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인구동태와 호정(戶政) ― 조선시대 호총(戶總)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KCI등재

인구동태와 호정(戶政) ― 조선시대 호총(戶總)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Population Dynamics and Ho Politics: Reconsidering Total Household Population (hochong, 戶總) Figures in the Joseon Period

박경숙 ( Park Keong-suk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3월
  • : 7-82(76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33.1


목차

1. 문제 제기
2. 조선 후기 인구동태 추정과 호적을 둘러싼 쟁점들
3. 호구 총수의 추이
4. 호정의 이념과 현실
5. 맺음말
참고문헌
<부록 표1> <호구총수>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수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총수의 자료는 조선 시기의 인구동태를 추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활용되었다. 한편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지역에서 호적들이 발굴되고 전산화되면서 그동안의 호적 연구의 인식론적 가정들을 질문하는 논의들이 확대되었다. 호구총수의 근거가 되는 호적이 작성될 때 상당한 누락과 복잡한 편제가 작용하여, 호구총수의 추이를 그대로 인구동태의 추이로 가정하는 데 비판적인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호구총이 인구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는지, 호구총에 어떻게 인구동태와 호정(戶政)이 배태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호총의 추이와 실질적 인구동태 사이의 관련성을 추론하기 위해 조선 시기 재해(역병)의 기록자료를 검색하여 호총과 재해기록의 추이 사이의 연관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전염병의 빈도 추이와 호총의 추이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6-18세기를 통해 심각한 재해가 지속되고, 특히 재해가 심각했던 시기 호총의 수치도 여느 식년에 비해 뚜렷하게 떨어지는 추세가 확인되었다. 한편 19세기에는 재해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데 호총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정체되어 그 맥락이 무엇인지 새로운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에서 재해상황, 호적, 부세, 신분, 가족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여 호정(戶政)의 이념과 현실을 해석하였다. 자연호와 편제호의 논란의 쟁점이듯이, 호총이 실제의 호수나 인구동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호총과 그 기록이 복잡한 사회관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관계성이 허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호총에 작용하는 인구동태와 호적 등록율 그리고 호적 편제 양식의 영향을 세심하게 선별하면 맥락타당한 추정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
The Hogu Chongsu, published in the 13th year of King Jeongjo (1789),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ave provided key data for estimating the population dynamics of the Joseon period. However, as ho (household) registers for various regions were discovered and computerized in the 2000s, scholars began to discuss the epistemological assumptions involved in ho register research. Significant omissions and a complicated editing process affected the creation of ho registers and, since these were the basis of record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questions were raised about whether the trends seen in those records could be treated as reliable indicators of population dynamics.
This study examines whether the ho registers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both of which were produced in the complex context of ho-politics, can be used as population data. It also analyzes how population dynamics and ho-politics are embedded ho registers. In order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ho registers and actual demographic dynamics, the relationship between register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and records of disasters (plague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examined. A very interesting relationship between the frequency of infectious diseases and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was found. Serious disasters occurred throughout the 16th, 17th and 18th centuries, and the number of households declined during years of severe disaster. However, whilst the number of disasters recorded during the 19th century was relatively small, the number of households decreased significantly and stagnated over this period, raising the question of why, and in what context, this transpired. To address these questions the study explores how ho politics was strongly related to disaster governance and the politics of tax, social status, and family support. Ho politics sought to secure the ho as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state’s system of military, agricultural and financial obligations. The concept of ho insisted that men and women form a family regardless of their social status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observing the three doctrines (samgang). These tenets were easily absorbed by the populace. They were internalized and put into practice through small, male-centered family living units that embodied the three doctrines (samgang) and acted as units of self-reliant survival strategy.

