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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소녀필지(少女必知)』의 특징과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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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필지(少女必知)』의 특징과 지향

Characteristics of So'nyeo Pilji(少女必知), and the Aspirations behind it

이정민 ( Lee¸ Jung-min )
  • : 한국사상사학회
  • : 한국사상사학 70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4월
  • : 75-104(30pages)
한국사상사학

DOI

10.31309/SKHT.70.202204.3


목차

머리말
1. 『소녀필지』의 내용과 특징
2. 『소녀필지』에 담긴 여성의 현실과 대안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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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20년대 편찬된 조인석(趙寅錫, 1879~1950)의 여성교육서 『소녀필지(少女必知)』를 통해, 식민지시기 유교 관습의 척결과 문명개화를 주장한 지식인이 집필한 여성교육서의 특징과 여성 인식을 검토하였다. 저자는 신구 문명의 갈등으로 촉발된 가족의 붕괴, 근대자본주의와 식민지배라는 현실로 야기된 여성 빈곤의 현실을 분석하고, ‘신구 문명의 공존’ 및 ‘노동을 통한 가난의 극복’이라는 두 화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한 기존의 여성교육서와는 매우 다르다. 성현의 언행 대신 본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서술하였고,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성녀(聖女)’ 대신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여성들의 사례를 수록하였다. ‘가문의 번성을 위한 여성 교육’을 중시한 종래의 여성교육서와 달리 여성 교육을 ‘여성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남녀유별 의식보다 부부간의 애정과 위생의 문제를 거론한 것도 이 책의 근대적 특징이다.
저자는 구여성과 신청년 간의 갈등으로 인한 이혼과 별거의 증가, 구여성 시모와 신여성 며느리 간의 갈등 등 신구 문명의 충돌에 주목하였다. 이에 구여성에게는 구습의 탈피와 신지식 습득을 강조하고,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혼당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반면 신여성에게는 서구 문명과 가난한 조선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고, 구생활의 노동과 살림을 배워 현실에 안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둘 다 여성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 조언이었다고 하겠다.
저자는 또 자본주의가 유입되던 식민지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이에 돈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하고 가난을 합리화하지 말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를 통해 가족의 붕괴를 막고 가난을 극복하며, 무엇보다도 경제의 멸망을 막는 것이 식민지하에서 종족을 보전하는 궁극의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Examined in this article is a Female Education text called So’nyeo Pilji (少女必知, What Every Girl Should Know), authored in the 1920s by a Korean modern intellectual named Jo In-seok(趙寅錫, 1879-1950).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Jo In-seok called for the abolition of old Confucian practices, and strongly supported the idea of cultural enlightenment. This text effectively reveals Jo’s perception of females, as well as certain ‘tasks’ which he thought women should take on in the future. In his eyes, the two biggest problems that were threatening the very survival of the Korean females were collapse of families and poverty, which were brought on by clashes between old and new ways and not to mention the advent of modern capitalism to a colonized land, so his suggestions were all based on that very observation.
This book wa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other female educative texts of the time, which had mostly dealt with traditional values. Words from ‘Past sages,’ the usual component of traditional texts, were replaced by stories and episodes from the author’s past experience and even imagination. Instead of promoting females who could only be called as Women saints(聖女) symbolizing Confucian values, Jo’s book is filled with stories of females stuck in tough economic situations. Unlike past female educative texts that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female education onlhy in terms of ‘Building prosperous families,’ Jo claimed that female education was imperative because it was vital to the women’s survival. He also discussed the importance of ‘love(affection)’ between spouses and the issue of sanity, instead of stressing on traditional notions like ‘different roles of spouses.’
Jo In-seok was keenly aware of the ‘clashes’ that were happening between old and new ways, represented by sudden increase in separation and divorces between spouses (especially between new-age males and old-style females) or conflicts between females (particularly between old-style mothers-in-law and new-age daughters-in-law). He asked the old-age females to break free from old customs and learn new things, and especially not to allow themselves to be divorced in economically handicapped situations. Then he also asked the new-age females to acknowledge the rift between Western civilization and the Joseon society’s reality, and try to eventually fit in by familiarizing themselves with old labor and living styles. Both suggestions were of a nature that prioritized female survival.
Jo was also very concerned about female poverty in colonized Joseon, which was also witnessing at the time the onset of Capitalist aspirations unfolding on a larger scale. He pleaded that the Joseon people let go their prejudice and misconception of money, do not in any way justify poverty, and engage in proper labor to overcome their poor reality. It was his belief and his suggestion, that only by doing so the Joseon society could prevent collapse of the families, further spreading of poverty, and ultimately keep the economy in tact and save the Korean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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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944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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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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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작의 『안락집』에 제시된 두 가지 주장에 대한 후대의 관점-『유심안락도』·순지·요세·나옹·경허를 중심으로

