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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사학회> 강원사학> 1840~1910년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구암동(狗巖洞)의 ‘洞中’ 운영과 계(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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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1910년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구암동(狗巖洞)의 ‘洞中’ 운영과 계(契)

The Operation of ‘Dongjung(洞中)’ and Gye(契)in Guam-dong(狗巖洞) of Pyeonghae-gun(平海郡) in Gangwon-do(江原道) from 1840 to 1910

이광우 ( Yi¸ Gwang-woo )
  • : 강원사학회
  • : 강원사학 3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5월
  • : 157-198(42pages)
강원사학

DOI

10.31097/KHR.2022.38.06


목차

Ⅰ. 머리말
Ⅱ. 동중 구조와 계
Ⅲ. 동중 재정 운영과 촌락의 권력 구조
Ⅳ. 洞中의 부세 대응과 대외 부조 활동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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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40∼1910년 江原道 平海郡 狗巖洞 ‘洞中’의 운영 양상을 규명한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각 촌락은 부세 대응, 복리 증진, 공동체 사업 수행을 위해 동중을 형성하였으며, 洞契를 비롯한 자치 조직을 통해 그것을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촌락 구성원의 성격과 생업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구암동은 반농반어의 촌락으로서 동중 운영과 관련된 여러 계 조직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동계 상층부를 구성하는 老班契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암동에서는 동계에 참여하지 않는 촌락민을 閒民으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촌락 내에서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한민은 동계에 참여하고 有司로서 동중의 궂은일을 잘 수행하면 노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다. ‘洞首’, ‘尊位’, ‘座上’이 바로 노반계를 구성하는 자리이다. 이들은 동계를 통해 동중 운영 전반에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권을 독점적으로 운영하였다. 특히 藿巖放賣權과 미역 채취, 멸치 조업을 바탕으로 동중 재정을 확충함과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공동납 관행에 따라 동리 단위로 부과되는 부세 행정에도 노반계는 큰 영향력을 발휘 하였다. 한편, 동중은 대외적으로 관부에 부세 감면과 조정을 청원함으로써 촌락민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나갔으며, 인근 촌락 및 관부·사찰·개인과의 상호 부조를 통한 공존을 모색하였다.
This study examines the aspects of operating ‘Dongjung’ in Guam-dong of Pyeonghae-gun in Gangwon-do from 1840 to 1910. After late Chosun, each of the villages formed Dongjung in order to cope with taxation, enhance welfare, and carry out community projects and operated it with autonomous organizations like Donggye. The phenomena appeared diversely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members in the villages and environment of their occupations. Guam-dong was a village of half farming and half fishing, and there existed several Gye associated with the operation of Dongjung. Among them, we would have to pay attention to Nobangye which formed the upper layer of Donggye. In Guam-dong, villagers not joining in Donggye were called as Hanmin, and their social and economic status was relatively lower within the village. Any of them joining in Donggye and willing to do Dongjung’s hard work as Yusa came to be qualified as a member of Noban. ‘Dongsu’, ‘Jonwi’, and ‘Jwasang’ were the very spots that comprised Nobangye. Through Donggye, they influenced the operation of Dongjung in general and also operated several interests exclusively. Particularly, while expanding the finances of Dongjung with Gwakambangmaegwon, seaweed collecting, or anchovy fishing, they could gain profits, too, financially. Also, Nobangye did have great influence over the administration of taxes imposed in the unit of a village according to the practice of Gongdongnap. Meanwhile, Dongjung requested tax reduction or adjustment to the government agency externally as a way to settle down the villagers’ common interests and also sought coexistence through mutual cooperation among neighboring villages, government agencies, Buddhist temples, or individ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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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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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반년간
  • : 1226-3060
  • : 2713-841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5-2022
  • :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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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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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춘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의 전시 분석과 개선 방향

저자 : 김도민 ( Kim Do-m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5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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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연구자가 2022년 4월부터 5월까지 세 차례 춘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이 기념관의 전시 내용을 분석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먼저 기념관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전시되고 있는지 분석했다. 특히 에티오피아의 참전기간과 사망자 숫자에 문제가 있음을 밝혔다. 다음으로 이 기념관에서 냉전기 '에티오피아와 한국의 관계사'의 복원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기념관은 이분법적이고 적대적인 냉전적·반공적인 서사에 따라 전시가 구성됐다. 따라서 냉전기 어느 한편에 서지 않았던 비동맹주의를 주도했던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였던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나아가 냉전기 내내 존재했던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생략됐다. 이로써 참전기념관은 한국사회의 오래된 반공주의적 내러티브를 반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방문객들에게 이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냉전기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관계는 글로벌한 차원에서 반공주의와 비동맹주의가 충돌하던 장소였다. 따라서 이 참전기념관은 냉전기 에티오피아와 한국의 관계사를 제시하고, 이를 포함하여 전시관을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처럼 본고가 제시한 전시 분석과 개선 방향이 반영되어, 춘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이 '전쟁과 평화' 관련한 공공역사의 교육현장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한다.


Based on the researcher's experience of visiting the 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in Chuncheon three times from April to May 2022, this paper analyzes the contents of the exhibition and suggests directions for improvement. First, this paper analyzed whether the memorial is being exhibited based on historical facts. In particular, it revealed that there were errors in the length of time Ethiopia participated in the war and the number of deaths. Next, the history of the Cold War relationship between Ethiopia and Korea, which was omitted by the 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was presented, and the need for reorganization of the exhibition hall was emphasized. It is expected that the Chuncheon Ethiopia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Hall will be reborn as an educational site for public history related to 'war and peace' by reflecting the wartime analysis and improvement directions suggested in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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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세대학교 원주박물관의 인문도시 사업 운영과 지역 협력

