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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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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The Re-examination of the 4th Offensive of the Communist Army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District during the Korean War

박동찬 ( Park Dong Chan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5월
  • : 175-207(33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86.6


목차

Ⅰ. 머리말
Ⅱ. 유엔군의 ‘휴전’ 모색과 공산군의 ‘춘계공세’ 준비
Ⅲ. 유엔군의 위력수색작전과 공산군의 제4차 공세 결정
Ⅳ. 유엔군의 지평리 선점과 공산군의 제4차 공세 주공격 방향 전환
Ⅴ. 유엔군의 지평리 전투 승리와 공산군의 공세 좌절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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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지평지구 전투는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후 공산군의 대규모 공세에 유엔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3월 말까지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는 ‘전쟁 전 상황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공산군은 지평지구 전투의 패배로 제4차 공세에 실패했다. 그들은 공세의 목표인 대전∼안동 선 진출은 고사하고 오히려 북위 38도선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아야만 했다.
지평지구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 전략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유엔군은 ‘전쟁 전 상황에서의 휴전’이라는 전쟁목표 달성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공산군은 제4차 공세의 실패로 인해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공산군이 계획하던 ‘춘계공세로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 즉 ‘완전 승리’ 구상이 파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가 유엔군의 전쟁전략을 ‘철군 < 휴전’으로, 공산군의 전략을 ‘승리 < 휴전’으로 확실히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군 측에서는 대외적으로 휴전을 적극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북위 38도선에 형성된 전선 상황이 그들에게 더 이상 ‘군사적 완전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했다.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의 결과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협상을 통한 휴전’만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향후 전쟁 양상은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행동 양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in 1951 was the first victory achieved by the UN forces in the face of a massive communist offensive after the Chinese entered the Korean War. As a result of this battle, the UN forces switched to a counterattack and advanced to the line linking Munsan∼Dongducheon∼Chuncheon∼Hyeonri∼Yangyang by the end of March. This meant 'recovery of the pre-war situation'. On the other hand, the communist forces failed in the 4th offensive due to the defeat in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They failed to advance to the Daejeon∼Andong line Which was the target of the offensive. Rather, They had to face the consequences of being pushed to the 38th parallel.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can be found in the changes in the war strategies of the UN and communist forces. The UN forces were one step closer to achieving the war goal of a ceasefire in the pre-war situation, and the communist forces had to switch to defense due to the failure of the 4th offensive. This meant that the plan for complete victory through the spring offensive planned by the communist army from December 1950 to January 1951 was broken. Also, This meant that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region played a role in making sure that the UN forces' war strategy was transformed into a 'withdrawal < truce' and the communist army's strategy into a 'victory < truce'. At that time, the communist army did not actively advocate a ceasefire externally, but the frontline situation formed at the 38th parallel made it impossible to guarantee them a “complete military victory” any longer.
As a result of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District, both the UN and communist forces came to realize that a truce through negotiations was the best way to end the war. It can be said that the future warfare showed a pattern of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 to gain the superiority of negot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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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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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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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 고대사에서 용(龍)에 대한 인식의 변천 -왕 신성(神聖) 권위의 변화와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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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왕의 권위의 변화에 따라 용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간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첫 단계의 왕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王卽天神'의 원초적 신성 이념에 의존하였으니, 이 단계의 용은 그런 '왕즉천신'을 하늘에서 모셔오고 하늘로 모셔가는 신성한 '神乘物'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단계의 왕은 불교의 전래 및 공인과 함께 '王卽佛'이라는 차별적인 신성 권위를 표방하였고, 일단 용은 '왕즉불'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 왕이 護法과 護國을 망라하는 '불국토의 주인'으로 인식되면서, 용은 왕을 보좌하는 '불국토의 수호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단계의 왕은 '爲民'을 실천하여 '尊王'의 권위를 확보한다는 유교적 규범을 지향하였고, 이에 따라 용은 왕의 신성 권위를 직접적으로 扶助하는 존재가 아니라 佛僧을 매개로 하여 왕의 호법과 호국의 권능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7세기 동아시아 해양 갈등과 교류 및 교역이 폭증하는 현상과 맞물려 나타났으며, 龍도 天龍이나 地龍보다는 海龍의 존재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왕은 용의 현신'이라는 '王卽龍'의 인식이 대두한다. '왕즉용'의 인식은 마한→백제로 이어지면서 성립하여 후백제의 견훤으로 이어졌고 고려의 왕건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면서 '왕즉용'의 인식은 고려시대에 본격 정착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the process of changing the perception of dragon according to the change in the king's authority.
First of all, the first-stage king relied on the original divine ideology of 'king=god of heaven' that came down from heaven, so the dragon of this stage was recognized as a sacred being that brought such 'king=god of heaven' from heaven and brought it to heaven.
