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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사학회> 여성과 역사> 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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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

"I'll remember" without a purpose - The storytelling of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and the historical imagination -

허윤 ( Heo Yoon )
  • : 한국여성사학회
  • : 여성과 역사 3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2월
  • : 1-36(36pages)
여성과 역사

DOI


목차

Ⅰ. 공공역사로서의 이야기
Ⅱ. 모델 스토리 만들기와 유튜브 콘텐츠의 전형성
Ⅲ. 사실적 허구로서의 영화와 원본성의 쟁투
Ⅳ. 리빙 히스토리로서 연극과 탈낭만화된 대항서사
Ⅴ. 다른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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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역사적 주제다. 특히 2015년의 한일합의 이후로 여러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양적 증가는 ‘대중을 지향하는 공적 역사 표현의 모든 형태’로서 공공역사와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 있다. 대중을 위한 역사라는 관점에서 공공역사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서사화된 구조가 더 강력한 소구력을 갖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를 해석하는 중심에 민족주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공공역사 담론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분명해지고, 대항적 서사는 삭제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의하는 인기 역사강사들이나 영화 <허스토리> 등은 이러한 민족국가 경계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사유한다. 그러나 최근 <1945>나 <공주들>과 같은 연극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면서,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군, 미군 ‘위안부’ 등을 연결시키면서 ‘위안부’ 재현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트랜스내셔널한 접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군 ‘위안부’ 문제와 성산업을 연결시키며 ‘위안부’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탈낭만화된 역사적 상상력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문화적 기억이 공공역사의 장을 다원화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From the perspective of 'history for the public', public history requires historical imagination. The narrative structure has more power than the historical facts themselves. This trend is strengthened in public history projects, where nationalistic imagination works at the center of interpreting text and functions as a kind of counter history narratives. The border between the state and the people becomes more clear, and the opposing narrative is deleted. Popular history instructors and movies "Herstory," which think about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focusing on these nationalistic narratives. Recently, however, plays such as 1945 and Princesses have expanded the scope of reproduction of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by featuring Korean Military Sexual Slavery, and the U.S. Military Sexual Slavery. Through a transnational approach, it questions the identity of Koreans, connects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problem with the sex industry, and reminds us of the presentity of the Military Sexual Slavery. This deromanticized historical imagination shows that cultural memories surrounding the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will diversify the field of public history.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23621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기타(인문과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738-6691
  • : 2672-0469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4-2022
  • :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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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권0호(2022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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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후기 양반 여성의 '친정살이'와 새로운 생활환경의 모색 - 진주하씨 묘 출토 한글 편지를 중심으로 -

저자 : 하여주 ( Ha Yeoju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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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7세기 전반에 작성된 진주하씨 묘 출토 한글 편지를 통하여 2대에 걸친 시집살이와 더불어 시작된 '친정살이' 문화를 확인하였다. 양반사회는 종법제 강화를 꾀하며 유교식 혼례인 친영례(親迎禮)를 변용함에 따라 시집살이를 현실화하였다. 그 영향으로 부계 질서 강화와 유교 젠더 규범 확산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양반사회의 형성과 지속은 가문 간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였으므로 남편이 부인을 일방적으로 젠더 위계질서에 배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본고의 분석 대상인 17세기 전반의 자료만 보더라도 부인 측이 남편 가문보다 더 높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성은 본인 집안에 들어온 여성을 며느리·어머니·부인으로서 시집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방도를 마련해야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여성들은 본인의 부계 질서 권력을 적극 활용하여 친정살이를 실현하여 새로운 생활환경을 창출하고 시집살이에 나름대로 적응하였다. 이로써 부부와 두 집안은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면서 물적·인적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


This paper confirmed the culture of 'married life in a woman's native home' that began with two generations of married life through a Korean letter excavated from the tomb of Ms Ha written in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The aristocratic society sought to strengthen the patriarchal clan system and came up with a new marriage method of Joseon, which is a mixture of tradition and Confucian weddings. As a result, there was an opportunity to strengthen the paternal order and spread Confucian gender norms. However, on the other hand, the aristocratic society was formed and continued based on the interests of the families, making it difficult for the husband to unilaterally place his wife in gender stratification. Looking at the data from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which this paper analyzed, the wife had a higher social position than her husband's family. Therefore, men had to come up with an appropriate way to adapt the woman who entered the family to the market price as a daughter-in-law, mother, and wife. At the same time, women created a new living environment by realizing their own family life and adapted themselves to married life in a woman's in-laws'. As a result, the couple and the two families were able to share material and human exchanges while establishing a smooth relatio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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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식민지시기 재일조선인 여성과 '교회' 공간의 구성

