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 일제시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진학과 진로

KCI등재

일제시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진학과 진로

Admission and career path of students of Keijo-Jeil Secondary School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임이랑 ( Lim Yirang )
  • : 역사문제연구소
  • : 역사문제연구 4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7월
  • : 207-257(51pages)
역사문제연구

DOI

10.36432/CSMKH.48.202207.5


목차

1. 머리말
2.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의 운영과 학생 진로
3.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의 개편과 진학
4. 1930년대 상급학교 진학의 본격화와 진로
5. 맺음말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은 실용과 간이에 입각한 실업중심주의였다. 이에 따라 경성제일고보는 농업, 상업, 수공 교과에 대하여 실습위주의 실업교육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학생들의 졸업 후에는 진학보다는 취업을 장려하였는데, 그 주안점은 하급관리와 교원양성에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2차조선교육령이 전면 개정되자 고등보통학교의 4년제 학제가 일본의 중학교와 동일한 5년제로 개정되었고,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 진학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상의 개정이었고 실제로 조선인 학생들이 진학에 전면으로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고등보통학교에서 진학이라는 것을 교육내용과 수업에서 체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경성제대 예과 창설이 계기가 되었다.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서 제일고보는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제대 진학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며 여타 고보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1920년대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상, 제일고보의 우위를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3·1운동의 여파와 사회주의의 확산,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1920년대는 여전히 제도에 대하여 불안정한 시기였고, 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한 채 중도 이탈했다. 제일고보의 진학은 1930년대부터 본격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와다 히데마사(和田英正)과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 두 교장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두 교장의 진학 장려책은 총독부의 정책 방향과 적극 부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제일고보생들의 진학 경향을 정리하면 첫째 경성제대 진학률이 꾸준하게 가장 높았다는 점, 둘째, 1939~1941년 국내 관공사립 전문학교 진학이 줄어들고 일본 내 (사립) 대학과 구제고등학교 등으로의 진학이 특히 증가한다는 점, 셋째, 광산전문, 무선통신학교와 같이 신흥으로 부상하는 학교들 이 보인다는 점, 넷째, 만주 소재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모색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의약학과 광공업 계열로의 진학이 두드러졌다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 그들은 조선인 사회에서 일정한 지도층을 형성하면서도 그들의 역할은 중견관리자나 중견지식인 하급관리로써 식민지배체제를 지탱하는데에 머물렀다.
In the 1910s, the education policy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 was unemployment-centered based on ‘practicality and simplicity’. Therefore, Keijo-Jeil Secondary School established agricultural, commercial, and handicraft departments and strongly implemented practice-oriented education. After graduation, students were encouraged to get a job, not to go to school, mainly focusing on lower management and teacher training.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2nd Joseon Education Decree was completely revised, enabling Korean students to enter Japan. However, it was only a revision of the system, not immediately Korean students took the lead in entering the school. The establishment of Keijo Imperial University's preparatory department was triggered by the full and systematic acceptance of "admission" in high school.
In the Keijo Imperial University's preliminary entrance examination, Keijo-Jeil Secondary School showed a strong performance in the discharge examination and gained an advantage over other high schools. However, this dominance could not be optimistic because of the 1920s. The 1920s, including the aftermath of the March 1st Movement, the spread of socialism, the 6.10 million-year-old movement, and the Gwangju Student Movement, were still unstable, and many students left without graduating.
The entrance of Jeil High School expanded in earnest from the 30s. This was largely due to the roles of the two principals, Wada Hidesama(和田英正) and Iwamura Toshio(岩村俊雄), who actively matched the policy direction of the Governor-General. The characteristics of Jeil High School’s admission trend in the 30s were that: first, the rate of admission to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the highest consistently; second, the number of students entering Joseon decreased and the number of students going to Japan increased; thirdly, schools related to technician training such as mining and wireless communication schools, and fourthly, advanced schools in Manchuria and China. lastly, advanced schools in medicine. They formed a certain leadership class in the Korean society. However, their role remained to support the colonial system as middle-level managers, lower-level officials, and middle-level intellectuals.

