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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푸티지 영상으로 본 한국전쟁 포로교환과 그 이면

Korean War POW Exchange Operations in U.S. military Footage Films

김일환 ( Kim Il-Hwan )
  • : 역사문제연구소
  • : 역사문제연구 4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3월
  • : 221-257(37pages)
역사문제연구

DOI

10.36432/CSMKH.47.202203.6


목차

1. 들어가며
2. ‘무대’로서의 판문점 포로 교환과 미군 영상병의 위치
3. 돌아가는 적 포로들
4. ‘자유 진영’으로 귀환하는 포로들
5.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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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리틀 스위치(Operation Little Switch)’, ‘빅스위치(Operation Big Switch)’, ‘만회작전(Operation Recovery)’ 등 한국전쟁 전쟁포로 교환 작전을 촬영한 미육군통신부대 및 미군사고문단 영상을 통해서 전쟁포로를 바라보는 미군의 시각 및 영상자료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총보다 많은 카메라”가 모였던 판문점 포로교환 현장에서 미군은 공보적, 기록적 목적으로 교환 과정 전반을 촬영, 미편집된 푸티지 필름(footage film)으로 남겼다. 미군 영상병들은 민간 특파원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무대 뒤편’의 여러 장면들 역시 촬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군 작전의 일환으로 촬영된 푸티지 영상은 한편으로는 포로들을 냉전적 시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기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그러한 재현 의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장면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도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적 관점에서 푸티지 영상을 냉전적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는 포로의 복합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In this article, I examined footage films which filmed Prisoners of War (POW) exchange operations during the Korean War, specifically ‘Operation Little Switch’, ‘Operation Big Switch’ and ‘Operation Recovery’. U.S. military signal troops filmed whole processes of POW exchange operations, even beyond the ‘backstage’ of operations which civilian press journalists could not approach. And owing to uncensored and unedited features, footage films could grasp very complex identities of POW. On the one hand, Footage films were undoubtedly repeated the Cold-war prototypes on ‘Pro’ and ‘Anti-communist’ prisoners, but on the other hand, they could closely observed inner side of POWs. It implies that if carefully read, the films can be analyzed as historical materials revealing and overcoming official Cod-war ideologies and narratives on P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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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인류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419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6-2022
  • :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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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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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산주의 체제의 교육: 연구사적 맥락

저자 : 노경덕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22 (1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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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해방 이후 북조선로동당의 당원교육 연구 - 1946년 8월~1948년 3월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창희 ( Pak Chang Hee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5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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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방 이후 북한의 국가건설운동에서 주도세력으로 활동한 북조선로동당의 당원교육에 대한 연구이다.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첫째, 당원교육기관은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당학교-도당학교-시·군·야간당학교-당세포교육으로 이어지는 전당원을 포괄하는 체계적인 당원교육제도가 구축되었다. 둘째, 당원교육기관의 설치와 운영뿐만 아니라 교과의 설정, 교재의 작성은 선전선동부가 주관하였다. 셋째, 북로당 선전선동부는 독자적으로 작성한 '유일제강'에 입각하여 당원교육교재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당원교육의 내용에 있어서 통일성을 도모하였다. 넷째, 북로당 선전선동부가 작성한 당원교육의 '유일제강'은 북한의 혁명적 경험을 중시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조합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구성되었다. 다섯째, 이와 같은 당원교육의 노선은 북로당 초대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다섯 가지 사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북조선로동당의 당원교육사업을 주도한 주체는 북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초대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었다. 둘째, 김창만이 주도한 당원교육의 목적은 혁명적인 국가건설운동을 선도하는 전위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김창만이 양성하고자 한 전위는, 해방 이후 북한에 조성된 혁명적 정세를 반영하고 있는 북로당의 정치노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부시켜 이해하고 이것을 실제 사업에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당원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혁명적 경험을 중시한 김창만의 시도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소련공산당의 경험을 앞세운 소련계 인사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education of party members of the Workers' Party of North Korea, which acted as a leading force in the North Korean state-building movement after liberation in 1945. The following facts were confirmed through this study. First, education institutions for party member were intensively established from 1946 to 1947, and as a result, a systematic education system for party member was established that encompasses all party members. Second, the Propaganda and Agitation Department was supervised not only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educational institutions for party members, but also in tasks such as setting curriculum and writing textbooks. Third, the Propaganda and Agitation Department of the North Workers' Party produced and distributed educational materials for party members based on the class syllabus independently prepared. Fourth, the syllabus for party member education prepared by the Propaganda and Agitation Department of the North Korean Workers' Party was constructed in a position to emphasize the combination with Marxism-Leninism while emphasizing the revolutionary experience of North Korea. Based on the facts confirmed in the thesis, the answer to the question posed in the introduction is as follows. First, the subject that led the education project for party members was the Propaganda and Agitation Department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More precisely, it was Kim Chang-man, the first head of the propaganda and agitation department. Second, Kim Chang-man wanted to train the vanguard to lead the revolutionary state-building movement through education of party members. This vanguard was a party member who had the ability to understand the political line of the Workers' Party of North Korea, which reflected the revolutionary situation in North Korea after liberation in 1945, in conjunction with Marxism-Leninism, and furthermore, to operate the political line in actual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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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북한의 직장 문화시설 설치와 노동자의 문화 향유(1945~1950)

