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漂泊を生きる

윤건차
  • : 한일민족문제학회
  •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6월
  • : 203-226(24pages)
한일민족문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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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방랑(표박)시인, 죽음을 살다-호사이(放哉), 산토카(山頭火), 김삿갓을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근대 일본의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오자키 호사이(尾崎放哉, 1885~1926)와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 1882~1940)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조선의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金笠, 1807~1863)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써보았다. 여기서 방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고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을 산다는 것은, 그리고 시작(詩作)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의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방랑시인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기가 높다. 사이교(西行), 잇큐(一休), 바쇼(芭蕉), 료칸(良寛), 그리고 이와 비슷한 오자키 호사이와 다네다 산토카가 있다. 이들의 삶은 고통과 고독, 그리고 수행과 신앙 등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는 여정이었다. 참고로 와타나베 도시오(渡辺利夫)가 지은 『호사이와 산토카(放哉と山頭火)』(ちくま書房, 2015년)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서적의 부제가 “죽음을 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제목·부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호사이와 산토카, 그리고 조선의 김삿갓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사이는 “몹시 쓸쓸하다”라고 하고, 산토카는 “어째서 이렇게도 쓸쓸한가”라고 한탄하면서 깊은 고독을 술로 달래며 다가오는 최후를 예리하게 응시하려고 했고, 죽음에 대한 각오라고 하는 것을 청징(清澄)한 자유율(自由律) 하이쿠(徘句)로 승화시키려 했다. 단 ‘방랑시인’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으나 호사이든 산토카이든 그 실태는 타인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걸식시인’이라는 측면이 농후했던 것 같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 죽음의 각오 그것이 바로 여행이고 거기에서 시가가 탄생한다. 내 나름대로 호사이와 산토카에 관한 키워드를 열거하자면, ‘고독·쓸쓸함’, ‘술’, ‘표박·방랑·편로(遍路)’, ‘걸식·행걸(行乞)’, ‘하이쿠’, ‘선(禅)·불교’, ‘인생·고통’, ‘죽음·자살’, ‘어머니·처’, ‘암(庵)’ 등으로, 모두 자기 삶의 태도·삶의 방식에 관한 말이다.
오자키 호사이는 돗토리현(鳥取県)출신으로 부친은 돗토리 지방법원 서기였다.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나 독특한 성격으로 학우들과도 뜻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보험회사에서 출세 코스를 걷지만 술버릇 때문에 실패하고, 나중에 경성에서도 일한다. 이윽고 그때까지의 생활을 버리고, 처를 두고 혼자 방랑에 나서, 하이쿠 동료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방대한 수의 하이쿠를 짓는다. 한편 다네다 산토카는 어머니의 투신이라고 하는 비참함을 껴안고 생애를 보내는데, 자유율하이쿠의 대표적인 시인이 된다.
인생은 어렵다. 불안과 고민이 달라붙어 최후의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이 점,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방랑시인에게 있어서 표박·방랑·편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호사이와 산토카를 염두에 두면서, 본고에서는 조선 왕조 후기에 살았던 김삿갓에 대해서 썼다. 호사이나 산토카보다 약 80년 앞서 1807년에 태어난 김삿갓은 부패한 봉건지배층에 반항하는 민란이 이어지고, 또 한반도 연해에 이양선(외국함선)이 자주 출몰하며, 심지어는 금교(禁敎)였던 천주교가 조선의 지식층과 여성층에 깊숙이 침투해 가는 사회 전환기·동란기에 태어났다. 강렬한 개성의 김삿갓은 명문 출신이었으나 부패한 왕조에 의해 가세가 기울고, 그 사실을 안 뒤 출분(出奔)하여 죽을 때까지 반골(反骨)의 삶을 산 생애의 비극성이 있고, 그로 인한 자아의 갈등이 있었다.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의 시에는 양반, 농민, 노인, 여인, 유자(儒者), 승려, 점쟁이, 풍수지리인,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인간이 등장한다. 그만큼 당시 사회적 실상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빈곤의 제상을 적지 않게 읊었던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호사이나 산토카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그 하나로서 호사이나 산토카는 ‘죽음을 산다’는 것은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죽음, 고작 구우(句友)의 죽음이었지 타인 일반의 죽음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김삿갓은 명백히 달랐다. 단순한 추도시가 아니라, 유족의 마음으로 쓰고 있는 것도 있다. ‘만시(挽詩)’라고 하는 독특한 시 영역을 갖고 있으며, 이는 근대 일본의 방랑시인과는 명백히 달랐다.
어찌됐든 호사이, 산토카, 김삿갓은 모두 ‘방랑속에 산’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거기서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지, 마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은 죽는 법을 선택할 수 있을 리 없다. 삶을 살고, 그리고 죽을 뿐이다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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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정치/외교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598-8414
  • : 2733-9025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1-2022
  • :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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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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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시아태평양전쟁기 부산형무소의 수형자 동원

