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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晦堂 張錫英의 滿洲·露領 기행시의 시적 구현 양상 -『遼左紀行』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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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堂 張錫英의 滿洲·露領 기행시의 시적 구현 양상 -『遼左紀行』을 중심으로-

The Aspects of Poetic Realization of Hoedang Jang Seok-young's Manchuria and Far East Russia Travel Poems. - Focusing on 『遼左紀行(Yojoagihaeng)』 -

한길로 ( Han Gil-ro )
  •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 영남학 80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3월
  • : 239-268(30pages)
영남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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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국내에서의 서정: 이역으로 향하는 遺民의 悔恨과 鬱悶
Ⅲ. 만주 · 노령 체험의 시적 구현 양상과 詩情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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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승희·곽종석 함께 한주 이진상의 학맥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근대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회당 장석영의 해외 기행시에 주목하는 논문이다. 그는 국망의 현실을 극복하고 유도의 쇠퇴를 막기 위해 해외 이주를 모색했던 유림이었다. 그는 북만주 蜜山에 머물던 한계 이승희와 더불어 해외 한인공동체를 논의할 계획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대로 향했고 그곳을 주람했다. 약 100일간 15,000리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그의 『요좌기행』은 중화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의 재현과 고국의 독립 및 이민자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던 1910년대 한국 유림의 현실인식과 그 내면을 웅변하고 있다. 그의 기행시는 식민지가 되어 버린 고국을 뒤로한 채, ‘떠남을 위한 기행’을 시작한 遺民의 憂愁로 시작된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한·중 ‘동지’들을 만나 잠시 마음의 안정을 갖고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60대 老儒의 몸으로 북만주 및 노령과 같은 낯선 이역을 기행하는 과정은 唐 玄奘과 비견된다고 할 만큼 고된 길이었다. 여기에 이역을 전전하며 流民이 되어버린 한인들이 겪고 있던 삶의 실상이 목도되면서, 비감과 통한 그리고 客愁의 서정은 배가 되어 온전히 시에 담기게 된다. 동시에 시에는 移居地에 대한 모색과 고뇌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고 확대되어 나타났다. 요컨대 그의 기행시는 근대기 유림이 실행한 독립운동의 일면과 함께 해외 이거를 모색하던 당대 유림의 내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한·중’과 ‘중·러’의 경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한인 이민자와 난민을 바라보며 나타난 다양한 내적 갈등과 자기 정체성의 모색, 또 고국에 대한 깊은 향수까지를 모두 담고 있었다. 즉 그의 작품은 근대기 한문학의 특징적 국면들을 대단히 잘 반영하고 있다.
Hoedang Jang Seok-young is a person who inherited the studies of Hanju Lee Jin-sang together with Lee Seung-hee and Kwak Jong-seok. He is also a modern Confucian scholar and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He traveled to China in 1912 for the liberation of his country and the revival of Confucianism, which in fact meant immigration. In other words, for him, China was not just a travel destination, but a base for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and preservation of Confucianism. His destination was Milsan, North Manchuria, where his colleague is located, but he even visited Far East Russia. His travel poems were full of sadness and lamentation about the reality of his country, and he met his comrades and expressed his inner psychology. At the same time, his poems also had concerns and serious reflection. about the place of migration. Finally, it also reflects the difficult pain and lifestyle of the Korean diaspora. In conclusion, his literary work contains new contents and themes of Modern Sino-Korean Literature, so it is especially worthy of 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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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민속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738-7760
  • : 2713-807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1-2022
  • :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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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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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새로 발견된 신라 恭順阿湌碑片의 조사와 碑文 書者

저자 : 박홍국 ( Park Hong-kook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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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5월 20일 知人으로부터 경주 남산동 南山寺 정원의 석재에 남아 있는 글자의 판독과 옛 비석인지 아닌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받고 그에 대한 고증작업에 착수한 바 있다. 그 결과 우선 신발견 碑片은 일제강점기와 1963년에 각각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수 1점, 碑片 2점과 더불어 동일한 碑身의 일부로, 序頭 부분인 것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비석이 파손되기 전의 폭과 길이 등에 대한 추정치를 도출할 수 있었다.
한편, 이 新片의 명문 내용, 즉 '恭順阿湌公神道之碑'에 따라 이 비석이 현존하는 우리나라 最古의 신도비임은 물론이고, 碑의 주인공까지 밝혀졌다. 다음으로 이 비편 명문의 서체를 비교·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神筆로 추앙되고 있는 金生이 바로 이 비문의 書者임을 지적하였다. 끝으로 비문에 있는 '天嶺郡' 지명이 사용되었던 첫 해(757년), 이수의 양식, 김생에 대한 문헌자료 등을 분석 고찰하여, 이 비석이 790~800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On May 20, 2022, I was asked to investigate the chinese characters on the stone at the garden of Namsan Temple at Namsandong, Gyeongju and its value, and have studied its historical evidence.
Here are some conclusions:
1. The newly found part is the exordium of the Sindobi(Sindo epitaphs) belonging to Gyeongju National Museum with a capstone fou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its two parts found in 1963.
2. The whole size of the tombstone could be estimated on the basis of it.
3. It would be the first existing tombstone according to the nine Chinese characters(恭順阿湌公神道之碑) inscribed on the surface of the part and its calligrapher could be extrapolated on the basis of it.
4. As a result of comparing and analysing the epigraphs of calligraphy, its calligrapher is supposed to be Kim, Saeng recognized as the greatest calligraphic master in the history of Korea.
5. The tombstone is supposed to have been built in 790-800 as a result of studying the place name, "Cheollyeonggun", the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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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라 아찬 金恭順 神道碑片 검토

저자 : 李泳鎬 ( Lee Young-ho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6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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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경인 경주 南山寺에서 새로 발견된 비편은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신도비의 일부였다. 이 글은 남아있는 부분의 글자를 행별로 살펴 그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제1행은 비석의 제목으로서 주인공의 이름이 공순이며, 관등은 6등인 아찬, 그리고 神道碑임을 명시하였다. '김공순'이 아닌 '공순'만을 밝힌 데서 성명을 연칭해서 사용하는 문화는 일반화되지 않은 사실과, '아찬' 관등 아래에 존칭접미사인 '公'자를 붙였음을 주목하였다.
제2행부터 제8행까지는 주인공과 관련된 서술이었다. “태종대왕의 孫”이라 한 부분과 김씨의 연원을 “少昊의 후예”라 한 구절 등에서 주인공은 중대 왕실과 밀접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진골 출신으로 추정되는 주인공은 20세 무렵에 천령군 태수에 부임하는 등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이하 부분의 내용은 비석의 탈락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찬의 관등을 가진 인물을 위해 신도비를 건립한 것을 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비운의 죽음을 당한 사람이 아닐까 여겨졌다. 특히 혜공왕대 일어난 6차의 大亂에 주목하고, 혜공왕 4년(768)의 大恭의 난과 결부시켜 이의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추측해 보았다.
또한 이 비석의 건립 연대는 “天嶺郡”이란 지명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경덕왕 16년(757) 12월에 漢化政治로 “천령군” 지명이 탄생하였으므로, 그 이후인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시기를 압축할 경우 지명의 복고조치가 단행된 혜공왕 12년(776) 정월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보고, 특히 대공의 난이 진압된 직후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그를 현창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비석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상 새로 발견된 비편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를 하였다. 그러나 발견된 비편이 원비석의 서두 일부에 불과하여 제한된 내용만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차후 시간을 갖고 세밀히 검토하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남은 비편들도 추가적으로 발견되길 기대한다.