저자 : 홍양희 ( Hong Yang-he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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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식민지시기 재일조선인 여성들이 구성한 교회 공동체를 공간구성의 정치학, 즉 삶의 공간들 사이의 사회적 정치적 역학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고자 하였다. 특히 재일조선인 여성들이 일하던 공장, 그 공간 속의 재일조선인 여성은 민족적/인종적 위계, 노동자라는 계급적 위치, 그리고 여성 젠더라는 젠더 위계가 교차되는 존재였다. 이들이 점하고 있던 이 세 가지 관계의 위치성은 각기 별개로 존재하기 보다는 서로 교차되고 얽히면서 그 관계성의 가장 하위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삶을 더욱 고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들에게 다가온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인 여성 공동체로서의 '교회'였다. 사회적 정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차단된 재일조선인 여성들에게 교회 공동체는 이들에게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이를 적극 이용하여 자기실현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이주 사회에서 여성들이 몸담고 있는 여러 공간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통해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 공간은 젠더 이원론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시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조선기독교회의 여성들이 남긴 증언집이나 그의 후손들에 의해 증언된 구술 자료들에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그녀들의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회 공간에는 단순히 여성 주체화의 역학이 온전히 실현된 공간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젠더 차별의 맥락이 존재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들에게 그 공간 자체는 일정한 사회적 저항성을 담지한 자기실현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본 연구가 재일조선인 여성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차 작동되던 권력 관계에 의해 구성된 사회적 관계의 구성체로서 '교회' 공간을 이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This paper attempted to examine the 'church' community composed by women in Jap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politics of spatial composition, that is, the social and political power among the spaces. In particular, the factory in Japan where Korean women worked, was the space crossing the ethnic/racial hierarchy with imperial Japan, the class position of workers, and the gender hierarchy. These three positions they occupied crossed and entangled with each other, making the lives of working women more difficult. One of the things that came to them here was the "church" as a Korean women's community. For Korean women in Japan, whose conditions for realizing social and political desires were blocked, the Christian community could be a space to satisfy their social needs. And women actively used it to make it a place for self-realization.
In the end, it can be said that 1) the church was constructed through the relationship among the various spaces in which women were in the migrant society. And 2) The space had a complexity that was difficult to define as gender dualism. This is because the political and social aspects of them are revealed in the testimony book left by women of the Korean Christian Church in Jap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While there is a context of gender discrimination in the church space, which is difficult to interpret simply as a space where the dynamics of women's subjectivity are fully realized, on the other hand, for women, the space itself was also a space of self-realization.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church' space as a composition of social relations composed of power relations that were operated in various ways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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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60-70년대 서울의 도시공간 변화와 여성 버스안내원의 노동

저자 : 조민지 ( Jo Minji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9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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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시기 정부가 추진하던 근대화 프로젝트는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자본과 인구가 이동하며 끊임없는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실제 도시공간에서 일어났다. 이 과도기는 구성원들이 공간에 대해 가지는 감각을 재편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그 핵심에 이동수단의 변화가 있었다.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할 때마다 도시공간의 구성과 구성원들의 일상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현장에 배치된 서비스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노동의 종류도 달라졌다. 정부가 도시의 교통체계를 재편하고 업자들이 그 속에서 수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이동에 따르는 위험은 물론 이동수단의 변화에서 소외된 구성원들의 불만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현장에서 취약한 지위의 여성 서비스 노동자들이 수행한 구체적인 노동이었다. 교통정책의 구체적인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구현하는 버스안내원들은 승객들이 인간의 형태로 가장 먼저 대면하는 시각화된 대중교통 “정책”이고 “서비스”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산해 낸 이동 서비스에서 소외되었을 뿐 아니라, 그 생산물에 부수하는 위험과 차별에 대한 사회적 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The modernization project during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in the 1960s and 1970s took place in an actual urban space where capital and population moved and caused constant imbalances. The changes in transportation means were the core of the sense of space for the participants in this project. Whenever a new transportation technique emerged, the composition of urban space and the daily lives of its members changed, and likewise the manual of the service labor in the field. For the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as well as profits from it, it was necessary to manage the risks in the field and control the dissatisfaction of the alienated. What made this process possible was the practical labor performed by female service workers in the field. This is because the female bus attendants, who directly implemented the transportation policies in the field, were the incarnated image of “policies” and “services” that passengers could daily encounter. In conclusion, not only were they alienated from the mobilities they produced, but the female bus attendants also had to cover the cost of the risks and discrimination that accompany the produ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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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수치스러운 몸 - 성적 불능과 근대 한국의 남성성 -

저자 : 최장락 ( Choi Jangra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1-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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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한국의 신문 의학 상담란에서 목격되는 '수치스러운 몸'에 대한 남성들의 고백을 타자성의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역사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체와 섹슈얼리티의 새로운 규범이 형성되던 근대 한국에서 남성성이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이탈하는 남성들은 무엇을 경험했는지가 이 글의 관심사이다. 이 글은 특히 남성성을 정의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성과학의 외부에 있던 성적 쾌락의 문제에 주목한다.
'연애'와 같은 근대적 섹슈얼리티가 조선에 도입됨에 따라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여성 성욕의 (재)발견이다. 여성의 성욕은 더 이상 부정될 수 없었으며 이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담론이 부상하였다. 근대적 일부일처제는 여성의 성욕을 적절히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었다. '삽입 중심주의'와 '질 오르가즘의 신화'가 혼합된 성차별적 담론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지만, 이는 여성의 성적 쾌락을 가시화하는 효과를 보였다. 그리고 남성 중심성 이데올로기의 반작용으로서 남성들은 성적 쾌락을 생산할 수 없는 자기신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남성 역시 성차별적 신체 규범을 내면화함에 따라 '남성성'의 척도를 벗어나는 타자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 남성들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수치심은 자기 신체를 바라보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유발된다. 수치심은 자기 외부의 규범을 내면화한 자신의 시선과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계기를 동시에 갖는다. 개인의 사생활이 대중매체를 통해 하나의 오락으로 변모하는 시대였기에 남성들은 자신의 비밀이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 놓이게 되었다. 남성의 성적 불능은 '이혼 소송'과 같은 사건의 서사화로서 사적 공간을 벗어나 공개되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타자화된 신체의 증명과 다름없었으며, 결국 남성들의 수치심이란 정상성에 동일시 할 수 없는 자기 신체에 관한 의식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감정이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historize male confessions about the 'shameful body'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objectification. The focus of this paper is what masculinity was in modern Korea, when new norms of body and sexuality were formed, and what men who deviated from it experienced. This paper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the problem of 'sexual pleasure' outside of sexology.
One of the changes that occurred with the introduction of modern sexuality such as 'love' in Korea is the (re)discovery of female sexual desire. Female sexual desire could no longer be denied, and the discourse that it should be satisfied emerged. Modern monogamy was an institutional means to properly manage women's sexual desires. Sexism, which was a mixture of "the centralism of insertive orgasm" and "the myth of the vaginal orgasm," was still repeated, but this showed the effect of visualizing women's sexual pleasure. And as a reaction to male centric gender ideology, men began to be conscious of their own bodies that could not produce sexual pleasure. Men also experienced the objectification as they internalized this body norms.
The feeling that these men usually felt was shame. Shame is caused by being aware of the existence of others looking at their bodies. The trigger for shame is one's own gaze that internalizes the norms outside one, and at the same time, another's gaze that exists outside one. Since it was an era when individual privacy was transformed into an entertainment through the mass media, men were placed in tension that their secrets might be revealed. Men's impotence was revealed outside of private space as an 'story' such as 'divorce litigation'. Being a spectacle was same with the proof of the objectified body, and in the end, men's shame was an emotion that arose from their consciousness of their body that could not be identified with norm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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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애화된 섹슈얼리티와 냉전의 성 정치 - 퀴어장애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 영화의 '성불구' 재현과 남성성(1960∼1972) -

