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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내·외국인의 울릉도에 잠입 사례와 사유(事由)에 대한 연구

A Case Study of Foreigners and Koreans who infiltrated Ulleungdo Island in the 19th Century

신태훈 ( Shin¸ Tae-hoon )
  • : 강원사학회
  • : 강원사학 3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5월
  • : 239-271(33pages)
강원사학

DOI

10.31097/KHR.2022.38.08


목차

Ⅰ. 서론
Ⅱ. 울릉도에 대한 인식변화
Ⅲ. 내국인의 울릉도 잠입
Ⅳ. 외국인의 울릉도 잠입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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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오면 울릉도에 대한 인식과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기존의 농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상품이 될 수 있는 작물이나 상품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적은 노동으로 경제적 이익을 낼 수 있는 어염이나 벌목에 쏠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남해안 및 동해안 어민들에게 주목받은 섬이 바로 울릉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과 러시아까지 울릉도에 관심을 두게 된다.
조선 정부는 먼저 울릉도에 잠입한 내국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채취한 물품을 몰수하고 그들을 방조한 수토관들에 대해서는 고신을 뺏는 처벌을 하였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퇴거를 요구하고 이들에 대해 재판을 열어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울릉도에 대한 산림벌목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울릉도에 대한 벌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미셸의 경우는 울릉도 목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세 이후 울릉도에는 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이 혼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더 이상 울릉도를 수토제에서 관리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질적인 영토로써 관리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1900년 관보 41호를 통해 울릉도에 군수를 두는 것으로 정식적으로 조선의 행정구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In the 19th century, the perception and situation of Ulleungdo Island will change a lot when it reaches the 19th century. Koreans who experienced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Jeongmyo Horan, turn to crops or products that can be commodities rather than engaging in existing agriculture. This has led people to focus on fishing or logging, which can make economic profits with less labor.
In this situation, Ulleungdo Island was the island that attracted attention from fishermen on the southern and eastern coasts. This situation was not only for Koreans but also for Japanese fishermen.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even Britain and Russia were interested in Ulleungdo Island.
The Joseon government first confiscated their collections for Koreans who infiltrated Ulleungdo Island, and instead punished the flood control officers who did not stop them and assisted them by stealing the body. As for foreigners, Japanese were asked to evict Japanese who lived illegally, and they were urged to hold a trial and punish them.
Britain and Russia received forest logging rights for Ulleungdo Island from the Joseon government and began logging for Ulleungdo Island. However, in the case of Michelle in the UK, it became a problem by smuggling Ulleungdo timber to Japan.
As such, many Koreans and foreigners are mixed in Ulleungdo Island after the age of 19.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government no longer managed Ulleungdo Island in the Sutoje system, but moved people to manage it as a substantial territory, and as a result, in 1900, it was officially included in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Joseon by having a county governor on Ulleungdo Island through Gazette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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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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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6-3060
  • : 2713-841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5-2022
  • :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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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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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제강점 전후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타다시의 강원도 문화재 조사와 식민성 - 1912년 원주 지역 고적 조사 활동을 중심으로 -

저자 : 왕현종 ( Wang¸ Hyeon-jong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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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 전후 도쿄제국대학 공과대 건축·고고·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강원도 문화재 조사, 특히 원주지역 고적조사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는 1902년부터 조선의 문화재와 고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여 1909년 이후 1915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수개월에 걸쳐 각종 문화재의 상태와 등급을 매겨 보존의 가치를 매겼다.
특히 1912년 가을에는 강원도 지역 고적조사에 나섰는데, 춘천, 강릉, 오대산, 원주 일대 문화재를 조사하였다. 특히 원주 지역의 조사에 대해 원주는 신라 말기철불, 석물, 석탑 등 귀중한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으며 경주 불교유적지에 버금간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흥법사지, 거돈자시, 법천사지 등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사찰과 석탑, 부도탑, 비문 등에 주목했다.
그런데 강원도 일대 문화재의 조사기록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 종합박물관에 세키노 타다시의 '필드카드'로 남아있다. 그중에서 원주 문화재 36개 유물에 대한 47장의 필드카드에서는 문화재 발견 경위, 보존상태, 등급과 가치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필드카드는 당시 문화재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물 사진촬영과 조사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노트였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이후 「조선고적조사표(朝鮮古蹟調査表)」, 「고적조사약보고서(古蹟調査略報告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원주 지역의 문화재는 흥법사지 진공대사비 발견 사실이나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의 반출과 같이 원 소재지에서 무단 이전되었으며, 1915년 조선공진회의 전시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문과 문화발달을 중시하는 학자인 안확, 정인보 등은 세키노의 조선고적조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반면, 최남선과 같은 이들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912년 강원도, 원주 지역에 대한 세키노 타다시의 조선 문화재 조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체계적인 조사활동을 통하여 조선 각지의 문화재의 보존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을 유발하고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정당화를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일제의 식민지성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Gangwon-do Cultural Heritage Survey, focusing on the Wonju area, by Sekino Tadashi(關野貞), an architectural, archaeological, and art historian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before and after the Japanese colonial era. He began investigating Joseon's cultural properties and monuments in 1902 and valued preservation by rating the condition of various cultural properties once a year from 1909 to 1915.
In particular, in the fall of 1912, a survey was conducted on historical sites in Gangwon-do, and cultural assets in Chuncheon, Gangneung, Odaesan, and Wonju were investigated. Wonju deemed that valuable cultural assets such as an iron Buddha, stone objects, and stone pagodas in the late Silla period were concentrated and comparable to the Buddhist ruins in Gyeongju. He especially considered large temples, stone pagodas, stupas, and inscriptions made in the late Goryeo Dynasty, such as the Heungbeopsaji, Geodonjashi, and Beopcheonsa Temple sites.
However, the research records of cultural assets in Gangwon-do remain at the Tokyo University Museum in Japan as Sekino Tadashi's "field card.” Among them, 47 field cards for 36 relics of Wonju Cultural Heritage recorded the details of the discovery and the preservation status, rating, and value of the cultural heritage. The field card was a notebook that recorded the details of the photographs and investigations of relics as the preservation of the cultural properties was improperly performed at that time. The contents of these records were systematically organized into the Joseon Historical Survey Table, the Historical Survey Report, and the Joseon Historical Archives.
Meanwhile, cultural properties in Wonju were transferred from the original location without permission, such as the discovery of a vacuum monument at Heungbeop Temple Site and the removal of the Stupa of State Preceptor Jigwang from Beopcheonsa Temple Site, and were used as an exhibition in 1915. Moreover, scholars such as An-hwak and Jeong In-bo, who value Joseon's academic and cultural development, were critical of Sekino's investigation of Joseon's historical sites, while those such as Choi Nam-sun also recognized their contributions.
Therefore, Sekino Tadashi's survey on Joseon cultural properties in 1912 in Gangwon-do and Wonju can be evaluated as follows. First, through systematic survey activities, it was possible to reevaluate the preservation value of cultural properties in various parts of Joseon. Second, it can be said to represent the colonial nature of the Japanese Empire in that it led the Japanese to loot cultural properties and caused the historical justification of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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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석탄에서 문화로 - 문화적 탈산업화 전략으로서 루르 산업 유산 -

