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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조영석 작 〈조정만 송하안식도〉 연구: 초상화에 투영된 ‘은일(隱逸)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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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작 〈조정만 송하안식도〉 연구: 초상화에 투영된 ‘은일(隱逸) 의식’

A Study of Jo Yeongseok’s Resting Under the Pine and the Concept of Reclusion Embodied in the Portraiture

이성훈 ( Lee Sunghoon )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5월
  • : 114-157(44pages)
미술사와 시각문화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영석이 그린 조정만의 초상화 〈송하안식도〉
Ⅲ. 조정만의 은일 의식과 〈송하안식도〉
Ⅳ. 〈송하안식도〉와 조영석의 명대(明代) 문인화풍 수용
Ⅴ.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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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송하안식도(松下安息圖)〉는 여러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그리고 그 제작 기록만 자세히 전하고 그 그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작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중 한 명인 조영석이 직접 그 제작 과정과 표현 의도를 자세히 소개한, 그가 그린 유일한 산수 배경의 초상화일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선사(先師)인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친우(親友)였던 조정만의 거듭된 부탁을 받아 성심성의껏 제작한 작품이란 측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새로이 조명될 수 있다.
〈송하안식도〉는 그 주인공인 조정만이 가졌던 은일·탈속 지향의 정신이 강하게 반영된 그림으로 분석된다. 조정만은 평생 관직 생활에 몸담으면서도 은일·탈속의 삶을 열망했으며, 이러한 열망을 때때로 그림이란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 자 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주변의 몇몇 문인화가들에게 그림 제작을 번번이 부탁해 그들로부터 그림을 그려 받았다. 이 초상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림이다. 조정만으로부터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은 조영석은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이상적으로 보이는 은거 공간을 구성하는 한편, 다양한 상징물들을 활용해 그 공간 안에 ‘아취 있는 일상과 탈속·은거의 삶’을 즐기는 조정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은거와 탈속의 삶에 대한 그의 염원 그리고 그의 고매한 정신과 일기(逸氣)를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조영석이 그 주문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단순하게 반영해 완성한 초상화로 한정해 볼 수 없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로 평가되는 조영석은 명대(明代) 문인화단을 주도했던 오파(吳派) 화가들의 회화 제작 경향과 사상을 수용하고 또한 명나라 말기 중국의 산수 배경 초상화의 도상과 표현 방식을 충분히 인지한 바탕 위에서, 또한 조정만이 지향하고 염원했던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송하안식도〉는 18세기 초 한 문사(文士)의 ‘은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그와 그의 의뢰를 받은 한 문인화가가 어떤 노력을 펼쳤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측면에서 이 그림은 18세기 초 이후 유행했던 산수 배경의 초상화나 사인풍속화(士人風俗畵)의 성격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The painting Resting Under the Pine by Jo Yeongseok (1686-1761) is a portrait of Jo Jeongman (1656-1739), which was previously believed not to have survived until the present day, although there are detailed records of its production. This work of Jo Yeongseok,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literati painters of 18th-century Joseon Korea, is currently his only portrait featuring a landscape background. Furthermore, there is a precise account of the process and of the intentions behind its creation that is found in one of the artist’s writings. After repeated requests from Jo Jeong-man, who was a close friend of his teacher Yi Huijo (1655-1724), Jo Yeongseok must have executed this painting with utmost sincerity. Therefore, it needs to be examined anew by highlighting that it is a masterpiece of the artist.
Resting Under the Pine is analyzed as a remarkable painting strongly reflecting the sitter’s wish for reclusion and freedom from social conventions. While dedicating his entire life to public service, Jo Jeongman longed for a life in reclusion, and occasionally turned to express this desire through the medium of painting. Thus, he often asked literati artists to paint different genres of paintings for himself and received several from them. This portrait originates from such a context.
On the one hand, Jo Yeongseok, whom Jo Jeongman commissioned for a portrait, presented a place of retreat in the painting that seems realistic while also idealistic. On the other hand, he used diverse symbols to depict the sitter enjoying “days of refinement and a reclusive life far away from the vulgar world” in order to express his yearning for reclusion as well as his noble mind and detached spirit. In doing so, the painter responded to Jo Jeongman’s wish that the refined lifestyle he pursued throughout his life would be remembered and passed on forever. Consequently, this work cannot be considered a portrait simply mirroring what was requested by the client. Jo Yeongseok embraced the painting methods and ideas of the Wu school, which led the Chinese literati artist circle during the Ming dynasty (1368-1644). Correspondingly, he created the portrait with sufficient awareness about the iconography and style of portraits with landscape backgrounds derived from late Ming paintings. In addition to that, he fully understood what his client, a Confucianist and government official, was aspiring and longing for.
After all, Resting Under the Pine demonstrates in detail what process and what efforts a Joseon literati painter had to go through at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when a scholar asked the painter to create his portrait as the image of a recluse. In this regard, this portrait can be evaluated as an important work for comprehending the character and content of portraits with landscape backgrounds as well as genre paintings of literati life that became popular after the early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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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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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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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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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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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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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세기 초 네덜란드 '인간의 단계' 연작 판화집의 교육적 기능

저자 : 손수연 ( Sohn Soo Y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1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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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주제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단계를 소개하는 알레고리 형태로 재현되어 왔다. 그러나 얀 라이켄의 엠블럼집의 50장면은 45장면을 유아기, 유년기에 할애하고 있어 다른 연작들과는 구별되는 특성을 보인다. 본 논문은 이 엠블럼집이 '인간의 단계'라는 주제를 나타낸 책이라기보다는 교육 도서였다고 보고 네덜란드에서 16세기부터 관심을 가졌던 어린이 교육의 관점에서 그 기능을 분석하였다. 또한 본 논문은 현재까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입장에서 해석되어 온 어린이 이미지를 저자와 출판업자가 속해 있던 메노파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영국 청교도 문학이 이 엠블럼집 제작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Jan Luyken's Des Menschen, begin, midden en einde (1712) has been traditionally interpreted as an allegory depicting the stages of man. The composition of its images, however, differs from that of typical 'three stages of man' series in that 45 out of 50 illustrations are devoted to infancy and childhood. This paper argues that Luyken's emblem book was intended as a book on child education, which was an important topic in the Netherlands since the sixteenth century, rather than as a commentary on the stages of life in general. Luyken's view on children, as represented in this emblem book, diverges from standard seventeenth-century Calvinist ideas of the Dutch Reformed Church. This paper maintains that the differences reflect Luyken and his publisher's Mennonite beliefs and Luyken's understanding of Puritan children's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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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닮음의 한계: 에마 해밀턴의 초상화