UCI(KEPA)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087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33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인구동태와 호정(戶政) ― 조선시대 호총(戶總)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저자 : 박경숙 ( Park Keo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82 (7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총수의 자료는 조선 시기의 인구동태를 추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활용되었다. 한편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지역에서 호적들이 발굴되고 전산화되면서 그동안의 호적 연구의 인식론적 가정들을 질문하는 논의들이 확대되었다. 호구총수의 근거가 되는 호적이 작성될 때 상당한 누락과 복잡한 편제가 작용하여, 호구총수의 추이를 그대로 인구동태의 추이로 가정하는 데 비판적인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호구총이 인구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는지, 호구총에 어떻게 인구동태와 호정(戶政)이 배태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호총의 추이와 실질적 인구동태 사이의 관련성을 추론하기 위해 조선 시기 재해(역병)의 기록자료를 검색하여 호총과 재해기록의 추이 사이의 연관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전염병의 빈도 추이와 호총의 추이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6-18세기를 통해 심각한 재해가 지속되고, 특히 재해가 심각했던 시기 호총의 수치도 여느 식년에 비해 뚜렷하게 떨어지는 추세가 확인되었다. 한편 19세기에는 재해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데 호총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정체되어 그 맥락이 무엇인지 새로운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에서 재해상황, 호적, 부세, 신분, 가족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여 호정(戶政)의 이념과 현실을 해석하였다. 자연호와 편제호의 논란의 쟁점이듯이, 호총이 실제의 호수나 인구동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호총과 그 기록이 복잡한 사회관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관계성이 허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호총에 작용하는 인구동태와 호적 등록율 그리고 호적 편제 양식의 영향을 세심하게 선별하면 맥락타당한 추정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


The Hogu Chongsu, published in the 13th year of King Jeongjo (1789),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ave provided key data for estimating the population dynamics of the Joseon period. However, as ho (household) registers for various regions were discovered and computerized in the 2000s, scholars began to discuss the epistemological assumptions involved in ho register research. Significant omissions and a complicated editing process affected the creation of ho registers and, since these were the basis of record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questions were raised about whether the trends seen in those records could be treated as reliable indicators of population dynamics.
This study examines whether the ho registers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both of which were produced in the complex context of ho-politics, can be used as population data. It also analyzes how population dynamics and ho-politics are embedded ho registers. In order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ho registers and actual demographic dynamics, the relationship between register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and records of disasters (plague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examined. A very interesting relationship between the frequency of infectious diseases and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was found. Serious disasters occurred throughout the 16th, 17th and 18th centuries, and the number of households declined during years of severe disaster. However, whilst the number of disasters recorded during the 19th century was relatively small, the number of households decreased significantly and stagnated over this period, raising the question of why, and in what context, this transpired. To address these questions the study explores how ho politics was strongly related to disaster governance and the politics of tax, social status, and family support. Ho politics sought to secure the ho as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state's system of military, agricultural and financial obligations. The concept of ho insisted that men and women form a family regardless of their social status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observing the three doctrines (samgang). These tenets were easily absorbed by the populace. They were internalized and put into practice through small, male-centered family living units that embodied the three doctrines (samgang) and acted as units of self-reliant survival strategy.

