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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三國時代의 形勢와 弓王의 稱帝建元

The Situation of the Later Three Kingdoms Period and Gung-wang(弓王, Gung-ye)’s Chingje-Geonwon(稱帝建元, Calling the monarch the emperor and establishing an era name)

李敏弘 ( Lee Min-hong )
  • : 동방한문학회
  • : 동방한문학 9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6월
  • : 141-199(59pages)
동방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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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弓王의 再認識
2. 勝者와 敗者가 겪는 榮光과 汚辱
3. 後三國時代의 展開와 弓裔와 甄萱, 王建
4. 史書에 形象된 弓裔의 開國과 挫折
5. 한국 최초 稱帝建元의 영도자 弓王
6. 結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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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인물들 중에 후세인의 주관적 척도에 의해, 망각되었거나 과소평가된 사람이 적지 않다. 별 실질이 없는 인물이 특정 派閥과 현달한 後孫에 의해 과대평가된 사람도 많고,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례도 있다. 필자는 그들 가운데 弓裔를 선택하여 그가 우리 반만년 역사상 중원 皇帝들처럼 최초의 ‘稱帝建元’과 ‘五行立國’을 시행한 영도자였던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 와서 ‘稱帝建元’과 ‘五行立國’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중세는 중세의 척도와 가치관으로 접근해야 그 실상이 구명된다. 하물며 칭제건원의 이념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외세에 휘말리지 않고 주체성을 살려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몸에 밴 사대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인식도 그 근저에는 稱帝建元의 經國理念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권력쟁탈에서 밀려난 패자에 관한 평가는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잔인하고 혹독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夏나라의 桀王과 殷나라의 紂王, 秦나라의 始皇과 조선조의 光海君이 그 대표적 帝王이다. 승자였던 禹王과 武王은 文武兼全에다 도덕심도 갖춘 성인으로 찬양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들과 비슷한 사례가 많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로 필자는 궁예를 선정하여 본고를 작성했다. 승자였던 王建은 寬仁厚德의 대명사로 묘사되어 있다. 만일 왕건이 궁예의 칭제건원을 계승하여, 皇帝로 군림하면서 발해의 유민과 합세하여 부국강병책을 써서 遼나라에 대항했다면, 당시 無主空山이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만주지역의 절반은 수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진실로 고려조의 禑王과 昌王의 성이 王氏가 아니라 辛氏였는지, 진시황의 성이 嬴氏가 아니라 呂氏인지도 의문이다. 승자인 李成桂와 劉邦 등이 易姓革命을 합리화하기 위한 權謀術數로 볼 수는 없는지, 언제까지 이 같은 왜곡을 기정사실로 여겨야 할 것인지. 이제 역사의 진실은 밝혀질 때도 되었다. 궁예의 ‘稱帝’에 대한 기록은 국내 史書에는 일체 없고, 중국 측 簡冊에만 전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諸侯禮樂이 아닌 皇帝禮樂과 稱帝建元의 經國理念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궁예의 經綸을 闡揚하여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鑑戒로 삼고자 한다.
Among the countless figures who had flickered in the history, there were many who have been forgotten or underestimated by posterity’s subjective measure. There are many cases that a person with no substance was overestimated by a certain faction and illustrious descendant, and there are cases that a person who has made remarkable achievements has been pushed out of interest. By choosing Gung-ye from among them, I would like to reveal the fact that he was the leader who implemented the first ‘Chingje-Geonwon (稱帝建元, Calling the monarch the emperor and establishing an era name)’ and ‘Ohaeng-ibguk(五行立國, Building a country with the five elements)’, like the emperors of China, in our a 5,000-years-old history.
There are many people who wonder why Chingje-Geonwon and Ohaengibguk are important at this belated time, but the medieval world must be approached with medieval values to reveal its reality. Moreover, the spirit of the Chingje-Geonwon has not been extinguished. And even today, in order to achieve independence by having subjectivity without being entangled in foreign powers, there is a perception that we must abandon the flunkeyism that has been entrenched in our body, at its root, there is the administration ideology of Chingje-Geonwon.
Since history is the record of winners, the evaluation of losers who were pushed out of the struggle for power was cruel and harsh, regardless of all ages and countries. In the case of East Asia, Geolwang(桀王) from the Xià(夏) Dynasty, Juwang(紂王) from the Yīn(殷) Dynasty, Shihuang(始皇) from the Qín(秦) Dynasty and Gwanghaegun(光海君) from the Joseon Dynasty were representative kings. The victors, Uwang(禹王) and Muwang(武王), were praised as saints with both literary and military accomplishments, and morality. There are many similar cases in Korea, but I selected Gung-ye as a person who must be pointed out and wrote this paper. The victor, Wang-geon, was described as a byword for generosity and eminent virtue. If Wang Geon succeeded Gung-ye’s Chingje-Geonwon, reigned as emperor, joined with the settlers of Balhae, and used the measure to enrich and strengthen a country, to fight against the Liáo(遼) dynasty, it is thought that half of the Manchuria region, which was an ownerless mountain at that time, and which was ancient territory of Goguryeo and Balhae, could have been restored.
Indeed, it is also questionable whether the surname of the Goryeo Dynasty’s Uwang(禑王) and Changwang(昌王) were Shin(辛) rather than Wang(王), and whether the surname of Qin Shihuang were Yeo(呂) rather than Yeong(嬴). How long should such distortion be considered as a fait accompli? Now is the time for the truth of history to be revealed. The record of Gung-ye’s Chingje(稱帝) is not in any domestic history books, but only in Chinese history books, and what the reason is. By revealing the statecraft of Gung-ye, which governed the country based on the administration ideology of the emperor’s Ye-Ack(禮樂, the Courtesy and the Music) and Chingje-Geonwon, rather than the feudal lords’ Ye-Ack(禮樂), I would like to use it as an lesson for the present and future of our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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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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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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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나라 樂府詩體 戰爭詩의 창작 양상과 연구의 과제

저자 : 朴貞珉 ( Park Jeong-mi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0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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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전쟁문학은 전쟁의 체험과 정서를 반영하는 데서 출발하였지만 점차 전쟁 상상 문학으로 선회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의 악부시체 전쟁시이다. 본고에서는 '전쟁의 상상과 관념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2장에서 악부시체 전쟁시의 의미와 유형을, 3장에서 우리나라 악부시체 전쟁시의 창작 현황을, 4장에서 향후 연구 과제를 논하였다.
2장에서는 악부시체 전쟁시를 '악부시의 양식으로 작성된 전쟁 한시'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중국 역대의 악부시를 가장 잘 모아놓은 책이라 일컬어지는 郭茂倩의 『樂府詩集』을 분석하여, 중국의 경우 총 31종의 악부시체 전쟁시 양식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3장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우 '塞下曲'·'出塞'·'塞上曲'·'關山月'·'征婦怨'·'從軍行'·'隴頭'·'苦熱行'·'飲馬長城窟行·'戰城南'·'出自薊北門行'·'白馬篇'·'入塞'·'出關'·'胡無人行'·'入關' 등 총 16종의 악부시체 전쟁시 양식이 창작되었음을 확인하고, 수집한 작품 총 325편의 목록 및 관련 연구를 제시하였다. 또 '변방의 생활과 정경', '전쟁으로 인한 이별과 그리움', '정벌의 괴로움과 將卒의 고통', '出征과 建功의 기원'이라는 4가지 측면에서 우리나라 악부시체 전쟁시의 주제를 살폈다.
4장에서는 향후의 연구 과제를 논하였다. 그것은 첫째 악부시체 전쟁시를 다작한 작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 둘째 중국 악부시의 전범과 우리나라 작품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본고의 논의는 전쟁 체험 한시에 주목했던 기존 연구의 편향성을 보완하는 연구라는 점, 觀念性과 擬古性이라는 전쟁문학의 특성을 탐색하는 연구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닐 수 있다.


Although the beginning of war literature was to reflect war experience and sentiment, it gradually changed into literature to imagine war. And one of the representative examples is Korean war poetry in the Akbu-poem(Yue Fu, 樂府詩) style. To form the basis for the research on "literary figuration of imagination and notion about war", this study discusses the meaning and type of war poetry in the Akbu-poem style in Chapter 2, situation of creation of Korean war poetry in the Akbu-poem style in Chapter 3, and research tasks in Chapter 4.
In Chapter 2, war poetry in the Akbu-poem style is defined as "Chinese poetry written in the Akbu-poem style". The study confirmed that, in case of China, there are 31 formats of the Akbu-poem-styled war poems by analyzing Gwak Mucheon(郭茂倩)'s 『the Book of Akbu Poems(樂府詩集)』 which has been called the best book coompiling the all-time great Akbu-poems.
In Chapter 3, the study confirmed that, in case of Korea, the Akbu-poem-styled war poems have 16 different formats in total, including Saehaagok(塞下曲), Chulsae(出塞), Saesanggok(塞上曲), Gwansanwol(關山月), Jeongbuwon(征婦怨), Jonggunhaeng(從軍行), Nongdu(隴頭), Goyeolhaeng(苦熱行), Eummajangseonggulhaeng(飲馬長城窟行), Jeonseongnam(戰城南), Chuljagyebukmunhaeng(出自薊北門行), Baekmapyeon(白馬篇), Ipsae(入塞), Chulgwan(出關), Homuinhaeng(胡無人行), and Ipgwan(入關). In addition to this, it presented the list of 325 poems collected for this study, and relevant studies as well. It also examined the themes of the Akbu-poem-styled Korean war poems, particularly from four different perspectives, including "the life and scenes on the frontier", "the parting and yearning due to war", "the distress from conquest and agony of soldiers and commanders(將卒)", and "the wish for going to war(出征) and accomplishing a feat(建功)".
In Chapter 4, the study discusses future research tasks; first, intensive researches will be required, particularly on writers who wrote a lot of war poems in the Akbu-poem style; second, comparative researches will be needed between the Chinese Akbu-poem models and Korean works.
The discussion of this study has significant meanings as it is the study that supplements the tendency of the existing studies focusing on war experience-oriented Chinese poetry, and also that explores the features of war literature in terms of "ideality(觀念性)" and "archaism(擬古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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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시대 詠花詩 고찰의 일면 - 문인들의 집단 창작을 중심으로-

