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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지학회> 온지논총> 파병군이 언급한 임진전쟁의 구도와 공적(功績) ― 가유약(賈維鑰)의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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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군이 언급한 임진전쟁의 구도와 공적(功績) ― 가유약(賈維鑰)의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을 중심으로 ―

The composition and military merit of the Imjin War(壬辰戰爭), as the dispatch forces call it ; <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 written by Gayuyak(賈維鑰)

김현미 ( Kim Hyunmee )
  • : 온지학회
  • : 온지논총 7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7월
  • : 151-180(30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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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임진전쟁, 파병군으로서 명군(明軍), 가유약
Ⅱ.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의 두 판본 비교분석
Ⅲ. 부산평왜비(平倭碑) 깊게 보기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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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병을 했던 명(明)측 인사가 남긴 기록을 통하여 국제 관계가 긴밀히 얽혀있는 ‘임진전쟁’의 실제 양상과 각국 입장에 따른 임진전쟁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하여 파병 명군에 의해서 지어진, 그리고 임진전쟁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조건을 만족하는 기록인 가유약이 집필한 「釜山平倭碑銘」(1599.10 작성)을 살펴보았다.
평왜비명은 현재 『선조실록』 32년 (1599) 10월 1일 조에 ‘가유약이 초고를 지었다’며 접반사(接伴使) 한술(韓述)이 보고한 형태로 전문이 소개되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도 또한 완성된 비(碑)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釜山平倭碑銘」 두 가지 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이본의 차이를 비교하고 글자의 출입, 배치의 차이 등을 살펴봄으로써 파병된 명군(明軍)인사가 이 임진전쟁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 측의 실제 ‘비명 제작’이라는 편집을 거쳐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양자를 비교한 결과, 구성상의 차이와 내용(특히 다른 글자들이 쓰이거나 포함된 면에서)의 차이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성상 일종의 액자 구조로 되어있는 실록본(實錄本)은 이 글이 지어진 외부 맥락을 소개함으로써, 비명(碑銘)의 실제 저자인 ‘가유약’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곧 이 비문(碑文)이 명군(明軍)의 전공(戰功)을 주장하는 선언문이 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유약’ 이라는 개인이 쓴 글이라는 부분도 적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쓴 글 때문에 국가 사이에 어떠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글을 쓰게 된 책임을 맡은 개인에게 돌릴 수도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쓰기 위한 가능성도 생긴다.
글자 출입에 의한 차이에서 유의할만한 것은 파병 명단을 밝히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초고인 실록본에는 ‘水’자가 빠져있지만, 결과본인 비명본에는 ‘水’자가 추가되어 있고 이것이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에서 적군을 물리친 부분과 이어져, 파병된 명군이 지상에서는 물론 해상 전투도 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 후, ‘비문(碑文)’이라는 조건 하에서 부산평왜비명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화하여 보기 위해 타 비석들과 비교하여 보았다. 함께 임진전쟁에 파병된 명군이 주체가 되어 지은 비명인 장양상(張良相)의 남해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와의 비교를 통해 파병 명군들의 임진전쟁 관련 전적비(戰績碑)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임진전쟁에서 싸웠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가 황제의 명을 따라 임진전쟁에 참여하여 조선의 상황을 좋게 만들었는가’로 요약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다음, 조선인에 의하여 지어진 임진전쟁 관련 비문(碑文)과의 비교를 해보았다. 평왜비가 위치하던 부산 지역에 있는 조선인작 임진전쟁 관련 금석문으로 대표적인 것은 송시열의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1670)인데, 이 글과의 비교에서 조선인들이 임진전쟁 관련 비문을 제작하는 내용의 취택 기준과 비문 내용의 수집 과정 특성상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임진전쟁’과 관련한 기억은 그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리고 조선인이 비를 건립하는 경우, 비석에 수록 혹은 누락 될 내용의 기준은 ‘실재(實在)’성 이다. 실재성의 점검을 위해 비를 세우는 자들은 목격자의 증언이나 가승(家乘)과 같은 검증 기록을 참조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대척점에 있다는 의미에서, 파병 명군인사에 의해 지어진 평왜비명은 임진전쟁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서 총괄 평가의 마음으로 내용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유약이 그려내는 임진전쟁은 명나라 황제의 ‘상황 판단과 정의 수호를 위한 마음’에 따른 명군(明軍)의 충성된 실천을 표현하되, 실제 사건의 충실한 묘사가 아니라 고사(古事)를 이용한 비유나 전쟁 후의 평온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ctual aspect of the "Imjin War(壬辰戰爭)," which is closely intertwined with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perception of the Imjin War according to each country's position, through analyzed <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 written by Gayuyak(賈維鑰) (1599.10), a record that satisfies the conditions for showing thoughts about the Imjin War.
The full text of PyeongwaebiMyeong has two versions. The first one is introduced in the 32nd year of Seonjo Silok(宣祖實錄) (1599) on October 1st, and second one is introduced in Dongnaebueupji(東萊府邑誌).
By comparing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version and examining the differences in entry and placement of letters, we could find that there were two aspects of the differences in composition (especially in terms of writing or inclusion) on the premise that the dispatched Mingun(明軍) thought about the Imjin War and their role. Silok(實錄) version, which has a kind of frame structure in its composition, introduces the external context in which this article was built, thereby making the existence of Gayuyak(賈維鑰), the actual author of this epitaph more prominent. This shows that this inscription becomes a declaration claiming the major of the Ming army, while also specifying that it is written by an individual named "Gayuyak(賈維鑰)," Therefore, when any problems arise between countries due to his writing, there is also a possibility to use it as a kind of safety device that can be attributed to the individual in charge of writing it.
What is noteworthy about the difference in text access is found in the part of revealing the dispatch list. The letter "water" is missing in the Silok(實錄) version but in the second version, ‘water’ letter is added to the part where the enemy was defeated in the land and sea battles, revealing that the dispatched Ming army fought not only on the ground but also on the sea.
After that, I compared it with other inscriptions to explore the meaning of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under the condition of inscription. By comparing Jang Ryangsang(張良相)’s Namhae Dongjeong Rock-carved Monument (東征磨崖碑), written by Ming army dispatched to the Imjin War, they were able to know the common characteristics of the epitaph's points were about who participated in the Imjin War, not about how Ming soldiers battle.
Next, we compared the inscriptions related to the Imjin War built by Koreans. Song Si-yeol's Dongnae Nammunbi(東萊南門碑) (1670) was represented epitaph related to the Imjin War in Busan, where the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was located, indicating the difference in the criteria for Koreans' adoption and collection of inscriptions related to the Imjin War. The memories of Koreans related to the "Imjin War" focus on events that occurred at the place. In addition, when Koreans build a monument, the standard for the content that will be included or omitted from the monument is 'reality'. It can be seen that those who erected the monument to check the reality refer to verification records such as witnesses' testimony and a family record. In the sense of being at the opposite point of these factors, it can be seen that PyeongwaebiMyeong(平倭碑銘) which was built by the dispatch army, chose the content with the mind of general evaluation at the time the Imjin War was almost over. In addition, the Imjin War drawn by Gayuyak expresses the loyal practice of Mingun(明軍) according to Minghwang(明皇)'s "mind for judging the situation and protecting justice," but is explained not by faithful description of actual events but by metaphors using idiom originated in an ancient event or peaceful images after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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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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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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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권0호(2022년 07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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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과 서술적 특징