The fragments of a stele, newly discovered at the Namsan-sa temple in Gyeongju, the Silla capital, are parts of the oldest memorial stele existing in our country. This study has analyzed the contents of the partial inscription by examining the remaining characters on every line. The first line from the top concerns the stele's title, which elucidates that it was set up to the memory of Kim Gongsun, a holder of achan, the sixth office rank of the Silla dynasty. It is revealed that the system of calling the family name and given name together did not pervade Silla society, in that this stele defined "Gongsun," not "Kim Gongsun." It is also remarkable that an honorific title "gong" was suffixed to the character achan.
The seven lines ranging from the second through the eighth lines describe the peson Kim Gongsun. Inferring from the part that he was “a grandson of King Taejong” and a passage that he was “a descendant of Soho,” he is considered to be a man in close connection with the Silla's royal household of the middle period. Presumed to be a man from the true-bone rank, he displayed distinct activity, including assuming office as magistrate of the Cheonryeong district when he was just twenty years old. Regretably, we know nothing about him beyond that, because we have just examined a part of the stele.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stele was erected to the memory of a person of the office rank of achan, however, it is supposed that he died an unnatural death while he was young. In particular, when we pay attention to the six great disturbances and consider him in relation to the Kim Daegong's plot against the monarch in 768 (in the fourth reign year of King Hyegong), he is presumed to have been a person who performed the meritorious deed to quell Kim Daegong's treason activity.
The time of the stele's erection might be inferred from the place name “Cheonryeong district.” Because the name resulted from the Silla policy of Sinicization in December 757 (the sixteenth reign year of King Gyeongdeok), it is presumed that it was set up roughly in the latter part of the eighth century. More specifically, it is surmised that it might have been erected at a certain point of time before January 776 (the twelfth reign year of King Hyegong), when the previous place name was restored, especially immediately after Kim Daegong's treason was shattered.
The above accounts are a product of a rudimentary analysis that has investigated the contents of the inscription only under certain restriction, because the fragments under study are no more than the opening part of the whole stele. Henceforth, a more detailed examination without being restricted by time may cause us to find much more historical facts. I hope that the still undiscovered fragments of the stele will be additionally excavated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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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삼국유사』에 인용된 『삼국사』 검토 - 표기와 인용 방식을 중심으로 -

저자 : 차광호 ( Cha Kwang-ho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9-10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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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전거 중 하나인 『삼국사』는 현전하지 않기에 실체 파악이 어렵다. 더욱이 '삼국사'라는 서명은 『삼국유사』의 또 다른 전거인 『삼국사기』나 『국사』의 동의어로도 사용될 수 있어서 혼란은 가중된다. 『삼국유사』의 찬자 역시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서 전거를 인용하는 방식에 주목하였는데, 그 결과 전거명의 표기와 관련해서 몇 개의 규칙성을 찾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삼국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되었다. 우선 이 책을 인용할 때마다 '삼국사'라는 전거의 명칭을 빠짐없이 기록해 출처를 명확히 하였다. 다음으로 '삼국사'와 그 종속어를 병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삼국사』의 종속어로는 「本傳」이나 「列傳」과 같이 '傳'의 형식을 갖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출전 표기 방식은 『국사』나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국사』는 '국사'라고 표기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용어를 생략하기도 했고, 때로는 '記' 형식의 종속어로 출처를 밝히기도 하였다. 또한 '史傳'이나 '國史史臣'과 같이 '史臣'류의 용어들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는 '삼국사기'라는 서명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대신 「史臣之論」이나 「史論」과 같은 '史臣'류의 용어들로 출처를 표기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의 찬자가 『삼국사』를 『국사』나 『삼국사기』와 다르게 표기하였다는 것은, 이들 세 전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한편 원문과 인용문의 관점에서 『삼국유사』에 인용된 『삼국사』와 『삼국사기』의 관련성을 검토하였는데, 『삼국사』가 『삼국사기』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살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두 사서의 관련 내용은 주제와 문맥, 문장 구조와 분량, 용어와 표현 등에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많았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삼국유사』의 찬자는 적어도 출전의 표기와 인용 방식에 있어서 『삼국사』를 『국사』나 『삼국사기』와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Samguksa, which is cited in Samgukyusa, is transmitted no longer today, which makes it difficult to figure out its true nature. Furthermore, the title "Samguksa" itself can be confused with Samguksagi, which was also published during Goryeo, and Guksa, one of references of Samgukyusa.
This study focused on the possibilities that the author of Samgukyusa was aware of confusion involved in the title "Samguksa" and set a couple of minimum criteria of writing to address the confusion. As a result, he distinguished Samguksa, Guksa, and Samguksagi when citing them in the book. When citing Samguksa, in particular, he made it sure that he wrote down the title "Samguksa" to provide information about the source. He also used analogous or subordinate terms like "Bonjeon" and "Jeon" for Samguksa. He used "Gi" and "Saron" for the subordinate or analogous terms for Guksa and cited Samguksagi in the form of "Saron" in his Samgukyusa.
Those findings indicate that Samguksa cited in Samgukyusa is a different book from Guksa and Samguks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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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 美肹考

