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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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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A Study on the Medical Missionary Mary M. Cutler

백옥경 ( Baek Ok Kyoung )
  • : 한국여성사학회
  • : 여성과 역사 3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2월
  • : 257-297(41pages)
여성과 역사

DOI


목차

Ⅰ. 서론
Ⅱ. 메리 커틀러의 성장배경과 조선입국과정
Ⅲ. 보구녀관(普救女館), 광혜여원(廣惠女院) 에서의 병원 운영과 진료활동
Ⅳ. 여성의료인력 양성 기반 마련
Ⅴ. 순회진료사업의 전개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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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조선에서 모두 42년간 의료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 조선에 도착한 이래로 1935년까지, 미 감리회 WFMS의 의료선교사로서 메리 커틀러는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광혜여원 등에서 활발한 진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호원 및 의사 등의 여성의료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상시적인 순회진료사업을 실시하여 의료소외지역에 대한 의료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조선에서 여성병원의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하였으며, 여성 자활과 조선인에 의한 여성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데에서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에도 기여했다. 곧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여성의료를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었으며, 한국의 여성의료 영역의 확장 과정이었다. 이는 본인 스스로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의학을 공부하거나, 기독교적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체화된 도전적 여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이 의료혜택을 향유하며, 전문교육을 통해 간호원으로서, 혹은 의사로서 자립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Mary M. Cutler had worked as a medical missionary in the early modern Korea for 42 years. Since Cutler had arrived in the Korea in 1893, she had provided volunteer medical services as a medical missionary of Methodist Church in American which was called WFMS until 1935. She had trained women doctors and nurses, had done the traveling dispensary project, and had provided the isolated area with medical cares. These kinds of Cutler’s activities were a new trial and a challenge against the existing women medical care, and had extended the area of women medical services endlessly. It was that she had overcome the social prejudice and negative understanding in America by herself and had studied, and was on the bases of embodied and challenging female consciousness through promoting the social reform activities. And she hoped that Korean women had also enjoyed medical care the same as Korean men, and had also stood on their own foot as a nurse or a women doctor with special medical education. With these kinds of Cutler’s activities, women hospital in Korea could had been managed to steadily, Korean women doctor and volunteers could had been able to do women medical care services through training medical people. And she had expanded new service like the visiting medical service from the general medical cares. These her achievement ha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Korean medical history, and had played a role to emancipate Korean women from the disease.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23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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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738-6691
  • : 2672-0469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4-2022
  •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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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권0호(2022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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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성가족부 폐지를 둘러싼 논란과 그 사회적 의미

저자 : 정현백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6 (1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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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 고·중세의 혼인제와 “유녀(遊女)”의 인식 -서옥제와 서류부가제를 중심으로-

저자 : 이현주 ( Lee Hyunju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5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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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녀는 중국의 문헌사료에만 기록되어 있다. 유녀의 실체에 알기 위해서는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된 기록의 편견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유녀'는 음란과 미개의 상징으로 기록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중국과 다른 혼인제에 대한 편견적 시선이다. 한국 고·중세의 혼인제는 '서류부가'의 혼인제였고, 중국 고대의 혼인제는 종법제적 질서를 기반으로 한 '여귀남가'의 혼인제였다. 중국인의 시선에서 차이는 차별의 근거가 되었고, 한국의 고대는 '미개한 동이(東夷)'으로 규정되어 기록되었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와 고려, 즉 '동이의 구습'에 대한 의도적인 '편견'과'오해'이다. 중국정사에서 부여와 고구려에 대한 시각이 대조적인데, 이는 중국과의 관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술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들 기록은 중국 사서의 필터(안경)을 통해 기록된 것이었다. 호의와 적대에 의한 친소관계(親疏關係)는 정절과 음란의 잣대로 문명과 미개를 구분하였던 것이다.
『고려도경』에 기술된 고려의 풍습 역시 당시 고려에 방문한 중국인, 서긍의 편견과 선입견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풍습, 유녀 등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기술과 유사하다. 서긍은 중국의 관혼상제와 다른 고려의 풍습을 지적하였고, 옛 사서의 기록과 고려의 풍습을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여전히 중국의 예법에 맞지 않는 고려의 미개함을 관찰하고 기술하였던 것이다.
한국 고·중세의 유녀는 '남편이 없는 여성'이었다. 유녀의 정의에는 신분적 조건, 사회경제적 여건, 정치적 지위 등의 요소는 삭제되었다. 중국인의 시선에서는 남편이 없는, 남편을 매개로 하지 않고 주체가 되어 활동하는 여성의 존재가 이상했고, 음란했던 것이다. 한국 고·중세의 제한적 처변거주(서류부가형)의 혼인·가족제에서는 '남편이 없는 여성'의 정의만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역할을 한 여성들이 존재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records of "Yu-nyeo(遊女)" and to identify misunderstandings and biases in Korean history recorded from the perspective of others.
The records of the "Yu-nyeo(遊女)" are only found in Chinese records, and also at certain times. Therefore, in order to approach the reality of "Yu-nyeo(遊女)", it is necessary to remove the prejudices of the records observed in the eyes of others.
The "Yu-nyeo(遊女)" was recorded as a symbol of obscenity and barbarity. There are two reasons for this.
One is the prejudice against the institution of marriage which is different from that of China. The institution of marriage in China is a form in which a woman goes to a man's house to hold a wedding ceremony and resides. On the other hand, the institution of marriage in ancient and middle ages of Korea was in the form of a man marrying in a woman's house, living in a woman's house, giving birth to children, and returning to the man's house when the child grew up. This difference in the institution of marriage between Korea and China was caused by the difference in the kinship structure. In the eyes of the Chinese, differences were the basis for discrimination, and ancient times in Korea were recorded as "the uncivilized east".
The other is deliberate prejudice and misunderstanding against Goguryeo(高句麗) and Goryeo(高麗), namely, the old customs of "the Barbarians of the East(東夷)". These records were recorded through the filters of Chinese's history books. The relationship between goodwill and hostility was divided into civilization and barbarism by the standards of fidelity and obscurity.
In Korea, the "Yu-nyeo(遊女)" of the Ancient-middle ages were "women without husbands." In the definition of the "Yu-nyeo(遊女)", elements such as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s and political status were removed. From the Chinese point of view, the existence of women who do not have husbands and who act as agents without husbands was strange and indecent. In Korea's institution of marriage and kinship structure, there were women who played various roles that were not included in the definition of "women without husb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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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후기 여악의 민간 활동과 기(妓)·창(娼)의 분화 -명명과 분류법을 중심으로-