UCI(KEPA)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인류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419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6-2022
  • : 519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8권0호(2022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새로운 민중사' 이후 민중사 연구의 진전을 위하여 - 19세기 말~20세기 초를 중심으로 -

저자 : 배항섭 ( Bae Hang Seob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66 (5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글은 2013년에 발간된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 이후 10여 년 간 제출된 민중사 연구 가운데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시기를 다룬 연구들을 살펴본 것이다. 또 이 시기의 민중사 연구성과 가운데 다음 두 가지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는 논저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첫째, 근대비판 내지 근대의 상대화와 관련된 연구들이다. 둘째, 민중 구성의 다양성을 드러낸 연구, 그리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민중들 간의 연대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연구들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은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의 핵심이 이 두 가지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먼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성과들의 내용과 연구사적 의미를 소개하고, 이어서 각 연구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함으로써 향후 한 걸음 더 진전된 연구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하였다. 새로운 연구 방법을 통해 기왕의 연구와는 다른 민중상을 그리고 있는 연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과 근대를 어떤 관계 속에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과 민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연대하는 조건이나 연대의 과정에서 보이는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This article examines studies dealing with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among the studies on popular history published over the past decade. In addition, among the research results, the following two thesis related to problem consciousness were examined. First, studies with critical ideas about modern times. Second, studies that revealed that the identity and values of the people who make up the people were diverse, and studies dealing with solidarity between the people with various identities. This article first introduced the contents and meanings of representative research achievements dealing with these topics, and then attempted to find a more advanced research direction by presenting my comments on each study. thoughts on each study.

KCI등재

2마이너리티 역사, 민중사의 새로운 혁신인가 해체인가?

저자 : 소현숙 ( So Hyunsoo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7-102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에서는 최근 활발하게 진척되고 있는 마이너리티 역사 연구의 성과를 검토하고 민중사를 혁신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제기된 '새로운 민중사론'과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어떻게 서로 접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전통적인 민중사 연구의 쇠퇴와 소수자운동의 활성화라는 학계 안팎의 변화 속에서 2000년대 이후 부랑자, 장애인, 한센인, 고아, 성소수자 등 다양한 마이너리티 집단에 대한 역사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는 민중으로 쉽게 통합될 수 없는 이질적 주체들의 경험을 가시화하고 기존의 민중사가 포착하지 못했던 근대성과 '정상성' 규범의 폭력성을 비판하며 지배와 억압의 다층적 면모를 구체화하였다. 또한 마이너리티 집단이 겪는 배제와 폭력에 다수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가해-피해의 다층성을 포착해왔다. 이를 통해 마이너리티 역사 연구는 민족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 낡은 민중사의 해체를 촉진해 왔다. 그러나 민중사를 '아래로부터 역사'로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름 없고 역사 없는 사람들에게 제 이름과 역사를 찾아줌으로써 역사학을 민주화하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마이너리티 역사는 민중사의 새로운 혁신이기도 하다. 젠더·섹슈얼리티·인종·국적·장애·지역 등 차이가 차별이 되는 사회에서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이 이루어 온 역사에 대한 지식 없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역사학의 민주화'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This study reviews recent research on minority history and examines how it can be combined with the novel people's history that emerged as an innovative alternative to the existing people's history. Studies on various minorities such as vagrants, disabled people,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orphans have been conducted in the midst of wholesale changes in academia, which include the decline of the traditional people's history research and the emergence of minority movements. These studies revealed the experiences of heterogeneous subjects that could not be easily integrated into Minjung (the people), criticized the violence of modernity and norms that were not captured by the existing people's history, and materialized the multi-layered aspects of domination and oppression. In addition, by revealing that the majority are complicit in the exclusion and violence suffered by minorities, the diversity of harm was captured and the possibility of solidarity based on differences was explored. In this study, I will explore how such research on the history of minorities contributes to the restructuring of the existing people's history.

KCI등재

3식민지시기 산림이용권을 둘러싼 갈등과 그 성격

저자 : 김태현 ( Kim Taehyu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35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공공성 논의에서 농민 및 하층민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논의를 주도하는 주체를 따라가는 수동적 주체로 그려졌다. 물론 자료의 한계 등으로 하층민이 '공공'영역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포착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본고는 조선인 3대 범죄 중 일상적으로 가장 많았던 '삼림령' 위반을 다루었다.
조선후기 '산림천택 여민공지'의 인정 이념으로 인정되던 민중의 산림이용권은 병합이후 근대적 소유권 체제의 도입과 함께 그 입지가 줄어들었다. 심지어 상목이 아닌 국유림의 지피물 채취 조차 금지되면서 민중의 시초공급은 법을 위반하지 않고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총독부는 '농용임지설영', '국유림보호명령'제도를 통해 국유림 보호와 농민의 임산물 확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예산 부족 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마을주민을 동원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또한 농민의 하초채취, 지피물 채취 요구는 도리어 1933년 '민유림지도방침대강'으로 인해 민유림의 지피물 채취까지 엄금되면서 기존에 인정논리에 기반 한 지피물 채취는 그 기반을 잃었다. 그러면서 농민의 시초채취 요구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농민의 생계유지와 생존 요구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기존 '산림천택 여민공지'라는 유교적 인정체계를 바탕으로 총독부에게 정책 수정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산발적·단발적 발생으로 식민지배에 변화를 가할 만큼의 압력을 가할 정도는 아니였으나,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식민권력의 지배에 균열을 냈다.