The second stage of the king advocated the discriminatory divine authority of 'king=Buddha' along with transmission and official recognition of Buddhism, and once the dragon was recognized as a symbol of 'king=Buddha'. In addition, in the case of Silla, as the king was recognized as 'owner of the Buddha's land' defending Buddhism and kingdom, the dragon was also recognized as the 'guardian god of Buddha's land' who assisted the king.
In the third stage, the king aimed for Confucian norms, the dragon was recognized as indirectly supporting the king's sacred power defending Buddhism and kingdom through the medium of Buddhist monks. This shift in perception appeared in conjunction with the 7th century East Asian maritime conflict and the explosion of exchanges and trade, and the dragon also appears more prominent as the dragon of the sea than the heaven or land.
And when it reaches the fourth stage,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meaning that the king is the appearance of dragon. finally emerged.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was established as it led from Mahan to Baekje, which led to Later Baekje's Gyeon-hwon, and spread to Wang-geon of Goryeo. In addition, as Wang-geon became the last winner,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was established in earnest during th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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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세기 전라도 조운선의 침몰과 그 대책

저자 : 한정훈 ( Han Jeong H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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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세곡이 국가재정 수입의 주요한 원천이었던 만큼 전라도 조운선의 안흥량에서의 침몰 사고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였다. 그래서 사고 직후에 '육운 이납', '태안 운하 공사', '사선의 활용' 등 침몰 방지를 위한 여러 대책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육운 이납은 전라도 세곡을 기존의 조창이 아닌 충청도·전라도의 또 다른 지점에 육운하는 방식으로 고려시대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수송방식이었다. 태종과 세종 연간 10년 남짓 동안 일시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사람과 우마(牛馬)의 피해로 인해 조운 정책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육운 이납의 영향으로 16세기 초엽의 중종 때에 영산창이 없어지고 법성창이 전라하도의 유일한 조창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침몰 방지책으로 잘 알려진 태안 운하 공사는 빈번히 실패하였다. 비록 공사가 성공하였더라도 인공 수로에 작은 배를 이용하여 여러 번 옮겨 싣는 방식은 전라도의 대규모 세곡의 수송방식으로는 부적절하였다. 또한 이들 침몰 대책에 비해 일정한 효과를 거둔 사선의 활용은 조운선의 침몰 대책이기보다 '관선 조운'의 폐단을 보완하는 조운 정책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15세기에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실효성의 논란 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운영 기반의 확충, 규정 및 조직의 보완과 같은 조운제 정비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치의 중요성이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기대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침몰 사고 직후에 반복하여 논의된 점은 전라도 조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As grain paid as taxes in Jeolla-do served as a key source of revenue for the state treasury, the sinking of tax carriers at the Anheung Headland was a huge loss for the state. Thus, after an accident, various countermeasures including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construction of the Taean Canal', and the 'use of privately owned ships' were discussed in order to counteract these sinkings.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involved the transportation of grain by land to a different location in Chungcheong-do and Jeolla-do rather than to existing tribute granaries. This was temporarily implemented for just more than 10 years during the reigns of Taejong and Sejong but failed to be established as shipping policy due to the harm done to humans as well as oxen and horses. As a result of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the Yeonsan granary disappeared by the reign of Jungjong in the early 16th century, and the Beopsung granary established itself as the only tribute granary in Jeolla-hado.
Known as the representative countermeasure against sinkings, the construction of the Taean Canal failed every time. Even if construction were to have succeeded, transporting the large amount of grain from Jeolla-do by loading it onto small boats on an artificial waterway would have been inadequate. Furthermore, the use of privately owned ships, with their limited effectiveness in contrast to the other countermeasures against sinkings, served rather as a shipping policy that made up for the harm done by 'shipping by government owned ships' rather than as a real countermeasure against the sinking of tax carriers.
