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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반계 유형원의 화폐유통론과 상업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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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형원의 화폐유통론과 상업인식

Bangye Yu Hyeongwon’s Discourse on Currency Circulation and Recognition of Commerce

송양섭 ( Song Yang-seop )
  • : 한국사상사학회
  • : 한국사상사학 6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2월
  • : 175-220(46pages)
한국사상사학

DOI

10.31309/SKHT.69.202112.5


목차

머리말
1. 유형원의 화폐인식과 당대의 행전책(行錢策)
2. ‘동국통보(東國通寶)’의 발행과 보급방안
3. 관설포자(官設鋪子)의 설치와 화폐유통책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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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의 화폐론은 공전제(公田制)에 입각한 농업사회의 운영을 위한 하위영역이자 국가적 재분배 체계의 중요한 매개역으로 다루어졌다. 유형원은 동전분송(銅錢分送), 재정지출, 점포설치 등을 통한 화폐의 유포, 그리고 조세의 대전납(代錢納)을 통한 회수라는 양 방향의 경로로 제시하여 하나의 순환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시 화폐유통책과 동궤를 이루는 것으로 총통화량의 산정은 공전제의 세수(稅收)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경비(經費)=상세(常稅)’로 지칭되는 재정총량을 기준으로 삼았다. 유형원의 행전론이 철저하게 국가의 재정·부세와 관련된 물류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폐유통과 물류의 거점으로서 포자(鋪子)는 상업이 과도하게 발달하여 농업을 해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과세를 통해 적절히 관리·통제되었다. 아울러 유형원은 지방 각 군현의 공장(空場)은 모조리 없애고 그 기능은 포자(鋪子)·참점(站店)이 흡수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장시철폐 및 규제론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장과 상업은 화폐유통·물자재분배와 관련하여 농업사회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철저히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통제하고자 한 것이 핵심이었다.
Yu Hyeongwon, on his discussion on the currency, considered currency as the significant medium of the redistribution system of resources, where it is subordinate to the operation of agricultural society based on Gongjeonje (公田制; public land system). The idea that Yu suggested consisted of two-way circulation system: money would be disseminated by dispensation of the copper currency, expenditure of the governmental finance, and establishment of stores, while it would be retracted by tax payment in the form of coins. This was aligned with the coin circulation system of the time: the estimation of the total amount of currency would make up the total amount of finance, indicated as Gyeongbi (經費; the Expense), and it was equal to Sangse (常稅; the constant tax revenue) collected from Gongjeonje. Yu’s discussion of coin circulation was comprehensively aiming the logistics of the state finance and taxation. Poja (鋪子; stores), the hub of coin circulation and logistics, was controlled and managed by taxation, so it could inhibit the situation where the development of commerce would harm the agriculture. In addition, Yu planned the markets in local counties and prefectures to be abolished and their functions to be absorbed into Poja and Chamjeom (hostels and lounges). This was the extension of the discourse of regulating local markets at the time, and the core idea was that the state should take control of the markets and commerce thoroughly so the agricultural society could be protected in the currency circulation and resource allocation.

UCI(KEPA)

I410-ECN-0102-2022-100-000964904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944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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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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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기식 『유교유신론』의 집필 계기와 '유교청년' 기획

저자 : 이현정 ( Lee¸ Hyun-j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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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유교 담론 중에서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송기식의 『유교유신론』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유리된 채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유신론』에서 제시하는 '유교 현대화론'은 저자를 비롯한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이자, 1920년대 신문 매체의 담론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였다.
송기식은 자신이 지닌 유교 지식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다수의 서간문을 주고받았다. 선배그룹으로부터의 영향은 물론이고, 특히 동료/후배그룹과는 서간문을 통해 후진 양성에 방점을 둔 교육 사업을 중시하고 있음을 논했다. 이러한 후진 양성에 대한 관심은 종국에 『유교유신론』 집필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집필 내용은 다시 동료에게 요약 전달되면서 주변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유교 지식인 내부의 논의와 더불어, 『유교유신론』은 집필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1920년대 신문 매체의 유교 비판 논쟁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 후 현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후속 세대 양성에 관심을 갖고 청년들의 비판과 세대론에 주목하였다.


