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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과 식민지 체제의 균열적 성격-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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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과 식민지 체제의 균열적 성격-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Singanhoe’s Ethnic Equality Movement between pro and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Regime-Focusing on a Campaign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윤효정 ( Yoon Hyojung )
  •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 한국학연구 6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2월
  • : 53-93(41pages)
한국학연구

DOI


목차

1. 머리말
2. 재만동포옹호동맹의 조직과 신간회
3. 화교배척 진정 호소와 재만 조선인 박해의 근본 원인에 대한 문제제기
4. 재만 조선인에 대한 일본국적법 적용 주장과 반식민주의적 효과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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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신간회 운동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신간회의 재만동포옹호운동은 재만동포옹호동맹(이하 옹호동맹)을 매개로 전개되었다. 옹호동맹은 신간회 본부의 적극적 참여로 결성되었고, 신간회 지회는 옹호동맹의 지방 확산에 기여했다. 옹호동맹은 화교배척 반대 입장을 가지고 만주 조선인 학살 소문을 정정하고 재만 조선인 문제가 중국인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했다. 또한 중국인들과 우호적 관계 속에서 만주 조선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이는 재만 조선인의 중국 입적 지지 주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재만 조선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인에게도 일본국적법을 적용해 탈적을 허용하라는 주장이기도 했다. 즉 재만동포옹호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제기된 사회적 의제는 조선 민족에게도 일본 민족과 동등한 법률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민족동권(民族同權)’이었다. 이처럼 신간회 운동은 외형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통치권을 전제한 개량적인 법적 권리 획득 운동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의 신민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민족동권의 논리가 일제의 재만 조선인 문제 해결의 방식과 달랐기 때문이다. 일제는 상조권 관철을 통해 만주 진출을 적극화하고 만주 조선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서 보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일본국적법의 적용과 중국 입적을 통해 재만 조선인의 생활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옹호동맹의 견해와 충돌되었다. 만주 조선인들에게 일본국적법을 적용할 경우 이들은 중국 국민으로서 중국 법률의 보호를 받게 된다. 즉 재만 조선인의 국적이탈권(탈적권) 보장과 중국 입적 지지는 일제의 세력 범위에서 재만 조선인들을 제외시키려는 것이었다. 신간회 지회에서 기획한 강연회·연설회·주민대회와 지회대회는 이와 같은 주장을 조선인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려는 과정으로 이는 일제가 곧 만주 조선인의 보호자라는 허황된 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조선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이들의 삶이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사고될 필요가 없다는 의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신간회 운동의 방향은 내선융화 이데올로기가 조선 민중의 의식에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만동포옹호운동의 사례에서 볼 때 신간회의 민족동권 운동은 조선 민중이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반식민주의적 효과를 꾀하면서 식민지 체제를 균열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This study explored aspects of that Singanhoe cracked the Japanese colonial regime focusing on a campaign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The campaign was developed through the Alliance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hereinafter referred to as the APMK). The APMK was made by the leaders of Singanhoe headquaters, and branches of Singanhoe contributed to the regional spread of the APMK. The campaign corrected rumors that Chinese slaughtered innocent Koreans in Manchuria and clarified that the deportation of Koreans was not caused by plain Chinese in Manchuria with the opposition to Koreans’ attacks on the Chinese in the Korean Peninsula. In addition, the APMK declared to solve sufferings that Koreans were experiencing cementing friendly relations with Chinese and argued Manchurian Koreans’ acquisition of Chinese nationality. This meant that the colonial state should have applied the Japanese Nationality Act to Koreans; therefore, the Singanhoe movement, represented by the campaign for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was an ethnic equality movement to assert the same rights as Japanese and revealed itself as a kind of civil rights movement. However, it is very important that this played a role in disrupting the spread of the ideology of the harmony between Japanese and Koreans made by Japanese colonialists. If Koreans in Manchuria had been subject to the Japanese Nationality Act, they, as Chinese people, would have been protected by Chinese laws. This idea differed from the Japanese solution to protect Manchurian Koreans as Japanese subjects by giving them ownership of the lands. This showed that the APMK sought effectiveness to destabilize the image that the Empire of Japan was Manchurian Koreans’ guardian. Also, this implicated that it was not necessary to consider Koreans’ lives improved in the prosperity of the Empire of Japan. Therefore, the Singanhoe movement, when figuring out in the case of the campaign protecting Manchurian Koreans, had anti-colonialism characteristic to help Koreans breaking away from the colonial ideology and played a part in cracking the colonial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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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469X
  • : 2734-035X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9-2022
  • :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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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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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두에 대한 북한 학자들의 개념과 인식 -홍기문, 김영황, 류렬, 오희복을 중심으로-

저자 : 문현수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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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국어학계에서는 이두의 개념이 학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북한의 조선어학계에서도 관찰되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북한의 대표적인 이두 연구서에서 이두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 그 결과를 남한의 국어학계의 견해와 비교해 보았다.
북한의 이두에 대한 개념은 홍기문(1957)에서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는 이두를 조선어의 문법 구조에 따라 개편된 조선 한문을 독송한 결과를 기사(記寫)하는 데서 기원하고 발전한 서사어로 정의한다. 김영황(1978)은 홍기문(1957)의 이두 개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고유명사 표기를 '이두식 표기'로 지칭하며 이두의 논의 범주로 끌어들였으며, 이두음을 이두식 표기를 이두식으로 읽은 음으로 새롭게 정의하였다. 류렬(1983)에 이르러서는 고유명사 표기에 쓰인 글자들도 이두자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두자를 이두의 필수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두자는 중국의 한자와 다른 우리만의 형태, 소리, 뜻을 갖는 우리의 글자로서, 여기에는 한국 고유 한자처럼 새로 만들어낸 글자가 포함되는 것은 물론, 외형상 한자와 동일하더라도 그 소리와 뜻이 한자 본래의 소리와 뜻과 달라지면 그 글자를 모두 이두자로 보게 되었다. 이두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오희복(1999)에서도 관찰된다.
이에 반해 남한의 국어학계에서는 이두자를 이와 같이 정의하지 않는다. 박성종(2016)처럼 이두자를 이두토 표기에 쓰인 글자로 한정하거나 북한의 조선어학계에서는 이두자로 보는 새로 만든 글자를 한국 고유한자로서 따로 다루고 있다. 더욱이 이숭녕(1955) 이후로 어휘 표기법을 문장 표기법과 구별하는 경향이 강하였기에 고유명사 표기에 쓰이는 글자를 이두자로 보지 않는다.
또한 구결에 대한 개념과 인식도 남과 북의 학계는 차이를 보인다. 남한의 국어학계에서는 석독구결의 존재로 인해 구결을 우리말 문장 표기법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의 조선어학계에서는 음독구결만을 구결로 보아 구결을 우리말 문장 표기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자를 차용하여 우리말 문장을 표기하는 표기법을 지칭하는 이두의 하위 유형에 구결을 넣지 않는다.


