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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괴물과 기형인의 탄생 -16~17세기 이형 신체에 대한 혐오와 통제를 중심으로-

The Birth of the Monster and Deformed People: Hatred and Control of Heterozygous Bodies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이성재 ( Lee Sungjae )
  • : 한국서양사학회
  • : 서양사론 15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9월
  • : 99-137(39pages)
서양사론

DOI

10.46259/WHR.154.4


목차

Ⅰ. 서론
Ⅱ. 전조와 기이함의 뒤섞임
Ⅲ. 17세기의 기형인 쇼: 콜로레도 형제
Ⅳ. 해부와 전시의 세계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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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괴물과 기형에 대한 16-17세기 유럽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중세 시기에 괴물과 기형인은 경이로운 대상 혹은 신의 경고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 종교적 갈등 그리고 기형의 원인을 찾으려는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기형적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구경거리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장식되고 통제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희화화될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콜로레도 형제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무대에 세우는 ‘기괴한 쇼’는 정상인과 기형인 간의 우열 관계를 강조하는 행사였다. 당시 학자들이 기형인들을 해부하고 분류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학문의 체계 속에 이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내로 편입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배제이기도 했다. 기형인은 이렇게 기형화되었다.
This paper examined how Europeans’ perceptions of monsters and deformities changed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through historical cases. In the Middle Ages, monsters and deformities were considered to be wondrous objects and divine warnings. However, this perception began to disappear through advances in printing, religious conflict, and research by scholars to find out the causes of deformities. At the same time, people with deformed bodies were degraded as objects of spectacle and curiosity. They began to be adorned and controlled by so-called ‘normal’ people and could only become meaningful objects when they were caricatured. A representative case is the story of the Colloredo brothers. The ‘Freak Show’ that put them on stage was an event that emphasized the superiority of so-called ‘normal’ people over deformed people. At that time, scholars also tried to dissect and classify deformed people for the same reason. Placing them in the academic classification system meant that there was no need to be afraid of them anymore. It can be said that they were included into society while simultaneously being excluded in another way. The deformed people were deformed in this way.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 capsoc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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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서양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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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9-0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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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8-2022
  • :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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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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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수정기 황제들의 재난 대응과 정치 담론의 형성 -서기 64-80년의 화재를 중심으로-

저자 : 고한석 ( Ko Hanseo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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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서기 64년-80년에 발생했던 로마시의 화재와 이에 대한 황제들의 대응을 살펴봄으로써 당대의 재난 담론이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정치적 격변기였던 이 시기에는 여러 원인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그 피해의 범위 역시 다양했다. 이에 대해 황제들은 적극적으로 재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피해민 구제뿐만 아니라 소방 관련 법령 신설, 도시 재건사업 등 다양한 차원의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사료에서 이 시기 황제들의 대응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재의 책임 소재 및 재난 대응에 대한 평가는 황제에 따라 극명히 다르게 나타났다. 유사한 형태의 재난과 대처 방식을 두고서도 황제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가 나타나는 까닭은 기록을 남긴 사가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즉, 사가들은 기존 지배층과의 합의를 무너뜨린 황제들에게 재난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지운 반면, 보수적인 입장의 황제들에게는 보호자로서의 측면을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결국 제정 초 로마의 재난 담론은 주로 지배 계급인 역사가들의 도덕주의적 입장에서 형성되었고, 새로운 황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대변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담론 자체가 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민중에게 재난의 책임 소재나 대처에 대한 평가, 황제의 명성보다 중요했던 것은 재난에 대한 황제의 대처가 그들에게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지였다.


This article discusses the political context of the disaster discourse by examining fires in Rome and the emperors' responses to them between AD 64 and 80. During this period, fires occurred with several causes in Rome, and the range of damage also varied. Roman emperors responded to these disasters actively at various levels, such as the legislation of fire regulations and urban reconstruction projects, as well as relieving victims by providing grains and spectacles.
According to the historical records, there were no significant differences in the emperors' responses during this period. Nevertheless, the responsibilities for the fires and the appraisals of disaster responses arguably differed depending on the emperors' political attitudes.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conflicting evaluations of the emperors' responses were based on the political and social statuses of the Roman historians. In other words, historians directly charged emperors who broke the agreements with the ruling class for disasters, while emphasizing conservative emperors' role as guardians.
Therefore, the Roman disaster discourse was formed mainly from the moralist position of the ruling elite and was used to guarantee the political legitimacy of the new dynasty. However, such political discourse did not directly concern the life of urban people.
(Seoul National University / nuclear3310@snu.ac.kr)