저자 : 이종민 ( Lee Jong-min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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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朝鮮の刑務所は戰時末期に中國の海南島を含め朝鮮の全国中約1萬名の受刑者の労働力を戦争中に動員した. この研究の目的は全國的に行われた受刑者動員の事例中地域の實相を具体的に調べることである. 今回は釜山を事例研究の対象にした.
使用された資料は, 日本防衛省防衛硏究所の日本軍資料や當時監獄法の改正をめぐる日本內閣資料, 朝鮮總督府法務局行刑課の人事や作業關係資料そして戦後釜山矯導所側がまとめた資料(1984年の資料)などを活用した. 以上の資料を使い當時戰時體制下受刑者たちが動員されるパタンを二つにまとめてみた. 各刑務所の工場の中での軍需品の生産と外役作業がそれである.
戰時末期の釜山ではアメリカとの決戦を想定し軍需品の生産が行われ, 軍事施設も集中的に配置された. 釜山刑務所の受刑者たちは刑務所の工場で軍需品を生産する一方市街地の拡大工事や飛行場の建設現場に動員された. これは監獄で行われた通常の刑務作業とは異なる戦時労務動員だった. その過程で1944年以降には多くの犠牲者が出たが, 受刑者たちは日本の敗戦までこのような労働を3-4年間続け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


Colonial Korean prisons mobilized the labor force of about one million prisoners nationwide, including the Hainan Island of China, during the war at the end of the war.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pecifically investigate the reality of a specific region through the case of mobilization of prisoners nationwide. Therefore, Busan was selected as the subject of the case study.
The materials used were military data from National Institute for Defense Study, data from the Japanese Cabinet for prison law revision, data from the Justice Department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organized data (1984) from the Pusan Prison, as well as newspaper and magazine articles at the time.
Through the above materials, I have summarized the patterns in which prisoners under the wartime system were mobilized into two patterns. That is the production of munitions in the factories of each prison and the work outside the ward.
In Busan, the production and transportation of munitions and military facilities were concentrated for the war with the United States at the end of the war. As a result, inmates in Busan Prison were mobilized on a large scale to produce munitions in factories within the prison, to expand Busan city area, or to build an airport. This was a wartime labor mobilization that was different from the existing normal prison work. In this process, many victims have occurred since 1944, but prisoners continued to work like this for 3-4 years before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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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후 일본의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기억과 문학 담론 -『피의 9월』과 '책임'의 서사-

저자 : 황익구 ( Hwang Ik-koo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1-8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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敗戦直後、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に対する日本民衆の責任は、同時代の言説において、ほぼ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なかった。なお、在日朝鮮人運動史においても、極めて限定的かつ部分的に取り上げられるに過ぎなかった。当時、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問題に対する責任は、ほとんど軍閥と警察、または官僚と資本家の階級だけに集中的に追及されていた。そのため日本民衆の責任に対する叙事は、ほとんど排除されるか、あるいは部分的に扱われる程度であった。そのようななか、江馬修の長編小説『血の九月』は、日本民衆の朝鮮人虐殺問題に対する責任の叙事において、同時代の他の言説とは異なる様相を見せている。また当時の朝鮮人運動史における、日本民衆に対する責任追及の仕方とも異質的な方向を提示している点は注目に値する。特に、敗戦直後、まだ日本民衆に対する責任追及問題が争点化する以前に出版された作品であり、しかも実際に作品が脱稿されていた1930年代から日本民衆による朝鮮人虐殺への加担と責任の問題を取り上げていたことは、あらためて再評価されるべきである。
しかし『血の九月』が一般読者はもちろん研究者からも充分な評価を得ていないことは、戦後日本の植民地支配責任に対する意識の欠如を垣間見る事例といえよう。


Immediately after the defeat, the responsibility of the Japanese people for the Genocide of Koreans during the Great Kanto Earthquake was hardly taken up in the discourse of the same period. Even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movement in Japan, it was only partially and partially taken up. At that time, the responsibility for the Genocide of Koreans during the Great Kanto Earthquake was mostly focused on the ranks of warlords and police, or bureaucrats and capitalists. Therefore, the narrative of the responsibility of the Japanese people was almost excluded or partially treated.
Under such circumstances, Shu Ema's novel September of Blood appears to be different from other discourses of the same period in the discourses of the responsibility of the Japanese people for the Genocide of Koreans. It is also noteworthy that it presents a different direction from the way of pursuing responsibility for the Japanese people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movement at that time. In particular, it is a work published immediately after the defeat and before the issue of pursuing responsibility for the Japanese people became an issue. Moreover, it should be re-evaluated that the issue of participation and responsibility for the Genocide of Koreans. by the Japanese people has been taken up since the 1930s when the work was actually drafted.
However, the fact that September of Blood has not been sufficiently evaluated not only by general readers but also by researchers can be said to be a glimpse of the lack of awareness of postwar Japan's responsibility for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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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재일코리안 민족교육에 대한 한국 민간 지원의 성과와 한계

