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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Advice on the kingship: Focusing on Basilikon Doron

강미경 ( Kang Mi-kyung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179-213(35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5.179


목차

Ι. 서론
Ⅱ. 등장 배경
Ⅲ. 아들에 대한 조언
Ⅳ. 유포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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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a famous politician and philosopher of Rome, wrote letters of advice to his son who went to Athens to study even though he was very busy. The publication of these letters in three volumes had a great effect on modern Western thinkers, and this is De Officiis (BC 44).
As the ancient culture was revived and regenerated after Renaissance, the British Islands saw re-illumination of classical books, and especially De Officiis was widely spread in English and Scotland both in the original version and in English-translated version of 1534. There was a trend to publish letters of advice to sons or daughters by being modeled after De Officiis, and the representative work of the tendency was Basilikon Doron (1599) by James Ⅵ (1567-1625), King of Scotland. Basilikon Doron is a Greek word meaning ‘the royal gift’, and it is a conduct book in the form of letters written to Prince Henry (1594-1612).
At first, this conduct book was printed for private purpose, so there were only seven books in secret. However, by the time King James succeeded to the king of English after Queen Elizabeth Ι (1533-1603), the attention of this book was spread not only in Scotland but also England and European continent. Even fabricated copies and abridged editions were popular. Finally, Basilikon Doron was officially published in London for general public and translated into Latin, French and German, being distributed throughout English and Europe as a bestseller of the time.
Why do we need to read Basilikon Doron now?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book? As Basilikon Doron appeared as a conduct book from the king to his son, this book can help to understand king’s education and ideal king in those days. In addition, it is an important resource to find out how King James, who was a king and intellectual, recognized his era and kingship. It also gives an opportunity to see a device to express the ideal about his kingship during the period of the conflicts among Divine Right of Kings, 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and authority to depose the King.
This study is intended to focus on political and religious backgrounds and contents of the advent of Basilikon Doron, and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Basilikon Doron around 1603 when King James succeeded to thron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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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900-000977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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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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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225-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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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2
  • :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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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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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조선 및 낙랑군 시기의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고찰

저자 : 강종훈 ( Kang Jong-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0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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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패수(浿水)'의 위치를 놓고 그동안 청천강으로 보는 설과 압록강으로 보는 설이 양립해 왔다. 사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니 두 설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결과,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는 '대령강'이 패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고, 근래 알려진 대령강장성이 패수가 대령강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파악되었다. 이를 근거로 낙랑군에 속한 현들 가운데 패수 부근에 있던 현들의 위치를 새로 비정하였는데, 특히 '수성현(遂成縣)'은 대령강과 청천강 사이에 위치한 박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re have been the academical debates on the location of the Pae-su River during Kojoseon and Lolang periods, which was the border between Kojoseon and Han Empire. The two major theories are the Cheongcheon-gang River theory and the Yalu River theory. But a close investigation shows that both of them have the logical defects.
As a result of seeking new alternatives, it is judged that the Daeryeong-gang River between the Yalu River and the Cheongcheon-gang River is likely to have been the Pae-su River. And it is thought that the recently known 'the long wall of Daeryoung-gang' can be a good evidence to prove it. Based on this, the location of the prefectures of Han Empire near the Pae-su River can newly be determined. Especially Suseong-hyun prefecture's location is presumed to be Pakcheon, which is located between the Daeryeong-gang River and the Cheongcheon-gang River.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Daegu Catholic University / kangjh@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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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구려(高句麗) 석비(石碑)의 교(敎)

저자 : 이용현 ( Lee Yong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9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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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 관련 자료는 1차 자료가 적은 한국 고대 행정문서 문자자료 가운데에서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그 가운데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이 고구려 자료다. 충주고구려비,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고구려 敎의 분석, 그리고 신라 중고 초기의 비석에 보이는 敎와의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검출해낼 수 있다. 고구려 敎 발령의 주체는 국왕 1인이었는데, 이는 敎의 발령 주체가 諸侯王이었던 고대 중국, 그리고 국왕을 포함한 집단이었던 중고초 신라와 비교할 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敎를 발령할 때, 관련사항에서는 先代, 先王의 敎를 중시하였다. 當代에 敎 발령 시, 先王, 祖王의 敎를 참작하여 認容繼受하거나 變容改修하였는데, 그 근거는 항상 이전의 敎였다. 敎 발령에 있어서, < 敎 - 節敎 >로 하여 敎 2건을 1組로 묶어 발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지니는 건으로, 그 안에서 항목이 분류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敎 안에 부속세칙 혹 시행강제규정으로서 令이 수반되는 경향이 있다. < 敎하여 令 즉 -하게 하다/하노라 >라는 패턴이었다. 敎를 위반할 경우 처벌 규정은 制令의 형식으로 말미에 부가하기도 했다. 일련의 敎는 말미가 종결사 之로 마무리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같은 현상은 신라 비석 초기 敎文에서도 보인다. 고구려의 敎 양식은 新羅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라의 敎라 할 수 있는 6세기 1사분기 신라의 敎에는 先王 혹 前時의 敎를 引用하여 존중하였다. 또 <敎 - 節敎 >의 서식도 보이며, 敎 말미 처벌규정 隨伴의 현상 등이 그것이다.


