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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성사와 공공역사의 상호작용 - 현황과 새로운 시도들 -

Achievements and Pursuits of Women’s History and Public History

박진빈 ( Park Jinbin )
  • : 한국여성사학회
  • : 여성과 역사 3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2월
  • : 37-67(31pages)
여성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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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사적지와 박물관의 여성
Ⅲ. 여성사가 공공역사에 말하는 것: 앤 허친슨의 경우
Ⅳ. 여성의 삶 읽기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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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공공역사와 여성사가 어떤 접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유물 및 유적 관리와 박물관 전시에 관련된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삶을 전시하는 행위의 역사성을 논하고, 공공역사에서 여성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기획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밝혔다. 그리고 여성사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그 성과물이 공공역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 사례 조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또한 공공역사의 다양한 방법이 여성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여러 제안과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그 시사점을 숙고하였다.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발전하고 역사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욱 확장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역사와 여성사의 만남이 이루어온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This paper outlined what common areas of interests public history and women’s history have and how the two discipline have worked separately, as well as together, to expand our understanding of history. First, the paper discussed the historical importance of women’s roles in preservation and presentation of historical sites and museums and the meaning of presenting women’s lives in those places. Moreover, it showed how the advancements of women’s history were reflected in public history as some cases have revealed. This paper also considered various methods and ideas of public history that could help doing women’s history. By addressing achievements of public history and women’s history, it attempted to search better ways of doing history in this era of new public media and more public-inclined history.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23636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738-6691
  • : 2672-0469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4-2021
  • :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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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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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

저자 : 허윤 ( Heo Yoo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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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역사적 주제다. 특히 2015년의 한일합의 이후로 여러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양적 증가는 '대중을 지향하는 공적 역사 표현의 모든 형태'로서 공공역사와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 있다. 대중을 위한 역사라는 관점에서 공공역사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서사화된 구조가 더 강력한 소구력을 갖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를 해석하는 중심에 민족주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공공역사 담론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분명해지고, 대항적 서사는 삭제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의하는 인기 역사강사들이나 영화 <허스토리> 등은 이러한 민족국가 경계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사유한다. 그러나 최근 <1945>나 <공주들>과 같은 연극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면서,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군, 미군 '위안부' 등을 연결시키면서 '위안부' 재현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트랜스내셔널한 접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군 '위안부' 문제와 성산업을 연결시키며 '위안부'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탈낭만화된 역사적 상상력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문화적 기억이 공공역사의 장을 다원화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From the perspective of 'history for the public', public history requires historical imagination. The narrative structure has more power than the historical facts themselves. This trend is strengthened in public history projects, where nationalistic imagination works at the center of interpreting text and functions as a kind of counter history narratives. The border between the state and the people becomes more clear, and the opposing narrative is deleted. Popular history instructors and movies "Herstory," which think about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focusing on these nationalistic narratives. Recently, however, plays such as 1945 and Princesses have expanded the scope of reproduction of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by featuring Korean Military Sexual Slavery, and the U.S. Military Sexual Slavery. Through a transnational approach, it questions the identity of Koreans, connects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problem with the sex industry, and reminds us of the presentity of the Military Sexual Slavery. This deromanticized historical imagination shows that cultural memories surrounding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will diversify the field of public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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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국 여성사와 공공역사의 상호작용 - 현황과 새로운 시도들 -

저자 : 박진빈 ( Park Jinbi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6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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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공공역사와 여성사가 어떤 접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유물 및 유적 관리와 박물관 전시에 관련된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삶을 전시하는 행위의 역사성을 논하고, 공공역사에서 여성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기획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밝혔다. 그리고 여성사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그 성과물이 공공역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 사례 조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또한 공공역사의 다양한 방법이 여성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여러 제안과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그 시사점을 숙고하였다.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발전하고 역사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욱 확장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역사와 여성사의 만남이 이루어온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This paper outlined what common areas of interests public history and women's history have and how the two discipline have worked separately, as well as together, to expand our understanding of history. First, the paper discussed the historical importance of women's roles in preservation and presentation of historical sites and museums and the meaning of presenting women's lives in those places. Moreover, it showed how the advancements of women's history were reflected in public history as some cases have revealed. This paper also considered various methods and ideas of public history that could help doing women's history. By addressing achievements of public history and women's history, it attempted to search better ways of doing history in this era of new public media and more public-incline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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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성여왕 생애 기록의 검토