저자 : 김웅기 ( Kim Woong-ki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5-11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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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は大阪の公立学校に設置されている民族学級において教育活動に従事する民族講師の力量強化を目的とする韓國の民間財団が提供した財政支援による事業運営の成果と限界を整理し、今後の改善方案を提示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筆者は在日コリアン民族教育に関心を示した民間財団に事業を提案し、財団は年間500万円規模の予算を在日コリアン民族教育を支援するコリアNGOセンターに委託した。
コリアNGOセンターはこの基金によって民族講師1人を実務者として雇用し、民族講師間の紐帶関係形成と教育的力量強化を目的とする民族講師相互間の教育クリティーク活動と巡回指導員制度を運営した。汎在日コリアン民族教育団体である民促協が解散した後、求心力を失った状態の中で約60%の民族講師が事業に参加したのは画期的な成果である。
韓国教育院を通して韓国政府が支援する民族教育支援予算の1/10に過ぎない規模にもかかわらず、今回の財政支援は次のような成果を上げた。第一に、民族講師の拠り所づくりの必要性が認識され、意思疎通の活性化に寄与した。第二に、経験の浅い民族講師を中心に、派遣先の学校で孤立する場合が見受けられ、また、民族講師間の力量差が顕著という点が巡回指導員によって再発見された。第三に、民族講師を指導しつつ、問題点を共に解決する巡回指導員の役割を民族講師1名に付与した結果、1年間に50回以上の現場訪問を通じて教育上の問題点、学校関係者などとの葛藤、生徒に対する差別事件、在野における民族教育活動の発掘および支援などの成果を挙げることができた。


This paper discusses the outcomes and achievements of financial support provided by ROK's private foundation to enhance the teaching capability of instructors of heritage education or minzoku koshi in Japanese in the Osaka public schools. The size of the fund reached 5 million Japanese yen for one year. Korea NGO Center, a Zainichi NGO in Osaka, was the recipient of this fund.
The center employed one of the minzoku koshis as the moderator of this project. The mutual critique for class activities and the circulated instructor for minzoku koshis were implemented by her initiative. Among more than 50 minzoku koshis, 30 of them participated in the critique activities. Also, the coordinator visited Osaka public schools 54 times to settle a variety of troubles and difficulties in heritage educational activities.
However, the fund was lifted one year later. The reasons were as follows. First, the term of the project was too short to decrease the tention of political conflicts among existing support groups. Second, the private foundation's owner lost interest in providing financial support one year later. Third, it was insufficient to solve a financial difficulty for part-time minzoku koshis solely by '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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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본의 근대 철도 건설에 참여한 조선인 노동자 -히사쓰선·산인선 철도 위령비를 중심으로-

저자 : 안해룡 ( Ahn Hae-ryong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7-15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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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日本において土木建設事業は朝鮮半島の植民地支配と中国大陸での経済的利益の確保という政治的·軍事的目的を達成するため、先導的な役割を果たした。特に鉄道の建設は近代国民国家の建設と植民地拡大において最も重要な役割を担った。鉄道の建設は「帝国の血管」を建設する過程であった。
帝国日本を建設した土木建設業界では、労働力の不足という課題に直面した。この当面の課題の解決のため、外国人労働者の導入を図った。京釜鉄道の建設を通し、日本の土木建設業は朝鮮人労働者を雇用する直接的な労働関係を経験した。この過程で不熟練朝鮮人労働者の優秀性に注目した日本の土木建設会社は、日本の近代鉄道建設のため朝鮮人労働者を移入し現場に投入した。
日本の土木建設業界は鉄道建設後、記念碑や追悼碑など様々な種類の鉄道碑を建てた。このうち1900年代~1910年代に建てられた鉄道慰霊碑は、朝鮮人労働者の日本移入過程を裏付けるものである。一つは1908年10月、間組が建てた「鐡道工事中殉難病歿者追悼紀念碑」であり、もう一つは1911年10月に鐡道工業合資會社が建てた「鐵道工事中職斃病歿者招魂碑」である。
鉄道慰霊碑に刻まれた朝鮮人労働者の名前は、朝鮮人労働者の日本移入の歴史を記憶する史料であり、日本の労働市場の変化を裏付ける資料である。朝鮮人の不熟練労働者は、人手不足に陥った日本の土木建設業界において代案的な労働力であった。日本の土木建設業界が積極的に導入した朝鮮人労働者は、日本における外国人労働者問題の始まりである。