저자 : 崔金萍 ( Cui Jin-pi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1-8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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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시대 詠花詩 가운데 집단적으로 창작된 영화시를 대상으로 고찰하였다. 고려시대는 영화시의 발전과정 중 발전기로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시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시대의 영화시에 대해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임금부터 꽃에 대한 선호가 높아, 여러 차례 궁궐에서 상화연을 열어 꽃의 아름다움을 신하들과 함께 감상하였으며,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고려시대의 궁궐에 심은 꽃은 대부분 화려하고 색깔이 고운 품종이었다. 궁궐의 꽃을 대상으로 지은 영화시는 대체로 화려하고 사치한 사조로 이루어졌으며, 시풍은 섬세하고 정교함을 추구하였다. 궁궐 영화시의 창작형식은 주로 응제시와 命賦詩인데 대형 집단 창작을 이룰 때는 남의 시를 차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비교하면, 문인들의 사적인 모임에서는 더 많은 종류의 꽃뿐만 아니라 더욱 다양한 영화시를 볼 수 있다. 사적 모임 자리의 영화시에서는 명부·주필·화운·차운·분운 등의 창작형식이 나타났다. 문인들의 모임 자리에서 읊은 대상은 자태가 아름다운 품종도, 군자의 품격을 지닌 품종도 궁궐 영화시의 부귀와 화려함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내용에서도 서사와 용사의 방식이 많이 사용되며, 즉흥적이고 특별히 시어의 조탁을 추구하지 않는다. 꽃을 사랑하는 문인들은 꽃의 생태적 특징을 인간의 인격에 투영하고, 꽃을 가꾸는 것을 수신양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꽃을 감상하고 꽃을 가꾸는 것을 일종의 격물치지로 여겼다. 이 때문에 매화, 국화 등 군자의 풍미를 살린 꽃을 더욱 선호하는 것으로 보였다.
고려시대 영화시는 개인 창작에 그치지 않고 집단 창작의 색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지배층 귀족들은 연회를 할 때 즉흥적으로 영화시를 지었다. 문인들은 다양한 모임에서 영화시로 자신의 시부 능력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 영화시의 집단 창작은 당시 문인들이 꽃구경을 오락으로 삼았던 풍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집단 창작은 영화시의 발전에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집단 영화시 작품에서는 당시 문인들의 꽃에 대한 애정과 꽃구경 현장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 연구는 고려시대 영화시의 전반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며, 향후 이와 관련된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This study examines the flower poems created by the group creation of poets in the Goryeo period as the object of study. The Goryeo period occupies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flower poetry. Therefore, in order to understand flower poetry in general, it is necessary to delve deeply into flower poetry of this era.
In the Goryeo Dynasty, the preference for flowers was high from the king. Kings several flower banquets were held at the palace to appreciate the beauty of the flowers with thems subjects, and ordered them to write poems. Most of the flowers planted with the palaces of the Goryeo Dynasty were colorful and beautiful. Most of the flower poems written for palace flowers consisted of colorful and luxurious words and the style of poetry pursued delicacy and sophistication. The flower poetry of palace was mainly written by the king's order. When creating a large feast, there was always cases of writing poems according to the rhyming words of others. In comparison, in private gatherings of poets, you can see not only more kinds of flowers but also more diverse flower poems. In flower poetry of the private feast, write under orders, on-site creation, hwawun, Chaun, and Bunun appeared. The flowers recited at the poets feast show a different appearance of the wealth and splendor of the palace flowers poem. The content of the poems ues the narrative and a method of quoting ancient stories, and it is improvised without intentional word processing. Flower-loving poets project the ecological characteristics of flowers onto human personality. Growing flowers was understood as a process of mental or spiritual cultivation. The appreciative and cultivation of flowers is considered a science of studying things and gaining knowledge. Therefore, they prefer plum blossoms, chrysanthemums, which are flowers with Gunja character.
The creation of flower poetry in the Goryeo Dynasty has a collective color, not only individual creation. The ruling aristocrats improvised flower poems when they gave a banquet. Poets proved their ability to write poems with flower poems at various gatherings. Therefore, the collective creation of flower poetry in the Goryeo Dynasty showed the trend that writers used flower viewing as an entertainment. This collective creation promoted the development of flower poetry. In the collective creative flower poem, poets showed their affection for flowers and appreciation of flowers more vividly. I argue that this study is meaningful in understanding the overall flower poetry of the Goryeo Dynasty. I hope to be helpful in future research related to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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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주지역 정자에 게시된 편액의 현황과 특징

저자 : 朴英鎬 ( Park Young-ho ) , 郭溟財 ( Gwak Myeong-jae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5-11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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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주지역에는 20개의 읍면동에 모두 116개의 정자가 소재하고 있는데 이는 경북의 다른 시군에 견주어도 적지 않은 숫자이다. 정자에 게시된 편액 자료는 현판 273개, 상량문 54편, 기문 141편, 제영 347수, 주련 45개, 기타 56개로 모두 916개이다. 이 가운데 상량문, 기문, 제영이 게시된 정자는 36개이며, 상량문과 기문만 게시된 정자는 16개, 기문과 제영만 게시된 정자는 26개이다.
현판에는 정자의 명칭과 함께 당실의 명칭을 포함하며 대체로 세 글자로 가로쓰기[橫書]로 되어 있다. 상량문과 기문은 창건, 중건, 이건, 중수 등에 사용된 글을 모두 포함하는데 대체로 세로쓰기[縱書]로 되어 있다. 제영에는 원시와 차운시를 포함하는데 시판 하나에 한시 한 수가 게시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많게는 다섯 수가 게시된 경우도 있다. 그리고 기둥에 걸어둔 주련과 현대에 제작된 액자나 성금록 등은 기타로 분류하였다.
정자에 게시된 편액 자료를 통해 경주지역 정자의 특징을 정자의 기능, 건립 시기와 편액 작성, 정자와 설화 등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주지역의 정자는 건물의 형태와 기능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풍류를 즐기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선조를 추모하는 기능과 학문을 연마하는 강학 기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경주지역 정자의 건립 시기는 1910년대에서 1930년대,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이 20세기에 창건하였거나 중건하였으며, 19세기에 창건하거나 중건한 정자는 5∼6개소에 불과하다. 확인 가능한 50여 개의 현판 가운데 많은 글씨를 남긴 사람은 경주 출신 최윤과 손석원, 성주 출신 이기윤 등이다. 편액 자료를 3편 이상 찬술한 사람은 10명 안팎인데, 경주 출신 최현필이 12편이며, 손후익과 이채원이 각 8편, 손제익과 유석우가 각 7편 등이다.
셋째, 경주지역 정자 가운데 설화를 남긴 정자는 내남면에 소재하는 어연정과 강동면에 소재하는 삼괴정 등이 있다. 어연정 설화는 돈독한 형제의 우애와 형제가 무고한 즐거움에 종신토록 부친을 사모하는 뜻을 담은 내용이다. 삼괴정 설화는 형제들이 어릴 때 심은 홰나무의 성장을 통해 그들과 자손들의 영고성쇠를 관련지은 내용이다.


Currently, Gyeong-ju city has 118 pavilions in its 20 towns, which is not small number compared to other cities in Gyeongsangbuk-do.
Out of the total number of 931 Pyeonaek(扁額) data in Gyeong-ju city, the pavilions include 277 Hyeonpan(懸板), 55 Sangryangmun(上樑文), 142 Gimun(記文), 355 Jeyeong(題詠), 45 Juryeon(柱聯), and 57 others. Among these, 37 pavilions have all 'Sangryangmun', 'Gimun', and 'Jeyeong', and 16 pavilions have only 'Sangryangmun' and 'Gimun', and 26 pavilions have only 'Gimun' and 'Jeyeong'.
The Hyeonpan includes the name of the floor(堂)·room(室) along with the name of the pavilion, which is generally written horizontally in three letters. Sangryangmun and Gimun include all the writings used in construction, reconstruction, transportation, and repair of the building, which are generally written vertically.
Jeyeong includes 'Original poem(原詩)' and 'Poem Written Along a Rhythming Character(次韻詩)' on the board. One board usually had one poem, but sometimes five poems were carved on it. 'Juryeon' and 'Modern frames(額子)' and 'Donation record(誠金錄)' were classified as others.
The Pyeonaek data which the pavilions have show the characteristics of the pavilion in Gyeong-ju city, which are also well explained by the name and function, the time of construction and creation of Pyeonaek and folktales related to the pavilions.
First, in that the shape of the pavilion in Gyeong-ju is closely connected with its function, it can be said that the pavilion was a space with the purpose of commemoration of ancestors and learning and education of their teachings, rather than a space for enjoyment of the nature.
Second, most pavilions in Gyeong-ju city was constructed in the periods from the 1910s to 1930s, and from the 1950s to 1970s. Most of them were founded or rebuilt in the 20th century, and only five to six pavilions were built or rebuilt in the 19th century. Choi Yoon(崔潤) and Son Seok-won(孫錫遠) from Gyeong-ju and Lee Ki-yoon(李基允) from Seong-ju left many calligraphic writings on the existing 50 Hyeonpans. Among about 10 people who had written more than three Pyeonaek data, Choi Hyun-pil(崔鉉弼), a native of Gyeong-ju, wrote 12 Pyeonaek data, Son Hoo-ik(孫厚翼) and Lee Chae-won(李綵源) 8 relatively, and Son Je-ik(孫濟翼) and Yoo Seok-woo(柳奭佑) 7 relatively.
Third, a number of Pyeonaek data in Gyeong-ju conveying folktales related to pavilions use the style of Gimun. Examples include Eoyeonjeong(魚淵亭) located in Naenam-myeon and Samgoejeong(三槐亭) located in Gangdong-myeon. Eoyeonjeong's folktale is about a strong brotherhood and adoration for his father. Samgoejeong's folktale is a work that compares the growth of the perch tree planted by the brothers to the prosperity of their descend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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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魯城 坡平尹氏家 宗會詩 연구

