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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소년 정문기의 교육입지전(敎育立志傳)

Jeong Mungi’s Life under the Japanese Education System: A Success Story

장신 ( Jang Shin )
  • : 연세사학연구회
  • : 학림 4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3월
  • : 307-333(27pages)
학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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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고향 순천에서의 초등교육
3. 중등교육을 위한 경성 유학
4. 고등교육을 위한 일본 유학
5. 민족차별의식의 부재와 그 배경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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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소년의 교육 경험을 연대기로 정리하였다. 소년 정문기는 1909년부터 강습소의 근대교육을 시작으로 1929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당시 일본인 소년은 소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바로 진학하였다. 소수의 관립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조선인 소년은 정문기처럼 여러 사립학교를 전전하였다. 졸업과 편입, 중퇴, 졸업이 반복되었다. 1910년대 조선의 소년은 네 곳의 사립학교를 거쳐 중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식민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업 연한이 3년이나 차이났기 때문이었다. 교육 제도의 구조적 차별이었다. 그나마 정문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느 조선인 소년과 마찬가지로 정문기도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편입하여 상급학교 진학 자격을 얻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차별 속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정문기는 민족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조선인 교원과 학생으로 구성된 사립학교만 다녀서 일본인을 접할 기회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축구와 야구 등 운동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개인적 특성도 있지만, 일본 유학 중에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제국대학 재학생이라는 일본인 학생의 엘리트 의식도 한 몫을 했다. 출신 지역보다 출신 학교의 동질감이 큰 이유도 있었다. 구조적 차별과 개인의 차별이 분리될 수 없지만 환경에 따라서 의식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a young student, living in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chieved success through the colonial education system. The protagonist of our story is Jeong Mungi, who first went through modern education from 1909 at an “educational institution (Gang Seupso 講學所) and later graduated from the Tōkyō Imperial University in 1929. A typical Japanese student would have moved through the elementary school-middle school-high schoolcollege school system during this period.
In contrast, except for a very few students registered in the state-sponsored Higher Common School (Godeung Botong Hakgyo, 高等普通學校), most Korean students would have-just like Jeong Mungi-wandered his way through various private education institutions, going through a rather unorganized process of admission(s), dropout(s), transfer(s) and graduation(s). In the 1910s, a Korean student would have been able to graduate from one of the four private schools and complete a curriculum provided by a “middle-level school (Jungdeung hakgyo 中等學校)” but the official high schools were not accessible to the Koreans. Accordingly, there were systematic discriminations imposed on Koreans compared to their peer Japanese, such as the Koreans being subject to a stricter year limit for graduation. However, Jeong Mungi was relatively fortunate, as he was able to transfer to a Japanese middle school and eventually earn qualifications to advance to a higher school.
Even though Jeong went through this systematically discriminative system, his memoirs do not indicate any direct experience of ethnic discrimination. Before his college education, he only attended private schools that consisted of Korean instructors and Korean students and thus did not have many opportunities to interact with Japanese. Similarly, but for different reasons, Jeong did not experience ethnic discrimination during his study abroad time in Japan. The lack of discriminative experience might have been partially due to his athletic expertise, as he was a talented football and baseball player. But we must also note the elite group mentality prevalent among his Japanese colleagues, those who valued his educational background as a Tōdai graduate more than his regional and ethnic background. Even though it is impossible to separate systematic and personal discrimination, Jeong Mugi’s experience shows that one might not constantly be aware of these elements of ethnic discri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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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0440-2324
  • : 2713-982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0-2022
  • :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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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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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돌프 멘첼의 역사화에 나타나는 프로이센의 이미지 : 시각사(visual history) 연구의 방법론적 난제에 대한 탐구

저자 : 전진성 ( Jin-sung Ch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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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사(visual history)'란 단지 시각자료를 사료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각 이미지의 매체적 특성을 원리로 삼아 재현의 가능성과 한계를 반추해보는 역사이다. 본고는 프로이센의 역사화가 멘첼의 사례를 통해 회화를 위시한 시각 이미지가 과연 시대의 증언이자 해석으로서 유효한지 살펴보았다. 멘첼은 고유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역사적 순간의 덧없는 일시성을 포착하려 한 급진적 역사주의자인 동시에 알레고리 기법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전통적 모티프를 활용하는 고전주의자이기도 했다.
역사적이면서도 비역사적이고 시각적이면서도 비시각적인 아돌프 멘첼의 역사화는 '시각사'의 방법론적 난제를 부각시킨다. 시각 이미지의 '시각성'은 그 자체로 현실을 바라보고 만들며 해석한다. 이미지는 대상과 함께 행동한다. 개인적,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특유의 멜랑콜리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역사가와 목격증인, 목격의 대상인 행위자간의 긴장관계를 탐구한 멘첼의 역사화는 이미지가 역사서술과 동급의 재현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Visual history' is meant to be a history that does not merely use visual data as historical material, but also reflects on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representation through the lens of visual images as principal media. The history paintings of Adolph Menzel are particularly useful in proving that visual images are valid as a testimony and interpretation of the times insofar as these extraordinary artworks advocated radical historicism capturing the ephemeral temporality of a historical moment based on their own realism, but at the same time underpinned classicism utilizing traditional allegory techniques and motifs. The uniqueness of Menzel's history paintings, which is both historical and non-historical, visual and non-visual, highlights the methodological aporia of visual history. The 'visuality' of the visual image itself gazes, creates, and interprets the reality. The image acts with the object. Menzel's artistic historiography, which explores the tension between the historian, the eyewitness, and the actor who is the target of eyewitness, through his unique melancholic distance derived from a personal and historical context, demonstrates that the visual image can be a representation of the same level as the historian's histor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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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로의 연대: 이미지로 보는 16세기 독일 루터파 공동체의 이상