저자 : 김은경 ( Kim Eunky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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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퀴어-장애의 교차적 관점에서 1960∼70년대 한국 영화 <이생명 다하도록>, <충녀>, <밀월>의 남성 '성불구' 재현을 분석했다. '성불구'와 같은 장애화된 섹슈얼리티의 등장이 한국 남성성의 주변부적 특징을 드러낸다고 보고, 그것이 냉전기 정상성 정치와 성·재생산 통제의 생명정치에 연루되어 있음을 밝혔다.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성 '성불구'의 문화적 재현이 등장하게 된 주요 배경은 냉전기의 성 정치 변동이다. 이데올로기적 정상성을 구축했던 냉전 정치가 이원젠더-이성애 정상성을 주조한 젠더 정치와 상호구성되는 과정에서 '정상적' 신체/섹슈얼리티 규범이 탄생했다. 이러한 정상 신체 규범의 강화는 서구와 아시아에서 폭넓게 확인된다. 하지만 그 양상이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다. 장애화된 남성 섹슈얼리티의 등장은 냉전의 최전선이자 '주변부'인 한국에서 남성성의 위기와 주변성을 드러낸다. 전쟁으로 육체적 손상을 입은 상이군인, 가족계획사업으로 부계혈연주의적 생식 관념이 도전받게 된 남성 가부장, 이성애 규범을 위반한 결혼제도 밖의 퀴어들은 새로 짜인 성·재생산 매트릭스에서 '성불구'의 신체로 재현되었다. 둘째, 연구에서 분석한 영화들에서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존재로 간주한 '성불구자'가 '정상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다. '숭고한 피해자'이지만 '정상성'에서 일탈한 존재로 비추어졌던 상이군인의 성적 욕망은 신체 손상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간주되었고 사회적인 욕망으로 순치되었다. 가족계획사업 추진 이후 남성의 이성애적 욕망과 쾌락은 옹호되고 부추겨졌지만, 양질의 인구생산을 위해 생식능력은 제어되었다. 이에 반해, 가족제도 밖의 동성애적 욕망은 아예 차단되고 단죄되었다. 요컨대, 냉전기 남성 섹슈얼리티 규범은 성적 쾌락과 생식능력을 무조건 옹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 다른 욕망으로 회유되거나 적절히 조절되거나, 또는 단죄되어야 했던 위계화된 생명정치의 장이었다.


This paper analyzed the reproduction of male “impotence” in Korean films between the 1960s and early 1970s, such as Isaengmyeong dahadorok (To The Death), Chungnyeo (Insect Woman), and Milwol (Honeymoon), from the perspective of queer/disabled studies. Regarding the fact that the appearance of disabled sexuality like “impotence” reveals changes in Korean masculinity, this study analyzed types of production in films that show various spectra. First, changes in sexual politics of the Cold War are the primary background in which the cultural reproduction of male “impotence” appeared. In other words, the 'normal' body and sexuality norms were created in the process of interconnecting the Cold War politics that formed the ideological normality and the gender politics that cast the dual gender-heterosexual normality. Second, the films analyzed in this study showed different methods used by “impotent” men, the “abnormal” and pathological beings, to acquire “normality.” The sexual pleasure of disabled soldiers who have damaged bodies was turned into social desire. In addition, whereas the sexual pleasure of male patriarchs in the bedroom was protected and encouraged by family planning programs to maintain the marriage system, their reproductive ability was controlled to produce a high-quality population. On the contrary, homosexual desires outside the family system were blocked and convicted entirely. In short, from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time, the male sexuality norms did not advocate sexual pleasure and reproductive ability unconditionally. They were hierarchical biopolitics that sometimes had to be conciliated by other desires, regulated adequately, or convi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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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10년대 뉴욕의 급진 잡지 『대중』에 나타난 성과 사랑의 담론

