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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미완의 싱크탱크 혹은 이용희의 국토통일원 시절(1976~1979) -1970년대 후반 국토통일원의 연구 사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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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싱크탱크 혹은 이용희의 국토통일원 시절(1976~1979) -1970년대 후반 국토통일원의 연구 사업을 중심으로-

The Incomplete Think Tank, or Lee Yong-hee’s time at the Ministry of National Unification (1976~1979) -A Focus on the Research Project of the Ministry of National Unification in the Late 1970s-

장세진 ( Chang Seijin )
  •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 한국학연구 6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5월
  • : 329-371(43pages)
한국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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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 국제정치학의 창설자(founding father), 현실정치에 참여하다
2. 국토통일원의 설립과 6대 장관(1976~1979) 이용희
3. 전문 연구기관으로서의 국토통일원을 지향하다
4. 결론: 기대와 수행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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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구의 근대 국제정치학을 한국에 제도적으로 안착시킨 창설자였던 이용희(李用熙, 1917~1997)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제 6대 국토통일원 장관으로서 재임한 시기(1976~1979)를 살펴보았다. 특히, 그가 국토통일원의 수장으로서 주도한 연구 사업의 특징을 그 한계부터 의의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이러한 시도는 구체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던 ‘관료-이용희’의 실천을 밝힌다는 점에서 그간의 공백을 메우는 전기적 연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가 몸담았던 국토통일원이라는 기관의 위상과 사업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글은 박정희 정권 말기의 통일 정책을 배경으로 한 냉전 제도사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띤다. 두 가지 접근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사실은 분단/통일의 문제를 대학에 소속된 학자로서 연구, 교육하는 일과 현실정치 한 가운데 위치한 정책 입안자가 접근하는 방식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자-이용희’와 ‘국토통일원 장관-이용희’ 사이에 놓인 예기된 거리 내지 간극을 단지 확인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글은 자신의 비판적 ‘앎’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기입하거나 실정화된 제도 속에서 실천하려 할 때 발생하는 불편한 균열과 긴장의 순간들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이용희의 재임 시절 각종 제도 개선과 연구를 통해 새롭게 획득된 현실의 변화와 생산적 순간 또한 놓치지 않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period 1976~1979 when Lee Yong-hee (1917~1997), the founder of modern Western international politics in Korea, was politically active and served as the sixth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This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search project he led during this time, including its limitations and significance. This biographical examination reveals his official practices. This article also examines the status and research conducted by the Institute in the context of the Cold War and unification policy at the end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The common fact that penetrates the two approaches is that there is a considerable gap between researching and educating the issue of division/unification as a university scholar and the approach of policymakers in the middle of real politic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not just to show the expected differences between Lee Yong-hee as an international politician and as President of the Institute.
This article examines the uncomfortable cracks and moments of tension that occur when trying to apply what one knows in practice. It reconstructs both real changes and the productive moments that occurred as the result of institutional improvements and research conducted during Lee Yong-hee’s tenure as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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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469X
  • : 2734-035X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9-2022
  • :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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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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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북의 김기림을 넘어서

저자 : 김재용 ( Kim Jaeyo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25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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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남북에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작가들에 대한 해금이 진행되었는데, 북한에서는 1984년에 남한에서는 1988년에 많은 작가들이 풀려나 널리 읽혀졌다. 남북 모두에서 금지되었던 정지용과 김기림이 이 시기에 읽히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김기림은 매우 문제적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한반도에서 갑자기 사라진 김기림은 해방직후 줄곧 남북협상파로서 활동하였다.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김기림은 미국과 소련을 적극 환영하였다. 일본을 제압한 미국과 소련의 힘을 업고 통일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신탁통치가 시작되자 비판적 지지로 전환하였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제국의 이익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길 아니고는 통일독립을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 없기에 비판적 지지를 하였다. 1947년 중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김기림은 분단이 올 위험성을 감지하고서는 남북협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부 지식인들은 소련을 믿고, 다른 일부 지식인들은 미국을 믿으면서 한반도가 급속하게 분단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김기림은 이 모두를 비판하면서 남북협상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남북에 분단 국가가 각각 들어서고 나아가 남북협상의 버팀목이었던 김구마저 사망하자 간신히 자신을 지탱하다가 결국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 전쟁 이후 남북한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남한에서 김기림이 해금되면서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는데 주로 모더니즘의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1984년 이후 김기림은 북한에서도 해금되었는데 주로 민족적 향토적 측면에서만 다루어졌다. 남북에서 행해진 이러한 김기림 이해는 1930년대 이후 유럽 근대를 비판하면서 비서구 식민지의 세계사적 가능성을 탐구하였고 이 연장선에서 남북협상운동을 벌였던 김기림과는 잘 맞지 않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위기를 감지하고 그 대안을 탐색하였던 김기림의 세계 이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근대성과 제국의 근대성에 대한 그의 미학적 대응을 충분히 감안하여야 한다.


In the 1980s, the lifting of the ban on writers who had been suppressed by North and South Korea was carried out, and many writers were released in 1984 and 1988 North Korea and South Korea seperately. Jeong Ji-yong and Kim Ki-rim, who were banned from both the north and south, began to be read during this period, Kim Ki-rim, who served as an inter-Korean negotiator shortly after liberation suddenly had disappeared from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Korean War, Kim Ki-rim, who thought it was necessary to create an independent unified and independent state, welcomed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They tried to create a unified and independent state with the power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that defeated Japan. However, when the trust rule began after the Moscow Triad, it switched to critical support. Although he was well aware of the interests of the new Empires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he gave critical support because there was no realistic way to achieve unification and independence. When the U.S.-Soviet Union Joint Committee broke down in mid-1947, Kim Ki-rim sensed the risk of division and actively launched an inter-Korean negotiation movement. Some intellectuals believed in the Soviet Union, others believed in the United States, and when the Korean Peninsula was rapidly on the verge of division, Kim Ki-rim criticized all of them and launched an inter-Korean negotiation campaign. However, when the divided countries were established in the two Koreas, and even Kim Gu, who was the main person of the inter-Korean negotiations, died, he managed to support himself and eventually disappeared in the process of the Korean War. After the war, he was a completely forgotten in the two Koreas. Then, in 1988, when Kim Ki-rim was lifted from South Korea, a lot of research was conducted, mainly from the angle of modernism. Since 1984, Kim Ki-rim has also been lifted in North Korea, and been read mainly in terms of ethnic and local aspects. This understanding of Kim Ki-rim, conducted by the two Koreas, could not explore the possibility of world history of non-Western colonies. Kim Ki-rim's world understanding of the European crisis and exploring alternatives after World War I, should be read in consideration of the global outlook, including non-Western colonies, on the basis of imperial modernity and imperial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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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북한문학 속의 김소월 1