저자 : 이병욱 ( Lee By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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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도작의 『안락집』에서 제시된 두 가지 주장을 소개하고, 그 주장에 대한 후대의 관점을 살펴본다. 첫째, 도작의 『안락집』에서는 도솔천에 태어남과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남을 회통한다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남이 도솔천에 태어남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한 것이 『유심안락도』와 『경허집』이다. 『유심안락도』에서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서 도솔천에 태어남이 쉬울 수 있고,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남이 쉬울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경허집』에서는 이처럼 견해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경전과 논서에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방편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느 견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도작의 『안락집』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견해를 제시한다. 도작은 공사상에 근거한 정토사상과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제시한다. 이것은 상근기 수행자는 유심정토에 들어가고, 중근기와 하근기 수행자는 유심정토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모습의 정토[相土]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도작은 하품(下品)의 중생, 곧 중근기와 하근기 수행자도 유심정토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염불 수행을 통해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도작의 주장은 충돌된다. 이러한 도작의 주장에 대해 순지는 공사상에 의거한 정토사상과 유심정토를 수용하고, 원묘국사 요세는 유심정토를 제시한다. 그에 비해 나옹혜근은 염불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도작의 서로 충돌하는 견해는 한쪽은 순지와 요세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나옹혜근으로 이어진다.


In this article, I introduce two arguments presented in Daochuo(道綽)'s Paradise Collection(安樂集), and look at the perspectives of later generations about two arguments. First, in Daochuo's Paradise Collection, it is said to reconcile being born in tuṣita heaven and being born in the western paradise of pure land, but in fact, being born in the western paradise of pure land is superior to being born in tuṣita heaven. Yusimanlakdo(遊心安樂道) and Gyeongheojip(鏡虛集) have specifically answered these two arguments. In Yusimanlakdo, it can be easy to be born in tuṣita heaven, and it can be easy to be born in the western paradise of pure land, according to a person's personality. And in Gyeongheojip, it is said that this difference of opinion occurs because the scriptures and treatises use expedients to guide sentient beings. So, it is said that there is no need to stick to one view. Second, in Daochuo's Paradise Collection, a conflicting view are presented. Daochuo presents the pure land idea based on śūnyatā and citta-mātra pure land. This leads to the superior faculties entering citta-mātra pure land, and middling and lesser capacity entering the form of pure land without knowing the meaning of citta-mātra pure land. However, it is said that even the lower level of sentient being, that is, middling and lesser capacity, can realize the principle of non-living through remembrance of the buddha, even if they do not know the meaning of citta-mātra pure land. At this point, Daochuo's argument is conflicted. In response to this claim of Daochuo, Sunji accepts the pure land idea based on śūnyatā and citta-mātra pure land, and Yose presents citta-mātra pure land. On the other hand, Naong claims that one can reach the world of enlightenment through remembrance of the buddha. In this way, Daochuo's conflicting views lead to Sunji and Yose on one side, and Naong on the other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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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 고대의 정토신앙과 신정도시(神政都市)

저자 : 조경철 ( Jo Gyung-cheol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6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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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익산을 미륵정토의 도시 신도(神都)로 만들었다. 미륵사의 3개의 탑은 하생한 미륵이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 심으면 일곱 번 수확한다는 일종칠확의 미륵경의 내용을 떠올리는 미륵사의 1천 3백여개의 7엽의 녹유연목와는 풍요로운 미륵정토의 구체적인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미륵사의 쌍석탑은 법화경 견보탑품에 근거한 것으로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이 어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문왕은 동경에 여러 개의 이불병좌상을 조성하였다. '금륜' 즉 전륜성왕을 자처한 문왕은 구국-중경-상경-동경 등 사방으로 수레를 몰며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 발해의 통합을 도모했다. 마지막 동경에서는 석가불과 동방의 부처인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있는 이불병좌상을 여럿 만들어 동경이 전륜성왕(과 미륵)이 다스리는 부처님의 도시 신경(神京)임을 드러냈다. 발해 동경에서도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이 어우러져 있는데 이는 백제(와 신라)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후고려 궁예는 철원에 처음 도읍을 정했다가 개경으로 옮긴 후 다시 철원으로 옮겼다. 다시 철원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서울 신경(新京)이라 했는데 이는 이전 철원이 미륵을 자처한 궁예가 통치하는 미륵의 도시 신경(神京)이 되었다는 의미다. 궁예는 철원에 발삽사를 세워 미륵과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를 안치하고 별자리 신앙 특히 북두칠성 신앙을 강조했다. 특히 발삽사는 바로 '발타(勃陀=Buddha, 부처, 불)'의 발(勃), 삽다(颯哆=Sapta, 7)의 삽(颯) 두 글자에서 따왔다고 생각한다. 곧 '발타삽다'의 줄임말 발삽으로, 발삽은 번역하면 불칠(佛七), 곧 칠불(七佛)이 된다.
백제의 무왕은 익산에, 발해의 문왕은 동경에, 후고려 궁예는 철원에 미륵정토의 도시 신도 또는 신경을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미륵신앙을 주로 하면서 법화신앙과 점찰신앙 치성광여래 신앙 등등이 나라 사정에 따라 결합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 세 왕이 모두 죽은 뒤 신정도시는 계속 계승되지 못하였다.