韓国の国語学界では、吏読の概念は学者により大きな違いを見せる。このような現象は北朝鮮の朝鮮語学界にも同じであろうか。本稿では、北朝鮮の代表的な吏読の研究書においての吏読の概念を検討し、その結果を韓国の国語学界の見解と比べてみた。
北朝鮮において吏読に対する概念は、洪起文(1957)で基本的な土台が設けられた。彼は漢文を朝鮮語の文法構造により改編した朝鮮漢文という概念を提唱し、それを読送した結果を記すことにより誕生した書写語が吏読であると主張する。金荣晃(1978)は、洪起文(1957)の吏読に対する概念を発展的に継承した。彼は固有名詞表記を吏読式表記と呼び、それを吏読の範疇に引き入れた。そして、吏読音を、吏読式表記を吏読式に読んだ音と改めて定義した。柳烈(1983)に至っては、固有名詞表記に使われた文字も吏読字として認識し、それを吏読の必須要素とした。それで、吏読字は中国の漢字とは違う朝鮮だけの形態、音、意味を持つ朝鮮の文字になり、ここには韓国固有漢字のように新しく作り出した文字が含まれる。そして、外形上漢字と同じでもその音や意味が漢字本来の音や意味とは違うと、その文字をすべて吏読字と見做すようになった。吏読字に対するこのような認識は、オㆍヒボク(1999)でも観察される。
これに対し、韓国の国語学界では、吏読字をこのように定義しない。たとえば、朴盛鐘(2016)は吏読字を吏読吐の表記に使われた文字に限定する。そして北朝鮮の朝鮮語学界では吏読字と見做す新しく作られた文字を韓国固有漢字と定義して別に扱っている。さらに、李崇寧(1955)以降、語彙表記法と文章表記法とを区別しているため、固有名詞表記に使われる文字を吏読字と認めない。
また、口訣に対する概念や認識も南北の学界では違いを見せる。韓国の国語学界では、釈読口訣のの存在により口訣を韓国語の文章表記法の-種と認識している。-方、北朝鮮の朝鮮語学界では、音読口訣だけを口訣と見做し、口訣を朝鮮語の文章表記法としては認めない。したがって、口訣は、漢字を借用して朝鮮語の文章を表記する表記法を意味する吏読の下位類型には含まれて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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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헝가리 투란주의자의 한국 인식 -버라토시의 『새벽의 나라 한국』(1929)을 중심으로-

저자 : 이영미 ( Lee Yeong-mi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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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토시(Baráthosi Balogh Benedek, 1870~1945)는 20세기 전반 부다페스트에서 사와 민족지학자, 저술가로 활동한 헝가리인이다. 헝가리에서 그는 19세기 후반에 발아하여 20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투란주의(Turanism)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가리인, 머저르족(Magyars)의 친족을 찾기 위하여 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매달렸고, 한국과 관련해서는 1907년과 1921년 두 번의 방문을 바탕으로 『새벽의 나라 한국(Korea, a ajnalpir országa)』(1929)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헝가리인이 한국을 단독으로 다룬 최초의 저술이지만, 인쇄소에서 극소량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물론 헝가리에서조차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본 논문은 버라토시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의 책 『새벽의 나라 한국』을 분석하였다. 첫 번째 장에서는 그가 투란주의자가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헝가리 민족의 동방기원설부터 헝가리 투란주의의 형성까지를 서술하여 다소 장황하지만, 투란주의가 그의 한국 인식에 명백히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두 번째 장에서는 투란주의자이자 민족지학자로서 그의 동아시아 여행과 관련 활동을 다루었는데, 1차 자료가 모두 헝가리어이고 입수 자체가 쉽지 않아 해외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였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에서는 『새벽의 나라 한국』을 텍스트로 삼아 1907년 그의 첫 번째 한국 여행을 소개하고, 그가 동시대 다른 서양인들과 달리 한국을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한 원인을 분석하였다. 텍스트 분석에 사용된 책은 헝가리어 원본이 아닌 초머의 번역본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지만, 본 논문에서 이 책을 지칭할 때는 원제를 따라 『새벽의 나라 한국』이라고 쓰겠다. 필자는 본 논문이 가진 방법론적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동안 우리 가까이에 있었으나 학문적으로는 거의 검토되지 않은 자료를 소개하는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Baráthosi Balogh Benedek (1870~1945) was a Hungarian teacher, ethnographer, and writer in Budapest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He was known as a supporter of Turanism, which arose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prevailed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He was mainly interested in the east of the Eurasian continent in order to find the relatives of the Hungarian people. Regarding Korea, he wrote a book titled “Korea, a hajnalpir országa (Korea, the Country of Dawn),” based on two visits in 1907 and 1921. Although it was the first book in Hungary to deal exclusively with Korea, it was not widely known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Hungary, as only a very small number of copies were published in the printing house.
This paper introduces the life of Baráthosi and analyzes his above-mentioned book. The first chapter explains the background that led him to become a Turanist. It describes from the theory of the Eastern origin of the Hungarian nation to the formation of Hungarian Turanism. The second chapter deals with his travels to East Asia and related activities as a Turanist and ethnographer, depending on the research results of overseas scholars. The most important final chapter introduces his first trip to Korea in 1907, using his book as a text, and reveals that he viewed Korea very positively, unlikely other Westerners of his time. While admitting the methodological limitations of this paper, the author introduces materials that have been close to us but rarely reviewed and urges further research.
In Korea, a hajnalpir országa, Baráthosi refuted the negative remarks that have been repeated in many Western writings. He introduced Korea as positively as possible, taking Hungary as the object of comparison and Japan as the object of of contrast. His perception of Korea is unique in that he viewed Korea only from a positive point of view, emphasized the homogeneity between Hungary and Korea, and perceived Japan in a negative way.
It seems that three factors may have influenced his perception of Korea. The first is the basic kindness that he could show to Korea as a Turanist. The second is his antipathy to Japanese colonial rule in Korea. The third is his sympathy for colonial Korea. However, it is highly unlikely that he thought the situation in Hungary and Korea was the s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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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ㆍ중 여성작가 작품에 드러난 양처현모론 인식의 자기모순적 양상과 그 의미