저자 : 한유나 ( Yu Na H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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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개인의 불행과 고통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및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위로해주고 극복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의 이상은 기독교의 전통적 미덕 중 하나인 '이웃 사랑(amor proximi)'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루터는 성경의 전체 내용이 믿음(fides)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전자는 오직 후자를 통해서만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만큼 '이웃 사랑' 개념에 전에 없이 큰 가치를 부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6세기 루터파 문화권 내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이 이웃 사랑의 실천에 동기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연대와 결속을 다지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편으로는 감상자로 하여금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탱해줄 공동체적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자 자신도 이러한 안전망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웠다. 기존 미술사 연구들은 이웃 사랑의 주제를 다룬 16세기 루터파 이미지들 상당수가 중세의 전통적 주제들과 도상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이유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논의되었던 '이웃 사랑'의 추상적 개념과 공동체적 이상이 일상생활 안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실천적 행위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들이다.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16세기 독일 루터파 공동체의 이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 이웃 봉사에 있어 도움의 공여자와 수혜자의 구분이 없는 호혜적 관계의 형성을 강조하였다. 이웃 사랑의 의인화(personification)인 여성이 갓난아이를 수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과일을 받아먹는 모습을 담은 '카리타스(caritas)'의 도상, 전도 활동을 위해 먼 길을 떠나기 전 서로를 다정하게 격려하는 사도들을 재현한 '사도들의 이별(divisio apostolorum)'과 같은 주제들이 크게 유행하였다. 둘째, 정신적 위안과 물질적 원조에 대한 균형감 있는 관심을 장려하였다. 복음 전파를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전하는 이웃 봉사의 행위로서 시각화한 작품들과 빈민구제를 위한 공동기금(Gemeiner Kasten)의 주제를 다룬 이미지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현실에서 상호 원조를 통해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웃들이 곧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구현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특히 신자들이 함께 모여 전례에 참석하는 교회 공간에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 초상이 포함된 제단화나 추모화(epitaph)들을 안치함으로써 그 상징성을 극대화시켰다.


Martin Luther (1483-1546) urged fellow men to actively help their neighbors in distress, and in the case of their own tribulation, to seek out some company who could assist them. This idea originated from the traditional Christian concept of neighborly love, to which the reformer attached unprecedented importance: the whole scripture was to be simply encapsulated in two notions, that is, faith and neighborly love, and the former could be fully achieved only by the latter. Luther's ultimate goal was to establish a network of mutual support and protection within his community.
Sixteenth-century Lutherans in Germany actively used images visualizing the reformer's idea to indeed foster solidarity among themselves. For example, the works presenting the iconographic themes such as Caritas and the Separation of the Apostles highlighted the reciprocity of neighborly service. Meanwhile, those images respectively thematizing preaching of the salvific Word and raising of communal funds propagated that spiritual and material aids were equally important. Group portraits of local congregations also became a crucial part of Lutheran visual culture;they represented the “network of support” in a literal sense. The presence of neighborly love was easily to be buried in oblivion in everyday life. Thus, it was the mission of the pictorial works depicting the Lutheran ideal of solidarity to reassure the viewers that loving hearts ready to assist were available to them whenever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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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미국 흑인의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 : 흑인 신체에 대한 집단적 비하와 문화적 인종주의의 구축

저자 : 허현 ( Hur Hy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5-11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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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미국 내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왔지만 노예제 폐지 이후 짐 크로우시대를 거치며 더욱 확산되고 변형·발전되었던 미국 흑인들에 대한 다양한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고찰을 통해 그 내용과 목적, 그리고 메시지 효과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정형화된 인종주의적 흑인 캐릭터들로서는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샘보(sambo)와 매미(mammy), 경멸적인 쿤(coon), 음탕한 제즈벨(jezebel), 폭력적인 브루트(brute)와 벅(buck) 등을 들 수 있는데 백인 중심의 기성 인종질서의 정당성과 위기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들은 백인 노예소유주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창조하여 흑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가공의 뒤틀린 자화상이자 자기혐오의 시선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일방적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억압적 문화 공간 안에 갇혀 있었고 그러한 '하얀 시선'을 통해 '검은 자아'를 부정당했다. '검은 자아들'은 늘 곱슬머리와 왕방울 같은 눈, 두터운 입술, 튀어나온 입과 유난히 하얀 이, 칠흑 같은 피부색, 비대한 몸, 바보 같거나 천박한 미소, 타락한 몸짓, 욕정에 찬 음탕한 눈길 등과 같은 부정적인 신체적 특징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부당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정형화는 특히 노예제의 폐지 이후 백인들이 인종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개한 헤게모니 장악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문화적 인종주의의 구축을 통해 후기노예제사회를 건설하고자하는 의도를 품고 있었고 인종주의적 캐리커처에서 드러나는 유머와 위트로 가장한 흑인들의 문화적 재현을 통해 노예제라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역사적 기억상실을 도모하고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work is to examine the contents, intentions, and message effects of the various racist images and African American caricatures which have been developed from the antebellum period through the Jim Crow era. These racially-stereotyped black characters, which includes submissive and faithful sambo and mammy, insolent and dishonest coon, seductive, sexually arousing jezebel, and innately savage, animalist, and criminal brute and buck, have justified the history of slavery and at the same time reflected the crisis of racial hierarchy. Also, these racial stereotypes have signified a fictional, distorted self-portrait and the gaze of self-abhorrence for African Americans which slaveholders and white supremacist imposed for their power and hegemony. African Americans were in prison of oppressive looking, becoming racialized objects of view. As a result, African Americans internalized the sense of always looking at one's self through the eyes of others, that is, through the lens of a dominant white gaze. In the process, the universal humanity of the African Americans, the 'black one's self,' were denied by the 'white gaze,' because it defined the African American identity with distorted, negative physical features of them. Privileged whites had an intention of building the post-slavery society through the degradation of the black body and the construction of cultural racism, and simultaneously sought to cause collective historical amnesia about the violent history of sla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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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18 전쟁'과 프랑스의 흑인 병사 이미지: 실재, 상상(계), 그리고 재현

