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KCI등재

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Influenza Swooping Joseon in 1799: Relief for the People

김정운 ( Kim Jeongun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5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1-29(29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5.1


목차

Ⅰ. 머리말
Ⅱ. 1799년 전염병 대유행의 실상
Ⅲ.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Ⅳ. 맺음말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Ryu Ui-mok(1785~1833) contracted influenza on January 7, 1799 at the age of 15. The next day, the family of an elder brother of his family, the family of a younger brother of his father, and families of his father's cousins all contracted it at once when his grandfather returned after going out. A few days later, seven of eight governors including the governor of Gyeongsang Province died. The number of deaths reached 400 in Andong and 63,000 in Seoul.
King Jeongjo(正祖) of Joseon determined that it was a national disaster and crisis, taking on relief works first. He gave an order to relieve people to Jinhyulcheong(賑恤廳) on January 13, 1799 and had Yeoje(厲祭) and Wuije(慰祭) held. These were traditional approaches, but they had much influence on the opinions of the people. He also had the bodies of the deceased due to the infectious disease isolated and buried in private land that was owned by people and purchased by the government for the purpose. The regular spring military campaign was suspended altogether. These measures were taken during a period of approximately 20 days.
Under this miserable situation, interesting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It is difficult to trace the origin of an infectious disease. It must have been even more difficult in the traditional society. The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during a severe infectious disease must reflect the consciousness of the people. Ryu Ui-mok at age 15 called this cold "Hoyeok(胡疫)" writing down what he heard. He believed that the cold was transmitted from China. The government made fast reactions to the influenza spreading around the nation, and the people seemed to have trusted the government.
(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 jeongun@knu.ac.kr)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77265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903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2
  • : 1395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7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16세기 일기체 경연 기록의 등장

저자 : 이인복 ( Yi In-b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경연일기는 개인이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여 경사를 강의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경연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경연일기를 기록한 개인이나 이를 정리하여 문집에 수록하거나 간행하는 집단의 의도가 담겨 있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다만 선조대와 같이 관찬사료가 부족한 시기의 경연일기만이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李珥의 『경연일기』나 柳希春의 「경연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경연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연 기록은 경연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종, 중종대를 거치면서 사림이 등장하고 경연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경연이 자주 시행되고 경연에서의 논의내용도 풍부해지면서 경연 기록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사관의 경연 입시 정례화로 사초에 경연 내용이 풍부해지고, 관찬 사료의 경연기사의 내용이 자세해졌다. 개인의 일기에도 경연 내용이 기록되고, 경연 때에 자신의 발언을 별도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종대 조광조, 한충을 비롯한 기묘사림들은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하여 남겼으며, 선조대의 이황 역시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으로 남겼다.
선조대에는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연에서의 발언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변화되었으며, 이는 16세기 지식인들의 일기 쓰기와 연관이 있다. 개인의 일기에서 경연에서의 경험이 기록되는 것은 국왕과 면대하여 경사를 진강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특별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본인이나 후손, 제자들에 의해 경연 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정리된다. 주희의 『주자경연강의』나 진덕수의 『진서산경연강의』, 관찬 경연일기를 작성하였던 경험들은 조선시대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의 출현에 영향을 주었다. 그 사이에서 이황의 「경연강의」, 이이의 『경연일기』는 경연일기가 등장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이후 김우옹의 「경연강의」 이후로 작성 주체와 형식이 다양한 경연일기들이 저술되기 시작한다.


Gyeongyeon(經筵, Royal Lectures) is a system in which the king and his servants give lectures on scriptures of Confucianism and history books, and at the same time discuss the politics of the country. For individuals, Gyeongyeon(經筵) were also a special experience, so they were recorded in various forms. In the case of individual Gyeongyeon(經筵)-diaries, the intentions of the individual or group who wrote them are reflected.
As Gyeongyeon(經筵) are activated in Sungjong(成宗) and Jungjong(中宗) period, various Gyeongyeon(經筵)-related records appear. Individual experiences in Gyeongyeon(經筵) were also recorded in individual diaries. In addition, the remarks made in the lecture were collected and left as a separate record, which is Gyeongyeon(經筵)-Jingye(陳啓). These records were mainly made by Salim(士林), including Jo Gwang-jo(趙光祖).
As this trend continues to the Sunjo(宣祖) period, the Gyeongyeon(經筵)-diary begins to appear. Among the diaries, representative titles are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and 'Gyeongyeon(經筵)-diary'. These records were also made by Salim(士林), including Yi Hwang(李滉) and Yi Yi(李珥). In this regard, it is Zhu Xi(朱熹)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that can be noted. In the 16th century, intellectuals of Joseon paid attention to this book and published it. Zhu Xi(朱熹)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influenced the appearance of the Gyeongyeon(經筵)-diary.
Kim Woo-Ong(金宇顒)`s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is a relatively early Gyeongyeon(經筵)-diary. It is an important book when looking at the process of individual Gyeongyeon(經筵)-diaries appearing. This diary was written and organized by him, and was organized by his disciples in the process of publishing it later. In the form of the diary, the date, method, place, textbook, scope, and participants were first recorded. After that, lectures on textbooks and discussions on national politics were recorded. This is the same as the general Gyeongyeon(經筵)-diary format that appears later. In the content, it is useful data for examining his ideas and policies. This book has been read a lot by intellectuals since then and has influenced many things.