King Mu of Baekje built Mireuksa Temple in Iksan and made Iksan the city of Mireuk Pure Land as a God city. The three pagodas of Mireuksa Temple mean that the descendant Maitreya rescues sentient beings through three sermons. The 7-leaf lotus-patterned tile of Mireuksa shows the world of Mireuk Jeongto, where once a seed is sown, it can be harvested 7 times. The twin stone pagodas of Maitreya Temple are based on the Lotus Sutra, and it can be seen that the Maitreya faith and the Beophwa faith are in harmony.
King Mun of Balhae created several two Buddhas sitting side by side in Donggyung[東京]. King Mun, who claimed to be the 'Geumryun', or the Holy king driving a cart[轉輪聖王], drove a cart in all directions such as Guguk[舊國], Chongqing[中京], Sanggyeong[上京], and Donggyung, spreading Buddhism and promoting the unification of Balhae. In the last Donggyung, he made several two Buddhas sitting side by side in which Shakyamuni Buddha and Buddha Dabo sit side by side, revealing that Donggyung is the God city of the Buddha, ruled by the King of Wheels (and Maitreya). Even in Donggyung of Balhae, the Maitreya faith and the Beophwa faith are mixed, which is thought to be the influence of Baekje (and Silla).
Hu-Goryeo[後高麗] Dynasty, Gungye first established the capital in Cheorwon, then moved to Gaegyeong and then to Cheorwon again. When it was moved back to Cheorwon, it was called the new Seoul[Singyeong, 新京], which means that the former Cheorwon became the God City[[Singyeong, 神京] of Maitreya, ruled by Gungye, who claimed to be Maitreya. Gungye built a Balsapsa temple in Cheorwon to enshrine the Buddha Chiseonggwang, which symbolizes Maitreya and the North Star, and emphasized the belief in the constellation. In particular, I think that Balsapsa[勃颯] Temple is derived from the two letters 'balta' (勃陀=Buddha) and sapta(颯哆, 7). Balsapsa can be called Chilbulsa[七佛寺].
King Mu of Baekje tried to establish a city of Mireukjeongto in Iksan, King Mun of Balhae in Donggyung, and Hu-Goryeo in Cheorwon. While the Maitreya faith was mainly practiced, the Beophwa faith, the Divination religion, the Buddha Chiseonggwang faith, etc. were combined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of the country. However, after the death of all three kings of the three kingdoms, Citys ruled by Gods[神政都市]did not continue to succ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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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본정토사상의 범부관(凡夫觀)

저자 : 김춘호 ( Kim Choon-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6-93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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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본정토사상을 이끌었던 호넨(法然), 신란(親鸞), 잇펜(一遍)의 범부관을 살펴보았다. 특히, 호넨의 전수염불(專修念佛), 신란의 타력신심(他力信心), 잇펜의 십일불이(十一不二) 사상이 그들의 범부관과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구명하여 일본정토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자하였다.
호넨은 인간내면의 범부성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강조한다. '정토문(淨土門)은 우치(愚癡)로 돌아가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다'라고 한 그의 말에서처럼, 범부로서의 자각을 중시하며, 이는 '자각형 범부관'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아미타불이 여러 선행이나 지혜, 지계 등을 본원으로 하지 않고, 칭명염불을 선택한 것은 범부의 왕생을 위한 것인 까닭이라고 하여 오로지 칭명염불의 전수(專修)를 주장한다.
신란은 범부중생이 염불이라는 수승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미타불에 의해 주어진 신심(信心)에 의한 것이지, 범부 스스로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수동형(受動形) 범부관'인 셈이다. 따라서 그러한 신심이야 말로 극락왕생의 정인(正因)이며, 염불 역시 범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에 의해 '해지는 것'이라는 타력신심사상을 전개시킨다.
잇펜의 경우 범부중생의 현상적 모습은 번뇌구족(煩惱具足)의 존재지만 본래면목은 이미 왕생이 결정된 존재라고 보는 '본각형(本覺形) 범부관'을 제시한다.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십일불이사상은 법장비구(法藏比丘)가 십겁(十劫) 전에 성취한 깨달음과 현재 중생의 일념왕생(一念往生)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본각형 범부관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view on unenlightened people of Patriarchs Honen (法然), Shinran (親鸞), and Ippen (一遍) who led Japan's Pure Land Buddhism. In particular, this study intended to understand the trend within Japanese Pure Land Buddhism by investigating how the thought of each patriarch: Honen's Senju Nembutsu (專修念佛, to practice the path of enlightenment only by chanting Buddha's name), Shinran's Tariki Shinjin (他力信心, faith is endowed by Amitabha Buddha), and Ippen's Juuichi Fuji (十一不二, Amitabha Buddha's enlightenment achieved very long time ago is basically the same as an unenlightened person's rebirth in the Pure Land after chanting 'I faithfully bow or depend on Amitabha to guide me'), are interconnected with their view on unenlightened people.
Honen emphasized a dispassionate reflection on the unenlightened-ness inside human mind. As he said, 'The Pure Land faith is to return to ignorance and stupidity and be reincarnated in paradise,' he places importance on becoming aware of oneself as an unenlightened person, which can be called a 'self-awareness'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In addition, he insisted on practicing the path of enlightenment only by chanting Buddha's name since the reason Amitabha Buddha did not pursue various good deeds, wisdom, wisdom, precepts, etc., as the original vow, and chose chanting Buddha's name is for the unenlightened people's rebirth in the other world.
Shinran believed that unenlightened people can perform the noble act of chanting because of the faith given to them by Amitabha Buddha, not because of their own might. In other words, it is a 'passive'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From there, he unfolded the idea of Tariki Shinjin that such a faith is the very primary cause for the blissful rebirth in the Pure Land and Buddha chanting is also not unenlightened people's 'doing' but is 'done' by Amitabha Buddha.
Ippen proposed the 'primal awakening'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that the phenomenal form of unenlightened people is the ones that are unable to do good deeds but only evil deeds while engulfed with passion but their rebirth in other worlds already has been decided. The idea of Juuichi Fuji that represents him is that Amitabha Buddha's enlightenment achieved very long time ago is basically the same as an unenlightened person's rebirth in the Pure Land through ardent recitation of the name of Amitabha Buddha. It is clear that this idea is based on his 'primal awakening'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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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신론』의 마하연체(摩訶衍體)와 마하연자체상용(摩訶衍自體相用)을 둘러싼 원효의 해석과 의의