Song Ki-sik's Confucian Revitalization Theory(1921), considered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among the modern Confucian discourses in Korea, did not appear apart from the context of the time. The Confucian Revitalization Theory presented in 'Confucian Modernization Theory' was a discourse within the author and other Confucian intellectuals, and a result of being deeply conscious of the discourse of the newspaper media in the 1920s.
Song Ki-sik exchanged a number of letters using his network of Confucian intellectuals. In addition to the influence from senior groups, he discussed in a letter with colleagues and junior groups that he emphasized educational projects focusing o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This interest i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eventually served as an opportunity to write Confucian Theology. As the contents of the writing were summarized again to colleagues, it became a discourse within the surrounding Confucian intellectuals.
Along with the discussions within Confucian intellectuals, the Confucian Revitalization reflects the context of the period at the time of writing. The text recognized the controversy over Confucian criticism presented by the newspaper media in the 1920s, critically reviewed the contents, and suggested a modernization plan. In particular, it paid attention to the criticism and generational theory of young people with interest i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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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지식인의 서양 번역서 독해방식: 전병훈,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소진형 ( Soh¸ Jean-h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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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의 분석을 통해 서양식 교육을 받지 않은 조선 지식인의 서양서적 독해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한 글로 평가되어 왔지만, 실제 이 텍스트의 서양사상 부분을 검토해보면 그가 서양사상을 그 자체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기존 번역서 중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발췌하고 모아서 구성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특히 『정신철학통편』의 2권 14장, 15장을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출판되었던 번역서 및 개론서와 비교해보면, 전병훈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고 서양사상을 수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초가 발견된다. 전병훈이 인용한 책들은 『법의(法意)』, 『철학요령(哲學要領)』, 『철학강요(哲學綱要)』, 『심리학개론(心理學槪論)』 등으로, 그 번역자들은 엄복, 채원배, 왕국유였다. 이들은 서양 철학 개념에 대한 번역어가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태극(太極), 리(理), 성(性)과 같은 동양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번역에 반영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어의 선택은 전통적인 언어로 책을 독해하는 전병훈과 같은 사람들의 자의적 독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전병훈의 서양철학서의 독해방식을 검토하고 근대 초기교육의 체계 없이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양 사상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This article aims to scrutinize how Korean intellectuals who did not acquire a Western-style education read translated Western texts through an examination of Jeon Byeonghun's Jeongsin cheolhak tongpyeon. His book has been praised for integrating Eastern and Western philosophy; however, when we compare it to the translations he read, we can see that he wrote his book by taking bits and pieces from the translations he read and weaving them together. He had mostly read Western books translated by Yan Fu, Cai Yuanpei, and Wang Guowei, in which the translators intentionally and unintentionally borrowed the core terms of Eastern philosophy to use for the translation of Western philosophical terms. The translators' practice contributed to Jeon's liberal reading of Western philosophy and his own way of interpretation; due to the terminology, he came to believe that Western philosophy was concerned with li, xing, xin, and taiji and that he was free to read the works. Jeon's instance is significant because it demonstrates how intellectuals who did not receive a contemporary education would place Western literature in Eastern intellectual contexts and read them through an Eastern l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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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녀필지(少女必知)』의 특징과 지향

저자 : 이정민 ( Lee¸ Jung-mi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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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20년대 편찬된 조인석(趙寅錫, 1879~1950)의 여성교육서 『소녀필지(少女必知)』를 통해, 식민지시기 유교 관습의 척결과 문명개화를 주장한 지식인이 집필한 여성교육서의 특징과 여성 인식을 검토하였다. 저자는 신구 문명의 갈등으로 촉발된 가족의 붕괴, 근대자본주의와 식민지배라는 현실로 야기된 여성 빈곤의 현실을 분석하고, '신구 문명의 공존' 및 '노동을 통한 가난의 극복'이라는 두 화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한 기존의 여성교육서와는 매우 다르다. 성현의 언행 대신 본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서술하였고,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성녀(聖女)' 대신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여성들의 사례를 수록하였다. '가문의 번성을 위한 여성 교육'을 중시한 종래의 여성교육서와 달리 여성 교육을 '여성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남녀유별 의식보다 부부간의 애정과 위생의 문제를 거론한 것도 이 책의 근대적 특징이다.
저자는 구여성과 신청년 간의 갈등으로 인한 이혼과 별거의 증가, 구여성 시모와 신여성 며느리 간의 갈등 등 신구 문명의 충돌에 주목하였다. 이에 구여성에게는 구습의 탈피와 신지식 습득을 강조하고,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혼당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반면 신여성에게는 서구 문명과 가난한 조선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고, 구생활의 노동과 살림을 배워 현실에 안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둘 다 여성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 조언이었다고 하겠다.
저자는 또 자본주의가 유입되던 식민지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이에 돈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하고 가난을 합리화하지 말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를 통해 가족의 붕괴를 막고 가난을 극복하며, 무엇보다도 경제의 멸망을 막는 것이 식민지하에서 종족을 보전하는 궁극의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Examined in this article is a Female Education text called So'nyeo Pilji (少女必知, What Every Girl Should Know), authored in the 1920s by a Korean modern intellectual named Jo In-seok(趙寅錫, 1879-1950).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Jo In-seok called for the abolition of old Confucian practices, and strongly supported the idea of cultural enlightenment. This text effectively reveals Jo's perception of females, as well as certain 'tasks' which he thought women should take on in the future. In his eyes, the two biggest problems that were threatening the very survival of the Korean females were collapse of families and poverty, which were brought on by clashes between old and new ways and not to mention the advent of modern capitalism to a colonized land, so his suggestions were all based on that very observation.
This book wa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other female educative texts of the time, which had mostly dealt with traditional values. Words from 'Past sages,' the usual component of traditional texts, were replaced by stories and episodes from the author's past experience and even imagination. Instead of promoting females who could only be called as Women saints(聖女) symbolizing Confucian values, Jo's book is filled with stories of females stuck in tough economic situations. Unlike past female educative texts that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female education onlhy in terms of 'Building prosperous families,' Jo claimed that female education was imperative because it was vital to the women's survival. He also discussed the importance of 'love(affection)' between spouses and the issue of sanity, instead of stressing on traditional notions like 'different roles of spouses.'
Jo In-seok was keenly aware of the 'clashes' that were happening between old and new ways, represented by sudden increase in separation and divorces between spouses (especially between new-age males and old-style females) or conflicts between females (particularly between old-style mothers-in-law and new-age daughters-in-law). He asked the old-age females to break free from old customs and learn new things, and especially not to allow themselves to be divorced in economically handicapped situations. Then he also asked the new-age females to acknowledge the rift between Western civilization and the Joseon society's reality, and try to eventually fit in by familiarizing themselves with old labor and living styles. Both suggestions were of a nature that prioritized female survival.
Jo was also very concerned about female poverty in colonized Joseon, which was also witnessing at the time the onset of Capitalist aspirations unfolding on a larger scale. He pleaded that the Joseon people let go their prejudice and misconception of money, do not in any way justify poverty, and engage in proper labor to overcome their poor reality. It was his belief and his suggestion, that only by doing so the Joseon society could prevent collapse of the families, further spreading of poverty, and ultimately keep the economy in tact and save the Korean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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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탐라기년』에 담긴 심재 김석익의 의식과 시각에 대하여