저자 : 여성구 ( Yeo Sung-gu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1-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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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대영랑이 화랑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남변제일과 미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였고, 앞서 살핀 남변제일에 이어서 미힐을 살핀 글이다.
효소왕대 미힐은 황금 100푼을 바치고, 관등과 租 100석을 받았다. 반면 경덕왕대 대영랑은 白狐를 바치고, 관등만 받고, 곡물을 받지 못했다. 국왕의 하사품의 有無나 지급량의 차이에 대한 배경이나 원인은 진상품의 가치, 왕의 성향, 시대 상황, 수급자의 신분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왕의 성향이나 시대 상황은 한정된 지면에서 논하기에 그 내용이 다양하고 주관적인 해석에 치우칠 경향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진상품의 가치와 수급자의 신분을 밝히는 데 집중하였다.
미힐이 진상한 황금 100푼(12.5g)의 가치는 租 100석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租 100석은 强首가 사지급(대사-소사)으로 복무할 때 받은 1년치 녹봉이었다. 미힐이 남변제일이라는 대사 관등을 받은 것을 보면, 4두품 이상의 신분이었다. 그리고 사지급의 1년치 녹봉에 해당하는 租 100석을 받은 것은 남변제일이 대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직무는 황금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금광 개발이나 금광석의 제련술과 연관 지을 수 있다.
한편 군현명을 쓰지 않고, 신촌만 써도 모든 이들이 알 정도라면, 父王 신문왕의 방문지였을 개연성이 높다. 신촌은 신라 중대 왕실과 친연성을 보이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의 거주지인 신촌은 금광산지이거나 그 주변이라고 생각되며, 신문왕이 순행시 방문해서 음악을 들었던 신촌과 동일한 지역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촌은 금광산지와 향악이 있는 곳으로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 주변, 소백산맥 이남에서 찾아보면, 금광과 향악이 있는 곳으로 안동・경산・울주・영천・의성・성주 지역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황금의 양에 비해 많은 곡물이 지급된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started with the question, Is Daeyeongrang(大永郎) is Hwarang? In order to clarify this, it was necessary to understand Nambyeonjeil(南邊第一) and Mihil, and it is an article that examined Mihil after Nambyeonjeil.
Mihil during the King Hyoso gave 12.5grams of gold, received an official rank and about 4 tons of rice, while Daeyoungrang during the King Gyeongdeok gave white foxes, received only an official rank, and did not receive grains. The background or cause of the difference in the presence or absence of the king's subordinate goods or the amount of payment can be inferred through the value of the genuine goods, the king's tendency, the situation of the times, and the status of the recipient.
The king's tendency and the situation of the times tend to be biased toward diverse and subjective interpretations because they are discussed in limited fields, so this study focused on revealing the value of the products and the status of the recipients.
The value of the 12.5g of gold that Mihill dedicated was far less than about 4 tons of rice. About four tons of rice was a year's wage that the Kangsu(强首) received when working as the Saji grade(舍知級).
Mihil was more than 4th dupum(頭品) in his position, given that he received the Daesa(大舍) of Nambyeonjeil. And the fact that the rice received about 4 tons of rice equivalent to a year's worth of rice is confirmed that NambyeonJeil is the Daesa(大舍). His duties are thought to be unrelated to gold, which can be associated with the development of gold ore or smelting of gold ore.
On the other hand, if everyone knows even if they use Shinchon without using the county names, it is possible that the father Shin Mun-wang visited the area.
His residence, Shinchon, is thought to be a gold mine or a surrounding area, and it seems to be the same area as Shinchon where the king visited the area and listened to music.
Therefore, Shinchon will be able to be regarded as a place where there is a gold mine and local music. Looking around Gyeongju and south of Sobaek Mountains, it is estimated that it is one of Andong, Gyeongsan, Ulju, Yeongcheon, Uiseong and Sungju areas where gold mines and local music are located. This will reasonably explain why many grains were paid compared to the amount of 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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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기하문 인장과 문서의 封緘

저자 : 이동주 ( Lee Dong-joo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6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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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가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중앙의 명령이 지방의 말단에까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관건이다. 구두 명령은 수신자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이에 반해 문서에 적힌 명령은 정확한 의사전달이 가능하며 책임 소재를 가리기에 용이하다. 다만 문서 역시 이동 과정에서 개봉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내용의 진정을 담보받기 위한 방법이 강구되었다.
문서의 진정은 인장의 날인을 통해 실현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인장의 날인은 서주 말기까지 소급되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면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인장은 주로 인명, 숫자, 지명 등 주로 내용상 민감한 부위에 찍음으로써 위조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나당전쟁기인 문무왕 15년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구리로 된 인장을 반급한 바 있다. 국가 비상시기에 범 국가적인 명령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신라의 인장 가운데 문자 인장 이외에 기하문 인장이 의외로 많이 확인된다. 인장의 재질은 청동, 납석, 토제, 목제 등 다양하다. 그리고 경주를 비롯하여 지방을 망라하여 출토된다. 다만 출토지는 역원, 산성, 사찰 등 특정 시설에 한정된다. 이는 인장의 사용자를 추정하는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산성은 행정의 중심지이다. 더구나 삼척 흥전리사지, 양주 대모산성,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인장의 사례는 문자 인장과 기하문 인장이 동시에 사용된 정황을 보여준다.
문자 인장의 경우 문서의 책임의 진정을 담보받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서의 내용 못지 않게 기밀의 유지도 중요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기밀의 유지를 위해 여러 보안책이 강구되었다. 문서는 대개 봉투나 함에 담겨 이동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부 문서의 개봉 여부는 봉투의 입구나 함의 외부에 찍힌 인장의 훼손여부를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기하문 인장은 문자 인장과는 달리 문양의 모양이 거의 같아 상하 구분 없이 무작위로 찍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는 결국 문서의 포장 및 수발 시간의 단축으로 귀결되었다.


In order for a country to operate smoothly, it is the key that the central command is accurately transmitted to the end of the province. Oral commands are highly likely to be interpreted arbitrarily depending on the recipient's level of knowledge. On the other hand, orders written in documents can be accurately communicated and it is easy to determine who is responsible. Since the document may also be opened in the process of moving, a method was devised to ensure the authenticity of the contents.
The authenticity of the document was realized through the sealing of the seal. In East Asia, the sealing of the seal is retroactive to the end of the Western Zhou period, and it spreads widely in the Spring and Autumn Warring States Period. Seals were mainly engraved on sensitive areas such as people's names, numbers, and place names to prevent counterfeiting.
Silla returned copper seals to central and regional government offices in the 15th year of King Munmu, during the Nadang War. He seems to have been trying to establish a pan-national command system in times of national emergency. However, among the seals of Silla, in addition to the letter seals, the geometric seals have been found surprisingly many. The material of the seal is various, such as bronze, pyrophyllite, earthenware, and wood. They are also excavated from Gyeongju and other regions. However, excavated sites are limited to specific facilities such as stations, fortresses, and temples. This provides useful information for estimating the user of the seal. The provincial fortress is the center of local administration. Moreover, the case of the seal unearthed at Samcheokheungjeonnisa Temple shows the situation in which both the letter seal and the geometric seal were used at the same time.
In the case of a character seal, it is used to substantiate the content of the document. However, I think that maintaining confidentiality is as important as the content of the document. Therefore, several security measures must have been devised to maintain confidentiality.
Documents would usually have been moved in envelopes or cases. If so, it is thought that the opening of the internal document could have been known through the damage of the seal on the entrance of the envelope or the outside of the case. In fact, unlike letter seals, geometric seals have the advantage of being able to take pictures at random without distinguishing between top and bottom because the shape of the pattern is almost identical. This ultimately resulted in a reduction in the time required for packing and sending 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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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 초ㆍ중기 진주 동면의 右族 거주 里坊에 대한 연구