Farmers and lower-class people are often portrayed as passive subjects who either rarely appear in discussions of a public nature or follow a subject that leads to a discussion. Of course, it is hard to find cases of lower-class people participating in “politics” in the “public” sector due to data limitations, etc. In order to capture this problem, this paper deals with violations of the “Forest Ordinance,” which was the most common among the three major crimes of the Joseon people.
People's right to use the forest, which was acknowledged as the ideology of recognizing the “Public Sharing of Mountains, Forests, Rivers, and Lak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lost its foothold with the introduction of a modern ownership system after the annexation. Moreover, the collection of surface-cover was banned not only from the upper woods but also from the national forest, making it impossible for people to obtain firewood without violating the law. In response, the Governor-General tried to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by protecting national forests and securing forestry products for farmers through the systems of “Forest Land Arrangement for Farmers” and the “National Forest Protection Order.” However, due to the lack of a budget, they were not implemented properly and reduced to an organization that mobilized villagers.
In addition, as a result of farmers' requests to collect herbs and surface-cover, even the collection of surface-cover from private forests was strictly prohibited, and the existing logic of recognizing the collection of surface-cover lost its foundation due to the “Outline for Private Forest Policy Guidance” that was implemented in 1933. At the same time, farmers' requests to collect firewood occurred sporadically. The requests for livelihood and survival were not simply a matter of “eating and living,” but also a means to pressure the Governor-General into revising the policies based on the Confucian recognition system of the existing “Public Sharing of Mountains, Forests, Rivers, and Lakes.” However, since it occurred sporadically and temporarily, it did not generate enough pressure to force changes in the colonial rule, but it did continue to accumulate, causing cracks in the domination of colonial rule.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5일제시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진학과 진로

저자 : 임이랑 ( Lim Yira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7-257 (5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은 실용과 간이에 입각한 실업중심주의였다. 이에 따라 경성제일고보는 농업, 상업, 수공 교과에 대하여 실습위주의 실업교육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학생들의 졸업 후에는 진학보다는 취업을 장려하였는데, 그 주안점은 하급관리와 교원양성에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2차조선교육령이 전면 개정되자 고등보통학교의 4년제 학제가 일본의 중학교와 동일한 5년제로 개정되었고,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 진학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상의 개정이었고 실제로 조선인 학생들이 진학에 전면으로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고등보통학교에서 진학이라는 것을 교육내용과 수업에서 체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경성제대 예과 창설이 계기가 되었다.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서 제일고보는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제대 진학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며 여타 고보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1920년대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상, 제일고보의 우위를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3·1운동의 여파와 사회주의의 확산,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1920년대는 여전히 제도에 대하여 불안정한 시기였고, 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한 채 중도 이탈했다. 제일고보의 진학은 1930년대부터 본격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와다 히데마사(和田英正)과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 두 교장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두 교장의 진학 장려책은 총독부의 정책 방향과 적극 부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제일고보생들의 진학 경향을 정리하면 첫째 경성제대 진학률이 꾸준하게 가장 높았다는 점, 둘째, 1939~1941년 국내 관공사립 전문학교 진학이 줄어들고 일본 내 (사립) 대학과 구제고등학교 등으로의 진학이 특히 증가한다는 점, 셋째, 광산전문, 무선통신학교와 같이 신흥으로 부상하는 학교들 이 보인다는 점, 넷째, 만주 소재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모색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의약학과 광공업 계열로의 진학이 두드러졌다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 그들은 조선인 사회에서 일정한 지도층을 형성하면서도 그들의 역할은 중견관리자나 중견지식인 하급관리로써 식민지배체제를 지탱하는데에 머물렀다.


