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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미술사학회> 동양미술사학> 송·원대 마니교회화의 구원 도상 연구 -예수와 빛의 처녀 도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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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대 마니교회화의 구원 도상 연구 -예수와 빛의 처녀 도상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Iconography of Salvation seen in Manichaean Paintings during the Song and Yuan dynasties -Focusing on Iconographies of Jesus and the Virgin of the Light-

이승희 ( Lee¸ Seung-hui )
  • : 동양미술사학회
  • : 동양미술사학 1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2월
  • : 169-197(29pages)
동양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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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마니교의 성립과 전파
Ⅲ. 중국 송·원대 마니교 회화와 구원의 표현
Ⅳ. 마니교 세계관과 빛의 상징성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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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하여 페르시아제국에서 성장하여 동서양에 널리 퍼진 종교이다. 마니교를 개창한 마니(Mani)는 메소포타미아의 영지주의,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적인 요소를 융합하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세계관과 교리를 완성하였다. 한편 마니는 특별히 아이콘(Icon)을 만들어 복음을 전파하는데 활용할 만큼 회화를 그리는데도 능하여 회화예술의 거장으로도 인정받았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마니교는 이교(異敎)였기 때문에 당대(唐代)에 불교와 달리 호인(胡人)의 종교로만 인정하였으며, 당말기 회창의 법난 때 탄압받아 수도 장안의 위구르 마니교도들은 푸젠성으로 이동하였다. 푸젠성의 취엔저우(泉州)와 저장성의 윈저우(溫州) 등지에서 마니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비밀스러운 종교활동을 하던 마니교도들은 송·원대에 이르러 마니교회화를 남겼다. 비록 송·원대 불교회화와 표현적으로 유사하지만 그림에 그려진 내용은 마니교가 성립되었던 당시의 교리와 이념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도상으로 빛의 처녀와 빛의 예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마니교에서 빛의 처녀는 죽음으로 몸에서 벗어난 영혼들을 심판장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며, 예수는 죽음 이후 육신 속에 갇혀 있는 빛을 해방시켜주는 존재로 기독교 역사 속 예수와 다른 영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Manichaeism is a religion that originated in Mesopotamia around the third century AD. It was developed in the Persian Empire and spread widely in the East and the West. Mani, who founded Manichaeism, completed his own worldview and doctrine of Manichaeism by integration of various religious elements from Gnosticism in Mesopotamia, Zoroastrianism, Christianity, Buddhism, etc. Meanwhile, Mani, as a master of painting, created icons and used them to spread the gospel.
From a Chinese perspective, Manichaeism was a pagan religion, and unlike for Buddhism, was recognized only as a religion of barbarians in the Tang Dynasty. Uyghur Mani believers in Chang’an, the capital city, moved to Fujian after the oppression of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Emperor Mujong at the end of the Tang dynasty. Mani believers formed Manichaean communities in Quanzhou in Fujian Province, Yunzhou in Zhejiang, and other places, and conducted secret religious activities, and left many religious paintings in the Song and Yuan dynasties. The paintings may be similar expressively to Buddhist paintings of the Song and Yuan era, but their subjects depict the doctrine and ideology at the time of the establishment of Manichaeism. This research primarily explores the paintings of the Virgin of the Light and Jesus of the Light as representative paintings of Manichaeism. From the examination of the paintings, it may be noted that in Manichaean paintings, the Virgin of the Light was the being who guides the souls who have escaped from their bodies to the seat of the judgment. Jesus was recognized as a spiritual being who is different from the historical Jesus, and was a being who liberates the light trapped in the body after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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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예체능분야  > 미술
  • : KCI등재
  • :
  • : 반년간
  • : 2287-4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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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12-2022
  •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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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권0호(2022년 09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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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五代~宋 山水畵 -典範의 形成과 傳統의 成立-

저자 : 박은화 ( Park Eun-wha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2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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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에서 오대를 거쳐 북송과 남송에 이르는 시대는 중국회화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이 시기 회화의 양상은 이후 중국 회화의 전개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산수화에서는 수묵대관산수 양식의 성립과 발전, 화북산수화와 강남산수화라는 상이한 산수화 양식의 형성, 문인산수화의 대두를 통해 이후 산수화 전개의 기반을 마련한 전범을 창조하고 지속적으로 화가들의 창작력을 자극한 여러 화파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오대와 북송대 산수화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고 오대에서 북송을 거쳐 남송 초까지 산수화에 나타난 변화와 그러한 변화의 시대적 배경을 고찰하여 중국 산수화의 창신 및 전범의 형성과 전통의 성립 과정을 파악하였다. 나아가 북송과 남송 교체기인 12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원화가인 李唐과 문인화가인 李公年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오대에서 남송에 이르는 산수화의 양식적 변화 및 창조와 모방, 전승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구명하여 이 시기 산수화의 흐름을 조명하였다. 남송대 이후 중국산수화는 이 시기에 마련된 전통을 계승하고 변용을 거쳐 다시 새로운 전통을 창출한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음으로 오대에서 남송까지 산수화의 발전과 변화의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후대 산수화의 흐름과 함께 화가의 독자적인 창조를 통한 성취나 작품의 우수성 및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During the Five Dynasties and the Song, landscape painting underwent significant development and emerged as the most important subject category in Chinese painting. In this period, landscape painting saw the formation of various stylistic trends with new brush and ink techniques reflecting different regional centers of pictorial art, burgeoning of literati painting theory and practice,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official painting academy and imperial sponsorship, which led to the founding of major paradigms and traditions and left long lasting impact on later Chinese painting.
This article examines the stylistic changes of landscape painting and cultural, intellectual background influenced the landscape ideas and aesthetic change during this period. Two securely dated works of the leading court painter Li Tang and literati painter Li Gongnian who were active during the early 12th century discussed in detail to demonstrate how the landscape styles of early masters Li Cheng, Fan Kuan, Kuo Xi, and Juran transmitted with individual artist's creativity and innovation while echoing established paradigms, and eventually developed into new artistic traditions in succeeding peri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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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五代 南唐·吳越의 石塔(上) -南唐의 南京 棲霞寺舍利塔-

