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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학회> 백제학보> 영역 인식의 교착(交錯)지대로서의 전북 동부지역 이해를 위한 소론(小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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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인식의 교착(交錯)지대로서의 전북 동부지역 이해를 위한 소론(小論)

A study for understanding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as the entangled area of territorial consciousness.

위가야 ( We Ka-ya )
  • : 백제학회
  • : 백제학보 3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37-57(21pages)
백제학보

DOI


목차

Ⅰ. 머리말
Ⅱ. 기문의 위치비정과 ‘기문·대사 분쟁’의 성격
Ⅲ. 반파 관련 사료의 분석과 ‘반파≠가라설’ 재검토
Ⅳ. 대가야와 백제가 인식한 전북 동부지역의 실상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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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가야와 백제에서 바라본 각자와의 접경이라는 관점에서 문헌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전북 동부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는 5~6세기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에서 전북 동부지역이 가지는 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 검토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가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하는 기문은 논쟁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 위치를 섬진강 유역에서 찾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보았다. 기문이라는 지명을 이해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한원』의 基汶河를 섬진강에 비정할 수 있으며, 이른바 ‘기문·대사 분쟁’의 성격이 섬진강 교통로를 둘러싼 갈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섬진강 교통로는 479년 대가야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할 때 이용한 경로이며, 그 교통로의 장악을 통해 왜와의 교역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백제는 대가야가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대할 수 있던 주된 요인을 섬진강 교통로의 장악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를 근절하기 위해 기문과 대사에 대한 공략에 나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해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성립할 수 있다. 최근 반파의 위치를 장수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문헌의 새로운 해석과 봉수 유적 등 고고자료의 발굴 결과를 근거로 제기되었지만, 『일본서기』 기록의 문학적 윤색을 사실로 전제하고 고고자료를 해석한 결과 도출된 견해라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현재까지는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와 『삼국사기』의 우륵 12곡 관련 기사를 통해 같은 시기에 백제와 대가야가 기문을 비롯한 전북 동부지역을 자신의 영역 또는 영향권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북 동부지역은 대가야와 백제 모두의 의식에서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지만, 실제로는 두 세력 모두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양국의 영역 인식이 交錯하는 지역으로서 전북 동부지역을 이해할 때, 그 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실상에 좀 더 가까운 접근이 가능할 것이며, 향후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nature of polities in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which can be identified through the literature record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border between Gaya and Baekje. It is also an attempt to understand the status of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in the space and time of ancient Korean history in the fifth and sixth centuries. The considerations reviewed in this study are follows:
In the first place,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Gimun(己汶) was in the Seomjin River basin, which was said to be the place where the conflict between Baekje and Gaya took place according to Nihonshoki. The first reason is that Gimunha(基汶河) in Han Yuan is the current Seomjin River. The second reason is that the nature of the conflict could be seen as a conflict over the waterway traffic route in Seomjin River basin.
In addition, this understanding can be logical from the perspective that Banpa(伴跛) recorded in Nihonshoki was Daegaya in Koryung. Recently, an argument has been raised to see the location of Banpa in the Jangsu region. However, this argument should be required a careful approach in the aspect of the source criticism of Nihonshoki. Until now, thus, it is reasonable to see that Banpa was Daegaya in Koryung.
Through the “Baekjekuksajo” in Zhigongtu of Liang and the article of “Wooreuk 12- Gok” in Samguksagi, it can be confirmed that Baekje and Daegaya recognized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as their own territory or their sphere of influence at the same time. Therefore, although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was recognized as their own territory in both Daegaya and Baekje in terms of consciousness, it was a region under the influence of both polities. When understanding the eastern part of Cheonbuk as the region where the territorial consciousness of Baekje and that of Gaya are entangled, it would be able to access the reality of the polity that existed in the area.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83705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2005-9469
  • : 2713-838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9-2022
  •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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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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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산성 출토 백제 평기와의 변천과 특징