In the 1910s, the education policy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 was unemployment-centered based on 'practicality and simplicity'. Therefore, Keijo-Jeil Secondary School established agricultural, commercial, and handicraft departments and strongly implemented practice-oriented education. After graduation, students were encouraged to get a job, not to go to school, mainly focusing on lower management and teacher training.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2nd Joseon Education Decree was completely revised, enabling Korean students to enter Japan. However, it was only a revision of the system, not immediately Korean students took the lead in entering the school. The establishment of Keijo Imperial University's preparatory department was triggered by the full and systematic acceptance of "admission" in high school.
In the Keijo Imperial University's preliminary entrance examination, Keijo-Jeil Secondary School showed a strong performance in the discharge examination and gained an advantage over other high schools. However, this dominance could not be optimistic because of the 1920s. The 1920s, including the aftermath of the March 1st Movement, the spread of socialism, the 6.10 million-year-old movement, and the Gwangju Student Movement, were still unstable, and many students left without graduating.
The entrance of Jeil High School expanded in earnest from the 30s. This was largely due to the roles of the two principals, Wada Hidesama(和田英正) and Iwamura Toshio(岩村俊雄), who actively matched the policy direction of the Governor-General. The characteristics of Jeil High School's admission trend in the 30s were that: first, the rate of admission to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the highest consistently; second, the number of students entering Joseon decreased and the number of students going to Japan increased; thirdly, schools related to technician training such as mining and wireless communication schools, and fourthly, advanced schools in Manchuria and China. lastly, advanced schools in medicine. They formed a certain leadership class in the Korean society. However, their role remained to support the colonial system as middle-level managers, lower-level officials, and middle-level intellectuals.

KCI등재

61920년대 중·후반 식민지 조선의 '사적 유물론' 전개 과정에서 '발전(發展)'과 '정체(停滯)'의 관계성 - '발전'과 '모순'·'봉건' 개념을 중심으로 -

저자 : 김명재 ( Kim Myung-jae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297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의 목적은 1920년대 본격화된 사적 유물론의 '발전'개념과 '모순'·'봉건'의 이중적 역할에 주목하여 궁극적으로 '정체'와의 '관계성'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 물질적·경제적 조건을 탐구하는 데 기초를 둔 사적 유물론이 '진화(론)'로 이해되는 가운데, 식민지화의 경험을 거치면서 나타난 논의논의 구조 속에서 경제·산업의 수치를 통해 조선 사회와 역사를 평가하는 작업이 그 '낙후성'을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었으며, 이때 '발전'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 운동과 사상의 난관을 넘어서기 위해 '유물변증법'이 수용되면서 '발전' 개념의 형성과 사적 유물론의 논리 구성에서 '모순'과 '봉건'이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발전'논리 속에서도 식민지 조선의 과거와 현재의 아시아·식민지적 성격이 '모순'과 '봉건'을 매개로 내면화되어 '정체'로 이어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1920년대 유물변증법을 경유한 사적유물론에서 발견되는 '발전/정체'의 동시적 구성은 1930년대에 더욱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focu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Historical Materialism” and its logical composition as a concept of “development” in the movement and social analysis of socialism in the mid and late 1920s.
It is argued that “contradiction” and “feudalism” had an important role in the formation of the "development" and the logic of “Historical Materialism” as the “Dialectical Materialism” was accepted to overcome movement and ideological difficulties in the mid-1920s. Behind the concept of “development”, colonial and Asian “feudalism” and “contradiction” was paradoxically internalized and applied to historical analysis, forming an acceptance topography of concept of “stagnation”.
After all, the simultaneous composition of “development/stagnation” in the theory of “Historical Materialism” is expected to begin in earnest in the discourse of socialism of 1930s.

KCI등재

71920년대 후반~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의 주택 공급 조성과 자가 확대의 이면 - 경성 지역을 중심으로 -

저자 : 이명학 ( Lee Myoung Hak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37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1920년대 후반 주거문제의 유력한 대책으로 등장한 공급 측면의 시장 활성화 조치를 분석했다. 조선총독부는 주택 공급을 제약하는 택지의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하나는 국유림의 방매였다. 1929~1935년 조선총독부는 경성 내외에 위치한 42개소, 84,003평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택지 조성용으로 불하했다. 다른 하나는 보안림의 정리였다. 193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보존 가치가 낮은 임야를 보통림으로 전환하고 소유주의 개간 신청을 가능한 한 허가했으며, 국책 회사와 협력자에게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여 보존구역으로 지정된 곳까지 개발을 허용했다. 이러한 조치는 공급시장을 자극하여 주택 수급의 불균형 완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자가 보유자의 확대 경향은 부정적인 사회적 효과를 동반했다. 분양주택을 신축하기 위한 재건축·재개발사업은 가난한 계층의 주거 상실을 초래했다. 시장 정상화를 통해 주거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총독부의 태도는 사회 모순을 하위 주체에게 전가하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This study set out to analyze measures to vitalize the market on the supply side that emerged as powerful solutions to housing issues from the late 1920s to the middle 1930s.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mplemented two policies to address the lack of housing lots that restricted housing supply. One of them was to sell national forests. In 1929~35,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isposed of 42 national forests of 84,003 pyeongs in Seoul to real estate developers for housing lots through an open tender. The other was the arrangement of reserved forests. Starting in 1932,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nverted forest land of low preservation value to ordinary forests, approved reclamation applications from owners as much as possible, and gave permission to the development of even preservation areas by applying double standards for government-run corporations and cooperators. These measures stimulated the supply market and had positive impacts on the alleviation of imbalance in housing supply, but the expanding trend of homeowners was accompanied by negative social effects. Rebuilding and redevelopment projects to build new houses that would go on sale caused the loss of housing for the poor.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dopted an attitude that was nothing but an attempt to impute social contradictions to the subordinate subjects as they tried to solve housing issues through market normalization.