저자 : 이세영 ( Lee Se You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9-9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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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도부는 1946년 일련의 노동법령을 제정·실시하며 노동자의 정권 지지와 적극적 노동 참여를 통한 생산력 증가를 기도하였다. 이를 위해 각 생산직장 내에 '구락부', 도서실, 운동장 등 각종 문화시설과 '써클'을 설치하여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하였다. 북한 지도부가 직장 내 문화시설을 설치한 이유는 북한에 '민주주의 민족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군중문화정책을 통해 노동자, 농민과 같은 근로대중이 직접 문화를 향유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정권의 의도에 맞게 노동자들을 의식화·조직화 하기 위한 목적도 같이 존재하였다. 문예총이나 직맹과 같은 유관기관들은 직장 문화시설 설치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노동자들은 구락부·써클에서 문화적 역량을 기를 수 있었다. 일제하에서 누리지 못했던 문화생활이 가능해진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중에는 새로운 재능이 개화하여 전문 예술인으로 나아간 이도 있었다. 또한 매년 열리는 예술축전과 체육축전에 참가하여 새로운 체험을 할 뿐 아니라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참가할 기회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단지 그간 못 누렸던 문화적 혜택을 향유한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화 창조 과정에 합류하였다.


The North Korean leadership enacted labor laws in 1946, hoping that workers would support the regime and increase productivity. In this process, cultural facilities such as clubs and circles were installed in each workplace so that workers could enjoy cultural life.
The North Korean leadership tried to allow the People, such as workers and farmers, to enjoy and create their own culture through crowd culture policies. In addition, there was also a purpose to consciousize and organize workers according to the intention of the regime.
Workers were able to develop cultural competencies in clubs and circles. Workers enjoyed the possibility of cultural life that they could not enjoy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mong them, some people grew into professional artists by blooming new talents. They also participated in the annual art and sports festivals, and further had an opportunity to participate in the World Youth Student Festival. Workers not only enjoyed the cultural benefits they had not enjoyed so far, but also actively joined the cultural creation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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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전쟁기 북한의 전시교육과정 운영과 기술인력 양성