저자 : 李松姬 ( Lee Song-hee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6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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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노성 파평윤씨가 종회에서 수창된 시문학 작품을 분석하여 종회와 학문 활동, 시적 형상화 양상 등을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노종오방파는 노성을 근거지로 삼아 금산, 연산, 공주, 부여 등 충남 남부 일대에서 활발한 사족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7세기 기호사림학자들과 더불어 당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동토 윤순거, 용서 윤원거, 노서 윤선거, 명재 윤증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절의와 학문으로 세상에 명망이 높았으며, 실천적 학문의 가학을 현실에 구현하여 문중에 종약과 종학당을 설치하고 봄가을로 종회를 열어 노성 파평윤씨가의 학문적 토대와 기틀을 마련하였다. 노성 파평윤씨가는 이때 마련한 종약의 가르침에 따라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위상을 보존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종회의 전통을 이어 친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있다.
노성 파평윤씨가의 종약, 종회, 종학당의 설립 배경은 人道를 실천하기 위함이다. 모든 행실의 으뜸인 효도를 근본에 두고 배움에 기반하는 규약을 제정하였다. 인도는 親親, 尊祖, 宗統에 대한 공경과 사랑,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배우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음을 말하였다. 이에 종회를 열어 친목하고 화합하였으며, 종학당을 설립하여 학문에 힘쓰고, 시회를 통해 종약의 가르침을 경계하고 권면하였다. 시회는 종약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규약에 따라 종회례의 일부로 개최되었다.
종회시는 노성 파평윤씨 『종회록』(1643~1948)에 수록된 시작품 87제 113수이다. 시회는 크게 追韻詩, 呼韻賦詩, 命韻賦詩, 分韻賦詩 양상으로 수창되었다. 내용으로는 친족과의 화목, 형제간의 우애, 조상에 대한 존중, 선현의 가르침, 조상 묘역의 치수 및 성묘, 종자에 대한 공경과 사랑, 학문 활동 등 종약의 규칙을 반추하고 복기하였다. 노성 파평윤씨가는 종회에서 시를 수창하며 끊임없이 서로를 격려하고 학문을 권면하였으며, 이를 동력으로 수백년 동안 종학당을 운영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ir academic activities, in particular, how to embody their ideas into the literature by examining the poetic works originated from the ceremonially opened family assembly gatherings of the Noseong Papyeong Yoon's clan family. Based in the area of Noseong, the Nojongobangpa(魯宗五方派), a branch of the Yoon's family, has actively implemented the academic activities of its own prestigious family in some parts of the southern Chungcheong Province such as Geumsan, Yeonsan, Gongju and Buyeo. And also cultivated the outstanding figures who dominated an era of the 17th century together with some scholars from the Giho school. Among these, Dongto Yoon Soon-geo, Yongseo Yoon Won-geo, Noseo Yoon Seon-geo, and Myeongjae Yoon Jeung were representatively enumerated. They all were renowned for their high fidelity to the principles and academic performance. In addition to turning the academic tradition in the family pass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nto reality, they set up the bylaw and the study institute in the family, held the family gatherings every spring and fall and eventually established their academic foundation in the Noseong Yoon's family. The Noseong Papyeong Yoon's family has maintained the status of a prestigious family representing the metropolitan area and Chungcheong Province by steadily producing the numerous talented according to the bylaws and guidance provided at this time. Even today, this tradition continues to promote the family harmony.
The reason why the Noseong Papyeong Yoon's family formed such a family gatherings, set the bylaws, and established study institute, was to abide by human dignities and responsibilites essentially. They made such an agreement for their discipline based on the filial piety, which is the foremost of all conduct. Practicing the human dignities and responsibilities in their family means the respect and love for ancestors, parents and descendants, with sharing joy and sorrow, which cannot be sustained without learning. To this end, the family gatherings was held to promote the higher amity and harmony between the family members, the study institute was set up to focus on the academic investigation, and the poetic club was held to pay attention to lesson of the bylaw and to recommend it to all family members and to admonish them. The poetic club was held and run as part of the family gatherings ceremony according to the bylaws.
The poetic works from the club are 113 works on 87 topics recorded in the family annals. At this club's reading ceremony, the poetic verses made and recited in various ways that adjust and change their positionings of the poetic rhythms, such as Chuunsi(追韻詩), Hounbusi(呼韻賦詩), Myeongunbusi(命韻賦詩), and Bununbusi (分韻賦詩). Such poems mainly repeatedly described and reminded the various detailed matters related to the bylaws such as family harmony, brotherly friendship, respect for ancestors, lessons from ancestors, size of ancestral graves and visit their tombs, a sense of honor for the main decendents. The Noseong Papyeong Yoon's family stimulated each other by composing and reciting poetry at a poetry club and encouraged to study. By running the study institute for hundreds of years with the driving forces, many talented have been trained and produ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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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본 '최초의 외교사서' 『善隣國寶記』 試考 - 15세기 '海東諸國'의 心象地理에 대한 소묘 -

저자 : 金南伊 ( Kim Nam-yi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3-219 (5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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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한-중-일에서는 거의 동시적으로 자국의 외교와 관련된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의 『海東諸國記』, 일본의 『善隣國寶記』, 명나라의 『皇明外夷朝貢考』가 그것이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이 자국 중심으로 소중화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만든 외교 지침서이다. 그런데 조선 내부의 시선만을 투사해서는 그 세계의 입지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즉 '海東諸國'의 心象地理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구도가 필요하다. 그런 『해동제국기』의 건너편에 『선린국보기』의 세계가 있다. 본고는 이런 관점에서 『선린국보기』에 주목한 첫 번째 연구이다. 『선린국보기』는 室町막부 때 편찬된 '일본 최초의 외교 사서'로 평가받는데, 1392년 일본에서 조선으로 발신한 「答朝鮮書」부터 1486년 역시 조선으로 발신한 「遣朝鮮書」까지 약 100여 년간 총 42건의 외교문서가 실려 있다. 편찬자인 외교승 瑞溪周鳳은 '중국-일본간의 외교역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발신한 문서가 약 15건으로 가장 많다.
『선린국보기』는 일본 실정막부의 五山禪僧 및 일부 관료 지식인이 공부하도록 만든 한문으로 된 외교 교과서이다. 그 내용은 '神國으로서 佛國'이라는 일본의 自國觀, 각종 외교 지식과 禮制, 즉 당시 일본에서 실질적으로 외교 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사람에게 필요한 가치관과 지식들이다. 「善鄰國寶記序」와 본문의 비평에서 서계주봉은 명나라가 자국 중심으로 구축한 조공-책봉의 체제에 일본이 定住하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이는 『선린국보기』에 수록된 외교문서의 年號 사용, 발수신자 표현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선과의 외교는 조공책봉 체제의 밖, 다른 외교의 영토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또한 그런 일본의 방식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거나 통일된 질서를 강제하지 않았다. 즉 명이 개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諸國' 외교의 현장은 명이 구성한 책봉-조공의 질서에 반드시 의거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은 자국을 중심으로 하는 '소중화'·'해동제국'의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다. 『해동제국기』는 그런 인식의 결과물이다. 『선린국보기』 또한 자국의 견지에서 일본이 그린 외교의 영토를 보여준다. 명나라는 이런 동상이몽 속 주변국들을 조공-책봉이라는 체제로 위계화하고 사대교린의 외교 관념을 관철하려고 했다. 『황명외이조공고』가 보여주는 '외이'의 세계 지리는 그런 인식의 일단이다. 그러나 이런 천하질서는 동아시아에서 고르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선린국보기』의 외교문서는 이를 예증한다. 향후 『선린국보기』에 수록된 외교문서 자체를 고찰하고 총체적으로 『선린국보기』의 성격을 규명한뒤, 조선의 『해동제국기』와 『선린국보기』, 그리고 『황명외이조공고』를 한 시야에 넣고 고찰하고자 한다.