저자 : 김정화 ( Kim Jeonghwa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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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는 여러 급진적 작가와 예술가, 사상가와 운동가에게 일종의 정치적 해방구이자 저항적 문화 게토였다. 『대중』은 바로 이 그리니치빌리지에서 1911년에 창간되었고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1917년 폐간된 사회주의를 표방한 급진 잡지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은 사회주의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활동했던 여러 급진적 예술가, 작가, 사회운동가 등이 잡지의 무료 기고자로 나서 새로운 예술의 스타일과 사상을 전했다. 『대중』은 1910년대 그리니치빌리지를 지배했던 반란의 시대정신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가장 잘 표현하였는데, 특히 참정권 이후 페미니즘의 의제인 자유연애와 출산 조절 같은 섹슈얼리티의 쟁점을 담았다.
물론 『대중』에서 기존의 참정권 운동과 새로운 페미니즘을 분명하게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참정권 이후 여성운동의 새로운 논제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미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무엇보다 감정의 자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성적 사랑이라는 테제가 새로운 페미니즘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출산 조절 운동은 이러한 변화의 시발점이면서 동시에 결과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대중』에는 노동 계급 독신 여성의 자유연애와 성적 탐색이라는 은유가 강력하게 등장한다. 『대중』에 나타난 성과 사랑의 담론에 주목하면 새로운 페미니즘의 다채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대중』의 담론은 분열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분열과 갈등을 통해 20세기 초 페미니즘 역사의 복잡다단한 실상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In the 1910s, Greenwich Village in New York was a form of political liberation and resistance cultural ghetto for many radical writers, artists, thinkers and activists. The Masses is a radical magazine that advocated socialism, founded in 1911 in Greenwich Village and closed in 1917 because of its opposition to the United States' participation in World War I. However, Interests of The Masses were not limited to socialism. Several radical artists, writers, and social activists who were active in Greenwich Village at the time were free contributors to the magazine to convey the style and ideas of new art. The Masses best expressed the spirit of the rebellion that dominated Greenwich Village in the 1910s in both form and content, especially the issues of sexuality such as free love and birth control, which are the agenda of feminism after suffrage.
Of course, The Masses did not clearly distinguish between the existing suffrage movement and new feminism, but there was already a consensus in that a new topic of the women's movement should be presented after the suffrage. And now, above all, the theme of freedom of emotion and sexual love based on it has emerged as an issue of new feminism. The birth control movement was both the starting point and the result of these changes. Thanks to this atmosphere, the metaphor of free love and sexual search of working-class single women appears strongly in The Masses. Attention to the discourse of sex and love in The Masses reveals the colorful appearance of new feminism. Of course, the discourse of The Masses surrounding sexuality was divided, but through such division and conflict, it will be possible to approach the complex reality of the history of feminism in the early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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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20년대 여성쿠클럭스클랜(Women of Ku Klux Klan)의 활동과 KKK의 성 정치

저자 : 김인선 ( Kim In-su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5-25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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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1920년대 쿠쿨럭스클랜(Ku Klux Klan; 이하 '클랜'으로 줄임) 운동에서 여성쿠클럭스클랜(이하 '여성클랜'으로 줄임) 활동의 의미를 여성사적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불타는 십자가 아래서 피의 맹세를 하며 흑인, 유대인, 가톨릭, 이민자를 상대로 극단적인 혐오와 폭력을 휘두른 클랜에 여성 단원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여성들이 적극적인 여성참정권 주창자였다는 사실이다. 지역 사회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클랜여성들은 선거 개입부터 로비활동, 문화선전, 자선사업, 교육개혁 및 마을정화운동을 전개하며 전 방위에서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정치 실현에 앞장섰다.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여성클랜은 통상 150만의 대규모 회원을 자랑하는 전국 조직으로 성장한다. 1920년 여성참정권 획득 이후 전국 최대 규모의 가장 영향력 있는 우익단체가 된 것이다. 여성클랜은 클랜의 하부조직이 아님을 강조하며 미국 여성의 시대적 소명을 주창했다. 앞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전략적으로 가정을 이용해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한 공감을 끌어냈듯이, 이들 또한 가정의 수호와 여성성 보호를 앞세워 인종주의와 반(反)-가톨릭, 반(反)-유대인, 반(反)-이민의 깃발을 치켜들었고 미국 전역에서 여성들의 폭발적인 호응과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성클랜은 극우파 정치의 수동적 공모자가 아니라 인종주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백인우월주의 유지에 적극 앞장선 주체적 행위자였다. 이 연구는 여성클랜 탄생을 통해 클랜의 이중적 성 도덕, 젠더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극우 정치운동이 성을 전유한 방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activities of the Women of Ku Klux Klan in the Ku Klux Klan movement in the 1920s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s history. There were the women who swore a bloody oath under a burning cross and wielded extreme hatred and violence against blacks, Jews, Catholics, and immigrants. Even more surprising was the fact that these women were active advocates for women's suffrage. Based on the network of the local community, the Women of Ku Klux Klan took the lead in realizing extreme white supremacy politics from election intervention to lobbying, cultural propaganda, charity work, education reform, and community cleanup. From 1923 to 1930, the Women's Klan grew into a national organization, boasting a massive membership of 1.5 million. In the 1920's, it has become one of the largest and most influential right-wing organization in the USA. Emphasizing that the Women's KKK were not a sub-organization of the Ku Klux Klan, it advocated the vocation of American women. Just as the feminists of the previous generation strategically used the family to draw sympathy for women's political participation, they also put racism, anti-Catholic, and anti-Jewish by defending the family and protecting femininity. It succeeded in eliciting explosive responses and voluntary participation from women across the United States. The WKKK was not a passive accomplice in far-right politics, but a subjective actor who voluntarily participated in racism and actively took the lead in maintaining white supremacy.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way in which the far-right political movement appropriated sex by examining the Klan's dual sexual morality through the birth of the Women of the Ku Klux K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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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60-1980년대 프랑스 여성의 '몸'과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논쟁 - 피임 및 낙태 합법화 과정을 중심으로 -

