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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이가원의 사회시(社會詩)에 보이는 작시 태도 연구

A Research on the Poet Writing Attitude in Yonmin YI Ga-won's Social Poetry

박순 ( Park Soon )
  • : 연민학회
  • : 연민학지 3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8월
  • : 117-149(33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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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연민의 사회시에 보이는 작시 태도
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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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하에서 시대의 불의(不義)를 묵과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시에 담아내었다. 이러한 사회시는 연민의 원고를 모은 6권의 문집 내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문집들은 시기별로 원고가 모일 때마다 편집ㆍ간행된 것이므로 연민은 한국 현대사를 겪어내면서 끊임없이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은 시를 써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민의 사회시에 대해서는 허경진의 연구 논문이 발표된 바 있는데, 본 주제에 대한 최초 연구로서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다보니 각각의 작품에 대해서는 핵심만 언급하는 것에 그쳤다. 이에 본고에서는 개별 작품들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는 연구를 지향하였다. 연민의 사회시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산업화ㆍ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전통 한학의 명맥이 끊겨가는 시점에 한시로서 사회의식을 보여준 마지막 선비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값진 유산이기에 허경진의 선행 연구에 뒤이어 각 작품에 담긴 작가의 내면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연민의 사회시에 보이는 작시 태도에 따라 작품들을 분류하였고, 이에 해당되는 시를 선별하였다. 양심 있는 문인(文人)이 당대 사회의 불의를 목도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시에 담아낼 때에는 여러 가지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연민의 사회시를 보면 크게 세 가지 태도가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시름하고 슬퍼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분노의 태도이고, 셋째는 유도(儒道)에 기반한 비판적 발언을 행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작시 태도에 따라 연민의 시는 그에 걸맞은 표현 방식을 보여주었다. 본고에서는 연민이 쓴 사회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확인하였다.
During the dictatorship of Syngman Rhee, Jeonghee Park, and Doohwan Chun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Yonmin(淵民) Yi, Ga-Won(李家源, 1917∼2000) was not silent to the injustice that occurred and expressed his convictions by putting them into poetry. These social poems can be found in the six collections of manuscripts by Yonmin, which were edited and published each time the manuscripts were gathered over a period of time. It can therefore be confirmed that Yonmin has been writing poetry that contains the spirit of criticism regarding the contemporary society while simultaneously exploring the modern history of Korea.
Hur Kyung-jin's research thesis has been published based on the social poetry by Yonmin; however, due to the fact that it was one of the first research papers on this subject - a number of topics/inputs were introduced and mentioned briefly. As a result of the above, in this paper, the research is aimed at analyzing the individual topics/inputs in detail. The social poetry by Yonmin can be considered to be the final crystallization of the spirit of the Confucian scholar who showed social consciousness as a Chinese poet at a time when the norm of the traditional Chinese learning method was excluded due to industrialization and westernization, which progressed after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Owing to the fact that it is a valuable legacy, there is intention to thoroughly explore the artist's inner side contained in each topic/input following the previous research of Hur Kyung-jin.
Accordingly, the topics/inputs by the authors we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poetic writing attitude shown in the social poetry by Yonmin, while the corresponding poems were selected. A conscientious writer can show various attitudes when he sees the injustice of the contemporary society and therefore responds to it in poetry. If you look at the social poetry by Yonmin, it can be seen that there are three major attitudes: the first is an attitude of pity and sorrow, the second is an attitude of anger, and the third is an attitude of making critical statements based on Confucianism (儒道). According to these three writing attitudes regarding poems, the poetry by Yonmin showed a more suitable expression method. In this paper, the researchers confirmed this by examining the social poetry written by Yonmin in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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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92-7428
  • : 2713-738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3-2022
  • :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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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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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영 정병욱 선생과 연희전문

저자 : 허경진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6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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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白影) 선생의 백주년기념강연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에서 주관하게 된 것은 백영선생의 생애와 학문이 연희전문에서 싹 트기 시작하여 연희대학교에서 꽃을 피웠다는 뜻이다. 백영선생은 학병으로 끌려갈 때에도 연희전문 2년 선배 윤동주의 유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고향 집에 보관했다가 광복 뒤에 출판하여 문학청년 윤동주를 시인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가 서울에 찾아오자 누이동생을 소개하여 결혼하게 하였으며, 윤동주의 유고를 돌려주었다. 후손들이 윤동주의 육필 유고와 유물들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여 이 기숙사에 윤동주기념관을 설치하게 되기까지 윤일주 윤혜원 남매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고와 정성이 있었지만, 우리는 연희 교정에서 맺어진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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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영 정병욱 선생의 국문학 연구 - 연구 방법론·국문학 특질론·판소리·고전 산문 영역에서의 학문적 업적 및 유산 -

저자 : 이강옥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9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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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영 기념 강연에 덧붙이는 글

저자 : 정학성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13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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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선생은 연민 이가원 선생과 같은 세대의 국문학자이다. 고전을 연구하는 국문학자였던 선친은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나 연민학지를 읽는 분들이라면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금년에는 탄신 백 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행사가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서 열려서 불초자가 선친에 대한 외람된 글을 쓰게 되었다. 작고한 지도 어언 40년이 되어 그간 지인과 후학들에 의해 그 학문과 업적을 추념하고 인간적 풍모를 회고하는 책들도 간행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이러한 기록이나 전문(傳聞), 그리고 선친 자신의 말글 몇 가닥을 토대로 관심을 가진 분들이 궁금하게 여기실 일들과 함께, 그 손을 거쳐 빛을 보고 우리에게 전하게 된 중요한 문화유산인 윤동주 시집과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 몇 마디를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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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민 이가원의 사회시(社會詩)에 보이는 작시 태도 연구