저자 : 서록지 ( Xu Luzhi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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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20년대 한국과 중국의 대표 여성작가들을 대상으로 근대 여성작가 소설에 드러난 양처현모론(賢母良妻論) 인식의 자기모순적 양상과 그 의미를 비교ㆍ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양처현모론과 신현모양처론은 당대 양국의 주류 여성 교육정책으로써 여성 담론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여성을 모범적인 신식 가정의 경영자로 간주함으로써 남편을 성공시키는 내조자의 역할 뿐 아니라 자녀의 양육자와 교육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1920년대 한국과 중국의 여성작가들은 사회의 분위기나 자신의 경험에 따라 양처현모론에 상이한 태도를 취하였다.
긍정론의 경우 양처현모 사상의 영향을 받은 나혜석과 빙신(冰心)이 그것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혜석은 양처현모사상과 개인적 성취 및 주체성과의 충돌을 발견하면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반면 빙신은 여성의 개인 가치가 가정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비판론의 경우 김일엽과 링수화(淩叔華), 루인(廬隱) 등이 양처현모 정책이 여성의 개인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면서, 자기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 사상을 비판하였다. 김일엽은 그의 작품에서 양처현모론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꿈이라는 무의식 세계에서 마음 깊이 잠재된 모성애를 드러냈다. 링수화와 루인은 독신주의를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선책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모성을 언급하는 경우, 두 작가는 방황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양처현모론을 긍정하거나 비판하는 입장들은 신여성이라는 개념이 아직 낯선 시대에 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여성작가들의 다양한 모색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긍정론과 비판론을 각각 일정한 가치를 지닌 신여성 담론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was to compare and review the self-contradictory aspects and meanings of the recognition of the concept of a good wife and loving mother that revealed in the works of Korean and Chinese female writers in the 1920s. The Korean and Chinese Female writers took different attitudes toward the concept of good wife and loving mother according to the conditions of society or their own experiences. Positions affirming or criticizing the concept show the various seeking processes of female writers to realize female subjectivity in an era where the concept of new women is still unfamiliar. The affirmative position secured an opportunity to speak for new women even if it showed a gap between female subjectivity and the criticizing position was able to design a life worthwhile and personal life while experiencing internal conflicts with maternal instin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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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송화강ㆍ황량한 만지(蠻地) ㆍ개척된 낙토(樂土) -사진엽서 '송화강'과 만주국의 문화정치학-

저자 : 최현식 ( Choi Hyun-si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68 (6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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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송화강'을 다룬 사진엽서의 탄생과 전개, 그것이 수행한 문화정치학의 본질과 성격을 탐구한다. 송화강은 동북 만주를 유유히 흘러가며 만주의 곡물 생산과 목재산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공업일본, 농업만주'라는 기치 아래 만주의 개척과 식민화에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송화강 일대의 도시, 예컨대 길림과 하얼빈은 만주를 대표하는 자연미와 이국정취, 신문명과 유흥문화의 집산지로 떠올랐다. 일제는 하얼빈과 길림을 '국책여행'의 핵심 공간으로 간주하여, 그곳에 대한 관광(여행)을 낯선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국 정취의 즐김에만 빠지지 않도록 했다. 오히려 제국 일본의 우월함과 세계 팽창을 자신하는 내면의 심상지리를 확산, 심화할 수 있는 식민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송화강천리』는 그 과정에서 발행된 사진엽서로, 여행 관련 엽서도 있지만, 역시 그것의 중심은 왕도낙토, 오족협화, 복지만리에 대한 프로파간다에 있었다. 본고는 그것을 식민주의와 군사주의의 산물로 보고, 『송화강천리』 엽서세트가 제국 일본의 신민을 포함한 만주국의 남성과 여성, 아동을 '총력전'의 도구로 징발하기 위해 제작, 유통되었음을 밝혔다. 그 과정에서 모든 가치를 일왕의 영원성과 그를 위한 헌신과 죽음에 두는 '전사자 숭배'가 공공연히 행해졌음도 밝혀냈다. 그런 점에서 『송화강천리』를 비롯한 '송화강' 엽서들은 비록 관광의 즐거움을 다뤘을지라도 결국은 죽음의 도구화를 통해 근대천황제를 절대화하는 도구적 매체, 바꿔 말해 '파시즘의 예술화'의 산물로 파악했다.


This study explores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photo postcards dealing with 'the Songhua River' and also the essence and characteristics of cultural politics that it has performed. Flowing serenely along northeast Manchuria, the Songhua River influenced grain production and wood industry in Manchuria significantly. Under the flag of 'engineering in Japan, farming in Manchuria', the Japanese Empire strived to exploit and colonize Manchuria. In that process, cities around the Songhua River such as Kirin and Harbin rose as a hub for natural beauty, exoticism, new civilization, and culture of pleasure representing Manchuria. Regarding Harbin and Kirin as key space for 'state-run travel', the Japanese Empire tried to make tourism (traveling) in the places something more than having curiosity over new space or enjoying exoticism merely. Instead, they defined it as the space of colonization that could realize the extension and deepening of imaginary geography in the mind of the Japanese Empire being sure of its superiority and expansion over the world. 『The 1,000 Miles of the Songhua River』 is a collection of photo postcards issued in that process. There are tourism-related postcards, too, but the center of it is, of course, the propaganda associated with Wangdonakto, Ojokhyeophwa, or Bokjimanri. Considering it as the product of colonialism and militarism, this study has found the fact that the postcard collection of 『The 1,000 Miles of the Songhua River』 was produced and distributed by the Japanese Empire to appropriate not just its subjects but men and women and even children in Manchuria as a means of 'all-out war'. In the process, this author has also revealed the fact that 'worshiping those who died in battle' which puts all the value on the perpetuity of the emperor and devotion to him and death for him was done publicly. In this sense, although postcards about 'the Songhua River' including 『The 1,000 Miles of the Songhua River』 dealt with the pleasure of tourism, this researcher has understood that ultimately, they were instrumental media to make the modern emperor system of Japan absolute through the instrumentalization of death, that is to say the products of 'turning fascism int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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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해방공간에서의 문학과 정치 -「도정」과 「새벽」을 중심으로-