The subject of the appointment of Goguryeo was one king. This can be said to be a characteristic compared to ancient China, where the subject of the church was Feudal lords, and 6 Century's Silla, which was the ruling group including the King. When issued King's order Gyo or Jiao, it valued and related Former and Ancestor of King's orders. It was issued in groups of two cases under < Gyo敎-Jeol Gyo節敎 >. There was a tendency for Gyo to be accompanied by Command Ryeong令 as an accessory detailed rule or enforcement regulation. After the order was issued, when the order was violated, compulsory regulations, including punishment regulations, were added at the end in the form of Je制. A series of Gyo tend to end with a terminator Ji之. In many aspects, it can be concluded that Goguryeo's A style influenced Silla through comparison of Goguryeo's tombstones and early Silla tombstones.
(Institute of Humanities Studies,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yhyi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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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라의 船府(署) 정비와 백촌강 전투

저자 : 이재석 ( Lee Jae-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2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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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진평왕 5년(583)에 처음 설치된 신라의 선부서(船府署)가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직후인 문무왕 18년(678) 선부(船府)로 승격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문무왕 3년(663)에 卿 2인의 신설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삼국사기』 職官志에는 船府의 성립 이전에는 兵部의 大監ㆍ弟監이 선박(舟楫)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고 하므로 선부서(船府署)는 곧 병부의 屬司였으며 따라서 선부로의 승격은 병부로부터의 자립화 과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선부서의 大監ㆍ弟監 설치가 兵部의 大監ㆍ弟監 설치보다 시기적으로 선행하므로, 직관지에보이는 舟楫之事 담당의 兵部 大監ㆍ弟監과 선부서의 그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선부서의 운용 실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본고에서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정합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으로서 583년 선부서의 大監ㆍ弟監이 처음부터 兵部의 예하 조직으로 편성되었다는 점과 589년ㆍ623년에 각각 설치되는 병부의 제감과 대감은 583년 선부서의 大監ㆍ弟監과는 별개의 조직이었다고 파악해야 함을 피력하였다. 또한 663년 선부서 卿 2인의 신설은 선부의 자립으로 가는 중간 다리였으며 이러한 선부서의 기능 강화는 특히 663년 8월에 벌어진 백촌강 水戰과 직ㆍ간접적으로 연동되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선부서 경의 신설이 통일전쟁에 임하는 신라의 선제적 태세에 비추어볼 때 백촌강의 水戰 이전에 선제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Seonbu(船府) was one of Silla's central administrative departments and was in charge of Silla's naval forces and ships. According to the records of Samguksagi(三國史記), Seonbu was first established in 583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And until it became an independent government office in 678, it seems that it was commanded by the military department, Byeongbu(兵部). In the Byeongbu and Seonbu, there are government posts with the same name, Daegam(大監) and Jegam(弟監), and I mentioned in this article that the Daegam and Jegam were separate government posts, respectively.
In addition, in this paper, I reviewed the significance of the appointment of two members of the Seonbu, especially in the 3rd year of King Munmu (663). The appointment of two new seniors in 663 occurred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from the military department(兵部) to the independence of the Seonbu, which meant strengthening the function of the Seonbu. As is well known, in 663, there was a most important battle to determine the victory or defeat of the Baekje Restoration War. In particular, the naval battle of the Baekchon River between the Silla-Tang Alliance and the Baekje-Japan(Wa) Alliance in August 663 was important. I emphasized that the appointment of the senior superintendent((卿) of the Seonbu and its strengthening of the functions were directly or indirectly related to this naval battle. In addition, in light of Silla's preemptive attitude toward the unification war, I mentioned the possibility that the construction of the Seonbu was preemptively carried out with preparation for this in advance before the Battle of the Baekchon River.
(Department of History and Culture, Hansung University / jsl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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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6년 신라 대당 외교의 내용과 목적