저자 : 전동호 ( Dongho Chu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56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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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하게 잘 그려진 초상화라면 누가 봐도 초상화 속 주인공과 현실 세계의 실제인물을 쉽게 대응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특히 닮음의 인식은 특별한 교육이나 지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다분히 동물적 본능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동일 인물을 그린 서로 다른 초상화 속 주인공이 달라 보인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화가들의 실력과 기교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관찰자의 시선이 객관적이지 못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더욱 미궁으로 빠뜨리는 보다 난감한 문제는 과거 인물들의 외모를 담은 초상화의 경우 비교할 수 있는 '원본'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현대인 가운데 수백 년 전에 사망한 초상화 속 주인공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재 남아 있는 특정 인물의 초상화는 '원본'인 개인의 복제본이며 따라서 현존하는 해당 인물의 초상화를 아무리 많이 비교해 본다 해도 이는 결국 복제본들 간의 비교일 뿐이다. 과거 인물의 초상화를 보며 우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해당 인물을 마주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초상화의 가장 기본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닮음(likeness)'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초상화는 무엇을 닮았다는 것인가?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18세기 후반 영국을 넘어 유럽을 풍미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 에마 해밀턴(Emma Hamilton)과 그녀의 초상화가 기능했던 맥락을 고찰한 글이다. 이를 통해 에마 및 주변인의 욕망과 페르소나가 어떻게 초상화 속에 침투하고 또한 초상화를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탐구함으로써 초상화는 본질적으로 사실인 '팩트(fact)'와 판타지인 '페티쉬(fetish)'가 결합된 '팩티쉬(factish)'임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 본고의 내용이다.


It is commonly assumed that a good portrait captures the sitter's likeness faithfully and the individual represented would be easily identified. Recognizing a likeness seems to be an instinct that requires no intellect or education. What does it mean, then, when one fails to recognize the identity of the same individual painted in many different portraits by one or more painters? Does it simply indicate different artists have different styles? Does it have to do with the sitter's different makeup or dress? Does it show the painters' different levels of technical skill in capturing the sitter's likeness? Or does it point to the beholder's lack of ability to notice the resemblances? What complicates the matter even more is the fact that there is no 'original' to be compared with faces on canvas when it comes to historical portraits for which the sitters have been long deceased. How do we, then, make sense of the issue of likeness in historical portraiture? This paper addresses this question of pictorial likeness in the case of Emma Hamilton, an internationally noted English beauty at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who mesmerized countless contemporary men from all walks of life. Since nobody living today has ever seen her, no one can confirm that her extant portraits capture her likeness. What do her portraits resemble, then? What are they portrayal of? This paper explores the cultural politics and dynamics of Emma's portraits, focusing on those executed by George Romney, and argues, following Marcia Pointon's contention, that they are in essence 'factish,' combining facts and fetis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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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국왕, 선조(宣祖)와 그림 속 주인공이 된 여성과 하층민 ―풍속화 이해를 위한 시론

저자 : 조규희 ( Kyuhee Cho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8-91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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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에서 기녀나 시종과 같은 하층민은 주로 지배층 행사의 부수적 인물로서 재현되었다. 특히 반정(反正)으로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을 새 국왕으로 추대할 만큼 신권이 강해진 16세기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지체 높은' 남성 관료들이 주인공인 그림이 성행했다. 이 논문은 이렇게 고관대작(高官大爵)들만이 그림의 주인공이던 조선 사회에서 선조(宣祖) 재위기(1567-1608)에 여성과 하층민이 '갑자기' 새롭게 재현된 맥락을 살핀 연구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이러한 시각 이미지들의 출현과 관련하여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선조 대의 대표적 두 사건인 1575년의 붕당 정치의 시작과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을 주목하였다. 1580년대에 제작된 선조 대의 왕실 후원 행사도에서는 이전까지 대개 뒷모습을 보이며 존재감 없이 일렬로 앉아 있는 모습으로 재현되던 여기(女妓)와 시종들이 행사의 주인공들만큼이나 부각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위 관료들의 모임 그림이 가장 성행하던 시기에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 하층민이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낯선 이미지의 출현은 절대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이 논문은 주목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선조 통치기에 '노모' 즉 여성이 '경수연(慶壽宴)'의 주인공으로서 '사회적인' 주목을 받으며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이 점 역시 선조의 의도와 관련된다. 선조가 후원한 <경수연도>에는 마부나 가마꾼이 일반 백성들과 함께 경수연을 '구경하는' 인물로서 중요하게 재현되었다. 이들 가마꾼이나 마부, 구경꾼들은 그림의 주인공 이상으로 경수연에 대한 미담을 전파하는 핵심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수연도>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시기는 공신 선정 등 임진왜란에 대한 전후 평가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는데, 1604년에 선조가 대대적으로 임진왜란의 공신을 봉하면서 마부들에게 초상을 그려 준 일도 주목된다. 이렇게 마부들을 공신으로 지정한 예는 선조 이전에는 없던, 당시 사대부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선조 대의 여성과 하층민에 대한 낯선 재현이 방계(傍系) 혈통으로 최초로 국왕이 된 선조가 지닌 정치적 위기의식과 동시에 이들 하층민에 대한 그의 특별한 공감대 속에서 나온 것임을 논증한 연구다. 동시에 이 글은 선조 대에 출현한 이러한 시각 이미지가 이후 조선 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형성과 이를 토대로 한 풍속화의 출현에 미쳤을 영향에 관해서도 탐색하였다.