저자 : 김새미오 ( Kim¸ Saemi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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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심재 김석익(心齋 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대한 제반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 글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탐라기년』의 서지사항을 정리하였고, 실증적 사실추구, 유교문명의 제고, 표류에 대한 재인식의 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용과 시각을 정리하였다. 이어 저작이 차지하는 학술적 위치를 정리하였다.
『탐라기년』은 필사본과 연활자본이 전해진다. 원본인 필사본은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연활자본은 1918년 영주서관에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탐라기년』은 탐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심재는 본격적인 제주 역사기록에 앞서 「외서(外書)」라는 항목을 두어 탐라시대를 따로 구분하였다. 탐라는 제주사람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지만, 문헌기록은 많다고 할 수 없다. 심재는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외서」를 써 내려갔고, 이를 통해 탐라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심재는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역사로 해석하려하지 않았다. 이에 『탐라기년』을 서술하면서, 부족하거나 보충 서술이 필요한 부분은 '부(附)' '안(按)'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기술하였다. 이런 방식을 통해 심재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 후세의 검증을 기다렸다.
유교문화에 대한 심재의 기술은 제주도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살펴보았다. 제주는 무속 문화가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심재는 병와 이형상의 신당철폐 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유교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교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조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며, 이는 일제강점기 유교지식인의 문투(文鬪)로 평가할 수 있다. 바다에 관한 인식 역시 주목된다. 이는 제주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이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재가 기록한 표류와 표착에 관한 자료는 예전에 있던 다른 서적들 보다 그 양이 많다. 그만큼 심재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재의 『탐라기년』은 지금까지 제주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다. 기존에 있던 역사저술이 대부분 외부인이 제주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면, 『탐라기년』은 제주사람이 제주를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Tamlaginyun written by Shimje Kim Suk-Ik. It first identifies the three bibliographic items of Tamlaginyun and further examines their meanings. The items identified are: seeking for positivist truth, improvement of Confucius civilization and perceptions regarding floating. Tamlaginyun has currently both a transcript copy and a lead printed copy. The original transcript copy being located in Jeju National Museum, the lead printed copy was published in Yongjuseogwan in 1918, this further being widespreadly recognized. Tamlaginyun documents, in a chronological form, historical facts for the periods from Tamla to modern. Prior to getting into recording history of Jeju, Shimje put Tamla period under the separate heading of a foreign book. Even though Tamla is very critical to the identity of Jeju islanders, documented records are not impressive. Shimje aimed to put in order Tamla history under the heading of a foreign book drawing upon evidence-based documents. Shimje put himself significantly cautioned to interpreting as a history those unidentifiable through documents. In this reason, in writing Tamlaginyun, he prepared separate appendix headings(附, 按) in order to provide supplementary explanations. Through this, he corrected existing misguided perceptions and waited further verification by leaving the unidentifiable for future generations.
In describing confucius culture, Shimje looked into a specific situation of Jeju. It is because Jeju is a place in which shamanism culture is very strong. He believed that the abolishment of shamanism temples by Byungwha Lee Hyung-Sang would bring Jeju into a place where confucius culture could prosper. Shimje's emphasis upon confucius culture can be read as considering Joseon positively, which is also a literary battle through which confucius scholars kept their identities living the Japanese occupation years. It is worthwhile to pay attention to his perception of seawater. This is because the geographic perceptions of Jeju islanders got to broaden. The volume of materials that Shimje recorded concerning floating and drifting ashore are much greater than the previous ones. We can be hinted that Shimje made a great effort in documenting these subjects. Shimje's Tamlaginyun transforms the way Jeju is perceived so far. While Jeju and its history having been documented by non-native scholars to Jeju, Tamlaginyun holds very important implication in that it is written by Jeju island born native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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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와 의미

저자 : 이민기 ( Yi¸ Min-ki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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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圜丘)제사는 유교적 성격을 가진 국가의례 가운데 위상이 가장 높은 제사이다. 고려왕조는 정월 상신일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인 상제와 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에게 송아지[犢]을 잡아 바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물을 처리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가운데 특이점을 도출하여 환구제사의 성격과 의미를 가늠해 보았다.
고려 환구제사에서는 희생이 신을 맞이하기 위해 적합한 상태인지 점검하고, 도살한 뒤 머리·피·몸통을 분리한다. 분리된 희생의 머리와 피는 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신단계에서 사용되었다. 몸통은 삶은 후 별도의 제기에 담아 각 신좌 앞 제사상에 올렸으며, 국왕·태위·광록경이 헌작한 다음, 요단에서 제사상에 올렸던 고기와 제물들을 태워 신을 돌려보내는 과정을 거쳐 제사를 종결하였다.
고려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희생의 머리를 태워 연기를 내는 행위로서 신을 맞이 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이 행위는 고려초 성종대 환구제사 설행 초기가 아닌 고려중기 예종대부터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두 번째는 모혈, 그 중에서도 '피'의 문제이다. 고기로부터 분리된 피가 '생명력', '생동감'이라는 본연의 상징성을 토대로 희생의 신선함을 부각시키는 실용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피가 제거된 깨끗한 희생물로써 제사대상에 대한 예우를 극대화한 외양 또한 연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The Round-Altar Rite(圜丘祭祀) was the most important and in fact highest Confucian ritual a government of a pre-modern dynasty could ever hold, and so it was in Goryeo as well. Every Sangshin day in January, the Goryeo King would offer a calf(犢) to the Heavenly King(Sangje) and the Founder King Taejo Wang Geon, hoping for a generous yield that year.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those sacrifices were processed, while the nature and meaning of the rite itself is contemplated as well.
The animal to be offered as a sacrifice was first examined to make sure it was in adequate shape to be offered to deities in the ritual. Then it was killed, and the head would be severed from the body while blood was removed as well. The head and blood were later used to invite the deity, and the body was boiled to be offered in bowls. After the King and officials paid respect, the meat and other items were all burned in an act of bidding farewell to the departing spirits.
There were two unique aspects in Goryeo Round-altar rites, in terms of the treatment of the sacrifice. First, the animal's head would be burned to make smoke that would guide the spirit to the service. This practice does not seem to have originated with the initiation of the ritual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but instead later on during King Yejong's reign. Secondly, the blood of the animal seems to have harbored a fairly symbolic meaning. Other than its own image of vitality and liveliness, blood separated from the meat signified the freshness of the sacrificed animal, while a cleanly processed bloodless body would generate the appearance of honoring the deities with the utmost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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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정국(金正國)의 『성리대전서절요』 편찬과 대체군주론(大體君主論)