저자 : 정용숙 ( Jung¸ Yong-s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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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산업 유산 재활용 도시재생의 국제적 성공 모델로 주목받는 독일 서부의 옛 중공업 중심지 루르 지역을 다루며 특히 1960년대 이후 전개된 탈산업화의 문화적 전략으로서 폐산업시설이 산업 유산이 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20세기 후반 동력원의 구조적 전환과 산업의 국제 분업으로 인한 서독의 석탄과 철강 공업의 몰락에 대해 루르 지역은 오염된 공업 지역으로부터 탈산업 자연을 갖춘 첨단 지식과 문화지역으로의 이행을 표방하는 장기적 '구조조정'으로 대응하였고 그 문화적 전략으로 '산업문화' 실천을 수행하였다. 이 글은 이를 가능케 한 사회적 토대와 정치적 맥락으로 사민주의 정치문화에 주목하고 그 결과물인 루르 지역 산업 유산의 특징을 논한다. 이를 위해 우선 그 역사적 조건으로서 산업화 시기 루르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형성 과정을 통해 지역 정체성의 구성성을 논한다. 둘째, 1950년대 말부터 반세기 이상 진행된 루르 지역 탈산업화의 특성을 사민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정치기획으로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물인 산업문화의 과거 재현에서 드러나는 기억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탈산업사회의 과제인 사회적 양극화와 관련한 역사적 문화적 공간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This is a study on the Ruhr area of western Germany, the deindustrialized district of international repute as a 'success model' for industrial heritage and urban regeneration since the 1990s. Regarding the collapse of its coal and steel industry as a result of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energy sources and the international division of industry in the second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Ruhr responded with a long-term Strukturwandel, which means the restructuring of the economy and the transition of the Ruhr area from a polluted industrial belt to a high-tech knowledge and cultural region with post-industrial nature. This article focuses on social-democratic political culture as a social and political context that made this transition possible and discusses the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s of Industriekultur, i.e. German conception of industrial heritage, as its result. To this end, this study first examines the Ruhr area and its identity as historically constructed since the nineteenth century by tracing its economic, social, and political formation. Second, the deindustrialization here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since the late 1950s is discussed as a result of a political project enforced by social democratic agents and compared with international counterparts of neoliberal deindustrialization without social policy. Finally, the memory culture in the representation of the industrial past by Industriekultur is critically examined and the possibility of historical, cultural, and spatial practice related to social polarization as the common task of a post-industrial society is expl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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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세기 전반기의 경제상황과 어촌 심언광의 절검론

저자 : 朴道植 ( Park , Doh-Sik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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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개창 이후 반세기 정도가 지나면서 나타나고 있던 국내상업에서의 변동은 조선의 각 경제 주체들의 경제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중앙의 고위관료들은 상업에 참여하여 재산 증식[殖貨]을 추구하였고, 직접 생산자인 일부 수공업자와 농민들은 상업에 종사[逐末]하기도 하였다. 중앙의 고위관료들의 상업참여를 통한 식화 행태는 필연적으로 이들과 부상대고 등 자산층 일반의 사치풍조로 이어졌다. 권세가와 부상대고는 이에 편승하여 당물을 수입하였다.
조선전기 국가의 모든 경비는 공안과 횡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었다. 공안은 태조 원년(1392) 10월 고려조의 세입의 다과와 세출의 경비를 헤아려 제정됨에 따라 국가재정의 수입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횡간은 건국한 지 70여 년이 경과한 세조대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다. 그 후 성종대에 이르러 개정작업이 착수되어 동왕 4년(1473) 9월에는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이, 다음 해에는 식례횡간(式例橫看)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때 제정된 횡간은 국가경비를 지나치게 절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운용에서도 많은 곤란을 가져왔다. 이에 성종은 신정횡간과 조응하여 공안을 개정하게 했는데, 이때의 공안 역시 이전에 비해 크게 삭감됨에 따라 제읍(諸邑)에서 매년 바치는 공물로는 경비의 태반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경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누차에 걸쳐 공안증액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끝내 개정되지 않았다. 그 후 공안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대두하게 되어 수차례에 걸쳐 논의된 결과 연산군 7년(1501) 7월에 마침내 공안개정을 보게 되었다. 이때 제정된 공안이 이른바 신유공안이다. 그러나 공안개정을 통해 국가재정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었는데도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인해 “상공(常貢) 외에 가정(加定)·인납(引納)이 없는 해가 없다”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중종대에도 대내의 비용이 번다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내수사 직계에 의한 재정확충과 인납(引納)·무납(貿納)과 같은 전대의 폐습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심언광은 중종이 즉위한 처음에는 병폐의 근원을 알고 지난날의 폐단을 고쳤으나, 수년 이래 궐내에서 쓰는 것이 번다하여 지난날보다 10배나 되어 불시에 명령이 내리고 명분도 없이 사용하는 용도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사(有司)들이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더러는 저자에서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기도 하고 더러는 민간의 공물을 앞당겨서 받아들이는 거의 일상화되었다고 하였다.