저자 : 이상숙 ( Lee Sangsoo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6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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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북한문학에 나타난 김소월시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민요성, 서정성, 민족성을 보여준 김소월은 한국현대시의 대표 시인이다. 그러나 남북의 문학사는 김소월의 민요적 율격, 민족적 정서, 향토적 소재를 각기 다른 의미와 관점에서 평가한다. 남한 연구자들이 서정성, 전통적 정한(情恨)의 정서, 낭만과 애수, 민요, 전통 율격의 시인으로 소월을 평가한다면 북한의 문학에서는 인도주의, 인민성, 애국주의, 민족적 형식, 민족적 요소의 기준으로 소월을 평가한다. 카프에 가담한 바 없고 이념적 경향성을 드러낸 바 없으며 남북 분단 전에 작고하여 체제 선택과도 관계없는 김소월이지만 분단된 남북의 문학사 안에서는 서로 다른 이념적 잣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의 북한 문학은 김소월을 '비판적 사실주의' 시인으로 규정한다. '비판적 사실주의'는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되기 전 단계의 사상적 문학적 한계를 가진 작가와 작품에 부여된 명칭으로, 김소월이 일제에 빼앗긴 조국과 인민에 대한 사랑, 민요조의 율격으로 향토성, 애국성, 인민성을 보였지만 애상성이 과도하고 계급성이 부족한 한계를 보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설가 나도향과 함께 대표적인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였던 김소월은 1960년대 중반 다른 카프계열 작가들과 함께 북한문학계에서 사라졌다. 이후 20여년 후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복권되며 북한문학계에 김소월이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에는 '비판적 사실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의 면모가 더 강조되었다.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북한의 문학사에 드러난 김소월에 대한 평가를 찾아내고 그 변화를 정리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This study assesses the critical evaluation and status of Sowol Kim's poems based on their place in Hoseok Um and Sepyeng Yoon's literary surveys, Modern Joseon Literary Anthology: Poetry (2) (1957), Modern Joseon Literary Anthology 14 (1992), and North Korean Literary History which were compiled by period.
The poems of Sowol Kim, a representative modern Korean poet, are well known in both North and South Korea for their folksong and lyrical characteristics, and their ethnic distinctiveness. In terms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modernism and tradition in South Korean literature, and between engagement and purity, Sowol Kim is recognized as a pure and lyrical poet. However, there are differences between the evaluations of Kim's oeuvre in South and North Korea. In North Korean critical literature, Kim is positively evaluated for expressing his affection for his people and nation, which had been subordinated to Japan, and for stressing regional characteristics, patriotism, and a people-centered philosophy using folksong-style rhythms, although some criticize the excessive sorrowfulness and lack of focus on class in his work. In the context of North Korean literature, the treatment of ethnicity,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patriotism in Sowol Kim's poems are understood as embodying affection for the nation and the people, which also can be understoo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heory of national specificity and the form of the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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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반도 통합문학의 가능성 탐색-월북 이후 이기영의 대표 작품을 중심으로-

저자 : 오태호 ( Oh Tae-h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5-9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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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이기영의 월북 이후 작품들 중 단편소설 「개벽」, 중편소설 「형관」, 장편소설 『땅』, 대하소설 『두만강』 등을 대상으로 한반도적인 시각에서 통합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진행해보았다. 1920년대 이래로 일제 강점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농민문학의 기수로서 대표적인 리얼리스트로 평가받고, 해방과 분단 이후 '북한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세계를 점검함으로써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단초로서의 '한반도 통합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해방기의 두 작품인 「개벽」과 「형관」에서는 당대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먼저 「개벽」은 불안한 지주 황주사와 소심한 소작농 원첨지 등을 비롯하여 인물들의 개성적 성격을 입체적으로 포착하면서 해방기 북한 사회의 풍경을 현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형관」 역시 해방 직전의 농촌을 배경으로 강제 징용을 둘러싼 일제와 농민들의 갈등을 그리면서, 농민 김부득과 허달삼을 중심으로 사상범 전력이 있는 문사 박철 등의 일화를 통해 일제 말기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반면에 『땅』과 『두만강』은 '토지개혁'과 '한국전쟁', '민족해방운동' 등의 주제에 대한 목적성이 과잉되어 서사적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에 해당한다. 물론 『땅』에서 주인공 곽바위에 대한 '순이 어머니'의 이중적 시선이 드러나는 대목 등에서는 입체적 형상화가 이루어지지만,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해 흠모와 감격을 금하지 못하는 곽바위의 생각과 마음을 묘사하는 대목은 '수령형상문학'의 전조로서 평면적 인물의 도식주의적 형상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두만강』에서도 곰손이가 씨동이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대목 등은 글공부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내용으로 당대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서사적 미덕에 해당하지만, 김일성 부대의 '항일 유격대원'으로서의 자부심에 넘치는 씨동이의 내면을 요약 기술한 대목 등은 인물의 입체성이 거세되어 평면화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기영의 문학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반도적 통합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월북 이후 해방기의 텍스트는 일제 강점기에 대표적인 리얼리스트로서의 감각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합문학의 필요성을 제공해주는 텍스트라고 판단된다. 반면에 분단 고착화 이후 발표된 『땅』과 『두만강』의 경우 당문학적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서사성의 약화와 함께 인물의 입체성이 평면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통합문학의 가능성'을 회의(懷疑)하게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영의 텍스트가 북한문학의 실체이자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서사적 리얼리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다. '해방 이전의 이기영'과 함께 '분단 이후의 리기영'은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한반도 통합문학의 외연을 넓힐 필요를 제기하는 입체적 텍스트인 셈이다.