This paper explores the context behind how women and the lower class in Joseon society were newly portrayed at a time when only the dignitaries were depicted as the main characters of a painting. In Joseon society, people of lower classes like ginyeo (courtesans) and chamberlains were mainly drawn as subsidiary figures in part of the ceremonies of the ruling class. However, during King Seonjo's reign (1567-1608) they received unprecedented spotlight in several paintings. In reference to such change in pictorial representations, this paper focuses on two events during King Seonjo's reign, the start of faction politics in 1575 and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at fundamentally transformed the Joseon society.
The gist of this paper stems from the drastic change in how the focus of the lower class in paintings was magnified and how the change intertwined with King Seonjo's collateral lineage. The ginyeo and chamberlains, who historically had negligible presence in most paintings with only their backs drawn, came to have the main presence in the painting Gathering of High- Ranking Senior Officials dated 1584 when paintings of high-ranking officials had strong prevalence. This was not something that could be attributed to coincidence or natural occurrence with time, a point that this paper aims to shed light on.
During King Seonjo's reign right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women became the central figures of the painting Banquet Hosted by High- Ranking Officials in Honor of Their Old Mothers amidst great social attention. This was another facet that alluded to something in connection with King Seonjo's political intent to ameliorate the dishonored reputation of the upper clas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the painting of the banquet sponsored by King Seonjo, grooms and servants were depicted as important figures along with ordinary people for they played a key role as onlookers in spreading favorable stories. It is also worthwhile to note that King Seonjo ennobled the grooms, granting their own portraits in 1604. Such appointment of meritorious subjects to the grooms was an unprecedented event that came as a shock to many scholar officials at the time, triggering a change in view of the people from lower social classes.
This paper aims to prove that the atypical portrayal of women and the lower class during King Seonjo's reign came as a response to his political crisis and from his particular empathy as the first King of collateral bloodline. The paper also explores the effects that such emergence of change in paintings had on creating a new perception of the lower class and on the appearance of genre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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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선(鄭歚, 1676-1759)의 화가적 정체성과 예술 전략

저자 : 김가희 ( Kim Kahe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2-131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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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鄭歚, 1676-1759)은 화가로서 자신의 삶과 그림에 관해 그 어떠한 글도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선행 연구에서 화가로서 정선의 삶은 그와 교류하였던 인물들의 언급에 의하여 설명되었다. 또한 그들의 사상(思想), 취향(趣向), 당색(黨色)에 의하여 정선의 작품은 해석되었다. 본고는 무언(無言)의 화가인 정선의 관점에서 그의 회화와 예술 세계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 시도이다. 본인의 작품과 화가로서의 삶에 관해 어떠한 글도 남기지 않은 정선이 자신의 예술 세계에 관하여 우리에게 남겨준 유일한 단서는 그의 '작품'이다.
정선은 작화(作畵) 초년기에 금강산도(金剛山圖)를 제작할 때에는 자신의 자기 표현적 의지보다 주문자의 필요에 중점을 둔 재현 방식을 사용하였다. 정선은 그림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문자의 여행 과정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각적 장치들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작화 태도는 1740년경 양천(陽川)의 현령(縣令)에 부임한 후 변화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정선의 서울 지역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는 정선의 거처가 자주 그려졌으며 관직 생활을 수행하는 관료(官僚)이자 한양에 거주하는 사대부(士大夫)의 모습으로 그는 본인을 표상하였다. 이러한 자화상적인 그림들을 통하여 정선은 당대 문예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제고(提高)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정선의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통시적(通時的)으로 변화하였지만 공시적(共時的)으로도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노년기의 정선은 높아진 그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간결한 필치의 수응화(酬應畵)를 다수 제작하였다. 한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같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득의작(得意作)을 통하여 자신의 그림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즉 정선은 예술계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위하여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따라 그림의 주제, 화풍, 크기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며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조형적인 요소의 변화는 정선이 적극적으로 구사한 '예술 전략(artistic strategy)'이었다. 이를 통하여 화가로서 정선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기민하게 변화시켜 당대 예술계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즉 정선은 예술계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매 순간 주체적으로 선택을 하며 살았던 능동적인 화가였다.


Jeong Seon (1676-1759) left behind no record on his painting and life as a painter at all. As a result, previous studies reconstructed his life based on what his friends or acquaintances said of him. But according to their personal tastes and political orientations, the life and art of Jeong Seon were interpreted differently. This paper explores his silent life and art from his perspective by examining the only clue that we have, his paintings.
In the earlier period, Jeong Seon's paintings of the Diamond Mountains did not reveal his self-expressive desire but met his patrons' needs. In these paintings, he invented a new visual expression conveying vivid travel experiences to his commissioners. After Jeong Seon became the county magistrate of Yangcheon in 1740, however, he painted himself and his selfexperiences in his paintings. His topographical landscape paintings begun to include his self-portrait, house, and office. By representing himself as a scholar-official, Jeong Seon seemed to promote his social status in the Joseon art world. While continuing to produce a number of commissioned or occasional paintings in a simple and abstract style at the end of his life, Jeong Seon attempted to create even more demands for his paintings by making novel styles of landscapes such as Inwang jesaek do (Clearing after Rain on Mount Inwang). Throughout his life, he continually switched the artistic identities both synchronically and diachronically, and varied the subjects, styles, and sizes of his paintings depending on his socio-economic situation. It was therefore Jeong Seon's artistic strategy that contributed to his great success in Joseon's artistic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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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규장각 소장 〈全州地圖〉 연구: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전주부성 재건 기록

