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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보건당국의 신체 및 사회에 대한 무균화 기획과 질병 낙인의 지속 ― 한센병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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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당국의 신체 및 사회에 대한 무균화 기획과 질병 낙인의 지속 ― 한센병 사례를 중심으로

Sterilization Projects Led by Public Health Authorities on Body and Society, and the Continuation of the Disease Stigma: Focusing on the Case of Hansen’s Disease

김재형 ( Kim Jae Hyung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6월
  • : 49-80(32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34.2


목차

1. 머리말
2. 일제강점기 세균설에 근거한 보건제도의 도입과 한센병 환자에 대한 조선 사회의 낙인과 차별 형성
3. 신체 내부의 무균화와 ‘음성나환자’의 탄생
4. 음성나환자를 둘러싼 신환자 발견 사업과 낙인과 차별의 지속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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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필자는 한센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과정과 이유로 인해 10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강고히 지속되었는가를 세균설이라는 의료지식과 이에 근거한 보건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에 세균설과 이에 근거한 엄격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이 도입되는 과정과 그 결과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자리잡게 된 과정을 선행연구와 의학 보고서 및 논문, 신문자료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여 드러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과 낙인과 차별은 광복 이후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되었다. 효과적인 치료제의 개발과 사용으로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으나, 정부와 의료전문가들은 이들을 계속 ‘환자’로 인식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사회에 숨어 있는 신환자들을 색출하여 통제하기 위해 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모두 완치된 이들의 삶을 고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신체 내부와 사회 내의 균 제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오히려 강고해졌다. 이러한 보건당국의 무균화 기획과 이로 인한 질병 낙인의 지속은 코로나19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 현재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where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faced by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in South Korea originated, and the causes and processes that have maintained it for nearly 100 years. It focuses on the medical knowledge of germ theory and the health policies based on it. The introduction of a strict policy of controlling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which was based on germ theory, and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this caused is clarified by analyzing various sources of historical data, including previous studies, medical reports, medical papers, and newspaper materials. Both leprosy patient control policies and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continued in different forms even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ism. With the development and use of effective treatments, leprosy has become a curable disease, but governments and healthcare professionals have perceived them as “patients” and created new institutions to monitor and control them. In addition, a system was developed to identify and control undetected patients in society. However, the stigma and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affected by Hansen’s disease has remained strong, as all these new systems focused only on the removal of bacteria inside the individual’s body and within society, rather than considering the lives of those who were completely cured. The history of the ‘germ free’ project led by health authorities and the resulting persistence of stigma is expected to provide lessons for contemporary Korean society as it deals with the experience of COVI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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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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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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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획특집: 한국 우생학의 역사와 오늘

저자 : 박지영 , 현재환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0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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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민족적 체질' 만들기 ― 식민지 시기 조선인 아동 발육 표준 연구

저자 : 박지영 ( Park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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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지금까지 제국주의의 도구로 알려져 온 생물측정학이 식민지 조선에서 피식민자들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탐구한다. 그러기 위해 이 논문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경성제국대학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조선인 위생학자들이 수행한 아동 발육 표준 연구를 분석한다. 검토 결과에 의하면, 조선인 위생학자들은 생물측정학을 그것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체질인류학의 맥락에서 분리하여 아동 발육 연구에 적용했다. 그런 선택에는 민족의 체질을 알고 개선해야 한다는 민족개조론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진 조선인 발육 표준은 조선인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기준이자 향상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그때까지 일본인 의학자들의 생물측정학 연구가 일반적으로 민족의 특질을 선천적이고 인종적인 것으로 묘사하던 것과 달리, 조선인 위생학자들의 연구가 그것을 후천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인 위생학자들의 연구가 식민 통치에 저항적이거나 대립적이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식민 당국은 식민 통치의 정당화와 안정화를 위해 조선인 체위향상 정책을 추진했으며, 조선인 위생학자들은 그 정책의 지원을 받고 또 그에 기여하면서 조선인의 발육에 관한 연구와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서술을 토대로, 이 논문은 조선인 위생학자들이 생물측정학을 '민족적 체질'을 알고 개선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그 활동은 조선인 사회와 식민 당국의 협력과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주장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how Korean medical specialists used and interpreted biometrics under Japanese rule in Korea. To do that, this paper examines studies on growth standards in the Korean population by Korean researchers in the Department of Hygie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s College of Medicine during the 1930s and early 1940s. The Korean Hygienists applied biometric methodology to research on growth patterns in Korean children, detaching biometrics from the anthropological context where it had been generally used. Their choice reflected a belief in Minjok Gaejoron, the notion that the composition of the Korean nation should be learned about and improved. From that point of view, growth standards were considered as both criteria for distinguishing Koreans from other ethnic groups and an area that could be targeted and developed. This shows that whilst Japanese anthropologists described Korean growth standards as innate and racial, Korean hygienists considered them to be acquired and variable. However, this does not mean that the Korean hygienists resisted Japanese colonial rule. Korean hygienists contributed to the public health and wartime manpower management policies of the colonial authorities. They received support from the colonial state to study and promote the physical development of Korean children. Based on these observations, this paper argues that the Korean hygienists used biometrics as a tool to learn about and improve 'national composition,' and that such activities were possible through cooperation and compromise between Korean society and the colonial author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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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우생'론과 의과학자들, 1945~1964

