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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희생자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 -1865년부터 현재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도 노예제와 짐크로 보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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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 -1865년부터 현재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도 노예제와 짐크로 보상 운동-

A Social Movement for the Justice for Victims: The African American Movement for Reparations for Slavery and Jim Crow Since 1865

권은혜 ( Kwon Eun-hye )
  • : 한국서양사학회
  • : 서양사론 15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3월
  • : 139-172(34pages)
서양사론

DOI

10.46259/WHR.152.5


목차

Ⅰ. 서론
Ⅱ.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 재건기부터 대공황 시기까지 노예제 보상 논의
Ⅲ. 전후 냉전과 민권운동 시기 노예제 보상 논의
Ⅳ. 20세기 말 21세기 초 노예제 보상 논의의 전면적 부상과 쟁점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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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재건기부터 현재까지 노예제 보상을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가들과 조직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1990년대 이후에야 노예제 보상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의 주요 의제로 등장한다. 사실 1865년부터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내전 중 연방정부가 약속했던 “40에이커”의 보상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며 스스로 운동을 조직했다. 이 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도 노예제 보상운동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별해 각 시기의 특징과 대표적 인물을 소개한다. 재건기에서 대공황 시기를 대표하는 노예제 보상 운동은 1890년대에서 1910년대 사이 칼리 하우스 주도의 전 노예 연금운동이다. 전 노예 연금운동은 노예노동과 내전 중 노예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임금을 연금으로 보상하는 입법을 지지했다. 민권운동 시기에는 오드리 무어, “흑인 선언”의 저자 제임스 포먼, 그리고 새로운 흑인 민족주의 및 분리주의 단체 블랙팬서당과 신아프리카공화국같은 단체들이 1948년 유엔의 제노사이드 반대 선언 및 1952년 독일의 홀로코스트 보상의 사례에 착안해 노예제를 흑인 제노사이드로 정의하며 미국 정부를 향해 노예의 후손에게 지연된 노예제 보상을 이행하고 흑인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20세기의 대부분 노예제 보상운동은 가난한 흑인 대중을 대상으로 한 흑인 민족주의 집단의 급진적 요구로 인식되었다.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보상이 실현된 1980년대 말 이후부터 중간계급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주류 민권운동단체, 학계가 노예제 보상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21세기 미국은 노예제 보상의 필요성과 방법을 두고 논쟁 중이다. 노예제 보상 운동은 미국 사회의 진정한 평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이자 희생자의 정의를 위한 사회운동이다.
This essay examines the African American leaders and organizations that fought for the reparations for slavery since 1865. It was not until in the 1990s that reparations have become one of the major issues for the civil rights for African Americans. In fact, poor African Americans have continued to organize and participate in the reparations movement since 1865, asking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o keep its promise of distributing “40 a cres” to ex-slaves. This essay divides the history of the reparations movement into three periods. Between Reconstruction and the Great Depression, the most notable case for reparations was the ex-slave pension movement led by Callie House. House organized the campaign for the legislation for the ex-slave pension, which would compensate for the unpaid labor of ex-slaves under slavery and during the Civil War. In the Civil Rights Movement era, Audley Moore, James Foreman―the author of “the Black Manifesto,”― and new black nationalist and separatist organizations such as the Black Panther Party and the Republic of New Afrika led the reparations movement. Inspired by the 1948 UN Genocide Convention and postwar German reparations to the survivers of Holocaust, these leaders of the reparations movement called slavery black genocide. They asked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o pay the descendants of slaves for the unpaid labor of American slaves and to address the issue of black poverty and racial inequality. For the most part of the 20th century, the reparations movement remained within the circle of black radicals who organized poor African Americans. In the late 1980s, the success of the Japanese American redress campaign for the World War 2 Internment of Japanese Americans helped the reparations movement spread among middle-class African Americans, major civil rights organizations, and scholars. During the first two decades of the 21st century, Americans have debated over reparations. The goal of the reparations movement led by African Americans has been the pursuit of racial equality and the vision of the United States as a democratic nation. The reparations movement has always been a social movement for the justice for victims.
(Hansung University / eunhyekw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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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서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9-0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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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8-2022
  • :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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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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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마 제정 초기 상류층의 부부 관계, 그 이상과 현실 -소 플리니우스와 칼푸르니아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고경주 ( Ko Kyung-joo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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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서한집』의 플리니우스와 칼푸르니아에 대해 관심사를 공유하고 화합을 향유하는 상호적 갈망과 애정의 관계인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그러한 부부간의 모습은 칼푸르니아가 처했던 상황 속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관심사를 형성하지 못했을 어린 나이에 고위 정무관직을 역임한 플리니우스와 혼인 관계에 들어간다. 표면상 그들의 관계는 화합을 구현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자기표현을 삼가면서 남편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아내 측의 순응 결과였다. 그러한 순응과 헌신으로 칼푸르니아는 부부간의 화합뿐만 아니라 플리니우스의 애정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연시의 관습을 이용해 아내에 대한 정염을 표현하고 상호적 애정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나, 정염의 표현이 곧 여성과 부부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의미하진 않는다. 칼푸르니아의 유산에 관한 서한은 여성과 후손에 대한 남성의 통제권이라는 시각을 드러내고 아내의 미덕에 관한 서한은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그의 기대 사항들이 전통적인 태도에 기반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Foucault sees Pliny's marriage to Calpurnia in the Epistulae as a relationship of mutual longing and affection. However, such a relationship was difficult to realize in the circumstances Calpurnia was in. At a young age, when she would not have been able to form her own interests, she entered into a marriage with Pliny who held a high-ranking public office. On the surface, their relationship seems to embody harmony, but it was the result of the wife's adaptation to her husband's interests. Calpurnia's conformity and devotion would have earned Pliny's affection as well as marital harmony. Pliny is notable for expressing affection for his wife and presenting the ideal of mutual affection using the conventions of love poetry, but the expression of passion does not mean a new perspective on women and marital relationships. A letter on Calpurnia's miscarriage reveals a view of men's control over women and their descendants and a letter on Calpurnia's virtues shows that his expectations for women's roles were based on traditional attitudes.
(Korea University / kokyung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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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기 4세기 콘스탄티우스의 현실정치 -우르시키누스의 정치적 활용을 통한 고찰-

