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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표훈(表訓) 창안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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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표훈(表訓) 창안 가능성

The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of Silla Korea

임영애 ( Lim Young-ae )
  •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5월
  • : 26-55(30pages)
미술사와 시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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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8세기 중엽 신라 왕경의 비로자나불상과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등장
Ⅲ. 연기계(緣起系)와 표훈계(表訓系)의 비로자나불상
Ⅳ. 맺음말: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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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과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두 불상 모두 지권인(智拳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하나는 몸에 장엄하지 않은 불상형이며, 다른 하나는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이다. 755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보관형 비로자나불상이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이다. 두 상은 모두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으며, 『80권본 화엄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두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은 다르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경전을 바탕으로 했지만, 도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8세기 중엽, 신라 왕경의 화엄학은 크게 연기계(緣起系, 또는 화엄사계)와 표훈계(表訓系, 또는 부석사계)로 나뉜다. 연기(緣起, 8세기 중엽에 활동)가 주로 화엄사,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표훈(表訓, 8세기 중엽에 활동)은 황복사, 불국사가 활동무대였다. 필자는 연기계가 보관형 비로자나불을, 표훈계가 불상형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중국 승려 법장(法藏, 643-712)의 영향을 받은 연기는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의 도상인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을 그대로 빌려 왔다. 그 사례가 바로 황룡사 연기조사가 조성한 755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이다. 반면 표훈계는 연기계와 달랐다. 표훈의 스승 의상(義相, 625-702)은 『화엄경』만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며 『화엄경』 그 자체에 몰두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표훈은 왕경에 진출하여 8세기 중엽 이후 왕경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러한 표훈을 비롯한 의상의 문도들이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비로자나불의 핵심인 지권인 수인(手印)만 빌려 와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이라는 새로운 도상 창안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훈계는 『화엄경』에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외의 경전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창안되었으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앞서 이미 신라 왕경에서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했다고 보았다. 당시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 도상 창안을 주도했던 이는 바로 당시 왕경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표훈(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In the Silla kingdom, there were two types of images depicting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known as ‘tathāgata type’ and ‘crowned type’. In both types, Vairocana Buddha holds his hands in the Bodhaśrī-mudrā’ (fist of wisdom) pose. The distinction is a matter of majestic ornamentation. While tathāgata images are absent of decoration, the crowned Vairocana Buddha is always represented with a crown above the Buddha’s head. The Vairocana Buddha portrayed in the 755 illustrated manuscript, Silla Illustration of the Avatamsaka Sutra, is of the crowned type. The stone statue of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Seongnamamsaji Temple site, created little more than a decade later in 766, is of the tathāgata type. Although both examples were made during the mid-eighth century and based on the 80-volume Avatamsaka Sutra, the two images present unmistakably different iconography. This paper seeks to explain why images of the same figure, created almost simultaneously and constructed from a single sutra, show contrasting iconographies.
During the mid-eighth century, the Huayan School of Buddhism in the royal capital of Silla was largely divided into either the monk Yeongi (active mid-eighth century) lineage or the monk Pyohun (active mid-eighth century) lineage. The leader of the former group, the monk Yeongi based his activities in the Hwaeomsa and Hwangnyongsa Temples. The leader of the latter group, the monk Pyohun worked at the Hwangboksa and Bulguksa Temples. Through this paper, I purport that the Yeongi lineage created the crowned type image of Vairocana Buddha, while the Pyohun lineage was responsible for developing the tathāgata type.
Yeongi, who was influenced by the Chinese monk Fazang (643-712), exactly reproduced the ‘Crowned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from the Middle Esoteric Buddhism iconograhpic interpretation of Mahāvairocana (Great Buddha Vairochana). The resulting image is preserved in the Silla Illustration of the Avatamsaka Sutra created in 755 by Yeongi for the Hwangnyongsa Temple. On the other hand, the head monk Uisang (625- 702) of the Pyohun lineage believed the Avatamsaka Sutra to be an absolute and complete teaching, and immersed himself in the sutra with an emphasis on applied practices. Among Uisang’s followers, Pyohun in particular made his way to the royal capital where he established his position as a preeminent monk after the mid-eighth century. Pyohun and other disciples of Uisang commissioned a stone statue of Vairocana Buddha, the central figure of the Avatamsaka Sutra. However, they did not follow the precedent for recreating the representation of the Mahāvairocana in the tradition of Middle Esoteric Buddhism. Instead, Pyohun and his fellow monks developed a new iconography that focused solely on the Bodhaśrī-mudrā, which they considered the defining aspect of Vairocana Buddha. Aligned with the core philosophy of the Pyohun lineage, Pyohun conceived the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as a physical symbol of the belief that the Avatamsaka Sutra is the culmination of teachings from all sutras. Thus, the stone statue of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the Seongnamamsaji Temple site was the manifestation of a newly established iconography.
In all likelihood, the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originates from Korea. This particular type of Vairocana Buddha image was already being created and enshrined in the royal capital before the stone statue of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the Seongnamamsaji Temple site was made in 766. This paper asserts that the monk Pyohun who was a central figure in the royal capital at the time, was the individual responsible for developing a new iconography. His efforts are symbolized in the image of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that we see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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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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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2002-2022
  • :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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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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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항해시대와 미술: 17세기 항해자 그리스도 도상의 유통과 수용

저자 : 박정호 ( Jeongho Par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2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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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자 그리스도는 아기 예수가 수난의 도구로 장식된 범선을 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도상으로, 현전하는 작품 중에서는 안토니오 리치(Antonio Ricci, c. 1565-1635)의 유화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항해자 그리스도 도상은 유럽에서 비롯되었으나 이 지역에서 제작된 미술 작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알려진 항해자 그리스도 이미지들은 오히려 인도, 중국, 필리핀, 멕시코, 페루 등 17세기 유럽과 활발히 교류하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필사본 삽화, 상아 부조, 우아망가석 조각 등으로 만들어진 이 이미지들은 각 지역의 미술전통을 반영하면서도 도상적으로는 서로 매우 유사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유사성에 주목하여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항해자 그리스도 이미지들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한편, 이 이미지들이 현재는 전하지 않는 16세기 말 유럽에서 제작된 판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유럽 미술에서 흔하지 않은 이미지가 아시아와 아메리카 각지에서 활발히 제작되고 유통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 사실은 대항해 시대 미술 교류를 유럽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한 기존의 관점을 재고하게 한다.


Representing Christ Child on a ship adorned with Arma Christi, Christ as Divine Pilot is a rare subject in the history of European art, the earliest extant example of which can be found in a painting by Antonio Ricci (c. 1565-1635). Although its origin is in Europe, the iconography of Christ as Divine Pilot appears much more frequently in art works produced in such regions as India, China, the Philippines, Mexico, and Peru. The iconographic resemblance among these works is remarkable despite the different media that reflect their respective artistic traditions. Focusing on the iconographic affinities among extant representations of Christ as Divine Pilot, this essay reconstructs a possible genealogy of the images and argues that they are modeled on a couple of late sixteenth-century European prints that no longer exist. That such rare subject matter circulated more actively in non-European regions than in Europe calls for a reconsideration of the traditional view that centers on the artistic exchange between Europe and the rest of the world in the Age of Cont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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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표훈(表訓) 창안 가능성

