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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客詩存』 속 朝·淸 문인 아회 문화와 교류

Literary Gathering (A-hoi; 雅會) Culture and Exchanges between Korean and Chinese Literators Shown in 『Hanke Shicun (韓客詩存)』

姜必任 ( Kang Pilyim )
  • : 한국중국학회
  • : 중국학보 9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2월
  • : 81-102(22pages)
중국학보

DOI

10.35982/jcs.99.4


목차

Ⅰ. 서론
Ⅱ. 朝·淸 문인 아회 재구성
Ⅲ. 문인 아회 밖 교류
Ⅳ. 결론
參考文獻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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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韓客詩存』에 나타난 朝·淸 문인의 교류를 중심으로, 연행사의 燕京에서의 일반적인 교류 활동과 이에 대한 양국 문인의 인식 양상을 분석하였다. 『韓客詩存』 속 양국의 교류 인물과 교류 장소, 역관과 三使의 독자 활동, 필담을 통한 소통 내용, 詩會 양상 및 雅會圖 창작 등을 아회문화로서 분석했으며, 顧炎武 사당 참배, 孝定太后 畫像 복원 및 『韓客詩錄』 편찬 협조 등 아회 밖에서 이루어진 양국 문인 교류도 분석했다.
『韓客詩存』에는 李尙迪, 吳慶錫 등 金正喜 인맥의 역관과 金永爵, 申錫愚, 朴珪壽 등 북학파 후대문인들의 교류 활동이 주로 실려있다. 양국 문인은 필담을 통해 소통하며, 시가를 지어 창화했고, 雅會圖를 그려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활동 방식이었다. 조선 문인들은 經世致用을 주장했던 청 문인과 교류하며 顧炎武의 사당 제사에 참여하고 시가를 창화하는 등 중화 문화의 중심이었던 宣南 지역에서 정통 문화를 체험하고 교류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韓客詩存』에 贈答詩나 唱和詩 등 시가가 많이 수록된 것도 이 시기 연행사가 청 문인과 문학 교류를 적극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는 19세기 燕行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청 문인과의 문학 교류 내용에 쏠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양국이 처한 국내외 정세가 위급했음에도 청의 정세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은 자제했는데, 이는 자국의 위급한 정세는 알리고 싶지 않거나 또는 문자로 남기는 것은 조심스러워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韓客詩存』 속 朝·淸 문인들은 양국 문인의 교류를 君子之交의 기회로 인식하며 중화문화를 향유하거나 과시하는 기회로 여겼고, 문학을 통해 시대를 고민하거나 위급한 국제 정세에 대한 대안을 찾는 기회로 삼지는 않았다.
『韓客詩存』은 청 문인에 의해 전해지던 자료를 수록한 것이므로, 직간접적으로 청 문인의 인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교류 관련 기록 대부분은 중화 문화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활동이고 그 공간적 범위도 선남 지역에 국한되는 등 한족 중심의 문화가 기록되었다. 그런데 청 문인들은 조선을 東國으로 표현하거나, 東夷나 外藩으로 표현한 경우에도 조선의 문화가 중화 문화와 뿌리가 같다거나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표현된다. 이것은 조선을 ‘夷’로 보는 순간 ‘淸’의 정통성과 선남지역에 거주하는 한족 자신들의 성격이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문인들이 尊明 의식이나 中華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이는 華와 夷를 구분은 하되 淸을 인정하는 즉 북학파 이후 反淸的 華夷觀이 극복되고 있었고 또 청 문인들에 의해 그러한 문헌 자료만 선별되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study analyzed what both Joseon and Qing dynasties’ literators, living in the same times, had thought about the general activities of Joseon’s delegation to Yanjing(燕京) and those literators’ exchanges focusing on the exchanges between the literators of Joseon and Qing dynasties shown in 『Hanke Shicun (韓客詩存)』. 『Hanke Shicun (韓客詩存)』 describes mainly about the exchange activities of those interpreter officials connected to Kim, Jeong-Hee(金正喜) such as Lee, Sang-Jeok(李尙迪) and Oh, Gyeong-Seok(吳慶錫) and those literators of Latter Bukhak School such as Kim, Young-Jak(金永爵), Shin, Seok-Woo(申錫愚) and Park, Gyu-Soo(朴珪壽). The literators of the two countries used to communicate in writing and responded to each other via poems, while generally making a painting on the literary gatherings to record the occasions. Joseon literators were active in experiencing and exchanging with the authentic culture in the area of Xuannan (宣南), the center of Zhonghua (中華) culture by exchanging with Qing literators who claimed Gyeongse Chiyong (經世致用), participated in the rituals of the shrine for Gu Yanwu (顧炎武) and composing Changhe poems. It is because the Joseon delegation to Yanjing at that times had active literary exchanges with Qing literators that Hanke Shicun recorded many poems such as presenting and responding poems or Changhe poems. This is also because the general public’s interest in the 19th century Yanjing delegation records was focused on the literary exchanges with Qing literators. As such, the literators of both Joseon and Qing shown in Hanke Shicun recognized the exchanges of the two countries’ literators as the opportunities for noble men’s friendly exchanges to enjoy or parade Zhonghua culture, whereas they did not take it as the opportunities to consider the issues in the times and find alternatives to cope with the urgent international situations.
Hanke Shicun contains the materials handed down among Qing literators, thus reflects the recognition of Qing’s literators. Most records on exchanges are activities confirming the authenticity of the Zhonghua culture and the spatial scope is confined within the area of Xuannan, recording the culture focusing on Han people. However, Qing’s literators express Joseon as Dongguk (東國; Dongguo in Chinese) or even in cases when they express Joseon as Dong-i (東夷; Dongyi in Chinese) or Woebeon (外藩; Waifan in Chinese), they described that the culture of Joseon originated from the same root of Zhonghua or had high cultural standards. This may be explained that for them, seeing Joseon as an ‘Yi (夷)’, there occurs the contradictory situation where the authenticity of ‘Qing (淸) and the identity of themselves, Han people residing in the area of Xuannan. Compared to this, Joseon literators did not show much recognition on respecting Ming or maintaining the authenticity of Zhonghua. This shows that, after the Bukhak School, Joseon was overcoming the anti-Qing, Hua-Yi viewpoint by differentiating Hua and Yi but admitting Qing as well as that, by the Qing literators, only those literary materials reflecting such attitudes were selectively handed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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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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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671-8286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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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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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중국어 '伤心'류 감정형용사군의 의미연결망과 차이 연구 - 말뭉치 기반의 BP접근법