저자 : 최민규 ( Choi¸ Min-gy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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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정국이 편찬한 『성리대전서절요』를 통해서 기묘사림 내부의 군주론, 군신관계론의 한 특색을 살피고자 했다.
김정국은 기묘사화 이후에 기묘사림들의 『성리대전』 연구를 계승해 『절요』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지주제의 확산 속에서 몰락하는 농민들, 그리고 반정과 사화가 연쇄하는 정국 현실을 목도하면서 군주 주도의 정치론 모색 차원에서 『성리대전』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절요』의 체재 역시 원래 『성리대전』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대」, 「군도」, 「치도」 등 정치사상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을 긍정하는 목차와 언설을 활용해서 요약했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김정국은 『성리대전』에 담겨 있는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긍정하면서 『절요』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절요』의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강조하는 특색이 드러난다. 그는 군주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는 군주가 정무의 최고 주재자로서 대체를 장악하는 가운데, 군신 간의 협력을 촉구하는 대체군주론을 바탕으로 『절요』의 군주론을 정리했다. 실제로 그는 군주수신론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실질적인 정무주재자로서 군주가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군신관계에서도 군주의 독단에 의한 정치는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신료들의 자정을 촉구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그는 군주와 재상이 같이 정치할 것을 말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보는 재상은 경세적 자질인 재와 도덕적 능력인 덕을 겸비한 실무재상이었다. 그는 실무재상론을 통해서 관료층의 실무에 대한 자질 강화, 그리고 그 내부의 자정 촉구를 통해 관료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요약하자면, 김정국의 『절요』는 중종 대의 정치·사회 문제를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발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절요』가 양반사대부 일반의 정치론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성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군주권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한 명종 대 집권세력이 주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This paper tried to examine one characteristic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uler and the subject through the 〈Seongri daejeonseo jeolyo〉 compiled by Kim Jeong-guk.
Kim Jeong-guk succeeded in the study of 'Seongri Daejeon'(『性理大全』) of the Gimyo sarim(己卯士林) and compiled 'Jeolyo'(『節要』). However, while witnessing the decline of peasants amid the spread of the land tenure system, and the political reality of a chain of 'literati purges'(士禍) and 'The Restoration of Righteousness'(反正), he paid attention to 'Seongri Daejeon' in terms of seeking a monarch-led political theory. Accordingly, the format of 'Jeolyo' was also summarized into political ideologies, which occupies a small proportion in the original 'Seongri Daejeon', and in the table of contents affirming the monarchcentered political operation and Much of the content structure was quoted. From this, it can be seen that Kim Jeong-guk compiled 'Jeolyo' while affirming the monarch-led political theory contained in 'Seongri Daejeon'.
Also, in terms of the content of 'Jeolyo', the characteristic of emphasizing the monarch-led political theory is revealed. In the part related to the monarch theory, he arranged the monarch theory of 'Jeolyo' while supposing the role of the monarch as the supreme ruler. In fact, he said that the monarch should be moral, but he emphasized that it was the means by which the monarch could function as a de facto ruler rather than constraining the monarch. At the same time, in term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arch and his subjects, he criticized the monarch's arbitrary politics, but similarly urged the rectification of the subjects' excessive media activity. Based on this position, he said that the monarch and the prime minister should govern together. His ideal prime minister was a working-level prime minister with both governmental and moral capabilities. He urged the normal operation of the bureaucracy by strengthening the qualifications of the bureaucrats in practice through the theory of practical re-employment, and by urging for self-correction within the bureaucracy.
In summary, Kim Jung-guk's 'Jeolyo' was an idea to solve the political and social problems of the reign of King Jungjong by strengthening the monarchy. However, this fact caused the attention of the ruling powers of the Myeongjong era, who sought ways to strengthen the monarchy within the framework of Neo-Confucianism, rather than being accepted as a general political theory by the yangbansadae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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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동법에 동조했던 '공(貢)'의 경세 담론들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43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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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납제를 대체했던 대동법은 조선 후기 다수의 유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전국적 단위의 세제로서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대동법에의 동조'라는 지점에서 본다면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만, 그로부터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전후의 맥락을 조망한다면 이 지점을 교차했던 다양한 담론들이 논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이에 본고는 고법(古法)에 대한 이해를 출발점으로 개혁의 지향(指向) 종착점으로 설정하고, '대동법에의 동조'를 경유했던 경세 담론들을 분별적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확인된 상이한 네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을 고법으로 간주했으나, 현실에서는 이를 '시의(時宜)'에 맞게 경장(更張)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서인계 경세가들을 중심으로 한 유자들에게 비교적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고법에 있어 임토작공(任土作貢)은 제후가 천자에게 납부했던 후공(候貢)에 한정되는 한편, 백성이 군주에게 진납하는 민공(民貢)의 경우에는 대동법과 마찬가지로 수미(收米)의 방식이 시행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고법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시 둘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토지 사유의 현실을 용인하는 바탕 위에서 대동법을 전조와는 별도의 세목으로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토지에 대한 차등적인 재분배를 달성한 토대 하에서, 대동세의 명목을 전조의 일부로 용해시키는 입장이다.
넷째는 삼대에는 9직(職)이 전업을 이루었으며, 공(貢)은 이들에게 각자가 생산한 물품을 납부케 한 직공(職貢) 즉 직업세였다는 견해이다. 정약용이 이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러한 고법으로서의 직공을 경세의 지향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현실의 조선은 사회적 분업이 전업적 산업체계로 성숙되지 못했던 까닭에 이것이 당장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산은 한편으로는 직공의 시행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조선 산업의 다각화와 전업화를 추동할 방안을 제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동법이 비록 그에게 이상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직공 시행의 이전 단계에서 그것이 지니는 제도사적 의의를 긍정했다.
공(貢)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유학적 이상과 조선 후기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유자들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경세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로써 펼쳐진 스펙트럼은 경세라는 유학의 본령과 시대적 요구에 당시 유자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었음을, 또한 지향하는 목표의 근거와 모델을 고법의 재해석을 통해 '발견'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경세학을 유학적 이상과 조선적 현실, 그리고 미래적 지향 사이의 다층적 학술 담론으로서 입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Gong(貢), Daedong Law(大同法), Imposing Tribute upon Regional Products(任土作貢), Old Law(古法), Tribute System, Hwang Shin(黃愼), Lee Yoo-tae(李惟泰), Kim Yuk(金堉), Jo Ik(趙翼), Yu Hyeoung-won(柳馨遠), Jeong Yak-yong(丁若鏞), Occupational Tax(職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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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저자 : 나종현 ( Na¸ Jo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7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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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윤증의 배사 문제는 노론에서 끊임없이 소론에 대한 공격 논리로 활용하였던 것이었다. 『가례원류』 사건을 거치며 숙종의 처분으로 윤증의 배사가 '공식화'되면서, 배사론은 단순한 공격 논리를 넘어 하나의 정치론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사문(師門)의 입장을 수호하려 하였던 호론계 권상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배사론은 호론계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스승에게 학문적으로 반발한 혐의를 가지고 있던 권상하 문하의 이간은 스승에 대한 글을 지어 윤증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낙론 계열의 이현익 또한 윤증의 배사 문제를 논하면서 윤증과 그를 옹호한 나양좌를 비판하였다.
경종대의 신임옥사와 영조대 초반의 의리 문제를 거치며 배사론은 충역론과 결합하여 노론 의리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권상하로부터 호론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한원진은 배사의 문제를 충역과 연결하고, 스승과 군주를 배신한 난적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원진과는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여 논쟁을 벌였던 이간 또한 배사론과 충역론에 근거하여 노론 의리의 관철과 소론에 대한 강한 징토를 주장하였다.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배사론이 단순히 그들의 태생적 배타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국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영향력이 변화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development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Ho-ron's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problem of Yun Jeung's betrayal of his master, Song Si-yeol, was that Noron had constantly used as an attack logic against So-ron. However, after the fact that Yun's betrayal was formalized by King Suk-jong through the controversy over 『Garyewonryu(家禮源流)』, it could served as the political theory of Ho-ron. Here, Kwon Sang-ha, who tried to defend the position of his school, played a great role. This allowed the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had a greater effect than before. Yi Gan, Kwon's diciple, who was accused of protesting against his master, wrote a text about the master. In this text, Yi criticized Yun and defend his own position. Yi Hyun-ik, a member of the Nak-ron, also criticized Yun Jeung and Na Yang-jwa, and defended the position of his own school.
Through the King Gyeong-jong's reign and the early King Yeong-jo's reign,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was used as a mechanism to emphasize the legitimacy of Noron loyalty. Han Won-jin, who was considered as the heir of Horon, argued that the So-ron had betrayed the master and King Gyong-jong and King Yeong-jo should punished them drastically. This appearance was also revealed without much difference in Yi Gan, who was philosophically arguing with Han. Yi also revealed same political ideas with Kwon-Han line's, which runs from the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to the theory of 'betraying own king'. Consider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Ho-ron's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in the early 18th century, it can be seen that the theory was not simply due to Ho-ron's inherent exclusivity, but the status and influence of the theory changed according to the changes in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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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불교사에서의 구산선문 개념 검토