The changes in domestic commerce that occurred about half a century after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brought about many changes to the economic life of each economic agent in Joseon. As a result, high-ranking central officials participated in commerce and sought to increase their wealth, and some craftsmen and farmers who were direct producers engaged in commerce. The behavior of wealth growth through the commercial participation of high-ranking central officials inevitably led to a trend of luxury among the wealthy, such as them and a merchant of wealth(富商大賈). high-ranking central officials and a merchant of wealth took the lead and imported Chinese goods(唐物).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t was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經國大典, National Code) that all national expenses were to use Gongan(貢案, the annual revenue) and Hoenggan(橫看, the annual expenses). Gongan was enacted in October 1392(1st year of King Taejo's reign) by considering the large and small amount of revenue and expenses of the Goryeo dynasty, so it was possible to grasp the income of the national finance to some extent, but Hoenggan was established only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70 years after the founding of the country. After that, revision work started in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nd Hoenggan-JoJaksik(橫看造作式) was completed in September 1473(4th year of King Sungjong's reign) and Sikrye-Hoenggan(式例橫看) the following year.
However, the Hoenggan enacted at this time not only caused many problems because it reduced national expenses too much, but also brought many difficulties in its operation. Accordingly, King Seongjong had to revise the Gongan in accordance with the newly enacted hoenggan. At this time, the Gongan was also greatly reduced compared to the previous one, so the annual tribute from several Gunhyun(郡縣; regional reign) was insufficient for most of the expenses. To solve this lack of expenses, there was a discussion about increasing the Gongan over time, but it was never revised. After that, the argument to revise Gongan emerged, and as a result of many discussions, the Gongan revision was finally made in July 1501(7th year of King Yeonsan's reign. The Gongan enacted at this time is the so-called SinyuGongan(辛酉貢案). However, even though the national finances have been greatly expanded through the Gongan revision, it is said that “there is no year without a fixed number(加定), the advance tribute(引納) other than annual tribute(常貢)” due to the chronic lack of national finances. Even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the expenses within the royal family were increasing, so to cover the expenses, financial expansion by Naesusa directed by king(內需司直啓) and the abusive practices of the previous generation such as the advance tribute and buying tributes in markets and then paying(貿納) were repeated.
At the beginning of King Jungjong's accession to the throne, Sim Eon-gwang knew the source of the ailments and corrected the evils of the past, but within a few years, it was used in the palace, so it was 10 times larger than in the past. Therefore, when officials could not afford the supply, some forcibly purchase goods from the market, and others said that it has become almost routine to accept private offerings ahead of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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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기 강원도지역 공납제 운영

저자 : 전상욱 ( Jeon¸ Sang-w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9-13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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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과 함께 제정된 공납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운영상의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이는 크게 공납물 분정의 불균형과 방납 확대로 인한 공납물 부담의 증가로 요약된다. 본 논문은 이 같은 16세기 공납제 운영 양상을 강원도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각도의 공납제 운영상의 특징과 조선후기 삼남 이외 지역에서 이루어진 공납제 개혁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우선 강원도지역의 공납물 분정의 불균형을 살펴보았다. 16세기 공납물 분정의 중요한 기준이 전결수였다. 그러나 강원도지역의 전결수는 타도에 비해 턱 없이 낮은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납물 부담이 과중한 상황이었다. 이는 전결수를 고려한 공납물 분정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시행된 계묘양전 당시 강원도지역의 전결수를 실상에 비해 높게 책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결수가 높게 책정되면서, 갑진공안 상의 강원도지역 공납물 부담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강원도지역 내에서도 발생하였다. 계묘양전 당시 전결수가 높게 책정된 영동지역은 영서지역에 비해 공납물 부담이 무거운 상황이었다. 즉, 강원도지역은 어느 군현에 속하는가에 따라 공납물 부담이 차이가 있었고, 그 부담은 타도에 비해 무거웠다.
다음으로 방납 확대로 인한 공납물 부담 증가를 살펴보았다. 16세기 공납물의 전결세화가 확대되었지만, 중앙정부는 여전히 현물재정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로 인해 방납이 활성화되었고, 강원도지역 역시 16세기 공납물의 방납은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간행된 갑진공안 상에 책정된 공납물만으로 국가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별복정 등 변칙적인 재정운영이 발생하였다. 민은 급박하게 납부해야할 공납물을 방납주인에게 구매하여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방납주인이 공납물 납부과정을 장악하면서 防納價를 높게 책정하였다. 이로 인해 민의 부담은 커지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 강원도지역 공납제 운영 양상은 17세기 초반 강원도 대동법이 시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This thesis focused on the operation of the tribute system in Gangwon-do in the 16th century. Through this, it is intended to contribute to a certain part in the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operation of the tribute system in each province and the reform of the tribute system other than the three southern regions of the late Joseon Dynasty.
First of all, the Gangwon-do region paid excessive tribute compared to the quantity of land. Although there is a limit to this system, it was closely related to Gyemyoyangjeon(癸卯量田) and Gapjin Gongan(甲辰貢案) after Japanese Invasion of Korea(壬辰倭亂). In the process of publishing Gyemyoyangjeon(癸卯量田) and Gapjin Gongan(甲辰貢案), the amount of land and offerings in Gangwon-do were overestimated. And the burden of tribute on the people increased due to Bangnab(防納).
In the end, the Gangwon-do region had a different burden of tribute depending on which county(郡縣) it belonged to, and the burden was excessive compared to the another province(道). This became the background of Gangwon Daedong law (江原道 大同法) in the early 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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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척향교의 제례(祭禮) 석물(石物)에 관한 연구 - 성생단(省牲壇)과 망료석함(望燎石函)을 중심으로 -