저자 : 진연 , 이해영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200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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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비슷한 주인공과 주제를 다룬 지하련의 「도정」(1946.07)과 전홍준의 「새벽」(1948.04)을 중심으로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이념과 문학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두 편의 소설은 모두 그 나름의 문학성을 인정받아 해방공간에서 문단의 최고 위상을 자랑하던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문학』에 게재되었지만 발표 당시 사뭇 다른 운명에 처하고 있었다. 지하련의 「도정」은 발표 당시에 좌익문단으로부터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았으나 전홍준의 「새벽」은 당시의 좌익문단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그나마 극소수의 평론도 주로 비판 일색이었다.
정치 논리가 우위인 해방공간에서 문학작품들의 운명 역시 정치와 직결되어 있었다. 소설을 게재한 『문학』을 비롯하여 작품「새벽」에 관한 비평을 게재한 잡지들은 모두 좌익문단의 강력한 영향과 자장 속에 있었으며 당시 좌익문단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남로당의 정치이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도정」은 당시 남로당의 정치이념에 상당히 부합되는 작품이다. 반면 「새벽」은 남조선노동당의 정치적 이념과 투쟁목표를 적시적으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표 당시 좌익문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한 것이다. 이처럼 「도정」과 「새벽」은 정치의 시대 즉 해방공간이라는 이념 우위의 시대에 문학작품의 운명이 정치에 의해 좌우된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本文旨在以池河连的《道程》与全洪俊的《拂晓》为中心、探究韩国解放期政治与文学的关联性。这两部作品都刊登在左翼领导的朝鲜文学家同盟机关杂志《文学》上、在主人公设置和主题方面存在相似性、但《道程》在当时广受好评、而《拂晓》在当时不仅没有受到太多关注、仅有的-些文学评论也以负面为主。
政治的时代中、作品和作家的命运往往也被政治支配。结合当时南朝鲜劳动党的相关资料、《道程》的成功可以说是必然、因为其情节设定高度符合南劳党的政治主张; 而全洪俊的《拂晓》与当时南劳党的政治理念不够贴合、所以在当时主要受到左翼文坛的批判。
政治的时代中、是否符合要求、决定了作品和作家命运的成败。从这种角度出发、《道程》和《拂晓》可被视为韩国解放空间这-特殊时期被政治左右命运的实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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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대항미디어 운동 연구(1) -선언을 통한 창립에서 『실천문학』의 창간에 이르는 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이종호 ( Yi Jong H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1-23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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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는 1974년 11월 18일 광화문 거리에서 선언을 통해 창립된 후 1984년 재창립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미디어 활동을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다른 지식인집단과 연대하며 그 지향을 대중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이에 본 논문은 자실의 미디어 활동을 선언문의 연쇄, 공연 및 인쇄 미디어의 절합, 『실천문학』의 창간 등으로 구분하여 각각을 검토하고 그 의의를 고찰해 보았다.
이 시기 자실은 표현의 자유와 반유신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계속해서 발표함으로써 조직을 정비하고 회원을 증원하면서 내부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를 통해 자실은 교수ㆍ언론인ㆍ학생 등의 지식인집단과 접속하여 강한 연대감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ㆍ민중과의 연결고리 또한 마련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자실은 '민족문학의 밤'이라는 공연미디어와 『광장에 서서』라는 인쇄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획과 문학적 실천을 대중적으로 확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실은 민족ㆍ민중 등으로 수렴되는 문학론을 정비하면서 주요 필진들을 결집하여 향후 실천문학론으로 나아가는 기반을 다졌다. 나아가 다층적 미디어 활동으로 축적된 역량은 무크지 『실천문학』의 창간을 견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실의 미디어 활동은 문인들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유신체제로 인해 존재 기반을 상실했던 문인ㆍ대학교수ㆍ대학생ㆍ언론인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협력하고 연대하며 구축한 '저항전선'이자 새로운 주체성 생성을 지향한 '대항미디어 운동'으로서의 성격과 위상을 지닌다.


The Council of Writers for Freedom and Practice(referred to as Jasil hereinafter), from its founding by the issue of the manifesto on the Gwanghwamun street on Nov., 18, 1974 to the reestablishment in 1984, has strengthened its internal solidarity and banded together with other intellectuals through multi-layered media activities, sharing its orientation with the public readers. Hence, this paper examined media activities by Jasil and pondered upon their significance, dividing them into a series of the manifestos, articulation of performance and printing media, and the foundation of Practice Literature.
In those days, Jasil aligned its organization and established the internal identity with the increased members by constantly issuing the manifestos for freedom of speech and anti-Yushin. Therefore, Jasil not only accessed the intellectual groups such as professorsㆍjournalistsㆍstudents and formed the strong solidarity with them but prepared the link with the people. laborers. In addition, Jasil pursued extending its political planning and literary practice to the public through the performance media of 'The Night of National Literature' and printing media of Standing in the Square. In such a process, while reorganizing the literary theories converged to the nation and the people and rallying main writers, Jasil laid the foundations going toward the theory of practice literature. Furthermore, the capabilities accumulated by these multi-layered media activities led to the first issue of the mook Practice Literature.
These media activities by Jasil has the characteristic and status both as the 'Resistant Front' which was constructed by various intellectuals such as writer sㆍprofessorsㆍuniversity studentsㆍjournalists who lost their basis for existence under the Yushin regime with cooperation and solidarity, though it was mainly led by writers, and as the 'Counter-Media Movement' which pursued the creation of the new subjec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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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후카사와 카이(深沢夏衣)의 글쓰기 의미 -소설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서-

저자 : 박성주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6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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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재일조선인여성작가 후카사와 카이(深沢夏衣, 1943~2014)에 주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소설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계간 잔소리』에서의 활동과 그녀의 데뷔작 『밤의 아이『에 초점을 맞춰 그녀의 글쓰기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후카사와 카이가 『계간 잔소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으나, 2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민족규범'에서 벗어나 일본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시작된 시기였다. 그녀는 편집위원으로서 다양한 글쓰기 활동을 시도하였으나, 주변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쓰고자 한 글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계간 잔소리』가 폐간된 이후 그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마음껏 펼치고자 소설을 쓰게 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쓰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고자 한 그녀의 시도였다. 즉 그녀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마음껏 펼치고자 한 자유로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녀의 글쓰기 의미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本稿は、これまで等閑視かつ不可視化されてきた在日朝鮮人女性作家の深沢夏衣(1943~2014)に注目したものである。深沢夏衣は、日本国籍をもつ在日朝鮮人2世の女性作家である。彼女は寡作ながら平明ㆍ的確な文体で、市井に生きる在日朝鮮人の家族ㆍ女性を描いてきた。彼女は編集者としての一面ももち、様々な在日朝鮮人の雑誌を発信した。しかし、深沢夏衣に対する在日朝鮮人社会の評価は、「『帰化』した在日朝鮮人女性」であり、彼女はその言葉に敏感であった。
深沢夏衣が周囲からの視線に最も揺れているのは、デビュ-作『夜の子供』(講談社、1992)である。こうした揺らぎは在日朝鮮人のアイデンティティの葛藤とも見られるが、深沢夏衣の「書き手」としての観点と、それを見定めようとする周囲の存在を踏まえてみると、自らの作家イメ-ジとの交渉過程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そこで、本稿では、深沢夏衣の小説『夜の子供』を中心に、彼女が何と対岐し、いかなる名づけを回避し、その表現の世界を拓いていったかを考察することで、深沢夏衣における「書くこと」の意味について検討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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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천-김포지역 분구묘와 마한