저자 : 김천학 ( Kim Cheon-ha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2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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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신론』의 마하연체와 마하연자체상용을 둘러싼 원효의 해석을 중심에 두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왜 '체'와 '자체'인지, 마하연자체상용의 독법은 어떻게 되는지. 진여·생멸문과 삼대의 관계 설정의 문제들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이것들이 『기신론』 주석가의 『기신론』 이해의 큰 틀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원효의 해석에서 지론사나 화엄가의 영향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원효의 해석이 법장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장은 원효의 『별기』와 『소』를 둘 다 참조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구축해간다. 다만, 진여·생멸문과 삼대의 관계에서도 보이듯이 법장이 반드시 원효의 사유를 따르지는 않는다. 사유구조와 문장은 가지고 오지만 결론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원효와 법장을 비교할 때 문헌학적인 엄밀성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본고의 문제의식에 대한 원효의 『별기』와 『소』의 관계를 검토해볼 때 두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별기』가 서술형인데 비해 『소』는 그것을 명확히 개념화하려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별기』가 종교적 수행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경향성이 발견되는 반면에 『소』는 이론의 정합성을 추구한다. 향후 원효의 마하연체와 마하연자체상용에 대한 해석이 『기신론』 해석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확대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finds its meaning by focusing on Wonhyo's interpretation of the essence of Mahāyāna(摩訶衍體) and the essence itself, characteristics, and function of Mahāyāna(摩訶衍自體相用) in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大乘起信論). In particular, the issues of why essence(體) and essence itself(自體), the reading method of the essence itself, characteristics, and function of Mahāyāna(摩訶衍自體相用),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usness aspect(眞如門), the arising and ceasing aspect(生滅門), and three kinds of greatness 三大 were mainly deals with. This is because these are important issues that determine the broad framework of the understanding of the structure of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of the commentator.
Wonhyo's(元曉) interpretation of this issue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Fazang(法藏), and Fazang builds his own thought by referring to both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起信論別記) and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起信論疏) of Wonhyo. However, as seen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usness aspect, the arising and ceasing aspect, and three kinds of greatness, Fazang does not necessarily follow Wonhyo's thought. The reason is that Fazang brings Wonhyo's thought structure and sentences, but his conclusion is different from Wonhyo's. This point requires philological preciseness and objectivity in the case of a comparison of Wonhyo and Fazang.
Two characteristics can be found when exam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and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of Wonhyo in this part. The first is that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is a narrative type, whereas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tends to conceptualize its contents. Second is that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is inclined to interpret from the view of a religious practitioner, while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is aca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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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역(日域)' 인식의 형성과 추이

저자 : 秋明燁 ( Choo Myung-yeop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5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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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곳으로서의 '일역'은 '중국' 용례처럼 왕조를 넘어서는 공간적 자의식을 보여주는 아국(我國)의 별칭이면서 중국과 구별되는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에서는 한 이래 일찍부터 '일역'을 활용해 고조선 지역을 지칭하였고 이후 '일역'은 요(遼)·송(宋)까지 중국 중심의 천하관념 속에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8~11세기에 '일역'은 서역(西域)을 염두에 두고 자칭되었고 이는 불법(佛法)의 동류(東流)라는 문화적 배경 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결국 '일역'은 11세기 고려 팔방 천하 속의 '일방(日邦)' 자칭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자칭의 흐름은 12세기 중엽까지 이어졌지만, 12세 후반 이후 '일역'은 고려가 있는 지역을 자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의미가 점차 희석되고 일본과의 관계 진전 속에서 동쪽 해 뜨는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서의 의미를 중심으로 일본지역을 지칭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3세기 후반에 가서는 몽골의 일본 원정 속에서 '일역'은 일본을 지칭하는 의미로 주로 활용되었다. 동일한 시기에 아침 해가 선명하다는 의미의 '조선'이 아국의 대명사로서 '일역'을 대신하여 활용되면서 '일역'은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이는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자의식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 시기에도 '일역'은 대개 일본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종종 중국과 대비되면서 일반명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용된 경우가 있다. 그런 인식 속에서 '일역'은 활용 빈도도 점차 낮아진 것으로 여겨진다.