저자 : 이상순 ( Lee Sang-s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4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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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목받고 있는 공공역사(public history)는 역사서술과 재현이 이루어지는 사회 영역에 대한 논의이다. 대학, 학계의 전문 학술 성과 (academic history)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대학, 연구소, 학회 등 전문 학술연구 영역과 그 외부에서 일어나는 역사 지식의 공적 활용에 관한 형식 총체를 말한다. 그 가운데 대학박물관은 전문적 역사학 연구의 영역과 더 넓은 공공 영역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전문적 학술연구의 성과가 외부로 확산되기에 용이한 내용적, 공간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인문도시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학 지원 사업의 하나로서 2010년대 인문학 대중화 사업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는 국책 지원 사업이다. 인문도시 사업은 대학의 인문 학술 역량을 사회에 확산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세대학교 원주박물관은 2015년 강원도 원주시를 무대로 하여 인문도시 사업에 선정되었고 2018년까지 총 3년간 사업을 수행하였다.
3년의 기간 동안 원주시에 소재한 문화, 사회 단체와의 폭넓은 교류를 바탕으로 매년 100강좌 가량의 인문강좌를 시행하였고 연구재단이 지정한 인문주간 행사를 비롯하여 시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축제와 전시회 등 문화행사를 수차례 개최하였다. 3년간 직, 간접적으로 본 사업에 참여한 사회, 문화단체는 26개 단체에 이르렀다.
공공역사의 주체가 대학, 학술연구공간을 넘어선 다양성과 개방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대학박물관으로서 주관한 인문도시사업은 사업주체가 대학이라는 점에서 공공역사 담론 생성 이전의 전통적인 공적 역사서술재현형식의 형식과 유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인문도시 원주' 사업은 '공공역사' 담론의 실천적 의미로서 그에 부합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서술재현의 형식으로 볼 때 권위적인 대학이 사회를 일방적으로 계몽하는 방식을 넘어서 지역의 역사 주체들과 호흡하며 함께 고민하고 나누었던 '역사하기' 형식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공공역사'가 가진 '공공', '공중', '공유'를 바탕으로 한 '생산'의 개념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ublic history, which has recently been attracting attention, is a discussion about the social domain in which historical descriptions and representations take place. As a concept that contrasts with academic history of universities and academia, it refers to the totality of formalities related to the public use of historical knowledge that occurs outside of professional academic research areas such as universities, research institutes, and academic societies. Among them, university museums have content and spatial excellence that facilitates the spread of professional academic research results as a contact point between the realm of professional historical research and the wider public realm.
The Humanities City project is one of the humanities support projects of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and it is a national support project that is leading the flow of humanities popularization projects in the 2010s. The Humanities City project aims to spread the university's humanities and academic capabilities to society. Yonsei University Wonju Museum was selected for the Humanities City project in Wonju-si, Gangwon-do in 2015, and carried out the project for a total of three years until 2018.
For three years, based on wide exchanges with cultural and social groups located in Wonju-si, about 100 humanities lectures were held every year. Several cultural events were held. The number of social and cultural organizations that directly or indirectly participated in this project for three years reached 26.
Considering the subject of public history as a being with diversity and openness beyond universities and academic research spaces, the Humanities City Project hosted by the Wonju Museum of Yonsei University is a traditional public historical narrative prior to the creation of public history discourse in that the subject of the project is a university. Formally, it was similar to the method of representation, but it showed a different aspect in content.
The 'Humanities City Wonju' project had elements that correspond to the practical meaning of the 'public history' discourse. In terms of the form of reproducing historical narratives, the format of 'doing history', which was shared with local historical subjects, was applied beyond the method of unilaterally enlightening society by an authoritative university. Therefore, it can be seen that it fits the concept of 'production' based on 'public', 'public', and 'sharing' of 'public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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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국 항미원조 영화에 나타난 내셔널리즘의 재현 양상과 한계 - 영화 <장진호> 시리즈의 '설욕 내셔널리즘'과 <저격수>의 '가국감정'을 중심으로 -

저자 : 한담 ( Han Dam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7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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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의 참전 70주년인 2020년을 항미원조 집단기억의 새로운 전환기로 보는데서 출발한다. 격화되는 중미 갈등 속에서 항미원조는 '반미를 핵심으로 하는 저항적 내셔널리즘'을 고취하는 집단기억으로 재소환되었다. 애국과 혁명 중 혁명만을 걷어낸 항미원조의 문화적 재현은 한국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악화된 한국사회의 반중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항미원조 집단기억의 새로운 전환 양상을 살펴보는 한편,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한중관계의 회고와 전망에 대한 고민이 집중되는 지금, 양국의 우호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중국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에 내재된 감정구조를 이해하는데도 참고가 될 수 있다.
본고는 참전 70주년 이후 제작된 항미원조 문화콘텐츠의 전반적인 특징을 살펴보고,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장진호(長津湖)> 시리즈와 <저격수(狙擊手)>를 통해 항미원조 집단기억을 통한 내셔널리즘을 추동하는 두 가지 방식과 한계를 고찰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두 거장 천카이거(陳凱歌)와 장이머우(張藝謀)는 각각 영화 <장진호> 시리즈와 <저격수>를 통해 항미원조를 모두 '중미전쟁', '승리의 애국전쟁'으로 그려내면서도, 내셔널리즘 재현에 있어서는 '100년의 굴욕과 신중국 수립 이후의 설욕' 그리고 '가국감정(家國情緒)'을 자극하는 것으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두 방식 모두 주변국을 적대시하는 대항적 민족주의와 국가를 위한 개인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조하는 한계가 노출되며, 이는 혁명 이데올로기가 빠졌을 뿐 냉전시기와 다름없이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정치적 메시지를 추출하여 대중동원에 활용하고 있다는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제는 달라진 국가적 위상에 맞게, 상대방을 증오하고 '승리'만을 강조하는 대신, 참전한 모든 국가 병사들의 희생과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보편적 인류애와 평화의 서사로 나아가야만 한다.


This paper starts from viewing 2020 as a new turning point in collective memory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the 70th anniversary of China's participation in the war. Amid the Sino-American conflict, this war memory was recalled as a collective memory promoting 'resistance nationalism centered on anti-American sentiment'
First, this paper analyzed the overall characteristics of “The War to Resist US Aggression and Aid Korea” cultural contents produced after the 70th anniversary of the war. After that, this paper analyzed two methods and limitations of driving nationalism through collective memory of this war through the movies < The Battle at Lake Changjin > series and < Sniper >. Two Chinese masters, Chen Kaiger(陳凱歌) and Zhang Yimou(張藝謀), portrayed this war as a "China-American War" and a "patriotic war of victory" through the movies < The Battle at Lake Changjin > series and < Sniper >. However, in terms of the representation of nationalism, there was a difference in stimulating "100 years of humiliation and revenge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Patriotism". But both ways have limitations in emphasizing counter-nationalism, which antagonizes neighboring countries, and the unconditional sacrifice of individuals for the country. This narrative style is hard to escape international criticism that the revolutionary ideology of the Cold War era was omitted, and that political messages were extracted according to the needs of the country and used for mass mobilization.
More than 70 years later, the Korean War has yet to emerge as a public stage in East Asia. Now, in line with China's high national status, instead of hating the other side and emphasizing only "victory," it must move toward a universal narrative of humanity and peace that can embrace the sacrifice and pain of all the soldiers of the country who particip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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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동해·삼척지역 신라 횡혈계 묘제의 등장과 의미