저자 : 강병희 ( Kang Byung-hee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6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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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五代十國시기는 중원의 물적, 인적 자원이 대량 양자강 남쪽으로 이동했던 시기이다. 이는 당 말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안정된 정세 속에서 새롭게 번성하였다. 특히 南唐의 南京은 산동성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매번 북방이 혼란해 질 때마다 동북쪽 이민들이 이동하여 밀집되는 곳이다.
서하사의 역사적 배경에도 이러한 동북방 유민들의 영향이 확인되며 사리탑의 조성 배경에서도 동일하게 찾아진다. 또 다른 주요 요인은 당시 중국 남쪽에서 성장하여 특히 남부 지방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법안종의 화엄적 성격이다.
서하사 사리탑은 『화엄경』의 깨달음으로 여래가 출현하면서 불, 보살, 천왕, 역사상, 나한 등이 화엄삼성의 연화장 정토 세계에 함께 모인 장면을 華嚴藏海 위에 구현하고 있으며 밀첨식 지붕, 3단의 앙연판 탑신받침, 목조 건축을 세밀하게 표현하면서도 공포 부분을 생략하고 둥글게 처리한 지붕돌 등의 양식은 당 중기 이후 조성되는 중국 동북방 지역의 밀첨식, 화엄경 석탑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어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吳越 杭州 지역의 석탑 3기는 유사한 배경 속에서 먼저 조성되지만 서하사사리탑과는 달리 지역적 특색을 발휘하며 새로운 진전을 보인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중국의 중심 문화는 오대 이후 남쪽으로 그 중심축을 이동했으며 이들 문화를 수용한 송나라는 개봉을 수도로 중국 문화의 맥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in China was when the material and human resources of the Central Plains moved south of the Yangtze River. This began at the end of Tang period and flourished anew in a stable situation. In particular, Nanjing in southern Tang(南唐) is a place where immigrants from the northeast move and concentrate when the north is confused every time due to geographical conditions adjacent to Shandong Province.
In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Qixia Monastery(棲霞寺) and the Sarira Pagoda of Qixia Monastery(棲霞寺舍利塔), the elements of an immigrant of the northeast are also identified, and they are also found in the background of the construction of the Sarira Pagoda. Another major factor is the Beopan School which grew up in the south of China at the time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southern region. And The Beopan Schoolplaced importance on the idea of Huayan(華嚴).
The Sarira Pagoda of Qixia Monastery embodies the sermon of 『Avatamska Sutra』 the Lotus World, on the other hand many parts of the shape were received from the Northeast Stone Pagoda, such as a close-to-close eaves form roof, a three-stage lotus pagoda body pedestal, and a round omitted eaves.
Three stone pagodas in the Hang zhou(杭州), Wuyue area are also built in a similar background, but unlike the Sarira Pagoda of Qixia Monastery of the southern Tang, they show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make new progress.
Eventually, Chinese culture moved southward after the Five Dynasties, and the Song Dynasty embraced these cultures and settled in the flow of Chines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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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오대~북송 江浙 지역 불탑 내 봉안된 소형 금동불의 의미 試論

저자 : 최선아 ( Choi Sun-ah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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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국 강소성 소주 운암사 탑과 서광사 탑, 그리고 절강성 금화 만불탑 안에서 발견된 소형 금동불상의 종류와 상태, 그리고 상들이 탑 내 봉안된 의미를 탐색한 글이다. 오대~북송 초, 즉 10세기 후반~11세기 중엽에 조성된 세 탑 안에서는 탑의 제3층 탑신부 혹은 탑 아래에 조성된 석실에서 각기 6구, 9구, 그리고 60여 구의 금동불이 수습되었다. 이 시기 불탑 안에 소형 불상이 안치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안치된 상의 성격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 논문은 상의 상태와 제작 시기를 조사하여 대체로 이들은 탑보다 적게는 50년, 많게는 500여 년 앞서 제작되었으며, 광배가 결실되거나 상의 일부가 파손된 채 안치된 것이 많음을 확인했다. 파손된 옛 불상을 탑 안에 넣은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唐宋전환기라 불리는 이 시기 두드러지게 보이는 佛事의 신경향을 주목했다.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소형 불상의 제작이 감소함과 동시에 불상이나 탑 내 다양한 공양물을 넣는 불사가 크게 유행했으며,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된 지 오래되어 발원의 의미가 희미해진 옛 불상을 매장한 관습이 그것이다. 파손된 불상을 수리하여 사찰의 경내에 보관하거나 소형 금동불을 불전에 진열해 놓았던 唐 이전의 관습 대신 오래된 상들을 매장하는 것이 당시 중국 각지에서 유행했는데, 江浙 지역에서는 그러한 불교 교장을 조성하는 대신 탑이라는 공간 안에 옛 금동불을 모아 넣었을 것으로 보았다.


