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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임진왜란기 조선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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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기 조선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Origins of the Image of “Lazy and Dissipated Joseo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김경태 ( Kim Kyong-tae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8월
  • : 75-121(47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87.3


목차

1. 머리말
2. 전쟁 당시 조선의 자기반성과 명군의 비난
3. 전쟁 이후 조선과 중국의 회고
4. 근대 역사학에서의 활용과 영향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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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관한 서술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오랜 평화에 안주해 있었던 데다가 당파 간의 갈등이 심하여,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런데 국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있었고, 정부 내에는 간신과 아첨하는 이들이 가득했다는 극단적인 표현도 존재했다. 과연 이러한 역사상(歷史像)은 실재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스스로 반성하는 문구를 남긴 경우가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명과 조선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하자, 명측 인사의 발언과 외교문서에서는 강한 비난 표현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문구들은 항상 정치적인 배경과 함께 해석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명에서 만들어진 임진왜란 관련 문헌에서는 맥락을 제거한 채, 비난의 표현만을 남겼다. 전쟁 후 조선의 문헌에는 자기반성을 위한 레토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상대되는 인물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문헌에서 국왕과 왕조를 직접 비난하는 서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
두 나라의 문헌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대중 지향의 출판이 유행하면서, 강렬한 요소만을 뽑아 흥미 위주의 임진왜란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기노시타 사네히로와 하야시 다이스케는 시대적인 맥락과 공간적인 맥락을 없애고,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뽑아낸 후 재조합하여 “게으르고 방탕한” 조선상을 만들어냈다. 그에 더하여, 개항 이후 조선에서 수집한 조선 사료의 목록을 추가하여 자신의 조합을 더 화려하게 꾸몄다. 기노시타와 하야시의 저작은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저작은 후대 학계에 큰 영향을 주어 오랜 기간 부정적인 조선 이미지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Some description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portray Joseon before the invasion critically. A familiar narrative is that Joseon had been complacent during the long period of peace and was not prepared for war due to internal conflict. However, some extreme statements were made that the king was dissipated in alcohol and women and that the government was full of confidants and flattery. Is this historical image tru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Joseon left documents examining its actions. Amid disputes between Joseon and the Ming dynasty during the war, there were strong criticisms of Joseon by Ming figures and in diplomatic documents. Such passages should always be interpreted within their political context. However, Ming’s post-war literature on the invasion only contains these expressions of criticism without context. After the war, the literature in Joseon strove for self-reflection, and the authors described their adversaries critically, highlighting a specific person. Nevertheless, descriptions directly criticizing the king and the dynasty were not permitted in Joseon literature.
The literature of both countries was transmitted to Japan. As the public-oriented publishing became popular in Japan, only intense elements were used to create an imag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focused on arousing public interest. In modern times, Sanehiro Kinoshita and Daisuke Hayashi ignored the spatial and temporal context by extracting only the negative aspects that they recombined to create the image of a “lazy and dissipated” Joseon. Additionally, they made this combination more colorful after Joseon opened its ports by collecting Joseon’s historical materials to add to the cited works. The works of Kinoshita and Hayashi were the culmination of this trend. These works significantly influenced later scholars and played an essential role in the later negative image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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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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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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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나주지역 철기문화의 등장과 성장배경

