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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여성: 엠마 윌러드의 여성관과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

The Role of Female Citizens in the Early Republic: Emma Willard’s Perspectives on Women and the Expansions of Women’s Higher Education

김진아 ( Kim Geena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2년 02월
  • : 309-343(35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85.10


목차

Ⅰ. 서론
Ⅱ.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
Ⅲ. 엠마 윌러드의 여성관과 교육관
Ⅳ. 참정권 부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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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세기 여성 고등교육을 이끌어 갔던 엠마 윌러드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미국에서의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과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고등교육 1세대 여성들은 여성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여성 고등교육 확장을 주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 윌러드를 포함한 이 시대 여성들은 미국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활동으로 기억되는 참정권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해 왔고, 이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이들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여성사 연구 일체가 ‘영웅적 서사’ 혹은 ‘비극적 서사’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통해 여성의 삶을 논의하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교육 활동이란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왔던 가정 안에서의 양육 활동을 가정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교육 활동을 통해 여성의 공적 활동을 확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에 엠마 윌러드의 교육관이나 정치관, 여성관, 그리고 이와 관련한 각종 활동의 한계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초지일관 여성의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공화국의 여성 시민을 성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In this paper, I discussed the expansions of women’s higher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its meanings in women’s history. For this work, I particularly investigated Emma Hart Willard’s educational experiences in leading women’s higher education. The first generation of women, who received higher education in the 19th century, became educational workers and led educational reforms after graduating from Female Seminaries or Academies. Despite such activities, their educational achievements were not well-noted, as they had conservative viewpoints of the suffrage movements, which have been remembered as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activities in American women’s history. However, negative viewpoints toward Emma Hart Willard were grounded in the polarized frameworks of women’s histories: Heroic narrative versus Tragic narrative. In this paper, I argued that educational activities were appropriate ways to prolong traditional domestic works; and these were also good strategies for women to participate in public work. Rather than pointing out the limitations of her perspectives on women, education, and politics, I highlighted the fact that Emma Hart Willard wanted to grow female citizens of the early Republic by focusing on particular areas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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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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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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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 고대사에서 용(龍)에 대한 인식의 변천 -왕 신성(神聖) 권위의 변화와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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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왕의 권위의 변화에 따라 용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간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첫 단계의 왕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王卽天神'의 원초적 신성 이념에 의존하였으니, 이 단계의 용은 그런 '왕즉천신'을 하늘에서 모셔오고 하늘로 모셔가는 신성한 '神乘物'로 인식되었다.
두 번째 단계의 왕은 불교의 전래 및 공인과 함께 '王卽佛'이라는 차별적인 신성 권위를 표방하였고, 일단 용은 '왕즉불'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 왕이 護法과 護國을 망라하는 '불국토의 주인'으로 인식되면서, 용은 왕을 보좌하는 '불국토의 수호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단계의 왕은 '爲民'을 실천하여 '尊王'의 권위를 확보한다는 유교적 규범을 지향하였고, 이에 따라 용은 왕의 신성 권위를 직접적으로 扶助하는 존재가 아니라 佛僧을 매개로 하여 왕의 호법과 호국의 권능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7세기 동아시아 해양 갈등과 교류 및 교역이 폭증하는 현상과 맞물려 나타났으며, 龍도 天龍이나 地龍보다는 海龍의 존재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왕은 용의 현신'이라는 '王卽龍'의 인식이 대두한다. '왕즉용'의 인식은 마한→백제로 이어지면서 성립하여 후백제의 견훤으로 이어졌고 고려의 왕건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면서 '왕즉용'의 인식은 고려시대에 본격 정착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the process of changing the perception of dragon according to the change in the king's authority.
First of all, the first-stage king relied on the original divine ideology of 'king=god of heaven' that came down from heaven, so the dragon of this stage was recognized as a sacred being that brought such 'king=god of heaven' from heaven and brought it to heaven.
The second stage of the king advocated the discriminatory divine authority of 'king=Buddha' along with transmission and official recognition of Buddhism, and once the dragon was recognized as a symbol of 'king=Buddha'. In addition, in the case of Silla, as the king was recognized as 'owner of the Buddha's land' defending Buddhism and kingdom, the dragon was also recognized as the 'guardian god of Buddha's land' who assisted the king.
In the third stage, the king aimed for Confucian norms, the dragon was recognized as indirectly supporting the king's sacred power defending Buddhism and kingdom through the medium of Buddhist monks. This shift in perception appeared in conjunction with the 7th century East Asian maritime conflict and the explosion of exchanges and trade, and the dragon also appears more prominent as the dragon of the sea than the heaven or land.
And when it reaches the fourth stage,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meaning that the king is the appearance of dragon. finally emerged.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was established as it led from Mahan to Baekje, which led to Later Baekje's Gyeon-hwon, and spread to Wang-geon of Goryeo. In addition, as Wang-geon became the last winner, the perception of 'king=dragon' was established in earnest during th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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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세기 전라도 조운선의 침몰과 그 대책