This paper explores the meaning of the small gilt-bronze Buddhist statues enshrined in the crypts of pagodas of the Jiangnan area, including Yunyan si and Ruiguang si at Suzhou in Jiangsu province, and Wanfo ta at Jinhua in Zhejiang province. Constructed during the Five Dynasties and Northern Song period, which spans from the latter half of the tenth to mid-eleventh centuries, the three pagods yielded various types of gilt bronze statues ranging from six to sixty. While it is well known that pagodas of this period yield small Buddhist statues, in-depth study with regards to their meaning has not been made. With a question of why the statues were put inside the invisible place of the pagoda which is in nature the place for Buddha's relics, this thesis examines conditions of the statues and the ways in which they were arranged in the crypts with other objects donated by many patrons. Through a systematic examination, it reveals that many of the statues were in fact not recent ones but old images that are dated at least fifty to five hundred years earlier than the construction of the pagodas. It also emphasizes that many images are lack of halos and parts of the body, which tells that they had been already broken before being enshrined.
In order to explore the reason why the broken, old images were enshrined in pagodas, this paper pays attention to the new trends of Buddhist activities during this period, which is often designated as the Tang-Song transition. During this period, the interest in producing small statues decreased dramatically, while new modes of Buddhist activities such as inserting various objects in either Buddhist statues or pagodas emerged as a way of accumulating merits. I argue that this in turn led to the creation of statue burials, which are found in many regions of China. Rather than repairing old statues and arranging them on the altar in the hall or in the precinct of temples, the old and broken statues came to be buried under the ground. Taking these changed atmosphere as significant contexts, this paper suggests that Buddhists of the Jiangnan area of this period chose to put the old statues inside the pagodas in a similar way of creating statue burials which were in vogue in the northern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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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北宋代 미륵 신앙과 도상 -중국 山西省 開化寺 <彌勒上生經變相圖>를 중심으로-

저자 : 황선우 ( Hwang Sun-woo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1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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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兜率天)에 머무르며 법문을 설하는 미륵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날 미래의 부처로서 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신앙되어 왔다. 이에 미륵 신앙은 사후 미륵보살의 주처인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 신앙과 미래세에 출현할 미륵불의 설법을 듣고자 하는 하생 신앙으로 크게 나누어 보기도 한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고평(高平) 개화사(開化寺) <미륵상생경변상도(彌勒上生經變相圖)>는 북송대(960~1127)에 그려진 사찰 벽화로 오랜 기간 잘못된 명칭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작품의 주제가 명확해지면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미륵상생경변에 관한 선행 연구에서는 다수의 작품이 현존하는 서하와 천산 위구르의 사례를 통해 당대(618~907) 이후 불교가 쇠퇴한 중원(中原)과 달리 이 지역에서 미륵 신앙이 성행한 것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최근 <미륵상생경변>으로 재규명된 본 벽화와 더불어 다양한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북송에서도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고, 왕실과 사찰 그리고 민간에 이르기까지 미륵 신앙이 상당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개화사본과 유사한 도상과 화면구성을 보이는 서하와 천산 위구르 작품과 비교해 보면 본 벽화가 가장 많은 수의 장면을 보다 충실하게 도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화사본을 비롯한 모든 작품에 표현된 건축물의 구조와 세부 부재가 정교한 계화(界畫) 기법으로 그려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족 문화의 중심인 중원에서 성립한 도상이 이웃 국가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당시 북송과 이웃 이민족 국가 간에 불교문화가 적극적으로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Maitreya has been widely venerated throughout Asia as the Future Buddha who will descend from the Tushita Heaven to this earth to deliver all sentient beings. According to this belief, two modes of the Maitreya cult developed in China: one stressing the motif of ascent and the other emphasizing the motif of descent. Buddhist devotees who believed in the ascent motif aspired to be reborn in the Tushita Heaven where Maitreya resides as a bodhisattva. On the other hand, those who espoused the descent motif wished to be reborn on earth along with Maitreya when he descends to become the Buddha. This paper focuses on a Northern Song (960~1127) mural that illustrates Maitreya bodhisattva in the Tushita Heaven situated in a Buddhist monastery named Kaihuasi in Shanxi province of northern China. The subject of the mural was long mistakenly identified and recent re-attribution has shed light on the importance of this work. While previous studies have focused on the Maitreya devotion in neighboring kingdoms of Xixia and Tianshan Uighur where a number of Buddhist texts and arts related to Maitreya have survived, historical records along with Kaihuasi mural attest to the widespread worship of Maitreya during the Northern Song period. When compared with similar works from Xixia and Tianshan Uyghur, it becomes clear that Kaihuasi mural follows the scripture more closely than any other works and illustrates the greatest number of scenes. Further, the fact that celestial figures as well as architectural representations are depicted in a distinctly Han Chinese style across all works suggests that Chinese prototypes must have circulated across borders. In other words, Kaihuasi mural serves as important evidence of active artistic exchanges among the Northern Song and the neighboring states during the tenth to twelf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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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宴飮圖>로 본 북송대 고분벽화의 세속화 경향