In this paper, among Lee Ki-young's post-North Korea works, short stories 「Gaebyeok」, medium-length novels 「Hyeonggwan」, long novels {Land}, and large-scale novels {Tumen River} We conducted an exploration of the possibility of integrated literature from a Korean Peninsula perspective. Since the 1920s, he has been regarded as a representative realist as a jockey of Korean literatur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as the best writer in North Korea after liberation and division, confirming the possibility and impossibility of “integrated literature on the Korean Peninsula” as a starting from the 1920s.
In the two works of the liberation period, 「Gaebyeok」 and 「Hyeonggwan」, the reality of the time was able to face living characters. First of all, 「Gaebyeok」 is a work that realistically embodies the landscape of North Korean society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capturing the individual characteristics of the characters, including unstable landlord 'Hwang Jusa' and timid tenant farmer 'Won Cheomji'. 「Hyeonggwan」 is a text that vividly captures the scenery of the end of Japan through anecdotes such as Kim Bu-deuk, a farmer, and Park Chul, a writer with a history of ideological criminals, while depicting conflicts between Japanese and farmers over forced labor against the backdrop of rural areas just before liberation.
On the other hand, {Land} and {Tumen River} are works that clearly reveal narrative limitations due to excessive purpose. Of course, in the {Land} three-dimensional imagery takes place in the part where the double view of Soon-i's mother against the main character Kwak Ba-wi is revealed. On the other hand, however, the part describing Kwak Ba-wi's thoughts and minds, which cannot help admiring and admiring “Great Leader Kim Il-sung,” is a precursor to “Great Figure Literature,” and is a representative part of the schematic shape of a planar figure. In the {Tumen River}, the part where Gomson preaches the importance of education to Sidong is a narrative virtue that brings the importance of writing study to life. However, the summary of the inner side of Sidong, who is full of pride as an “anti-Japanese guerrilla member” of the Kim Il-sung unit, is problematic in that the three-dimensional nature of the character is intensified and planarized.
Lee Ki-young's literature corresponds to a text that simultaneously shows the possibility and impossibility of integrated Korean literature. The text of the liberation period after North Korea's defection is judged to be a text that provides the necessity of integrated literature in that it has a sense of being a representative real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On the other hand, in the case of {land} and {Tumen River} announced after the division, it confirms the impossibility of integrated literature in that the three-dimensional nature of characters is being planarized along with the weakening of artistry. Nevertheless, assuming that Lee Ki-young's text is a mirror reflecting the times as a substance of North Korean literature, the author Lee Ki-young is a three-dimensional text that raises the need to expand the scope of integrated literature on the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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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북으로 간 심훈과 채만식-북한 『현대조선문학선집』의 '해금 작가' 연구 서설-

저자 : 장문석 ( Jang Moon-seo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9-160 (6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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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남한의 문학사적 정전인 심훈과 채만식의 문학이 탈냉전 이후 북한에서 문학사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현대조선문학선집』으로 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98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그 이전보다 더 유연한 시각에서 다양한 작품을 문학사의 시야에 포괄하였다. 『조선문학개관』 2권(1986)과 『주체문학론』(1992)에서는 북한의 연구자들은 심훈과 채만식의 문학을 '카프'의 동반자 문학으로 이해하였다. 이후 『현대조선문학선집』을 통해 심훈과 채만식이 창작한 다양한 양식의 작품이 북한에 소개되었다. 『현대조선문학선집』은 류희정을 비롯한 편집자의 텍스트 비평을 통해 원전에 기반하여 편찬된 문학선집이다. 『현대조선문학선집』은 『주체 문학론』 등 강령적 문학 이해에 기반하면서도, 텍스트의 편집과 해제를 통해 강령에 한정되지 않는 텍스트의 목소리를 제시하였다. 『현대조선문학선집』이 복원한 심훈과 채만식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조선문학사』 9권(1995)과 여러 연구를 통해 더욱 풍요로워진다. 탈냉전기 북한의 심훈과 채만식 문학 인식은 남한의 인식과 제한적이나마 동시대성을 형성하였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process in which the literature of Shim Hoon and Chae Man-sik, the literary cannon of South Korea, became the object of discussions on literary history in North Korea after the post-Cold War, and was published in Collection of Modern Korean Literature. In the mid-1980s, North Korea incorporated various works into the perspective of literary history from a more flexible perspective than before. In Korean Literature Overview 2(1986) and Literary Theory of Juche(1992), North Korean researchers understood Shim Hoon and Chae Man-sik's literature as literature of sympathizer. Since then, various literary mode of works written by Shim and Chae have been introduced to North Korea through Collection of Modern Korean Literature. Collection of Modern Korean Literature is a literary selection compilation based on text criticism by editors including Ryu Hee-jung. Collection of Modern Korean Literature is based on the understanding on the view such as Literary Theory of Juche. This collection presented a voice of the text that is not limited to the single view through editing the text and explaining the work. In addition, the voices of Shim Hoon and Chae Man-sik's literature restored in Collection of Modern Korean Literature become richer through Korean Literary History(1995) and various studies. Two Koreas' literary perception on Shim and Chae during the post-Cold War period share limited synchr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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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남북한 문학장에서 조명희 문학의 위상

저자 : 임옥규 ( Lim Ok-kyu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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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문학장은 각각의 특성과 이념적 제약으로 인해 상호 이질적이며 배타적인데 이는 남북한 문학사의 구성과 서술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상호 재평가하고 소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남북한 문학사에서 공통적으로 주요하게 논의되는 작가 중 한 명인 조명희 작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문학은 남북한이 함께 공유하는 문화유산으로 남북한 문학사 접점으로 존재한다. 그의 국내외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예활동은 한민족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도 분단이라는 이념적 대립 상황과 사회주의 사상을 선택하여 소련에 망명하였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그의 문학사적 업적이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또한 그의 방대한 문예와 문학관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기에 통합문학사적 측면에서 그의 문학사적 위상과 전망을 다루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다가올 통일시대를 대비한 통합 문학사 서술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방편이 될 수 있으며 남북한을 넘어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위상을 점검하는 실증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본고는 남북한에서의 조명희 연구사를 살펴보면서 특히 북한 평가의 역사적 변모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또한 남북한 근현대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조명희적 경향을 근대화 비판과 사실주의 계보의 확장으로 보고자 한다. 그는 1920년대 피식민지 주체의 마음을 형상화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굴절된 근대화를 비판하였고 그의 사실주의 창작방법론은 남북한에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그가 구소련으로 망명한 이후 원동고려문단 활동 사항을 통해서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문학으로서의 특색과 전망을 살펴볼 수 있다.
본고는 남북한 문학장에서의 조명희 문학의 위상을 다루고 한민족 디아스포라문화권에서 조명희 문학의 논리와 의미를 분석하여 남북한 문학 소통의 전망을 마련하고자 한다.


Writer Cho Myung-hee has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literary history of North and South Korea through various literary activities. She is one of the most talked about writers in the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literature in both Koreas. Cho Myeong-hee is variously evaluated as a national writer, folk writer, anti-Japanese writer, and exile writer. Nevertheless, his literature was not properly evaluated due to the ideological confrontation of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Korea and the prejudice that he chose socialism and defected to the Soviet Union. On the one hand, it is not easy to deal with his literary status and prospects because his vast view of literature and his view of literature form a diverse spectrum. However, this aspect can be a means of presenting a methodology for writing an integrated history of literature in preparation for the upcoming era of unification, and is meaningful as an empirical data to examine the status of Korean diaspora literature beyond North and South Korea. This article examined the status of Cho Myeong-hee's literature as a means of describing the history of inter-Korean integrated literature.
This article examines Cho Myung-hee's history of research on North and South Korea and analyzes his historical evaluation of North Korea in depth. I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literary history of North and South Korea, Cho Myung-hee's tendency appears as a criticism of modernization and an expansion of the genealogy of realism. He criticized the modernization of the colonial era while embodying the spirit of the colonial subject in the 1920s, and his realism creation methodology was variously inherited in South and North Korea.
In addition, this article closely examined the activities of Korean literary circles in the former Soviet Union from 1927 to 1938 after exile in the Soviet Union, and compared the perceptions of North and South Korea. Through this, we will analyze the logic and meaning of Cho Myung-hee's literature in the Korean diaspora culture to prepare a communication horizon for North and South Korean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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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무(時務)의 연구자, 강덕상(姜德相)의 조선사 연구