저자 : 서지영 ( Suh Ji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9-10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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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기녀에 대한 명명과 분류법에 주목하여 기녀의 존재 양식의 역사적 변이 양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먼저 '관기'(官妓)와 '창기'(娼妓)라는 호칭을 재검토하여 기녀의 사회적 기반을 탐색하고, 조선후기의 음악제도 및 연행 환경의 변화 속에서 포착되는 새로운 명명과 분류체계에 주목하여 기녀의 존재방식의 변화의 징후들을 살펴본다. 특히 17세기 이후 궁중 여악의 축소와 맞물려 전개된 기녀의 민간 활동의 활성화와 예인으로서의 기녀의 입지를 반영하는 '명희'라는 명명에 주목하여 기녀집단 내부의 위계화가 가속화되었던 지점을 살핀다. 또한, 19세기 서울의 민간 음악무대와 유흥공간에 배치되었던 여성들을 '관기'와 '창녀'로 이분화하는 기술들에 주목하여 '창녀'의 대립항으로서 '관기'의 쓰임을 검토하고, 관비로서 신역을 수행한 '창기'와 달리 시정의 음악· 유흥공간과 관련성을 가지는 '창녀'의 함의를 탐색한다. 나아가, 19세기 자료들에서 '妓'와 '娼'의 분리가 제기하는 함의들과 20세기 초 기생 담론 속의 명명법 및 분류체계 사이의 연계성을 제기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해체와 변형을 겪었던 근대 전환기의 기녀의 역사적 존재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찾고자 한다.


This research aims to investigate the historical diversity of kinyŏ by focusing on the nomenclature and taxonomy of kinyŏ in the Chosŏn society. I first explore the structural existence of kinyŏ through the examination of terms, such as kwan'gi and ch'anggi and then some signs of change in the way the kinyŏ system functioned from the new designations and classifications of kinyŏ in the late Chosŏn period, when the court music policies and the environments of music performance were drastically altered. In particular, I examine the growing hierarchization within the kinyŏ group in their involvement with non-official music activities since the early 17th century by looking at the term 'myŏnghŭi', which reflects the position of artiste-kinyŏ and the new classification that distinguished kwan'gi from ch'angnyŏ, both of whom were employed in the private music sector including entertainment establishments in 19th-Seoul. Finally, I try to find clues to explain the existential condition of kinyŏ during the transition to modern era, when the kinyŏ system broke down and changed, by connecting the implications of the taxonomy that separated ch'ang from ki in the 19th century with the new nomenclature and classification of kinyŏ produced in the early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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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식민지 조선 사회의 성 구매 변화와 식민권력의 대응 -1930년대 여급의 '연애' 매매와 경찰의 성매매 관리 정책-