In modern Japan,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projects played a leading role in achieving the political and military objectives, such as colonial rule of the Korean Peninsula and securing economic benefits from the Chinese mainland. In particular, the construction of railroads played the most important role in building the modern nation state and expanding colonial territories. In short, the construction of railways was the process of building the 'blood vessels of the empire'.
The Japanese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industry, in the process of building Empire Japan, faced the challenge of labor shortage. In order to solve this urgent problem, foreign workers were introduced. Hiring Korean workers while building the Gyeongbu Line in Korea, Japan's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industry experienced the first direct labor relationship with Korean workers. From this experience, Japanese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companies noticed that unskilled Korean workers were excellent labor force. In order to build Japanese modern railways, Korean workers were introduced to the construction sites by migrating them from Korea to Japan.
Completing the construction of railways, the Japanese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companies built many railway monuments and memorials. Some of these monuments and memorials, built in the 1900s and 1910s, shows how Korean workers had moved into Japan. One is Tetsudoukouchoujunnanbyoubotsushatsuitoukinenhi(the Memorial Monument for Those Died of Diseases and Accidents during the Railway Construction), built by Hazamakumi in October 1908, and the other is Tetsudoukoujichuushokuheibyoubotsushashuukonhi(the Evocation Monument for the Deceased Workers during the Railway Construction), built by Tetsudoukougyougoushigaisha(the Unlimited Partnership Company of Railway Industry) in October 1911.
The Korean workers' names engraved on those railway memorial monuments have become historical records to prove the entry of Korean workers into Japan and henceforth changes in the Japanese labor market. Korean unskilled workers were an alternative labor force in the Japanese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industry facing labor shortages. Korean workers, migrated from Korea into Japan by the Japanese civil engineering construction industry, were the first bearers of the foreign workers' issue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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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군수동원법제 정비와 조선인 동원의 강화 -군수지정회사 노무동원 연구의 시론-

저자 : 김광열 ( Kim Gwang-yol ) , 이연식 ( Yi Yeon-sik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20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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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は、太平洋戦争末期に日本帝国の軍需動員関連法制が整備された過程や軍需指定会社の動員事例を検討して、軍需会社法が朝鮮人動員に及ぼした影響の考察を試みるものである。
日本帝国の戦争動員体制に関する構想は第一次世界大戦時に列強の戦時動員体制をまねて制定した「軍需会社動員法」(1918)に起原する。その法制は日中戦争の勃発で制定された「国家総動員法」(1938)によって実行された。しかし1941年12月以降、欧米諸国に対する太平洋戦争を挑発してからは徐々に戦況悪化に陥ったため、1943年には軍需会社法制定や軍需省新設などを通して航空機や船舶など重要軍需品の生産増強を図る形で戦争動員システムを建て直そうとした。しかしそれによって、日本本土での動員対象者の性別と年齢が拡大されたし、植民地でも「徴用」を通して「国民動員」を強制する契機となった。一方、朝鮮総督府は朝鮮側の「特殊な状況」を盾に臨時的に「軍需生産責任制」(1944.4)を試行して日本政府による「内外地行政の一元化」に対応しようとしたが、政府と企業および軍部の圧力によって1944年10月には朝鮮にも「軍需会社法」を適用した。軍需会社法は軍需増強のために企業や労働者を国家の命令によって徴用した法制だが、そのかわり軍需企業は原料や金融はもちろん、労働力供給にいたるまで莫大なメリトを享受した。
軍需会社法が公布されてから、軍需会社はその傘下の労働者とともに一括して「徴用とみなされる」ようになって、以前に「募集」、「官斡旋」などの形態で動員された朝鮮人もすべて「応徴士」と見なされたので、日本の軍需指定会社による朝鮮からの労務動員はいっそう円滑となった。それは、本稿で検討した日本の製鉄会社、造船会社、機械製作会社などの軍需会社における朝鮮人動員の事例からも確認できる。したがって、日本政府はもちろん、朝鮮人戦時動員の主体であった該当の軍需企業もそれにたいする戦後責任から逃れない。