저자 : 이규수 ( Yi Gyu-so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3-23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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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1931~2021)의 삶의 궤적을 검토했다. 강덕상은 일본의 조선사 연구, 특히 근대사 연구의 초석을 쌓았다. 우방협회(友邦協會)를 토대로 한 '조선근대사료연구회(朝鮮近代史料硏究會)'의 활동을 비롯, 일본 사회에서 조선사 연구가 갖는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제시했다. 본인이 말하는 시무(時務)의 역사학자로서의 길이었다.
강덕상의 삶은 재일조선인으로서 살아온 '격투'의 역사였다. 식민지 시대 황국 소년으로서 강덕상은 조국의 존재가 희미했다. 조선인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일본에 충성을 다하도록 강요당한 황국 소년, 강덕상의 모습을 통해, 황민화 정책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강덕상의 방황과 고뇌는 청년기에도 계속되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그토록 가혹했다.
강덕상이 민족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조선인 선언' 이후다. 대학원 진학 이후 강덕상은 근대사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일본에서 조선사 연구의 전국적 학회인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의 결성에 핵심적 역할을 다했다. 개인 연구 영역 그는 경제사 관련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조선의 내재적 발전을 추적했고, 3ㆍ1운동 연구에서도 민족대표 논쟁을 통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강덕상은 시무의 역사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그것은 강덕상의 대표적 연구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연구로 이어졌다.
강덕상은 '재일사학(在日史學)'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연구를 제시했다. 강덕상은 일본인이 언급하지 않은 숨겨진 역사의 규명이 '재일사학'의 본령이라고 강조한다. 일본인이 다루지 않은 영역, 일본인이 피하고 싶은 영역을 일본 역사학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 일본의 조선 연구가 지닌 문제와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강덕상은 일관되게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남북 분단의 극복과 통일의 방향성을 전망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여운형 연구가 이루어졌다.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 집필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운형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서만 분단된 한반도의 민족의식의 심리적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과 통일은 여운형 사상의 재평가를 통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강덕상은 '시무의 역사학자'로서 온 생애를 바쳤다.


In this article, the trajectory of life of Korean historian Kang Deok-sang (1931-2021) was reviewed. Kang Deok-sang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tudy of Korean history in Japan, especially modern history. It presented the true meaning and direction of Korean history research in Japan, including the activities of < The Korean Modern History Research Association(朝鮮近代史料 硏究會) > based on the Friendship Association(友邦協會). This was his researching path as a historian of the mission of the times(時務).
Kang Deok-sang's life was the 'fighting history' as a korean in Japan. In colonial-era as a colonized boy, Kang Deok-sang had a faint perception on his country. Through the appearance of a colonized boy, Kang Deok-sang, who has Korean's mind but is forced to fulfill his loyalty to Japan,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how imperial citizenship's policy could distort human mind. Kang Deok-sang's wandering and anguish continued even in his youth. Prejudice and discrimination against Korean people in Japan were so harsh.
It was after the 'Korean Declaration' that Kang Deok-sang restored his national identity. After entering the graduate school, Kang Deok-sang devoted himself to researching modern history. He played a key role in the formation of the < Korean History Research Association(朝鮮史硏究會) >, a national academic society for Korean history research in Japan. In the field of personal research, he tracked the intrinsic development of Korean through the collection and analysis of data related to economic history, and also drew attention from academia through the debate on national representation in the study of the 3.1 movements. In this process, Kang Deok-sang shared the problematic consciousness of the history of the Mission of the Times. It led to the study of the massacre of Koreans in the Great Kanto Earthquake, a representative study of Gang Deok-sang.
Kang Deok-sang presented a new field of study called 'Korean history in Japan(在日史學)'. He emphasizes that the discovery of hidden history which the Japanese did not mention is the main body of 'Korean history in Japan.' It is important to raise a problem that the Japanese did not deal with and they wanted to avoid. This also presents the problems of recent Japanese research on Korea and future tasks.'
Kang Deok-sang consistently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people. It predicts the direction of unification and overcoming the division of the two Koreas. Under this awareness, a lingering study was conducted. The ultimate purpose of Kang Deok-sang's writing of critical biography of Yeo Woon-hyung is that only through a proper evaluation of Yeo Woon-hyung, psychological unification of the divided Korean Peninsula's national consciousness is possible. It suggested the prospect that Korean's independence and unification could only begin through a re-evaluation of Yeo Woon-hyung's ideas. Kang Deok-sang has devoted his entire life as a researcher of the mission of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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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어느 재조일본인의 인양 회고와 그 의미-요시하라 이사무의 『내려진 일장기』에 나타난 일제 말기 인천의 지리지-

저자 : 윤미란 ( Yun Mira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3-26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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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요시하라 이사무(吉原勇)의 수필 『내려진 일장기-국민학교 1학년생의 조선일기』(2010)에 나타난 일제강점기 말기와 인양기에 관한 재조일본인으로서의 조선 인식을 분석하고 그 의의를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저자 요시하라 이사무는 종전 전후에 재조 일본인으로서 인천에서의 경험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조력자가 되는 현실 모순의 상황을 인식한다. 또 그는 조선인을 이분법적으로 도식화(나쁜 조선인/착한 조선인)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정형화를 강화하는 한편 착한 조선인 에피소드를 통하여 기존의 조선(인) 인식을 전복하기도 한다. 요시하라는 '제국의 브로커'도 아니고 '식민자의식'이 강렬하지도 않았던 한 재조일본인으로서 인양기 인천의 체험을 '화해를 위한 기억'으로 재구성하였다.