저자 : 한정훈 ( Han Jeong H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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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세곡이 국가재정 수입의 주요한 원천이었던 만큼 전라도 조운선의 안흥량에서의 침몰 사고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였다. 그래서 사고 직후에 '육운 이납', '태안 운하 공사', '사선의 활용' 등 침몰 방지를 위한 여러 대책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육운 이납은 전라도 세곡을 기존의 조창이 아닌 충청도·전라도의 또 다른 지점에 육운하는 방식으로 고려시대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수송방식이었다. 태종과 세종 연간 10년 남짓 동안 일시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사람과 우마(牛馬)의 피해로 인해 조운 정책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육운 이납의 영향으로 16세기 초엽의 중종 때에 영산창이 없어지고 법성창이 전라하도의 유일한 조창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침몰 방지책으로 잘 알려진 태안 운하 공사는 빈번히 실패하였다. 비록 공사가 성공하였더라도 인공 수로에 작은 배를 이용하여 여러 번 옮겨 싣는 방식은 전라도의 대규모 세곡의 수송방식으로는 부적절하였다. 또한 이들 침몰 대책에 비해 일정한 효과를 거둔 사선의 활용은 조운선의 침몰 대책이기보다 '관선 조운'의 폐단을 보완하는 조운 정책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15세기에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실효성의 논란 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운영 기반의 확충, 규정 및 조직의 보완과 같은 조운제 정비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치의 중요성이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운선 침몰 방지 대책이 기대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침몰 사고 직후에 반복하여 논의된 점은 전라도 조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As grain paid as taxes in Jeolla-do served as a key source of revenue for the state treasury, the sinking of tax carriers at the Anheung Headland was a huge loss for the state. Thus, after an accident, various countermeasures including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construction of the Taean Canal', and the 'use of privately owned ships' were discussed in order to counteract these sinkings.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involved the transportation of grain by land to a different location in Chungcheong-do and Jeolla-do rather than to existing tribute granaries. This was temporarily implemented for just more than 10 years during the reigns of Taejong and Sejong but failed to be established as shipping policy due to the harm done to humans as well as oxen and horses. As a result of payment by land transportation, the Yeonsan granary disappeared by the reign of Jungjong in the early 16th century, and the Beopsung granary established itself as the only tribute granary in Jeolla-hado.
Known as the representative countermeasure against sinkings, the construction of the Taean Canal failed every time. Even if construction were to have succeeded, transporting the large amount of grain from Jeolla-do by loading it onto small boats on an artificial waterway would have been inadequate. Furthermore, the use of privately owned ships, with their limited effectiveness in contrast to the other countermeasures against sinkings, served rather as a shipping policy that made up for the harm done by 'shipping by government owned ships' rather than as a real countermeasure against the sinking of tax carriers.
While these countermeasures for preventing the sinking of tax carriers in the 15th century failed to be properly executed due to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ir effectiveness, basic measures necessary to the overhaul of the shipping system, such as the expansion of operating infrastructure and the supplementation of regulations and organization, did indeed receive attention with regard to their importance. Although countermeasures for preventing the sinking of tax carriers failed to achieve as huge an effect as expected, the fact that they were repeatedly discussed immediately after sinkings reveals the status of Jeolla-do ship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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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사강목』의 후고구려 인식