In the 15th century, Korea, China, and Japan were compiling books related to their own diplomacy almost simultaneously. Those books are HaeDongJeKukGi(海東諸國記) by Joseon,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by Japan, and HwangMyeongOeYiJo GongGo(皇明外夷朝貢考) by Ming. HaeDongJeKukGi(海東諸國記) is a diplomatic guide created by Joseon in the process of building a little Sinocentric world centered on its own country. However, it is difficult to grasp the position and meaning of such a world by projecting only the gaze of the interior of Joseon. In other words, a composition that can view the imaginative geography of 'HaeDongJeKuk(海東諸國)' three-dimensionally is necessary. Across from such a HaeDongJeKukGi(海東諸國記) is the world of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This paper is the first study to pay attention to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from this point of view.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compiled during the SilJung(室町) bakufu period, is regarded as 'the first diplomatic history book of Japan', which included a total of 42 diplomatic documents over 100 years from 'DapJoseonSeo(答朝鮮書)' sent to Joseon from Japan in 1392 to 'GyeonJoseonSeo(遣朝鮮書)' sent to Joseon in 1486. Compiler SeoGyeJuBong(瑞溪周鳳) professes “the history of diplomacy between China and Japan,” but in reality, the number of documents sent from Japan to Joseon were the largest as about 15, confirming that Korea was the most important object of Japanese diplomacy at the time.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is a diplomatic textbook written in Chinese for the education of Osan-zen monks, who were in charge of foreign affairs of the Sil Jung(室町) bakufu, and the intellectuals of the bakufu. It introduced Japan's identity as 'the country of Buddhism as a country of God' and presented examples of diplomatic documents, so it can be said that it contained the values and knowledge necessary for those who were actually conducting diplomatic affairs in Japan at the time. SeoGyeJuBong(瑞溪周鳳) argued that Japan carried out successfully and voluntarily the fusion between Shinto, which existed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in Japan, and Buddhism, foreign ideas, thereby gaining its status as the most fundamental and ideal world-a Buddhism country among East Asian countries. Based on his own country's view, he argued that in terms of diplomacy Japan was not settled in the diplomatic system that the Ming dynasty was building centered on its own country. However, the editor's notion does not coincide with all the documents published in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and the diplomatic direction of the SilJung(室町) bakufu. In this respect,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is an inconsistent book.
On the other hand,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use of the era name, the expression of senders and recipients, etc. in diplomatic documents recorded in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diplomacy with Joseon in Japan was conducted in other territories outside the Ming dynasty-centered tribute-investiture system. Joseon also neither took issue with Japan's such methods formally and blatantly nor forced a unified order. In other words, the field of 'JeKuk(諸國)' diplomacy, which took place in a situation where Ming did not intervene, did not have to necessarily depend on the order of tribute-investiture established by Ming.
Joseon tried to create an order of 'HaeDongJeKuk(海東諸國)', 'little Sinocentrism, centered on its own country. HaeDongJeKukGi(海東諸國記) is the result of such recognition.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also shows the diplomatic territories drawn by Japan from the point of view of its own country. The Ming Dynasty tried to hierarchize neighboring countries with the so-called tribute-investiture system amid such different dreams inside the same bed and accomplish the diplomatic concept of Sadae-Gyorin(事大交隣). The world geography of the 'outer barbarians' represented by HwangMyeongOeYiJoGongGo(皇明外夷朝貢考) is a portion of such perception. However, the world order established, centered-on its own country by the Ming dynasty was not implemented evenly and comprehensively in East Asia. Diplomatic documents from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exemplify this. In the future, after considering the diplomatic documents themselves contained in the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and investigating the nature of the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across the board, we want to consider the Joseon Dynasty's HaeDongJeKukGi(海東諸國記), Japan's SunRinKukBoGi(善隣國寶記), and the Ming Dynasty's HwangMyeongOeYiJo GongGo(皇明外夷朝貢考) while putting them in one view. were 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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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義烈圖』의 판본에 대한 연구

저자 : 金奭培 ( Kim Sug-bae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5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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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경상도 善山에서는 백성들에게 '義'와 '烈'을 가르칠 목적으로 『義烈圖』가 간행되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알 수 있도록 그림을 앞에 싣고 그다음에 그림과 관련된 글을 수록하였다.
『의열도』의 간행 경위와 판본의 성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간본 『의열도』(13장 목판본)는 1703년 6월에 선산부사 趙龜祥이 열녀 香娘과 義牛의 일을 수록하고 권상하의 跋文을 받아 간행한 것이다. 초간본 『의열도』의 간행 동기는 열녀 향랑과 의우를 통해 백성들에게 의와 열을 가르쳐 節義의 중함을 알지 못하는 세상을 바로잡아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초간본 『의열도』는 '의우도'+「의우도서」+'열녀도'+「열녀도기」+「의열도발」'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확인된 11개 판본은 약간씩 다른데, 그중에서 '홍익대본'이 가장 먼저 간행된 것으로 짐작되고, '경북대본'이 가장 특이하다.
둘째, 중간본 『의열도』(17장 목판본)는 1745년 초여름에 박익령이 초간본 『의열도』에 열녀 藥哥와 義狗의 일을 더해 간행하였다. 중간본 『의열도』의 간행 동기는 초간본과 같다.
중간본 『의열도』는 대체로 '약가도'+「의열도첨보서」+'열녀도'+「열녀도기」+「의열도발」+'의우도'+「의우도서」+'의구도'+「의구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5개 판본은 모두 조금씩 다른 것으로, 그중에서 '고려대본'이 가장 특이하다.
이 외에 1832년에 「약가전」과 봉곡동의 「의우전」을 필사해 넣은 『속의열도』도 있다.


『Euiyeoldo』 was published in Seonsan during the 18th century for the purpose of teaching people 'eui[loyalty]' and 'yeol[fidelity]'. Pictures are arranged first and their explanations are given next in the book for the illiterate people to know the meaning of the pictures. The process of publishing 『Euiyeoldo』 and the characters of the first and second versions of 『Euiyeoldo』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first version of 『Euiyeoldo』(13 leaves block book) with an epilogue written by Kwon Sang-ha was published by Seonsanbusa Jo Gu-sang in June, 1703. It includes what the fidelity woman Hyang-rang and an Euiu[ultraloyal cow] did. The motivation of publishing the first version of 『Euiyeoldo』 was to keep and strengthen public order of the villages by teaching people eui and yeol through the friendship of the virtuous woman Hyang-rang and Euiu. The first version of 『Euiyeoldo』 is composed of 'Euiudo'+「Euiudoseo」+'Yeolnyeodo'+「Yeolnyeodogi」+「Euiyeoldobal」'. The remaining 12 block books are a little different from one another. 'Hongik University version' is supposed to be published first among them, and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version' is most peculiar.
Second, the second version(17 leaves block book) was published in the early summer, 1745, after stories of the fidelity woman Yak-ga and Euigu[ultraloyal dog] was added to the first version of 『Euiyeoldo』 by Park Ik-ryeong. The motivation of publishing the second version was the same as the first version. Roughly speaking, the second version of 『Euiyeoldo』 is composed of 'Yakgado'+「Euiyeoldocheomboseo」+'Yeolnyeodo'+「Yeolnyeodogi」+「Euiyeoldobal」+'Euiudo'+「Euiwudoseo」+'Euigudo'+「Euigujeon」'. The remaining five block books are a little different among one another, and 'Korea University version' is most peculiar.
Besides, there are 「Yakgajeon」 published in 1832, and 『Sok Euiyeoldo』 into which 「Euiujeon」 was wri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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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근대 간찰서식집 '金玉尺牘'류 연구

저자 : 尹世旬 ( Yun Se-so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3-27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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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8종의 금옥척독류에 대해 먼저 서지사항을 파악해 보고, 이후로 본문 구성, 예문 간찰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부록의 비교를 통해 영향 관계 등을 살펴보았다.
금옥척독류의 서지사항을 파악해 본 결과, 書名에는 모두 '金玉尺牘'이라는 용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지만, 편찬 시기, 편찬자[저작 겸 발행자], 발행처가 각기 달랐다. 이 때문에 편찬 시기와 편찬자와 발행처 등의 서지사항만으로는 금옥척독류 상호 간의 영향 관계를 파악해 낼 수 없었다.
한편 금옥척독류의 서지사항을 추적하다가 금옥척독류와 표제만 다른 간찰서식집을 발견하였다. 『대증보 무쌍금옥척독』은 『보통유행 성문척독』과, 『주해부음 모범금옥척독』은 『신식유행 무쌍주옥척독』과, 『부음주해 특별금옥척독』은 『부음주해 신식청년척독』과 書名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동일한 간찰서식집이었다. 이를 통해 금옥척독류가 금옥척독류만의 고유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하면서 출간된 간찰서식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창기 '금옥척독'이란 서명의 간찰서식집이 절찬리에 판매되는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이후 편찬자들이 앞다투어 자신들이 편찬한 간찰서식집에 '금옥척독'이라는 이름을 포함시켰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서지사항을 살핀 이후에 금옥척독류 상호 간의 구성 및 내용 등을 비교해 보니, 이들 사이에 영향 관계가 드러났다. 『주해부음 무쌍금옥척독』과 『주해부음 모범금옥척독』, 그리고 『석자부음 최신금옥척독』은 초창기 금옥척독인 『부음주석 신식금옥척독』의 예문 간찰 상당수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었다. 또한 『부음주해 특별금옥척독』은 『석자부음 최신금옥척독』과 『대증보 무쌍금옥척독』의 간찰 일부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문장을 이해하기 쉽고, 내용이 풍부해지는 방향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또한 부록에 서식대요, 축문식, 신식단찰, 동서양연대표가 공통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은 금옥척독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옥척독류는 1920·30년대 간찰서식집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인기를 얻게 되자, 우후죽순처럼 간행된 상황 속에게 탄생된 간찰서식집이다. 대상 독자는 당시 한문과 한글을 모두 알고 있는 남성 식자층이었다. 또한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진취성을 드러내기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독자로 想定하여 편찬되었다.