저자 : 권영오 ( Kwon Young-oh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9-1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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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진성여왕의 생애 기록을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하여 검증한 것이다. 진성여왕 김만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출생에서부터 장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검증된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진성여왕과 김위홍과의 관계는 후대에 설화적으로 분식된 사적(私的) 관계에 근거한 소문에 의해 재생되고 유포되어 왔다. 『삼국사기』에서 김위홍이 진성여왕과 통했다고 하는 기록은 김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초에 병부령이자 상대등이며, 경문왕계 왕실의 종실 대신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에 두고 역사적 상관관계를 찾는 연구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부호부인을 진성여왕의 유모로, 김요를 진성여왕의 소자로, 양패를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이라고 한 것도 설화화한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이 후대에 전해진 것으로 당대의 역사적 실체와 거리가 있다.
진성여왕 김만은 868년(경문왕 8년) 아버지 경문왕과 어머니 영화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위로 김정과 김황 두 오빠가 있었다. 갓난아이때 어머니가 죽어 숙모인 부호부인이 양육하였다. 887년 20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직전까지 왕실 가족인 공주나 장공주로서 왕궁의 이궁인 북궁에 거주하였으며, 미혼으로 자식은 없었다. 즉위 후에는 숙부 김위홍과 모후의 역할을 한 숙모 부호부인에게 정국운영을 맡겼다. 30세가 되던 재위 11년(897년) 6월에 조카 김요에게 정치적 실정과 건강의 이유로 선위했고, 6개월 후 왕경의 북궁에서 죽었다. 사후 왕경의 황산에서 화장하여 산골하였다.


The expression in 『Samguk Sagi』that Kim Wi-hong had an amour with Queen Jinseong in private should be interpreted in connection with the political situation in which Kim Wi-hong led the administration of the government in the reign of Queen Jinseong as Sangdaedeung(上大等) of the time and a minister of King Gyeongmun royal family. In addition, it is also a narrative image and symbolic expression handed down to posterity to refer to Madame Buho as Queen Jinseong's nanny, Kim Yo as Queen Jinseong's Soja(小子), and Yangpae as Queen Jinseong's youngest son in 『Samguk Yusa』, which is far from the historical reality of the time. Queen Jinseong, Kim Mann, was born in 868 to her father, King Gyeongmun and her mother, Madame Yeonghwa, and had two older brothers, Kim Jeong and Kim Hwang. Until she ascended to the throne in 887 at the age of 20, she lived at Bukgung(北宮), as a princess or Janggongju(長公主),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She was single and had no children. After ascending to the throne, she entrusted the administration of the country to her uncle Kim Wi-hong and her aunt, Madame Buho. In June of the 11th year of her reign (in the year of 897), at the age of 30, she abdicated the throne to her nephew Kim Yo due to political maladministration and health, and died at Bukgung six months later. The funeral was held at Mt. Hwangsan in Gyeongju, and after cremation, her ashes were scatt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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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 전기 후비의 생활공간과 의미

저자 : 신혜영 ( Shin Hye-yeo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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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 전기 후비는 어디에 살았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고려의 후비는 정궁 밖의 궁(宮)·원(院)의 건물을 보유하며 궁주(宮主) 원주(院主)로 불렸다. 따라서 고려의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서 살았는지, 정궁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후비궁과 정궁 모두에서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왕(夫王) 생전과 사후로 구분하여 후비들의 생활공간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고려의 사회사 정치사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우선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보여주는 사료를 한 데 모아,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후비궁에서 후비의 출산, 왕자녀의 양육 그리고 왕비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록만을 가지고 후비가 자신의 후비궁에 상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비는 출산 등을 위해 임시로 후비궁에 나갔던 것이다. 후비는 정궁 내 내전에 살았으며 특히 만령전(萬齡殿) 사례로 말미암아 후비는 국왕과 동일한 구역 내에 기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신왕(新王) 즉위 후 정치 세력에 변동이 생기는 것처럼, 정궁 내 후비들의 생활공간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들은 출궁하여 자신의 후비궁에 살았던 반면, 신왕의 친모는 태후의 지위에 올라 계속해서 정궁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태후가 살았던 거소(居所)가 『고려사』 「백관지 입전주부의 '입전(立殿)' 조항임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 혼인 풍속은 서류부가혼으로, 신부집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과 딸을 외가에서 생장하게 하는 것은 외척 성장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왕실과 외척, 공간적으로는 정궁과 외척집의 제3의 장소로서 후비궁이 존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 나가 살았는데, 이는 고려에 일부종사와 같은 유교적 관념이 부재한 사회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정궁 내 후비의 거소 변화는 고려 왕실혼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고려의 왕실혼은 일부다처제로, 국왕 생전에 후비 내 차등이 명확하지 않다가 국왕 사후 태후로 높여지는 후비와 그렇지 않은 후비로 서열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고려의 후비제가 생활공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부왕 생전 여러 후비들이 국왕과 동일한 구역에 기거하다가 부왕 사후 신왕의 친모만이 태후가 되어 독립 거소인 태후전을 설치하여 정궁 내에 살 수 있었다.