저자 : 홍창우 ( Hong Changw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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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보이는 후고구려ㆍ궁예 관련 정보를 분석하여 인식의 양상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이다. 먼저 안정복이 자신의 벗인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궁예와 후고구려에 대한 그의 관심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정복은 조선 前代의 통사를 저술한 『동사강목』의 저자였으므로, 그가 특정한 역사적 대상을 향해 깊은 관심을 보인 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에 기존의 연구들이 주로 『동사강목』에서 '정통'과 관련이 있는 나라의 문제에 치중했다면, 정통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무통'의 문제에도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우선 궁예와 후고구려가 '도적'과 '무통' 국가로 설정된 양상과 계기를 살폈다. 그 결과 궁예는 '도적'이라는 점이 『동사강목』 도처에서 강조되었고, 그의 후고구려는 단군ㆍ기자를 시작으로 하여 마한, 문무왕 9년 이후의 신라, 태조 19년 이후의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채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들이 부정적으로 서술된 이유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달랐다. 안정복은 '정통' 국가인 신라를 넘본 후고구려와 궁예에 정통과 군주로서의 위상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를 위한 배려의 차원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는 '춘추대의'에 기반을 둔 명분질서의 탐색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통론'의 관점에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이 답습되었던 것과 함께, 『동사강목』 내에 궁예와 견훤을 우리 문적의 소멸 주체로 지목하여 비판하는 대목에도 주목해보았다. 기록의 문제이긴 하지만, 고려시대의 경우 역사서 편찬을 위한 자료의 문제를 거론했던 주체들이 궁예나 견훤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례는 조선시대 식자들 사이에서 보이는 특수한 견해인데, 별다른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후고구려나 후백제 모두 역사서 편찬이나 기록물 생산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기왕의 성과를 감안했을 때, 막연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추정하였다. 난세의 시기에 한낱 도적에 불과한 이들에게 불합리한 누명이 씌워진 것이다.
궁예나 견훤의 처지에서 본다면 굉장히 억울할 이와 같은 설명은 사건의 발생 시점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 사이의 간극이 제법 크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식의 주체와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의 계기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여기에서 분기된 자유분방한 역사적 인식의 양상을 『동사강목』을 매개로 살펴본 것이라 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Ahn Jungbok's Dongsa-Gangmok recognized Later-Goguryeo and Gungye. First, through the letter Ahn Jungbok sent to Lee Gahwan, we were to confirm his interest in Gungye and Later-Goguryeo. The fact that Ahn Jungbok showed a deep interest in a specific historical object was the first thing that stood out. Therefore, it was thought that it was necessary to consider the problem of 'legitimate dynasty'[正統], which stands at the opposite point of 'illegitimate dynasty'[無統].
To this end, first of all, we looked at the patterns and opportunities for Gungye and Later-Goguryeo to be set up as 'Dojeok'[盜賊] and 'illegitimate dynasty'. As a result, the fact that Gungye was a 'Dojeok' was emphasized everywhere in Dongsa-Gangmok, and it was confirmed that his Later-Goguryeo was not included in the category of 'legitimate dynasty' and became a target of criticism. However, the reason they were described negatively wa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previous era. Ahn Jung-bok did not give 'legitimate dynasty' and status as a monarch to Later-Goguryeo and Gungye, who opposed the 'legitimate dynasty' of Silla.
In addition, we also paid attention to the criticism of Gungye and Gyeonhwon as the subjects of extinction of our literature in Dongsa-Gangmok. This case was a special opinion seen among scholars of the Joseon Dynasty, but it can seen that it was not based on any particular literary basis. In particular, considering the previous achievements that both Later-Goguryeo and Later-Baekje were not negligent in compiling history books or producing records, it was presumed to be an idea derived from vague 'prejudice'.
This explanation, which would be very unfair from the perspective of Gungye or Gyeonhwon, may be possible because the gap between the time of the incident and the subject looking at it is quite large. Therefore, this article could confirm that the trigger for evaluating historical facts varies according to the subject of perception and the historical background in which he is placed.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the free-spirited historical perception branched here was examined through the Dongsa-Gangm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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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함경도 방곡령 실시와 배상을 둘러싼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의 동향(1889~1893)

저자 : 박한민 ( Park Han M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7-14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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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함경도 지역의 방곡령 실시와 관련하여 지방관과 상인, 지역에 파견된 관리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한 양상과, 이들의 활동이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곡물 유통과 판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둘러싸고 지방관과 지역 상인이 보인 반응은 방곡령 실시가 단순히 외세 침탈로부터 곡물 유출을 막고 지역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함경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조일 양국은 관원을 현지에 보냈다. 조선에서는 임응호를 판핵관으로 파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지역민들은 함경감사와 관련이 있는 현직 관리들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며 몸을 사리고, 일본 상인과의 곡물 거래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판핵관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조병식의 지시를 받아 비위를 몰래 조사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이후 조정에서 임응호를 탄핵하고 구금시키는데 활용되었다. 외무성에서는 이시이 기쿠지로를 원산에 파견하였다. 그는 현지 상인들과 면담하고 장부를 조사하면서 손해배상으로 청구한 금액이 적정하고 타당한지 조사하였다. 조사 중 원산 재류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액에 다소 증빙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체 배상액을 재산정하여 제출하도록 지도하였다. 함경감사 조병식을 비호한 조정의 유력자는 민응식이었다. 민응식은 방곡령에 대한 배상 반대론을 주장하였고, 외아문 독판의 교체를 주도하였다. 일본공사관 측과 접촉한 대원군은 조정 내 분위기와 정보를 일본 측에 흘리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조일 간 교섭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만회해 보려 시도하였다. 함경도의 방곡 시행과 배상 교섭에는 지방과 중앙의 여러 세력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면서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방곡령 시행과 배상 교섭은 조정 내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동된 내정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activities of local governments, merchants, and investigators dispatched to the region who responded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in relation to the implementation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in Hamgyeong province, and their impact on central politics and local communities. The reaction of local governments and local merchants over the profits from grain distribution and sales cannot be understood as simply to prevent grain outflow from foreign invasion and to protect the local economy. In order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Korea and Japan government dispatched officials to Hamgyeong province. In Joseon, Lim Eung-ho was dispatched as an inspector. During the investigation, local people were forced to spare themselves and avoid trading grain with Japanese merchants, fearing the possibility of retaliation by incumbent officials related to Cho Byung-sik, the governor of Hamgyeong province. While the investigator worked in the area, some secretly investigated the irregularities under the direction of Cho. The information they collected was later used to impeach and detain Lim in the mediation.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dispatched Ishii Kikujiro to Wonsan. Ishii interviewed local merchants and investigated the books to see if the amount claimed for damages was appropriate and reasonable. During the investigation, he confirmed that it was somewhat difficult to prove the extent of damage claimed by the Japanese merchants in Wonsan, and instructed them to re-assign and submit the whole amount for compensation. Min Eung-sik was the leading figure in Joseon politics defending Cho. Min was against the compensation for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and led the replacement of minister of Foreign Office. After contacting the Japanese legation officials, Daewongun attempted to redeem his political influence by using stalled negotiations between Joseon and Japan, leaking the information within the government to the Japanese side. In the compensation negotiations following the implementation of Grain Export Prohibition, various local and central forces intervened deeply according to their interests, greatly affecting the grain trade in the local community. It can be seen that the implementation of the Grain Export Prohibition Order and compensation negotiations were a domestic issue closely linked to political forces in the 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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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강점기 경학원(經學院) 강사(講士)의 위상과 활동