저자 : 지민경 ( Ji Min-kyung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1-14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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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의예술은 보수성을 띄며 전례를 중시하기에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민족성과 지역성이 아닌 시대와 사회 변화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북송 말엽 화북지역에 집중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벽화고분은 전례 없는 특이점들을 보이게 되는데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으로 벽화고분의 주요 주문자인 묘주층의 사회적 신분 변화가 지적된 바 있다. 송대 이후 성장한 부유한 중간계급은 기존의 상류계급 전유의 고급문화를 선호하여 벽화고분 축조를 주도했지만, 형식상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벽화의 구성과 양식을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는 등 자기화하였다. 북송대 이후의 신흥 묘주층은 벽화고분의 형식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벽화고분이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이용되는 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이 점에 있어 북송대 벽화고분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가 형성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볼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본 연구는 북송대 벽화고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이는 벽화 속 <宴飮圖>를 집중 분석하여 이 시대의 벽화고분이 오대 이후 급변한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이 주목하는 <연음도>는 묘주부부가 한가로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으로 단순히 벽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도상일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묘주의 정체를 명확히 하고 그들의 내세생활을 대변하는 벽화의 중심 주제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그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묘주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강조되며 사자의 특권으로서 현실에서 보기 힘든 신비로운 광경들이 연회의 장면으로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북송대 고분벽화에서의 <연음도>는 묘주의 표현으로부터 전반적인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이전시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는 '세속성'의 강화로 요약되며 이는 묘주인 중간계급이 벽화고분 축조와 사용에 투영한 그들만의 바람을 반영한다. 본 연구는 북송대 고분벽화 속 <연음도>에서 세속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이 벽화고분이 오랜 전통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작용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Chinese funerary art has been known as being conservative to the temporal and social changes. However, the mural tombs constructed in the northern China since the end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began to show unprecedented characteristics; this shift was due to the changes in the social status of the mural tomb owners-wealthy middle class, a rising local elite. The middle class led the construction of mural tombs as a desire to emulate the preexisting high-class culture. Still, they did not just follow the precedent forms but customized the styles according to their tastes. This change of tomb owners' social classes after the Northern Song Dynasty not only changed the form of mural tombs but also affected the way mural tombs were socially recognized and used. In this respect, the mural tombs of the North Song Dynasty show how traditional values were understood and accepted differently in the changing historical and social environment.
This study tries to examine how the mural tomb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reflect the social changes by analyzing the painting of 'Tomb Owners' Banquet' in the mural, which characterizes the mural tombs of the North Song Dynasty. The theme of 'Tomb Owners' Banquet' which this paper pays attention to, generally denotes the scenes of the tomb owner couple enjoying a banquet in their happy house; this was not merely a theme that constitutes a tomb mural, but the long been central theme of the tomb mural that has a function identifying tomb owners and suggesting ideal afterlife. Therefore, in their details, the social status of the tomb owner had been emphasized, and as the privilege of the dead, a luxurious banquet scene was described. However, the banquet scenes in the tomb mural of the North Song Dynasty ar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previous era, from the representation of the tomb owner to the overall atmosphere; these differences are summarized as 'reinforcement of secularity' reflecting the new tomb owners' wishes at the construction and use of the tombs. This study analyzes how such secularity is expressed in banquet scenes in tomb murals of the North Song Dynasty and attempts to show how the long tradition of funerary art came to divaricate from this transitiona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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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宋代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 -仿古銅器와 金銀器-

저자 : 이용진 ( Lee Yong-jin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7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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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금속공예는 仿古銅器와 金銀器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방고동기는 예제개혁과 회복을 통한 권력강화를 위해 황실 주도 하의 진행된 금속공예였다. 북송의 방고동기는 휘종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고, 상대 고동기의 기형과 서주 고동기의 명문을 적용하였으며, 부분 주조 후 접합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남송대 방고동기는 紹興, 紹熙 연간에 주로 제작되었고, 『宣和博古圖』를 바탕으로 『淳熙釋尊制度圖』, 『紹熙州縣釋奠儀圖』와 같은 예서를 활용하여 새로운 경향의 방고동기를 만들었다.
송대의 금은기는 재질의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사용이 보편화 되었는데, 『東京夢華錄』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송대 금은기 사용의 보편화는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금은기 소유는 제한적이지만, 사용은 영업장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송대 금은기는 협층법과 거푸집 단조 등 전대와는 다른 기법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협층법은 기형의 중후함과 내부를 매끄럽게 만들어 사용이 편리하였고, 거푸집 단조는 동일기형을 대량생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문양 표현에서는 화훼문과 인물고사 등이 주요 문양으로 등장하였고, 타출기법으로 문양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송대 방고동기와 금은기는 재질과 기형, 문양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금은으로 방고동기를 만들고 고동기의 문양을 금은기에 적용한 것은 당시 금은기에도 방고동기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대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인 방고동기와 금은기의 소유는 황실과 관료 등의 지배층에 국한되었지만, 소비와 사용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방고동기의 사용은 황실과 관료 등 지배층에 국한되었지만, 금은기는 영업점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던 공예품이었던 것이다. 송대 방고동기와 금은기는 역할의 차이가 있었지만, 황실에서 민간으로 그리고 상품화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 송대의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이었다.


The metal crafts of Song dynasty had developed centering on two axes: imitating ancient bronzes and gold and silver vessels. The imitating ancient bronzes was the metal crafts led by the imperial family in order to reinforce and legitimize their sovereign power through reform and recover national rite. The imitating ancient bronzes of Northern Song were produced during Huizong era, They adopted the vessel types of Shang dynasty and the inscriptions of Zhou dynasty, It was manufactured by joining after partial casting. The imitating ancient bronzes of Southern Song was produced during Gaojong era and Gwangong era, The production of the imitating ancient bronzes of Southern dynasty was used the ritual books such as Xuanhebogutu, Chunxishidianzhidutu (淳熙釋尊制度圖), and Shaoxizhouxianshidianyitu(紹熙州縣釋奠儀圖).
The gold and silver vessels of Song dynasty was widely used despite the scarcity of materials, which can be confirmed through records Dongjingmenghuaru(東京夢華錄). The universal use of gold and silver vessels in the Song dynasty meant the revitalization of the market economy. Although ownership of gold and silver vessels was limited, anyone who visited pub could use the gold and silver vessels. The gold and silver vessel of Song dynasty were also produced using techniques different from those of previous dynasty like double-layered technic and mold forging. The double-layered technic has an advantage of voluminous shape and smooth inside for use. The mold forging technic has a meaning in that it enables mass production of the same vessels. The flowering plant and historical event was the main designs, the designs was expressed by the repoussé technic.
Although the imitating ancient bronzes and the gold and silver vessels have a difference in materials, shape, and designs, the fact that the design of ancient bronzes was applied to gold and silver vessels shows the influence of the imitaing ancient bronzes.
The two axes of Song dynasty, imitating ancient bronzes and gold and silver vessels, were owned by the ruling class such as the imperial family and bureaucrats, but they show different aspects in consumption and use. Although the use of the imitating ancient bronzes was limited to the ruling class, gold and silver vessels that anyone could use at pubs. There was a difference in role between imitating ancient bronzes and gold and silver vessels, however, they were the two axes of metal crafts of the Song dynasty, which showed various changes from the imperial family to the private sector and commerci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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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송대 彩色瓷器의 生産과 消費文化