This article started from the question 'Where did the empresses(后妃) of Early Goryeo live?' The empresses of Goryeo were in possession of buildings such as palaces(宮) or courts(院) and were referred to as gungju(宮主) or wonju(院主). The palaces or courts owned by the empresses were buildings located outside the main palace. Therefore, the question that arose was whether the empresses of Goryeo lived in their empress palaces, the main palace, or both. To answer this query, we observed the living spaces of empresses before and after the deaths of their kings and went further to determine the social and political historic implications for Goryeo embedded in this.
We first collected all the historical data in literature records that reveal the spatial functionality of empress palaces and made close observations. As a result, we confirmed that the birth of empresses, nurturing of princes/princess, and queen proclamation ceremonies were performed in the empress palaces. However, it is difficult to conclude from such records that the empresses lived in their palaces. Instead, the empresses temporarily went to their empress palaces to give birth. Furthermore, it is assumed that empresses lived in annexes of the king's sleeping quarters inside the main palace, as in the case of Mallyeongjeon(萬齡殿).
With the changes in political power when a king was succeeded also came changes in the living spaces of empresses inside the main palace. Empresses that could not become Empress Dowagers left the main palace to live in their empress palaces. Empresses that became Empress Dowagers as mothers of the new king were able to live in the empress quarters inside the main palace, which was confirmed to be the Ipjeon(立殿), or “entering into the quarter,” as recorded in 『Goryeosa(高麗史)』 「Baekguanji(百官志)」.
The marriage custom during the Goryeo era was a matrilocal residence where the child was born and raised in the home of the wife. However, raising the sons and daughters of a king in the home of the wife would accelerate the growth of maternal relatives. Therefore, the empress palace acted as a third location between royalty and maternal relatives, and between the main palace and the maternal household from a spatial perspective. Empresses that failed to become Empress Dowagers would live in their empress palaces, which is understood to be because of a lack of Confucian concepts in the Goryeo society such as serving only a single husband.
Finally, the change in the empresses' living quarters inside the main palace was viewed as a phenomenon arising from Goryeo's royal marriages. The royal marriage in Goryeo were polygamous events where the disparity between empresses was unclear until the death of the king, at which point there was a clear separation of empresses as some became Empress Dowagers and some did not. This empress system of Goryeo affected the living spaces where the empresses stayed in annexes of the king's quarters, but only the mother of a new king was able to live in the main palace after establishing the empress quar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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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18세기초 사대부가 여성의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 - 영광 영월신씨가 고문서를 중심으로 -