저자 : 장안영 ( Jang An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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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87년 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 4편을 살펴본 것이다. 이 표류 기록은 1687년 9월 3일 출항한 이후부터 1688년 12월 17일 송환된 일까지 모두 1년 3개월에 걸친 내용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동일 사건에 대한 표류 기록이 4편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영록(知瀛錄)』,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주영편(晝永編)』에 기록된 이야기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건은 크게 「김태황 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과 「고상영 표류기(高尙英漂流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영록』, 『해외견문록』은 '제주진무(濟州鎭撫) 김태황'의 이야기로, 『탐라문견록』, 『주영편』은 '제주 주민 고상영'의 구술로 구성되었다.
4편의 기록은 모두 표류민들이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기록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저자에 따라 서술의 차이점이 있었다. 각 자료를 살펴보면 『지영록』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송환 과정과 사후 조치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있었고, 『해외문견록』은 해외무역에 대한 관심 가운데 선박의 기록이 두드러졌고, 『탐라문견록』은 안남의 삶과 민심을 엿볼 수 있었고, 『주영편』에서는 안남의 지리(地理) 내용과 저자의 평가와 함께 기록되었다는 부분에서 각각의 특징이 드러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서술적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특징이 드러났던 점은 기록하는 사람의 저술의식이 담겨있어서였고, 또 표류민의 구술로 된 체험 특성상 말하는 이에 따라 시선이 달리 표현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four records of the Annam drift of the Joseon Koreans in 1687. This drift record spans 1 year and 3 months from the departure on September 3, 1687 to the time of repatriation on December 17, 1688. What is unusual here is that there are 4 drift records of the same incident. Accordingly, each of the four stories recorded in 『Jiyoungnok(知瀛錄)』, 『Haeseongmungyunrok(海外聞見錄)』, 『Tamnamungyunrok( 耽羅聞見錄)』, and 『Juyeongpyeon(晝永編)』 were taken as the center of discussion. The incident can be largely divided into 「Kim Tae-hwang Pyo Hae Log(金大璜漂and 「Ko Sang-young's Adrift Records(高尙英漂流記)」 ' is composed of the oral form of 'Jeju resident Koh Sang-young'.
All four records have in common that they were recorded based on the experiences of the drifters, but differences in narrative style were revealed depending on the character or author. 『Jiyoungnok(知瀛錄)』 contained details about the repatriation process and follow-up measures that could not be confirmed in other documents. In 『Haeseongmungyunrok(海外聞見錄)』 the record of ships stood out among the interest in foreign trade, 『Tamnamungyunrok(耽羅聞見錄)』 gave a glimpse into Annam's life and people's feelings, In 『Juyeongpyeon(晝永編)』 each characteristic was revealed in the part where the geography of Annam was added and recorded along with the evaluation of the narrator alone.
Even in the process of narrating the same event, it can be seen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stics are revealed in different ways. The fact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stics of the same event were revealed was because the writer's writing consciousness was contained, and it seemed that the gaze could be expressed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person speaking due to the nature of the oral experience of the drif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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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石梧 尹致英의 북한산 유기 연구

저자 : 김미란 ( Kim Mi-ra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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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중반 관료이자 문인인 石梧 尹致英(1803∼1858)을 19세기 북한산 유람의 주요 양상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로 파악하고, 『石梧集』(국립중앙도서관)에 수록된 그의 산수유기 19편 가운데 북한산 유기 9편을 취합하여 분석하고 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환로에서 발생한 정치적 부침으로 인해 유배기를 중심으로 사환기의 유람과 해배기의 유람으로 양분되며, 동행자의 유무에 따라 두 시기의 주요 활동과 정서적 분위기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사환기의 유람이 형제와 조카를 비롯해 벗이나 손님들과 함께 즐겁고 화락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이에 대한 묘사에 치중했다면, 해배기 이후의 유람은 유배의 과정에서 얻은 숙병으로 인해 주로 홀로 유람하였으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주관적인 입장에서 느낌이나 감회 등을 술회하는 데 집중하였다. 구성 방식과 표현상의 특징에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구성 방식과 표현방식의 주요 양상인 구성의 단편화와 간략화 등에서 그 맥을 같이 하며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 인용과 열거를 통한 비유적 표현 등도 19세기 유기 문학에서 현격히 증가한 비유적인 표현 등과 함께 궤를 같이하면서 유기의 객관성 및 사실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寫實美를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인근에 한정된 勝景과 名所의 탐방, 그리고 暢神을 통한 治癒의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석오의 북한산 유기 전편이 모두 거주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승경이나 주변의 명소를 일회적으로 탐방하기 위해 진행된 단일화된 유람이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같은 시기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을 보여 준 박윤묵이나 한장석 등과 같이 한두 차례의 유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지속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는 석오가전 생애에 걸쳐 도성과 성북의 외곽에 거처하며 일상적으로 근거리에 한정된 승경과 명소를 빈번하게 유람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석오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주요 양상의 하나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람이 일상 속의 근거리 유람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바지하는 바가 매우 크고, 또 구체적인 실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한 사람이 기록한 북한산 유기로는 가장 많은 편수인 6편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산 유기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 또한 높다고 판단된다.


This study identified Seokoh Yun Chi-yeong (石梧 尹致英, 1803-1858), a bureaucrat and literary man in the mid-19th century as the central figure of short-distance and unified travel, the main aspect of Bukhansan mountain travel in the 19th century, and attempted to collect, analyze, and identify the nine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among his 19 hills and rivers travelogues included in “Seokohjip (石梧集)” (housed by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took place throughout his life, due to political ups and downs in his government service career, and focusing on the exile period, it is divided into travel in the government service period and travel in the post-exile period, and depending on the presence or absence of a companion, there is a marked difference in the main activities and emotional atmosphere of the two periods. While travel of the government service period focused on describing it while creating a pleasant and luxurious atmosphere with friends and guests, including brothers and nephews, travel after the post-exile period was mainly solo travel due to a chronicle disease obtained in the course of exile. From an objective point of view, it was focused on a detailed record of the trace of events (事跡), and from a subjective point of view, expressing feelings and emotions. In terms of narrative aspect and content,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is in line with the fragmentation and simplification of the composition, which are the main aspects of the construction method and expression method of the 19th century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and contributes greatly, and figurative expressions through citations and enumerations also coincided with the metaphorical expressions that increased significantly in 19th century travelogue literature. While securing objectivity and realism of travelogue, realistic beauty (寫實美) was created. In terms of content,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have their high material value as they specifically record the main temples of Bukhansan mountain that appeared newly in the 19th century, and the anecdotes related to the birth of the royal court and Seokoh's own extraordinary friendship (方外之交).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has meaning as enjoyment of magnificent scenes, visiting famous sights, healing through mindfulness (治癒), and short-distance travel in everyday life. As Seokoh lived on the outskirts of the capital and north fortress throughout his life, it is thought that it was possible because he frequently traveled to magnificent scenes and famous sights that were limited to short distances on a daily basis. From this fact, it is confirmed that all of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were short-distance and unified travel, and at that time, it was not just one or two trips along with Park Yun-muk or Han Jang-seok, etc., but all his Bukhansan mountain travels are characteristic in that they were all short-distance and unified travels. Through these facts, it is confirmed that Seokoh is the central figure of short-distance unified travel, one of the main aspects of the 19th century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As a result, Seokoh's Bukhansan mountain travel contributes greatly to establishing the 19th century Bukhansan mountain travel as a short-distance travel in everyday life, and it is also meaningful in that it is a concrete example. In addition, it is said that the significance of the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 in the literature history is high by securing six books, which is the largest number of Bukhansan mountain travelogues recorded by one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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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重訂南漢志』 소재 인물 관련 조목 '節義', '孝子', '烈女' 고찰

