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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학회> 백제학보> 무령왕릉(武寧王陵) 장례과정(葬禮過程)에서 <설치식(設置式) 관(棺)>의 검토(檢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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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武寧王陵) 장례과정(葬禮過程)에서 <설치식(設置式) 관(棺)>의 검토(檢討)

Regarding the Possibility of “Installation-style Coffin” for the King Muryeong’s Mortuary Practice

강원표 ( Kang Won-pyo )
  • : 백제학회
  • : 백제학보 3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59-88(30pages)
백제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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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무령왕릉 상장의례 연구현황
Ⅲ. 목관 내 유물 출토상황 재검토
Ⅳ. 무령왕릉 목관의 안장방법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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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 상장의례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정확한 조사보고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장례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관의 안장방법과 위치, 관 내 부장품의 위치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검토가 진행되기 어려웠다. 이에 장례 과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물의 실제 위치 파악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973년 보고서와 이후 복원안의 문제점을 살펴 정확한 유물 출토위치와 관 안장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목관의 안장방법을 재검토하였다.
왕과 왕비의 관은 300kg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덤의 입구가 좁고, 연도와 묘실의 크기가 협소하므로 인력으로 무거운 관을 들어 왕릉 내에 안치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관은 시신이 안치된 관을 빈장지에서부터 운구하여 묘실에 안치하는 <운구식 관>이 아니라, 묘실 내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설치식 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운구를 위한 손잡이로 추정되었던 관고리가 실제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두침과 족좌에 운구 시 진동에 대비한 고정 흔적이 없는 점, 좁은 실내에서 조립이 용이하도록 안쪽에 홈을 파고 모서리를 깎아 가공한 관재, 머리 부분에 타격흔적이 없는 관정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관 내부는 3개 공간으로 나뉘고 시신은 가운데, 부장품은 위, 아래 공간에 안치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령왕릉의 상장례는 중국의 유교적 상장례의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가 많았다. 하지만 무령왕릉 장례과정 중 목관의 안장방법을 검토한 결과 중국의 전통 상장례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묘실 내 미리 설치된 목관에 시신 안치, 관 내부 공간을 구획하여 가운데는 시신 안치공간으로, 머리 위와 아래는 부장공간으로 활용한 점 등은 백제의 전통적인 장례 방법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가 중국 상장의례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나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묘제의 변화가 상장례의 변화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향후 백제 상장례에 대한 연구는 묘제의 변화와 장례 방식의 변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The excavation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and the discovery of the epitaph in 1971 have become the starting point of research on the mortuary practice of Baekje. However, in-depth studies on the funeral process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have not progressed as expected due to the inability to accurately report the investigation.
The situation of the excavation of artifacts in the burial chamber is reviewed to analyze the funeral process of the tomb. After identifying the problems of the 1973 report, subsequent restoration plans, the exact location of the excavation, and the location of the coffin inside the tomb are estimated again. Thereby, the installation method of the wooden coffin is reviewed.
The coffins of the king and queen were estimated to weigh over 300kg. The entrance of the tomb is narrow and the size of the path and the burial chamber is confined; it is almost impossible to lift a heavy coffin and place it in the royal tomb.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view the tomb of King Muryeong as an “installation-style coffin” rather than a “carry-in-style coffin,” and it is believed that the bodies of the king and queen were moved from the temporary burial place and placed in a coffin that had already been placed in the burial chamber.
The coffin rings, which were supposed to be handles for carrying the coffin, are too weak to support the weight of carrying the coffin. This inference is supported through the headrest and footrest that have no signs of fixing against vibration during transportation, coffin timbers that have been cut and chamfered inside for easy assembly in a narrow room, and coffin nails that have no striking marks on the head.
The coffin is divided into three sections; the body is placed in the middle, and the burial goods are placed in the upper and lower sections. All artifacts outside the wooden coffin are thought to have been used for rituals in the burial chamber.