저자 : 김건우 ( Kim Kun-w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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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동해·삼척지역에서 조사된 횡혈계 묘제를 분석하고, 횡혈계 묘제의 등장과 그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횡혈계 묘제는 내부구조의 속성 조합을 통해 8개의 형식으로 분류 할 수 있다. 각 형식은 변화양상을 토대로 4단계로 설정할 수 있으며, 출토된 토기류(고배, 개, 부가구연대부장경호)로 보아 중심연대는 6세기 초엽에서 7세기 말엽으로 편년된다. 동해·삼척지역은 原三國時代에서 三國時代로 이어지는 묘제가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2세기 전엽부터 5세기 전엽까지 존속한 취락유적과의 관계를 통해 횡혈계 묘제의 등장을 추론할 수 있다. 취락유적은 기존의 연구에서 '悉直國'의 문화로 파악하고 있고,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간접지배의 형태로 신라와 관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간접지배 관계에서 점진적인 변화 양상이 수반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등장한 횡혈계 묘제는 신라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신흥 집단의 출현을 나타낸다. 가장 이른 시기에 조영된 동해 구호동고분군과 추암동고분군은 신라의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의 전환을 나타내며, 동해·삼척 지역은 이를 위한 전초기지로 볼 수 있다. 아울러 505년(지증왕 6) 직접지배의 산물인 悉直州의 설치와 軍主의 파견은 동해·삼척지역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가지는 고분군이 확인되지 않는 까닭으로 볼 수 있다.


In this article analyzed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in the Donghae and Samcheok Area and looked into the appearance and meaing of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can be classified into 8 types through the combination of attribute of the internal structure. Each type can be set in 4 stages based on the change aspect, and the central era is from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to the end of the 7th century based on the earthenware excavated(mounted dishes, half-spherical lids, the long-necked jars with stand). In the Donghae and Samcheok area, there are not has been confirmed yet to be connected burial system from the Proto-Three Kingdoms Period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However, it is possible to infer the emergence of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through the relationship with the settlements that continued from the early 2nd century to the early 5th century. The settlements have been identified as the culture of 'Siljik-guk(悉直國)' in previous studies, and if you look at the Samguksagi(三國史記), it is highly likely that they had a relationship with Silla in the form of indirect rule. The Corridor Entrance Type Burial System, which sudden appeared without any gradual change in the indirect control relationship, is represents the emergence of a new group closely related to Silla. The Guho-dong and the Chuam-dong tomb clusters in Donghae, built at the earliest period, represent the transition from indirect control to direct control of Silla, and Donghae Area can be seen as outposts for this. In addition in 505(year 6 of Jijeung maripgan) as a result of direct rule the installation of Siljik-ju(悉直州) and the dispatch of ruler can be attributed to the reason that the tomb clusters with an overwhelming position of the Donghae and Samcheok area are not ident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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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원지역의 고분 분포 현황과 정비·활용방안

저자 : 김규운 ( Kim Gyu-u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1-133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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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지역 고분의 현황과 활용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현재 강원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고분의 수는 약 이외의 타지역에 비해서도 적지 않은 숫자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특히 지표조사에 그친 고분군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그 양적인 지표에 비해 질적인 지표인 현황을 살펴보았을 때, 아직까지 미진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분을 활용함에 있어서 내부 구조와 고분이 가지는 성격 및 특성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확인되었다. 또한 지표조사 이후 석실의 내부가 노출된 채 방치된 사례도 확인되어 향후 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전자의 경우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춘천지역에 밀집된 고구려 고분의 특성을 살려 '춘천의 고구려 고분 탐방'이라는 주제로 접근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초보적인 단계의 방안이기는 하나 결국 중요한 것은 점 단위의 복원보다는 면 단위로 고분의 성격과 특징을 살리는 방향으로 복원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고분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여 후대에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복원하는 방향으로의 복원이 필요하며, 단순히 봉분의 형태로 덮기보다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이에 초보적인 단계의 제안을 통해 고분의 구조와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할 것을 제시하였다. 문화유산을 보존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반인들과 함께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Many remains have been excavated in Gangwon Area so far. However, it is difficult to find a general utilization plan because the ruins of the village are identified at a high rate. Nevertheless, a large number of tombs are identified in Gangwon-do, with about 850 tombs excavated. These tombs are remains with excellent visibility and are judged to have great value for use. However, in terms of utilization, it is considered that the qualitative indicators are still insufficient compared to the quantitative indicators of ancient tombs in Gangwon Area. Therefore, it was suggested to improve the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of the tomb in a direction that can be well preserved through a proposal at an a rudimentary stage.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ways to use cultural heritage with the general public, away from recognizing it only as an object of preser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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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세조대 여진 정벌과 홍윤성의 활동