저자 : 이은경 ( Lee Eunkyoung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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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유의어 '伤心', '难受', '难过', '痛苦' 그룹의 의미 차이를 밝히기 위해 BP접근법을 적용해 말뭉치 용례에서 '행동 프로필'을 조사하고 통사 기능과 다양한 의미적 차원의 특징과 차이에 대한 통합된 데이터를 도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데이터에 대한 CA분석과 HAC분석을 통해 범주 내부의 구조를 탐색하고 연결망을 구조를 제안하였다.
통사적 BP데이터에 대한 군집분석 결과 '难过'와 '难受'가 가장 유사하여 가장 먼저 군집화되 고이 군집이 다시 '伤心'과 결합되며, '痛苦'는 이들과 가장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차이는 구체적으로 '痛苦'의 명사적 사용(명사성 주어, 목적어, 전치사의 목적어) 선호와 서술적 사용의 비선호, '难过'와 '难受'의 보어와 술보구조의 술어로서의 사용 선호, 그리고 '伤心'과 '痛苦'의 부사어와 관형어로의 사용 선호가 야기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모든 의미적 차원의 특징에 대한 군집화 분석은 통사적 분포 특성과 유사하게 '难受'와 '难过'를 내부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통사와 의미의 통합 프로필에 대해 '难受'와 '难过'를 하나의 군집으로 제안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연결망에 대한 제안을 토대로 '难受'와 '难过'의 의미 차이, 이 군집과 '伤心'의 차이, 그리고 '伤心'과 '痛苦'의 주요 차이와 원형적 의미를 설명하였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behavioral profile' in corpus use cases by applying the BP approach to reveal the difference in meaning between the synonyms 'shangxin', 'nanshou', 'nanguo', and 'tongku' groups. Through this method, integrated data was derived on the characteristics and differences of syntactic functions and various semantic dimensions. And on these data, CA analysis and HAC analysis were performed to explore the structure within the category, and the structure of the network was proposed.
As a result of cluster analysis on the syntactic BP data, 'nanguo' and 'nanshou' were the most similar and clustered first, and this cluster was combined with 'shangxin' again, and 'tongku' was the most distant from them. These differences are specifically related to the preference for the noun use of 'tongku' (noun subject, object, and the object of the preposition) and the non-preference for the descriptive use, the preference for the use of the complement and predicate of 'nanguo' and 'nanshou' as predicates in the predicate structure, and It was analyzed that the preference for using the adverbs and adjectives of 'shangxin' and 'tongku' was caused. Clustering analysis of all semantic dimension features suggested that 'nanshou' and 'nanguo' are internally closest similar to syntactic distribution characteristics. For the integrated profile of syntactic and semantics, both distance measures 'nanshou' and 'nanguo' were proposed as one cluster. And 'shangxin' was similar to these and 'tongku' was found to be the most different from the other three words. Finally, based on the proposal for this network, the difference in meaning between 'nanshou' and 'nanguo', the difference between this cluster and 'shangxin', and the main difference and the typical meaning between 'shangxin' and 'tongku' were expl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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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대소설 『개벽연역(開闢衍繹)』 번역필사본에 대한 연구 - 존재 양상과 그 의미를 중심으로

저자 : 김영 ( Kim Young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55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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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명대소설 『開闢衍繹』이 유입된 이후 조선시대에 한글로 번역된 모습에 대한 포괄적 고찰이다. 그간 번역필사본에 대한 선행연구가 있었으나 간략한 소개에 가까웠기에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비교하여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본 논문은 그간의 선행연구와 논의를 보완하여 조선시대에 유입된 중국소설 『開闢衍繹』의 유통 현황과 번역 실태를 확인하고 왕실번역본을 중심으로 번역의 특색을 살피고자 하였다. 더불어서 『開闢衍繹』 번역본 향유의 효용성과 의미를 논하고 완질로 전하는 또 다른 필사본 연세대 소장본과 왕실본의 상관관계를 고찰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도출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開闢衍繹』이 조선에 유입된 시기는 관련 문헌 기록에 근거하면 최소 1700년대 중반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왕실과 사대부가 문인들이 보았던 판본은 숭정연간에 간행된 명간본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글번역과 관련된 기록은 1700년대 말부터 나타나며 '벽연역'과 '벽연의'이란 서명으로 유통되었고 이후 20세기 초반에 '天地開闢'으로 바뀐 활자본의 존재까지 확인될 만큼 상당히 오래도록 탐독되었다. 독자층 역시 왕실을 비롯하여 사대부가, 민간으로까지 다양한 층위를 두루 포괄하였다. 어떤 경유로 왕실본의 일부가 외부로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소장본은 규장각 소장본에 누락된 '권지오'이며 표지의 모습은 다소 다른데 서지형태를 검토한 결과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소장본이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연세대 소장본은 번역문의 형태가 왕실본과 매우 유사하고 오기 및 오역의 부분마저도 일치하는 점을 보여 동일 계열의 번역본에서 나온 전사본이다. 왕실본과 연세대본 번역본은 명대 숭정연간에 나온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원전에 충실하여 번역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이름을 피휘하여 번역된 부분도 있다.
『開闢衍繹』 번역본은 소설로의 재미와 흥미 외에도 중국 역사를 이해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서로서의 기능도 강화된 독서물이었다. 오락성,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서술, 그리고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물의 활약상을 통해 배우는 교화성까지 중요한 효용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읽었던 독서물의 하나였다.


This paper is a comprehensive review of the translation into Hangul in the Joseon Dynasty after the introduction of Kaipi-Yanyi(開闢衍繹), Ming Dynasty Novel. In the meantime, there were prior studies on translated manuscripts, but since they were close to a brief introduction, it was difficult to compare them specifically and comprehensively. Therefore, this paper complemented prior research and discussion, to check the Kaipi-Yanyi(開闢衍繹) distribution status and translation status of Chinese novels introduced in the Joseon Dynasty, and then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translation, focusing on the court version.
In addition, this paper discussed the value and meaning of translated manuscripts and examined the correlation between the manuscripts of Yonsei University and the royal version, which are conveyed in complete quality.
The results derived from this study are as follows. The period when Kaipi-Yanyi(開闢衍繹) was spread to Joseon was at least before the mid-1700s, based on the relevant literature records. And it was determined that what they saw was a version of the Ming Dynasty published during the Chongzhen(崇禎) period. Records related to the translation of Hangul appeared since the end of the 1700s, and since then, as an active capital in the early 20th century, existed for a long time and were read. The reader also encompassed a wide range of classes, including the royal family, gentry class, and civilians.
It is not known how a part of the royal version came to the outside, but the collection, “Volume 5”, of Suncheon's Ppurigibeunnamu museum is missing from the collection of Kyujanggak. The appearance of the cover is somewhat different, but after reviewing the form of the bibliography, it was determined that the collection of Suncheon's Ppurigibeunnamu museum retains the original form.
The collection of Yonsei University is a transcription from the same series of translations, showing that the form of the translation is very similar to the royal version, and even parts of the Ogi and mistranslation coincide.
Both translated manuscripts were written versions published during the Chongzhen(崇禎) period, and were translated faithfully to the original book as a whole. Some parts were translated by changing the name of the king of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o the fun and interest of the novel, the translation of the Kaipi-Yanyi(開闢衍繹) was a reading that enhanced its function as a tutorial for understanding Chinese history and acquiring knowledge.
It was one of the readings that I read actively because it had important utility values, including entertainment, narratives based on historical facts, and the rise and fall of the country, and the ability to learn from people's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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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청대(淸代) 문헌(文獻)에 나타난 남색(男色) 질병(疾病)과 사회인식 - 문언소설(文言小說)과 의서(醫書)를 중심으로

저자 : 최윤주 ( Choi Yoonju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2-74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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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중기 이후 쾌락적 풍조를 따라 형성된 남색 풍조는 왕조가 바뀌어서도 계속되었다. 청대 지식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남색 풍조에 참여했다. 지식인층의 열렬한 남색 참여 원인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청나라 정부의 관리 숙창 금지령, 道家 養生術의 영향, 지식인층의 현실 도피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보고 있다.
이후 남색은 꾸준히 소설의 제재가 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의 남색 애호는 문언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청대에는 희극업의 성행과 함께 남성 배우[男旦]가 남색 대상으로 부상했으며, 지식인들은 배우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로 보았을 때 당시 중국 사회가 남색을 온전히 포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청 왕조는 법률 사항으로 남성 간의 관계를 간음죄로 보며 명백한 위법 사항이라 보았고, 문언소설도 남색의 폐해를 종종 언급하였다. 특히 '남색에 잘못 빠지면 질병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명청 시기 소설작품 중 청대 문언소설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당시 의서 또한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남색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질병 서사들은 곧 남색을 처벌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었으며, 이 배후에는 주류계층이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의서·소설·권선서 등에 질병 서사를 담론으로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After the middle of the Ming Dynasty, the trend of pederasty formed along the hedonic trend continued even after the dynasty changed. The Qing Dynasty intellectuals participated more actively in this trend. As for the cause of the enthusiastic pederasty participation of intellectuals, modern scholars believe that it is the result of a combination of factors such as the Qing government's ban on administrative whore, the influence of Taoist regimen, and the escape of intellectuals from reality.
Since then, pederasty has been steadily sanctioned for novels. In particular, intellectuals' pederasty had a great influence on literary novels. In the Qing Dynasty, with the success of the comedy industry, male actors[男旦] emerged as pederasty objects, and intellectuals tried to seek new relationships through exchanges with male actors.
From these situations, it can be thought that Chinese society at the time fully embraced pederasty, but there were voices against it. The Qing Dynasty regarded the relationship between men as a crime of adultery as a legal matter and viewed it as a clear offense, The Qing Dynasty regarded the relationship between men as a crime of adultery as a legal matter and viewed it as a clear offense, and literary novels often mentioned the harmful effects of pederasty. In particular, the story of “If you fall into the pederasy, you will get a disease” is a unique phenomenon that appears only in literary novels of the Qing Dynasty. Although the expressions of the medical books at the time were also little bit different, they seem to be taking a critical position against pederasty. These disease narratives were soon used as tools to punish pederasty. In order for intellectuals to keep their place, it can be seen that the narrative of disease as a discourse was planned in medical books, novels, and book of persu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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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韓客詩存』 속 朝·淸 문인 아회 문화와 교류