저자 : 이재원 ( Lee Jae-w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1-16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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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화 이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어떻게 인식되며 재현되고 있을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기 유럽 대중 다수가 접하게 된, 당시의 일상적이고도 사회정치적인 삶 속에 관여했던, 이미지들에 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허구와 상징, 그리고 현실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전(propaganda)과 전파 덕분에 다수의 대중을 매혹한 메시지가 된 이미지들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 내의 평범한 일반 프랑스인들의 흑인 병사에 대한 상상은 혹은 상상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형성되었다. 본 논문은 전쟁 기간 프랑스인들이 재현한 식민지인, 특히 아프리카 흑인 병사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연구이다. 논문을 준비하며 접하게 된 다량의 이미지는 프랑스인들의 식민지 의식의 형성에 있어 식민지 시기 동안의 이미지 자료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랑스인이 인식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식민지인, 그중 다수가 참전한 아프리카 흑인병사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다변적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분석하기 위해 먼저, '가장 거대한 프랑스(La Plus Grande France)'라는 상상계 속에서 1차 대전 중 아프리카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다음으로, 유명한 핫초코 분말 제품인 '바나니아(Banania)' 광고 속 흑인 병사의 '큰 아이(grand enfant)'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이와 더불어 희화화된 아프리카인 이미지의 양가적 측면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식민지의 군사적 기여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식민지 제국의 희생에 대한 늦은 인정에 대해서도 소개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차 대전 종전 후 점령군으로서 독일의 라인란트(Rheinland) 지역의 진주에 반대하는, 즉 '검은 치욕(Schwarze Schande)'에 대항하는 독일의 선전 활동과 이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More than 60 years after decolonization, how are Africa and Africans perceived and reproduced by Europeans today? In order to deal with this problem, it is necessary to study images that were involved in the daily and socio-political life of the time that the majority of the European public encounter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Research is needed on images that have maintained a complex and subtle relationship between fiction, symbols, and reality and have become a harsh message for the majority of the public thanks to propaganda and propagation.
The imagination or imaginary world of ordinary Frenchmen in France about African soldiers was formed during World War I.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image of colonies, especially African black soldiers, reproduced by the French during the war. The large amount of images encountered while preparing for the thesis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image data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the formation of French colonial consciousness.
The image of the French as colonists during World War I, of whom the vast majority participated in the war, is diverse and multifaceted. In order to analyze these images, I will first mention the importance and role of Africans during World War I in the imaginary world of “The Greatest France”. Next, I would like to highlight the image of a black soldier as a “grand enfant” in the advertisement for “Banania”, a famous hot chocolate powder product, and also consider the ambivalent aspect of the caricatured image of Africans. The indifference and oblivion of the French colonies' military contribution and the late recognition of the colonial empire's sacrifice as compensation for this will be introduced. And finally, I would like to examine Germany's propaganda activities against the “Black Shame” as an occupational force after the end of World War I, and France's response to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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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전쟁 트라우마, 감각적 고통, 반전(反戰)의 미학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

저자 : 최용찬 ( Choi Yong-ch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19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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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30년의 전쟁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나타난 '전쟁 트라우마'(Kriegstraumata)에 의한 참전 세대의 감각적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특히 참전 병사들의 전쟁 트라우마에 의한 총체적 파괴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목표를 둔다. 레마르크 소설에서 제시된 실마리를 따라, 본론 2장에서는 참호병과 전쟁 트라우마의 청각적 고통, 3장에서는 포격 공포증과 전쟁 트라우마의 시각적 고통, 4장에서는 전선 조광증과 전쟁 트라우마의 촉각적 고통을 나누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세대가 몸소 겪은 전쟁 트라우마의 감각성, 곧 청각성, 시각성, 촉각성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병사들이 경험한 전쟁 트라우마의 보편적, 심리적, 정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별적, 감각적, 신체적 차원까지 모조리 재현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반전영화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대목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전쟁 트라우마와 세 가지 감각적 고통이 제각각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병사들은 모두 다 전쟁 트라우마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신체의 감각적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영화는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일스톤의 영화는 전쟁 유탄이 인간의 신체 감각에 미치는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을 통해 참전 세대의 일반적, 심리적, 정신적 파멸성뿐만 아니라, 개별적, 감각적, 신체적 파괴성 차원까지 철저하게 구명해낸 최초의 반전영화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This study focuses on analyzing the filmic ways to represent the sensory suffering of the young generation participating into World War I by the war trauma, which appeared in the 1930 war film All Quiet on the Werstern Front. In particular, the main goal is to reshape the process of total destruction by war trauma of veterans. Following the clues presented in the Erich Mariaq Remarque's famous war novel, it should be differently analyzed firstly trench disease and their aural pain in Chapter II, seondly, shelling phobia and their visual pain in Chapter III, and thirdly frontline dimming and their tactile pain in Chapter IV. These analysis specifically revealed their sensory, auditory, visual, and tactile nature of the war trauma experienced by the veterans of World War I. As a result, it should be confirmed that the film was the first anti-war film to be successful in reproducing not only the universal, psychological and mental dimensions of the war trauma experienced by veterans in World War I, but also individual, sensory, and physical dimensions. More importantly, the above three war traumas and three sensory pains were and are not separated. In other words, the film reminded us that all the world war veterans in those days were exposed to any kind of war trauma and suffered the sensory pain of the body. Therefore, Milestone's film deserves high regard for being the first anti-war film to thoroughly reveal not only the general, psychological, and mental ruin of the veterans, but also the individual, sensory, and physical destructive dimensions through the various trauma symptoms of the war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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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鄭世雅의 生涯와 壬亂 擧義 -영천성 전투를 중심으로-

