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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Advice on the kingship: Focusing on Basilikon Doron

강미경 ( Kang Mi-kyung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179-213(35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5.179


목차

Ι. 서론
Ⅱ. 등장 배경
Ⅲ. 아들에 대한 조언
Ⅳ. 유포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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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a famous politician and philosopher of Rome, wrote letters of advice to his son who went to Athens to study even though he was very busy. The publication of these letters in three volumes had a great effect on modern Western thinkers, and this is De Officiis (BC 44).
As the ancient culture was revived and regenerated after Renaissance, the British Islands saw re-illumination of classical books, and especially De Officiis was widely spread in English and Scotland both in the original version and in English-translated version of 1534. There was a trend to publish letters of advice to sons or daughters by being modeled after De Officiis, and the representative work of the tendency was Basilikon Doron (1599) by James Ⅵ (1567-1625), King of Scotland. Basilikon Doron is a Greek word meaning ‘the royal gift’, and it is a conduct book in the form of letters written to Prince Henry (1594-1612).
At first, this conduct book was printed for private purpose, so there were only seven books in secret. However, by the time King James succeeded to the king of English after Queen Elizabeth Ι (1533-1603), the attention of this book was spread not only in Scotland but also England and European continent. Even fabricated copies and abridged editions were popular. Finally, Basilikon Doron was officially published in London for general public and translated into Latin, French and German, being distributed throughout English and Europe as a bestseller of the time.
Why do we need to read Basilikon Doron now?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book? As Basilikon Doron appeared as a conduct book from the king to his son, this book can help to understand king’s education and ideal king in those days. In addition, it is an important resource to find out how King James, who was a king and intellectual, recognized his era and kingship. It also gives an opportunity to see a device to express the ideal about his kingship during the period of the conflicts among Divine Right of Kings, 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and authority to depose the King.
This study is intended to focus on political and religious backgrounds and contents of the advent of Basilikon Doron, and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Basilikon Doron around 1603 when King James succeeded to thron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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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900-000977316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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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2
  • :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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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권0호(2022년 11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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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구 팔거산성 출토 신라 목간 검토

저자 : 홍승우 ( Hong Sue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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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구 팔거산성 출토 신라 목간에 대한 기초 연구로서, 출토지 대구 팔거산성의 위상과 기능을 살펴본 후, 그것을 염두에 두고 목간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 목간들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신라 행정 체계에 대한 연구의 단서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대구 팔거산성은 신라가 건립한 지방 거점 산성으로 왕경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중심 수비 체제 마련을 위한 군사적 목적과 함께 지방지배 방식의 전환 및 영역 내의 원활한 통치라는 복합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이 출토된 팔거산성 목간은 대부분 부찰목간으로, 이러한 위상과 기능을 가진 팔거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이다. 전체 16점의 목간형 목기 중 10점에서만 글자가 확인되는데,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한국 고대 목간 연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 대한 통설적 판독과 이해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팔거산성 목간의 주요 내용으로는 우선 '王私'라는 새로운 용례를 확정할 수 있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나아가 다양한 '私'의 용법도 확인할 수 있어서, 팔거산성 목간은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 및 수취제도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간 주요 논쟁점 중 하나였던 소위 '城下木簡'에서 '下'의 의미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더하여 성하목간의 물품 양 기재 방식에서 특이했던 '十五石', '十五斗石', '十一斗石' 등이 어떤 의미로 목간에 기재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단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 거점 성에서의 곡물의 납입과 반출 과정 및 다른 거점 성으로의 유통이라는 신라 행정 체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his paper is a basic study on the wooden tablets of Silla excavated from Palgeo-mountain Fortress in Daegu. This work is also intended to provide clues to the study of the Silla administrative system in which these wooden tablets were made and used.
Daegu Palgeo-mountain Fortress is a regional base fortress built by Silla. It had a military purpose to establish a defensive system centered on the transportation route leading to the Capital. It also had a function for developing a method of local governance and smooth governance within the domain.
Most of the newly excavated wooden tablets on Palgeo-mountain Fortress site are tags attached to the luggage, which were made and used in connection with the operation of Palgeo-mountain Fortress. The total number of wooden tablets is 16, but only 10 of them contain Chinese characters. Although the number is not large, it is a decisive historical source that can overturn the conventional reading and understanding of the wooden tablets of Seongsan-mountain Fortress, which occupies the largest portion in the study of ancient Korean wooden tablets.
The main conclusion that can be presented first is that the new historical term 'Wang-Sa' and 'Sa' can be established. Furthermore, it is expected that they will provide clues to a new understanding of the social structure and status system of Silla. And also expected provide clues to the specifics of the tax system.
The next achievement is that it is possible to more accurately grasp the contents of the so-called 'Seongha wooden tablets'. The meaning of '下(ha)', which had a different opinion, became clear. In addition, It was also possible to find out what the meaning of the unusual quantities of '15' and '11' in the records of the amount of grain in the luggage. These newly revealed facts are expected to bring significant progress in the study of the administrative system operated by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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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학문과 사상