저자 : 현재환 ( Hyun Jaehw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5-9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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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970년대 가족계획사업과 「모자보건법」의 우생학적 측면을 조명하는 연구들 덕분에 해방 이후 한국의 우생학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글은 해방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생물학자들과 의학 전문가들의 활동들을 검토하여 이들이 1945년 이전의 미국 우생학과 전전(戰前) 및 전후(戰後) 일본의 민족위생학(民族衛生学)을 자원으로 삼아 '민족우생' 혹은 '국민우생'을 과학적으로 온당한 분야이자 담론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의과학자들은 적어도 1970년대초까지 우생학을 '건전한 과학'으로 가르치고 홍보했으며, 1950년대에는 동성동본 불혼제 등과 같이 생식과 관련된 사법적 문제에 우생학의 이름으로 개입했다. 특히 권이혁(1923~2020)을 위시한 의학 전문가들은 1950~60년대 사이에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따라 우생법을 입안해 '유전병' 환자들의 강제불임수술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의과학자들이 해방 이후 한국 우생학과 우생주의 형성에 맡은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가족계획사업에만 초점을 맞춘 국민우생법안(1964) 입안의 역사를 재고한다. 나아가 한국이 '우생사회'가 되어가는 과정과 그 면모를 드러내려는 최근의 간학제적인 노력에 과학사가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In recent years, interest in South Korean eugenics has grown among social historians, particularly with regards to eugenic aspects of family planning in the 1970s and the Mother and Child Health Act of 1973. Examining the scientific discourse and social activities of biologists and medical researchers from the post-liberation period to the early 1960s, this paper argues that these medical scientists played a crucial role in making “national eugenics” (minjok usaeng) appear to be objective science and legitimate medical policy. Using pre-WWII American eugenic theories and prewar and postwar Japanese ideas about racial hygiene (minzoku eisei), they presented eugenics as a “sound science” and intervened in legal debates concerning human reproduction-related family laws. Furthermore, they continuously pushed for legislation of a eugenics law modeled on the Japanese Eugenic Protection Law (1948), and hoped to legalize the sterilization of people with cognitive disabilities. Through this case study, I demonstrate that History of Science can contribute to the current interdisciplinary effort to revisit the family planning-centered history of Korean eugenics legislation and help uncover the origin of eugenic ideas in South Korean society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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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획특집: 고등교육의 경험과 그 (포스트)식민적 효과들

저자 : 정준영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95 (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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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학의 장'과 식민지 고등교육