In this paper, we first identified the bibliographical information on the 8 types of geumokcheokdok. Then, the influence relationship was examined by comparing the text structure, the title and content of the example letter, and the appendix.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bibliographic details of the eight Geum-ok cheok-dok(金玉尺牘), although the term 'geumokcheok-dok' was commonly included in all titles, the time of compilation, the author, and the publisher were different. For this reason, it was not possible to grasp the influence relationship between the eight geumokcheok-dok based only on the bibliographic information such as the date of compilation and the author and publisher.
On the other hand, while tracing the bibliographical information of 8 Geum-ok cheok-dok, I found a letter-writing guidebooks with the same contents and different titles from the Geum-ok cheok-dok. 『Daejeungbo(大增補) mussang Geum-ok cheok-dok(無雙金玉尺牘)』 has a different title from 『botong-yuhaeng(普通流行) seongmun cheok-dok(成文尺牘)』, 『Juhaebueum(註解附音) mobeom Geum-ok cheok-dok(模範金玉尺牘)』 has a different title from 『Shinsik-yuhaeng(新式流行) mussang-juok cheok-dok(無雙金玉尺牘)』, 『Bueumjuhae(附音註解) teugbyeol Geum-ok cheok-dok(特別金玉尺牘)』 has a different title from 『Bueumjuhae(附音註解) Shinsik-cheongnyeoncheok-dok(新式靑年尺牘)』. But the contents are the same. Through this fact, I came to know that 'Geum-ok cheok-dok' was not a published letter-writing guidebook as it continuously changed and developed with its own uniqueness. Since the letter-writing guidebook titled 'Geum-ok cheok-dok' was sold with great success in the early days, I think that later editors competitively to give the title of 'Geum-ok cheok-dok' to the letter-writing guidebook they compiled.
Next, by comparing the composition and contents of the eight 'Geum-ok cheok-dok', a certain influence relationship was revealed between them. 『Juhaebueum(註解附音) mussang Geum-ok cheok-dok(無雙金玉尺牘)』, 『Juhaebueum(註解附音) mobeom Geum-ok cheok-dok(模範金玉尺牘)』 and 『Seokjabueum(釋字附音) choesin Geum-ok cheok-dok』 borrowed many of the Sample letter from 『Bueumjuseok shinsik Geum-ok cheok-dok』, the early Geum-ok cheok-dok. In addition, 『Bueumjuhae teugbyeol Geum-ok cheok-dok』 does not borrow the example letters from 『Seokjabooeum choesin Geum-ok cheok-dok』 and 『Dajeungbo mussang Geum-ok cheok-dok』, but has been modified in a way that makes the text easier to understand and rich in content. And it can be said that it is a characteristic of the letter writing guidebook for the Geum-ok che-ok that the appendix contains the Components of the letter form, various ceremonial procedures, new style note, and eastern and western chronology in com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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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 초기 李叔蕃의 삶과 함양지역

저자 : 朴勇國 ( Park Yong-guk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9-32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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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練藜室記述』을 비롯한 李叔蕃에 관한 기록과 그 어머니 관련 설화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밝혔다. 고려 말기 이숙번의 증조부 李禧는 벼슬살이에 나아가 가계의 정치·사회적 입지를 다져 安城李氏 吏部侍郎公派의 派祖가 되었다. 조선 초기 이숙번이 벼슬로서 크게 현달함으로써 안성이씨 이부시랑공파 가문이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숙번의 처부 청주정씨 鄭摠(1358~1397)의 집안은 여말선초 대표적인 사대부 가문이었으며, 이숙번의 손아래 동서 金五門과 柳佐도 조선 초기 대표적인 공신 가문 출신이다. 이러한 이숙번의 처부 가문의 정치·사회적 입지는 이숙번의 벼슬살이에서 매우 우호적인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숙번은 청주정씨 사이에 한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1416년 4월을 기점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던 親功臣이 조정에서 차츰 사라졌으며, 이 무렵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숙청되었다. 그의 숙청은 다른 사례와 달랐다. 이는 태종이나 세종 모두 이숙번이 불충을 저지른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크다. 그러므로 이숙번은 일반적인 유배와 달리 함양 別墅에 自願 安置되었다. 그는 함양에서 寓居하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추방 생활을 했던 셈이다. 그의 별서는 지금의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함양 거주 영양남씨의 실체를 고증한 결과 이숙번과 尹子當은 異父 형제가 아니라 姨從 사촌 형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숙번과 윤자당의 이부 형제 설화는 李叔蕃의 어머니 영양남씨와 윤자당의 어머니 영양남씨가 자매지간이라는 사실을 착오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이숙번 가문의 세력 약화와 윤자당의 奉祀孫 단절 등을 배경으로 해서 생겨난 허구적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숙번의 경제력은 1416년 6월 연안부에 안치되었을 때도 온전했다. 이숙번은 비록 삭탈관직 되고 공신녹권을 회수 당했지만 그의 家産은 籍沒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양에서 이숙번의 생활 형편은 풍족한 정도가 아니라 사치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숙번 집안은 이후 경제적으로 서서히 쇠락해져 그의 사후 부인 정씨와 아들 및 첫째 딸도 궁핍해졌다. 다만 둘째 사위 강순덕은 분재 받은 재산을 잘 간수하였다. 정씨는 후사 없이 죽은 딸이 1415년에 분재 받았던 전장과 노비를 사위 강순덕으로부터 돌려받아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438년 9월 25일 세종은 이숙번을 잘 살피고 보호해서 한성으로 데리고 오라고 知印 金稷孫에게 敎旨를 내렸다. 세종은 이숙번이 獻陵의 비문 내용에서 1398년 기사의 문구를 자세히 고증할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숙번은 함양으로 방출된 지 21년여 만에 한성을 향해 길을 나섰다. 이숙번은 1438년 10월 15일을 전후하여 함양을 떠나는데, 이날 오랜 친구와 沙斤驛郵亭에서 만나 이별의 정을 나누는 시를 남겼다. 12월 12일 한성에 도착한 이숙번은 세종으로부터 후대를 받았으며, 한 달여 만인 1439년 1월 13일에 從便되어 경기 安山에 거주하다가 1440년 3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In this paper, by exam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Lee Suk-beon's life and the Hamyang reg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t was revealed that there were a number of errors in the records about Lee Suk-beon including 『Yeonlyeosilgisul』.
In the late Goryeo Dynasty, Lee Suk-beon's great-grandfather Lee Hui went to government office and established the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 of the family, becoming the founder of Libusilangongpa. In tthe early Joseon Dynasty, as Lee Suk-beon ascended to the rank of prime minister, the Anseong Lee Clan family grew significantly politically and socially. Cheongju Jeong Clan Jeong Chong (1358-1397), the father-in-law of Lee Suk-beon, belonged to the representative Sadaebu family from the late Goryeo to the early Joseon Dynasty. Jeongchong's second son-in-law Kim O-mun and third son-in-law Yu Jwa were also from the representative Gongsin famil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is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 of Lee Suk-beon's father-in-law's family served as a very friendly political background in Lee Suk-beon's position. Lee Suk-beon had a son and two daughters with his wife.
As of April 1416, Chingongsin, who was at the center of power, gradually disappeared from the royal court, and Anseong Buongun Lee Suk-beon was purged. His purge was different from other cases. This has a lot to do with the fact that neither Taejong nor Sejong saw Lee Suk-beon as guilty of disloyalty. Therefore, Lee Suk-beon was voluntarily placed on his farm in Hamyang, unlike the usual exile. He lived a relatively free life on a farm in Hamyang. It is presumed that the house attached to his farm was located in what is now Hamyanggun Yulimmyeon Guggyeli. And the reality of Yeongyang Nam Clan, the mother of Lee Suk-beon living in Hamyang, was verified. As a result, it is presumed that Lee Suk-beon and Yun Ja-dang were not brothers with different surnames, but sons of each of the two sisters. The legend that Lee Suk-beon and Yun Ja-dang have different fathers and have the same mother comes from not knowing that Lee Suk-beon's mother and Yun Ja-dang's mother were sisters. In addition, I think that it is nothing more than a fictional story that was created with the background of the weakening of the power of the Lee Suk-beon family and the severance of Yun Ja-dang's descendants.
Lee Suk-beon's economic power was intact when he was placed in Yeonanbu in June 1416. In Hamyang, Lee Suk-beon's living conditions were not only affluent but also luxurious. However, the Lee Suk-beon family gradually declined economically after that. After his death, his wife, son and daughter also became destitute. But his second son-in-law, Kang Sun-deog, took good care of his property. Lee Suk-beon's wife seems to have escaped some economic poverty by taking back the property of her daughter, Mrs. Kang Sun-deog, who died without children.
On September 25, 1438, Sejong ordered Jiin Kim Jik-son to take good care of Lee Suk-beon and bring him to Hanseong. This is because Sejong thought that Lee Suk-beon was the person who would testify in detail the text of the 1398 article in the content of Heonleung's inscription. Around October 15, 1438, Lee Suk-beon departed for Hanseong, more than 21 years after being placed to Hamyang. On this day, he met old friends at Ujeong in Sageunyeog and left a poem to share his parting feelings. Lee Suk-beon, who arrived in Hanseong on December 12, received hospitality from Sejong. And Lee Suk-beon received Jongpyeon permission from Sejong on January 13, 1439, lived in Kyeonggi Ansan, and died on March 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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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蓮軒 李宜茂의 辭賦文學 연구