저자 : 김은경 ( Kim Eun-kyoung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0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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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의 연유자기는 문인취향을 근간으로 하는 청ㆍ백자와 함께 송대 도자문화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이자 송 사회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송대 연유자기는 명요 생산품에 비해 만듦새가 조악하여 민간 취향으로 치부되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그동안 간과되어온 송대 연유자기에 주목하여, 생산지와 제작기술적 문제, 더 나아가 소비양상을 고찰하였다.
문인취향의 청자와 백자가 송대 도자의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한편으로 연유자기는 기술적으로 唐代의 연유도기보다 진화되어 이미 일상용기를 비롯한 예기, 부장품과 명기 등에 대한 수요로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보다 더욱 확장된 생산규모는 송 사회의 연유자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음을 방증하며, 소비 계층 역시 상류층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된 점이 확인된다.
그 외 송대의 연유자기는 지역별 출토양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가령 북방은 일상용품이 주를 이룬다면, 남방은 도용과 같은 부장품의 출토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특히 승려나 불상, 馬首人身ㆍ鳥首人身ㆍ人首蛇身ㆍ12지신 등 도교적 도상의 출현은 송 조정의 정치적 통치와 판단에 따라 유ㆍ불교가 조화된 사상의 확산에 따른 결과물로 이해된다. 특히 사천지역에서 유독 도교적 도상의 출현이 많은 배경에는 도교의 발원지로써 일찍이 도교신앙이 널리 보편화된 배경을 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곳이 남북교통로의 접전지로 당대 북방 중원지역에서 성행했던 삼채도용 제작과 장례문화가 남방으로 이전될 수 있었고, 남북방의 문화가 융합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Along with celadon and white porcelain based on literary tastes, the Song Dynasty's condensed porcelain is an important factor that constitutes the Song Dynasty's ceramic culture and is an important evidence of the diversity of Song Dynasty society. Nevertheless, the lead-glazed ceramics of the Song Dynasty were considered to be a folk taste because of their poor quality compared to other major kiln products, and did not receive much attention. Therefore, this study focused on the Song Dynasty lead-glaze porcelain, which has been overlooked, and examined the production area, manufacturing technical issues, and further consumption patterns.
Celadon and white porcelain with the taste of literary class have established themselves as the mainstream of Song Dynasty Ceramics. At the same time, it can be seen that the lead-glazed porcelain of the Song dynasty was technologically more advanced than the lead-glazed porcelain of the Tang dynasty, and it was already favored by the demand for daily containers, burial goods, and ritual goods. The expanded production scale compared to the Tang Dynasty proves that the demand for lead-glazed porcelain in the Song Dynasty increased, and it is confirmed that the consumption class was also widely used from the upper classes to the common people.
In addition, the lead-glazed porcelain of the Song Dynasty shows differences in excavation patterns by region. For example, in the north, daily necessities are mainly, while in the south, excavations of burial items such as theft are overwhelmingly large. In particular, the emergence of Taoist icons such as monks, Buddhas, human body with horse head(馬首人身)ㆍhuman body with bird head(鳥首人身)ㆍsnake body with human head(人首蛇身), and 12 zodiac signs is understood as a result of the spread of ideas that harmonized Confucianism and Buddhism according to the political rule and judgment of the Song Dynasty court. In particular, the historical background in which the Taoist religion was widely common as the origin of Taoism can be cited as the background for the emergence of Taoist iconography in the Sichuan(四川) region. Furthermore, this is the point where the transportation routes between the South and the North meet, and the Sancai(三彩) Pottery Figures and funeral culture that were prevalent in the north-central part of the Tang Dynasty can be transferred to the south, and it can be seen as the result of the fusion of the culture of the north and s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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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본 승려들의 송대 喫茶 문화 경험과 수용 -나한도를 중심으로-

저자 : 이정은 ( Lee Jung-eun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1-23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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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일본 헤이안 시대 말에서 가마쿠라 시대 초기 중국에서 전래된 차의 수용 양상을 천태대사공(天台大師供), 계어독경(季御讀經), 북두법, 나한신앙과 나한공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당시 궁정과 사원 의례 및 승원에서 사용된 차의 구체상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입송(入宋) 일본 승려들의 일기류 문헌, 『선원청규(禪苑淸規)』를 포함한 송대 사원의 각종 규칙서, 당시 남송 승원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나한도에 표현된 끽다 관련 양상을 함께 분석하여, 일송(日宋) 교류의 배경 속에서 입송 일본 승려들이 중국에서 경험한 사원 의례와 승원 문화 속 차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것이 어떻게 일본에서 수용되었는지 그 구체적 일면을 고찰한다. 의례적인 관점을 통해 단순한 기호 음료가 아닌 갖추어야 할 공양물로서의 차 그리고 영적인 효능이 기대되던 차의 구체적 사용양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중국 송대 사원의 의례와 규율이 일본에 전래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This study analyzes the Japanese early reception of Chinese tea, focusing on how tea was used in Buddhist and court rituals in the late Heian and early Kamakura periods. By examining priests' diaries, religious texts, ritual manuals, and illustrated handscrolls, this paper details how tea was used in royal court and temple rituals, including offering rituals for abbots of the Tendai Buddhist sect(天台大師供), court rituals of Buddhist priests' chanting the Prajñā-Paramitā sutra praying for the emperor's and the court's health and safety(季御讀經), and the Buddhsit offering rituals to the seven stars of the Big Dipper/ rituals for the workshop of the Big Dipper(北斗法) as well as offering rituals to arhat (羅漢供).
By analyzing in particular the diaries of Japanese priests who visited Song Dynasty China, various priests' rule books of the Song Dynasty that includes Tea-drinking(喫茶), and tea practices depicted in arhat paintings from China and Japan, this paper analyzes accounts of monastic rules and lives from the Song dynasty and investigates the specific uses of teas in the temple rituals and monastery culture that Japanese monks experienced in China in the context of the Japanese-Song ex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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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中國 宋代 金銀器와 花卉文化