저자 : 박정애 ( Park Jung-a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1-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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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성매매 관리 정책은 일본의 창기제도가 노예제도하는 국내외 안팎의 비난에 대응하면서 정비되어 갔다. 그 방향은 허가 공창인 창기제도를 축소하고 등록 사창인 예기, 작부, 여급 제도에 대한 관리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었다. 남성 노동자와 병사를 중심으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국가주의 체제 아래에서 일본의 성매매 정책은 어디까지나 관리 방침을 기조로 유지되어 갔다.
1916년 식민지 조선에서 전국적인 성매매 관리 체제가 확립된 이후, 창기제도를 이용하는 것은 하류층 남성이 노예상태인 '인육'와 '정조'를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창기제도가 비문명 노예제도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하락세를 보였으며 그 대신 등록 사창인 예기·작부제도가 확산되었다. 1934년에는 카페와 여급에 대한 관리 방침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1930년대 모던 남성들이 카페 여급을 찾는 것이 유행하면서 식민권력이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카페는 중류층 이하의 남성들이 낮은 비용으로 여급의 '연애'를 살 수 있는 곳으로 인기를 끌었다. '연애'라는 근대적 기호 속에 포함된 '남녀간 자유의지'라는 뉘앙스는 여급의 섹슈얼리티를 구매하는 남성에 대한 세간의 의혹에 방파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식민권력은 단순한 섹스 구매를 넘어 섹슈얼리티를 구매하는 남성 고객들의 이러한 취향 변화를 추인하면서 이를 법제화했다.


The Sexuality management policies of modern Japan was reorganized while responding to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criticisms that the Japanese shōgi system(娼妓制度) was a slavery system. It was done by downscaling the shōgi system, which was a state-licensed prostitution system, and reinforcing the management of like the geigi(藝妓), shakufu(酌婦), and jōkyu(女給, waitress) systems (registered unlicensed prostitution system). Under the nationalistic regime aiming to accomplish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centered on male laborers and soldiers, the sexuality trade policy of Japan was maintained at the management level.
After the state-regulated national prostitution system was established in colonial Joseon in 1916, people formed an awareness that the shōgi system was used by men of the lower class to buy 'human flesh' and 'fidelity' of slaves. The shōgi system was criticized for being an uncivilized slavery system and showed a decline. Instead, the geigi and shakufu systems began to spread as registered and unlicensed prostitution systems. A new management policy was established in 1934 for cafes and waitresses. Cafes became popular among modern men as places to look for waitresses at cafes in the 1930s, and the colonial power institutionalized cafe waitresses. Cafes were popular among men of the middle class or lower as places to purchase 'Modern Love' opportunities with waitresses. The nuance of 'free will of men and women' included in the modern term called 'Modern Love' was used as a protection against the public suspicion against men purchasing the sexuality of waitresses. The colonial power ratified and legislated such preferences of male customers who purchased sexuality, which was beyond the simple purchase of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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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철종대 순원왕후 존호의례의 거행과 의미

저자 : 임혜련 ( Lim Hyeryu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6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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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철종대 순원왕후에게 시행된 존호의례를 중심으로 선왕과 대비에 대한 가상존호와 추상존호 의례를 검토하였다. 철종대 자주 시행된 순원왕후에 대한 존숭은 철종을 즉위하도록 하고 정통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던 순원왕후에 대한 보은의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그간 정비된 존호의례가 반영된 것이었다.
왕과 왕비, 대비 등 왕실 구성원의 공덕을 칭송하는 존숭의례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존호를 올리는 상존호와 추상존호를 들 수 있다. 순조의 왕비로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였던 순원왕후에게는 11회에 걸쳐 존호가 올려졌다. 철종 2년에서 4년 사이에 시행된 순원왕후에 대한 가상존호의례는 첫째, 상례적으로 선왕의 부묘 후 치러지는 의례이지만, 이보다 먼저 순원왕후에 대한 칭경이 이루어졌다는 것, 둘째, 치사·전문·표리를 국왕이 친히 올리는 친상으로 거행되었던 것, 셋째, 왕비가 친히 치사와 표리를 올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순원왕후가 훙서한 철종 8년 이후 해를 거듭하며 비슷한 명분으로 존호 추상이 이어졌으며, 순조의 묘호 개상 이후 철종이 주도적으로 발의하여 추상 존호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상례 중, 부묘 전 존호 추상을 시행하며 추상 존호의 공간과 의식의 구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순원왕후에 대한 존호 추상은 선례와 비교하였을 때 횟수나 빈도가 증가한 것이었고, 철종 재위 기간에 집중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철종대 순원왕후에 대한 존호의례는 보은과 효의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순조의 아들로 대통을 이은 것이라는 명분을 확인하며 스스로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철종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여기에 안동 김문등 외척과 당대 집권층은 그들의 집권 기반이었던 순원왕후의 부재에도 정치기반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순원왕후에 대한 존호의례는 철종과 안동 김문 등 집권층의 협치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국조속오례의』 등 전례서에 편제된 존호의례 의식들이 그 이후 변화된 양상을 살펴보기에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었다. 순원왕후의 존호의례는 상존호와 추상존호 의식이 대체로 완비되었던 시기에 시행되었던 만큼 의례적인 면에서 존호의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honorable titles offered to Queen Sunwon during the reign of King Cheoljong of the Joseon dynasty. The honorable title is a name given to the royal family in praise. If it is received while alive, it is called offering the honorable title or new honorable title. If it is received after death, it is called an remembrance honorable title. Queen Sunwon is the queen of Sunjo. She made Cheoljong ascend the throne and made regency. Queen Sunwon adopted Cheoljong and became a mother.
Queen Sunwon received the title of honor 11 times in all. Among them, he received No. 7 during the reign of King Cheoljong. Number 3 was the new honorable titles, received while alive, and number 4 was the remembrance honorable titles, received after death. In the 4th year of King Sunjo, he received the honorific title along with Sunjo. This is because Cheoljong thanked her for putting him on the throne. And it was to emphasize that he inherited the royal line of Sunjo.
Queen Sunwon died in the 8th year of King Cheoljong. After death, a funeral is held and honorable title is given. However, the name of Sunjo was changed from Sunjong to Sunjo. To commemorate this, the honorable title was raised before the funeral. It changed ceremony. Queen Sunwon protected King Cheoljong and created his status as a king. After Queen Sunwon died, King Cheoljong had to strengthen his status. That is why he gave a lot of honorable titles to Queen S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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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선시대 선잠 의례의 동선과 제단의 크기