Thus far, there have been several studies on the mortuary practice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from the perspective of China's Confucian mortuary practice. However, examining the burial and ritual processes of the Baekje King through excavated artifacts showed that there is a significant difference from the traditional Chinese mortuary practice. The burial of the body in a pre-installed wooden coffin in the burial chamber, and the interior space of the coffin divided into a burial section for the body and spaces for burial goods are considered the traditional funeral practices of Baekje. Even though there is a very high possibility that Baekje was heavily influenced by the mortuary practice in China at the time, it is necessary to examine how readily it was adopted. The change of the burial system does not necessarily coincide with the change of the mortuary practice. In the future, it is hoped that a study of the mortuary practice of Baekje would comprehensively examine the changes in the rituals along with the changes in the burial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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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900-000983710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2005-9469
  • : 2713-838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9-2022
  • :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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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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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中國 南朝 塼築墳을 통해 본 武寧王陵의 '外簡內奢'

저자 : 장단위 ( Zhang Tuanwei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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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송산리고분군 내에서 우연히 무령왕릉을 발견했다. 이는 정확한 墓主를 밝혀주는 백제에 속하는 유일한 무덤이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시기의 주류 묘제인 塼築墳文化를 받아들여 구축하였다. 이 점은 백제 웅진시기를 이채롭게 하는 대목일 것이다. 전축분을 포함한 출토유물에서도 남조의 영향이 다수 표출되었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구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을 철저히 파악하고 이해하려면 무령왕릉과 중국 남조 전축분 간의 比較硏究는 불가결할 것이다.
무령왕릉에 관한 상장의례 시설은 추정으로 본 艇止山 遺蹟뿐이다. 그리고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에 제사에 관한 방단적석유구도 2기만 발견되었으며, 埋葬主體部가 없어서 祭禮施設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고분군에 지금 확인 가능한 무덤은 총 15기에 달하는데, 그 중에 제례시설로 본 2기의 방단적석유구는 여러 무덤과 서로 어떤 대응관계를 맺고 있었는지에 대해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에 南京獅子沖南朝陵園과 蕭偉墓의 경우에는 능원담장, 신도, 석각(석수, 석주, 석비), 墓闕 등 예제시설을 갖추고 있는 정연한 능원배치에 비해 무령왕릉 외부에는 소박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양나라에 존속 되었던 55년 동안 백제에서 梁으로 遣使한 횟수는 총 7회에 달하였으며, 백제가 남조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나타난 지체성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규명하려면 南朝文化에 착안하기보다 백제의 고유문화에서 그 단서를 찾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무령왕릉과 남조 왕후일급 무덤에 출토유물의 종류 간의 많은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무령왕릉과 비슷한 시기 및 동등 신분위계를 가진 양나라 諸王候墓에서 출토된 유물의 공통점은 묘지석과 磁器類遺物이 있다는 점이다. 다만 남조시기의 皇帝陵이나 王候墓에는 거의 다 도기나 俑이 출토되었지만 반면 무령왕릉에는 한 점이라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백제시기 토기의 부장량 자체가 많지 않았으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 진묘수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승선적인 내세관을 지닌 결과로 인해 토기 부장이 전무하게 된 주장과 진묘수는 鎭墓를 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피장자의 승선을 돕는 다목적성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흥미롭다. 이상과 같이, 남조 전축분은 무령왕릉과 서로 비교를 통해 외부의 附屬禮制施設과 출토유물의 종류 및 위계에 나타난 차이점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겠다.


King Muryeong's Tomb was accidentally found in Songsan-ri Ancient Tombs in 1971. To date, this is the only tomb among Baekje Tombs whose owner was identified by the academic community. King Muryeong's Tomb was constructed following the custom of Brick Chamber Tombs which stems from the most common burial system in the Southern Dynasties. Its style is a typical representative in Baekje's Yoongjin period. The cultural relics from the Brick Chamber Tombs were found to have the era characteristics of the Southern Dynasties.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perform the comparative study between King Muryeong's Tomb and Southern Dynasties' Brick Chamber Tombs if we do the deep study on the structure of King Muryeong's Tomb and its cultural relics.
Jeongji-san ruin was the only location presumed to connect with the Funeral and Burial Rituals of King Muryeong's Tomb. To some extent, two sites of Bangdanjeokseok (squared altar where stones were piled up) relics in Songsan-ri Ancient Tombs can be considered as cult facilities due to the buried major part of the tomb chamber. So far, there are 15 tombs which can be confirmed to locate in Songsan-ri Ancient Tombs. However,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2 sites of cult-facilities like Bangdanjeokseok relics and other groups of tombs remain to be identified. Nanjing Lion Southern Dynasty Cemetery and Xiao Wei Tomb had rigorous layouts that consisted of ritual facilities such as Mausoleum, Tomb Passage, stone carvings (stone beasts, stone pillars, stone tablets) and Que Gate at the Tomb. Compared with these facilities, King Muryeong's Tomb was relatively simple. During the 55 years of Xiao Liang Dynasty, Baekje sent envoys seven times to the Liang Dynasty. Therefore, it would be unreasonable to explain the lag in Baekje's acceptance of the culture of the Southern Dynasty, and more appropriate to look for the cause in the inherent culture of Baekje.