KCI등재

2麟坪大君 李㴭의 『燕途紀行』 연구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0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麟坪大君(1622~1658)의 12차례 대청사행을 살펴보고, 그의 대중국 인식을 『燕途紀行』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인평대군은 인질과 사신으로 자주 청을 왕래하였으며, 왕족 출신인 그의 대중국 인식은 관료들의 인식과 차이를 보인다.
『연도기행』은 인평대군이 12차례의 사행 가운데 11번째인 1656년(효종 7)의 사행을 기록한 것이다. 『연도기행』에는 이전 10차례 사행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1656년(효종 7) 당시의 사행일기보다 회고록의 성격이 강하다.
인평대군은 여행자로서 개인의 사행 체험, 연행 노정의 고초와 심정을 기록하였고, 사신으로서 연로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조선의 산성 현황과 청의 요동 병력 배치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인평대군은 전란이 재차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산성 보존과 민심의 수습을 중요시하고, 청의 요동 병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인평대군은 청에 거주하는 역관과 조선인을 통해 청 내정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청의 정치 운영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명 정권의 보존과 부흥을 기대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평대군이 왕족으로서 중국의 흥망에 대한 인식이다. 인평대군은 명의 멸망이 山海關을 열어준 吳三桂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운수가 쇠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나라의 존망에 人和 즉 인심 향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명의 멸망 원인에 대한 그의 고민은 왕족인 통치자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This paper examines the twelve Sahaeng(使行) of Prince Inpyeong(麟坪大君) and analyzes his perceptions of China, focusing on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As a hostage and ambassador to the Qing dynast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often traveled to and from China, and his knowledge of China differed from that of the bureaucrats.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is the record of the 11th trip of the 12 trips made b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in 1656.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contains information from the previous 10 trips. It is more of a memoir than a record of the Sahaeng(使行) in 1656.
Prince Inpyeong(麟坪大君) recorded his personal experience of Sahaeng(使行) and the sufferings and emotions along the way as a traveler, and collected various information as an ambassador. He was very concerned about the current state of mountain castles in Joseon and the deployment of Qing Dynasty troops in Liaodong. Due to the fear of another war, Prince Inpyeong(麟坪大君) attached importance to preserving the mountainous castle of Joseon and pacifying the people, and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strength of the Qing Dynasty in Liaodong.
Prince Inpyeong(麟坪大君)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internal affairs of the Qing dynasty through interpreters and Koreans living in the Qing dynasty. He pointed out the problems of the political operations of the Qing Dynasty and looked forward to the preservation and revival of the Southern Ming regime. What is of interest is Prince Inpyeong(麟坪大君)'s perception of the rise and fall of China as a royal famil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believes that the Ming dynasty fell not because of Wu Sangui(吳三桂), who opened the Opening the Shanhaiguan Gate, but because of the declining fortunes, and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people's hearts and minds to the survival of the nation. His anguish about the cause of the Ming Dynasty's demise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of being a ruler of a royal family.