213세기 중엽 서유럽의 연대기에 나타난 몽골의 이미지 -매튜 패리스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저자 : 성백용 ( Sung Baik-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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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엽 서유럽 기독교세계를 강타한 '타르타르의 공포'는 오래도록 유럽인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 글은 세인트얼반스의 수도사 매튜 패리스의 연대기에 나타난 몽골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영민한 베네딕투스회 수도사의 기록에서 타르타르인들의 이미지를 빚어낸 재료는 고대와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신화와 전설이었다. 이들은 곡과 마곡, 이스마일 지파, 사라진 열 지파 등과 동일시되었으며, 엽기적인 식인귀로 묘사된다. 이 괴기스러운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는 묵시록적 또는 종말론적 의식 구조가 그 시대 지식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튜 패리스의 기록은 몽골인들이 그러한 상징세계의 견고한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The so-called 'furor Tartarorum', which struck the Christian world in Western Europe in the mid-13th century, has long represented a psychological trauma to Europeans. This article attempts to examine images and discourses of the Mongols in the chronicle of Matthew Paris, a Benedictine monk from Saint Albans. The myths and legends inherited from ancient and Christian traditions shaped the images of the Tartars in the writings of this brilliant monk. They were identified with Gog and Magog, Ishmaelites,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and described as monstrous cannibals. These grotesque images confirm that the apocalyptic or eschatological structure of consciousness dominated among intellectuals of the time. Matthew Paris' record clearly shows that the Mongols were doomed to be kept in formidable prisons of such a symbolic world.
(Hannam University / sungby506@hanmail.net)

314세기 플랑드르인의 잉글랜드 이주 -방직공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고반석 ( Koh Bansu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9-9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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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세 시기 여러 정치체들의 접경지대였던 플랑드르 출신 방직공들의 잉글랜드 이주 연구를 통해 14세기 잉글랜드 사회를 다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잉글랜드 이주민 연구에서 중세 후기는 이주민의 수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이유와 사료의 부족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기존의 플랑드르인 이주 연구는 이주의 동인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공업자들의 이주는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보편적 현상이었고, 이들을 이동하게 만든 동력에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환경적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북서부유럽 정치의 접경지이자 북유럽 교역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에서 산업의 변화에 따라 지배층에 저항할 정도로 성장했던 방직공들은 에드워드 3세의 보호장 발급과 같은 이주 수용국의 적극적인 이주 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백년전쟁 초기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플랑드르 백작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플랑드르 방직공들은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 당시 학살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토착민과 어우러지며 잉글랜드 사회의 한 부분을 형성해 나갔다.


To date, scholarship on migration to England in the late Middle Ages has not received adequate attention. In particular, the migration of Flemish weavers has been treated as an incidental event in socioeconomic research, where the prevailing view is that the impact of their migration on the English economy was insignificant. In the 14th century, the Flemings were a prominent part of the immigrant community in England. In the 1330s, Edward III issued a letter of protection to bring Flemish weavers to England to help develop the textile industry. In the 14th century, backed by the Crown's patronage, Flemish weavers established textile businesses in England. The migration of Flemish weavers to England must be considered from various perspectives. Concerning Flemish migration to England in the 14th century, there was a “pull factor”, i.e., the Crown's immigration policy to make up for the population decline caused by the plague and attract artisans. This worked in tandem with the “push factor”, i.e., the political conflict within Flanders as a result of the Hundred Years' War between France and England. Flemish weavers banished by the Count of Flanders―who had maintained a pro-French line in the early days of the war―were mainly located in Colchester in eastern England and London. The English Crown supported Flemish weavers for economic reasons; this preferential treatment later led to conflict with native weavers, which ultimately resulted in the massacre of 1381. However, at the same time, the coevolution of migrants and natives was observed. For a variety of reasons, Flemish weavers influenced the economy and society where they settled.
(Chung-Ang University / kocmanse@naver.com)

4근대적 괴물과 기형인의 탄생 -16~17세기 이형 신체에 대한 혐오와 통제를 중심으로-

저자 : 이성재 ( Lee Sungja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9-13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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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괴물과 기형에 대한 16-17세기 유럽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중세 시기에 괴물과 기형인은 경이로운 대상 혹은 신의 경고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 종교적 갈등 그리고 기형의 원인을 찾으려는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기형적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구경거리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장식되고 통제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희화화될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콜로레도 형제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무대에 세우는 '기괴한 쇼'는 정상인과 기형인 간의 우열 관계를 강조하는 행사였다. 당시 학자들이 기형인들을 해부하고 분류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학문의 체계 속에 이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내로 편입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배제이기도 했다. 기형인은 이렇게 기형화되었다.