The 'Ilyuk(日域)' as an area of sunrise showed the spatial self-consciousness that goes beyond the dynasty, such as the example of 'China'. That name was showing the characteristics of an area as distinct from China. Since early in China, the Gojoseon area had been referred to using 'Ilyuk' since the beginning of the year. The Han(漢) dynasty had referred to 'Ilyuk' in the Chinese-centered concept of the world.
However, the Silla had called oneself Ilyuk in the 8th century. In Silla, it was thought that the Ilyuk was symmetrical to the west. The Ilyuk title was formed based on the cultural background of the eastern spread of Buddhism. Eventually, the Ilyuk title resulted in the calling oneself 'ilbang(日邦)' on the background of the Haedongcheonha(海東天下) in the 11th century.
Such self-proclaimed trends continued until the middle of the 12th century, but in the late 12th century, Goryeo began to refer to the 'Ilyuk' as Japan. In particular in the late 13th century, Goryeo refered to the 'Ilyuk' as Japan in Mongolia's expedition to Japan. At the same time, 'Joseon(朝鮮)' which means that the morning sun is bright, was used as a pronoun in Korea instead of 'Ilyuk', and it gradually disappeared from memory. That was also set in the background of changes in self-consciousness that emerged in the Mongol interferenc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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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설장수의 인적 네트워크와 『직해소학』의 편찬

저자 : 양강 ( Yang Ka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9-19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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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귀화 지식인 설장수의 유학지식, 경세론, 외국어능력을 통해서 고려와 조선 사회에 기여한 바를 살펴보고 그 활동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려후기의 귀화인은 종족별·시기별로 다양하였고 지식인 귀화가 증가하였는데 설장수는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공민왕 7년(1358)에 부친을 따라 고려로 귀화한 그는 과거에 급제하고 성리학을 매개로 지식인들과 교유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는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에서 이루어진 성리학의 연구를 통해서 동료 유학 지식인들과 함께 경세의식을 견지하고 현실개혁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설장수는 대명외교 활동에서도 활약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전에는 의례적인 성절사·천추사로 명에 파견되어 고려·명 양국의 갈등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 고려 왕조의 수호에 앞장섰다.
조선 건국후 출사하여 대명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장수는 사역원의 통역관 인재양성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태조 3년(1394)에 상서문을 올려 한어 능통자는 양성하고 유학적 기본 지식과 소양 또한 함께 갖춰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유학의 사회적 실천을 위한 기초교육으로 『소학』을 중시하였다. 이는 그의 인적 네트워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소학』을 백화문으로 풀이하여 『직해소학』을 편찬하였다. 『직해소학』은 이후 역학뿐만 아니라 승문원 이학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고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성리학의 학습서로서 보급되었다. 말하자면 귀화인 설장수는 유학지식과 한어의 능통함으로 고려와 조선왕조의 체제유지에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This study tried to examine the contributions of naturalized intellectual Seol Jang-su to Goryeo and Joseon society through his knowledge of studying abroad, theory of governance, and foreign language skills, and to examine what historical significance his activities have.
Naturalized people in the late Goryeo Dynasty varied by race and period, and naturalization of intellectuals increased, and Seol Jang-su was a representative figure. Naturalized to Goryeo following his father in the 7th year of King Gongmin (1358), he passed the imperial examination in the past, communicated with intellectuals through Neo-Confucianism, and formed a human network. Through the study of Neo-Confucianism conducted at Sungkyunkwan in the 16th year of King Gongmin (1367), he maintained a sense of the world and participated in real-life reform politics with fellow Confucian scholars. Seol Jang-su was also active in diplomacy toward Ming activities. Before the Wihwado retreat, he was dispatched to the order as a ceremonial Seongjeolsa(聖節使) or Cheonchusa(千秋使) to deal with conflicts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after the Wihwado retreat, he took the lead in protecting the Goryeo Dynasty.
After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he took part in diplomacy toward Ming activities. In the 3rd year of King Taejo's reign (1394), Seol Jang-su put forward suggestions for reforming the talent training system for interpreters of the Sayeok-won(司譯院), saying that Chinese proficient people must possess basic knowledge and literacy of Confucianism. In particular, he valued < Sohak(小學) > as a basic education for social practice of Confucianism. This would have been influenced by his human network. In addition, he annotated < Sohak > in Baekhwamun(白話文) and compiled < Jikhae-Sohak(直解小學) >. < Jikhae-Sohak(直解小學) > was later adopted as an examination subject for the Yeokhak(譯學) and Sungmun-won's Ihak(吏學), and during the reign of Sejong, it was distributed nationwide as a study book of Neo-Confucianism. In other words, naturalized Seol Jang-su contributed to the maintenance of the system of Goryeo and Joseon dynasties with his knowledge of Confucianism and proficiency in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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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 전기 유교식 불효의 출현-성종 대 이심원 불효 사건을 중심으로-