저자 : 안주홍 ( An Juh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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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86년의 신라의 대당 외교 활동을 분석한 글이다. 『삼국사기』에는 686년에 신라가 예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듬해 태조와 직계 4친으로 구성된 祖廟에서 致祭한 기록과 연결하여, 신라가 『예기』를 수용하여 제후 5묘를 정립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신라는 진덕왕대에 신정 『예기』와 『예기정의』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686년의 예기는 『예기』가 아니라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대로 당례이다. 그런데 신라는 진덕왕대에 『진서』를 통해 오례의 개념을 알았고, 『정관례』도 수용하였다. 태종무열왕대는 양국의 관계가 긴밀하였으므로 『현경례』도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은 677년, 678년에 당례를 개편하였다. 686년에 신라가 요청한 당례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신문왕은 새로운 당례를 수용하지 않아도 국가의례를 정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왕에 수용된 당례에 따라 683년에 국왕의 혼례를 거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은 군신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방법의 하나로 경전을 사여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대당 관계의 개선을 위해 당례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대당 관계를 개선하고자 외교 활동을 벌였다. 681년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문무왕의 사망과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 684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요청에 따라 그해 12월에 일본의 견당학생의 귀국을 도왔다. 685년에 망덕사를 창건하여 이 소식을 686년에 파견한 하정사를 통해 알렸을 것이다. 686년의 기록은 신라의 요청이 성사된 시점이다. 당 측천은 686년에 다시 임조하였고,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신라의 요청을 이행하였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diplomatic activities of Silla and Tang Dynasty in 686. Silla accepted the newly compiled "Yegi(禮記)" and "Yegijeong(禮記正義)" from the Tang Dynasty during the reign of King Jindeok. Therefore, the view that Silla accepted "Yegi" in the Tang Dynasty in 686 and completed the Jongmyo(宗廟) system in 687 cannot be followed. Yegi, which Silla requested to the Tang Dynasty in 686, is Dangrye(唐禮). In 648, the Tang Dynasty gave "Jinseo(晉書)" to Silla. Silla learned Orye(五禮) after reading “Jinseo”. King Jindeok of Silla accepted the Tang Dynasty's Jeonggwanrye(貞觀禮). Tang Dynasty reorganized Dangrye in the 670s and Silla requested that.
In 683, King Shinmun married on the basis of Dangrye. As such, Silla had no problem in reorganizing the national ritual based on Dangrye. The Tang Dynasty presented 'Confucian scriptures' to other countries. This was a good way to turn neighboring countries into subordinate countries. Silla tried to create a good relationship by requesting "Dangrye" from the Tang Dynasty. In 681, King Sinmun dispatched envoys to the Tang Dynasty to announce the death of King Munmu and his ascension. In 684, envoys were dispatched to the Tang Dynasty. Tang Dynasty asked Silla for help so that Japanese students(日本遣唐學生) could return to their home country. Silla actively accepted the Tang Dynasty's demands. In 685, Silla founded Mangdeok Temple(望德寺) for the Tang Dynasty. In 686, a envoy was dispatched to the Tang Dynasty to announce this news. Wu Zeitian(武則天) again replaced the emperor in 686. She tried to show off her power by fulfilling Silla's request.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ajhkn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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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세기 시장(諡狀)의 출현과 의미

저자 : 김현지 ( Kim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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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신하의 생전 행적을 기려 諡號를 내려주었으며, 그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사후의 이름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전기에는 『經國大典』의 규정에 맞는 신하에게 시호를 내린 데 비하여 선조대에는 儒賢에게, 인조대에는 전쟁 절사자에게 증시가 승인되면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규정 외의 인물이 시호를 받는 사례가 늘어났다.
국가에서 시호를 내릴 때 그 절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사망한 증시 대상자의 집안에서 行狀을 제출한다. 행장이란 어떤 인물의 사후에 짓는 것으로 인적사항과 생전의 행적을 세세하게 남기는 글이다. 예조와 봉상시에서 차례로 이 행장을 검토하고, 다시 홍문관에서 사망자의 행적을 살펴 시호 三望을 결정한다. 결정된 삼망이 의정부의 署經을 통과하면 다시 행장과 함께 보고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 일련의 증시 절차에서 시호를 논의하는 가장 기초자료가 되는 문서가 행장이다. 조선전기 행장은 사망한 관원의 친척들이 작성하였다. 그래서 행장의 내용과 실제 행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인조대에는 가문 외의 인물이 시장을 따로 짓는 관례가 생겨났다. 이는 행장의 객관성 문제를 논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규정 외의 인물이 시호를 받는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본래 규정인 정2품 이상의 인물에게 내릴 시호를 논의할 때에는 비교적 행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증직 후 시호를 받은 인물들은 관품이 증시 자격에 이르지 못하였던 만큼 다른 이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시호를 하사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롭게 시장을 짓게 되었다.
이렇듯 객관적으로 사실과 같은 내용을 찬술해야 한다는 인식은 후대로 갈수록 강해지며, 이러한 인식과 관련하여 숙종대 李選(1632~1692)이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그는 수많은 저술에서 객관적인 행장 작성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이선이 당시 증시를 주도한 인물들과 교류하였고 숙종 역시 그의 의견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인식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증시 제도는 개인적 · 가문적 명예 보장과 더불어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국가의 의도를 투영시키려면 기초 자료가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장이란 형태의 행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물의 행적을 평가하는 가장 기초자료인 행장 찬술에 점차 국가의 관여가 확대되었다.