While these countermeasures for preventing the sinking of tax carriers in the 15th century failed to be properly executed due to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ir effectiveness, basic measures necessary to the overhaul of the shipping system, such as the expansion of operating infrastructure and the supplementation of regulations and organization, did indeed receive attention with regard to their importance. Although countermeasures for preventing the sinking of tax carriers failed to achieve as huge an effect as expected, the fact that they were repeatedly discussed immediately after sinkings reveals the status of Jeolla-do ship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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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사강목』의 후고구려 인식

저자 : 홍창우 ( Hong Changw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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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보이는 후고구려ㆍ궁예 관련 정보를 분석하여 인식의 양상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이다. 먼저 안정복이 자신의 벗인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궁예와 후고구려에 대한 그의 관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정복은 조선 前代의 통사를 저술한 『동사강목』의 저자였으므로, 그가 특정한 역사적 대상을 향해 깊은 관심을 보인 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들이 주로 『동사강목』에서 '정통'과 관련이 있는 나라의 문제에 치중했다면, 정통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무통'의 문제에도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우선 궁예와 후고구려가 '도적'과 '무통' 국가로 설정된 양상과 계기를 살폈다. 그 결과 궁예는 '도적'이라는 점이 『동사강목』 도처에서 강조되었고, 그의 후고구려는 단군ㆍ기자를 시작으로 하여 마한, 문무왕 9년 이후의 신라, 태조 19년 이후의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들이 부정적으로 서술된 이유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안정복은 '정통' 국가인 신라를 넘본 후고구려와 궁예에 정통과 군주로서의 위상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를 위한 배려의 차원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춘추대의'에 기반을 둔 명분질서의 탐색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통론'의 관점에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이 답습되었던 것과 함께, 『동사강목』 내에 궁예와 견훤을 우리 문적의 소멸 주체로 지목하여 비판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기록의 문제이긴 하지만, 고려시대의 경우 역사서 편찬을 위한 자료의 문제를 거론했던 주체들이 궁예나 견훤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례는 조선시대 식자들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견해인데, 별다른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후고구려나 후백제 모두 역사서 편찬이나 기록물 생산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기왕의 성과를 감안했을 때, 막연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추정하였다. 난세의 시기에 한낱 도적에 불과한 이들에게 불합리한 누명이 씌워진 것이다.
궁예나 견훤의 처지에서 본다면 굉장히 억울할 이와 같은 설명은 사건의 발생 시점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 사이의 간극이 제법 크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식의 주체와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의 계기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여기에서 분기된 자유분방한 역사적 인식의 양상을 『동사강목』을 매개로 살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Ahn Jungbok's Dongsa-Gangmok recognized Later-Goguryeo and Gungye. First, through the letter Ahn Jungbok sent to Lee Gahwan, we were to confirm his interest in Gungye and Later-Goguryeo. The fact that Ahn Jungbok showed a deep interest in a specific historical object was the first thing that stood out. Therefore, it was thought that it was necessary to consider the problem of 'legitimate dynasty'[正統], which stands at the opposite point of 'illegitimate dynasty'[無統].
To this end, first of all, we looked at the patterns and opportunities for Gungye and Later-Goguryeo to be set up as 'Dojeok'[盜賊] and 'illegitimate dynasty'. As a result, the fact that Gungye was a 'Dojeok' was emphasized everywhere in Dongsa-Gangmok, and it was confirmed that his Later-Goguryeo was not included in the category of 'legitimate dynasty' and became a target of criticism. However, the reason they were described negatively wa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previous era. Ahn Jung-bok did not give 'legitimate dynasty' and status as a monarch to Later-Goguryeo and Gungye, who opposed the 'legitimate dynasty' of Silla.
In addition, we also paid attention to the criticism of Gungye and Gyeonhwon as the subjects of extinction of our literature in Dongsa-Gangmok. This case was a special opinion seen among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 but it can seen that it was not based on any particular literary basis. In particular, considering the previous achievements that both Later-Goguryeo and Later-Baekje were not negligent in compiling history books or producing records, it was presumed to be an idea derived from vague 'prejudice'.
This explanation, which would be very unfair from the perspective of Gungye or Gyeonhwon, may be possible because the gap between the time of the incident and the subject looking at it is quite large. Therefore, this article could confirm that the trigger for evaluating historical facts varies according to the subject of perception and the historical background in which he is placed.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the free-spirited historical perception branched here was examined through the Dongsa-Gangm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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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함경도 방곡령 실시와 배상을 둘러싼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의 동향(1889~1893)

저자 : 박한민 ( Park Han M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4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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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함경도 지역의 방곡령 실시와 관련하여 지방관과 상인, 지역에 파견된 관리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한 양상과, 이들의 활동이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곡물 유통과 판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둘러싸고 지방관과 지역 상인이 보인 반응은 방곡령 실시가 단순히 외세 침탈로부터 곡물 유출을 막고 지역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함경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조일 양국은 관원을 현지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임응호를 판핵관으로 파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지역민들은 함경감사와 관련이 있는 현직 관리들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며 몸을 사리고, 일본 상인과의 곡물 거래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판핵관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조병식의 지시를 받아 비위를 몰래 조사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이후 조정에서 임응호를 탄핵하고 구금시키는데 활용되었다. 외무성에서는 이시이 기쿠지로를 원산에 파견하였다. 그는 현지 상인들과 면담하고 장부를 조사하면서 손해배상으로 청구한 금액이 적정하고 타당한지 조사하였다. 조사 중 원산 재류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액에 다소 증빙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체 배상액을 재산정하여 제출하도록 지도하였다. 함경감사 조병식을 비호한 조정의 유력자는 민응식이었다. 민응식은 방곡령에 대한 배상 반대론을 주장하였고, 외아문 독판의 교체를 주도하였다. 일본공사관 측과 접촉한 대원군은 조정 내 분위기와 정보를 일본 측에 흘리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조일 간 교섭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만회해 보려 시도하였다. 