저자 : 김경화 ( Kim Kyoung Hwa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5-29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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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김포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분구묘가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에 일정 규모의 세력을 가진 지배 집단이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분구묘가 특히 집중적으로 발견된 지역은 인천 연희동 유적, 김포 운양동, 양촌 유적 등이다. 출토유물을 토대로 본 중심연대가 대략 3세기 전후반임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삼국지』 한조에 등장하는 마한 諸國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 한조에는 56개의 소국이 등장한다. 문헌사적 연구성과에 따른다면 인천-김포지역에 해당하는 나라는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및 '속로불사국' 등이다. 이들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중국 군현과 경제적 교류를 통해 해상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또한 3세기 낙랑군과 벌인 기리영전투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김포지역의 정치세력은 “해상”을 매개로 하여 경제적,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형성된 마한의 지역연맹체적 특성을 가진다. 특히 연희동지역은 외부 세력이 한반도 내륙에 들어 오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따라서 대외무역에 종사하려는 서해 연안의 세력이라면 이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김포 운양동 유적에는 오수전, 철경동촉, 낙랑계토기편 등 낙랑계유물과 함께 상당수의 철제무기류가 발견된다. 이는 기리영전투 등의 분쟁에 이 지역 세력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인천-김포지역은 군사적 동맹으로 맺어진 지역연맹체로 중국 군현과의 경제적 교섭은 물론 분쟁이 일어났을 때도 함께 행동하였고, 이 때문에 『삼국지』에서 국명을 열거할 때, 나란히 기재되었을 것이다.


Recently, a fairly large number of Bungu-tombs(墳丘墓) were discovered in the Incheon-Gimpo area. This means that a ruling group with a certain size of power has emerged in this region. Areas where Bungu-tombs have been found particularly intensively are the remains of Yeonhui-dong in Incheon and Unyang-dong, Yangchon. in Gimpo. Considering that the central age seen based on the excavated relics is around the first half of the 3rd century,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ey are one of the Mahan countries appearing in the Hanjo(韓條) of 『The Three Kingdoms(三國志)』.
There are 56 small kingdoms in Hanjo(韓條) of 『The Three Kingdoms(三國志)』. According to the historical research results, the countries that fall under the Incheon-Gimpo region are 'Woohyumotakguk(優休牟涿國)', 'Sinbungoguk (臣濆沽國)', 'Soklobulsaguk(速盧不斯國)'. As a member of the Mahan Federation, they would have grown into a maritime power through economic exchanges with Chinese Gunhyeon(郡縣). It is also highly likely that he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Giriyeong with Chinese Gunhyeon in the 3rd century.
The political forces in the Incheon-Gimpo region have the characteristics of a regional federation of Mahan formed by economic and military necessity through “sea” as a medium. In particular, the Yeonhui-dong area is a strategic military base located on the way to the inland of the Korean Peninsula. Therefore, if it is a power on the West Sea coast to engage in foreign trade, it is highly likely that it has formed an economic and military alliance with this region.
On the other hand, a significant number of iron weapons and relics of Nakrang, such as Osujeon(五銖錢), Cheolgyeongdongchok(鐵莖銅鏃), and Nakranggye earthenware(樂浪系土器片), are found at the Unyang-dong ruins in Gimpo. This shows the possibility that the local powers participated in conflicts such as the Battle of Giriyeong. In other words, the Incheon-Gimpo region is a regional alliance formed by a military alliance, and it acted together when conflicts occurred as well as economic negotiations with Chinese Gunhyeon(郡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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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요순 정치의 회복, 다산 정약용의 홍범(洪範)론

저자 : 김호 ( Kim Ho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93-32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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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사망 직전 『상서』에 대한 주석서를 완성하여, 조선후기 정치개혁에 대한 자신의 최종 견해를 제시했다. 고대의 이상 정치로 상징되는 요순통치에 대한 다산의 평가는 한마디로 '현능한 지도자가 부지런히 정무에 힘쓴 결과[有爲]'였다. 다산은 이른바 세속에서 말하는 무위이치(無爲而治)야말로 어리석은 견해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현능한 지도자는 반드시 유능한 관리들을 선발하여 관직을 나누어주고 이들이 부지런히 과업을 수행하는지 철저하게 살폈다[考績]. 다산은 「홍범」이 바로 요순정치의 핵심 교훈이라고 정의하고 새롭게 재해석했다. 특히 「홍범」의 9개 범주에 붙은 숫자에 현혹되지 말고, 황극[최고권력]을 중심으로 한 통치행위 전반으로 이해할 것을 제언했다. 오행은 단지 하늘이 내려준 자연의 '재료'에 불과하고 이를 활용[利用]하여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면[厚生] 그만이었다. 따라서 정치[八政]는 오직 국가의 세입과 지출에 해당하는 경제 및 재정 정책이 가장 중요했다. 한편, 「홍범」에는 왕과 함께 통치에 참여할 현능한 자들의 자질[三德]이 설명되어 있을뿐더러, 왕이 현능한 자들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잡는 수신의 항목들[五事]이 기록되어 있었다. 왕의 지위[皇極]가 절대적인 것은 바로 상벌의 권한을 쥐고 있기 때문인데, 왕은 이 권한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능력있는 신하들에게는 충분한 인센티브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합당한 벌을 내려야만 했다[福極]. 왕이 이상의 통치행위를 지성으로 수행한다면 하늘이 감동하여 왕으로 하여금 선정의 기회를 허락할 것이었다. 다산은 조선의 왕들이 「홍범」의 가르침에 따라 현능한 관료를 등용하여[知人]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安民]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고전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經學]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경제의 개혁안[經世論]이 본인의 억측이 아닌 '고대의 지혜[周禮]'를 밝혔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Dasan presented his final view on political reform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completing a commentary on Classic of History(尙書) just before his death. His evaluation of Yao-Shun politics, which symbolized as ancient ideal politics, was in short, the result of a wise leader's diligent efforts[有爲] in political affairs. He dismissed idea of “governing without action[無爲而治]”, which is said to be a foolish view. A wise leader had to select competent officials to distribute government posts and thoroughly examine[考績] whether they are diligent in carrying out their tasks. Dasan defined “Great Plan(洪範)” as the core lesson of Yao-Shun politics and reinterpreted it anew. In particular, he suggested not to be misled by the numbers attached to the nine categories of Great Plan, but to understand the overall act of governing centered on the supreme power[皇極]. Five Phases[五行] were only a “material” of nature given by heaven, and it was enough to make human life peaceful[厚生] by utilizing[利用] them. Therefore, economic and fiscal policy-which correspond to the revenue and expenditure of the state- were the most important part in the politics[八政]. On the other hand, Great Plan described the qualities[三德] of the wise who would participate in the rule with the king, as well as the items of moral training[五事] that the king should first internalize to recognize the wise. The absoluteness of the king's position[皇極] was based on his power of reward and punishment. He had to faithfully carry out this power so that competent officials would have sufficient incentives while those who aren't be punished reasonably[福極]. It was certain that if the king carried out the above governing act with intelligence, heaven would be moved and allow the king a chance for just rule[善政]. Dasan argued that the kings of Joseon at that time should take the lead in reforming to make the people comfortable[安民] by appointing wise officials[知人] according to the teachings of Great Plan. In short, Dasan emphasized that his reform plan of politics and economics[經世論] was not his mere conjecture, but rediscovery of “ancient wisdom” through a new reinterpretation of classical literature[經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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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미완의 싱크탱크 혹은 이용희의 국토통일원 시절(1976~1979) -1970년대 후반 국토통일원의 연구 사업을 중심으로-