A posthumous name(諡號, Shiho) refers to a title given to the deceased official by evaluating his conducts while aliv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 accordance with the regulations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經國大典』,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 posthumous name was strictly given only to 'the royal families and the officials with the senior grade of the second rank or higher' who had lost their jobs. Then, Confucian intellectuals(儒賢, Yuhyeon) started to be given the titles by the Sarim(士林) forces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when the increased expectation of loyalty to the state during the Imjin War(壬辰倭亂) led to more cases where people other than those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 were given the titles. King Injo embraced these changes and gave the titles to the persons whom the king himself or the dynasty deemed exemplary using the system of giving a posthumous name.
Before the state issued a posthumous name to the deceased subject, his family first submitted a record of the deceased during his lifetime(行狀, Haengjang). A Haengjang refers to a detailed record containing the personal information of the king and the gentry during the Joseon Dynasty only after their death. Yejo(禮曹) and Bongsangsi(奉常寺) review the contents of the submitted Haengjang in turn and again, the conducts of the deceased are examined at Hongmungwan(弘文館) to determine three candidate titles to be given to the deceased. After the prospective titles are agreed upon and are agreed upon and signed(署經) by Uijeongbu(議政府), the three candidate titles are reported again with the Haengjang to receive the king's approval.
A Haengjang serves as the starting point and the most basic document for discussing a posthumous name in this series of procedure in which a posthumous name is given. Howeve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 Haengjang was written by the relatives of the deceased official, which constantly raised a question about the objectivity of its contents. As the deceased was a member of the same family, his relatives did not write his conducts in an honest and transparent way, only highlighting his good deeds.
Then, there was a movement to write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during the reign of King Injo. This was because there was a need for a procedure to discuss the issue of objectivity of a Haengjang and to grant legitimacy when a person other than the aforementioned person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 would receive a posthumous name. Credibility regarding knowledge of Confucianism or loyalty could vary according to evaluation criteria, whereas the grades of official ranks in the original regulations served as an objective and well-accepted criterion. In addition, if a person with low rank was given a posthumous name later, there could be a gap of several hundred years between the date of birth and death of the person, thereby raising the question of whether his Haenjang was a reliable data. It was necessary to write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for the legitimacy of granting the title to those whose official title did not meet the qualifications for being given a posthumous name in order to make it more persuasive to others.
Hence, the perception that the market should be praised objectively and based on facts grew more and more widespread with each passing generation. It is worth paying special attention to Lee Seon(李選, 1632-1692)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who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writing a Haengjang objectively in his numerous writings. It is thought that this perception was preval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given that Lee Seon interacted with the people who were mainly in charge of giving a posthumous name at the time and that King Sukjong also accepted most of his opinion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became a common practice and was included in the regulations for a person with guaranteed sentences to write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The system of giving a posthumous name in the 17th-century Joseon Dynasty was expanded from guaranteeing honor to individuals and families to emphasizing national values. A Haengjang in a form of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came into being as the fairness and objectivity of its contents was essential to clearly projecting the state's intentions.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khj9410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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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만(張晩)의 대외정세 인식과 대중국 외교현안 대응

저자 : 허태구 ( Huh Tae-k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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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선조대부터 인조대까지 최고위급 군사·외교 전문가로 활약한 張晩(1566∼1629)의 대외정세 인식과 대중국 외교현안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았다. 이 논문의 중요한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장만의 대후금 인식과 평가는 後金의 세력이 확대되고 이를 둘러싼 대외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장만을 비롯한 인조대 조정의 君臣들은 후금의 최우선 공격 목표를 조선이나 毛營이 아닌 中原으로 판단하여, 정묘호란 직전까지도 후금의 전면적인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인조대 초반의 조선의 가장 중요한 안보 이슈 가운데 하나는 毛文龍과 요동 난민에 대한 대응이었다. 장만은 후금에 대한 모문룡의 과시적이고 도발적인 무력시위가 조선과 후금 사이의 우발적 교전을 야기하는 상황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어 태세 강화를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둘째, 장만은 深河 패전으로 초토화된 關西 지역의 전후 수습을 전담하며 광해군의 관망적이고 양단적인 외교노선에 힘을 보탠 유능한 실무형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과 관련된 다양한 외교현안을 다룰 때에는 여전히 對明義理라는 명분을 강하게 인식하며 대처하였다. 인조대 모문룡 문제를 처리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그의 입장과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對明事大가 대명의리라는 명분에 함몰되어 조선의 국익을 방기하는 성격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후금에 대한 강경한 척화론을 주장하였던 李爾瞻, 柳希奮 등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This paper examined Jang Man(張晩)'s perception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response to diplomatic issues with China, who served as the highest-ranking military and diplomatic experts from the reign of King Seonjo(宣祖) to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The important poi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 Jangman(張晩)'s perception and evaluation of the Hugeum(後金) changed little by little as the Hugeum(後金)'s power expanded and the external environment surrounding it changed. However, Jang Man(張晩) and other kings and servants of the Royal Court judged that the Hugeum(後金)'s top priority attack goal was not Joseon(朝鮮) or Mao Wenlong(毛文龍)'s military camp, so they did not see the possibility of a full-scale invasion of the Hugeum(後金) until just before the Jeongmyo Horan(丁卯胡亂). In the early days of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one of the most important security issues in Joseon(朝鮮) was the response to Mao Wenlong(毛文龍) and Liao Dong refugees(遼民). Jang Man(張晩) was concerned about the unintended war situation between Joseon(朝鮮) and Hugeum(後金) caused by Mao Wenlong(毛文龍)'s conspicuous and provocative armed demonstration against the Hugeum(後金). And he insisted on strengthening his defense posture.
Second, Jang Man(張晩) was a competent practical official who was in charge of post-war defense in the Pyeongan-do(平安道) area devastated by the defeat of the Simha battle(深河戰鬪) and helped King Gwanghaegun(光海君)'s wait-and-see diplomatic route. Nevertheless, when dealing with various diplomatic issues related to the Ming(明), he still strongly recognized and dealt with the justification of Daemyeongeuirie(對明義理). His position and attitude did not change when dealing with problems related to Daemyeongeuirie(對明義理) in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However, his Daemyeongsadae(對明事大) was not at all in the name of Daemyeongeuirie(對明義理), giving up Joseon(朝鮮)'s national interests. His move was distinct from Yi I-cheom(李爾瞻) and Yoo Hee-bun(柳希奮), who insisted on a strong Cheokhwa-ron(斥和論) against the Hugeum(後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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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20년대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청년운동