저자 : 손태창 ( Son Tae-cha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2-72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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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부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후 형제들과 로마제국을 삼분할하여 동방을 다스리던 아우구스투스였다. 350년 그의 형제들이 다 죽은 이후 신속히 전체 로마를 수중에 넣어 다시 1인 지배 시대를 열었다. 그는 상황을 이용하는 예리한 판단력과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 활용하는 용인술이 뛰어난 자였다. 이것이 그가 내외적으로 반란이 빈번했던 치세에서 자기의 통치권을 지켜낸 바탕이 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콘스탄티우스의 용인술에 초점을 두고 그가 펼친 정책이 “현실정치”라는 것을 우르시키누스라는 인물과의 관계적 사례를 가지고 해설해보고 자 한다. 우르시키누스는 354년 갈루스 반역 혐의에 공모자로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던 자였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측근들의 사형집행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우르시키누스를 오히려 그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했다. 355년에 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실바누스를 제압하는 데에 357년에는 제국의 안정된 방위를 위해 페르시아 외교에 359년에는 황궁으로 불러서 페르시아의 군사행동에 대응하는 작전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체로 그는 황명에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이는 그의 충성과 능력에 대한 반증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명분보다는 그 자신의 정치적 실리에 도움이 되는 것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비록 의심스러운 자라도 이용하고 큰 임무를 주는 정책을 폈다. 이는 그가 치자로서 용인술에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광대한 대제국을 유효적절히 잘 다스리는 방법으로 현실정치를 운용하는 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군주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Constantius II was the Augustus who ruled the Eastern part of the Roman Empire by dividing it into 3 parts with his brothers after the death of Constantinus the Great. In 350 his brothers died and Constantius brought the entire Empire under his control, opening the age of autocracy(single rule) again. He was very good at using people by managing and controling them, and had a very keen sense of judgment regarding circumstances. These are the bases on which he was able to keep his sovereignty, even under frequent rebellious situations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This paper aims at explaining the “Realpolitik” of Constantius, focusing on his personal policy, by using the case of Constantius' relations with Ursicinus. Ursicinus was under investigation in 354 because he was regarded as an accomplice of Gallus the traitor. However, Constantius did not accept the suggestion of the death penalty for Ursicinus given by his proximy, rather preferring to use Ursicinus for his political purposes. In 355 Ursicinus was employed to solve Silvanus' revolt. Again, in 357, put into service regarding foreign affairs with Persia in order to prolong the peace and maintain the stable defence of the whole Roman Empire. Also, in 359, the emperor called Ursicinus to himself, but thereafter ordered him to return to Mesopotamia again because the Persians presented a military threat on the way. Generally Ursicinus obeyed the imperial ordinances well and accomplished the missions successfully. It was the proof of his loyalty and ability.
Constantius employed policies for the sake of real political ahead of superficial causes, and even used those who seemed suspicious, and provided them with certain assignments. It means that Constantius was very excellent at the art of handling and manipulating people. Moreover we know that the emperor was talented in using Realpolitik as a method to rule and expand the empire effectively.
(Korea University / fertilec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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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로마에서의 아스클레피오스 숭배