저자 : 장세진 ( Chang Seiji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9-37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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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구의 근대 국제정치학을 한국에 제도적으로 안착시킨 창설자였던 이용희(李用熙, 1917~1997)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제 6대 국토통일원 장관으로서 재임한 시기(1976~1979)를 살펴보았다. 특히, 그가 국토통일원의 수장으로서 주도한 연구 사업의 특징을 그 한계부터 의의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이러한 시도는 구체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던 '관료-이용희'의 실천을 밝힌다는 점에서 그간의 공백을 메우는 전기적 연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가 몸담았던 국토통일원이라는 기관의 위상과 사업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글은 박정희 정권 말기의 통일 정책을 배경으로 한 냉전 제도사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띤다. 두 가지 접근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사실은 분단/통일의 문제를 대학에 소속된 학자로서 연구, 교육하는 일과 현실정치 한 가운데 위치한 정책 입안자가 접근하는 방식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자-이용희'와 '국토통일원 장관-이용희' 사이에 놓인 예기된 거리 내지 간극을 단지 확인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글은 자신의 비판적 '앎'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기입하거나 실정화된 제도 속에서 실천하려 할 때 발생하는 불편한 균열과 긴장의 순간들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이용희의 재임 시절 각종 제도 개선과 연구를 통해 새롭게 획득된 현실의 변화와 생산적 순간 또한 놓치지 않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period 1976~1979 when Lee Yong-hee (1917~1997), the founder of modern Western international politics in Korea, was politically active and served as the sixth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This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search project he led during this time, including its limitations and significance. This biographical examination reveals his official practices. This article also examines the status and research conducted by the Institute in the context of the Cold War and unification policy at the end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The common fact that penetrates the two approaches is that there is a considerable gap between researching and educating the issue of division/unification as a university scholar and the approach of policymakers in the middle of real politic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not just to show the expected differences between Lee Yong-hee as an international politician and as President of the Institute.
This article examines the uncomfortable cracks and moments of tension that occur when trying to apply what one knows in practice. It reconstructs both real changes and the productive moments that occurred as the result of institutional improvements and research conducted during Lee Yong-hee's tenure as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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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 정당정치기 사이토총독의 '문화정치'와 신간회

저자 : 전상숙 ( Jeon Sang Sook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5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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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는 일제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최대의 민족협동전선체였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되어 1931년 5월 16일 해소를 결정할 때까지 '합법적 민족운동 단체'로 존재했다. 이 글은 기존 연구 성과를 통해서 이루어진 이러한 신간회의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서의 존립이 가능했던 시기'에 주목했다. 일제하에서 신간회가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 결성될 수 있었던 '정치참여의 공간'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고, 이것이 일제의 조선지배정책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재고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신간회 연구와 1920년대 일본의 정당정치기 조선통치에 관한 연구의 관점을 확장해 볼 필요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다각적으로 이루어진 기존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신간회가 존속했던 '문화정치기'와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가 존재한 '정치참여 공간'의 형성에 주목한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식민통치 방침을 변화시킨 하라수상을 필두로 한 일본의 정당정치와 조선통치, 그리고 이와 직결되어 '문화정치'를 실시한 사이토총독과 그의 조선통치방침을 제고하여, 신간회가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 결성돼 존재했던 '정치참여 공간'의 형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갖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지배정책으로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하 식민지 조선인의 삶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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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간회의 '민족동권(民族同權)' 운동과 식민지 체제의 균열적 성격-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저자 : 윤효정 ( Yoon Hyoju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9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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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중심으로 신간회 운동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신간회의 재만동포옹호운동은 재만동포옹호동맹(이하 옹호동맹)을 매개로 전개되었다. 옹호동맹은 신간회 본부의 적극적 참여로 결성되었고, 신간회 지회는 옹호동맹의 지방 확산에 기여했다. 옹호동맹은 화교배척 반대 입장을 가지고 만주 조선인 학살 소문을 정정하고 재만 조선인 문제가 중국인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했다. 또한 중국인들과 우호적 관계 속에서 만주 조선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이는 재만 조선인의 중국 입적 지지 주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재만 조선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인에게도 일본국적법을 적용해 탈적을 허용하라는 주장이기도 했다. 즉 재만동포옹호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제기된 사회적 의제는 조선 민족에게도 일본 민족과 동등한 법률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민족동권(民族同權)'이었다. 이처럼 신간회 운동은 외형적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통치권을 전제한 개량적인 법적 권리 획득 운동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의 신민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민족동권의 논리가 일제의 재만 조선인 문제 해결의 방식과 달랐기 때문이다. 일제는 상조권 관철을 통해 만주 진출을 적극화하고 만주 조선인들을 일본의 신민으로서 보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일본국적법의 적용과 중국 입적을 통해 재만 조선인의 생활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옹호동맹의 견해와 충돌되었다. 만주 조선인들에게 일본국적법을 적용할 경우 이들은 중국 국민으로서 중국 법률의 보호를 받게 된다. 즉 재만 조선인의 국적이탈권(탈적권) 보장과 중국 입적 지지는 일제의 세력 범위에서 재만 조선인들을 제외시키려는 것이었다. 신간회 지회에서 기획한 강연회·연설회·주민대회와 지회대회는 이와 같은 주장을 조선인 사회의 공론으로 만들려는 과정으로 이는 일제가 곧 만주 조선인의 보호자라는 허황된 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조선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이들의 삶이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사고될 필요가 없다는 의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신간회 운동의 방향은 내선융화 이데올로기가 조선 민중의 의식에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만동포옹호운동의 사례에서 볼 때 신간회의 민족동권 운동은 조선 민중이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흡수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반식민주의적 효과를 꾀하면서 식민지 체제를 균열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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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30년 전후 합법적 정치 운동의 퇴조와 신간회를 둘러싼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저자 : 윤덕영 ( Yoon Duk-you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48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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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목적은 1930년 전후, 최린의 천도교 신파와 연결된 타협적 자치운동이 기독교계의 수양동우회와 기독신우회, 동아일보 등의 민족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신간회의 지도부도 포함하여 민족운동 세력내부에 광범하게 전개되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에 대신하여 1930년 전후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정세 변화를 일본 제2차 중의원 보통선거와 식민지 조선의 제2차 지방제도 개정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천도교와 기독교계열, 동아일보 계열 등 민족주의세력의 실제 동향과 활동 양상, 신간회 김병로 중앙집행부의 조직 실상과 성격에 대해 해명하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 동아시아는 제국의 시대였다. 1920년대 정당정치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일본 특권세력들과 군부세력, 정당정치 핵심세력들은 식민지에 중의원 참정권을 부여하거나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30년 일제의 식민지 지방제도 제2차 개정은 이런 제국과 식민지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만들어지는 극히 제한되고, 권한도 별로 없는 지방정치 공간은 지방정치 참여의 의미를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1930년 2월 중의원 제2차 보통선거의 결과는 무산정당운동의 분열상만을 드러냈고, 일본사회의 민주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식민지 조선에서 합법적 정치운동의 공간을 대단히 축소시켰고, 그 전망을 어둡게 하였다. 당시 민족운동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1920년대 합법적 정치운동을 주도했던 동아일보계열은 일본 정계 변화 및 중국 국민혁명의 전개에 주목하면서 그 정세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운동 노선과 방향을 수정하여 갔다. 그들은 중의원 제2차 보통선거의 결과와 식민지 지방제도 2차 개정을 통해 조선에서 자치의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판단했고, 합법적 정치 운동에서 사실상 후퇴했다. 반면에 천도교 신파는 정세와 무관하게 자치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가졌던 천도교세력들은 민족협동전선운동에 비판적이었고, 독자 활동에 주력했다. 기독신우회의 주요 인물들은 신간회에서 활동을 하였고, 천도교 신파와 연결되어 자치운동을 추진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세력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은 사회참여에 반대하는 기독교 보수 세력과의 갈등 속에 침체상태에 있었다.
신간회 허헌 중앙집행부나 민중대회사건이후 구성된 김병로 중앙집행부나 그 인적 구성과 조직 성격에 큰 차이가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었지만,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적극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좌익사민주의자라 불리는 인물들도 있었고, 당재건운동과 혁명적 농노조운동을 전개하던 인물들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합법적 정치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신간회의 활동내용에서도 이전과 달라진바가 크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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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근우회와 신간회의 연대성 검토