KCI등재

8오키다이토섬의 일본군 위안소

저자 : 하종문 ( Ha Jongmoo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9-376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오키나와현 오키다이토섬의 위안소를 제85병참경비대 제4중대의 진중일지를 통해 분석한 결과물이다. 오키다이토섬의 주둔 개시와 종료에 이르기까지 진중일지 속에 그려진 위안부와 위안소의 전체상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키다이토섬의 사례는 위안소의 개설과 운용이 관련 부대의 작전과 명령 체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오키다이토섬까지 이동하는 일은 물론 위안소의 영업마저 군의 허가와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 위안부의 신분에 관한 인식과 대응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4중대는 미군의 상륙에 앞서 오키다이토섬의 모든 민간인을 퇴거시키려고 하면서도 상급부대인 보병 제38연대의 명령에 따라 위안부를 배제시켰다. 전투가 임박한 일선에서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잔류를 강제당하는 위안부는 사실상의 '노예' 상태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로 위안부는 실질적으로 군인과 군속에 이은 군대의 구성원 즉 '제3요원'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미군과의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4중대는 작전 명령서속에 위안소와 위안부의 거취와 임무를 담았다. 위안부의 행동은 전적으로 군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이상의 사실을 토대로 봤을 때 위안소는 평시의 민간 성매매 시설이 아니라 '전시 성노예' 상태를 만들어내는 '준군사시설'로 정의되어야 한다. 위안부는 군대 체계로부터 비롯되는 특이하고 제도적인 가해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This study highlights the comfort station located in Oki Daito Island of Okinawa prefecture based on the war diaries(陣中日誌, jinchunisshi) of the 4th Company, the 85th Logistic Security Troops. The paper attempts to reconstruct a complete illustration of comfort women and comfort station and shed light on the underlying implications. The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ly, the case of Oki Daito Island shows that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comfort station were closely related with the military operations and command system of the 4th Company. Relocation to Oki Daito Island and operation of comfort station were authorized by the military.
Secondly, perception of comfort women's status and treatment of them can be inferred from the war diaries. Comfort women were excluded from the civilian evacuation from Oki Daito Island prior to U. S. army landing by the order of the 38th Regiment. This illustrates comfort women's status as “slaves” where they are forced to remain on the front despite life-threatening circumstances.
Thirdly, comfort women were treated as an essential military personnel as part of the military unit. The 4th Company issued combat orders regarding comfort station and comfort women ahead of the impending battle with U. S. army. Comfort women's actions were determined by military orders.
Based on the findings indicated above, it is imperative that comfort stations be defined as a paramilitary facility of wartime sexual slavery, not private prostitution in peace time, because comfort women were victims of institutional violence perpetrated by the military system in wartime.