저자 : 정재훈 ( Jung Jae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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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에 활동한 학자이자 관료인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림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는 기묘사화 이후 성리학을 보존하여 이를 확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의 정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김안국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 20년 가까이 은거생활을 한다. 이를 전후로 한 시기에 김안국은 주로 성리학의 사회적 실천에 노력하였다. 경상도관찰사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며 『정속언해』, 『이륜행실도』, 『여씨향약』 등 각종 교화서의 간행에 주력하였다. 특히 『이륜행실도』는 김안국이 직접 편찬을 건의한 도서로서, 가족과 친족을 넘어 수평적인 윤리가 향촌에 필요한 윤리로 인식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여씨향약언해본』의 보급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기묘사림과 그에 동조한 인물들과의 연계 속에서 김안국이 주도한 것이었다. 노비에게까지 나이에 따른 기준을 적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김안국은 성균관 사성으로 있으면서 정지운이나 김인후, 유희춘 등 많은 인물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성취는 철학 방면보다는 실천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에 치중되었다. 사대부들이 역사적 주체로서 향촌에서 향약을 실천하고 향촌의 질서를 주도하는 데에 그의 역할은 선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Kim An-guk (1478-1543), a scholar and bureaucrat who was active in the first half of the 16th century, was a disciple of Kim Gong-pil and, along with Jo Gwang-jo, was classified as a Gimyo Sarim. He is evaluated as a person who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preservation and expansion of Neo-Confucianism after Gimyo-sahwa.
After Jo Gwang-jo's political reforms failed due to the kimyo-sahwa, Kim An-guk also resigned from his post and lived in seclusion for nearly 20 years. In the period before and after this, Kim An-guk mainly worked on the social practice of Neo-Confucianism. While serving as an officer in Gyeongsang-do and in Jeolla-do, he focused on publishing various educational books such as 『Jeongsok Eonhae』, 『Iryeonhaengsildo』, and 『Yeossi Hyangyak』. In particular, 『Iryeonhaengsildo』, a book that Kim Ahn-guk personally recommended to compile, provided an opportunity to recognize that horizontal ethics beyond family and relatives were recognized as ethics necessary for rural communities. He also focused on the dissemination of 『Yeossi hyangyak eonhae』, which was led by Kim An-guk in connection with the Gimyo Sarim and the people who sympathized with it. Applying age-based standards to slaves was unprecedented at the time.
While Kim Ahn-guk was a member of Sungkyunkwan, he influenced many people such as Jung Ji-woon, Kim In-hoo, and Yoo Hee-chun. However, his ideological achievements were focused on laying the groundwork for practice rather than on the philosophical aspect. It can be said that his role was pioneering in the practice of hyangyak in the villages as historical subjects and leading the order of the vill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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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순의(金純義, 1645~1714)의 제사 설행과 특징

저자 : 김정운 ( Jeongun Kim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1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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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김순의(金純義, 1645~1714)의 『과헌일기』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을 정리하여 18세기 사대부의 제사 설행 방식을 실증적으로 확인한 연구이다. 김순의의 사례에서 보면 제사는 대상자의 자손들이 역할을 분담하였다. 김순의는 종자(宗子)로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강조하면서, 제사는 친족들과 분담하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에게 종자와 종가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제사는 대상자의 후손이 모두 참여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것을 보여준다.
김순의의 친족들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을 단위로 제사를 담당하였다. 이는 당시 사대부에게 가산을 운영하는 단위가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분할적인 가산을 기반으로 하면서, 개별 제사 마다 일정한 재정을 확보해서 이것을 토대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는 선대의 제사가 종자 개인의 일이 아니라 후손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고조(高祖)의 자손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그 종자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가산을 운영하고 의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던 『주자가례』의 친족 질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김순의의 제사 설행 방식은 조선 사대부의 가족과 친족 운영이 중국의 제도와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This study aims to empirically investigate the process of performing ancestral rites of the literati in the 18th century by extracting and analyzing the records of Kim Sun-ui (1645-1714)'s "Gwaheon Diary." In the case of Kim Sun-ui, the descendants of the subjects shared their roles in the ancestral rites. Kim clearly recognized and emphasized his role as the primogeniture[宗子], and the ritual was shared with his relatives to perform the role. This shows that the consciousness of the primogeniture and the head family was strengthened to the literati at the time, and at the same time, the ritual shows that all the descendants of the subjects participated and shared their roles.
Kim's relatives were in charge of ancestral rites as a unit of the family-centered on the couple. This tells the literati at the time that the unit that runs the family fortune was a family consisting of a couple and children. Based on this divided family property, a certain amount of money was secured for each ancestral rite and a rite was held based on this. This can be seen as a result of the perception that the ancestral rites are not individual affairs of the primogeniture, but all the descendants. This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e kinship order of the "Family Rites" of Zhuxi which allowed the descendants of the great-great-grandparents to operate the family property and perform rituals integrally around the primogeniture. Therefore, Kim's performance of the ancestral rites is an example of the characteristics that the family and relatives of the Joseon Dynasty's literati are different from the Chines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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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20년대 안동지역 여성단체와 활동