저자 : 홍성익 ( Hong¸ Sung-i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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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지방에 설치한 관학이다. 향교 건립은 조선시대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유교이념으로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강원도에는 15개의 향교가 있으며 춘천과 강릉만이 고려시대에 건립되고 이외의 향교 건립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척향교의 건립년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조선초기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삼척향교의 대표적 제례석물은 성생단과 망료석함이다. 성생단이란 犧牲禮에 사용될 犧牲物의 건강과 肥肉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壇으로 민예풍의 거북이 형태로 제작되었다. 제례에 사용한 祭文은 제례가 종료되면 태우는 데 제문을 태우기 위한 석물을 망료석함이라 부른다. 망료석함은 石函과 蓋石 2점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붕이 우진각인 가옥의 형태로 제작되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고 1656년에 제작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시대적 기준작으로서 볼 수 있다. 성생단은 동재와 서재 사이에 있고 망료석함은 대성전 서쪽에 위치한다. 이외에도 망료석함과 동시에 건립되는 하마비가 있으며 원형으로 추정되는 관수대가 있다.
이와 같이 제례석물을 온전히 갖춘 향교는 강원도 내에서 삼척향교가 유일한 사례이다. 앞으로 이 석물이 향교에서 행해지는 제례에서 실제 설행되기를 기대한다.


Hyanggyo are government schools installed in provinces by the central government since the Goryeo Dynasty. The establishment of hyanggyo spread nationwide during the Joseon Dynasty and became the representative provincial educational institutes of the Joseon Dynasty, which wanted to run the nation under Confucian ideologies. There are 15 hyanggyo in Gangwon-do and only those in Chuncheon and Gangneung were built during the Goryeo Dynasty, while the dates of building other hyanggyo are unknown. The year that Samcheok Hyanggyo is unknown but it is estimated to have been construct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epresentative ritual ceremony stonework of Samcheok Hyanggyo to be examined in this paper are Seongsaengdan and Mangnyoseokham. Seongsaengdan is an altar for checking the health and fattiness of sacrifices to be used in the sacrificial ritual, and it was made in the shape of a turtle in a folk art style. The written funeral oration used in the ritual is burned once the ritual is complete, and the stonework for burning this piece of paper is called mangnyoseokham. Mangnyoseokham is made up of a stone case and two roof stones, and it is designed like a small house. Because of its high art history value and as it was made in 1956, it can be viewed as the standard piece of the time. Seongsaengdan is located between the dongjae and seojae, while mangnyoseokham is located west of the Daejseongjoen shrine. There is also the hamabi that was constructed together with mangnyoseokham and the gwansudae that is presumed to be in its original form.
Samcheok Hyanggyo is the only hyanggyo that still has ritual stonework so fully intact in Gangwon-do. It is anticipated that this stonework will be actually used in rituals performed at the hyang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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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40~1910년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구암동(狗巖洞)의 '洞中' 운영과 계(契)

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7-19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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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40∼1910년 江原道 平海郡 狗巖洞 '洞中'의 운영 양상을 규명한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각 촌락은 부세 대응, 복리 증진, 공동체 사업 수행을 위해 동중을 형성하였으며, 洞契를 비롯한 자치 조직을 통해 그것을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촌락 구성원의 성격과 생업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구암동은 반농반어의 촌락으로서 동중 운영과 관련된 여러 계 조직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동계 상층부를 구성하는 老班契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암동에서는 동계에 참여하지 않는 촌락민을 閒民으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촌락 내에서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한민은 동계에 참여하고 有司로서 동중의 궂은일을 잘 수행하면 노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다. '洞首', '尊位', '座上'이 바로 노반계를 구성하는 자리이다. 이들은 동계를 통해 동중 운영 전반에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권을 독점적으로 운영하였다. 특히 藿巖放賣權과 미역 채취, 멸치 조업을 바탕으로 동중 재정을 확충함과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공동납 관행에 따라 동리 단위로 부과되는 부세 행정에도 노반계는 큰 영향력을 발휘 하였다. 한편, 동중은 대외적으로 관부에 부세 감면과 조정을 청원함으로써 촌락민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나갔으며, 인근 촌락 및 관부·사찰·개인과의 상호 부조를 통한 공존을 모색하였다.


This study examines the aspects of operating 'Dongjung' in Guam-dong of Pyeonghae-gun in Gangwon-do from 1840 to 1910. After late Chosun, each of the villages formed Dongjung in order to cope with taxation, enhance welfare, and carry out community projects and operated it with autonomous organizations like Donggye. The phenomena appeared diversely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members in the villages and environment of their occupations. Guam-dong was a village of half farming and half fishing, and there existed several Gye associated with the operation of Dongjung. Among them, we would have to pay attention to Nobangye which formed the upper layer of Donggye. In Guam-dong, villagers not joining in Donggye were called as Hanmin, and their social and economic status was relatively lower within the village. Any of them joining in Donggye and willing to do Dongjung's hard work as Yusa came to be qualified as a member of Noban. 'Dongsu', 'Jonwi', and 'Jwasang' were the very spots that comprised Nobangye. Through Donggye, they influenced the operation of Dongjung in general and also operated several interests exclusively. Particularly, while expanding the finances of Dongjung with Gwakambangmaegwon, seaweed collecting, or anchovy fishing, they could gain profits, too, financially. Also, Nobangye did have great influence over the administration of taxes imposed in the unit of a village according to the practice of Gongdongnap. Meanwhile, Dongjung requested tax reduction or adjustment to the government agency externally as a way to settle down the villagers' common interests and also sought coexistence through mutual cooperation among neighboring villages, government agencies, Buddhist temples, or individ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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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말~20세기 초 황해도 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양상