저자 : 윤해동 ( Yun Hae-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51 (5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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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의 조선학은 국학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학운동'이라는 좁은 렌즈만으로는 조선학의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학술장이라는 개념을 분석도구로 삼아,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분석과정에서 특히 고등교육과의 관련을 중시했다.
1920년대 벽두 최남선의 조선학선언을 통해 조선학이라는 지평이 서서히 조선사회에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조선인들이 주도하는 조선학은 어문학과 발명학이라는 하위장에서만 새로운 시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1926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본격적인 조선학 연구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대학에 부임한 일본인 연구자와 1929년부터 배출되는 조선인 졸업생 그리고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조선인 해외유학생들이 조선학 붐의 주체가 되었다.
1930년 결성된 청구학회는 본격적인 조선학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조선학 연구 종합학회가 출현한 것이다. 경성제대에서 제도화된 분과학문을 바탕으로 청구학회가 조선학 전문지식을 본격적으로 생산해내게 되었다. 한편 이를 계기로 1930년 이후 어문학, 철학, 민속학, 경제학 등의 인문학과 의학, 발명학, 박물학 등의 이공학 분야에서 조선학 하위 학술장이 족출하게 되었다. 조선학의 장은 이리하여 1930년대 초반 화려하게 만개하게 되었다.
이런 하위장의 성립을 토대로 1934년 조선인 중심의 조선학 연구 종합학회인 진단학회가 탄생하였다. 진단학회는 역설적이게도 과학적 조선연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조선학 전분야의 하위장 연합으로 발족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 우파 그룹이 조선학의 상징으로 실학을 내걸고 조선학운동을 시작한 것은, 이런 과학적 조선연구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조선학의 성립을 자극한 것은 일본의 조선 연구였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조선학 연구에 대한 자의식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조선인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경성제국 설립과 유학생의 유입이 조선학 형성의 신호탄이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선학에 대한 자의식은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강화하고, 고등교육을 통해 배출된 연구인력은 조선학 연구를 진전시켜 갔다. 식민지기의 고등교육은 조선학을 추동한 자극의 원천이자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Joseon studi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can placed within the tradition of national learning (國學). As such it is not possible to understand the full extent of Joseon studies through the narrow lens of the 'Chosunhak Movement'. This article analys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Joseon studies using the concepts of academic fields and sub academic fields, emphasizing Joseon studies' relationship with higher education was emphasized.
In the 1920s, through the declaration of Joseon Studies by Choi Nam-sun, the horizon of Joseon Studies gradually emerged in Korean society. However, during the 1920s, only minor and experimental research in the sub-field of linguistics and 'invention' (that is engineering) was led by Koreans in Joseon studies. Instead, Keijo Imperial University, which opened in 1926, laid the foundation for full-fledged Joseon studies. Japanese researchers who took office at universities, Korean graduates who had studied abroad, and from 1929, Korean graduates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came together at the same time to become the main agents of the Joseon studies boom.
The formation of Cheonggu Academic Society (靑丘學會) in 1930, signaled the full-fledged launch of Joseon studies. The first comprehensive academic society on Joseon studies centered on Japanese researchers appeared. Based on the academic discipline institutionalized at Keijo University, the Cheonggu Academic Society produced expertise in Joseon studies in earnest. As a result, from 1930, the sub-academic field of Joseon studies have been established in humanities such as language and literature, philosophy, folklore studies, and economics, as well as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disciplines such as medicine, 'invention', and natural science. The academic field of Joseon Studies thus came to be in full bloom in the early 1930s.
Based on the establishment of these sub-field, the Jindan Academic Society (震檀學會), a comprehensive society for Joseon studies centered on Koreans, was born in 1934. Paradoxically, the Jindan Academic Society put forward 'scientific Joseon research' as a slogan, and it was able to be launched as a sub-field alliance in humanities of Joseon studies. The reason why the nationalist right-wing group started the Joseon Studies Movement with Silhak (實學) as a symbol of Joseon Studies was this sense of crisis over scientific Joseon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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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미션스쿨의 지식인 풍경 ―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을 중심으로