함경도의 방곡 시행과 배상 교섭에는 지방과 중앙의 여러 세력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면서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방곡령 시행과 배상 교섭은 조정 내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동된 내정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ctivities of local governments, merchants, and investigators dispatched to the region who responded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in relation to the implementation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in Hamgyeong province, and their impact on central politics and local communities. The reaction of local governments and local merchants over the profits from grain distribution and sales cannot be understood as simply to prevent grain outflow from foreign invasion and to protect the local economy. In order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Korea and Japan government dispatched officials to Hamgyeong province. In Joseon, Lim Eung-ho was dispatched as an inspector. During the investigation, local people were forced to spare themselves and avoid trading grain with Japanese merchants, fearing the possibility of retaliation by incumbent officials related to Cho Byung-sik, the governor of Hamgyeong province. While the investigator worked in the area, some secretly investigated the irregularities under the direction of Cho. The information they collected was later used to impeach and detain Lim in the mediation.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dispatched Ishii Kikujiro to Wonsan. Ishii interviewed local merchants and investigated the books to see if the amount claimed for damages was appropriate and reasonable. During the investigation, he confirmed that it was somewhat difficult to prove the extent of damage claimed by the Japanese merchants in Wonsan, and instructed them to re-assign and submit the whole amount for compensation. Min Eung-sik was the leading figure in Joseon politics defending Cho. Min was against the compensation for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and led the replacement of minister of Foreign Office. After contacting the Japanese legation officials, Daewongun attempted to redeem his political influence by using stalled negotiations between Joseon and Japan, leaking the information within the government to the Japanese side. In the compensation negotiations following the implementation of Grain Export Prohibition, various local and central forces intervened deeply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greatly affecting the grain trade in the local community. It can be seen that the implementation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and compensation negotiations were a domestic issue closely linked to political forces in the 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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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강점기 경학원(經學院) 강사(講士)의 위상과 활동

저자 : 정욱재 ( Jung Uk-j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7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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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강점기 경학원 강사(講士)의 선정과 시기별 활동의 특징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경학원 강사는 경학원의 공식적인 직제에 포함되지 않은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사의 선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910년대~1920년대 경학원 강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정되었고, 선정된 사람들은 명망과 학문이 높은 인물들로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설득과 회유를 받았다. 이를 강하게 저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굴복하여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위정척사론으로 유명한 학파의 제자와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도 있었다. 1930년대부터는 유림이라 볼 수 없는 인물들도 경학원 강사로 선정되었고, 이 흐름은 전세체제기인 194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경학원 강사는 명예직으로 월급은 없고 연수당과 여비만 지원받았다. 또한 1930년대까지 경학원 강사의 임기는 규정되지 않아 본인이 스스로 사임하지 않은 이상 사실상 종신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우대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경학원 강사는 공식 직제인 경학원 부제학ㆍ대제학이 될 수 있었다. 일부 경학원 강사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거나 중추원 참의가 경학원 강사로 임명되는 등 경학원 강사는 단순 명예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경학원 강사의 주 임무는 석전제 거행ㆍ순회강연ㆍ시문 기고로 일제강점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특히 경학원 강사의 순회강연은 유교의 교리를 이용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이 『경학원잡지』 등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한 경학원 강사는 일본 천황과 일제의 침략전쟁 등을 찬양하는 한시를 짓는 등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황도유학'을 주창하여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적ㆍ물적 희생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황도유학'을 추종하여 전시대에 이룩한 높은 수준의 유학사상을 단절시키는 한편, 한국 유학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는 폐해를 남기는 데 일조하였다.


This study gave an overview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lection and activity of the instructors (Gangas) of Kyunghagw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by period.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was an honorary post that was not included in the official office organization of Kyunghagwon. And ye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paid special attention to the selection of the instructors, attaching importance to those of Kyunghagwon. In the 1910s-1920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selected unilaterally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ose selected were figures with high reputation and study, who got strong persuasion and conciliation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Some strongly resisted while others finally yielded and participated, some of whom were disciples of famous schools through the theory of Wijungchugsa (Defending Orthodoxy and Heterodoxy), and there were even figures who had done the independence movement. Since the 1930s, even the figures who could not be considered Confucian scholars were selected a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nd this flow was further strengthened in the 1940s, which was a state of war.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was an honorary position, who did not receive monthly pay except for annual allowance and travel expenses. In addition, until the 1930s, as the term in office was not prescribed for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it was a tenured post unless the instructor resigned. Sinc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avorably treated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those whose ability was recognized could become Kyunghagwon Boojehak and Daejehak, which belonged to its official office organization. Som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appointed as Jungchuwon officials, or Jungchuwon officials were appointed a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ccordingly,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had a status that could not be regarded as a simple honorary position.