KCI등재

318세기 대구 사대부의 일상을 통해 본 가족과 관계 - 최흥원(1705~1786)의 사례 -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104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18세기에 대구에서 살았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일상생활에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논의는 두 가지 지점에 집중하였다. 첫째는 공간이다. 공간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흥원이 살았던 18세기 대구의 특징을 확인하였다. 18세기의 대구는 번화한 도회지였다. 1601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행정과 사법의 중심이었다.
둘째는 가족과 관계이다. 가족의 범위는 좁게는 부부와 자녀이며, 확대하면 부부의 부모와 형제가 포함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였나. 최흥원이 가족에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최흥원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부부가 함께 분담하였다. 또 아내와 자녀, 부모와 형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


This study contemplates the meanings of family in the daily life of Choi Heung-won (1705~1786) who lived in Daegu in the 18th century. In the study, discussions focus on two points. The first point is space as it was an important element in a person's way of thinking and action. The study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Daegu in the 18th century when Choi lived there. The provincial office of Gyeongsang Province was set up in Daegu in 1601. The governor would have controlled the entire province, including its administration and judicial power. Thus, Daegu became the central city of the province in administration and jurisdiction. Gyeongsang Province was the most populous administrative unit at the provincial level in Joseon in the 18th century, and Daegu was at its center.
The second discussion point is family, which is a foundational group of life. The scope of family, in a narrow sense, encompasses a couple and their children, and in a broader sense, even their parents and siblings. Accordingly, one must know the description of family. The present study sheds light on the family relationships of Sadaebu in the 18th century with the case of Choi's family, whose perceptions of family and roles were reviewed based on their words and actions to each other.
Choi's family consisted of a couple and their children. They lived together, and the couple shared responsibility for their children's upbringing and education. As a father, Choi was particularly devoted to the upbringing and education of his children. He taught his son everything from daily habits to interpersonal behavior styles. It was the same with his daughter. He would postpone an urgent matter to prevent her from getting hurt emotionally and even feel sorry after spending days at the house of his married daughter.
The study also examines the couple's relationships with their parents and siblings. Their parents and siblings lived in separate places and worked together to serve their parents. Choi was the eldest son and lived with his mother after his father passed away early. Choi's wife also passed away early. Under these circumstances, he lived with his mother. His siblings lived in their respective homes after getting married. He and his siblings divided their roles to serve their parents.

KCI등재

4한국사의 의미에 비추어 본 현행 교육과정 고대사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저자 : 박성현 ( Park Sung-hy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한국사, 특히 전근대 한국사를 네이션으로서 현재 한국, 한국인의 '형성 과정'으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사 체계가 대체로 큰 틀에서 그러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정통론이나 특히 근대의 민족 개념에서는 일정한 선택의 원리가 작용하여,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배제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현행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와 중학교 역사의 고대사 체계를 검토해 보았다. 선사 및 고대 부분은 대체로 4시기로 구성되는데, 선사/ 고조선과 '여러 나라'/ 삼국 및 가야/ 남북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의 멸망에서 삼국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여전히 정립되지 않고 있으며, 그 이유 중 하나는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무엇보다 처음부터 한민족 혹은 한국사의 경계를 정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경계를 설정하게 되면서 그 범위를 현재의 한국인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그 외의 계통, 이를테면 중국계의 군현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한국사의 과정에서 배제하였다. 특히 역사 교육에서 한국사 체계는 한국인 형성 과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열린 체계로서 제시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한국 문화의 형성에 대해서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 이것을 한국사 과목 안에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문명사 및 동아시아사와의 연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is paper, Korean history, especially pre-modern Korean history, is defined as the process of formation of Korea and Koreans as the present nation, and the structure of Korean history formed in the process was evaluated as largely explaining such process in a broad framework. However, it was pointed out that there is a problem of emphasizing or excluding certain parts as a result of certain selection principles working in the orthodox the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especially in the concept of minjok.
From this perspective, the ancient history structure of high school Korean history, and middle school history in the current curriculum were reviewed. The prehistoric and ancient parts are largely composed of four periods: the prehistoric period, Gojoseon and 'many countries', the three kingdoms and Gaya, and the northern and southern kingdoms. Among them, the part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the three kingdoms from the fall of Gojoseon has not been established, and one of the reasons is thought to be because it excludes Chinese counties including Nakrang.
In this paper, I tried to say that there is a problem in the tendency to set boundaries in the beginning of Korean people or Korean history. By setting the boundary in this way, it was made an error of equating the scope to the current Korean, and other lines, such as Chinese counties, were unfairly excluded from the process of Korean history. In history education, the Korean history structure should be presented as an open one that shows the 'flow' of the Korean formation process, and furthermore, it should be able to show the formation of Korean culture from a broader perspective. However, not all of this can be achieved in the course of Korean history, and it can be realized in connection with the history of civilization and the history of East Asia.