저자 : 이경숙 ( Lee Kyu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3-18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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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식민지 미션스쿨에 재직 중인 지식인들을 하나의 풍경화로 묘사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풍경화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본다. 하나가 풍경화가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공간, 둘째가 풍경화가 포착하는 특정한 시간대, 마지막으로 풍경화의 구도를 잡아주는 출발점이자 확장선인 소실점이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비추어 평양에 있었던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을 사례로 식민지 미션스쿨 지식인들을 풍경화로 그려보고자 한다. 지식인 풍경이라는 이 새로운 방법은 식민지 지식인들을 당대의 시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좀 더 사회적 존재로 이해하기 위해 고안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숭실전문학교 교수들이 활동한 공간은 식민지에서는 때 이르게 글로벌하면서도 로컬했다. 지역 유일 사립전문학교였던 숭실전문학교는 평양의 역사와 식민지적 특성으로 인해 인구구성이 비교적 다양했고, 교수들의 학력구성도 제국을 기반으로 글로벌했다. 동시에 평양이 역사적으로 오래 차별받아 온 서북지역이이면서 민족주의와 사립학교의 설립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라는 특성이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들 역시 지역에서의 책무를 기꺼이 맡는 지역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지식인들이 처한 시간대를 보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지식인들의 직선적 시간과 이를 제국주의 국가권력의 시간 쪽으로 끌어당기는 권력의 힘이 충돌하면서 울퉁불퉁한 구부러진 시간대를 살아갔다. 셋째, 지식인들에게 핵심적 역할인 지적 행위를 소실점으로 두고 봤을 때, 식민지 미션스쿨 지식인들은 식민지라는 한계와 전문학교라는 한계 속에서 그들의 학문적 활동을 진행했으며, 여러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기술교육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This article paints a landscape painting of intellectuals working at the Colonial Mission College. The author believes that landscape painting includes three elements. The first is the wide space landscape paintings describe, the second is the specific time zone captured by landscape paintings, and the third is the vanishing point. This is the starting point and extension line that defines the composition of the painting. In light of these three elements, the author attempts to paint a picture of intellectuals in colonial mission college using the example of Soongsil College professors in Pyongyang.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space of intellectuals at Soongsil College, a colonial mission school, was both global and local. Second, time at Soongsil College was uneven and curved. The straight time of intellectuals trying to move toward the future collided with the colonial power that pulled it toward the time of state power. Third, with regards to intellectual activity, which is a defining role for intellectuals, professors at Soongsil College conducted their academic activities under the limitations imposed by Japanese colonialism and the institution's status as a vocational school. They tended to focus on technical education as this met the interests of various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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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묵은 술을 새 부대에 ― 고종의 '전제왕권'과 관보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2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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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갑오개혁 때부터 발행된 인쇄 관보는 이듬해 6월에는 일본 관보와 비슷한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근대국가의 관보는 일차적으로 법령을 공표하고 정부 소식을 전하는 매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고종대의 관보에서 법령보다 더 부각된 것은, 규정과 달리 관보 맨 앞자리로 옮겨진 「궁정녹사」였다. 「궁정녹사」는 본래정치와는 별개로 임금과 왕실의 동정, 각종 제사 소식을 싣는 주변적인 꼭지로 설정되었지만, 고종대 관보에서는 “詔曰”이라는 명령 형식을 취한 고종의 정치적 결정, 관리 인사, 각종 상소와 고종의 비답이 상당한 분량으로 이 꼭지를 채웠다. 심지어 고종이 자신의 “무한하온 군권”을 강조한 「대한국국제」를 공포한 것 역시 「궁정녹사」 난을 통해서였다. 「궁정녹사」는 관보 속의 또다른 관보였고, 고종대 관보는 법치의 매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제왕권의 과시를 위한 매체였다.