저자 : 한형주 ( Han Hyung Ju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9-19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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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성종 8년(1477) 윤2월 27일과 영조 43년(1767) 3월 10일에 시행된 왕비의 선잠단과 채상단에서의 의식을 검토하여 왕비가 실제로 제사를 할 때 의식의 동선을 초헌관의 움직임과 비교 검토해 보았고, 왕비가 채상단을 통한 친잠의 방식과 그 움직임을 추적해 보았다.
성종 8년에는 선잠단에서 관료의 제사가 시행된 후 창덕궁에서 왕비의 친상(親桑)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서는 왕비의 친제가 없었다. 왕비가 궁 밖으로 나가 행사를 치룰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것으로, 관료들만이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영조 43년의 행사에서는 숙종대의 종묘, 영녕전의 묘현례를 통해 제사에 참여한 것을 본받아 친제를 시행하였는데, 그 방식은 왕비가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는 대신 경복궁의 강녕전 옛터에서 선잠제를 거행했던 것이다. 친제를 시행할 때는 남성 관료가 준비과정을 시행하지만 행사가 시작되면 여성들인 궁관의 도움을 받아 행사를 진행하였다. 왕비는 관세를 한 후 집규(執圭)→국궁사배흥평신(鞠躬四拜興平身)→삼상향(三上香)→작헌례(酌獻禮)→독축(讀祝)→국궁사배흥평신→예필(禮畢)의 과정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마친 후에 채상단으로 가서 친잠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의식은 완전히 여성만이 참여하는 의식으로 성종 대와 영조 대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행해졌다. 성종 대는 왕비 채상위에서 동향→채상위 앞에 나가 갈고리를 올림→왕비가 갈고리를 받아 뽕을 오조(五條)를 채취→내명부·외명부의 뽕 채취→예필→왕비 자리로 돌아오는 방식을 취하였다. 영조 43년의 의식은 성종 대와 유사하게 시행되었지만 이때에는 혜빈과 왕세손빈이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들이 7잎의 뽕나무를 채취하는 의식이 설정되어 있었고, 또 잠모가 고두례를 시행하는 방식이 첨가되어 있었다. 성종대에는 왕비의 채상단이 북쪽에 설치되어 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채상단이 별도로 설치되었지만 영조 대에는 혜빈과 왕세자빈의 채상단과 내명부와 외명부를 합친 내외명부단이 합쳐서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잠단의 규모는 『국조오례의』에 사방 2장 3척, 높이는 2척 7촌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친잠의궤』나 『춘관통고』에서는 경복궁에 설치한 선잠단을 방(方) 14척, 고(高) 2척으로 설정하여 원래 선잠단의 크기보다 약간의 축소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경복궁밖에 있는 선잠단을 새로 고치고 이를 바탕으로 경복궁에 선잠단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따로 경복궁의 왕비의 제단을 만들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대한예전』에서도 영·정조대의 새로 바뀐 제단의 규모가 아니라 『국조오례의』의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의 기록을 따랐던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movement of the queen by examining the rituals of the queen's Seonjamdan and the rituals at Chaesangdan, which were carried out in the 8th year of King Seongjong and the 43rd year of King Yeongjo. And the size of Seonjamdan recorded in 『Gukjo-oryeui』in the early Joseon period became smaller in 『Chungwantonggo』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 was intended to examine the reason.
In the 8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after the bureaucratic rites were held at Seonjamdan, the queen's ritual act was held at Changdeokgung, but there was no relative of the queen here. It came out of the ceremony that the queen could not go out of the palace to hold the ceremony, and the bureaucrats conducted the entire ceremony. However, in the 43rd year of King Yeongjo, the queen's ancestral rite was carried out following the participation in ancestral rites through the MyoHyeonrye(廟見禮) of Jongmyo and Yeongnyeongjeon of Sukjong's era. When the king's personal sacrifice was held, a male official was in charge of the preparation process, but when the event started, the ceremony was conducted with the help of a female palace official.
This ceremony was entirely attended by women, and was performed in a very similar way to the Seongjong and Yeongjo era. In particular,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 queen collected 5 types of mulberry leaves, Hyebin and Crown Princess collected 7 types, and Naimyungbu(내명부) and Oemyungbu(외명부) collected 9 types of mulberry. The ceremony of Yeongjodae was similar to that of Seongjongdae, but Hyebin and Crown Prince newly participated in the event, and a person named Jammo performed Go Du-rye to the queen was added.
However, in 『Gukjo-oryeui』, the size of Seonjamdan was set to be 2 Jang(2장) and 3 cheok(3척) on all four sides and 2 Jang(2장) and 7 chon(7촌) in height. It is different by setting it to 14 cheok(14척) and 2 cheok(2척) high, but this is a reworked Seonjamdan outside Gyeongbokgung, not a rebuilt Seonjamdan. Therefore, in 『Daehanyeje』, the contents of 『Gukjo-oryeui』 were written without paying attention to the Seonjamdan of Yeongj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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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핍초(逼醮):청말 민국시기 하층 과부의 위기