저자 : 한성주 ( Han Seong-j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6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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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460년(세조 6)에 일어난 조선의 여진 정벌인 '경진북정' 전후 홍윤성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진북정'은 모련위의 추장이었던 낭발아한을 조선이 처벌하자, 그의 아들 아비거가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의 변경을 침입한 것에서 기인하였다. 세조는 여진인들의 침입이 격하되자 홍윤성을 조전원수로 삼아 함길도로 파견하였다. 세조는 홍윤성을 파견하면서 그에게 내구마와 금으로 용을 그린 안장, 주홍의 말다래, 홍모영의 장식을 하사하였다. 이는 세조가 자신을 대리해서 홍윤성을 파견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權臣인 홍윤성을 파견함으로써 도망간 여진인들을 안정시켜 돌아오게 하고, 배반한 여진인들을 귀순시켜 두만강 유역에서 조선과 여진과의 싸움이 확전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홍윤성은 세조의 방책에 따라 여진인들을 적극적으로 귀순시켜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의 활동으로 투항·귀순한 자들을 서울로 상경시키기도 하였다. 세조는 아비거가 조선을 침입하다가 죽고, 홍윤성의 여진 초무가 성공을 거두자, 여진 정벌을 일시적으로 중지하였다.
그러던 중 明은 조선의 낭발아한에 대한 처벌을 문제시하고 여러 차례 칙서와 사신을 보내며 조선을 압박하였다. 이때 여진인들은 명의 조선 압박을 이용해 조선에 한편으로는 귀순하고, 한편으로는 침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세조는 明使가 모련위 지역에 머물고 있음에도 신숙주와 홍윤성을 파견하여 여진에 대한 정벌을 실행하였다. 당시 정벌의 총지휘관은 신숙주였고, 부지휘관은 홍윤성이었으며, 이들은 총 8,300명의 군사를 4로군으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종성을 출발하여 여진인들의 거주 지역을 기습 공격하고 4일 만에 귀환하였다.
'경진북정'으로 조선군은 여진인 430여 명을 죽이고, 9백여 채의 집과 재산을 불태웠으며, 죽이거나 사로잡은 우마가 1천여 마리에 이르는 등 이전 3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보다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경진북정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조의 권신인 신숙주와 홍윤성을 각각 정벌의 책임자와 부책임자로 파견하여 장수들에게 정벌의 의지를 강력하게 보이고 실천하였다. 둘째, 이 정벌은 문신들이 지휘관이 된 최초의 여진 정벌로, 이들은 당시 공을 앞세워 성급한 정벌을 주장하던 무신들을 제어하면서 여진 지역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하여 준비하였다. 셋째, 조선의 군사 행동이 단기간에 전 군사가 전방위로 기습 공격하고 철수하였다. 마지막으로 세조가 무인의 자질과 무재를 가진 홍윤성을 파견함으로써 자신을 대리화시키고 신숙주를 보완하게 함으로써 문무 양측면에서 정벌의 성과를 이끌어내었다.


The sudy reviewed activities of Hong Yoon-seong at the time around 'Gyeongjin Bukjeong(庚辰北征, conquest to northern area in the year of Gyeongjin)' which was one against Jurchens occurred in the 6th year of Sejo(1460). 'Gyeongjin Bukjeong(庚辰北征)' was caused by the invasion of Abigeo(阿比車) and other Jurchens to border area of Joseon. His invasion was stimulated by his father's death. Joseon killed his father Nangbalahan(浪孛兒罕) who was the chief of Moryeonwi(毛憐衛). Sejo sent army under command of Hong Yoon-seong, Jojeonwonsoo(助戰元帥) to Hamgildo against their increasing invasion. Sejo gave him Naeguma(內廏馬), saddle with painted dragon in gold, scarlet saddle flap, and decoration of Hongmoyeong(紅毛榮). This means that Sejo sent Hong Yoon-seong instead of him.
Sejo sent Hong Yoon-seong, a powerful courtier to let fled Jurchens return and betrayed Jurchens surrender. This aimed to prevent expansion of war between Joseon and Jurchens in Tumen river basin. Hong Yoon-seong actively made Jurchens surrender and return to home according to plan of Sejo. Some of the Jurchens were sent to the city of Hanyang to live there. Sejo temporarily stopped conquest to Jurchens because Abigeo died during invasion to Joseon and Hong Yoon-seong succeeded placating Jurchens.
Then Ming Dynasty(明) raised issue regarding death of Nangbalahan and pressed Joseon by sending a Royal letter and envoys several times. Jurchens surrendered to Joseon, But on the other hand, they invaded Joseon, using pressure to Joseon from Ming. In the end, Sejo sent Shin Sook-ju to conquer Jurchens though an envoy from Ming stayed in Moryeonwi(毛憐衛). Then times, the commander for the conquest was Shin Sook-ju and the vice-commander was Hong Yoon-seong. There were 8,300 soldiers in total composed of Four direction army. They started in Jongseong, suddenly attacked the area where Jurchens lived. It took only 4 days from the start of the conquest till return.
Joseon army recorded military achievements better than existing three conquests through 'Gyeongjin Bukjeong'. That is, killed 430 Jurchens, burned about 900 houses including property, about 1,000 horses including cow live or dead. The reasons of success of Gyeongjin Bukjeong' are as follows.
First, Sejo's strong willingness to conquer was shown to the generals by appointing Shin Sook-ju and Hong Yoon-seong as commander and vice-commander respectively. Second, The conquest to Jurchens was the first one by a commander with the position of civil minister. The organization of such personnel made it possible to control military ministers who insisted hasty conquest for the purpose of their performance. Therefore, thorough preparation was possible, making deep study on Jurchens area. Third, Soldiers of Joseon made sudden attack with all forces for short period and then, withdrew. Finally, Sejo showed himself though not participating in the conquest, by sending Hong Yoon-seong with quality and skill as military man. And Sejo led performance of conquest in the aspects of literary and military by supplementing Shin Sook-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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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

저자 : 임호민 ( Lim Ho-mi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3-18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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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전기 강릉지방에 입향한 안동권씨 추밀공파 가문이 조선후기까지 명가로 그 지속성을 유지해 온 배경과 과정, 대내외적인 사회적 지위 유지의 지속성, 재도약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입향 초기 안동권씨 추밀공파는 통혼을 통해 가문을 성장시켰고, 이후 권연 등의 출사는 가문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가문의 지역적 기반은 지역 내 명문가와의 통혼 확대와 출사, 그리고 향촌사회의 활약을 통해 지속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통혼과 같은 족적 토대는 유지하였으나 과거 합격자 배출의 단절은 가문의 위상을 정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세기 후반, 정체되었던 명문가가 재도약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권계학과 그의 아들 권한위의 출사, 그리고 그의 아들 권한옥과 손자 권도와 권박의 사마시 입격과 출사였다.
특히 관직에서 퇴임한 후 낙향한 권계학은 족적 기반만 유지하던 가문의 침체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권계학과 권한위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청렴결백한 관료로 인정받았다. 당시 강릉 향촌사회의 향론은 율곡-우암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적 명분론 강조되었던 조선후기 청풍당 가문 종인들은 노론 성향의 기조로 보이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실리적인 측면도 강조하였다.