This paper examined how Europeans' perceptions of monsters and deformities changed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through historical cases. In the Middle Ages, monsters and deformities were considered to be wondrous objects and divine warnings. However, this perception began to disappear through advances in printing, religious conflict, and research by scholars to find out the causes of deformities. At the same time, people with deformed bodies were degraded as objects of spectacle and curiosity. They began to be adorned and controlled by so-called 'normal' people and could only become meaningful objects when they were caricatured. A representative case is the story of the Colloredo brothers. The 'Freak Show' that put them on stage was an event that emphasized the superiority of so-called 'normal' people over deformed people. At that time, scholars also tried to dissect and classify deformed people for the same reason. Placing them in the academic classification system meant that there was no need to be afraid of them anymore. It can be said that they were included into society while simultaneously being excluded in another way. The deformed people were deformed in this way.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 capsoclee@naver.com)

5런던데리 플랜테이션과 런던 상인들 -제임스 1세의 설득과 협상-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8-171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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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Ⅰ, 재위 1558-1603)을 계승한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25)는 1609년 당시 국무상이었던 세실(Robert Cecil, 1st Earl of Salisbury, 1563-1612)의 추천에 따라 런던 상인들에게 런던데리 카운티의 식민을 제안했다. 당시 토지는 부와 권력의 기반이었던 만큼 얼스터 귀족들의 땅을 신교도 이주민들에게 할당하는 것은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신교도 공동체가 얼스터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의 제안에 대한 런던 상인들의 반응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논문은 제임스 1세가 런던 상인들에게 런던데리 식민을 제안했던 배경과 런던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부와 런던 상인들 사이에 어떤 협상이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협의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본 것이다.


Even after most of the revolts in Ireland that occurred during the Tudor dynasty had been suppressed, Ulster remained under the control of the powerful Irish nobility, and it was considered to be 'the hotbed of the last great rebellion' for the English people. However, after losing their Nine Years' War (1594-1603), the ruling nobility who could not withstand their downgraded status, numbering about 90, fled to Europe, and their territory was taken over by James I (1603-25), who succeeded Elizabeth Ⅰ (1558-1603). James I made a large number of English and Scottish Protestants migrate to that land, which was called the Ulster Plantation, and it may be the historical background for the emergence of Protestants in Northern Ireland today.
Since land was the basis of wealth and power in those days, allocating the land of the Ulster nobility to Protestant immigrants was a good way to weaken Irish resistance to English colonial reign and grow the Protestant community. However, the financial situation of England during the reign of James I made it difficult to achieve the colonization of Ulster as a whole. To secure the necessary funds and manpower, King James I proposed the colonization of Londonderry County, one of the six counties of Ulster, to London merchants, who had accumulated a strong economy at the time.
However, the reaction of London merchants was not at all favorable. This is because the natives, who were deprived of their land, were hostile to the English, and some of them became 'wood-kernes', thus plundering and assaulting the new settlers. It was also partly because the London merchants were in a difficult financial situation because they mobilized to set up a settlement on the North American coast across the Atlantic Ocean.
This essay examines the background of the proposal of Londonderry colonization to London merchants to facilitate the smooth progress of colonization, how negotiations were conducted between the government and London merchants, and what the outcomes of the negotiations were.
To properly understand the political turmoil of Northern Ireland, which has become a part of Britain today, it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history regarding the Ulster Plantation; further, as the colonization process carried out in Londonderry became the basis of the British overseas colonization policy, it is a good opportunity to look at Irish political conflict and British colonial policy from various angles.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6링컨과 노예제, 그리고 노예제폐지론 -링컨과 노예제폐지론자들과 관계를 중심으로-