There are many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types of cultural relics from the King Muryeong's Tomb and the Southern Dynasty princely tombs. Epitaphs and porcelain cultural relics are generally unearthed in the tombs of the King Muryeong's Tomb and the tombs of the Liang Dynasty princes with the same status in the same period. Pottery and figurines are basically buried in the Huangdi Mausoleum or the tombs of princes during the Southern Dynasties. On the contrary, no one was unearthed in the King Muryeong's Tomb. Although the earthenware in Baekje tombs is generally not very large, there are also a few unearthed. There might be certain unknown relationships between such phenomenon and both of the Land Purchase Record and the Jinmyosu found in King Muryeong's Tomb. Firstly, no earthenware was buried because of the concept of afterlife to be gods. Additionally, the function of Jinmyosu was not limited to safeguarding the tomb but also played some multi-functional roles. In conclusion, by comparing with the Brick Chamber Tombs of the Southern Dynasty, we can fully explain the phenomenon of “exterior simplicity and interior luxury” in the King Muryeong's T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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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사비 도성 내 부소산성의 위상

저자 : 이병호 ( Lee Byongho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61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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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헌사료와 발굴 성과를 분석하여 백제 사비기 부소산성이 차지하는 도성 내의 위상이나 성격을 검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Ⅱ장에서는 『翰苑』 백제전에서 인용한 「括地志」에 등장하는 百濟 王城 관련 기사를 부소산성에 관한 발굴 조사 내용과 비교해 보았다. 「괄지지」라는 중국의 역사책은 7세기대 백제의 사정을 반영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책으로, '백제 왕성'의 규모나 '北面한다'는 기사는 부소산성의 현상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기사는 부소산성 성벽이 土築이므로 오류라 할 수 있지만 당시 중국인의 인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Ⅲ장에서는 부소산성의 初築 시기와 내부에서 발견된 불교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여 사비 도성 내 부소산성의 위상을 검토해 보았다. 부소산성 동문지 일대에서 발견된 '大通'명 문자자료는 이 성곽이 538년 이전에 축조되기 시작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내부 사자루와 군창지 일대에서 발견된 佛像이나 佛頭, 光背, 각종 기와류 등은 부소산성이 불교적인 聖所로서 중요시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부소산성은 단순한 逃避城이나 後苑이 아니라 국가적인 의례 시설과 각종 중앙행정관서, 불교 사원 등이 배치된 백제 사비기 왕성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사비기 백제의 왕궁은 부소산성과 그 아래 별도의 평지성 등 2개소의 왕궁이 공존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to increase our understanding of the status and characteristics of Busosanseong Fortress as a planned part of Sabi, the fortified capital city of Baekje in the Sabi period (538-660), based on the accounts contained in historical records and the findings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Chapter II compares the record on the fortified royal palace of Baekje contained in Comprehensive Land Records (Kuodi Zhi) and Garden of Academia (Hanyuan) with the archaeological discoveries made at the Busosanseong Fortress site. According to the Chinese history book, Kuodi Zhi , which provides an accurate depiction of the then situation of the fortress and also contains a valuable record about Baekje in the seventh century, including the size of the kingdom's fortified palace, the fortress “faced northward”. The assertion that the fortification was built by “piling up stones” is, however, incorrect because Busosanseong is actually an earthen-walled fortification. This record may be justifiable, however, it can't be overlooked in that it reflects the knowledge of Baekje shared by Chinese historians of that time.
In Chapter III, the discussion focuses on the status of Busosanseong Fortress as an integral part of the capital city of Baekje during the Sabi period based on ancient records about its initial construction and Buddhist artifacts discovered inside the fortress. The textual record containing the inscription “Daetong” (大通) discovered near the east gate site of Busosanseong Fortress shows that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began sometime before 538. Archaeologists have also found Buddhist statuettes, a Buddha's head and halo, and a variety of roof tiles at the sites of Sajaru Pavilion and Gunchangji , all of which suggests that the fortress was also a Buddhist sanctuary. In conclusion, Busosanseong Fortress was neither a place of shelter in times of emergency nor the rear garden of a royal palace, but rather a fortified royal palace of Sabi Baekje comprising government offices, religious structures used for state rites, and Buddhist temples. It also appears to have been connected with another fortification below Busosanseong Fortress, making it one of two fortifications that formed the royal palace of Baekje in the Sabi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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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북한 학계의 백제 역사인식

저자 : 이성준 ( Lee Sungjoo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8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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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에 대한 북한 학계의 지향점은 고구려사의 정립에 일조하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의 아들이 백제를 건국했다는 인식은 국가체제, 물질문화, 대외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강조하게 하였다. 이것은 소위 인민의 투쟁사를 발굴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당위성을 공고히 하고, 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하지만 백제의 제도와 문화가 고구려의 선진성과 주체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는 해석으로 귀결되면서, 과장된 역사인식과 편중된 시각에서 비롯된 폐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 학계는 고구려의 건국시점을 기원전 1세기 초로 규정하였고, 이에 따라 백제는 기원전 1세기 중엽 봉건소국, 기원후 1세기 중엽 봉건국가가 된 것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김정일의 교시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277년으로 수정하면서, 백제는 기원전 3세기 중엽 봉건소국, 기원전 1세기 말 봉건국가가 되었다고 정정된다. 그리고 백제의 사비 천도가 고구려의 장안성 천도보다 48년 앞선다는 맹점을 해결하기 위해 장안성의 건설 이후 나성이 착공되었고, 이에 따라 7세기 전반 고구려식의 도성제가 백제에 완성되었다는 논리를 만든다.
