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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한국전쟁기 유엔한국묘지(적군 묘지)의 조성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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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유엔한국묘지(적군 묘지)의 조성과 의미

The Significance and Creation of the Enemy Cemetery during the Korean War

전성현 ( Jeon Sung-hyun )
  • : 한국사회사학회
  •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2월
  • : 177-207(31pages)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DOI

10.37743/SAH.132.5


목차

1. 머리말
2. 적군 묘지의 조성 및 관리 배경
3. 적군 묘지의 설치와 매장 현황
4. 맺음말 - 적군 묘지의 의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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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기 적군 묘지의 조성 배경과 실체를 제한적인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요약하면, 적군 묘지의 조성은 표면적으로 국제 인도법인 제네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은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이 아니었지만, 참전과 동시에 곧바로 승인했다. 이 같은 즉각적인 조치는 적진에 있는 미군 전사자의 수습과 송환을 위한 영현관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영현관리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는 1950년 9월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미군 묘지의 일부 구역에 최초로 적군 유해가 매장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이라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대규모의 적군 포로가 발생해 부산에는 약 14만 명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들이 운영되는 가운데 독립적인 제2 적군 묘지가 1950년 12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와 병행해 미군 유해의 자국 송환을 위한 예비적 조치와 유엔군 전사자의 체계적인 영현관리를 위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자, 기존의 미군 묘지는 1951년 4월 중순부터 제1 적군 묘지로 전환되면서 적군 묘지는 제자리를 잡았다.
이들 적군 묘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1954년 8월 조인된 전사자 유해의 인도인수에 의해 1954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면서 현장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기 전까지 부산 적군 묘지에 매장된 수는 제1 적군 묘지 1,691구, 제2 적군 묘지 5,459구, 추모사찰 79구 등 총 8,602구로 전체 인도 유해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 적군 묘지에 매장된 유해는 북한군, 중국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국적의 민간인 억류자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확인을 통해 이장되기도 했지만 외국인도 매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적군 유해 대부분이 매장된 부산의 적군 묘지는 국제인도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군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고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한 영현관리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장자는 북한군과 중국인민군만이 아니라 국군, 민간인(억류자), 외국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묘지였다.
This study examines enemy cemeteries created in Korea during the Korean War. These enemy cemeteries were created in accordance with the Geneva Conventions. However, though the US Army was not a signatory to the Convention, it soon joined after entering the war, which led to a graves registration system for those killed in action and for the repatriation of remains. Therefore, it was not until around September 1950, when graves registration was systematized to some extent, that the enemy remains were first buried in some areas of US Army Cemetery in Busan. Furthermore, the Enemy Cemetery Number 2 was built and started operation in December 1950. At the same time, as UN Military Cemetery was created, the existing US Army Cemetery was converted into the Enemy Cemetery Number 1 in mid-April 1951. While numerous ‘transfer of remains of the dead’ took place after the signing of a repatriation agreement in 1954, the number of burials in the Busan enemy cemeteries was 8,602, including 1,691 in the 1st Enemy Cemetery, 5,459 in the 2nd Enemy Cemetery, and 79 in the Memorial Temple, accounting for 2/3 of the total repatriated remains. The remains buried in these enemy cemeteries include not only North Korean and Chinese People’s Army, but also South Korean soldiers. There were also many civilian internees of different nationalities buried in these cemeteries. Although many were transferred during the verification process, foreigners were also included. These enemy cemeteries in Busan, where most of the enemies’ remains were buried, was not simply a graveyard for the enemy. It was a graveyard with complex significance, for it was not merely one for Korean soldiers but also one that held civilians and foreig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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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300-000939289