저자 : 박순 ( Park Soon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7-1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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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하에서 시대의 불의(不義)를 묵과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시에 담아내었다. 이러한 사회시는 연민의 원고를 모은 6권의 문집 내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문집들은 시기별로 원고가 모일 때마다 편집ㆍ간행된 것이므로 연민은 한국 현대사를 겪어내면서 끊임없이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은 시를 써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민의 사회시에 대해서는 허경진의 연구 논문이 발표된 바 있는데, 본 주제에 대한 최초 연구로서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다보니 각각의 작품에 대해서는 핵심만 언급하는 것에 그쳤다. 이에 본고에서는 개별 작품들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는 연구를 지향하였다. 연민의 사회시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산업화ㆍ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전통 한학의 명맥이 끊겨가는 시점에 한시로서 사회의식을 보여준 마지막 선비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값진 유산이기에 허경진의 선행 연구에 뒤이어 각 작품에 담긴 작가의 내면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연민의 사회시에 보이는 작시 태도에 따라 작품들을 분류하였고, 이에 해당되는 시를 선별하였다. 양심 있는 문인(文人)이 당대 사회의 불의를 목도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시에 담아낼 때에는 여러 가지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연민의 사회시를 보면 크게 세 가지 태도가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시름하고 슬퍼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분노의 태도이고, 셋째는 유도(儒道)에 기반한 비판적 발언을 행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작시 태도에 따라 연민의 시는 그에 걸맞은 표현 방식을 보여주었다. 본고에서는 연민이 쓴 사회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확인하였다.


During the dictatorship of Syngman Rhee, Jeonghee Park, and Doohwan Chun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Yonmin(淵民) Yi, Ga-Won(李家源, 1917∼2000) was not silent to the injustice that occurred and expressed his convictions by putting them into poetry. These social poems can be found in the six collections of manuscripts by Yonmin, which were edited and published each time the manuscripts were gathered over a period of time. It can therefore be confirmed that Yonmin has been writing poetry that contains the spirit of criticism regarding the contemporary society while simultaneously exploring the modern history of Korea.
Hur Kyung-jin's research thesis has been published based on the social poetry by Yonmin; however, due to the fact that it was one of the first research papers on this subject - a number of topics/inputs were introduced and mentioned briefly. As a result of the above, in this paper, the research is aimed at analyzing the individual topics/inputs in detail. The social poetry by Yonmin can be considered to be the final crystallization of the spirit of the Confucian scholar who showed social consciousness as a Chinese poet at a time when the norm of the traditional Chinese learning method was excluded due to industrialization and westernization, which progressed after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Owing to the fact that it is a valuable legacy, there is intention to thoroughly explore the artist's inner side contained in each topic/input following the previous research of Hur Kyung-jin.
Accordingly, the topics/inputs by the authors we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poetic writing attitude shown in the social poetry by Yonmin, while the corresponding poems were selected. A conscientious writer can show various attitudes when he sees the injustice of the contemporary society and therefore responds to it in poetry. If you look at the social poetry by Yonmin, it can be seen that there are three major attitudes: the first is an attitude of pity and sorrow, the second is an attitude of anger, and the third is an attitude of making critical statements based on Confucianism (儒道). According to these three writing attitudes regarding poems, the poetry by Yonmin showed a more suitable expression method. In this paper, the researchers confirmed this by examining the social poetry written by Yonmin in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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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의 과정과 의의

저자 : 허권수 ( Heo Kweon-soo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1-18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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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신재의 시대에는 동시대에 대학자들이 많았는데, 신재는 이들과 모두 학문적 교류를 하여 자신의 학문적 안목을 넓혔다. 신재는 선배를 스승처럼 모셨고, 퇴계와 남명보다는 6세 많은 중간에 위치한 인물로서 두 사람과 다 교류하였다. 퇴계와 남명이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벼슬에 대하는 자세도 매우 적극적으로 책임감과 충성심이 강했다. 배운 바를 최대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평생 관직에 있었다.
그는 유학(儒學)을 교화(敎化)의 방도로 여겨 유학의 보급을 위해 정성을 쏟았고, 또 유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인물이다. 그가 백운동서원을 창설한 것은 이런 그의 정신적 자세의 반영인 셈이다. 조선 최초로 창설된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최초로 우리나라 학자를 향사(享祀)함으로 해서 우리 학문의 자주성을 높이고, 우리나라 학자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 학문, 문화, 교육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재가 서원을 창설함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선비가 비로소 체계적으로 양성되고 선비정신이 정립되게 되었다. 이때 오랜 역사를 지닌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는 이미 과거시험 위주의 형식적인 교육으로 추락하여, 새로운 참된 학문적 전기를 마련한 곳이 서원이었다. 특히 도학(道學)을 위주로 하는 참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백운동서원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학문을 통한 백성 교화 등 현실 적용에 더 비중을 두었다. 신재의 서원 창설의 전통을 계승하여, 자신이 직접 서원을 창설하거나 서원 창설을 적극 지원한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면 근 1천여 개의 서원이 건립되어, 학문연구와 백성교화의 본부가 되었다.
신재의 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는, 동시대의 여타 문인ㆍ학자들에 비해서 비교적 완비된 체재를 갖추고 있어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우나라의 서원의 역사와 선비정신을 연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Shinjae Chu Se-pung was a literati, academic, and educator who lived during the mid-Chosŏn era.
Many great scholars were active around his time; Shinjae made sure to communicate with them academically to widen his scholarly perspective. Shinjae treated his seniors like teachers, and also reached out to both T'oegye and Nammyŏng - who were both six years his junio - whereas T'oegye and Nammyŏng themselves never met each other. Shinjae also had a strong sense of responsibility and loyalty to his government post. In life, he always tried to practice what he had learned, and thus, he was able to remain in a government post all his life.
Shinjae regarded Confucianism as the correct form of edification, and thus endeavored to disseminate Confucian teachings. He also made an active effort to apply Confucian ideology to politics. His founding of Paegundong Seowon reflects this mentality. As the first Seowon built in Chosŏn, Paegundong Seowon invigorated the autonomy of scholarship and enhanced the pride of Korean scholars by enshrining them for the first time. This had a great impact on Korean scholarship, culture, and education among other areas.
Shinjae's founding of the Seowon allowed Korean scholars to be methodically trained, and scholarly thinking came to be established. At this time, government schools - Seonggyungwan and local Confucian schools - had already become vessels of perfunctory education, oriented towards studies for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stead, the Seowon came to be the site of a novel and authentic academic innovation, providing an education that focused on the learning of “the Way” (道學).
Paegundong Seowon primarily dedicated its efforts to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Neo-Confucianism, such as the edification of the people through scholarship, rather than theoretical research. The one who succeeded the tradition of founding Seowon was T'oegye Yi Hwang, who not only supported such projects, but went on to construct Seowon himself. Approximately one thousand Seowon had been constructed by the end of the Chosŏn dynasty's rule, serving as headquarters for academic research and the edification of the people.
A collection of Shinjae's works, Various Writings of Murŭng, is more structured in its contents compared to the other literati and academics of his time, making it a valuable resource in studying the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of the period. In particular, there are invaluable materials for researching the history of Seowon and the scholarly mind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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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퇴계의 기묘사화에 대한 의리와 선비정신 연구