저자 : 박성준 ( Park¸ Sung-j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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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황해도는 땅은 넓으나 척박하고 인구는 적은 지역으로 평가되었으나 세조대부터 한광지를 개간한 것을 시작으로 해택지와 하천 연안 지역까지 활발하게 개간하면서 곡창지대이자 서울의 곡물 공급지로 변화되었다.
황해도 지역이 개간되는 과정에서 궁방전도 다수 설치되었는데, 궁방전과 導掌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황해도 지역이 이러한 특징을 갖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인접해 장토를 관리하기에 편리하면서, 곡물 생산량이 풍부한 곡창지대여서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고, 바다와 하천을 이용해서 곡물을 서울로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황해도 지역의 궁방전에 차정된 도장은 발생유형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궁방전을 관리·경영한 운영 주체이자, 궁방전의 지대를 거의 독점한 실질적인 소유자였다. 도장의 거주지는 대부분 서울이었고, 현지에 감관·마름을 두고 장토를 경영했다. 징수한 지대는 현지에서 매각하거나 서울이나 鎭南浦로 수송해서 매각하기도 했다.
황해도 지역의 궁방전에서 도장은 답을 농업경영의 중심으로 삼고서 답은 타조, 전은 도조 경영을 선호했다. 타조답의 결세는 도장이 부담했고, 타조·도조답의 종자는 작인이 부담했다. 도장은 타조답의 결세만 담당하고 종자를 작인에게 부담시키며 지주경영을 강화해 갔다.
황해도와 삼남 지역의 답 지대량을 비교해 보면 구간별 분포에서는 삼남 지역이 약간 높았지만 간격의 폭은 크지 않았고, 환산된 지대량의 평균은 황해도 지역이 더 높았다. 전 지대량은 황해도 지역이 삼남 지역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
황해도 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양상과 지대량이 삼남 지역과 비슷한 수준이었듯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의 농업은 삼남 지역과 아울러 전국적으로 큰 차이 없이 전반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If the residential area of Dohjang managing the Royal Household lands at Hwanghae-do region is checked, the absentee landlord won the overwhelming majority as the Dohjang residing at the different place from the location of Royal Household lands is 7 persons, the Dohjang residing in the same place is 1 person. And the place where the Dohjang being the absentee landlord resided was Seoul all. It seemed that those who resided in Seoul preferred the landowner management of Royal Household lands at Hwanghae-do region owing to the geographical proximity between Hwanghae-do and Seoul.
Even though there are 6 places of system paying the half of crop and 3 places of system paying the determined amount in the management method of rice paddy, in fact the system paying the half of crop formed the center since the specific gravity in 3 places of system paying the determined amount was less than 10% in the whole farmland. The Dohjang of Royal Household lands at Hwanghae-do region was the absentee landlord residing in Seoul and preferred the system paying the half of crop. The rice paddy preferred the system paying the half of crop, but the field has been managed all as the system paying the determined amount.
The Dohjang bore taxes and the tenant farmers paid seeds in the farmland managed as the system paying the half of crop. The Dohjang supervised the situation of harvest by going down directly or letting another person go down to the field if it becomes the harvest time by placing the supervisor of a tenant farm in the field. The aspect of this landlord management of Royal Household lands at Hwanghae-do region was the identical image with the general private landowner.
Based on the amount of ground rent per the amount of seed of Royal Household lands at Hwanghae-do region and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as 21 dues, as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are a little high level as more than 21 dues are 33.3% at Hwanghae-do region,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are 45.5%, the amount of ground rent at Hwanghae-do region,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may be evaluated to be nearly the similar level as more than 31 dues that were not in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occupy 11.1%. Next, if the amount of seed of field is compared, there was 1 place where the amount of ground rent per the amount of seed was 1~2 dues at Hwanghae-do region, 1 place where there was more than 3 dues, 1 place where there was more than 5 dues, there was 1 place where there were 3 places where the amount of ground rent per the amount of seed was 1~2 dues, 1 place where there was more than 5 dues at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Hwanghae-do region may be higher level than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in terms of amount of ground rent of field.
The amount of ground rent at Hwanghae-do region and three southern province regions formed nearly similar level. It can be known that each region formed the similar level as the agricultural productivity of Joseon developed on a national scale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through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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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세기 내·외국인의 울릉도에 잠입 사례와 사유(事由)에 대한 연구

저자 : 신태훈 ( Shin¸ Tae-h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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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오면 울릉도에 대한 인식과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기존의 농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상품이 될 수 있는 작물이나 상품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적은 노동으로 경제적 이익을 낼 수 있는 어염이나 벌목에 쏠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남해안 및 동해안 어민들에게 주목받은 섬이 바로 울릉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과 러시아까지 울릉도에 관심을 두게 된다.
조선 정부는 먼저 울릉도에 잠입한 내국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채취한 물품을 몰수하고 그들을 방조한 수토관들에 대해서는 고신을 뺏는 처벌을 하였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퇴거를 요구하고 이들에 대해 재판을 열어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울릉도에 대한 산림벌목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울릉도에 대한 벌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미셸의 경우는 울릉도 목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세 이후 울릉도에는 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이 혼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더 이상 울릉도를 수토제에서 관리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질적인 영토로써 관리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1900년 관보 41호를 통해 울릉도에 군수를 두는 것으로 정식적으로 조선의 행정구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In the 19th century, the perception and situation of Ulleungdo Island will change a lot when it reaches the 19th century. Koreans who experienced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Jeongmyo Horan, turn to crops or products that can be commodities rather than engaging in existing agriculture. This has led people to focus on fishing or logging, which can make economic profits with less labor.
In this situation, Ulleungdo Island was the island that attracted attention from fishermen on the southern and eastern coasts. This situation was not only for Koreans but also for Japanese fishermen.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even Britain and Russia were interested in Ulleungdo Island.
The Joseon government first confiscated their collections for Koreans who infiltrated Ulleungdo Island, and instead punished the flood control officers who did not stop them and assisted them by stealing the body. As for foreigners, Japanese were asked to evict Japanese who lived illegally, and they were urged to hold a trial and punish them.
Britain and Russia received forest logging rights for Ulleungdo Island from the Joseon government and began logging for Ulleungdo Island. However, in the case of Michelle in the UK, it became a problem by smuggling Ulleungdo timber to Japan.
As such, many Koreans and foreigners are mixed in Ulleungdo Island after the age of 19.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government no longer managed Ulleungdo Island in the Sutoje system, but moved people to manage it as a substantial territory, and as a result, in 1900, it was officially included in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Joseon by having a county governor on Ulleungdo Island through Gazette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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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해방 후 북한 지역 지방인민위원회의 재편 : 면·리 단위를 중심으로