KCI등재

5신라 진지왕 폐위 원인에 관한 새로운 고찰과 그 역사적 의미

저자 : 성준선 ( Seong J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71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6세기 新羅 眞智王의 즉위와 폐위를 주제로 삼았다. 진지왕이 조카이자 태자의 아들인 白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眞興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배경으로, 진흥왕이 적극 활용한 轉輪聖王이라는 불교적 신성관념으로 등장한 '聖骨'을 주목하였다. 진흥왕은 안정적인 왕위 계승과 6세기 후반 달라진 삼국 간의 정세 속에 자신의 유고를 대비하여 백정보다 연장자인 진지왕을 金輪으로 명명하여 정치일선에 등장시켰다.
짧은 재위로 『三國遺事』와 『三國史記』 모두 관련 기록이 소략할뿐더러 서로 다른 실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자 한다. 그 배경으로 전자에는 진지왕 개인의 부도덕함과 자질 문제, 후자에는 신라가 처한 대외적 상황의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혼재되자 신라 지배계층에서 혼란과 위기감, 불만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진지왕의 리더십에 큰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의 가장 큰 명분으로는 정법을 수호하고 엄격한 자기관리와 도덕성이 요구되는 전륜성왕으로서 그 자격이 문제가 된 것 같다. 이에 국인들이 폐위를 요구하자 진지왕이 이를 수용하였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 뒤를 銅輪의 아들 백정이 眞平王으로 즉위하였다. 진평왕은 전륜성왕 신성관념이 더는 효용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보다 한층 더 강화된 신성관념으로 '석가족'을 내세웠고, 그 범위를 동륜계로 한정하면서 중고기 성골은 한차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King Jinji(眞智王) succeeded King Jinheung(眞興王) to the throne as the new Chakravartin(轉輪聖王), but was dethroned after 4 years of reign. As this is an unprecedented event, various causes are raised.
A clue could be found in the two records, Samguk-Yusa(三國遺事) and Samguk-Sagi(三國史記). Several factors such as unrestricted behavior, personal qualities, and Baekje's pressure on Silla acted in a complex way. Under this circumstance, the ruling class of Silla began to have doubts about the sanctity of the Chakravartin, and King Jinji was finally dethroned. The newly crowned King Jinpyeong(眞平王) asserted a stronger notion of the divinity than the Chakravartin. King Jinpyeong declared his family to be the Sakyamuni(釋迦牟尼)'s family. As a result, the sacredness of Silla's seonggol(聖骨) was strengthened, while the closedness became even deeper.

KCI등재

6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에 나타난 수혈주거지 변화에 대한 고찰

저자 : 황대일 ( Hwang Dae-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3-207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앞 시기인 고려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나타나는 벽석렬과 주혈의 규칙성이 확인되지 않으며, 면적이 15㎡ 전후로 벽로 중심의 시설이 설치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보인다. 이처럼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 내에서 확인되는 수혈주거지는 문헌기록과 면적, 구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때 최하층민의 주거형태에 해당한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의 분포는 소규모, 중소규모, 대규모 취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규모 취락은 주요 교통로 또는 역원 주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지리적으로 모두 태화강 북쪽에 위치하며, 취락 주변에 소규모 취락과 중소규모 취락이 함께 분포하는 양상이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대규모 취락에서 수혈주거지 시기별 변화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15세기 중반부터 수혈주거지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에는 취락마다 수혈주거지의 수량이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17세기 이후부터는 급격히 감소하면서 18세기가 되면 취락 내에서 거의 수혈주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시기별 변화의 요인은 4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주거형태의 변화로 17세기 이후 수혈주거지에서 지상건물지로의 변화이다. 둘째, 입지의 변화로 농업기술과 사회ㆍ경제활동의 발달로 인해 취락의 중심이 구릉에서 평지로 이동하였다. 셋째, 인구변화로, 16~17세기에 발생한 양란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원인이 작용하여 취락 내 수혈주거지의 개체 수 또한 급격히 감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역촌의 설치와 정비, 해체가 역촌의 형성과 소멸로 연결되어 취락 내 수혈주거지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The dwelling sites in the Joseon Dynasty is not confirmed the regularity of stone rows and column holes in the walls that appeared in the Goryeo Dynasty. Its area was around 15㎡, and it had a relatively simple structure with facilities installed around a fireplace on the wall. Based on documentary records, size, and structure, the dwellings within the villages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Ulsan area correspond to the housing type of the lowest class.
The main characteristic of the residential change process in large-scale settlements of the Joseon Dynasty in Ulsan area was that the number of dwellings in each village increased rapidly in the 16th century, as the number of dwellings began to gradually increase from the middle of the 15th century. From the 17th century, it was decreased sharply, and by the 18th century, not only villages but also dwellings were almost absent.
The factors of residential change process of the Joseon Dynasty in Ulsan can be summariz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it is the change of the building site in the residential area after the 17th century. Second, the center of the village was characterized by moving from the hills to the plains caused by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al technology and social, economic activities. Third, the population was decreased rapidly due to the two great wars that occurred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and as a result, the number of dwellings within the village was also decreased sharply. Lastly, it is thought that set-up and withdrawal of the station with inns led to the formation and extinction of the station area, affecting the change of residence in the village.