저자 : 신두환 ( Shin Doo-hwan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7-22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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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퇴계의 기묘사화에 대한 의리와 그 선비정신을 연구한 논문이다. 퇴계는 그가 직접 목도한 기묘사화에 대하여 특별히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출사 이후 기회만 있으면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기묘명현들의 사면 복권을 조심스럽게 임금에게 소청하곤 하였다. 기묘사화가 수습되기는 하였지만 신원이 흡족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조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벼슬만 내리면 사직상소를 올려 사퇴하곤 하였다. 퇴계처럼 사직상소를 여러 번 올린 사람도 드물었다. 이를 두고 선조는 경연에서 퇴계는 왜 조정을 꺼려하고 벼슬만 내리면 사직을 하려 하는지에 대해 신하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 대한 결론은 기묘사화에 대한 조광조의 신원이 회복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라고 결론지어진다. 그는 기묘사화의 중심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신원을 회복해 줄 것을 경연에서 명종임금과 독대하여 토로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이 시기에 정암 조광조의 행장을 직접 썼다. 그의 조광조의 신원 회복에 대한 끈질긴 노력은 선조 대에 와서 이루어지게 된다. 선조는 기묘사화에 처참하게 희생된 조광조의 억울한 신원을 회복해 주고 그에게 영의정의 벼슬을 추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퇴계의 끈질기고 강직한 선비정신은 조정에서 관직이 내려올 때마다 병을 핑계로 사직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퇴계는 국가의 기강이 선비들의 사풍(士風)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며 기묘명현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의 희생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퇴계의 기묘명현에 대한 의리관과 강인한 선비정신은 그의 문학작품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This paper is a study of Toegye Lee-hwang's loyalty and scholarly spirit during Kimyo-Sahwa(己卯士禍) in 1519, wherein scholars were systematically executed by the government. Toegye witnessed this event, and this experience prompted him to appeal to the king for amnesty on behalf of these scholars. Following his appointment to a government post, Toegye continued to appeal, arguing that the king was perpetuating a campaign of disinformation to discredit the scholars. The case was settled, but it was not completely resolved. For this reason, Toegye would resign by posting a letter of resignation whenever he lowered his government post and he kept a certain distance from the government's actions. Several of Toegye's colleagues also posted their resignations in a similar fashion during this time. When discussing Toegye's protests, the government formed the conclusion that Toegye was appealing for the restoration of the executed scholar's reputations. In a personal meeting with the king, Toegye petitioned him to restore the reputation of Jo Kwang-jo, who was the representative figure of the executed scholars and whose life Toegye had documented during this period. However, Toegye's persistent efforts were not realized until the next king, King Seonjo, ascended; at this time, Jo Kwang-jo's reputation was restored, and he was given the position of Yeonguijeong. Toegye's upright loyalty and scholarly spirit were apparent in his resignation from the government post under the pretext of illness as an act of protest. Toegye judged that the discipline of the state depends on the righteous spirit of scholars, and he was highly sympathetic to the sacrifices of the executed scholars and their loyalty to the state.
In this situation, Toegye's loyalty to the executed scholars and his strong scholarly spirit against injustice are ev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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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맥국(貊國)' 관련 한시에 보이는 춘천의 역사적 정체성