저자 : 신명주 ( Shin Myongjoo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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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클레피오스는 기원전 291년, 당시 로마를 뒤덮었던 역병에 대처하기 위한 구원투수로서 에피다우루스로부터 로마로 도입되었다. 티베르섬에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한 신전이 마련되었고, 신전이 병원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정기 이후에도 이곳은 계속 병자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남았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로마에서도 아폴로, 살루스와 함께 건강을 주관하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에서 안전과 안녕을 주관하던 신인 살루스는 점차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자 위생, 청결, 건강의 여신인 히기에이아와 동일시되었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의사들도 스스로를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인 아스클레피아데스라 칭했고, 황제의 주치의들을 통해 황제들도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와 연계되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주치의였던 크세노폰에 대한 총애로 그의 출신지이자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로 유명한 코스섬에 대한 공납의 면제를 추진하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순방하는 과정에서 페르가뭄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제우스-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대규모 개축하였다. 카라칼라 황제는 스스로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유받기 위해 페르가뭄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직접 참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스클레피오스 숭배가 로마에서도 일반화된 것은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의 다양한 양상이 나타나는 주화가 로마시에서도 지속적으로 주조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전쟁터에서 부상과 질병에 자주 노출된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도 아스클레피오스는 인기 있는 신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군대 주둔지역에서 발굴된 비문에 자주 나타나는 신격이었고, 이 비문을 세운 이들은 대부분 군대 내의 의료인력들이었다. 비문만이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진 제단과 군 병원 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쳐졌던 성소까지, 군대와 아스클레피오스의 연계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는 다양하게 발견된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로마 도입이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주관한 것이었고, 이후의 숭배 역시 일반 대중들만이 아니라 황제 및 군인들과 밀접히 연계된다는 점에서 로마에서의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공동체, 혹은 그에 속한 개인들의 건강이라는 개념에 대해 로마의 국가권력이 어떻게 관심을 표현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Asclepius was introduced to Rome from Epidaurus in 291 BCE to alleviate the plague that swept Rome. The temple of Asclepius was erected in the Tiber island. Although this temple did not serve as a hospital, it remained a place where the sick continued to come in the imperial period. Asclepius established himself as the god of health along with his father Apollo and Salus. Salus who was traditional Roman goddess in charge of safety and well-being, was gradually identified with Hygieia, a daughter of Asclepius.
Like the Greeks, the Roman physicians called themselves Asclepiades, descendants of Asclepius. Roman emperors were associated with the cult of Asclepius through court physicians. Claudius, in favor of his physician Xenophon, proposed exemption from tribute to the island of Kos, Xenophon's hometown and famous for the cult of Asclepius. Hadrianus remodeled the temple of Asclepius-Soter in Pergamum into the temple of Zeus-Asclepius during his visit. Caracalla visited the temple of Asclepius in Pergamum to be healed of his physical and mental illness. The generalization of cult of Asclepius in Rome can be seen in Roman coins showing various aspects of worship for Asclepius.
Asclepius was a popular deity among Roman soldiers who were exposed to wounds and disease on the battlefield. Asclepius appeared frequently in inscriptions excavated from military garrison areas, and most of these inscriptions were erected by medical personnel(medicus) in the army. Archaeological evidences showing the connection between the army and Asclepius are abundantly found in the area of military hospital (valetudinarium).
The introduction of Asclepius to Rome was organized by consuls and other political officials, and worship for him was linked not only to ordinary people but also to emperors and soldiers. The worship of Asclepius in Rome shows how Roman state power expressed interest in the health of the community, or individuals belonging to it.
(Ewha Womans University / livia0412@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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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국 1834년 신빈민법 제정과 생계부양권리

저자 : 김자경 ( Kim Ja-gye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6-138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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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34년 신빈민법 제정에 기초가 된 『1834년 보고서』의 전략적 역할을 살펴보면서 신빈민법의 제정 목적을 고찰하려 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민법 폐단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신빈민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빈민법 폐단에 대한 논의만 분분할 뿐 실제적인 개혁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지주들이 온정주의 통치 방식으로 지방의 빈민구제를 관리하여 왔고, 그 결과 빈민구제가 관습과 얽혀져서 빈민법 개혁은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1834년 보고서』는 빈민 행정에서 다양한 경험과 이해 관계를 지닌 지주들 앞에 던져질 개혁을 제안하는 보고서였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논쟁이나 지주들이 꺼려하는 민감한 요인들을 피해야만 했다. 보고서에는 빈민 행정의 재정문제, 지방빈민 행정에서의 지주들의 권한 문제, 노동자들의 빈곤의 원인에 관한 분석이 없었다. 따라서 『1834년 보고서』는 지주들의 권한을 훼손하지 않고 지주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개혁안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1834년 보고서』는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지지를 받아 신빈민법으로 제정되었다. 이런 점에서 브룬디지의 주장처럼 빈민행정에서 지주 권한이 지속됨으로써 구빈민법과 신빈민법은 지속성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34년 보고서』는 지주들의 온정주의 빈민행정 속에 얽혀있는 노동자들의 생계부양 권리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를 제거할 수 있는 구제 원칙인 열등처우 원칙을 제안하였다. 신빈민법은 빈곤과 극빈을 구분하여 빈곤한 근로능력이 있는 노동자는 구제받을 권리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신빈민법은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보면 구빈민법과 단절성을 보인다.