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사회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6-5535
  • : 2733-885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6-2022
  • :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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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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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구동태와 호정(戶政) ― 조선시대 호총(戶總)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저자 : 박경숙 ( Park Keong-suk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82 (7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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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호구총수의 자료는 조선 시기의 인구동태를 추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활용되었다. 한편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지역에서 호적들이 발굴되고 전산화되면서 그동안의 호적 연구의 인식론적 가정들을 질문하는 논의들이 확대되었다. 호구총수의 근거가 되는 호적이 작성될 때 상당한 누락과 복잡한 편제가 작용하여, 호구총수의 추이를 그대로 인구동태의 추이로 가정하는 데 비판적인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연구는 호구총이 인구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는지, 호구총에 어떻게 인구동태와 호정(戶政)이 배태되어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호총의 추이와 실질적 인구동태 사이의 관련성을 추론하기 위해 조선 시기 재해(역병)의 기록자료를 검색하여 호총과 재해기록의 추이 사이의 연관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전염병의 빈도 추이와 호총의 추이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6-18세기를 통해 심각한 재해가 지속되고, 특히 재해가 심각했던 시기 호총의 수치도 여느 식년에 비해 뚜렷하게 떨어지는 추세가 확인되었다. 한편 19세기에는 재해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는데 호총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정체되어 그 맥락이 무엇인지 새로운 의문으로 제기되었다. 또한 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에서 재해상황, 호적, 부세, 신분, 가족제도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여 호정(戶政)의 이념과 현실을 해석하였다. 자연호와 편제호의 논란의 쟁점이듯이, 호총이 실제의 호수나 인구동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호총과 그 기록이 복잡한 사회관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관계성이 허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호총에 작용하는 인구동태와 호적 등록율 그리고 호적 편제 양식의 영향을 세심하게 선별하면 맥락타당한 추정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


The Hogu Chongsu, published in the 13th year of King Jeongjo (1789),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have provided key data for estimating the population dynamics of the Joseon period. However, as ho (household) registers for various regions were discovered and computerized in the 2000s, scholars began to discuss the epistemological assumptions involved in ho register research. Significant omissions and a complicated editing process affected the creation of ho registers and, since these were the basis of record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questions were raised about whether the trends seen in those records could be treated as reliable indicators of population dynamics.
This study examines whether the ho registers and total number of households, both of which were produced in the complex context of ho-politics, can be used as population data. It also analyzes how population dynamics and ho-politics are embedded ho registers. In order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recorded in ho registers and actual demographic dynamics, the relationship between registered total number of households and records of disasters (plagues) during the Joseon Dynasty were examined. A very interesting relationship between the frequency of infectious diseases and the figures for the total number of households was found. Serious disasters occurred throughout the 16th, 17th and 18th centuries, and the number of households declined during years of severe disaster. However, whilst the number of disasters recorded during the 19th century was relatively small, the number of households decreased significantly and stagnated over this period, raising the question of why, and in what context, this transpired. To address these questions the study explores how ho politics was strongly related to disaster governance and the politics of tax, social status, and family support. Ho politics sought to secure the ho as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state's system of military, agricultural and financial obligations. The concept of ho insisted that men and women form a family regardless of their social status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observing the three doctrines (samgang). These tenets were easily absorbed by the populace. They were internalized and put into practice through small, male-centered family living units that embodied the three doctrines (samgang) and acted as units of self-reliant survival 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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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후기 근기남인 사족의 '가(家)' 이념에 대한 일고찰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정일균 ( Jeong¸ Il-g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3-139 (5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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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후기 근기남인(近畿南人) 사족(士族)의 '가(家)' 이념의 요체를 당시 근기남인을 대표했던 정약용(丁若鏞)의 사례를 중심으로 일별해보았다. 즉, 그가 제시한바 ① '사족의 가' 개념의 이상형으로서 '유인(幽人)의 삶'을 전제하는 가운데, ② '사족의 가'론과 관련하여 '사족의 가'의 기본구성과 그 확대조직, ③ '사족의 가 윤리'론과 관련해서는 '사족의 제가(齊家) 덕목(德目)'론, '사족의 가례(家禮)'론 및 '사족의 입후(立後)'론의 주요내용과 그 내용적 특징, ④ '사족의 가계경영(家計經營)'론과 관련해서는 특히 '상업적 농업경영론'의 주요내용과 내용적 특징을 차례대로 정리·개관해보았다.
이처럼 정약용이 구상·제출했던 '사족의 가' 이념은 또한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조선사회가 목하 경험하고 있었던 일련의 심대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정약용이 구상·제출한바 상기의 '사족의 가' 이념은, ① 특히 그가 '사족의 가계경영'론에서 그 대상으로 “작록(爵祿)의 계통(系統)을 잃은 사대부가(士大夫家)” 또는 “가난한 사족”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데서 간취할 수 있듯이, 당시 당색(黨色)을 막론하고 몰락해가던 대다수 하층양반의 입장에서 꿈꿀 수 있었던 '거가사본(居家四本)[제가(齊家)·치가(治家)·기가(起家)·보가(保家)]'의 최대치이자, ② 같은 남인(南人)이면서도 영남남인(嶺南南人)의 경우에 비해 근기남인이 가지는 재지적 기반의 상대적 허약함에다 불행하게도 어느덧 '폐족(廢族)'으로 전락하고 만 자신의 가문의 중흥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이 아니었던가 한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cardinal points of 'family'(家) ideology among the nobility (Yangban) of the Southerners (Namin) in Gyeonggi (京畿) districts. It focuses on the case of Jeong Yak-Yong who was a typical example of noble members of the Southerners in Gyeonggi districts. The main conte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① The paper introduces Jeong Yak-Yong's idea that 'the life of a hermit' represents the ideal type of the nobility's concept of 'family'. ② In relation to Jeong Yak-Yong's theory of 'family of the nobility', the basic constituent elements of 'family of the nobility' and its enlarged organizations are examined. ③ In connection with Jeong Yak-Yong's theory of 'family ethics of the nobility', the main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theory of 'virtues for wise government of the nobility's family', that of 'family formalities of the nobility', and that of 'adoption of the nobility's heir' are considered. ④ Jeong Yak-Yong's theory of 'management of household economy of the nobility' is surveyed briefly, with special attention paid to the main points and characteristics of his theory of 'commercial management of agriculture'.
It is clear that the ideology of 'family of the nobility' which Jeong Yak-Yong mapped out and presented was a response to a series of enormous socio-economic changes which Joseon society experienced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18th century and the first half of 19th century. After all, Jeong Yak-Yong's ideology of 'family of the nobility' was probably ① the maximum to which the then lower-class nobility could dream of going forward, and ② a practical plan for the restoration of Jeong Yak-Yong's own family, which had fallen into 'a ruined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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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족보를 활용한 조선후기 인구현상의 이해 ― 전주이씨 『선원속보(璿源續譜)』를 중심으로