저자 : 김상민 ( Kim Sangm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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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일제강점기 신촌리 9호분의 발굴조사를 통해 금동관을 비롯한 각종 위세품이 출토되면서 지역 내 지배층의 위상을 보여준다. 특히 옹관묘이라는 독특한 무덤구조의 고총고분이 발달한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또한 아파트형 고분으로 유명한 나주 복암리고분과 정촌고분에 부장된 금동신발과 은화관식 등 지배자의 위세를 보여주는 금속품을 비롯한 유물의 부장양상은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영산강유역 내 독자적인 고대사회가 자리 잡았음이 논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영산강유역 내 고대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된다고 알려진 철기문화와 관련된 특징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나주지역이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철기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삼한의 마한으로부터 이어진 고대 영산강유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점에 주목하였다. 최근 조사된 나주지역 유적의 현황을 검토하며,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로서 나주의 철기문화가 시기에 따라 어떤 현상을 띠며, 백제화되는지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덤에서 보이는 나주지역 철기문화의 현상을 살펴보면, 5세기대 나주 일대에서 성행한 토착집단의 성장은 영산강유역 토착집단이 가진 해양성을 토대로 한 다원적 교류에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산강유역의 철기문화는 나주 운곡동 지석묘 출토품을 시작으로 수문패총과 같은 해양거점이 중심이 된 교류의 산물로서 구기촌유적에서 보이는 단조철기문화는 이후 영산강유역 철기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3세기 이후 철기문화의 성장은 나주 용호고분에서 출토된 철기를 통해 해양성에 기반한 것으로 추정되며, 나주 복암리 3호분 선행기의 철기와 용호고분 철기의 비교하여 옹관묘와 철기문화의 결합이 3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음을 추정하였다.
또한 반남고분군 내 철기문화 역시 해양성에 기반한 특징이 확인하며, 고대 나주지역은 그간 축척된 해양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후 고대 나주지역은 복암리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계 철기생산기술의 도입하면서 철기생산과 유통의 중심지를 형성한다. 이로써 고대 영산강유역 철기문화는 완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Various elite grave goods including the gilt-bronze crown were excavated in Naju through the excavation investigation of the Sinchon-ri tomb no. 9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so that Naju shows the status of the regional ruling class. Especially, the development of a high-mount tomb with the unique tomb structure such as a jar burial received attention. Moreover, the burial aspect of the artifacts such as the metallic goods showing the ruler's power like the Naju Bokam-ri tomb famous as an apartment type tomb and the gilt-bronze shoes and silver diadem ornaments buried in the Jeongchon tomb served as a momentum for discussing that an independent ancient society got settled within the Yeongsan River basin around Naju at that time. The characteristics related to the ironware culture known as the basis for the development of an ancient state within the Yeongsan River basin are not identified properly.
This article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Naju region accepted the advanced culture including ironware early on the basis of the geographical advantage and grew as the ancient central force of the Yeongsan River basin extended from Mahan(馬韓) of the Three Hans(三韓). The current status of the remains of the Naju region investigated recently was reviewed, and it was addressed that the ironware culture of Naju being as the center of the ancient society in the Yeongsan River basin had a certain phenomenon and went through the transformation of being Baekje depending on the time. The content is summarized as follows.
Considering the phenomenon of the ironware culture of the Naju region shown from the tomb, it can be checked that the growth of the indigenous group having prevailed around Naju in the 5th century is the fruit of the plural exchange based on the oceanicity the indigenous group of the Yeongsan River basin had.
The ironware culture of the Yeongsan River basin is the fruit of the exchange done around the marine basis such as Sumunpaechong with the start of the excavated article of the Naju Ungok-dong dolmen, and the forged ironware culture shown in the Gugichon sites became the basis for the ironware culture of the Yeongsan River basin afterwards. It is estimated that the growth of ironware culture after the 3rd century is based on oceanicity through the ironware excavated from the Naju Yongho tomb. It was estimated by comparing the ironware of the previous tomb of the Naju Bokam-ri tomb no. 3 with the ironware of the Yongho tomb that the combination of a jar burial with ironware culture was done in the middle of the 3rd century.
Moreover, the characteristics based on oceanicity is also checked from the ironware culture inside the Bannam tombs. It was checked that the ancient Naju region was developed through exchange with various regions on the basis of the oceanicity having been accumulated. Thereafter, the ancient Naju region introduced the Baekje style ironware production technology around Bokam-ri and formed the center of ironware production and distribution. Hereby, the ironware culture of the ancient Yeongsan River basin was comple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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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섬진강 하류지역 가야문화의 확산과 정치체의 변동

저자 : 하승철 ( Ha Seung Cheo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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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하류지역은 마한·백제문화, 가야문화가 혼재하는 공간이다. 4세기부터 경남 서부지역과 공통의 문화권을 형성하였고 5세기부터 가야문화의 색채가 강해진다. 6세기 중엽에는 가야문화를 대신하여 백제문화가 주류를 형성한다. 이 지역에 대한 문헌연구에서는 백제와 대가야의 관계에 대해 집중하고 있으나 물질자료에서는 소가야 계통이 월등히 많으므로 이와 관련한 연구도 필요하다. 또한 토착세력이 소가야, 대가야, 백제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였는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섬진강 하류지역에는 다양한 계통의 가야토기가 출토되고 경남 서부지역의 주거구조와도 강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섬진강 하류지역의 묘제는 4~5세기 전반에 토광묘, 5~6세기에 석곽묘, 6세기부터 석실묘로 바뀐다. 고고자료로 판단하면 섬진강 하류지역과 소가야는 4세기부터 공통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5세기에는 소가야연맹체에 포함된다. 5세기 후엽부터 소가야와 함께 대가야 세력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대가야는 섬진강 교역로를 확보하고 섬진강 하류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섬진강 하류지역에 있었던 정치체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사현으로 추정된다. 고고학 자료로 보면 백제와 가야가 접점을 이루었던 섬진강 하류지역이 임나사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임나사현을 대가야로만 한정하는 것은 제고를 요한다. 임나사현으로 추정되는 섬진강 하류지역 집단은 소가야, 대가야, 백제와 다각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생존을 모색했다.


The Downstream area of the Seomjin River is a space where Mahan, Baekje, and Gaya cultures are mixed. Mahan and Gaya cultures are mixed until the 4th century, but from the 5th century to the 6th century, Gaya culture has rich in color. Baekje culture has been mainstream since the middle of the 6th century. Various types of Gaya pottrry have been excavated in the Downstream area of the Seomjin River and the western part of Gyeongsangnam-do show a strong connection in residential structures. The tombs in the Downstream area of the Seomjin River were changed to the wooden chamber tomb in the first half of the 4th and 5th centuries, Stone-lined tomb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and Corridor-Chamber tomb from the 6th century. Judging from the archaeological data, the Downstream area of the Seomjin River and Sogaya form a common cultural sphere from the 4th century and are included in the Sogaya Federation in the 5th century. Since the late 5th century, the entry of Daegaya forces along with Sogaya has been remarkable.
It is presumed that the political body in the Downstream area of the Seomjin River was Imna 4Prefectures recorded in the Nihoshok日本書紀. Groups in the Downstream area of the Seomjin River sought survival by establishing multilateral relations with Sogaya, Daegaya, and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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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유신에 대한 기억과 인식