저자 : 강윤정 ( Kang Yun-j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1-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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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에서는 1920년 7월 30일 '안동부인회'가 결성되었다. 결성 주체는 김법상·김병규·김선경·김일애 등 불교계와 기독교계 여성들이다. 안동부인회는 안동지역 청년회와 연대하여 여성교육과 안동유치원설립 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의 활동은 여성교육계몽에 그치는 한계를 보였지만, 새로운 여성운동을 여는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안동부인회가 설립한 안동유치원의 교사로 부임한 주금경·이기현 등에 의해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925년 11월 조직된 안동여성회는 계급의식 각성을 목적으로 자체의 교양과 훈련에 노력하는 새로운 성격의 단체였다. 창립 이후 안동여성회는 부인야학 및 부인견학 활동, 도산서원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도산서원철폐운동은 남성들의 여성인식 전환에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안동여성회는 1926년 5월 명칭을 '안동여자청년회'로 바꾸었다. 이를 주도한 주체는 중앙의 화요파, 안동의 화성회와 연결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다. 이들은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 이후 '안동청맹 가입, 혹은 근우회 지회로의 개편'이라는 선택지 앞에 놓였다. 그러나 안동여자청년회는 무산아동을 대상으로 한 여자야학부 운영, 메이데이 행사 준비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1929년까지 독자적인 여성청년조직을 유지하였다. 이는 전국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며, 근우회 안동지회가 조직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1929년 들어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이에 안동청년동맹 산하에 여자부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여성들이 등장하였다. 김성애·전금옥·박금숙·김정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1931년 들어 조공재건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안동콤그룹 세포조직인 여자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여성운동으로서의 방향성을 찾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적지 않다.


In the Andong area, the Andong Women's Association was formed on July 30, 1920. The formation subjects are Buddhist and Christian women such as Kim Beop-rye, Kim Byeong-gyu, Kim Seon-kyung, and Kim Il-ae. The Andong Women's Association led the movement for women's education and the establishment of Andong kindergarten in solidarity with the Andong Youth Association. Their activities showed limitations only in the women's education enlightenment movement, but served as priming water for opening a new women's movement. This is because the socialist women's liberation movement was developed by Joo Geum-kyung and Lee Ki-hyun, who were appointed as teachers of Andong Kindergarten established by Andong Women's Association. The Andong Women's Association, organized in November 1925, was a new organization that strives for its own culture and training for the purpose of awakening class consciousness. Since its foundation, Andong Women's Association has carried out women's night school, women's field trip activities, and the campaign to abolish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In particular, the movement to abolish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is significant in that i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changing men's perception of women.
Andong Women's Association changed its name to Andong Women's Youth Association in May 1926. The subjects who led this were socialist activists connected to the Hwayo faction in the center and Hwaseonghoe in Andong. After the declaration of the Jeongwoohoe in November 1926, they were placed in front of the option of "joining Andong Cheongmeng, or reorganizing the Geunwoohoe branch.“ However, the Andong Women's Youth Association maintained its own women's youth organization until 1929 by operating the women's department and preparing for May Day events for Musan children. This is a rare case in the country, and it is also the reason why the Andong branch of the Geunwoohoe was not organized. However, as the power weakened in 1929, new alternatives were eventually needed. Accordingly, women who organized and operated the women's club under the Andong Youth League appeared. They are Kim Seong-ae, Jeon Geum-ok, Park Geum-sook, and Kim Jeong-hae. In 1931, they organized the women's division, a cellular organization of Andong Com Group, which was organized as part of the tribute reconstruction movement. Their activities revealed the limitations of not being able to find a direction as a women's movement, but on the other hand, they are significant in that they played a part in the continuous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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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강점기 고적조사 사업과 성주 성산동 고분군의 조사