This paper studied on the legislation process for national mobilization of the company and laborers, especially focused on Munitions Companies Act(Gunjukaishaho), and its legal operations both in japan and Korea, which led to intensive mobilization of colonial Koreans. The results of studies are as follows.
1. Legislative process - The concept of national mobilization originated from the Munitions Industry Mobilization Law in 1918, which was made after the model of German wartime mobilization system, and was actualized by legislation of National Mobilization Law in 1938 just after the Sino-Japanese War, finally reinforced by the legislation of the Munitions Companies Act in October of 1943, which was made for the reverse the tide in the Pacific war by producing munitions including air fighters in a high speed, which led to more intensive mobilization of women and adolescents as well as japanese men.
2. Logistics mobilization in colonial Korea -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in korea initiated a logistic mobilization policy in October of 1944, which was similar to Munitions Companies Act in Japan, which was the result of the enormous pressure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munitions corporate group(Zaibatsu), and military powers. This was the very crucial trigger to intensify the nation-wide forced mobilization(Choyo)
3. Influence on korean mobilization - After the introduction of Munitions Companies Act in korea, koreans mobilized into munitions company in north area of korean peninsula and japanese islands increased in a high speed, which brought about under population in south korea. Nevertheless,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in korea mobilized more koreans including women and adolescents in the name of Jyosei Kinro Teishintai or Kinrohokokutai to fill up the labor shortage in japan. The mobilized koreans were put mainly into japanese munitions companies, which were granted a number of favors for their pains and cooperations. That is the reason why the japanese munitions companies as well as japanese government won't be free from the responsibility and compensation for mobilized kor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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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漂泊を生きる

저자 : 윤건차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3-22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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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방랑(표박)시인, 죽음을 살다-호사이(放哉), 산토카(山頭火), 김삿갓을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근대 일본의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오자키 호사이(尾崎放哉, 1885~1926)와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 1882~1940)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조선의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金笠, 1807~1863)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써보았다. 여기서 방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고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을 산다는 것은, 그리고 시작(詩作)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의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방랑시인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기가 높다. 사이교(西行), 잇큐(一休), 바쇼(芭蕉), 료칸(良寛), 그리고 이와 비슷한 오자키 호사이와 다네다 산토카가 있다. 이들의 삶은 고통과 고독, 그리고 수행과 신앙 등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는 여정이었다. 참고로 와타나베 도시오(渡辺利夫)가 지은 『호사이와 산토카(放哉と山頭火)』(ちくま書房, 2015년)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서적의 부제가 “죽음을 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제목·부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호사이와 산토카, 그리고 조선의 김삿갓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사이는 “몹시 쓸쓸하다”라고 하고, 산토카는 “어째서 이렇게도 쓸쓸한가”라고 한탄하면서 깊은 고독을 술로 달래며 다가오는 최후를 예리하게 응시하려고 했고, 죽음에 대한 각오라고 하는 것을 청징(清澄)한 자유율(自由律) 하이쿠(徘句)로 승화시키려 했다. 단 '방랑시인'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으나 호사이든 산토카이든 그 실태는 타인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걸식시인'이라는 측면이 농후했던 것 같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 죽음의 각오 그것이 바로 여행이고 거기에서 시가가 탄생한다. 내 나름대로 호사이와 산토카에 관한 키워드를 열거하자면, '고독·쓸쓸함', '술', '표박·방랑·편로(遍路)', '걸식·행걸(行乞)', '하이쿠', '선(禅)·불교', '인생·고통', '죽음·자살', '어머니·처', '암(庵)' 등으로, 모두 자기 삶의 태도·삶의 방식에 관한 말이다.
오자키 호사이는 돗토리현(鳥取県)출신으로 부친은 돗토리 지방법원 서기였다.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나 독특한 성격으로 학우들과도 뜻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보험회사에서 출세 코스를 걷지만 술버릇 때문에 실패하고, 나중에 경성에서도 일한다. 이윽고 그때까지의 생활을 버리고, 처를 두고 혼자 방랑에 나서, 하이쿠 동료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방대한 수의 하이쿠를 짓는다. 한편 다네다 산토카는 어머니의 투신이라고 하는 비참함을 껴안고 생애를 보내는데, 자유율하이쿠의 대표적인 시인이 된다.
인생은 어렵다. 불안과 고민이 달라붙어 최후의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이 점,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방랑시인에게 있어서 표박·방랑·편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호사이와 산토카를 염두에 두면서, 본고에서는 조선 왕조 후기에 살았던 김삿갓에 대해서 썼다. 호사이나 산토카보다 약 80년 앞서 1807년에 태어난 김삿갓은 부패한 봉건지배층에 반항하는 민란이 이어지고, 또 한반도 연해에 이양선(외국함선)이 자주 출몰하며, 심지어는 금교(禁敎)였던 천주교가 조선의 지식층과 여성층에 깊숙이 침투해 가는 사회 전환기·동란기에 태어났다. 강렬한 개성의 김삿갓은 명문 출신이었으나 부패한 왕조에 의해 가세가 기울고, 그 사실을 안 뒤 출분(出奔)하여 죽을 때까지 반골(反骨)의 삶을 산 생애의 비극성이 있고, 그로 인한 자아의 갈등이 있었다.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의 시에는 양반, 농민, 노인, 여인, 유자(儒者), 승려, 점쟁이, 풍수지리인,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인간이 등장한다. 그만큼 당시 사회적 실상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빈곤의 제상을 적지 않게 읊었던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호사이나 산토카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그 하나로서 호사이나 산토카는 '죽음을 산다'는 것은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죽음, 고작 구우(句友)의 죽음이었지 타인 일반의 죽음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김삿갓은 명백히 달랐다. 단순한 추도시가 아니라, 유족의 마음으로 쓰고 있는 것도 있다. '만시(挽詩)'라고 하는 독특한 시 영역을 갖고 있으며, 이는 근대 일본의 방랑시인과는 명백히 달랐다.
어찌됐든 호사이, 산토카, 김삿갓은 모두 '방랑속에 산'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거기서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지, 마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은 죽는 법을 선택할 수 있을 리 없다. 삶을 살고, 그리고 죽을 뿐이다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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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내선협정'과 전시기 도항관리정책에 관하여 -1930년대 말을 중심으로-