저자 : 김가람 ( Kim Ka-ram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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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유교식 효와 효행을 통해 유교적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효는 절대적 가치가 되어 조선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불효이다. 효를 강조할수록 효의 대척점에 있는 불효 또한 부각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종 대에 발생한 이심원 불효 사건은 효가 절대화되며 불효가 부각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 당시 죽은 이심원은 중종 이후 충신으로 인정받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효자의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성종 대에 고모부 임사홍의 탄핵에 깊게 관여하였다가 조부 이합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불효죄로 고발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불효죄에 대해서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격론이 발생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격론의 내용을 통해 불효에 대해 접근하였다. 이 과정에서 효와 불효의 변화를 파악하고자 효/비효(非孝)/불효의 설명틀을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살펴본 결과 이심원의 불효 사건이 발생한 15세기 후반 불효죄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불효의 범위 확대이다. 이는 효와 불효의 중간 영역에 속하면서 효도 불효도 아니던 비효가 불효로 전환한 것이다. 이심원이 조부에게 대든 행위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불효의 주관적 성격 강화이다. 효행 대상자의 주관에 따라 불효죄는 성립도 해소도 될 수 있었다. 셋째는 불효의 구속력 강화이다. 효의 가치 절대화는 효를 부정하는 불효에 대한 엄격한 처벌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유교 사회에서 통용되는 효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출현하였다는 점에서 유교식 불효라 할 수 있다.


After the founding of the country, Joseon tried to establish a Confucian social order through Confucian filial piety. In this process, filial piety became an absolute value and exerted influence on Joseon society. It is not good to show this well. The more filial piety was emphasized, the more unfilial piety was emphasized, and it became a social issue. In this context, the case of Lee Simwon's unfilial piety that occurr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shows the process of absoluteizing filial piety and highlighting unfilial piety. Lee Simwon, who died at the time of Muosahwa, was recognized as a loyalist after King Jungjong, but while he was alive, he lived under the label of a bad son. This is because he was deeply involved in the impeachment of his uncle Lim Sa-hong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nd was accused of being ineffective due to the deterioration of his relationship with his grandfather Lee Hap. However, since there was a dubious part about his crime of infidelity, several heated debates occurred in the court.
This article approached unfilial piety through the contents of this heated debate. In this process, an explanation frame of filial piety/nonfilial piety/unfilal piety was used to grasp the change in filial piety and unfilial piety. As a result of examining this, there were three characteristics of the crime of insolence in the late 15th century, when the case of Lee Simwon's insolence occurred. The first is the widening of the range of unfilial piety. This is the transition of nonfilial piety, which belonged to the middle area between filial piety and unfilial piety, and was not filial piety, to unfilial piety. The act of Lee Simwon against his grandfather is a representative example. The second is the strengthening of the subjective nature of unfilial piety. Depending on the subjectivity of the person subject to filial piety, the crime of filial piety could be established and resolved. The third is strengthening the binding force of unfilial pirety. The absoluteization of the value of filial piety has led to strict punishment for unfilial piety, which denies filial piety. In addition, this can be said to be a Confucian-style filial piety in that it emerged while absoluteizing the value of filial piety used in Confuci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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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기식 『유교유신론』의 집필 계기와 '유교청년' 기획

저자 : 이현정 ( Lee¸ Hyun-j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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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유교 담론 중에서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송기식의 『유교유신론』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유리된 채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유신론』에서 제시하는 '유교 현대화론'은 저자를 비롯한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이자, 1920년대 신문 매체의 담론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였다.
송기식은 자신이 지닌 유교 지식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다수의 서간문을 주고받았다. 선배그룹으로부터의 영향은 물론이고, 특히 동료/후배그룹과는 서간문을 통해 후진 양성에 방점을 둔 교육 사업을 중시하고 있음을 논했다. 이러한 후진 양성에 대한 관심은 종국에 『유교유신론』 집필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집필 내용은 다시 동료에게 요약 전달되면서 주변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유교 지식인 내부의 논의와 더불어, 『유교유신론』은 집필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1920년대 신문 매체의 유교 비판 논쟁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 후 현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후속 세대 양성에 관심을 갖고 청년들의 비판과 세대론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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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지식인의 서양 번역서 독해방식: 전병훈,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소진형 ( Soh¸ Jean-h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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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의 분석을 통해 서양식 교육을 받지 않은 조선 지식인의 서양서적 독해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한 글로 평가되어 왔지만, 실제 이 텍스트의 서양사상 부분을 검토해보면 그가 서양사상을 그 자체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기존 번역서 중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발췌하고 모아서 구성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특히 『정신철학통편』의 2권 14장, 15장을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출판되었던 번역서 및 개론서와 비교해보면, 전병훈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고 서양사상을 수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초가 발견된다. 전병훈이 인용한 책들은 『법의(法意)』, 『철학요령(哲學要領)』, 『철학강요(哲學綱要)』, 『심리학개론(心理學槪論)』 등으로, 그 번역자들은 엄복, 채원배, 왕국유였다. 이들은 서양 철학 개념에 대한 번역어가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태극(太極), 리(理), 성(性)과 같은 동양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번역에 반영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어의 선택은 전통적인 언어로 책을 독해하는 전병훈과 같은 사람들의 자의적 독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전병훈의 서양철학서의 독해방식을 검토하고 근대 초기교육의 체계 없이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양 사상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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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녀필지(少女必知)』의 특징과 지향