KCI등재

7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은행 경영과 식민지 주주자본주의 - 1920년대 경상공립은행의 설립과 경영 -

저자 : 김명수 ( Kim Myung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50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20년 7월부터 10년 동안 대구에 존재했던 경상공립은행을 대상으로 설립주체, 설립과정, 경영변동, 조선총독부의 은행합동정책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의 측면을 강조했던 선행 연구와 달리 일본인들에 의한 공립은행의 경영 사례가 일제강점기라는 정치적 상황 하에서 오직 일본인 주주들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주주자본주의였음을 해명하고자 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0년 7월에 설립된 공립은행은 대구에 본점을 두었지만 주주의 대부분이 가가와현에 거주하는 '순수한' 일본인 은행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설립된 은행들이 그 구성비율에 차이가 있어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주주로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했음을 고려한다면 공립은행은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이례적인 은행이었다.
둘째, 공립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미야이(宮井正一)의 축재 경로는 대금업, 도기제조업, 창고금융업, 정미업, 미곡거래업이었다. 당시 대구의 주요 일본인들이 종사했던 분야였다. 미야이의 축재 경로는 당시 대구의 일본인 자산가들이 걸었던 전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립은행은 1920년 7월에 설립되어 1930년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 경일은행과의 합병안을 승인할 때까지 정확히 만 10년 동안 존재했었다. 은행의 '공공적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철두철미 실리 본위'로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공립은행의 퍼포먼스는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넷째, 대출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어음할인이나 어음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담보물도 지극히 보수적으로 평가했으며, 평가한 금액에 대해서도 대체로 60%만을 대출해 주었다. 하지만 1929년 개정 은행령에 의해 감독이 강화되면서 대금업자식의 '미야이식' 은행 경영이 어려워졌다. 미야이가 은행업을 폐업을 고려한 것도 경일은행과의 합병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This paper have two goals. The first goal is to examine the founders, the establishment process, the management fluctuation,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f Gyungsang Public Bank(GPB). The second is to make it clear that the case of GPB is nothing but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because GPB was faithful only to the interest of shareholders. This is different from research results which existing studies have stressed on financing for colonial development. The resul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ly, Founded in July 1920, GPB was a purely Japanese bank in the sense that most of its shareholders were from Kagawa Prefeture Japan.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at many banks have Korean and Japanese shareholders commonly, the case of GPB was a rare one because GPB consisted of only Japanese shareholders.
Secondly, Masakazu Miyai, who led the establishment of GPB, amassed a fortune from money-lending business, pottery manufacturing, warehousing, financial business, rice-cleaning business. Also, he was famous as a rice dealer in Daegu. Miyai's path of wealth accumulation was true of the Japanese wealthy people in Daegu at that time.
Thirdly, GPB existed exactly for 1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n July 1920 until the approval of its merger with Gyungil Bank in September 1930. Instead of thinking about the public nature of the bank, Miyai focused on only making money thoroughly. GPB appreciated secured property offered by borrowers very conservatively and lent at most about 60% of appraised value. Loans were also made centering around bill discount and loans on bills, which guaranteed high commissions.
Miyai tried to quit banking and go back to Japan when monitoring on banks became strict since revision of bank act in 1929. He could not manage GPB like a money lender under the new reinforced regulations on banking. It was the reason why Miyai responded positively the offer of acquisition to Gyungil Bank by Chosun Bank, which was the central bank of colonial Korea. In conclusion, GPB's case was the typical case of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KCI등재