저자 : 이강래 ( Lee Kangl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10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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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시대의 경험과 문헌 정보를 바탕으로 신라의 저명한 김유신에 대한 기억과 인식의 문제를 논의한 것이다. 김유신에 대한 기록은 고대 삼국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에 대한 풍부한 기억과 다양한 설명들은 각기 주체가 다르고 그에 따라 중심 화소도 달라졌다. 또한 전승의 주체뿐 아니라 전승을 수용하는 방식에서도 시대와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김유신을 기억하고 설명하는 사유 체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삼산의 호국신, 불교의 33천 관념, 유교의 성인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예화를 거느리면서 변전하였다. 신라 왕실에서도 상대는 물론 중대 무열계 왕통과 하대 원성계 왕통이 서로 다른 이유와 필요에서 김유신을 호명하고 권위를 분유하였다. 지식인과 문맹인의 기억은 각각 경험적 합리와 감동적 신이를 대변하는 것이지만, 때때로 그러한 분별이 무의미할 정도로 서로 정합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요컨대 김유신에 대한 기억과 인식은, 고대의 신라와 중세의 고려를 막론하고, 신이와 합리의 양단을 모두 포섭하는 것이었다.


This article discusses the memory and awareness of Kim Yu-shin based on the experiences and literature information of the Goryŏ dynasty. The record of Kim Yu-shin occupied the largest proportion among the famous characters of the ancient Three Kingdoms. However, the memories and various explanations of Kim Yu-shin have shown different central objects and contents according to different subjects. It was also noted that not only the subject of the oral heritages but also the method of accepting the heritages may differ depending on the times and social circumstances.
The thought system for remembering and explaining Kim Yu-sin changed over time, with new illustrations centered on the patriotic gods in three mountains of Silla, the Buddhist concept of the universe, and the Confucian saints. In the Silla royal family, not only their early period of Silla but also the middle period of the line of King Muyŏl and the late period which King Wŏnsŏng's descendants occupied the throne called Kim Yu-shin and shared authority with him for different reasons and needs. The memories of intellectuals and illiterate people represent empirical rationality and emotional wonders, respectively. But at times,they were so consistent with each other that such distinctions were meaningless. In short, the memory and awareness of Kim Yu-sin, regardless of the ancient Silla and medieval Goryŏ, encompassed both sides of transcendence and r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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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국유사』 효선편의 내용과 특징

저자 : 신선혜 ( Sin Sun Hy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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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선편은 효행의 양상을 하나의 편목으로 엮은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에 『삼국유사』 내 다른 편목에 비해 적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불교적 효에 대한 논의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신라 및 고려에서는 유-불 공존을 통해 사상계가 발전했다는 점에서 효선편 내용에 대한 분석과 편목 설정의 배경에 대한 논의를 재고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에 「진정사효선쌍미」조에서는 雙美의 의미가 자식의 봉양에 대한 부모의 따름을 함께 지칭했다는 점을 밝히고, 「대성효이세부모」조에서는 불교적 효가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모두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했음을 살폈다. 「향득사지할고공친」조에서는 불교적 효가 극단적인 희생적 효행을 경계하고자 했음에 주목하였다. 이는 「손순매아」조에서도 이어지는데, 효를 위해 자식을 희생하려 했던 손순의 행위를 석종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경계한 것이 결국 사찰 창건으로 회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빈녀양모」조에서는 불교적 효는 자식의 일방적 부모 봉양에만 한정되지 않음에 주목하여 첫 조목과 '雙美'의 관점에서 수미상관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효선편은 효행담이 하나의 편목으로 구성된 첫 문헌인 만큼 편목 설정의 배경과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효선편은 도세의 『법원주림』이 구성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는데, 이 문헌이 유교적 세계관에 대한 불교적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찬술되었다는 점도 효선편 이해에 단초를 제시해주었다. 한편 효선편에 수록된 효행담이 신라 중대 이후 형성되었고, 주체가 모두 재가자라는 점에서 재가신도의 비중과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그들의 일상생활 속 윤리로서 효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을 것임을 상정해보았다. 그들의 계율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아짐에 따라 割股나 埋兒와 같은 행위가 효의 관점에서는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효선편 효행담의 형성 배경이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렇듯 효선편은 불교적 효의 확장적이고 다중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편제된 편목이라 할 수 있다.


Since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is the first record to compile aspects of filial piety into one category, it occupies a small amount compared to other categories in the Samkuk Yusa but it is a category that cannot be neglected as it can be said to be the starting point of discussions on Buddhist filial piety. In Silla and Goryeo, it i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analysis of the contents of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and the discussion on the background of category setting in that the ideological world developed through the coexistence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Accordingly, in the 'Jinjeongsa-Hyoseon-Ssangmi(眞定師孝善雙美)', it is revealed that the meaning of Ssangmi (雙美) refers to the obedience of parents to the support of their children and in the 'Daeseonghyo-Isebumo(大城孝二世父母)', it was examined whether Buddhist filial piety was said to be the object of both the parent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In 'Hyangdeugsaji-halgogongchin(向得舍知割股供親), it was noted that Buddhist filial piety was to be wary of extreme sacrificial filial piety. This is continued in 'Sonsunmaea(孫順埋兒)', in other words, the fact that the act of Son-soon (孫順), who tried to sacrifice his child for filial piety, was warned through a stone-made bell, was ultimately remembered as the founding of the temple. Lastly, the 'Binnyeo-Yangmo (貧女養母)', points out that Buddhist filial piety is not limited to the unilateral support of the child's parents. By noting this point, from the point of view of 'Ssangmi (雙美)', it was considered that this was correlated with the first item.
As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is the first document in which the story of filial piety consists of one category, it is also necessary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meaning of category setting. It is confirmed the fact that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was influenced by Do-se's 'Beobwon-Julim (法苑珠林)' in terms of composition, the fact that 'Beobwon-Julim' was written from the point of view of a Buddhist response to the Confucian worldview also provided a starting point for understanding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On the other hand, the story of filial piety recorded in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was formed after the middle of Silla, and the main characters of the story of filial piety are all lay people. Therefore, it was hypothesized that as the status of lay believers increased, interest in filial piety as an ethics in their daily life would have increased. As their understanding of the precepts also increased, it became possible to understand that actions such as cutting one's own flesh or burying a child do not violate the precepts from the point of view of filial piety, which was understood that this was the background for the formation of the filial piety story in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As such, the section 'Filial Piety and Good Deeds' is a category organized to emphasize the expansive and multiple meanings of Buddhist filial p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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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 남평현의 흥학당과 흥학사