저자 : 임영애 ( Lim Young-a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5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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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과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두 불상 모두 지권인(智拳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하나는 몸에 장엄하지 않은 불상형이며, 다른 하나는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이다. 755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보관형 비로자나불상이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이다. 두 상은 모두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으며, 『80권본 화엄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두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은 다르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경전을 바탕으로 했지만, 도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8세기 중엽, 신라 왕경의 화엄학은 크게 연기계(緣起系, 또는 화엄사계)와 표훈계(表訓系, 또는 부석사계)로 나뉜다. 연기(緣起, 8세기 중엽에 활동)가 주로 화엄사,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표훈(表訓, 8세기 중엽에 활동)은 황복사, 불국사가 활동무대였다. 필자는 연기계가 보관형 비로자나불을, 표훈계가 불상형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중국 승려 법장(法藏, 643-712)의 영향을 받은 연기는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의 도상인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을 그대로 빌려 왔다. 그 사례가 바로 황룡사 연기조사가 조성한 755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이다. 반면 표훈계는 연기계와 달랐다. 표훈의 스승 의상(義相, 625-702)은 『화엄경』만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며 『화엄경』 그 자체에 몰두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표훈은 왕경에 진출하여 8세기 중엽 이후 왕경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러한 표훈을 비롯한 의상의 문도들이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비로자나불의 핵심인 지권인 수인(手印)만 빌려 와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이라는 새로운 도상 창안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훈계는 『화엄경』에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외의 경전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창안되었으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앞서 이미 신라 왕경에서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했다고 보았다. 당시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 도상 창안을 주도했던 이는 바로 당시 왕경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표훈(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In the Silla kingdom, there were two types of images depicting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known as 'tathāgata type' and 'crowned type'. In both types, Vairocana Buddha holds his hands in the Bodhaśrī-mudrā' (fist of wisdom) pose. The distinction is a matter of majestic ornamentation. While tathāgata images are absent of decoration, the crowned Vairocana Buddha is always represented with a crown above the Buddha's head. The Vairocana Buddha portrayed in the 755 illustrated manuscript, Silla Illustration of the Avatamsaka Sutra, is of the crowned type. The stone statue of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Seongnamamsaji Temple site, created little more than a decade later in 766, is of the tathāgata type. Although both examples were made during the mid-eighth century and based on the 80-volume Avatamsaka Sutra, the two images present unmistakably different iconography. This paper seeks to explain why images of the same figure, created almost simultaneously and constructed from a single sutra, show contrasting iconographies.
During the mid-eighth century, the Huayan School of Buddhism in the royal capital of Silla was largely divided into either the monk Yeongi (active mid-eighth century) lineage or the monk Pyohun (active mid-eighth century) lineage. The leader of the former group, the monk Yeongi based his activities in the Hwaeomsa and Hwangnyongsa Temples. The leader of the latter group, the monk Pyohun worked at the Hwangboksa and Bulguksa Temples. Through this paper, I purport that the Yeongi lineage created the crowned type image of Vairocana Buddha, while the Pyohun lineage was responsible for developing the tathāgata type.
Yeongi, who was influenced by the Chinese monk Fazang (643-712), exactly reproduced the 'Crowned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from the Middle Esoteric Buddhism iconograhpic interpretation of Mahāvairocana (Great Buddha Vairochana). The resulting image is preserved in the Silla Illustration of the Avatamsaka Sutra created in 755 by Yeongi for the Hwangnyongsa Temple. On the other hand, the head monk Uisang (625- 702) of the Pyohun lineage believed the Avatamsaka Sutra to be an absolute and complete teaching, and immersed himself in the sutra with an emphasis on applied practices. Among Uisang's followers, Pyohun in particular made his way to the royal capital where he established his position as a preeminent monk after the mid-eighth century. Pyohun and other disciples of Uisang commissioned a stone statue of Vairocana Buddha, the central figure of the Avatamsaka Sutra. However, they did not follow the precedent for recreating the representation of the Mahāvairocana in the tradition of Middle Esoteric Buddhism. Instead, Pyohun and his fellow monks developed a new iconography that focused solely on the Bodhaśrī-mudrā, which they considered the defining aspect of Vairocana Buddha. Aligned with the core philosophy of the Pyohun lineage, Pyohun conceived the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as a physical symbol of the belief that the Avatamsaka Sutra is the culmination of teachings from all sutras. Thus, the stone statue of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the Seongnamamsaji Temple site was the manifestation of a newly established iconography.
In all likelihood, the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originates from Korea. This particular type of Vairocana Buddha image was already being created and enshrined in the royal capital before the stone statue of seated Vairocana Buddha from the Seongnamamsaji Temple site was made in 766. This paper asserts that the monk Pyohun who was a central figure in the royal capital at the time, was the individual responsible for developing a new iconography. His efforts are symbolized in the image of 'Tathāgata type Vairocana Buddha in Bodhaśrī-mudrā' that we see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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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전기 회화와 '연사모종(煙寺暮鍾)'

저자 : 장진성 ( Chin-sung Cha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6-7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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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는 16세기에 안견파(安堅派) 화풍으로 그려진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회화작품이다. 이 그림은 표면적으로 보면 특정한 주제가 없는 '일반 산수화(generic landscape painting)'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의 원경(遠景)에 보이는 연무(煙霧)에 잠겨 있는 사찰은 〈산수도〉가 연사모종도라는 것을 알려 준다. 연사모종도를 구성하는 정확한 도상(圖像)적 요소들은 분명하지 않지만 강 너머 또는 언덕 위에 있는 곳을 보여 주는 공간적 거리감, 안개에 싸여 있는 사찰, 저녁 시간, 종소리를 듣는 인물들이 중요한 시각적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길을 걸어가는 행인(行人)들, 안개에 싸여 있는 사찰, 저녁 무렵의 풍경이 나타나 있는 〈산수도〉는 특정한 주제가 없는 일반 산수화가 아니라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한 장면을 그린 〈연사모종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처럼 아직도 많은 작품들이 '산수도'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상팔경도 병풍 및 화첩이 해체되고 이후 8폭의 그림이 단폭(單幅)으로 후대에 전해지면서 이 작품들은 '산수도'가 되었다.
현재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중행려도(雨中行旅圖, Rainy Landscape with Travelers)〉는 전경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는 승려를 근거로 〈연사모종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우중행려도〉에는 사찰이 그려져 있지 않다. 안개가 산과 계곡에 자욱하지만 사찰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연사모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안개에 싸인 절[煙寺]'이 이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우중행려도〉는 연사모종도로 불릴 어떤 근거도 없다. 〈우중행려도〉와 같이 연사모종도로 오인(誤認)될 수 있는 그림도 있지만 연사모종도로 알려진 그림이지만 연사모종도가 아닌 그림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는 〈연사모종도〉이다. 〈연사모종도〉로 알려진 것은 화면의 왼쪽 상단에 적혀 있는 '촉사모종(燭寺暮鍾)'과 명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인 사구소(史九韶, 15세기 초에 주로 활동)의 「소상팔경기(瀟湘八景記)」 중 '연사모종'에 대한 시(詩) 때문이다. 〈연사모종도〉에는 비록 사찰이 나타나 있지만 너무도 미미한 화면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 〈연사모종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전경에 나타나 있는 강가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다. 이러한 '정박한 배'라는 모티프는 '어촌석조(漁村夕照)' 또는 '원포귀범(遠浦歸帆)'을 그린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야마토분카칸 소장의 〈연사모종도〉의 주제는 '연사모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Landscape, now in a private collection, has been considered a generic landscape painting with no specific theme. The scene of a temple enveloped in mists and clouds in the background strongly suggests that this painting depicts “Evening Bells from Mist-Shrouded Temple,” one of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The iconography of “Evening Bells from Mist- Shrouded Temple” consists of evening, temple in the misty hills, distance (across the river or up in the hills), and figures standing to listen to the sound of bells or wandering through the mist toward a distant temple. The two figures in the foreground, a man with a staff and a young attendant, and the misty temple in the background indicate that the subject of Landscape is “Evening Bells from Mist-Shrouded Temple.” Paintings of the Eight Views of the Xiao and Xiang Rivers have been disassembled. Eight round fans, eight square album leaves, eight hanging scrolls, eight screen panels, eight handscrolls, and eight sections of a handscroll, painted originally as a linked group have been taken apart, dispersed, and remounted as individual paintings. Landscape is one such example.
Rainy Landscape with Travelers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shows a man with two attendants traversing a bridge in a mist-shrouded mountain valley on the way to his temple. Due to the overall evocative and misty setting and the figures, this painting is thought to depict “Evening Bells from Mist- Shrouded Temple.” However, none of the iconographic core elements of the theme is found in the Rainy Landscape with Travelers. Even the Buddhist temple is absent. The subject of Evening Bell from Mist-Shrouded Temple in the Yamato Bunkakan, Nara, Japan, has never been questioned because of the inscription on the painting, a poem on “Evening Bell from Mist-Shrouded Temple” by the Ming poet Shi Jiushao (active early fifteenth century). The misty temple seen in the upper right is too small to be visible. The moored boats and drying nets in the foreground are suggestive of the theme of the painting: either “Fishing Village in Evening Glow” or “Returning Sail off Distant Shore.” In all likelihood, the Yamato Bukankan painting has nothing to do with “Evening Bell from Mist-Shrouded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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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보 〈송시열 초상〉의 제작 시기와 맥락