저자 : 정욱재 ( Jung Uk-j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5-17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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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강점기 경학원 강사(講士)의 선정과 시기별 활동의 특징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경학원 강사는 경학원의 공식적인 직제에 포함되지 않은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사의 선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910년대~1920년대 경학원 강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정되었고, 선정된 사람들은 명망과 학문이 높은 인물들로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설득과 회유를 받았다. 이를 강하게 저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굴복하여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위정척사론으로 유명한 학파의 제자와 독립운동을 하던 인물도 있었다. 1930년대부터는 유림이라 볼 수 없는 인물들도 경학원 강사로 선정되었고, 이 흐름은 전세체제기인 194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경학원 강사는 명예직으로 월급은 없고 연수당과 여비만 지원받았다. 또한 1930년대까지 경학원 강사의 임기는 규정되지 않아 본인이 스스로 사임하지 않은 이상 사실상 종신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경학원 강사를 우대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경학원 강사는 공식 직제인 경학원 부제학ㆍ대제학이 될 수 있었다. 일부 경학원 강사는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거나 중추원 참의가 경학원 강사로 임명되는 등 경학원 강사는 단순 명예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경학원 강사의 주 임무는 석전제 거행ㆍ순회강연ㆍ시문 기고로 일제강점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특히 경학원 강사의 순회강연은 유교의 교리를 이용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그 내용이 『경학원잡지』 등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한 경학원 강사는 일본 천황과 일제의 침략전쟁 등을 찬양하는 한시를 짓는 등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황도유학'을 주창하여 식민지 조선인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적ㆍ물적 희생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황도유학'을 추종하여 전시대에 이룩한 높은 수준의 유학사상을 단절시키는 한편, 한국 유학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는 폐해를 남기는 데 일조하였다.


This study gave an overview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lection and activity of the instructors (Gangas) of Kyunghagw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by period.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was an honorary post that was not included in the official office organization of Kyunghagwon. And ye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paid special attention to the selection of the instructors, attaching importance to those of Kyunghagwon. In the 1910s-1920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selected unilaterally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ose selected were figures with high reputation and study, who got strong persuasion and conciliation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Some strongly resisted while others finally yielded and participated, some of whom were disciples of famous schools through the theory of Wijungchugsa (Defending Orthodoxy and Heterodoxy), and there were even figures who had done the independence movement. Since the 1930s, even the figures who could not be considered Confucian scholars were selected a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nd this flow was further strengthened in the 1940s, which was a state of war.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was an honorary position, who did not receive monthly pay except for annual allowance and travel expenses. In addition, until the 1930s, as the term in office was not prescribed for the instructor of Kyunghagwon, it was a tenured post unless the instructor resigned. Sinc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favorably treated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those whose ability was recognized could become Kyunghagwon Boojehak and Daejehak, which belonged to its official office organization. Som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appointed as Jungchuwon officials, or Jungchuwon officials were appointed as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ccordingly,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had a status that could not be regarded as a simple honorary position.
The main missions of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ere holding Seokjeonje, having a lecturing tour, and contributing poetry and prose, which continued throughout the Japanese colonial era. Especially, the lecturing tour of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was mostly concerned with the contents to justify and praise Japanese colonial rule, using the doctrine of Confucianism, which sometimes were published in Kyunghagwon Magazine. In addition, the instructors of Kyunghagwon acted as a mere tool of Japanese colonial rule, e.g. composing Sino-Korean poetry praising the Japanese emperor and the Japanese imperialist war of aggression. Especially, entering the 1940s, they coerced colonial Korean people into a voluntary human and material sacrifice for the Japanese invasion war, advocating the so-called 'Whangdo Confucianism.' Following 'Whangdo Confucianism,' they broke off from the high-level Confucian ideas achieved in the previous age while contributing to leaving the evil of cutting off from the developmental flow of Korean Confucian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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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5전쟁기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 재조명