저자 : 박소영 ( Park S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8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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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46년 홍경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편찬 배경과 항목을 제시하고, 그중 <절의>, <효자>, <열녀> 항목에 수록된 인물 사례와 행적을 연구한 논의다. 『중정남한지』는 오늘날 경기도 광주(廣州)지역의 사찬지리지로, 13권에 달하는 현전하는 가장 방대한 분량의 광주지(廣州志)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간 지리지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과 지리학, 넓게는 역사인류학 분야에 중점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전통지리지 양식, 즉 관찬지리지에 한정 지어 본다면 이는 타당한 결과겠으나, 조선 후기 사찬지리지가 확대되고 지리지 내 항목과 내용이 다양해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리지라는 양식은 보다 넓은 학문 분야에서 재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 한 실례로서 『중정남한지』를 주목할 수 있다. 남한지(南漢志)라 이름한 데서 알 수 있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 현장을 바탕으로 서술되었기에 그 수록 양상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중 특히 절의, 효자, 열녀 등 인물(人物) 항목에 주목한 까닭은, 여타 지리지에 비해 인물과 사례가 많고 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몇몇 인물들이 광주 지역과 관련한 전란(戰亂)의 아픔과 기억을 간직한 인물들이 선정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절의(節義)는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자연적 지형 공간이라는 데서 나아가 의미를 지닌 심상적 공간으로서 전환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병자호란(1636)과 관련한 김상헌, 정온, 삼학사(三學士) 등의 행적을 수록하여 광주에서 생장(生長)한 인물은 아니지만 충절을 지킨 인물임을 밝혔다.
효자(孝子)와 열녀(烈女)의 경우, 각각 20명, 18명으로 많은 숫자의 인물과 행적을 수록하였다. 그 인물 유형 또한 전형적인 사례들이 많지만, 광주 지역의 효자와 열녀 인물군과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내용과 제재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고 보고, 본 연구를 진행하였다.


This paper presents the background and items of the compilation of ≪jungjeong-namhanji≫, compiled by Hong Gyeong-mo(洪敬謨) in 1846, and studies the examples and deeds of characters in the items of removal of honor(節義)', 'Filial Son(孝子)', 'Chaste Women(烈女)'. ≪jungjeongnamhanji≫ is today a private geography in Gwang-ju, Gyeonggi-do, and it is the largest amount of Gwangju, which has 13books, and has high value as a historical material. Until now, research on geography has been conducted focusing on the fields of history and geography, and broadly, historical anthropology. This would be a valid result to limit the traditional geography tyle, that is, Geography Books but considering the expansion of private geogra-ph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diversification of items and contents in geography, the form of geography should be discussed again in a wider academic field As an example of this, ≪jungjeongnamhanji≫ can be noted. As can be seen from the name 'Namhanji', it is described based on the historical events of the Imjin War(壬辰倭亂) and the Byeongja Horan(丙子胡亂), so the aspect is very characteristic. Among them, the reason why they paid particular attention to the person items such as temples, filial piety, and filial piety is that the number of people is significantly higher than the number of people in other geography, and the cases are also detailed and specific. It is also noteworthy that among the characters, those who kept the pain and memory of the war related to the Gwang-ju area were selected. In this regard, this study was conducted because it was necessary to reconsider the contents and sanctions of ≪jungjeongnamh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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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전문학에 형상화된 역병(疫病)의 인식과 특질

저자 : 정영문 ( Joung Young-moon ) , 하경숙 ( Ha Kyoung-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7-11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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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류는 질병과 싸웠고, 그 시간을 지나 현재로 왔다. 역병은 강한 전파 속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여러 불안과 공포의 요소로 작용한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역병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 역병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함, 죽음에 대한 목격과 공포 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상세히 형상화되어 있었고, 시대적 상황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단순한 기억의 산물이 아니라 역병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경험하고, 생계(生計)를 잃고 방황하는 삶의 모습, 차별과 배제의 현상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역병이 확산하면서 사회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전염이 된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보여준다.
고대 국가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보여주는 '처용설화'에서는 '감염', '간병과 기도', '치유'의 순간만 기록으로 남았다. 조선에서는 '이성(理性)'과 '기록(記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순간들을 기록하였다. 과거에 맹위(猛威)를 떨치다 사라진 전염병은 시대를 달리하여 변이되어 돌아온다. 현재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코로나19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염병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특질, 치유에 대한 염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역병을 극복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병'은 그 어떤 이야기에 비해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의 서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단순히 고난을 참아내며 고통과 괴로움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극복 방안을 생각하고, 참혹함 속에서도 선의는 존재한다. 사람들은 절망과 참혹함을 말하기보다 희망(希望)과 선의(善意)를 말하고, 이러한 인식은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Even before history began, mankind fought against disease, and past that time came to the present. Plague has a strong rate of transmission and acts as a factor of anxiety and fear in people. The pain and fear of the plague, the finite nature of humans standing in front of the plague, and the sighting and fear of death were embodied in detail regardless of the times, and are inextricably related to the situation of the times. The phenomenon of life,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which are not just a product of memory, but experiences the unfortunate deaths of people around them through plague, loses their livelihoods, and wanders, can be applied not only to memories of the past but also to the present reality. As the plague spreads, even members of society become infected. Like reality, it shows various efforts to heal them in the past.
In the "Cheoyong Story," which shows infectious diseases that occurred in ancient countries, only the moments of "infection," "care and prayer," and "healing" remained as records. In Joseon, these moments were recorded because reason and record were considered important. Infectious diseases that have disappeared after showing dignity in the past come back with variations from different times.
Currently, COVID-19, which is spread around the world, has a different form from the infectious disease we know, but the perception and desire of people to cope with it have not changed. However, in the context of overcoming it, the 'disease' that people remember represents a voice of desperate hope for human life compared to any other story
Humans simply endure hardships and do not remember only pain and suffering. There is always hope in despair, and good faith in misery. People say hope and good faith rather than despair and brutality, and this situation continues from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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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임진전쟁기 조선 사신의 대명(對明) 외교활동 ― 정유재란 중 대명 사행록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지현 ( Kim Chi-hyo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5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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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은 조선, 일본, 명의 운명을 좌우한 16세기 말 발발했던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이러한 임진전쟁 중 정유재란 당시 북경 사신이 남긴 사행록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신들이 명 조정에서 행했던 외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임진전쟁 당시 북경 사행을 다녀온 사신 중에서 류몽정, 정곤수, 정철, 최립, 민인백, 류사원, 권협, 허균, 이수광, 이상의, 이항복, 이정구, 황여일 등이 사행록을 남겼으며, 사행록은 대략 20여 편이 전한다. 이 사행록 중 정유재란을 중심으로 북경에서 사신들의 외교활동을 사행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예부의 관원이 아닌 다른 관원들을 직접 대면하고 청원 등을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시이면서 명조정 내에서의 주전파와 화의파의 대결 구도 속에서 조선에게 유리하게 정국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교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으로 복귀 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정사의 이름으로 정문을 만들어 예부 관원뿐만 아니라 명 조정의 조현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가던 과도관 등을 길에서 만나 직접 당시의 정황이 담긴 정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 북경으로 갔던 사행은 임진전쟁 이전의 외교활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명 조정의 동향을 주시하고 명 조정의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조선의 상황을 적확하게 알리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The Imjin War was an international war in East Asia that broke out at the end of the 16th century that determined the fate of Joseon, Japan, and Ming. In relation to diplomatic activities, the meandering record has the characteristics of public records and private records. Focusing on the four books, we looked at the diplomatic activities that Joseon envoys carried out during the Imjin War, especially during the Jeongyu Rebellion, went to the Ming Dynasty. Among the envoys who went to Beijing during the Imjin War, Ryu Mong-jeong, Jeong Gon-soo, Jeong Cheol, Choe Rip, Min In-baek, Yoo Sa-won, Kwon Hyeop, Heo Gyun, Lee Soo-kwang, Lee Sang-bok, Lee Jung-gu, and Hwang Yeo-il left about 20 of them. If you look at the diplomatic activities of envoys in Beijing, focusing on the Jeongyu Jae-ran, you can see that during his stay in Beijing, he made informal visits, face-to-face with Chinese officials, and petitioned them. This is because it could not be solved through existing diplomatic activities in order to lead the political situation in favor of Joseon amid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main faction and the Chinese faction within the Ming Dynasty. Therefore, at the risk of being punished after returning to Joseon, they made the main gate in the name of the magistrate and used not only the Yebu official but also the time of the mediation of the Ming Dynasty to meet and post the main gate. As such, it can be seen that the envoy who went to Beijing at the time was more active than the diplomatic activities before the Imjin War to watch the Ming Dynasty's movements, collect information on the Ming Dynasty, and to accurately inform the situation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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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파병군이 언급한 임진전쟁의 구도와 공적(功績) ― 가유약(賈維鑰)의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을 중심으로 ―