저자 : 강관식 ( Kang Kwanshi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6-113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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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 초상〉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의 가장 큰 쟁점인 제작 시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여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송시열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에 근거하여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정조어제의 관서에 근거하여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으며, 평면적이고 고졸한 화법에 근거하여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국보본의 관서는 송시열과 그의 초상화를 이상화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상의 내용을 가탁(假託)해 넣은 것이고, 용모와 의관도 초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모습과 달리 이상화시키고 추상화시킨 모습을 의고적인 평면적 조형으로 특별하게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텍스트 분석이나 양식 분석으로는 올바르게 편년하기 어렵다.
본고는 이와 같은 특수성을 고려하여 국보본(國寶本)의 가장 본질적 특징인 '이상화' 개념을 핵심 기준으로 삼은 뒤, 용모나 도상이 유사한 이모작 계열 가운데 나타난 이상화 양상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양식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편년을 시도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모된 송시열 초상은 크게 3단계의 이상화 과정을 보여 준다. 1단계인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은 도화서 화원에 의한 윤색이 가해졌지만 대체로 초기의 사실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2단계인 18세기 중·후반에는 여러 화가들이 그린 송시열 초상의 장점이 융합되고 얼굴이 귀인의 상처럼 관상학적으로 이상화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단계인 19세기 초반에는 이상화가 더욱 진행되어 눈썹이 초승달이나 버들잎처럼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지고 귀는 부처님 귀처럼 2배 이상 길어져 이상화가 정점에 달하며 국보본이 그려졌다. 정조 어제를 서사(書寫)한 예서(隸書)의 서풍(書風)이 19세기 초반 양식을 보여 주고, 국보본과 동일한 용모와 도상의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중·후반 이후 이모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송시열에 대한 숭배 의식이 18세기 후반에 정점에 달하고 19세기 초까지 그 여맥이 지속되었던 것도 국보본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추론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This essay identifies Portrait of Song Siyeol (henceforth referred to as National Treasure No. 239) as an early nineteenth-century painting. Previous studies regarding this portrait diverge greatly on the issue of its creation date. Some identified National Treasure No. 239 as a mid-seventeenth-century portrait, on the basis of Song's inscription, hwasang jagyeong (self-admonishing portrait inscription). Others considered the work to be produced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due to King Jeongjo's (r. 1776-1800) inscription. Observing the painting's archaistic and flat drawing, the others assumed it was drawn between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and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However, it is difficult to identify the date of National Treasure No. 239 via a general analysis of text or style due to its characteristics: Song's and King Jeongjo's inscriptions are deceptively used later to idealize Song; the sitter's appearance and attire are also deliberately depicted in archaistic and flat styles to idealize Song, contrary to the realistic representation appearing in Song's earliest portraits.
Considering such characteristics found in National Treasure No. 239, this essay sets the notion of “idealization,” the most fundamental character of the painting that is essential for evaluating the creation date. By conducting a stylistic analysis of the idealization process among copies that resemble National Treasure No. 239 in countenance and iconography, this essay concludes that National Treasure No. 239 was produced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copies of Song's portrait in the late Joseon period fall into three steps of idealization. In the first step, from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to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Song's portraits tend to maintain the early versions' realistic representation, albeit with some embellishment added by court painters. In the second step, or during the mid-to-late eighteenth century, however, a new trend appeared. Song was further idealized by synthesizing the great pictorial elements of various versions of Song's portraits and depicting the sitter as a nobleman according to physiognomy.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idealization of Song advanced to the third step, reaching its peak as marked by National Treasure No. 239: brows thinly and gently crooked like a crescent or willow leaves, and ears drooping twice as long to resemble those of the Buddha.
This essay also offers other pieces of evidence to support that National Treasure No. 239 was produced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Firstly, King Jeongjo's inscription written in clerical script was transcribed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Secondly, copies of Song's portrait that accord with the countenance and iconography of National Treasure No. 239 began to appear after the mid-to-late nineteenth century. Lastly, enthusiasm toward venerating Song was at its zenith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and continued until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se all strongly support this essay's argument that National Treasure No. 239 is an early nineteenth-century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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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영석 작 〈조정만 송하안식도〉 연구: 초상화에 투영된 '은일(隱逸) 의식'

저자 : 이성훈 ( Lee S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4-157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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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안식도(松下安息圖)〉는 여러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그리고 그 제작 기록만 자세히 전하고 그 그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작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중 한 명인 조영석이 직접 그 제작 과정과 표현 의도를 자세히 소개한, 그가 그린 유일한 산수 배경의 초상화일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선사(先師)인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친우(親友)였던 조정만의 거듭된 부탁을 받아 성심성의껏 제작한 작품이란 측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새로이 조명될 수 있다.
〈송하안식도〉는 그 주인공인 조정만이 가졌던 은일·탈속 지향의 정신이 강하게 반영된 그림으로 분석된다. 조정만은 평생 관직 생활에 몸담으면서도 은일·탈속의 삶을 열망했으며, 이러한 열망을 때때로 그림이란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 자 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주변의 몇몇 문인화가들에게 그림 제작을 번번이 부탁해 그들로부터 그림을 그려 받았다. 이 초상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림이다. 조정만으로부터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은 조영석은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이상적으로 보이는 은거 공간을 구성하는 한편, 다양한 상징물들을 활용해 그 공간 안에 '아취 있는 일상과 탈속·은거의 삶'을 즐기는 조정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은거와 탈속의 삶에 대한 그의 염원 그리고 그의 고매한 정신과 일기(逸氣)를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조영석이 그 주문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단순하게 반영해 완성한 초상화로 한정해 볼 수 없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로 평가되는 조영석은 명대(明代) 문인화단을 주도했던 오파(吳派) 화가들의 회화 제작 경향과 사상을 수용하고 또한 명나라 말기 중국의 산수 배경 초상화의 도상과 표현 방식을 충분히 인지한 바탕 위에서, 또한 조정만이 지향하고 염원했던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송하안식도〉는 18세기 초 한 문사(文士)의 '은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그와 그의 의뢰를 받은 한 문인화가가 어떤 노력을 펼쳤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측면에서 이 그림은 18세기 초 이후 유행했던 산수 배경의 초상화나 사인풍속화(士人風俗畵)의 성격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The painting Resting Under the Pine by Jo Yeongseok (1686-1761) is a portrait of Jo Jeongman (1656-1739), which was previously believed not to have survived until the present day, although there are detailed records of its production. This work of Jo Yeongseok,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literati painters of 18th-century Joseon Korea, is currently his only portrait featuring a landscape background. Furthermore, there is a precise account of the process and of the intentions behind its creation that is found in one of the artist's writings. After repeated requests from Jo Jeong-man, who was a close friend of his teacher Yi Huijo (1655-1724), Jo Yeongseok must have executed this painting with utmost sincerity. Therefore, it needs to be examined anew by highlighting that it is a masterpiece of the artist.
Resting Under the Pine is analyzed as a remarkable painting strongly reflecting the sitter's wish for reclusion and freedom from social conventions. While dedicating his entire life to public service, Jo Jeongman longed for a life in reclusion, and occasionally turned to express this desire through the medium of painting. Thus, he often asked literati artists to paint different genres of paintings for himself and received several from them. This portrait originates from such a context.
On the one hand, Jo Yeongseok, whom Jo Jeongman commissioned for a portrait, presented a place of retreat in the painting that seems realistic while also idealistic. On the other hand, he used diverse symbols to depict the sitter enjoying “days of refinement and a reclusive life far away from the vulgar world” in order to express his yearning for reclusion as well as his noble mind and detached spirit. In doing so, the painter responded to Jo Jeongman's wish that the refined lifestyle he pursued throughout his life would be remembered and passed on forever. Consequently, this work cannot be considered a portrait simply mirroring what was requested by the client. Jo Yeongseok embraced the painting methods and ideas of the Wu school, which led the Chinese literati artist circle during the Ming dynasty (1368-1644). Correspondingly, he created the portrait with sufficient awareness about the iconography and style of portraits with landscape backgrounds derived from late Ming paintings. In addition to that, he fully understood what his client, a Confucianist and government official, was aspiring and longing for.
After all, Resting Under the Pine demonstrates in detail what process and what efforts a Joseon literati painter had to go through at the beginning of the 18th century, when a scholar asked the painter to create his portrait as the image of a recluse. In this regard, this portrait can be evaluated as an important work for comprehending the character and content of portraits with landscape backgrounds as well as genre paintings of literati life that became popular after the early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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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20세기 조선 궁궐의 건축 공간과 서화