저자 : 최용석 ( Choi Yong-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8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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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일지역은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연일군,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관제 조정으로 통합되어 영일군이 되었다. 3·1운동이후 영일지역의 청년들도 각 면지역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설립하였다. 포항면의 영일청년회, 청하면의 청하청년회, 송라면의 송라청년회, 흥해면의 흥해청년회 등을 설립하였고, 이러한 청년단체들은 이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전국의 청년단체들이 혁신을 통해 조직체를 변경한다. 전국적 청년단체의 혁신은 영일지역의 청년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혁신과 더불어 지역 청년단체 연합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영일지역에서는 10 여 개의 청년단체들이 모여 영일청년연맹을 설립한다.
이후 영일청년연맹은 1927년, 청년운동이 민족주의·사회주의 양 진영의 통일전선체 구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방향전환 한 청년회들은 더욱 더 조직화 되어 一郡 一靑年會라는 목적아래 각 府·郡에 있는 청년회 및 청년연맹을 자진 해체하고, 대신 각 府·郡 청년동맹을, 그리고 각 面에는 동맹지회를 결성하여 나갔다. 영일청년연맹 역시 이러한 통일전선체 구성을 통해 영일청년동맹으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또한 정학선·이재우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사상단체 '四月會'를 해체하고, 신간회 영일(포항)지회 설립하였다.
영일지역의 청년들은 영일청년동맹 활동과 신간회 영일(포항)지회와 의 연대활동을 통해 민족의 이익 옹호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29년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일어난 조선공산당사건, 조선공산당 재건위 사건은 신간회 각 지회와 청년단체에 있어서 큰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신간회 각 지회 간부들이 대거 연행이 되고, 이들이 속한 단체들은 강제 해산되거나,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일지역에서도 조선공산당사건은 지역의 청년운동이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청년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포항교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새로운 민중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특히, 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던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검거된 이후, 청년단체 뿐만아니라 노동조합, 형평사, 어업조합 등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거나 와해되면서 지역적 민족운동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일지역 청년운동은 많은 청년들을 지역의 민족운동의 선도자적 위치로 이끌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계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적·사상적 분화를 뛰어 넘어, 영일청년연맹·신간회영일(포항)지회·영일청년동맹 등 단일한 민족운동 세력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은 영일지역에서도 청년들이 1920~30년대 청년회 활동과 해방 이전까지 일제에 대해 끊임없이 항거하고 전민족적 활동을 이어왔다는데 그 의의와 영향은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Yeongil-gun, Yeonil-gun, Heunghae-gun, Cheongha-gun, and Janggi-gun were reorganized into Yeonil-gun, Heunghae-gun, Cheongha-gun, and Janggi-gun due to local control reorganization in 1895.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young people from the Yeongil area also established youth groups centered on each Myeon area. Yeongil Youth Association in Pohang-myeon, Cheongha Youth Association in Cheongha-myeon, Songra Youth Association in Songra-myeon, and Heunghae Youth Association in Heunghae-myeon were established.
At that time, socialism was also spread in the Yeongil area by Jeong Hak-seon and others. After that, each youth organization changes its organization through innovation. After the change in the Youth Association, youth organizations in the Yeongil region sought a coalition of local youth organizations. At a time when each youth organization was changing, it was also necessary to unite local youth organizations and unify the youth movement. Due to this need, the Yeongil Youth Federation is established with more than 10 youth organizations in the Yeongil area.
Since then, the Young-Japanese Youth Federation has undergone another change in 1927 when the youth movement discussed the composition of a unified front between the two camps of nationalism and socialism. The youth associations, which changed their direction to the National Unification Front Movement, were further organized and voluntarily disbanded youth associations and youth federations in each department and county, and formed alliance branches in each side. The Young-Japanese Youth Federation will also be transformed and developed into the Young-Japanese Youth Alliance through the formation of such a unified front. In addition, the ideological organization “Sawolhoe”, led by Jeong Hak-seon and Lee Jae-woo, was disbanded and the Yeongil (Pohang) branch of the Singanhoe was established.
Young people in the Yeongil region engaged in activities to defend the interests of the people through joint activities with the Yeongil Youth Alliance and the Yeongil (Pohang) branch of the Singanhoe. However, the Joseon Communist Party incident and the Joseon Communist Party Reconstruction Committee incident, which took place from the end of 1929 to the early 1930s, were a major blow to each branch and youth organization of the Singanhoe. Due to these cases, a large number of executives of each branch of the Singanhoe were arrested, and the organizations to which they belonged were forced to be dissolved or subject to many restrictions on their activities. Even in the Yeongil region, the Joseon Communist Party incident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the local youth movement to shrink.
The national and youth movements in Yeongil, Gyeongsangbuk-do, were led by young socialist people and Christians from Pohang Church. However, there was a limitation in that it could not actively attract the participation of new people except them. In particular, after the arrest of socialist youth who led the local movement by the Japanese colonial rule, activities such as labor unions, equity firms, and fishing associations as well as youth groups were greatly reduced or collapsed, revealing the limitations of the local national movement. However, despite these limitations, the Yeongil Youth Movement led many young people to a leading position in the local national movement. In addition, they constantly tried to form a single national movement force, such as the Youngil Youth Federation, the New Korean Hoeyeongil Branch, and the Youngil Youth Alliance, beyond the ideological and ideological differentiation of socialist and Christian uncompromising nationalists. In this regard, it can be said that the significance and impact of young people in the Yeongil region constantly protested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nd continued national activities before liberation in the 1920s and 30s are great.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ttl7904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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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원대(元代) 운남(雲南) 통치와 토인(土人) 활용 - 호광행성(湖廣行省)과 비교를 중심으로 -