저자 : 강호선 ( Kang Ho-s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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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구산(五敎九山)은 포광 김영수 이래 고려시대 불교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었다. 선종 구산문의 성립은 신라하대 수용된 선종이 나말여초 사회변동 속에서 각 지역에 자리를 잡는 과정이자 결과였고, 고려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김영수가 고려선종사를 구산문으로 설명한 이래, 교과서는 물론이고 여러 개설서에서 나말여초불교의 변화 및 고려 선종을 구산선문[선문구산]으로 설명해 왔다. 『고려사』나 금석문 등 당대 사료에 구산이라는 용어는 여러 차례 나오지만, 이것이 아홉개의 개별산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사례는 찾기 어렵다. 1084년(선종 1) 구산 문도들도 3년에 한번씩 승과를 볼 수 있게 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현재까지 확인되는 “구산문”에 대한 가장 오랜 것이며, 현재 알려진 아홉 개의 산문과 그 개산조는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 처음 정리되어 있다. 구산은 승과시행과 불교교단 정비로 대표되는 고려전기 승정 확립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의천의 천태종 개창으로 인한 선종계의 변화를 반영하듯 고려중기 이후 “조계종”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면서 사굴산문, 가지산문, 성주산문 등 산문의식을 드러내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또한 고려후기 자료에서의 구산은 아홉개의 개별산문이 아니라 당시 선종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도 특징이어서 구산은 나말여초 성립된 여러 산문들이 고려시대 겪었던 변화와 승정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고려적인 요소로 볼 수 있으며, 승정이라는 측면에서 승과와 관련된 “구산선(九山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산선문은 실제 아홉 개의 산문이 고려시대 내내 모두 존속했느냐의 여부보다 고려시대 선종교단의 존재양태를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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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 '경장(更張)'의 의미와 변천