저자 : 손호정 ( Sohn Ho-jeong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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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은 맥국(貊國)의 도읍지다.”라는 이야기는 역사기록과 지역의 전설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맥국의 실체나 왕위계보에 대한 물증을 찾지 못하여 그 실재 여부는 아직도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하였다. 최근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에서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관련되는 방대한 문헌 기록, 현존하는 지역 명칭과 전설, 새로이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들을 근거로 다시금 실체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의 고증에 매달리는 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들 각종 연구자료 중 '한시(漢詩)'에 주목하였다. 맥국의 실체가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춘천을 찾은 많은 시인들은 왜 굳이 맥국이라는 시어를 사용하였을 까? 시인들이 유독 춘천에 와서 맥국을 떠올린 것은 춘천만이 가지는 특성, 즉 역사적 정체성에서 맥국적인 요소를 감지한 것은 아닐까?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옛 시문 자료 중 '맥(貊)'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77인의 128수를 대상으로, 그중 춘천 일대를 맥국으로 본 99수의 시를 살펴보았다. 옛 시에 읊은 춘천을 맥국으로 표현한 양상을 종합해보면 조선 시대에 들어 후기에 이를수록 많은 지식인들이 춘천을 찾아 시를 읊었고, 대다수 시인은 춘천을 옛 맥국의 도읍지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정리된 역사서의 전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실학자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역사 인식과 고대사에 대한 관심, 조선말 이궁(離宮)을 설치할 정도로 고대국가가 들어서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 그리고 순박하고 강인한 주민의 인상이 고대 맥족이 가졌을 특성과 유사하다는 점 등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춘천을 찾은 시인들은 이와 같은 영사시(詠史詩)를 통해 단순히 풍경만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 인문 지리적 특성 등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춘천을 맥국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러한 기록은 누적되어 다시 춘천의 역사적 정체성을 강화해 왔다고 본다.


The story that “Chuncheon is the capital of Macguk(貊國) Kingdom” has formed part of the historical records and local legends. However, it has not been clearly demonstrated whether it exists or not as there is no physical evidence that has been found to make this myth a reality for the Macguk Kingdom's substantive body or the lineage of the throne. In an attempt to prove this, recently the Chuncheon Research Institute at the Chuncheon Cultural Center is striving to clarify its substance again by relying on the vast literature records, existing regional names and legends as well as the newly excavated remains and relics. However, it seems difficult to achieve the desired results as long as it is relying on to the testament of the name.
Among these various research materials, the researcher paid attention to the classical Chinese poetry(漢詩) to which one question stood out Why did many poets who visited Chuncheon refer to it a "Macguk" even though the substance of the physical evidence is unclear? Perhaps the poets came to Chuncheon and thought of "Macguk" because they verified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Chuncheon, that is, the identity of Chuncheon being the "Macguk." In order to solve these questions, this study examined a total of 128 poems by 77 poets, all from the old poetry materials with the poetic word - Mac(貊). A total of 99 poems, which expressed that the Macguk is located around the Chuncheon, were selected. In conclusion, the expression of Chuncheon, which was recited in old poems, was expressed as Mac, and as the Joseon Dynasty reached the late Joseon Dynasty, more intellectuals visited Chuncheon to recite poetry to which most poets expressed Chuncheon as the capital of the old Mac. This was based on the dissemination of historical books compiled in the late Goryeo Dynasty, whereas the new historical awareness and interest in ancient history is centered on scholars after the two rebellions(兩亂), the location conditions for ancient countries to be built, and the impression that simple and strong and residents are similar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ancient people of Mac. Chuncheon was described as a Macguk because it was not only inspired by the scenery but also by the three-dimensional and holistic characteristics of history and humanity through such consular poems. These historical records accumulate and reinforced the Chuncheon's historic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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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여말선초 유학의 분화 및 사회에 미친 영향 연구

저자 : 왕엽서 ( Wang Yeshu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7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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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麗末鮮初), 불교로 인한 폐단은 종종 심각한 사회성 문제뿐만 아니라, 짙은 사상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시기 전통 불교 내지 유학 사상은 이미 사회적 지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사회개혁의 도구로 삼아 알맞은 해결 방도를 모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 유학자들은 왕권 교체문제를 둘러싸고, 심성유학(心性儒學)을 중시하는 보수파와 정치유학(政治儒學)을 중시하는 급진파로 갈라서게 되는데, 보수파가 유학의 덕화(德化) 교육에 치중하여 고려왕조의 틀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급진파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치중하여 왕조 교체를 주장했던 것이다. 두 파별은 국가체제의 통치, 척불숭유(斥佛崇儒), 그리고 전제개혁(田制改革) 등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조선왕조 전체의 지배체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토대로 본 논문에서는 여말선초의 성리학 수용 과정을 접점으로 하여 신진사대부 세력들 간의 내부 분열과 각축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정치유학과 심성유학의 이론적 가치와 실질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함으로써 성리학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내막과 그 객관적인 영향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During the late Koryo dynasty to earlier Joseon dynasty period, Buddhism's shortcomings resulted in severe social problems and a profound intellectual crisis. The emerging scholar-officials used the Li (universal principle) of nature as a weapon to explore a solution to social reform, resulting in Traditional Buddhism and Confucianism losing their ability to guide society. This process caused a division between the Confucian scholars such as Lee Saek and Jeong Mong-ju regarding the issues of the dynastic replacement into a conservative school of mind and a radical school of political Confucianism. The conservative school emphasized the need for Confucianism's moral education and advocated reform within the framework of the Koryo dynasty, whereas the radical school emphasized a more pragmatic reform and advocated for the replacement of the dynasty. The two schools disagreed on which state system would be applicable, the exclusion of Buddhism and the reverence for Confucianism, and the reform of the field system. While the two schools'philosophies alluded to the political Confucianism and mind Confucianism, the entire Joseon dynasty regime system was impacted negatively. Both the political Confucianism and mind Confucianism originated from Confucius, with the former seeking to build a social organization beyond the individual and aiming to re-establish an ideal social-political order through rites, laws, and social norms. Mind Confucianism focuses on individual morality and the intrinsic nature of the natural law and is dedicated to cultivating one's own ethics and morality while exploring the origin of life ontology or the universe and time. It further has an individual inner nature and a strong tendency towards moral idealism. This study takes the eastward spread of Li (universal principle) during the period from the Late Koryo Dynasty to Earlier Joseon Dynasty as a starting point. It further examines the process of the internal division and competition between the emerging scholar-official powers. It explores the theoretical value and practical significance of political Confucianism and spiritual Confucianism. Furthermore, it elucidates the localized features of the Li (universal principle) of nature and its objective effects after its introduction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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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64년 통신사행 시기 오사카 문인의 필담창화집 『관풍호영(觀風互詠)』의 성립과 의미