This paper examines the strategic r ole of the 1 834 Poor law Commission Report that became the basis for the enactment of the Poor Law Amendment (New Poor Law) in 1834. While the debate over the problematic nature of the Old Poor Law rose after the Napolean Wars, it did not reach any fruitful resolution until the New Poor L aw came into effect. This w as due to landlords' management of the poor relief in their local provinces in the form of paternalism, which culminated in a state where the poor relief was intertwined with customary traditions, thus making the poor-law reforms even a more challenging problem.
As the 1834 Poor Law Commission Report was essentially a proposal suggesting an overhaul of the current administration of poor relief to the landlords with various backgrounds in this field, it needed to avoid sensitive issues such as ideological debates that landlords would be reluctant to consider. As such, the report did not touch upon issues of the financial problems of the administration, the landlords' authority in the local administration of poor relief, or the cause of the poverty among the laborers. Consequently, the report could propose a reform that reflected the interests of landlords without undermining their authority. The report was enacted as the New Poor Law with overwhelming support in Parliament. This falls in line with A. Brundage claims that the New Poor Law obtained its continuity as a follow-up to its predecessor through upholding landlords' authority in the administration of poor relief.
Still, the report strongly criticized how the laborers' right to subsistence was heavily dependent on the paternalistic management by the landlords and proposed the principle of less-eligibility to get rid of the right to relief. The New Poor Law distinguished poverty from indigence, declaring that the able-bodied have no right to relief. Therefore, in this aspect, the New Poor Law embodies discontinuity from the Old Poor Law from the perspective of the lower class.
(Sunchon National University / jgkim40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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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우스캐롤라이나 사면법의 시행 배경

저자 : 김정은 ( Kim Jeong-eu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16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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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충성파들이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로 이주하지 않고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남기로 결정하게 된 요인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충성파들이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떠나지 않게 된 중요한 요인 중에 1782년 제정된 몰수법과 추방법(The Bill of for disposing of Certain Estates and Banishing Certain Person)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충성파에 대한 보복적인 폭력을 제한하고 사회질서, 번영 그리고 평화를 위해 화해를 주장하며 사면법(General Clemency Act)을 제정한 배경과 그 결과를 논의하는 것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로우컨트리 상류층은 1730년대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 사회를 장악해왔다. 이들 로우컨트리 상류층들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의회(The Assembly)를 장악하며 입법활동을 통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를 운영해왔다. 혁명 시기에 같은 애국파의 편에 서서 혁명을 도왔던 일부 수공업 장인과 기술공 그리고 백컨트리의 사람들에게도 혁명 이후 의회의 자리를 일부 내어주기는 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의회의 대다수의 의원은 로우컨트리 상류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시절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의회를 장악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의회를 장악했으며 입법활동을 통해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제를 공고히 하고 노예의 반란과 같은 위험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로우컨트리 애국파들은 자신과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로우컨트리 출신 충성파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혁명 이후 몰수법, 추방법 그리고 사면법 시행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로우컨트리 상류층 애국파들은 친척이자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로우컨트리 출신 충성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노선을 넘나들며 지속적으로 협력했다. 사면법 시행 과정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의회가 청원과 재판의 과정을 빠르게 진행했던 이유도 로우컨트리 출신의 충성파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시민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로우컨트리 출신 애국파에게 충성파의 재산몰수는 충성파 개인의 재산 몰수가 아닌 가문의 재산 몰수였고 로우컨트리 상류층의 지배력을 약화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전쟁 이후 로우컨트리 출신 애국파들은 자신이 속한 로우컨트리 상류층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주보다도 느슨한 몰수법과 추방법을 적용했고 너그러운 관용정책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For the loyalist research was focused on in New York and Southern Carolina, where the war of independence was fiercely unfolded. Many of the loyalist in New York moved to Britain or other British colonies, while most of the South Carolina loyalists remained in South Carolina.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factors that led South Carolina loyalists to decide to remain in South Carolina instead of moving to Britain or Britain's colonies. It is necessary to take a closer look at some of the important factors that kept South Carolina loyalists from leaving South Carolina. This essay also discuss the background and consequences of the General Clemency Act, limiting retaliatory violence against the loyalists and arguing for reconciliation for social order, prosperity and peace.
South Carolina Low Country elite has dominated South Carolina since the 1730s. White people who settled in South Carolina had to fight diseases, Indians, and slaves. Faced with these problems, wealthy South Carolinas began to consolidate their communities to manage slaves and property and maintain social stability. In particular, as a way to overcome political, social, military, religious and demographic instability, South Carolina lowcountry elite began to develop strategies to unite and bond between families. Through joint parenting, sophisticated guardianship, farm management, and family marriage, a strong kinship network was formed, and economic activities also acted within the framework of community norms.
And also These Lowcountry elite dominated the Assembly, and controlled the South Carolina colony through legislative activities. Although some the artisans, the mechanics and the backcountry people, who stood on the same patriotic side during the revolution, also gave up a few of seats of Congress after the revolution, the majority of the members of the South Carolina Congress were from the lowcountry elites. They took control of the South Carolina Congress the same way they took control of the South Carolina colonial council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through legislation, they tried to consolidate South Carolina's economy and eliminate risks such as slave rebellion.
The lowcountry patriots tried to protect the property of lowcountry loyalists who shared economic and social interests with them. In a series of processes since the revolution, such as the Confiscation Act, the Deportation Act, and the Tolerance Act, the Patriots of lowcountry elite have continued to cooperate across political lines to protect the property of loyalists from lowcountry, who are relatives and share the same interests.
The reason why the South Carolina Congress quickly proceeded with petitions and trials in the process of implementing the Tolerance Act was to confirm that loyalists from lowcountry could be South Carolina citizens and to protect their property.
For patriots from lowcountry, the confiscation of the property of loyalty was not a confiscation of the property of a loyal individual but a confiscation of the family's property and weakened the control of the upper class of lowcountry. As a result, after the war, patriots from lowcountry applied looser confiscation and deportation laws than other states to consolidate their control of the lowcountry elites over South Carolina.
(Chonnam National University / sanmin10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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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가다 -캔튼 인디언 정신병원과 미국 사회의 인종 관계-