저자 : 정인성 ( Jung Inse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6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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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실시한 관제사업의 하나였다. 성주지역에 대한 최초의 고적조사는 1902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그 이후 1914년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이마니시 류(今西龍),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에 의해 차례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일본 관학자들에 의한 조사성과는 철저하게 일본학계에서 공유되었으며 일본인 사회가 소비했다. 조선인들은 철저하게 소비주체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 분야의 탈식민지화란 그 내용을 한국인의 시선에서 재검토하여 맥락재구성의 과정을 거쳐서 완수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의식하여 일제강점기 일본 연구자들의 고고학적 활동을 재검토하는 작업의 일환의 하나로, 성주지역에서 이루어진 고적조사의 경과와 조사 내용을 추적하고 복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During the Japanese rules, the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project was carried out as one of the means for colonial rule in the process of Japan's forcible annexation of Korea. The first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of the Seongju area was conducted by Sekino Tadashi(關野貞) in 1902, and from 1914 to 1920 by Torii Ryuzo(鳥居龍藏), Imanishi Ryu(今西龍), Hamada Kosaku(濱田耕作), Umehara Sueji(梅原末治), and Yatsui Seiitsu(谷井濟一). was investigated several more times. However, their investigations are rougher and insufficiently documented compared to today's investigations, and in particular, they focused only on securing excavated relics.
This study is one of the work to review the archaeological activities of Japanese researche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ased on this awareness of the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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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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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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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행과 민중의 대응 : 방역의식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선 ( Kim Hy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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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령,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참여는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방역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방역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이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가 방역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Dugald Christie의 『奉天三十年』과 『東三省疫事報告書』를 중심으로 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입과 방역당국의 방역정책과 민중의 대응, 방역에 대한 민중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1910년 페스트가 발생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페스트를 빌미로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청조는 유럽의 방역을 모범으로 한 근대적 방역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당시 민중은 방역과 위생에 무지했으며, 엄격하고 과감한 근대적 방역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방역사업을 도왔던 외국인 의료선교사의 희생은 서양인과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역정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중국 민중은 상인들의 모험을 통해 근대적 방역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방역정책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정부의 방역정책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병원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개설한 병원에서 중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환자가 희생되었으며, 이는 방역정책의 실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역과 위생에 대한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우고 방역의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는 신문과 포고문을 배포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높은 방역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은 방역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민중의 적극적 협조는 방역정책의 성공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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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리클레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인가?

저자 : 안재원 ( Ahn J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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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한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다. 역병은 아테네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마저 해체했다. 이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배분 정의론과 종교와 법에 호소하면서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다름 아닌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전쟁과 역병의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중함의 리더십임을 강조하는 작품이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역병은 긍정적 측면도 남기었다. 역병으로 인해 소위 “데카당스”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했을 때, 예컨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의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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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의 인구추이에 대한 연구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저자 : 최규진 ( Choi Gy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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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형산강 유역이라는 공간 범위에서 청동기시대 취락 조사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취락 자료를 중심으로 시기별·지역별 인구를 추정해보고 당시의 인구추이와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 인구추정에 있어서 1인이 필요한 주거 면적을 5㎡의 수치로 추정했다. 그 결과 전기의 인구를 100%로 산정하여 인구추이를 지구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청동기시대 전기 인구 규모의 40.7%로 60% 정도 감소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추정 결과로 본 인구분포 비율은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60% 정도 감소하였으나 경주 중심권과 안강 방면 북부권의 경우에는 전기보다 후기의 인구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주중심권으로 취락들이 통합되어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추정되며 취락의 구조가 커짐을 뜻한다. 이러한 경주 중심권으로의 인구증가는 청동기시대 후기 읍락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주중심권으로 인구가 모여드는 인구집중을 토대로 하면서 대외교류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중심으로 한 기초 정치체가 형성되고 더 통합되어 지역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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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진흥왕대 황룡사(皇龍寺) 창건과 그 의미

저자 : 최준식 ( Choi Jun-sic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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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가 창건된 배경과 목적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황룡사 창건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미처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도 확인된다. 예컨대 진흥왕대 활발하게 진행된 대외활동이 황룡사 창건 과정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황룡사 창건의 배경과 목적을 대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 자료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553) 신궁(新宮) 조영을 위한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사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황룡사 보완발굴조사 내용을 참고하면 황룡사는 북편의 건물군(建物群)과 담장이 먼저 들어서고, 점차 불상(佛像)과 금당(金堂)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이 신궁을 사찰로 전환하게 된 명분은 '황룡(黃龍)'의 출현이었다. 이때 '황룡'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聖王)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신라 토착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용' 서상(瑞祥)에 황제를 표상하는 중국 '용'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궁의 황룡사로의 전환은 백제와의 전쟁과 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 마무리되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백제 성왕과 마찬가지로 양무제(梁武帝)의 숭불(崇佛) 정책을 참고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특히 황룡사에 양의 국가대사였던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의 역할과 유사한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룡사는 진흥왕이 불교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황룡사는 진흥왕 당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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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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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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