저자 : 신은정 ( Shin Eunjeo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5-28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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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9일 프랑스 보건부 장관 올리비에 베랑(Olivier Veran)은 2022년 1월 1일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는 25세 이하 여성들에게 무료로 피임수단 및 약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21세기 프랑스에서는 피임, 임신중절에 대한 논의가 큰 문제가 아닌,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나 20세기 프랑스 사회는 그렇지 못하였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 보다 일찍이 인구감소를 겪은 프랑스는 1920년 피임과 낙태 금지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지금까지도 20세기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한 법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후 피임 합법화 논의는 대중 사이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권으로 들어오며 다양한 논쟁을 야기하였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프랑스는 1967년 12월 28일 마침내 피임 합법화 법('뇌비르트 법')을 제정하였다.
피임 합법화를 이룬 프랑스 여성들은 안주하지 않고 68운동 이후 집단시위 경험을 토대로 낙태 합법화 운동을 이끌어갔다. 피임 보다 낙태 논쟁은 더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대 사회부터 낙태는 가장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기에 낙태 합법화 논의가 더욱 치열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71년 '343명의 선언', 1972년 '보비니 재판'은 프랑스 사회에서 낙태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 충분하였다. 낙태 찬성 여론이 형성되자 정치계에서도 낙태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안이 되었다. 일부 보수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낙태가 인구감소를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1975년 1월 17일 낙태 합법화 법('베유 법')을 공표하였다. 해당 법은 통과 이후 총 4번의 개정을 통해 낙태 가능 주수, 제약 등의 문제점을 계속 보완해갔다.
이 논문에서는 2기 페미니즘 시기인 1960-1980년대 피임 및 낙태 합법화를 둘러싼 프랑스 여성들의 '몸'과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중심으로 피임과 낙태 합법화 문제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뇌비르트 법과 베유법 제정과 이후 현재까지 관련법의 변화를 통해 이 두 법이 갖는 역사적 함의를 고찰하였다.


On September 9, 2021, Olivier Véran, French Health Minister, announced that women under the age of 25 living in France will be provided with contraceptives and pills without cost from January 1, 2022. In the 21st century France, the discussion on contraception and induced abortion is considered as an issue to be solved, not a very controversial one. However, a century ago, this was not the case. France experienced a decline in population earlier than other European countries and enacted a law that banned contraception and abortion in 1920. It is still considered one of the laws controlling women's bodies by the state. The debate on legalizing contraception has caused various controversies not only in the public but also in the political sphere. After fierce debates, France finally enacted a law to legalize contraception('Neuwirth Law') on December 28, 1967.
French women who achieved the legalization of contraception did not settle for that, and led the movement to legalize abortion based on their experiences of mass protests after May 1968 events. Abortion has sparked fiercer debates than contraception. This was natural because abortion has been considered as a challenge to fathers' authority since ancient times. However, 'Manifesto of the 343' in 1971 and 'Bobigny trial' in 1972 were enough to form public opinion in favor of abortion in France. As public opinion was formed, this became a matter that should not be taken a backseat in the political sphere. Though some conservatives and the press pointed out that abortion would lead to a decline in population, a law to legalize induced abortion('Weil Law') was promulgated on January 17, 1975. After the law was passed, it has been amended four times and the number of possible weeks and other restrictions have been modified.
This thesis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contraception and abortion legalization putting focus on the legalization of contraception and abortion in the 1960s - 1980s, the second feminist period, and various debates over the 'body' and 'self-determination' of French women and through the enactment of Neuwirth Law and Weil Law and the changes of related laws since then, studies the historical implications of the two laws. In chapter 1, the relationship with the legalization of abortion is analyzed by dealing with the process of legalizing contraception in France after the enactment of Neuwirth Law in 1967. In chapter 2, we looks at the fierce social atmosphere in the early 1970s by examining the sluggish follow-up measures after legalization of contraception and the political and religious debates surrounding the legalization of abortion. In chapter 3, we studies how Neuwirth Law and Weil law are operating in France now after the legalization of contraception and abor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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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고려 현종비 원성태후 김씨의 혼인과 그 영향

저자 : 신수정 ( Shin Sooj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2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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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안산김씨 김은부의 딸이며 현종의 왕비가 된 원성태후 김씨를 통해 그 가문이 명망가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안산김씨는 시조에 해당하는 김긍필의 관직 활동이 드러나지 않고 그 아들인 김은부의 경우도 그리 높은 벼슬에 있지 않아, 그 위상이 왕실과 결혼할 정도는 아닌 가문이었다. 그러나 비상시국인 거란 침입으로 왕과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즉 거란의 침략으로 현종이 피란하는 중 어려움을 겪을 때 지방관 김은부가 극진히 대접한다. 이를 기억한 현종은 거란이 물러가자 환궁하는 길에 김은부가 지방관으로 있는 공주에 들르게 된다. 이때 김은부는 맏딸에게 왕의 의복을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그녀는 현종의 비가 되었다.
맏딸이 궁에 들어가면서 안산김씨 가문은 부상하게 된다. 아버지 김은부는 지방관에서 중앙관으로, 최후에는 고위직인 중추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더구나 원성태후가 왕비가 된 후에는 추증직을 통해 아버지 김은부 외에 조부 김긍필, 외조부 이허겸 등은 높은 벼슬을 얻게 된다. 김은부의 두 아들은 고위직에 오르거나, 국사로도 활동한다. 김은부의 다른 두 딸도 현종의 후비가 되어 모두 3명의 후비를 배출한 가문의 위상을 갖게 된다. 외가인 인주이씨도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원성태후가 왕실과 혼인하면서 친가와 외가에 영향을 미쳐 고려 전기의 대표적 명망가문에 속하게 된 것이다.
원성태후는 후비의 지위 중 낮은 궁인으로 출발하여 자녀를 낳으면서 점차 지위를 높여가 원주, 궁주를 거쳐 왕비로까지 책봉된다. 처음부터 왕비가 아니었고 자녀를 출산하면서 그 지위를 높이고 마침내 왕비가 되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게다가 왕실근친혼으로 종실녀 왕비가 주를 이었던 광종 이후 왕실에서 처음으로 비종실녀 왕비가 나오게 된다.
또한 그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이 중 두 아들이 모두 덕종, 정종으로 즉위하며 왕실 계보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덕종이 즉위하면서 그녀를 태후로 추증하여, 이 역시 비종실녀 출신의 태후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궁인에서 출발하여 왕비가 되었으며, 비종실녀로 왕비가 되고, 비종실녀 소생의 덕종과 정종을 통해 비종실녀 태후가 되어 왕실의 변화를 가져온 주목할 만한 고려 왕실 여성이라 할만하다.