저자 : 박시현 ( Sihyun Par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2-165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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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전주지도(全州地圖)〉를 분석한 연구이다. 이 작품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지도의 특징보다 회화적인 면을 강하게 보여 준다. 이 작품에는 지명, 산봉우리 명칭, 길과 강의 이름, 인접 지역명, 행정구역 경계 등 일반적으로 지도가 제공하는 지리 정보들이 표기되지 않았다. 반면 청록산수화의 색채, 형태가 변형된 전주부성, 성의 내외부를 가득 채운 꽃과 나무, 섬세하게 그려진 인물들이 화면에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제목과 작품 이미지의 차이에 주목하여 〈전주지도〉의 회화적인 표현 양식과 제작 배경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전주부성〉의 제작 시기를 전주부성이 재건된 1734년부터 전라감영의 정문인 포정루(布政樓)가 창건된 1743년까지로 한정하였다. 이 경우 작품의 제작 배경으로 가장 주목되는 일은 조현명의 전주부성 재건이다. 그 이유는 전주의 도시사(都市史)에서 재건 공사의 의미가 특별하였으며 작품에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관련된 요소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전주부성 재건은 정유재란으로 파괴된 채 방치되어 왔던 전주부성을 약 140년 만에 재건하는 대규모 공사였다. 그 목적은 전주의 방어 기능 향상이었다. 전주는 조선 왕실의 관향(貫鄕)이자 경기전(慶基殿)이 위치한 곳이었으며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 이후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전주가 함락될 경우 적들이 곧바로 한양(漢陽)으로 북진(北進)할 수 있는 점도 성의 재건에 영향을 끼쳤다.
〈전주지도〉에는 전라도관찰사의 공무와 관련된 건축물, 경기전, 명승지(名勝地)의 누정(樓亭)인 한벽루(寒碧樓) 등 9개의 건물에만 명칭이 표기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조현명과 관련이 있다. 작품과 조현명의 관계는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조현명은 산성(山城)보다 평지(平地) 읍성(邑城)을 통한 방어를 강조하였다. 작품에서 전주부성은 화면의 중앙을 압도하는 반면 위봉산성(威鳳山城)은 인식이 어려울 만큼 극도로 작게 표현되었다. 또한 가뭄과 재정 고갈이 염려되는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전주부성 개축은 조현명 탄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조현명의 편에 서서 성의 완공에 힘을 실어 주었다. 조현명은 임금의 밝은 식견에 감사하며 사대문 중 남문 문루(門樓)의 이름을 명견루(明見樓)라고 지었다. 그는 「명견루상량문(明見樓上樑文)」에서 경기전의 상서로운 분위기를 강조하였는데, 이 또한 〈전주지도〉에서 경기전 위의 서학(瑞鶴) 무리로 표현되었다. 조현명이 공사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전주부성축성록(全州府城築城錄)』을 남긴 점은 축성 공사의 특별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는 전주부성 표현에 그의 축성록이 충실하게 반영된 점 또한 〈전주지도〉와 조현명의 관계를 뒷받침한다. 〈전주지도〉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성의 안팎에 표현된 민가와 꽃나무이다. 이 표현은 작품의 작가로 추정되어온 김희성(金喜誠, ?-1763년 이후)의 도원(桃源) 그림을 연상시킨다. 두 작품의 양식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김희성이 〈전주지도〉를 그렸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리고 조현명이 김희성에게 자신의 정자인 명오정(名吾亭) 그림을 부탁하였던 사실은 〈전주지도〉, 김희성, 조현명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알려 준다.
이를 종합하면 〈전주지도〉는 표현 방식, 제작 배경, 화가 등 다양한 부분에서 회화적인 특징을 강하게 보인다. 따라서 〈전주지도〉는 전주의 실경과 함께 조현명의 중요 업적인 전주부성 재건이 표현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This paper analyzes Map of Jeonju (National Treasure) and identifies it as a painting. Despite the word 'map' in its title, Map of Jeonju bears the characteristics of a painting. It does not contain geographical information that is typically provided in maps, e.g. names of locations, mountain peaks, roads, rivers, neighboring regions or boundaries of administrative districts. On the contrary, it displays pictorial aspects, such as the coloration of blue and green landscape paintings, a stylized depiction of the Jeonjubu Fortress filled and surrounded by flowers and trees, as well as delicately painted human figures. Therefore, the author examines the painting style and the background of Map of Jeonju while focusing on the discrepancies between the title and the image.
In this paper, Map of Jeonju is estimated to have been produced sometime between 1734 (when the Jeonjubu Fortress was reconstructed) and 1743 (when the Pojeong Pavilion was built). The most remarkable event during that period was the reconstruction of the fortress by Jo Hyeonmyeong (1690-1752). This is based on the fact that the reconstruction of the Jeonjubu Fortress was significant for the history of Jeonju, and several elements in Map of Jeonju relate to Jo Hyeonmyeong. 140 years after its collapse during the Second Japanese Invasion (1597-1598), reconstructing the Jeonjubu Fortress was a large-scale project. Jeonju served as an important defense point for Hanyang and regional military bases.
In Map of Jeonju, only nine buildings are labelled and they are all related to Jo Hyeonmyeong. Another important point is that Map of Jeonju reflects Jo's opinion that town fortresses were more effective than mountain fortresses. Accordingly, the Jeonjubu Fortress dominates the center of Map of Jeonju while the Wibong Mountain Fortress is almost too small to be recognized. Because Jo had ordered the reconstruction of the Jeonjubu Fortress despite severe droughts and financial difficulties, people called for his impeachment. King Yeongjo (r. 1724-1776), however, supported Jo and helped him complete the project. With gratitude for the king's positive judgement, Jo Hyeonmyeong named the southern gate pavilion of the fortress Myeonggyeonru, which means the “Pavilion of Bright Judgement”. In his writings, he emphasized the auspicious atmosphere of the Gyeonggi Hall in which a portrait of the first king of the Joseon dynasty is housed. Likewise, there is a group of auspicious cranes depicted above the Gyeonggi Hall in Map of Jeonju. His “Record of the Reconstruction of the Jeonjubu Fortress” describes the entire process and what the project meant to him.
Another important aspect is the houses and flowering trees inside and outside the fortress which are reminiscent of the painting Peach Blossom Spring by Kim Huiseong (?-after 1763). Since the painting styles are very similar, it seems possible that Kim Huiseong painted Map of Jeonju. In addition to that, Jo was a patron of Kim Huiseong and had commissioned a painting of his new pavilion from him. After all, Map of Jeonju connects Jo Hyeonmyeong, the reconstruction of the fortress, and the painter Kim Huiseong with each other. Even though it is called a map, the work can be considered a painting which documents Jo Hyeonmyeong's major achievement of reconstructing the Jeonjubu For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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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용희와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