KCI등재

2조선후기 근기남인 사족의 '가(家)' 이념에 대한 일고찰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정일균 ( Jeong¸ Il-g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3-139 (5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조선후기 근기남인(近畿南人) 사족(士族)의 '가(家)' 이념의 요체를 당시 근기남인을 대표했던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일별해보았다. 즉, 그가 제시한바 ① '사족의 가' 개념의 이상형으로서 '유인(幽人)의 삶'을 전제하는 가운데, ② '사족의 가'론과 관련하여 '사족의 가'의 기본구성과 그 확대조직, ③ '사족의 가 윤리'론과 관련해서는 '사족의 제가(齊家) 덕목(德目)'론, '사족의 가례(家禮)'론 및 '사족의 입후(立後)'론의 주요내용과 그 내용적 특징, ④ '사족의 가계경영(家計經營)'론과 관련해서는 특히 '상업적 농업경영론'의 주요내용과 내용적 특징을 차례대로 정리·개관해보았다.
이처럼 정약용이 구상·제출했던 '사족의 가' 이념은 또한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조선사회가 목하 경험하고 있었던 일련의 심대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정약용이 구상·제출한바 상기의 '사족의 가' 이념은, ① 특히 그가 '사족의 가계경영'론에서 그 대상으로 “작록(爵祿)의 계통(系統)을 잃은 사대부가(士大夫家)” 또는 “가난한 사족”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데서 간취할 수 있듯이, 당시 당색(黨色)을 막론하고 몰락해가던 대다수 하층양반의 입장에서 꿈꿀 수 있었던 '거가사본(居家四本)[제가(齊家)·치가(治家)·기가(起家)·보가(保家)]'의 최대치이자, ② 같은 남인(南人)이면서도 영남남인(嶺南南人)의 경우에 비해 근기남인이 가지는 재지적 기반의 상대적 허약함에다 불행하게도 어느덧 '폐족(廢族)'으로 전락하고 만 자신의 가문의 중흥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이 아니었던가 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cardinal points of 'family'(家) ideology among the nobility (Yangban) of the Southerners (Namin) in Gyeonggi (京畿) districts. It focuses on the case of Jeong Yak-Yong who was a typical example of noble members of the Southerners in Gyeonggi districts. The main conte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① The paper introduces Jeong Yak-Yong's idea that 'the life of a hermit' represents the ideal type of the nobility's concept of 'family'. ② In relation to Jeong Yak-Yong's theory of 'family of the nobility', the basic constituent elements of 'family of the nobility' and its enlarged organizations are examined. ③ In connection with Jeong Yak-Yong's theory of 'family ethics of the nobility', the main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theory of 'virtues for wise government of the nobility's family', that of 'family formalities of the nobility', and that of 'adoption of the nobility's heir' are considered. ④ Jeong Yak-Yong's theory of 'management of household economy of the nobility' is surveyed briefly, with special attention paid to the main points and characteristics of his theory of 'commercial management of agriculture'.
It is clear that the ideology of 'family of the nobility' which Jeong Yak-Yong mapped out and presented was a response to a series of enormous socio-economic changes which Joseon society experience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19th century. After all, Jeong Yak-Yong's ideology of 'family of the nobility' was probably ① the maximum to which the then lower-class nobility could dream of going forward, and ② a practical plan for the restoration of Jeong Yak-Yong's own family, which had fallen into 'a ruined family'.

KCI등재

3족보를 활용한 조선후기 인구현상의 이해 ― 전주이씨 『선원속보(璿源續譜)』를 중심으로

저자 : 백광열 ( Baek¸ Kwang Ryeo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78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전주이씨 대동보인 『선원속보』를 활용하여 조선후기의 출산 관련 현상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지금까지 족보는 자료적 한계로 인해 인구학적 분석에 그다지 잘 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인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중에 족보는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유용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이 글에서는 족보가 가진 인구 자료로서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하여 출산 관련 지표를 도출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 결과 조선후기 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함의를 얻을 수 있었다. 합계출산율 개념을 활용하여, 한 여성이 평생동안 출산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시킬 것이 기대되는 자녀 수인 '합계생존율'을 구해보았다. 전주이씨 집단에 있어 '합계생존율' 값은 17세기 전반기까지 전란으로 인해 매우 낮은 상태이다가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걸쳐 상승하였다. 특히, 종래의 일반적인 관찰과는 다르게 19세기 전반기에 이 값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출산 및 인구동태에 관한 인식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비록 완전한 의미의 것은 아니지만, (기록상의) 초산연령 및 평균출산연령도 구해보았다. 이 값은 17세기까지 상승하다가 18세기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이 '합계생존율'의 상승과 병행했다. 18세기 이후에는 기록상 초산연령이 급격히 하강하고 '합계생존율'은 증가하였다. 이에 대해 유아사망율이나 출산율의 관련을 통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한편, 『선원속보』가 왕실 후손의 족보라는 것에서 오는 계층편의를 보완하기 위해 적파/서파를 구분하여 그 인구학적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 결과 서파의 영향이 기록상의 출산아 수에 음의 방향으로 작용함을 관찰하였다. 추후,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분석과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가미한다면 인구 및 사회에 관한 보다 심화된 역사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birth dynamics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utilizing the Jeonju Yi clan's great companion genealogy, The Seonwon Sokbo (璿源續譜, 1900~1902). Until now, genealogy has not often been used for demographic analysis due to data limitations. However, of the available forms of data for understanding the population of the Joseon society, genealogy offers advantages in terms of size and quality. In this paper, in order to solve the limitations of genealogy as a form of population data, various methods were used to derive and analyze fertility-related indicators. The results have several implications for our understanding of birth Dynamic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dapting the concept of Total Fertility Rate (TFR), I calculated the Yi clan's 'total survival rate'. This is the number of children a woman is expected to give birth to and survive to adulthood. In the Jeonju Yi clan, the 'total survival rate' was very low until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due to war, but rose from the late 17th to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The total survival rate stayed at a very high level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a finding which differs from previous observations. This suggests we need to reconsider fertility and population-related phenomena during this period. Although the data was not complete, I also calculated the women's (recorded) average age at first birth and (recorded) mean age at birth. These values rose through the 17th century and peaked in the 18th century. This process coincided with an increase in the total survival rate. After the 18th century women's (recorded) average age at first birth dropped sharply while the total survival rate increased. In this regard, an interpretation was attempted through the relation between the infant mortality rate and the fertility rate. The Seonwon Sokbo has an inherent class bias because it is a genealogy of royal descendants, so, in order to compensate for this, the demographic effects for legitimate and illegitimate son were investigated individually. As a result, it was observed that illegitimacy had a negative effect on fertility. In the future, if we add analysis of various variables and comparison with other societies, we may be able to attain a more in-depth history of population and society during this period.