고고자료에도 고구려의 선진기술과 제도의 파급이 선명하다는 기조는 이어진다. 토기의 형태적 특징, 기술적 유형, 문양 등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생활풍습, 감정, 정서, 취미가 서로 같았기 때문이고, 백제 초기 수막새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특징이 관찰된다고 한다. 기단식적석총은 고구려보다 2~3분기 정도 후행하도록 설정하였고, 고구려 석실묘의 구조를 감안하여 백제의 석실묘를 편년하면서, 부여 능산리와 서울 가락동의 일부를 4세기로 분류하였다. 또한 고구려 능제의 도입을 부여 능산리 사지의 건설 배경으로 제시하며, 능산리 2호분(중하총)을 성왕이 아닌 백제 시조 구태의 능으로 비정하였다.
이처럼 한국과 북한 학계의 간극은 학문적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만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향후 의미 있는 접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고대 동아시아의 역학구도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The goal of the North Korean academia about the history of Baekje is to contribute to establishing the history of Goguryeo right. The recognition that Baekje was established by the son of the founder of Goguryeo emphasized the influence of Goguryeo in almost all areas, including the state system, material culture, and foreign relations. This is a part of measures to discover the history of the people's struggles to solidify the historical necessity of socialist construction and to strengthen ideology. However, as it resulted in the interpretation that Baekje's system and culture blindly followed Goguryeo's advancedness and subjectivity, it clearly showed the flaws stemming from an exaggerated historical perception and biased perspective.
Until the mid-1980s, North Korean academics defined the founding of Goguryeo as early 1st century BC, and Baekje became a small feudal state in the mid-1st century BC and a feudal state in the mid-1st century AD. However, after the 2000s, according to the teachings of Kim Jong-il, the founding of Goguryeo was revised to 277 BC, and Baekje was changed to become a feudal state in the middle of the 3rd century BC and a feudal state at the end of the 1st century BC. In order to solve the blind spot that Baekje's Sabi capital was 48 years ahead of Goguryeo's Janganseong capital, the construction of Naseong started after the construction of Janganseong, and it suggests the logic that the Goguryeostyle capital system was completed in Sabi in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The theory continues that the spread of advanced technologies and systems of Goguryeo is clear even in archeology. The common features identified in the 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technical types, and patterns of pottery are that life customs, emotions, emotions, and hobbies were the same. Stone Mound Tomb was set to lag behind Goguryeo by two to three quarters. By analyzing the stone chamber tomb of Baekje in consideration of the structure of the stone chamber tomb in Goguryeo, parts of Neungsan-ri in Buyeo and Garak-dong in Seoul were defined as the 4th century. In addition, it is said that the Neungsan-ri temple in Buyeo was built with the introduction of the tomb system of Goguryeo, and Neungsan-ri Tomb No. 2 (Junghachong) was defined as the tomb of Gutae, the founder of Baekje.
As such, the gap between academia i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is a problem that cannot only be said to be caused by differences in academic methodologies. In order to find a meaningful point of contact in the future, it will be necessary to make an effort to form a consensus that Baekje and Gogurye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ynamics of ancient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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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솔동고분군 축조 배경과 역사적 의미

저자 : 정재윤 ( Chung Jae-yu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9-115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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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한솔동고분군과 세종 일대의 고대 유적을 분석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데 있다.