저자 : 김현미 ( Kim Hyunm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1-18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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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병을 했던 명(明)측 인사가 남긴 기록을 통하여 국제 관계가 긴밀히 얽혀있는 '임진전쟁'의 실제 양상과 각국 입장에 따른 임진전쟁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하여 파병 명군에 의해서 지어진, 그리고 임진전쟁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조건을 만족하는 기록인 가유약이 집필한 「釜山平倭碑銘」(1599.10 작성)을 살펴보았다.
평왜비명은 현재 『선조실록』 32년 (1599) 10월 1일 조에 '가유약이 초고를 지었다'며 접반사(接伴使) 한술(韓述)이 보고한 형태로 전문이 소개되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도 또한 완성된 비(碑)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釜山平倭碑銘」 두 가지 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이본의 차이를 비교하고 글자의 출입, 배치의 차이 등을 살펴봄으로써 파병된 명군(明軍)인사가 이 임진전쟁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 측의 실제 '비명 제작'이라는 편집을 거쳐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양자를 비교한 결과, 구성상의 차이와 내용(특히 다른 글자들이 쓰이거나 포함된 면에서)의 차이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성상 일종의 액자 구조로 되어있는 실록본(實錄本)은 이 글이 지어진 외부 맥락을 소개함으로써, 비명(碑銘)의 실제 저자인 '가유약'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곧 이 비문(碑文)이 명군(明軍)의 전공(戰功)을 주장하는 선언문이 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유약' 이라는 개인이 쓴 글이라는 부분도 적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쓴 글 때문에 국가 사이에 어떠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글을 쓰게 된 책임을 맡은 개인에게 돌릴 수도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쓰기 위한 가능성도 생긴다.
글자 출입에 의한 차이에서 유의할만한 것은 파병 명단을 밝히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초고인 실록본에는 '水'자가 빠져있지만, 결과본인 비명본에는 '水'자가 추가되어 있고 이것이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에서 적군을 물리친 부분과 이어져, 파병된 명군이 지상에서는 물론 해상 전투도 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 후, '비문(碑文)'이라는 조건 하에서 부산평왜비명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화하여 보기 위해 타 비석들과 비교하여 보았다. 함께 임진전쟁에 파병된 명군이 주체가 되어 지은 비명인 장양상(張良相)의 남해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와의 비교를 통해 파병 명군들의 임진전쟁 관련 전적비(戰績碑)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임진전쟁에서 싸웠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가 황제의 명을 따라 임진전쟁에 참여하여 조선의 상황을 좋게 만들었는가'로 요약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다음, 조선인에 의하여 지어진 임진전쟁 관련 비문(碑文)과의 비교를 해보았다. 평왜비가 위치하던 부산 지역에 있는 조선인작 임진전쟁 관련 금석문으로 대표적인 것은 송시열의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1670)인데, 이 글과의 비교에서 조선인들이 임진전쟁 관련 비문을 제작하는 내용의 취택 기준과 비문 내용의 수집 과정 특성상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임진전쟁'과 관련한 기억은 그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리고 조선인이 비를 건립하는 경우, 비석에 수록 혹은 누락 될 내용의 기준은 '실재(實在)'성 이다. 실재성의 점검을 위해 비를 세우는 자들은 목격자의 증언이나 가승(家乘)과 같은 검증 기록을 참조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대척점에 있다는 의미에서, 파병 명군인사에 의해 지어진 평왜비명은 임진전쟁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서 총괄 평가의 마음으로 내용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유약이 그려내는 임진전쟁은 명나라 황제의 '상황 판단과 정의 수호를 위한 마음'에 따른 명군(明軍)의 충성된 실천을 표현하되, 실제 사건의 충실한 묘사가 아니라 고사(古事)를 이용한 비유나 전쟁 후의 평온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ctual aspect of the "Imjin War(壬辰戰爭)," which is closely intertwined with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perception of the Imjin War according to each country's position, through analyzed <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 written by Gayuyak(賈維鑰) (1599.10), a record that satisfies the conditions for showing thoughts about the Imjin War.
The full text of PyeongwaebiMyeong has two versions. The first one is introduced in the 32nd year of Seonjo Silok(宣祖實錄) (1599) on October 1st, and second one is introduced in Dongnaebueupji(東萊府邑誌).
By comparing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version and examining the differences in entry and placement of letters, we could find that there were two aspects of the differences in composition (especially in terms of writing or inclusion) on the premise that the dispatched Mingun(明軍) thought about the Imjin War and their role. Silok(實錄) version, which has a kind of frame structure in its composition, introduces the external context in which this article was built, thereby making the existence of Gayuyak(賈維鑰), the actual author of this epitaph more prominent. This shows that this inscription becomes a declaration claiming the major of the Ming army, while also specifying that it is written by an individual named "Gayuyak(賈維鑰)," Therefore, when any problems arise between countries due to his writing, there is also a possibility to use it as a kind of safety device that can be attributed to the individual in charge of writing it.
What is noteworthy about the difference in text access is found in the part of revealing the dispatch list. The letter "water" is missing in the Silok(實錄) version but in the second version, 'water' letter is added to the part where the enemy was defeated in the land and sea battles, revealing that the dispatched Ming army fought not only on the ground but also on the sea.
After that, I compared it with other inscriptions to explore the meaning of Pusan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under the condition of inscription. By comparing Jang Ryangsang(張良相)'s Namhae Dongjeong Rock-carved Monument (東征磨崖碑), written by Ming army dispatched to the Imjin War, they were able to know the common characteristics of the epitaph's points were about who participated in the Imjin War, not about how Ming soldiers battle.
Next, we compared the inscriptions related to the Imjin War built by Koreans. Song Si-yeol's Dongnae Nammunbi(東萊南門碑) (1670) was represented epitaph related to the Imjin War in Busan, where the PyeongwaebiMyeong(釜山平倭碑銘) was located, indicating the difference in the criteria for Koreans' adoption and collection of inscriptions related to the Imjin War. The memories of Koreans related to the "Imjin War" focus on events that occurred at the place. In addition, when Koreans build a monument, the standard for the content that will be included or omitted from the monument is 'reality'. It can be seen that those who erected the monument to check the reality refer to verification records such as witnesses' testimony and a family record. In the sense of being at the opposite point of these factors, it can be seen that PyeongwaebiMyeong(平倭碑銘) which was built by the dispatch army, chose the content with the mind of general evaluation at the time the Imjin War was almost over. In addition, the Imjin War drawn by Gayuyak expresses the loyal practice of Mingun(明軍) according to Minghwang(明皇)'s "mind for judging the situation and protecting justice," but is explained not by faithful description of actual events but by metaphors using idiom originated in an ancient event or peaceful images after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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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宗의 리더십 ―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으로 ―