저자 : 김수진 ( Sooji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8-187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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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최근 발굴작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궁궐의 건축 공간에서 서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논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의 사례로 주로 이 시기에 집중된 건축 관련 서화는 그 종류와 기능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궁궐의 생활 공간에 사용된 장지서화이다. 이 글은 이 유형의 형식적 특징을 논구하는 한편 작품의 주제를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설치되었던 공간과 사용자 간의 관계에 주목했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서화 장지가 왕실구성원의 감계(鑑戒)와 지위 및 책무 표상을 위해 조성된 것임을 논의했다. 둘째, 이 글은 조선 왕실이 병풍과 장지를 일종의 가벽(假壁)으로 활용함으로써 본래 있던 생활 공간을 흉례 공간으로 전환한 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이와 관련해서 본 연구는 명성황후의 국장을 위해 마련된 경효전(景孝殿)의 사례를 통해 왕실이 지벽병풍장지를 활용하여 의례 공간을 꾸민 방식을 검토하였다. 셋째, 필자는 궁궐에서 부벽(付壁) 서화가 조성된 역사를 논의하면서, 병풍 조성 방식이 부벽 서화 제작에 적용되었던 역사를 검토하였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궁궐 벽화류가 현재는 단독 유물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본래는 건축 공간에 설치되었던 특수 서화였음을 조명함으로써 이들이 가진 왕실문화사적 의의를 논하였다.


This study discusses how calligraphy and painting were used in the architectural space of royal palaces in Joseon Korea, focusing on recent excavations. Since the remaining works are mainly examples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rchitecture-related visual arts such as calligraphy and paintings were classified into three types, specifically focusing on that period and functional usage. Firstly, this paper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pace in which they were installed and the royal family users by analyzing the subject matter of the works while discussing the formal characteristics of this type. In Particular,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jangji (sliding door) were created for the moral education and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royal family's status and responsibility. Secondly, this study discusses how the Joseon royal family converted the living place into a funeral space by using the folding screen and jangji as a kind of temporary wall. In this regard, through the case of Gyeonghyojeon, prepared for the funeral of Empress Myeongseong, this paper sheds light on the way the royal family decorated the ceremonial space by using the paper-wall folding screen. Thirdly, while discussing the history of the creation of calligraphy and paintings to be attached to the walls of palaces, this study argues how the folding screen mounting was applied to the production of calligraphy and paintings attached to the wall. Ultimately, this study discusses the significance of the late Joseon cultural history by illuminating the palace murals that are currently in museum collections. But they were originally special calligraphy and paintings installed in the architectural space of royal pal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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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고동(古董) 수집의 실상과 책거리 기물의 간극

저자 : 유재빈 ( Yoo Jaeb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8-243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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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세기 조선의 수집 문화와 책거리 기물 간의 간극을 살피고자 하였다. 필자는 19세기 문인의 수장품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당시 대표 수장가였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 홍경모(洪敬謨, 1774-1851), 신위(申緯, 1769-1847)의 수장품 기록을 살펴보았으며, 분석 그림은 이형록(李亨祿, 1808-?)의 책거리로 한정하였다. 세 사람이 소장하였던 70여 점의 수장품의 특징을 분석한 결과 이들의 수집 목록과 책거리의 기물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책거리 기물이 대부분 조선에서 제작된 적이 없는 수입산 중국 기물만을 다루고 있다면 수집가들은 중국 기물뿐 아니라 집안의 가전품(家傳品)이나 백제, 고려의 유물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과 서장(西藏)의 물건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책거리 기물을 종류별로 나누어 그 분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책거리에서 도자기가 절반가량을 차지한 데 비해 문인 수장가는 수집가가 특별한 경위로 선물 받거나 직접 제작한 고급 문방구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차이는 책거리가 감상과 길상이라는 일반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려진 데 비해 수장 목록은 특별한 역사적, 개인적 가치가 있는 수집품을 위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책거리가 19세기의 물질문화를 반영하는 측면도 발견된다. 문헌의 수장품과 정확히 일치되는 책거리의 기물은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당시 특정 재료나 기물에 대한 전반적인 애호나 지식수준이 책거리 기물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과 마노, 문양석에 대한 특별한 애호는 책거리 기물 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얼룩 반점 효과로 증명될 수 있으며, 다양한 수입 목재에 대한 선호는 책거리 기물에서 표면이 나무옹이 모양으로 과장되게 일그러진 필통들을 통해 드러난다. '주문왕정(周文王鼎)'이나 '선덕로(宣德爐)' 정도의 이름을 상식적으로 알았던 당시의 고동기 구입 수준은 방정(方鼎)과 유족로(乳足爐) 등 소수의 기형이 반복되는 책거리의 고동기 표현과 관계가 있다.
책거리는 청대의 다보격(多寶格)에 형식적 기원을 두고 있지만 사실상 매우 다른 지향점을 보여 준다. 다보격이 이미 소유한 물건을 특정한 체계 안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소우주를 구성한 것이라면 책거리는 내가 원하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을 이미지로 구현함으로써 나의 밖에 다른 세계를 구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책거리는 실제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gap between the culture of collecting antiques and prized items and the objects shown in chaekgeori (paintings of books and things) in 19th-century Joseon Korea. In order to understand the collection of Joseon literati in detail, I examined the collecting records of the three representative collectors of the time, Kim Josun (1765-1832), Hong Gyeongmo (1774-1851), and Sin Wi (1769-1847). As a result, there are the following differences between their collection and the objects featured in chaekgeori screens by Yi Hyeongnok (1808-?). First, while most of the chaekgeori paintings show imported Chinese goods that were never made in Joseon, such as Ge ware or fencai (Chinese porcelains defined by the presence of pink color overglaze enamel) vessels, the collectors were interested in not only Chinese antiques, but also relics and cultural remains from Baekje and Goryeo. They were also interested in precious objects from Japan and Tibet.
Second, the imported Chinese ceramics accounted for about half of the objects in chaekgeori, while the luxurious scholarly utensils gifted by kings and friends constituted the collections of Joseon literati. Chinese ceramics were seldom included in their collection lists. These differences can be attributed to the fact that chaekgeori paintings were made to meet the general need of their appreciation and were created for auspicious purposes, while the collection records were based on the specific historical and personal value of collectors rather than the objects' aesthetic or material value.
Despite these gaps, it was also found that chaekgeori reflected the material culture of the 19th century. Few objects were found to match exactly the collections of those three collectors. Their contemporaries' overall level of knowledge or affection for certain materials or objects was, however, reflected in chaekgeori. For example, the special love for jades, agates, and marbles can be proved by the stain-spotted effect repeatedly found on the containers and furniture in the paintings and the preference for various precious wood is revealed through pencil cases whose surfaces are exaggeratedly distorted or covered by the knot of wood in chaekgeori paintings.
The chaekgeori genre has been considered to be originated from the format of duoboge or curio boxes of the Qing dynasty, but they are different. While duoboge presents the collector's own small universe by rearranging the objects he has already owned within a specifically designed system, chaekgeori shows a material world outside of oneself by embodying objects that one desires but rarely ow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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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환된 전통: 서구 국제 비엔날레 출품작을 통해 본 한국현대미술과 전통