저자 : 李聖炯 ( Lee Soung-hyu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3-35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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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蓮軒 李宜茂(1449~1507)의 현전하는 辭賦 10편에 대하여 문학적인 연구를 하였다. 연헌은 辭賦의 史的 展開上 轉換期의 대표 작가인데, 여타 사부 작가들에 비하여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연헌 辭賦의 제목이 다소 짧고 포괄적인 것은 다양한 본문 구성이 가능하게 하는 古賦의 특징을 따른 것이다. 연헌의 辭賦는 형식면에서 古賦로 분류되지만, 擬騷體의 비율이 적다. 주제면에서는 道學辭賦의 유행을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 확인되고, 또한 辭賦의 전통을 계승한 道家的 價値를 담고 있는 작품도 확인된다.
연헌 辭賦는 대체로 33세 이후의 작품이 현전하는데, 창작 시기가 미상인 4편의 賦는 혼란한 현실정치를 비판하거나 田園閑居를 지향하고 있어서 洪州牧使 시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편의 辭는 유사한 주제의 漢詩의 창작시기를 고려했을 때, 仕宦期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헌 辭賦의 작품세계는 전환기의 특징이 선명하게 반영되었다. 먼저 道學的 修養과 孝行을 강조한 작품에 대하여 살펴보면, 「螢火賦」가 개인적 수양론을 강조했다면, 「喜雨賦」는 군주의 수양론을 강조했다. 「雨霽遊山賦」와 「花石亭賦」는 연헌이 모친상을 당해서 시묘를 마친 직후에 창작된 작품인데, 陳師道와 李達衷의 작품을 계승했으면서도 관념적인 孝道觀이 아니고 본인의 체험을 孝道觀과 결부시켜 체험적으로 전달했다.
두 번째로 故事에 대한 論辨과 變奏를 보여주는 작품에 대하여 살펴보면, 桓溫의 고사와 관련된 「平乘樓賦」, 漢武帝의 고사와 관련된 「綉衣使者賦」, 隋煬帝의 고사와 관련된 「隋堤柳賦」 등은 辭賦의 형식을 활용하여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연헌의 비판적 의론을 보여준 작품이다. 毛遂自薦의 고사와 관련된 「歃銅盤辭」는 역사적인 글을 辭賦로 변주해서 자신의 포부를 보여준 작품이다.
세 번째로 道家的 處世와 理想을 志向한 작품을 살펴보면, 「淸州望仙樓賦」는 仙界에 대한 선망과 田園閑居의 처세를 지향하고 있고, 「鵂鶹賦」는 賈誼의 「鵩鳥賦」의 내용과 주제를 수용하여 道家의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에 동조하고 있는 모습을 노정하였다.


This paper is a literary study on the 10 existing poems by Yeonheon(蓮軒) LeeUimu(李宜茂)(1449~1507), a write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Yeonheon is the representative writer of transition period i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Sa-bu(辭賦). And compared to other Sa-bu(辭賦) writers, he left behind a relatively large number of works. The rather short and comprehensive title of Yeonheon Sa-bu(辭賦) follows the characteristics of the Go-bu(古賦) that make it possible to compose a variety of texts. The Sa-bu(辭賦) of Yeonheon is classified as a Go-bu(古賦) in terms of form, but the proportion of Uisoche(擬騷体) is small. In terms of subject matter, works that foresee the trend of Neo-Confucianism Sa-bu(辭賦) are confirmed, and also works that contain the Taoist tradition that inherited the tradition of poetry are confirmed.
Most of the works of Yeonheon Sa-bu(辭賦) are present after the age of 33, but the four bu(賦), whose creation date is unknown, criticize the chaotic reality of politics or aim for the Jeon-wonhangeo(田園閑居). Therefore, it is presumed to be a work of the Hongjumogsa(洪州牧使) period. Considering the period of creation of the Chinese poems with similar themes, the one 辭 is presumed to be the work in the early years of his official life.
Yeonheon Sa-bu(辭賦) work world clearly reflect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transition period. First, looking at the works emphasizing moral discipline and filial piety, 「Hyeonghwabu(螢火賦)」 emphasized the theory of personal discipline while 「Huiubu(喜雨賦)」 emphasized the discipline of the monarch. 「Ujeyusanbu(雨霽遊山賦)」 and 「Hwaseogjeongbu(花石亭賦)」 were created right after Yeonheon finished his funeral after his mother's death. And while inheriting the works of Jinsado(陳師道) and Leedalchung(李達衷), they are not ideological, but connect the artist's experience with the filial piety, delivered experientially.
Second, looking at the works that show the remarks and recollections of the historical events, the 「Pyeongseungnubu(平乘樓賦)」 related to the historical history of the Hwan-on(桓溫), 「Souuisajabu(綉衣使者賦)」 related to the ancient history of Hanmuje(漢武帝), the 「Sujelyubu(隋堤柳賦)」 related to the ancient history of the Suyangje(隋煬帝) is a work that shows Yeonheon's critical opinion on the times of the time by using the form of Sa-bu(辭賦). 「Sabdongbansa(歃銅盤辭)」, which is related to the historical story of Mosujacheon(毛遂自薦), is a work that shows the aspirations of the author by changing a historical text into a Sa-bu(辭賦).
Third, if we look at the works that reflect the Taoist traditions and principles, 「Cheongjumangseonnubu(淸州望仙樓賦)」 aims for the envy of paradise and the life of the Jeon-wonhangeo(田園閑居). 「Hyulyubu(鵂鶹賦)」 adopted the contents and theme of 「Bogjobu(鵩鳥賦)」 of Gaui(賈誼), revealing that it is in sync with the relativistic worldview of the Dao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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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白下 尹淳 문학관 검토 시론

저자 : 尹載煥 ( Yoon Jae-hwa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65-39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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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白下 尹淳의 문학관을 살펴보고자 한 글이다. 백하 윤순은 조선후기 소론계열을 대표하는 관료이자 문인·학자의 한 사람이면서 조선 書風의 맥을 잇는 대표적인 서예가로, 현재까지 윤순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이 그의 서예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현상은 그가 서예 방면에서 이룩한 성취가 다른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 전하는 윤순 관련 자료가 상당히 소략하여 서예 이외의 부분을 온전하게 살펴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 윤순이 이룩했던 다양한 방면에서의 성취를 생각해본다면 윤순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전체적인 검토가 필요한데, 그 시작은 문학 방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문학관 이해가 문학 연구에 선행되어야 한다.
윤순의 문학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살펴보면 그의 문학관이나 문학적 특징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료가 당대 윤순이 지녔던 문학적 명성에 관한 것이고, 그 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집의 서문과 윤순의 행장 일부를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추정을 통해 윤순의 문학이 文章輔國을 목적에 둔 것으로, 윤근수 이후 이어져 내려온 家系의 문학 경향과 소론계열, 특히 그중에서도 강화학파의 일원이었던 그의 學脈과 政派의 문학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문학을 창작하기 위해 수식과 기교에 주목하기보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품을 창작했고, 典範으로 선택한 글의 본질에 부합하는 간결한 문장을 선호했으며, 문학의 창작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 많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시에서도 수식과 기교보다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시 속에 자신의 지향 세계와 의식 세계를 오롯하게 담고자 했다.
윤순은 현실적 효용을 이룰 수 있는, 감정과 내용이 진실한 문학을 추구했고, 그런 문학이 문학다운 문학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질박하고 순수하며 수식이나 기교보다 내용에 주목한, 實心을 담아 實見과 實得을 얻을 수 있는 문장을 올바른 문장으로 보았으며, 진실한 감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지어진 시를 올바른 시라고 여겼다.
이런 특성은 윤순이 감정과 내용이 진실한 문학을 통해 현실적 효용을 추구하여 감정과 내용의 진실성을 문학 창작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보았고, 문학을 통한 현실적인 효용의 구현을 문학의 최종적인 목표로 생각했다는 것과 인위적이고 기교에 가득한 수식이나 용어를 사용한 화려한 문학을 부정하고 질박하고 순수하며 자연스러운 문학을 추구하여, 수식이나 기교보다 작자의 감정과 내용을 문학의 중심에 두었으며, 기이하고 새롭거나 단순히 전범을 모방하는 문학의 창작 경향을 부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Baekha Yoon Soon's literature view. Baekha Yoon Soon is a representative a bureaucrat who represents the Soron frac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s one of the literary and scholar, and a calligrapher who connects the spirit of Joseon's style of penmanship. To date, most of the research on Yoon Soon has been done in his caligraphy field. This phenomenon is due to the fact that the accomplishments he achieved in the caligraphy field are relatively more prominent than other parts, and the current data related to the Yoon Soon is very small and it is difficult to fully examine the part other than the caligraphy. However, considering the accomplishments of the Yoon Soon's various aspects of the present age, it is necessary to thoroughly understand the Yoon Soon, and the beginning of the study should be done in the literary field, and the understanding of the literary view should be preceded by the literary research.
If you look at the surrounding evaluation of the literature of Yoon Soon, there is not much to confirm about his literary view or literary characteristics. Most of the data are about the literary reputation of the contemporary Yoon Soon, and the other contents can be estimated through the preface of a collection of works and the records of he's doing he's lifetime of Yoon Soon. However, this estimation suggests that the literature of Yoon Soon is based on 'Helping the Country through literature', which is related to the literary tendency of pedigree that has been followed since Yoon Geunsoo and the literary tradition of his schools and faction which was a member of Soron faction, especially among Kanghwa School. He created works based on contents rather than focusing on formula and technique to create such literature, preferred simple sentences that correspond to the essence of the writings chosen as examples, did not think about the creation of literature easily, and did not try to create many works. In poetry, I tried to include my own oriented world and consciousness world in poetry, focusing on contents rather than formula and technique.
The literature of Yoon Soon shows he pursued that the literature which can achieve realistic usefulness, and the literature which emotion and contents can be true, and it is considered that such literature can be literary literature. Therefore, it is simple and unadorned and pure, and focuses on contents rather than formula or technique, and It shows that he takes the sentences that can obtain the sincerity sees and realistic got with true heart and it shows that the poems naturally created by the true emotion were regarded as the correct poem.
Literature of true emotion and content, and saw the authenticity of emotion and content as the most basic element of literary creation. He thought that the realization of realistic usefulness through literature was the ultimate goal, and denied colorful literature using artificial and skillful formulas or terms, pursued a rich, pure and natural literature, It is found that the author has denied the tendency of writing literature that imitates strange, new, or simply exa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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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艮齋 田愚의 저서 간행 상황과 문제점

