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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유교의 예학적(禮學的) 탐구를 통한 효(孝) 사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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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예학적(禮學的) 탐구를 통한 효(孝) 사상 고찰

A Study on Hyo (孝) Ideology through Study of Confucian Rites

서정화 ( Seo Jeong-hwa )
  •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 : 민족문화연구 93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121-148(28pages)
민족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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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언(유학 사상으로서의 효의 정의)
2. 효 사상 주체의 계층 확대
3. 『논어』에서 그려지는 삼년상의 본의 및 효와의 관계
4. 유교 예학에서 효자와 계승자
5. 결어(유교의 현실적인 상·제례와 효 사상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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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예학에서, 계승자를 의미하는 宗子·宗孫은 孝子·孝孫과 같은 말이며, 제왕이라 해도 자신이 부모를 계승하지 않았다면 孝心의 유무와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孝子가 되지 못한다. 受命·創業之君의 자리에 오른 것이, 부모나 선조의 뜻을 받들어서 오른 것인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오른 것인지에 따라, 사망 후 부여되는 諡號에 ‘孝’ 자가 포함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한다.
효도와 선조 제사는 ‘유교 사상’과 ‘유교 의례’의 관계이고, 효도와 삼년상은 ‘유교 사상’과 ‘인륜적 정서’의 관계이다. 즉 효는 본질의 문제이고, 제사는 그가 진정한 후계자 다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외형적·대외적 표현의 수단일 뿐이다. 또, 3년의 喪은 자식이 끈끈한 親의 관계 속에 있었던 부모를 잃은 충격과 상심을 조금씩 진정시켜 가는 과정의 시간들이다.
자녀가 부모를 가깝고 극진하게 봉양하며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품속에서 받은 사랑과 보살핌에 의한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상호적인 인륜(윤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부모가 품었던 대의적인 뜻과 일삼았던 일을 계승한 계승자를 의미하는 효는, 개개인의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수용되는, 사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In study of Confucian Rites, the words of Jongja (宗子: the eldest son of the head family) and Jongson (宗孫: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meaning a successor are the same as filial son and filial grandson, and even a king cannot become an official filial son regardless of whether he has filial love or not if he hasn't succeeded his parents. Depending on whether one becomes crowned as a king beginning a new regime, such as Yi Seong Gye (李成桂), following the will of one's parents or ancestors or just on one's own, ‘Hyo (孝: filial piety, filial son)’, is included into or excluded from the posthumous name granted after one's death.
Filial piety and ancestral rites are in the relationship of Confucian ideology and Confucian rites, and filial piety and three years of mourning (三年喪) are in the relation of Confucian ideology and the emotions of humanity. In other words, Hyo is the matter of essence, and ancestral rites are just the means of external expression that he is a true inheritor. In addition, the three years of mourning is the time as the process for a son or a daughter to gradually relieve the shock and pain of heart from losing their parent with whom they were in a close relationship of qīn (親: associating with, cherishing and loving).
A son's or a daughter's feeling close to one's parents, supporting them sincerely and loving them are natural emotions from the love and care from their parents, and are in the area of reciprocal ethics. Hyo, which means a successor inheriting the will of one's parents for great cause and what they used to do, is in the area of ideology accepted by the choice following each individual's beliefs.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7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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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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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9-7925
  • : 2672-0787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4-2022
  • :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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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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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상으로서의 코로나 ―제1회 한국학 페스티벌 좌담회 녹취록―

저자 : 진태원 , 김형찬 , 김홍중 , 윤자영 , 염운옥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65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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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의 법과 경세술

저자 : Anders Karlsson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7-115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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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 무신집권기 '복정우왕(復政于王)' 명분의 등장과 도방(都房)의 변화

저자 : 홍민호 ( Hong Min-h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9-15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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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방은 무신 집정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호위·활용을 위해 창설한 사병집단이다. 무신 집정에게 있어서 도방은 본인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는 도방이 무신집권기를 통틀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이다.
무오정변을 주동한 인물 중 하나인 김준은 자신이 무신집정이 되지 않으면 도태될 우려가 있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정변 직후 정권을 잡았던 유경을 축출하고 무신 집정이 되었다. 하지만 본인은 '復政于王'의 기치를 통해 성장한 인물이며, 그 스스로도 충분히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무신집정과 '復政于王' 명분 사이의 딜레마에 놓인 김준은 결국 온전히 도방 관련 권한을 환수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는 국왕에 의해 동원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이러한 모습은 임연 집권기에도 이어졌다. 전대 최씨 무신 집정의 확고한 집권 체제에 가해졌던 형식적 균열이었다. 결국 무오정변 당시 등장했던 '復政于王'의 명분은 '쇠퇴기'의 무신 집정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실제로 당시 국왕이 도방을 자유로이 활용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온전하게 김준·임연에게 귀속되지 않았고 국왕에 의해 發命될 수 있었다. 결국 무신 집정의 사적 체제 운영에도 굴곡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Dobang (都房) is a private group created by the military governor for their private escort and utilization. For the military regime, Dobang was their exclusive property, and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Dobang was able to survive throughout this period.
Kim Jun (金俊), one of the figures who led Muojeongbyun (戊午政變), was in a position that he could be eliminated if he did not become the highest authority. Thus, he ousted YuKyeong (柳璥) and became a military governor. However, he was a person who grew up through the banner of “Bring political affairs back to the king (復政于王)”, and he was fully aware of it. Kim Jun, who is in a dilemma between military governor and the cause of "Bring political affairs back to the king (復政于王)", eventually failed to fully regain his authority related to the Dobang, leaving room for formal mobilization by the king.
This aspect continued even when Im Yeon (林衍) took power. It was a formal crack that was inflicted on the firm system of the former military governor. In the end, the justification of "Bring political affairs back to the king (復政于王)," which appeared during the Muojeongbyun, continues to affect the military governor during the decline. Of course, it is not thought that the king at the time would have used Dobang freely, but at least formally, it was not entirely attributed to Kim Jun and Im Yeon and could be mobilized by the king. Eventually, a curve was created in the operation of the private system of the military gover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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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승휴의 국사편년과 역사의식