이를 통해 한솔동고분군을 축조한 나성리 세력이 백제의 금강 중류 지역 지배의 안정화에 기여함으로써 웅진 천도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밀리자 태자인 전지를 왜에 파견하는 등 주변국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또한 금강 하구 유역 세력가로 추정되는 사두를 등용하여 지방의 戰力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후 용원리 고분군과 수촌리고분군 등에서 금동관 등 위세품이 출토되는 것도 백제가 이들 세력을 거점으로 삼아 점차 금강 중류 유역에 대한 진출과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이해된다. 한솔동고분군 또한 양상이 비슷하여 백제의 금강 유역 진출과 관련됨이 분명하고, 예식진 일가 묘지명을 통해서도 웅진 지역을 개발하려는 백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는 방어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수도로서의 입지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지역을 택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에 도움을 준 세력으로는 목씨와 해씨뿐만 아니라 수촌리고분군과 한솔동고분군 축조 세력 등 지방 세력가도 일조하였다. 한솔동고분군을 축조한 나성리 세력은 지방도시로 번성하고, 금강의 길목을 장악하여 세종 일대의 세력들을 통합하였다. 나성리 세력의 부상은 금강 상류로 가는 길을 통제함으로써 웅진 천도가 가능하게 된 배경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나성리 세력은 재지적 기반에 바탕을 두었지만 백제에 의한 계획도시라는 점에 주목하면 이들 중 일부는 이주민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는 선진문물을 취득한 중국계 이주민들을 활용하여 5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부터 금강 유역을 개발하였으며, 예식진 일족을 통해서 그 모습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웅진 천도 이후 한솔동고분군 축조 세력의 연속성이 보이지 않은 것은 나성리의 도시 기능 위축과 이들의 중앙귀족화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천도 후 벌어진 권력 다툼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웅진 방령을 지낸 예식진의 모습을 통해서도 명맥을 이어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tombs of Hansol-dong and ancient remains in the Sejong area to examine their historical significance. Through this, it was noted that the Naseongri power that constructed the tombs of Hansol-dong played a great role in Ungjincheondo (transfer of capital to Ungjin) by contributing to the Baekje's stabilization of the midstream of the Geumgang River.
Baekje would utilize help from neighboring countries and local influences as it was losing the war against Goguryeo. It is understood in the dimension to strengthen its control over the Geumgang river area that grave goods like gilt-bronze crowns come from the tombs of Yongwon-ri and the tombs of Suchon-ri constructed around this time. The tombs of Hansol-dong, also, had similar aspects, which were related to Baekje's advancement to the Geumgang river area, and it would redevelop the Ungjin area, also through the Ye Shikjin clan's epitaph.
As powers that help Baekje's Ungjincheondo were the Moks and the Haes, and the local influences, like the powers that constructed the tombs of Suchon-ri and the tombs of Hansol-dong contributed to it as well. Naseong-ri power that constructed the tombs of Hansol-dong became prosperous as a provincial city and united powers in the Sejong area by occupying the routes of the Geumgang River. The rise of Naseong-ri power became the background that made Ungjincheondo possible by controlling the traffic routes in the upstream of the Geumgang.
Naseong-ri power is based on the region, but some of them likely included emigrants, given that it was a city planned by Baekje. Baekje developed the Geumgang river area around the 5th century, utilizing Chinese immigrants that acquired advanced culture, it is possible to peek at part of what happened through the Ye Shikjin clan. After Ungjincheondo, Naseong-ri power did not form a great power, but it was noted that this was maintained also through Ye Shikjin, who served as the leader of the Ungjin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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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종 한솔동 고분군(舊송원리 고분군)의 축조양상과 그 의의

저자 : 박신영 ( Park Shin-yeong ) , 성정용 ( Seong Jeong-yo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17-15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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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한솔동(舊 연기 송원리) 고분군은 행정중심복합도시 조성에 앞서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알려졌다. 고분군에서는 토광묘와 석곽묘·석실묘 등 다양한 묘제의 고분이 90여 기 조사되었는데 그중 21기가 석실묘이다. 이처럼 한성기 지방 고분군에 대규모 석실군이 조영된 사례가 그다지 없어 조사 당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한솔동 고분군은 조성 초기에는 모든 묘제가 혼재하다가 석실묘 축조가 확산한 이후에는 묘제에 따른 고분 입지의 분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솔동 고분군에서 가장 도드라진 무덤은 송원리형 석실로 분류되는 16호 석실묘이다. 이는 한성기 석실묘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구조가 독특하고 완성도도 높다. 한솔동 고분군에서는 도굴 등의 요인으로 인해 위세품들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피장자의 위계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석실묘가 다수 조영된 고분군 양상과 송원리형 석실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이 고분군 축조집단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고분군은 한성기 최대의 지방 도시이자 계획도시로 여겨지는 나성리 유적을 경영했던 사람들이 묻힌 곳으로 보이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거대한 계획도시인 나성리 개발을 주도한 것이 바로 한솔동 고분군 축조집단으로 보이는 바, 한성기 지방사회에서 이 집단이 가지고 있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나아가 한솔동 고분군 축조집단과 백제 중앙과의 밀접한 관계도 상정해 볼 수 있다.