This is a study on Empress Dowager Wonsung(원성태후), King Hyunjong's queen consort in Goryo. She brought changes in her family and the royal family after the marriage, so I would like to focus on her influences.
Her father was Kim Eunbu(김은부) of Ansan Kim clan. Before the marrige between King Hyunjong and Empress Dowager Wonsung, the Ansan Kim clan was not that qualified to get married to the royal family because his official rank was not high enough and the family was not that renowned.
Her marriage with the king was possible under the circumstance of the war between Goryo and Kitan. King Hyunjong came to Kongju(공주) to evacuate from the war. When the king was in difficulties, Kim Eunbu showed his loyalty to the king bringing some food and clothes to console the king. When the war ended, the king revisited and stayed in Kongju, where Kim Enbu had governed, for six days on the way to return the palace. Therefore, the first daughter had a chance to get married to the king. After the marriage the Ansan Kim clan could become a well known family in Goryo.
In the beginning of the marrige, her position was one of the concubines of King Hyunjong. As she bore him a crown prince and three children, her position had been promoted. At last she became a queen consort, and it was the first queen consort who did not come from the royal family since King Kwangjong(광종). Her son came to the throne as King Dukjong(덕종), so he was also the first king whose mother was not from royal family since King Kwangjong. Dukjong gave her the title of empress dowager Wonsung after her death, so she became the first empress dowager as a non-royal queen consort since King Kwangjong.
Therefore, I think that she was a notable figure who brought some shifts for her own family and the royal family in Gor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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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세기 말 혼구(婚具) 자료에 나타난 사대부 혼례문화의 특징

저자 : 김연수 ( Kim Yeonsoo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3-370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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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문서 물목단자의 일환인 '혼구(婚具)' 자료를 통해 조선사회의 혼례문화상을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혼구 자료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논지를 보강하는 차원에서 활용되었다면, 이번 연구에서는 전면적으로 중심 사료의 역할을 하며 새로운 연구방법의 하나로 분석되었다.
앞으로 보다 발굴될 자료가 많겠지만 현재까지 수집된 4종의 혼구 자료로서, ①보은 화순최씨가에 소장된 「남녀혼인졔구男女婚姻具(1891)」, ②안산 진주유씨가에 소장된 「婚具(19세기 후반)」, ③『광례람』의 「昏禮諸具(1893)」, ④『현토주해 사례편람』의 「구식혼례 혼구단자(1924)」가 그 대상이 되었다.
선행연구를 통해 이들 자료가 작성된 지역 및 작성자의 정치적 성향이 다름을 확인하였지만 기록연대가 19세기 말(3종)에서 20세기 초(1종)이라는 점, 상류층의 부유한 사대부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이들 혼구의 공통점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전국 각지의 권위 있는 사대부가의 혼례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내용을 통한 특징으로는 첫째, 조선후기까지 여가에서 혼례식을 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입증되었으며, 그 현실적 원인으로서 여가의 혼구 준비량과 지출비용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공주·옹주·궁주 등의 왕녀가 사대부가에 출가하며 형성된 왕실 혼례문화와의 관련성을 타진해보고, 일부 물품에 대해 중앙관청에서 대여하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셋째, 계례의 상징인 족두리는 혼전이 아닌 혼후 우귀 때 시가에서 사용되며, 해당 의례를 통해 부녀자의 전유물로 자리 잡았음을 추론하였다. 마지막으로 넷째, 혼구는 가시적인 물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비단 현상뿐 아니라 조선시대 혼례와 관련된 그림 해석에도 상보적인 관계를 취하고 있어 보다 정확한 분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This paper was designed to understand the wedding culture of Joseon society through "wedding equipment(Hongu,婚具)" data, which is a part of the ancient document's Mulmok danja(物目單子). In the meantime, if it has been used to reinforce the thesis partially and piecemeal, this study has been analyzed as one of the new research methods, serving as a central data overall.
There will be more data to be discovered in the future, but there will be 4 types of mixed data collected so far ① 「Man and Woman Marriage article (男女婚姻具,1891)」 owned by the Hwasun Choi Clan in Boeun, ② 「Marriage article(具婚,the end of the 19th century) owned by Ansan Jinju Yoo Clan, ③『Gwangrye-ram(廣禮覽)』 「Marriage article(昏禮諸具,1893)」, ④ an old-fashioned marriage article(1924)」.
Previous studies have confirmed that the area and political orientation of these data are different, but it was found to be quite similar in that the record date was from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and targeting wealthy aristocrats of the upper class. In particular, it is noteworthy that it has the representation and symbolism of the weddings of prestigious aristocrats throughout the count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First, it can be confirmed once again that the wedding ceremony was held in leisure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actual cause was that the preparation amount and expenditure of leisure were overwhelmingly high. Second, it was seen that the culture of royal weddings formed by royal daughters such as princesses, ongju(翁主), and Gungju(宮主), etc. deeply penetrated and became similar to their marriages in the 19th century, and that the goods were rented by the royal government. Third, it was inferred that the Jokdu-ri(簇頭里), the symbol of Gyerye(筓禮), was held in the city during the right period after marriage, not before marriage, and that it became the exclusive property of women through the ritual. Lastly, since Hongu(婚具) records visible items, it has a complementary relationship not only with the phenomenon of silk but also with the interpretation of paintings related to weddings in the Joseon Dynasty, enabling more accurate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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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적(어) 없는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서사화와 역사적 상상력 -