81920年代 在韓 中國人 無緣故死亡者의 處理와 中日交涉

저자 : 이학로/HakroRhee 1 ( Rhee Hak-r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84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발생과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1920년대에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 대부분 당시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의 중국인들은 주로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북부 지역이나 仁川 등 京畿道와 서울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업과 노동 그리고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무연고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먼저 그의 국적을 판단하였다. 사망자가 중국식 복장을 하거나 소지품에서 국적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을 경우 중국인으로 판단하였다. 이들 사망자는 1920년대에 많이 발생하였는데, 1927년 華僑排斥事件 이후에는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조선총독부와 중국측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게 된다.
그것은 사망자 처리 비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사망자가 발생하면 그의 국적을 확인하고 그의 주소, 이름과 직업 등을 조사하고 연고자를 찾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중국측에 그 비용을 청구하였다. 대개 인부들의 인건비와 간단한 부대비용으로 큰 금액은 아니었다. 금액의 크기보다 책임의 소재 때문에 그 비용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두고 양측간에 여러 차례 교섭이 오고가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 중국은 華商들에게 그 비용을 담담하게 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This essay is the analysis on the Chinese deceased without family in 1920s' Joseon and the study about the process of their treatment. The death of Chinese people without family in 1920s mostly occurred in the region that Chinese people liked to live. They used to reside mainly in the northern region or the central region of Korea like Gyeonggi-do Province and Seoul, where it was convenient for them to travel to China. Their jobs were various. Some were engaged in commerce, others in farming. And there were also wage-labourers.
When a death case occurred, the first thing to be done was to identify the nationality of the dead. Usually it was decided on the ground of the Chinese clothes of the dead or the possessions of the dead. The death case of the Chinese in Joseon frequently occurred in 1920s. Especially after overseas Chinese Rejection Incident in 1927, Joseon Government General and the Chinese authority in Joseon responded against each other very sensitively concerning the handling of the Chinese dead without family. The conflict between two sides was partly due to the expense for the treatment of the dead.
In general when a person was discovered dead, the Japanese officers checked the nationality, address, name and jobs, and then tried to find family or relatives. Then Joseon Government General claimed Chinese authority for the expense. The expense composed of labor cost and other small expenditure was not a large amount. The negotiation between two sides about which side would pay the expense used to go on mainly in the aspect of who would take charge of the case. In many cases this kind of accident was settled down, with overseas Chinese merchant forced to pay the expense.

KCI등재

9제정기 로마군 공성전에 관한 실증 연구

저자 : 배은숙 ( Bae Eun 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5-317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공화정 후기에서 4세기까지 총 124번의 공성전을 분석하여 포위전의 쇠퇴 가능성을 추론한 것이다. 공화정 후기 총 65번의 공성전을 분석하면 포위전만 한 전투는 21번(32.3%)이었다. 포위망 구축 후 공격한 14번(21.5%) 전투와 곧바로 공격에 들어간 25번(38.5%) 전투를 합하면 공격적인 전투는 39번(60%)이었다. 1-4세기 총 59번의 공성전 중에서 포위전만 한 것은 7번(11.9%)이었고,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든 공격적인 전투를 한 것은 45번(76.3%)이었다. 공격전을 펼친 것이 공화정 후기에는 60%, 제정기에는 76.3%를 차지한다는 것은 로마 공성전의 전술적 특징이 지속해서 공격전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포위전이 공화정 후기 32.3%에서 제정기 11.9%로 줄어들어 포위전의 쇠퇴를 주장할 수 있지만, 전장을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적인 서부와 유대,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가 적인 동부로 나누어보면 달라진다. 공화정 후기 서부 지역에서 행했던 총 33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16번(48.9%)에서 제정기 총 11번의 전투 중 5번(45.5%)으로 비율적으로 차이가 없다. 서부 지역에서는 포위전이 쇠퇴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동부 지역에서 행했던 공성전에서 공화정 후기 총 32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5번(15.6%)에서 제정기 총 48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2번(4.2%)으로 현격히 감소했다. 이를 볼 때 동부 지역은 공화정 후기보다 제정기에 포위전이 쇠퇴하고, 공격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공성전을 할 줄 모르는 갈리아족과 게르만족, 로마군을 모방하여 공성 기술을 갖춘 유대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화정 후기와 제정기의 공성전이 동일한 공격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에 따른 지역적 편차가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포위전 쇠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This study analyzes a total of 124 siege wars to infer the possibility of the decline of the siege warfare. When analyzing a total of 65 siege battles in the late republican period, 21 battles(32.3%) were just siege battles. When the 14 battles(21.5%) that attacked after establishing the siege network and the 25 battles(38.5%) that immediately started attacking were combined, the number of offensive battles was 39 battles(60%). Of the 59 siege battles between the 1st and 4th centuries, 7 battles(11.9%) were only siege battles, and 45 battles(76.3%) were the battles that either attacked after establishing a siege network or immediately entered into an attack. The fact that offensive battles took up 60%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76.3% of the imperial period indicates that the tactical characteristics of the siege of Rome continued to be directed toward offensive warfare.
Although the decline of the siege war can be argued as the siege war has been reduced from 32.3% in the late republican period to 11.9% in the imperial period, it is different when the battlefield is divided into the western part, where Gauls and Germanic enemies are enemies, and the east part, where Parthia and Sassanid Persia are enemies. Of the total 33 siege battles conducted in the western region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there were 16 (48.9%) siege battles and 5 (45.5%) out of 11 battles during the imperial period, so there is no difference in proportion. In the western region, the siege cannot be said to have declined. On the other hand, Of the 32 siege battles conducted in the eastern region of the late Republican Dynasty, siege battles were 5 battles(15.6%). Of the total 48 siege battles during the imperial period, siege battles took place 2 battles(4.2%). In view of this, siege warfare declined during the imperial period rather than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the eastern region tended to prefer offensive warfare. Therefore, although the siege battles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the imperial period can be regarded as the same offensive battles, it is difficult to argue that the siege wars are in decline as there are regional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enemy.