저자 : 허현 ( Hur Hy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2-205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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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과 19세기 전반기 대표적인 정치·사회개혁운동세력이자 급진주의 세력이었던 노예제폐지론자들 간의 상호 인식과 실질적 관계 및 상호 영향 관계를 추적해 봄으로써 링컨의 반(反)노예제 정치 행보와 내전의 발발, 노예해방선언의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이른바 “링컨주의”의 실체를 검증해보면서 동시에 이러한 과정들과 결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노예제폐지론의 흔적과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역할을 추적하여 다시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링컨은 결코 노예제폐지론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노예제폐지론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위대한 해방자”로서 그의 철학이나 역사적 위상은 아주 모순적이다. 실제로 링컨의 반(反)노예제론은 가장 발전적인 형태를 갖추었을 때조차도 보수적 내셔널리즘과, 경제적 보상을 전제로 한 점진적 노예해방 및 아프리카 식민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당대에 노예제폐지론자들은 링컨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방과 견제를 멈추지 않았다. 요컨대 링컨과 노예제폐지론자들 간의 거리는 아주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링컨이 최초의 반(反)노예제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잡고 내전에 직면했을 때 내전을 노예해방투쟁이자 사회혁명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압박과 투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고 링컨에게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서 노예제폐지론을, 하나의 시대적 요구로서 노예해방선언을 거부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리하여 링컨이 노예제폐지론의 사상적 세례를 받게 된 이후에야 노예해방선언은 가능했다.


This paper seeks to shed new light on the antislavery idea of Abraham Lincoln as 'Lincolnism,' his anti-abolitionism, and the importance of abolitionism in the rise of revolutionized Civil War by exploring the relationships and mutual influences between Abraham Lincoln and the abolitionists in the antislavery politics and the history of abolition. While current historiography primarily credit Lincoln as a “Great Emancipator” with the creation of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and the realization of antislavery politics, it is ironic and confusing that, as Eric Foner has said, Lincoln was not an abolitionist and never claimed to be. Indeed, even when Lincoln would finally contemplate emancipation, it was not the abolitionists terms: His ideal emancipation legislation would have three main features of gradualism, compensation, and colonization, all of which the abolitionists abhorred. In addition, Lincoln's conservative nationalism led him to differ so markedly from abolitionists in regard to Texas, the war against Mexico, the Fugitive Slave Law, the personal liberty laws, and emancipation in the District of Columbia. Therefore, abolitionists consistently mistrusted and so energetically vilified Lincoln. When Lincoln as the first antislavery President should lead the politics of the Civil War, however, the abolitionists could not keep alienating Lincoln, thus making a struggle to realize the abolitionist ideology and philosophy in Lincoln's politics of the Civil War. Lincoln did not have any power or justification to reject abolitionism as a zeitgeis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hon422@cnu.ac.kr)

7설탕과 종속: 프랑스령 앙티유를 통해서 본 노예해방 후 설탕 경제의 장기적 변천 과정, 1848-현재

저자 : 권윤경 ( Kwon Yun K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6-242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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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역사는 주로 대서양 노예제와 연결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노예해방은 사탕수수 단일경작 체제의 긴 역사 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일 뿐, 좀 더 장기지속적 관점에서 노예해방 후 식민주의 경제의 운영 방식과 설탕 경제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글로벌한 설탕 경제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프랑스령 앙티유를 이루는 두 섬, 즉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의 역사적 특수성에 주목한다. 두 섬은 아이티처럼 스스로 노예해방을 이룩하지 않았고, 이웃한 자메이카처럼 탈식민화 시대에 독립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령 앙티유는 노예해방 이후 프랑스 동화주의의 실험실로서 독특한 역사를 가진다. 이 글은 프랑스령 앙티유의 설탕 경제를 중심축으로 삼아 노예해방 후 새로운 노동 체제의 형성, 제당 경제 근


The standard narrative of the history of sugar often focuses on the horrors of Atlantic slavery. However, it is necessary to integrate the evolution of the sugar economy following emancipation into the longer history of the sugarcane monoculture system developed in the colonies, as the abolition of slavery was just one of the turning points in that history. This article positions the two islands of the French Lesser Antilles, Martinique and Guadeloupe, in the history of the global sugar economy, and investigates the particular path of these two “sugar islands” after the abolition of slavery in 1848. The two islands did not liberate themselves from slavery as Haiti did, nor did they become independent states like other neighboring sugar colonies. They have a unique history as a laboratory of French assimilationism. This paper examines how the white sugar elite, non-European workers and cultivators, and the colonial state in the two islands interacted in the tumultuous transformations of the sugar economy from 1848 to the present. It examines how the sugarcane monoculture system, which was assumed as the raison d'etre of colonial economy, conflicted with the ideals of emancipation and assimilation, and how a racialized labor system was established after the abolition of racial slavery. Ultimately, it aims to historically illuminate the problem of underdevelopment in the French Antilles and contextualize it within the theoretical framework of “racial capitalism.”
(Seoul National University / yunkwon@snu.ac.kr)