저자 : 姜必任 ( Kang Pilyim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0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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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韓客詩存』에 나타난 朝·淸 문인의 교류를 중심으로, 연행사의 燕京에서의 일반적인 교류 활동과 이에 대한 양국 문인의 인식 양상을 분석하였다. 『韓客詩存』 속 양국의 교류 인물과 교류 장소, 역관과 三使의 독자 활동, 필담을 통한 소통 내용, 詩會 양상 및 雅會圖 창작 등을 아회문화로서 분석했으며, 顧炎武 사당 참배, 孝定太后 畫像 복원 및 『韓客詩錄』 편찬 협조 등 아회 밖에서 이루어진 양국 문인 교류도 분석했다.
『韓客詩存』에는 李尙迪, 吳慶錫 등 金正喜 인맥의 역관과 金永爵, 申錫愚, 朴珪壽 등 북학파 후대문인들의 교류 활동이 주로 실려있다. 양국 문인은 필담을 통해 소통하며, 시가를 지어 창화했고, 雅會圖를 그려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활동 방식이었다. 조선 문인들은 經世致用을 주장했던 청 문인과 교류하며 顧炎武의 사당 제사에 참여하고 시가를 창화하는 등 중화 문화의 중심이었던 宣南 지역에서 정통 문화를 체험하고 교류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韓客詩存』에 贈答詩나 唱和詩 등 시가가 많이 수록된 것도 이 시기 연행사가 청 문인과 문학 교류를 적극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는 19세기 燕行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청 문인과의 문학 교류 내용에 쏠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양국이 처한 국내외 정세가 위급했음에도 청의 정세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은 자제했는데, 이는 자국의 위급한 정세는 알리고 싶지 않거나 또는 문자로 남기는 것은 조심스러워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韓客詩存』 속 朝·淸 문인들은 양국 문인의 교류를 君子之交의 기회로 인식하며 중화문화를 향유하거나 과시하는 기회로 여겼고, 문학을 통해 시대를 고민하거나 위급한 국제 정세에 대한 대안을 찾는 기회로 삼지는 않았다.
『韓客詩存』은 청 문인에 의해 전해지던 자료를 수록한 것이므로, 직간접적으로 청 문인의 인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교류 관련 기록 대부분은 중화 문화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활동이고 그 공간적 범위도 선남 지역에 국한되는 등 한족 중심의 문화가 기록되었다. 그런데 청 문인들은 조선을 東國으로 표현하거나, 東夷나 外藩으로 표현한 경우에도 조선의 문화가 중화 문화와 뿌리가 같다거나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표현된다. 이것은 조선을 '夷'로 보는 순간 '淸'의 정통성과 선남지역에 거주하는 한족 자신들의 성격이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문인들이 尊明 의식이나 中華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이는 華와 夷를 구분은 하되 淸을 인정하는 즉 북학파 이후 反淸的 華夷觀이 극복되고 있었고 또 청 문인들에 의해 그러한 문헌 자료만 선별되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study analyzed what both Joseon and Qing dynasties' literators, living in the same times, had thought about the general activities of Joseon's delegation to Yanjing(燕京) and those literators' exchanges focusing on the exchanges between the literators of Joseon and Qing dynasties shown in 『Hanke Shicun (韓客詩存)』. 『Hanke Shicun (韓客詩存)』 describes mainly about the exchange activities of those interpreter officials connected to Kim, Jeong-Hee(金正喜) such as Lee, Sang-Jeok(李尙迪) and Oh, Gyeong-Seok(吳慶錫) and those literators of Latter Bukhak School such as Kim, Young-Jak(金永爵), Shin, Seok-Woo(申錫愚) and Park, Gyu-Soo(朴珪壽). The literators of the two countries used to communicate in writing and responded to each other via poems, while generally making a painting on the literary gatherings to record the occasions. Joseon literators were active in experiencing and exchanging with the authentic culture in the area of Xuannan (宣南), the center of Zhonghua (中華) culture by exchanging with Qing literators who claimed Gyeongse Chiyong (經世致用), participated in the rituals of the shrine for Gu Yanwu (顧炎武) and composing Changhe poems. It is because the Joseon delegation to Yanjing at that times had active literary exchanges with Qing literators that Hanke Shicun recorded many poems such as presenting and responding poems or Changhe poems. This is also because the general public's interest in the 19th century Yanjing delegation records was focused on the literary exchanges with Qing literators. As such, the literators of both Joseon and Qing shown in Hanke Shicun recognized the exchanges of the two countries' literators as the opportunities for noble men's friendly exchanges to enjoy or parade Zhonghua culture, whereas they did not take it as the opportunities to consider the issues in the times and find alternatives to cope with the urgent international situations.
Hanke Shicun contains the materials handed down among Qing literators, thus reflects the recognition of Qing's literators. Most records on exchanges are activities confirming the authenticity of the Zhonghua culture and the spatial scope is confined within the area of Xuannan, recording the culture focusing on Han people. However, Qing's literators express Joseon as Dongguk (東國; Dongguo in Chinese) or even in cases when they express Joseon as Dong-i (東夷; Dongyi in Chinese) or Woebeon (外藩; Waifan in Chinese), they described that the culture of Joseon originated from the same root of Zhonghua or had high cultural standards. This may be explained that for them, seeing Joseon as an 'Yi (夷)', there occurs the contradictory situation where the authenticity of 'Qing (淸) and the identity of themselves, Han people residing in the area of Xuannan. Compared to this, Joseon literators did not show much recognition on respecting Ming or maintaining the authenticity of Zhonghua. This shows that, after the Bukhak School, Joseon was overcoming the anti-Qing, Hua-Yi viewpoint by differentiating Hua and Yi but admitting Qing as well as that, by the Qing literators, only those literary materials reflecting such attitudes were selectively handed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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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국의 도시, 꿈에서 깨어나다: 『양주몽(揚州夢)』의 기녀 서술과 새로운 양주(揚州) 공간의 구축