저자 : 김경숙 ( Kim Kyeo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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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18세기초 영월신씨(寧越辛氏) 집안의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청원·소송 활동의 특성을 검토하고, 신정수(辛鼎受) 처 서산유씨(瑞山柳氏)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 여성의 법적 행위와 의사 표현 방식을 검토하였다. 신정수 처 유씨는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선호한 노비를 통한 대소(代訴)·대송(代訟)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남편의 족인 신성중과의 산송, 노비 추쇄를 위한 상언·격쟁 추진, 입후 청원 등 가호 보존, 가계 계승 및 재산권 수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다.
유씨의 친소·친송 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첫째,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유씨는 조선시대 법 규정에 근거하여 친소·친송의 법적 권한이 보장되어 있었고, 이러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노비를 통한 대소·대송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친소·친송을 추진한 것은 선택의 결과로 이해된다. 둘째, 유씨는 법적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당시 사회적 규범 하에 사대부가의 여성이 이해를 다투는 법적 공간에 나가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청원·소송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임을 계속 강조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는 자신의 행위와 사고를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과 명분을 자신의 소송 명분으로 적극 활용하며 원고로서의 법적 권한을 실현하고 설득력과 호소력을 높이는 장치로 활용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modes of act and of expression which female members of official-literati family represented by Yŏngwŏl Sin family's daughters-in-law showed in their legal activities of petition and litigation. Among them was Sin Chŏng-su's wife, Ms. Yu who actively filed by herself the various kinds of appeals and litigations such as the litigation over grave yard, a direct appeal to a king, and an adoption of child.
More than anything else, Ms. Yu made an appeal by herself and filed a direct litigation based upon her own will in the situation that she could file her cases indirectly by making her slave proxy. Next, her litigation and other legal strategies laid a persuasive emphasis upon unavoidable circumstances which obliged her to appeal to law by herself in the situation that her direct legal activities could bring about her image contrary to the contemporary social norm which usually dissuaded female member of official-literati family from going to court for the reason that it could expose her to a conflict of interest dispute. And lastly, she positively appropriated the contemporary social norm restricting woman's thought and deed, to the rationale of her litigations which, in court, reinforced her appeal and at the same time strengthened her persuasive power. All these characteristics show the subjectivity of her legal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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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조대 여성 격쟁(擊錚)의 실태와 특징

저자 : 박경 ( Par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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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내외법과 정절 관념으로 인해 여성의 활동 영역이 제한되었지만 여성의 격쟁은 법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성록』에는 정조대 총 224건의 여성 격쟁 사례가 나타난다. 이 중 가족 죄명(罪名)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155건,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28건인데, 이 두 사안은 정조대 여성 격쟁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사안이다.
먼저 가족 죄명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 중에서도 남편을 위한 격쟁이 대다수였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활동이 주로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데다 부모, 남편, 형제, 상전을 위한 격쟁이 격쟁 허용 대상인 4건사에 해당된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살옥 죄인인 가족의 억울함을 호소한 격쟁에 대해서 정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받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한 번 더 조사해보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재조사를 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격쟁 원정에서 호소한 내용에 의거하여 살인사건 조사 방향이 바뀌기도 했다. 사안이 4건사에 해당하는데다 정조의 신중한 살옥 심리 방침으로 격쟁을 한다면 관대한 판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되는 상황에서 이 시기 많은 여성들이 격쟁 제도를 활용하여 가족을 구명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례들이었다. 개인간의 분쟁 사안은 원칙적으로는 외람된 격쟁으로, 처리해주지 않아야 할 사안이었지만 정조는 권세가가 과부의 돈을 갚지 않은 경우와 같이 '민은(民隱)'에 해당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호소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또, 분쟁 과정에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가 있었다면, 그 관원들을 징벌함으로써 관직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권세가나 관에 의해 권리를 침해받은 경우 격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정조는 격쟁 제도를 통해 살옥 판결에 억울함을 줄이고, 백성들의 질곡을 널리 들어 해결해주고, 권세가의 횡포와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 여성들도 이러한 방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격쟁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생활 기반인 가족 공동체의 권익을 확보해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This study examines the cases of gyeokjaeng(擊錚) by women in King Jeongjo's era. In spite of the limited status of women's activities, women's right to gyeokjaeng was legally granted. Even though the laws for punishing gyeokjaeng cases, which were not four granted cases or impudent, had been enacted to prevent it from its abuse in late Joseon, the logic that King should solve his people's regrets listening to their situations was also valid at the same time. In such situations, women's gyeokjaeng were granted by submitting documents in Korean rather than being done orally in King Jeongjo's era.
Among the total 224 gyeokjaeng cases by women in King Jeongjo's era, which were included in Ilseongrok(日省錄), consisted of 155 cases of appealing the family's false accusations and 28 cases of the private disputes and abuses by government authority, and both types show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men's gyeokjaeng cases in King Jeongjo's era.
First, the cases of appealing the family's false accusations held the majority of the women's gyeokjaeng cases in King Jeongjo's era, and most of them were for their husbands, because lot's of women's sphere limited their household and then, the gyeokjaeng cases for their parents, husbands, brothers, and masters were the four granted cases. As King Jeongjo was so cautious about treating murder cases, he usually ordered to re-investigate the cases, even though they were reported with no doubt, having basic approach that re-investigation of the murder case would be better, if the gyeokjaeng case was about appealing false accusation of murder by a family member. In these cases, appealing contents of gyeokjaeng could change the directions of investigating the murder cases. In the cases as one of four granted ones and with expectations for generous judgement against the murder cases under King Jeongjo's discreet approach to them, many women tried to save their family members' lives through the gyeokjaeng at that time.
Second, the cases appealing about private disputes and abuses of government authority were about that women conducted themselves to secure their own rights. In principle, the dispute cases between private persons were not treated, as they were considered as impudent, and yet, King Jeongjo insisted that the cases of 'people's difficulties(民隱)' such as a powerful person had not repaid for a widow's money should be solved positively. In addition, by punishing unfairness of government authority in disputes, he also tried to rectify the discipline of government office. In such situations, women tried to secure their rights through gyeokjaeng, when their rights were infringed by the powerful persons or government authority.
As a result, King Jeongjo tried to reduce the unfairness in the cases of murder, listen to and solve his people's difficulties, and check the powerful persons' arrogance and government authority's unjustness through the system of gyeokjaeng. In that era, women's gyeokjaeng cases showed to try to secure their own rights and those of their family's which were their basis for living, through using positively the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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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제국기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