8제정 말기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과 동아시아 인식

저자 : 송준서 ( Song Joonseo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3-2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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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19세기 중후반부터 동아시아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면서 중국·일본·한 국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어 나갔다. 그들은 문화상대주의 인식에 기반하여 동아시아 문명의 특성을 편견 없이 수용하기도 했지만 오리엔탈리즘 인식에 기반하여 동아시아 문명을 비정상적 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주로 인종주의·제국주의 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그 외에도 동아시아 국가의 국내 정치·사회 상황 및 러시 아인들이 동아시아 현지에서 경험한 생활습관 및 환경의 괴리로부터 유발된 문화 충격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다만 19세기 중후반 급속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대해서는 러시아나 유럽과 동급 문명으로 인식했고 동시에 극동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기도 했다. 이외에도 19세기말 극동지역으로 대거 유입된 중 국인과 한인에 대해서는 러시아화 정책과 지역 보건위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 는 황화론 인식도 대두했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다양한 동아시아 인식은 일 관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지정학적, 지경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각 인식틀 내에서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After Russia's active engagement in East Asian affairs began starting in the mid- and late-19th century, Russian intellectuals came to create images of China, Japan, and Korea as Russia more frequently contacted those East Asian countries. These Russian images of East Asia were formed based on multiple perceptions such as cultural relativism, the “Yellow-Peril” ideology, and Orientalism founded on racism and imperialism. In addition, both the chaotic socio-political situations in East Asian countries, especially China and Korea, and the cultural shock that Russian travelers experienced during their direct contact with Koreans and Chinese people certainly enhanced Russia's perception of Orientalism regarding those people and countries.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se various perceptions were not consistent, but rather contradicted themselves within the framework of each perception itself according to both the changing geopolitical situations in East Asia and the economic interests of the Russian Far East. Moreover, Russia did not maintain a consistent perception of East Asians but a selective one, as Russian intellectuals regarded Japan as a country on a par with Russia and European countries due to its recent military and industrial achievements, while considering China and Korea―which clung to Confucianism―to be “abnormal” and backward countries that lacked practicality, innovation, and dynamics. Russian perceptions of East Asia at the turn of the century were varied, contradictory, and selective rather than monolithic and universal.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 songjoo1@hufs.ac.kr)

91920년 '대-베를린(Groß-Berlin)' 만들기와 공공의 후생복지

저자 : 한해정 ( Han Hai-j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0-310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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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베를린' 만들기 과정과 대-베를린에서 후생복지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소개하고 있다. 베를린과 주변지역들을 통합하려는 오랜 노력은 1차 대전을 겪은 후 1920년 대-베를린 출범으로 실현되었다. 대-베를린은 의미 있는 실험장이었다. 지역 간 존재했던 격차를 줄이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하는 후생복지의 실험장이었으며, 지방자치를 보여줄 실험장이었다. 여기서 시장과 시행정위원회를 선출하는 시의회의 구성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보통선거제와 유권자의 높은 투표율 결과, 시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 대-베를린은 후생복지를 확대시키는 시정사회주의의 실험장이 될 수 있었다.


This article deals with the creation of 'Greater-Berlin' and the expansion of public welfare. The efforts to integrate Berlin with its suburbs bore fruit in 1920, after the First World War. The unified city, 'Greater-Berlin' thus became a meaningful testing-ground. Greater-Berlin was a municipal government that represented an experiment involving public welfare. The municipality had to provide public services and reduce social disparities between districts. The change in the Berlin city-council is worth noting here. Due to general suffrage and a heavy poll, Social Democrats had dominant positions in the city-council, which elected mayors and municipal-magistrates. The situations were then able to improve public services. In this way, Greater-Berlin served as a testing-ground for municipal-socialism.
(Korea University / hanhjung@chol.com)