저자 : 박순교 ( Park Soon Ky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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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아(1535~1612)는 영천의 재지사족이었다. 그는 임란 시기 영천성 복성 전투, 임고서원 중건 등의 중핵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본문은 영천의 재지사족 정세아의 삶을 복원하고, 임란의 혼란기 전후 영천 지역의 사건과 동향을 정세아의 삶과 곁들여 검토했다. 그간 본격 검토되지 않은 『호수실기』를 여타 잔존 기록들과 대조, 검토하였고, 잘못되거나 누락된 사실들을 비정하였다. 정세아 집안의 가풍, 정세아 집안의 노루목 이거 과정과 의미, 정세아의 소과 입격 성적, 정세아의 상경 사건, 정세아의 경북 영양 오극성과의 만남, 정세아의 세계관과 삶의 궤적, 임진란 당시 정세아의 거의 시점, 거의 목적, 거의 성격 등을 축차적으로 구명하였다. 본문은 영천의 4월 추평회맹을 부정하고, 영천성 전투를 전후한 시기, 영천에서 발현된 다기다양한 세력들의 정치적 노선과 상황들을 천착하고 부각하였다.


This thesis attempted to closely restore the life of Jeong Se-ah(鄭世雅), a Jaejisa tribe(在地士族) in Yeongcheon, and through this, the events and trends of the Yeongcheon area before and after the confusion of Imran(壬亂) reviewed alongside the life of Jeong Se-ah(鄭世雅). Accordingly, the main text carefully contrasted and reviewed the actual contents of Jeong Se-ah's actual recording(湖叟實記), which had not been reviewed in earnest, with other remaining records, and clarified the facts that were incorrect or omitted.
The family customs of Jeong Se-ah'(鄭世雅)s family, Jeong Se-ah's process into Jayang(紫陽) and its meaning, Jeong Se-ah's academic record, Jeong Se-ah's succession-related events, Jeong Se-ah's visit to Youngyang(英陽), Gyeongsangbukdo and encounter with Oh Gyeog-seong(吳克成), Jeong Se-ah's view of the world and trajectory, the uprising point of view, uprising purpose, and uprising personality of Jeong Se-ah at the time of Imran(壬亂) were sequentially investigated. This thesis denied 'the April Chupyeong Association(四月 楸坪會盟)' of Yeongcheon recently raised by some, and focused on and highlighted the political lines and situations of the various forces that emerged in Yeongcheon before and after the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永川城). I believe that these considerations will be the cornerstones of the future studies of Jeong Se-ah (鄭世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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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통적 華夷論의 변천과 崔濟愚의 文明觀

저자 : 김민석 ( Kim Minseok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7-27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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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통적 화이론의 구조와 특징, 그것의 수용과 변천 과정을 살펴본 후, 화이론과의 관계에서 동학의 天觀과 聖人觀, 전통 사상 및 서양·청·일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최제우의 문명관을 검토하였다. 최제우는 天觀에 기초하여 보편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개방적·포용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게 '문명'이란 특정 문화나 가치·이념의 구현이 아닌 보편적인 天道의 실현이었으며, 이는 곧 전통적 화이론의 '유일·보편' 문명과는 다른 '혼성·보편' 문명의 지향이었다.


Starting from defining the traditional concept, structure, and feature of Hwairon, this study shows how Hwairon had been appropriated in the Korean Peninsula and had become the main theory of civilization in Choi Cheu's era through many changes. After, it explores Choi Cheu's perspective of civilization on the basis of its relation to Hwairon and the concept of Cheon which was the starting and main point of Choi Cheu and Donghak.
By doing so, this paper was confirmed that Choe Je-u aimed for universalism based on the concept of Cheon, which is the starting point of Donghak and the core of doctrine, while at the same time showing an open and inclusive attitude toward specific theories and ideas such as Confucianism and the Western Learning. In other words, it can be summarized as aiming for 'mixed and universal' civilization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Hwai-theory's 'only and universal' civilizai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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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후기 사적복수 허용에 대한 일고찰 -법규 변화와 『추관지(秋官志)』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하경 ( Ha-kyoung Le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30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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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유교 경전 어구처럼 조선시대에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국가의 사법적 체제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이 무력을 통해서 사건을 직접 해결하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적인 무력사용을 국가에서도 일정하게 허용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사례에서는 복수를 감행한 행위에 대해 국가 차원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유교적인 가치가 내재화되는 차원에서 이와 같은 사적복수 허용을 분석해 왔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국가의 입장에서 개인의 무력사용을 허용하면서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서 조선후기 법규의 변천을 추적하고 관련 사례분석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러 복수와 관련된 법규가 어떻게 세분화 되었는지, 허용되는 복수 주체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형량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아울러, 사적복수 사건을 27건 수록하고 있는 『추관지(秋官志)』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복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복수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The famous phrase originated from Confucian ideology, “one should not live under the same Heaven with the enemy who has slain one's father,” reveals the tolerance of revenge in Chosǒn dynasty. In some cases, individuals did not resort to the state's judicial procedures but tried to solve the case with private use of force for the sake of revenge. Also, the state commended the use of such private force. Sometimes, the state even praised revengers for taking private revenge. Existing studies have analyzed such permission of private revenge in terms of internalizing Confucian values in the late Chosǒn dynasty. However, this study focused on social and political problems that could be caused by allowing individuals to use force. This paper traces the changes concerning the regulations of private use of force and conducts case studies. Throughout an analysis of the changing regulations, this paper explicates how private use of force, especially revenge, was categorized, who was allowed to use violent means for revenge, and how punishments changed over time. In addition, the case studies based on Ch'ugwanji, a case book delineating different types of revenge, explicates how the policymakers understood private use of fo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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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식민지 소년 정문기의 교육입지전(敎育立志傳)