저자 : 문미라 ( Moon Mira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2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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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북한의 교육체계를 흔들어놓았다. 북한은 전시에 적합한 수업형태를 고안하고 안전한 지대에 학교를 소개함으로써 최대한 중단 없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1951년 전선 고착화 이후에는 전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파괴된 학교를 복구하는 데 전 인민을 동원하였다. 전쟁기의 학교 복구는 해방 직후 대중의 힘으로 추진된 학교 증설운동의 연장이자 1956년 실시된 초등의무교육제의 물질적 토대였다는 점에서, 전전과 전후를 잇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기 북한교육의 최대 목표는 기술교육 확대를 통한 기술자 양성이었다. 보통교육과 고등교육, 유자녀학원·영예군인학교로 대표되는 특수교육을 막론하고 전쟁 중 모든 교육의 초점은 기술인력 육성·확대에 맞춰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재 북한교육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교육과 생산노동의 결합'의 초기적 형태가 나타났다. 한국전쟁기 교육이 기술에 방점을 두는 방향으로 주조된 것은 1950년대 후반 기술의무교육제 추진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The Korean War shook the North Korean education system. North Korea tried not to stop education by devising a teaching method suitable for war and moving schools to safe areas. When the front line was fixed in 1951, the entire population was mobilized to restore the destroyed school. The restoration of schools during the war period was followed by the expansion of schools that were promoted by the power of the public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It was also the material foundation of the Elementary Compulsory Education system implemented in 1956. In this respect, the restoration of schools during the war period can be said to be a stepping-stone bridge between before and after the war.
The greatest goal of education in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was to foster technicians through the expansion of technical education. Regardless of general education, higher education, and special education represented by Bereaved Children School and Honorable Veterans Academies, all education was aimed at fostering and expanding technical manpower. In this process, an early form of “combination of education and productive labor,” which is one of the important characteristics of current North Korean education, appeared. The emphasis on technology in education during the Korean War became the decisive background for the Compulsory Technical Education system promoted in the late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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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전쟁 푸티지영상,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저자 : 강성현 ( Kang Sung Hyu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179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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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규모 영상 자료 수집 프로젝트의 성과를 바탕으로, 연구팀이 조직되고 공동 조사·연구·아카이빙 작업들이 꾸준히 쌓이고 있다. 이 글도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한국전쟁 영상 연구의 방법론을 세우고 학술적·대중적 영상아카이브에서 제공되어야 하는 연구 해제의 예시를 보여주고자 한다.
영상은 관련 문서·사진·구술 자료의 교차 분석과 비판적인 종합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구성할 수 있는 역사 자료다. 무엇보다 영상 이미지는 문서상 서술이나 구술로도 충분히 전달하기 여러운 시대적 분위기를 충실히 재현한다. 영상 연구는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사물·장소·날짜·사운드·배경·사건의 진행·내래이션 등의 정보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분석을 토대로 영상(촬영)의 기술 요소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접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영상의 생산 주체와 의도, 영상의 피사체, 영상 촬영의 방법과 기술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면서 한국전쟁 영상 연구 방법론을 논의한다. 그러면서 영상이 의도하고 시각화한 재현과 역사 현실의 균열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성찰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영상의 수집 단계에서부터 영상의 메타데이터에 대한 충실한 '목록 작성과 서술(cataloging)'이 이루어져야 하고, 해당 영상과 관련한 문헌 연구와 문서·사진·구술 자료들을 교차분석하면서 영상의 군사적·사회적·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 글은 미 육군 푸티지영상 중 71통신대 A중대 사진대 영상팀이 촬영한 모윤숙 체험 관련 영상(RG 111 ADC-8517)과 거제도포로수용소 올림픽 관련 영상(RG 111 LC-29589)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해제를 작성해 예시한다.


Recently, research teams have been organized and joint research, and archiving works have been consistently accumulated based on large-scale film collecting projects. Based on such projects, this article tries to build methodology of studies on Korean war footage films and exemplify research analysis and explanation which should be provided in academic and public film archive.
Pictures are historical materials that can constitute historical facts through cross analysis and critical aggregation of related documents, photographs, oral data. Above all, social atmosphere of the times, which cannot be expressed sufficiently only by statements in documents or oral datas, can be represented faithfully through images. Image study is to analyze information such as people, objects, sound, backgrounds, development of events, narration in images. This paper profoundly accesses and understands technical factors and historical·social context of image photographing. To be specific, discussing the research methodology of the Korean War images by comprehensively accessing the producing subject, intention, subject, and photographing method and technique, this paper analyzes the gap between historical reality and visualized representation the image intended and reflectively assesses the meaning of the crack.
To make such work possible, while sufficiently cataloging and describing metadata of images should be accomplished at the stage of collecting images, it is necessary to analyze military·social·historical context of the images by cross analysis of associated documents, photographs, oral datas and research of related literature. This article exemplifies overall research analysis and explanation of U.S. Army footage film about experiences of Mo Yoonsook(RG 111 ADC-8517) and Olympic games in pow camp No.1(Keoje-do) which were taken by motion picture team, photograph unit, A company 71 Signal Batta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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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미군의 북한 영상 노획과 심리전 영화 제작