저자 : 이경동 ( Lee Kyung-do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8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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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경장(更張)'의 용례와 의미 변천을 통해 경세론의 추이를 분석하고 시기별 변화에 따른 역사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경장은 변화 및 개혁을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사용된 이래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폭넓게 사용되었다.
한국사에서 경장은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14세기 후반부터 용례가 확인되는데, 국면의 변환이나 법제의 개수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에는 『경국대전』의 편찬과 그 이후의 개수 논의와 관련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이는 경장 개념이 법제와 관련한 부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16세기에는 사림(士林)의 정치적 활동이 증대됨과 동시에 경장의 용례가 점차 증가하였다. 사림들은 동중서를 포함하여 송대 이학자(理學者)인 진덕수(眞德秀), 정호(程顥), 주희(朱熹) 등이 주장했던 견해를 토대로 경장을 구조화하였다. 경장을 활발하게 사용했던 인물은 조광조(趙光祖)였으며, 이후 이이(李珥)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이이는 시기, 방법, 지향, 주체의 측면에서 경장을 정의하고 그 내용을 구조적으로 밝혔다. 이 시기 정립된 경장 개념은 경세론과 결합되어 이후 전개되는 경장에 대한 활용에 있어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경장은 17세기 사회개혁정책의 전개와 함께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대동법(大同法)을 포함한 주요 개혁 논의의 담론 속에 경장 개념이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경장과 함께 경장에 상대되는 '준수(遵守)'가 이원적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책문(策問), 상소문, 연설(筵說) 등에서 경장과 준수가 언급되었는데, 당대 국가 운영의 방향과 관련한 인물들 사이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부터 경장은 탕평론과 결합되며 활용되었다. 영·정조는 경장을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였던 개혁정책와 결부하며 경장의 주체로서 군주를 설정하였으며, 스스로 경장의 주인을 자처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 초까지 경장의 주체를 관료로 설정했던 경장관과는 차이가 있다.
19세기에는 삼정(三政) 등 당대 사회문제와 함께 경장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경장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1862년 임술민란을 계기로 제출된 삼정책(三政策)이다. 제출된 삼정책에는 경장을 입론의 당위나 전거로서 제시하고, 삼정문제에 관한 해결방안을 각론으로 제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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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초기 궁궐 사찰 '내원당(內願堂)'의 설치와 변동

저자 : 양혜원 ( Yang Hye-w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2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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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 초기 궁궐 내 절의 설치 과정과 변동에 대해 고찰하였다. 조선 초기에 존재하던 궁궐 안[內]의 절[願堂, 佛堂]은 내원당(內願堂), 내불당(內佛堂)으로 불렸는데, 이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해야 한다. 먼저, 고려와의 연장선 위에서 살펴야 하며, 조선 초에는 개성과 한양으로 거듭된 천도가 이루어져 수도와 궁궐의 이동을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궁궐 안에 위치한 내원당과 한양 도성 안에 위치하되 궁 밖에 설치된 정업원은 전혀 다르므로 구분해야 한다.
조선의 내원당은 건국 직후부터 확인된다. 개경에 수도를 두었던 국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양으로 천도한 후 1396년(태조 5) 1월에 신궁 경복궁에도 설치되었다. 이 경복궁 내원당은 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여 생활하던 1412년(태종 12)에 폐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설치한 창덕궁 문소전(구 인소전) 불당은 1433년(세종 15)까지 존재한다.
내원당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내원당은 궐 안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찰이라기보다, 왕의 발원에 따라 궁 안에 다수 건립될 수 있는 불당이었다. 둘째로, 내원당은 국왕의 거주 공간인 궁궐 안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목적하에 설치되었다. 셋째로, 궁궐 내 혼전으로서의 진전에 부속된 불당도 하나의 내원당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왕실 상장례의 변화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선 초 건립되는 내원당은 모두 현왕인 태조와 태종, 세종의 의지와 발원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창덕궁 내원당은 1433년(세종 15)까지 유지되다가, 세종이 경복궁에 문소전을 새로 건립하고 원묘(原廟)로 단장하면서 철거되었다. 그러나 1448년(세종 30)년 세종은 다시 경복궁 문소전 옆에 내원당을 짓고자 하는데,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궁 안이 아닌 궁 밖에 건립하게 된다. 이로써 '내원당'은 이름과 달리 궁 밖에 건립되면서 '궁궐 내 불당'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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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의 절의(節義)와 선산(善山) 사림(士林)의 추숭 활동