KCI등재

4병역 대체복무제도의 역사적 구성 ― '잉여자원' 관리와 발전에의 동원

저자 : 강인화 ( Kang¸ Inhw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16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병역 대체복무제도가 형성되어온 역사·사회적 과정을 살펴본다. 병역제도의 운영은 국민개병 이념과 징병제 실행 사이의 불일치를 수반한다. 한국사회는 병역의무의 대상에게 현역 군복무를 '대체'하는 의무를 '병역'의 일종으로 요구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운영을 통해 이러한 불일치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냉전시기 징병제는 안보와 발전의 중첩된 이해를 토대로 방위소집복무, 병역특례 등과 같은 대체복무를 병역제도 안으로 포섭하였다. 대체복무가 제도화되면서 군사활동을 담당하는 현역복무 이외에 이를 대체하는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병역의무'로 개념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정부는 병역 대상자를 현역 군복무 이외의 분야에 동원하던 앞선 시기의 유제를 이용하여 '잉여' 병역자원의 경제·사회적 활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공익분야에서의 복무'가 대체복무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대체복무를 포괄하는 확대된 병역 개념에 기초하여 징병제 운영의 전면화와 병역의무의 보편화가 추구되어 왔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y and the social processes of the alternative service system in South Korea. The management of the military service system faces a discrepancy between the ideology of the citizen-soldier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conscription system. Korean society solved these discrepancies by implementing an alternative service system that offers alternatives to military service as a kind of “military duty.” During the Cold War, the draft system included alternative military services such as the homeland reserve service and military service exceptions based on the understanding that development and national security overlap. Various alternative forms of activities were conceptualized as “military service obligations” since the institutionalization of alternative services. After democratization, the government developed economic and social utilization policies for “surplus resources,” based on the legacy of the earlier mobilization of military service personnel to other areas. At that time, “serving in an area of public interest” was a form of military service. Based on the expanded concept of military service, which includes alternative services, the Korean government aimed to manage the universal conscription system.

KCI등재

5여성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 1980년대 이후 중국 '부녀회가(婦女回家)' 담론의 전개와 굴절

저자 : 김란 ( Jin¸ L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58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혁명과정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이 시기 국가 주도로 여성을 노동자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주체화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여성노동자 모범이나 노동자 모범가족 선정과 같은 작업을 통해 사회주의 '생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문화적 작업은 당시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시장주의의 도입에 따른 고용유연화로 여성 노동력 감축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부녀회가”라는 문화적 담론의 장이 열렸다. 본 연구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중국 8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와 쇠퇴과정을 반영하는 문화적 흐름을 십년 단위로 전개된 네 차례의 '부녀회가(여성회가)'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시기별로 80년대 단계성취업론, 90년대 기업부담론, 사회발전 단계론, 2000년대 가사노동 찬양, 2010년대 생물학적 모성론 등 다양한 논변이 제기되었고, 그 와중에도 중국 전국부녀연합회의 반대는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 여성지위의 하락과 쇠퇴의 과정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부침과 격론을 거치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회주의 시기 여성-노동자로서의 주체화는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했다.