저자 : 김덕진 ( Kim Deok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7-16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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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당은 1701년(숙종 27)에 읍내의 향교 옆에 설립되어 조선왕조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흥학당 창설은 현감과 지역민의 합작품이었다. 현감은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익이, 지역민은 김정구가 대표적이다. 창설 후 효과가 나타나자 이들을 추모하는 흥학사란 사우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흥학당은 15조에 이르는 학규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에 따르면, 학교는 읍내의 흥학당과 10개 면의 서당으로 위계화 되어 있었다. 운영자는 흥학당은 도훈장이고, 서당은 사장이었다. 학생은 15세 이상이면 누구나 입학하여 강학과 제술을 공부하였고, 원하면 기숙도 가능하였다. 학기는 2학기제로 운영되었고 학기 중 강학과 제술을 교체하였다. 평가는 면 서당에서는 매달, 읍 흥학당에서는 4개월마다 행하여 우수자는 시상하고 미달자는 문책하였다. 예산은 현감이 지원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지역민의 기부로 충당하였고 기부자에 대해서는 향교의 입학·면강 및 군역의 면제 등 특전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군역자원이 부족해지자, 기부자 특전에 대한 논란이 일어 인원수 제한이나 흥학당 혁파 등이 논의되었다.


Heunghakdang was set up next to the Hyanggyo in the town in 1701(the 2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and shared its fate with the Joseon dynasty. The foundation of Heunghakdang was a joint work of Hyeongam and local residents. The former was represented by Song Byeong-ik, the grandson of Dongchundang Song Jun-gil, and the latter by Kim Jeong-gu. As Heunghakdang generated effects following its foundation, a Sawoo called Heunghaksa was built to commemorate their memories. Heunghakdang was managed according to the school rules of 15 articles. According to the school rules, it had a hierarchical system in place with Heunghakdang in the town and Seodangs in ten Myeons. The manager was Dohunjang for Heunghakdang and Sajang for a Seodang. Anyone aged 15 or older could enroll and study. The students studied Ganghak and Jesul. If they wanted, they could live in the dormitory. A two-semester system was established with Ganghak and Jesul replaced during a semester. Seodangs in Myeons evaluated students every month, and Heunghakdang in the town did every four months. Those who recorded excellent achievements were awarded, whereas those who fell short were reprimanded. Hyeongam would contribute to the budgets, but most of the budgets were covered by contributions from local residents. Donators received such benefits as enrollment in Hyanggyo, Myeongang, and exemption from military service. When there was a shortage of military service resources in the middle 18th century, controversies occurred over the benefits of donators and led to the limitation of students and the abolition of Heunghak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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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정조 대 훈련원의 정비 방향과 금군 강화 -1797년의 〈훈련원절목〉을 중심으로-

저자 : 정해은 ( Chung Hae-e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7-19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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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정조가 1797년에 마련한 〈훈련원절목〉의 내용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훈련원의 정비 방향과 그 의미를 검토한 글이다. 조선 전기에 훈련원은 무관을 선발하고, 군사를 양성하며 병학 교육을 관장하는 국방의 산실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오군영이 창설되면서 군사 훈련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능마아청의 설립으로 병학 교육의 역할도 능마아청에 내주면서 예전의 위상만 못하게 되었다. 정조는 훈련원의 군사 기능과 무학 본래의 역할을 되살리기 위해 1796년에 훈련원의 건물을 정비하고, 이듬해에 〈훈련원절목〉 7개 조항을 마련하였다. 이 절목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금군별장이 매달 훈련원에서 금군을 훈련하게 하였다. 정조는 금군에 대한 병조의 영향력을 줄이는 대신에 금군별장의 권한을 높이고, 훈련원을 훈련장으로 지목하여 금군의 훈련과 연관을 맺는 관서로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훈련원 도정이 능마아청 당상을 겸임하면서 낭청 전원에 대한 인사권을 갖게 하였다. 곧 훈련원 도정에게 능마아청 낭청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하여 훈련원을 능마아청의 상위 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따라서 〈훈련원절목〉은 금군 강화의 일환이자 훈련원을 무학의 본산으로 되살리고자 한 정조의 의지가 담긴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set out to review the content of Hunryeonwon-jeolmok written by King Jeongjo in 1797 and examine the reform directions and meanings of the training center based on it. During the former half of Joseon, Hunryeonwon recruited military officers, cultivated soldiers, and supervised military science education as the cradle of national defense. During the latter half of Joseon, Hunryeonwon expanded in size and turned into a government office closely connected to the successful careers of military officers. Its function of training soldiers became weak after the establishment of Ogunyeong. Its roles of providing military science education also weakened after the establishment of Neungmaacheong during the reign of King Injo. King Jeongjo devised seven provisions of Hunryeonwon-jeolmok in 1797 to restore the military functions and military science education roles of Hunryeonwon. There are two essential parts in Hunryeonwon-jeolmok: one is that the Byeoljang of Geumgun would train Geumgun at Hunryeonwon every month; and the other is that the head of Hunryeonwon would also serve as the Dangsanggwan of Neungmaacheong and have all the authority over the personnel of low-rank government officials. King Jeongjo tried to make Hunryeonwon a government office related to the training of Geumgun by increasing the authority of the Byeoljang of Geumgun and appointing Hunryeonwon as Geumgun's training ground instead of reducing the influence of the Ministry of War on Geumgun. At the same time, he granted the authority over the personnel of Nangcheong at Neungmaacheong to the head of Hunryeonwon. As a result, Hunryeonwon was established as a supervising agency of Neungmaacheong. These findings indicate that Hunryeonwonjeolmok was a part of Hunryeonwon's Geumgun policy and a policy that represented King Jeongjo's determination to restore Hunryeonwon as the main provider of military science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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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60~70년대 주한미군 및 가족의 한국 사회 경험과 민군관계