저자 : 장영희 ( Jang Young H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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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세운 왕조이다. 조선조의 성군의 대표적 모델은 세종이다. 세종은 덕치와 제도를 결합하여 治道를 펴고 制度를 잘 운영하였다. 본고는 세종이 덕치를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운영하여 시대를 지도해 나갔는가를 규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에서도 덕치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의 운영에서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 내용으로 하였다.
『세종실록』의 관련 기록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여 본 논문의 주제에 따라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다. 과전법에서의 시대적 병폐, 세종의 시대적 병폐의 문제 제기와 시대의 목표 제시, 공법에 의거한 정액제에 대한 여론 듣기를 개략적으로 고찰하였다. 이어서 조선조 정치체제와 의정부서사제 회복, 현신과 함께한 의사소통의 리더십으로 공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시행하는 리더십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여민동락을 위해 공법을 완성한 의미를 조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개혁과 혁신의 리더십이다. 아버지 태종의 국정운영 방식인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회복한다.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은 것이요 의정부에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의정부서 사제의 회복은 유학 사상에 충실한 것이며 그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가동하였다. 국가적 사안인 공법에 관하여 의정부와 육조의 논의를 거쳐 의정부에서 합의안을 올렸으며 세종은 이를 따랐다. 공적 시스템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치적 결단을 하였다. 그리고 주목한 바는 공법의 제정과 실행에 사안마다 신료들은 찬성과 반대를 자유로이 개진할 수 있는 열린 의사소통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소통의 리더십은 세종이 지도하는 방향대로 한발 한발 진전하는 개혁이었다. 공법의 제정과 시행은 마치 周나라의 文王과 같은 切磋琢磨의 개혁의 리더십이었다. 기존 체재에서 제후로서 한발 한발 개선해 나간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료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얻는 믿음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법 시행에 있어 부작용으로 임계치에 이른다. 그것은 척박한 토지를 소유한 백성의 비탄의 소리였다. 이에 세종은 신공법의 혁신안을 제안한다. 공법의 대전환의 계기로 세종의 혁신적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유학 사상은 조건과 때가 맞으면 백성을 위하여 혁명이 가능하며, 시대를 이끌 인물의 주도하에 정치와 제도를 바꿀 수 있다. 제도가 오래되면 부패하고 비능률과 부조리로 인하여 현실과 맞지 않을 때는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폐단을 수정, 보완하는 개혁을 하든지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태조의 조선 건국을 守成하는 것을 넘어 세종은 改革과 革新을 이루어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조의 교체 없이도 혁명적 혁신을 이룩하였다. 『周易』 「革」卦에 의하면 혁명이란 민심에 의한 것이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전의 대립적인 것이 소멸되어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다. 공법의 완성인 소위 田分6等과 年分9等의 法이 그것이다. 최종 법안은 어질고 뛰어난 세종이 비탄에 젖은 民心에 귀 기울이고 賢臣과 함께하여 새로운 시대를 창설한 혁신적 리더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The Joseon Dynasty was based on Confucianism. Sejong the Great was the typical good king of Joseon. Sejong the Great combined virtuous politics and good system to manage the nation properly. The aim of this paper is innovative leadership of Sejong the Great. The focus of this thesis is the enactment process of new tax law that he has taken lead. The subject matter of this article is the related documents of the Sejong Annals(The Sejong Sillok). The contents of this essay is as follows. Sejong the Great raised the bad problems of Gwajeonbeob, established tax law and proposed the flat rate scheme of tax law. The reform proceedings of tax law was the listening of public opinion, the restoration of prime ministers council agreement system(Uijeongbu seosaje) and communicative enactment and enforcement of new tax law. The essence of Sejong the Great leadership is love of the people and the ruler's shared happiness with the people.
The Leadership of Sejong the Great is the leadership of reform and innovation. He reformed the autocratic administration of His father, King Taejong. He abolished the king's direct administration system(Yugjo jiggyeje) and restored the prime ministers council agreement system(Uijeongbu seosaje). He divided his power and gave it the prime ministers council. He agreed with consensus of government departments in tax law. His leadership of enactment process of new tax law resembled indefatigable assiduity of King Wen's reform in Zhou Dynasty. Both won the trust and support of subjects through gradual progress of reform. He listened people's voice willingly and amended tax law rightly. The final system of new tax was six classification of land grade and nine classification of annual grade in taxation. He achieved the great transformation of tax system in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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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自撰墓誌銘」에 드러난 茶山의 中庸觀연구 ― 『중용자잠』과 『중용강의보』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조영 ( Kim J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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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茶山 丁若鏞의 『中庸』에 관한 저술 중 『中庸自箴』과 『中庸講義補』를 중심으로 茶山이 「自撰墓誌銘」에서 『中庸』에 대해 언급한 7가지 논점을 통해 다산의 中庸觀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經學은 일반적으로 朱子學的세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선후기 丁若鏞은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 수용의 태도로 자신의 경학관을 제시하였다.
茶山이 「자찬묘지명」에서 『中庸』에 관해 제시한 7가지 논점을 살펴보면, 中의 의미를 주자와 같이 '不偏不倚無過不及'의 의미로 見地하고 있으나 주자의 中과 구별되고, 庸의 의미는 '능히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有常'의 의미로 파악하고 有常은 '恒常' '能久'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이 말하는 中庸은 '연속적인 실천성'을 강조한 특징이 보인다. '不睹不聞'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주체와 대상'에 대해 초점을 두어 主宰者로서의 上帝를 제시하고 '不睹'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며, '不聞'이란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정하여 제시하였다. '隱微'는 暗處細事가 아니고 上天의 일이라고 하였으며, '喜怒哀樂之未發'은 喜怒哀樂의 未發이지 心知思慮의 未發이 아니라고 하여 喜怒哀樂과 心知思慮를 구분함으로써 情의 범위를 재해석하고 있다. '罟擭陷阱'은 잘못을 저질러 有司에게 형벌을 받는 것만이 罟擭陷阱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索隱'은 隱僻한 이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改而止'는 自修의 공부로 파악하여 내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道心人心, 唯一唯精'은 『荀子』에서 『道經』을 인용한 말이기에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순자』가 인용한 本意를 따른다면 '道心人心'과, '唯一唯精'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같이 『중용』에 나타난 다산의 經學觀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으로 제시하였고, 현실적인 경세론의 입장으로 경학에 접근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Dasan(茶山)'s Jungyong perspective through the seven points that Dasan mentioned about Jungyong in Jachanmyojimyeong (self-written epitaph) focusing on Jungyong Jajam and Jungyong Ganguibo among his writings on Jungyong by Dasan Jeongyakyong.
In general, the study of Korean 經學was based on the worldview of 朱子學的, and in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 studies were deepened and Neo-Confucian thinking expanded by Yulgok and Toegye. However, in the late Joseon Dynasty, Dasan Jeongyakyong presented his own 經學觀from a critical standpoint vis-à-vis Neo-Confucianism, escaping from the worldview of Neo-Confucianism, which was the main school at the time. In addition, he suggested seven points in hisJachanmyojimyeong about Jungyong, one of the Confucian Classics.
Among the seven points, he considered the meaning of '中' with respect to the meaning of '不偏不倚無過不及' as Zhu Xi had done, but adopted a distinct interpretation of '中' from Zhu Xi, while he understood 庸as meaning 有常, focusing on 'being able to do it consistently for a long time', where 有常 is understood as meaning '恒常' and '能久'. Therefore, in Dasan's view, 中庸is characterized by an emphasis on 'continuous practicality'. Regarding the phrase ' 不睹不聞', it shows a focus on the 'subject and object' that we cannot see or hear, suggesting the 上帝as 主宰者, and confirming that '不睹' is what is not seen and '不聞' is what is not heard. Regarding '隱微', it was said to be a matter of 上天, not of 暗處細事. Moreover, in '喜怒哀樂之未發', by distinguishing 喜怒哀樂and 心知思慮and stating that it is not the 未發of 心知思慮that is meant but 未發of 喜怒哀樂, the scope of 情was reinterpreted. Regarding '罟擭陷阱', he stated that it was not 罟擭陷阱only to have committed a wrong and to be punished by 有司and that the meaning of '索隱' was not to find 隱僻reason, but to be hidden for no reason. '改而止' means that if one exerts self-control and corrects one's mistakes, it does not mean to stop controlling oneself, but rather to correct one's own actions through self-study. The two halves of '道心人心, 唯一唯精' are not connected to each other based on the 『道經』 in 『荀子』, and according to the 本意quoted by Xunzi, people should follow the order '道心人心' rather than '人心道心' and of '唯一唯精' rather than '惟精惟一'. In this way, if we examine Dasan's view of 經學觀in Jungyong, we see that the philosophical concepts of Neo-Confucianism are presented in a concrete way for easy recognition, and 經學is approached from the perspective of governing, with a focus on examples revealed in re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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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역사지리적 관점에서 본 지역어의 언어문화 연구 ― 무주군 설천면의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을 사례로 ―