저자 : 백광열 ( Baek¸ Kwang Ryeo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17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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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주이씨 대동보인 『선원속보』를 활용하여 조선후기의 출산 관련 현상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지금까지 족보는 자료적 한계로 인해 인구학적 분석에 그다지 잘 이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인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중에 족보는 그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유용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이 글에서는 족보가 가진 인구 자료로서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하여 출산 관련 지표를 도출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 결과 조선후기 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함의를 얻을 수 있었다. 합계출산율 개념을 활용하여, 한 여성이 평생동안 출산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시킬 것이 기대되는 자녀 수인 '합계생존율'을 구해보았다. 전주이씨 집단에 있어 '합계생존율' 값은 17세기 전반기까지 전란으로 인해 매우 낮은 상태이다가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에 걸쳐 상승하였다. 특히, 종래의 일반적인 관찰과는 다르게 19세기 전반기에 이 값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출산 및 인구동태에 관한 인식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비록 완전한 의미의 것은 아니지만, (기록상의) 초산연령 및 평균출산연령도 구해보았다. 이 값은 17세기까지 상승하다가 18세기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이 '합계생존율'의 상승과 병행했다. 18세기 이후에는 기록상 초산연령이 급격히 하강하고 '합계생존율'은 증가하였다. 이에 대해 유아사망율이나 출산율의 관련을 통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한편, 『선원속보』가 왕실 후손의 족보라는 것에서 오는 계층편의를 보완하기 위해 적파/서파를 구분하여 그 인구학적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 결과 서파의 영향이 기록상의 출산아 수에 음의 방향으로 작용함을 관찰하였다. 추후,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분석과 다른 사회와의 비교를 가미한다면 인구 및 사회에 관한 보다 심화된 역사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birth dynamics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utilizing the Jeonju Yi clan's great companion genealogy, The Seonwon Sokbo (璿源續譜, 1900~1902). Until now, genealogy has not often been used for demographic analysis due to data limitations. However, of the available forms of data for understanding the population of the Joseon society, genealogy offers advantages in terms of size and quality. In this paper, in order to solve the limitations of genealogy as a form of population data, various methods were used to derive and analyze fertility-related indicators. The results have several implications for our understanding of birth Dynamic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dapting the concept of Total Fertility Rate (TFR), I calculated the Yi clan's 'total survival rate'. This is the number of children a woman is expected to give birth to and survive to adulthood. In the Jeonju Yi clan, the 'total survival rate' was very low until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due to war, but rose from the late 17th to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The total survival rate stayed at a very high level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a finding which differs from previous observations. This suggests we need to reconsider fertility and population-related phenomena during this period. Although the data was not complete, I also calculated the women's (recorded) average age at first birth and (recorded) mean age at birth. These values rose through the 17th century and peaked in the 18th century. This process coincided with an increase in the total survival rate. After the 18th century women's (recorded) average age at first birth dropped sharply while the total survival rate increased. In this regard, an interpretation was attempted through the relation between the infant mortality rate and the fertility rate. The Seonwon Sokbo has an inherent class bias because it is a genealogy of royal descendants, so, in order to compensate for this, the demographic effects for legitimate and illegitimate son were investigated individually. As a result, it was observed that illegitimacy had a negative effect on fertility. In the future, if we add analysis of various variables and comparison with other societies, we may be able to attain a more in-depth history of population and society during thi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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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병역 대체복무제도의 역사적 구성 ― '잉여자원' 관리와 발전에의 동원