During the Gabo Reform, the government in Korea began to be publish a government gazette. The government gazette of the modern state is primarily a medium for promulgating and publishing laws and delivering government news. However, in the King Gojong Era, “The Royal Events” section, which was originally only a secondary concern, was given a prominent position. Originally, “The Royal Events” section covered the daily life of the king and the royal family and ancestral rituals. However, during the King Gojong Era, this section reported on the emperor's rule rather than the news of the court's event. Through this section, King Gojong even promulgated the Constitution of the Korean Empire which emphasized his “infinite sovereignty”. The government gazette in King Gojong Era was a medium for the display of aut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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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해방전후 위문공연의 연속성에 대한 연구 ― 위문대와 군예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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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방전후 위문공연의 연속성에 대해 위문대와 군예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당시 위문대/군예대는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전국 각지에 걸쳐 순회하였으며, 관객들에게 위문연예라는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위문공연은 상이군인과 산업전사 같은 기표를 통해 남성성을 찬양하면서 반공사상과 계몽의식을 반복적으로 함양하기도 했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악극단과 연예계의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 문화 형식 등이 계승되면서 재구성되었던 측면이 존재했다. 위문대/군예대 안에는 기생과 접대부를 포함하는 여성 예인이 참여하였다. 그녀들은 무용과 음악을 통해 위문연예를 수행하면서, 가두에 진출하여 위문금까지 모금하여 헌납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차원에서 위문하는 문화가 생성되면서도, 남성성을 보완하기 위해 여성 신체가 비/자발적으로 전유되었던 서비스 노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looks at the continuity between performances given for troops in Korea before and after liberation, focusing on military arts troupes and what were known in Korea as “comfort groups”. The comfort groups and military arts troupes toured all over the country, undergoing various transformations and providing the audience with a visual spectacle. The shows praised masculinity through symbols such as disabled soldiers and industrial warriors, while cultivating an anti-communism and enlightenment consciousness. Key aspects of these performances were inherited and reconstructed from the musical theater troupes and the entertainment industry of colonial Joseon, including the human resources, networks, cultural forms. Female entertainers, including gisaengs and waitresses, participated in the comfort groups and military arts troupes. They even raised money for condolences by performing dance and music in the street. This can be seen as service labor in which the female body was involuntarily/voluntarily appropriated to supplement masculinity, creating an everyday culture of “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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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신군부 정권의 가속 통치와 '3S 정책'

저자 : 김학선 ( Kim Hak-s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5-30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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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S'(Screen, Sex, Sports)란 용어는 보통 우민화 정책을 지칭하는데, 대한민국의 1980년대를 특징짓는 표현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신군부 정권의 '3S 정책'의 실재를 부정하거나 '3S'는 당시 자율화·자유화 정책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라는 의견이 맞서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신군부 정권의 가속화 열망에서 비롯된 가속 통치의 측면에서 '3S 정책'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가속통치란 인접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정통성을 얻지 못한 지배세력이 미래를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워 사회 가속화를 촉진하는 통치행위를 가리킨다.
신군부 정권은 2번의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했으므로 정당성 확보가 우선순위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황은 예전과 같은 고속성장을 보장할 수 없었다. 신군부 정권은 정치·경제 안정화에 주력하면서 속도 조절 담론을 통해서 고속성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여기'의 문제를 현재가 아니라 미래적 시점에서 해결하자는 논리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며 가속 정치를 시행했는데, 그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3S'다. 신군부 정권은 '3S 정책'을 통해서 삼중의 속도-과거와의 단절 속도, 자본의 회전 속도, 속도에의 몰입과 속도 경쟁의 자유가 일상화되는 속도-를 가속화함으로써 자신의 가속화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3S 정책'이란 곧 '3S' 소비책을 의미하는데, 신군부 정권은 '3S'에 대한 소비 진작을 통해서 정치·경제적 당면과제를 해결하고, 정권의 정당성과 국민 동원을 신속하게 이루고자 했다. 본 글에서는 '3S'의 구체적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당시 신군부 정권이 펼친 '3S 정책'을 정리하고, 그로 인해 '3S'가 1980년대 시공간에서 산업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신군부의 스크린 정책은 영상 산업, 유흥·향락 정책은 성 산업, 스포츠 정책은 스포츠 붐과 관련해서 논의한다.