저자 : 권오수 ( Kwon¸ Oh-s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3-29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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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47년 북한 지역에서 시행된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중심으로 북한 정권 수립기 면·리 인민위원회의 재편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규명한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 형태의 지방정권기구가 창출되었다. 그러나 면·리 단위는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 정권기구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북한지역 정치주도세력은 선거를 통해 면 인민위원회를 재편하고 리 지역까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북한 지역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는 1947년 2월과 3월에 시행되었다. 선거 후 북한지역에서는 지방인민위원회가 말단 행정 단위까지 완전히 조직·재편되어 통일적인 정권기구가 구축되었다. 선거를 통해 새롭게 선출된 인민위원의 정당별 구성은 각 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북로당의 비율이 높았다. 또한 면·리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농민을 중심으로 인민위원이 구성됨에 따라 '인민정권'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This article is to analyze the process and result of the People's Committee Election of 1947 in North Korea, and to catch the organizing process and characteristics of the local People's Committee at the period of State Building in North Korea. The North Korean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rganized the election committee to hold the township and village elections, set the electoral districts, and made the voter's lists. The Election Committee was formed through towns. And electoral districts made under the Japanese rule changed into administrative districts of village, and was under direct control of City People's Committee. In principle, candidates were needed the recommendation of the General Election Committee, but, in the case of village elections, they was recommended by the North Korean Worker's Party, and in the case of town elections, the North Korean Democratic National United Front generally recommended them in consideration of the local circumstances. Classifying the elected People Committee member according to parties, the North Korean Worker's Party winners, despite regional differences, were the most among the elected winners. Therefore, it suggests that the political influence of the North Korean Worker's Party was the most crucial, even though candidates was recommended in view of the local real circumstances. And Grouping them by social class, the majority were the peasant. In North Korea, considering that much of population was the peasant, the radical class-oriented changes within the apparatus of government had taken place. Regarding of the entry of the peasant into the political machinery, they ha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building of the 'People's Government', which are now argued by Nor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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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제강점 전후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타다시의 강원도 문화재 조사와 식민성 - 1912년 원주 지역 고적 조사 활동을 중심으로 -

저자 : 왕현종 ( Wang¸ Hyeon-jong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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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 전후 도쿄제국대학 공과대 건축·고고·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강원도 문화재 조사, 특히 원주지역 고적조사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는 1902년부터 조선의 문화재와 고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여 1909년 이후 1915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수개월에 걸쳐 각종 문화재의 상태와 등급을 매겨 보존의 가치를 매겼다.
특히 1912년 가을에는 강원도 지역 고적조사에 나섰는데, 춘천, 강릉, 오대산, 원주 일대 문화재를 조사하였다. 특히 원주 지역의 조사에 대해 원주는 신라 말기철불, 석물, 석탑 등 귀중한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으며 경주 불교유적지에 버금간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흥법사지, 거돈자시, 법천사지 등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사찰과 석탑, 부도탑, 비문 등에 주목했다.
그런데 강원도 일대 문화재의 조사기록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 종합박물관에 세키노 타다시의 '필드카드'로 남아있다. 그중에서 원주 문화재 36개 유물에 대한 47장의 필드카드에서는 문화재 발견 경위, 보존상태, 등급과 가치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필드카드는 당시 문화재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물 사진촬영과 조사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노트였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이후 「조선고적조사표(朝鮮古蹟調査表)」, 「고적조사약보고서(古蹟調査略報告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원주 지역의 문화재는 흥법사지 진공대사비 발견 사실이나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의 반출과 같이 원 소재지에서 무단 이전되었으며, 1915년 조선공진회의 전시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문과 문화발달을 중시하는 학자인 안확, 정인보 등은 세키노의 조선고적조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반면, 최남선과 같은 이들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912년 강원도, 원주 지역에 대한 세키노 타다시의 조선 문화재 조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체계적인 조사활동을 통하여 조선 각지의 문화재의 보존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을 유발하고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정당화를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일제의 식민지성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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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석탄에서 문화로 - 문화적 탈산업화 전략으로서 루르 산업 유산 -

저자 : 정용숙 ( Jung¸ Yong-s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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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산업 유산 재활용 도시재생의 국제적 성공 모델로 주목받는 독일 서부의 옛 중공업 중심지 루르 지역을 다루며 특히 1960년대 이후 전개된 탈산업화의 문화적 전략으로서 폐산업시설이 산업 유산이 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20세기 후반 동력원의 구조적 전환과 산업의 국제 분업으로 인한 서독의 석탄과 철강 공업의 몰락에 대해 루르 지역은 오염된 공업 지역으로부터 탈산업 자연을 갖춘 첨단 지식과 문화지역으로의 이행을 표방하는 장기적 '구조조정'으로 대응하였고 그 문화적 전략으로 '산업문화' 실천을 수행하였다. 이 글은 이를 가능케 한 사회적 토대와 정치적 맥락으로 사민주의 정치문화에 주목하고 그 결과물인 루르 지역 산업 유산의 특징을 논한다. 이를 위해 우선 그 역사적 조건으로서 산업화 시기 루르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형성 과정을 통해 지역 정체성의 구성성을 논한다. 둘째, 1950년대 말부터 반세기 이상 진행된 루르 지역 탈산업화의 특성을 사민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정치기획으로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물인 산업문화의 과거 재현에서 드러나는 기억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탈산업사회의 과제인 사회적 양극화와 관련한 역사적 문화적 공간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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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세기 전반기의 경제상황과 어촌 심언광의 절검론