저자 : 금보운 ( Keum Bowo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7-22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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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주한미군의 한국 생활 경험과 인식이 공간, 지역, 지위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한 미군이 주둔하며 한국 사회와 관계를 형성해 온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다각적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한미군이 한국사회를 인식하는 주요 공간이 되었던 기지 주변 지역과 기지라는 공간을 병사와 현지 주민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시각을 기반으로 한다.
본 연구를 통해 규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한미군 사령부가 안정적인 기지운영을 위해 현지 주민과 미군 간 우호적 관계의 증진을 독려하였지만, 그 정책은 주한미군이 처한 상황과 임무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균열이 발생했는데, 주한미군 사령부가 의도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관계 형성의 제한이 발생한 것이었다.
둘째, '주한 미군'을 단일 조직이 아니라 개별 주체로 분리하여 미군의 정책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조명하여 관계의 다양성을 규명하였다. 물론 병사의 개별 성격과 우연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주한미군이 한국 사회를 경험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여 실제 경험을 공유하며 유형화한 시도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를 통해 주한미군의 주둔이 단순히 사령부의 정책 결정만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며, 안보라는 목적 아래 한국 사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형성된 민군관계의 한계를 규명하였다.


This study attempted to construct a diverse understanding of the time and space that the U.S. military has been stationed in Korea and has formed relationships with Korean society, noting that the experiences and perceptions of U.S. troops in Korea differ according to space, region, and status.
What has been identified through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USFK Command encouraged the promotion of friendly relations between local residents and the U.S. military for stable base operation, but the policy was express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situation and mission of the USFK.
Second, the diversity of relations was investigated by dividing the "U.S. military in Korea" into individual subjects rather than a single organization and describing them as subjects who implemented the U.S. military policy. Of course, the individual characteristics and accidental situations of soldiers should be considered as well, but it is meaningful as an attempt to share and categorize actual experiences by setting standards for USFK to experience Korean society. Through this, the limitations of civil-military relations formed were identified in a situation that under the purpose of security, a sufficient understanding of Korean society was not ba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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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李贄와 許筠 사상의 횡단적 보편성

저자 : 김창규 ( Kim Chang-gyu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1-25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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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와 허균의 반유교적 사상과 행동은 인간의 해방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신에 의해 운명지워진 인간의 해방이 근대성이라면 이들의 사상과 노력이야말로 근대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전통에 대한 비판과 수정이 근대화라면, 이들 사상 역시 근대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이들의 사상과 지향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횡단적 보편성이 담겨 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유지하면서 서로 영향을 끼치고, 상호 이해와 공감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다양성과 공동성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우리는 횡단적 보편성이라 말할 수 있다. 異地域이라는 점에서 특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지와 허균의 사상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고 아우르는 가치와 지향이 담겨 있다.
이 특수하면서도 공통적인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해방에 대한 추구일 것이다. 한중 지식인의 지적 고민과 성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횡단적 보편성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에서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한 근대성을 공감할 수 있다.


The anti-Confucian ideas and actions of Lee Ji(李贄) and Heo Gyun(許筠) are directly related to the issue of human liberation. If the liberation of human beings destined by God is modernity, then their thoughts and efforts can be evaluated as modern. Also, if criticism and revision of tradition are modernization, these ideas are also connected with modernity. Their ideas and intentions contain transversal universality that transcends time and space.
We can say that the process of achieving diversity and commonality in a way that maintains different time and space, influences each other, and forms mutual understanding and sympathy, we can say as transversal universality. Although they seem special in that they are other area, they contain values and aspirations that span Korea and China, tradition and modernity.
This particular and common thing is the universal, specifically the quest for human liberation. The intellectual concerns and reflections of Korean and Chinese intellectuals have transversal universality that transcends time and space. In the intellectual tradition of East Asia, we can sympathize with modernity aimed at human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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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18세기 랑그독(Languedoc)의 공공 토목공사 : 랑그독 신분회와 중앙집중화-분권화 논의