This thesis is to analyze the perception of Koreans by the Japanese living in Korea regarding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period of salvage and to investigate the significance of Isamu Yoshihara's essay “The Japanese Flag Dropped - Chosun Diary of a First Year Student at Elementary School” (2010). The author, Isamu Yoshihara looked back on his experiences in Incheon as a Japanese based on the end of the war. He recognized the situation in which the United States confronts the reality of going from an enemy of the past to an enabler of today. He said to have subverted the existing Chosun (people) beyond the good Chosun people episode that strengthened the standardization of Chosun (peopl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y picturing another Korean in a dichotomous way (bad Chosun people/good Chosun people). Yoshihara was neither an “Imperial Broker” nor had a strong sense of “colonialism.”, a Japanese residing in Korea, reconstructed the experience of Incheon during the salvage period as 'memories for reconcil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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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동아시아학 속의 한국학-미국 UC 버클리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장재용 ( Jaeyong Chang ) , Rachel Min Park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3-29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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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한국학의 성장세는 뚜렷하지만, 한국 안에서의 한국학과 한국 밖, 특히 미국의 한국학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미국에서 한국학의 발전이 동아시아 연구라는 좀 더 넓은 맥락과 어떤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는지를 미국 UC 버클리대학교의 사례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UC 버클리대학교 한국학의 성장은 미국이 참가하였던 두 차례의 국제전, 태평양 전쟁과 베트남 전쟁 수행과정에서 연방정부의 지역 전문가의 육성차원애서 이루어졌다. 또한 이 글은 궁극적으로는 한국학의 연구 방법론을 재고하고 학문적 차원에서 국가 간 교류를 촉진하여 한국학 연구의 생산적인 틀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While the discipline of Korean Studies has grown increasingly popular and widespread in recent years, there is often an assumed homogeneity between the “Korean Studies” practiced across different countries, eliding the specific sociohistorical contexts that led to its various disciplinary formations. In particular, there is a need to distinguish between the Korean Studies as practiced in South Korea proper and the United States.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development of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was inextricably linked to the broader context of East Asian Studies, using the specific case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to consider how early research institutions (such as 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global events such as World War II and the Vietnam War, and federal-level education policies influenced the direction and tenor of research on Korea within the United States.
By reassessing the genealogy of Kore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and demonstrating its sociohistorical differences with its development in South Korea, this article ultimately aims to provide a productive framework in reconsidering research methodologies, promoting cross-country exchange in terms of scholarship, and future promising directions for the framing of Korean Studies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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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근대 전환기 여성 번역가의 등장과 근대적 인식론의 성립-잡지 『우리의 가뎡』에 연재된 영한 번역을 중심으로-

저자 : 김민지 ( Kim Minji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5-31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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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전환기 여성 독자들을 대상으로 근대적 지식을 전파하고자 하였던 잡지 『우리의 가뎡』에 연재된 번역문을 조명함으로써 서구의 논의가 어떻게 전달되었는가를 검토하였다. 『우리의 가뎡』에 나타난 '독자에서 필자로'의 이동 양상은 선행 연구들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 지점이었다. 앞선 논의들을 참고하여, 본 연구에서는 독자 출신 '기자'였던 백경애의 번역 작업에 주목하였다. 백경애는 『우리의 가뎡』 8호에 두 편의 글을 발표하며, 기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하나는 '현상모집' 당선작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내한 선교사였던 미국인 저자 무야곱(제이콥 로버트 무스, J. Robert Moose)이 출간한 책의 일부를 우리말로 옮긴 번역문이었다. 이 번역물은 『우리의 가뎡』에 총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본 논문은 이때의 번역물이 전문(full text) 번역이 아니었으며, 매호 '역자 후기'와 같은 형태로 사견(私見)이 함께 게재되었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백경애의 번역 작업이 서구의 시선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조선의 상황을 덧붙이는 형태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번역 방식을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 논의를 빌려 '상황적 번역'이라 명명하고, 당대 여성들에게 조선이라는 삶의 터전이 '전근대적 농촌/근대적 여학교'와 같은 이분법적 공간으로 간단히 규정될 수 없었음을 주장하였다. 한국 여성들의 문해력 획득 및 글쓰기 역사와 관련하여 '영한 번역'의 사례를 검토하는 연구 방식은 식민지 역사 속 '근대화' 문제를 다층적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at Western discussions were not simply conveyed to Koreans by highlighting the translations published in the magazine “Uriui Kadyung”; which spread modern knowledge to female Korean readers in the 1910s. The phenomenon of 'readers becoming writers' identified in the magazine was also importantly examined in previous studies. Referring to the previous discussions, this study focused on the translation work of Baek Kyung-ae, who was a reader-turned-writer. Baek started her career as a writer by publishing two articles in the magazine “Uriui Kadyung” No. 8 in 1914. One was the winning work of the “Writing Contest,” and the other was a translation of parts of the books published by J. Robert Moose, an American author who was a missionary in Korea, in 1911. The translation had been serialized in three volumes in the magazine “Uriui Kadyung.” Especially, this article focused on the fact that the translation was not a full text translation, and was published with an editorial such as “translator review”. As a result, I concluded that Baek's translation work was adding the situation of colonial Korea instead of conveying the Western view as it was. I named this translation method as “situational translation” by borrowing Haraway's discussion of “situated knowledge”. And I claimed that colonial Korea, as a living space for Korean women, should not be defined in a dichotomous way, such as 'pre-modern rural area / modern girl's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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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감염병과 주권의 재영토화-1946년 콜레라의 발생이 불러온 풍경들-