저자 : 崔琇景 ( Choi Soo-kyung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3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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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揚州를 배경으로 한 筆記를 중심으로 청대 중후기 문인들이 어떻게 과거 기억을 활용하여 性別 상상을 이 도시에 부여했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40-50년대 揚州에서의 체류 기억을 서술한 周伯儀의 靑樓筆記 『揚州夢』을 중점적으로 탐색하였다. 揚州는 청대의 경제 중심지이자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여성을 사고파는 '瘦馬'의 도시로 각인되어 왔다. 『揚州夢』 역시 이러한 역사적 상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오랜 역사의 여성 감상문헌의 체제와 구성을 모방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전의 여성 감상 문헌이 기녀와 청루 문화에 부여한 기대와 의미를 상당 부분 파괴하였다. 기녀의 아름다움과 행위를 미화하고 낭만화하는 것이 전통적 기녀 서사의 주류였지만 『揚州夢』은 기녀들을 현실 세계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동시에 기녀들은 화자와 주변 문인들의 주변적 자아를 대표하기도 한다. 이는 오래전부터 확립된 문인-기녀간의 비유 관계와 여성 재현의 수사학적 전통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전통 감상문헌이 기녀를 비유하고 중개하던 사물은 '꽃'이나 기루 공간이었지만 『揚州夢』은 揚州의 모든 일상적 사물로 서술범위를 확장한다. 이러한 사물은 향수의 정서를 불러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련된 유행의 감각을 떠올리기 위해 등장한다. 천년을 이어오던 '揚州夢'에서 깨어난 『揚州夢』의 화자는 揚州를 과거의 영화를 꿈꾸는 퇴락한 도시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비극과 희극이 계속되는 도시, 거리와 상점, 식당, 기루에서 여전한 일상이 전개되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지금 현재'의 일상적인 공간으로 揚州를 재구성하였다.


This paper aims to analyze how China's literati in the 19th century employed memory as a tool to give a gendered imagination to Yangzhou. This study focuses on The Dream of Yangzhou, a courtesan essay of Zhou Boyi周伯儀, which describes the memories of staying in Yangzhou in the 1840s and 50s. Yangzhou, the city of “thin horses” (瘦馬shouma) was recognized as the economic center of China in the 18th century because of the sex trafficking of women. The Dream of Yangzhou is also not free from this historical imagination and imitates the existing women's connoisseurship literature system and composition. However, this book largely reimagined the expectations and meanings that previous women connoisseurship literature had placed on courtesans and their culture. The mainstream approach of traditional courtesan narrative is to glorify and romanticize the beauty and behavior of courtesans; whereas, The Dream of Yangzhou portrays prostitutes as “humans” in the real world. At the same time, courtesans also represent the peripheral selves of the male narrator and the surrounding literati. This representation could have originated from the long-established metaphor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literary man and the courtesan as well as the rhetorical tradition of representing women. Traditional connoisseurship literature used flowers or brothel spaces to compare and mediate courtesans but “The Dream of Yangzhou” expands the scope of description to all everyday objects in Yangzhou. These objects do not bring back nostalgia, instead, they recall a sophisticated and constantly changing sense of fashion. Awakening from the thousand-year-old “Yangzhou dream,” the narrator of The Dream of Yangzhou does not recreate Yangzhou as a degenerative city dreaming of its prosperous past. Rather, he reconstructs Yangzhou into an incomplete daily space in the process, where daily life still unfolds in cities, streets, shops, restaurants, and brothels, where the tragedy and comedy of lif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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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 시기 지식인의 신시 미학관 - 1918년 胡適과 沈尹默의 초기 시를 중심으로

저자 : 송자윤 ( Song Jayun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7-16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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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5·4 시기 『신청년』에서 발표된 신시를 중심으로, 호적과 심윤묵이 추구한 시가 미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청년』의 편집부는 여러 문학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신시 운동을 필두로 삼았으며, 이의 주축에는 호적과 심윤묵이 있었다. 이들은 신시를 처음 선보임에 있어 '비둘기'라는 같은 시제를 선택하였고, 이후 호적은 심윤묵 시에서 나온 표현을 빌려 「까마귀」라는 시까지 내게 된다.
이들은 창작 과정에서 같은 시제에 대한 공동 창작, 즉 창화를 선택했던 것은 새로운 시의 창작 과정에서 여러 탐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시 창작에 있어 낡은 상투어 등의 사용을 피하고자 했던 호적은 심윤묵의 표현을 확대 및 재생산함으로써, 백화문으로 쓴 시의 예술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학교의 교무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관계는 멀어지고, 이후의 두 사람의 신시 창작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만, 이의 전인 1918년 이들은 유사한 미학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회에 대한 시를 쓸 필요가 있다는 점과 참신한 표현 방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관점의 공유 하에, 이들은 신시 운동의 기초를 닦았고, 신시의 창작 및 유통의 공간이 넓어지는 과정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시작점에서 발생한 신시 운동과 주역들의 시, 창작 배경 및 이들의 미학관을 살펴본다는 것은 초기의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attempted to examine the poetry aesthetics pursued by Hu Shi(胡適) and Shen Yinmo (沈尹默), focusing on the New Poetry (新詩) published in New Youth (新靑年) during the May Fourth Movement period. In the process of developing various literary actions, the editorial department of the New Youth also founded the New Poetry movement, with Hu Shi and Shen Yinmo as its main pillars. In their first introduction of the New Poetry, they chose the same topic of “Pigeon” and later Hu Shi borrowed almost identical expressions from Shen Yinmo and published a poem called “Crow.”
They chose co-creation on the same topic in the creating process, that is, they sought to enable various exploration paths for New Poetry. Furthermore, Hu Shi, who wanted to avoid the use of worn-out old clichés while creating poetry, tried to prove the artistry of poetry written in vernacular Chinese by expanding and reproducing Shen Yinmo's interpretation.
In the process of electing the director of Educational Affairs, their relationship drifted apart and this influenced the creation of their later poems. Previously in 1918, before the forementioned election, they had shown a similar aesthetic view in their writings. With the need to write poems about social difficulties and the need to create novel expressions, they laid the foundation for the New Poetry styling and set a milestone in the process of expanding the space for creation and distribution of it. Examining the poems, the way they were created, and the aesthetic viewpoints of protagonists who led the New Poetry Movement will help us better understand modern Chinese literature in its early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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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본 원제국(元帝國) 성종-무종-인종 시기 조정(朝廷) - 몽골의 '한화'를 반박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

저자 : 조원희 ( Cho Wonhee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19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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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네트워크 분석론을 가지고 원제국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카안, 무종 카이샨 카안, 성종 테무르 카안 시기의 중앙 조정 관료들을 검토하였다. 기본적으로 2017년도에 기 발표된 논문의 방법론을 확장하여 연구를 하는 것으로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 아래 세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동업 네트워크 분석을 통한 원 조정의 관료 분석은 유효다는 것이다. 둘째, 성종-무종-인종까지 중앙에서 활약한 관료들을 양적으로 분석 하다 보니, 이른바 몽골 제국의 '한화' 문제 - 특히 인종 시기의 과거제 부활 등으로 대표되는 정책들 - 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무종 시기에 비한족 출신의 관료들이 압도적인 활약을 하는 것은 무종 통치시기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예상이 될 수 있는 것이나, 성종 테무르 카안과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카안 시기의 한과 비한 관료의 비율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볼 때, 과연 “인종 시기의 한화”라고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 카안의 시기를 통해서 전반적으로 비한인 관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나, 그 관료들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 (가령 『元史』 列傳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부재한 것 등으로 볼 때 몽골제국의 '한화'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디지털 방법론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서도 제기할 수 있고 또한 후속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officials of the central court of the Yuan dynasty, specifically during the reign of Qa'ans Ayurubarwada (Renzong), Kaishan (Wuzong) and Temur (Chengzong) by using the network analysis methodology. By design, the article adopts the so-called co-operative network analysis methodology first proposed my previous article from 2017. Based on this analysis, it reaches the three following conclusion. First, it demonstrates that the “co-operative network analysis” can be a valid approach it determining the importance of an individual. Second, it raises question on the so-called “Sinicization” of Qa'an Ayurubarwada, as the officials in his era do not significantly seem to be more populated with Han Chinese officials in comparison to the era of Qa'an Temur. Finally, this research indicates that the most central figures during the the reign of these three Qa'an are dominantly non-Han individuals, but at the same time, they also mostly lack systematic records of their activities as seen in the absence of their biographies in The Official History of the Yuan. Thus, this research raises questions on opens new avenues of research in utilizing digital humanities methodologies in studying the Mongol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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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건륭 29년(1764) 교관(榷關) 세수의 운송 체계 재편과 그 여파 - 월해관(粵海關) 특수성을 둘러싼 갈등을 중심으로