KCI등재

10노스버릭 마녀사냥과 제임스 6세의 왕권신수설

저자 : 김중락 ( Kim Joongla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9-354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어떻게 1590-1년 노스버릭 마녀사냥을 통해 자신의 미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신성화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1590년 제임스 6세는 성년의 나이었지만 강력한 귀족들의 권력싸움과 종교적 갈등속에 어려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때에 발생한 노스버릭 마녀사건은 제임스에게 왕권강화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제임스는 마녀혐의자들에 대해 직접 심문에 참여하였고, 재판에 관여하면서 정적제거를 위한 진술을 확보하였다. 마녀혐의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고, 국왕을 해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결혼을 방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법적인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임스 6세가 고문을 통해 얻은 자백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진술로 제임스는 정적인 보스웰 백작을 제거할 수 있었다.
1591년 재판 말기에 제임스는 Newes from Scotland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했는데 이 보고서는 왕권의 신성화를 꾀한 고도의 정치선전물이었다. 보고서는 악마가 스코틀랜드 왕은 “이 세상에서 그의 가장 큰 대적”이라고 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이 표현은 왕이 이 세상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Newes from Scotland에서 왕은 “신의 자녀” 또는 “신의 종”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은 신이 보호아래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왕은 신의 기름부은 자이고 신의 전능한 힘으로 보호아래 있음으로 악마와 마녀들의 음모를 이길 수 있었다. 제임스 6세는 1598년 Trew Law of Free Monarchies에서 자신의 왕권신수설을 피력했는데 이는 Newes from Scotland에서 시작된 왕권신성화의 논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King James VI of Scotland strengthened his feeble monarchy and even sanctified his royal power through the North Berwick witch-hunt of 1590-1. In 1590, although King James VI had long reached the age of majority, his rule was far from stable amidst power struggles and religious conflicts among powerful nobles. James saw the North Berwick witch incident in 1590-1 as a right opportunity to strengthen his royal power. James directly took part in the interrogation and trials of the witch suspects and secured statements from those accused of witchcraft which helped him eliminate his political enemy. The witch suspects confessed that they had made a pact with the devil and tried to harm the king as well as hindered his marriage. In the absence of legal experts, the confessions that James VI obtained through torture were very likely to have been distorted. These statements allowed James to get rid of Earl of Boswell, his political opponent.
At the end of the trials in late 1591, James arranged to publish a report entitled Newes from Scotland, which was a highly political propaganda. The pamphlet claims that the devil defined the Scottish king as "the greatest enemy he hath in the world." Paradoxically, this expression could mean that the king is the closest person to God in the world as God is the opposite of the devil. In fact, in Newes from Scotland, the king was once described as a "child of God" or "servant of God". The king was also portrayed as being under divine protection. The king was the anointed by the God, and with God's almighty power, he was able to defeat the plots of the devil and witches. It may be said, the theory of the divine right of kingship was elaborated in the Trew Law of Free Monarchies in 1598, but it started from Newes from Scotland in 1591.