저자 : 강인화 ( Kang¸ Inhw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1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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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병역 대체복무제도가 형성되어온 역사·사회적 과정을 살펴본다. 병역제도의 운영은 국민개병 이념과 징병제 실행 사이의 불일치를 수반한다. 한국사회는 병역의무의 대상에게 현역 군복무를 '대체'하는 의무를 '병역'의 일종으로 요구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운영을 통해 이러한 불일치의 문제를 해결해왔다. 냉전시기 징병제는 안보와 발전의 중첩된 이해를 토대로 방위소집복무, 병역특례 등과 같은 대체복무를 병역제도 안으로 포섭하였다. 대체복무가 제도화되면서 군사활동을 담당하는 현역복무 이외에 이를 대체하는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병역의무'로 개념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정부는 병역 대상자를 현역 군복무 이외의 분야에 동원하던 앞선 시기의 유제를 이용하여 '잉여' 병역자원의 경제·사회적 활용 정책을 펼쳤다. 이때 '공익분야에서의 복무'가 대체복무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대체복무를 포괄하는 확대된 병역 개념에 기초하여 징병제 운영의 전면화와 병역의무의 보편화가 추구되어 왔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y and the social processes of the alternative service system in South Korea. The management of the military service system faces a discrepancy between the ideology of the citizen-soldier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conscription system. Korean society solved these discrepancies by implementing an alternative service system that offers alternatives to military service as a kind of “military duty.” During the Cold War, the draft system included alternative military services such as the homeland reserve service and military service exceptions based on the understanding that development and national security overlap. Various alternative forms of activities were conceptualized as “military service obligations” since the institutionalization of alternative services. After democratization, the government developed economic and social utilization policies for “surplus resources,” based on the legacy of the earlier mobilization of military service personnel to other areas. At that time, “serving in an area of public interest” was a form of military service. Based on the expanded concept of military service, which includes alternative services, the Korean government aimed to manage the universal conscrip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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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성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 1980년대 이후 중국 '부녀회가(婦女回家)' 담론의 전개와 굴절

저자 : 김란 ( Jin¸ La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7-258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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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혁명과정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이 시기 국가 주도로 여성을 노동자로서 위로부터 아래로 주체화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여성노동자 모범이나 노동자 모범가족 선정과 같은 작업을 통해 사회주의 '생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문화적 작업은 당시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시장주의의 도입에 따른 고용유연화로 여성 노동력 감축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부녀회가”라는 문화적 담론의 장이 열렸다. 본 연구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중국 8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와 쇠퇴과정을 반영하는 문화적 흐름을 십년 단위로 전개된 네 차례의 '부녀회가(여성회가)' 담론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시기별로 80년대 단계성취업론, 90년대 기업부담론, 사회발전 단계론, 2000년대 가사노동 찬양, 2010년대 생물학적 모성론 등 다양한 논변이 제기되었고, 그 와중에도 중국 전국부녀연합회의 반대는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서 여성지위의 하락과 쇠퇴의 과정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많은 부침과 격론을 거치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사회주의 시기 여성-노동자로서의 주체화는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했다.