저자 : 박대재 ( Park Dae-ja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3-18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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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休는 『제왕운기』에서 역대 군왕의 연대 편년을 위해 노력하였다. 단군이 堯 원년 무진년에 개국하여 1,048년간 다스리다 은퇴한 지 164년에 기자가 와 스스로 입국하였고, 기자조선이 928년간, 위만조선이 88년간 이어졌다고 하여 고조선사의 연대를 분명히 밝혔다. 이를 기초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태조 18년(935)이 단군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3,268년이 되는 해라고 하여 檀君紀元에 의해 역사적 의의를 부각하였다. 『제왕운기』는 단군기원이 나타난 현존 최고의 기록으로 이를 역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 단군 원년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이승휴는 단군을 국사의 開祖로, 기자를 小中華의 시조로 함께 존숭하였다. 소중화를 중심으로 한 정통론적 역사의식은 박인량의 『고금록』,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기자조선을 중시한 선행 역사서의 인식이 투영된 결과이다. 이승휴의 역사의식은 기자에 앞서 단군을 국사의 시원으로 존중한다는 점에서 사대주의라고만 볼 수 없으며, 중국과 조선을 구분해보는 이원적 세계관인 소중화에 그의 역사관이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중화는 이승휴의 유가적 역사의식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고려 전기의 다원적 세계관을 발전시킨 이원적 역사의식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In Chewang Un'gi (帝王韻紀), Yi Sŭnghyu (李承休) tried to set up the annual chronology of the successive kings. He clearly revealed the chronicles of the Old Chosŏn history that Tan'gun founded his state in the first year of Yao(堯)'s reign, a Mujin year, and retired after 1,048 years of his reign. According to him, Kija(箕子) came and established his own state after 164 years. He also revealed that Kija Chosŏn lasted for 928 years, and Wiman Chosŏn for 88 years. Based on this chronicle, he accentuated the significance of the epoch of Tan'gun calender by defining the eighteenth year of King Taejo(935 AD), the year when King Kyŏngsun of Silla submitted to Koryŏ, as 3,268th year after the origin year of Tan'gun. Chewang Un'gi is the oldest historical record that has the epoch of Tan'gun calender in existence. By counting the years in the chronicle back, the origin year of Tan'gun is 2,333 BC, which is the same as today's standard for Tan'gun calender.
Yi Sŭnghyu revered Tan'gun as a progenitor of the national history, and Kija as a founder of 'Little China (小中華).' Such historical consciousness of legitimism focusing on the ideology of Little China projects the consciousness of previous historical texts such as Pak Illyang's Kogŭmnok (古今錄), Kim Pusik's Samguk Sagi (三國史記) and others. Yi Sŭnghyu's historical consciousness could not be interpreted only as an ideology of 'serving the great(事大)' since he prioritize the reverence to Tan'gun as the progenitor of the national history before Kija.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was condensed into the ideology of Little China, which was a dual world view that dichotomized it between China and Chosŏn. The Little China was a notion that represents his Confucian historical consciousness. The notion could be understood as an alternative expression for a dual world view, which was developed from the plural world view in the early period of Kory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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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전기의 제사 담론 ―인정(人情)과 교감(交感)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숙인 ( Lee Sook-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9-21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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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서 17세기 전반에 이르는, 조선전기는 제사 관련 담론이 활발했던 시기다. 조선 건국의 주체들은 신유학의 정치이념에 의해 가장 먼저 제례의 유교화를 추진하는데, 속례(俗禮)의 많은 부분과 갈등을 일으켜 개혁이 원활하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제사의 본질적 의미나 제사의 권력화 문제 등의 다층적인 제사 담론이 형성된다. 여기서는 『가례』와는 다른, 속례의 제사 관행에 주목하여 조선전기 제사 담론의 특징을 밝히고자 했다.
속례의 윤회봉사는 『가례』의 가묘(家廟)와는 달리 제사공간과 봉사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의례 행위에는 의무와 권리가 함께 주어진다고 할 때, 윤회봉사는 그것을 혈연 근속들이 나누어 갖는 의미가 있다. 또 『가례』의 제사가 공동의 조상을 통한 부계친의 조직화를 지향한다면, 속례의 제사는 봉양과 교감 등 망자(亡者)를 향한 의미가 크다. 조선전기 예학자들에 의해 비례(非禮)로 규정된 속례의 고비합설(考妣合設)과 생신제(生辰祭)는 인정과 교감을 추구한 조선전기 제례 정신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자연 감정에 충실한 속례의 제사를 일정부분 인정한 것은 속례의 저항이 컸기 때문인데, 이것이 곧 조선전기 제사 담론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전기 제사 설행의 기록들은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제사를 매개로 유출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제사에 임하는 감정은 망자와의 관계나 망자에 대한 기억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제사 설행자의 성별에 따라 감정의 차이가 컸다. 『가례』와 비교할 때, 조선전기 사람들의 제사 의식은 덜 추상적이고 덜 규범적이었으며 망자(亡者)를 기억하는 방식이 구체적이고 정감적이었다. 제사가 고도의 감정을 요구하는 의례인 점에 주목하여 조선전기 제사 관행을 의미화했다.