저자 : 박동찬 ( Park Dong C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5-2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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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지평지구 전투는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후 공산군의 대규모 공세에 유엔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3월 말까지 문산∼동두천∼춘천∼현리∼양양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는 '전쟁 전 상황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공산군은 지평지구 전투의 패배로 제4차 공세에 실패했다. 그들은 공세의 목표인 대전∼안동 선 진출은 고사하고 오히려 북위 38도선으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아야만 했다.
지평지구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전쟁 전략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유엔군은 '전쟁 전 상황에서의 휴전'이라는 전쟁목표 달성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공산군은 제4차 공세의 실패로 인해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950년 12월∼1951년 1월에 공산군이 계획하던 '춘계공세로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 즉 '완전 승리' 구상이 파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가 유엔군의 전쟁전략을 '철군 < 휴전'으로, 공산군의 전략을 '승리 < 휴전'으로 확실히 탈바꿈하게 하는 계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군 측에서는 대외적으로 휴전을 적극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북위 38도선에 형성된 전선 상황이 그들에게 더 이상 '군사적 완전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했다.
공산군의 제4차 공세와 지평지구 전투의 결과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협상을 통한 휴전'만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향후 전쟁 양상은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행동 양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in 1951 was the first victory achieved by the UN forces in the face of a massive communist offensive after the Chinese entered the Korean War. As a result of this battle, the UN forces switched to a counterattack and advanced to the line linking Munsan∼Dongducheon∼Chuncheon∼Hyeonri∼Yangyang by the end of March. This meant 'recovery of the pre-war situation'. On the other hand, the communist forces failed in the 4th offensive due to the defeat in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They failed to advance to the Daejeon∼Andong line Which was the target of the offensive. Rather, They had to face the consequences of being pushed to the 38th parallel.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Battle of Jipyeong District can be found in the changes in the war strategies of the UN and communist forces. The UN forces were one step closer to achieving the war goal of a ceasefire in the pre-war situation, and the communist forces had to switch to defense due to the failure of the 4th offensive. This meant that the plan for complete victory through the spring offensive planned by the communist army from December 1950 to January 1951 was broken. Also, This meant that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region played a role in making sure that the UN forces' war strategy was transformed into a 'withdrawal < truce' and the communist army's strategy into a 'victory < truce'. At that time, the communist army did not actively advocate a ceasefire externally, but the frontline situation formed at the 38th parallel made it impossible to guarantee them a “complete military victory” any longer.
As a result of the Communist Forces' 4th Offensive and the Battle of the Jipyeong District, both the UN and communist forces came to realize that a truce through negotiations was the best way to end the war. It can be said that the future warfare showed a pattern of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 to gain the superiority of negot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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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페르시아 전쟁 이후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 -사제직과 성소 변화를 중심으로-

저자 : 김효진 ( Kim Hyo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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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는 엘레우시스를 대표하는 종교 의식이었으나,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에는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범 그리스적인 종교 행사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여러 사제직 중에 가장 중요한 신관직은 히에로판테스와 다둑코스를 들 수 있는데, 히에로판테스는 에우몰포스 씨족에서, 다둑코스는 키리케스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히에로판테스의 역할은 입교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둑코스의 역할을 소 미스테리아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을 보면, 이러한 사제직들은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 공식적인 역할이 정립된 것으로 보이며 일정 부분에서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둑코스를 배출한 케리케스 씨족은 친 아테네적 성향을 다수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소 미스테리아를 관장하는 사제로 선택된 사제 가문은 케리케스였다. 또한 케리케스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 치세 전에 아티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다둑코스의 역할을 한 때는 아테네인들과 분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케리케스 가문은 아테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테네는 긴밀한 관계성을 통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성소의 변화를 보면,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전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가 되었고 엘레우시스나 아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복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키몬을 시작으로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아테네 정치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재건축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텔레스테리온의 규모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매우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어벽에 해당되는 페리볼로스가 새롭게 세워졌는데 매우 견고하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데메테르 성소인 엘레우시니온도 변화했는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벽을 건축했다. 이외에도 트립톨레모스의 성소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잇는 '신성한 길'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으며 이는 아테네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한 측면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페르시아가 물러나고 그리스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분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레우시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불안한 측면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고 엘레우시스 사람들을 친아테네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통해 아테네인들은 여러 폴리스에 아테네가 데메테르 여신의 시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시혜를 다른 폴리스에 전하는 민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The Eleusinian Mysteries were a religious ritual that represented Eleusis. And after Eleusis was incorporated into Athens, it was reborn as a pan-Greek religious ceremony under the influence of Athens. Of the many priesthoods of the Eleusinian Mysteries, the most important priesthood were Hierophant and Daduchos. Hierophant came from the Eumolpidae families, and Daduchos from the Kerykes families. It's believed that the role of Hierophant appears to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the initiation ritual, and the role of the Daduchos was closely related to the Eleusinian Lesser Mysteries. From the inscription, these priesthoods appear to have established their official roles since the incorporation of Eleusis into Athens, and in some respects they appear to have changed.
In particular, the Kerykes which produced the Daduchos, had pro-Athenian tendencies. The Kerykes was chosen to preside over the Eleusinian Lesser Mysteries which appears to have been established in the time of Peisistratos. It is also shown that the Kerykes families migrated to the Attica region and lived there before the reign of Cleisthenes. The role of Daduchos had been shared with the Athenians at one time. Looking at these points, it is believed that the Kerykes families maintained close relations with Athens, and that Athens increased its influence over the Eleusinian Mysteries through its close ties.
If we look at the change in the sanctuary, the Persian War left most of Greece in ruins, and Eleusis and Athens were no exception. After the Persian Wars, the Athenians were interested in restoring the sanctuary of Demeter in Eleusis. Athenian politicians sought to reconstruct the sanctuary of Demeter in Eleusis, in particularly, It is estimated that the size of the telesterion had been very large compared to the previous period. As the sanctuary grew in size, a new peribolos, the defensive wall, was erected, and it was very solid. The Eleusinion, the sanctuary of Demeter in Athens, also changed, growing in size and building new walls. In addition, a temple of Triptolemos was newly built and the 'the sacred way' between Athens and Eleusis took shape.
These changes will be closely related to the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situation in Athens after the Persian Wars. After the Persian Wars, Athens increased its influence over the region of Eleusis, and this can be seen in the context of Athens' interest in and involvement in the Eleusinian Mysteries. With the retreat of Persia, Greece continued to turmoil between Athens and The Peloponnesian League. In this situation, Eleusis was a region that was strategically important but also had an unsettling aspect. Because of those reasons, Athens may have used the Eleusinian Mysteries to increase its influence over the region of Eleusis and to make people of Eleusis get acquainted with Athens. It also appears that through the Eleusinian Mysteries, the Athenians wanted to be seen in the various poleis as people who had received the favor of Demeter and to pass on this benefit to other pol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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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 시기와 그 과정