저자 : 박용국 ( Park Yong-guk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2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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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지리지』 진주 임내 반성현의 四方界域에 의하면 그 구역 내에 해당하는 리방은 반성리·가수개리·정수개리·비라동리·부다리·상사리·용봉리·청원리·승어산리 등 모두 9개소였다. 그 리방의 자연촌은 연계재본 『진양지』에 의하면 35개소이지만 그 실태를 고증한 결과 모두 39개소였다.
우족이 정착한 리방의 자연촌과 시기를 검토한 결과 상사리 우곡촌에는 진양정씨 우곡공파 隅谷 鄭溫(1324-1402), 상사리 백야동에는 고려말기 진양정씨 은열공파 都染署令 鄭淳이 정착했다. 또한 백야동에는 울산김씨 白巖 金大鳴(1536-1603)의 고조부 奉化縣監 金國老가 정순의 딸과 혼인을 통해 이주했다. 그리고 정수개리 莫耶洞에는 16세기 초에 청주한씨 遯菴 韓承利(1477-1536)가 입향하여 정착했으며, 한승리의 사위 재령이씨 사의공파 大山 李琠(1502-1579)과 그의 仲兄 李琛이 입향하여 거주하기도 했다.
상사리 백야동의 정순의 내외손 가문들과 정수개리 막야동의 청주한씨 가문은 우족으로서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함안과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의 유력 가문들과 혼인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재지적 기반을 확장하였다. 그들 우족들은 남명학파의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삼고, 대과와 사마시 합격자를 다수 배출함으로써 정치·사회적 활동과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특히 상사리 백야동의 우족들은 향촌지배권을 두고 진주목사 이제신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우족 가문들이 반성현의 縣內 외곽 상사리와 정수개리에 정착하여 번성함으로써 자연촌과 리방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상사리의 속방, 즉 자연촌 백야동은 白也里로 지칭될 만큼 리방의 규모로 성장했다. 정수개리의 중심 마을은 조선 초기까지 龍巖寺의 寺下村인 용암촌이었으나 16세기 초에 이르러 우족 가문이 정착한 막야동이 그 중심 마을로 성장했다. 정수개리와 상사리는 반성현의 지역촌 가운데 縣內 다음으로 이른 시기에 촌락이 형성되고 우족 중심의 리방으로 성장하였다.


First, According to the four-way boundary of Bansonghyon, the Jinju Imnae of 『Gyeongsangdojiliji』, there were 9 Libangs within that area, including Bansongri, Sangsangri, and Jeongsugaeli. The natural villages in nine Libang were 35 places according to the Yeongyejaebon 『Jinyangji』, but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actual situation, it was revealed that there were 39 places in all.
Second,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natural villages and time period of Libang where Ujok settled, Jinyang Jeong Clan Ugoggongpa Jeong On settled in Sangsari Ugogchon and Jinyang Jeong Clan Eunyeolgongpa Jeong Soon settled in Sangsari Baekyadong in the late Goryeo, respectively. Also, Ulsan Kim Clan Kim Guk-ro moved to Baekyadong through marriage with Jeong Soon's daughter. Jeongsugaryri Makyadong was settled by Cheongju Han Clan Han Seung-ri at the beginning of the 16th century, and Han Seung-ri's son-in-law Jaelyeong Lee Clan Sauigongpa Lee Jeon and former second older brother Lee Chim moved there.
Third, the Nae'oeson(內外孫) family of Jeong Soon of Sangsari Baekyadong and the Cheongju Han Clan family of Jeongsugaryri Makyadong established a social foundation through marriage with the influential families of Haman and Jinju, based on their superior social status as Ujok. Through this, they expanded their base within the region. These Ujoks, based on Nammyeonghagpa's human network, produced a large number of Gwageo Exam passers, so they had considerable political and social activities and influence. In particular, the Ujoks of Baekyadong had conflicts with Jinju Governors Lee Je-sin over the dominance of rural communities in the process.
Fourth, Ujoks settled and prospered in Sangsari and Jeongsugaryri outside Hyunnae of Bansonghyon, leading to the growth of natural villages and Libang. Sangsari's Baekyadong was also referred to as Baekyari. This has a lot to do with Baekyadong's growth. Until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central village of Jeongsugaryri was Yongamchon, the Yongamsa Saha village. However, by the beginning of the 16th century, Makyadong, where the Ujok family settled, has grown as its central village. Sangsari and Jeongsugaryri are considered to be Libang, where Ujok-centered villages were formed and developed in the earliest period after Hyunnae among the district villages of Bansongh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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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景物詩'를 통해 본 龜巖 李楨 詩作의 향방

저자 : 백운용 ( Baek Woon-young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5-24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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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대상으로 삼는 공간은 크게 자연의 공간과 인공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시인은 이를 대상으로 외적인 경이를 시화하기도 하고 내적인 상징을 시화하기도 하며 외적인 상징을 시화하기도 하고 내적인 경이를 시화하기도 한다.
구암 이정이 시를 쓰는 방법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 시작 법에 의거하여 이정의 시를 분석해 보면, 첫째, 자연의 공간을 대상으로 외적 경이를 시화하여 외경에 압도되어 흥취를 표출하기도 하며, 외경에 동화되어 자연의 공간을 완상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 외경을 통해 정감을 환기하여 자연의 공간에서 추억에 젖기도 하였으며, 한 차원 나아가 외경이 삶의 현실을 배태한 공간임을 분명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둘째, 자연의 공간을 대상으로 내적 상징을 시화할 때는 자연의 공간에서 도를 구하기도 하고 그 공간을 도가 실현되는 경지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이때 '源頭'에 대한 집착은 구도의 절실함으로 통하였고, 자연은 속세와 격리된 이상향이자 도가 실현되는 '大家'였다. 이정은 여기서 더 나아가 득도의 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내적 상징의 시화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셋째, 인공의 공간을 대상으로 외적 상징을 시화할 때는 상징에 매몰되어 교훈적 어조로 당부하기도 하였고, 인공물이 담지하고 있는 상징성을 풀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정은 외재한 상징을 넘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상징을 창출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하였다.
넷째, 인공의 공간을 대상으로 내적 경이를 시화할 때는 그가 처한 시간과 공간적 분위기에 젖어 상징을 버려두고 공간의 분위기를 묘사하였다. 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간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발견'해는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인공의 공간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징적 언어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필요하고, 상징적 의미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철학적 체계가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의미를 체화하여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정의 시 쓰기는 '경물시'만 놓고 볼 때,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시작의 네 가지 양상이 모두 구현되어 있으며, 그 표출 양상도 다양하다. 이뿐만 아니라 현실에 눈감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였으며, 득도의 경지를 체험하고, 새로운 상징을 창출하였으며, 감춰진 상징을 발견해내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다.