저자 : 朴道植 ( Park , Doh-Sik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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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개창 이후 반세기 정도가 지나면서 나타나고 있던 국내상업에서의 변동은 조선의 각 경제 주체들의 경제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중앙의 고위관료들은 상업에 참여하여 재산 증식[殖貨]을 추구하였고, 직접 생산자인 일부 수공업자와 농민들은 상업에 종사[逐末]하기도 하였다. 중앙의 고위관료들의 상업참여를 통한 식화 행태는 필연적으로 이들과 부상대고 등 자산층 일반의 사치풍조로 이어졌다. 권세가와 부상대고는 이에 편승하여 당물을 수입하였다.
조선전기 국가의 모든 경비는 공안과 횡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었다. 공안은 태조 원년(1392) 10월 고려조의 세입의 다과와 세출의 경비를 헤아려 제정됨에 따라 국가재정의 수입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횡간은 건국한 지 70여 년이 경과한 세조대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다. 그 후 성종대에 이르러 개정작업이 착수되어 동왕 4년(1473) 9월에는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이, 다음 해에는 식례횡간(式例橫看)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때 제정된 횡간은 국가경비를 지나치게 절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운용에서도 많은 곤란을 가져왔다. 이에 성종은 신정횡간과 조응하여 공안을 개정하게 했는데, 이때의 공안 역시 이전에 비해 크게 삭감됨에 따라 제읍(諸邑)에서 매년 바치는 공물로는 경비의 태반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경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누차에 걸쳐 공안증액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끝내 개정되지 않았다. 그 후 공안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대두하게 되어 수차례에 걸쳐 논의된 결과 연산군 7년(1501) 7월에 마침내 공안개정을 보게 되었다. 이때 제정된 공안이 이른바 신유공안이다. 그러나 공안개정을 통해 국가재정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었는데도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인해 “상공(常貢) 외에 가정(加定)·인납(引納)이 없는 해가 없다”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중종대에도 대내의 비용이 번다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내수사 직계에 의한 재정확충과 인납(引納)·무납(貿納)과 같은 전대의 폐습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심언광은 중종이 즉위한 처음에는 병폐의 근원을 알고 지난날의 폐단을 고쳤으나, 수년 이래 궐내에서 쓰는 것이 번다하여 지난날보다 10배나 되어 불시에 명령이 내리고 명분도 없이 사용하는 용도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사(有司)들이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더러는 저자에서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기도 하고 더러는 민간의 공물을 앞당겨서 받아들이는 거의 일상화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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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기 강원도지역 공납제 운영

저자 : 전상욱 ( Jeon¸ Sang-w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9-13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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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과 함께 제정된 공납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운영상의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이는 크게 공납물 분정의 불균형과 방납 확대로 인한 공납물 부담의 증가로 요약된다. 본 논문은 이 같은 16세기 공납제 운영 양상을 강원도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각도의 공납제 운영상의 특징과 조선후기 삼남 이외 지역에서 이루어진 공납제 개혁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우선 강원도지역의 공납물 분정의 불균형을 살펴보았다. 16세기 공납물 분정의 중요한 기준이 전결수였다. 그러나 강원도지역의 전결수는 타도에 비해 턱 없이 낮은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납물 부담이 과중한 상황이었다. 이는 전결수를 고려한 공납물 분정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시행된 계묘양전 당시 강원도지역의 전결수를 실상에 비해 높게 책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결수가 높게 책정되면서, 갑진공안 상의 강원도지역 공납물 부담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강원도지역 내에서도 발생하였다. 계묘양전 당시 전결수가 높게 책정된 영동지역은 영서지역에 비해 공납물 부담이 무거운 상황이었다. 즉, 강원도지역은 어느 군현에 속하는가에 따라 공납물 부담이 차이가 있었고, 그 부담은 타도에 비해 무거웠다.
다음으로 방납 확대로 인한 공납물 부담 증가를 살펴보았다. 16세기 공납물의 전결세화가 확대되었지만, 중앙정부는 여전히 현물재정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로 인해 방납이 활성화되었고, 강원도지역 역시 16세기 공납물의 방납은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간행된 갑진공안 상에 책정된 공납물만으로 국가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별복정 등 변칙적인 재정운영이 발생하였다. 민은 급박하게 납부해야할 공납물을 방납주인에게 구매하여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방납주인이 공납물 납부과정을 장악하면서 防納價를 높게 책정하였다. 이로 인해 민의 부담은 커지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 강원도지역 공납제 운영 양상은 17세기 초반 강원도 대동법이 시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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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척향교의 제례(祭禮) 석물(石物)에 관한 연구 - 성생단(省牲壇)과 망료석함(望燎石函)을 중심으로 -

저자 : 홍성익 ( Hong¸ Sung-i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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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지방에 설치한 관학이다. 향교 건립은 조선시대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유교이념으로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강원도에는 15개의 향교가 있으며 춘천과 강릉만이 고려시대에 건립되고 이외의 향교 건립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척향교의 건립년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조선초기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삼척향교의 대표적 제례석물은 성생단과 망료석함이다. 성생단이란 犧牲禮에 사용될 犧牲物의 건강과 肥肉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壇으로 민예풍의 거북이 형태로 제작되었다. 제례에 사용한 祭文은 제례가 종료되면 태우는 데 제문을 태우기 위한 석물을 망료석함이라 부른다. 망료석함은 石函과 蓋石 2점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붕이 우진각인 가옥의 형태로 제작되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고 1656년에 제작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시대적 기준작으로서 볼 수 있다. 성생단은 동재와 서재 사이에 있고 망료석함은 대성전 서쪽에 위치한다. 이외에도 망료석함과 동시에 건립되는 하마비가 있으며 원형으로 추정되는 관수대가 있다.
이와 같이 제례석물을 온전히 갖춘 향교는 강원도 내에서 삼척향교가 유일한 사례이다. 앞으로 이 석물이 향교에서 행해지는 제례에서 실제 설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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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40~1910년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구암동(狗巖洞)의 '洞中' 운영과 계(契)