Hansol-dong(old Yeongi Songwon-ri) Tombs in Sejong, were known through excavations conducted prior to the creation of an administrative complex city. About 90 tombs were built in Hansol-dong Ancient Tombs, and 21 of them are stone chamber tombs. Hansoldong is the only case in which a large-scale stone chamber group was constructed in the Hansung Period local ancient tombs, so it has received a lot of attention since the time of the investigation. Various tombs were built in Hansol-dong Ancient Tombs, and more than 20% of tombs were concentrated in District 1.
In the early stages of the form of the tomb, all tombs are mixed, but after the construction of the stone chamber tomb spreads, the differentiation of the tomb site according to the form of the tomb appears clearly. The most prominent tomb among the tombs in Hansol-dong was the 16th stone chamber tomb, which was also classified as a Songwon-ri-type stone chamber. The structure is high quality of completion and unique that it is difficult to find similar cases to 16th stone chamber tomb of Hansung Period.
Although no valuable items were excavated from Hansol-dong Ancient Tombs due to the robberies, it is an outstanding local power that is no way inferior to not only the ancient tombs in Sejong-si but also the ancient tombs in the Hansung period. It is also the largest local city and the planned city during the Hanseong period where people who managed the ruins of Naseong-ri, were buried.
Although the size of the ancient tomb group is important, however one of the important values of this ancient tomb group is that it is found how the people who built the ancient tomb lived. The development of Naseong-ri was led by the Hansol-dong group, and it is believed that local forces participated in the operation. In the background of the development of Naseong-ri, it is assumed that there was a close relationship between the Hansol-dong group and the major power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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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제 금제구슬의 형태 구분과 금 순도 비교

저자 : 김성곤 ( Kim Seong Gon ) , 김은아 ( Kim Eun A ) , 김규호 ( Kim Gyu Ho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3-169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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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백제지역 15개 유적에서 출토된 금제구슬 1,067점을 형태에 따라 Ⅰ, Ⅱ, Ⅲ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른 금 순도를 비교하였다. 한성기와 웅진기 유적에서 확인되는 Ⅰ유형은 22점으로 타원형이고 한면에 두 개의 투공이 관찰된다. Ⅰ유형은 세부 특징에 따라 금판으로 구성된 Ⅰ-A형이 6점, 각목대가 둘러진 Ⅰ-B형이 7점, 금판에 장식이 있는 Ⅰ-C형이 9점으로 구분하였다. 웅진기와 사비기의 주요 유적에서 확인되는 Ⅱ유형은 857점으로 투공이 한 개 있는 반구체 금판 2매를 결합한 형태이다. Ⅱ유형은 세부 특징에 따라 구형(Ⅱ-A형) 709점과 화형(Ⅱ-B형) 148점으로 구분된다. 웅진기와 사비기 유적에서 확인되나 다수가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Ⅲ유형은 205점으로 소환과 누금을 연접한 구슬이다. Ⅲ유형은 소환을 연접한 형태인 Ⅲ-A형 4점, 소환에 각목문이 장식된 Ⅲ-B형 2점, 누금장식이 확인되는 Ⅲ-C형 199점으로 구분하였다. 형태에 따른 금 순도의 비교에서, Ⅰ유형은 금 순도가 다양하게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Ⅰ-A형이 15.1~23.0 K, Ⅰ-B형이 15.8~23.7 K, Ⅰ-C형이 20.9~21.3 K이다. Ⅱ유형은 순금에 가까운 편이다. Ⅱ-A형이 23.6~23.8 K, Ⅱ-B형이 23.8~24.0 K으로 확인된다. Ⅲ유형은 세부 유형에 따라 금 순도가 차이를 보인다. Ⅲ-A형이 20.0~20.9 K, Ⅲ-B형이 22.9~23.2 K, Ⅲ-C형이 23.0~23.8 K로 금 순도가 높아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를 종합하면 상대적으로 금 순도가 낮은 금제구슬 Ⅰ유형은 지방재지 세력과 귀족 집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금 순도가 높은 금제구슬 Ⅱ, Ⅲ유형은 웅진기와 사비기의 왕실과 관련된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형태와 금 순도가 상관성을 보이는 백제 금제구슬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특성도 나타난다.