저자 : 전갑생 ( Jeon Gab Sea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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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기 미군이 어떻게 북한 노획영상을 활용했는지를 다루었다. 북한 노획영상에 관한 기존 연구는 극영화와 기록영화의 내용적 분석에 집중되었고, 미군에 노획되는 과정이나 다른 영화에 재활용된 사례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극동사령부와 미8군사령부 작전참모부(G-2)는 미 육군 2보병사단 내 G-2 책임자와 주요 부대원들로 '인디언헤드'를 조직하고 평양에 파견하여 정보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노획했다. 미군은 노획된 자료로 자체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반공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전쟁 심리전에 활용했다. 미국 심리전략위원회 소속 기관은 미국, 전쟁 상대국, 한국 등 여러 영역에서 체계적인 심리전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미육군부 정훈국과 극동사령부(FEC)의 민간정보교육국은 영화 < The Big Lie >와 TV시리즈 < The Big Picture >에 북한 노획 푸티지 영상을 삽입해 재탄생시켰다. 이 두 영화와 북한 노획영상은 전쟁 중과 전후 심리전에 이용되어 냉전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This article was intended to deal with how the U.S. military used North Korea's capture Films during the Korean War. Previous studies dealing with North Korean Seized Film focused on the content analysis of feature films and documentary films, with no case studies of the process of being captured by the U.S. military or recycled into other films. The Far East Command and the U.S. Eighth United States Army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G-2) have organized Indianheads for G-2 officers and key members within the US Army 2nd Infantry Division and dispatched them to Pyongyang for informational value, Captured high material. The US military built its own archive of the captured materials, produced an anti-communist documentary, and used it in war psychological warfare. Organizations belonging to the US Psychological Strategy Committee have planned and executed systematic psychological warfare in many fields such as the United States, war partners, and South Korea. The Civil Information and Educational Section(CI&E) of the FEC Office have reborn the documentary < The Big Lie > and the TV series < The Big Picture > North Korean Seized footage Film. Historically, we analyzed the effects of movies and North Korean Seized Film on the spread of the Cold War, which were used during and after the war in psychological war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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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미군 푸티지 영상으로 본 한국전쟁 포로교환과 그 이면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5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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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리틀 스위치(Operation Little Switch)', '빅스위치(Operation Big Switch)', '만회작전(Operation Recovery)' 등 한국전쟁 전쟁포로 교환 작전을 촬영한 미육군통신부대 및 미군사고문단 영상을 통해서 전쟁포로를 바라보는 미군의 시각 및 영상자료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총보다 많은 카메라”가 모였던 판문점 포로교환 현장에서 미군은 공보적, 기록적 목적으로 교환 과정 전반을 촬영, 미편집된 푸티지 필름(footage film)으로 남겼다. 미군 영상병들은 민간 특파원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무대 뒤편'의 여러 장면들 역시 촬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군 작전의 일환으로 촬영된 푸티지 영상은 한편으로는 포로들을 냉전적 시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기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그러한 재현 의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장면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도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적 관점에서 푸티지 영상을 냉전적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는 포로의 복합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In this article, I examined footage films which filmed Prisoners of War (POW) exchange operations during the Korean War, specifically 'Operation Little Switch', 'Operation Big Switch' and 'Operation Recovery'. U.S. military signal troops filmed whole processes of POW exchange operations, even beyond the 'backstage' of operations which civilian press journalists could not approach. And owing to uncensored and unedited features, footage films could grasp very complex identities of POW. On the one hand, Footage films were undoubtedly repeated the Cold-war prototypes on 'Pro' and 'Anti-communist' prisoners, but on the other hand, they could closely observed inner side of POWs. It implies that if carefully read, the films can be analyzed as historical materials revealing and overcoming official Cod-war ideologies and narratives on P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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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북한 해군의 창설과 조직·간부구성