저자 : 남미혜 ( Nam Mi-hy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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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하였던 잠업강습소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1905년 한·일 양국 부인들의 사교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주한 일본공사관 관리의 부인이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에 이옥경이 합세하여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친일적인 성향의 이옥경이 선출되고, 임원에 다수의 통감부 관리 부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한부인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잠업강습소를 설치·운영하고자 계획하고 궁내부소속 용산 양잠장을 하사받았다.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여성 입학지원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9년부터는 여성만을 선발해서 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구두시험과 작문·산술 시험을 거쳐 생도를 선발하였으며, 4∼6개월 동안 양잠에 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4년 동안 총 92명의 졸업생 및 수업생을 배출하였다. 잠업강습소 졸업생들은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거나, 관립·사립 양잠학교 교사로 진출하였다. 졸업생 가운데는 양잠학교를 설립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잠학회와 잠업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양잠 교육 외에도 잠종과 뽕나무 묘목을 배포하거나, 생도 및 지방 양잠가들에게 잠종·양잠 도구의 구입을 중개하였다. 또한 1907년 경성박람회에 양잠 관련물을 출품하기도 했으며, 친잠례 및 황족·고관들의 양잠지도를 하였다. 1910년 2월 일제가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를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 운영하게 되면서 잠업강습소는 폐지되었다.