KCI등재

9군 자료를 통해 본 한국군의 창설과 변화 - 국방경비대·육군을 중심으로 -

저자 : 노영기 ( Noe Young Gi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7-413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군 자료를 통해 한국군 창설과 그 변화 과정을 검토했다. 그동안 군 관련 연구에서 각종 군 자료가 '기밀(機密)'로 취급되며 군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으나 이 글에서는 국방경비대·육군의 자료를 분석해 한국군의 창설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해방 직후부터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는 군대가 창설되어 변화하는 시기였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상부의 정책결정과 상관없이 창군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군대로 창설한 것은 아니고 경찰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는 경찰예비대로서의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그렇기에 국방경비대는 그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1947년 하반기에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상정되며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군대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터진 제주 4·3사건은 국방경비대 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시금석이었다. 국방경비대가 토벌의 주체가 되며, 작전을 지휘한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했다. 정부 수립 직후에 터진 여순사건은 군대의 성격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군은 숙군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내부 반발세력을 제거하며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군은 민간인 학살에 직접 관여했다. 결과적으로 창군기의 군대로의 변화를 거치면서 군은 민간인 학살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계엄령과 군법회의, 민간인 사찰 등을 통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로 전락해갔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military and its change process through military data. In the meantime, various military data have been treated as "confidential" and access to military data has been difficult, but this article aims to lay the groundwork for understanding how the Korean military was created and changed, including the days of the constabulary.
According to military data,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military was examined, and the period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before and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was the period when the military was established and changed. The U.S. military, which first landed on the Korean Peninsula, established a plan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military regardless of the policy decisions made by the upper level in preparation for the future. However, it was not established as an army from the beginning, but at first, it was created as a police reserve, which was nothing more than a police aid. Therefore, the Constabulary was limited in its activities, even though there were forces aiming for the army from within. In the second half of 1947, the issue of the Korean Peninsula was brought to the United Nations, 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verted the defense guard into an army. It transformed the constabulary into the Army by creating a brigade and implementing measures to internally convert troops into weapons. In the process, the Jeju 4·3 incident was a touchstone showing the change in the nature of the costabulary. The constabulary became the main body of the suppression, and Lt. col. Park Jin-kyung, the commander of the regiment who led it, was assassinated. The yosun-incident, which broke out shortl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change in the character of the military. In the wake of this incident, the government and the military were able to boldly carry out the red purge to remove and stabilize internal opposition forces. After a series of incidents, the military was directly involved in the massacre of civilians. As a result, the change in the military during the founding period was reduced to the perpetrator of the massacre of civilians through martial law rather than preventing the massacre of civilians.

KCI등재

10밑으로부터의 냉전, 유격전과 대유격전 : 허은, 『냉전과 새마을: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와 분단국가체제』 (창비, 2022)

저자 : 홍석률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429 (1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새로운 민중사' 이후 민중사 연구의 진전을 위하여 - 19세기 말~20세기 초를 중심으로 -

저자 : 배항섭 ( Bae Hang Seob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66 (5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글은 2013년에 발간된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 이후 10여 년 간 제출된 민중사 연구 가운데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시기를 다룬 연구들을 살펴본 것이다. 또 이 시기의 민중사 연구성과 가운데 다음 두 가지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는 논저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첫째, 근대비판 내지 근대의 상대화와 관련된 연구들이다. 둘째, 민중 구성의 다양성을 드러낸 연구, 그리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민중들 간의 연대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연구들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은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의 핵심이 이 두 가지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먼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성과들의 내용과 연구사적 의미를 소개하고, 이어서 각 연구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함으로써 향후 한 걸음 더 진전된 연구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하였다. 새로운 연구 방법을 통해 기왕의 연구와는 다른 민중상을 그리고 있는 연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과 근대를 어떤 관계 속에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과 민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연대하는 조건이나 연대의 과정에서 보이는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KCI등재

2마이너리티 역사, 민중사의 새로운 혁신인가 해체인가?

저자 : 소현숙 ( So Hyunsoo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7-102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에서는 최근 활발하게 진척되고 있는 마이너리티 역사 연구의 성과를 검토하고 민중사를 혁신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제기된 '새로운 민중사론'과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어떻게 서로 접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전통적인 민중사 연구의 쇠퇴와 소수자운동의 활성화라는 학계 안팎의 변화 속에서 2000년대 이후 부랑자, 장애인, 한센인, 고아, 성소수자 등 다양한 마이너리티 집단에 대한 역사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는 민중으로 쉽게 통합될 수 없는 이질적 주체들의 경험을 가시화하고 기존의 민중사가 포착하지 못했던 근대성과 '정상성' 규범의 폭력성을 비판하며 지배와 억압의 다층적 면모를 구체화하였다. 또한 마이너리티 집단이 겪는 배제와 폭력에 다수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가해-피해의 다층성을 포착해왔다. 이를 통해 마이너리티 역사 연구는 민족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 낡은 민중사의 해체를 촉진해 왔다. 그러나 민중사를 '아래로부터 역사'로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름 없고 역사 없는 사람들에게 제 이름과 역사를 찾아줌으로써 역사학을 민주화하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마이너리티 역사는 민중사의 새로운 혁신이기도 하다. 젠더·섹슈얼리티·인종·국적·장애·지역 등 차이가 차별이 되는 사회에서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이 이루어 온 역사에 대한 지식 없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역사학의 민주화'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KCI등재