The main missions of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holding Seokjeonje, having a lecturing tour, and contributing poetry and prose, which continued throughout the Japanese colonial era. Especially, the lecturing tour of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as mostly concerned with the contents to justify and praise Japanese colonial rule, using the doctrine of Confucianism, which sometimes were published in Kyunghagwon Magazine. In addition,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cted as a mere tool of Japanese colonial rule, e.g. composing Sino-Korean poetry praising the Japanese emperor and the Japanese imperialist war of aggression. Especially, entering the 1940s, they coerced colonial Korean people into a voluntary human and material sacrifice for the Japanese invasion war, advocating the so-called 'Whangdo Confucianism.' Following 'Whangdo Confucianism,' they broke off from the high-level Confucian ideas achieved in the previous age while contributing to leaving the evil of cutting off from the developmental flow of Korean Confucian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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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저자 : 박동찬 ( Park Dong C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5-2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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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지평지구 전투는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후 공산군의 대규모 공세에 유엔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3월 말까지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는 '전쟁 전 상황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공산군은 지평지구 전투의 패배로 제4차 공세에 실패했다. 그들은 공세의 목표인 대전∼안동 선 진출은 고사하고 오히려 북위 38도선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아야만 했다.
지평지구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 전략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유엔군은 '전쟁 전 상황에서의 휴전'이라는 전쟁목표 달성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공산군은 제4차 공세의 실패로 인해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공산군이 계획하던 '춘계공세로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 즉 '완전 승리' 구상이 파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가 유엔군의 전쟁전략을 '철군 < 휴전'으로, 공산군의 전략을 '승리 < 휴전'으로 확실히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군 측에서는 대외적으로 휴전을 적극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북위 38도선에 형성된 전선 상황이 그들에게 더 이상 '군사적 완전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했다.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의 결과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협상을 통한 휴전'만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향후 전쟁 양상은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행동 양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in 1951 was the first victory achieved by the UN forces in the face of a massive communist offensive after the Chinese entered the Korean War. As a result of this battle, the UN forces switched to a counterattack and advanced to the line linking Munsan∼Dongducheon∼Chuncheon∼Hyeonri∼Yangyang by the end of March. This meant 'recovery of the pre-war situation'. On the other hand, the communist forces failed in the 4th offensive due to the defeat in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They failed to advance to the Daejeon∼Andong line Which was the target of the offensive. Rather, They had to face the consequences of being pushed to the 38th parallel.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can be found in the changes in the war strategies of the UN and communist forces. The UN forces were one step closer to achieving the war goal of a ceasefire in the pre-war situation, and the communist forces had to switch to defense due to the failure of the 4th offensive. This meant that the plan for complete victory through the spring offensive planned by the communist army from December 1950 to January 1951 was broken. Also, This meant that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region played a role in making sure that the UN forces' war strategy was transformed into a 'withdrawal < truce' and the communist army's strategy into a 'victory < truce'. At that time, the communist army did not actively advocate a ceasefire externally, but the frontline situation formed at the 38th parallel made it impossible to guarantee them a “complete military victory” any longer.
As a result of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District, both the UN and communist forces came to realize that a truce through negotiations was the best way to end the war. It can be said that the future warfare showed a pattern of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 to gain the superiority of negot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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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페르시아 전쟁 이후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 -사제직과 성소 변화를 중심으로-

저자 : 김효진 ( Kim Hyo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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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는 엘레우시스를 대표하는 종교 의식이었으나,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에는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범 그리스적인 종교 행사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여러 사제직 중에 가장 중요한 신관직은 히에로판테스와 다둑코스를 들 수 있는데, 히에로판테스는 에우몰포스 씨족에서, 다둑코스는 키리케스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히에로판테스의 역할은 입교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둑코스의 역할을 소 미스테리아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을 보면, 이러한 사제직들은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 공식적인 역할이 정립된 것으로 보이며 일정 부분에서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둑코스를 배출한 케리케스 씨족은 친 아테네적 성향을 다수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소 미스테리아를 관장하는 사제로 선택된 사제 가문은 케리케스였다. 또한 케리케스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 치세 전에 아티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다둑코스의 역할을 한 때는 아테네인들과 분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케리케스 가문은 아테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테네는 긴밀한 관계성을 통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성소의 변화를 보면,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전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가 되었고 엘레우시스나 아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복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키몬을 시작으로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아테네 정치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재건축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텔레스테리온의 규모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매우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어벽에 해당되는 페리볼로스가 새롭게 세워졌는데 매우 견고하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데메테르 성소인 엘레우시니온도 변화했는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벽을 건축했다. 이외에도 트립톨레모스의 성소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잇는 '신성한 길'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으며 이는 아테네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한 측면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페르시아가 물러나고 그리스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분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레우시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불안한 측면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고 엘레우시스 사람들을 친아테네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통해 아테네인들은 여러 폴리스에 아테네가 데메테르 여신의 시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시혜를 다른 폴리스에 전하는 민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The Eleusinian Mysteries were a religious ritual that represented Eleusis. And after Eleusis was incorporated into Athens, it was reborn as a pan-Greek religious ceremony under the influence of Athens. Of the many priesthoods of the Eleusinian Mysteries, the most important priesthood were Hierophant and Daduchos. Hierophant came from the Eumolpidae families, and Daduchos from the Kerykes families. It's believed that the role of Hierophant appears to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the initiation ritual, and the role of the Daduchos was closely related to the Eleusinian Lesser Mysteries. From the inscription, these priesthoods appear to have established their official roles since the incorporation of Eleusis into Athens, and in some respects they appear to have changed.