저자 : 신지혜 ( Shin Ji-hy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7-20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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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사회가 미국 원주민―이하 '인디언'―을 어떻게 정의했는지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1902년 사우스다코타주 캔튼에 설립된 캔튼 인디언 정신병원(Canton Asylum for Insane Indians)을 주축으로 미국의 인종 담론이 인디언의 인종·혈통 및 '정신이상'에 대한 이해와 중첩된 과정, 그리고 이에 내재된 모순을 드러낼 것이다. '누가' 병원 치료를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 진정한 인디언이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이 글은 미국의 인구조사와 도즈 법/도즈 커미션(도즈 명부 작성), 그리고 인디언 정신병원 입원 신청 기록에 반영된 인디언의 정의를 연구한다. 입원 이후의 상황보다는 인디언만을 위한 정신병원이 설립된 과정과 입원 절차를 살펴봄으로써 '인디언,' '자유민(freedman),' '정신이상(insanity)'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해도 논한다. 주요 사료는 당대의 신문기사, 정부 보고서, 인구 조사 보고서 등이며, 이 외에도 미국 국가문서보관소(NARA) 문서그룹 75, 마스코기(Muskogee) 엔트리가 있다. 여기서 분석한 자료에는 분명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원주민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적 인식과 '인디언성'의 제도적 구성을 짚어 보았다는 데서 연구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This study focuses on how Native Americans―hereafter, “Indians”―were defined in American society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Placing the Canton Asylum for Insane Indians at the center, it sheds light on the process by which the American racial discourse became intertwined with the understanding of Indian race, blood, and “insanity.” To reveal “who” were considered true Indians worthy of hospital care, this study analyzes the rationale behind the U.S. Census and the Dawes Act/Commission (Dawes Rolls) and examines the records of application to the Canton Asylum for Insane Indians, which was established in 1902 in Canton, South Dakota. Rather than look inside the hospital walls, it highlights the foundational history of the mental institution for Indians and its admission and commitment process in order to discuss the American conception of “Indian,” “freedman,” and “insanity.” The main sources include contemporary newspaper articles, government reports, Census records, and the Muskogee Entry case files at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Record Group 75). While available materials are limited, they offer valuable insights into the American racial understanding of Native Americans and the institutional construction of “Indianness” at the turn of the twentieth centur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 jhyshin@j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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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의 아스테카 정복의 역사 다시 쓰기

저자 : 박구병 ( Park Koo-byou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3-23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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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6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의 아스테카 정복에 대한 전통적인 서사를 신화와 뒤섞인 역사로 평가하는 '새로운 정복사' 또는 수정주의적 연구의 몇 가지 주요 논점을 정리하고, 정복 과정을 둘러싼 관심사의 확대 사례에 주목한다. 수정주의적 연구가 재탐색하려는 세 가지 핵심 쟁점은 첫째, 1519년 11월 코르테스와 목테수마 사이의 회합의 성격, 둘째, 목테수마의 수동성을 비난하는 근거로 제시된 예언의 역할과 그것이 아스테카의 패배에 끼친 영향에 대한 신빙성 여부, 셋째, 누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지 등이다. 수정주의적 연구의 사례들은 코르테스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정복자들과 동맹을 맺은 틀락스칼테카인들의 역할, 그리고 16세기 초 이전부터 존재해 온 나우아인들의 뿌리 깊고 복잡한 영토 전쟁에 더 주목하도록 촉구한다. 그런 관점에서 에스파냐인들의 정복에 대한 신화적 역사를 중부 멕시코의 나우아인 사이의 대립에 에스파냐인들이 새롭게 개입한 사건으로 재정립하는 시도가 요구된다.