저자 : 이지은 ( Jieun Rhe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4-281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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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의 해외 국제전 참가의 역사는 곧 한국현대미술사의 이정표였다. 그것이 국가를 대표하여 참가하는 국제 비엔날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현대미술의 후발 주자로서 서구의 현대미술과 어깨를 견주는 동시대성의 확보에 목말라하던 국내 미술계의 열망은 국제 비엔날레를 통해 그 창구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사조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따라잡는 숨가쁜 릴레이가 이어졌다. 참여 작가들은 서구 중심의 국제 비엔날레의 현실을 마주하며 서구의 모방이라는 오명을 씻고 한국현대미술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전통은 세계가 함께 겨루는 비엔날레의 치열한 경기장에서 한국 미술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방패였다.
이 논문은 한국현대미술이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 비엔날레였던 1958년 국제현대채색석판화비엔날레를 시작으로 1960년대 파리 비엔날레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개관전, 그리고 2015년 이후 이어진 베니스 비엔날레 단색화 병행전과 최근 2017년, 2019년의 비엔날레 출품작에 이르는 몇몇 주요 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한국현대미술에서 '전통'에 대한 담론이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한국현대미술은 세계 미술계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통의 수사학을 구사하며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계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구축되어 온 타자성을 충족시켜 왔다. 또한 전통은 국내에 서구현대미술 사조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현대미술의 차별성과 독자성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국현대미술이 그 미감에 내재되었다고 여겼던 '고유한' 전통을 찾는 과정은 곧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소환하고 이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이전의 전통이 발굴해 내야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과거의 실재였다면, 오늘 한국 동시대미술에서의 전통은 상상의 영역에 존재한다. 이제껏 한국현대미술에서 전통의 논의가 보여 주듯이, 전통은 취사선택되며 재조합되고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통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영하고 새로운 서사를 생산하며, 바로 그 전통의 허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환된 동시대의 전통을 만들어 냄으로써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계가 요구하던 타자성의 전복을 도모한다.


In modern Korean art, tradition has always been a double-edged sword. It is a cultural barrier that Korean modernists are trying to overcome in order to be accepted as key players in the international art world. Tradition, on the other hand, is also an index of locality whether in form or narrative, which gives Korean modern art a distinct sense of style contrasting with its western counterparts.
This article attends to the creative acts of 'invention of tradition' occasioned by the way modern Korean artists have grappled with the range of local traditions and vernacular styles in an effort to integrate into the larger world of international art Biennales. What emerges from this global shift is the treatment of tradition as an object of stylistic or rhetorical investment ranging from the revival of traditional practice to “dissimulating” Orientalism, which all contribute to the making of Korean contemporary art as a point of distinction to be appreciated by Western viewers of the international Biennales while avoiding the possible charges of mimicking Western styles.
The article claims that this complex, often interventionist link to tradition is at the heart of what can be construed as 'inventing tradition' in Korean modern art, a creative practice of self-fashioning one's cultural belongingness at the local or national level. Particular emphasis is placed on the way in which the act of invention is also designed to subvert the globalist system of representation in which Korean arts are essentialized as the sign of “Koreanness”, an orientalist construct of otherness cohering into the “world picture” that privileges the position of the occidental ga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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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북조기(北朝期)의 불교미술에 나타난 다양한 불교 고사(故事) 중에서 아육왕시토(阿育王施土)와 정광불수기(定光佛授記) 본생(本生) 장면에 주목한 글이다. 이 두 주제는 운강석굴(雲岡石窟) 및 6세기 중국 불교조각에서 각각 가장 빈번하게 묘사되었으며, 두 주제가 짝을 이루어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강 중기 및 후기에 이르러 이 두 고사는 아육왕시토의 특징적인 도상(圖像)이 정광불수기 본생 장면으로 전이되어 결합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난다. 특정 도상이 전이되어 다른 주제로 인식된 불교 고사의 다른 사례는 종래 알려진 바가 없는 만큼 이러한 현상은 중국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주목할 만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아육왕시토와 정광불수기 본생과 관련된 문헌을 조사하고, 중국 북조 후기에 제작된 운강석굴 벽면의 부조와 기타 불교조각에 나타난 이 고사를 표현한 장면의 구성 및 시각적 특징들을 분석하여 두 주제가 결합되어 가는 양상을 추적하였다. 이어서 선행 연구에서 이 두 고사의 결합 이유로 제시되었던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북조 말기 불교 문화가 당시 불교도들의 종교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기존의 개별 도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재현방식을 창조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광불수기 본생과 아육왕시토 인연 장면의 결합과 관련된 논의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로 현재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소장의 〈불교조상비(佛敎造像碑)〉를 들 수 있다. 1910년 9월에 보스턴미술관에서 구입한 이 조상비에는 정면을 향한 불입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정광불수기 본생 장면과 우측에 아육왕시토 고사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바 없는 보스턴미술관의 이 불교조상비는 이 연구에서 자세히 살펴본 두 고사의 도상적 결합이 일어난 결과물로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상비의 중국 불교조각사상의 위치를 비정해 본 것도 이 글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이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illustrated scenes of the offering of a handful of dust by a previous life of King Aśoka and the Dīpaṃkara jātaka among various scenes of narrative stories surrounding the Buddha Sa-kyamuni, in Buddhist sculptures created during the late Northern Dynasties of China. These two scenes were most frequently represented in the Yungang caves and Buddhist sculptures of the late fifth and the sixth century China, and were paired in symmetrical positions on several occasions. In the mid and late stages of the Yungang caves, however, the combination of the two scenes occurred as iconographic traits of Aśoka's gift of dust were transferred to the Dīpaṃkara jātaka scenes. This phenomenon can be considered an unusual and so very remarkable combination in the history of Chinese Buddhist art, since there are no cases in which a Buddhist narrative scene has been recognized as, or transferred to, a different scene. 
Therefore, this paper investigates Chinese Buddhist literature related to the two scenes and analyzes the composition and visual characteristics of the scenes represented at the Yungang caves and in other Buddhist sculptures created in the late fifth to sixth century. It also traces the process of the combination of the two narrative scenes and explores several theories suggested as the reasons for the merging of the two scenes in previous studies. Through this study,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Buddhist culture at the end of the Northern Dynasties was so dynamic that it created a new way of representation, which could effectively embody the religious aspirations of Buddhists at the time by combining existing depictions of Buddhist narrative scenes. 
One of the notable examples in the discussion related to the combination is a Buddhist votive stele housed in 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The stele, purchased by the museum in September 1910, features a standing Buddha image at the center, with the scene of Dīpaṃkara jātaka on the Buddha's left side and the scene of a child, a former life of King Aśoka, offering a handful of dust to Sa - kyamuni Buddha on the right side. One major significance of this paper is to suggest that the stele, which has never been published before, was created between the late sixth and early seventh centuries as a result of combining the two Buddhist narrative depi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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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운생동(氣韻生動)'과 'Rhythmic Vitality'