This paper identifie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Andong Kwon family, who entered Gangneu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aintaining its continuity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the persistence of maintaining internal and external social status,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re-emergence, and the role of the community.
In the early days of entering the village, Andong Kwon's Privy Gongpa grew his family through marriage, and after that, the employment of Kwon Yeon and others served as an opportunity to grow the family to the next level.
Since then, the regional foundation of the family has maintained continuity through the expansion of marriage with prestigious families in the region, employment, and the activities of the local community.
However, although it maintained the same foot foundation as Tong-hon, the disconnection of successful applicants in the past resulted in stagnating the status of the family.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background behind the re-emergence of the stagnant prestigious family was Kwon gye-hak and his son Kwon han-wi, and his sons Kwon han-ok, Kwon do, and Kwon bak's entry into Samashi. In particular, Kwon gye-hak, who returned to his hometown after leaving offic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overcoming the stagnation of the family, which maintained only the foundation of the clan. Kwon gye-hak and Kwon han-wi, were recognized as clean bureaucrats on the central political stage. At that time, the local theory of Gangneung Hyangchon society emphasized the Neo-Confucian order leading to Yulgok-Uam.
However, the members of the Cheongpungdang fami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ich emphasized this Neo-Confucian justification, seemed to have a Noron tendency, but also emphasized practical aspects in practical ma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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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말 화본소설 '三言'의 宗族 이야기와 宗族 인식 - 불멸의 세계로서의 종족과 관련하여 -

저자 : 원정식 ( Won Jeong-si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2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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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언에서 종족 관련 핵심 용어가 사용되는 사례가 적어도 62편으로 전체 120편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명대 종족 인식의 확산과 그 필요가 반영된 결과였다.
삼언을 전체적으로 볼 때, 필멸의 세계와 불멸의 세계라는 공간을 설정하고, 필멸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인과율을 통해 불멸의 세계와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조상 - 나 - 후손'으로 이어지는 종족의 세계와 유사했다.
삼언에서는 영생불사 및 불멸의 세계에서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이에 도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공언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福'의 획득을 강조했다. '복' 가운데는 '자손 많은 것'을 비롯하여 관직, 재산, 건강과 장수 등이 있고 그 복을 얻는 최선책 역시, 수행, 선행, 공덕 쌓기였는데, 이들은 모두 종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삼언에서 종족은 필멸의 세계와 불멸의 세계를 결합한 조직이자 믿음의 세계였다. 조종은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을 보우하고, 후손은 조상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복을 받고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제사를 지내주는 후손이 없다면 죽어서도 제사를 받지 못하는 떠돌이 귀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에 후손의 확보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그 대책으로 첩 들이기, 데릴사위 삼기, 양자 들이기, 외손자 나누어 갖기 등을 소설 형식으로 제시했다. 또 선영은 조상의 유해를 보존하고 정기적으로 조상을 추념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사당은 조상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셔두고 일상적으로 조상과 같이 사는 공간으로, 종족을 영속시키는 물질적 기초였다. 이에 삼언에서는 선영과 사당에 대한 안정적 유지가 조상을 지키고 종족을 영속시키는 현안이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덤을 새로운 종족 형성의 출발점이자 상징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삼언의 작가들은 이러한 종족 인식과 종족 이야기를 120편 곳곳에 배치하여 이야기를 흥미 있게 만들고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The ideology and lifestyle of the Clans permeated the Ming Dynasty society like air. Political instability and socioeconomic liquidity increased in the Ming Dynasty. Securing the social safety net has become the most important task for everyone. The state power sought to ease restrictions on the people's right to perform ancestral rites and expand clan ethics to the foundational society. Various clans were activated, ranging from the Emperor's or gentry's clans to the common people's clans below. There were at least 62 cases in which key terms related to clan were used in Sanyan, accounting for more than half of the total 120. This was the result of reflecting the spread of the ideas of clans and its need.
Looking at Sanyan as a whole, the space of the mortal world and the immortal world were set. The lives of people living in the mortal world are ultimately combined with the immortal world through causality. This composition was similar to the world of clans connected by 'ancestors - I - descendants'.
In Sanyan, life in a world of eternal immortality and immortality was set as the the highest value. However, Sanyan declared that it was virtually impossible to reach this. Sanyan emphasize the realistically possible acquisition of 'Fu(福)'. Among the 'Fu(福)', there are "many descendants", government posts, property, health, and longevity. These were all key elements of forming and maintaining a clan. The best way to achieve 'Fu(福)' was also to practice, do good deeds, and build merit. These were all in accordance with causality and were important virtues for clan formation and development. From the first story of Sanyan, in return for his good deeds, it cited cases of passing the test and promotion, becoming rich, acquiring offspring, and the couple's happily aging together, and presented cases of death, disgrace, and extinction for evil deeds.
In Sanyan, the clans was an organization and a world of faith that combined the mortal world and the immortal world. People believed that when their ancestors died, they became ancestors and protected their descendants. People believed that descendants could be blessed and protected by continuously performing ancestral rites. People believed that without descendants who performed ancestral rites, they would become wandering ghosts who could not receive ancestral rites even when they died. As a result, securing descendants became the most important task for everyone. As a countermeasure against this, Sanyan presented the form of a novel, such as making a concubine, making a son-in-law, making an adopted son-in-law, and sharing a grandchild.
The tomb was a space where the remains of ancestors could be preserved and regularly remembered. A shrine is a space where ancestors' portraits or memorial tablets are enshrined and they live together on a daily basis. These were all material bases that perpetuated the clan. Sanyan clearly stated that maintaining these stable is a pending issue that protects ancestors and perpetuates the clan. Even in Sanyan, the tomb was described as a symbol of forming a new clan.
The writers of Sanyan placed these ideas of clan and stories of clan in the composition of many of the 120 novels. Through this, the story development was urgent and interested. In addition, they tried to fulfill their will to "awake the world" through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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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淸代 淮河中流域의 水利開發과 水災豫防 - 安徽省 鳳陽府를 中心으로 -