저자 : 구지현 ( Koo Jea-hyoun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9-329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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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관풍호영(觀風互詠)』을 소개하고 성립 과정을 고찰하는 것이다.
『관풍호영』은 1764년 16인의 일본 문인이 오사카에서 조선의 통신사 사행원을 만나 주고받은 필담과 창화시를 편집하여 출판한 필담창화집이다. 2권 2책으로, 1책은 22장, 2책은 11장이다. 1책은 「觀風互詠序」, 「諸君姓名」, 「韓使姓名」, 상권이 실려 있고, 2책에는 하권이 실려 있다. 서문은 오쿠다 센로(奧田仙樓, 1729-1807)가 지은 것이다. 「諸君姓名」에는 필담창화를 나눈 일본인 16명의 인명, 「韓使姓名」에는 조선인 8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하권 마지막 장에 “甲申明和紀元閏十二月發行 洛陽錢屋善兵衛 大坂名倉又兵衛 同上西田理兵衛”라고 간기를 밝히고 있다. 상권에는 山口西周, 岡洋溟, 林靑桂, 林伏鸞, 白石東沼가 나눈 필담과 창화시가 실려 있고, 하권에는 鳥崧岳, 千庫鷺洲, 井西陵, 松梧亭, 前田貞儀, 水月, 堀洞龍, 菅泰菴, 鄱茅亭, 板倉澹翠, 永昆陵의 순으로 창화시 및 서한이 실려 있다.
『관풍호영』에 등장하는 문인 가운데 도리야마 스가쿠, 야마구치 고사이 등 오사카 문인들이 포함되어 있고 같은 시기 필담집인 『양호여화』의 저자 오쿠다 센로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를 단서로 하여 당시 문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하자면 이들은 기무라 겐카도의 교유 네트워크에 있으면서 이후 곤돈시샤에서도 활동하였던 오사카 지역의 문인들이라 추정할 수 있다. 번잡스러운 양국 문인들의 만남에도 학술적인 논의와 시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필담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이들의 성향은 조선 문사들이 일본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 지역은 상업적인 번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취미를 지닌 문인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의 교유 네트워크는 이후 시사(詩社)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관풍호영』은 오사카 문인층의 성립과 일본 문학계의 변화를 포착하게 하는 문헌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troduce Kanpugoei(觀風互詠) and reflect on the process of its foundation. In 1764, sixteen Japanese literati had compiled brush-talk records and poetry conversed with Chosŏn envoys in Ōsaka.
The records and poetry were published in the Kanpugoei and based on brush-talk interactions, making them a poetic and literal composition. This composition consists of two volumes, the first being that one has 22 chapters and the other has 11 chapters. Volume 1 has the first volume of “The Foreword of Kanpugoei(觀風互詠序)”, “Japanese writer list(諸君姓名)”, and the “Korean writer list(韓使姓名)”, while Volume 2 has the second volume of them. The Foreword was written by Okuda Senro(奧田仙樓, 1729-1807). The “Japanese writer list” has the name of 16 Japanese literati who had participated in brush-talk interactions previously; likewise, the “Korean writer list” has the name of 8 Chosŏn envoys. With reference to the last chapter in the second volume, publishing information such as time, place, publisher ect. is referred to as “甲申明和紀元閏十二月發行 洛陽錢屋善兵衛 大坂名倉又兵衛 同上西田理兵衛”. The first volume has brush-talk records and poetry in which 山口西周, 岡洋溟, 林靑桂, 林伏鸞, and 白石東沼 had conversed while the second volume has other poetry and letters following the list 鳥崧岳, 千庫鷺洲, 井西陵, 松梧亭, 前田貞儀, 水月, 堀洞龍, 菅泰菴, 鄱茅亭, 板倉澹翠 and 永昆陵.
The literati of Kanpugoei was referred to as the group communicating as readers and literati, despite what kind of employment they had such as Confucian, governor, artist, poet, engraver, or that of a Buddhist monk. They had excellent sinographic literature capacity and it's knowledge, to the extent of them not having any difficulty with regard to communicating in brush-talk interactions.
Considering the opportunity that Chosŏn envoys came to Japan for the sake of the realization of the Elegant Gathering(雅集), they further communicated and made exchanges with the literati.
Literati who had new cultural hobbies appeared in Ōsaka based on commercial prosperity and built a foundation comprising of literal association organized by literati. As a result, Kanpugoei is literature that is built from a class of Ōsaka literati who grasped the change of Japanese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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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악의첨(仁嶽義沾)의 독서와 교유