This study aimed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a women's organization created in July 1905. In 1905, as the women's social gatherings between Joseon and Japan became active, the wife of a Japanese legation official in Joseon insisted on organizing the Joseon-Japan Women's Association, and Lee Ok-kyung joined forces to create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 Lee Ok-kyung, who was pro-Japanese, was elected as the chairman, and a number of wives of the Tonggambu(統監府) officials were appointed as the executives.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 planned to set up and operate a Training Office for women and was granted the Sericultural Experiment Station in Yongsan, which belonged to the Gungnaebu(宮內府).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was originally an educational institution for women, but there were few female applicants in the beginning, so it recruited and operated male students. As the number of female applicants for admission gradually increased, only women were selected and educated from 1909.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 Sericulture Training Office selected students after oral and written and arithmetic tests, and trained them in theory and practice for four to six months.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produced a total of 92 graduates in the four-year period from 1906 to 1909. After graduation, the students of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were appointed as engineers of the Ministry of Agriculture, or became teachers of the Government Administration and Privat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Some of the graduates established Sericulture Schools, and established sericulture-related societies and sericulture research institutes. In addition to the Sericulture training,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also distributed silkworm eggs and mulberry seedlings, or mediated the purchase of silkworm eggs and Sericulture tools to students and local sericulture farmers. It also featured silkworm-related items at the 1907 Gyeongseong(京城) Exposition. In addition, Queen's Chinjam-rye(親蠶禮) guidance and sericulture education for royal and governmen officials were provided. In February 1910, when the imperial Japan reorganized and operated the Daehan Women's Association-Sericulture Training Office as a governmental women's Sericulture Training Office, the Sericulture Training Office was abo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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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저자 : 백옥경 ( Baek O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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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조선에서 모두 42년간 의료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 조선에 도착한 이래로 1935년까지, 미 감리회 WFMS의 의료선교사로서 메리 커틀러는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광혜여원 등에서 활발한 진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호원 및 의사 등의 여성의료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상시적인 순회진료사업을 실시하여 의료소외지역에 대한 의료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조선에서 여성병원의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하였으며, 여성 자활과 조선인에 의한 여성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데에서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에도 기여했다. 곧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여성의료를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었으며, 한국의 여성의료 영역의 확장 과정이었다. 이는 본인 스스로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의학을 공부하거나, 기독교적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체화된 도전적 여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이 의료혜택을 향유하며, 전문교육을 통해 간호원으로서, 혹은 의사로서 자립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Mary M. Cutler had worked as a medical missionary in the early modern Korea for 42 years. Since Cutler had arrived in the Korea in 1893, she had provided volunteer medical services as a medical missionary of Methodist Church in American which was called WFMS until 1935. She had trained women doctors and nurses, had done the traveling dispensary project, and had provided the isolated area with medical cares. These kinds of Cutler's activities were a new trial and a challenge against the existing women medical care, and had extended the area of women medical services endlessly. It was that she had overcome the social prejudice and negative understanding in America by herself and had studied, and was on the bases of embodied and challenging female consciousness through promoting the social reform activities. And she hoped that Korean women had also enjoyed medical care the same as Korean men, and had also stood on their own foot as a nurse or a women doctor with special medical education. With these kinds of Cutler's activities, women hospital in Korea could had been managed to steadily, Korean women doctor and volunteers could had been able to do women medical care services through training medical people. And she had expanded new service like the visiting medical service from the general medical cares. These her achievement ha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Korean medical history, and had played a role to emancipate Korean women from the dis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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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평 : 냉전의 '사이'를 탐구하다: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저자 : 김청강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310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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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

저자 : 허윤 ( Heo Yoo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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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역사적 주제다. 특히 2015년의 한일합의 이후로 여러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양적 증가는 '대중을 지향하는 공적 역사 표현의 모든 형태'로서 공공역사와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 있다. 대중을 위한 역사라는 관점에서 공공역사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서사화된 구조가 더 강력한 소구력을 갖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를 해석하는 중심에 민족주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공공역사 담론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분명해지고, 대항적 서사는 삭제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의하는 인기 역사강사들이나 영화 <허스토리> 등은 이러한 민족국가 경계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사유한다. 그러나 최근 <1945>나 <공주들>과 같은 연극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면서,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군, 미군 '위안부' 등을 연결시키면서 '위안부' 재현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트랜스내셔널한 접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군 '위안부' 문제와 성산업을 연결시키며 '위안부'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탈낭만화된 역사적 상상력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문화적 기억이 공공역사의 장을 다원화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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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국 여성사와 공공역사의 상호작용 - 현황과 새로운 시도들 -

저자 : 박진빈 ( Park Jinbi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6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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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공공역사와 여성사가 어떤 접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유물 및 유적 관리와 박물관 전시에 관련된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삶을 전시하는 행위의 역사성을 논하고, 공공역사에서 여성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기획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밝혔다. 그리고 여성사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그 성과물이 공공역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 사례 조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또한 공공역사의 다양한 방법이 여성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여러 제안과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그 시사점을 숙고하였다.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발전하고 역사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욱 확장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역사와 여성사의 만남이 이루어온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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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성여왕 생애 기록의 검토