저자 : 윤지훈 ( Yun Ji 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3-28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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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오늘날 동일한 행정구역에 속해 있는 두 마을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차이가 나는 배경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다시말해 본 연구는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접한 두 지역을 사례로 현대 언어문화의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이 있는 설천면과 인접과 무풍면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백제와 신라의 변방 가장자리의 접경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신촌마을과 이남마을 사이에 소재하고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대상물이기도 하다.
둘째, 조선 태종 14년(1414년), 신라계 무풍현과 백제계 주계현이 통합되어 무주현이 된 이래로 옛 신라의 일부 영토는 현재까지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무풍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역적,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이남마을은 주민들은 가까운 설천장보다는 무풍장을 이용하고, 고개 넘어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주로 무풍쪽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고대국가 백제의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촌마을 주민들은 나제통문 넘어를 신라땅, 혹은 경상도라고 인식하여 이남마을이나 무풍지역 사람들과는 통혼은 물론 교류도 거의 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고대국가에 정체성를 두고 오랜 세월 교류도 거의 없었기에 각자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보전되어 온 것이다.
넷째, 이남마을과 무풍면 사람들은 비록 오랫동안 전북권에 속해 있음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경상도식 언어문화를 간직하고 있었고, 신촌마을 사람들은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전라도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요컨대, 하천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와 분수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 연구를 통해 현대 언어문화는 신라나 백제와 같은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부분 검증될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This study was attempted to clarify the background of the different customs and language cultures of two villages that belong to the same administrative district today.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historical origin of modern language culture, taking as an example two adjacent regions rooted in ancient countries. First, it is understood that Seolcheon-myeon where Sinchon village and Inam village are located, and the adjacent Mupung-myeon were historically and geographically the border area between ancient countries Baekje and Silla. In particular, the 'Rajetongmun Gate' located between Sinchon and Inam villages is also a symbolical object that supports such a historical background. Second, in the 14th year of Taejong of Joseon(1414), Mupung-hyeon of Silla and Jugye-hyeon of Baekje were integrated into Muju-hyeon; therefore, some territories of the former Silla have belonged to Jeolla-do until now. Nevertheless, even today, more than 600 years later, people from Mupung-myeon maintain their regional and cultural identity of being rooted in Silla. Third, while Inam village residents have a cultural identity in the Gyeongsang-do as interacting mainly with people from Mupung-myeon, the residents of Sinchon village, on the other hand, have the cultural identity of the ancient nation Baekje, Since there have been little interactions for a long time over their identity in different ancient countries, their customs and language culture have been preserved. Fourth, the people of Inam Village and Mupung-myeon have their own Gyeongsang-do-style language culture even though they have belonged to Jeonbuk for a long time, and the people of Sinchon Village use Jeolla-do dialect mixed with Chungcheong-do dialect. In short, just as the origins and watersheds of the river can be traced back upstream, this study confirms that the hypothesis that modern language culture is rooted in ancient countries such as Silla and Baekje can be verified to a large ex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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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과 서술적 특징

저자 : 장안영 ( Jang An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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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687년 제주 조선인의 안남 표류 기록 4편을 살펴본 것이다. 이 표류 기록은 1687년 9월 3일 출항한 이후부터 1688년 12월 17일 송환된 일까지 모두 1년 3개월에 걸친 내용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동일 사건에 대한 표류 기록이 4편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영록(知瀛錄)』,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주영편(晝永編)』에 기록된 이야기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건은 크게 「김태황 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과 「고상영 표류기(高尙英漂流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영록』, 『해외견문록』은 '제주진무(濟州鎭撫) 김태황'의 이야기로, 『탐라문견록』, 『주영편』은 '제주 주민 고상영'의 구술로 구성되었다.
4편의 기록은 모두 표류민들이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기록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인물의 성격이나 저자에 따라 서술의 차이점이 있었다. 각 자료를 살펴보면 『지영록』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송환 과정과 사후 조치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있었고, 『해외문견록』은 해외무역에 대한 관심 가운데 선박의 기록이 두드러졌고, 『탐라문견록』은 안남의 삶과 민심을 엿볼 수 있었고, 『주영편』에서는 안남의 지리(地理) 내용과 저자의 평가와 함께 기록되었다는 부분에서 각각의 특징이 드러났다.
이처럼 같은 사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서술적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특징이 드러났던 점은 기록하는 사람의 저술의식이 담겨있어서였고, 또 표류민의 구술로 된 체험 특성상 말하는 이에 따라 시선이 달리 표현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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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세기 石梧 尹致英의 북한산 유기 연구

저자 : 김미란 ( Kim Mi-ra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6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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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중반 관료이자 문인인 石梧 尹致英(1803∼1858)을 19세기 북한산 유람의 주요 양상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로 파악하고, 『石梧集』(국립중앙도서관)에 수록된 그의 산수유기 19편 가운데 북한산 유기 9편을 취합하여 분석하고 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환로에서 발생한 정치적 부침으로 인해 유배기를 중심으로 사환기의 유람과 해배기의 유람으로 양분되며, 동행자의 유무에 따라 두 시기의 주요 활동과 정서적 분위기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사환기의 유람이 형제와 조카를 비롯해 벗이나 손님들과 함께 즐겁고 화락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이에 대한 묘사에 치중했다면, 해배기 이후의 유람은 유배의 과정에서 얻은 숙병으로 인해 주로 홀로 유람하였으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적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주관적인 입장에서 느낌이나 감회 등을 술회하는 데 집중하였다. 구성 방식과 표현상의 특징에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구성 방식과 표현방식의 주요 양상인 구성의 단편화와 간략화 등에서 그 맥을 같이 하며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 인용과 열거를 통한 비유적 표현 등도 19세기 유기 문학에서 현격히 증가한 비유적인 표현 등과 함께 궤를 같이하면서 유기의 객관성 및 사실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寫實美를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인근에 한정된 勝景과 名所의 탐방, 그리고 暢神을 통한 治癒의 과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석오의 북한산 유기 전편이 모두 거주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승경이나 주변의 명소를 일회적으로 탐방하기 위해 진행된 단일화된 유람이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같은 시기 북한산 외곽에 한정된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을 보여 준 박윤묵이나 한장석 등과 같이 한두 차례의 유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지속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는 석오가전 생애에 걸쳐 도성과 성북의 외곽에 거처하며 일상적으로 근거리에 한정된 승경과 명소를 빈번하게 유람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석오가 19세기 북한산 유기의 주요 양상의 하나인 근거리 단일화된 유람의 중심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석오의 북한산 유람은 19세기 북한산 유람이 일상 속의 근거리 유람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바지하는 바가 매우 크고, 또 구체적인 실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한 사람이 기록한 북한산 유기로는 가장 많은 편수인 6편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산 유기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 또한 높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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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重訂南漢志』 소재 인물 관련 조목 '節義', '孝子', '烈女' 고찰