저자 : 김선호 ( Kim Seonho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1-29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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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는 1949년 3월에 스탈린과 회담에서 무력통일방식이 간접적으로 승인되자, 1949년도 하기 인민군 증편계획을 수립해서 해군 창설을 개시했다. 그리고 청진항에 주둔한 소련 해군으로부터 무기·장비·교범·고문 등 군사지원을 받아서 1949년 8월 28일에 정규 해군을 창설했다. 민족보위성은 육군과 달리 해군에 병종지휘부를 설치해서 뒤늦게 창설된 해군의 전력을 급속히 증강시키려고 구상했다.
북한 해군이 육군·공군과 다른 점은 그 지휘부까지 대부분 소련에서 입북한 고려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북한 해군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10개월 전에 창설되었고 해상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북한지도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 소련군에 익숙한 고려인을 해군사령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해서 소련 해군의 현대적 군사교리를 급속히 도입했다.
민족보위성은 소련에서 연안방어 중심의 군사교리를 도입했고 6·25전쟁을 준비하면서 해군에 독자적인 해상전투나 지상군에 대한 함포공격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북한지도부는 2개 육전대를 후방 해안에 상륙시켜 후방을 교란하려 했고, 전략지역인 원산·청진·진남포에 방어부대를 편성하고 함정의 절반을 계류시켜 국군 해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결국 북한 해군은 보조적 공격임무와 연안방어 임무를 맡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When the North Korean government approved the unification of armed forces at a meeting with Stalin in March 1949, the North Korean government established a plan to increase the army. As a result, the North Korean Navy(NKN) was created on August 28, 1949, with military support from the Soviet Navy stationed in Chongjin Port.
Unlike the Army and the Air Force, the North Korean government introduced the Soviet navy's military doctrines by making the navy's headquarters mostly from Koreans who grew up in the Soviet Union(USSR). In addition, the Soviet Union dispatched soldiers from the Pacific Fleet stationed in North Korea as military advisers to aid the reinforcement of the NKN.
The NKN was founded just 10 months before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the Soviet Union could not increase its fighting power because the Soviet Union did not provide enough combat traps. Also, the NKN was not completed until shortly before the Korean War, and the organization was being reorganized. As a result, the NKN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with the lack of combat power of regular tro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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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50년대 중후반기 이승만 대통령의 언론 이미지 변화 -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의 보도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진흠 ( Kim Jinheum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3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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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전달하고 만들어내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재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언론 이미지는 '우상화'와 '독재자'로 대표된다. 그런데 1950년대 중후반 언론에서 전하는 혹은 만들어내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단조로운 우상화에 의한 추앙과 독재자라는 공격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기관지인 서울신문에서는 근엄하고 존경받는 대상에서 친근하고 인자하며 검소한 이미지, 그리고 건강하면서 열정적인 할아버지의 이미지 등 이승만의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 이후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는 발언이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독재라는 단어가 이승만 정권과 연결되었다. 이런 요인들이 이후의 이미지 변화 시도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개방하여 독재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과 나란히 섞여 지내는 모습을 연출했고, 소통할 줄 아는 인자한 '우리 할아버지'가 되어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시도와 노력을 보여주려 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검소하며 소박한 이미지의 추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야당으로부터 독재자로 공격받는 대통령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들이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해서 이승만이 건강 면에서 건재하다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국민들에게 주입했다. 이와 같은 이미지 변화 모색이 우상화와 독재자로의 공격 속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국민들의 이승만에 대한 감정은 우상화와 독재자라는 키워드만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국민들은 양극의 감정으로만 이승만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이승만의 이미지들을 고려한다면 이승만에 대한 대중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반응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The image of politicians delivered and created by the media has a great influence on the public. During his tenure, President Syngman Rhee's media image is represented by "idolization" and "dictator." However, the images of President Syngman Rhee delivered or created by the media in the mid-to-late 1950s appeared in various ways. It was not just reverence by monotonous idolization and attack as a dictator. The Seoul Newspaper, a government agency, created a variety of images of Syngman Rhee, including a friendly, benevolent, frugal image, and a healthy and passionate grandfather's image.
After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in 1954, remarks that defined Syngman Rhee as a dictator actively appeared, and the word dictatorship was linked to the Syngman Rhee regime. These factors led to subsequent attempts to change the image. Syngman Rhee opened the presidential residence to become the president of a "democratic country," not a dictatorship, to live side by side with the people, and there were attempts and efforts to become a kind "grandfather" who can communicate and approach the people friendly. The pursuit of loving children, frugal, and simple images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These are the opposite of the president being attacked as a dictator by the opposition party. In addition, in order to maintain the regime, Syngman Rhee continued to inject the image of being healthy into the people. This attempt for image change was promoted simultaneously amid idolization and attack by dictators.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he people's feelings for Syngman Rhee only with the keywords idolization and dictatorship. Considering Syngman Rhee's images created by the media, we will be able to understand one aspect of the public's diverse and complex emotions and reactions to Syngman Rhee. Also, we can guess what Syngman Rhee was to the people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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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진보당사건'과 진보당의 평화통일론 재검토 - 『진보당사건기록』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진영 ( Park Jinyou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3-36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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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통일방안은 지금까지도 과제로 남아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1950년대 진보당은 정책 중에서 무엇보다 평화통일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었고, 진보당=평화통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껏 진보당의 평화통일론 연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 보다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에 치중되어 연구해 왔다. 이글에서는 '진보당사건'에서 진보당 탄압의 빌미를 제공한 김기철의 「선언문」과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을 통해 진보당 당원들의 평화통일론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았다. 김기철의 「선언문」은 김기철의 개인적 의견으로 진보당의 통일정책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기철의 「선언문」은 진보당 통일정책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봉암은 「평화통일에의 길」에서 '북한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동일한 시간에 선거실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진보당 간부들은 「선언문」에서 언급한 '남북연립정권수립'과 「평화통일에의 길」의 다섯째 방안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선언문」과 「평화통일에의 길」을 통하여 '유엔감시 하의 남북총선거' 실시는 진보당이 정권을 획득한 후 가능하다고 보았다.