The space targeted by poets can be largely divided into natural space and artificial space. The poet poems external wonders, internal symbols, external symbols, and internal wonders.
The way Guam Lee-jeong writes poems is also not out of this. According to these starting methods, Guam's poems were analyzed. First, the external wonders were visualized in the natural space, overwhelmed by the external view, and the natural space was assimilated into the external view and viewed as an object of completion. In addition, by evoking affection through the outer diameter, he was immersed in memories in the natural space, and furthermore, it was clearly revealed that the outer diameter was a space that originated the reality of life.
Second, when poeticizing the inner symbol for the natural space, the Tao was obtained from the natural space and the space was identified as the state of realizing the Tao. At this time, the obsession with "源頭" led to the urgency of the composition, and nature was a "大家" where utopia and capital were realized, isolated from the world. Guam went further from here, and by embodying the experience of 得道, it has reached the highest level that the poetry of the inner symbol can achieve.
Third, when poeticizing external symbols for artificial spaces, they were buried in symbols and asked for them in an instructive tone, and explained the symbolism of the artifacts. However, without staying here, Guam went beyond the external symbols to create its own unique symbols.
Fourth, when poeticizing the inner wonder for the artificial space, he was immersed in the time and spatial atmosphere he was in, leaving the symbol behind and describing the atmosphere of the space. In addition, it took a step further from here and reached the stage of 'discovering' the symbolic meaning of space.
It can be said that Guam's poetry has reached a certain level in terms of "Gyeongmul Poem[景物詩]". All four aspects of the beginning are implemented, and their expression patterns are also diverse. In addition, it has faced reality without turning a blind eye to reality, experiencing the level of "得道", creating new symbols, and discovering hidden symbols, so its value can be appreciated even more. This is why we call Guam a scholar and a literary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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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국보 이순신 서간첩 연구

저자 : 조상현 ( Cho Sang-hyun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3-27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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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초, 이능권이 영암 연주 현씨 집안으로부터 얻은 이순신 친필 편지는 그의 후손 이규대에 의해 덕수 이씨 종가 사당에 봉납 되었다. 이때 편지는 책자의 형태로 장첩되고, 이규대의 발문이 가장 뒤에 붙은 형태였다. 1928년에 조선사편수회가 촬영한 서간첩 유리 필름이 남아 있는데, 이순신과 장남 이회가 현씨 집안에 보낸 편지 7통과 이규대의 발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편지의 배치 순서는 시대 순을 따르고 있었다. 1930년대 초, 『위인유적』과 『이충무공전서』 속집 등이 간행되면서 현씨와 전혀 무관한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앞자리에 위치하기 시작한다. 현재 국보 서간첩 가장 앞부분에도 역시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30년대에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서간첩에 추가됐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국보 서간첩은 1928년 필름이나 1960년대 간행된 이은상의 영인본 등과 비교해서 편지 순서가 뒤섞여 있다. 이는 누군가 서간첩을 고의로 조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은상의 영인본 편지 배치가 서간첩 원본과 다른 것은 단순히 편지를 수신인 순서로 정렬한 까닭일 뿐, 수상한 지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1967년 벌어진 국보 76호 도난 사건 때 절도범이 서간첩 일부를 분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이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1928년의 순서와 어긋난 상태로 장첩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현재의 국보 이순신 서간첩은 최초 형태인 '이순신-현씨 집안'과의 편지 모음이라는 성격에서 어긋나 있으며, 편지 순서 역시 뒤섞여 있는 상태이기에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In the early 1830s, Lee Neung-kwon received Yi Sun-sin's handwritten letter from the Yeonju Hyeon Clan. His descendant Lee Kyu-dae dedicated the letter to the shrine of the Lee clan. At this time, the letter was made in the form of a booklet, and the epilogue of Lee Kyu-dae was attached at the end.
The glass film of Yi Sun-sin's letter taken by the Chosun Historical Association in 1928 remains. It consists of a letter to Hyeon Clan and the epilogue of Lee Kyu-dae, arranged in chronological order. Judging by the fact that there is a 'letter to nephew' at the front of the 'National Treasure - Collection of Letters by Yi Sun-sin', it seems that it was newly added to the "Letters Collection" in the 1930s.
Currently, the 'National Treasure - Collection of Letters' left to us is a mixture of letter orders compared to '1928 Film' and 'Lee Eun-sang's Printed Book' published in the 1960s. This was also an excuse for suspicion that someone might have intentionally manipulated it. However, the reason why Lee Eun-sang's arrangement of the letter is different from the original Collection of Letters is simply because the letters were arranged in the order of recipients, and no suspicious points were found. It has been confirmed that during the theft of National Treasure No. 76, which took place in December 1967, the letter collection was separated into some pages by thieves. It is presumed that the current 'National Treasure - Collection of Letters' is different in order from the initial letter book due to the theft.
The present 'Collection of Letters by Yi Sun-sin' deviates from the character of a collection of letters between the original form 'Yi Sun-sin-Hyeon Clan'. And the order of letters is also mixed up. It is necessary to find the original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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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후기 읍지 편찬 흐름과 읍지 통합 작업 - 경산지역 경산·자인·하양 세 고을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재두 ( Lee Jae-doo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30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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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읍지는 구지를 그대로 베낀 경우들이 많아 읍지 제작 당시 고을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18세기 후반 영·정조 시기 중앙정부에서 주도한 읍지 편찬에는 향촌 공의를 바탕으로 사족들이 참여하였다. 19세기 순조 말 읍지 편찬에도 사족들이 일부 참여하여 경상도 도내 전체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읍지를 편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완성한 정본은 규장각의 『경상도읍지』만 확인된다. 그렇지만 각 고을에는 18세기 후반이나 순조대에 편찬한 읍지의 고을 보관용이나 초고본이 남아있었다. 각 고을에서는 이전에 편찬한 구지나 1832년지의 초고본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행정조직의 말단에 있던 향리들은 구지를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가감하여 감영이나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편찬 시기가 후대 것이지만, 읍지 편찬 이전 시기의 통계자료가 실린 것은 구지를 재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경산현·자인현·하양현의 경산지역은 영조대의 전국읍지 편찬 사업 추진 과정에서 1758년에는 『여지승람』 증보유형, 1760년에는 『여지도서』 유형의 읍지를 편찬하였다. 제3, 4차 전국읍지 편찬 사업 시기인 1768년과 1773~1775년 무렵에도 읍지를 편찬했겠지만, 현전하지 않는다. 정조대인 1786년에 편찬한 읍지를 보면, 경산현과 하양현은 1768년에 보급한 『여지도서』 보완유형(『경상도읍지』 유형)이며, 자인현은 1775년에 보급한 『여지도서』 증보유형(『여지도서』+α 유형)이다. 1789년에 편찬한 읍지는 세 고을 모두 1786년지를 바탕으로 호구와 부세 관련 수치를 수정하였을 뿐이다. 순조 말인 1832년 전국읍지 편찬 사업 당시 경상도는 감영이 중심이 되어 모든 고을에서 『여지도서』 보완유형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후 편찬한 19세기 경산지역 읍지는 일부 수록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 유형이다.
관찬읍지는 대부분 필사본이며, 보고용으로 제작한 것을 제외하면 고을에 남은 부본은 많지 않았다. 경산지역에는 1758년 이래 고을마다 시기별로 10종 정도의 읍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구지를 베끼면서 내용을 가감하여, 항목별로 살펴보면 수록 내용이 풍부한 선본을 고르기가 어렵다. 따라서 고을마다 현전하는 읍지 전체를 대상으로 수록 내용을 모두 전산화하여 항목별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통합 읍지'를 편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읍지 통합 작업'은 조선후기 지역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지역문화 콘텐츠 개발 등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Most of Gwanchan-Eupji(official county gazetteer) were manuscripts, and there were not many copies left in the county except for those produced for reporting purposes. In the Gyeongsan area, about 10 eupjis have remained in each of the three counties since 1758. It is difficult to sort out the best eupji by county, Since those of each county have their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So it is necessary to complete a book by reorganizing the whole contents in the entire existing booklet by item and complete it into a book. This 'eupji integration work' will not only help us understand the reality of the commun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but also develop local cultural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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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尙州 擎天臺와 시적 공간으로서의 의미