3식민지시기 산림이용권을 둘러싼 갈등과 그 성격

저자 : 김태현 ( Kim Taehyu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35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공공성 논의에서 농민 및 하층민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논의를 주도하는 주체를 따라가는 수동적 주체로 그려졌다. 물론 자료의 한계 등으로 하층민이 '공공'영역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포착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본고는 조선인 3대 범죄 중 일상적으로 가장 많았던 '삼림령' 위반을 다루었다.
조선후기 '산림천택 여민공지'의 인정 이념으로 인정되던 민중의 산림이용권은 병합이후 근대적 소유권 체제의 도입과 함께 그 입지가 줄어들었다. 심지어 상목이 아닌 국유림의 지피물 채취 조차 금지되면서 민중의 시초공급은 법을 위반하지 않고 얻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총독부는 '농용임지설영', '국유림보호명령'제도를 통해 국유림 보호와 농민의 임산물 확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예산 부족 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마을주민을 동원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또한 농민의 하초채취, 지피물 채취 요구는 도리어 1933년 '민유림지도방침대강'으로 인해 민유림의 지피물 채취까지 엄금되면서 기존에 인정논리에 기반 한 지피물 채취는 그 기반을 잃었다. 그러면서 농민의 시초채취 요구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농민의 생계유지와 생존 요구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기존 '산림천택 여민공지'라는 유교적 인정체계를 바탕으로 총독부에게 정책 수정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산발적·단발적 발생으로 식민지배에 변화를 가할 만큼의 압력을 가할 정도는 아니였으나,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식민권력의 지배에 균열을 냈다.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5일제시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진학과 진로

저자 : 임이랑 ( Lim Yira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7-257 (5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은 실용과 간이에 입각한 실업중심주의였다. 이에 따라 경성제일고보는 농업, 상업, 수공 교과에 대하여 실습위주의 실업교육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학생들의 졸업 후에는 진학보다는 취업을 장려하였는데, 그 주안점은 하급관리와 교원양성에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2차조선교육령이 전면 개정되자 고등보통학교의 4년제 학제가 일본의 중학교와 동일한 5년제로 개정되었고,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 진학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상의 개정이었고 실제로 조선인 학생들이 진학에 전면으로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고등보통학교에서 진학이라는 것을 교육내용과 수업에서 체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경성제대 예과 창설이 계기가 되었다.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서 제일고보는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제대 진학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며 여타 고보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1920년대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상, 제일고보의 우위를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3·1운동의 여파와 사회주의의 확산,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1920년대는 여전히 제도에 대하여 불안정한 시기였고, 많은 학생들이 졸업하지 못한 채 중도 이탈했다. 제일고보의 진학은 1930년대부터 본격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와다 히데마사(和田英正)과 이와무라 도시오(岩村俊雄) 두 교장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두 교장의 진학 장려책은 총독부의 정책 방향과 적극 부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제일고보생들의 진학 경향을 정리하면 첫째 경성제대 진학률이 꾸준하게 가장 높았다는 점, 둘째, 1939~1941년 국내 관공사립 전문학교 진학이 줄어들고 일본 내 (사립) 대학과 구제고등학교 등으로의 진학이 특히 증가한다는 점, 셋째, 광산전문, 무선통신학교와 같이 신흥으로 부상하는 학교들 이 보인다는 점, 넷째, 만주 소재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모색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의약학과 광공업 계열로의 진학이 두드러졌다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 그들은 조선인 사회에서 일정한 지도층을 형성하면서도 그들의 역할은 중견관리자나 중견지식인 하급관리로써 식민지배체제를 지탱하는데에 머물렀다.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의 목적은 1920년대 본격화된 사적 유물론의 '발전'개념과 '모순'·'봉건'의 이중적 역할에 주목하여 궁극적으로 '정체'와의 '관계성'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 물질적·경제적 조건을 탐구하는 데 기초를 둔 사적 유물론이 '진화(론)'로 이해되는 가운데, 식민지화의 경험을 거치면서 나타난 논의논의 구조 속에서 경제·산업의 수치를 통해 조선 사회와 역사를 평가하는 작업이 그 '낙후성'을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었으며, 이때 '발전'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 운동과 사상의 난관을 넘어서기 위해 '유물변증법'이 수용되면서 '발전' 개념의 형성과 사적 유물론의 논리 구성에서 '모순'과 '봉건'이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발전'논리 속에서도 식민지 조선의 과거와 현재의 아시아·식민지적 성격이 '모순'과 '봉건'을 매개로 내면화되어 '정체'로 이어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1920년대 유물변증법을 경유한 사적유물론에서 발견되는 '발전/정체'의 동시적 구성은 1930년대에 더욱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KCI등재