In the early era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labor” was top of the government's agenda. During this period the state led a process of top-down subjectivation that intended to make women into workers. However, after China's reform and opening up, women's involvement in the labor market began to decline and a cultural discourse about “women-going-home” emerged. This study will describe different forms of the “women-going-home” discourse from the 1980s, 1990s, 2000s and 2010s. These reflect the process of change and decline in women's social status since the 1980s. Over this period a variety of debates and ideas arose that reinforced and interacted with the “women-going-home” discourse, including stage employment discourses in the 1980s, corporate burden discourses and the social development stage theory in the 1990s, the praise of domestic labor debates in the 2000s, and biological maternity discourses in the 2010s. Throughout this era the All-China Women's Federation mounted persistent opposition. The decline in women's status in China has not been linear, but instead developed in a complex manner through controversy and argument. From this perspective, the socialist era subjectivation of women laborers remained strong even after reform and open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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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 내몽골 자치구 '다원일체' 민족주의의 구축 ― 왕소군 이미지의 변모 양상과 소군박물원을 중심으로

저자 : 고페이 ( Gu¸ Fei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9-304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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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인 왕소군(王昭君)의 이미지의 변모 과정과 역사 기억의 시기별 특징을 고찰하고, 동시에 현재 왕소군을 활발히 기념하고 있는 내몽골 소군박물원에서의 현지 참여 경험을 토대로 내몽골 지역 주민들의 담론과 심리적 반응을 분석함으로써 비소수민족자치구역인 후베이(湖北)성에 있는 왕소군 기념물과 대비1)되어 나타나는 '다원일체론'적 민족주의를 밝히고자 한다.
상상된 영웅의 과거를 신비롭게 구성하여 국가의 권위를 표출하는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적 영웅의 창출은 훨씬 더 복잡한 논리를 필요로 한다.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왕소군을 여성영웅으로 추앙하여 민족주의 구축의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왕소군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로, 최초 등장한 한나라 시기부터 현재까지 그녀의 이미지는 계속 변모해왔다. 그녀는 민족적 저항, 다민족국가건설, 소수민족통합, 다원일체적 국가 구축 등의 다양한 맥락에서 활용되어 왔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맥락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져 왔으며, 소수민족 우세지역과 한족우세지역에서 그 상징적 가치가 다르게 활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민족주의의 '재소환 및 재기'시기에 북방소수민족지역인 내몽골에서 그녀는 '다원일체' 민족주의 구축의 역사적 소재로 적극 활용되어 왔는데, 이는 페이샤오퉁의 '다원일체론'의 민족주의 이념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t is common for modern nation-states to express the authority of the state by mythicizing an imagined hero's past. But the creation of national heroes in a multinational state requires much more complex logic. China, a representative multi-ethnic country, held up Wang Zhaojun as a heroine during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and used her as a historical resource to help establish a unified national identity. The image of Wang Zhaojun, a historical figure, her image has been constantly changing since her first appearance during the Han Dynasty. She has been used in various contexts, including national resistance, multi-ethnic country construction, minority integration, and pluralistic state construction. Most interesting is that her symbolic value has been used differently in minority and non-minority areas. In particular, in Inner Mongolia, a northern minority region of China, she was actively used as a historical resource for the establishment of “Diversity in Unity” nationalism during the “recall and comeback” period of Chinese 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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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과 반론 : 예술가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어려움

저자 : 이진아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3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1-334 (1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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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0-30년대 “조선인 군중 소요”와 식민지 군중의 정치동학

저자 : 기유정 ( Ki You J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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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20-30년대 식민 공간에서 발생했던 조선인 군중 소요들을 군중의 정치 동학은 무엇인가라는 문제 설정 위에서 크게 4가지의 개념적 틀에 의거해 분석한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군중을 개인의 '상실'이나 계급 혹은 민족의식의 '결여'라는 근대주의적 주체관에 입각해 접근하는 방법론적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했던 것으로서,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사건의 철학'이라는 이론적 문제의식에 입각해 식민지 군중의 동학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당시 소요 사태들을 분석했을 때, 1920-30년대 식민지 군중 소요들은 사건의 발발과 전개 발전 그리고 결과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발성과 구경꾼 심리(혹은 욕망) 변이와 이항화라는 동학에 의거해 그 정치가 설명될 수 있다고 접근하였다. 특히, 본 연구는 이 같은 접근의 과정에서 기성 식민지 정치사 연구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례들을 발굴해 사건의 철학이라는 틀 위에서 접근했을 때, 이 같은 역사적 사례가 어떻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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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30-40년대 식민지/제국의 위문대의 존재방식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6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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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30-40년대 식민지/제국의 위문대의 존재방식에 대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는 다카라즈카에서 조선악극단을 거쳐 위문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조선, 만주국에 걸쳐 순회하는 공연 문화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다카라즈카는 조선의 극단들에게 위문대의 역할모델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문화 권력은 여성 예인을 젠더규범을 통해 순화시키면서 전시체제기의 황군용사라는 남성성을 새롭게 호명하였다. 동시에 그녀들은 일본인 혹은 조선인 황군용사를 직접 찾아가서 무용과 음악을 통해 여성성을 표상하는 위문연예를 수행하였다. 이는 여급과 기생이 만든 위문인형과 위문주머니까지 포함되었다. 위문공연의 관객이자 제국의 남성은 위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동질적으로 상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위문대가 자발적이고 순수했던 오락이나 예능이기보다 문화권력에 의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투영을 위한 매개체로서 전유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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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성대학 총장 알프레드 크로프츠와 미군정 초기 대학정책