저자 : 안나연 ( An¸ Na-yeon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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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문은 감상의 대상인 화훼를 인간의 조형능력을 사용해 조합하여 예술 전반에 사용한 장식문양을 일컫는다. 이러한 화훼문은 宋代(960~1279)부터 실제 화훼의 모습을 반영하여 예술 전반에서 단독적인 장식제재로 등장한다. 본 논문에서는 송대 금은기의 조형과 문양에서 화훼가 적극 반영되는 점에 주목하여, 화훼문이 유행하게 되는 원인과 사용양상을 송대 사회에서 유행한 화훼문화와 결부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南宋代 窖藏 및 무덤 출토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茶, 酒具와 首飾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송대부터 보편화 되었던 화훼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화훼가 상징하는 의미와 관련된 茶, 酒文化가 있었고, 머리나 몸에 화훼를 지녀 신분을 드러냈던 송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처럼 금은기를 통해 화훼문화를 조명하는 것은 그간 연구되지 않았던 송대 금은기의 성격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동시에 송대 도시문화의 특징이 어떻게 금은기에 반영되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송대 화훼문화와 화훼문은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遼와 高麗 금은기에 보이는 화훼문에도 일정 부분 영향관계를 살필 수 있어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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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19세기 명·청대 박고문(博古紋)자기의 유행과 동아시아로의 영향

저자 : 신주혜 ( Shin¸ Ju-hye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6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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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19세기 명·청대 박고문자기의 제작배경, 유형과 시기별 특징, 그리고 조선과 일본도자에 미친 영향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박고문자기는 고동기에 대한 완상 및 애호가 일종의 문인취미로서 확산되었던 명·청대 사회상을 반영한 대표적인 시각작품이다. 그 제작배경과 관련하여 당대 문헌사료들을 통해 박고취미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17~19세기 자기 박고문에서 보이는 고기물 도상, 문방청완, 팔보 등 기타 길상소재 등의 구성요소로 유형 분류를 시도하고, 유형별 자기 박고문의 편년자료와 양식을 통해 17~19세기 박고문자기의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17~19세기 자기 박고문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했으며, 이는 곧 시기별 박고문자기의 변천과 특징으로 이어졌다. 17세기 중후반, 경덕진 민요에서 문인취향이 적극 반영되어 나타난 박고문자기는 18세기 이후에는 官樣의 내수뿐 아니라 다양한 품종으로 유럽 수출자기로도 크게 성행하였다. 19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자기의 질이 쇠퇴되며, 민간 잡보를 비롯한 여러 길상적 문양요소로 이전보다 더욱 번잡해지는 구성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박고문자기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조선과 일본도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현전하는 작품들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 영향관계를 확인하였다. 조선의 경우, 조선 후기 골동애완풍조 등 중국의 복고적 취향을 잇는 주요 매개체로 작용하였으며,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19세기 민화적 요소와 결합되어 자기의 문양으로 변용되었다.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17~18세기 유럽시장을 배경으로 한 수출자기에서의 수용과 변용이 이뤄졌으며, 일본식 미감이 가미된 일본 수출자기의 특색으로 자리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각국에서 중국 박고문자기를 수용하는 시기와 경로, 모방과 변용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점을 통해 동아시아 도자문화에서 갖는 박고문자기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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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선조 17년(1584)과 18년(1585)에 개최된 기영연(耆英宴)을 그림으로 기록한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16세기 사연용(賜宴用) 화준(花樽)과 주준(酒樽)의 조형 특징을 구명하고, 사연에 있어서 두 종류 준(樽)의 진설 방식과 및 진설 의미를 고찰하였다. 연회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 가운데 준화(樽花)를 꽂기 위한 화준(花樽)과 선온(宣醞)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주준(酒樽)은 16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좋은 품질의 백자·청화백자로 추정된다. 사연용 화준은 조선 전기 국가 의례서(儀禮書) 및 조선 후기 궁중연(宮中宴)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호(壺)와 재질·기형·품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식에 있어서 문양을 생략하거나 청화(靑畵) 문양이 장식되었을 경우 소재는 대나무·매화·화당초문 등 화훼문(花卉文) 계통을 채택함으로써, 사연의 설행(設行) 목적을 투영하는 동시에 궁중연 용준(龍樽)과 차별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조조기영회도>에 묘사된 주준용 뚜껑은 입구의 가장자리가 위로 살짝 들려 있는 특징에 기인하여 연엽(蓮葉)형 뚜껑으로 명명하였다. 연엽형 뚜껑은 국가 의례용기, 가마터 출토품, 전세품 등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뚜껑의 사용처와 용도에는 왕실 및 사연용 주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6세기 <선조조기영회도>의 화준·주준 진설 방식과 사연도(賜宴圖) 속 진설 방식을 종합해보면, 16세기 화준은 다양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진설 되지만, 주준의 경우 획일화되고 고정된 진설 방식을 보인다.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연회의 주최자인 왕의 교체, 임진왜란으로 인한 제작 여건 및 관련 기록 소실로 인한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17세기 이후 점차 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사연용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18세기 이후 양상과는 상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16세기 기영연에 화준·주준이 모두 진설 되었다는 사실은 이 연회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대된 사연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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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汉代帝陵的考古发现与研究