저자 : 주형준 ( Joo Hyungjoon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3-22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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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64년 榷關 세수의 운송 체계의 재편과 이를 계기로 발생한 戶部와 粵海關의 두 차례 충돌을 다루었다. 논쟁의 초점은 榷關體制에서 粵海關의 특수성을 인정할지에 있었다. 우선 광동체제 해체 이후 설치된 대외 무역 세관인 “海關”에 대응하여 내지 무역 세관을 지칭하는 '일반 세관' 혹은 '보통 세관'에 의미로 새로 출현한 “常關”을 청대 세관 전체에 적용하지 않고, 아편전쟁 이전의 명칭을 “榷關”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常關이라는 명칭이 야기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고, 청대 세관의 연속적인 이해를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戶部가 명·청 시기 재정 운영의 주요 원리 중에 하나인 정액주의를 세관에 적용하여 전국에 榷關을 일원적으로 관리하는 운영 체계를 각 관체제로 정의한다.
광동체제 성립 이후 청조의 유일한 對서양 무역 세관이 된 粵海關은 각관체제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粵海關은 관세 행정에 관한 모든 업무를 行商에게 위탁하여 처리했고, 이로 인해 각관체제에서 규정된 것 외에 추가적인 절차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른 비용은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조달해야 하였다. 월해관의 대리 징세 구조에서 저울추의 무게 차이 문제가 존재하였다. 징세 청부업자가 관세를 징수하는 무게 기준 저울추(司碼平)와 호부가 세수를 결산하는 무게 기준 저울추(庫平)의 차이가 그것이었다. 월해관은 회계 처리 과정에서 이를 위한 추가적인 저울추 무게 조정 과정이 필요했고, 월해관은 여기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添平銀)은 세수 운송비로 책정된 항목(水脚銀)에서 처리하였다.
처리하였다.
1764년 榷關 세수의 운송비 산정 방식을 통일하고, 실제 운송비를 제외한 우수리 금액(節省水脚銀)을 반납할 것을 결정한 戶部의 목적은 기존에 榷關에서 불분명한 용도로 전용하던 水脚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각관체제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水脚銀에서 添平銀을 지출하는 문제를 둘러싼 戶部와 粵海關의 첫 번째 충돌이 발생하였다. 戶部는 각관체제에서 인정되지 않는 지출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粵海關은 水脚銀에서 添平銀을 지출해 오던 관행과 대외 무역의 특수성을 이유로 반발하였다. 첫 번째 충돌은 乾隆帝가 잠정적으로 관행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粵海關의 添平銀에 대해 상세히 조사할 것을 지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戶部는 粵海關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1768년 戶部와 粵海關의 두 번째 충돌로 이어졌다. 戶部는 榷關體制에서 벗어난 粵海關의 添平銀 지출을 인정하지 않고, 건륭 31년분 粵海關 세수를 결손 처리해 버렸다. 戶部는 논쟁의 초점을 저울추 무게 차이에서 세수 결손으로 전환하면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논쟁은 乾隆帝가 호부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粵海關의 예외를 승인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며 마무리되었다.
1764년 각관 세수의 운송 방식의 재편으로 촉발된 양측의 갈등은 월해관의 특수성이 부정되고, 각 관체제로 구심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각관체제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호부의 의도는 정액주의에 기초한 재정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월해관이 대외 무역을 관리하는 해관으로서 독자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reorganization of the Queguan(榷關) revenue transport system in 1764 and the two conflicts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戶部) and Yuehaiguan(粵海關) that have been caused by it. The focus of the debate lied on whether the specificity of Yuehaiguan from Queguan system(榷關體制) would be recognized. First of all, in response to the maritime customs(海關) that has been established after the disintegration of the Canton system, the name before the Opium war is to be replaced as Queguan without applying the newly appeared Changguan(常關), meaning 'general customs' or 'ordinary customs' which refers to native trade customs, to all of Qing dynasty customs. This will avoid the misunderstandings that the name Changguan may cause and allow a continuous understanding of the Qing dynasty customs. Moreover,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applied the Quota system, one of the main principles of financial management in the Ming and Qing periods, to the customs and defined the operating system that manages Queguan unitarily across the country as a Queguan system.
Yuehaiguan as the only Western trade port of the Qing dynast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Canton system was considered very heterogeneous. Yuehaiguan entrusted all duties related to customs administration to Hong merchants, and additional steps outside of the regulations of the Queguan system arose due to it. The resulting costs had to be obtained through an unofficial channel. There existed the problem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weights in Yuehaiguan's proxy tax collection structure. It was the difference between the weight-based weight(Simaping, 司碼平) for collecting customs by a tax collector and a weight-based weight(Kuping, 庫平) for settling customs revenue by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Yuehaiguan needed an additional weight adjustment process in the accounting process and Yuehaiguan settled the additional costs(添平銀) resulting from it in the item(水脚銀) set as the customs revenue transport cost.
In 1764,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decided to unify the calculation method of Queguan revenue transport cost and return the extra costs(節省水脚銀) excluding the actual transport cost. The purpose of this was to increase power over the transportation costs, which were previously used for unclear purposes in Queguan, and to maintain the unity of a Queguan system. Therefore, the first conflict regarding the disburse problem of the additional costs in the transportation costs between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and Yuehaiguan occurred accordingly.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was for the position that expenditures not recognized by the Queguan system cannot be approved and Yuehaiguan opposed due to the customs of the additional costs disburse in the transportation costs and the specificity of the foreign trade. The first conflict was concluded when Qianlong Emperor instructed it be dealt provisionally and conventionally while commanding a detailed investigation of Yuehaiguan's system.
However,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did not renounce their stand of not approving the exception, and this led to the second conflict between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and Yuehaiguan in 1768.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did not approve of the Yuehaiguan's expenditure outside of Queguan system and processed the 31st year of Yuehaiguan revenue.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were able to lead the situation in favor of themselves by transferring the focus of the controversy from the weight difference to customs revenue deficit. In addition, the second controversy was resolved when Qianlong Emperor accepted the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s opinion and decided not to approve the exception of Yuehaiguan.
The conflict of both sides triggered by the reorganization of the Queguan revenue transport system in 1764 was denied the specificity of Yuehaiguan as the Western trade port and was concluded that the centripetal force is strengthened as a Queguan system. The intention of the Imperial Household Department to maintain the unity of the Queguan system was to obtain the stability of financial management based on the Quota system, it had no other choice but to act as a negative factor to establish an independent management system as Yuehaiguan, a maritime customs in charge of foreign trade. The reason the Canton system was disintegrated after the Opium war perhaps needs to be found within the disapproval of its specificity and the imposed stiff operating principles of the Quegua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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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희 철학에 있어 사단 부중절 문제에 대한 소고(小考)