저자 : 천성림 ( Chun Sung-lim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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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정절숭배가 최고조에 도달한 청대 후기에 과부를 강제로 결혼시키는 이른바 '핍초(逼醮)'라는 악습이 유행했다. 전국에 걸친 현상이기는 했지만, 주로 강남 지역의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발생했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극심한 성비불균형으로 인해 상층계급을 제외하면 다수의 남성이 아내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한편에서는 나날이 사치스러워지는 결혼의식과 비용, 특히 남자측이 여자집에 보내야 하는 재례(財禮)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목적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과부를 데려가는 남자는 재례를 대부분 시댁에 주었기 때문에 며느리를 이용해 금전을 취득하려는 시댁 어른과 형제가 핍초를 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보쌈과 유사하지만 중국의 경우 전문 중매꾼과 유괴업자가 협업해 과부를 약탈하고 폭리를 취하는 등 전문성과 상업성이 강했다. 국가에서는 과부 스스로 원해 하는 재혼이 아니면 이러한 강제결혼 관련자들을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다스렸지만 민국 시기까지도 이러한 현상은 단절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 불안과 혼란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한 농촌의 빈곤문제 및 여성인구 부족 때문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 과정에서 죽거나 자살했다.


Ironically, while widow chastity was at its height in late Qing China, the practice of widow remarriage by abduction, known as 'Bijiao (逼醮),' also became prevalent. It developed in rural areas among the poor. One major factor that contributed to this custom was a shortage of women, which made it difficult for many men to find a wife. It was also motivated by the desire to reduce the burden of increasingly extravagant marriage rituals and expenses, particularly that of the betrothal gifts to the bride's family. When a man married a widow, though, most of the betrothal gifts were given to her deceased husband's family. So Bijiao was mostly organized by this deceased husband's parents and brothers who sought monetary gain from the widow's remarriage. Though similar to Bossam, a form of bride kidnapping in Joseon Korea, the Chinese practice was more organized and commercialized: often professional matchmakers and kidnappers joined in preying on a widow to make excessive profits. Even though the Chinese government tried to abolish the ill practice by imposing capital punishment, it continued to exist until the Republican era. This was largely due to worsening rural poverty and the continuing shortage of women in times of political instability. Women continued to die, often by suicide, in the Bijiao process throughout thi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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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점령기(1945-52) 일본 도쿄 우에노(上野)의 퀴어 지리학 -스미 다쓰야(角達也), 『남창의 숲(男娼の森)』을 중심으로-