저자 : 장신 ( Jang Shi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7-33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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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소년의 교육 경험을 연대기로 정리하였다. 소년 정문기는 1909년부터 강습소의 근대교육을 시작으로 1929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당시 일본인 소년은 소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바로 진학하였다. 소수의 관립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조선인 소년은 정문기처럼 여러 사립학교를 전전하였다. 졸업과 편입, 중퇴, 졸업이 반복되었다. 1910년대 조선의 소년은 네 곳의 사립학교를 거쳐 중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식민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업 연한이 3년이나 차이났기 때문이었다. 교육 제도의 구조적 차별이었다. 그나마 정문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느 조선인 소년과 마찬가지로 정문기도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편입하여 상급학교 진학 자격을 얻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차별 속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정문기는 민족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조선인 교원과 학생으로 구성된 사립학교만 다녀서 일본인을 접할 기회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축구와 야구 등 운동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개인적 특성도 있지만, 일본 유학 중에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제국대학 재학생이라는 일본인 학생의 엘리트 의식도 한 몫을 했다. 출신 지역보다 출신 학교의 동질감이 큰 이유도 있었다. 구조적 차별과 개인의 차별이 분리될 수 없지만 환경에 따라서 의식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a young student, living in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chieved success through the colonial education system. The protagonist of our story is Jeong Mungi, who first went through modern education from 1909 at an “educational institution (Gang Seupso 講學所) and later graduated from the Tōkyō Imperial University in 1929. A typical Japanese student would have moved through the elementary school-middle school-high schoolcollege school system during this period.
In contrast, except for a very few students registered in the state-sponsored Higher Common School (Godeung Botong Hakgyo, 高等普通學校), most Korean students would have-just like Jeong Mungi-wandered his way through various private education institutions, going through a rather unorganized process of admission(s), dropout(s), transfer(s) and graduation(s). In the 1910s, a Korean student would have been able to graduate from one of the four private schools and complete a curriculum provided by a “middle-level school (Jungdeung hakgyo 中等學校)” but the official high schools were not accessible to the Koreans. Accordingly, there were systematic discriminations imposed on Koreans compared to their peer Japanese, such as the Koreans being subject to a stricter year limit for graduation. However, Jeong Mungi was relatively fortunate, as he was able to transfer to a Japanese middle school and eventually earn qualifications to advance to a higher school.
Even though Jeong went through this systematically discriminative system, his memoirs do not indicate any direct experience of ethnic discrimination. Before his college education, he only attended private schools that consisted of Korean instructors and Korean students and thus did not have many opportunities to interact with Japanese. Similarly, but for different reasons, Jeong did not experience ethnic discrimination during his study abroad time in Japan. The lack of discriminative experience might have been partially due to his athletic expertise, as he was a talented football and baseball player. But we must also note the elite group mentality prevalent among his Japanese colleagues, those who valued his educational background as a Tōdai graduate more than his regional and ethnic background. Even though it is impossible to separate systematic and personal discrimination, Jeong Mugi's experience shows that one might not constantly be aware of these elements of ethnic discri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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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70년대 후반 기업의 직업훈련소 운영과 훈련의 효과 -금성통신 기간사원 양성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장미현 ( Mihyun Ja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5-36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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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기업의 직업훈련 사례 중 하나로 1970년대 후반 금성통신의 직업훈련을 살펴본다. 금성사에서 분사한 금성통신은 전국기능경기대회와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을 다수 배출하고 있었던 만큼 기능직 훈련에도 적극적이었다. 1976년부터는 사내 강사를 활용한 초급대학 수준의 훈련 과정을 개설하였다. 초급대학 수준의 기간사원 양성과정으로 개설된 이 훈련은 고졸 훈련생을 선발해 1년 간 훈련을 시킨 후 사무기술직에 입사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기간사원 양성과정을 통해 금성통신이 기대한 효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고졸사원을 입사시켜 총급여액을 절약하는 것이었고 둘째, 훈련소 기숙사 입소와 단체생활을 통해 애사심을 향상시켜 이직률을 낮추는 것이었다. 구술을 통해 확인했듯이 기간사원 양성과정 훈련생들 대다수가 훈련과정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1년 간의 훈련 과정은 입사 후 이들의 회사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훈련생들은 대졸사원 대우를 넘어 대학 진학을 회사가 지원할 것으로 기대했다. 기업과 훈련생들의 기대 효과가 달랐던 것이다. 한편 기업이 의도한 애사심과 단체생활을 통해 훈련생들은 자신들만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내·외에서 협력하였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훈련생들에겐 유리했지만 기업 차원에서는 인사관리 차원에서도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었다. 입사 후 훈련생들 대다수는 대졸사원 대우와 대졸은 다르다는 점을 체감했고 대다수가 야간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금성통신의 직업훈련은 해당 기업과 산업의 인력수급을 넘어 채용, 인사, 노동과정, 복무, 사내 인간관계 등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시에 구술자들의 생애사적 차원에서 보자면 기간사원 양성과정은 이들에게 교육과 취업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결국 대졸사원 대우였지 대졸과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시대적 한계 또한 금성통신 기간사원 양성과정과 구술자들의 생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examines the vocational training of Goldstar Telecommunication in the late 1970s as one of the cases of corporate vocational training. Goldstar Telecommunication, which was spun off from Goldstar Company was also active in training for skilled workers as it produced several winners in the National Skills Competition and Skill Olympics. Junior college-level training courses were also established in 1976 conducting in-house instructors. This training was a program, which was opened as a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course at the junior college level that trains selected high school graduates for one year, and then joins them in office technician positions,
There were two effects that Goldstar Telecommunication expected through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process: First, it was to cut down the total amount of salary by hiring high school graduates, and second, it was to lower the voluntary turnover rate by encouraging loyalty towards the company through entering a training camp dormitory and living together in a group. As confirmed through the verbal statement, most of the trainees in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course were satisfied with the training process and the one-year training course helped them a lot in terms of adjusting to the work environment after joining the company. However, not to mention getting equal treatment as the college graduates, the trainees expected that the company would support them in entering college. There were differences in expectations of the companies and the trainees. The majority of the trainees who moved to Seoul from other provincial areas were of the same age and formed a bond of their own at the training camp as they spend time in a group. They set up their own network and collaborated both inside and outside of work. Although such a network gave the trainees an edge over the others, it could become a potential risk factor for human resource management from the corporate perspective. After joining the company, most of the trainees chose to attend night college because they realized that there was a difference between being equivalent to the college graduates and actually being a college graduates.
As can be seen from this study, the vocational training of Goldstar Telecommunication was pan out in intricate relationships such as recruitment, HR, labor process, service, and interpersonal relationships within the company, beyond the supply and demand of manpower in the company and industry. Whils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interviewee's life history,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course provided them with education and employment opportunities. However, it was only an offering of the same treatment as college graduates. And beyond the education discrimination, the generational limitations were also confirmed through the study of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process of Goldstar Telecommunication that they were not recognized as equal society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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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돌프 멘첼의 역사화에 나타나는 프로이센의 이미지 : 시각사(visual history) 연구의 방법론적 난제에 대한 탐구