저자 : 방현주 ( Bang Hyun Joo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7-244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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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부중절'의 문제는 주희 당시에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이후 조선시대에 기대승奇大升이 이황李滉에게 사단부중절의 문제를 제기한 이후 조선유학자들을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단부중절을 주장했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 사단은 모두 순선純善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을 비판하면서 주희가 사단부중절을 언급했음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본 논문은 조선성리학계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로 등장한 '사단부중절'의 문제를 통해 성선의 근거이자 수양의 당위성을 확보해주는 사단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주희철학 안에서 순선純善으로서의 사단의 지위와 사단부중절의 문제를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의 심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사단은 칠정과 더불어 '정情'이기 때문에 언제나 100% 순선함을 보장할 수 없으며, 사단 역시 경우에 따라 절도에 부합하지 않게 되면[不中節] 불선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사단의 부중절 문제는 사단의 순선함이라는 본질성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이며, 이것은 주희가 사단을 칠정과 더불어 '정情'으로 규정했고 그리고 정情의 특성 상 기질적 요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발생하며, 동시에 현실 속의 우리가 간혹 선한 동기로 행한 행위들이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경험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The issue of 'Anti-equilibrium at Four Moral emotions' was not dealt with much at the time of Zhu-Xi, but later became the subject of controversy in the Joseon Dynasty. This paper is based on the problem of 'Anti-equilibrium at Four Moral Emotions', aims to show that how to understand the status of 'Four Moral Emotions' which is the basis for the goodness of human nature and secures the justification for self-cultivation, and the status of 'Four Moral Emotions' as the goodness and the problem of 'Anti-equilibrium at Four Moral emotions' in Zhu-Xi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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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문화철학의 차원에서 본 주겸지(朱謙之)의 유정(唯情)철학과 문화공간설(文化空間說) - 민족주의적 발전사관(發展史觀)에 착안하여

저자 : 김연재 ( Kim Yon Jae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6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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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겸지의 唯情철학은 문화철학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현재의 생명력으로 작동하는 보편적 공감성에 입각하여 문화를 재창조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창조되면서 진화하는 “진정한 情의 흐름”을 중시한다. 이는 중국의 자아가 자신과 구분된 타자로서의 서구를 올바로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보편적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학과 지리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화공간설의 투사면이 있다. 문화공간설에 따르면, 세계의 문화사에서 특히 예술의 궁극적 문화라야 인류의 보편성을 지닌 大同사회의 이상향을 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근대의 시점에서 남방지역의 과학문화에 기반하면서 미래의 예술문화를 달성하는 文化救國論으로 귀결된다. 여기에는 문화의 다원주의와 문명의 보편주의가 결합된 근대적 발전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식민지의 지역성과 제국주의적 국가관 사이에 적용되는 양단논법을 부정하고 서구 열강의 植民史觀을 넘어서 민족주의적 發展史觀을 지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唯情철학의 문화철학적 성격은 오리엔탈리즘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적인 식민사관을 넘어서 포스트오리엔탈리즘의 특징을 지닌 문화인류학적 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철학적 구상은 근대의 중국을 中華主義의 틀 안에 가두어놓는 한계성을 지닌다.


The essay is to excavate Zhu Qian-zhi's position of Wei-qing philosophy to try to overcome the limitation of modern Chinese geopoltical space in the traditional consciousness of Chinese history. His view of cultural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tream of true Qing” incessantly creating and evolving in human life. So-called culture, as a experience of life, is an appearance of going incessantly changing and orienting toward, but never completing a sustainable process of self-realization. He recognized the other separating from the self to grope for an existential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in a certain value of 'sustainable universal co-existence.' In this philosophical recognition, particularly, his doctrine's cultural space projected a social engineering process of social evolution theory moderately adapting to China. Here is an integral horizon of historical diachronicity and geographical synchronicity in China. It is characteristic of sinocentrism of combining the pluralism of culture and the universalism of civilization. He rejected such a modern dichotomy such as colonial locality and imperial nationalism, and, in prism of civilization, overcome Western powers' view of colonization history to orient toward China's nationalistic view of development history. In conclusion, Zhu Qian-zhi's Wei-qing philosophy searches for the recreation of culture of having universal sympathy of vitality and presentness in the doctrine of national salvation. It is said to conclude that his modern conception oriented toward the sustainable horizon of locality in Area Study, but consequently confine sinocentrism to a limited frame of nation-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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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중국어 '伤心'류 감정형용사군의 의미연결망과 차이 연구 - 말뭉치 기반의 BP접근법

저자 : 이은경 ( Lee Eunkyoung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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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유의어 '伤心', '难受', '难过', '痛苦' 그룹의 의미 차이를 밝히기 위해 BP접근법을 적용해 말뭉치 용례에서 '행동 프로필'을 조사하고 통사 기능과 다양한 의미적 차원의 특징과 차이에 대한 통합된 데이터를 도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데이터에 대한 CA분석과 HAC분석을 통해 범주 내부의 구조를 탐색하고 연결망을 구조를 제안하였다.
통사적 BP데이터에 대한 군집분석 결과 '难过'와 '难受'가 가장 유사하여 가장 먼저 군집화되 고이 군집이 다시 '伤心'과 결합되며, '痛苦'는 이들과 가장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차이는 구체적으로 '痛苦'의 명사적 사용(명사성 주어, 목적어, 전치사의 목적어) 선호와 서술적 사용의 비선호, '难过'와 '难受'의 보어와 술보구조의 술어로서의 사용 선호, 그리고 '伤心'과 '痛苦'의 부사어와 관형어로의 사용 선호가 야기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모든 의미적 차원의 특징에 대한 군집화 분석은 통사적 분포 특성과 유사하게 '难受'와 '难过'를 내부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통사와 의미의 통합 프로필에 대해 '难受'와 '难过'를 하나의 군집으로 제안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연결망에 대한 제안을 토대로 '难受'와 '难过'의 의미 차이, 이 군집과 '伤心'의 차이, 그리고 '伤心'과 '痛苦'의 주요 차이와 원형적 의미를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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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대소설 『개벽연역(開闢衍繹)』 번역필사본에 대한 연구 - 존재 양상과 그 의미를 중심으로

저자 : 김영 ( Kim Young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55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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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명대소설 『開闢衍繹』이 유입된 이후 조선시대에 한글로 번역된 모습에 대한 포괄적 고찰이다. 그간 번역필사본에 대한 선행연구가 있었으나 간략한 소개에 가까웠기에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비교하여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본 논문은 그간의 선행연구와 논의를 보완하여 조선시대에 유입된 중국소설 『開闢衍繹』의 유통 현황과 번역 실태를 확인하고 왕실번역본을 중심으로 번역의 특색을 살피고자 하였다. 더불어서 『開闢衍繹』 번역본 향유의 효용성과 의미를 논하고 완질로 전하는 또 다른 필사본 연세대 소장본과 왕실본의 상관관계를 고찰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도출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開闢衍繹』이 조선에 유입된 시기는 관련 문헌 기록에 근거하면 최소 1700년대 중반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왕실과 사대부가 문인들이 보았던 판본은 숭정연간에 간행된 명간본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글번역과 관련된 기록은 1700년대 말부터 나타나며 '벽연역'과 '벽연의'이란 서명으로 유통되었고 이후 20세기 초반에 '天地開闢'으로 바뀐 활자본의 존재까지 확인될 만큼 상당히 오래도록 탐독되었다. 독자층 역시 왕실을 비롯하여 사대부가, 민간으로까지 다양한 층위를 두루 포괄하였다. 어떤 경유로 왕실본의 일부가 외부로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소장본은 규장각 소장본에 누락된 '권지오'이며 표지의 모습은 다소 다른데 서지형태를 검토한 결과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 소장본이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연세대 소장본은 번역문의 형태가 왕실본과 매우 유사하고 오기 및 오역의 부분마저도 일치하는 점을 보여 동일 계열의 번역본에서 나온 전사본이다. 왕실본과 연세대본 번역본은 명대 숭정연간에 나온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원전에 충실하여 번역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이름을 피휘하여 번역된 부분도 있다.
『開闢衍繹』 번역본은 소설로의 재미와 흥미 외에도 중국 역사를 이해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서로서의 기능도 강화된 독서물이었다. 오락성,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서술, 그리고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물의 활약상을 통해 배우는 교화성까지 중요한 효용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읽었던 독서물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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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청대(淸代) 문헌(文獻)에 나타난 남색(男色) 질병(疾病)과 사회인식 - 문언소설(文言小說)과 의서(醫書)를 중심으로