저자 : 정병준 ( Jung Byung J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5-127 (6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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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크로프츠는 1945년 10월 17일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12월 7일까지 근무했다. 크로프츠는 미군정 학무국 장교 중 뛰어난 학력(시카고대학 석사, 스탠포드대학 박사), 경력(대학 교수), 성장배경(선교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성장 및 교육) 등을 갖추었고, 또한 경성대학의 재건·복구에 진정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경성대학 총장에 임명된 크로프츠 대위는 경성대학 이공학부와 법문학부에 진주한 미군부대의 철수를 강하게 주장하며, 동양인들에게 대학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주한미군 내 고위 장교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의 재임을 전후해 경성제대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경성제대 직원, 학생,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자치위원회와 미군정 학무국, 한국교육위원회 사이에 벌어졌다. 연희전문 출신 백낙준이 경성제대 임시총장이자 법문학부장에 임명되었고, 그를 배척하는 경성제대 출신들의 반대시위가 이어진 끝에 크로프츠가 경성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경성제대와 사립전문의 주도권 경쟁이자 고등교육의 주도권 경쟁이었다.
총장과 학부장 선임문제에 이어 경성대학 교수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교수 선출·임명권을 둘러싼 갈등이자 경성대학의 권력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었다. 이어서 1945년 12월 10~11일 경성대학 총장후보 추천 투표가 이뤄졌고, 학무국과 법문학부 교수진이 합의한 홍명희 대신 공산당원 김태준이 추천되었다.
이 시점에 크로프츠는 경성대학과 한국에 대한 양심적이고 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고위 장교들과 마찰을 빚었고, 사실상 해임되었다. 크로프츠는 1946년 2월 초 일본으로 전출되었다. 이후 지속적 갈등을 겪은 경성대학은 1946년 여름에 이르자 국대안파동에 직면했다. 이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필적하는 교육분야의 대폭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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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쟁포로의 또 다른 경계 ―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수용소 연구

저자 : 정찬대 ( Jeong Chanda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76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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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초기 북한 인민군은 각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후 전선이 북상하고 수복기가 되면서 군경에 의한 후방 토벌작전이 본격화됐다. 그리고 수많은 입산자들이 토벌과정에서 빨치산 포로로 분류·처리됐다. 이들은 작전지역 내임시수용소를 거쳐 광주중앙포로수용소로 모두 옮겨왔다.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연구는 거제포로수용소에 편중된 측면이 컸다. 빨치산 연구 역시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의 생성 과정과 입산 후 활동 등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전쟁포로로서 어떤 처우를 받고, 어떻게 관리됐으며, 이후 포로처리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빨치산 포로수용소의 실태 분석을 통해 이를 면밀하게 살피고 자 했다. 본 논문은 구술 면담자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뤘다. 이를 통해 빨치산포로들의 처우, 감찰, 신문 과정 등을 들여다본 것은 물론 광주중앙포로수용소의 시설도까지 복원이 가능했다. 또 미군 보고서 등의 분석을 통해 광주중앙포로수용소 현황 및 실태 등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1952년 광주중앙포로수용소는 한 차례 명칭이 변경됐다. '포로'라는 이름을 빼 '광주중앙수용소'로 불린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며 그 배경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초 '민간인 억류자'들이 별도로 분류되지 않은 배경 또한 분석이 이뤄질 수 있었다. 빨치산 포로수용소는 그간 한국전쟁기 포로 연구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 논문은 빨치산 포로를 분석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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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전쟁기 유엔한국묘지(적군 묘지)의 조성과 의미