저자 : 김승룡 ( Kim Seung-ryong ) , 최금자 ( Choi Geum-ja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9-35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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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대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유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승경지 중 하나로, 과거 경천대 일원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방문하여 자연의 경관을 노래하거나 시를 읊어 풍류를 즐긴 곳으로 많은 기록이 있다. 수려한 경관 이외에도 임진왜란 때의 명장 鄭起龍(1562-1622) 장군이 젊었을 때 경천대에서 수련을 쌓았던 곳이며,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동행한 雩潭 蔡得沂(1605-1646)가 은거한 곳이다. 경천대는 채득기와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기우제를 지내는 신령한 곳이나,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명승지로서만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채득기가 자천동에 터 잡은 뒤로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경천대가 채득기와 함께 인식되었다.
경천대 한시 작품은 첫째, 낙동강을 중심으로 열었던 뱃놀이 문화로 인해 창작된 작품이다. 상주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시를 창작한 기록은 병진년(1196)에 李奎報에서 임술년(1862)에 柳疇睦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 시회를 가졌다. 이 중에 '商山船遊詩會'가 대표적이다. 이 시회는 상주의 제1경으로 알려진 擎天臺에서 배를 띄워 동남쪽의 道南書院을 거쳐 觀水樓에 이르는 30여리의 구간에서 시회가 개최되었고, 1607년부터 1778년까지 171년 동안 총 8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蒼石 李埈(1560-1635)을 중심으로 한 이 선유 시회는 낙강시회의 한 전범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서 경천대는 문인들의 文會를 위한 공간이었고 특히 船遊의 공간에서 빠지지 않았다. 또한 상주 지식인의 유대관계를 위한 곳으로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 즉 소통의 공간이었다.
둘째, 채득기를 회상하고 그의 정신을 담은 작품이다. 채득기가 명·청 교체기에 급박한 위기를 경험했을 때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세상을 피해 은거한 곳임을 형상화하고 있었으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채득기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경천대가 있는 이곳 상주가 '商山'이라 하여 '商山四皓' 같은 덕 높은 은사가 살만한 선비의 고장, 신선의 고을로 일컬어진 것과 상통한다. 특히 상주지역은 낙동강 상류인 안동지역과 전통적으로 밀접한 인맥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퇴계의 제자인 류성룡은 상주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제자들이 스승에게서 이어받은 선비정신이 일상화하던 지역으로 인식된 것에서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Gyeongcheondae is one of the most beautiful scenic spots in the basin along the Nakdong River. In the past, there are records of many poets and calligraphers visiting the Gyeongcheondae area and enjoying the scenery by singing or writing poetry. Aside from its splendid scenery, Gyeongcheondae is the place where the famous general Jeong Gi-ryong (鄭起龍, 1562-1622) trained in his youth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Joseon (1592-1598). It is also the hiding place of Udam Chae Deuk-gi (蔡得沂, 1605-1646) who accompanied Crown Prince Sohyeon and Prince Bongnim when they were taken as political hostages to Shenyang in the Qing Dynasty due to the Qing Invasion of Joseon. In particular, Gyeongcheondae was recognized only as a sacred place for rituals for rainfall or a scenic spot with beautiful scenery until its encounter with Chae Deuk-gi. Then, after the Qing Invasion of Joseon in 1636, after Chae Deuk-gi settled in Jacheon-dong, Gyeongcheondae became widely known to the world and it was recognized together with Chae Deuk-gi.
Gyeongcheondae Sino-Korean poetry works are first created because of the boating culture that opened around the Nakdong River. The record of writing poetry while boating in the Nakdong River of Sangju covers a period of 666 years from Yi Gyu-bo(李奎報) in the year of Byeongjin (丙辰年, 1196) to Yu Ju-mok(柳疇睦) in the year of Imsul (1862), leaving a total of 51 poems. According to the record, the 'Sangsanseon Poetry Party(商山船遊詩會)' is a representative example. This boating poetry party was held in a section covering a distance of about 30-li from Gyeongcheondae, known as the First Scenery of Sangju to Gwansuru(觀水樓) Pavilion via Danamseowon Confucian Academy(商山船遊詩會) in the southeast, and the party was held a total of 8 times during 171 years from 1607 to 1778.
This boating poetry party centered on Changseok Yi Jun (蒼石 李埈, 1560-1635) became a model for the Nakgang Poetry Party. Following this tradition, Gyeongcheondae was a space for literary clubs for literati, especially it was second to none as a pleasure boating space. In addition, it was a space for communication between Sangju intellectuals, an important medium that connected them together.
Second, many literati recall Chae Deuk-gi and leave works that contain his spirit. In other words, when Chae Deuk-gi experienced an imminent crisis during the Ming-Qing transit period, Gyeongcheondae was described as a place where he hid from the world by keeping his faithfulness to Ming. Sangju, where Gyeongcheondae is located, is called Sangsan(商山) so it was compared to “Sangsansaho (商山四皓, The Four Sages of Shang Shan)” where scholars and hermits with high morals and deities deserve living. Sangju is an area with close relationships with the surrounding Andong area. For example, Ryu Seong-ryong(柳成龍), a disciple of Toegye, trained disciples in Sangju, who recognized Sangju as an area where the scholarly spirit inherited from the master was preva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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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옥소 권섭의 세계인식과 영남관