In particular, the Kerykes which produced the Daduchos, had pro-Athenian tendencies. The Kerykes was chosen to preside over the Eleusinian Lesser Mysteries which appears to have been established in the time of Peisistratos. It is also shown that the Kerykes families migrated to the Attica region and lived there before the reign of Cleisthenes. The role of Daduchos had been shared with the Athenians at one time. Looking at these points, it is believed that the Kerykes families maintained close relations with Athens, and that Athens increased its influence over the Eleusinian Mysteries through its close ties.
If we look at the change in the sanctuary, the Persian War left most of Greece in ruins, and Eleusis and Athens were no exception. After the Persian Wars, the Athenians were interested in restoring the sanctuary of Demeter in Eleusis. Athenian politicians sought to reconstruct the sanctuary of Demeter in Eleusis, in particularly, It is estimated that the size of the telesterion had been very large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As the sanctuary grew in size, a new peribolos, the defensive wall, was erected, and it was very solid. The Eleusinion, the sanctuary of Demeter in Athens, also changed, growing in size and building new walls. In addition, a temple of Triptolemos was newly built and the 'the sacred way' between Athens and Eleusis took shape.
These changes will be closely related to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ituation in Athens after the Persian Wars. After the Persian Wars, Athens increased its influence over the region of Eleusis, and this can be seen in the context of Athens' interest in and involvement in the Eleusinian Mysteries. With the retreat of Persia, Greece continued to turmoil between Athens and The Peloponnesian League. In this situation, Eleusis was a region that was strategically important but also had an unsettling aspect. Because of those reasons, Athens may have used the Eleusinian Mysteries to increase its influence over the region of Eleusis and to make people of Eleusis get acquainted with Athens. It also appears that through the Eleusinian Mysteries, the Athenians wanted to be seen in the various poleis as people who had received the favor of Demeter and to pass on this benefit to other pol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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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 고대사에서 용(龍)에 대한 인식의 변천 -왕 신성(神聖) 권위의 변화와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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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왕의 권위의 변화에 따라 용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간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첫 단계의 왕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王卽天神'의 원초적 신성 이념에 의존하였으니, 이 단계의 용은 그런 '왕즉천신'을 하늘에서 모셔오고 하늘로 모셔가는 신성한 '神乘物'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단계의 왕은 불교의 전래 및 공인과 함께 '王卽佛'이라는 차별적인 신성 권위를 표방하였고, 일단 용은 '왕즉불'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 왕이 護法과 護國을 망라하는 '불국토의 주인'으로 인식되면서, 용은 왕을 보좌하는 '불국토의 수호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단계의 왕은 '爲民'을 실천하여 '尊王'의 권위를 확보한다는 유교적 규범을 지향하였고, 이에 따라 용은 왕의 신성 권위를 직접적으로 扶助하는 존재가 아니라 佛僧을 매개로 하여 왕의 호법과 호국의 권능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7세기 동아시아 해양 갈등과 교류 및 교역이 폭증하는 현상과 맞물려 나타났으며, 龍도 天龍이나 地龍보다는 海龍의 존재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왕은 용의 현신'이라는 '王卽龍'의 인식이 대두한다. '왕즉용'의 인식은 마한→백제로 이어지면서 성립하여 후백제의 견훤으로 이어졌고 고려의 왕건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면서 '왕즉용'의 인식은 고려시대에 본격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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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세기 전라도 조운선의 침몰과 그 대책

저자 : 한정훈 ( Han Jeong H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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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세곡이 국가재정 수입의 주요한 원천이었던 만큼 전라도 조운선의 안흥량에서의 침몰 사고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였다. 그래서 사고 직후에 '육운 이납', '태안 운하 공사', '사선의 활용' 등 침몰 방지를 위한 여러 대책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육운 이납은 전라도 세곡을 기존의 조창이 아닌 충청도·전라도의 또 다른 지점에 육운하는 방식으로 고려시대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수송방식이었다. 태종과 세종 연간 10년 남짓 동안 일시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사람과 우마(牛馬)의 피해로 인해 조운 정책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육운 이납의 영향으로 16세기 초엽의 중종 때에 영산창이 없어지고 법성창이 전라하도의 유일한 조창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침몰 방지책으로 잘 알려진 태안 운하 공사는 빈번히 실패하였다. 비록 공사가 성공하였더라도 인공 수로에 작은 배를 이용하여 여러 번 옮겨 싣는 방식은 전라도의 대규모 세곡의 수송방식으로는 부적절하였다. 또한 이들 침몰 대책에 비해 일정한 효과를 거둔 사선의 활용은 조운선의 침몰 대책이기보다 '관선 조운'의 폐단을 보완하는 조운 정책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15세기에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실효성의 논란 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운영 기반의 확충, 규정 및 조직의 보완과 같은 조운제 정비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치의 중요성이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기대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침몰 사고 직후에 반복하여 논의된 점은 전라도 조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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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사강목』의 후고구려 인식