저자 : 허병식 ( Huh Byungshi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7-339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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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국주의 시기에 한반도 외부의 구일본 제국의 권역 속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해방을 맞은 후, 국내로 귀환하였다. 제국-식민지 질서에서 냉전-국민국가 질서로 주권권력이 재편되고 식민지배의 폐해와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익이 교차하던 국제정세 속에서 귀환을 둘러싼 양상은 복잡한 국면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반도와 일본 사이, 한반도와 만주 사이에 냉전적으로 교차하고 있던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은 자신이 속할 영토와 국가, 정체성 속으로 투신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1946년에 한반도 전역에 발발한 콜레라 사태는 귀환하고 월경하는 민족의 이동에 결정적인 장애로 작동하였다. 일본에서 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의 귀환은 콜레라로 인하 차질을 빚었다. 또한 중국 동북 지역 한인들이 귀국이 아니라 현지 정착을 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도문을 중심으로 전 연변 지역을 휩쓸었던 콜레라 감염병이었다. 이 과정에서 온전한 국적조차 부여받지 못한 한인의 귀환은 국제적 현실과 냉엄한 전후 동아시아 질서 속에 휩쓸려 갔다.
감염병이 불러온 공포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당대의 미디어였고, 문학은 이 공포가 불러온 시스템과 질서의 혼란을 조명한다. 염상섭은 만주에서 귀환하던 한인들의 모습을 담은 일련의 작품에서 콜레라라는 감염병을 직시하고 있다. 만주로부터 귀환하는 한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을 검증하는 것과, 콜레라 예방주사를 맞았느냐의 문제이다. 방역이 사상과 감염병 양편에 공히 방역이 작동하고 있는 양상이다.
콜레라라는 감염병과 관련해서 기억해야할 장소는 접경지만이 아니다. 해방 후 대구와 제주에서 일어난 정치적 격랑은 콜레라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굶주림에 이어 병마로 다시 쓰러져야 했던 사람들-그들의 원과 한의 입김이 모여 시월의 폭풍을 불러왔다. 남한에서 주민의 수와 대비해서 가장 심각한 발병률과 사망률을 보여준 지역은 제주도였다. 미군정의 보고서는 이러한 제주의 콜레라 발병세에 대해서 방역 격리 조치가 이완된 것과 감염된 피난민이 제멋대로 밀수, 밀항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대흉년과 .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콜레라 사태는 이후로 이어진 제주 4.3 사건과 밀접히 연동되는 것이다. 현기영이 그의 작품들에서 조명하고 있는 해방 후 제주의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콜레라로 인해 흉흉해진 마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 연구는 해방기의 접경지과 대구, 제주에서 민심의 동요를 불러온 일련의 사태들을 당대의 정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조명하고, 이를 응시하고 있는 문학과 미디어의 담론을 분석하였다.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period, Koreans living in the sphere of the former Japanese Empire outside the Korean Peninsula returned to Korea after liberation.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which sovereign power was reorganized from the imperial-colonial order to the Cold War-nation-state order, the harms of colonial rule and the interests of the great powers surrounding the Korean Peninsula after the war intersected, the aspect surrounding the return was facing a complex phase. Crossing the borderline that crossed the Cold War between the Korean Peninsula and Japan and between the Korean Peninsula and Manchuria was also a task of committing oneself to the territory, country, and identity to which one belonged.
The cholera outbreak that broke out across the Korean Peninsula in 1946 acted as a decisive obstacle to the movement of returning and bordering peoples. The return of Koreans who were working in Japan was hindered by cholera. Also, one of the important reasons why Koreans in northeast China chose to settle there rather than return home was the cholera epidemic that swept the entire Yanbian region around Tumun. In the process, the return of Koreans, who were not even given full nationality, was swept away by the international reality and the harsh post-war East Asian order.
It was the media of the time that reacted most sensitively to the fear brought about by the infectious disease, and literature sheds light on the chaos of the system and order brought about by this fear. In a series of works depicting Koreans returning from Manchuria, Yeom Sang-seop faces an infectious disease called cholera. What is required of Koreans returning from Manchuria is to verify their ideas and whether they have been vaccinated against cholera. Quarantine is working on both sides of ideology and infectious disease.
The border isn't the only place to remember when it comes to infectious disease cholera.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the political upheaval in Daegu and Jeju after liberation was directly related to cholera. The people who had to fall again due to illness following hunger - their won and the breath of Han gathered to bring about the storm of October. In South Korea, the region that showed the most severe morbidity and mortality compared to the number of residents was Jeju Island. The report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determined that the cholera outbreak in Jeju was caused by the relaxation of quarantine measures and the smuggling and smuggling of infected refugees at will. Great Famine and Jeju's economy fell into a state of death due to manufacturing shutdowns, high unemployment, and failure of rice policies. And this economic situation and the cholera crisis are closely linked to the Jeju 4.3 incident that followed. In the landscape of Jeju after liberation, which Hyun Ki-young illuminates in his works, there is always a picture of a village that has been horrified by cholera. This study illuminates a series of events that provoked agitation in the borderlands of the liberation period, Daegu, and Jeju in the contemporary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and analyzed the discourses of literature and media staring a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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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두에 대한 북한 학자들의 개념과 인식 -홍기문, 김영황, 류렬, 오희복을 중심으로-

저자 : 문현수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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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국어학계에서는 이두의 개념이 학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북한의 조선어학계에서도 관찰되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북한의 대표적인 이두 연구서에서 이두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 그 결과를 남한의 국어학계의 견해와 비교해 보았다.
북한의 이두에 대한 개념은 홍기문(1957)에서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는 이두를 조선어의 문법 구조에 따라 개편된 조선 한문을 독송한 결과를 기사(記寫)하는 데서 기원하고 발전한 서사어로 정의한다. 김영황(1978)은 홍기문(1957)의 이두 개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고유명사 표기를 '이두식 표기'로 지칭하며 이두의 논의 범주로 끌어들였으며, 이두음을 이두식 표기를 이두식으로 읽은 음으로 새롭게 정의하였다. 류렬(1983)에 이르러서는 고유명사 표기에 쓰인 글자들도 이두자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두자를 이두의 필수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두자는 중국의 한자와 다른 우리만의 형태, 소리, 뜻을 갖는 우리의 글자로서, 여기에는 한국 고유 한자처럼 새로 만들어낸 글자가 포함되는 것은 물론, 외형상 한자와 동일하더라도 그 소리와 뜻이 한자 본래의 소리와 뜻과 달라지면 그 글자를 모두 이두자로 보게 되었다. 이두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오희복(1999)에서도 관찰된다.
이에 반해 남한의 국어학계에서는 이두자를 이와 같이 정의하지 않는다. 박성종(2016)처럼 이두자를 이두토 표기에 쓰인 글자로 한정하거나 북한의 조선어학계에서는 이두자로 보는 새로 만든 글자를 한국 고유한자로서 따로 다루고 있다. 더욱이 이숭녕(1955) 이후로 어휘 표기법을 문장 표기법과 구별하는 경향이 강하였기에 고유명사 표기에 쓰이는 글자를 이두자로 보지 않는다.
또한 구결에 대한 개념과 인식도 남과 북의 학계는 차이를 보인다. 남한의 국어학계에서는 석독구결의 존재로 인해 구결을 우리말 문장 표기법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의 조선어학계에서는 음독구결만을 구결로 보아 구결을 우리말 문장 표기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자를 차용하여 우리말 문장을 표기하는 표기법을 지칭하는 이두의 하위 유형에 구결을 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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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헝가리 투란주의자의 한국 인식 -버라토시의 『새벽의 나라 한국』(1929)을 중심으로-

저자 : 이영미 ( Lee Yeong-mi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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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토시(Baráthosi Balogh Benedek, 1870~1945)는 20세기 전반 부다페스트에서 사와 민족지학자, 저술가로 활동한 헝가리인이다. 헝가리에서 그는 19세기 후반에 발아하여 20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투란주의(Turanism)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가리인, 머저르족(Magyars)의 친족을 찾기 위하여 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매달렸고, 한국과 관련해서는 1907년과 1921년 두 번의 방문을 바탕으로 『새벽의 나라 한국(Korea, a ajnalpir országa)』(1929)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헝가리인이 한국을 단독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이지만, 인쇄소에서 극소량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물론 헝가리에서조차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본 논문은 버라토시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의 책 『새벽의 나라 한국』을 분석하였다. 첫 번째 장에서는 그가 투란주의자가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헝가리 민족의 동방기원설부터 헝가리 투란주의의 형성까지를 서술하여 다소 장황하지만, 투란주의가 그의 한국 인식에 명백히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두 번째 장에서는 투란주의자이자 민족지학자로서 그의 동아시아 여행과 관련 활동을 다루었는데, 1차 자료가 모두 헝가리어이고 입수 자체가 쉽지 않아 해외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였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에서는 『새벽의 나라 한국』을 텍스트로 삼아 1907년 그의 첫 번째 한국 여행을 소개하고, 그가 동시대 다른 서양인들과 달리 한국을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한 원인을 분석하였다. 텍스트 분석에 사용된 책은 헝가리어 원본이 아닌 초머의 번역본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지만, 본 논문에서 이 책을 지칭할 때는 원제를 따라 『새벽의 나라 한국』이라고 쓰겠다. 필자는 본 논문이 가진 방법론적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동안 우리 가까이에 있었으나 학문적으로는 거의 검토되지 않은 자료를 소개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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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ㆍ중 여성작가 작품에 드러난 양처현모론 인식의 자기모순적 양상과 그 의미