In the early era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labor” was top of the government's agenda. During this period the state led a process of top-down subjectivation that intended to make women into workers. However, after China's reform and opening up, women's involvement in the labor market began to decline and a cultural discourse about “women-going-home” emerged. This study will describe different forms of the “women-going-home” discourse from the 1980s, 1990s, 2000s and 2010s. These reflect the process of change and decline in women's social status since the 1980s. Over this period a variety of debates and ideas arose that reinforced and interacted with the “women-going-home” discourse, including stage employment discourses in the 1980s, corporate burden discourses and the social development stage theory in the 1990s, the praise of domestic labor debates in the 2000s, and biological maternity discourses in the 2010s. Throughout this era the All-China Women's Federation mounted persistent opposition. The decline in women's status in China has not been linear, but instead developed in a complex manner through controversy and argument. From this perspective, the socialist era subjectivation of women laborers remained strong even after reform and opening up.

KCI등재

6중국 내몽골 자치구 '다원일체' 민족주의의 구축 ― 왕소군 이미지의 변모 양상과 소군박물원을 중심으로

저자 : 고페이 ( Gu¸ Fe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304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왕소군(王昭君)의 이미지의 변모 과정과 역사 기억의 시기별 특징을 고찰하고, 동시에 현재 왕소군을 활발히 기념하고 있는 내몽골 소군박물원에서의 현지 참여 경험을 토대로 내몽골 지역 주민들의 담론과 심리적 반응을 분석함으로써 비소수민족자치구역인 후베이(湖北)성에 있는 왕소군 기념물과 대비1)되어 나타나는 '다원일체론'적 민족주의를 밝히고자 한다.
상상된 영웅의 과거를 신비롭게 구성하여 국가의 권위를 표출하는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적 영웅의 창출은 훨씬 더 복잡한 논리를 필요로 한다.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왕소군을 여성영웅으로 추앙하여 민족주의 구축의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왕소군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로, 최초 등장한 한나라 시기부터 현재까지 그녀의 이미지는 계속 변모해왔다. 그녀는 민족적 저항, 다민족국가건설, 소수민족통합, 다원일체적 국가 구축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활용되어 왔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맥락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져 왔으며, 소수민족 우세지역과 한족우세지역에서 그 상징적 가치가 다르게 활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민족주의의 '재소환 및 재기'시기에 북방소수민족지역인 내몽골에서 그녀는 '다원일체' 민족주의 구축의 역사적 소재로 적극 활용되어 왔는데, 이는 페이샤오퉁의 '다원일체론'의 민족주의 이념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t is common for modern nation-states to express the authority of the state by mythicizing an imagined hero's past. But the creation of national heroes in a multinational state requires much more complex logic. China, a representative multi-ethnic country, held up Wang Zhaojun as a heroine during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and used her as a historical resource to help establish a unified national identity. The image of Wang Zhaojun, a historical figure, her image has been constantly changing since her first appearance during the Han Dynasty. She has been used in various contexts, including national resistance, multi-ethnic country construction, minority integration, and pluralistic state construction. Most interesting is that her symbolic value has been used differently in minority and non-minority areas. In particular, in Inner Mongolia, a northern minority region of China, she was actively used as a historical resource for the establishment of “Diversity in Unity” nationalism during the “recall and comeback” period of Chinese nationalism.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8서평과 반론 : 예술가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어려움

저자 : 이진아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1-334 (1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인구동태와 호정(戶政) ― 조선시대 호총(戶總)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저자 : 박경숙 ( Park Keo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82 (7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총수의 자료는 조선 시기의 인구동태를 추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활용되었다. 한편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지역에서 호적들이 발굴되고 전산화되면서 그동안의 호적 연구의 인식론적 가정들을 질문하는 논의들이 확대되었다. 호구총수의 근거가 되는 호적이 작성될 때 상당한 누락과 복잡한 편제가 작용하여, 호구총수의 추이를 그대로 인구동태의 추이로 가정하는 데 비판적인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호구총이 인구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는지, 호구총에 어떻게 인구동태와 호정(戶政)이 배태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호총의 추이와 실질적 인구동태 사이의 관련성을 추론하기 위해 조선 시기 재해(역병)의 기록자료를 검색하여 호총과 재해기록의 추이 사이의 연관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전염병의 빈도 추이와 호총의 추이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6-18세기를 통해 심각한 재해가 지속되고, 특히 재해가 심각했던 시기 호총의 수치도 여느 식년에 비해 뚜렷하게 떨어지는 추세가 확인되었다. 한편 19세기에는 재해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데 호총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정체되어 그 맥락이 무엇인지 새로운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에서 재해상황, 호적, 부세, 신분, 가족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여 호정(戶政)의 이념과 현실을 해석하였다. 자연호와 편제호의 논란의 쟁점이듯이, 호총이 실제의 호수나 인구동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호총과 그 기록이 복잡한 사회관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관계성이 허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호총에 작용하는 인구동태와 호적 등록율 그리고 호적 편제 양식의 영향을 세심하게 선별하면 맥락타당한 추정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