저자 : 후쿠이유즈루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7-272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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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본인귀환자 재외재산문제의 처리기록

저자 : 최영호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3-288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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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시아태평양전쟁기 부산형무소의 수형자 동원

저자 : 이종민 ( Lee Jong-min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9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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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朝鮮の刑務所は戰時末期に中國の海南島を含め朝鮮の全国中約1萬名の受刑者の労働力を戦争中に動員した. この研究の目的は全國的に行われた受刑者動員の事例中地域の實相を具体的に調べることである. 今回は釜山を事例研究の対象にした.
使用された資料は, 日本防衛省防衛硏究所の日本軍資料や當時監獄法の改正をめぐる日本內閣資料, 朝鮮總督府法務局行刑課の人事や作業關係資料そして戦後釜山矯導所側がまとめた資料(1984年の資料)などを活用した. 以上の資料を使い當時戰時體制下受刑者たちが動員されるパタンを二つにまとめてみた. 各刑務所の工場の中での軍需品の生産と外役作業がそれである.
戰時末期の釜山ではアメリカとの決戦を想定し軍需品の生産が行われ, 軍事施設も集中的に配置された. 釜山刑務所の受刑者たちは刑務所の工場で軍需品を生産する一方市街地の拡大工事や飛行場の建設現場に動員された. これは監獄で行われた通常の刑務作業とは異なる戦時労務動員だった. その過程で1944年以降には多くの犠牲者が出たが, 受刑者たちは日本の敗戦までこのような労働を3-4年間続け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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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후 일본의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기억과 문학 담론 -『피의 9월』과 '책임'의 서사-

저자 : 황익구 ( Hwang Ik-koo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1-8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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敗戦直後、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に対する日本民衆の責任は、同時代の言説において、ほぼ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なかった。なお、在日朝鮮人運動史においても、極めて限定的かつ部分的に取り上げられるに過ぎなかった。当時、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問題に対する責任は、ほとんど軍閥と警察、または官僚と資本家の階級だけに集中的に追及されていた。そのため日本民衆の責任に対する叙事は、ほとんど排除されるか、あるいは部分的に扱われる程度であった。そのようななか、江馬修の長編小説『血の九月』は、日本民衆の朝鮮人虐殺問題に対する責任の叙事において、同時代の他の言説とは異なる様相を見せている。また当時の朝鮮人運動史における、日本民衆に対する責任追及の仕方とも異質的な方向を提示している点は注目に値する。特に、敗戦直後、まだ日本民衆に対する責任追及問題が争点化する以前に出版された作品であり、しかも実際に作品が脱稿されていた1930年代から日本民衆による朝鮮人虐殺への加担と責任の問題を取り上げていたことは、あらためて再評価されるべきである。
しかし『血の九月』が一般読者はもちろん研究者からも充分な評価を得ていないことは、戦後日本の植民地支配責任に対する意識の欠如を垣間見る事例とい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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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재일코리안 민족교육에 대한 한국 민간 지원의 성과와 한계

저자 : 김웅기 ( Kim Woong-ki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5-11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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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は大阪の公立学校に設置されている民族学級において教育活動に従事する民族講師の力量強化を目的とする韓國の民間財団が提供した財政支援による事業運営の成果と限界を整理し、今後の改善方案を提示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筆者は在日コリアン民族教育に関心を示した民間財団に事業を提案し、財団は年間500万円規模の予算を在日コリアン民族教育を支援するコリアNGOセンターに委託した。
コリアNGOセンターはこの基金によって民族講師1人を実務者として雇用し、民族講師間の紐帶関係形成と教育的力量強化を目的とする民族講師相互間の教育クリティーク活動と巡回指導員制度を運営した。汎在日コリアン民族教育団体である民促協が解散した後、求心力を失った状態の中で約60%の民族講師が事業に参加したのは画期的な成果である。
韓国教育院を通して韓国政府が支援する民族教育支援予算の1/10に過ぎない規模にもかかわらず、今回の財政支援は次のような成果を上げた。第一に、民族講師の拠り所づくりの必要性が認識され、意思疎通の活性化に寄与した。第二に、経験の浅い民族講師を中心に、派遣先の学校で孤立する場合が見受けられ、また、民族講師間の力量差が顕著という点が巡回指導員によって再発見された。第三に、民族講師を指導しつつ、問題点を共に解決する巡回指導員の役割を民族講師1名に付与した結果、1年間に50回以上の現場訪問を通じて教育上の問題点、学校関係者などとの葛藤、生徒に対する差別事件、在野における民族教育活動の発掘および支援などの成果を挙げることが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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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본의 근대 철도 건설에 참여한 조선인 노동자 -히사쓰선·산인선 철도 위령비를 중심으로-