저자 : 鄭敬薰 ( Jung Kyung-ho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4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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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艮齋 田愚(1841~1922)의 문집 중 金澤述이 전한 華島手定本과 金永燮에 의해 간행된 『臼山雜著』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전우는 거대한 명성에 맞게 많은 저술을 남겼다. 『艮齋私稿』, 『艮齋先生文集』, 『秋潭別集』, 『艮齋先生文集拾遺』 등 문집을 제외하고도 단행본은 현재 12종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단행본은 전우 생전, 혹은 사후에 간행되었다. 이들 단행본 중에는 문집과 중복되는 작품 보다는 문집에 소재하지 않은 작품들이 대다수이지만 총제적인 전우 저서는 아직 학계에서 본격적인 논의 시도나 소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한 『구산잡저』는 전우의 장년기의 작품을 모아 중국 상해에서 문인인 김영섭에 의해 간행된 책이다. 상하 2권, 1책으로 「檢本」, 「一事編」, 「田氏朔望訓辭」 등 세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작품이 전우의 작품인지는 『艮齋年譜』 등을 통해 알 수 있고, 「검본」은 전우의 발문이 있어 간행 경위를 알 수 있었다. 발행인 김영섭은 저자인 전우의 허락여부를 밝히지 않았고, 『구산잡저』의 작품들이 이후 간행된 전우 문집에 미수록된 상태였다. 세 작품들의 구성과 내용을 볼 때 「검본」은 하나의 단독 저술로 보아야 하고, 「일사편」, 「전씨삭망훈사」는 잡저의 형태로 문집에 포함해도 가능할 것이다. 김택술이 필사했다는 원고본 화도수정본은 崔秉心과 같이 필사한 것으로 스승의 유훈을 충실히 계승하여 광복 후 간행을 도모했지만 김택술 생전에는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인 金炯觀에 의해 1975년, 1984년 등 이후에도 몇 차례 정본화 되지 않은 원고본 형태로 영인되었다. 원고본 형태의 화도수정본을 향후 정본 『간재집』의 완성에 있어 별도의 판본으로 가능 여부는 앞으로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전우, 최병심 문인들은 화도수정본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고 있어 정본 『간재집』을 위한 하나의 판본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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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晉州本 『艮齋集』 간행과 門人의 갈등

저자 : 姜玟求 ( Kang Min-gu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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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간재집』은 3종이 영인 출판되어 있는데, 문집의 권수는 진주본이 총 59권, 화도본이 총 60권, 신도본이 총 52권이다. 글의 종류는 편지가 가장 많으니, 진주본과 화도본이 전체의 77%, 신도본은 전체의 76%이다. 전반적으로 글의 종류별 작품 수는 화도본과 신도본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화도본의 총 작품 수는 신도본의 5,368편보다 75편 많은 5,443편이다. 이는 화도본이 수록한 書ㆍ雜著의 작품 수가 신도본보다 많기 때문이다. 또 이로 인해 화도본의 총 작품 수는 5,443편으로 진주본보다 178편 많아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성과 작품의 수는 화도본과 신도본이 近似하다.
진주본 『간재집』 간행을 둘러싼 문인 간의 갈등은 간재의 애매한 유언이 일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으니, 간재는 대부분 편지로 채워진 문집을 간행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또 논쟁 등이 다수 포함된 글이 公刊될 때 世人의 비난을 야기할 수 있고, 자신이 확정하지 않은 글을 제자와 자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무단히 넣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것에 더하여 '문집을 간행할 가치가 없으므로 단지 후손들이 보관만 하면 될 일이다.'라고 유명하는 전통도 문인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러나 간재 문인들의 분열과 갈등은 『간재집』 간행이 촉발하였을 뿐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오진영을 비판한 김택술 등은 진주본의 왜곡을 밝히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오진영이 간재의 의리를 배반하였다고 성토하는 데 주력 하였다. 이는 김택술 등이 오진영과 이념적 지향을 달리한 것에 기인한다.
『간재집』의 문헌학적 고찰은 善本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선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왜곡된 부분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이본 간의 비교를 통한 오류의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간재가 직접 확정하지 않았던 글을 굳이 문집에 편입시킬 필요가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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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艮齋 田愚의 『臼山先生風雅』의 체재와 구성

저자 : 金甫省 ( Kim Bo-su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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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 田愚(1841~1922)는 조선 말기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동안 간재의 경학·철학 사상을 연구한 논문이 다수 배출되었고, 간재 문집이나 문학을 주목한 논문도 간간이 이어졌다. 간재는 전통적 성리학을 통해 나라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대표적인 유학자이므로 그의 경학·철학관을 탐구한 연구성과가 비교적 많이 축적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간재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담아낸 작품들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연구가 특히 미흡한 간재의 한시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간재의 문집은 크게 세 판본으로 나뉜다. 이인구가 논산 '용동'에서 간행한 용동본, 오진영이 '진주'에서 간행한 진주본, 그리고 최병심·김택술이 1922년 정리된 원고를 필사하여 완성한 화도수정본이다. 세 판본에 실린 간재의 한시는 편차, 시 제목, 시어 등에서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인다.
간재의 한시는 여러 판본에 산재하는 형태로 존재할 뿐 아니라, 별도로 묶인 형태로도 존재한다. 바로 『臼山先生風雅』(2권 1책)이다. 구산선생풍아는 유일하게 별본으로 존재하는 간재의 한시집으로서 다양한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구산선생풍아』에는 세 판본에 실리지 않은 한시가 적지 않은데, 대체로 불특정 다수의 제자에게 남긴 시, 도학적 자질과 문학적 소양을 모두 발휘한 문인의 작품에 차운한 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읊은 시, 외세의 영향에 격렬한 감정을 담은 시라는 특징을 보인다. 즉, 『구산선생풍아』는 간재의 유학자와 문장가, 스승과 가장, 문명의 전환기에 격동하는 개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시 작품을 두루 수록하고 있어, 주요 세 판본보다 간재의 다양한 이면을 망라한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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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臼山旨訣』과 絅齋 金永燮의 간재학 계승

저자 : 鄭燾源 ( Jeong Do-w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3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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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臼山旨訣』은 田愚가 金永燮에게 보낸 편지 등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1897년 상해에서 석판본으로 인쇄되었는데, 김영섭은 약 1,000질 가량을 국내로 들여와 유포하였다. 김영섭은 사림들이 이 책을 통해 스승 전우의 도학을 이해해줄 것으로 믿었고, 자신 또한 전우 문하의 정통을 이은 제자로 인정받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이 책은 사림들의 거센 비판만 야기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우의 처신은 儒宗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한 전우는 이 책을 수거, 소각하도록 지시했지만,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김영섭은 사후에 문인록에서 삭제되었다. 김영섭이 복권된 것은 전우가 사망한 뒤이다.
이 책은 김영섭에게 전해진 전우의 心法을 담고 있고, 김영섭은 이를 자신의 학문적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포장하고자 하였으나, 전우의 문집은 이러한 포장을 거둬 냈고, 이 책에 담긴 많은 편지 역시 제외하였다. 제외된 편지 대부분은 물의를 일으켰거나 김영섭의 심법 수수를 유추할 만한 내용이 담긴 것들이었다. 전우가 생전에 자신의 문집을 직접 산삭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이 결국 전우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들과 그에 관한 주석은 전우와 김영섭이 산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전우가 제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도학을 전수하고자 하였는지 또한 보여준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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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後三國時代의 形勢와 弓王의 稱帝建元

저자 : 李敏弘 ( Lee Min-hong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99 (5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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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인물들 중에 후세인의 주관적 척도에 의해, 망각되었거나 과소평가된 사람이 적지 않다. 별 실질이 없는 인물이 특정 派閥과 현달한 後孫에 의해 과대평가된 사람도 많고,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례도 있다. 필자는 그들 가운데 弓裔를 선택하여 그가 우리 반만년 역사상 중원 皇帝들처럼 최초의 '稱帝建元'과 '五行立國'을 시행한 영도자였던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 와서 '稱帝建元'과 '五行立國'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중세는 중세의 척도와 가치관으로 접근해야 그 실상이 구명된다. 하물며 칭제건원의 이념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외세에 휘말리지 않고 주체성을 살려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해, 몸에 밴 사대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인식도 그 근저에는 稱帝建元의 經國理念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권력쟁탈에서 밀려난 패자에 관한 평가는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잔인하고 혹독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夏나라의 桀王과 殷나라의 紂王, 秦나라의 始皇과 조선조의 光海君이 그 대표적 帝王이다. 승자였던 禹王과 武王은 文武兼全에다 도덕심도 갖춘 성인으로 찬양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들과 비슷한 사례가 많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로 필자는 궁예를 선정하여 본고를 작성했다. 승자였던 王建은 寬仁厚德의 대명사로 묘사되어 있다. 만일 왕건이 궁예의 칭제건원을 계승하여, 皇帝로 군림하면서 발해의 유민과 합세하여 부국강병책을 써서 遼나라에 대항했다면, 당시 無主空山이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만주지역의 절반은 수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진실로 고려조의 禑王과 昌王의 성이 王氏가 아니라 辛氏였는지, 진시황의 성이 嬴氏가 아니라 呂氏인지도 의문이다. 승자인 李成桂와 劉邦 등이 易姓革命을 합리화하기 위한 權謀術數로 볼 수는 없는지, 언제까지 이 같은 왜곡을 기정사실로 여겨야 할 것인지. 이제 역사의 진실은 밝혀질 때도 되었다. 궁예의 '稱帝'에 대한 기록은 국내 史書에는 일체 없고, 중국 측 簡冊에만 전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諸侯禮樂이 아닌 皇帝禮樂과 稱帝建元의 經國理念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궁예의 經綸을 闡揚하여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鑑戒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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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규범성과 계층성 - 관각문학을 통해 본 성종대 왕실문화의 정립 과정