저자 : 이대형 ( Lee Dae-hyung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1-35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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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私記)로 유명한 인악의첨(仁嶽義沾)은 정조 임금이 용주사를 창건할 때 참여하여 글을 지을 만큼 명망이 높았고, 그래서 많은 유자(儒者)들이 교유를 청하였다. 인악이 유자들과 활발하게 교유할 수 있었던 내적인 바탕엔 그의 폭넓은 독서가 자리하고 있다. 인악은 『주역』과 주희(朱熹)의 책을 매우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글의 인용처를 통해 살펴보면, 그는 『맹자』 그리고 두보(杜甫)와 왕세정(王世貞)의 시를 좋아하였다. 다른 승려들의 경우와 비교할 때 역사서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맹자』와 주희의 책을 좋아한 것은 「답눌촌서(答訥村書)」의 논리적 글쓰기와 연관된다.
인악은 유자들과 편지로 사상적 대화를 나누며 불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글을 청하거나 안부를 묻는 게 대부분인 다른 승려들의 편지와는 차별된다. 유자들의 비판에 대해 소극적 옹호에 그쳤던 다른 승려들과 달리 인악은 불교를 적극 주장하였다. 「답눌촌서」가 대표적이니, 일심관(一心觀)을 설파하며 유학과 다르다고 했다. 만법의 근원은 '한마음'이므로 한마음을 깨달으면 된다는 것이다.
인악이 교유한 유자들 가운데 대구 판관의 자제였던 홍직필(洪直弼)이 주목되는데 젊은 시절 대구로 부친을 뵈러 왔다가 노장 인악을 만나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정약용이 어린 시절에 노장 연담(蓮潭)을 만나 감명을 받았던 것과 유사하며, 이러한 사실이 유자들의 문집에서는 삭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Inak Uichum was famous for sagi(私記), which is a personal commentary based on the Buddhist temple. When King Jeongjo(正祖) founded the Yongjusa(龍珠寺) Temple, Inak was participated in the process of founding the temple. It can therefore be assumed that, at the time, he was famous. Due to being so popular, many Confucians asked him for companionship and the evidence of this remains in collection. The internal basis for the active communication of Inak with the Confucians is his broad interest in reading. He not only has read about the Buddhist temples, but further studied the Confucian books and the literature books.
Inak mentioned that he enjoyed reading the Book of Changes and the books of Zhu Xi(朱熹) a lot. There is no article other than this study that mentions and clarifies his tendency to read; it is therefore necessary to indirectly examine his tendency to read through his writing as well. Looking at the books he quoted, he is characterized by liking the Works of Mencius as well as poems by Du Fu(杜甫) and Wang Shizhen(王世貞). Wang Shizhen was an archaic poet of the Ming Dynasty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literary circl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it is difficult to find traces of it in the Buddhist writings. As such, it can be seen that the reading tendency of Inak was in line with the trend at the time.
By having ideological conversations with the Confucian scholars, Inak actively insisted on the ideas of the Buddhist. In his letters to Nulchon(訥村), he stated that the source of everything is in "one's mind." His letter is different from that of other monks, who mostly ask questions regarding his writing or ask how they are doing. Among the Confucian scholars, Hong Jikpil(洪直弼) was as famous as a representative of the Confucian scholars in the 19th century. When Hong Jik-pil was young, he came to meet his father, a local official in Daegu who was impressed by the veteran Inak. Their meeting is comparable to that of young Jeong Yakyong(丁若鏞) who was impressed by the old Yeondam(蓮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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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영 정병욱 선생과 연희전문

저자 : 허경진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6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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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白影) 선생의 백주년기념강연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에서 주관하게 된 것은 백영선생의 생애와 학문이 연희전문에서 싹 트기 시작하여 연희대학교에서 꽃을 피웠다는 뜻이다. 백영선생은 학병으로 끌려갈 때에도 연희전문 2년 선배 윤동주의 유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고향 집에 보관했다가 광복 뒤에 출판하여 문학청년 윤동주를 시인으로 소개하였고,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가 서울에 찾아오자 누이동생을 소개하여 결혼하게 하였으며, 윤동주의 유고를 돌려주었다. 후손들이 윤동주의 육필 유고와 유물들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여 이 기숙사에 윤동주기념관을 설치하게 되기까지 윤일주 윤혜원 남매를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고와 정성이 있었지만, 우리는 연희 교정에서 맺어진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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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영 정병욱 선생의 국문학 연구 - 연구 방법론·국문학 특질론·판소리·고전 산문 영역에서의 학문적 업적 및 유산 -

저자 : 이강옥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9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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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영 기념 강연에 덧붙이는 글

저자 : 정학성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13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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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선생은 연민 이가원 선생과 같은 세대의 국문학자이다. 고전을 연구하는 국문학자였던 선친은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나 연민학지를 읽는 분들이라면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금년에는 탄신 백 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행사가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서 열려서 불초자가 선친에 대한 외람된 글을 쓰게 되었다. 작고한 지도 어언 40년이 되어 그간 지인과 후학들에 의해 그 학문과 업적을 추념하고 인간적 풍모를 회고하는 책들도 간행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이러한 기록이나 전문(傳聞), 그리고 선친 자신의 말글 몇 가닥을 토대로 관심을 가진 분들이 궁금하게 여기실 일들과 함께, 그 손을 거쳐 빛을 보고 우리에게 전하게 된 중요한 문화유산인 윤동주 시집과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 몇 마디를 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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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연민 이가원의 사회시(社會詩)에 보이는 작시 태도 연구

저자 : 박순 ( Park Soon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7-1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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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하에서 시대의 불의(不義)를 묵과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시에 담아내었다. 이러한 사회시는 연민의 원고를 모은 6권의 문집 내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문집들은 시기별로 원고가 모일 때마다 편집ㆍ간행된 것이므로 연민은 한국 현대사를 겪어내면서 끊임없이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은 시를 써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민의 사회시에 대해서는 허경진의 연구 논문이 발표된 바 있는데, 본 주제에 대한 최초 연구로서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다보니 각각의 작품에 대해서는 핵심만 언급하는 것에 그쳤다. 이에 본고에서는 개별 작품들을 보다 면밀히 분석하는 연구를 지향하였다. 연민의 사회시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산업화ㆍ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전통 한학의 명맥이 끊겨가는 시점에 한시로서 사회의식을 보여준 마지막 선비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값진 유산이기에 허경진의 선행 연구에 뒤이어 각 작품에 담긴 작가의 내면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연민의 사회시에 보이는 작시 태도에 따라 작품들을 분류하였고, 이에 해당되는 시를 선별하였다. 양심 있는 문인(文人)이 당대 사회의 불의를 목도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시에 담아낼 때에는 여러 가지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연민의 사회시를 보면 크게 세 가지 태도가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시름하고 슬퍼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분노의 태도이고, 셋째는 유도(儒道)에 기반한 비판적 발언을 행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작시 태도에 따라 연민의 시는 그에 걸맞은 표현 방식을 보여주었다. 본고에서는 연민이 쓴 사회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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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의 과정과 의의