저자 : 안해룡 ( Ahn Hae-ryong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7-15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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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日本において土木建設事業は朝鮮半島の植民地支配と中国大陸での経済的利益の確保という政治的·軍事的目的を達成するため、先導的な役割を果たした。特に鉄道の建設は近代国民国家の建設と植民地拡大において最も重要な役割を担った。鉄道の建設は「帝国の血管」を建設する過程であった。
帝国日本を建設した土木建設業界では、労働力の不足という課題に直面した。この当面の課題の解決のため、外国人労働者の導入を図った。京釜鉄道の建設を通し、日本の土木建設業は朝鮮人労働者を雇用する直接的な労働関係を経験した。この過程で不熟練朝鮮人労働者の優秀性に注目した日本の土木建設会社は、日本の近代鉄道建設のため朝鮮人労働者を移入し現場に投入した。
日本の土木建設業界は鉄道建設後、記念碑や追悼碑など様々な種類の鉄道碑を建てた。このうち1900年代~1910年代に建てられた鉄道慰霊碑は、朝鮮人労働者の日本移入過程を裏付けるものである。一つは1908年10月、間組が建てた「鐡道工事中殉難病歿者追悼紀念碑」であり、もう一つは1911年10月に鐡道工業合資會社が建てた「鐵道工事中職斃病歿者招魂碑」である。
鉄道慰霊碑に刻まれた朝鮮人労働者の名前は、朝鮮人労働者の日本移入の歴史を記憶する史料であり、日本の労働市場の変化を裏付ける資料である。朝鮮人の不熟練労働者は、人手不足に陥った日本の土木建設業界において代案的な労働力であった。日本の土木建設業界が積極的に導入した朝鮮人労働者は、日本における外国人労働者問題の始まり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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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군수동원법제 정비와 조선인 동원의 강화 -군수지정회사 노무동원 연구의 시론-

저자 : 김광열 ( Kim Gwang-yol ) , 이연식 ( Yi Yeon-sik )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5-20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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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は、太平洋戦争末期に日本帝国の軍需動員関連法制が整備された過程や軍需指定会社の動員事例を検討して、軍需会社法が朝鮮人動員に及ぼした影響の考察を試みるものである。
日本帝国の戦争動員体制に関する構想は第一次世界大戦時に列強の戦時動員体制をまねて制定した「軍需会社動員法」(1918)に起原する。その法制は日中戦争の勃発で制定された「国家総動員法」(1938)によって実行された。しかし1941年12月以降、欧米諸国に対する太平洋戦争を挑発してからは徐々に戦況悪化に陥ったため、1943年には軍需会社法制定や軍需省新設などを通して航空機や船舶など重要軍需品の生産増強を図る形で戦争動員システムを建て直そうとした。しかしそれによって、日本本土での動員対象者の性別と年齢が拡大されたし、植民地でも「徴用」を通して「国民動員」を強制する契機となった。一方、朝鮮総督府は朝鮮側の「特殊な状況」を盾に臨時的に「軍需生産責任制」(1944.4)を試行して日本政府による「内外地行政の一元化」に対応しようとしたが、政府と企業および軍部の圧力によって1944年10月には朝鮮にも「軍需会社法」を適用した。軍需会社法は軍需増強のために企業や労働者を国家の命令によって徴用した法制だが、そのかわり軍需企業は原料や金融はもちろん、労働力供給にいたるまで莫大なメリトを享受した。
軍需会社法が公布されてから、軍需会社はその傘下の労働者とともに一括して「徴用とみなされる」ようになって、以前に「募集」、「官斡旋」などの形態で動員された朝鮮人もすべて「応徴士」と見なされたので、日本の軍需指定会社による朝鮮からの労務動員はいっそう円滑となった。それは、本稿で検討した日本の製鉄会社、造船会社、機械製作会社などの軍需会社における朝鮮人動員の事例からも確認できる。したがって、日本政府はもちろん、朝鮮人戦時動員の主体であった該当の軍需企業もそれにたいする戦後責任から逃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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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漂泊を生きる