12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KCI등재

2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행과 민중의 대응 : 방역의식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선 ( Kim Hy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2019년 12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령,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참여는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방역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방역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이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가 방역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Dugald Christie의 『奉天三十年』과 『東三省疫事報告書』를 중심으로 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입과 방역당국의 방역정책과 민중의 대응, 방역에 대한 민중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1910년 페스트가 발생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페스트를 빌미로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청조는 유럽의 방역을 모범으로 한 근대적 방역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당시 민중은 방역과 위생에 무지했으며, 엄격하고 과감한 근대적 방역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방역사업을 도왔던 외국인 의료선교사의 희생은 서양인과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역정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중국 민중은 상인들의 모험을 통해 근대적 방역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방역정책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정부의 방역정책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병원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개설한 병원에서 중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환자가 희생되었으며, 이는 방역정책의 실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역과 위생에 대한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우고 방역의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는 신문과 포고문을 배포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높은 방역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은 방역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민중의 적극적 협조는 방역정책의 성공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KCI등재

3페리클레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인가?

저자 : 안재원 ( Ahn J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6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한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다. 역병은 아테네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마저 해체했다. 이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배분 정의론과 종교와 법에 호소하면서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다름 아닌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전쟁과 역병의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중함의 리더십임을 강조하는 작품이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역병은 긍정적 측면도 남기었다. 역병으로 인해 소위 “데카당스”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했을 때, 예컨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의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KCI등재

4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의 인구추이에 대한 연구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저자 : 최규진 ( Choi Gy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5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최근 형산강 유역이라는 공간 범위에서 청동기시대 취락 조사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취락 자료를 중심으로 시기별·지역별 인구를 추정해보고 당시의 인구추이와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 인구추정에 있어서 1인이 필요한 주거 면적을 5㎡의 수치로 추정했다. 그 결과 전기의 인구를 100%로 산정하여 인구추이를 지구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청동기시대 전기 인구 규모의 40.7%로 60% 정도 감소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추정 결과로 본 인구분포 비율은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60% 정도 감소하였으나 경주 중심권과 안강 방면 북부권의 경우에는 전기보다 후기의 인구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주중심권으로 취락들이 통합되어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추정되며 취락의 구조가 커짐을 뜻한다. 이러한 경주 중심권으로의 인구증가는 청동기시대 후기 읍락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주중심권으로 인구가 모여드는 인구집중을 토대로 하면서 대외교류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중심으로 한 기초 정치체가 형성되고 더 통합되어 지역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KCI등재

5신라 진흥왕대 황룡사(皇龍寺) 창건과 그 의미

저자 : 최준식 ( Choi Jun-sic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황룡사가 창건된 배경과 목적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황룡사 창건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미처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도 확인된다. 예컨대 진흥왕대 활발하게 진행된 대외활동이 황룡사 창건 과정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황룡사 창건의 배경과 목적을 대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 자료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553) 신궁(新宮) 조영을 위한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사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황룡사 보완발굴조사 내용을 참고하면 황룡사는 북편의 건물군(建物群)과 담장이 먼저 들어서고, 점차 불상(佛像)과 금당(金堂)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이 신궁을 사찰로 전환하게 된 명분은 '황룡(黃龍)'의 출현이었다. 이때 '황룡'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聖王)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신라 토착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용' 서상(瑞祥)에 황제를 표상하는 중국 '용'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궁의 황룡사로의 전환은 백제와의 전쟁과 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 마무리되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백제 성왕과 마찬가지로 양무제(梁武帝)의 숭불(崇佛) 정책을 참고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특히 황룡사에 양의 국가대사였던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의 역할과 유사한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룡사는 진흥왕이 불교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황룡사는 진흥왕 당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KCI등재

6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키워드 보기
초록보기
1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석당논총
83권 0호

KCI등재

동양학
88권 0호

KCI등재

동양문화연구
36권 0호

KCI등재

중국학논총
76권 0호

KCI등재

이화사학연구
64권 0호

KCI후보

문물연구
41권 0호

KCI등재

중국연구
91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8권 0호

KCI등재

중국지식네트워크
19권 0호

KCI등재

사림(성대사림)
80권 0호

KCI등재

몽골학
69권 0호

KCI등재

동양예술
55권 0호

KCI등재

사총
106권 0호

KCI등재

대구사학
147권 0호

KCI등재

강원사학
38권 0호

KCI등재

동아시아문화연구
89권 0호

KCI등재

명청사연구
57권 0호

KCI등재

동양학
87권 0호

KCI등재

일본학
56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7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