저자 : 박소영 ( Park S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8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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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46년 홍경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편찬 배경과 항목을 제시하고, 그중 <절의>, <효자>, <열녀> 항목에 수록된 인물 사례와 행적을 연구한 논의다. 『중정남한지』는 오늘날 경기도 광주(廣州)지역의 사찬지리지로, 13권에 달하는 현전하는 가장 방대한 분량의 광주지(廣州志)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그간 지리지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과 지리학, 넓게는 역사인류학 분야에 중점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다. 전통지리지 양식, 즉 관찬지리지에 한정 지어 본다면 이는 타당한 결과겠으나, 조선 후기 사찬지리지가 확대되고 지리지 내 항목과 내용이 다양해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리지라는 양식은 보다 넓은 학문 분야에서 재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 한 실례로서 『중정남한지』를 주목할 수 있다. 남한지(南漢志)라 이름한 데서 알 수 있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 현장을 바탕으로 서술되었기에 그 수록 양상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중 특히 절의, 효자, 열녀 등 인물(人物) 항목에 주목한 까닭은, 여타 지리지에 비해 인물과 사례가 많고 상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몇몇 인물들이 광주 지역과 관련한 전란(戰亂)의 아픔과 기억을 간직한 인물들이 선정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절의(節義)는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자연적 지형 공간이라는 데서 나아가 의미를 지닌 심상적 공간으로서 전환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병자호란(1636)과 관련한 김상헌, 정온, 삼학사(三學士) 등의 행적을 수록하여 광주에서 생장(生長)한 인물은 아니지만 충절을 지킨 인물임을 밝혔다.
효자(孝子)와 열녀(烈女)의 경우, 각각 20명, 18명으로 많은 숫자의 인물과 행적을 수록하였다. 그 인물 유형 또한 전형적인 사례들이 많지만, 광주 지역의 효자와 열녀 인물군과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내용과 제재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하다고 보고, 본 연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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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전문학에 형상화된 역병(疫病)의 인식과 특질

저자 : 정영문 ( Joung Young-moon ) , 하경숙 ( Ha Kyoung-sook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7-11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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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류는 질병과 싸웠고, 그 시간을 지나 현재로 왔다. 역병은 강한 전파 속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여러 불안과 공포의 요소로 작용한다. 고전문학에 나타난 역병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 역병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함, 죽음에 대한 목격과 공포 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상세히 형상화되어 있었고, 시대적 상황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단순한 기억의 산물이 아니라 역병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경험하고, 생계(生計)를 잃고 방황하는 삶의 모습, 차별과 배제의 현상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역병이 확산하면서 사회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전염이 된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보여준다.
고대 국가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보여주는 '처용설화'에서는 '감염', '간병과 기도', '치유'의 순간만 기록으로 남았다. 조선에서는 '이성(理性)'과 '기록(記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순간들을 기록하였다. 과거에 맹위(猛威)를 떨치다 사라진 전염병은 시대를 달리하여 변이되어 돌아온다. 현재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코로나19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염병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특질, 치유에 대한 염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역병을 극복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병'은 그 어떤 이야기에 비해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의 서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단순히 고난을 참아내며 고통과 괴로움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극복 방안을 생각하고, 참혹함 속에서도 선의는 존재한다. 사람들은 절망과 참혹함을 말하기보다 희망(希望)과 선의(善意)를 말하고, 이러한 인식은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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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임진전쟁기 조선 사신의 대명(對明) 외교활동 ― 정유재란 중 대명 사행록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지현 ( Kim Chi-hyou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3-15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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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은 조선, 일본, 명의 운명을 좌우한 16세기 말 발발했던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이러한 임진전쟁 중 정유재란 당시 북경 사신이 남긴 사행록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 사신들이 명 조정에서 행했던 외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임진전쟁 당시 북경 사행을 다녀온 사신 중에서 류몽정, 정곤수, 정철, 최립, 민인백, 류사원, 권협, 허균, 이수광, 이상의, 이항복, 이정구, 황여일 등이 사행록을 남겼으며, 사행록은 대략 20여 편이 전한다. 이 사행록 중 정유재란을 중심으로 북경에서 사신들의 외교활동을 사행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예부의 관원이 아닌 다른 관원들을 직접 대면하고 청원 등을 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시이면서 명조정 내에서의 주전파와 화의파의 대결 구도 속에서 조선에게 유리하게 정국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교활동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으로 복귀 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정사의 이름으로 정문을 만들어 예부 관원뿐만 아니라 명 조정의 조현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가던 과도관 등을 길에서 만나 직접 당시의 정황이 담긴 정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 북경으로 갔던 사행은 임진전쟁 이전의 외교활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명 조정의 동향을 주시하고 명 조정의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조선의 상황을 적확하게 알리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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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파병군이 언급한 임진전쟁의 구도와 공적(功績) ― 가유약(賈維鑰)의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을 중심으로 ―

저자 : 김현미 ( Kim Hyunm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1-18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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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파병을 했던 명(明)측 인사가 남긴 기록을 통하여 국제 관계가 긴밀히 얽혀있는 '임진전쟁'의 실제 양상과 각국 입장에 따른 임진전쟁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하여 파병 명군에 의해서 지어진, 그리고 임진전쟁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조건을 만족하는 기록인 가유약이 집필한 「釜山平倭碑銘」(1599.10 작성)을 살펴보았다.
평왜비명은 현재 『선조실록』 32년 (1599) 10월 1일 조에 '가유약이 초고를 지었다'며 접반사(接伴使) 한술(韓述)이 보고한 형태로 전문이 소개되었으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도 또한 완성된 비(碑)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釜山平倭碑銘」 두 가지 판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 이본의 차이를 비교하고 글자의 출입, 배치의 차이 등을 살펴봄으로써 파병된 명군(明軍)인사가 이 임진전쟁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 측의 실제 '비명 제작'이라는 편집을 거쳐 어떻게 수정되었는지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양자를 비교한 결과, 구성상의 차이와 내용(특히 다른 글자들이 쓰이거나 포함된 면에서)의 차이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성상 일종의 액자 구조로 되어있는 실록본(實錄本)은 이 글이 지어진 외부 맥락을 소개함으로써, 비명(碑銘)의 실제 저자인 '가유약'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곧 이 비문(碑文)이 명군(明軍)의 전공(戰功)을 주장하는 선언문이 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유약' 이라는 개인이 쓴 글이라는 부분도 적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쓴 글 때문에 국가 사이에 어떠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글을 쓰게 된 책임을 맡은 개인에게 돌릴 수도 있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쓰기 위한 가능성도 생긴다.
글자 출입에 의한 차이에서 유의할만한 것은 파병 명단을 밝히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초고인 실록본에는 '水'자가 빠져있지만, 결과본인 비명본에는 '水'자가 추가되어 있고 이것이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에서 적군을 물리친 부분과 이어져, 파병된 명군이 지상에서는 물론 해상 전투도 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 후, '비문(碑文)'이라는 조건 하에서 부산평왜비명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화하여 보기 위해 타 비석들과 비교하여 보았다. 함께 임진전쟁에 파병된 명군이 주체가 되어 지은 비명인 장양상(張良相)의 남해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와의 비교를 통해 파병 명군들의 임진전쟁 관련 전적비(戰績碑)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임진전쟁에서 싸웠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누가 황제의 명을 따라 임진전쟁에 참여하여 조선의 상황을 좋게 만들었는가'로 요약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다음, 조선인에 의하여 지어진 임진전쟁 관련 비문(碑文)과의 비교를 해보았다. 평왜비가 위치하던 부산 지역에 있는 조선인작 임진전쟁 관련 금석문으로 대표적인 것은 송시열의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1670)인데, 이 글과의 비교에서 조선인들이 임진전쟁 관련 비문을 제작하는 내용의 취택 기준과 비문 내용의 수집 과정 특성상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임진전쟁'과 관련한 기억은 그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한다. 그리고 조선인이 비를 건립하는 경우, 비석에 수록 혹은 누락 될 내용의 기준은 '실재(實在)'성 이다. 실재성의 점검을 위해 비를 세우는 자들은 목격자의 증언이나 가승(家乘)과 같은 검증 기록을 참조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대척점에 있다는 의미에서, 파병 명군인사에 의해 지어진 평왜비명은 임진전쟁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서 총괄 평가의 마음으로 내용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유약이 그려내는 임진전쟁은 명나라 황제의 '상황 판단과 정의 수호를 위한 마음'에 따른 명군(明軍)의 충성된 실천을 표현하되, 실제 사건의 충실한 묘사가 아니라 고사(古事)를 이용한 비유나 전쟁 후의 평온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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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宗의 리더십 ―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으로 ―