저자 : 김성운 ( Kim Seong-u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5-26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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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 전후(1945-52) 도쿄 우에노에 남창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원리를 퀴어 지리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연합군 점령기 도쿄의 우에노에는 많은 여장 남창들이 거리의 여성 성노동자들인 '판판'들과 섞여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우에노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전전부터 철도 교통의 요지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지역이었던 우에노는 도호쿠(東北) 지역 사람들을 도쿄로 맞이하는 현관으로, 패전 후에는 복원병들이 도착하는 입구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사통팔달의 우에노 지역은 일본의 많은 퀴어 인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서, 혹은 새로운 생활 양식을 추구하며 행한 장소적 이동을 촉진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본고에서는 우에노가 전후 퀴어 주체 형성에서 수행하였던 이와 같은 역할을 스미 다쓰야(角達也)의 소설 『남창의 숲(男娼の森)』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며 고찰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창 주인공 오테루(お照)와 '불량소녀들'의 우두머리 니가와라(二河原)는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서 자신의 성적, 젠더적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갱신한다. 이렇게 퀴어 주체의 형성은 정착이 아닌 부단한 이동, 변화, 흐름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퀴어의 주체성은 항상 만들어지는(becoming)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way the danshō (male prostitutes) community was formed in Ueno, Tokyo during the allied occupation (1945-52) from the perspective of the queer geography. During the occupation, cross-dressed male prostitutes, mingled with panpan streetwalkers, were an active part of the chaotic Ueno culture. This has much to do with the geography of Ueno which was characterized by the hub of railroad traffic. Even before the war, Ueno was a gateway for people from Northeastern Japan who entered Tokyo in search of job opportunities. In the wake of Japan's defeat, the Ueno station unloaded a great number of former imperial soldiers from battlefield. As such, Uen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mediating the movement of postwar Japan's queer subjects seeking new experiences and identities. In this paper, I investigate this mediating role that Ueno played in the making of queer subjectivities by tracing the footsteps of the characters of Sumi Tatsuya's Danshō no mori (The Grove of Male Prostitutes). Both Oteru, a cross-dressed male prostitute and Nigawara, a big sister of 'delinquent girls' were constantly on the move to rediscover and transform their sexual and gender subjectivities. This way, I argue that queer subjectivities are products of ceaseless movement, flow and connections, therefore always in the process of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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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멕시코의 여성 살해 가시화하기 -시우닷 후아레스의 '죽은 여성들'부터 페미니시디오 입법화까지-

저자 : 박수경 ( Park Soo-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69-315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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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멕시코에서 페미사이드 개념을 통해 젠더에 기반한 여성 살해를 가시화해온 과정을 살펴보는 데 있다. 멕시코에서 젠더에 기반한 여성 살해라는 현상은 1993년부터 치와와주 시우닷 후아레스에서 발생한 여성의 실종과 살해를 계기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시우닷 후아레스의 여성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멕시코 정부의 무책임과 방기에 대해 2002년 미주인권재판소에 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멕시코 정부가 피해자 보호에 미흡했다는 점에서 젠더에 기반한 여성 살해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면화밭 사건'으로 알려진 이 소송을 계기로, 멕시코에서 증가하고 있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점차 페미사이드로 개념화되었다. 2000년대 중반 멕시코에서는 페미사이드와 관련된 입법화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여성에게 보장하기 위한 법률 이 마련되었다. 이후 멕시코의 모든 주에서는 페미니시디오를 형법상 범죄로 규정하고, 그 성립 요건을 명시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ways in which the concept of femicide was used to give visibility to the violent death of women because of their gender in Mexico. This phenomenon became relevant as a result of deaths and disappearances of girls and women in Ciudad Juarez, Chihuahua since 1993. These case reached the Inter-American Court of Human Rights in 2002. As a result, the Mexican State was considered responsible for the lack of measures for the protection of the victims on the case known as Caso del Campo Algodonero. In addition it was impossible to ignore that the number of murdered women in Mexico was alarming. This incidence of violent murders of women has introduced terms such as “feminicidio” or “femicidio” in Mexico. It opened the debate nationally and at the level of the states for its legal regulation under Mexican legislation. The General Law of Acces of the Women to a Free Life of Violence was resulted from the framework act on the prevention of gender-based violence against women. Finally all mexican states have criminalized feminicidio in their criminal c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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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그녀들의 이야기, 그리고 역사 (노서경·최재인 외, 『19세기 허스토리: 생존자의 노래, 개척자의 지도』, 마농지, 2022)

저자 : 이진옥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7-328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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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

저자 : 허윤 ( Heo Yoo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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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역사적 주제다. 특히 2015년의 한일합의 이후로 여러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양적 증가는 '대중을 지향하는 공적 역사 표현의 모든 형태'로서 공공역사와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 있다. 대중을 위한 역사라는 관점에서 공공역사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서사화된 구조가 더 강력한 소구력을 갖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를 해석하는 중심에 민족주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공공역사 담론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분명해지고, 대항적 서사는 삭제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의하는 인기 역사강사들이나 영화 <허스토리> 등은 이러한 민족국가 경계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사유한다. 그러나 최근 <1945>나 <공주들>과 같은 연극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면서,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군, 미군 '위안부' 등을 연결시키면서 '위안부' 재현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트랜스내셔널한 접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군 '위안부' 문제와 성산업을 연결시키며 '위안부'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탈낭만화된 역사적 상상력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문화적 기억이 공공역사의 장을 다원화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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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국 여성사와 공공역사의 상호작용 - 현황과 새로운 시도들 -