저자 : 김대보 ( Kim Daeb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28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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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독은 흔히 '절대왕정의 예외'라고 불리며 구체제 프랑스에서 가장 독특한 지방이었다. 랑그독의 지방신분회는 중앙 행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재정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과 왕실 납부액을 협상하고, 신분회가 자율적으로 심의하여 결정할 수 있었으며, 지방에 필요한 금액을 별도로 징수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랑그독 신분회가 가진 이러한 자율성은 17-18세기 동안 정치적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었다. 루이 14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프롱드 난이 발발하여 파리의 정국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재정적 자율성을 확보했고, 이후에는 공공 토목공사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꾸준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랑그독 내 중앙 행정 소속 관직자들의 권한을 점차 축소시켰다. 이렇게 행정적 자율성을 확대시킨 랑그독 신분회는 자율성의 표현으로서 도로망의 확충에 1756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도로공사의 수와 지출 금액이 크게 증가했다. 또한, 랑그독 신분회는 파리와 독립적인 토목학교를 파리와 몽플리에에 설립했다.
랑그독 신분회가 도로망 확충에 개입한 것은 자율성의 표현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경제적 이유도 작용했다. 당대인들은 지역간 생산 불균형을 해소하여 모두의 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 도로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도로는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았다. 모든 도로는 인간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랑그독 신분회의 행정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를레트 주아나는 단순한 중앙집권화-분권화에서 벗어나 이중 중앙집중화로 랑그독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앙집중화 논의는 다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에 따라, 행정 영역에 따라 중앙집중화, 분권화 등의 문제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중앙 행정과 랑그독 신분회의 행정에는 모두 이론적 중앙집중화와 실질적인 분권화, 제도적 표준화와 예외 지방의 단독 표준화, 그리고 국왕이 의도한 분권화와 지방의 자율성 확보 및 자체적인 중앙집중화가 모두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랑그독 신분회의 행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지방사 서술에 일정한 제언을 할 수 있다. 즉, 역사의 흐름에 단순하게 휩쓸리는 지방이 아니라 나름의 동력을 가지고 중앙에 연쇄적인 파동을 일으키는 지방의 모습을 서술해야 할 것이다.


It is often said that the province of Languedoc is an exception to absolute monarchy. The Estates of Languedoc, outside the reach of the royal administration, has financial autonomy. They negotiate with the King, deliberate and vote the sum of Don Graguit. In addition, they can collect the amount necessary for their action.
This autonomy is the result of political struggle between the Estates and the King. The Estates of Languedoc obtain financial autonomy after the coronation of Louis XIV and during the Fronde. Since then, the Estates have increased the sum for public works, and minimized the functions of royal agents in their province. They have been actively involved since 1756 in the development of the road infrastructure, so that the number and the amount spent on public works have multiplied. In addition, the Estates established the two schools of engineering, one in Toulouse and the other in Montpellier.
The Estates of Languedoc intervene in road works not only to demonstrate local autonomy but also for the economy. Contemporaries are well aware of the necessity of roads which bring about prosperity by balancing the unequal production between different provinces. However, the roads are not straightforward. They are politically decided by men.
So, how can we understand the administration of the States of Languedoc? Arlette Jouanna offers us the expression “bi-centralization”. However, centralization is not a simple matter.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various levels of centralization because it is found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branches of administration, the provinces etc. In the central administration and that of Languedoc, we can see all of these factors together: theoretical centralization and real decentralization; institutional standardization and that in an exceptional province; decentralization by royal intent, local empowerment and local centralization.
By this argument, a proposal can be made for the historiography of local history, that is to say, it would be necessary to write the history not of the province which depends on the center, but of the province and of the center which influences each other recipro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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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서술에 대한 검토

저자 : 권용철 ( Kwon Yongcheo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1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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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서술된 10~12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대한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검토를 해 본 결과 현행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는 '다원적' 국제관계에 대한 정밀한 서술 및 최신 연구 성과의 반영 등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진행될 교육과정 개정에서는 '역동적' 국제관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10~12세기 역사에 대한 서술에서 각 국가 간의 관계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더욱 정확하면서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기존의 연구들에서 제기되었던 고려의 국제관계에 대한 서술도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므로 이 역시 최신 연구 성과들을 꼼꼼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른바 '맹약의 시대'라고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의 국가 간 관계가 맺어졌던 10~12세기 동아시아의 모습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가 '다원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거란과 북송 사이의 대등한 관계, 북송과 서하 사이의 상하 관계, 금과 남송 사이의 관계 변화의 양상들이 더욱 명확하게 설명이 되어야 하고, 그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 및 단어의 용법이 국가 간 관계에 맞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신중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요와 서하의 상하 관계 및 금과 서하의 상하 관계도 무시되어서는 안 될 내용이기도 하다.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일원적'인 국제질서의 모습을 형성하기 이전인 10~12세기의 이른바 '다국체제'에서 확인되는 동아시아의 양상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주로 송대사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시대에 대한 더욱 포괄적인 분석이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 거란과 여진 및 탕구트 등 여러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한 최근의 추세에 발맞추어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서술도 더욱 정밀해지고 그 시야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