In the early Joseon, discourse on ancestral rites were active. It contains the reform by Jujagarai (朱子家禮) and the resistance of conventional rituals to it. Joseon which used the Neo-Confucian worldview as a political ideology was the first to promote Confucianization of everyday rituals while excluding conventional rituals. This article attempted to reveal its nature and meaning by paying attention to conventional rituals that resisted Jujagarai. While a conventional rituals considered it important to serve the deceased and interact with the deceased, but Jujagarai differ from each other in that they aimed to organize paternal relatives through common ancestors.
This article discussed the meaning of the ritual Gobihapseol [考妣合設] and a ritual to remember the birthday of the deceased[生辰祭]. Through Mukje-ilgi (默齋日記) and Byeongja-ilgi (丙子日記), I looked at the feelings of rituals of people in reality. Compared to Jujagarai it was revealed that their rituals were less normative, and the way they remembered the deceased was specific and emo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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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이(李珥)의 청사(靑詞) 작성 문제에 대한 재검토

저자 : 김철웅 ( Kim Cheol-woong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19-24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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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는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그는 도교를 左道라고 하면서 醮에 쓰일 靑詞를 작성하라는 선조의 명을 거부하였다. 이는 율곡이 도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가 지은 청사가 여러 편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栗谷先生外集』(1682)에 4편의 청사와 1편의 초제 축문이 실려 있고, 『文苑黼黻』(1787)에 청사 2편이 율곡의 제술로 수록되어 있다.
청사 작성을 거부하는 차자는 『율곡집』과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율곡이 이단에 비판적이며, 그의 학문이 순정하였음을 잘 드러나게 해준다. 율곡이 청사 저술의 명을 거부한 것은 중종 때에 조광조가 소격서 혁파를 주도하여 관철시킨 일과 비교된다. 율곡은 조광조와 달리 자신의 뜻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 소격서의 혁파와 복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거진 조광조의 몰락은 소격서 폐지가 결코 신하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율곡은 소격서와 초례의 폐지와 같은 이단의 척결에도 군주의 결심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소격서와 참성단에서 거행된 초례는 여전히 국가제례의 하나였으며, 이에 선조는 청사를 작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현실에서 율곡은 청사 작성의 명을 끝까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지제교로서 청사를 작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율곡이 작성한 청사 5편은 모두 다른 시기에 거행된 것이다. 이는 율곡이 여러 해에 걸쳐 청사를 작성하였음을 의미한다. 결국 율곡이 청사를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선조 때에도 초례가 국가제례로서 계속 거행되고 있었고, 성리학자도 관료의 입장에서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Yulgok Yi I is a representative Neo-Confucian scholar of Joseon Dynasty. He was very critical of Taoism. Thus, Taoism was treated as heresy, and he rejected the order of King Seonjo to write Taoist prayer, Cheongsa.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he has written several Cheongsa. The Taoist prayer by Yulgok contains five in YulgokOejip and two in Munwonbobul.
Requests for refusal to write Taoist prayer are included in Yulgokjip and Yulgokjeonseo. This shows that Yulgok is critical of heresy and that his studies were pure. Yulgok's refusal to order the writing of Cheongsa can be said to be comparable to the abolition of Sogyukjeon led by Jo Gwang-jo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But, unlike Jo Gwang-jo, Yulgok did not insist on his will until the end. Yulgok saw that the determination of King Seonjo was important in the abolition of the Sogyeokseo and the eradication of heresy. However, The Taoism rituals held in Sogyukjeon, and Chamsungdan was still one of the national rituals, and King Seonjo ordered him to write Cheongsa. In this situation, Yulgok could not reject the order to write Cheongsa until the end. As a Jijegyo, he was forced to write Taoist prayer.
All five prayers written by Yulgok were held at different times. This means that Yulgok wrote prayers over the years. In the end, the fact that Yulgok wrote prayer shows that Taoist rituals continued to be held as a national ritual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and Yulgok was a Neo-Confucian scholar, but as a bureaucrat, he had no choice but to accept the Taoist rit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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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영혼(靈魂)에서 인성(人性)으로 ―『성학추술(性學觕述)』의 철학적 인간학과 유교적 변용―