저자 : 허윤 ( Heo Yoo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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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역사적 주제다. 특히 2015년의 한일합의 이후로 여러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양적 증가는 '대중을 지향하는 공적 역사 표현의 모든 형태'로서 공공역사와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 있다. 대중을 위한 역사라는 관점에서 공공역사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서사화된 구조가 더 강력한 소구력을 갖는 것이다. 이때 텍스트를 해석하는 중심에 민족주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공공역사 담론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강화된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분명해지고, 대항적 서사는 삭제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의하는 인기 역사강사들이나 영화 <허스토리> 등은 이러한 민족국가 경계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사유한다. 그러나 최근 <1945>나 <공주들>과 같은 연극은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면서, 일본인 '위안부'나 한국군, 미군 '위안부' 등을 연결시키면서 '위안부' 재현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트랜스내셔널한 접근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군 '위안부' 문제와 성산업을 연결시키며 '위안부'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탈낭만화된 역사적 상상력은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문화적 기억이 공공역사의 장을 다원화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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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국 여성사와 공공역사의 상호작용 - 현황과 새로운 시도들 -

저자 : 박진빈 ( Park Jinbin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6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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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공공역사와 여성사가 어떤 접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간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유물 및 유적 관리와 박물관 전시에 관련된 영역에서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삶을 전시하는 행위의 역사성을 논하고, 공공역사에서 여성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기획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밝혔다. 그리고 여성사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그 성과물이 공공역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지 사례 조사를 통해 알아보았다. 또한 공공역사의 다양한 방법이 여성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여러 제안과 아이디어들을 살펴보고 그 시사점을 숙고하였다.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발전하고 역사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더욱 확장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공역사와 여성사의 만남이 이루어온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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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성여왕 생애 기록의 검토

저자 : 권영오 ( Kwon Young-oh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9-10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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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진성여왕의 생애 기록을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하여 검증한 것이다. 진성여왕 김만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출생에서부터 장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검증된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진성여왕과 김위홍과의 관계는 후대에 설화적으로 분식된 사적(私的) 관계에 근거한 소문에 의해 재생되고 유포되어 왔다. 『삼국사기』에서 김위홍이 진성여왕과 통했다고 하는 기록은 김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초에 병부령이자 상대등이며, 경문왕계 왕실의 종실 대신으로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배경에 두고 역사적 상관관계를 찾는 연구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부호부인을 진성여왕의 유모로, 김요를 진성여왕의 소자로, 양패를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이라고 한 것도 설화화한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이 후대에 전해진 것으로 당대의 역사적 실체와 거리가 있다.
진성여왕 김만은 868년(경문왕 8년) 아버지 경문왕과 어머니 영화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위로 김정과 김황 두 오빠가 있었다. 갓난아이때 어머니가 죽어 숙모인 부호부인이 양육하였다. 887년 20세의 나이로 즉위하기 직전까지 왕실 가족인 공주나 장공주로서 왕궁의 이궁인 북궁에 거주하였으며, 미혼으로 자식은 없었다. 즉위 후에는 숙부 김위홍과 모후의 역할을 한 숙모 부호부인에게 정국운영을 맡겼다. 30세가 되던 재위 11년(897년) 6월에 조카 김요에게 정치적 실정과 건강의 이유로 선위했고, 6개월 후 왕경의 북궁에서 죽었다. 사후 왕경의 황산에서 화장하여 산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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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 전기 후비의 생활공간과 의미

저자 : 신혜영 ( Shin Hye-yeo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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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 전기 후비는 어디에 살았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고려의 후비는 정궁 밖의 궁(宮)·원(院)의 건물을 보유하며 궁주(宮主) 원주(院主)로 불렸다. 따라서 고려의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서 살았는지, 정궁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후비궁과 정궁 모두에서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왕(夫王) 생전과 사후로 구분하여 후비들의 생활공간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고려의 사회사 정치사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우선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보여주는 사료를 한 데 모아, 후비궁의 공간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후비궁에서 후비의 출산, 왕자녀의 양육 그리고 왕비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들 기록만을 가지고 후비가 자신의 후비궁에 상주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비는 출산 등을 위해 임시로 후비궁에 나갔던 것이다. 후비는 정궁 내 내전에 살았으며 특히 만령전(萬齡殿) 사례로 말미암아 후비는 국왕과 동일한 구역 내에 기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신왕(新王) 즉위 후 정치 세력에 변동이 생기는 것처럼, 정궁 내 후비들의 생활공간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들은 출궁하여 자신의 후비궁에 살았던 반면, 신왕의 친모는 태후의 지위에 올라 계속해서 정궁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태후가 살았던 거소(居所)가 『고려사』 「백관지 입전주부의 '입전(立殿)' 조항임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 혼인 풍속은 서류부가혼으로, 신부집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과 딸을 외가에서 생장하게 하는 것은 외척 성장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왕실과 외척, 공간적으로는 정궁과 외척집의 제3의 장소로서 후비궁이 존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왕 사후 태후가 되지 못한 후비는 자신의 후비궁에 나가 살았는데, 이는 고려에 일부종사와 같은 유교적 관념이 부재한 사회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정궁 내 후비의 거소 변화는 고려 왕실혼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고려의 왕실혼은 일부다처제로, 국왕 생전에 후비 내 차등이 명확하지 않다가 국왕 사후 태후로 높여지는 후비와 그렇지 않은 후비로 서열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고려의 후비제가 생활공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부왕 생전 여러 후비들이 국왕과 동일한 구역에 기거하다가 부왕 사후 신왕의 친모만이 태후가 되어 독립 거소인 태후전을 설치하여 정궁 내에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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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18세기초 사대부가 여성의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 - 영광 영월신씨가 고문서를 중심으로 -