저자 : 진현경 ( Jin Hyeongy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1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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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元朝의 운남지역 통치변화 과정에서 재지세력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다루고, 더 나아가 호광 지역과 비교를 통해 元代 土人 활용 방식을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元朝는 운남에서 재지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바탕에는 정복한 지역의 기존 세력을 흡수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몽골의 전략적 관습이 있었다. 몽골인들은 제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정치 환경에 조응하여 새로운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복지가 가진 고유한 요소에 더해 몽골적 요소도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은 남송전쟁에 대비하여 뭉케 시기에 운남을 선제적으로 점령하였다. 하지만 운남은 몽골의 정치중심지에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에 어려움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몽골 통치자는 해당 지역 재지세력의 협조에 크게 의지하여 통치력을 보강하였다. 운남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재지정치체 大理國의 정세와 몽골의 군사목적은 호응하였고, 몽골 통치자는 재지세력에게 운남 통치를 맡기는 방식으로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후 舍利畏의 난, 雲南王 후게치 독살사건을 거치며 元朝는 이 지역에 지방 최고통치기구인 行省을 세우게 되어 운남 재지세력 활용방식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元朝는 운남에서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路-府-州-縣의 중층적 지역 구획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재지세력을 정규 관원으로 선발하고 관직 세습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활용 방식은 이후 明代의 土官 개념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새로 편입되어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재지세력을 재편하기 어려웠던 지역에서는 투항한 재지수령과 휘하 세력을 간접적으로 통제하였다. 이와 같은 간접 통치방식은 호광행성에서 이루어진 蠻夷官 제도와 유사하다. 元代의 두 가지 土人 활용법은 후대의 재지세력 관할 방식에 영향을 주어, 明 중기에 이르러서는 土司制度라는 하나의 제도로 통합되었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Yuan dynasty's governance of Yunnan (雲南) focusing on how the native force was utilized and also categorized the utilization method of the native people in Yuan Dynasty into two types through a comparison of the Branch Secretariat of Yunnan (Yunnan Xingsheng 雲南行省) and the Branch Secretariat of Huguang (Huguang Xingsheng 湖廣行省). Mongolian rulers actively utilized indigenous Yunnan people in this region for reign. On the basis of this phenomenon was a Mongolian strategic custom of absorbing the indigenous people of the conquest site and utilizing them in the next war. In the process of expanding the empire, Mongol sought a new way of governing in harmony with the political environment of each conquest. Inevitably, this process resulted in embodying both the customs of Mongol and of the conquest.
During the reign of Möngke Qa'an, Mongol preemptively conquered Yunnan to prepare for the military campaign against the Southern Song (南宋). However, as Yunnan was located far away from the capital, centralized control was difficult. Therefore, Mongolian rulers heavily relied on the cooperation of native force of the region to reinforce their governance. While conquering Yunnan, the political scene of the indigenous kingdom, Dali Kingdom(大理國), and Mongol's military purpose responded, and Mongolian rulers governed this area by entrusting the native force with the ruling of Yunnan. Following the sheliwei(舍利畏)'s revolt in 1264 and the poisoning of the prince of Yunnan(雲南王) in 1270, Qubilai Qa'an came to establish the highest local government organization in this area, and a significant change in the utilization method of Yunnan's native force has occurred.
Based on the census in Yunnan, the Yuan empire selected native people as regular officials in reigns where multi level local government structure was made and allowed them to inherit government posts. This utilization method had a huge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concept of 'native officials (Tuguan 土官)' in the Ming Dynasty. Meanwhile, in areas where reorganizing native people was difficult due to the lack of military stability, Mongolian rulers governed by incorporating the natives who surrendered. Such indirect way of ruling is similar to the Branch Secretariat of Hugang's system named 'Manyiguan (蠻夷官)'. These two methods of utilizing native force in the Yuan dynasty were later integrated into one system named 'Tusi system (土司制度)' in the Ming dynasty.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inbory22@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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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용굉(容閎)과 청말(淸末) 근대외교(近代外交)