저자 : 김선희 ( Kim Seon-he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7-28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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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스콜라 철학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을 다루고 있는 알레니의 한문서학서 『성학추술(性學觕述)』에 나타나는 이론적 기획과 전략을 검토하려는 시도이다. 『성학추술』은 영혼론뿐 아니라 생리학적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서 스콜라 철학은 물론 중국적 전통에서도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안하고 있다. 『성학추술』을 통해 영혼의 작용을 육체의 구조와 기능에 연동하는 통합적 인간관에 기초한 스콜라주의의 철학적 인간학이 유학-성리학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어떤 긴장을 형성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원본과 다른 복합적 맥락을 형성하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학추술』에 나타나는 인간론은 중세 철학으로 주해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라는 원본의 맥락에서 이탈해 한역(漢譯)된 지식이 중국의 지적 전통과의 대면을 통해 어떻게 절충되고 변용되는지 하나의 양상을 보여줄 것이다. 이 절충과 변용을 통해 예수회 선교사들의 번역이 일정한 수준에서 유교화 과정을 거쳤다는 점과 그에 따라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 특히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가 타자의 사유를 자신의 지적 전통 내부에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세부를 변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uss Guilio Alleni's theoretical plans and strategies in his translation book Xingxuecushu, which deals with the philosophical anthropology of Scholasticism. By discussing it, it can be revealed that how the philosophical anthropology of medieval Christianity which understands the mind and body in an integrated manner is conveyed and how it forms a different context from the origin with facing the theory of Confucianism and Neo Confucianism. Unlike other Western Learning books focused on soul or anima, Xingxuecushu focuses not only on the theory of soul but also on physiology. This means that Aleni proposes a new comprehensive perspective of the theory of human nature, which has never been tried in Scholasticism or Chinese tradition. That is an integrated view of human beings that links the workings of the soul to the structure and the function of the body. In this context the theory of humans in Xingxuecushu will be an example of how knowledge deviates from the original context of the Coimbra Commentary on Aristotle's Philosophy meets and compromises with the Chinese intellectual tradition. Through revealing a compromise and a mixing of the two intellectual traditions experienced we can see that the translation of Jesuit missionaries had to undergo a certain level of Confucianization. Furthermore, it can be turned out that the intellectuals of East Asia did not replace their knowledge by unquestioning acceptance of foreign thoughts but by introducing the other thoughts into their traditional theoretical system they modified some of the details 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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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선조대 조선의 대(對)여진 정토(征討)와 그 실상 ―이정구(李廷龜)의 차자(箚子)·헌의(獻議)를 중심으로―

저자 : 장정수 ( Jang Jung-soo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2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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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선조대 對女眞 정책의 하나인 征討의 성격을 고찰한 것이다. 정토는 군사력을 동원한 강경책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藩籬를 복원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번리는 조선의 육진 인근에 거주하던 藩胡 부락들로 구성된 '울타리'를 의미했는데, 그 외연의 深處胡를 방어한다는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번호는 16세기 중반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17세기 초 대부분 建州女眞에 귀속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선조대인 16세기 말에 집중된 정토는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유지를 꾀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선조대 말 번호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정토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론을 다룬다. 특히 李廷龜가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반대론을 집중 분석함으로써 시행의 당위와 실제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조선의 대여진 정책이 後金·淸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전환되는 연결고리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nature of the 'Punitive Expedition (征討)' as a part of policy toward nearby Jurchen tribes. The expedition itself was a tough line policy using military might, but its fundamental purpose was to restore 'pŏnli (藩籬)', a fence consisted of Boundary Jurchen (pŏnho; 藩胡) tribes to protect Chosŏn from outer Deep-Dwelling Jurchens (深處胡). Boundary Jurchens are seen in the records of the mid-16th century, but they became extinguished in the early 17th century when most of them were subjugated by the Jianzhou Jurchens (建州女眞). The expeditions were launched mostly around the late 16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Sŏnjo, to prevent these changes and maintain the status quo. This study further investigates the skepticism on the expedition, especially on its effectiveness. Yi Jŏnggu (李廷龜) is one of the ministers who articulated against the expedition, and his arguments shows the difference between the reality and the oughtness. Through his eyes, we can find a transitional link where Chosŏn policy toward Jurchen tribes transforming into interstate policy toward the Later Jin and the Q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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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옥소 기몽문학 초탐 ―작품의 현황과 특질을 중심으로―