In this paper, the contents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 East Asia between the 10th and 12th centuries described in the East Asian history textbooks were critically analyzed. As a result of the review, it was confirmed that the current East Asian history textbooks should be more active in describing “multistate” international relations and reflecting the latest research results. In the future revision of the curriculum, discussions should be conducted in a way that can more accurately and clearly reveal the natur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each country and its meaning in the description of East Asia's 10th~12th century history. In addition, the description of Goryeo's international relations also accounts for an important portion of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in the 10th~12th centuries, so it is also necessary to carefully check the latest research results.
The description of East Asia between the 10th and 12th centuries which can be referred to as the “era of covenant,” should have a “plural” appearance in itself. The change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Liao(遼) and Northern Song(北宋), between Northern and Western Xia(西夏), between Jin(金) and Southern Song(南宋), and the terms and words used to express the relationship should be explained correctly. In addition, relationship between Liao and Western Xia and between Jin and Western Xia should not be ignored.
“Multistate system” between the 10th and 12th centuries in East Asia has historical significance, before the emergence of the Mongol Empire in the 13th century and forming a “unified” international order. There have been insufficient analysis of this era as research has been conducted mainly on Song Dynasty for a long time, but interest and research on various ethnic groups such as Khitan, Jurchen, and Tangut, and the countries they established have been active recently. In line with such recent trends, the description of East Asian history textbooks needs to be more precise and their perspective needs to be expa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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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하대 원랑선사 대통의 위앙종 수용과 월광사 주석

저자 : 임평섭 ( Lim Pyeong-seob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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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하대에 활동한 선승인 원랑선사 대통(816~883)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대통은 신라 변방의 지방민이자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당나라에서 최신 선사상을 수용하여 명망을 얻었다. 대통이 교류하였던 낭혜 무염과 경문왕은 당대의 명사였으며, 그가 수행한 위앙종은 9세기 중반 당나라의 선종계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다. 그렇지만 대통에 관해서는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대통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핵심적인 사안을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대통의 생애는 크게 입당과 귀국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대통의 출신지와 함께 그가 출가한 이후 활동했던 지역에 대한 분석이다. 대통의 출신지인 통화부는 신라의 서북방 국경인 취성군이며, 그가 출가한 이후 활동한 단엄사는 지금의 철원 방면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로, 대통이 당나라에서 배웠던 위앙종의 사상적 특징과 관련한 내용이다. 위앙종의 수행 방법 가운데 대통은 특히 조사선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귀국 이후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은 월광사 주석과 함께 경문왕과의 관계이다. 계립령 북부 입구에 있는 월광사에 주석한 대통은 주변 지역의 교화에 힘을 쏟았다.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경문왕은 이러한 대통의 활동을 우대하였다. 대통에 관한 연구를 통해 9세기 신라 남종선의 조사선 수용 흐름과 함께 월광사가 가지는 시대적 의미 또한 살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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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이의민 집정시기 명종의 정치적 위상

저자 : 임영희 ( Lim Younghe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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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 집권기에 국왕의 위상이 위축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은 과연 명종의 27년간이라는 오랜 재위가 나약하고 무력한 왕으로서만 가능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명종대는 무인 집권의 성립기로 아직 무인집정자의 위치가 확고하지 않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여러 인물의 무인집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왕은 경대승이 죽자 공백기라는 절호의 기회에 가장 먼저 경대승의 사병조직인 도방을 해체하고 그 도방을 구성하는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왕은 무인 집정자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처럼 처신하다가도 기회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걸림돌을 제거해버리는 면밀하고 적극적인 생존방식을 보여주었다. 명종의 인사정책 또한, 중방의 반대에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반발이 가라앉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살며시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다시 등용시킴으로써 왕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명종은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을 직접 불러들였다. 이의민이 집정하더라도 경거망동하거나 국왕의 전주권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할 거라는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명종의 이의민 발탁은 국왕의 효율적인 정국운영과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한문준, 문극겸, 이지명 등은 지공거를 수차례 역임하면서 인재발굴에 집중하여 친왕적 관료육성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명종은 두경승과 이의민을 서로 경쟁케 하는 구도에 둠으로써 일방적인 권력의 독점을 막고 왕권안정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명종은 경대승 사후에서 이의민 집정시기에 어느 때보다 국왕의 권위가 회복의 탄력을 받으면서 안정된 통치력을 보였다. 반면에 명종이 대항마인 두경승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문신이 무신의 위상을 넘을 수 없었던 점은 한계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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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임진왜란기 조선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저자 : 김경태 ( Kim Kyong-t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2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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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관한 서술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오랜 평화에 안주해 있었던 데다가 당파 간의 갈등이 심하여,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런데 국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있었고, 정부 내에는 간신과 아첨하는 이들이 가득했다는 극단적인 표현도 존재했다. 과연 이러한 역사상(歷史像)은 실재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스스로 반성하는 문구를 남긴 경우가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명과 조선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하자, 명측 인사의 발언과 외교문서에서는 강한 비난 표현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문구들은 항상 정치적인 배경과 함께 해석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명에서 만들어진 임진왜란 관련 문헌에서는 맥락을 제거한 채, 비난의 표현만을 남겼다. 전쟁 후 조선의 문헌에는 자기반성을 위한 레토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상대되는 인물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문헌에서 국왕과 왕조를 직접 비난하는 서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
두 나라의 문헌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대중 지향의 출판이 유행하면서, 강렬한 요소만을 뽑아 흥미 위주의 임진왜란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기노시타 사네히로와 하야시 다이스케는 시대적인 맥락과 공간적인 맥락을 없애고,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뽑아낸 후 재조합하여 “게으르고 방탕한” 조선상을 만들어냈다. 그에 더하여, 개항 이후 조선에서 수집한 조선 사료의 목록을 추가하여 자신의 조합을 더 화려하게 꾸몄다. 기노시타와 하야시의 저작은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저작은 후대 학계에 큰 영향을 주어 오랜 기간 부정적인 조선 이미지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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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제강점기 在中韓人留學生의 근대학문 수용과 유통 - 北京大의 李允宰를 중심으로 -