저자 : 정동연 ( Jung Dong 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7-3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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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용굉(容閎, 1828~1912)이 청말 근대외교에 미친 영향을 탐색한 글이다. 그동안 용굉에 대해서는 청 정부가 미국에 보낸 국비 유학생, 이른바 '유미유동(留美幼童)'을 인솔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용굉의 활동은 청 정부가 서양 국제법에 토대를 둔 근대외교를 수용하는 과정과 중첩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그가 지닌 외교사적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용굉은 어린 시절 광둥 지역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곧 이어 미국인 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예일대학에서 서양 지식과 가치관을 습득하였다. 귀국한 용굉은 중국이 근대외교에 뒤처져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한때 태평천국에 가담할 생각을 품었던 것도 이들이 청을 대신하여 중국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굉은 서양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하다는 이유로 청 정부의 실권자 증국번(曾國藩)의 막료로 발탁되었다. 용굉은 서양 기계를 도입하는 임무를 완수하여 증국번의 신뢰를 얻은 다음, 어린 학생들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사업을 승인받았다. 1872년부터 파견된 120명의 유미유동은 용굉의 인솔 하에 서양식 교육을 받았지만, 1881년 청 정부의 지시로 중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 시기 용굉은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근대외교를 직접 실행하였다. 그는 외국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숙할 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활용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쿨리 학대 문제를 조사하여 보고함으로써 청 정부가 페루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청이 설립한 주미공사관의 초대 참찬(參贊)이 된 후에는 공사(公使) 진란빈(陳蘭彬)을 보좌하며 미국 내의 반중 정서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유미유동이 중도 귀국한 후에는 한동안 미국에서 칩거하였지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군함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차관 도입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용굉이 양성한 유미유동은 청말 근대외교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청 정부가 해외에 설립한 공사관(公使館)과 영사관(領事館)에서 근무하였고, 이를 토대로 의화단사건 이후 설립된 외무부(外務部)의 고위 관료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한공관(駐韓公館) 경력을 토대로 외무부로 옮겨 활동한 당소의(唐紹儀)와 양여호(梁如浩)는 중화민국에서 외교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용굉은 유미유동을 통해 근대외교의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analyzed the influence of Yung Wing on modern chinese diplomacy. Meanwhile, it was emphasized that Yung Wing led the chinese students sent to America by Qing Dynasty so-called 'Chinese Educational Mission'. But it is necessary to appreciate Yung Wing's diplomatic significance by paying attention to his activities was overlapped with the process of the Qing government's introduction of modern diplomacy based on Western international law.
Yung Wing received Western-style education in Canton in his childhood and followed an American teacher to study in the United States and acquired Western knowledge and values at Yale University. After returning to homeland, Yung Wing witnessed the reality that China was lagging behind modern diplomacy but was not aware of it.
So, Yung Wing demonstrated modern diplomacy directly based on his ability. He was not only good at foreign situations and was fluent in foreign languages, but also had various human networks in the United States. Yung Wing was appointed as a staff of Zeng GuoFan who was the power-holder of the Qing government because he was bright in Western circumstances and was fluent in foreign languages. Yung Wing gained trust of Zeng GuoFan by completing the mission of introducing Western machines, and was approved the plan to dispatch 'Chinese Educational Mission'. In this period, he investigated the situation of Cooley abuse in the America, and helped Qing government to sign a trade treaty with Peru. After a while, he became the vice minister of the Embassy, he tried to respond to anti-Chinese sentiment in the United States. Although Yung Wing stayed in the United States without any special activities after the recall of the 'Chinese Educational Mission', he negotiated the introduction of loans with England to prepare a warship that could attack Japan during the Sino-Japanese War. As such, Yung Wing was typical figure as an practitioner of modern diplomacy.
The 120 Chinese students dispatched from 1872 received Western-style education under the leadership of Yung Wing, but were returned under the direction of the Qing Dynasty in 1881. 'Chinese Educational Mission' fostered by Yung Wing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modern diplomacy in the late Qing Dynasty. They worked at the legation and consulate established overseas by the Qing Dynasty, and some of them were promoted to a high-ranking official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fter the Boxer Rebellion. In particular, Tang Shaoyi and YangRuhao became president of diplomatic affairs in the Republic of China by his experience as a diplomatic official in Korea. From this point of view, it can be said that Yung Wing sowed the seeds of modern diplomacy through 'Chinese Educational Mission'.
(Cheongju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 jungdy@c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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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書評] : 오주환 지음, 『영국혁명 사관과 사회계층』(헤로도토스, 2021.08)