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7-19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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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40∼1910년 江原道 平海郡 狗巖洞 '洞中'의 운영 양상을 규명한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각 촌락은 부세 대응, 복리 증진, 공동체 사업 수행을 위해 동중을 형성하였으며, 洞契를 비롯한 자치 조직을 통해 그것을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촌락 구성원의 성격과 생업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구암동은 반농반어의 촌락으로서 동중 운영과 관련된 여러 계 조직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동계 상층부를 구성하는 老班契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암동에서는 동계에 참여하지 않는 촌락민을 閒民으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촌락 내에서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한민은 동계에 참여하고 有司로서 동중의 궂은일을 잘 수행하면 노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다. '洞首', '尊位', '座上'이 바로 노반계를 구성하는 자리이다. 이들은 동계를 통해 동중 운영 전반에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권을 독점적으로 운영하였다. 특히 藿巖放賣權과 미역 채취, 멸치 조업을 바탕으로 동중 재정을 확충함과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공동납 관행에 따라 동리 단위로 부과되는 부세 행정에도 노반계는 큰 영향력을 발휘 하였다. 한편, 동중은 대외적으로 관부에 부세 감면과 조정을 청원함으로써 촌락민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나갔으며, 인근 촌락 및 관부·사찰·개인과의 상호 부조를 통한 공존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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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말~20세기 초 황해도 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양상

저자 : 박성준 ( Park¸ Sung-j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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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황해도는 땅은 넓으나 척박하고 인구는 적은 지역으로 평가되었으나 세조대부터 한광지를 개간한 것을 시작으로 해택지와 하천 연안 지역까지 활발하게 개간하면서 곡창지대이자 서울의 곡물 공급지로 변화되었다.
황해도 지역이 개간되는 과정에서 궁방전도 다수 설치되었는데, 궁방전과 導掌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황해도 지역이 이러한 특징을 갖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인접해 장토를 관리하기에 편리하면서, 곡물 생산량이 풍부한 곡창지대여서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고, 바다와 하천을 이용해서 곡물을 서울로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황해도 지역의 궁방전에 차정된 도장은 발생유형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궁방전을 관리·경영한 운영 주체이자, 궁방전의 지대를 거의 독점한 실질적인 소유자였다. 도장의 거주지는 대부분 서울이었고, 현지에 감관·마름을 두고 장토를 경영했다. 징수한 지대는 현지에서 매각하거나 서울이나 鎭南浦로 수송해서 매각하기도 했다.
황해도 지역의 궁방전에서 도장은 답을 농업경영의 중심으로 삼고서 답은 타조, 전은 도조 경영을 선호했다. 타조답의 결세는 도장이 부담했고, 타조·도조답의 종자는 작인이 부담했다. 도장은 타조답의 결세만 담당하고 종자를 작인에게 부담시키며 지주경영을 강화해 갔다.
황해도와 삼남 지역의 답 지대량을 비교해 보면 구간별 분포에서는 삼남 지역이 약간 높았지만 간격의 폭은 크지 않았고, 환산된 지대량의 평균은 황해도 지역이 더 높았다. 전 지대량은 황해도 지역이 삼남 지역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
황해도 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양상과 지대량이 삼남 지역과 비슷한 수준이었듯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의 농업은 삼남 지역과 아울러 전국적으로 큰 차이 없이 전반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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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세기 내·외국인의 울릉도에 잠입 사례와 사유(事由)에 대한 연구

저자 : 신태훈 ( Shin¸ Tae-h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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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오면 울릉도에 대한 인식과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기존의 농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상품이 될 수 있는 작물이나 상품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적은 노동으로 경제적 이익을 낼 수 있는 어염이나 벌목에 쏠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남해안 및 동해안 어민들에게 주목받은 섬이 바로 울릉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과 러시아까지 울릉도에 관심을 두게 된다.
조선 정부는 먼저 울릉도에 잠입한 내국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채취한 물품을 몰수하고 그들을 방조한 수토관들에 대해서는 고신을 뺏는 처벌을 하였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퇴거를 요구하고 이들에 대해 재판을 열어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울릉도에 대한 산림벌목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울릉도에 대한 벌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미셸의 경우는 울릉도 목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세 이후 울릉도에는 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이 혼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더 이상 울릉도를 수토제에서 관리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질적인 영토로써 관리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1900년 관보 41호를 통해 울릉도에 군수를 두는 것으로 정식적으로 조선의 행정구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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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해방 후 북한 지역 지방인민위원회의 재편 : 면·리 단위를 중심으로

저자 : 권오수 ( Kwon¸ Oh-s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3-29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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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47년 북한 지역에서 시행된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중심으로 북한 정권 수립기 면·리 인민위원회의 재편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규명한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 형태의 지방정권기구가 창출되었다. 그러나 면·리 단위는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 정권기구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북한지역 정치주도세력은 선거를 통해 면 인민위원회를 재편하고 리 지역까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북한 지역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는 1947년 2월과 3월에 시행되었다. 선거 후 북한지역에서는 지방인민위원회가 말단 행정 단위까지 완전히 조직·재편되어 통일적인 정권기구가 구축되었다. 선거를 통해 새롭게 선출된 인민위원의 정당별 구성은 각 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북로당의 비율이 높았다. 또한 면·리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농민을 중심으로 인민위원이 구성됨에 따라 '인민정권'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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