저자 : 이정민 ( Lee¸ Jung-mi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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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20년대 편찬된 조인석(趙寅錫, 1879~1950)의 여성교육서 『소녀필지(少女必知)』를 통해, 식민지시기 유교 관습의 척결과 문명개화를 주장한 지식인이 집필한 여성교육서의 특징과 여성 인식을 검토하였다. 저자는 신구 문명의 갈등으로 촉발된 가족의 붕괴, 근대자본주의와 식민지배라는 현실로 야기된 여성 빈곤의 현실을 분석하고, '신구 문명의 공존' 및 '노동을 통한 가난의 극복'이라는 두 화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한 기존의 여성교육서와는 매우 다르다. 성현의 언행 대신 본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서술하였고,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성녀(聖女)' 대신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여성들의 사례를 수록하였다. '가문의 번성을 위한 여성 교육'을 중시한 종래의 여성교육서와 달리 여성 교육을 '여성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남녀유별 의식보다 부부간의 애정과 위생의 문제를 거론한 것도 이 책의 근대적 특징이다.
저자는 구여성과 신청년 간의 갈등으로 인한 이혼과 별거의 증가, 구여성 시모와 신여성 며느리 간의 갈등 등 신구 문명의 충돌에 주목하였다. 이에 구여성에게는 구습의 탈피와 신지식 습득을 강조하고,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혼당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반면 신여성에게는 서구 문명과 가난한 조선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고, 구생활의 노동과 살림을 배워 현실에 안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둘 다 여성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 조언이었다고 하겠다.
저자는 또 자본주의가 유입되던 식민지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이에 돈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하고 가난을 합리화하지 말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를 통해 가족의 붕괴를 막고 가난을 극복하며, 무엇보다도 경제의 멸망을 막는 것이 식민지하에서 종족을 보전하는 궁극의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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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탐라기년』에 담긴 심재 김석익의 의식과 시각에 대하여

저자 : 김새미오 ( Kim¸ Saemi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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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심재 김석익(心齋 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대한 제반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 글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탐라기년』의 서지사항을 정리하였고, 실증적 사실추구, 유교문명의 제고, 표류에 대한 재인식의 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용과 시각을 정리하였다. 이어 저작이 차지하는 학술적 위치를 정리하였다.
『탐라기년』은 필사본과 연활자본이 전해진다. 원본인 필사본은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연활자본은 1918년 영주서관에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탐라기년』은 탐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심재는 본격적인 제주 역사기록에 앞서 「외서(外書)」라는 항목을 두어 탐라시대를 따로 구분하였다. 탐라는 제주사람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지만, 문헌기록은 많다고 할 수 없다. 심재는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외서」를 써 내려갔고, 이를 통해 탐라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심재는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역사로 해석하려하지 않았다. 이에 『탐라기년』을 서술하면서, 부족하거나 보충 서술이 필요한 부분은 '부(附)' '안(按)'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기술하였다. 이런 방식을 통해 심재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 후세의 검증을 기다렸다.
유교문화에 대한 심재의 기술은 제주도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살펴보았다. 제주는 무속 문화가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심재는 병와 이형상의 신당철폐 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유교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교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조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며, 이는 일제강점기 유교지식인의 문투(文鬪)로 평가할 수 있다. 바다에 관한 인식 역시 주목된다. 이는 제주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이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재가 기록한 표류와 표착에 관한 자료는 예전에 있던 다른 서적들 보다 그 양이 많다. 그만큼 심재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재의 『탐라기년』은 지금까지 제주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다. 기존에 있던 역사저술이 대부분 외부인이 제주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면, 『탐라기년』은 제주사람이 제주를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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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와 의미

저자 : 이민기 ( Yi¸ Min-ki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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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圜丘)제사는 유교적 성격을 가진 국가의례 가운데 위상이 가장 높은 제사이다. 고려왕조는 정월 상신일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인 상제와 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에게 송아지[犢]을 잡아 바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물을 처리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가운데 특이점을 도출하여 환구제사의 성격과 의미를 가늠해 보았다.
고려 환구제사에서는 희생이 신을 맞이하기 위해 적합한 상태인지 점검하고, 도살한 뒤 머리·피·몸통을 분리한다. 분리된 희생의 머리와 피는 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신단계에서 사용되었다. 몸통은 삶은 후 별도의 제기에 담아 각 신좌 앞 제사상에 올렸으며, 국왕·태위·광록경이 헌작한 다음, 요단에서 제사상에 올렸던 고기와 제물들을 태워 신을 돌려보내는 과정을 거쳐 제사를 종결하였다.
고려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희생의 머리를 태워 연기를 내는 행위로서 신을 맞이 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이 행위는 고려초 성종대 환구제사 설행 초기가 아닌 고려중기 예종대부터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두 번째는 모혈, 그 중에서도 '피'의 문제이다. 고기로부터 분리된 피가 '생명력', '생동감'이라는 본연의 상징성을 토대로 희생의 신선함을 부각시키는 실용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피가 제거된 깨끗한 희생물로써 제사대상에 대한 예우를 극대화한 외양 또한 연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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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정국(金正國)의 『성리대전서절요』 편찬과 대체군주론(大體君主論)