저자 : 남철호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1-35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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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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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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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10-1911년 봉천(奉天)의 페스트 유행과 민중의 대응 : 방역의식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선 ( Kim Hy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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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령,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참여는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방역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방역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이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가 방역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Dugald Christie의 『奉天三十年』과 『東三省疫事報告書』를 중심으로 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입과 방역당국의 방역정책과 민중의 대응, 방역에 대한 민중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1910년 페스트가 발생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페스트를 빌미로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청조는 유럽의 방역을 모범으로 한 근대적 방역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당시 민중은 방역과 위생에 무지했으며, 엄격하고 과감한 근대적 방역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방역사업을 도왔던 외국인 의료선교사의 희생은 서양인과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역정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중국 민중은 상인들의 모험을 통해 근대적 방역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방역정책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정부의 방역정책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병원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개설한 병원에서 중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환자가 희생되었으며, 이는 방역정책의 실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역과 위생에 대한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우고 방역의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는 신문과 포고문을 배포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높은 방역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은 방역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민중의 적극적 협조는 방역정책의 성공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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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리클레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인가?

저자 : 안재원 ( Ahn J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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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한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다. 역병은 아테네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마저 해체했다. 이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배분 정의론과 종교와 법에 호소하면서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다름 아닌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전쟁과 역병의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중함의 리더십임을 강조하는 작품이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역병은 긍정적 측면도 남기었다. 역병으로 인해 소위 “데카당스”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했을 때, 예컨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의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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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의 인구추이에 대한 연구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저자 : 최규진 ( Choi Gy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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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형산강 유역이라는 공간 범위에서 청동기시대 취락 조사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취락 자료를 중심으로 시기별·지역별 인구를 추정해보고 당시의 인구추이와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 인구추정에 있어서 1인이 필요한 주거 면적을 5㎡의 수치로 추정했다. 그 결과 전기의 인구를 100%로 산정하여 인구추이를 지구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청동기시대 전기 인구 규모의 40.7%로 60% 정도 감소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추정 결과로 본 인구분포 비율은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60% 정도 감소하였으나 경주 중심권과 안강 방면 북부권의 경우에는 전기보다 후기의 인구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주중심권으로 취락들이 통합되어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추정되며 취락의 구조가 커짐을 뜻한다. 이러한 경주 중심권으로의 인구증가는 청동기시대 후기 읍락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주중심권으로 인구가 모여드는 인구집중을 토대로 하면서 대외교류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중심으로 한 기초 정치체가 형성되고 더 통합되어 지역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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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진흥왕대 황룡사(皇龍寺) 창건과 그 의미

저자 : 최준식 ( Choi Jun-sic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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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가 창건된 배경과 목적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황룡사 창건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미처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도 확인된다. 예컨대 진흥왕대 활발하게 진행된 대외활동이 황룡사 창건 과정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황룡사 창건의 배경과 목적을 대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 자료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553) 신궁(新宮) 조영을 위한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사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황룡사 보완발굴조사 내용을 참고하면 황룡사는 북편의 건물군(建物群)과 담장이 먼저 들어서고, 점차 불상(佛像)과 금당(金堂)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이 신궁을 사찰로 전환하게 된 명분은 '황룡(黃龍)'의 출현이었다. 이때 '황룡'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聖王)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신라 토착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용' 서상(瑞祥)에 황제를 표상하는 중국 '용'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궁의 황룡사로의 전환은 백제와의 전쟁과 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 마무리되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백제 성왕과 마찬가지로 양무제(梁武帝)의 숭불(崇佛) 정책을 참고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특히 황룡사에 양의 국가대사였던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의 역할과 유사한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룡사는 진흥왕이 불교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황룡사는 진흥왕 당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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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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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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