저자 : 전진성 ( Jin-sung Ch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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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사(visual history)'란 단지 시각자료를 사료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각 이미지의 매체적 특성을 원리로 삼아 재현의 가능성과 한계를 반추해보는 역사이다. 본고는 프로이센의 역사화가 멘첼의 사례를 통해 회화를 위시한 시각 이미지가 과연 시대의 증언이자 해석으로서 유효한지 살펴보았다. 멘첼은 고유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역사적 순간의 덧없는 일시성을 포착하려 한 급진적 역사주의자인 동시에 알레고리 기법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전통적 모티프를 활용하는 고전주의자이기도 했다.
역사적이면서도 비역사적이고 시각적이면서도 비시각적인 아돌프 멘첼의 역사화는 '시각사'의 방법론적 난제를 부각시킨다. 시각 이미지의 '시각성'은 그 자체로 현실을 바라보고 만들며 해석한다. 이미지는 대상과 함께 행동한다. 개인적,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특유의 멜랑콜리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역사가와 목격증인, 목격의 대상인 행위자간의 긴장관계를 탐구한 멘첼의 역사화는 이미지가 역사서술과 동급의 재현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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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로의 연대: 이미지로 보는 16세기 독일 루터파 공동체의 이상

저자 : 한유나 ( Yu Na H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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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개인의 불행과 고통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및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위로해주고 극복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의 이상은 기독교의 전통적 미덕 중 하나인 '이웃 사랑(amor proximi)'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루터는 성경의 전체 내용이 믿음(fides)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전자는 오직 후자를 통해서만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만큼 '이웃 사랑' 개념에 전에 없이 큰 가치를 부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6세기 루터파 문화권 내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이 이웃 사랑의 실천에 동기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연대와 결속을 다지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편으로는 감상자로 하여금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탱해줄 공동체적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자 자신도 이러한 안전망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웠다. 기존 미술사 연구들은 이웃 사랑의 주제를 다룬 16세기 루터파 이미지들 상당수가 중세의 전통적 주제들과 도상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이유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논의되었던 '이웃 사랑'의 추상적 개념과 공동체적 이상이 일상생활 안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실천적 행위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들이다.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16세기 독일 루터파 공동체의 이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 이웃 봉사에 있어 도움의 공여자와 수혜자의 구분이 없는 호혜적 관계의 형성을 강조하였다. 이웃 사랑의 의인화(personification)인 여성이 갓난아이를 수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과일을 받아먹는 모습을 담은 '카리타스(caritas)'의 도상, 전도 활동을 위해 먼 길을 떠나기 전 서로를 다정하게 격려하는 사도들을 재현한 '사도들의 이별(divisio apostolorum)'과 같은 주제들이 크게 유행하였다. 둘째, 정신적 위안과 물질적 원조에 대한 균형감 있는 관심을 장려하였다. 복음 전파를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전하는 이웃 봉사의 행위로서 시각화한 작품들과 빈민구제를 위한 공동기금(Gemeiner Kasten)의 주제를 다룬 이미지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현실에서 상호 원조를 통해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웃들이 곧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구현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특히 신자들이 함께 모여 전례에 참석하는 교회 공간에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 초상이 포함된 제단화나 추모화(epitaph)들을 안치함으로써 그 상징성을 극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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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미국 흑인의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 : 흑인 신체에 대한 집단적 비하와 문화적 인종주의의 구축