저자 : 최민규 ( Choi¸ Min-gy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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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정국이 편찬한 『성리대전서절요』를 통해서 기묘사림 내부의 군주론, 군신관계론의 한 특색을 살피고자 했다.
김정국은 기묘사화 이후에 기묘사림들의 『성리대전』 연구를 계승해 『절요』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지주제의 확산 속에서 몰락하는 농민들, 그리고 반정과 사화가 연쇄하는 정국 현실을 목도하면서 군주 주도의 정치론 모색 차원에서 『성리대전』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절요』의 체재 역시 원래 『성리대전』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대」, 「군도」, 「치도」 등 정치사상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을 긍정하는 목차와 언설을 활용해서 요약했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김정국은 『성리대전』에 담겨 있는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긍정하면서 『절요』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절요』의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강조하는 특색이 드러난다. 그는 군주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는 군주가 정무의 최고 주재자로서 대체를 장악하는 가운데, 군신 간의 협력을 촉구하는 대체군주론을 바탕으로 『절요』의 군주론을 정리했다. 실제로 그는 군주수신론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실질적인 정무주재자로서 군주가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군신관계에서도 군주의 독단에 의한 정치는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신료들의 자정을 촉구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그는 군주와 재상이 같이 정치할 것을 말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보는 재상은 경세적 자질인 재와 도덕적 능력인 덕을 겸비한 실무재상이었다. 그는 실무재상론을 통해서 관료층의 실무에 대한 자질 강화, 그리고 그 내부의 자정 촉구를 통해 관료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요약하자면, 김정국의 『절요』는 중종 대의 정치·사회 문제를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발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절요』가 양반사대부 일반의 정치론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성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군주권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한 명종 대 집권세력이 주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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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동법에 동조했던 '공(貢)'의 경세 담론들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43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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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납제를 대체했던 대동법은 조선 후기 다수의 유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전국적 단위의 세제로서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대동법에의 동조'라는 지점에서 본다면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만, 그로부터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전후의 맥락을 조망한다면 이 지점을 교차했던 다양한 담론들이 논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이에 본고는 고법(古法)에 대한 이해를 출발점으로 개혁의 지향(指向) 종착점으로 설정하고, '대동법에의 동조'를 경유했던 경세 담론들을 분별적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확인된 상이한 네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을 고법으로 간주했으나, 현실에서는 이를 '시의(時宜)'에 맞게 경장(更張)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서인계 경세가들을 중심으로 한 유자들에게 비교적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고법에 있어 임토작공(任土作貢)은 제후가 천자에게 납부했던 후공(候貢)에 한정되는 한편, 백성이 군주에게 진납하는 민공(民貢)의 경우에는 대동법과 마찬가지로 수미(收米)의 방식이 시행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고법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시 둘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토지 사유의 현실을 용인하는 바탕 위에서 대동법을 전조와는 별도의 세목으로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토지에 대한 차등적인 재분배를 달성한 토대 하에서, 대동세의 명목을 전조의 일부로 용해시키는 입장이다.
넷째는 삼대에는 9직(職)이 전업을 이루었으며, 공(貢)은 이들에게 각자가 생산한 물품을 납부케 한 직공(職貢) 즉 직업세였다는 견해이다. 정약용이 이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러한 고법으로서의 직공을 경세의 지향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현실의 조선은 사회적 분업이 전업적 산업체계로 성숙되지 못했던 까닭에 이것이 당장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산은 한편으로는 직공의 시행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조선 산업의 다각화와 전업화를 추동할 방안을 제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동법이 비록 그에게 이상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직공 시행의 이전 단계에서 그것이 지니는 제도사적 의의를 긍정했다.
공(貢)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유학적 이상과 조선 후기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유자들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경세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로써 펼쳐진 스펙트럼은 경세라는 유학의 본령과 시대적 요구에 당시 유자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었음을, 또한 지향하는 목표의 근거와 모델을 고법의 재해석을 통해 '발견'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경세학을 유학적 이상과 조선적 현실, 그리고 미래적 지향 사이의 다층적 학술 담론으로서 입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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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저자 : 나종현 ( Na¸ Jo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7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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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윤증의 배사 문제는 노론에서 끊임없이 소론에 대한 공격 논리로 활용하였던 것이었다. 『가례원류』 사건을 거치며 숙종의 처분으로 윤증의 배사가 '공식화'되면서, 배사론은 단순한 공격 논리를 넘어 하나의 정치론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사문(師門)의 입장을 수호하려 하였던 호론계 권상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배사론은 호론계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스승에게 학문적으로 반발한 혐의를 가지고 있던 권상하 문하의 이간은 스승에 대한 글을 지어 윤증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낙론 계열의 이현익 또한 윤증의 배사 문제를 논하면서 윤증과 그를 옹호한 나양좌를 비판하였다.
경종대의 신임옥사와 영조대 초반의 의리 문제를 거치며 배사론은 충역론과 결합하여 노론 의리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권상하로부터 호론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한원진은 배사의 문제를 충역과 연결하고, 스승과 군주를 배신한 난적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원진과는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여 논쟁을 벌였던 이간 또한 배사론과 충역론에 근거하여 노론 의리의 관철과 소론에 대한 강한 징토를 주장하였다.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배사론이 단순히 그들의 태생적 배타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국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영향력이 변화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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