KCI등재

2조선후기 근기남인 사족의 '가(家)' 이념에 대한 일고찰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정일균 ( Jeong¸ Il-g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3-139 (5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조선후기 근기남인(近畿南人) 사족(士族)의 '가(家)' 이념의 요체를 당시 근기남인을 대표했던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일별해보았다. 즉, 그가 제시한바 ① '사족의 가' 개념의 이상형으로서 '유인(幽人)의 삶'을 전제하는 가운데, ② '사족의 가'론과 관련하여 '사족의 가'의 기본구성과 그 확대조직, ③ '사족의 가 윤리'론과 관련해서는 '사족의 제가(齊家) 덕목(德目)'론, '사족의 가례(家禮)'론 및 '사족의 입후(立後)'론의 주요내용과 그 내용적 특징, ④ '사족의 가계경영(家計經營)'론과 관련해서는 특히 '상업적 농업경영론'의 주요내용과 내용적 특징을 차례대로 정리·개관해보았다.
이처럼 정약용이 구상·제출했던 '사족의 가' 이념은 또한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조선사회가 목하 경험하고 있었던 일련의 심대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정약용이 구상·제출한바 상기의 '사족의 가' 이념은, ① 특히 그가 '사족의 가계경영'론에서 그 대상으로 “작록(爵祿)의 계통(系統)을 잃은 사대부가(士大夫家)” 또는 “가난한 사족”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데서 간취할 수 있듯이, 당시 당색(黨色)을 막론하고 몰락해가던 대다수 하층양반의 입장에서 꿈꿀 수 있었던 '거가사본(居家四本)[제가(齊家)·치가(治家)·기가(起家)·보가(保家)]'의 최대치이자, ② 같은 남인(南人)이면서도 영남남인(嶺南南人)의 경우에 비해 근기남인이 가지는 재지적 기반의 상대적 허약함에다 불행하게도 어느덧 '폐족(廢族)'으로 전락하고 만 자신의 가문의 중흥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이 아니었던가 한다.

KCI등재

3족보를 활용한 조선후기 인구현상의 이해 ― 전주이씨 『선원속보(璿源續譜)』를 중심으로

저자 : 백광열 ( Baek¸ Kwang Ryeo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78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전주이씨 대동보인 『선원속보』를 활용하여 조선후기의 출산 관련 현상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지금까지 족보는 자료적 한계로 인해 인구학적 분석에 그다지 잘 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인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중에 족보는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유용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이 글에서는 족보가 가진 인구 자료로서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하여 출산 관련 지표를 도출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 결과 조선후기 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함의를 얻을 수 있었다. 합계출산율 개념을 활용하여, 한 여성이 평생동안 출산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시킬 것이 기대되는 자녀 수인 '합계생존율'을 구해보았다. 전주이씨 집단에 있어 '합계생존율' 값은 17세기 전반기까지 전란으로 인해 매우 낮은 상태이다가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걸쳐 상승하였다. 특히, 종래의 일반적인 관찰과는 다르게 19세기 전반기에 이 값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출산 및 인구동태에 관한 인식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비록 완전한 의미의 것은 아니지만, (기록상의) 초산연령 및 평균출산연령도 구해보았다. 이 값은 17세기까지 상승하다가 18세기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이 '합계생존율'의 상승과 병행했다. 18세기 이후에는 기록상 초산연령이 급격히 하강하고 '합계생존율'은 증가하였다. 이에 대해 유아사망율이나 출산율의 관련을 통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한편, 『선원속보』가 왕실 후손의 족보라는 것에서 오는 계층편의를 보완하기 위해 적파/서파를 구분하여 그 인구학적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 결과 서파의 영향이 기록상의 출산아 수에 음의 방향으로 작용함을 관찰하였다. 추후,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분석과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가미한다면 인구 및 사회에 관한 보다 심화된 역사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KCI등재