저자 : 전성현 ( Jeon Su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7-20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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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전쟁기 적군 묘지의 조성 배경과 실체를 제한적인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것이다. 요약하면, 적군 묘지의 조성은 표면적으로 국제 인도법인 제네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미군은 제네바협약의 체약국이 아니었지만, 참전과 동시에 곧바로 승인했다. 이 같은 즉각적인 조치는 적진에 있는 미군 전사자의 수습과 송환을 위한 영현관리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군의 영현관리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는 1950년 9월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미군 묘지의 일부 구역에 최초로 적군 유해가 매장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서울 수복이라는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대규모의 적군 포로가 발생해 부산에는 약 14만 명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들이 운영되는 가운데 독립적인 제2 적군 묘지가 1950년 12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와 병행해 미군 유해의 자국 송환을 위한 예비적 조치와 유엔군 전사자의 체계적인 영현관리를 위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자, 기존의 미군 묘지는 1951년 4월 중순부터 제1 적군 묘지로 전환되면서 적군 묘지는 제자리를 잡았다.
이들 적군 묘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1954년 8월 조인된 전사자 유해의 인도인수에 의해 1954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면서 현장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북한으로 유해가 송환되기 전까지 부산 적군 묘지에 매장된 수는 제1 적군 묘지 1,691구, 제2 적군 묘지 5,459구, 추모사찰 79구 등 총 8,602구로 전체 인도 유해의 2/3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들 적군 묘지에 매장된 유해는 북한군, 중국군뿐만 아니라 국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국적의 민간인 억류자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확인을 통해 이장되기도 했지만 외국인도 매장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기 적군 유해 대부분이 매장된 부산의 적군 묘지는 국제인도법에 따른 것이지만 미군의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고 본국으로 후송하기 위한 영현관리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매장자는 북한군과 중국인민군만이 아니라 국군, 민간인(억류자), 외국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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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쟁기념관의 전시를 상대화하기 위해 기획된 두 전시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와 < 허락되지 않은 기억(RESTRICTED) >의 내용을 소개하고, 전시 기획의 과정 및 실제 전시 과정에서 발생한 쟁점과 사회적 '소란'과 논란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기념관의 전시는 군인의 관점에 기반해서 전투사 혹은 전사(戰史)로서 재현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 두 전시는 전쟁포로와 민간인이 겪은 전쟁 체험을 부각하려고 시도했다. 관점의 전환 자체가 한국전쟁이 전시로서 재현될 때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또 민간인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절대로 발발하면 안 되는 사건임이 강조되었다. 이 두 전시를 통해 전시 장소의 상징성이나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를 전시로 다루는 방식, 전시에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 등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 사회 '금기'의 일단이 드러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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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70년대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과 교관의 교육 경험 다시 읽기

저자 : 윤충로 ( Yoon Chung-r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1-28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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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교육은 새마을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던 문화적 기제인 동시에 그 자체가 대규모 국가동원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 교육의 중심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었다. 이 연구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교육을 통해 국가의 의도가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전달되는 미시적 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관 2명의 구술 자료를 중심으로 이들의 교육 경험과 일상, 연수원 교육의 특성을 재구성했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교관의 활동 공간이었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특징을 검토했다. 둘째, 연수원 '교관되기'와 '교육 일상'을 교관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셋째. 교관의 교육 업무를 그들의 '노동 경험'으로, 그리고 연수원 교육을 일종의 '집합적 열광'의 구축과정으로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또한 교관의 상징적 의미와 교육의 효과를 살펴봤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은 국가의 대중정치, 대중동원 방식, 이와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동의기제 형성과 그 한계의 구체적 일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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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95년 이후 정신보건정책에서 나타난 '정신질환자'의 정의 ―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변화

저자 : 이정연 ( Yi Jungye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3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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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95년 '정신보건법'의 제정 이후 정신보건정책에서 '정신질환자의 정의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를 고찰한다. 약 25년간의 정신보건정책 역사는 정신보건법의 제정·개정 과정과 정신보건사업의 변화를 토대로 분석된다. 이를 기반으로 정신질환자의 정의변화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정신보건법 제정 직후까지 정신질환자는 주로 만성적인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서 전문기관의 격리 입원이 필요한 자들로 규정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질환자는 중증질환자뿐 아니라 정신질환의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사람, 그리고 일상적인 정신관리가 필요한 사람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신질환자', '정신장애자', '기능저하 정신질환자'라는 개념이라는 혼재했다. 이후 정신질환자는 중증질환자만 지칭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정신보건정책은 대상과 방식이 분리되어 '정신질환'과 '정신건강증진'의 이중적 관리체제로 분화되었다. 지역의 통합적 관리체제 속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강화되었고 전 국민 대상의 정신건강증진사업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적 정의변화에도 불구하고 '강제입원의 대상자'라는 내포적 정의는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강제입원의 정당성은 정신보건정책의 법제화와 제도화 속에서 권리, 보호, 돌봄의 논리를 통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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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여성의 배우자관 ― 여성지 『연변여성』의 「오작교」란을 중심으로