저자 : 金斗鉉 ( Kim Du-hyu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5-25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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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안휘성 북부에 위치한 봉양부 사례를 중심으로, 水利開發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水利問題를 水運水利와 農田水利로 구분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農田水利라는 관점에서 淮河中流域의 鳳陽府에서 시행한 水利事業의 목적과 그 양상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鳳陽府는 지리적 특성은 강수량이 부족한 지역과 多雨地域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淮河가 관류하고 있고, 강수량이 적은 지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수재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즉 거리상 황하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하의 유수량을 줄여주는(減水河) 각 支流와 淮河가 합류하는 지역에 위치했다. 따라서 황하가 운반하는 대량의 토사가 하상에 침적하여, 河道가 지속적으로 막히는('淤塞') 지역이었다. 河道의 '막힘'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 결과 배수문제를 야기하여 增水期나 暴雨가 내리는 시기에 쉽게 범람하여 빈번한 수재를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빈번한 자연재해의 발생은 이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량의 토사 퇴적층이 형성됨으로써 토질이 척박해지고, 이것이 빈번한 수재 발생과 맞물리면서 일반 농민들의 농업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게 했으며, 결국 생계가 막연해진 이들은 외지로 끊임없이 유망할 수밖에 없는 생존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수리사업의 중점은 자연스럽게 재해예방이라는 목적에 치중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지역에서처럼 공적 혹은 사적인 수리시설의 축조를 통해 圍田·圩田 등을 개발하는 현상도 존재했지만, 잦은 토사의 퇴적과 이로 인한 河道의 소멸이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與水爭地'현상은 지배적인 수리개발 양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배수로의 확보와 이를 보호할 제방의 수축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함풍 5년(1855) 황하의 河道가 북쪽으로 변경되면서 배수로 확보 문제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말 국가재정난의 심화로 인해 수리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봉양부 지역의 수리개발의 양상은 지형적 특성의 영향으로 인해 재해예방 목적이 1차적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양상은 여타 지역의 수리개발과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meaning of water conservancy development, focusing on the case of the Fengyang Prefecture located in the northern part of Anhui Province. In general, water conservancy is divided into Water transport(水運水利) and Farmland irrigation(農田水利), but in this paper, the purpose and aspects of the Water conservancy business implemented by the Fengyang Prefecture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Huai River Middle Basin have been looked at.
Fengyang Prefecture is geographically characterized by a boundary line that separates less rain region(過雨地域) and raining region(多雨地域). Although it belongs to the less rain(過雨) area, it was an area where floods occurred frequently. In other words, despite being quite far from the Yellow River in terms of distance, it was located at the confluence of each tributary streams(支流) and Huai River(淮河), which reduced the flow of the Yellow River. Therefore, it was an area where a large amount of soil carried by the Yellow River was deposited on the river bed and the waterway was continuously blocked ('淤塞'). The 'blockage(淤塞)' of the waterway obstructed the flow of water, and as a result, it caused drainage problems, and it easily overflowed at the time of flooding, which became a factor causing frequent floods.
Frequent natural disasters have had a profound impact on this community. As a large amount of sedimentary layers are formed, the soil becomes barren, and this, coupled with the frequent floods, caused general farmers to lose their enthusiasm for agriculture. In the end, these people, whose livelihoods became vague, created an environment for survival in which they could not help but continue to be promising.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focus of the water conservancy project in this area was naturally focused on the purpose of disaster prevention. That is, as in other regions, there was a phenomenon of developing Weitian(圍田) and Wutian(圩田) through the construction of public or private repair facilities, but due to the top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frequent sedimentation of soil and the disappearance of waterways, the phenomenon of '與水爭地' does not seem to have been the dominant hydraulic development pattern. It is thought that the most urgent task in this area was securing a drainage canal and shrinking the embankment to protect it. In particular, it can be confirmed from the fact that the issue of securing drainage channels was highlighted as an important national task in the 5th year of Xianfeng (1855) as the Yellow River's waterway was changed to the north. However, due to the deepening of the national financial crisis in the late Qing Dynasty, the water conservancy project did not proceed smoothly, so the intended purpose could not be achieved.
Summarizing the above facts, in the aspect of hydraulic development in the Fengyang Prefecture, it can be said that the primary purpose was to prevent disasters due to the influence of the topographical characteristics. This aspect can be seen as showing the difference from the hydraulic development in other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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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제강점 전후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타다시의 강원도 문화재 조사와 식민성 - 1912년 원주 지역 고적 조사 활동을 중심으로 -

저자 : 왕현종 ( Wang¸ Hyeon-jong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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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 전후 도쿄제국대학 공과대 건축·고고·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강원도 문화재 조사, 특히 원주지역 고적조사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는 1902년부터 조선의 문화재와 고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여 1909년 이후 1915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수개월에 걸쳐 각종 문화재의 상태와 등급을 매겨 보존의 가치를 매겼다.
특히 1912년 가을에는 강원도 지역 고적조사에 나섰는데, 춘천, 강릉, 오대산, 원주 일대 문화재를 조사하였다. 특히 원주 지역의 조사에 대해 원주는 신라 말기철불, 석물, 석탑 등 귀중한 문화재가 집중되어 있으며 경주 불교유적지에 버금간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흥법사지, 거돈자시, 법천사지 등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사찰과 석탑, 부도탑, 비문 등에 주목했다.
그런데 강원도 일대 문화재의 조사기록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 종합박물관에 세키노 타다시의 '필드카드'로 남아있다. 그중에서 원주 문화재 36개 유물에 대한 47장의 필드카드에서는 문화재 발견 경위, 보존상태, 등급과 가치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필드카드는 당시 문화재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물 사진촬영과 조사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노트였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이후 「조선고적조사표(朝鮮古蹟調査表)」, 「고적조사약보고서(古蹟調査略報告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원주 지역의 문화재는 흥법사지 진공대사비 발견 사실이나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의 반출과 같이 원 소재지에서 무단 이전되었으며, 1915년 조선공진회의 전시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문과 문화발달을 중시하는 학자인 안확, 정인보 등은 세키노의 조선고적조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반면, 최남선과 같은 이들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912년 강원도, 원주 지역에 대한 세키노 타다시의 조선 문화재 조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체계적인 조사활동을 통하여 조선 각지의 문화재의 보존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을 유발하고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정당화를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일제의 식민지성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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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석탄에서 문화로 - 문화적 탈산업화 전략으로서 루르 산업 유산 -