저자 : 박진빈 ( Park Jinbi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6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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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공공역사와 여성사가 어떤 접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유물 및 유적 관리와 박물관 전시에 관련된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삶을 전시하는 행위의 역사성을 논하고, 공공역사에서 여성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기획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밝혔다. 그리고 여성사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그 성과물이 공공역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 사례 조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또한 공공역사의 다양한 방법이 여성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여러 제안과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그 시사점을 숙고하였다.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발전하고 역사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욱 확장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역사와 여성사의 만남이 이루어온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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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성여왕 생애 기록의 검토

저자 : 권영오 ( Kwon Young-oh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9-1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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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진성여왕의 생애 기록을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하여 검증한 것이다. 진성여왕 김만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출생에서부터 장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검증된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진성여왕과 김위홍과의 관계는 후대에 설화적으로 분식된 사적(私的) 관계에 근거한 소문에 의해 재생되고 유포되어 왔다. 『삼국사기』에서 김위홍이 진성여왕과 통했다고 하는 기록은 김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초에 병부령이자 상대등이며, 경문왕계 왕실의 종실 대신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에 두고 역사적 상관관계를 찾는 연구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부호부인을 진성여왕의 유모로, 김요를 진성여왕의 소자로, 양패를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이라고 한 것도 설화화한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이 후대에 전해진 것으로 당대의 역사적 실체와 거리가 있다.
진성여왕 김만은 868년(경문왕 8년) 아버지 경문왕과 어머니 영화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위로 김정과 김황 두 오빠가 있었다. 갓난아이때 어머니가 죽어 숙모인 부호부인이 양육하였다. 887년 20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직전까지 왕실 가족인 공주나 장공주로서 왕궁의 이궁인 북궁에 거주하였으며, 미혼으로 자식은 없었다. 즉위 후에는 숙부 김위홍과 모후의 역할을 한 숙모 부호부인에게 정국운영을 맡겼다. 30세가 되던 재위 11년(897년) 6월에 조카 김요에게 정치적 실정과 건강의 이유로 선위했고, 6개월 후 왕경의 북궁에서 죽었다. 사후 왕경의 황산에서 화장하여 산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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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 전기 후비의 생활공간과 의미

저자 : 신혜영 ( Shin Hye-yeo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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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 전기 후비는 어디에 살았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고려의 후비는 정궁 밖의 궁(宮)·원(院)의 건물을 보유하며 궁주(宮主) 원주(院主)로 불렸다. 따라서 고려의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서 살았는지, 정궁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후비궁과 정궁 모두에서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왕(夫王) 생전과 사후로 구분하여 후비들의 생활공간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고려의 사회사 정치사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우선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보여주는 사료를 한 데 모아,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후비궁에서 후비의 출산, 왕자녀의 양육 그리고 왕비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록만을 가지고 후비가 자신의 후비궁에 상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비는 출산 등을 위해 임시로 후비궁에 나갔던 것이다. 후비는 정궁 내 내전에 살았으며 특히 만령전(萬齡殿) 사례로 말미암아 후비는 국왕과 동일한 구역 내에 기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신왕(新王) 즉위 후 정치 세력에 변동이 생기는 것처럼, 정궁 내 후비들의 생활공간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들은 출궁하여 자신의 후비궁에 살았던 반면, 신왕의 친모는 태후의 지위에 올라 계속해서 정궁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태후가 살았던 거소(居所)가 『고려사』 「백관지 입전주부의 '입전(立殿)' 조항임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 혼인 풍속은 서류부가혼으로, 신부집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과 딸을 외가에서 생장하게 하는 것은 외척 성장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왕실과 외척, 공간적으로는 정궁과 외척집의 제3의 장소로서 후비궁이 존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 나가 살았는데, 이는 고려에 일부종사와 같은 유교적 관념이 부재한 사회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정궁 내 후비의 거소 변화는 고려 왕실혼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고려의 왕실혼은 일부다처제로, 국왕 생전에 후비 내 차등이 명확하지 않다가 국왕 사후 태후로 높여지는 후비와 그렇지 않은 후비로 서열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고려의 후비제가 생활공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부왕 생전 여러 후비들이 국왕과 동일한 구역에 기거하다가 부왕 사후 신왕의 친모만이 태후가 되어 독립 거소인 태후전을 설치하여 정궁 내에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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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18세기초 사대부가 여성의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 - 영광 영월신씨가 고문서를 중심으로 -