저자 : 양승목 ( Yang Seung-mok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25-380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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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옥소 권섭의 기몽문학에 대한 총체적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기획되었다. 꿈과 관련된 옥소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종래의 연구 시야는 대개 「畵夢」 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옥소가 꿈을 소재로 지은 문학작품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옥소는 일생에 걸쳐 자신이 꾼 꿈을 글감으로 섭취하여 실로 방대한 양의 시문을 창작하였으며, 이들은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채 '記夢'이라는 속성을 공유하며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온당하고 균형 있는 조명은 「화몽」은 물론 그의 기몽문학, 나아가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충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다.
이에 본고는 옥소가 남긴 기몽문학 작품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현전하는 2종의 필사본 『玉所稿』 전편을 대상으로 꿈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조사하여 옥소가 남긴 기몽작품의 총 수효가 기몽시 115제, 기몽산문 120편에 이름을 밝혔다. 이를 전수 목록화하고 주요 정보를 표지해 제공하는 동시에, 이로부터 옥소의 기몽문학에 대해 거시적 차원에서 도출할 수 있는 정보들, 곧 작품 현황과 창작의 추세, 양식적 구성 내역 등을 정리하였다. 이와 함께 주요 작품의 내용에 주목하여 옥소의 기몽문학 전반을 관통하는 특질을 살펴보고, 이러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을 탐색해보았다.
이번 시도는 옥소의 기몽문학에 대한 보다 광시야적이고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간 옥소 문학의 꿈과 관련된 작품에 대한 고찰이 적잖이 있었음에도 '초탐'이란 표현을 내세운 것은 기몽문학이라는 시좌를 취하여 그 총체를 살핀 사실상 첫 시도이기 때문이다. 본고를 통해 제공되는 목록과 정보들이 이 분야 연구의 다음 장을 여는 데 기여할 수 있길 기대한다.


This paper was prepared to lay the foundation for the holistic study of Okso Gwon Seop's literature that records his dreams. Existing studies on literature in which Gwon Seop recorded his dreams were generally limited to the Hwa-mong (「畵夢」). However, this is only a part of a literary work written by Gwon Seop based on his dream. In fact, Gwon Seop has created a very vast amount of poetry and prose based on his dreams throughout his life. These works form a group, sharing the attribute of 'gimong (記夢)' in various forms. A reasonable and balanced light on this is essential for a deeper understanding of his literary world.
The first task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the full picture of the literary works that recorded Gwon Seop's dreams. As a result of examining all of the existing Oksogo (『玉所稿』), 115 poems recorded dreams and 120 prose poems recorded dreams. The information on this work is listed and attached at the end of this article. Based on this, the literature in which Gwon Seop's dreams were recorded was reviewed in general, and the current status of the works, the trend of creation, and the composition of literary styles were summarized. After that, I focused on the content of the work,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that penetrated the whole, and explored the background that made this unique achievement possible.
This attempt laid the foundation for a more extensive and full-fledged study of Gwon Seop's Literature that records dreams. It is hoped that the list and information provided through this paper will contribute to opening the next chapter of research in this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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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조선시대의 한글 번역서와 여성 지식사

저자 : 박영민 ( Park Young-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81-41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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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여성지식사의 경로 추적을 목표로 여성의 책과 독서의 문화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본고는 조선시대에 여성을 독자로 하여 한글로 번역된 史部類 고문헌과 여성 지식의 상관관계를 파악하였다. 여성을 독자로 상정한 한글 번역서는 조선시대가 여성에게 허용한 정보와 지식을 살피는 데에 유효하고, 여성의 지식형성과정과 여성지식의 특징을 살피는 데에도 유효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에도 조상의 행적과 가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家乘類, 가문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黨爭 자료를 한글로 번역하여 여성에게 제공하였다. 여성에게 가문이라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욕망을 습득하고 조상을 현창하라는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가승류를 학습하였고, 필사 및 정서를 통해 친정 가문의 이익과 욕망이라는 사적 가치를 전파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둘째, 왕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홍보하고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서적을 편찬하였고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여성에게 제공하였다. 가문뿐만 아니라 국왕도 여성의 지식의 범주에서 “정치사”를 배제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여성의 독서가 “정치사”와 무관하다고 보는 것은 실상과 어긋난다. 셋째, 조선시대는 왕과 왕비가 중국사 및 조선사를 여성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제공하였다. 중국사 번역은 주로 왕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高宗은 중국의 正史가 한문으로 된 것만 있고 한글로 된 것이 없는 상황에 대해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고 하였다. 趙大妃는 조선사를 번역하여 왕실 여성에게 제공하였다. 이 점을 기반으로 여성이 조선의 野史 번역본도 읽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넷째, 연행록 번역은 여성의 이국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여성은 번역본 연행록을 읽으며 견문의 知를 넓혔다. 여성의 연행록 독서는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쾌락과 연결되었고, 여성은 공적 가치·권력의 의도에 구속된 독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의 독서의 범위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범주를 넘어섰고, 여성의 지식은 점점 더 확장되고 해방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corelation between hangŭl versions of historical books for female readers and women's knowledge as part of the process of exploring the cultural history of women's books and reading under the goal of tracking the path of female intellectual history in Chosǒn Korea. Hangŭl versions for female readers would help analyze information and knowledge they can have access to at that time as well as the process of knowledge formation and the characteristics of female intelligence. The research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even in the Chosǒn Dynasty, the materials which helped to understand the family's political position and family activities or history were translated into Korean and provided to women, which obligated women to acquire the interests and desires of a specific group of families and to manifest their ancestors. Thus, women learned these materials and contributed to spreading the private values of the interests and desires of their family through transcriptions. Second, the king also compiled books to form public opinion that promoted and supported his political position, and translated them into Korean and provided them to women. Not only the family but also the king did not exclude "political history" from the range of women's knowledge. It is contrary to the situation that women's reading during the Chosǒn Dynasty has nothing to do with "political history." Third, kings and queens translated and provided Chinese and Chosǒn history for women to read. Translation of Chinese history was mainly conducted by the king's instructions. King Kojong said that he was sorry and ashamed of the situation in which Chinese official history only written in literary sinitic. Dowager queen translated Chosǒn history and provided it to royal women. Based on this point, it can be inferred that women also read translated unofficial history of Chosǒn. Fourth, the translation of Records of Travels to Peking was implemented by women's envy and curiosity about foreign countries, and the women expanded their knowledge by reading these translations. Women's reading Records of Travels to Peking was linked to personal happiness and private pleasure, which freed women from reading bound by public values. The range of women's reading went beyond the general assumption, and women's knowledge gradually expa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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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 초 순화(淳化)명 청자에 대한 재조명 ―제작과 전개를 중심으로―