South Korea in the 1980's is often characterized by the term “3Ss” (Screen, Sex, Sports). 3Ss culture is often assumed to have been the result of a conscious state policy to “dumb-down” society. However, some contend that this interpretation misrepresents the nature of the New Military Group's 3S policy, or argue that 3S culture emerged naturally as a result of growing autonomy and liberalization. This article seeks to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the 3S policy, arguing that it can be seen as the result of “accelerated government”. Accelerated governance stemmed from the New Military Group's desire for acceleration, and refers to governing behaviors in which the ruling power promotes social acceleration because it has not obtained legitimacy from the adjacent past or present.
Since the New Military Group usurped the government through two military coups, securing legitimacy was a priority. However, political instability and the economic depression meant it could not even guarantee that growth would match the pace of previous years. Through the 3S policy, the new regime instead tried to realize its aspiration for acceleration by speeding up in three ways―in the rate of disconnection from the past, the speed of capital rotation, and the rate at which immersion in speed and speed competition became commonplace.
The 3Ss policy refers to the 3Ss consumption policy. In order to determine the concrete reality of 3S, this article summarizes the New Military Group's 3S policy and its attempts to govern by stimulating consumption of the 3Ss. This explains how the 3Ss established itself as an industry in the space and time of the 1980s. The new regime's entertainment and pleasure policies, screen policy, and sports policy, are discussed in relation to the video industry, the sex industry, and the sports 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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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80-90년대 발전국가 전환기의 부실기업 처리 ― 국제그룹과 한보그룹 사례

저자 : 오형석 ( Oh Hyu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7-3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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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발전국가 전환의 불균등성이라는 맥락에서 1980-90년대 대표적인 부실기업인 국제그룹과 한보그룹 사례를 분석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정부는 여러 방면에서 이전의 전형적인 발전국가의 면모를 탈색하려 했다. 그 와중에 큰 규모의 기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부 대응은 각각 상이했다. 1985년 국제그룹 사례에서는 정부가 해체를 직접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계열사별 인수업체 선정까지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국제그룹이라는 개별 기업의 부실이 국가적 차원의 부실로 심화되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정부의 직접개입은 민간 자율이라는 경제 정책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더 큰 위기의 방지라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모순은 1997년 한보그룹 위기 상황에서 기업주, 정부, 은행이 서로 다른 판단을 하여 한보를 부도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가 무개입으로 일관한 가운데, 기업주 정태수의 은행관리 거부라는 돌발상황이 발생했고, 은행은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하던 가운데 청와대 한보 부도 결정이라는 오보를 즉각 수용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97년 1월 한보 부도 이후의 결과는 대기업의 연쇄 도산이었다.


This paper analyzes the Kookje dissolution case of 1985 and the Hanbo bankruptcy case of 1997, both of which are representative instances of corporate insolvency in South Korea. The Kookje dissolution case of 1985 show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uccessfully using a strategy of active market intervention to prevent the spread of insolvency. However, the bankruptcy of Hanbo in 1997 suggests that this strategy was extremely limited. In the Hanbo crisis, the government, banks, and corporate owner's evaluation of the situation differed, and consequently each took different actions. The result was the Hanbo Group's bankruptcy. This was not only an undesirable outcome for the government, banks, and corporate owner, but also led to series of large corporations going bankru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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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융희연간의 통계체계 구축과 농업통계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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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금껏 연구된 바 없는 갑오개혁기부터 보호국기까지의 정부통계에 대한 것이다. 갑오개혁 이래 '통계'는 정부의 일상적 문서행정의 일부로 규정되었으나, 고종 재위 동안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전통적 관료제의 보고체계도 여전히 작동했지만, 그런 정보들은 거의 공간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순종 즉위 이후, 일본 세력에 의해서다. 메가타 쥬타로 재정고문부의 인력과 노하우를 물려받은 탁지부가 한발 앞서 통계체계를 구축하고, 인쇄된 숫자의 작은 '쇄도'를 만들었다. 1908년부터 탁지부는 징세기구의, 농상공부는 지방행정기관의 인력을 동원해서, 경쟁적으로 조사를 하고 통계를 집계했다. 탁지부는 재정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 걸친 통계서를 다수 간행했고, 농상공부는 일본인 이민 유치를 위해 한국 사정을 소개하는 책자들을 제작했다. 물론 초창기의 통계, 특히 농업통계는 매우 부정확·불완전했다. 조사원의 훈련도 없었고 현장에서 표본추출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 같지도 않다. 조사와 통계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조사·통계의 확장이 식민지화 과정과 맞물려 있었던 점이 큰 한계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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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건당국의 신체 및 사회에 대한 무균화 기획과 질병 낙인의 지속 ― 한센병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김재형 ( Kim Jae Hy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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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필자는 한센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과정과 이유로 인해 10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강고히 지속되었는가를 세균설이라는 의료지식과 이에 근거한 보건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에 세균설과 이에 근거한 엄격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이 도입되는 과정과 그 결과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한국 사회에 강고하게 자리잡게 된 과정을 선행연구와 의학 보고서 및 논문, 신문자료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여 드러내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센병 환자 통제 정책과 낙인과 차별은 광복 이후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되었다. 효과적인 치료제의 개발과 사용으로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으나, 정부와 의료전문가들은 이들을 계속 '환자'로 인식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사회에 숨어 있는 신환자들을 색출하여 통제하기 위해 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모두 완치된 이들의 삶을 고려하기보다는 개인의 신체 내부와 사회 내의 균 제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오히려 강고해졌다. 이러한 보건당국의 무균화 기획과 이로 인한 질병 낙인의 지속은 코로나19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 현재적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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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신체제(1972-1979) 하 '좌익수' 전향정책의 역사정치적 성격