In this study, 1,067 gold beads excavated from 15 ruins in Baekje were classified intoⅠ, Ⅱ, and Ⅲ types according to the physical shape and the gold purity was compared. Type I identified in ruins of the Hanseong and Ungjin period was oval with 22 beads, and two holes were observed on one side. Type Ⅰ was divided into 3 groups according to the decoration of the gold plate. Ⅰ-A Type of 6 beads with gold plate only, Ⅰ-B Type of 7 beads with thin lines engraved on the gold plate, and Ⅰ-C Type of 9 beads with granulation on the gold plate. Type II identified in ruins of the Ungjin and Sabi period is 857 beads, which is a combination of two hemispherical gold plates with one hole. Type Ⅱ was divided into 2 groups according to their shape. The Round Ⅱ-A Type of 709 beads, and the flower shape beads Ⅱ-B Type of 148 beads. Type Ⅲ is confirmed from the remains of the Ungjin and Sabi periods, but many of them were excavated from the tomb of King Muryeong of Gongju. Aspherical Ⅲ-A Type with the small gold ring has 4 beads, Ⅲ-B Type with thin lines has 2 beads, and Ⅲ-C Type with granules decorations has 199 beads. In the comparison of gold purity according to shape, type I shows the characteristic of the various distribution of gold purity. Ⅰ-A Type is 15.1∼23.0K, Ⅰ-B Type is 15.8∼23.7K, and Ⅰ-C Type is 20.9∼21.3K. Type Ⅱ is close to pure gold, Ⅱ-A Type is 23.6∼23.8K, and Ⅱ-B Type is 23.8∼24.0K. Type Ⅲ shows a characteristic that the purity of gold increases from 20.0∼20.9K, Ⅲ-A Type to 22.9∼23.2, Ⅲ-B type, 23.0∼23.8K, and Ⅲ-C type. In summary, type I gold beads which are relatively low in the purity of gold, are found mainly in ruins presumed to be local power and aristocratic groups, and types II and III gold beads with high gold purity are mainly found in ruins related to the royal family of Ungjin and Sabi period. Therefore, it is presumed that the Baekje gold beads, which show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hape and purity of gold a correlation according to period and 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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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황해 교섭·교류 항로와 경기만

저자 : 임동민 ( Lim Dong-mi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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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만은 남북방향 연안항로의 경유지, 동서방향 횡단항로의 기항지, 한강 수계의 인후부로서 교통망의 '결절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가진 동시에, 많은 연안항해 위험요소를 지닌 곳이다. 이에 따라 고대 경기만의 역사는 황해 항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황해 항로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는 특정 사료를 통해 특정 항로의 개척시점 문제에 천착하였지만, 항로 활용의 주체와 목적에 따른 구분을 고려하면, 경기만과 긴밀히 연결된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시점과 활용 양상에 대해 보완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황해 항로 활용의 주체는 국가와 민간 영역으로 나뉘며, 활용의 목적은 정치·군사·외교적 측면의 교섭과 경제·문화·사상적 측면의 교류로 크게 구분된다. '교섭 항로'는 정치, 군사, 외교적 '교섭'을 위해 활용하는 항로를 의미하는데, '교류 항로'보다 공적인 성격을 지니며, 더욱 높은 안전성을 요구한다. '교류 항로'는 경제, 문화, 사상적 '교류'를 위해 활용하는 항로로서, '교섭 항로'보다 상대국과의 적대관계, 기항지 연안의 정세변화에 구애받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교섭 항로'는 '교류 항로'의 경험, 기술, 정보가 축적되어 안정성이 담보된 항로를 의미한다. '교섭 항로', '교류 항로'는 당시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항로라기보다, 연안항로, 횡단항로 등 다양한 항로를 활용했던 역사적 사실을 목적에 따라 구분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 구분을 통해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 시점을 살펴보면, 4세기 이전 경기만, 낙랑지역 관련 문헌자료, 고고자료에서 이미 횡단항로가 교류 및 교섭 항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된다. 그리고 4세기 후반 백제는 앞선 시기의 횡단항로 경험을 흡수하여, 장거리 연안항로 대신에 횡단항로를 교섭 항로로 활용하여 동진과 교섭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면, 고대 경기만의 해양사적 전개과정은 4시기로 구분된다. 1기(~4세기 초반) 연안항로 중심 시대의 경기만은 연안항로 경유지로서, 신분고국과 '마한주'(백제왕)가 성장한 지역이었다. 횡단항로 중심 시대는 세 시기로 세분되는데, 2기(~5세기 초반)는 백제가 횡단항로를 활용한 시기로서, 경기만은 남북방향 연안항로, 동서방향 횡단항로, 내륙의 한강수계를 잇는 '결절점' 역할을 하였다. 3기(~6세기 중반)에 경기만 '결절점'의 범위는 동아시아 각국으로 확대되어, 왜와 가라국도 경기만의 백제를 거쳐 중국과 교섭하였다. 하지만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교섭항로의 안정성이 떨어졌고, 왜나 가라국의 중국 교섭을 지켜보아야 하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4기(6세기 후반~)에 신라는 경기만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도 기존에 축적된 지정학적 이점과 해양학적 특성을 흡수하여 횡단항로를 통해 당과 동맹을 맺어 삼국통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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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역 인식의 교착(交錯)지대로서의 전북 동부지역 이해를 위한 소론(小論)