저자 : 홍창우 ( Hong Changw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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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보이는 후고구려ㆍ궁예 관련 정보를 분석하여 인식의 양상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이다. 먼저 안정복이 자신의 벗인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궁예와 후고구려에 대한 그의 관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정복은 조선 前代의 통사를 저술한 『동사강목』의 저자였으므로, 그가 특정한 역사적 대상을 향해 깊은 관심을 보인 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들이 주로 『동사강목』에서 '정통'과 관련이 있는 나라의 문제에 치중했다면, 정통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무통'의 문제에도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우선 궁예와 후고구려가 '도적'과 '무통' 국가로 설정된 양상과 계기를 살폈다. 그 결과 궁예는 '도적'이라는 점이 『동사강목』 도처에서 강조되었고, 그의 후고구려는 단군ㆍ기자를 시작으로 하여 마한, 문무왕 9년 이후의 신라, 태조 19년 이후의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들이 부정적으로 서술된 이유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안정복은 '정통' 국가인 신라를 넘본 후고구려와 궁예에 정통과 군주로서의 위상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를 위한 배려의 차원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춘추대의'에 기반을 둔 명분질서의 탐색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통론'의 관점에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이 답습되었던 것과 함께, 『동사강목』 내에 궁예와 견훤을 우리 문적의 소멸 주체로 지목하여 비판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기록의 문제이긴 하지만, 고려시대의 경우 역사서 편찬을 위한 자료의 문제를 거론했던 주체들이 궁예나 견훤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례는 조선시대 식자들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견해인데, 별다른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후고구려나 후백제 모두 역사서 편찬이나 기록물 생산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기왕의 성과를 감안했을 때, 막연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추정하였다. 난세의 시기에 한낱 도적에 불과한 이들에게 불합리한 누명이 씌워진 것이다.
궁예나 견훤의 처지에서 본다면 굉장히 억울할 이와 같은 설명은 사건의 발생 시점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 사이의 간극이 제법 크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식의 주체와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의 계기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여기에서 분기된 자유분방한 역사적 인식의 양상을 『동사강목』을 매개로 살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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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함경도 방곡령 실시와 배상을 둘러싼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의 동향(1889~1893)

저자 : 박한민 ( Park Han M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4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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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함경도 지역의 방곡령 실시와 관련하여 지방관과 상인, 지역에 파견된 관리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한 양상과, 이들의 활동이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곡물 유통과 판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둘러싸고 지방관과 지역 상인이 보인 반응은 방곡령 실시가 단순히 외세 침탈로부터 곡물 유출을 막고 지역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함경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조일 양국은 관원을 현지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임응호를 판핵관으로 파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지역민들은 함경감사와 관련이 있는 현직 관리들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며 몸을 사리고, 일본 상인과의 곡물 거래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판핵관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조병식의 지시를 받아 비위를 몰래 조사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이후 조정에서 임응호를 탄핵하고 구금시키는데 활용되었다. 외무성에서는 이시이 기쿠지로를 원산에 파견하였다. 그는 현지 상인들과 면담하고 장부를 조사하면서 손해배상으로 청구한 금액이 적정하고 타당한지 조사하였다. 조사 중 원산 재류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액에 다소 증빙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체 배상액을 재산정하여 제출하도록 지도하였다. 함경감사 조병식을 비호한 조정의 유력자는 민응식이었다. 민응식은 방곡령에 대한 배상 반대론을 주장하였고, 외아문 독판의 교체를 주도하였다. 일본공사관 측과 접촉한 대원군은 조정 내 분위기와 정보를 일본 측에 흘리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조일 간 교섭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만회해 보려 시도하였다. 함경도의 방곡 시행과 배상 교섭에는 지방과 중앙의 여러 세력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면서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방곡령 시행과 배상 교섭은 조정 내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동된 내정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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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강점기 경학원(經學院) 강사(講士)의 위상과 활동

저자 : 정욱재 ( Jung Uk-j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7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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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강점기 경학원 강사(講士)의 선정과 시기별 활동의 특징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경학원 강사는 경학원의 공식적인 직제에 포함되지 않은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사의 선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910년대~1920년대 경학원 강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정되었고, 선정된 사람들은 명망과 학문이 높은 인물들로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설득과 회유를 받았다. 이를 강하게 저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굴복하여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위정척사론으로 유명한 학파의 제자와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도 있었다. 1930년대부터는 유림이라 볼 수 없는 인물들도 경학원 강사로 선정되었고, 이 흐름은 전세체제기인 194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경학원 강사는 명예직으로 월급은 없고 연수당과 여비만 지원받았다. 또한 1930년대까지 경학원 강사의 임기는 규정되지 않아 본인이 스스로 사임하지 않은 이상 사실상 종신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우대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경학원 강사는 공식 직제인 경학원 부제학ㆍ대제학이 될 수 있었다. 