저자 : 오영인 ( Oh Young-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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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순화명 청자의 성격, 제작배경과 의미, 위계를 살피고, 제작이 중단된 이후 태묘 의례용 제기의 추이를 제작 및 수급방식의 변화에 주목하여 논하였다. 중국예서와 제기도는 고려의 제사 공간을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988년 성종은 태묘를 5묘체제로 삼아 992년 11월에 건립을 마무리하였다. 성종에게 태묘는 국가근본인 효가 구현되는 공간이었고, 태묘의 건립과 제사를 통해 왕위의 정통성을 공표하고자 하였다. 순화명 청자는 이러한 성종의 의지를 담아 992-993년 태묘 의례를 위해 배천 원산리 가마에서 우수한 제작공력으로 제작된 결과물이자, 『삼례도』를 견본으로 제작되고 명문을 개체별로 표기할 만큼 규격화된 공정과 체계적인 제작방식이 적용된 대상이었다. 960년 물장성에서 개칭된 보천은 장인과 진귀품의 보관을 담당하였고, 배천원산리 가마를 산하에 두어 필요시 장인을 차출하여 순화명 청자를 제작하였다. 993년 이후 순화명 청자의 제작을 비롯해 배천 원산리 가마 역시 운영이 중단되었다. 해당 가마의 운영 중단은 요업상 비효율과 유지의 어려움에 기인하였고, 운영을 중단한 이후 1010년 재차 발발한 거란의 침입에 따른 피해로 왕실의 지원을 받거나 인력의 확보 및 가마 구조의 전환을 통한 재건도 불가능하였다. 1011년 소실된 태묘는 1027년 수리가 마무리되어 의례가 진행되었다. 1029년 태묘 의례용 제기의 확보가 원활히 이행된 배경에는 제기도감의 관할 하에 공물의 형태로 자기제기가 수급되었기에 가능하였다. 992-993년 배천 원산리 가마에서 제작된 순화명 청자는 11세기 이후 용인서리 및 여주 중암리 일대에서 제작된 백자제기에 태묘 의례용 제기의 역할을 위임하였고, 왕실직속 제작체제의 조달에서 공물 납부방식으로 태묘 의례용 자기제기의 제작과 수급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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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중기 의리유학(義理儒學)의 실상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과 왕안석의 신학(新學)을 중심으로―

저자 : 이동환 ( Lee Dong-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120 (8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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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분류개념으로 전장유학, 사장유학, 의리유학, 기저유학을 제시했으며, 고려중기 유학에 대한 지배적인 학설을 비판하면서 나의 신학설을 수립하였다.
최충의 사학 9재학당은 다분히 피상적인 연구에 머물렀던 것을 학당 설립의 배경에서부터 재호 명명의 의미와 그 편성의 논리를 의리유학적으로 접근하여 구명하였다. 공맹이래 유학의 수기·치인의 본령이 불교전성 시대의 관점인 수신(수기)을 불교의 기능, 치국(치인)을 유교의 기능으로 인식해오던 것을 최충은 수기·치인을 일원적으로 통합, 유교의 본령을 복구하고 중국 전도학 그룹의 영향을 받아 유학에 대한 특단의 고양된 인식을 가졌다. 그래서 공자를 모델로 한 성인신하후보를 배양하는 사학을 설립했는데, 학당의 9개 재호와 그 편성의 논리를 作聖방법으로서의 의리유학으로 보았다.
이 최충의 의리유학의 맹아는 이론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으로 저작을 남기지 못해 뒤이어 송으로부터 전래된 심급높은 의리유학인 왕안석의 신학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 예종·인종 연간을 고조기로 한 신학은 성명도덕논리의 국시로서의 통행과 심급높은 경의학의 흥기로 특징지어지는데, 그동안 학계가 도학의 명제로 알아왔던 성명도덕논리가 왕안석의 사상임을 밝혔고, 경의학은 왕안석의 新義의 영향과, 국학과 과거제의 정비를 통하여 흥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왕안석의 성명도덕론의 난해성과 혼란성으로 인하여 국시가 주로 구두담론으로 통행하다가 무신란 이후 사라지고, 경의학도 초기의 열정이 없어지고 고식화되어 갔다.
무신란 이후의 사장에 나오는 '窮理盡性'·'因性循理'의 어사를 성리학의 명제로 알고 이 시대에 이미 성리학이 상당히 보급된 것으로 아는 학계 일부의 주장에 대해 궁리진성은 당초의 용법대로이지 송대의 성리학적으로 특화된 명제가 아니며, 인성순리는 '순리대로'란 뜻이지 성리학적 性에 근거하여 性卽理나 所當然之理를 따른다는 명제가 아님을 밝혔다. 고려중기까지의 유학은 전장유학과 사장유학이 주도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 의리유학의 정통은 13세기 후반기에 고려에 전래된 주자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종대 정의의 賦에 나오는 리기는 정이의 개념이 아니라 『회남자』에 나오는 노자적 개념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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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유교의 예학적(禮學的) 탐구를 통한 효(孝) 사상 고찰