저자 : 서록지 ( Xu Luzhi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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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20년대 한국과 중국의 대표 여성작가들을 대상으로 근대 여성작가 소설에 드러난 양처현모론(賢母良妻論) 인식의 자기모순적 양상과 그 의미를 비교ㆍ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양처현모론과 신현모양처론은 당대 양국의 주류 여성 교육정책으로써 여성 담론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여성을 모범적인 신식 가정의 경영자로 간주함으로써 남편을 성공시키는 내조자의 역할 뿐 아니라 자녀의 양육자와 교육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1920년대 한국과 중국의 여성작가들은 사회의 분위기나 자신의 경험에 따라 양처현모론에 상이한 태도를 취하였다.
긍정론의 경우 양처현모 사상의 영향을 받은 나혜석과 빙신(冰心)이 그것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혜석은 양처현모사상과 개인적 성취 및 주체성과의 충돌을 발견하면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반면 빙신은 여성의 개인 가치가 가정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비판론의 경우 김일엽과 링수화(淩叔華), 루인(廬隱) 등이 양처현모 정책이 여성의 개인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면서, 자기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 사상을 비판하였다. 김일엽은 그의 작품에서 양처현모론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꿈이라는 무의식 세계에서 마음 깊이 잠재된 모성애를 드러냈다. 링수화와 루인은 독신주의를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선책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모성을 언급하는 경우, 두 작가는 방황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양처현모론을 긍정하거나 비판하는 입장들은 신여성이라는 개념이 아직 낯선 시대에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여성작가들의 다양한 모색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긍정론과 비판론을 각각 일정한 가치를 지닌 신여성 담론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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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송화강ㆍ황량한 만지(蠻地) ㆍ개척된 낙토(樂土) -사진엽서 '송화강'과 만주국의 문화정치학-

저자 : 최현식 ( Choi Hyun-si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68 (6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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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송화강'을 다룬 사진엽서의 탄생과 전개, 그것이 수행한 문화정치학의 본질과 성격을 탐구한다. 송화강은 동북 만주를 유유히 흘러가며 만주의 곡물 생산과 목재산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공업일본, 농업만주'라는 기치 아래 만주의 개척과 식민화에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송화강 일대의 도시, 예컨대 길림과 하얼빈은 만주를 대표하는 자연미와 이국정취, 신문명과 유흥문화의 집산지로 떠올랐다. 일제는 하얼빈과 길림을 '국책여행'의 핵심 공간으로 간주하여, 그곳에 대한 관광(여행)을 낯선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국 정취의 즐김에만 빠지지 않도록 했다. 오히려 제국 일본의 우월함과 세계 팽창을 자신하는 내면의 심상지리를 확산, 심화할 수 있는 식민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송화강천리』는 그 과정에서 발행된 사진엽서로, 여행 관련 엽서도 있지만, 역시 그것의 중심은 왕도낙토, 오족협화, 복지만리에 대한 프로파간다에 있었다. 본고는 그것을 식민주의와 군사주의의 산물로 보고, 『송화강천리』 엽서세트가 제국 일본의 신민을 포함한 만주국의 남성과 여성, 아동을 '총력전'의 도구로 징발하기 위해 제작, 유통되었음을 밝혔다. 그 과정에서 모든 가치를 일왕의 영원성과 그를 위한 헌신과 죽음에 두는 '전사자 숭배'가 공공연히 행해졌음도 밝혀냈다. 그런 점에서 『송화강천리』를 비롯한 '송화강' 엽서들은 비록 관광의 즐거움을 다뤘을지라도 결국은 죽음의 도구화를 통해 근대천황제를 절대화하는 도구적 매체, 바꿔 말해 '파시즘의 예술화'의 산물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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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해방공간에서의 문학과 정치 -「도정」과 「새벽」을 중심으로-

저자 : 진연 , 이해영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20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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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비슷한 주인공과 주제를 다룬 지하련의 「도정」(1946.07)과 전홍준의 「새벽」(1948.04)을 중심으로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이념과 문학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두 편의 소설은 모두 그 나름의 문학성을 인정받아 해방공간에서 문단의 최고 위상을 자랑하던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문학』에 게재되었지만 발표 당시 사뭇 다른 운명에 처하고 있었다. 지하련의 「도정」은 발표 당시에 좌익문단으로부터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았으나 전홍준의 「새벽」은 당시의 좌익문단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그나마 극소수의 평론도 주로 비판 일색이었다.
정치 논리가 우위인 해방공간에서 문학작품들의 운명 역시 정치와 직결되어 있었다. 소설을 게재한 『문학』을 비롯하여 작품「새벽」에 관한 비평을 게재한 잡지들은 모두 좌익문단의 강력한 영향과 자장 속에 있었으며 당시 좌익문단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남로당의 정치이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도정」은 당시 남로당의 정치이념에 상당히 부합되는 작품이다. 반면 「새벽」은 남조선노동당의 정치적 이념과 투쟁목표를 적시적으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표 당시 좌익문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한 것이다. 이처럼 「도정」과 「새벽」은 정치의 시대 즉 해방공간이라는 이념 우위의 시대에 문학작품의 운명이 정치에 의해 좌우된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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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대항미디어 운동 연구(1) -선언을 통한 창립에서 『실천문학』의 창간에 이르는 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이종호 ( Yi Jong H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1-23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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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는 1974년 11월 18일 광화문 거리에서 선언을 통해 창립된 후 1984년 재창립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미디어 활동을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다른 지식인집단과 연대하며 그 지향을 대중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이에 본 논문은 자실의 미디어 활동을 선언문의 연쇄, 공연 및 인쇄 미디어의 절합, 『실천문학』의 창간 등으로 구분하여 각각을 검토하고 그 의의를 고찰해 보았다.
이 시기 자실은 표현의 자유와 반유신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계속해서 발표함으로써 조직을 정비하고 회원을 증원하면서 내부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를 통해 자실은 교수ㆍ언론인ㆍ학생 등의 지식인집단과 접속하여 강한 연대감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ㆍ민중과의 연결고리 또한 마련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자실은 '민족문학의 밤'이라는 공연미디어와 『광장에 서서』라는 인쇄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획과 문학적 실천을 대중적으로 확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실은 민족ㆍ민중 등으로 수렴되는 문학론을 정비하면서 주요 필진들을 결집하여 향후 실천문학론으로 나아가는 기반을 다졌다. 나아가 다층적 미디어 활동으로 축적된 역량은 무크지 『실천문학』의 창간을 견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실의 미디어 활동은 문인들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유신체제로 인해 존재 기반을 상실했던 문인ㆍ대학교수ㆍ대학생ㆍ언론인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협력하고 연대하며 구축한 '저항전선'이자 새로운 주체성 생성을 지향한 '대항미디어 운동'으로서의 성격과 위상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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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후카사와 카이(深沢夏衣)의 글쓰기 의미 -소설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서-