저자 : 정수진 ( Jung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8-345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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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중국에는 서구에서 영역(英譯)된 중국 회화 이론의 용어가 수용되어 자국의 미술사를 해석하는 사례가 있었다. 사혁(謝赫, 6세기 초반 활동)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실린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개념의 해석과 번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구의 학자들은 중국 미술을 설명할 때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의미가 모호한 이 개념을 다양한 어휘로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자일스(Herbert A. Giles, 1845-1935)가 1905년에 기운생동을 번역한 'rhythmic vitality'라는 용어는 동시기 중국의 학자들에게 역으로 수용되어 중국 미술의 특질로 서술되었다. 텅구(滕固, 1901-1941), 류하이쑤(劉海粟, 1896-1994), 쭝바이화(宗白華, 1897-1986) 등의 학자들은 '기운생동'을 '리듬이 있는 생명(有節奏的生命)'이라고 해석하여 자일스의 영향을 드러내었다. 즉 '기운'을 'rhythm'으로 이해한 서구 학자들의 초기 연구가 동시기 초국가적 학술의 특징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기운'보다는 '생동'에 중점을 둔 자일스의 해석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로울리(George Rowley, 1892-1962), 소퍼(Alexander Soper, 1904-1993), 케힐(James Cahill, 1926-2014) 등은 '기운생동'의 중점은 '기운'이라고 역설하였으며 이후 '기운'의 번역은 'spirit resonance' 또는 'spirit consonance'로 정착되었다.
이 사례는 미술사의 서술에서 번역과 해석 그리고 그로 인한 이론의 변형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더욱이 연구의 성과가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번역에 의한 이론의 변형은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In early 20th century China, art historians used terminology for Chinese painting theory that was coined by Western translations. One representative example for this is the interpretation and translation of the concept qiyun shengdong in the work Guhua pinlu by Xie He (active in the early 6th century). Western scholars translated this concept, which is essential but also ambiguous in meaning, in diverse ways when describing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art. Among those, the term “rhythmic vitality,” as Herbert Giles (1845-1935) translated it in 1905, was accepted by contemporary Chinese scholars and became a defining feature of Chinese art. Scholars such as Teng Gu (1901-1941), Liu Haisu (1896-1994), and Zong Baihua (1897-1986) interpreted qiyun as “life with rhythm,” which reveals Giles' influence. In other words, the Western scholars' understanding of qiyun as “rhythm” formulated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art in the transnational academic world at the time.
But Giles' interpretation, which focuses on shengdong rather than qiyun, was criticized by later scholars. George Rowley (1892-1962), Alexander Soper (1904-1993), and James Cahill (1926-2014) emphasized that qiyun was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 concept qiyun shengdong. Consequently, they translated qiyun as “spirit resonance” or “spirit consonance.” This case demonstrates how important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are for art history and how they can lead to modifications of art theory. After all, when research achievements are shared worldwide, we have to be mindful about changes of art theory that are caused by different trans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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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항해시대와 미술: 17세기 항해자 그리스도 도상의 유통과 수용

저자 : 박정호 ( Jeongho Par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2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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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자 그리스도는 아기 예수가 수난의 도구로 장식된 범선을 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도상으로, 현전하는 작품 중에서는 안토니오 리치(Antonio Ricci, c. 1565-1635)의 유화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항해자 그리스도 도상은 유럽에서 비롯되었으나 이 지역에서 제작된 미술 작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알려진 항해자 그리스도 이미지들은 오히려 인도, 중국, 필리핀, 멕시코, 페루 등 17세기 유럽과 활발히 교류하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필사본 삽화, 상아 부조, 우아망가석 조각 등으로 만들어진 이 이미지들은 각 지역의 미술전통을 반영하면서도 도상적으로는 서로 매우 유사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유사성에 주목하여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항해자 그리스도 이미지들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한편, 이 이미지들이 현재는 전하지 않는 16세기 말 유럽에서 제작된 판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유럽 미술에서 흔하지 않은 이미지가 아시아와 아메리카 각지에서 활발히 제작되고 유통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 사실은 대항해 시대 미술 교류를 유럽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한 기존의 관점을 재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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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의 표훈(表訓) 창안 가능성

저자 : 임영애 ( Lim Young-a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5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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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과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두 불상 모두 지권인(智拳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하나는 몸에 장엄하지 않은 불상형이며, 다른 하나는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이다. 755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보관형 비로자나불상이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이다. 두 상은 모두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으며, 『80권본 화엄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두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은 다르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경전을 바탕으로 했지만, 도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8세기 중엽, 신라 왕경의 화엄학은 크게 연기계(緣起系, 또는 화엄사계)와 표훈계(表訓系, 또는 부석사계)로 나뉜다. 연기(緣起, 8세기 중엽에 활동)가 주로 화엄사,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표훈(表訓, 8세기 중엽에 활동)은 황복사, 불국사가 활동무대였다. 필자는 연기계가 보관형 비로자나불을, 표훈계가 불상형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중국 승려 법장(法藏, 643-712)의 영향을 받은 연기는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의 도상인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을 그대로 빌려 왔다. 그 사례가 바로 황룡사 연기조사가 조성한 755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이다. 반면 표훈계는 연기계와 달랐다. 표훈의 스승 의상(義相, 625-702)은 『화엄경』만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며 『화엄경』 그 자체에 몰두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표훈은 왕경에 진출하여 8세기 중엽 이후 왕경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러한 표훈을 비롯한 의상의 문도들이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비로자나불의 핵심인 지권인 수인(手印)만 빌려 와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이라는 새로운 도상 창안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훈계는 『화엄경』에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외의 경전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창안되었으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앞서 이미 신라 왕경에서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했다고 보았다. 당시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 도상 창안을 주도했던 이는 바로 당시 왕경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표훈(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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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전기 회화와 '연사모종(煙寺暮鍾)'