저자 : 정용숙 ( Jung¸ Yong-s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6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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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산업 유산 재활용 도시재생의 국제적 성공 모델로 주목받는 독일 서부의 옛 중공업 중심지 루르 지역을 다루며 특히 1960년대 이후 전개된 탈산업화의 문화적 전략으로서 폐산업시설이 산업 유산이 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20세기 후반 동력원의 구조적 전환과 산업의 국제 분업으로 인한 서독의 석탄과 철강 공업의 몰락에 대해 루르 지역은 오염된 공업 지역으로부터 탈산업 자연을 갖춘 첨단 지식과 문화지역으로의 이행을 표방하는 장기적 '구조조정'으로 대응하였고 그 문화적 전략으로 '산업문화' 실천을 수행하였다. 이 글은 이를 가능케 한 사회적 토대와 정치적 맥락으로 사민주의 정치문화에 주목하고 그 결과물인 루르 지역 산업 유산의 특징을 논한다. 이를 위해 우선 그 역사적 조건으로서 산업화 시기 루르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형성 과정을 통해 지역 정체성의 구성성을 논한다. 둘째, 1950년대 말부터 반세기 이상 진행된 루르 지역 탈산업화의 특성을 사민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정치기획으로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물인 산업문화의 과거 재현에서 드러나는 기억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탈산업사회의 과제인 사회적 양극화와 관련한 역사적 문화적 공간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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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세기 전반기의 경제상황과 어촌 심언광의 절검론

저자 : 朴道植 ( Park , Doh-Sik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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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개창 이후 반세기 정도가 지나면서 나타나고 있던 국내상업에서의 변동은 조선의 각 경제 주체들의 경제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중앙의 고위관료들은 상업에 참여하여 재산 증식[殖貨]을 추구하였고, 직접 생산자인 일부 수공업자와 농민들은 상업에 종사[逐末]하기도 하였다. 중앙의 고위관료들의 상업참여를 통한 식화 행태는 필연적으로 이들과 부상대고 등 자산층 일반의 사치풍조로 이어졌다. 권세가와 부상대고는 이에 편승하여 당물을 수입하였다.
조선전기 국가의 모든 경비는 공안과 횡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었다. 공안은 태조 원년(1392) 10월 고려조의 세입의 다과와 세출의 경비를 헤아려 제정됨에 따라 국가재정의 수입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횡간은 건국한 지 70여 년이 경과한 세조대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다. 그 후 성종대에 이르러 개정작업이 착수되어 동왕 4년(1473) 9월에는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이, 다음 해에는 식례횡간(式例橫看)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때 제정된 횡간은 국가경비를 지나치게 절감하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운용에서도 많은 곤란을 가져왔다. 이에 성종은 신정횡간과 조응하여 공안을 개정하게 했는데, 이때의 공안 역시 이전에 비해 크게 삭감됨에 따라 제읍(諸邑)에서 매년 바치는 공물로는 경비의 태반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경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누차에 걸쳐 공안증액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끝내 개정되지 않았다. 그 후 공안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대두하게 되어 수차례에 걸쳐 논의된 결과 연산군 7년(1501) 7월에 마침내 공안개정을 보게 되었다. 이때 제정된 공안이 이른바 신유공안이다. 그러나 공안개정을 통해 국가재정이 대대적으로 확충되었는데도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인해 “상공(常貢) 외에 가정(加定)·인납(引納)이 없는 해가 없다”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중종대에도 대내의 비용이 번다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내수사 직계에 의한 재정확충과 인납(引納)·무납(貿納)과 같은 전대의 폐습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심언광은 중종이 즉위한 처음에는 병폐의 근원을 알고 지난날의 폐단을 고쳤으나, 수년 이래 궐내에서 쓰는 것이 번다하여 지난날보다 10배나 되어 불시에 명령이 내리고 명분도 없이 사용하는 용도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사(有司)들이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더러는 저자에서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기도 하고 더러는 민간의 공물을 앞당겨서 받아들이는 거의 일상화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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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기 강원도지역 공납제 운영

저자 : 전상욱 ( Jeon¸ Sang-wu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9-13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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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과 함께 제정된 공납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운영상의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이는 크게 공납물 분정의 불균형과 방납 확대로 인한 공납물 부담의 증가로 요약된다. 본 논문은 이 같은 16세기 공납제 운영 양상을 강원도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각도의 공납제 운영상의 특징과 조선후기 삼남 이외 지역에서 이루어진 공납제 개혁에 대한 연구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우선 강원도지역의 공납물 분정의 불균형을 살펴보았다. 16세기 공납물 분정의 중요한 기준이 전결수였다. 그러나 강원도지역의 전결수는 타도에 비해 턱 없이 낮은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납물 부담이 과중한 상황이었다. 이는 전결수를 고려한 공납물 분정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 시행된 계묘양전 당시 강원도지역의 전결수를 실상에 비해 높게 책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결수가 높게 책정되면서, 갑진공안 상의 강원도지역 공납물 부담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강원도지역 내에서도 발생하였다. 계묘양전 당시 전결수가 높게 책정된 영동지역은 영서지역에 비해 공납물 부담이 무거운 상황이었다. 즉, 강원도지역은 어느 군현에 속하는가에 따라 공납물 부담이 차이가 있었고, 그 부담은 타도에 비해 무거웠다.
다음으로 방납 확대로 인한 공납물 부담 증가를 살펴보았다. 16세기 공납물의 전결세화가 확대되었지만, 중앙정부는 여전히 현물재정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로 인해 방납이 활성화되었고, 강원도지역 역시 16세기 공납물의 방납은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간행된 갑진공안 상에 책정된 공납물만으로 국가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별복정 등 변칙적인 재정운영이 발생하였다. 민은 급박하게 납부해야할 공납물을 방납주인에게 구매하여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방납주인이 공납물 납부과정을 장악하면서 防納價를 높게 책정하였다. 이로 인해 민의 부담은 커지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 강원도지역 공납제 운영 양상은 17세기 초반 강원도 대동법이 시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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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척향교의 제례(祭禮) 석물(石物)에 관한 연구 - 성생단(省牲壇)과 망료석함(望燎石函)을 중심으로 -