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1-17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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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절의(節義)'를 숭상하였다.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는 세조 연간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지만, 사림(士林)들은 하위지의 단종 복위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추숭해 나갔다. 하위지는 '인재(人材)의 부고(府庫)'라 일컬어졌던 경상도(慶尙道) 선산(善山) 출신으로 세종 연간 문과 장원 급제 후 집현전(集賢殿)·사헌부(司憲府)·예조(禮曹) 등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조선 왕조가 지향하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활동을 펼쳐 나갔던 인물이다. 단종 복위 실패 후 역률(逆律)이 적용되어 멸족(滅族)에 가까운 화를 입었지만, 사림은 그를 절의 인사로 추숭하였는데, 특히 선산 사림의 활동이 주목된다. 우선 선산 사림은 하위지에 대한 외손봉사를 지원하며 그의 '구기(舊基)'와 묘소를 수호하였다. 최현(崔晛)은 1591년 한문소설 「금생이문록(琴生異聞錄)」을 통해 도학의 실천자로서 하위지를 손꼽았다. 이상일(李尙逸)은 1668년 하위지 등 선산 출신 절의 인사의 유고 및 전기를 『삼인록(三仁錄)』으로 편찬함으로써, 그 정신을 주체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이렇게 형성된 공감대를 바탕으로 선산 사림은 하위지를 삼인묘(三仁廟)에 제향하였다. 나아가 1694년에는 단종 복위에 맞추어 삼인묘를 월암서원(月巖書院)으로 사액(賜額)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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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반계 유형원의 화폐유통론과 상업인식

저자 : 송양섭 ( Song Yang-seop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2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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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의 화폐론은 공전제(公田制)에 입각한 농업사회의 운영을 위한 하위영역이자 국가적 재분배 체계의 중요한 매개역으로 다루어졌다. 유형원은 동전분송(銅錢分送), 재정지출, 점포설치 등을 통한 화폐의 유포, 그리고 조세의 대전납(代錢納)을 통한 회수라는 양 방향의 경로로 제시하여 하나의 순환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시 화폐유통책과 동궤를 이루는 것으로 총통화량의 산정은 공전제의 세수(稅收)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경비(經費)=상세(常稅)'로 지칭되는 재정총량을 기준으로 삼았다. 유형원의 행전론이 철저하게 국가의 재정·부세와 관련된 물류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폐유통과 물류의 거점으로서 포자(鋪子)는 상업이 과도하게 발달하여 농업을 해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과세를 통해 적절히 관리·통제되었다. 아울러 유형원은 지방 각 군현의 공장(空場)은 모조리 없애고 그 기능은 포자(鋪子)·참점(站店)이 흡수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장시철폐 및 규제론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장과 상업은 화폐유통·물자재분배와 관련하여 농업사회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철저히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통제하고자 한 것이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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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수신편(理藪新編)』의 편찬과 내용 구성

저자 : 구만옥 ( Koo Mhan-oc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71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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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석(黃胤錫)이 그의 나이 16세 무렵인 1740년대 중반에 착수한 『이수신편』의 편찬 작업은 175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 내용은 1760년대 중반에도 보완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수신편』은 '태극(太極)과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역학계몽(易學啓蒙)』 등에 수록되어 있는 상수(象數)나 율려(律呂)와 관련한 학문, 그리고 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의 세부적 방법 등을 '옛사람들의 지극히 훌륭한 이론[古人之至論]'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황윤석은 『성리대전』의 목차를 모방하여 자기 나름의 편목을 새롭게 구성하고, 『성리대전』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비롯한 다양한 참고 문헌을 활용하여 세부 내용을 채웠으며, 곳곳에 자신의 견해를 주석의 형태로 덧붙여 23권 분량의 책을 완성하였다. 황윤석이 첨가한 내용은 본문에 등장하는 용어나 고사를 부연 설명한 것, 중국인 특유의 표현 양식에 대해 설명한 것, 해당 내용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덧붙인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황윤석이 『이수신편』에서 인용한 문헌 가운데는 조선 학자들의 저술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가 조선 학자들이 작성한 여러 도설(圖說) 자료를 인용하여 『성리대전』의 내용을 부연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선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반면에 서학서(西學書)의 활용은 생각만큼 풍부하지 않았다. 황윤석이 한양에 올라와 다양한 서학서에 본격적으로 접한 시점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꼼꼼히 따져본다면, 앞으로 『이수신편』의 편찬 시기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수신편』의 편찬은 황윤석이 필생의 사업으로 여겼던 『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의 편찬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수신편』과 『성리대전주해』는 성리학을 집대성하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정확한 시점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1760년대 후반 이후 황윤석의 학문적 관심은 『성리대전』을 주해하는 작업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성리대전』의 각 권마다 찌지를 붙여가며 주를 달고, 간혹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거나 옛사람의 학설을 인용하는 작업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율력연원(律曆淵源)』을 비롯한 최신 서적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황윤석은 『이수신편』에 자신의 평생 정력이 투여되었다고 했던 것처럼 이 작업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했다. 이는 『성리대전』을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함으로써 『성리대전주해』를 완결하고자 했던 황윤석의 학문적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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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18세기 구황 서적 편찬의 전개와 변화