저자 : 최윤주 ( Choi Yoonju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2-74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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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중기 이후 쾌락적 풍조를 따라 형성된 남색 풍조는 왕조가 바뀌어서도 계속되었다. 청대 지식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남색 풍조에 참여했다. 지식인층의 열렬한 남색 참여 원인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청나라 정부의 관리 숙창 금지령, 道家 養生術의 영향, 지식인층의 현실 도피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보고 있다.
이후 남색은 꾸준히 소설의 제재가 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의 남색 애호는 문언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청대에는 희극업의 성행과 함께 남성 배우[男旦]가 남색 대상으로 부상했으며, 지식인들은 배우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로 보았을 때 당시 중국 사회가 남색을 온전히 포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청 왕조는 법률 사항으로 남성 간의 관계를 간음죄로 보며 명백한 위법 사항이라 보았고, 문언소설도 남색의 폐해를 종종 언급하였다. 특히 '남색에 잘못 빠지면 질병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명청 시기 소설작품 중 청대 문언소설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당시 의서 또한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남색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질병 서사들은 곧 남색을 처벌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었으며, 이 배후에는 주류계층이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의서·소설·권선서 등에 질병 서사를 담론으로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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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韓客詩存』 속 朝·淸 문인 아회 문화와 교류

저자 : 姜必任 ( Kang Pilyim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1-102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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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韓客詩存』에 나타난 朝·淸 문인의 교류를 중심으로, 연행사의 燕京에서의 일반적인 교류 활동과 이에 대한 양국 문인의 인식 양상을 분석하였다. 『韓客詩存』 속 양국의 교류 인물과 교류 장소, 역관과 三使의 독자 활동, 필담을 통한 소통 내용, 詩會 양상 및 雅會圖 창작 등을 아회문화로서 분석했으며, 顧炎武 사당 참배, 孝定太后 畫像 복원 및 『韓客詩錄』 편찬 협조 등 아회 밖에서 이루어진 양국 문인 교류도 분석했다.
『韓客詩存』에는 李尙迪, 吳慶錫 등 金正喜 인맥의 역관과 金永爵, 申錫愚, 朴珪壽 등 북학파 후대문인들의 교류 활동이 주로 실려있다. 양국 문인은 필담을 통해 소통하며, 시가를 지어 창화했고, 雅會圖를 그려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활동 방식이었다. 조선 문인들은 經世致用을 주장했던 청 문인과 교류하며 顧炎武의 사당 제사에 참여하고 시가를 창화하는 등 중화 문화의 중심이었던 宣南 지역에서 정통 문화를 체험하고 교류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韓客詩存』에 贈答詩나 唱和詩 등 시가가 많이 수록된 것도 이 시기 연행사가 청 문인과 문학 교류를 적극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는 19세기 燕行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청 문인과의 문학 교류 내용에 쏠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양국이 처한 국내외 정세가 위급했음에도 청의 정세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은 자제했는데, 이는 자국의 위급한 정세는 알리고 싶지 않거나 또는 문자로 남기는 것은 조심스러워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韓客詩存』 속 朝·淸 문인들은 양국 문인의 교류를 君子之交의 기회로 인식하며 중화문화를 향유하거나 과시하는 기회로 여겼고, 문학을 통해 시대를 고민하거나 위급한 국제 정세에 대한 대안을 찾는 기회로 삼지는 않았다.
『韓客詩存』은 청 문인에 의해 전해지던 자료를 수록한 것이므로, 직간접적으로 청 문인의 인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교류 관련 기록 대부분은 중화 문화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활동이고 그 공간적 범위도 선남 지역에 국한되는 등 한족 중심의 문화가 기록되었다. 그런데 청 문인들은 조선을 東國으로 표현하거나, 東夷나 外藩으로 표현한 경우에도 조선의 문화가 중화 문화와 뿌리가 같다거나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표현된다. 이것은 조선을 '夷'로 보는 순간 '淸'의 정통성과 선남지역에 거주하는 한족 자신들의 성격이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문인들이 尊明 의식이나 中華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이는 華와 夷를 구분은 하되 淸을 인정하는 즉 북학파 이후 反淸的 華夷觀이 극복되고 있었고 또 청 문인들에 의해 그러한 문헌 자료만 선별되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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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국의 도시, 꿈에서 깨어나다: 『양주몽(揚州夢)』의 기녀 서술과 새로운 양주(揚州) 공간의 구축

저자 : 崔琇景 ( Choi Soo-kyung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3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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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揚州를 배경으로 한 筆記를 중심으로 청대 중후기 문인들이 어떻게 과거 기억을 활용하여 性別 상상을 이 도시에 부여했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40-50년대 揚州에서의 체류 기억을 서술한 周伯儀의 靑樓筆記 『揚州夢』을 중점적으로 탐색하였다. 揚州는 청대의 경제 중심지이자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여성을 사고파는 '瘦馬'의 도시로 각인되어 왔다. 『揚州夢』 역시 이러한 역사적 상상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오랜 역사의 여성 감상문헌의 체제와 구성을 모방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전의 여성 감상 문헌이 기녀와 청루 문화에 부여한 기대와 의미를 상당 부분 파괴하였다. 기녀의 아름다움과 행위를 미화하고 낭만화하는 것이 전통적 기녀 서사의 주류였지만 『揚州夢』은 기녀들을 현실 세계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동시에 기녀들은 화자와 주변 문인들의 주변적 자아를 대표하기도 한다. 이는 오래전부터 확립된 문인-기녀간의 비유 관계와 여성 재현의 수사학적 전통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전통 감상문헌이 기녀를 비유하고 중개하던 사물은 '꽃'이나 기루 공간이었지만 『揚州夢』은 揚州의 모든 일상적 사물로 서술범위를 확장한다. 이러한 사물은 향수의 정서를 불러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련된 유행의 감각을 떠올리기 위해 등장한다. 천년을 이어오던 '揚州夢'에서 깨어난 『揚州夢』의 화자는 揚州를 과거의 영화를 꿈꾸는 퇴락한 도시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비극과 희극이 계속되는 도시, 거리와 상점, 식당, 기루에서 여전한 일상이 전개되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지금 현재'의 일상적인 공간으로 揚州를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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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 시기 지식인의 신시 미학관 - 1918년 胡適과 沈尹默의 초기 시를 중심으로

저자 : 송자윤 ( Song Jayun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7-16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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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5·4 시기 『신청년』에서 발표된 신시를 중심으로, 호적과 심윤묵이 추구한 시가 미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청년』의 편집부는 여러 문학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신시 운동을 필두로 삼았으며, 이의 주축에는 호적과 심윤묵이 있었다. 이들은 신시를 처음 선보임에 있어 '비둘기'라는 같은 시제를 선택하였고, 이후 호적은 심윤묵 시에서 나온 표현을 빌려 「까마귀」라는 시까지 내게 된다.
이들은 창작 과정에서 같은 시제에 대한 공동 창작, 즉 창화를 선택했던 것은 새로운 시의 창작 과정에서 여러 탐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시 창작에 있어 낡은 상투어 등의 사용을 피하고자 했던 호적은 심윤묵의 표현을 확대 및 재생산함으로써, 백화문으로 쓴 시의 예술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학교의 교무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관계는 멀어지고, 이후의 두 사람의 신시 창작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만, 이의 전인 1918년 이들은 유사한 미학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회에 대한 시를 쓸 필요가 있다는 점과 참신한 표현 방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관점의 공유 하에, 이들은 신시 운동의 기초를 닦았고, 신시의 창작 및 유통의 공간이 넓어지는 과정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시작점에서 발생한 신시 운동과 주역들의 시, 창작 배경 및 이들의 미학관을 살펴본다는 것은 초기의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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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본 원제국(元帝國) 성종-무종-인종 시기 조정(朝廷) - 몽골의 '한화'를 반박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