저자 : 장진성 ( Chin-sung Chang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6-75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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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는 16세기에 안견파(安堅派) 화풍으로 그려진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회화작품이다. 이 그림은 표면적으로 보면 특정한 주제가 없는 '일반 산수화(generic landscape painting)'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의 원경(遠景)에 보이는 연무(煙霧)에 잠겨 있는 사찰은 〈산수도〉가 연사모종도라는 것을 알려 준다. 연사모종도를 구성하는 정확한 도상(圖像)적 요소들은 분명하지 않지만 강 너머 또는 언덕 위에 있는 곳을 보여 주는 공간적 거리감, 안개에 싸여 있는 사찰, 저녁 시간, 종소리를 듣는 인물들이 중요한 시각적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길을 걸어가는 행인(行人)들, 안개에 싸여 있는 사찰, 저녁 무렵의 풍경이 나타나 있는 〈산수도〉는 특정한 주제가 없는 일반 산수화가 아니라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한 장면을 그린 〈연사모종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처럼 아직도 많은 작품들이 '산수도'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상팔경도 병풍 및 화첩이 해체되고 이후 8폭의 그림이 단폭(單幅)으로 후대에 전해지면서 이 작품들은 '산수도'가 되었다.
현재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중행려도(雨中行旅圖, Rainy Landscape with Travelers)〉는 전경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는 승려를 근거로 〈연사모종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우중행려도〉에는 사찰이 그려져 있지 않다. 안개가 산과 계곡에 자욱하지만 사찰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연사모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안개에 싸인 절[煙寺]'이 이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우중행려도〉는 연사모종도로 불릴 어떤 근거도 없다. 〈우중행려도〉와 같이 연사모종도로 오인(誤認)될 수 있는 그림도 있지만 연사모종도로 알려진 그림이지만 연사모종도가 아닌 그림도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는 〈연사모종도〉이다. 〈연사모종도〉로 알려진 것은 화면의 왼쪽 상단에 적혀 있는 '촉사모종(燭寺暮鍾)'과 명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인 사구소(史九韶, 15세기 초에 주로 활동)의 「소상팔경기(瀟湘八景記)」 중 '연사모종'에 대한 시(詩) 때문이다. 〈연사모종도〉에는 비록 사찰이 나타나 있지만 너무도 미미한 화면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 〈연사모종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전경에 나타나 있는 강가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다. 이러한 '정박한 배'라는 모티프는 '어촌석조(漁村夕照)' 또는 '원포귀범(遠浦歸帆)'을 그린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야마토분카칸 소장의 〈연사모종도〉의 주제는 '연사모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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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보 〈송시열 초상〉의 제작 시기와 맥락

저자 : 강관식 ( Kang Kwanshik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6-113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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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 초상〉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의 가장 큰 쟁점인 제작 시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여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송시열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에 근거하여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정조어제의 관서에 근거하여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으며, 평면적이고 고졸한 화법에 근거하여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국보본의 관서는 송시열과 그의 초상화를 이상화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상의 내용을 가탁(假託)해 넣은 것이고, 용모와 의관도 초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모습과 달리 이상화시키고 추상화시킨 모습을 의고적인 평면적 조형으로 특별하게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텍스트 분석이나 양식 분석으로는 올바르게 편년하기 어렵다.
본고는 이와 같은 특수성을 고려하여 국보본(國寶本)의 가장 본질적 특징인 '이상화' 개념을 핵심 기준으로 삼은 뒤, 용모나 도상이 유사한 이모작 계열 가운데 나타난 이상화 양상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양식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편년을 시도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모된 송시열 초상은 크게 3단계의 이상화 과정을 보여 준다. 1단계인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은 도화서 화원에 의한 윤색이 가해졌지만 대체로 초기의 사실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2단계인 18세기 중·후반에는 여러 화가들이 그린 송시열 초상의 장점이 융합되고 얼굴이 귀인의 상처럼 관상학적으로 이상화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단계인 19세기 초반에는 이상화가 더욱 진행되어 눈썹이 초승달이나 버들잎처럼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지고 귀는 부처님 귀처럼 2배 이상 길어져 이상화가 정점에 달하며 국보본이 그려졌다. 정조 어제를 서사(書寫)한 예서(隸書)의 서풍(書風)이 19세기 초반 양식을 보여 주고, 국보본과 동일한 용모와 도상의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중·후반 이후 이모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송시열에 대한 숭배 의식이 18세기 후반에 정점에 달하고 19세기 초까지 그 여맥이 지속되었던 것도 국보본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추론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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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영석 작 〈조정만 송하안식도〉 연구: 초상화에 투영된 '은일(隱逸) 의식'

저자 : 이성훈 ( Lee Sunghoo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4-157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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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안식도(松下安息圖)〉는 여러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그리고 그 제작 기록만 자세히 전하고 그 그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작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중 한 명인 조영석이 직접 그 제작 과정과 표현 의도를 자세히 소개한, 그가 그린 유일한 산수 배경의 초상화일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선사(先師)인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친우(親友)였던 조정만의 거듭된 부탁을 받아 성심성의껏 제작한 작품이란 측면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새로이 조명될 수 있다.
〈송하안식도〉는 그 주인공인 조정만이 가졌던 은일·탈속 지향의 정신이 강하게 반영된 그림으로 분석된다. 조정만은 평생 관직 생활에 몸담으면서도 은일·탈속의 삶을 열망했으며, 이러한 열망을 때때로 그림이란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 자 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주변의 몇몇 문인화가들에게 그림 제작을 번번이 부탁해 그들로부터 그림을 그려 받았다. 이 초상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림이다. 조정만으로부터 초상화 제작 의뢰를 받은 조영석은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이상적으로 보이는 은거 공간을 구성하는 한편, 다양한 상징물들을 활용해 그 공간 안에 '아취 있는 일상과 탈속·은거의 삶'을 즐기는 조정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은거와 탈속의 삶에 대한 그의 염원 그리고 그의 고매한 정신과 일기(逸氣)를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조영석이 그 주문자가 요구한 사항들을 단순하게 반영해 완성한 초상화로 한정해 볼 수 없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로 평가되는 조영석은 명대(明代) 문인화단을 주도했던 오파(吳派) 화가들의 회화 제작 경향과 사상을 수용하고 또한 명나라 말기 중국의 산수 배경 초상화의 도상과 표현 방식을 충분히 인지한 바탕 위에서, 또한 조정만이 지향하고 염원했던 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송하안식도〉는 18세기 초 한 문사(文士)의 '은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그와 그의 의뢰를 받은 한 문인화가가 어떤 노력을 펼쳤으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측면에서 이 그림은 18세기 초 이후 유행했던 산수 배경의 초상화나 사인풍속화(士人風俗畵)의 성격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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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20세기 조선 궁궐의 건축 공간과 서화

저자 : 김수진 ( Soojin Kim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8-187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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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최근 발굴작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궁궐의 건축 공간에서 서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논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의 사례로 주로 이 시기에 집중된 건축 관련 서화는 그 종류와 기능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궁궐의 생활 공간에 사용된 장지서화이다. 이 글은 이 유형의 형식적 특징을 논구하는 한편 작품의 주제를 분석함으로써 이것이 설치되었던 공간과 사용자 간의 관계에 주목했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서화 장지가 왕실구성원의 감계(鑑戒)와 지위 및 책무 표상을 위해 조성된 것임을 논의했다. 둘째, 이 글은 조선 왕실이 병풍과 장지를 일종의 가벽(假壁)으로 활용함으로써 본래 있던 생활 공간을 흉례 공간으로 전환한 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이와 관련해서 본 연구는 명성황후의 국장을 위해 마련된 경효전(景孝殿)의 사례를 통해 왕실이 지벽병풍장지를 활용하여 의례 공간을 꾸민 방식을 검토하였다. 셋째, 필자는 궁궐에서 부벽(付壁) 서화가 조성된 역사를 논의하면서, 병풍 조성 방식이 부벽 서화 제작에 적용되었던 역사를 검토하였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궁궐 벽화류가 현재는 단독 유물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본래는 건축 공간에 설치되었던 특수 서화였음을 조명함으로써 이들이 가진 왕실문화사적 의의를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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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고동(古董) 수집의 실상과 책거리 기물의 간극