저자 : 허권수 ( Heo Kweon-soo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1-18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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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신재의 시대에는 동시대에 대학자들이 많았는데, 신재는 이들과 모두 학문적 교류를 하여 자신의 학문적 안목을 넓혔다. 신재는 선배를 스승처럼 모셨고, 퇴계와 남명보다는 6세 많은 중간에 위치한 인물로서 두 사람과 다 교류하였다. 퇴계와 남명이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벼슬에 대하는 자세도 매우 적극적으로 책임감과 충성심이 강했다. 배운 바를 최대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평생 관직에 있었다.
그는 유학(儒學)을 교화(敎化)의 방도로 여겨 유학의 보급을 위해 정성을 쏟았고, 또 유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인물이다. 그가 백운동서원을 창설한 것은 이런 그의 정신적 자세의 반영인 셈이다. 조선 최초로 창설된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최초로 우리나라 학자를 향사(享祀)함으로 해서 우리 학문의 자주성을 높이고, 우리나라 학자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 학문, 문화, 교육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재가 서원을 창설함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선비가 비로소 체계적으로 양성되고 선비정신이 정립되게 되었다. 이때 오랜 역사를 지닌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는 이미 과거시험 위주의 형식적인 교육으로 추락하여, 새로운 참된 학문적 전기를 마련한 곳이 서원이었다. 특히 도학(道學)을 위주로 하는 참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백운동서원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학문을 통한 백성 교화 등 현실 적용에 더 비중을 두었다. 신재의 서원 창설의 전통을 계승하여, 자신이 직접 서원을 창설하거나 서원 창설을 적극 지원한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면 근 1천여 개의 서원이 건립되어, 학문연구와 백성교화의 본부가 되었다.
신재의 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는, 동시대의 여타 문인ㆍ학자들에 비해서 비교적 완비된 체재를 갖추고 있어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우나라의 서원의 역사와 선비정신을 연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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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퇴계의 기묘사화에 대한 의리와 선비정신 연구

저자 : 신두환 ( Shin Doo-hwan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7-22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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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퇴계의 기묘사화에 대한 의리와 그 선비정신을 연구한 논문이다. 퇴계는 그가 직접 목도한 기묘사화에 대하여 특별히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출사 이후 기회만 있으면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기묘명현들의 사면 복권을 조심스럽게 임금에게 소청하곤 하였다. 기묘사화가 수습되기는 하였지만 신원이 흡족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조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벼슬만 내리면 사직상소를 올려 사퇴하곤 하였다. 퇴계처럼 사직상소를 여러 번 올린 사람도 드물었다. 이를 두고 선조는 경연에서 퇴계는 왜 조정을 꺼려하고 벼슬만 내리면 사직을 하려 하는지에 대해 신하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 대한 결론은 기묘사화에 대한 조광조의 신원이 회복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라고 결론지어진다. 그는 기묘사화의 중심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신원을 회복해 줄 것을 경연에서 명종임금과 독대하여 토로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이 시기에 정암 조광조의 행장을 직접 썼다. 그의 조광조의 신원 회복에 대한 끈질긴 노력은 선조 대에 와서 이루어지게 된다. 선조는 기묘사화에 처참하게 희생된 조광조의 억울한 신원을 회복해 주고 그에게 영의정의 벼슬을 추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퇴계의 끈질기고 강직한 선비정신은 조정에서 관직이 내려올 때마다 병을 핑계로 사직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퇴계는 국가의 기강이 선비들의 사풍(士風)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며 기묘명현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의 희생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퇴계의 기묘명현에 대한 의리관과 강인한 선비정신은 그의 문학작품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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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맥국(貊國)' 관련 한시에 보이는 춘천의 역사적 정체성

저자 : 손호정 ( Sohn Ho-jeong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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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은 맥국(貊國)의 도읍지다.”라는 이야기는 역사기록과 지역의 전설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맥국의 실체나 왕위계보에 대한 물증을 찾지 못하여 그 실재 여부는 아직도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하였다. 최근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에서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관련되는 방대한 문헌 기록, 현존하는 지역 명칭과 전설, 새로이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들을 근거로 다시금 실체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의 고증에 매달리는 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들 각종 연구자료 중 '한시(漢詩)'에 주목하였다. 맥국의 실체가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춘천을 찾은 많은 시인들은 왜 굳이 맥국이라는 시어를 사용하였을 까? 시인들이 유독 춘천에 와서 맥국을 떠올린 것은 춘천만이 가지는 특성, 즉 역사적 정체성에서 맥국적인 요소를 감지한 것은 아닐까?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옛 시문 자료 중 '맥(貊)'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77인의 128수를 대상으로, 그중 춘천 일대를 맥국으로 본 99수의 시를 살펴보았다. 옛 시에 읊은 춘천을 맥국으로 표현한 양상을 종합해보면 조선 시대에 들어 후기에 이를수록 많은 지식인들이 춘천을 찾아 시를 읊었고, 대다수 시인은 춘천을 옛 맥국의 도읍지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고려 후기에 정리된 역사서의 전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실학자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역사 인식과 고대사에 대한 관심, 조선말 이궁(離宮)을 설치할 정도로 고대국가가 들어서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 그리고 순박하고 강인한 주민의 인상이 고대 맥족이 가졌을 특성과 유사하다는 점 등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춘천을 찾은 시인들은 이와 같은 영사시(詠史詩)를 통해 단순히 풍경만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 인문 지리적 특성 등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춘천을 맥국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러한 기록은 누적되어 다시 춘천의 역사적 정체성을 강화해 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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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여말선초 유학의 분화 및 사회에 미친 영향 연구