This article attempts to examine the repeated themes and issues in traditional narrative of the Spanish Conquest in the early 16th century, the revisionist criticism of the traditional perception, and diversified research examples by way of new approach. The traditional triumphalist narrative of the Spanish Conquest have focused mainly on the activities of conquistadors in Mexico, and emphasized the inevitability and rapidity of military victory and religious conversion. It also tended to maximize differences between the civilizations particularly based on metonymic contrasts between Cortes and Montezuma. Its polished success stories have been accepted as a historical reality and thus prolonging “mythistory” for centuries. In contrast, the revisionist New Conquest History, which emerged from a renewed emphasis on paleographic toil and philological analyses on primary sources in Nahuatl(Nahuan languages), has underscored localized accounts and the roles of the indigenous that the mythistory of the Conquest tended to neglect. As a revisionist example, Matthew Restall raises a challenging question of whether Cortes could exert a strong influence on development of the events, and urges to reappraise the deep-rooted and complex territorial conflict related to the Tlaxcaltecas' fierce rivalry against the Aztecas. The Spanish conquistadors were heavily outnumbered by all of the undisclosed indigenous forces with altepetl(community)-based identities. Although the crucial factors such as disease, native disunity, and Spanish military technology represented by steel have explained the conquest's outcome, it is indispensable to pay closer attention to the neglected and unnoticed role of other Nahuatl-speaking tribes in the conquest of the Aztecas.
(Ajou University / kbpark@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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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삼자연합(Tripartisme) 시기 프랑스 공산당의 식민지 연합론 -국제 정세 인식과 반독점자본론을 중심으로-

저자 : 이푸름 ( Lee Pureum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7-27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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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삼자연합 시기 프랑스 공산당의 식민지 연합론에 대한 재고다. 전쟁 이후 프랑스 식민지들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지만, 프랑스 공산당은 식민지 분리에 반대하며 프랑스 연합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본고는 프랑스 공산당 중앙 기관지 레 까이에 뒤 꼬뮈니즘(Les Cahiers du Communisme)과 뤼마니떼(L'Humanite)의 분석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의 식민지 연합론이 그들의 국제 정세 인식과 마르크스-레닌주의 반독점자본론에 근거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당시 국제 정세를 앵글로색슨 반공주의와 제국주의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았고, 이는 그들의 식민지 유지 주장에 주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 정세 인식과 더불어 프랑스 공산당의 식민지 연합론에는 초국가적 거대 독점기업인 트러스트 세력의 위협에 대한 경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시각에서, 즉각적인 식민지 독립은 트러스트에 의한 경제 착취를 심화시킬 뿐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 본국과 식민지가 연합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 연구는 프랑스 공산당의 식민지 연합론을 국내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기존 연구의 흐름과 달리 국제 정치적 맥락과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rethink the French Communist Party(Parti Communiste Francaise: PCF)'s position on French colonialism in the era of Tripartisme after the Second World War. The postwar years witnessed the explosion of anti-colonialist movements in the French colonial world, but the PCF opposed their immediate independence and called for staying within the boundary of the French Union. Previous studies have generally linked the PCF's position to their status as a major party of the French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 Fourth Republic responsible for securing the national interests.
By analyzing the PCF's central organs, Les Cahiers du Communisme and L'Humanite, this study argues that the PCF's support of French unionism between metropolitan France and their colonies was based on their perceptions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s and their Marxist-Leninist theory on monopoly capitalism. The PCF noticed the revival of anti-communism and imperialism in the Anglo-Saxon world after WWII and found such trends as a significant threat to democracy and self-determination in world politics. Along with their assessment of the international realities, the PCF's economic theory of global monopoly capitalists, namely trusts, served as another critical pillar for French Unionism. In the eyes of the PCF, immediate independence of the French colonies would only exacerbate economic exploitation by trusts; therefore, metropolitan France and their overseas territories should unite against monopolistic capitalists. This study demonstrates the importance of the context of international politics and the ideology to get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PCF's French unionism with colonies.
(Ewha Womans University / frm9411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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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노서경, 최재인 외, 『19세기 허스토리: 생존자의 노래, 개척자의 지도』 (마농지, 2022), 372pp.

저자 : 박찬영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2-280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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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레이몽 아롱(변광배 역), 『지식인의 아편』 (세창출판사, 2022), 432pp.