저자 : 谭青枝 ( Qingzhi Tan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7-12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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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二十年, 汉代帝陵的考古调查勘探发掘工作取得了重大成果, 基本探明了两汉帝陵的形制、布局及发展演变轨迹。本文利用已发表的考古资料及多位学者的研究成果, 介绍了两汉帝陵考古工作及研究历程, 并重点介绍了具有代表性的陵墓布局、内涵。西汉“事死如生”,帝陵制度的特点可归纳如下:帝后同茔不同穴;双重陵园, 外陵园内帝后又各自有小陵园;陵园墙外有一重或两重围沟;覆斗形封土;墓葬形制是有四条墓道的亚字形墓, 以东墓道最长, 为主墓道;墓室内黄肠题凑木椁结构;墓主身着金镂玉衣;陵园内有大量的外藏坑, 有多座建筑, 有嫔妃祔葬墓, 数量从数座到数十座不等;陵园外有大量陪葬墓;西汉宣帝之前的帝陵近旁设置陵邑。东汉提倡薄葬, 与西汉时期重视陵墓设施相较, 更注重祭祀仪式, 东汉时期帝陵规模较西汉小很多, 特点如下:帝后同穴而葬;一重陵园, 规模较小;或有一重围沟;圆丘形封土;墓葬形制是一条墓道的甲字形墓, 墓道通常在墓室南侧;墓室是有横前室纵向后室或多室砖石墓;墓主身着金镂玉衣;陵园内有石殿建筑、钟虡建筑;没有外藏坑, 将西汉时期的外藏体系纳入墓葬内;有陪葬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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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발견과 연구

저자 : 탄칭즈 ( Qingzhi Tan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9-16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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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년 동안 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조사·탐사 발굴 작업은 한대제릉의 형식과 배치, 발전 및 변화의 궤적을 밝혀내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발표된 고고학 자료와 여러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한대 황제릉의 고고학적 성과와 연구과정을 소개하고, 능묘배치, 내포된 함의을 중점적으로 소개하였다. 서한(西漢)은 “사사여생(事死如生)” 즉, 죽은자 섬기기를 산자 섬기듯 하였는데, 황제릉제도의 특징을 요약하면, “제후동토부동혈(帝后同茔不同穴)”로, 황제와 황후는 동일 묘역에 장례를 치루지만, 각자의 능원을 가지며, 이중능원, 외릉원 안에서 제후는 각기 소능원을 가지며, 능원담장 밖에는 한겹 또는 2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복두형 봉분으로 4개의 묘도가 있는 아자형묘(亞字形墓)이며. 가장 긴 동쪽의 묘도가 무덤의 주묘도이다. 무덤 안은 황장제주의 목곽구조이며, 묘주는 금루옥의를 입고 있다. 능원 안에는 대량의 외장갱이 있고, 여러 기의 건축물이 있으며, 비빈의 합장묘가 있다. 수량은 몇기에서 수십기로 차등이 있다. 능원밖에는 대량의 배장묘(陪葬墓)가 있다. 서한 선제이전의 제릉은 근처에 능읍을 설치하였다. 동한(東漢)은 박장(薄葬)을 부르짖어, 서한시대의 능묘시설을 중시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제사의식을 더 중시하였으며, 동한시기 제릉의 규모가 서한 때 보다 훨씬 작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제후동혈장(帝后同穴葬)으로, 한겹의 능원으로 규모가 작거나 혹은 한 겹의 해자가 있거나 또는 원구형 봉분이다. 무덤형식은 묘도가 하나인 갑자형묘(甲字形墓)로, 묘도는 통상적으로 묘실의 남측에 있다. 묘실은 가로형 전실과 세로형 후실이 있거나 혹은 다실(多室)의 전석묘(磚石墓)이다. 묘주는 몸에 금루옥의를 걸치고 있다. 능원 안에는 석전(石殿)건축과 종거(鐘簴)건축이 있다. 외장갱이 없는 것은, 서한시기의 외장체계를 무덤 안으로 포함시켰으며, 배장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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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송·원대 마니교회화의 구원 도상 연구 -예수와 빛의 처녀 도상을 중심으로-

저자 : 이승희 ( Lee¸ Seung-hui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19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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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하여 페르시아제국에서 성장하여 동서양에 널리 퍼진 종교이다. 마니교를 개창한 마니(Mani)는 메소포타미아의 영지주의,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적인 요소를 융합하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세계관과 교리를 완성하였다. 한편 마니는 특별히 아이콘(Icon)을 만들어 복음을 전파하는데 활용할 만큼 회화를 그리는데도 능하여 회화예술의 거장으로도 인정받았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마니교는 이교(異敎)였기 때문에 당대(唐代)에 불교와 달리 호인(胡人)의 종교로만 인정하였으며, 당말기 회창의 법난 때 탄압받아 수도 장안의 위구르 마니교도들은 푸젠성으로 이동하였다. 푸젠성의 취엔저우(泉州)와 저장성의 윈저우(溫州) 등지에서 마니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비밀스러운 종교활동을 하던 마니교도들은 송·원대에 이르러 마니교회화를 남겼다. 비록 송·원대 불교회화와 표현적으로 유사하지만 그림에 그려진 내용은 마니교가 성립되었던 당시의 교리와 이념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도상으로 빛의 처녀와 빛의 예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마니교에서 빛의 처녀는 죽음으로 몸에서 벗어난 영혼들을 심판장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며, 예수는 죽음 이후 육신 속에 갇혀 있는 빛을 해방시켜주는 존재로 기독교 역사 속 예수와 다른 영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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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수근과 외국인 소장가의 조우 -냉전 문화의 한 양상-