저자 : 허현 ( Hur Hy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5-11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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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미국 내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왔지만 노예제 폐지 이후 짐 크로우시대를 거치며 더욱 확산되고 변형·발전되었던 미국 흑인들에 대한 다양한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고찰을 통해 그 내용과 목적, 그리고 메시지 효과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정형화된 인종주의적 흑인 캐릭터들로서는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샘보(sambo)와 매미(mammy), 경멸적인 쿤(coon), 음탕한 제즈벨(jezebel), 폭력적인 브루트(brute)와 벅(buck) 등을 들 수 있는데 백인 중심의 기성 인종질서의 정당성과 위기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들은 백인 노예소유주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창조하여 흑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가공의 뒤틀린 자화상이자 자기혐오의 시선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일방적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억압적 문화 공간 안에 갇혀 있었고 그러한 '하얀 시선'을 통해 '검은 자아'를 부정당했다. '검은 자아들'은 늘 곱슬머리와 왕방울 같은 눈, 두터운 입술, 튀어나온 입과 유난히 하얀 이, 칠흑 같은 피부색, 비대한 몸, 바보 같거나 천박한 미소, 타락한 몸짓, 욕정에 찬 음탕한 눈길 등과 같은 부정적인 신체적 특징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부당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정형화는 특히 노예제의 폐지 이후 백인들이 인종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개한 헤게모니 장악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문화적 인종주의의 구축을 통해 후기노예제사회를 건설하고자하는 의도를 품고 있었고 인종주의적 캐리커처에서 드러나는 유머와 위트로 가장한 흑인들의 문화적 재현을 통해 노예제라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역사적 기억상실을 도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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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18 전쟁'과 프랑스의 흑인 병사 이미지: 실재, 상상(계), 그리고 재현

저자 : 이재원 ( Lee Jae-w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1-16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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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화 이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어떻게 인식되며 재현되고 있을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기 유럽 대중 다수가 접하게 된, 당시의 일상적이고도 사회정치적인 삶 속에 관여했던, 이미지들에 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허구와 상징, 그리고 현실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전(propaganda)과 전파 덕분에 다수의 대중을 매혹한 메시지가 된 이미지들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 내의 평범한 일반 프랑스인들의 흑인 병사에 대한 상상은 혹은 상상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형성되었다. 본 논문은 전쟁 기간 프랑스인들이 재현한 식민지인, 특히 아프리카 흑인 병사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연구이다. 논문을 준비하며 접하게 된 다량의 이미지는 프랑스인들의 식민지 의식의 형성에 있어 식민지 시기 동안의 이미지 자료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랑스인이 인식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식민지인, 그중 다수가 참전한 아프리카 흑인병사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다변적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분석하기 위해 먼저, '가장 거대한 프랑스(La Plus Grande France)'라는 상상계 속에서 1차 대전 중 아프리카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다음으로, 유명한 핫초코 분말 제품인 '바나니아(Banania)' 광고 속 흑인 병사의 '큰 아이(grand enfant)'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이와 더불어 희화화된 아프리카인 이미지의 양가적 측면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식민지의 군사적 기여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식민지 제국의 희생에 대한 늦은 인정에 대해서도 소개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차 대전 종전 후 점령군으로서 독일의 라인란트(Rheinland) 지역의 진주에 반대하는, 즉 '검은 치욕(Schwarze Schande)'에 대항하는 독일의 선전 활동과 이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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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전쟁 트라우마, 감각적 고통, 반전(反戰)의 미학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

저자 : 최용찬 ( Choi Yong-ch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19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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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30년의 전쟁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나타난 '전쟁 트라우마'(Kriegstraumata)에 의한 참전 세대의 감각적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특히 참전 병사들의 전쟁 트라우마에 의한 총체적 파괴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목표를 둔다. 레마르크 소설에서 제시된 실마리를 따라, 본론 2장에서는 참호병과 전쟁 트라우마의 청각적 고통, 3장에서는 포격 공포증과 전쟁 트라우마의 시각적 고통, 4장에서는 전선 조광증과 전쟁 트라우마의 촉각적 고통을 나누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세대가 몸소 겪은 전쟁 트라우마의 감각성, 곧 청각성, 시각성, 촉각성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병사들이 경험한 전쟁 트라우마의 보편적, 심리적, 정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별적, 감각적, 신체적 차원까지 모조리 재현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반전영화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대목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전쟁 트라우마와 세 가지 감각적 고통이 제각각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병사들은 모두 다 전쟁 트라우마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신체의 감각적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영화는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일스톤의 영화는 전쟁 유탄이 인간의 신체 감각에 미치는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을 통해 참전 세대의 일반적, 심리적, 정신적 파멸성뿐만 아니라, 개별적, 감각적, 신체적 파괴성 차원까지 철저하게 구명해낸 최초의 반전영화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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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鄭世雅의 生涯와 壬亂 擧義 -영천성 전투를 중심으로-