저자 : 장진성 ( Chin-sung Cha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3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6-187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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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李用熙, 1917-1997)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학자이지만 미술사학을 연구하여 한국회화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는 이동주(李東洲)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한국회화사 관련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이용희는 미술사 연구에 있어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 1881-1965)의 영향을 받았다. 이용희는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 양식의 심리학에 대한 한 기고(寄稿)[Abstraktion und Einfuhlung: Ein Beitrag zur Stilpsychologie (Abstraction and Empathy: A Contribution to the Psychology of Style)]』(1908)에 나타난 추상미술(the art of abstraction)과 감정이입적 미술(the art of empathy)에 대한 비교 분석에 크게 공감하였으며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미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이용희는 보링거의 저작을 읽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미의식은 다르며 미는 상대적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특히 이용희는 보링거가 제시한 원시미술에 보이는 추상성은 결코 서구의 고전주의 및 사실주의적 미술(감정이입적 미술)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미의 상대성' 주장에 주목하였다. 미의 상대성에 대한 발견은 이용희의 한국회화사 연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다니던 시절 일본인 학자들이 쓴 미술사 서적을 읽으면서 깊은 열등감에 빠졌다고 술회하였다. 한국의 그림은 보잘 것이 없으며 중국 그림을 모방한 것으로 전혀 독자성이 없다는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 이용희는 낙담하였다. 그런데 보링거가 제기한 미의 상대성 이론을 알게 되면서 미술에는 우열이 없으며 단지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용희는 한국의 옛 그림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의 옛 그림은 결코 중국 그림의 아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미의 상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그림은 한국 고유의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Yi Yonghui (1917-1997) was an international relations specialist. He also studied art history. He published several books on the history of Korean painting. When he was a college student, he discovered the significance of Abstraction and Empathy: A Contribution to the Psychology of Style (1908) by Wilhelm Worringer (1881-1965). Abstraction and Empathy: A Contribution to the Psychology of Style exerted considerable influence on Yi. According to Worringer, abstraction and empathy mark the two poles of artistic sensitivity. The art of abstraction is that of primitive cultures. It is non-representational art. The art of empathy is associated with realism. It is representational art that realistically and recognizably depicts the natural world from ancient Greece to the Italian Renaissance. Worringer argued that the art of abstraction was not inferior to realist art, emphasizing that aesthetic value judgements are relative. Worringer's argument provided a source of inspiration for Yi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painting. When he first studied Korean painting, he was deeply distressed by Japanese scholars' arguments that Korean painting was inferior to Chinese painting. After he discovered the importance of Abstraction and Empathy: A Contribution to the Psychology of Style, he began to take a fresh look at Korean paintings whos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re unique. Armed with Worringer's aesthetic relativism, Yi argued that Korean painting was worthy of respect in its own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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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는 관음보살의 주처인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은 다양하게 정의되었다. 관념적인 신화적 장소, 실재하지만 현실과 분리되어 접근이 어려운 공간, 혹은 물리적 여행이 가능한 순례지 등으로 인식되었는데, 특히 순례지의 경우는 관념적 공간인 보타락가산을 실제 지리 공간에 대입하여 현실 속 성지(聖地)로 만든 결과이다. 본 논문은 여러 현실 속 보타락가산 중 하나인 중국 주산군도(舟山群島) 보타산(普陀山)과 이를 그린 일본 조쇼지(定勝寺) 소장 〈보타락가산관음현신성경도(補怛洛迦山觀音現神聖境圖)〉(이하 〈보타산성경도〉)을 통해 이 현실 속 보타락가산의 신앙적 의미와 재해석의 사례를 살펴본 글이다.
〈보타산성경도〉의 시각적 특징은 이 그림의 제작 의도를 드러낸다. 원대(元代)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타산성경도〉는 지방지(地方志)의 지도와 유사한 조형 요소 및 상세한 지명 표기로 일견 회화식 지도로 보인다. 그러나 관음보타사(觀音寶陀寺), 조음동(潮音洞) 등 특정 지역의 과장과 일관되지 않은 방위 체계 등은 이 그림이 지리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제작된 지도가 아니라 보타산 내 여러 지역과 그곳에 얽힌 신이담(神異譚)의 시각화를 통해 성스러운 공간이자 현실 속 순례지로서의 보타산의 이중적 이미지를 홍보하려는 의도 속에서 그려졌음을 알려 준다. 한편 〈보타산성경도〉는 수리명(修理銘)을 통해 일본에서 관음참법(觀音懺法)의 본존으로 활용되었다. 제재(除災)와 기복을 위한 의례인 관음참법이 일본 선종 사원에서 추선 공양(追善供養)으로도 활용된 것처럼 중국의 보타산 역시 이 의례의 맥락에서 재해석되었다. 중국의 관련 저작들과는 달리 일본의 관음참법 행법서(行法書)에 관음 주처(主處)로 중국 보타산이 언급되는 점, 중국 보타산을 그린 〈보타산성경도〉가 관음참법의 주존이 되었다는 점은 일본에서 중국 보타산이 현실의 순례지에서 더 나아가 성역화, 추상화된 공간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준다. 일본에서 다르게 활용된 〈보타산성경도〉는 중국 보타산이 일본의 관음 신앙 체계에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일례로, 보타락가산에 대한 개념이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형, 융합되었음을 알려 준다.


Mount Potalaka in East Asia, the dwelling of Avalokitesvara, has been defined in several ways. It has been viewed as either a mythical place isolated from this world or as an actual pilgrimage site that can be reached through physical travel. This latter definition was made after a specific geographic site was compared to Mount Potalaka and designated it the land of Avalokitesvara. Mount Putuo in the East China Sea is an example of such a comparison. This paper examines the religious meanings behind the mundane materialization of Mount Potalaka and its reinterpretation through Mount Putuo and a Yuan painting titled Budaluojia Guanyin xianshen shengjing tu (hereafter, shengjing tu), which illustrates this place.
The visual characteristics of shengjing tu reveal the purpose of its production. At first glance, the painting seems to be a picturesque map as its style with detailed place name entries is similar to contemporary printed maps. However, certain sites, such as the Putuo Temple and the Tidal Sound Cave, have exaggerated scales and there are inconsistent cardinal directions, both of which imply that the intention had not been to provide geographic information; rather, by visualizing the holy sites associated with the folk legends and various pilgrims, it appears they may have intended to depict Mount Putuo as both a sacred place and an accessible pilgrimage site. Regardless of their intention, the later inscription indicates that shengjing tu was used in Avalokitesvara confession rituals in Japan as Mount Potalaka, while Mount Putuo in China was reinterpreted for this ritualistic context. Shengjing tu hung in the confession ritual in Japan and Japanese ritual manuals also mention Mount Putuo to be the dwelling place of Avalokitesvara. Furthermore, it indicates that Mount Putuo was seen by the Japanese not as just a pilgrimage site in this world but as a sacred place. Shengjing tu and its use in Japan demonstrate how Mount Putuo in China, which is a mundane Mount Potalaka, was reinterpreted under the Japanese Avalokitesvara worship system by changing and combining the notions surrounding Mount Potal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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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항해시대와 미술: 17세기 항해자 그리스도 도상의 유통과 수용