저자 : 정우락 ( Jeong Woo-lak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4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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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玉所 權燮(1671-1759)의 세계인식과 영남관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권섭은 옹주와 재상의 집에서 경화사족의 문화풍토 속에 성장하였지만, 기사환국과 신임사화로 커다란 좌절을 맛본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볼 때, 그는 대체로 현실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기록벽과 기행벽을 갖고 산수에 탐닉하였다. 현실정치가 어떤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의 주요 관심사는 오히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등 자신의 취미생활에 있었다.
권섭의 세계인식은 주체적 개방성으로 요약된다. 도통론과 화이론으로 대변되는 그의 주체성은 자기 세계 속으로 매몰되지 않고 사상적으로는 유불도가 상호 공존하고 신분적으로는 중인이나 천인도 포용하였다. 또한 권섭의 작품에는 기호학과 영남학이 서로 소통하는 기령학적 회통성 또한 잘 나타난다. 그의 영남관은 이로써 확인이 가능하다. 기호학이 영남학에 뿌리를 두지만 그 완성은 결국 기호학이 담당했다고 보고, 영남지역에는 이황의 도맥을 이은 정구의 학문을 크게 인정하였다.
권섭의 삶과 사유에는 주체성과 개방성 사이, 기호학과 영남학 사이,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은사, 고사, 신선 등으로 조롱까지 받으면서 과거장에 나아갔으니,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권섭은 科場仙이었고, 그를 地上仙이라며 칭송하던 사람들에게서는 세정을 떨치지 못한 涕泣仙이었다. 그의 세계인식이 주체성과 개방성 사이에서 개방성으로, 영남관이 기호학과 영남학 사이에서 기호학으로 귀결되지만, 권섭은 언제나 중간자적 존재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그를 산수 속에서 방황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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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玉所 權燮과 18세기 가족문화

저자 : 박영민 ( Park Yeong-min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5-87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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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玉所 權燮(1671-1759)의 가문을 통해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조선시대의 가부장제와 가족문화의 한 양상을 고찰하였다. 현재 학계에서는 옥소가 생존하였던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에 가부장제가 嫡長子中心으로 硬化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소 가문을 살펴보면, 과연 이 시기 조선사회의 가부장제가 적장자중심 일변도 였던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옥소는 자신이 사후에 묻힐 자리에 초취부인과 재취부인의 자리는 두었으나 소실의 자리는 두지 않았다. 또 적자의 자손에게 가문을 일으킬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옥소 집안에서 소실과 소실 소생들을 대하는 방향은 적장자와 분명한 차별을 두면서도 가부장제의 경계 밖으로 몰아내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으로 가문의 일원으로 이끌었다. 옥소는 소실 이씨와 60여 년을 함께 하였고 재취부인 조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약 30여 년을 소실 이씨와 함께 하였다. 또 옥소는 노년에 서자인 善性과 서손인 信應에 의지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래서 분재를 할 때에도 선성과 신응에게 그들의 효도와 재능을 인정하며 서책, 예술품, 전답을 나누어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17세기 중엽 이후 18세기 중엽까지의 조선사회의 가부장제, 가족문화의 실상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각 가문 내부의 다양한 문화를 세밀하게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본 연구는 옥소 가문의 가족 관계를 통해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시대의 가부장제의 저변에 다양한 가족문화가 존재하였음을 주목하는 계기를 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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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옥소 권섭의 <화지구곡가>에 나타난 구곡 형상과 그 의미

저자 : 조유영 ( Jo Yu-young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9-112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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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권섭의 화지구곡 경영과 <화지구곡가> 창작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 권섭의 문경 화지동에서의 생활과 화지구곡 경영을 그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살펴보고, <화지구곡가>에 나타나는 구곡 형상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 후기 구곡문화 속에서 권섭의 <화지구곡가>가 보여주는 구곡 형상이 가지는 의미를 논의하고자 하였다.
<화지구곡가>에 나타나는 구곡 형상은 각 구비마다 나타나는 마을의 실경과 승경을 강조함으로써 성리학적 이상세계보다는 무릉도원과 같은 선경으로서의 모습에 더 가까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권섭은 구곡이 가진 성리학적 관념성을 일정 부분 배제하고, 구곡의 실경이 가진 외면적 아름다움에 주목함으로써 현실과는 이격된 선경으로 자신의 구곡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지구곡가>의 구곡 형상은 산수의 외면적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조선 후기 구곡문화의 새로운 경향성을 담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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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

저자 : 김수태 ( Kim Soo-tae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65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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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595~673)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글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유신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이 부족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필자도 그에 대한 견해를 밝혔지만, 신라의 삼국통일론과 관련해서 계속적으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때문에 김유신의 삼국통일론이 어떠하였는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김유신이 당시의 외교정세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서 활동하였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김유신을 당나라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자주적인 인물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파악하기만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유신의 대외인식과 관련해서 시기적인 변화양상을 제대로 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유신의 사상적 기반에도 새로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와 유교의 관련성을 다룬 글이 나와 있어서 주목되지만, 그가 신라 중고기의 유교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가 원광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신라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적 결합을 크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김유신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군사적으로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정치가로서, 외교가로서, 사상가로서도 크게 활동한 또 다른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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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錦溪 黃俊良의 역사의식과 의리관 고찰 - 士宦期 前期의 글들을 중심으로 -

저자 : 이규필 ( Lee Gyu-pil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7-19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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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 黃俊良(1517~1563)은 퇴계학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이제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주로 황준량이 퇴계에 받은 영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본고는 이에 대해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였다. 황준량의 본래 모습을 먼저 조명하고, 그것이 퇴계를 만나 어떻게 변모, 확장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황준량의 사환기 초기 작품을 중심으로 선비와 역사가에 대한 사유를 탐색하고 유난히 밀도 높은 그 역사의식과 의리관을 고찰해 보았다. 황준량은 퇴계학의 여러 국면 가운데 특히 『주자서절요』와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는다. 본고에서는 이 연구를 통해, 황준량이 퇴계를 만나 학문을 완성하였지만 그 바탕에는 자신 특유의 역사의식과 의리관이 지속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함을 논증하려 하였다.
황준량과 퇴계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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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유재란기 정경운의 호남 체험과 그 의미 - 『고대일록』을 중심으로 -