저자 : 원동필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1-287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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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포스트코로나 문명 전환과 역사학

저자 : 김기봉 ( Kim Gi-bong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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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의 시대구분을 낳은 정도로 큰 변화가 일어났던 포스트코로나 시대 “역사학의 미래”와 “미래 역사학”에 대해 고찰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지구에서 인류의 삶은 거시 기생과 미시 기생의 두 과정으로 전개된다. 코로나19는 인간의 거시 세계에 미시 세계의 코로나바이러스가 개입해서 일어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종래의 역사학은 그런 질병이 발생한 과정에 관한 역사연구를 인간중심주의에 근거해서 전염병의 역사로 서술했다. 하지만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바이러스와 같은 비생명체도 행위자로 보는 “물질적 전환”의 패러다임이 역사학에 요청된다.
인류세에 일어날 인류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류의 시간을 행성 차원의 깊은 시간과 얽혀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문명사와 자연사를 통합하는 새로운 역사학 모델이 나와야 한다. 지금 인류에게는 역사학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이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역사학 모델을 대체하는 “미래 역사학”을 모색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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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대 서아시아의 팬데믹 -제1차 세계화 시대의 이집트 문명을 중심으로-

저자 : 유성환 ( Yoo Sung-hwan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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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시기, 특히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와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전역이 국제화되던 “제1차 세계화 시기”(기원전 1500-1200년)에 유행했던 감염병의 종류 및 전파·확산의 양상을 접근 가능한 문헌학적·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규명하는 데 있다.
단편적인 문헌학적 언급이나 고고학적 정황증거를 통해서는 고대 이집트 시대의 감염병과 관련한 확정적 정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우주의 총체적 질서에 반하는 역사적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장애나 질병 등을 조형예술을 통해 정확히 표현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염병과 관련하여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분야는 미라에 대한 의학적 검시라 할 수 있다. 첨단 연구방법을 통한 왕족 및 일반인의 미라 검시를 통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주혈흡충ㆍ촌충ㆍ선모충 등 다양한 기생충과 결핵ㆍ소아마비ㆍ천연두ㆍ말라리아ㆍ흑사병 등과 같은 감염병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1500-1200년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걸쳐 국제화가 진행되었다. 국제화에 따라 감염병이 이집트ㆍ시리아-팔레스타인ㆍ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감염병의 국제적 확산, 즉 범유행은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간 발신ㆍ수신되었던 외교서신을 통해 그 실체와 규모를 확인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집트의 왕궁 터에서 발견된 소위 「아마르나 외교서신」에 따르면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발병한 감염병이 이집트와 히타이트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히타이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아마르나 외교서신」에 언급된 감염병에 대해서는 말라리아ㆍ흑사병ㆍ야토병 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잠복기 및 증상 등을 고려할 때 이들 후보군에 속한 질병으로는 문헌학적 증거에 묘사된 질병의 확산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감염병의 존재는 확정할 수 있으나 그 정체는 여전히 규명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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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18세기 프랑스 사회의 매독에 대한 인식과 대응

저자 : 이성재 ( Lee Sung-ja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7-10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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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유럽에 처음 나타난 매독은 16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증상의 완화와 잠복기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병이 사라지고 있다는 낙관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종종 매독이 천재적 영감을 준다는 오해에 빠지기도 했다. 17세기에 들어 종교적 믿음이 사회 전체적으로 커지자 매독 환자는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수은을 통한 치료 노력이 가져온 신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더 큰 문제는 치료의 실효성에 있었다. 또한 예방 의학적 접근 역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17세기 말의 전쟁과 기근은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18세기는 인구가 국부의 원천이라는 생각 속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매독 문제에 개입한 시기였다. 특히 선천성 매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것은 1780년 파리에 성병 전문 병원인 보지라르의 창설을 가져왔다. 매독이라는 질병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 병원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매독 치료를 위해 모유의 형태로 수은을 사용한 방법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 여성을 실험과 치료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도덕적 비난은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병원이 보여준 매독에 대한 체계적인 의학 실험은 하나의 성과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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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세기 북미 두창 팬데믹 시기 영국군과 인두접종(smallpox inoculation) -의사 존 제프리(Dr. John Jeffries, 1745-1819)의 기록을 중심으로-

저자 : 이현주 ( Lee Hyon Ju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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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A. 펜(Elizabeth A. Fenn)은 2001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폭스 아메리카나: 1775-82 두창 대유행』에서 18세기 미국독립전쟁 동안 유행한 두창이 실질적으로 전 북미를 휩쓴 팬데믹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펜의 책은 국지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두창 발발 케이스 간의 연관성을 추적해 거시적 관점에서 북미 두창 유행의 규모를 밝히고, 독립전쟁 기간 동안 두창 유행의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의학적 함의를 연구한 저작으로 18세기 미국사에 기여한 바가 크다. 본 연구는 펜의 사학사적 공헌에 더해, 그러나 펜의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접근으로 그 방법을 달리해 18세기 북미 두창 유행의 시대를 재조명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전쟁기 영국군에서 의료인으로 활동한 미국인 충성파 의사 존 제프리의 기록을 중심으로 영국군 주둔지에서 두창 통제에 대해 살펴본다. 본 연구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제프리의 충성파로서의 여정과 그가 남긴 군사 및 의료 기록을 통해 봉쇄된 보스턴과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영국군 주둔지에서 두창 유행의 양상과 인두접종 실시 방법을 재구성한다. 특히 본 논문은 영국군 내 전투요원뿐만 아니라 기존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피난민, 종군민간인, 그리고 전쟁포로에 대한 영국군의 두창통제 정책과 인두접종의 사례를 발굴하는 것을 통해 전쟁기 군에 의한 두창 통제와 인두접종에 대한 논의가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특히 아동)을 포함하는 포괄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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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희생자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 -1865년부터 현재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도 노예제와 짐크로 보상 운동-