저자 : 具瑟妸 ( Koo Seul-ah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1-2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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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성종대 왕실문화의 정립 과정이 왕권 강화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이 과정에서 창작된 관각산문을 통해 관각문학의 勸戒的 역할과 諷諫의 글쓰기 방식을 분석한 것이다. 성종은 특별한 왕위 계승 과정으로 인해 나름의 방식으로 왕실 내부 기강을 정립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자 하였다. 신료들은 왕실문화를 공론의 장으로 포섭하는 가운데 계층성을 강조하는 성종의 국정 운영 방식에 대해 규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대립과 조율의 과정이 관각산문의 안팎에 반영되어 있다.
먼저, 성종 즉위 초기에 왕실은 后妃의 정치 참여를 嚴禁하고 모범적 선례를 따를 것을 강조하는 『后妃明鑑』 찬술 등의 활동을 통해 규범성에 대한 자발적 준수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신료들은 왕실의 의지에 대한 예찬과 성종에 대한 기대감을 관각산문에 담아냈다. 그러나 친정 직전, 성종은 私親을 추숭하는 방식으로 혈통의 위계를 드높이려 하면서 그 의례적 부당성을 논하는 신료들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관각문인들은 私家의 모범으로서 왕실이 견지해야 할 규범성을 우회적으로 환기하는 방식을 통해 성종을 규계하였다.
둘째, 창경궁 낙성을 전후한 시기 왕실은 宦官을 둘러싼 내홍을 겪고 있었다. 성종은 친왕 세력 확보 및 군왕의 인사권 등 계층적 우위를 앞세워 신료들의 제동에 불만을 토로하고, 이 문제를 에둘러 해결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성종의 명을 받은 金宗直은 사건의 당사자인 환관을 대상으로 직설적 경계의 의도를 담은 관각산문을 찬술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계층적 질서의 최상위자이자 왕실 내부의 구성원들을 완벽하게 제어해야 하는 존재로서 군왕이 관련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절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관각문인들은 규범성과 계층성의 구심점인 군왕을 대상으로, 사적 영역에서 보여주어야 할 행동규범을 제시하였다. 「環翠亭記」의 작가들은 군왕의 현실적 입장을 일정 부분 존중하는 가운데 긴장이 완화되는 사적 영역에서도 마음을 다잡아야 함을 풍간의 방식으로 피력하였다. 아유나 찬미에 그치지 않고, 의사소통 방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종의 성격을 고려하되 自淨의 정치적 의도를 사수하기 위해 고심한 관각의 글쓰기 방식이 새롭게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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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敬菴 盧景任의 「月幕山水記」와 그 장소성

저자 : 申斗煥 ( Shin Doo-hwa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1-287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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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살았던 敬菴 盧景任(1569~1620)의 「月幕山水記」와 그 장소성을 연구한 논문이다. 이 작품은 『敬菴先生文集』 卷2에 들어 있으며, 그가 1607년 6월에 영해부사로 부임하여 1611년까지 근무하던 시절에 월막의 산수를 유람하고 쓴 것이다. 「월막산수기」는 지금의 경북 영덕군의 팔각산과 옥계구곡을 유람하고 지은 기문이다. 이 기문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명소에다가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곳곳에 최초로 붙인 점들은 그 장소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의 재능이 드러났으며 여헌 장현광과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문학수업을 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산수를 유람하고 지은 기문들이 여러 편 들어 있다. 그가 어려서부터 공부한 성리학은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의 「월막산수기」를 분석한 결과 그 경관묘사가 뛰어나고 아름다워 간과 할 수 없는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점이 발견된다. 그의 문체는 아름답고 질박하며 온유돈후한 문예미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산수유기 전반에는 주자의 무이구곡의 경관이 인식되어 있었으며 주자처럼 시가로 강호를 구가하며 성리학적 학문수양에 전념하려는 강호가도가 발견된다. 이 논문은 새롭게 발견된 「월막산수기」를 바탕으로 관광의 명소로 부각되고 있는 경북 영덕의 팔각산과 옥계구곡의 장소성을 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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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東谿 趙龜命 산문에 나타난 속임수와 정치적 함의

저자 : 崔斗憲 ( Choi Du-heon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9-31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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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東谿 趙龜命 散文에 나타난 속임수와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정치적 함의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속임수가 나타난 3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侯公說項王辭」에는 유방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파견된 후공이 항우를 속이는 이야기와 유방이 '명의를 가장'하여 천하를 속이는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었으며 이 두 가지 속임수에 대한 조귀명의 평가를 추론하기 위해 「楚論」과 「倭驢說」을 분석하였다.
「楚論」의 분석을 통해 조귀명이 '강포한 사람'을 상대하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인식하였음을 확인하였으며,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 있는 정당화의 논리이자 허용의 범위를 두 가지로 추론하였다.
「倭驢說」의 분석을 통해서는 조귀명이 선험적이고 당위적으로 주어진 名에 實을 일치시키는 일반적인 명실상부의 원칙을 넘어, 실에 맞추어 명을 조정하고 심지어 명을 가장하는 것도 허용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점에 따라 속임수가 허용되는 범위 설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조귀명의 속임수 인식은 그 범위의 측면에서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분별되는 지점이 있으며, 이는 당대의 주요한 정치적 화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일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본 논문에서는 청나라의 위협에 대한 대응과 당쟁의 해소 방안이라는 두 가지 지점에서 조귀명의 속임수 인식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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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山雲 李亮淵의 『一日行事大略』 연구

저자 : 朴東昱 ( Pak Dong-uk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1-35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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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行事大略』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자료는 필사본으로 3권 1책이다. 서문이 1839년(산운의 나이 69세)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책이 집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一日行事大略』은 하루의 日課를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으로 일과지침서이다.
『一日行事大略』은 총 38개 항목이다. 상권에서는 사친과 독서를 중심으로 7개 항목을, 중권에서는 몸과 정신, 태도, 인간 관계 등 20개 항목을, 하권에서는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11개 항목을 다루고 있다. 상권은 기존의 일과 지침서처럼 시간대별로 기록하고 있지만, 중권과 하권은 인간사의 다종 다기한 관계와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산운이 밝힌 것처럼 하루에 지켜야 할 일이지만 평생 동안 지켜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38개의 항목을 다른 식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저자의 편찬 의도에 따라 각 권의 편제별로 살펴보았다.
요즘 시테크와 자기계발서가 크게 주목받고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진정한 내면의 변화를 끌어내기보다는 자신을 포장하고 과장하는 데 치중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 않다. 『一日行事大略』에는 이미 시효가 만료된 가치도 있지만 인간 사회의 보편적 문제를 담은 것들도 적지 않아, 연구자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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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橘山 李裕元의 燕行과 記錄 - 『燕槎日錄』을 중심으로 -

저자 : 金仁奎 ( Kim In-gyu )

발행기관 : 동방한문학회 간행물 : 동방한문학 9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1-38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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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槎日錄』은 이유원의 연행록으로 1875년 7월 30일 서울에서 출발해 10월 1일에 북경에 도착한 후, 11월 2일에 다시 북경에서 서울로 출발하고, 같은 해 12월 16일에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저술이다. 이유원은 『연사일록』에서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하기도 하며, 풍광이나 지역의 특색들을 소개하면서 연행에서 얻은 감회들을 표현하였다. 기존 『林下筆記』나 『嘉梧藁略』을 보면 이유원은 작품을 지을 때 기본적으로 메모와 재배치, 혹은 자신이 봤던 문헌들을 정리하거나 참고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하지만 『연사일록』은 실제 자신이 연행을 통해 접했던 내용들을 비롯해 자신의 감회나 도처에서 느낀 생각들을 시로 표현하거나 그와 교유했던 중국 문인들과 주고받은 내용들을 기록했다. 이 점은 『임하필기』와 『가오고략』과는 완전히 다른 저술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이 두 저서가 편집자와 비평가로서의 안목을 가지고 지은 것이라면, 『연사일록』은 순수한 자기의식 세계가 투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연사일록』은 이유원의 작품을 보고 누군가 비평, 혹은 감상을 頭註로 기록하고 있다. 그 두주는 짧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연행록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사일록』은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의 회담을 기록하고 있는 데, 이들 대화는 대부분 조선에 관한 언급이었다. 내용은 비록 이유원의 연행에 해당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 회담 내용이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유원은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결국 본고는 『연사일록』을 통해 기존에 연구가 되지 않았던 이유원의 2차 연행을 통한 기록이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와 시인으로서의 이유원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은 그간 이유원을 정치가, 혹은 산문가를 넘어 종합 문학가로서의 위상을 발견하여 19세기 문인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또 하나의 예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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