일부 경학원 강사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거나 중추원 참의가 경학원 강사로 임명되는 등 경학원 강사는 단순 명예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경학원 강사의 주 임무는 석전제 거행ㆍ순회강연ㆍ시문 기고로 일제강점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특히 경학원 강사의 순회강연은 유교의 교리를 이용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이 『경학원잡지』 등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한 경학원 강사는 일본 천황과 일제의 침략전쟁 등을 찬양하는 한시를 짓는 등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황도유학'을 주창하여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적ㆍ물적 희생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황도유학'을 추종하여 전시대에 이룩한 높은 수준의 유학사상을 단절시키는 한편, 한국 유학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는 폐해를 남기는 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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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저자 : 박동찬 ( Park Dong C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5-2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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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지평지구 전투는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후 공산군의 대규모 공세에 유엔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3월 말까지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는 '전쟁 전 상황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공산군은 지평지구 전투의 패배로 제4차 공세에 실패했다. 그들은 공세의 목표인 대전∼안동 선 진출은 고사하고 오히려 북위 38도선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아야만 했다.
지평지구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 전략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유엔군은 '전쟁 전 상황에서의 휴전'이라는 전쟁목표 달성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공산군은 제4차 공세의 실패로 인해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공산군이 계획하던 '춘계공세로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 즉 '완전 승리' 구상이 파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가 유엔군의 전쟁전략을 '철군 < 휴전'으로, 공산군의 전략을 '승리 < 휴전'으로 확실히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군 측에서는 대외적으로 휴전을 적극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북위 38도선에 형성된 전선 상황이 그들에게 더 이상 '군사적 완전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했다.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의 결과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협상을 통한 휴전'만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향후 전쟁 양상은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행동 양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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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페르시아 전쟁 이후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 -사제직과 성소 변화를 중심으로-

저자 : 김효진 ( Kim Hyoj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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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는 엘레우시스를 대표하는 종교 의식이었으나,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에는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범 그리스적인 종교 행사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여러 사제직 중에 가장 중요한 신관직은 히에로판테스와 다둑코스를 들 수 있는데, 히에로판테스는 에우몰포스 씨족에서, 다둑코스는 키리케스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히에로판테스의 역할은 입교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둑코스의 역할을 소 미스테리아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을 보면, 이러한 사제직들은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 공식적인 역할이 정립된 것으로 보이며 일정 부분에서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둑코스를 배출한 케리케스 씨족은 친 아테네적 성향을 다수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소 미스테리아를 관장하는 사제로 선택된 사제 가문은 케리케스였다. 또한 케리케스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 치세 전에 아티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다둑코스의 역할을 한 때는 아테네인들과 분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케리케스 가문은 아테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테네는 긴밀한 관계성을 통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성소의 변화를 보면,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전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가 되었고 엘레우시스나 아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복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키몬을 시작으로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아테네 정치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재건축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텔레스테리온의 규모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매우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어벽에 해당되는 페리볼로스가 새롭게 세워졌는데 매우 견고하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데메테르 성소인 엘레우시니온도 변화했는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벽을 건축했다. 이외에도 트립톨레모스의 성소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잇는 '신성한 길'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으며 이는 아테네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한 측면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페르시아가 물러나고 그리스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분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레우시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불안한 측면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고 엘레우시스 사람들을 친아테네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통해 아테네인들은 여러 폴리스에 아테네가 데메테르 여신의 시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시혜를 다른 폴리스에 전하는 민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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