저자 : 권영오 ( Kwon Young-oh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9-1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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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진성여왕의 생애 기록을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하여 검증한 것이다. 진성여왕 김만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출생에서부터 장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검증된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진성여왕과 김위홍과의 관계는 후대에 설화적으로 분식된 사적(私的) 관계에 근거한 소문에 의해 재생되고 유포되어 왔다. 『삼국사기』에서 김위홍이 진성여왕과 통했다고 하는 기록은 김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초에 병부령이자 상대등이며, 경문왕계 왕실의 종실 대신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에 두고 역사적 상관관계를 찾는 연구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부호부인을 진성여왕의 유모로, 김요를 진성여왕의 소자로, 양패를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이라고 한 것도 설화화한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이 후대에 전해진 것으로 당대의 역사적 실체와 거리가 있다.
진성여왕 김만은 868년(경문왕 8년) 아버지 경문왕과 어머니 영화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위로 김정과 김황 두 오빠가 있었다. 갓난아이때 어머니가 죽어 숙모인 부호부인이 양육하였다. 887년 20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직전까지 왕실 가족인 공주나 장공주로서 왕궁의 이궁인 북궁에 거주하였으며, 미혼으로 자식은 없었다. 즉위 후에는 숙부 김위홍과 모후의 역할을 한 숙모 부호부인에게 정국운영을 맡겼다. 30세가 되던 재위 11년(897년) 6월에 조카 김요에게 정치적 실정과 건강의 이유로 선위했고, 6개월 후 왕경의 북궁에서 죽었다. 사후 왕경의 황산에서 화장하여 산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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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 전기 후비의 생활공간과 의미

저자 : 신혜영 ( Shin Hye-yeo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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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 전기 후비는 어디에 살았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고려의 후비는 정궁 밖의 궁(宮)·원(院)의 건물을 보유하며 궁주(宮主) 원주(院主)로 불렸다. 따라서 고려의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서 살았는지, 정궁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후비궁과 정궁 모두에서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왕(夫王) 생전과 사후로 구분하여 후비들의 생활공간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고려의 사회사 정치사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우선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보여주는 사료를 한 데 모아,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후비궁에서 후비의 출산, 왕자녀의 양육 그리고 왕비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록만을 가지고 후비가 자신의 후비궁에 상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비는 출산 등을 위해 임시로 후비궁에 나갔던 것이다. 후비는 정궁 내 내전에 살았으며 특히 만령전(萬齡殿) 사례로 말미암아 후비는 국왕과 동일한 구역 내에 기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신왕(新王) 즉위 후 정치 세력에 변동이 생기는 것처럼, 정궁 내 후비들의 생활공간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들은 출궁하여 자신의 후비궁에 살았던 반면, 신왕의 친모는 태후의 지위에 올라 계속해서 정궁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태후가 살았던 거소(居所)가 『고려사』 「백관지 입전주부의 '입전(立殿)' 조항임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 혼인 풍속은 서류부가혼으로, 신부집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과 딸을 외가에서 생장하게 하는 것은 외척 성장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왕실과 외척, 공간적으로는 정궁과 외척집의 제3의 장소로서 후비궁이 존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 나가 살았는데, 이는 고려에 일부종사와 같은 유교적 관념이 부재한 사회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정궁 내 후비의 거소 변화는 고려 왕실혼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고려의 왕실혼은 일부다처제로, 국왕 생전에 후비 내 차등이 명확하지 않다가 국왕 사후 태후로 높여지는 후비와 그렇지 않은 후비로 서열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고려의 후비제가 생활공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부왕 생전 여러 후비들이 국왕과 동일한 구역에 기거하다가 부왕 사후 신왕의 친모만이 태후가 되어 독립 거소인 태후전을 설치하여 정궁 내에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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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18세기초 사대부가 여성의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 - 영광 영월신씨가 고문서를 중심으로 -

저자 : 김경숙 ( Kim Kyeo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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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18세기초 영월신씨(寧越辛氏) 집안의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청원·소송 활동의 특성을 검토하고, 신정수(辛鼎受) 처 서산유씨(瑞山柳氏)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 여성의 법적 행위와 의사 표현 방식을 검토하였다. 신정수 처 유씨는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선호한 노비를 통한 대소(代訴)·대송(代訟)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남편의 족인 신성중과의 산송, 노비 추쇄를 위한 상언·격쟁 추진, 입후 청원 등 가호 보존, 가계 계승 및 재산권 수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다.
유씨의 친소·친송 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첫째,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유씨는 조선시대 법 규정에 근거하여 친소·친송의 법적 권한이 보장되어 있었고, 이러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노비를 통한 대소·대송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친소·친송을 추진한 것은 선택의 결과로 이해된다. 둘째, 유씨는 법적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당시 사회적 규범 하에 사대부가의 여성이 이해를 다투는 법적 공간에 나가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청원·소송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임을 계속 강조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는 자신의 행위와 사고를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과 명분을 자신의 소송 명분으로 적극 활용하며 원고로서의 법적 권한을 실현하고 설득력과 호소력을 높이는 장치로 활용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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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조대 여성 격쟁(擊錚)의 실태와 특징