저자 : 조진선 ( Cho Jins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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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역은 마한 소국 중 하나인 일난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며, 백제 시기에는 월나군, 고미현, 아로곡현, 반나부리현 등이 설치되어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은 인구의 집중과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의 형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암지역은 기원전 8~4세기경의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는데, 고고학적으로는 송국리형 주거지와 1,399기에 이르는 지석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암지역으로 유입된 새로운 인구집단은 지석묘의 형식과 분포상태로 보아 탐진강유역(장흥군 유치면 일대)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된 점이다. 전쟁인류학적으로 보면, 평등한 부족사회와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는 전쟁 양상이 서로 달라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조합도 다르다.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영암지역의 무기조합은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석검)여서 부족사회의 모습을 보이지만, 초기철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는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여서 군장사회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로 보아 영암지역은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집중되기 시작한 인구를 바탕으로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되면서 군장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 소국은 이러한 군장사회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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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완도 법화사지의 성격에 대한 신고찰-고려 후기의 항몽(抗蒙)과 백련결사(白蓮結社), 그리고 송징(宋徵)과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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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완도의 장보고 중심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고려 후기 완도 법화사지의 역사적 현황을 고고 자료, 문헌 자료, 설화 자료의 검토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는 완도 법화사가 12세기 초에 재건되었고, 1243년에 완도를 '거점 섬'으로 지정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243년 당시 고려의 최이정권은 진도의 용장성에 도성에 버금가는 전략시설을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완도와 압해도 등의 주요 섬을 연결하는 서남해지역 '거점 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1247년에 백련결사의 2대 사주였던 천인과 그의 도반인천책 등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거점 섬' 완도의 전략시설이 조성된 법화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고려의 官人 이영이 유배형을 당하여 완도로 왔고, 이영의 작은아버지 승려 혜일도 완도에 들어왔다. 이는 '거점 섬'으로 지정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이 조성된 직후의 일로서, 당시 완도 법화사가 항몽의 공동체이자 법화신앙의 공동체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완도의 설화적 인물 송징은 완도에서 명멸해간 민중영웅들을 다면적으로 대변하는 복합적 캐릭터이다. 따라서 역사화 과정에서 송징이 때로는 장보고로 치환되기도 하고, 때로는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되기도 하는 것은 나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법화사지 발굴에서 12~13세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됨에 따라 송징을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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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산보의 학문과 사상