저자 : 정무정 ( Chung¸ Moo-jeong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20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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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작품은 1950-60년대 많은 외국 소장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박수근의 작품이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그의 후원자를 자처한 마가렛 밀러, 미대사관 문정관의 부인 마리아 크리스틴 헨더슨(Maria-Christine Henderson, 1923~2007), 그리고 미국 무역상사 주재원의 부인 실리아 지머맨(Celia Zimmerman)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글에서는 외국인 소장가들의 작품 소장 배경을 추적해보고, 그들과 박수근을 이어준 반도화랑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반도화랑에서 마가렛 밀러와 실리아 지머맨 그리고 마리아 헨더슨의 주도로 이루어진 모임과 행사는 단순히 문화에 관심을 가진 동호인들의 친목 성격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당사자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외견상 순수한 문화공간인 반도화랑 이면에서는 문화 냉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에서 박수근의 작품이 외국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것이 외국 소장가들에게 동서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인간의 정서를 건드리는 미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반도화랑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평범한 인물들에서 박수근 개인이나 전후 한국인의 초상 또는 한국적 전통 이상의 것을 보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 소장가들이 박수근의 작품에서 2차대전 종전 이후 확산하여가던 문화 냉전에 처한 인류의 초상을 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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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비반복적 본색과 예술적 필치 -1970년대 북한의 조선화 형식론-

저자 : 홍지석 ( Hong¸ Ji-suk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4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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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의 주요 특징으로는 기법과 수법의 상위개념으로서 '화법' 개념의 정립, 색채의 주관적 인식(일반성)과 객관적 지각(개별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제색(본색)' 개념의 부상, 예술적 형상화의 높이에 올라선 '예술적 필치' 개념에 대한 강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0년대 북한 조선화 형식론은 대립하는 것들의 중재, 또는 갈등의 봉합을 추구했다. 그들은 '화법', '제색(본색)', '예술적 필치' 등을 내세워 선과 색, 본색과 반사색, 몰골법과 구륵법 등 대립으로 이끌어지기 쉬운 것들을 담론 체계 안에 효율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화의 개조발전과 현대화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렇듯 조율과 중재, 봉합과 화해를 지향하는 개념들은 차이들, 곧 서로 다른 입장들이 경쟁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담론장의 역동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대에 구축된 조선화 형식체계는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면서 조선화 창작과 수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화법', '제색', '필치' 등의 개념들은 모두 조선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들의 능동적 관여를 강조했지만 그 관여는 언제나 지배체제의 이념이 정해준 길을 따라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조선화 형식론은 궁극적으로 형식 문제를 이념 문제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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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아시아 5개국 재외 한인 미술의 정체성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전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박본수 ( Park¸ Bon-soo )

발행기관 : 동양미술사학회 간행물 : 동양미술사학 1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3-27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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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在外) 한인(韓人) 즉,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는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모국을 떠나 세계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한민족 '이산(離散)'을 의미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의 가장 핵심적 개념은 '타의(他意)에 의한 이주'라고 할 수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을 그들이 지닌 민족적 정체성 측면에서 분류하고 분석해보면 '①기억(記憶), 이산의 역사 ②근원(根源), 뿌리와 정체성 ③정착(定着), 또 하나의 고향 ④연결(連結), 이산과 분단을 넘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기억(記憶), 이산(離散)의 역사'는 아시아의 재외 한인 이산의 역사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개인적인 기억과 서사를 다룬 작품들로 나타난다. 자발적이 아닌 타의(他意)에 의한 이주, 원치 않고 준비되지 않은 이산(離散)의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記憶)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의 첫 번째 정수(精髓)이다.
두 번째, '근원(根源), 뿌리와 정체성'은 해외 한인 동포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재외한인 동포는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에 속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다. 재일동포의 경우에는 일본으로의 귀화를 종용 당하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도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조선적'이라는 무국적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혈통에 따른 국적과 거주지에 따른 국적의 불일치라는 이중적 상황과 현지에서 소수자로서 살면서 당하는 차별과 부조리함은 슬프고 서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떠나 이주를 시작한 증조부모나 조부모의 모습에서부터 부모와 가족을 그린 그림들, 자신의 자화상, 그리고 백두산과 제주도 같은 혈통적 조국 산하의 풍경, 탈춤이나 돌잡이, 제사와 같은 풍물과 전통적 관습 등을 그린 여러 동포 작가의 작품에서는 한민족으로서의 혈통적·문화적 정체성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정착(定着), 또 하나의 고향'은 아시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조국을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세상에 정착하고 적응하면서 만나게 되는 시각적 대상을 그린 작품들을 보여준다. 또 다른 고향인 현지의 자연 풍경과 도시의 모습, 인물과 풍속, 역사와 종교 등은 그들 작품의 주제가 된다. 혈통적 조국이 아닌 거주국의 국민으로서 갖게 되는 국가·국토·현재에 대한 애정이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 간취된다. 모든 예술은 풍토성을 띠는 것이 당연하므로 거주국의 관습과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거주국 미술계의 역사와 현대미술의 상황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네 번째, '연결(連結), 이산과 분단을 넘어'는 동포 작가들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한반도의 문화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투영하여 그려낸 작품들이다. 세계에서 몇 안되는 민족 분단 국가인 한반도에 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재외 한인 작가들에게도 남과 북의 대치 상황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이 마주하는 대화의 자리가 자주 열려, 분단을 극복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확립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그림들이 꽤 많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의 미술이 이산과 분단을 뛰어넘고 한민족을 위한 축복과 번영의 매개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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