저자 : 김정인 ( Kim Jeong-i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9-17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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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협동전선에 기반한 민족유일당을 지향하며 등장한 신간회와 여성운동의 협동전선으로 출현한 근우회는 사건 혹은 사안별로 양자 간의 연대기구를 만들어 활동하지 않았다. 근우회와 신간회 간의 연대는 '자매단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창립 초기 1년간 집중적으로 상호 지지를 표명하는 선언적 연대가 주를 이뤘다. 그나마 근우회와 신간회에서 동시에 활동한 여성운동가들을 통한 인적 연대는 양자가 해소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실천면에서 볼 때 두 단체의 활동 초기에 발발한 숙명여고보 맹휴사건에서 학부형회라는 공동대응기구에서 함께 행동하는 면모를 보였지만, 활동이 차츰 위축되던 시기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는 여학생 연대를 지도하고 지원하거나 전국적 연대를 촉구하는 민중대회 계획을 준비하는 등 별도로 대응하는 간접적인 연대에 그쳤다. 이처럼 근우회와 신간회 각각은 연대체이면서도 양자 간의 직접적인 연대를 시도하지 않았으며 사회운동 차원에서의 느슨한 연대로 각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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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보산 사건과 아동문학-신의주 반중국인 폭동을 다룬 김우철의 소년소설-

저자 : 원종찬 ( Won Jong Cha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3-22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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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만보산 사건(1931)에서 촉발된 신의주 반중국인 폭동을 다룬 김우철의 소년소설 「왕매란과 순녀」(1937)에 대한 발굴 보고이다. 만보산 사건과 관련된 작품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 왔으나, 아동문학 분야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작품이 하나도 없었기에 이렇다 할 논의가 뒤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찾은 김우철의 소년소설은 중일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 만보산 사건과 반중국인 폭동을 불러와서 그 비극성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 가운데, 만보산 사건 당시 국내 거주 중국인 피해자를 주요 등장인물로 삼은 것은 한국문학을 통틀어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1931년 7월 초순경 전국 각지로 번져나간 반중국인 폭동은 한국인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윤리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차별과 혐오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김우철의 「왕매란과 순녀」는 아동문학을 넘어서는 한국문학의 뜻 깊은 유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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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용정(龍井) 로컬리티'의 형성과정-용정 공간의 형성과정과 사상·종교의 유입을 중심으로-

저자 : 천춘화 ( Qian Chunhua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45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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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만주(滿洲) 조선인사회의 중심은 간도(間島)였고, 간도의 서울은 용정(龍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정의 위상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00년대 들어 식민지말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야 비로소 극히 제한적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본고는 이러한 용정의 지역적 특성을 '용정 로컬리티'의 형성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하였다. 공간적으로 용정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용정촌(龍井村)'과 '명동촌(明東村)'을 중심으로 점차 확장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1900년대부터 시작된 학교건설운동은 용정을 만주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였다. 학교는 민족주의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수용의 주요 통로로도 작용하였다. 특히 명동학교(明東學校)는 북간도 기독교 수용과 전파의 중요한 근거지이기도 했다. 3.1운동 전까지의 용정은 민족의식과 기독교사상이 거의 동시적으로 유입되었던, 민족의 자주독립을 고취했던 교육·투쟁의 공간이자 민족 정체성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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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혼성어 개념에 대한 재검토

저자 : 양정정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9-28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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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어는 두 개 이상의 낱말이 합쳐져 혼합된 뜻을 가지게 된 낱말을 말한다. 혼성어의 형성이 현재 매우 왕성하게 진행 중인 단어 형성 과정이라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아 왔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혼성의 형성 과정에 동시에 '절단'과 '결합'이라는 두 가지 형식적 조작을 거쳐 형성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합성' 또는 '파생'이라는 단어 형성 기제와 다른 양상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혼성을 새로운 단어 형성 기제로 인정해 왔다. 하지만 그 동안의 대부분 논의에서는 주로 혼성어가 형성될 때 수반되는 형태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혼성어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새로운 의미의 파생을 부차적인 것으로 처리했다. 혼성을 새로운 단어 형성 기제로 인정하려면 혼성어가 새로운 의미 변화가 이루어진 새로운 단어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지금까지 선행 연구에서 혼성을 새로운 단어 형성 기제로 인정하면서 의미 변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형태적 특성에만 집중하여 혼성어를 정의하면 혼성어가 다른 개념들과 혼동되어 있다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혼성어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는 의미 변화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먹방'과 같은 신어는 '라볶이'처럼 처음 생성될 때부터 새로운 의미로 생성된 것은 아닌 듯하다. 본고에서는 혼성어의 형성 과정 중 일차적인 의미 변화를 중요시하며 약어로 형성된 후 의미 확대가 일어난 경우를 혼성어로 보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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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차별 언어와 대안어의 성격-<서울시 성평등 언어 사전>(2018~2020)의 '성평등 단어'를 대상으로-