저자 : 박순교 ( Park Soon Ky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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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아(1535~1612)는 영천의 재지사족이었다. 그는 임란 시기 영천성 복성 전투, 임고서원 중건 등의 중핵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본문은 영천의 재지사족 정세아의 삶을 복원하고, 임란의 혼란기 전후 영천 지역의 사건과 동향을 정세아의 삶과 곁들여 검토했다. 그간 본격 검토되지 않은 『호수실기』를 여타 잔존 기록들과 대조, 검토하였고, 잘못되거나 누락된 사실들을 비정하였다. 정세아 집안의 가풍, 정세아 집안의 노루목 이거 과정과 의미, 정세아의 소과 입격 성적, 정세아의 상경 사건, 정세아의 경북 영양 오극성과의 만남, 정세아의 세계관과 삶의 궤적, 임진란 당시 정세아의 거의 시점, 거의 목적, 거의 성격 등을 축차적으로 구명하였다. 본문은 영천의 4월 추평회맹을 부정하고, 영천성 전투를 전후한 시기, 영천에서 발현된 다기다양한 세력들의 정치적 노선과 상황들을 천착하고 부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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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통적 華夷論의 변천과 崔濟愚의 文明觀

저자 : 김민석 ( Kim Minseok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7-27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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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통적 화이론의 구조와 특징, 그것의 수용과 변천 과정을 살펴본 후, 화이론과의 관계에서 동학의 天觀과 聖人觀, 전통 사상 및 서양·청·일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최제우의 문명관을 검토하였다. 최제우는 天觀에 기초하여 보편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개방적·포용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게 '문명'이란 특정 문화나 가치·이념의 구현이 아닌 보편적인 天道의 실현이었으며, 이는 곧 전통적 화이론의 '유일·보편' 문명과는 다른 '혼성·보편' 문명의 지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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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선후기 사적복수 허용에 대한 일고찰 -법규 변화와 『추관지(秋官志)』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하경 ( Ha-kyoung Le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30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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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식민지 소년 정문기의 교육입지전(敎育立志傳)

저자 : 장신 ( Jang Sh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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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소년의 교육 경험을 연대기로 정리하였다. 소년 정문기는 1909년부터 강습소의 근대교육을 시작으로 1929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당시 일본인 소년은 소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바로 진학하였다. 소수의 관립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조선인 소년은 정문기처럼 여러 사립학교를 전전하였다. 졸업과 편입, 중퇴, 졸업이 반복되었다. 1910년대 조선의 소년은 네 곳의 사립학교를 거쳐 중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식민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업 연한이 3년이나 차이났기 때문이었다. 교육 제도의 구조적 차별이었다. 그나마 정문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느 조선인 소년과 마찬가지로 정문기도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편입하여 상급학교 진학 자격을 얻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차별 속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정문기는 민족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조선인 교원과 학생으로 구성된 사립학교만 다녀서 일본인을 접할 기회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축구와 야구 등 운동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개인적 특성도 있지만, 일본 유학 중에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제국대학 재학생이라는 일본인 학생의 엘리트 의식도 한 몫을 했다. 출신 지역보다 출신 학교의 동질감이 큰 이유도 있었다. 구조적 차별과 개인의 차별이 분리될 수 없지만 환경에 따라서 의식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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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70년대 후반 기업의 직업훈련소 운영과 훈련의 효과 -금성통신 기간사원 양성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장미현 ( Mihyun Ja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5-36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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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기업의 직업훈련 사례 중 하나로 1970년대 후반 금성통신의 직업훈련을 살펴본다. 금성사에서 분사한 금성통신은 전국기능경기대회와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을 다수 배출하고 있었던 만큼 기능직 훈련에도 적극적이었다. 1976년부터는 사내 강사를 활용한 초급대학 수준의 훈련 과정을 개설하였다. 초급대학 수준의 기간사원 양성과정으로 개설된 이 훈련은 고졸 훈련생을 선발해 1년 간 훈련을 시킨 후 사무기술직에 입사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기간사원 양성과정을 통해 금성통신이 기대한 효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고졸사원을 입사시켜 총급여액을 절약하는 것이었고 둘째, 훈련소 기숙사 입소와 단체생활을 통해 애사심을 향상시켜 이직률을 낮추는 것이었다. 구술을 통해 확인했듯이 기간사원 양성과정 훈련생들 대다수가 훈련과정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1년 간의 훈련 과정은 입사 후 이들의 회사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훈련생들은 대졸사원 대우를 넘어 대학 진학을 회사가 지원할 것으로 기대했다. 기업과 훈련생들의 기대 효과가 달랐던 것이다. 한편 기업이 의도한 애사심과 단체생활을 통해 훈련생들은 자신들만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내·외에서 협력하였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훈련생들에겐 유리했지만 기업 차원에서는 인사관리 차원에서도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었다. 입사 후 훈련생들 대다수는 대졸사원 대우와 대졸은 다르다는 점을 체감했고 대다수가 야간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금성통신의 직업훈련은 해당 기업과 산업의 인력수급을 넘어 채용, 인사, 노동과정, 복무, 사내 인간관계 등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시에 구술자들의 생애사적 차원에서 보자면 기간사원 양성과정은 이들에게 교육과 취업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결국 대졸사원 대우였지 대졸과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시대적 한계 또한 금성통신 기간사원 양성과정과 구술자들의 생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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