4병역 대체복무제도의 역사적 구성 ― '잉여자원' 관리와 발전에의 동원

저자 : 강인화 ( Kang¸ Inhw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16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병역 대체복무제도가 형성되어온 역사·사회적 과정을 살펴본다. 병역제도의 운영은 국민개병 이념과 징병제 실행 사이의 불일치를 수반한다. 한국사회는 병역의무의 대상에게 현역 군복무를 '대체'하는 의무를 '병역'의 일종으로 요구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운영을 통해 이러한 불일치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냉전시기 징병제는 안보와 발전의 중첩된 이해를 토대로 방위소집복무, 병역특례 등과 같은 대체복무를 병역제도 안으로 포섭하였다. 대체복무가 제도화되면서 군사활동을 담당하는 현역복무 이외에 이를 대체하는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병역의무'로 개념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정부는 병역 대상자를 현역 군복무 이외의 분야에 동원하던 앞선 시기의 유제를 이용하여 '잉여' 병역자원의 경제·사회적 활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공익분야에서의 복무'가 대체복무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대체복무를 포괄하는 확대된 병역 개념에 기초하여 징병제 운영의 전면화와 병역의무의 보편화가 추구되어 왔다.

KCI등재

5여성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 1980년대 이후 중국 '부녀회가(婦女回家)' 담론의 전개와 굴절

저자 : 김란 ( Jin¸ L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58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혁명과정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이 시기 국가 주도로 여성을 노동자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주체화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여성노동자 모범이나 노동자 모범가족 선정과 같은 작업을 통해 사회주의 '생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문화적 작업은 당시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시장주의의 도입에 따른 고용유연화로 여성 노동력 감축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부녀회가”라는 문화적 담론의 장이 열렸다. 본 연구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중국 8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와 쇠퇴과정을 반영하는 문화적 흐름을 십년 단위로 전개된 네 차례의 '부녀회가(여성회가)'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시기별로 80년대 단계성취업론, 90년대 기업부담론, 사회발전 단계론, 2000년대 가사노동 찬양, 2010년대 생물학적 모성론 등 다양한 논변이 제기되었고, 그 와중에도 중국 전국부녀연합회의 반대는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 여성지위의 하락과 쇠퇴의 과정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부침과 격론을 거치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회주의 시기 여성-노동자로서의 주체화는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했다.

KCI등재

6중국 내몽골 자치구 '다원일체' 민족주의의 구축 ― 왕소군 이미지의 변모 양상과 소군박물원을 중심으로

저자 : 고페이 ( Gu¸ Fe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304 (4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왕소군(王昭君)의 이미지의 변모 과정과 역사 기억의 시기별 특징을 고찰하고, 동시에 현재 왕소군을 활발히 기념하고 있는 내몽골 소군박물원에서의 현지 참여 경험을 토대로 내몽골 지역 주민들의 담론과 심리적 반응을 분석함으로써 비소수민족자치구역인 후베이(湖北)성에 있는 왕소군 기념물과 대비1)되어 나타나는 '다원일체론'적 민족주의를 밝히고자 한다.
상상된 영웅의 과거를 신비롭게 구성하여 국가의 권위를 표출하는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적 영웅의 창출은 훨씬 더 복잡한 논리를 필요로 한다.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왕소군을 여성영웅으로 추앙하여 민족주의 구축의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왕소군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로, 최초 등장한 한나라 시기부터 현재까지 그녀의 이미지는 계속 변모해왔다. 그녀는 민족적 저항, 다민족국가건설, 소수민족통합, 다원일체적 국가 구축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활용되어 왔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맥락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져 왔으며, 소수민족 우세지역과 한족우세지역에서 그 상징적 가치가 다르게 활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민족주의의 '재소환 및 재기'시기에 북방소수민족지역인 내몽골에서 그녀는 '다원일체' 민족주의 구축의 역사적 소재로 적극 활용되어 왔는데, 이는 페이샤오퉁의 '다원일체론'의 민족주의 이념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KCI등재

8서평과 반론 : 예술가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어려움

저자 : 이진아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1-334 (1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