저자 : 이재령 ( Lee Jaer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6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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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유학생 이윤재의 지적 경험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근대 학문·사상의 수용과 유통 양상을 다루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이윤재는 베이징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중국은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거쳐 서양의 학문·사상이 홍수를 이루었고, 대중운동이 일상화된 격변기였다. 유학 중 이윤재는 문자혁명, 몽고의 독립운동, 중화민국정치사, 학생운동, 노동운동, 문학혁명, 여론동향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중국 인식과 구국방안 모색에 기여하였다. 그는 문자혁명 위주의 신문화운동에 주목하였는데 胡適의 문학혁명을 적극 지지,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어문일치운동에 자극을 주었고, 중국학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중국 연극사에 주목하였다. 그는 중국의 애국운동을 지지하였는데 5·4운동을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민중운동으로 평가하면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옹호하고 인권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이윤재는 전공학문의 범위를 넘어 동시대 중국의 신문화와 대중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 유통시켰다.
귀국 후 이윤재는 곧장 교육·학술·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근대역사학을 공부한 만큼 史論과 史話에 관한 글을 가장 많이 썼는데 역사상 위인들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리더십을 찾고자 했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를 알리는데 힘썼다. 그는 민족문화의 유구함과 우수성을 강조하였으며 외세 침략에 저항한 영웅들을 소개하여 역사를 통한 교훈을 강조하였다. 이윤재는 한글운동에도 앞장섰는데 중국 문학혁명의 영향을 받아 체계적인 한글 사용과 표준화를 주장하였고, 한글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맹목적인 서양사상의 수용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는 식민지를 극복할 첫걸음으로 도덕적 윤리적 수양을 강조하여 自助와 互助를 앞세웠다. 그는 민족의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단군역사와 개천절을 중시했는데 '弘益人間'과 '在世理化'를 특히 부각시켰다. 이렇듯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던 이윤재는 베이징유학을 통해 과학적 학문 방법과 근대적 학술사상을 섭렵하고, 학과공부뿐만 아니라 시국 문제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교육·언론 활동을 통해 구국방안을 강구하였다. 이윤재의 교육·학술 활동은 베이징 유학을 통해 축적된 근대지식과 서양사상이 민족주의와 혼합, 변용된 것으로 실천적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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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5 전쟁> 토론수업에 나타난 예비 역사교사의 역사인식 사례 연구 - 유엔군1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에 대하여-

저자 : 김수미 ( Kim Su-m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3-19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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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6ㆍ25 전쟁 과정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에 대하여 예비 역사교사를 대상으로 토론수업을 진행하고, 이 토론수업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비 역사교사의 역사인식을 살펴본 사례 연구이다. 이 연구의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6ㆍ25 전쟁의 책임은 우선적으로 북한에 있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예비 역사교사는 유엔군의 전쟁 개입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고마운 존재로 인식하는 반면,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가 나누어졌다. 또한 전쟁 전 이승만의 북진 통일 주장에 대해서는 무력을 이용한 통일은 반대한다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토론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사 토론수업의 효용성에 대한 부분이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고 나와 다른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도 사유해 보는 토론을 거치면서 다양한 해석을 살피면서 역사인식이 실제로 변화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효용성 있는 토론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본 연구는 분단국가의 특수성이 있는 상황에서 6ㆍ25 전쟁 당시'유엔군의 북진 정당성'문제에 의문을 던진다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논제로 삼아 근거를 찾아 설득하는 토론수업 경험은 역사교사를 지망하는 예비교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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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청대 복건지역의 역병(疫病) 발생과 관민(官民)사회의 대응

저자 : 유채원 ( Yoo Chaewe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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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중후기로 갈수록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고 복건지역의 경우 福州와 厦門 등 연안도시의 성장도 가속화되면서 역병의 발생과 유행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 있어서도 청대에는 의료가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방치되면서 의료위생환경에 대한 조성은 각 지방정부의 행정력과 민간사회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조치는 역병의 발원지나 유행지를 선정하고 승선의 검역 등을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또한 복건지역의 민간사회에서는 자선적 성격의 보건활동이 매우 유동적이었고, 많은 민간 의사들이 역병 치료를 위한 구조 활동을 펼치거나 의서를 선전해서 역병에 도움이 될 만한 일상 상식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에 역병이 돌 때 시행했던 환경 및 위생 개선 조치들을 토대로 대응했으며, 이론적으로는 당대의 의학 지식에 의존했다.
청대 복건인의 역병에 대한 대처 방식은 종교 관념이 투영된 의례를 통해 치료하려는 방식과 경험적인 의약에 의존하는 전통방식을 고수해 가면서 당사자도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병의 지리적 확산과 피해의 증대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지리적 다양성과 분절성으로 인해 생성된 복건의 지역적 특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고, 역병이라는 큰 재난상황에서 긴장과 협력과정을 거치면서도 전통과 근대라는 과도기에 나타난 복건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환경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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