저자 : 조원희 ( Cho Wonhee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19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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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네트워크 분석론을 가지고 원제국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카안, 무종 카이샨 카안, 성종 테무르 카안 시기의 중앙 조정 관료들을 검토하였다. 기본적으로 2017년도에 기 발표된 논문의 방법론을 확장하여 연구를 하는 것으로 시도하였는데, 그 결과 아래 세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동업 네트워크 분석을 통한 원 조정의 관료 분석은 유효다는 것이다. 둘째, 성종-무종-인종까지 중앙에서 활약한 관료들을 양적으로 분석 하다 보니, 이른바 몽골 제국의 '한화' 문제 - 특히 인종 시기의 과거제 부활 등으로 대표되는 정책들 - 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무종 시기에 비한족 출신의 관료들이 압도적인 활약을 하는 것은 무종 통치시기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예상이 될 수 있는 것이나, 성종 테무르 카안과 인종 아유르바르와다 카안 시기의 한과 비한 관료의 비율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볼 때, 과연 “인종 시기의 한화”라고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 카안의 시기를 통해서 전반적으로 비한인 관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나, 그 관료들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 (가령 『元史』 列傳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부재한 것 등으로 볼 때 몽골제국의 '한화'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디지털 방법론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서도 제기할 수 있고 또한 후속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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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건륭 29년(1764) 교관(榷關) 세수의 운송 체계 재편과 그 여파 - 월해관(粵海關) 특수성을 둘러싼 갈등을 중심으로

저자 : 주형준 ( Joo Hyungjoon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3-22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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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64년 榷關 세수의 운송 체계의 재편과 이를 계기로 발생한 戶部와 粵海關의 두 차례 충돌을 다루었다. 논쟁의 초점은 榷關體制에서 粵海關의 특수성을 인정할지에 있었다. 우선 광동체제 해체 이후 설치된 대외 무역 세관인 “海關”에 대응하여 내지 무역 세관을 지칭하는 '일반 세관' 혹은 '보통 세관'에 의미로 새로 출현한 “常關”을 청대 세관 전체에 적용하지 않고, 아편전쟁 이전의 명칭을 “榷關”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常關이라는 명칭이 야기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고, 청대 세관의 연속적인 이해를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戶部가 명·청 시기 재정 운영의 주요 원리 중에 하나인 정액주의를 세관에 적용하여 전국에 榷關을 일원적으로 관리하는 운영 체계를 각 관체제로 정의한다.
광동체제 성립 이후 청조의 유일한 對서양 무역 세관이 된 粵海關은 각관체제에서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粵海關은 관세 행정에 관한 모든 업무를 行商에게 위탁하여 처리했고, 이로 인해 각관체제에서 규정된 것 외에 추가적인 절차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른 비용은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조달해야 하였다. 월해관의 대리 징세 구조에서 저울추의 무게 차이 문제가 존재하였다. 징세 청부업자가 관세를 징수하는 무게 기준 저울추(司碼平)와 호부가 세수를 결산하는 무게 기준 저울추(庫平)의 차이가 그것이었다. 월해관은 회계 처리 과정에서 이를 위한 추가적인 저울추 무게 조정 과정이 필요했고, 월해관은 여기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添平銀)은 세수 운송비로 책정된 항목(水脚銀)에서 처리하였다.
처리하였다.
1764년 榷關 세수의 운송비 산정 방식을 통일하고, 실제 운송비를 제외한 우수리 금액(節省水脚銀)을 반납할 것을 결정한 戶部의 목적은 기존에 榷關에서 불분명한 용도로 전용하던 水脚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각관체제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水脚銀에서 添平銀을 지출하는 문제를 둘러싼 戶部와 粵海關의 첫 번째 충돌이 발생하였다. 戶部는 각관체제에서 인정되지 않는 지출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粵海關은 水脚銀에서 添平銀을 지출해 오던 관행과 대외 무역의 특수성을 이유로 반발하였다. 첫 번째 충돌은 乾隆帝가 잠정적으로 관행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粵海關의 添平銀에 대해 상세히 조사할 것을 지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戶部는 粵海關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1768년 戶部와 粵海關의 두 번째 충돌로 이어졌다. 戶部는 榷關體制에서 벗어난 粵海關의 添平銀 지출을 인정하지 않고, 건륭 31년분 粵海關 세수를 결손 처리해 버렸다. 戶部는 논쟁의 초점을 저울추 무게 차이에서 세수 결손으로 전환하면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논쟁은 乾隆帝가 호부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粵海關의 예외를 승인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며 마무리되었다.
1764년 각관 세수의 운송 방식의 재편으로 촉발된 양측의 갈등은 월해관의 특수성이 부정되고, 각 관체제로 구심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각관체제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호부의 의도는 정액주의에 기초한 재정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월해관이 대외 무역을 관리하는 해관으로서 독자적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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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희 철학에 있어 사단 부중절 문제에 대한 소고(小考)

저자 : 방현주 ( Bang Hyun Joo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7-244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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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부중절'의 문제는 주희 당시에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이후 조선시대에 기대승奇大升이 이황李滉에게 사단부중절의 문제를 제기한 이후 조선유학자들을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단부중절을 주장했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 사단은 모두 순선純善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을 비판하면서 주희가 사단부중절을 언급했음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본 논문은 조선성리학계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로 등장한 '사단부중절'의 문제를 통해 성선의 근거이자 수양의 당위성을 확보해주는 사단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주희철학 안에서 순선純善으로서의 사단의 지위와 사단부중절의 문제를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의 심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사단은 칠정과 더불어 '정情'이기 때문에 언제나 100% 순선함을 보장할 수 없으며, 사단 역시 경우에 따라 절도에 부합하지 않게 되면[不中節] 불선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사단의 부중절 문제는 사단의 순선함이라는 본질성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이며, 이것은 주희가 사단을 칠정과 더불어 '정情'으로 규정했고 그리고 정情의 특성 상 기질적 요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발생하며, 동시에 현실 속의 우리가 간혹 선한 동기로 행한 행위들이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경험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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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문화철학의 차원에서 본 주겸지(朱謙之)의 유정(唯情)철학과 문화공간설(文化空間說) - 민족주의적 발전사관(發展史觀)에 착안하여

저자 : 김연재 ( Kim Yon Jae )

발행기관 : 한국중국학회 간행물 : 중국학보 9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6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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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겸지의 唯情철학은 문화철학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현재의 생명력으로 작동하는 보편적 공감성에 입각하여 문화를 재창조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창조되면서 진화하는 “진정한 情의 흐름”을 중시한다. 이는 중국의 자아가 자신과 구분된 타자로서의 서구를 올바로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보편적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학과 지리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화공간설의 투사면이 있다. 문화공간설에 따르면, 세계의 문화사에서 특히 예술의 궁극적 문화라야 인류의 보편성을 지닌 大同사회의 이상향을 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근대의 시점에서 남방지역의 과학문화에 기반하면서 미래의 예술문화를 달성하는 文化救國論으로 귀결된다. 여기에는 문화의 다원주의와 문명의 보편주의가 결합된 근대적 발전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식민지의 지역성과 제국주의적 국가관 사이에 적용되는 양단논법을 부정하고 서구 열강의 植民史觀을 넘어서 민족주의적 發展史觀을 지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唯情철학의 문화철학적 성격은 오리엔탈리즘으로 대변되는 제국주의적인 식민사관을 넘어서 포스트오리엔탈리즘의 특징을 지닌 문화인류학적 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철학적 구상은 근대의 중국을 中華主義의 틀 안에 가두어놓는 한계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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