저자 : 김동춘 ( Kim Dong-ch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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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사상범, 수감 좌익수에 대한 전향공작은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 감옥에서 징벌적 전향 압박이 계속되었지만, 특히 유신 체제에서 전향공작은 더욱 폭력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폭력과 고문까지 가하면서 좌익수들에게 전향을 압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접촉할 수 없는 특별 사동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각은 감옥 밖에서는 물론 감옥 안에서도 주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이들의 비전향 상태에 대해 느낀 '위험'은 실제 정치적 위험보다는 수백 명의 비전향수가 풀려날 경우, 대북 관계에서 남한 체제의 정당성과 대북 이념적 우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종의 신앙 개종을 요구하는 전향 공작은 멀리는 천황제 하의 일본의 전향 정책, 특히 일제 말 전시파시즘의 유산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의 전향공작이 갱생, 사회복귀를 지향하는 사회통합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나 한국의 전향공작은 징벌적 성격으로 일관했고, 폭력과 강압에 주로 의존하였다.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반공 국가에 항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좌익수 대상 전향공작은 '통일'과 '민족해방'의 '진실성'에 확신을 가진 이들의 죽음을 각오한 저항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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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학에서 사회학과는 1946년 서울대학교의 개교와 함께 처음 설치되었으나, 다른 대학으로의 확산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설치되었던 학과의 폐과도 이어져서 1974년까지 사회학과가 있는 대학은 전국에 5곳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5년 충남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이듬해부터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사회학과의 설치가 이어졌고, 1979년과 1980년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1980년대 초 사회학과의 수는 전국에 걸쳐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75년 충남대에 사회학과가 설치된 것은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에 대해 학문적 호감을 갖고 있던 박희범 총장이 낙후되어 있던 충남대 개혁의 방법론의 하나로 사회과학의 기초 학문인 경제학과와 사회학과의 설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한 박 총장은 우수한 교수진의 충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1976년부터 다른 주요 국립대학에 사회학과가 설치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런 파급 효과는 일부 사립대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사회학은 1975년에서 1983년 사이에 제도적 기반을 크게 확충할 수 있었다.
한편 1975년은 1960년대 이후 가속화된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정책적 대응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점에서 나타난, 지방대학 육성이라는 대학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사회학이란 학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수요가 제고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충남대 사회학과의 설치는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동의 조건 하에서, 향후 일어날 연쇄 반응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선례의 축적은 1980년대 초 대학팽창의 시기에 주요 사회계 학과 중에서 사회학과의 증설이 가장 높은 비율로 선택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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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포퓰리즘, '국민주권'의 변형을 지향하는 정치이념

저자 : 윤종희 ( Yoon Jongh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18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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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후,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을 촉발한다.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우려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국민주권을 실현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대부분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것에서 비롯된다. 기존 연구들은 포퓰리즘으로 지칭되는 사례들에서 공통의 특성을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개념을 정의한다. 그런데 이 같은 방식은 너무도 많은 정치현상을 포퓰리즘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포퓰리즘의 외부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기하학의 방식을 따라 구조적 발생원인에 반영하여 개념을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의 적대적 대립물로 구성된 현실의 '인민'이 주권자임을 주장하면서 대표제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정치이념”으로 규정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기 때문에 대표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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