저자 : 위가야 ( We Ka-ya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57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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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가야와 백제에서 바라본 각자와의 접경이라는 관점에서 문헌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전북 동부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는 5~6세기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에서 전북 동부지역이 가지는 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 검토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가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하는 기문은 논쟁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 위치를 섬진강 유역에서 찾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보았다. 기문이라는 지명을 이해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한원』의 基汶河를 섬진강에 비정할 수 있으며, 이른바 '기문·대사 분쟁'의 성격이 섬진강 교통로를 둘러싼 갈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섬진강 교통로는 479년 대가야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할 때 이용한 경로이며, 그 교통로의 장악을 통해 왜와의 교역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백제는 대가야가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대할 수 있던 주된 요인을 섬진강 교통로의 장악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를 근절하기 위해 기문과 대사에 대한 공략에 나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해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성립할 수 있다. 최근 반파의 위치를 장수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문헌의 새로운 해석과 봉수 유적 등 고고자료의 발굴 결과를 근거로 제기되었지만, 『일본서기』 기록의 문학적 윤색을 사실로 전제하고 고고자료를 해석한 결과 도출된 견해라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현재까지는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와 『삼국사기』의 우륵 12곡 관련 기사를 통해 같은 시기에 백제와 대가야가 기문을 비롯한 전북 동부지역을 자신의 영역 또는 영향권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북 동부지역은 대가야와 백제 모두의 의식에서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지만, 실제로는 두 세력 모두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양국의 영역 인식이 交錯하는 지역으로서 전북 동부지역을 이해할 때, 그 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실상에 좀 더 가까운 접근이 가능할 것이며, 향후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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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령왕릉(武寧王陵) 장례과정(葬禮過程)에서 <설치식(設置式) 관(棺)>의 검토(檢討)

저자 : 강원표 ( Kang Won-pyo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9-8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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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 상장의례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정확한 조사보고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장례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관의 안장방법과 위치, 관 내 부장품의 위치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검토가 진행되기 어려웠다. 이에 장례 과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물의 실제 위치 파악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973년 보고서와 이후 복원안의 문제점을 살펴 정확한 유물 출토위치와 관 안장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목관의 안장방법을 재검토하였다.
왕과 왕비의 관은 300kg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덤의 입구가 좁고, 연도와 묘실의 크기가 협소하므로 인력으로 무거운 관을 들어 왕릉 내에 안치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관은 시신이 안치된 관을 빈장지에서부터 운구하여 묘실에 안치하는 <운구식 관>이 아니라, 묘실 내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설치식 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운구를 위한 손잡이로 추정되었던 관고리가 실제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두침과 족좌에 운구 시 진동에 대비한 고정 흔적이 없는 점, 좁은 실내에서 조립이 용이하도록 안쪽에 홈을 파고 모서리를 깎아 가공한 관재, 머리 부분에 타격흔적이 없는 관정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관 내부는 3개 공간으로 나뉘고 시신은 가운데, 부장품은 위, 아래 공간에 안치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령왕릉의 상장례는 중국의 유교적 상장례의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가 많았다. 하지만 무령왕릉 장례과정 중 목관의 안장방법을 검토한 결과 중국의 전통 상장례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묘실 내 미리 설치된 목관에 시신 안치, 관 내부 공간을 구획하여 가운데는 시신 안치공간으로, 머리 위와 아래는 부장공간으로 활용한 점 등은 백제의 전통적인 장례 방법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가 중국 상장의례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나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묘제의 변화가 상장례의 변화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향후 백제 상장례에 대한 연구는 묘제의 변화와 장례 방식의 변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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