저자 : 왕엽서 ( Wang Yeshu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7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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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麗末鮮初), 불교로 인한 폐단은 종종 심각한 사회성 문제뿐만 아니라, 짙은 사상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시기 전통 불교 내지 유학 사상은 이미 사회적 지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사회개혁의 도구로 삼아 알맞은 해결 방도를 모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 유학자들은 왕권 교체문제를 둘러싸고, 심성유학(心性儒學)을 중시하는 보수파와 정치유학(政治儒學)을 중시하는 급진파로 갈라서게 되는데, 보수파가 유학의 덕화(德化) 교육에 치중하여 고려왕조의 틀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급진파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치중하여 왕조 교체를 주장했던 것이다. 두 파별은 국가체제의 통치, 척불숭유(斥佛崇儒), 그리고 전제개혁(田制改革) 등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조선왕조 전체의 지배체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토대로 본 논문에서는 여말선초의 성리학 수용 과정을 접점으로 하여 신진사대부 세력들 간의 내부 분열과 각축 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정치유학과 심성유학의 이론적 가치와 실질적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함으로써 성리학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내막과 그 객관적인 영향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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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64년 통신사행 시기 오사카 문인의 필담창화집 『관풍호영(觀風互詠)』의 성립과 의미

저자 : 구지현 ( Koo Jea-hyo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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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관풍호영(觀風互詠)』을 소개하고 성립 과정을 고찰하는 것이다.
『관풍호영』은 1764년 16인의 일본 문인이 오사카에서 조선의 통신사 사행원을 만나 주고받은 필담과 창화시를 편집하여 출판한 필담창화집이다. 2권 2책으로, 1책은 22장, 2책은 11장이다. 1책은 「觀風互詠序」, 「諸君姓名」, 「韓使姓名」, 상권이 실려 있고, 2책에는 하권이 실려 있다. 서문은 오쿠다 센로(奧田仙樓, 1729-1807)가 지은 것이다. 「諸君姓名」에는 필담창화를 나눈 일본인 16명의 인명, 「韓使姓名」에는 조선인 8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하권 마지막 장에 “甲申明和紀元閏十二月發行 洛陽錢屋善兵衛 大坂名倉又兵衛 同上西田理兵衛”라고 간기를 밝히고 있다. 상권에는 山口西周, 岡洋溟, 林靑桂, 林伏鸞, 白石東沼가 나눈 필담과 창화시가 실려 있고, 하권에는 鳥崧岳, 千庫鷺洲, 井西陵, 松梧亭, 前田貞儀, 水月, 堀洞龍, 菅泰菴, 鄱茅亭, 板倉澹翠, 永昆陵의 순으로 창화시 및 서한이 실려 있다.
『관풍호영』에 등장하는 문인 가운데 도리야마 스가쿠, 야마구치 고사이 등 오사카 문인들이 포함되어 있고 같은 시기 필담집인 『양호여화』의 저자 오쿠다 센로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를 단서로 하여 당시 문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하자면 이들은 기무라 겐카도의 교유 네트워크에 있으면서 이후 곤돈시샤에서도 활동하였던 오사카 지역의 문인들이라 추정할 수 있다. 번잡스러운 양국 문인들의 만남에도 학술적인 논의와 시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필담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이들의 성향은 조선 문사들이 일본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 지역은 상업적인 번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취미를 지닌 문인들이 등장하였고 이들의 교유 네트워크는 이후 시사(詩社)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관풍호영』은 오사카 문인층의 성립과 일본 문학계의 변화를 포착하게 하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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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악의첨(仁嶽義沾)의 독서와 교유

저자 : 이대형 ( Lee Dae-hyung )

발행기관 : 연민학회 간행물 : 연민학지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1-35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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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私記)로 유명한 인악의첨(仁嶽義沾)은 정조 임금이 용주사를 창건할 때 참여하여 글을 지을 만큼 명망이 높았고, 그래서 많은 유자(儒者)들이 교유를 청하였다. 인악이 유자들과 활발하게 교유할 수 있었던 내적인 바탕엔 그의 폭넓은 독서가 자리하고 있다. 인악은 『주역』과 주희(朱熹)의 책을 매우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글의 인용처를 통해 살펴보면, 그는 『맹자』 그리고 두보(杜甫)와 왕세정(王世貞)의 시를 좋아하였다. 다른 승려들의 경우와 비교할 때 역사서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맹자』와 주희의 책을 좋아한 것은 「답눌촌서(答訥村書)」의 논리적 글쓰기와 연관된다.
인악은 유자들과 편지로 사상적 대화를 나누며 불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글을 청하거나 안부를 묻는 게 대부분인 다른 승려들의 편지와는 차별된다. 유자들의 비판에 대해 소극적 옹호에 그쳤던 다른 승려들과 달리 인악은 불교를 적극 주장하였다. 「답눌촌서」가 대표적이니, 일심관(一心觀)을 설파하며 유학과 다르다고 했다. 만법의 근원은 '한마음'이므로 한마음을 깨달으면 된다는 것이다.
인악이 교유한 유자들 가운데 대구 판관의 자제였던 홍직필(洪直弼)이 주목되는데 젊은 시절 대구로 부친을 뵈러 왔다가 노장 인악을 만나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정약용이 어린 시절에 노장 연담(蓮潭)을 만나 감명을 받았던 것과 유사하며, 이러한 사실이 유자들의 문집에서는 삭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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