저자 : 홍성익 ( Hong¸ Sung-ik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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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지방에 설치한 관학이다. 향교 건립은 조선시대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유교이념으로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강원도에는 15개의 향교가 있으며 춘천과 강릉만이 고려시대에 건립되고 이외의 향교 건립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척향교의 건립년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조선초기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삼척향교의 대표적 제례석물은 성생단과 망료석함이다. 성생단이란 犧牲禮에 사용될 犧牲物의 건강과 肥肉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壇으로 민예풍의 거북이 형태로 제작되었다. 제례에 사용한 祭文은 제례가 종료되면 태우는 데 제문을 태우기 위한 석물을 망료석함이라 부른다. 망료석함은 石函과 蓋石 2점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붕이 우진각인 가옥의 형태로 제작되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고 1656년에 제작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시대적 기준작으로서 볼 수 있다. 성생단은 동재와 서재 사이에 있고 망료석함은 대성전 서쪽에 위치한다. 이외에도 망료석함과 동시에 건립되는 하마비가 있으며 원형으로 추정되는 관수대가 있다.
이와 같이 제례석물을 온전히 갖춘 향교는 강원도 내에서 삼척향교가 유일한 사례이다. 앞으로 이 석물이 향교에서 행해지는 제례에서 실제 설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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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40~1910년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구암동(狗巖洞)의 '洞中' 운영과 계(契)

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7-19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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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40∼1910년 江原道 平海郡 狗巖洞 '洞中'의 운영 양상을 규명한 것이다. 조선후기 이후 각 촌락은 부세 대응, 복리 증진, 공동체 사업 수행을 위해 동중을 형성하였으며, 洞契를 비롯한 자치 조직을 통해 그것을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촌락 구성원의 성격과 생업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구암동은 반농반어의 촌락으로서 동중 운영과 관련된 여러 계 조직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동계 상층부를 구성하는 老班契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암동에서는 동계에 참여하지 않는 촌락민을 閒民으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촌락 내에서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한민은 동계에 참여하고 有司로서 동중의 궂은일을 잘 수행하면 노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다. '洞首', '尊位', '座上'이 바로 노반계를 구성하는 자리이다. 이들은 동계를 통해 동중 운영 전반에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이권을 독점적으로 운영하였다. 특히 藿巖放賣權과 미역 채취, 멸치 조업을 바탕으로 동중 재정을 확충함과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공동납 관행에 따라 동리 단위로 부과되는 부세 행정에도 노반계는 큰 영향력을 발휘 하였다. 한편, 동중은 대외적으로 관부에 부세 감면과 조정을 청원함으로써 촌락민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나갔으며, 인근 촌락 및 관부·사찰·개인과의 상호 부조를 통한 공존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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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세기 말~20세기 초 황해도 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양상

저자 : 박성준 ( Park¸ Sung-j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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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황해도는 땅은 넓으나 척박하고 인구는 적은 지역으로 평가되었으나 세조대부터 한광지를 개간한 것을 시작으로 해택지와 하천 연안 지역까지 활발하게 개간하면서 곡창지대이자 서울의 곡물 공급지로 변화되었다.
황해도 지역이 개간되는 과정에서 궁방전도 다수 설치되었는데, 궁방전과 導掌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황해도 지역이 이러한 특징을 갖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인접해 장토를 관리하기에 편리하면서, 곡물 생산량이 풍부한 곡창지대여서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고, 바다와 하천을 이용해서 곡물을 서울로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황해도 지역의 궁방전에 차정된 도장은 발생유형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궁방전을 관리·경영한 운영 주체이자, 궁방전의 지대를 거의 독점한 실질적인 소유자였다. 도장의 거주지는 대부분 서울이었고, 현지에 감관·마름을 두고 장토를 경영했다. 징수한 지대는 현지에서 매각하거나 서울이나 鎭南浦로 수송해서 매각하기도 했다.
황해도 지역의 궁방전에서 도장은 답을 농업경영의 중심으로 삼고서 답은 타조, 전은 도조 경영을 선호했다. 타조답의 결세는 도장이 부담했고, 타조·도조답의 종자는 작인이 부담했다. 도장은 타조답의 결세만 담당하고 종자를 작인에게 부담시키며 지주경영을 강화해 갔다.
황해도와 삼남 지역의 답 지대량을 비교해 보면 구간별 분포에서는 삼남 지역이 약간 높았지만 간격의 폭은 크지 않았고, 환산된 지대량의 평균은 황해도 지역이 더 높았다. 전 지대량은 황해도 지역이 삼남 지역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
황해도 지역 궁방전의 농업경영 양상과 지대량이 삼남 지역과 비슷한 수준이었듯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의 농업은 삼남 지역과 아울러 전국적으로 큰 차이 없이 전반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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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세기 내·외국인의 울릉도에 잠입 사례와 사유(事由)에 대한 연구

저자 : 신태훈 ( Shin¸ Tae-hoon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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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오면 울릉도에 대한 인식과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기존의 농업에 종사하기보다는 상품이 될 수 있는 작물이나 상품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적은 노동으로 경제적 이익을 낼 수 있는 어염이나 벌목에 쏠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남해안 및 동해안 어민들에게 주목받은 섬이 바로 울릉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과 러시아까지 울릉도에 관심을 두게 된다.
조선 정부는 먼저 울릉도에 잠입한 내국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채취한 물품을 몰수하고 그들을 방조한 수토관들에 대해서는 고신을 뺏는 처벌을 하였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퇴거를 요구하고 이들에 대해 재판을 열어 처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울릉도에 대한 산림벌목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울릉도에 대한 벌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미셸의 경우는 울릉도 목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세 이후 울릉도에는 많은 조선인과 외국인이 혼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더 이상 울릉도를 수토제에서 관리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질적인 영토로써 관리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1900년 관보 41호를 통해 울릉도에 군수를 두는 것으로 정식적으로 조선의 행정구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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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해방 후 북한 지역 지방인민위원회의 재편 : 면·리 단위를 중심으로

저자 : 권오수 ( Kwon¸ Oh-soo )

발행기관 : 강원사학회 간행물 : 강원사학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3-29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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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47년 북한 지역에서 시행된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중심으로 북한 정권 수립기 면·리 인민위원회의 재편 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규명한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 형태의 지방정권기구가 창출되었다. 그러나 면·리 단위는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 정권기구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북한지역 정치주도세력은 선거를 통해 면 인민위원회를 재편하고 리 지역까지 인민위원회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북한 지역 면·리 인민위원회 위원선거는 1947년 2월과 3월에 시행되었다. 선거 후 북한지역에서는 지방인민위원회가 말단 행정 단위까지 완전히 조직·재편되어 통일적인 정권기구가 구축되었다. 선거를 통해 새롭게 선출된 인민위원의 정당별 구성은 각 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북로당의 비율이 높았다. 또한 면·리 인민위원회는 대부분 농민을 중심으로 인민위원이 구성됨에 따라 '인민정권'의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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