71920년대 후반~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의 주택 공급 조성과 자가 확대의 이면 - 경성 지역을 중심으로 -

저자 : 이명학 ( Lee Myoung Hak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37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1920년대 후반 주거문제의 유력한 대책으로 등장한 공급 측면의 시장 활성화 조치를 분석했다. 조선총독부는 주택 공급을 제약하는 택지의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하나는 국유림의 방매였다. 1929~1935년 조선총독부는 경성 내외에 위치한 42개소, 84,003평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택지 조성용으로 불하했다. 다른 하나는 보안림의 정리였다. 193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보존 가치가 낮은 임야를 보통림으로 전환하고 소유주의 개간 신청을 가능한 한 허가했으며, 국책 회사와 협력자에게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여 보존구역으로 지정된 곳까지 개발을 허용했다. 이러한 조치는 공급시장을 자극하여 주택 수급의 불균형 완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자가 보유자의 확대 경향은 부정적인 사회적 효과를 동반했다. 분양주택을 신축하기 위한 재건축·재개발사업은 가난한 계층의 주거 상실을 초래했다. 시장 정상화를 통해 주거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총독부의 태도는 사회 모순을 하위 주체에게 전가하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KCI등재

8오키다이토섬의 일본군 위안소

저자 : 하종문 ( Ha Jongmoo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9-376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오키나와현 오키다이토섬의 위안소를 제85병참경비대 제4중대의 진중일지를 통해 분석한 결과물이다. 오키다이토섬의 주둔 개시와 종료에 이르기까지 진중일지 속에 그려진 위안부와 위안소의 전체상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키다이토섬의 사례는 위안소의 개설과 운용이 관련 부대의 작전과 명령 체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오키다이토섬까지 이동하는 일은 물론 위안소의 영업마저 군의 허가와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 위안부의 신분에 관한 인식과 대응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4중대는 미군의 상륙에 앞서 오키다이토섬의 모든 민간인을 퇴거시키려고 하면서도 상급부대인 보병 제38연대의 명령에 따라 위안부를 배제시켰다. 전투가 임박한 일선에서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잔류를 강제당하는 위안부는 사실상의 '노예' 상태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로 위안부는 실질적으로 군인과 군속에 이은 군대의 구성원 즉 '제3요원'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미군과의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4중대는 작전 명령서속에 위안소와 위안부의 거취와 임무를 담았다. 위안부의 행동은 전적으로 군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이상의 사실을 토대로 봤을 때 위안소는 평시의 민간 성매매 시설이 아니라 '전시 성노예' 상태를 만들어내는 '준군사시설'로 정의되어야 한다. 위안부는 군대 체계로부터 비롯되는 특이하고 제도적인 가해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KCI등재

9군 자료를 통해 본 한국군의 창설과 변화 - 국방경비대·육군을 중심으로 -

저자 : 노영기 ( Noe Young Gi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7-413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군 자료를 통해 한국군 창설과 그 변화 과정을 검토했다. 그동안 군 관련 연구에서 각종 군 자료가 '기밀(機密)'로 취급되며 군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으나 이 글에서는 국방경비대·육군의 자료를 분석해 한국군의 창설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해방 직후부터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는 군대가 창설되어 변화하는 시기였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상부의 정책결정과 상관없이 창군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군대로 창설한 것은 아니고 경찰의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는 경찰예비대로서의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그렇기에 국방경비대는 그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1947년 하반기에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상정되며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군대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터진 제주 4·3사건은 국방경비대 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시금석이었다. 국방경비대가 토벌의 주체가 되며, 작전을 지휘한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했다. 정부 수립 직후에 터진 여순사건은 군대의 성격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군은 숙군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내부 반발세력을 제거하며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군은 민간인 학살에 직접 관여했다. 결과적으로 창군기의 군대로의 변화를 거치면서 군은 민간인 학살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계엄령과 군법회의, 민간인 사찰 등을 통해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로 전락해갔다.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5권 3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72권 0호

KCI등재

역사문제연구
48권 0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5권 2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71권 0호

KCI등재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5권 1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70권 0호

KCI등재

역사문제연구
46권 0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4권 3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69권 0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4권 2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68권 0호

KCI등재

호서고고학
49권 0호

KCI등재

역사문제연구
45권 0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4권 1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67권 0호

KCI등재

호서고고학
48권 0호

KCI등재

한국문화인류학
53권 3호

KCI등재

호남고고학보
66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