저자 : 유재빈 ( Yoo Jaeb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8-243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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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세기 조선의 수집 문화와 책거리 기물 간의 간극을 살피고자 하였다. 필자는 19세기 문인의 수장품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당시 대표 수장가였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 홍경모(洪敬謨, 1774-1851), 신위(申緯, 1769-1847)의 수장품 기록을 살펴보았으며, 분석 그림은 이형록(李亨祿, 1808-?)의 책거리로 한정하였다. 세 사람이 소장하였던 70여 점의 수장품의 특징을 분석한 결과 이들의 수집 목록과 책거리의 기물 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책거리 기물이 대부분 조선에서 제작된 적이 없는 수입산 중국 기물만을 다루고 있다면 수집가들은 중국 기물뿐 아니라 집안의 가전품(家傳品)이나 백제, 고려의 유물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과 서장(西藏)의 물건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책거리 기물을 종류별로 나누어 그 분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책거리에서 도자기가 절반가량을 차지한 데 비해 문인 수장가는 수집가가 특별한 경위로 선물 받거나 직접 제작한 고급 문방구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차이는 책거리가 감상과 길상이라는 일반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려진 데 비해 수장 목록은 특별한 역사적, 개인적 가치가 있는 수집품을 위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책거리가 19세기의 물질문화를 반영하는 측면도 발견된다. 문헌의 수장품과 정확히 일치되는 책거리의 기물은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당시 특정 재료나 기물에 대한 전반적인 애호나 지식수준이 책거리 기물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과 마노, 문양석에 대한 특별한 애호는 책거리 기물 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얼룩 반점 효과로 증명될 수 있으며, 다양한 수입 목재에 대한 선호는 책거리 기물에서 표면이 나무옹이 모양으로 과장되게 일그러진 필통들을 통해 드러난다. '주문왕정(周文王鼎)'이나 '선덕로(宣德爐)' 정도의 이름을 상식적으로 알았던 당시의 고동기 구입 수준은 방정(方鼎)과 유족로(乳足爐) 등 소수의 기형이 반복되는 책거리의 고동기 표현과 관계가 있다.
책거리는 청대의 다보격(多寶格)에 형식적 기원을 두고 있지만 사실상 매우 다른 지향점을 보여 준다. 다보격이 이미 소유한 물건을 특정한 체계 안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소우주를 구성한 것이라면 책거리는 내가 원하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을 이미지로 구현함으로써 나의 밖에 다른 세계를 구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책거리는 실제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욕망하는가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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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환된 전통: 서구 국제 비엔날레 출품작을 통해 본 한국현대미술과 전통

저자 : 이지은 ( Jieun Rhee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4-281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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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의 해외 국제전 참가의 역사는 곧 한국현대미술사의 이정표였다. 그것이 국가를 대표하여 참가하는 국제 비엔날레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현대미술의 후발 주자로서 서구의 현대미술과 어깨를 견주는 동시대성의 확보에 목말라하던 국내 미술계의 열망은 국제 비엔날레를 통해 그 창구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사조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따라잡는 숨가쁜 릴레이가 이어졌다. 참여 작가들은 서구 중심의 국제 비엔날레의 현실을 마주하며 서구의 모방이라는 오명을 씻고 한국현대미술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이때 전통은 세계가 함께 겨루는 비엔날레의 치열한 경기장에서 한국 미술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방패였다.
이 논문은 한국현대미술이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 비엔날레였던 1958년 국제현대채색석판화비엔날레를 시작으로 1960년대 파리 비엔날레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개관전, 그리고 2015년 이후 이어진 베니스 비엔날레 단색화 병행전과 최근 2017년, 2019년의 비엔날레 출품작에 이르는 몇몇 주요 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한국현대미술에서 '전통'에 대한 담론이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한국현대미술은 세계 미술계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통의 수사학을 구사하며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계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구축되어 온 타자성을 충족시켜 왔다. 또한 전통은 국내에 서구현대미술 사조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현대미술의 차별성과 독자성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국현대미술이 그 미감에 내재되었다고 여겼던 '고유한' 전통을 찾는 과정은 곧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소환하고 이를 재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이전의 전통이 발굴해 내야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과거의 실재였다면, 오늘 한국 동시대미술에서의 전통은 상상의 영역에 존재한다. 이제껏 한국현대미술에서 전통의 논의가 보여 주듯이, 전통은 취사선택되며 재조합되고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통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영하고 새로운 서사를 생산하며, 바로 그 전통의 허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환된 동시대의 전통을 만들어 냄으로써 서구 중심의 국제 미술계가 요구하던 타자성의 전복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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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북조기(北朝期)의 불교미술에 나타난 다양한 불교 고사(故事) 중에서 아육왕시토(阿育王施土)와 정광불수기(定光佛授記) 본생(本生) 장면에 주목한 글이다. 이 두 주제는 운강석굴(雲岡石窟) 및 6세기 중국 불교조각에서 각각 가장 빈번하게 묘사되었으며, 두 주제가 짝을 이루어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강 중기 및 후기에 이르러 이 두 고사는 아육왕시토의 특징적인 도상(圖像)이 정광불수기 본생 장면으로 전이되어 결합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난다. 특정 도상이 전이되어 다른 주제로 인식된 불교 고사의 다른 사례는 종래 알려진 바가 없는 만큼 이러한 현상은 중국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주목할 만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아육왕시토와 정광불수기 본생과 관련된 문헌을 조사하고, 중국 북조 후기에 제작된 운강석굴 벽면의 부조와 기타 불교조각에 나타난 이 고사를 표현한 장면의 구성 및 시각적 특징들을 분석하여 두 주제가 결합되어 가는 양상을 추적하였다. 이어서 선행 연구에서 이 두 고사의 결합 이유로 제시되었던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북조 말기 불교 문화가 당시 불교도들의 종교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기존의 개별 도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재현방식을 창조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광불수기 본생과 아육왕시토 인연 장면의 결합과 관련된 논의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로 현재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소장의 〈불교조상비(佛敎造像碑)〉를 들 수 있다. 1910년 9월에 보스턴미술관에서 구입한 이 조상비에는 정면을 향한 불입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정광불수기 본생 장면과 우측에 아육왕시토 고사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바 없는 보스턴미술관의 이 불교조상비는 이 연구에서 자세히 살펴본 두 고사의 도상적 결합이 일어난 결과물로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상비의 중국 불교조각사상의 위치를 비정해 본 것도 이 글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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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운생동(氣韻生動)'과 'Rhythmic Vitality'

저자 : 정수진 ( Jung Soojin )

발행기관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간행물 : 미술사와 시각문화 2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8-345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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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중국에는 서구에서 영역(英譯)된 중국 회화 이론의 용어가 수용되어 자국의 미술사를 해석하는 사례가 있었다. 사혁(謝赫, 6세기 초반 활동)의 「고화품록(古畵品錄)」에 실린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개념의 해석과 번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구의 학자들은 중국 미술을 설명할 때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의미가 모호한 이 개념을 다양한 어휘로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자일스(Herbert A. Giles, 1845-1935)가 1905년에 기운생동을 번역한 'rhythmic vitality'라는 용어는 동시기 중국의 학자들에게 역으로 수용되어 중국 미술의 특질로 서술되었다. 텅구(滕固, 1901-1941), 류하이쑤(劉海粟, 1896-1994), 쭝바이화(宗白華, 1897-1986) 등의 학자들은 '기운생동'을 '리듬이 있는 생명(有節奏的生命)'이라고 해석하여 자일스의 영향을 드러내었다. 즉 '기운'을 'rhythm'으로 이해한 서구 학자들의 초기 연구가 동시기 초국가적 학술의 특징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기운'보다는 '생동'에 중점을 둔 자일스의 해석은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로울리(George Rowley, 1892-1962), 소퍼(Alexander Soper, 1904-1993), 케힐(James Cahill, 1926-2014) 등은 '기운생동'의 중점은 '기운'이라고 역설하였으며 이후 '기운'의 번역은 'spirit resonance' 또는 'spirit consonance'로 정착되었다.
이 사례는 미술사의 서술에서 번역과 해석 그리고 그로 인한 이론의 변형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더욱이 연구의 성과가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번역에 의한 이론의 변형은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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