저자 : 박정호 ( Jeongho Par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2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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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자 그리스도는 아기 예수가 수난의 도구로 장식된 범선을 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도상으로, 현전하는 작품 중에서는 안토니오 리치(Antonio Ricci, c. 1565-1635)의 유화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항해자 그리스도 도상은 유럽에서 비롯되었으나 이 지역에서 제작된 미술 작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알려진 항해자 그리스도 이미지들은 오히려 인도, 중국, 필리핀, 멕시코, 페루 등 17세기 유럽과 활발히 교류하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필사본 삽화, 상아 부조, 우아망가석 조각 등으로 만들어진 이 이미지들은 각 지역의 미술전통을 반영하면서도 도상적으로는 서로 매우 유사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유사성에 주목하여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항해자 그리스도 이미지들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한편, 이 이미지들이 현재는 전하지 않는 16세기 말 유럽에서 제작된 판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유럽 미술에서 흔하지 않은 이미지가 아시아와 아메리카 각지에서 활발히 제작되고 유통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 사실은 대항해 시대 미술 교류를 유럽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한 기존의 관점을 재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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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표훈(表訓) 창안 가능성

저자 : 임영애 ( Lim Young-a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5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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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과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두 불상 모두 지권인(智拳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하나는 몸에 장엄하지 않은 불상형이며, 다른 하나는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이다. 755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보관형 비로자나불상이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이다. 두 상은 모두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으며, 『80권본 화엄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두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은 다르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경전을 바탕으로 했지만, 도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8세기 중엽, 신라 왕경의 화엄학은 크게 연기계(緣起系, 또는 화엄사계)와 표훈계(表訓系, 또는 부석사계)로 나뉜다. 연기(緣起, 8세기 중엽에 활동)가 주로 화엄사,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표훈(表訓, 8세기 중엽에 활동)은 황복사, 불국사가 활동무대였다. 필자는 연기계가 보관형 비로자나불을, 표훈계가 불상형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중국 승려 법장(法藏, 643-712)의 영향을 받은 연기는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의 도상인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을 그대로 빌려 왔다. 그 사례가 바로 황룡사 연기조사가 조성한 755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이다. 반면 표훈계는 연기계와 달랐다. 표훈의 스승 의상(義相, 625-702)은 『화엄경』만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며 『화엄경』 그 자체에 몰두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표훈은 왕경에 진출하여 8세기 중엽 이후 왕경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러한 표훈을 비롯한 의상의 문도들이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비로자나불의 핵심인 지권인 수인(手印)만 빌려 와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이라는 새로운 도상 창안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훈계는 『화엄경』에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외의 경전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창안되었으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앞서 이미 신라 왕경에서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했다고 보았다. 당시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 도상 창안을 주도했던 이는 바로 당시 왕경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표훈(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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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전기 회화와 '연사모종(煙寺暮鍾)'

저자 : 장진성 ( Chin-sung Cha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6-7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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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는 16세기에 안견파(安堅派) 화풍으로 그려진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회화작품이다. 이 그림은 표면적으로 보면 특정한 주제가 없는 '일반 산수화(generic landscape painting)'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의 원경(遠景)에 보이는 연무(煙霧)에 잠겨 있는 사찰은 〈산수도〉가 연사모종도라는 것을 알려 준다. 연사모종도를 구성하는 정확한 도상(圖像)적 요소들은 분명하지 않지만 강 너머 또는 언덕 위에 있는 곳을 보여 주는 공간적 거리감, 안개에 싸여 있는 사찰, 저녁 시간, 종소리를 듣는 인물들이 중요한 시각적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길을 걸어가는 행인(行人)들, 안개에 싸여 있는 사찰, 저녁 무렵의 풍경이 나타나 있는 〈산수도〉는 특정한 주제가 없는 일반 산수화가 아니라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한 장면을 그린 〈연사모종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처럼 아직도 많은 작품들이 '산수도'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상팔경도 병풍 및 화첩이 해체되고 이후 8폭의 그림이 단폭(單幅)으로 후대에 전해지면서 이 작품들은 '산수도'가 되었다.
현재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중행려도(雨中行旅圖, Rainy Landscape with Travelers)〉는 전경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는 승려를 근거로 〈연사모종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우중행려도〉에는 사찰이 그려져 있지 않다. 안개가 산과 계곡에 자욱하지만 사찰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연사모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안개에 싸인 절[煙寺]'이 이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우중행려도〉는 연사모종도로 불릴 어떤 근거도 없다. 〈우중행려도〉와 같이 연사모종도로 오인(誤認)될 수 있는 그림도 있지만 연사모종도로 알려진 그림이지만 연사모종도가 아닌 그림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는 〈연사모종도〉이다. 〈연사모종도〉로 알려진 것은 화면의 왼쪽 상단에 적혀 있는 '촉사모종(燭寺暮鍾)'과 명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인 사구소(史九韶, 15세기 초에 주로 활동)의 「소상팔경기(瀟湘八景記)」 중 '연사모종'에 대한 시(詩) 때문이다. 〈연사모종도〉에는 비록 사찰이 나타나 있지만 너무도 미미한 화면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 〈연사모종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전경에 나타나 있는 강가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다. 이러한 '정박한 배'라는 모티프는 '어촌석조(漁村夕照)' 또는 '원포귀범(遠浦歸帆)'을 그린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야마토분카칸 소장의 〈연사모종도〉의 주제는 '연사모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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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보 〈송시열 초상〉의 제작 시기와 맥락