저자 : 염정섭 ( Yeom Jeong-sup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31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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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구황 서적 편찬에서 주목되는 것은 1636년 이식과 최명길 등이 증보한 『고사촬요』이다. 이 『고사촬요』 「구황방」의 각 조목 가운데 조선 구황방 편찬 정리작업의 변화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구황을 위해서 탐색, 습득 등의 채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종자를 획득하고 이를 파종하여 기르는 재배법을 기재한 조목인데, 「구황방」의 맨 마지막 조목인 '종우법(토란 재배법)'이 그것이다. 이후 채소 대부분이 구황식물의 의미를 갖게 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1660년에 이르러 서원현감이던 신속은 『구황촬요』를 새로 간행하면서 「구황보유방(救荒補遺方)」을 붙여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를 편찬 간행하였다. 「잡물식법(雜物食法)」과 「벽곡절식방(辟穀絶食方)」이라는 항목 아래 여러 가지 구황식물을 식용하는 방법을 기재하고 있다.
18세기에 이르러 홍만선(洪萬選)이 편찬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구황과 관련된 많은 구황방(救荒方)을 수록하고 있었다. 구황방의 수집과 정리가 구황서라는 전문분야의 서적 편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산림경제』 이후 종합농서의 주요한 항목으로 '구황편'이 설정되어 편입되었다. 『산림경제』의 구황(救荒)과 치포(治圃)는 구황에 활용하는 구황식물의 상당 부분이 채소재배라는 일상적인 채소농사의 범위에 속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황식물과 채소로서의 성격을 각각 떼어 「구황」, 「치포」로 나누어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유중림(柳重臨)이 편찬한 『증보산림경제』는 『산림경제』 「구황(救荒)」 항목을 바탕으로 몇가지를 보완, 증보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서명응이 편찬한 『고사신서(攷事新書)』는 대부분의 내용이 『산림경제』 「구황」의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그런데 서명응의 『본사(本史)』는 농서의 구성체제에서 사서(史書)의 기전체(紀傳體) 형식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황정지(荒政志)」는 구황방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모아놓는 방식이 아니라 각 구황방과 연관된 초목(草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구황과 관련된 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구황방과 초목의 재배법을 연결시키는 내용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구황식물 확보방법이 채취에서 재배로 나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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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19세기 서양어 문헌 목록으로 살펴본 한국 인식의 형성 과정

저자 : 배민재 ( Bae Min-jae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3-34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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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동아시아 관련 서양어 문헌 목록의 분류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 관한 서양의 지리적·문화적 인식이 점차 분화하면서 한국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조명하였다. 동서 간의 접촉과 교류가 시작된 이래로, 아시아에 관한 지식은 각종 문서와 저술의 형태로 축적되었다. 문헌 목록은 그렇게 축적된 개별적 지식을 수집, 선별하여 배치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문헌 목록은 지식을 수집하여 나열한 축적의 한 형태이자, 분류의 총체이다. 수집된 도서에 대한 분류 및 배치는 문헌 목록의 편찬자와 독자가 속해 있는 학술 공동체의 인식과 규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용자에게 있어서 문헌 목록은 특정 분야에 관해 축적되어 온 지식의 안내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수집 및 분류 대상이 일치하는 문헌 목록들의 분류체계 및 분류 항목의 전거와 전승 관계를 추적하였다. 문헌 목록에서 지식이 존재하는 위치와 형태에 대한 분석은 한국 인식의 연원과 더불어, 지식을 생산해내는 주체 및 지식이 생산되는 맥락의 변화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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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세기 말 한국 지식인의 서구 문화규범 수용 양태-윤치호의 경우-

저자 : 박주영 ( Park Ju-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5-38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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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말 서구 교육을 받은 뒤 동아시아로 돌아온 한국인 윤치호의 사례를 통해, 서구화된 그의 신체 및 정신이 동아시아의 '전근대적인' 일상 환경에 어떠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는지, 그 '전근대성'을 어떤 근거로 비판하였는지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서구화된 동양인/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였는지도 확인해 보려고 한다.
윤치호가 서구 세계를 떠나 동아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접하게 된 것은 그의 오감을 자극하는 '전근대적' 광경과 냄새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오랜 유학 생활 후 다시 접하게 된 중국과 한국의 환경 - 위생 및 예의범절을 포함한 일상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환경에 대한 그의 부정적 평가는 일면 나름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내면화한 서구의 미적 가치기준을 자동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표출하는 그의 신체·오감과는 달리, 그의 한국인(비서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이를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구한말 한국의 '전근대적인' 모습을 본 서구 선교사들의 태도와 분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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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러일전쟁 개전 전후 언론의 국제정세 인식과 대응-한국 중립론을 중심으로-

저자 : 정종원 ( Jung Jong-w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83-42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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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언론의 국제정세인식과 대응을 검토하여, 삼국제휴론으로만 해석되어 왔던 『황성신문』이 실제로는 국제정세에 따라 중립론과 삼국제휴론을 오갔음을 드러냄으로써, 한국의 지식인들이 주체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음을 밝히는 데 있다.
1903년 5월에 러시아가 용암포 사건을 일으키자 『황성신문』과 『한성신보』 모두 러시아를 경계하고, 의주 개시(開市)를 통해 러시아의 한국 침략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도 경계했던 반면에, 『한성신보』는 용암포에 침입하는 러시아군을 한국이 막지 못한 것이 문제라며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신문은 용암포 사건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1903년 하반기에 이르러 러일전쟁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한국의 중립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황성신문』은 동양과 한국 모두를 정체성의 대상으로 삼는 이중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중정체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삼국제휴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속적인 한국 침략은 『황성신문』으로 하여금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라는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이중의 침략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황성신문』의 이중정체성은 분열되었다. 결국 『황성신문』은 동양을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은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성신문』은 중립을 통해 자강(自强)을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으며, 중립을 선언한 청과 동맹을 맺어 동양의 연대와 한국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지키려 했다. 반면, 『한성신보』는 한국의 중립을 끊임없이 견제하면서, 중립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황성신문』은 한국이 이미 일본에 점령된 상황 속에서 삼국제휴론으로 선회했다. 삼국제휴론의 논리에 의지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성신문』은 한일의정서 체결에 격렬히 반대했다. 반면 『한성신보』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개전한 것이 정당하다고 강조하면서,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의 독립이 보장되었으니 내정에만 신경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성신보』는 한국의 주체적인 국제정세인식과 대응을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황성신문』이 국제정세에 따라 삼국제휴론과 중립론을 오갔다는 사실은 『황성신문』이 인종주의와 삼국제휴론에 갇혀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황성신문』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랑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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