10노인의학을 구성하기 -영국 노인의학의 역사와 역사성 (1930년대∼1960년대)-

저자 : 황혜진 ( Hwang Hye Jea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1-34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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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친 영국 노인의학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재구성하고, 이 의료 분과가 갖는 주요한 특성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이 분야는 1935년 “노인의학의 어머니” 마저리 워렌이 구빈법 의료 시설 소속 환자들을 적극적인 의료 서비스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출발한다. 이후 목표 의식을 공유하는 일단의 의학 전문가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 분야의 잠재적 효용에 주목했던 정책 결정가 집단이 힘을 보탰다. 1948년 국민보건서비스의 출범과 함께 노인과는 영국 의료 시스템의 일부로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았다. 본고는 20세기 후반 영국 노인의학의 구체적 모습을 결정한 요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각각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먼저, 워렌을 위시한 이 분야의 '개척자들'에 주목한다. 이 1세대 노인의학자들은 이 의료 전공의 이론적 기틀과 실천적 규범을 마련했다. 두 번째는 구빈법의 유산이다. 전간기에 이미 효력을 상실한 이 법률은 노인의학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 및 원칙과 함께 물리적 기반을 이 의료분과에 물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보건성과 국민보건서비스는 영국의 노인의학이, 타국의 경우와 달리, 신속하게 제도화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생 의료 시스템으로의 편입은 때때로 그 운영의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었다. 노인의학의 초기 역사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영국식 의료의 구체적 모습을 조망하는 한편 의료 및 의학의 역사적 성격과 사회적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This article aims to trace the early history of British geriatric medicine, between the 1930s and the 1960s, and to identify the social and historical origins of the main attributes of the medical branch. In Britain, the specialty began with the tireless efforts of Marjory Warren, who took over the responsibility for chronic senile patients that had previously been accommodated in a poor law hospital in 1935 and tried to provide all of them with proper diagnosis and treatment. A group of medical professionals aware of the necessity of medical practice benefiting the old joined Warren to create a new medical specialty. Politicians and political decision makers, mostly based in the Ministry of Health, found potential solutions to the bed-blocking problem occurring in public hospitals from geriatric medicine. With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Health Service in 1948, geriatrics was officially incorporated into the new welfare system.
To have a clear view of British geriatric medicine, it is necessary to consider three major factors that shaped the new medical specialty in the mid-twentieth century: The first is the 'pioneers' of this field. Its founding members, including Warren, provided a blueprint of geriatric medicine, most of which was realized in the system of the NHS, and set up main principles and detailed practices for the specialty. The second is the legacy of the poor law. Although it was abolished around the birth of geriatrics, the law bequeathed norms about care of the weak as well as its facilities to this medical branch. Lastly, the Ministry of Health and the NHS offered a crucial chance to institutionalize geriatrics in its nascent state, which confirmed its existence as a distinct medical specialty in a nationwide system. Understanding the early history of geriatric medicine allows us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British healthcare system and to identify social and historical aspects of medicine.
(Yeungnam University / hjeanhw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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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수정기 황제들의 재난 대응과 정치 담론의 형성 -서기 64-80년의 화재를 중심으로-

저자 : 고한석 ( Ko Hanseo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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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서기 64년-80년에 발생했던 로마시의 화재와 이에 대한 황제들의 대응을 살펴봄으로써 당대의 재난 담론이 어떤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정치적 격변기였던 이 시기에는 여러 원인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그 피해의 범위 역시 다양했다. 이에 대해 황제들은 적극적으로 재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피해민 구제뿐만 아니라 소방 관련 법령 신설, 도시 재건사업 등 다양한 차원의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사료에서 이 시기 황제들의 대응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재의 책임 소재 및 재난 대응에 대한 평가는 황제에 따라 극명히 다르게 나타났다. 유사한 형태의 재난과 대처 방식을 두고서도 황제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가 나타나는 까닭은 기록을 남긴 사가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즉, 사가들은 기존 지배층과의 합의를 무너뜨린 황제들에게 재난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지운 반면, 보수적인 입장의 황제들에게는 보호자로서의 측면을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결국 제정 초 로마의 재난 담론은 주로 지배 계급인 역사가들의 도덕주의적 입장에서 형성되었고, 새로운 황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대변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담론 자체가 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민중에게 재난의 책임 소재나 대처에 대한 평가, 황제의 명성보다 중요했던 것은 재난에 대한 황제의 대처가 그들에게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지였다.