저자 : 강관식 ( Kang Kwanshi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6-113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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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 초상〉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의 가장 큰 쟁점인 제작 시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여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송시열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에 근거하여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정조어제의 관서에 근거하여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으며, 평면적이고 고졸한 화법에 근거하여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국보본의 관서는 송시열과 그의 초상화를 이상화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상의 내용을 가탁(假託)해 넣은 것이고, 용모와 의관도 초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모습과 달리 이상화시키고 추상화시킨 모습을 의고적인 평면적 조형으로 특별하게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텍스트 분석이나 양식 분석으로는 올바르게 편년하기 어렵다.
본고는 이와 같은 특수성을 고려하여 국보본(國寶本)의 가장 본질적 특징인 '이상화' 개념을 핵심 기준으로 삼은 뒤, 용모나 도상이 유사한 이모작 계열 가운데 나타난 이상화 양상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양식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편년을 시도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모된 송시열 초상은 크게 3단계의 이상화 과정을 보여 준다. 1단계인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은 도화서 화원에 의한 윤색이 가해졌지만 대체로 초기의 사실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2단계인 18세기 중·후반에는 여러 화가들이 그린 송시열 초상의 장점이 융합되고 얼굴이 귀인의 상처럼 관상학적으로 이상화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단계인 19세기 초반에는 이상화가 더욱 진행되어 눈썹이 초승달이나 버들잎처럼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지고 귀는 부처님 귀처럼 2배 이상 길어져 이상화가 정점에 달하며 국보본이 그려졌다. 정조 어제를 서사(書寫)한 예서(隸書)의 서풍(書風)이 19세기 초반 양식을 보여 주고, 국보본과 동일한 용모와 도상의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중·후반 이후 이모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송시열에 대한 숭배 의식이 18세기 후반에 정점에 달하고 19세기 초까지 그 여맥이 지속되었던 것도 국보본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추론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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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영석 작 〈조정만 송하안식도〉 연구: 초상화에 투영된 '은일(隱逸) 의식'

저자 : 이성훈 ( Lee S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4-157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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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안식도(松下安息圖)〉는 여러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그리고 그 제작 기록만 자세히 전하고 그 그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작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중 한 명인 조영석이 직접 그 제작 과정과 표현 의도를 자세히 소개한, 그가 그린 유일한 산수 배경의 초상화일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선사(先師)인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친우(親友)였던 조정만의 거듭된 부탁을 받아 성심성의껏 제작한 작품이란 측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새로이 조명될 수 있다.
〈송하안식도〉는 그 주인공인 조정만이 가졌던 은일·탈속 지향의 정신이 강하게 반영된 그림으로 분석된다. 조정만은 평생 관직 생활에 몸담으면서도 은일·탈속의 삶을 열망했으며, 이러한 열망을 때때로 그림이란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 자 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주변의 몇몇 문인화가들에게 그림 제작을 번번이 부탁해 그들로부터 그림을 그려 받았다. 이 초상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림이다. 조정만으로부터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은 조영석은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이상적으로 보이는 은거 공간을 구성하는 한편, 다양한 상징물들을 활용해 그 공간 안에 '아취 있는 일상과 탈속·은거의 삶'을 즐기는 조정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은거와 탈속의 삶에 대한 그의 염원 그리고 그의 고매한 정신과 일기(逸氣)를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조영석이 그 주문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단순하게 반영해 완성한 초상화로 한정해 볼 수 없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로 평가되는 조영석은 명대(明代) 문인화단을 주도했던 오파(吳派) 화가들의 회화 제작 경향과 사상을 수용하고 또한 명나라 말기 중국의 산수 배경 초상화의 도상과 표현 방식을 충분히 인지한 바탕 위에서, 또한 조정만이 지향하고 염원했던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송하안식도〉는 18세기 초 한 문사(文士)의 '은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그와 그의 의뢰를 받은 한 문인화가가 어떤 노력을 펼쳤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측면에서 이 그림은 18세기 초 이후 유행했던 산수 배경의 초상화나 사인풍속화(士人風俗畵)의 성격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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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20세기 조선 궁궐의 건축 공간과 서화

저자 : 김수진 ( Sooji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8-187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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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최근 발굴작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궁궐의 건축 공간에서 서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논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의 사례로 주로 이 시기에 집중된 건축 관련 서화는 그 종류와 기능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궁궐의 생활 공간에 사용된 장지서화이다. 이 글은 이 유형의 형식적 특징을 논구하는 한편 작품의 주제를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설치되었던 공간과 사용자 간의 관계에 주목했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서화 장지가 왕실구성원의 감계(鑑戒)와 지위 및 책무 표상을 위해 조성된 것임을 논의했다. 둘째, 이 글은 조선 왕실이 병풍과 장지를 일종의 가벽(假壁)으로 활용함으로써 본래 있던 생활 공간을 흉례 공간으로 전환한 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이와 관련해서 본 연구는 명성황후의 국장을 위해 마련된 경효전(景孝殿)의 사례를 통해 왕실이 지벽병풍장지를 활용하여 의례 공간을 꾸민 방식을 검토하였다. 셋째, 필자는 궁궐에서 부벽(付壁) 서화가 조성된 역사를 논의하면서, 병풍 조성 방식이 부벽 서화 제작에 적용되었던 역사를 검토하였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궁궐 벽화류가 현재는 단독 유물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본래는 건축 공간에 설치되었던 특수 서화였음을 조명함으로써 이들이 가진 왕실문화사적 의의를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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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고동(古董) 수집의 실상과 책거리 기물의 간극

저자 : 유재빈 ( Yoo Jaeb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8-243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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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세기 조선의 수집 문화와 책거리 기물 간의 간극을 살피고자 하였다. 필자는 19세기 문인의 수장품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당시 대표 수장가였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 홍경모(洪敬謨, 1774-1851), 신위(申緯, 1769-1847)의 수장품 기록을 살펴보았으며, 분석 그림은 이형록(李亨祿, 1808-?)의 책거리로 한정하였다. 세 사람이 소장하였던 70여 점의 수장품의 특징을 분석한 결과 이들의 수집 목록과 책거리의 기물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책거리 기물이 대부분 조선에서 제작된 적이 없는 수입산 중국 기물만을 다루고 있다면 수집가들은 중국 기물뿐 아니라 집안의 가전품(家傳品)이나 백제, 고려의 유물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과 서장(西藏)의 물건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책거리 기물을 종류별로 나누어 그 분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책거리에서 도자기가 절반가량을 차지한 데 비해 문인 수장가는 수집가가 특별한 경위로 선물 받거나 직접 제작한 고급 문방구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차이는 책거리가 감상과 길상이라는 일반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려진 데 비해 수장 목록은 특별한 역사적, 개인적 가치가 있는 수집품을 위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책거리가 19세기의 물질문화를 반영하는 측면도 발견된다. 문헌의 수장품과 정확히 일치되는 책거리의 기물은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당시 특정 재료나 기물에 대한 전반적인 애호나 지식수준이 책거리 기물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과 마노, 문양석에 대한 특별한 애호는 책거리 기물 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얼룩 반점 효과로 증명될 수 있으며, 다양한 수입 목재에 대한 선호는 책거리 기물에서 표면이 나무옹이 모양으로 과장되게 일그러진 필통들을 통해 드러난다. '주문왕정(周文王鼎)'이나 '선덕로(宣德爐)' 정도의 이름을 상식적으로 알았던 당시의 고동기 구입 수준은 방정(方鼎)과 유족로(乳足爐) 등 소수의 기형이 반복되는 책거리의 고동기 표현과 관계가 있다.
책거리는 청대의 다보격(多寶格)에 형식적 기원을 두고 있지만 사실상 매우 다른 지향점을 보여 준다. 다보격이 이미 소유한 물건을 특정한 체계 안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소우주를 구성한 것이라면 책거리는 내가 원하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을 이미지로 구현함으로써 나의 밖에 다른 세계를 구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책거리는 실제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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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환된 전통: 서구 국제 비엔날레 출품작을 통해 본 한국현대미술과 전통