As the division became entrenched after the Korean War, unification measures still remain a task and are seeking solutions. In particular, in the 1950s, the Progressive Party focused the most on peaceful unification among policies, and received public attention enough to be called the Progressive Party = peaceful unification. Until now, the progressive party's research on peaceful unification has been focused on the study of the theory of peaceful unification of Cho Bong-am, the leader of the progressive party, rather than the progressive party's theory of peaceful unification. In this article, we examined the opinions of the progressive party members on the theory of peaceful unification through Kim Ki-cheol's 'Declaration' and Cho Bong-am's 'Path to Peaceful Unification', which provided an excuse for the oppression of the progressive party in the Progressive Party Incident. Kim Ki-cheol's 'Declaration' was not adopted as the progressive party's unification policy due to Kim Ki-chul's personal opinion. However, Kim Ki-cheol's Declaration created an opportunity to take a step further from the progressive party's unification policy. It was said that "standing in an equal position with North Korea and holding an election at the same time" proposed by Cho Bong-am's 'Path to Peaceful Unification' was the best. The Rhee Syng-man administration saw that the fifth plan of "establishing a coalition regime between the two Koreas" and "the path to peaceful unification" mentioned in the Declaration eventually coincided with "disintegr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he Rhee Syng-man administration, the proposals mentioned in 'the Declaration' or 'Path to Peaceful Unification' were impossible. Progressive party members can hold a "general election between the two Koreas under UN surveillance" through the Declaration and the Road to Peaceful Unification after the Progressive Party acquires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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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산주의 체제의 교육: 연구사적 맥락

저자 : 노경덕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22 (1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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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해방 이후 북조선로동당의 당원교육 연구 - 1946년 8월~1948년 3월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창희 ( Pak Chang Hee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5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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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해방 이후 북한의 국가건설운동에서 주도세력으로 활동한 북조선로동당의 당원교육에 대한 연구이다.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첫째, 당원교육기관은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당학교-도당학교-시·군·야간당학교-당세포교육으로 이어지는 전당원을 포괄하는 체계적인 당원교육제도가 구축되었다. 둘째, 당원교육기관의 설치와 운영뿐만 아니라 교과의 설정, 교재의 작성은 선전선동부가 주관하였다. 셋째, 북로당 선전선동부는 독자적으로 작성한 '유일제강'에 입각하여 당원교육교재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당원교육의 내용에 있어서 통일성을 도모하였다. 넷째, 북로당 선전선동부가 작성한 당원교육의 '유일제강'은 북한의 혁명적 경험을 중시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조합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구성되었다. 다섯째, 이와 같은 당원교육의 노선은 북로당 초대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다섯 가지 사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북조선로동당의 당원교육사업을 주도한 주체는 북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초대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었다. 둘째, 김창만이 주도한 당원교육의 목적은 혁명적인 국가건설운동을 선도하는 전위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김창만이 양성하고자 한 전위는, 해방 이후 북한에 조성된 혁명적 정세를 반영하고 있는 북로당의 정치노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부시켜 이해하고 이것을 실제 사업에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당원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혁명적 경험을 중시한 김창만의 시도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소련공산당의 경험을 앞세운 소련계 인사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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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북한의 직장 문화시설 설치와 노동자의 문화 향유(1945~1950)

저자 : 이세영 ( Lee Se You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9-9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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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도부는 1946년 일련의 노동법령을 제정·실시하며 노동자의 정권 지지와 적극적 노동 참여를 통한 생산력 증가를 기도하였다. 이를 위해 각 생산직장 내에 '구락부', 도서실, 운동장 등 각종 문화시설과 '써클'을 설치하여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하였다. 북한 지도부가 직장 내 문화시설을 설치한 이유는 북한에 '민주주의 민족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군중문화정책을 통해 노동자, 농민과 같은 근로대중이 직접 문화를 향유하고 창조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정권의 의도에 맞게 노동자들을 의식화·조직화 하기 위한 목적도 같이 존재하였다. 문예총이나 직맹과 같은 유관기관들은 직장 문화시설 설치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노동자들은 구락부·써클에서 문화적 역량을 기를 수 있었다. 일제하에서 누리지 못했던 문화생활이 가능해진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중에는 새로운 재능이 개화하여 전문 예술인으로 나아간 이도 있었다. 또한 매년 열리는 예술축전과 체육축전에 참가하여 새로운 체험을 할 뿐 아니라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참가할 기회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단지 그간 못 누렸던 문화적 혜택을 향유한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화 창조 과정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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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전쟁기 북한의 전시교육과정 운영과 기술인력 양성