213세기 중엽 서유럽의 연대기에 나타난 몽골의 이미지 -매튜 패리스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저자 : 성백용 ( Sung Baik-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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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엽 서유럽 기독교세계를 강타한 '타르타르의 공포'는 오래도록 유럽인들에게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 글은 세인트얼반스의 수도사 매튜 패리스의 연대기에 나타난 몽골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영민한 베네딕투스회 수도사의 기록에서 타르타르인들의 이미지를 빚어낸 재료는 고대와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신화와 전설이었다. 이들은 곡과 마곡, 이스마일 지파, 사라진 열 지파 등과 동일시되었으며, 엽기적인 식인귀로 묘사된다. 이 괴기스러운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는 묵시록적 또는 종말론적 의식 구조가 그 시대 지식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튜 패리스의 기록은 몽골인들이 그러한 상징세계의 견고한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314세기 플랑드르인의 잉글랜드 이주 -방직공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고반석 ( Koh Bansu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9-9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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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세 시기 여러 정치체들의 접경지대였던 플랑드르 출신 방직공들의 잉글랜드 이주 연구를 통해 14세기 잉글랜드 사회를 다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잉글랜드 이주민 연구에서 중세 후기는 이주민의 수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이유와 사료의 부족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기존의 플랑드르인 이주 연구는 이주의 동인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공업자들의 이주는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보편적 현상이었고, 이들을 이동하게 만든 동력에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환경적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북서부유럽 정치의 접경지이자 북유럽 교역의 중심지였던 플랑드르에서 산업의 변화에 따라 지배층에 저항할 정도로 성장했던 방직공들은 에드워드 3세의 보호장 발급과 같은 이주 수용국의 적극적인 이주 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백년전쟁 초기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플랑드르 백작에 의해 추방당하면서 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플랑드르 방직공들은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 당시 학살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토착민과 어우러지며 잉글랜드 사회의 한 부분을 형성해 나갔다.

4근대적 괴물과 기형인의 탄생 -16~17세기 이형 신체에 대한 혐오와 통제를 중심으로-

저자 : 이성재 ( Lee Sungja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9-137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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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괴물과 기형에 대한 16-17세기 유럽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중세 시기에 괴물과 기형인은 경이로운 대상 혹은 신의 경고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 종교적 갈등 그리고 기형의 원인을 찾으려는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기형적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구경거리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인간의 손에 의해 장식되고 통제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희화화될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콜로레도 형제의 이야기이다. 이들을 무대에 세우는 '기괴한 쇼'는 정상인과 기형인 간의 우열 관계를 강조하는 행사였다. 당시 학자들이 기형인들을 해부하고 분류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학문의 체계 속에 이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내로 편입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배제이기도 했다. 기형인은 이렇게 기형화되었다.

5런던데리 플랜테이션과 런던 상인들 -제임스 1세의 설득과 협상-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8-171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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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Ⅰ, 재위 1558-1603)을 계승한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25)는 1609년 당시 국무상이었던 세실(Robert Cecil, 1st Earl of Salisbury, 1563-1612)의 추천에 따라 런던 상인들에게 런던데리 카운티의 식민을 제안했다. 당시 토지는 부와 권력의 기반이었던 만큼 얼스터 귀족들의 땅을 신교도 이주민들에게 할당하는 것은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신교도 공동체가 얼스터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의 제안에 대한 런던 상인들의 반응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논문은 제임스 1세가 런던 상인들에게 런던데리 식민을 제안했던 배경과 런던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부와 런던 상인들 사이에 어떤 협상이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협의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본 것이다.

6링컨과 노예제, 그리고 노예제폐지론 -링컨과 노예제폐지론자들과 관계를 중심으로-

저자 : 허현 ( Hur Hy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2-205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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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과 19세기 전반기 대표적인 정치·사회개혁운동세력이자 급진주의 세력이었던 노예제폐지론자들 간의 상호 인식과 실질적 관계 및 상호 영향 관계를 추적해 봄으로써 링컨의 반(反)노예제 정치 행보와 내전의 발발, 노예해방선언의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이른바 “링컨주의”의 실체를 검증해보면서 동시에 이러한 과정들과 결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노예제폐지론의 흔적과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역할을 추적하여 다시 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링컨은 결코 노예제폐지론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노예제폐지론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위대한 해방자”로서 그의 철학이나 역사적 위상은 아주 모순적이다. 실제로 링컨의 반(反)노예제론은 가장 발전적인 형태를 갖추었을 때조차도 보수적 내셔널리즘과, 경제적 보상을 전제로 한 점진적 노예해방 및 아프리카 식민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당대에 노예제폐지론자들은 링컨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방과 견제를 멈추지 않았다. 요컨대 링컨과 노예제폐지론자들 간의 거리는 아주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링컨이 최초의 반(反)노예제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잡고 내전에 직면했을 때 내전을 노예해방투쟁이자 사회혁명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노예제폐지론자들의 압박과 투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고 링컨에게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서 노예제폐지론을, 하나의 시대적 요구로서 노예해방선언을 거부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리하여 링컨이 노예제폐지론의 사상적 세례를 받게 된 이후에야 노예해방선언은 가능했다.