저자 : 고영진 ( Koh Young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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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는 16세기 전반 대표적인 호남사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5살 때인 1517년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나 2년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이 賜死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자 통분하며 낙향하여 무등산 아래 창암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소쇄원을 경영하고 평생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
양산보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먼저 至治主義의 구현을 들 수 있다. 그는 스승인 조광조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의 학문은 『소학』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四書 중에서는 『대학』과 『중용』을, 五經 중에서는 『주역』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도연명과 주돈이를 흠모해 서재에 도연명의 「歸去來辭」와 「五柳先生傳」, 주돈이의 「太極圖」, 「通書」, 「愛蓮說」 등을 두고 가까이 하였다.
양산보는 『소학』의 실천에 힘썼으며 「孝賦」와 「愛日歌」등을 저술하고 소쇄원에 愛陽壇을 쌓는 등 효를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의 『소학』과 효 중시 사상은 家學으로 전해 내려져 갔다.
그는 스승의 죽음과 개혁의 실패를 보고 좌절하기도 하였지만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 스승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지치를 자신의 주변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사회에까지 넓혀가고 자연 속에서까지 구현하려고 하였다. 『소학』과 효의 실천, 의리의 강조, 소쇄원의 건설이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양산보의 또다른 사상적 특징으로는 天人合一論을 들 수 있다. 양산보는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학적 세계관과 우주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북송성리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주돈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천인합일론에 기반하고 있다.
양산보가 흠모했던 또 한 명의 인물은 도연명이다. 그는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는데, 道家的 隱逸之士보다는 엄격한 出處觀을 가진 儒家的 處士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은거하였지만 세상과 등진 것은 아니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의식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의 시문은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 바탕에는 천인합일론에 입각한 物我一體의 사상이 있었다.
양산보는 스승과 자신이 꿈꿨던 이상사회인 지치를 자연에 구현한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도 소쇄옹으로 하였다. 그러나 소쇄는 단순한 쇄락으로서의 내면적 정신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쇄락의 기상을 의미한 강한 실천지향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구체적 형용이 광풍제월이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도연명과 주돈이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소쇄원을 소쇄라는 문학적 기풍과 광풍제월이라는 기상의 결합이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건축물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천인합일,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사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조광조의 사상과 이기심성론 중심의 주자성리학의 중간 단계, 즉 성리학적 우주론 중심의 북송성리학과 친연성이 있었지 않나 생각되며 호남유학사에서는 송순계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소쇄원이 그들 사이의 학문 교류의 장이 되면서 송순계열의 학문과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양산보는 소쇄원을 중심으로 송순, 임억령, 김윤제,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 많은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활발한 문학 교류를 하였다. 당시 호남지역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최고 수준이었는데 양산보와 소쇄원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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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황진(黃進) 추서(追敍)와 17세기 기억의 형성

저자 : 김한신 ( Kim Hansh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4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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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黃進은 17세기 이후의 조선사회에서 전란 초반의 전황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임진전쟁 발발 직후 호남 방어에 전력을 다했으며, 충청병사에 승진된 이후 활동범위를 확대하여 삼남의 보전에 초점을 맞추어 임무를 수행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었고, 황진은 다른 군·민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했다. 조선 조정으로 전달된 보고에서 황진이 중과부적임에도 '力戰'하다 전사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정에서는 서둘러 황진 등 전사자에게 상을 내리고 추증했다. 황진의 공훈은 당대를 넘어 17세기 이후 사대부 사이에서 기억되고 기록으로 전승되었다. 황진의 기억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황진이 후손들 사이에서만 顯彰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 그의 기록이 수정, 보완을 거치며 당대를 설명하는 敍事 중 일부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황진의 史實은 私撰記錄과 官撰史書에서 병행 수록되어, 그의 면모와 전공을 재조명하는 가운데 당대사의 실상이 복원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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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해임과 사탕무당제조사업권 추구

저자 : 김희연 ( Kim Hee 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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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해임되는 과정과 그 가운데 알렌이 획득하려 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검토했다. 기존 연구는 알렌의 해임 배경에 대해 그가 루스벨트 정부의 친일, 반러 정책에 반박하고 친러, 반일, 친한 정책을 개진했기 때문이라 해석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 입장에서 알렌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 가지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알렌이 해임 전후로 추진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이때 그의 관심은 한국의 독립이 아닌 자국 권익과 개인적 실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알렌이 공사에서 경질되는 배경을 자세히 검토했다. 알렌은 자신이 친러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알렌은 일본측에 협조적으로 움직였고 한국의 보호국화를 예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해임되었고 알렌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기에 처했다. 이는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모건이 제안한 사탕무당제조사업의 내용과 알렌이 마련한 계약안 내용을 분석했다. 이때 알렌 계약안은 종전에 비해 혜택이 축소되었을지언정 이권획득자를 적극 배려한 것으로, 그가 한국에서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충분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동시에 일본의 한국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획득하고자 취한 대일협조적 행보들을 살펴보고, 그가 한국을 떠나는 과정을 살폈다. 알렌은 이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친화적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개인에 전매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알렌의 시도는 결국 무산되었다. 귀국 후 서한이나 강연에서 알렌은 그러한 자신의 행적은 모조리 소거하고 자국 정부의 공사관 조기철수를 비판했다.
알렌의 해임과 그 과정에서 이뤄진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알렌은 자신의 안위와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주의 노선을 철저하게 따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세계정세와 관련한 알렌의 인식과 태도 변화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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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저자 : 이승일 ( Lee Seung I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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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하의 대만과 조선은 일본을 통해서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이 지역에는 전문 재판기관이 설치되었고, 법률 전문가가 판사와 검사에 임용되었다. 더 나아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을 분리하였고 소송절차법도 만들어졌다. 이렇듯, 대만과 조선은 모두 일본의 사법제도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는 대만의 법원조직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대만의 사법제도,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대만의 사법제도의 특징을 연구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를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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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 - 오월의 기록>에 담긴 5·18 민주화운동 영상기록물 연구