저자 : 김소영 ( Kim So-yeong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1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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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민감도가 증가하면서 차별 언어에 대한 대안어를 제시하는 작업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성차별어는 차별 언어 개선에 대한 움직임이 적극적인 분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발표해 온 <서울시 성평등 언어 사전>(2018~2020)역시 그러한 성격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지적된 성차별어는 크게 남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 표현을 사용하는 유형, 남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반영하는 유형, 여성 관련 단어 중 사회적 인식 및 관점을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한편 성차별어의 대안어는 제3의 단어로 기존 성차별어를 대체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며, 성별 제거, 성별 통합, 표현 대칭화 역시 대안어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차별어를 선정함에 있어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어의 의미를 어디까지 이해할 것인지와 비유적 표현의 차별성을 인정할 수 있을지가 관련 쟁점이 될 수 있으며, 대안어의 선정 과정에서는 대안어가 기존 차별 언어의 원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지와 대안어 자체가 의미 분화의 가능성은 없는지 고려해야 한다. 차별 언어에 대한 대안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향후 대안어를 평가하고 새로운 대안어를 만드는 방향성을 논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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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게' 염자도의 주제 연구

저자 : 서성 ( Seo Sung ) , 강희안 ( Kang Hee Ahn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3-34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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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게' 염자도(廉字圖)에 나타난 '게'의 형상 및 화제(畫題)를 둘러싸고 모호하게 해석된 점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그림의 주제 해석에 있어서도 조선 시대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근거를 찾아내 더 적절한 독해를 시도하였다. 먼저 '게'의 해석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화제를 '염계한천, 전퇴후퇴'[廉溪寒泉, 前退後退]로 정하고, “염계선생 주돈이와 한천정사를 세운 주희는, 처음에도 물러났고 나중에도 물러났다.”고 풀이하여 두 사람의 염퇴 정신을 기린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조선 시대 '게'에 관한 문화적 인식을 「곽삭전」과 「무장공자사」 등에서 찾아냈으며, '물러남'을 높이 치고 '나아감'을 비판하는 보편적인 인식도 확인하였다. 또 주돈이와 주희의 행적에 대해서도 소동파와 송 효종이 '염퇴'(廉退)라 평가하였음을 보고, '게' 염자도의 주제가 '염퇴'라고 판단하였다. '염퇴'는 사양하고 양보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이지만, 사회적 맥락에서는 벼슬을 물리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염퇴'의 정신은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 나라의 기강과 사회의 기풍과도 관련되기에 더욱 중시되었다. '게'는 걸핏하면 뒷걸음질을 쳐 제 집으로 물러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게' 염자도는 상단의 게로 형상화된 선비가 벼슬을 물리치고 염퇴하여 글자 획으로 얽혀진 은자의 '세 갈래 길'이 있는 정원에서 염결한 정신을 수양하는 것으로 해독할 수 있다. 그 길에서 소나무와 국화를 완상하며 도연명의 염결을 떠올릴 수 있고, 수석을 감상하고 배를 타며 육적의 청렴을 본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게' 염자도는 상하구조를 통합하여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지도록 구성하였고, 문자의 자획들이 자획이면서 동시에 조형 형상이 되도록 설계하여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자체적인 문화적 기호로 '게'의 형상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점과 조선의 염퇴 문화를 간결한 형상과 자획으로 절묘하게 통합한 점은 '게' 염자도가 어느 문자도보다 뛰어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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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유신체제와 검열, 검열체제 재편성의 동력과 민간자율기구의 존재방식

저자 : 이봉범 ( Lee Bong Beom )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연구 6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45-406 (6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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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박정희정권의 의사헤게모니 지배-프로파간다-검열체제의 동력학이란 구조적 역학의 관점에서 1970년대 검열체제의 확대 재편을 재구성하고, 사회통제의 하위양식으로서 검열의 위상과 그 기능을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70년대 박정희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국가안보를 지배이데올로기로 한 국가비상사태-유신헌법-긴급조치의 법제도적 토대 위에서 구사되었는데, 사회·문화정책도 이러한 기조와 방향에 종속되어 입안·배치되었다. 검열 또한 프로파간다 및 문화통제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변화무쌍한 변동을 거친다. 지배/저항의 분극화 현상이 촉진되면서 검열전선의 경직화를 고조시켰다. 1970년대 검열의 심층과 정점에는 합법적 검열자 중앙정보부가 존재한다. 중앙정보부는 대내외 심리전, 프로파간다, 검열을 일사불란하게 기획·통제하는 빅 브라더였다. 총력안보체제의 제도화를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발동된 긴급조치를 계기로 검열의 수위와 진폭이 최대치로 증대하면서 한국검열사의 종합전시장을 이룬다. 첫째, 행정입법의 강화를 통해 전면적·공세적 검열이 극대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언론 규제의 양산, 퇴폐 규제의 본격화,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검열 기조 등이 수반되고 식민지검열의 유제가 재생되기도 했다. 둘째, 통제의 표적이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까지 미친 가운데 표적이 된 검열대상에 대해서는 사회적·문화적 기반을 붕괴시키는 수준으로 진전된다. 행정지도를 동원하여 제도적 검열의 구성적 외부까지 통제했다. 셋째, 긴급조치시기 민간자율기구의 위상이 재정위되면서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통제가 전면화 된다. 법정기구화를 기반으로 대중문화예술을 총력안보의 정략적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프로파간다의 범용성보다는 부정적 통제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윤리적 문제를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발상이었다. 퇴폐, 왜색, 저질 등은 반국가적 요소로 규정되면서 국민총화를 좀먹는 사회 내부의 적이자 명백한 이적행위에 해당한다. 그것은 사상검열의 부재, 미풍양속 저해에 대한 검열이 압도적이었던 심의 실적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긴급조치가 무기한으로 연장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런데 전면적 검열에 따른 사회·문화에 대한 강압적 통제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쇄시킨 최대장애물은 자유민주주의를 염원한 건전한 국민들이었다. 유신체제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절차적 원리를 통해 성립되었다는 불편한 진실, 또한 법치주의로 분식된 교묘한 관료주의체제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탐구하는 작업을 통해서 박정희체제 검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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