7설탕과 종속: 프랑스령 앙티유를 통해서 본 노예해방 후 설탕 경제의 장기적 변천 과정, 1848-현재

저자 : 권윤경 ( Kwon Yun Ky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6-242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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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역사는 주로 대서양 노예제와 연결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노예해방은 사탕수수 단일경작 체제의 긴 역사 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일 뿐, 좀 더 장기지속적 관점에서 노예해방 후 식민주의 경제의 운영 방식과 설탕 경제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글로벌한 설탕 경제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프랑스령 앙티유를 이루는 두 섬, 즉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의 역사적 특수성에 주목한다. 두 섬은 아이티처럼 스스로 노예해방을 이룩하지 않았고, 이웃한 자메이카처럼 탈식민화 시대에 독립하지도 않았다. 프랑스령 앙티유는 노예해방 이후 프랑스 동화주의의 실험실로서 독특한 역사를 가진다. 이 글은 프랑스령 앙티유의 설탕 경제를 중심축으로 삼아 노예해방 후 새로운 노동 체제의 형성, 제당 경제 근

8제정 말기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과 동아시아 인식

저자 : 송준서 ( Song Joonseo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3-2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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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19세기 중후반부터 동아시아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면서 중국·일본·한 국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 어 나갔다. 그들은 문화상대주의 인식에 기반하여 동아시아 문명의 특성을 편견 없이 수용하기도 했지만 오리엔탈리즘 인식에 기반하여 동아시아 문명을 비정상적 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주로 인종주의·제국주의 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그 외에도 동아시아 국가의 국내 정치·사회 상황 및 러시 아인들이 동아시아 현지에서 경험한 생활습관 및 환경의 괴리로부터 유발된 문화 충격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다만 19세기 중후반 급속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대해서는 러시아나 유럽과 동급 문명으로 인식했고 동시에 극동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기도 했다. 이외에도 19세기말 극동지역으로 대거 유입된 중 국인과 한인에 대해서는 러시아화 정책과 지역 보건위생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 는 황화론 인식도 대두했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다양한 동아시아 인식은 일 관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지정학적, 지경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각 인식틀 내에서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91920년 '대-베를린(Groß-Berlin)' 만들기와 공공의 후생복지

저자 : 한해정 ( Han Hai-j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0-310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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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베를린' 만들기 과정과 대-베를린에서 후생복지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소개하고 있다. 베를린과 주변지역들을 통합하려는 오랜 노력은 1차 대전을 겪은 후 1920년 대-베를린 출범으로 실현되었다. 대-베를린은 의미 있는 실험장이었다. 지역 간 존재했던 격차를 줄이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하는 후생복지의 실험장이었으며, 지방자치를 보여줄 실험장이었다. 여기서 시장과 시행정위원회를 선출하는 시의회의 구성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보통선거제와 유권자의 높은 투표율 결과, 시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진영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 대-베를린은 후생복지를 확대시키는 시정사회주의의 실험장이 될 수 있었다.

10노인의학을 구성하기 -영국 노인의학의 역사와 역사성 (1930년대∼1960년대)-

저자 : 황혜진 ( Hwang Hye Jea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1-34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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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친 영국 노인의학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재구성하고, 이 의료 분과가 갖는 주요한 특성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이 분야는 1935년 “노인의학의 어머니” 마저리 워렌이 구빈법 의료 시설 소속 환자들을 적극적인 의료 서비스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출발한다. 이후 목표 의식을 공유하는 일단의 의학 전문가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 분야의 잠재적 효용에 주목했던 정책 결정가 집단이 힘을 보탰다. 1948년 국민보건서비스의 출범과 함께 노인과는 영국 의료 시스템의 일부로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았다. 본고는 20세기 후반 영국 노인의학의 구체적 모습을 결정한 요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각각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다. 먼저, 워렌을 위시한 이 분야의 '개척자들'에 주목한다. 이 1세대 노인의학자들은 이 의료 전공의 이론적 기틀과 실천적 규범을 마련했다. 두 번째는 구빈법의 유산이다. 전간기에 이미 효력을 상실한 이 법률은 노인의학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 및 원칙과 함께 물리적 기반을 이 의료분과에 물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보건성과 국민보건서비스는 영국의 노인의학이, 타국의 경우와 달리, 신속하게 제도화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생 의료 시스템으로의 편입은 때때로 그 운영의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었다. 노인의학의 초기 역사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영국식 의료의 구체적 모습을 조망하는 한편 의료 및 의학의 역사적 성격과 사회적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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