저자 : 서정화 ( Seo Jeong-hwa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1-14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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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예학에서, 계승자를 의미하는 宗子·宗孫은 孝子·孝孫과 같은 말이며, 제왕이라 해도 자신이 부모를 계승하지 않았다면 孝心의 유무와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孝子가 되지 못한다. 受命·創業之君의 자리에 오른 것이, 부모나 선조의 뜻을 받들어서 오른 것인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오른 것인지에 따라, 사망 후 부여되는 諡號에 '孝' 자가 포함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한다.
효도와 선조 제사는 '유교 사상'과 '유교 의례'의 관계이고, 효도와 삼년상은 '유교 사상'과 '인륜적 정서'의 관계이다. 즉 효는 본질의 문제이고, 제사는 그가 진정한 후계자 다운 사람임을 나타내는 외형적·대외적 표현의 수단일 뿐이다. 또, 3년의 喪은 자식이 끈끈한 親의 관계 속에 있었던 부모를 잃은 충격과 상심을 조금씩 진정시켜 가는 과정의 시간들이다.
자녀가 부모를 가깝고 극진하게 봉양하며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품속에서 받은 사랑과 보살핌에 의한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상호적인 인륜(윤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부모가 품었던 대의적인 뜻과 일삼았던 일을 계승한 계승자를 의미하는 효는, 개개인의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수용되는, 사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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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注李太白詩)』의 조선시대 수용 양상(Ⅰ) ―전·중기를 중심으로―

저자 : 임준철 ( Lim Jun-Chul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204 (5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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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에서의 이백 시 수용 연구 일환으로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백시집 판본이자 주석서인 『分類補注李太白詩』의 조선 전·중기 수용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백은 우리 한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지만, 개별 문인들이 어떤 책을 통해 수용하였던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검증된 바가 없다. 이 글에서는 조선 초기 이래 이백 시 주석서 및 시집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分類補注李太白詩』의 수용 양상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여 다음 네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판본 간 수록된 내용에 차이가 있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검토한 결과 조선 중기까지 『분류보주이태백시』의 내용이 주로 수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점은 이 책이 조선시대 문인들의 이백 이해에 주요한 준거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둘째, 『分類補注李太白詩』와 다른 이본 계열이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발견되었다. 조선 전기 金安老가 『希樂堂稿』에 自註할 때 활용한 이백 시는 현재 전하는 異本들과도 차이가 있다.
셋째, 『風騷軌範』과 같은 이백 시 선별 작업에 『분류보주이태백시』가 기준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풍소궤범』에선 『분류보주이태백시』의 분류방식을 제한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대체로 새로운 방식으로 이백 시를 재분류하였다.
넷째, 조선 중기 『지봉유설』과 『오산설림』의 이백 시 비평 내용을 통해 『分類補注李太白詩』의 주석이 이 시기까지 이백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도구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이 本注라고 말한 것은 모두 楊齊賢이나 蕭士贇의 주석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수광과 차천로는 주석의 문제점들도 함께 지적하였으며 나름의 주석을 추가하기도 했다. 『지봉유설』의 경우 명나라 唐汝詢의 『唐詩解』 같은 새로운 이백 시주석이 『분류보주이태백시』의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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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홍자성(洪自誠)의 정체와 『채근담(菜根譚)』의 주제의식 ―휘주(徽州) 상인(商人)과 연관하여―

저자 : 안대회 ( Ahn Dae-hoe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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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晩明 시기 淸言 작가 洪自誠의 출신지와 스승을 새롭게 추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菜根譚』의 주제를 새롭게 검토하였다. 오랫동안 정설처럼 굳어진 泗川省 成都출신으로서 楊愼의 제자라는 설을 수정하여 安徽省 徽州의 歙縣에 본적을 둔 부유한 鹽商 가문 출신이며, 같은 지역 염상 가문 출신의 유명한 문인인 汪道崑의 제자로 추정하였다. 홍자성이 明淸 시대에 가장 큰 상인집단이었던 徽州 商人의 의식을 지닌 지식인이었고, 해당 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던 왕도곤의 학맥과 인맥, 지역색의 영향권에서 활동하였음을 밝혔다.
『채근담』 초간본의 前集과 後集을 분석하여 왕성한 상업문화를 꽃피운 휘주 상인의 경영문화와 지역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였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경영문화와 인간관계, 리더쉽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면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주요한 청언집과 대비하여 『채근담』에는 현실에서 도피하며 은둔하는 청언 일반의 사유가 약하게 나타남을 확인하였다. 영욕과 득실, 시시비비와 이해관계로 뒤엉킨 현실을 세상의 본질로 이해하고,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헤치고 살아가는 자세를 인생의 본모습으로 보는 적극적 처세관을 살펴보았다.
특히 『채근담』에서 가혹한 현실 환경, 대인관계, 인정세태를 부각하여,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세상을 견디고 헤쳐나가는 방법을 제시한 점은 당대 상인의 현실을 은연중 반영하였다고 보았다. 이 논문에서 밝힌 내용은 홍자성과 『채근담』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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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미군정기 귀속농지 처리와 중앙토지행정처