저자 : 박성주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6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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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재일조선인여성작가 후카사와 카이(深沢夏衣, 1943~2014)에 주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소설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계간 잔소리』에서의 활동과 그녀의 데뷔작 『밤의 아이『에 초점을 맞춰 그녀의 글쓰기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후카사와 카이가 『계간 잔소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으나, 2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민족규범'에서 벗어나 일본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시작된 시기였다. 그녀는 편집위원으로서 다양한 글쓰기 활동을 시도하였으나, 주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쓰고자 한 글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계간 잔소리』가 폐간된 이후 그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마음껏 펼치고자 소설을 쓰게 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쓰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고자 한 그녀의 시도였다. 즉 그녀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마음껏 펼치고자 한 자유로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녀의 글쓰기 의미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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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천-김포지역 분구묘와 마한

저자 : 김경화 ( Kim Kyoung Hwa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29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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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김포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분구묘가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에 일정 규모의 세력을 가진 지배 집단이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분구묘가 특히 집중적으로 발견된 지역은 인천 연희동 유적, 김포 운양동, 양촌 유적 등이다. 출토유물을 토대로 본 중심연대가 대략 3세기 전후반임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삼국지』 한조에 등장하는 마한 諸國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 한조에는 56개의 소국이 등장한다. 문헌사적 연구성과에 따른다면 인천-김포지역에 해당하는 나라는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및 '속로불사국' 등이다. 이들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중국 군현과 경제적 교류를 통해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또한 3세기 낙랑군과 벌인 기리영전투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김포지역의 정치세력은 “해상”을 매개로 하여 경제적,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형성된 마한의 지역연맹체적 특성을 가진다. 특히 연희동지역은 외부 세력이 한반도 내륙에 들어 오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따라서 대외무역에 종사하려는 서해 연안의 세력이라면 이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김포 운양동 유적에는 오수전, 철경동촉, 낙랑계토기편 등 낙랑계유물과 함께 상당수의 철제무기류가 발견된다. 이는 기리영전투 등의 분쟁에 이 지역 세력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인천-김포지역은 군사적 동맹으로 맺어진 지역연맹체로 중국 군현과의 경제적 교섭은 물론 분쟁이 일어났을 때도 함께 행동하였고, 이 때문에 『삼국지』에서 국명을 열거할 때, 나란히 기재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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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요순 정치의 회복, 다산 정약용의 홍범(洪範)론

저자 : 김호 ( Kim H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3-32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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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사망 직전 『상서』에 대한 주석서를 완성하여, 조선후기 정치개혁에 대한 자신의 최종 견해를 제시했다. 고대의 이상 정치로 상징되는 요순통치에 대한 다산의 평가는 한마디로 '현능한 지도자가 부지런히 정무에 힘쓴 결과[有爲]'였다. 다산은 이른바 세속에서 말하는 무위이치(無爲而治)야말로 어리석은 견해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현능한 지도자는 반드시 유능한 관리들을 선발하여 관직을 나누어주고 이들이 부지런히 과업을 수행하는지 철저하게 살폈다[考績]. 다산은 「홍범」이 바로 요순정치의 핵심 교훈이라고 정의하고 새롭게 재해석했다. 특히 「홍범」의 9개 범주에 붙은 숫자에 현혹되지 말고, 황극[최고권력]을 중심으로 한 통치행위 전반으로 이해할 것을 제언했다. 오행은 단지 하늘이 내려준 자연의 '재료'에 불과하고 이를 활용[利用]하여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면[厚生] 그만이었다. 따라서 정치[八政]는 오직 국가의 세입과 지출에 해당하는 경제 및 재정 정책이 가장 중요했다. 한편, 「홍범」에는 왕과 함께 통치에 참여할 현능한 자들의 자질[三德]이 설명되어 있을뿐더러, 왕이 현능한 자들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잡는 수신의 항목들[五事]이 기록되어 있었다. 왕의 지위[皇極]가 절대적인 것은 바로 상벌의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인데, 왕은 이 권한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능력있는 신하들에게는 충분한 인센티브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합당한 벌을 내려야만 했다[福極]. 왕이 이상의 통치행위를 지성으로 수행한다면 하늘이 감동하여 왕으로 하여금 선정의 기회를 허락할 것이었다. 다산은 조선의 왕들이 「홍범」의 가르침에 따라 현능한 관료를 등용하여[知人]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安民]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고전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經學]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경제의 개혁안[經世論]이 본인의 억측이 아닌 '고대의 지혜[周禮]'를 밝혔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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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미완의 싱크탱크 혹은 이용희의 국토통일원 시절(1976~1979) -1970년대 후반 국토통일원의 연구 사업을 중심으로-

저자 : 장세진 ( Chang Seiji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9-37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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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구의 근대 국제정치학을 한국에 제도적으로 안착시킨 창설자였던 이용희(李用熙, 1917~1997)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제 6대 국토통일원 장관으로서 재임한 시기(1976~1979)를 살펴보았다. 특히, 그가 국토통일원의 수장으로서 주도한 연구 사업의 특징을 그 한계부터 의의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이러한 시도는 구체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던 '관료-이용희'의 실천을 밝힌다는 점에서 그간의 공백을 메우는 전기적 연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가 몸담았던 국토통일원이라는 기관의 위상과 사업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글은 박정희 정권 말기의 통일 정책을 배경으로 한 냉전 제도사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띤다. 두 가지 접근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사실은 분단/통일의 문제를 대학에 소속된 학자로서 연구, 교육하는 일과 현실정치 한 가운데 위치한 정책 입안자가 접근하는 방식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자-이용희'와 '국토통일원 장관-이용희' 사이에 놓인 예기된 거리 내지 간극을 단지 확인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글은 자신의 비판적 '앎'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기입하거나 실정화된 제도 속에서 실천하려 할 때 발생하는 불편한 균열과 긴장의 순간들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이용희의 재임 시절 각종 제도 개선과 연구를 통해 새롭게 획득된 현실의 변화와 생산적 순간 또한 놓치지 않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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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포스트휴먼의 조건: 다학제적 탐색
2022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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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11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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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
72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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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역사
37권 0호

인문학연구
51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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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론총
30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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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인문학연구
12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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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연구
106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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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1권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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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와 번역
44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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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학
126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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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연구
22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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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철학
33권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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倫理硏究
139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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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88권 4호

강원문화연구
46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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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철학
34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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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연구
129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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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21권 3호

문학/사학/철학
72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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