저자 : 이지은 ( Jieun Rhe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4-281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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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의 해외 국제전 참가의 역사는 곧 한국현대미술사의 이정표였다. 그것이 국가를 대표하여 참가하는 국제 비엔날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현대미술의 후발 주자로서 서구의 현대미술과 어깨를 견주는 동시대성의 확보에 목말라하던 국내 미술계의 열망은 국제 비엔날레를 통해 그 창구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사조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따라잡는 숨가쁜 릴레이가 이어졌다. 참여 작가들은 서구 중심의 국제 비엔날레의 현실을 마주하며 서구의 모방이라는 오명을 씻고 한국현대미술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전통은 세계가 함께 겨루는 비엔날레의 치열한 경기장에서 한국 미술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방패였다.
이 논문은 한국현대미술이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 비엔날레였던 1958년 국제현대채색석판화비엔날레를 시작으로 1960년대 파리 비엔날레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개관전, 그리고 2015년 이후 이어진 베니스 비엔날레 단색화 병행전과 최근 2017년, 2019년의 비엔날레 출품작에 이르는 몇몇 주요 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한국현대미술에서 '전통'에 대한 담론이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한국현대미술은 세계 미술계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통의 수사학을 구사하며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계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구축되어 온 타자성을 충족시켜 왔다. 또한 전통은 국내에 서구현대미술 사조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현대미술의 차별성과 독자성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국현대미술이 그 미감에 내재되었다고 여겼던 '고유한' 전통을 찾는 과정은 곧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소환하고 이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이전의 전통이 발굴해 내야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과거의 실재였다면, 오늘 한국 동시대미술에서의 전통은 상상의 영역에 존재한다. 이제껏 한국현대미술에서 전통의 논의가 보여 주듯이, 전통은 취사선택되며 재조합되고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통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영하고 새로운 서사를 생산하며, 바로 그 전통의 허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환된 동시대의 전통을 만들어 냄으로써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계가 요구하던 타자성의 전복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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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북조기(北朝期)의 불교미술에 나타난 다양한 불교 고사(故事) 중에서 아육왕시토(阿育王施土)와 정광불수기(定光佛授記) 본생(本生) 장면에 주목한 글이다. 이 두 주제는 운강석굴(雲岡石窟) 및 6세기 중국 불교조각에서 각각 가장 빈번하게 묘사되었으며, 두 주제가 짝을 이루어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강 중기 및 후기에 이르러 이 두 고사는 아육왕시토의 특징적인 도상(圖像)이 정광불수기 본생 장면으로 전이되어 결합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난다. 특정 도상이 전이되어 다른 주제로 인식된 불교 고사의 다른 사례는 종래 알려진 바가 없는 만큼 이러한 현상은 중국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주목할 만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아육왕시토와 정광불수기 본생과 관련된 문헌을 조사하고, 중국 북조 후기에 제작된 운강석굴 벽면의 부조와 기타 불교조각에 나타난 이 고사를 표현한 장면의 구성 및 시각적 특징들을 분석하여 두 주제가 결합되어 가는 양상을 추적하였다. 이어서 선행 연구에서 이 두 고사의 결합 이유로 제시되었던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북조 말기 불교 문화가 당시 불교도들의 종교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기존의 개별 도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재현방식을 창조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광불수기 본생과 아육왕시토 인연 장면의 결합과 관련된 논의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로 현재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소장의 〈불교조상비(佛敎造像碑)〉를 들 수 있다. 1910년 9월에 보스턴미술관에서 구입한 이 조상비에는 정면을 향한 불입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정광불수기 본생 장면과 우측에 아육왕시토 고사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바 없는 보스턴미술관의 이 불교조상비는 이 연구에서 자세히 살펴본 두 고사의 도상적 결합이 일어난 결과물로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상비의 중국 불교조각사상의 위치를 비정해 본 것도 이 글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이다.

KCI등재

10'기운생동(氣韻生動)'과 'Rhythmic Vitality'

저자 : 정수진 ( Jung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8-345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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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중국에는 서구에서 영역(英譯)된 중국 회화 이론의 용어가 수용되어 자국의 미술사를 해석하는 사례가 있었다. 사혁(謝赫, 6세기 초반 활동)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실린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개념의 해석과 번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구의 학자들은 중국 미술을 설명할 때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의미가 모호한 이 개념을 다양한 어휘로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자일스(Herbert A. Giles, 1845-1935)가 1905년에 기운생동을 번역한 'rhythmic vitality'라는 용어는 동시기 중국의 학자들에게 역으로 수용되어 중국 미술의 특질로 서술되었다. 텅구(滕固, 1901-1941), 류하이쑤(劉海粟, 1896-1994), 쭝바이화(宗白華, 1897-1986) 등의 학자들은 '기운생동'을 '리듬이 있는 생명(有節奏的生命)'이라고 해석하여 자일스의 영향을 드러내었다. 즉 '기운'을 'rhythm'으로 이해한 서구 학자들의 초기 연구가 동시기 초국가적 학술의 특징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기운'보다는 '생동'에 중점을 둔 자일스의 해석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로울리(George Rowley, 1892-1962), 소퍼(Alexander Soper, 1904-1993), 케힐(James Cahill, 1926-2014) 등은 '기운생동'의 중점은 '기운'이라고 역설하였으며 이후 '기운'의 번역은 'spirit resonance' 또는 'spirit consonance'로 정착되었다.
이 사례는 미술사의 서술에서 번역과 해석 그리고 그로 인한 이론의 변형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더욱이 연구의 성과가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번역에 의한 이론의 변형은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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