저자 : 방미화 ( Fang Meihua ) , 예성호 ( Rui Shenghao ) , 김흠 ( Jin Xi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3-37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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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연변여성』의 「오작교」란에 대한 텍스트 마이닝 분석을 중심으로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여성들의 전통적인 성별분업 지향의 '역행'현상에 고찰하였다. 1960~1970년대 조선족 여성들이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은 노동자, 군인 등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인 1980~1990년대에는 공무원, 사업가 등으로 변화되었으며, 사업이 있는 남자, 사업심이 강한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배우자 선택관의 변화는 국가의 경제체제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체제 하의 여성들의 취직난, 경제체제 변화에 부응한 남성들의 창업, 나아가 1980~1990년대 조선족 여성들의 이중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변화 등 요소들이 맞물려 여성들은 사업이 있거나 사업심이 강한 남자를 선호하면서 자신들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지향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맞이하며 여성들이 사업심이 강하고 사업이 있는 배우자를 선호한 것은 결코 혼인에서의 자유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남성에 의탁하여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비사회에 진입하면서 여성들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해 부의 축적을 욕망하는 등의 시대적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 성 역할의 강화 내지 지속은 조선족 여성들이 젠더 정체성 수행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가부장적 문화는 단번에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들의 행위에 의해 지속, 해체, 생성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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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독도론(獨島論) ― 군사주의를 넘어서

저자 : 전경수 ( Chun Kyung 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3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9-432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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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독도에 관련된 군사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군사주의적 인식을 해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41년 대동아전쟁 발발로 인하여 미일관계는 적대적으로 급선회하였고, 미국은 그때부터 군사적인 차원에서 태평양체제를 운영해왔고, 연합군의 일본“점령” 통치를 겪으면서 태평양체제에도 일련의 변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작금 미국은 대중국/대러시아 용의 군사적인 인도태평양체제를 확립하였다. 즉 과거의 태평양체제가 인도 태평양체제로 전환함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화에는 미일적대의 관계로부터 미일동맹의 관계로 변화한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태평양체제 속에서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과거의 태평양체제보다도 더욱더 밀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일관계의 변화가 독도 영유권이라는 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 예측적 관찰에 대비함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부차적인 목적이다.
1900년 독도의 영유권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포고령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일언 반구도 않고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노일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대한제국의 동해안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강압적 협약을 맺었다. 노일전쟁의 승리가 목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일본정부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공문을 작성하였다. 그 과정에는 일본해군의 수로부장을 역임하였던 키모츠키 카네유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하는 것이 본론의 일부이다. 본고에서 독도론의 배경에 깔린 군사주의를 논하는 전반부에 해당되는 내용인 키모츠키의 역할과 노일전쟁 중의 일본해군의 군사적 활동을 살펴본다. 독도의 영유권에 얽힌 두 번째의 군사주의적 맥락은 미국해군과의 관련성에서 논증된다. 일본에서 변호사 업무의 경험을 갖고 있는 윌리엄 시볼드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미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였고, GHQ의 일본점령 통치기간에는 외교국장을 역임하였다. NARA에 보관된 GHQ시대의 자료에 의하면, 미해군이 작성한 지도는 점령후 일본의 영토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축소된 지도를 제시하였다. 그 속에 표기된 독도는 “Korea”의 소속으로 명기되어 있다. GHQ의 초기 자료에도 일본영토의 표기에 있어서 최소원칙은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GHQ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본고에서 지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직전에 윌리엄 시볼드는 “타케시마”는 일본영토라는 의견서를 제출하였음도 확인되었다.
변화된 태평양체제를 배경으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미국과의 군사적·외교적 관계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제 변화된 태평양체제보다도 더욱더 미일관계가 밀접한 인도태평양체제 속에서 독도 영유권의 문제가 어떠한 지위에 놓일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독도의 영유권에 개입되어 온 군사주의적인 상황들이 앞으로 전개가능한 군사주의적 변화체제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등장할지에 대해서 심사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와 관련된 군사주의에 개입되어 있는 미국의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영유권 외교를 전개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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