저자 : 문미라 ( Moon Mira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2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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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북한의 교육체계를 흔들어놓았다. 북한은 전시에 적합한 수업형태를 고안하고 안전한 지대에 학교를 소개함으로써 최대한 중단 없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1951년 전선 고착화 이후에는 전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파괴된 학교를 복구하는 데 전 인민을 동원하였다. 전쟁기의 학교 복구는 해방 직후 대중의 힘으로 추진된 학교 증설운동의 연장이자 1956년 실시된 초등의무교육제의 물질적 토대였다는 점에서, 전전과 전후를 잇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기 북한교육의 최대 목표는 기술교육 확대를 통한 기술자 양성이었다. 보통교육과 고등교육, 유자녀학원·영예군인학교로 대표되는 특수교육을 막론하고 전쟁 중 모든 교육의 초점은 기술인력 육성·확대에 맞춰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재 북한교육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교육과 생산노동의 결합'의 초기적 형태가 나타났다. 한국전쟁기 교육이 기술에 방점을 두는 방향으로 주조된 것은 1950년대 후반 기술의무교육제 추진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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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전쟁 푸티지영상,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저자 : 강성현 ( Kang Sung Hyu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179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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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규모 영상 자료 수집 프로젝트의 성과를 바탕으로, 연구팀이 조직되고 공동 조사·연구·아카이빙 작업들이 꾸준히 쌓이고 있다. 이 글도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한국전쟁 영상 연구의 방법론을 세우고 학술적·대중적 영상아카이브에서 제공되어야 하는 연구 해제의 예시를 보여주고자 한다.
영상은 관련 문서·사진·구술 자료의 교차 분석과 비판적인 종합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구성할 수 있는 역사 자료다. 무엇보다 영상 이미지는 문서상 서술이나 구술로도 충분히 전달하기 여러운 시대적 분위기를 충실히 재현한다. 영상 연구는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사물·장소·날짜·사운드·배경·사건의 진행·내래이션 등의 정보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분석을 토대로 영상(촬영)의 기술 요소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접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영상의 생산 주체와 의도, 영상의 피사체, 영상 촬영의 방법과 기술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면서 한국전쟁 영상 연구 방법론을 논의한다. 그러면서 영상이 의도하고 시각화한 재현과 역사 현실의 균열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성찰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영상의 수집 단계에서부터 영상의 메타데이터에 대한 충실한 '목록 작성과 서술(cataloging)'이 이루어져야 하고, 해당 영상과 관련한 문헌 연구와 문서·사진·구술 자료들을 교차분석하면서 영상의 군사적·사회적·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 글은 미 육군 푸티지영상 중 71통신대 A중대 사진대 영상팀이 촬영한 모윤숙 체험 관련 영상(RG 111 ADC-8517)과 거제도포로수용소 올림픽 관련 영상(RG 111 LC-29589)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해제를 작성해 예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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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미군의 북한 영상 노획과 심리전 영화 제작

저자 : 전갑생 ( Jeon Gab Seang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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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기 미군이 어떻게 북한 노획영상을 활용했는지를 다루었다. 북한 노획영상에 관한 기존 연구는 극영화와 기록영화의 내용적 분석에 집중되었고, 미군에 노획되는 과정이나 다른 영화에 재활용된 사례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극동사령부와 미8군사령부 작전참모부(G-2)는 미 육군 2보병사단 내 G-2 책임자와 주요 부대원들로 '인디언헤드'를 조직하고 평양에 파견하여 정보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을 노획했다. 미군은 노획된 자료로 자체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반공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전쟁 심리전에 활용했다. 미국 심리전략위원회 소속 기관은 미국, 전쟁 상대국, 한국 등 여러 영역에서 체계적인 심리전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미육군부 정훈국과 극동사령부(FEC)의 민간정보교육국은 영화 < The Big Lie >와 TV시리즈 < The Big Picture >에 북한 노획 푸티지 영상을 삽입해 재탄생시켰다. 이 두 영화와 북한 노획영상은 전쟁 중과 전후 심리전에 이용되어 냉전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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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미군 푸티지 영상으로 본 한국전쟁 포로교환과 그 이면