저자 : 류일환 ( Ryu Il-Hwa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3-27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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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은 한국에서 농지개혁의 첫 단계로 귀속농지 매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농지분배 뿐 아니라 금융지원과 경영지도까지 겸하는 전담기구를 만들려 하였다. 농업금융과 농촌지도에 관한 제도와 계획이 수립되기 전에라도, 농지분배 '후속조치'로서의 이러한 기능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농지개혁 추진조직이 이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1946년 번스안에는 금융조합이 운영기관으로서 매각된 귀속농지에 대한 관리·감독을 맡는다는 구상이 있었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토지개혁 논의에서 미군정은 한미간 채널을 통해 토지행정기구 구상을 관철하려 하였다. 금융지원과 경영지도까지 맡을 독립적인 전담행정기구가 토지개혁 전반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도입법의원 산업노농위 측의 생각은 달랐고, 그래서 양측의 입장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조정 과정을 거쳤다. 그 절충의 결과가 과도입법의원에 제출된 토지개혁법안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결국 유산되었고, 1948년 3월 미군정은 그들의 원래 의도를 그대로 담은 법령 173호를 공포하여 중앙토지행정처를 설치하고 귀속농지를 처리하였다.
중앙토지행정처는 미국 농업안정국(FSA)을 모델로 한 조직이었다. FSA는 뉴딜정책시기 만들어진 기구로, 소작인 농지 구매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FSA의 이 프로그램은 기존 농업금융기관을 이용하기 어려운 소작인들을 위해 설계된 제도였고, 영농·가계 계획에 대한 지도·감독과 금융지원을 결합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미군정은 귀속농지 처리에서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에서도 행정처가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이를 위해 그들이 취한 방법은 신한공사를 중앙토지행정처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예인 신한공사는 이러한 구상에 참여하면서 존립을 도모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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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제 조선통치자의 한일회담에 대한 상상력 : 이승만 정권 말기, 장면 내각, 박정희 정권 초기

저자 : 박경민 ( Park Kyung-mi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29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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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통치자가 해방 후 한일 양국관계의 근간인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어떻게 인식했었는지를 복원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생각하기에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지, 한일관계에서 일관되게 중요한 점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낸다. 아울러 이승만-기시 정권기 한일관계부터 주목해보면 과연 그들에게 한일회담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이 있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일본정부와 협력해서 한반도 소재 재산 규모를 조사한 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일본정부의 대한청구권 주장, 그리고 구보타망언까지 지탱하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한일회담에 확실히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의 교섭 결렬부터 4년 반 만에 회담을 재개하고자 기시 정권은 한국측이 요구한 대한청구권과 구보타망언의 철회를 수용했다. 이에 따라 한일회담에서 조선통치자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저하되었고, 점차 외교교섭에서도 배제되며 한일회담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통치자들이 보인 일본정부의 대한정책에 대한 평가와 함께 한일회담 시기 양국관계에 대한 그들의 전망을 살펴본다. 그리고 조선통치자들이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주목한 '미국 책임론'을 실제 교섭의 진척 상황과 대비시켜서 그들의 한일회담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치자들이 시종일관 한일관계에서 중요시했던 부분이 역설적으로 '국민감정'이었다는 점 또한 밝혀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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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유한의 형상에서 무한의 존재로 ―이형곤 추상화의 종교적 해석―

저자 : 박종천 ( Park Jong-chun )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5-348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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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예술은 작가의 개성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창작을 넘어서서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는 예술적 수행이 될 수 있다. 이형곤의 추상화는 시간과 공간이 드러내는 유한의 형상을 초월하여 무한의 존재를 의식하고 경험하는 예술적 수행으로서 명상미술의 새로운 장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들은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존재 의식으로 실존적 현상으로부터 존재의 근원으로 역행하는 명상 혹은 수행으로써 우주의 근원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동시에, 주체와 객체가 사라지고 온 우주가 저절로 하나가 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혹은 '존재-의식-지복'의 신비를 풍류, 불교, 힌두교, 기독교, 장자 등의 종교적 주제들을 상기시키는 예술적 영성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명상이자 신비적 종교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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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동평위공유고(東平尉公遺稿)』 해제

저자 : 김준형

발행기관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간행물 : 민족문화연구 9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1-360 (1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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