저자 : 권은혜 ( Kwon Eun-hye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17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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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재건기부터 현재까지 노예제 보상을 위해 싸웠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가들과 조직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1990년대 이후에야 노예제 보상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의 주요 의제로 등장한다. 사실 1865년부터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내전 중 연방정부가 약속했던 “40에이커”의 보상을 이행하라고 요구하며 스스로 운동을 조직했다. 이 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도 노예제 보상운동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별해 각 시기의 특징과 대표적 인물을 소개한다. 재건기에서 대공황 시기를 대표하는 노예제 보상 운동은 1890년대에서 1910년대 사이 칼리 하우스 주도의 전 노예 연금운동이다. 전 노예 연금운동은 노예노동과 내전 중 노예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임금을 연금으로 보상하는 입법을 지지했다. 민권운동 시기에는 오드리 무어, “흑인 선언”의 저자 제임스 포먼, 그리고 새로운 흑인 민족주의 및 분리주의 단체 블랙팬서당과 신아프리카공화국같은 단체들이 1948년 유엔의 제노사이드 반대 선언 및 1952년 독일의 홀로코스트 보상의 사례에 착안해 노예제를 흑인 제노사이드로 정의하며 미국 정부를 향해 노예의 후손에게 지연된 노예제 보상을 이행하고 흑인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20세기의 대부분 노예제 보상운동은 가난한 흑인 대중을 대상으로 한 흑인 민족주의 집단의 급진적 요구로 인식되었다.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보상이 실현된 1980년대 말 이후부터 중간계급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주류 민권운동단체, 학계가 노예제 보상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21세기 미국은 노예제 보상의 필요성과 방법을 두고 논쟁 중이다. 노예제 보상 운동은 미국 사회의 진정한 평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이자 희생자의 정의를 위한 사회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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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버크의 돼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정치적 공포의 문제-

저자 : 김철기 ( Kim Chulki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3-20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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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혁명의 원리를 저지하지 않으면 그 나라가 공포스러운 정치적 상태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견한 근거를 검토한다. 기독교와 기사도로 대표되는 유럽문명은 '숭고'와 '아름다움'이 결합되어 공포에 의존하면서 그 공포를 중화하는 관습 체계였다. 프랑스혁명의 원리가 이러한 사회 관습을 파괴하면, 공포를 중화할 기능도 사라지게 되고, 결국 국가의 공포스러운 작동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버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혁명 동조자들을 아름답지 못한 동물로 꼽았었던 돼지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사회 관습 중 오래된 것들만 옹호하고 비교적 새롭게 형성되는 관습의 존재와 역할을 사실상 배제하고 있다. 18세기 영국은 버크가 말하는 '오래된' 유럽 사회보다 상업과 무역의 팽창으로 역동적인 사회에 가까웠고, 중간계층을 중심으로 '공손함'과 '세련됨' 같은 상업사회와 관련된 관습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크가 판단한 사회적 기반은 편협했고, 따라서 그가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공포를 예견했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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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파르테논의 기능과 역할 재고

저자 : 이상덕 ( Lee Sang-duk )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2-235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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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위에는 미케네 시대로부터 성채가 있었으며, 상고기에는 헤카톰페돈과 고(古) 아테나 신전의 두 건물이 있었다. 이 두 건물 사이에는 하나의 제단만이 존재했다. 페르시아 전쟁 후, 파르테논의 전신 헤카톰페돈이 세워졌지만, 곧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만다. 약 30년이 지나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보고를 옮겨오면서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아테네 전역에 아테네 제국을 선전하는 건축 활동을 개시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바로 파르테논이었다. 파르테논은 폐허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빠른 시간 안에 지어졌다. 혹은, 급히 지어야 해서 폐허의 재료를 활용했다. 에렉테이온은 고(古) 아테나 신전의 폐허를 빗겨 세워졌다. 아테나 폴리아스의 오래된 나무 신상은 고(古) 아테나 신전에서 에렉테이온으로 옮겨졌다. 상고기와 고전기의 이 건물들 사이에는 완벽하게 증명하기는 어려운 관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를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최대한 파악함으로써 파르테논의 기능이 숭배보다는 봉헌물의 보관에 있었음을 드러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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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역사기행 : 남부 아프리카 마풍구웨와 그레이트 짐바브웨 문명 답사 -영국 식민주의의 왜곡과 부정을 파헤치며-

저자 : 김광수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6-267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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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평 : 임지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휴머니스트, 2021), 640pp.

저자 : 권윤경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8-276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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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서평 : 세르히 플로히(허승철 역) 『체르노빌 히스토리: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 (책과함께, 2021), 535pp.

저자 : 김동혁

발행기관 : 한국서양사학회 간행물 : 서양사론 152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7-283 (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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