저자 : 김일환 ( Kim Il-Hwan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1-25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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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리틀 스위치(Operation Little Switch)', '빅스위치(Operation Big Switch)', '만회작전(Operation Recovery)' 등 한국전쟁 전쟁포로 교환 작전을 촬영한 미육군통신부대 및 미군사고문단 영상을 통해서 전쟁포로를 바라보는 미군의 시각 및 영상자료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총보다 많은 카메라”가 모였던 판문점 포로교환 현장에서 미군은 공보적, 기록적 목적으로 교환 과정 전반을 촬영, 미편집된 푸티지 필름(footage film)으로 남겼다. 미군 영상병들은 민간 특파원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무대 뒤편'의 여러 장면들 역시 촬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군 작전의 일환으로 촬영된 푸티지 영상은 한편으로는 포로들을 냉전적 시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기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그러한 재현 의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장면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도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적 관점에서 푸티지 영상을 냉전적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는 포로의 복합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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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북한 해군의 창설과 조직·간부구성

저자 : 김선호 ( Kim Seonho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1-29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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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는 1949년 3월에 스탈린과 회담에서 무력통일방식이 간접적으로 승인되자, 1949년도 하기 인민군 증편계획을 수립해서 해군 창설을 개시했다. 그리고 청진항에 주둔한 소련 해군으로부터 무기·장비·교범·고문 등 군사지원을 받아서 1949년 8월 28일에 정규 해군을 창설했다. 민족보위성은 육군과 달리 해군에 병종지휘부를 설치해서 뒤늦게 창설된 해군의 전력을 급속히 증강시키려고 구상했다.
북한 해군이 육군·공군과 다른 점은 그 지휘부까지 대부분 소련에서 입북한 고려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북한 해군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10개월 전에 창설되었고 해상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북한지도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 소련군에 익숙한 고려인을 해군사령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해서 소련 해군의 현대적 군사교리를 급속히 도입했다.
민족보위성은 소련에서 연안방어 중심의 군사교리를 도입했고 6·25전쟁을 준비하면서 해군에 독자적인 해상전투나 지상군에 대한 함포공격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북한지도부는 2개 육전대를 후방 해안에 상륙시켜 후방을 교란하려 했고, 전략지역인 원산·청진·진남포에 방어부대를 편성하고 함정의 절반을 계류시켜 국군 해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결국 북한 해군은 보조적 공격임무와 연안방어 임무를 맡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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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50년대 중후반기 이승만 대통령의 언론 이미지 변화 -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의 보도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진흠 ( Kim Jinheum )

발행기관 : 역사문제연구소 간행물 : 역사문제연구 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9-33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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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전달하고 만들어내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재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언론 이미지는 '우상화'와 '독재자'로 대표된다. 그런데 1950년대 중후반 언론에서 전하는 혹은 만들어내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단조로운 우상화에 의한 추앙과 독재자라는 공격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기관지인 서울신문에서는 근엄하고 존경받는 대상에서 친근하고 인자하며 검소한 이미지, 그리고 건강하면서 열정적인 할아버지의 이미지 등 이승만의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 이후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는 발언이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독재라는 단어가 이승만 정권과 연결되었다. 이런 요인들이 이후의 이미지 변화 시도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개방하여 독재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과 나란히 섞여 지내는 모습을 연출했고, 소통할 줄 아는 인자한 '우리 할아버지'가 되어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시도와 노력을 보여주려 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검소하며 소박한 이미지의 추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야당으로부터 독재자로 공격받는 대통령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들이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해서 이승만이 건강 면에서 건재하다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국민들에게 주입했다. 이와 같은 이미지 변화 모색이 우상화와 독재자로의 공격 속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국민들의 이승만에 대한 감정은 우상화와 독재자라는 키워드만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국민들은 양극의 감정으로만 이승만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이승만의 이미지들을 고려한다면 이승만에 대한 대중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반응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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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진보당사건'과 진보당의 평화통일론 재검토 - 『진보당사건기록』을 중심으로 -

저자 : 박진영 ( Park Jinyo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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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통일방안은 지금까지도 과제로 남아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1950년대 진보당은 정책 중에서 무엇보다 평화통일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었고, 진보당=평화통일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껏 진보당의 평화통일론 연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 보다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에 치중되어 연구해 왔다. 이글에서는 '진보당사건'에서 진보당 탄압의 빌미를 제공한 김기철의 「선언문」과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을 통해 진보당 당원들의 평화통일론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았다. 김기철의 「선언문」은 김기철의 개인적 의견으로 진보당의 통일정책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기철의 「선언문」은 진보당 통일정책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봉암은 「평화통일에의 길」에서 '북한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동일한 시간에 선거실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 진보당 간부들은 「선언문」에서 언급한 '남북연립정권수립'과 「평화통일에의 길」의 다섯째 방안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선언문」과 「평화통일에의 길」을 통하여 '유엔감시 하의 남북총선거' 실시는 진보당이 정권을 획득한 후 가능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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