저자 : 김경숙 ( Kim Kyeong Sook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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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18세기초 영월신씨(寧越辛氏) 집안의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청원·소송 활동의 특성을 검토하고, 신정수(辛鼎受) 처 서산유씨(瑞山柳氏)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 여성의 법적 행위와 의사 표현 방식을 검토하였다. 신정수 처 유씨는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선호한 노비를 통한 대소(代訴)·대송(代訟)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남편의 족인 신성중과의 산송, 노비 추쇄를 위한 상언·격쟁 추진, 입후 청원 등 가호 보존, 가계 계승 및 재산권 수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다.
유씨의 친소·친송 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첫째,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유씨는 조선시대 법 규정에 근거하여 친소·친송의 법적 권한이 보장되어 있었고, 이러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노비를 통한 대소·대송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친소·친송을 추진한 것은 선택의 결과로 이해된다. 둘째, 유씨는 법적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당시 사회적 규범 하에 사대부가의 여성이 이해를 다투는 법적 공간에 나가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청원·소송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임을 계속 강조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씨는 자신의 행위와 사고를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과 명분을 자신의 소송 명분으로 적극 활용하며 원고로서의 법적 권한을 실현하고 설득력과 호소력을 높이는 장치로 활용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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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조대 여성 격쟁(擊錚)의 실태와 특징

저자 : 박경 ( Par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1-21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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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내외법과 정절 관념으로 인해 여성의 활동 영역이 제한되었지만 여성의 격쟁은 법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성록』에는 정조대 총 224건의 여성 격쟁 사례가 나타난다. 이 중 가족 죄명(罪名)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155건,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28건인데, 이 두 사안은 정조대 여성 격쟁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사안이다.
먼저 가족 죄명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례는 정조대 여성 격쟁의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 중에서도 남편을 위한 격쟁이 대다수였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활동이 주로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데다 부모, 남편, 형제, 상전을 위한 격쟁이 격쟁 허용 대상인 4건사에 해당된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살옥 죄인인 가족의 억울함을 호소한 격쟁에 대해서 정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받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한 번 더 조사해보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재조사를 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격쟁 원정에서 호소한 내용에 의거하여 살인사건 조사 방향이 바뀌기도 했다. 사안이 4건사에 해당하는데다 정조의 신중한 살옥 심리 방침으로 격쟁을 한다면 관대한 판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기대되는 상황에서 이 시기 많은 여성들이 격쟁 제도를 활용하여 가족을 구명하고자 했다.
다음으로 분쟁 및 관권 남용에 관한 민원 사례는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례들이었다. 개인간의 분쟁 사안은 원칙적으로는 외람된 격쟁으로, 처리해주지 않아야 할 사안이었지만 정조는 권세가가 과부의 돈을 갚지 않은 경우와 같이 '민은(民隱)'에 해당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호소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또, 분쟁 과정에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가 있었다면, 그 관원들을 징벌함으로써 관직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권세가나 관에 의해 권리를 침해받은 경우 격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정조는 격쟁 제도를 통해 살옥 판결에 억울함을 줄이고, 백성들의 질곡을 널리 들어 해결해주고, 권세가의 횡포와 관권의 불공정한 행사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 여성들도 이러한 방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격쟁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생활 기반인 가족 공동체의 권익을 확보해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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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제국기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의 조직과 활동

저자 : 남미혜 ( Nam Mi-hye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9-25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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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05년 7월에 설립된 여성단체 대한부인회가 운영하였던 잠업강습소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1905년 한·일 양국 부인들의 사교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주한 일본공사관 관리의 부인이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에 이옥경이 합세하여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친일적인 성향의 이옥경이 선출되고, 임원에 다수의 통감부 관리 부인들이 임명되었다. 대한부인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잠업강습소를 설치·운영하고자 계획하고 궁내부소속 용산 양잠장을 하사받았다.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는 원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지만, 초기에는 여성 지원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남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여성 입학지원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9년부터는 여성만을 선발해서 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구두시험과 작문·산술 시험을 거쳐 생도를 선발하였으며, 4∼6개월 동안 양잠에 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하였다. 잠업강습소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4년 동안 총 92명의 졸업생 및 수업생을 배출하였다. 잠업강습소 졸업생들은 농상공부 기수로 임용되거나, 관립·사립 양잠학교 교사로 진출하였다. 졸업생 가운데는 양잠학교를 설립한 사람도 있었으며, 양잠학회와 잠업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잠업강습소에서는 양잠 교육 외에도 잠종과 뽕나무 묘목을 배포하거나, 생도 및 지방 양잠가들에게 잠종·양잠 도구의 구입을 중개하였다. 또한 1907년 경성박람회에 양잠 관련물을 출품하기도 했으며, 친잠례 및 황족·고관들의 양잠지도를 하였다. 1910년 2월 일제가 대한부인회 잠업강습소를 관립여자잠업강습소로 개편, 운영하게 되면서 잠업강습소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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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국 근대 초 의료선교사 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의 진료활동과 여성의학교육

저자 : 백옥경 ( Baek Ok Kyoung )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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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는 조선에서 모두 42년간 의료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 조선에 도착한 이래로 1935년까지, 미 감리회 WFMS의 의료선교사로서 메리 커틀러는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광혜여원 등에서 활발한 진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호원 및 의사 등의 여성의료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상시적인 순회진료사업을 실시하여 의료소외지역에 대한 의료혜택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조선에서 여성병원의 안정적 운영을 가능케 하였으며, 여성 자활과 조선인에 의한 여성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데에서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방식의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에도 기여했다. 곧 메리 커틀러의 활동은 여성의료를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었으며, 한국의 여성의료 영역의 확장 과정이었다. 이는 본인 스스로 미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고 의학을 공부하거나, 기독교적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체화된 도전적 여성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이 의료혜택을 향유하며, 전문교육을 통해 간호원으로서, 혹은 의사로서 자립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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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평 : 냉전의 '사이'를 탐구하다: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창비, 2021)>

저자 : 김청강

발행기관 : 한국여성사학회 간행물 : 여성과 역사 3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310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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