저자 : 김경숙 ( Kim Kyeo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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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18세기초 영월신씨(寧越辛氏) 집안의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청원·소송 활동의 특성을 검토하고, 신정수(辛鼎受) 처 서산유씨(瑞山柳氏)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 여성의 법적 행위와 의사 표현 방식을 검토하였다. 신정수 처 유씨는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선호한 노비를 통한 대소(代訴)·대송(代訟)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남편의 족인 신성중과의 산송, 노비 추쇄를 위한 상언·격쟁 추진, 입후 청원 등 가호 보존, 가계 계승 및 재산권 수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다.
유씨의 친소·친송 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첫째,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유씨는 조선시대 법 규정에 근거하여 친소·친송의 법적 권한이 보장되어 있었고, 이러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노비를 통한 대소·대송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친소·친송을 추진한 것은 선택의 결과로 이해된다. 둘째, 유씨는 법적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당시 사회적 규범 하에 사대부가의 여성이 이해를 다투는 법적 공간에 나가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청원·소송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임을 계속 강조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는 자신의 행위와 사고를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과 명분을 자신의 소송 명분으로 적극 활용하며 원고로서의 법적 권한을 실현하고 설득력과 호소력을 높이는 장치로 활용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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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조대 여성 격쟁(擊錚)의 실태와 특징

저자 : 박경 ( Par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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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내외법과 정절 관념으로 인해 여성의 활동 영역이 제한되었지만 여성의 격쟁은 법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성록』에는 정조대 총 224건의 여성 격쟁 사례가 나타난다. 이 중 가족 죄명(罪名)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155건,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28건인데, 이 두 사안은 정조대 여성 격쟁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사안이다.
먼저 가족 죄명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 중에서도 남편을 위한 격쟁이 대다수였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활동이 주로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데다 부모, 남편, 형제, 상전을 위한 격쟁이 격쟁 허용 대상인 4건사에 해당된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살옥 죄인인 가족의 억울함을 호소한 격쟁에 대해서 정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받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한 번 더 조사해보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재조사를 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격쟁 원정에서 호소한 내용에 의거하여 살인사건 조사 방향이 바뀌기도 했다. 사안이 4건사에 해당하는데다 정조의 신중한 살옥 심리 방침으로 격쟁을 한다면 관대한 판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되는 상황에서 이 시기 많은 여성들이 격쟁 제도를 활용하여 가족을 구명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례들이었다. 개인간의 분쟁 사안은 원칙적으로는 외람된 격쟁으로, 처리해주지 않아야 할 사안이었지만 정조는 권세가가 과부의 돈을 갚지 않은 경우와 같이 '민은(民隱)'에 해당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호소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또, 분쟁 과정에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가 있었다면, 그 관원들을 징벌함으로써 관직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권세가나 관에 의해 권리를 침해받은 경우 격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정조는 격쟁 제도를 통해 살옥 판결에 억울함을 줄이고, 백성들의 질곡을 널리 들어 해결해주고, 권세가의 횡포와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 여성들도 이러한 방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격쟁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생활 기반인 가족 공동체의 권익을 확보해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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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제국기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

저자 : 남미혜 ( Nam Mi-hy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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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하였던 잠업강습소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1905년 한·일 양국 부인들의 사교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주한 일본공사관 관리의 부인이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에 이옥경이 합세하여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친일적인 성향의 이옥경이 선출되고, 임원에 다수의 통감부 관리 부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한부인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잠업강습소를 설치·운영하고자 계획하고 궁내부소속 용산 양잠장을 하사받았다.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여성 입학지원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9년부터는 여성만을 선발해서 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구두시험과 작문·산술 시험을 거쳐 생도를 선발하였으며, 4∼6개월 동안 양잠에 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4년 동안 총 92명의 졸업생 및 수업생을 배출하였다. 잠업강습소 졸업생들은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거나, 관립·사립 양잠학교 교사로 진출하였다. 졸업생 가운데는 양잠학교를 설립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잠학회와 잠업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양잠 교육 외에도 잠종과 뽕나무 묘목을 배포하거나, 생도 및 지방 양잠가들에게 잠종·양잠 도구의 구입을 중개하였다. 또한 1907년 경성박람회에 양잠 관련물을 출품하기도 했으며, 친잠례 및 황족·고관들의 양잠지도를 하였다. 1910년 2월 일제가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를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 운영하게 되면서 잠업강습소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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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저자 : 백옥경 ( Baek O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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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조선에서 모두 42년간 의료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 조선에 도착한 이래로 1935년까지, 미 감리회 WFMS의 의료선교사로서 메리 커틀러는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광혜여원 등에서 활발한 진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호원 및 의사 등의 여성의료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상시적인 순회진료사업을 실시하여 의료소외지역에 대한 의료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조선에서 여성병원의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하였으며, 여성 자활과 조선인에 의한 여성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데에서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에도 기여했다. 곧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여성의료를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었으며, 한국의 여성의료 영역의 확장 과정이었다. 이는 본인 스스로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의학을 공부하거나, 기독교적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체화된 도전적 여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이 의료혜택을 향유하며, 전문교육을 통해 간호원으로서, 혹은 의사로서 자립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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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평 : 냉전의 '사이'를 탐구하다: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저자 : 김청강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310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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