저자 : 윤건차

발행기관 : 한일민족문제학회 간행물 : 한일민족문제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3-22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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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방랑(표박)시인, 죽음을 살다-호사이(放哉), 산토카(山頭火), 김삿갓을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근대 일본의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오자키 호사이(尾崎放哉, 1885~1926)와 다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 1882~1940)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조선의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金笠, 1807~1863)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써보았다. 여기서 방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고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을 산다는 것은, 그리고 시작(詩作)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의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방랑시인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기가 높다. 사이교(西行), 잇큐(一休), 바쇼(芭蕉), 료칸(良寛), 그리고 이와 비슷한 오자키 호사이와 다네다 산토카가 있다. 이들의 삶은 고통과 고독, 그리고 수행과 신앙 등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는 여정이었다. 참고로 와타나베 도시오(渡辺利夫)가 지은 『호사이와 산토카(放哉と山頭火)』(ちくま書房, 2015년)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서적의 부제가 “죽음을 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제목·부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호사이와 산토카, 그리고 조선의 김삿갓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사이는 “몹시 쓸쓸하다”라고 하고, 산토카는 “어째서 이렇게도 쓸쓸한가”라고 한탄하면서 깊은 고독을 술로 달래며 다가오는 최후를 예리하게 응시하려고 했고, 죽음에 대한 각오라고 하는 것을 청징(清澄)한 자유율(自由律) 하이쿠(徘句)로 승화시키려 했다. 단 '방랑시인'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으나 호사이든 산토카이든 그 실태는 타인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걸식시인'이라는 측면이 농후했던 것 같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 죽음의 각오 그것이 바로 여행이고 거기에서 시가가 탄생한다. 내 나름대로 호사이와 산토카에 관한 키워드를 열거하자면, '고독·쓸쓸함', '술', '표박·방랑·편로(遍路)', '걸식·행걸(行乞)', '하이쿠', '선(禅)·불교', '인생·고통', '죽음·자살', '어머니·처', '암(庵)' 등으로, 모두 자기 삶의 태도·삶의 방식에 관한 말이다.
오자키 호사이는 돗토리현(鳥取県)출신으로 부친은 돗토리 지방법원 서기였다.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나 독특한 성격으로 학우들과도 뜻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보험회사에서 출세 코스를 걷지만 술버릇 때문에 실패하고, 나중에 경성에서도 일한다. 이윽고 그때까지의 생활을 버리고, 처를 두고 혼자 방랑에 나서, 하이쿠 동료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방대한 수의 하이쿠를 짓는다. 한편 다네다 산토카는 어머니의 투신이라고 하는 비참함을 껴안고 생애를 보내는데, 자유율하이쿠의 대표적인 시인이 된다.
인생은 어렵다. 불안과 고민이 달라붙어 최후의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이 점,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방랑시인에게 있어서 표박·방랑·편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호사이와 산토카를 염두에 두면서, 본고에서는 조선 왕조 후기에 살았던 김삿갓에 대해서 썼다. 호사이나 산토카보다 약 80년 앞서 1807년에 태어난 김삿갓은 부패한 봉건지배층에 반항하는 민란이 이어지고, 또 한반도 연해에 이양선(외국함선)이 자주 출몰하며, 심지어는 금교(禁敎)였던 천주교가 조선의 지식층과 여성층에 깊숙이 침투해 가는 사회 전환기·동란기에 태어났다. 강렬한 개성의 김삿갓은 명문 출신이었으나 부패한 왕조에 의해 가세가 기울고, 그 사실을 안 뒤 출분(出奔)하여 죽을 때까지 반골(反骨)의 삶을 산 생애의 비극성이 있고, 그로 인한 자아의 갈등이 있었다.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의 시에는 양반, 농민, 노인, 여인, 유자(儒者), 승려, 점쟁이, 풍수지리인,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인간이 등장한다. 그만큼 당시 사회적 실상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빈곤의 제상을 적지 않게 읊었던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호사이나 산토카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그 하나로서 호사이나 산토카는 '죽음을 산다'는 것은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죽음, 고작 구우(句友)의 죽음이었지 타인 일반의 죽음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김삿갓은 명백히 달랐다. 단순한 추도시가 아니라, 유족의 마음으로 쓰고 있는 것도 있다. '만시(挽詩)'라고 하는 독특한 시 영역을 갖고 있으며, 이는 근대 일본의 방랑시인과는 명백히 달랐다.
어찌됐든 호사이, 산토카, 김삿갓은 모두 '방랑속에 산'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거기서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지, 마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은 죽는 법을 선택할 수 있을 리 없다. 삶을 살고, 그리고 죽을 뿐이다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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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내선협정'과 전시기 도항관리정책에 관하여 -1930년대 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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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본인귀환자 재외재산문제의 처리기록

저자 : 최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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