저자 : 김종구 ( Kim Jong-gu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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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의는 정유재란기 孤臺 鄭慶雲(1556-?)의 호남 체험과 그 의미를 분석했다. 『고대일록』은 정경운이 1592년부터 1609년까지 김성일의 소모유사, 김면의 소모종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 · 정유재란과 관련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정유재란기의 피난민으로서의 기록은 전쟁 생활사에 중요한 부분이다.
정경운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구체적으로 피난 계획을 세우며, 깊은 산의 계곡 · 암자 · 사찰을 이용해 호남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茶洞과 六十峴 등은 피난 여정의 거점 지역이었고, 쉽게 한곳에 거처할 수 없었다. 피난한 지 5개월이 지나서 용담현에 피난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피난민 정경운의 호남 체험은 첫째, 위기의 삶과 궁핍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쟁으로 일어난 전염병과 궁핍에서 오는 질병을 감수해야 했고, 딸과 늦게 태어난 아들도 잃게 되는 불운을 감지해야 했다. 그는 나머지 식솔을 챙겨야 했기 때문에, 마을과 시장에 가서 구걸하는 설움을 참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둘째, 피난민으로 살아남기 위해 소금 장수가 되어 상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금을 매입하여 다시 되팔기도 하고, 그 외 장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하는 일 없이 同類와 시장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전쟁 등 정보와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지만, 그 수확은 미미했다.
셋째, 개인의 心狀을 드러내며, 전쟁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제사 등 일상이 파괴된 점을 통곡하고 있었다. 하지만 벗들과 교유를 하며 전쟁 피난민의 울분을 극복하고 있었다. 山水를 통해 잠시 그 仙境을 만끽하며, 역설적인 心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시를 읊으며 마음을 中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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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晦堂 張錫英의 滿洲·露領 기행시의 시적 구현 양상 -『遼左紀行』을 중심으로-

저자 : 한길로 ( Han Gil-ro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6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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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이승희·곽종석 함께 한주 이진상의 학맥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근대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회당 장석영의 해외 기행시에 주목하는 논문이다. 그는 국망의 현실을 극복하고 유도의 쇠퇴를 막기 위해 해외 이주를 모색했던 유림이었다. 그는 북만주 蜜山에 머물던 한계 이승희와 더불어 해외 한인공동체를 논의할 계획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대로 향했고 그곳을 주람했다. 약 100일간 15,000리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그의 『요좌기행』은 중화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의 재현과 고국의 독립 및 이민자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던 1910년대 한국 유림의 현실인식과 그 내면을 웅변하고 있다. 그의 기행시는 식민지가 되어 버린 고국을 뒤로한 채, '떠남을 위한 기행'을 시작한 遺民의 憂愁로 시작된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한·중 '동지'들을 만나 잠시 마음의 안정을 갖고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60대 老儒의 몸으로 북만주 및 노령과 같은 낯선 이역을 기행하는 과정은 唐 玄奘과 비견된다고 할 만큼 고된 길이었다. 여기에 이역을 전전하며 流民이 되어버린 한인들이 겪고 있던 삶의 실상이 목도되면서, 비감과 통한 그리고 客愁의 서정은 배가 되어 온전히 시에 담기게 된다. 동시에 시에는 移居地에 대한 모색과 고뇌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고 확대되어 나타났다. 요컨대 그의 기행시는 근대기 유림이 실행한 독립운동의 일면과 함께 해외 이거를 모색하던 당대 유림의 내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한·중'과 '중·러'의 경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한인 이민자와 난민을 바라보며 나타난 다양한 내적 갈등과 자기 정체성의 모색, 또 고국에 대한 깊은 향수까지를 모두 담고 있었다. 즉 그의 작품은 근대기 한문학의 특징적 국면들을 대단히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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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제사 설화의 전승의식과 가족공동체의 문화적 의미

저자 : 류명옥 ( Ryu Myeong-ok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9-29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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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설화는 조상에 대한 의례인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구비 전승되는 제사 설화의 유형으로 '정성이 부족해서 혼령이 해 끼치는 이야기'가 있다. 구비 설화에 전승되는 제사 설화는 제사의 격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제사를 지내는 정성 또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제사 설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정성의 의미를 살펴보면 주로 제사 음식을 깨끗하게 준비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지낼 때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제사를 정성껏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주제의 이면에는 제사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야 하는 대상이 며느리인 여성으로 한정되어 나타난다.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여성에게 제사라는 의례는 과도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게 하여, 정성이라는 의미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 제사 설화에서 정성은 여성들에게 노동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지만 제사 설화는 현재에도 여전히 구비 전승되고 있으며 변하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는 설화들도 있다. 금기시되어 온 제사 음식을 올리는 설화나 제사 지내는 시간을 현대에 맞게 바꾸는 설화를 통해서 제사의 의미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화되고 있다. 또한 현재 전승되는 제사 설화를 보면 여성이 제사의 불필요함을 남편에게 토로하면서 과거에는 고부 사이에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 부부의 갈등으로 관점이 변화되었다.
그리고 제사 설화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설화에서 바쁜 생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제사 날짜를 까먹는 남성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남성들은 점점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남성들의 빈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남성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제사에 여성이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주도적으로 지낸다. 장자 또는 남성 중심적이었던 제사의 세대 간의 연대는 약화 되고 여성들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세대 갈등의 관점으로 변화되면서 남성들은 관심이 없어지고, 여성들은 이전의 책임감으로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처럼 세대 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하지 못한 지금 시대에 제사 설화는 더 이상 전승되지 않을 것 같지만 여전히 제사 설화는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변화되고 있다. 부계중심의 제사 문화가 현재에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제사 설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현대가족의 구심점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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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세환 시조에 나타난 노년기, 질병 속 希求

저자 : 이순희 ( Lee Soon-hee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간행물 : 영남학 8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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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김세환 시조를 대상으로 노년기 질병에서 관점의 변화에 따라 삶의 질이 다름을 밝히는 데 있다. 김세환 시조를 분석한 결과, 『어머니의 치매』에 나타난 어머니는 자아 통합을 하지 않은 까닭에 삶의 질이 떨어졌다. 치매를 앓기 전까지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恨과 그리움 해소의 희구가 있었지만, '자아 통합'을 하지 못하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고 이어서 치매를 앓게 된다. 치매를 앓게 되면서 恨과 그리움의 해소 희구는 서러움, 두려움, 분노, 슬픔, 외로움 등으로 표출되어 삶의 질이 떨어진다. 그에 비해 『바람꽃』에 나타난 김세환 시인 자신은 천식을 앓지만, 희구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 順命의 자세, 자기 성찰, 감사 정서, 창작의 산실 등이 그것이다. 김세환 시인은 끊임없이 '자아 통합'을 한 결과이다. 천식을 '동반자' 또는 '친구'로 여기면서 천식 앓는 것을 順命의 자세로 자기 성찰과 감사의 기회로 여기며 절실한 시조 창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노년기, 삶의 질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관점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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