저자 : 김정아 ( Kim Jung 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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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영상기록물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87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 자료다. 영상기록물이 역사 자료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출처와 제작 배경, 내용을 밝히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오월의 기록>은 80년 5월 광주를 기록한 국내외 영상의 출처, 시간과 장소를 면밀히 파악하여 그날의 진실에 가까운 '5·18민주화운동 영상일지'를 만든다는 기획 의도로 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수집된 5·18 영상기록물의 생산처와 소장처, 제작 배경과 일시, 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따라 영상기록물의 내용을 문서 자료, 사진 자료와 교차 분석함으로써 영상기록물이 가진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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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상왕(商王)의 출정(出征)과 '방인(方人)'의 여정

저자 : 이성원 ( Lee Sung W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7-28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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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는 공방, 토방, 강방, 주방, 인방 등 중원 외곽의 강력한 방국들과 주기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하였고 필요한 경우 상왕은 군사적 출정을 하였다. 이들 지역은 상읍으로부터 500~800킬로미터 거리였기에 이러한 군사적 출정을 다녀오려면 두 달 혹은 석 달이 시간이 소요되는 장도의 원정이었다. 상왕의 출행은 정례적인 卜旬 복사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일간격으로 행해지는 점복을 기록한 복순 복사에서 상왕이 상읍 이외의 지역에 머무르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소재지를 기록함으로써 상왕의 이동 경로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복순 복사에 의하면 상대 후기 상왕이 동남 회하유역으로 잦은 원정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경유지에서 복순 복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이라도 상읍의 출입에는 방위, 택월, 택일 등의 신탁이 허락해야 출입 할 수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생포된 방인들은 상왕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여정을 보여준다. 특히 강방의 강족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검토하면, 그들은 전쟁에서 생포되어 상읍까지 수백 킬로의 험난한 장도를 감내하며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비록 살아서 상읍에 도착하여도 그들 대부분은 벌제의 식을 통해 제사의식의 희생이 되었다. 즉 그들은 고향을 떠나 와서 이승이 아닌 저 피안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 외의 방인들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훼손되는 육형을 받아야 했고, 남은 여생동안 불구가 되어 내밀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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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송시기 전쟁이 화폐에 끼친 영향 -단평입락(端平入洛) 시기 회자(會子)의 발행량을 중심으로-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0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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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시기의 재정은 赤字였고 이러한 적자재정의 主要 原因은 막대한 軍費 지출에 있었다. 즉 南宋 건립이후 金과의 계속 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량의 軍隊를 유지해야만 했었고 이것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남송조정이 적자재정을 해결하고자 하였다면 우선 군비의 지출을 줄이고 세금 수입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은 남송조의 실제정황과는 符合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송조정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쉬운 방법은 紙幣를 대량으로 발행하는 것이다.
남송과 金 間의 계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가 필요하자 회자의 발행량도 점점 증가하여 開禧北伐 後 회자의 발행량은 1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비록 회자의 발행량이 증가하였다 할지라도 회자와 교환하는 金, 銀, 銅錢 등의 準備金이 충분하였다면 회자의 가치하락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234년(端平 元)에 남송은 蒙古와 연합하여 金을 멸망시키고 승리하였지만 몽고로부터 전쟁 승리에 대한 보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金을 멸망시킨 후에 남송조정은 三京收復을 목적으로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하그렇지만 이 전쟁의 실패로 남송과 몽고는 전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로 얻은 것은 없다하여도 조금이나마 재정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시간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理宗 친정초기에 진행하였던 두 번의 戰役은 재정에 큰 손실을 주었다. 端平入洛 이후에 남송조정은 이전보다 많은 군비를 지출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결국은 회자의 발행량이 4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회자가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사회경제활동에 큰 문제였고 남송의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端平入洛 後 會子의 가치가 하락하는 추세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하였다. 남송과 몽고가 연합하여 金을 멸한 이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宋과 蒙古는 平和 時期였다. 하지만 南宋이 三京을 수복하기 위하여 蒙古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端平入洛의 결과는 매우 비참하여 이후 남송의 재정 적자는 더욱 악화되었고 어쩔 수 없이 會子의 發行量을 늘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端平入洛은 宋과 蒙古의 全面 戰爭의 도화선이 되었다. 端平入洛은 晩宋時期기에 會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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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여성: 엠마 윌러드의 여성관과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

저자 : 김진아 ( Kim Geen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9-3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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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세기 여성 고등교육을 이끌어 갔던 엠마 윌러드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미국에서의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과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고등교육 1세대 여성들은 여성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여성 고등교육 확장을 주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 윌러드를 포함한 이 시대 여성들은 미국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활동으로 기억되는 참정권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해 왔고, 이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이들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여성사 연구 일체가 '영웅적 서사' 혹은 '비극적 서사'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통해 여성의 삶을 논의하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교육 활동이란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왔던 가정 안에서의 양육 활동을 가정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교육 활동을 통해 여성의 공적 활동을 확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에 엠마 윌러드의 교육관이나 정치관, 여성관, 그리고 이와 관련한 각종 활동의 한계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초지일관 여성의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공화국의 여성 시민을 성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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