저자 : 박경 ( Par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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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내외법과 정절 관념으로 인해 여성의 활동 영역이 제한되었지만 여성의 격쟁은 법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성록』에는 정조대 총 224건의 여성 격쟁 사례가 나타난다. 이 중 가족 죄명(罪名)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155건,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28건인데, 이 두 사안은 정조대 여성 격쟁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사안이다.
먼저 가족 죄명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 중에서도 남편을 위한 격쟁이 대다수였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활동이 주로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데다 부모, 남편, 형제, 상전을 위한 격쟁이 격쟁 허용 대상인 4건사에 해당된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살옥 죄인인 가족의 억울함을 호소한 격쟁에 대해서 정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받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한 번 더 조사해보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재조사를 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격쟁 원정에서 호소한 내용에 의거하여 살인사건 조사 방향이 바뀌기도 했다. 사안이 4건사에 해당하는데다 정조의 신중한 살옥 심리 방침으로 격쟁을 한다면 관대한 판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되는 상황에서 이 시기 많은 여성들이 격쟁 제도를 활용하여 가족을 구명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례들이었다. 개인간의 분쟁 사안은 원칙적으로는 외람된 격쟁으로, 처리해주지 않아야 할 사안이었지만 정조는 권세가가 과부의 돈을 갚지 않은 경우와 같이 '민은(民隱)'에 해당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호소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또, 분쟁 과정에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가 있었다면, 그 관원들을 징벌함으로써 관직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권세가나 관에 의해 권리를 침해받은 경우 격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정조는 격쟁 제도를 통해 살옥 판결에 억울함을 줄이고, 백성들의 질곡을 널리 들어 해결해주고, 권세가의 횡포와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 여성들도 이러한 방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격쟁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생활 기반인 가족 공동체의 권익을 확보해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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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제국기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

저자 : 남미혜 ( Nam Mi-hy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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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하였던 잠업강습소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1905년 한·일 양국 부인들의 사교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주한 일본공사관 관리의 부인이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에 이옥경이 합세하여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친일적인 성향의 이옥경이 선출되고, 임원에 다수의 통감부 관리 부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한부인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잠업강습소를 설치·운영하고자 계획하고 궁내부소속 용산 양잠장을 하사받았다.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여성 입학지원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9년부터는 여성만을 선발해서 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구두시험과 작문·산술 시험을 거쳐 생도를 선발하였으며, 4∼6개월 동안 양잠에 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4년 동안 총 92명의 졸업생 및 수업생을 배출하였다. 잠업강습소 졸업생들은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거나, 관립·사립 양잠학교 교사로 진출하였다. 졸업생 가운데는 양잠학교를 설립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잠학회와 잠업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양잠 교육 외에도 잠종과 뽕나무 묘목을 배포하거나, 생도 및 지방 양잠가들에게 잠종·양잠 도구의 구입을 중개하였다. 또한 1907년 경성박람회에 양잠 관련물을 출품하기도 했으며, 친잠례 및 황족·고관들의 양잠지도를 하였다. 1910년 2월 일제가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를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 운영하게 되면서 잠업강습소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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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저자 : 백옥경 ( Baek O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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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조선에서 모두 42년간 의료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 조선에 도착한 이래로 1935년까지, 미 감리회 WFMS의 의료선교사로서 메리 커틀러는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광혜여원 등에서 활발한 진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호원 및 의사 등의 여성의료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상시적인 순회진료사업을 실시하여 의료소외지역에 대한 의료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조선에서 여성병원의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하였으며, 여성 자활과 조선인에 의한 여성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데에서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에도 기여했다. 곧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여성의료를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었으며, 한국의 여성의료 영역의 확장 과정이었다. 이는 본인 스스로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의학을 공부하거나, 기독교적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체화된 도전적 여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이 의료혜택을 향유하며, 전문교육을 통해 간호원으로서, 혹은 의사로서 자립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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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평 : 냉전의 '사이'를 탐구하다: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저자 : 김청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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