저자 : 장영희 ( Jang Young H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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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세운 왕조이다. 조선조의 성군의 대표적 모델은 세종이다. 세종은 덕치와 제도를 결합하여 治道를 펴고 制度를 잘 운영하였다. 본고는 세종이 덕치를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운영하여 시대를 지도해 나갔는가를 규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에서도 덕치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의 운영에서 貢法의 制定과정을 중심 내용으로 하였다.
『세종실록』의 관련 기록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여 본 논문의 주제에 따라 그 과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다. 과전법에서의 시대적 병폐, 세종의 시대적 병폐의 문제 제기와 시대의 목표 제시, 공법에 의거한 정액제에 대한 여론 듣기를 개략적으로 고찰하였다. 이어서 조선조 정치체제와 의정부서사제 회복, 현신과 함께한 의사소통의 리더십으로 공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시행하는 리더십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여민동락을 위해 공법을 완성한 의미를 조명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개혁과 혁신의 리더십이다. 아버지 태종의 국정운영 방식인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회복한다. 스스로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은 것이요 의정부에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의정부서 사제의 회복은 유학 사상에 충실한 것이며 그 기반으로 정치체제를 가동하였다. 국가적 사안인 공법에 관하여 의정부와 육조의 논의를 거쳐 의정부에서 합의안을 올렸으며 세종은 이를 따랐다. 공적 시스템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치적 결단을 하였다. 그리고 주목한 바는 공법의 제정과 실행에 사안마다 신료들은 찬성과 반대를 자유로이 개진할 수 있는 열린 의사소통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소통의 리더십은 세종이 지도하는 방향대로 한발 한발 진전하는 개혁이었다. 공법의 제정과 시행은 마치 周나라의 文王과 같은 切磋琢磨의 개혁의 리더십이었다. 기존 체재에서 제후로서 한발 한발 개선해 나간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료들에게 신뢰와 지지를 얻는 믿음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법 시행에 있어 부작용으로 임계치에 이른다. 그것은 척박한 토지를 소유한 백성의 비탄의 소리였다. 이에 세종은 신공법의 혁신안을 제안한다. 공법의 대전환의 계기로 세종의 혁신적 리더십을 볼 수 있었다. 유학 사상은 조건과 때가 맞으면 백성을 위하여 혁명이 가능하며, 시대를 이끌 인물의 주도하에 정치와 제도를 바꿀 수 있다. 제도가 오래되면 부패하고 비능률과 부조리로 인하여 현실과 맞지 않을 때는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폐단을 수정, 보완하는 개혁을 하든지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태조의 조선 건국을 守成하는 것을 넘어 세종은 改革과 革新을 이루어낸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조의 교체 없이도 혁명적 혁신을 이룩하였다. 『周易』 「革」卦에 의하면 혁명이란 민심에 의한 것이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전의 대립적인 것이 소멸되어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다. 공법의 완성인 소위 田分6等과 年分9等의 法이 그것이다. 최종 법안은 어질고 뛰어난 세종이 비탄에 젖은 民心에 귀 기울이고 賢臣과 함께하여 새로운 시대를 창설한 혁신적 리더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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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自撰墓誌銘」에 드러난 茶山의 中庸觀연구 ― 『중용자잠』과 『중용강의보』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조영 ( Kim Jo-yo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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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茶山 丁若鏞의 『中庸』에 관한 저술 중 『中庸自箴』과 『中庸講義補』를 중심으로 茶山이 「自撰墓誌銘」에서 『中庸』에 대해 언급한 7가지 논점을 통해 다산의 中庸觀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經學은 일반적으로 朱子學的세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선후기 丁若鏞은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 수용의 태도로 자신의 경학관을 제시하였다.
茶山이 「자찬묘지명」에서 『中庸』에 관해 제시한 7가지 논점을 살펴보면, 中의 의미를 주자와 같이 '不偏不倚無過不及'의 의미로 見地하고 있으나 주자의 中과 구별되고, 庸의 의미는 '능히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有常'의 의미로 파악하고 有常은 '恒常' '能久'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이 말하는 中庸은 '연속적인 실천성'을 강조한 특징이 보인다. '不睹不聞'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주체와 대상'에 대해 초점을 두어 主宰者로서의 上帝를 제시하고 '不睹'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며, '不聞'이란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정하여 제시하였다. '隱微'는 暗處細事가 아니고 上天의 일이라고 하였으며, '喜怒哀樂之未發'은 喜怒哀樂의 未發이지 心知思慮의 未發이 아니라고 하여 喜怒哀樂과 心知思慮를 구분함으로써 情의 범위를 재해석하고 있다. '罟擭陷阱'은 잘못을 저질러 有司에게 형벌을 받는 것만이 罟擭陷阱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索隱'은 隱僻한 이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改而止'는 自修의 공부로 파악하여 내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道心人心, 唯一唯精'은 『荀子』에서 『道經』을 인용한 말이기에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순자』가 인용한 本意를 따른다면 '道心人心'과, '唯一唯精'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같이 『중용』에 나타난 다산의 經學觀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으로 제시하였고, 현실적인 경세론의 입장으로 경학에 접근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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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역사지리적 관점에서 본 지역어의 언어문화 연구 ― 무주군 설천면의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을 사례로 ―

저자 : 윤지훈 ( Yun Ji Hoo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7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3-28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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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오늘날 동일한 행정구역에 속해 있는 두 마을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차이가 나는 배경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다시말해 본 연구는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접한 두 지역을 사례로 현대 언어문화의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촌마을과 이남마을이 있는 설천면과 인접과 무풍면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백제와 신라의 변방 가장자리의 접경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신촌마을과 이남마을 사이에 소재하고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대상물이기도 하다.
둘째, 조선 태종 14년(1414년), 신라계 무풍현과 백제계 주계현이 통합되어 무주현이 된 이래로 옛 신라의 일부 영토는 현재까지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는데,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무풍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역적,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이남마을은 주민들은 가까운 설천장보다는 무풍장을 이용하고, 고개 넘어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주로 무풍쪽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반면, 고대국가 백제의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신촌마을 주민들은 나제통문 넘어를 신라땅, 혹은 경상도라고 인식하여 이남마을이나 무풍지역 사람들과는 통혼은 물론 교류도 거의 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고대국가에 정체성를 두고 오랜 세월 교류도 거의 없었기에 각자의 풍속과 언어문화가 보전되어 온 것이다.
넷째, 이남마을과 무풍면 사람들은 비록 오랫동안 전북권에 속해 있음에도 자신들의 고유한 경상도식 언어문화를 간직하고 있었고, 신촌마을 사람들은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전라도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요컨대, 하천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와 분수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 연구를 통해 현대 언어문화는 신라나 백제와 같은 고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부분 검증될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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