저자 : 오세인 ( Oh Se-i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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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공산성에서 출토된 자료를 토대로 백제 웅진·사비기에 사용된 평기와의 제작 기법을 살펴보았다. 평기와 속성 분석은 제작 기술과 형태로 구분하여 살펴보았고, 각 속성별 요소는 서로 유기적으로 군집되어 8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었다.
유형의 변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공산성 유구 내 층위에서 출토된 평기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평기와 크게 1∼4유형(웅진기)→5∼8유형(사비기)로 제작되었다. 이 같은 변천 양상을 보다 세분하기 위해 주변 비교 유적에서 출토된 평기와와 공반 유물을 살펴보았고, 그 결과 공산성 평기와는 크게 4단계로 구분되었다.
단계별로 검토한 결과, 제작 기법은 백제 웅진기(1단계)에서 사비기(2∼4단계)로 갈수록 변화상이 뚜렷하다. 웅진기 평기와는 토기 제작에서 사용된 기술이 일부 적용된다. 그러나 사비기 이후에는 토기 제작에 사용된 기술이 사라지고, 기와 전용의 제작 기법만이 사용된다. 이를 통해 기와 제작 기술은 전보다 발전하고, 나아가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단계별로 실제 기와가 사용된 공간을 살펴보기 위해 공산성 내 공북루 남쪽대지 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3단계 이후 기와 사용 범위는 유적 전 범위에 가깝게 확장되어, 대규모의 공간 활용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This paper looks into manufacturing techniques of plain roof tiles used during the Woongjin·Sabi Period of Baekje, based on the data excavated from the Gongsan Fortress. Properties of plain roof tiles were divided depending on manufacturing techniques and forms for analysis and a total of eight types were extracted from components of individual properties that were organically clustered.
To examine transition aspects of the types, plain roof files excavated from soil layers of Gongsan Fortress remains were investigated and it was found that they generally changed from Type 1∼4(Woongjin Period) to Type 5∼8(Sabi Period). For subdividing these transition aspects more, plain roof tiles and associated relics excavated from the surrounding comparison remains were investigated and plain roof tiles from the Gongsan Fortress were found to be divided into total of 4 stages.
Manufacturing techniques changed more clearly in the Sabi Period(Stage 2∼4) than in the Woongjin Peiord(Stage 1) of Baekje. Part of techniques used for manufacturing pottery applied to plain roof tiles during the Woongjin Period. But the techniques used for manufacturing pottery disappeared after the Sabi Period and only the manufacturing techniques for roof tiles were used. This made a contribution to the advancement in roof tile manufacturing techniques and furthermore, the mass-production.
In addition, relics around the southern site of Gongbukru in the Gongsan Fortress were investigated to look into the spaces of individual stages that real roof tiles were used. As a result, it was revealed that the use of roof tiles expanded to the whole scope of relics after Stage 3, which means there was a large-scale use of sp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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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형성 과정과 그 배경

저자 : 이명헌 ( Lee Myeong Heon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3-7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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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란 사비양식 백제토기 중 고구려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제작·사용된 토기를 지칭한다. 대부분 부여, 익산, 공주 등 백제 도성급 유적에서 출토되고, 사비도성 내에서도 중요 유적(왕궁추정지, 왕실 사찰, 관영 공방 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상위계층이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일부 의례용으로 사용된 기종(대부완, 이배, 접시 등의 소형기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생활용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주로 회색계열, 정선된 점토 혹은 소량의 첨가제가 혼입된 태토, 연질로 제작되며 타날(선문)을 이용해 성형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와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형성 과정과 등장 배경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형성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6세기를 전후하여 일부 고구려계 기종이 확인되는 단계로, 도성(공주) 외 지역에서 소수 확인되며 형태나 제작기법상 5세기대 고구려토기 제작집단과 관련이 깊다. 또 일반적인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와는 다르게 격자문 타날의 비율이 높고, 사용자의 위계 역시 높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1단계 토기는 2단계 토기와 출현 경로나 그 성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1단계 토기를 사비양식 백제토기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2단계는 6세기 중~후엽에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단계이다. 전체적으로 형태나 제작기법이 6세기대 고구려토기와 유사하고, 사비도성 내 국가 중요시설에서 다수 확인된다. 또 중앙 생산된 것으로 판단되며, 사용자의 위계 역시 높다. 이를 통해 기존 견해처럼 사비기에 고구려와의 문화접변으로 고구려토기 문화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도입·수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단계는 7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백제 멸망까지로,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가 백제 공인들에 의해 제작되면서 고구려토기의 변천 양상과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변화해나가는 단계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사비기만의 독특한 토기 양식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어서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등장 배경은 Peer Polity Interaction 모델을 이용해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한성기에 유행한 적석총과 고구려와 삼연의 문화적 동질성 등의 사례를 참고하였다. 그 결과 두 사례와는 다르게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는 비교적 간접적인 상호작용(비물질문화의 전이, 기술의 전달 등)을 통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고구려토기의 생활 편리성은 고구려계 사비양식 백제토기의 성립 이후 해당 양식이 확산 및 발전하는데 있어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y refers to a new style of Baekje's Sabi pottery pottery of a new style that emerged under the influence of Koguryo pottery.
The development of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can be explained in three stages. In Stage 1, which centers around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potteries were mainly excavated from areas outside the capital (Ungjin).
Stage 2, which ranges from the mid to the late 6th century, marks the full-fledged production of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In addition, given the fact that the stage 2 potteries are found in the capital and related to 6th-century Koguryo potteries, they are different from the stage 1 potteries in terms of their nature and places of excavation. There appears to be no continuity between the stage 1 potteries and the stage 2 potteries.
In Stage 3, which lasted from the beginning of the 7th century to the fall of Baekje,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began to show its own development trajectories regardless of the changes in Koguryo potteries in the era.
Alternatively, this study attempts an interpretation of the formational background of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using the Peer Polity Interaction model. The analysis showed that Koguryo style Sabi Baekje potteries are estimated to have been formed by indirect interactions (transfer of non-material culture and technology transfer).
Meanwhile, the convenience of Koguryo potteries appears to have been one of the causes behind the dissemination and development of Sabi-style Baekje pott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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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령왕릉의 구조적 특징과 위계성 - 중국 동진·남조시기 전실묘와 비교를 중심으로 -

저자 : 김봉근 ( Kim Bonggeun ) , 성정용 ( Seong Jeongyo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9-10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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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묘로서, 중국의 묘제인 전실묘를 채용함으로써 백제와 중국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무령왕릉과 중국 남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진·남조시기 전실묘의 구조적 특징을 비교·분석하여 무령왕릉의 위계를 파악하고, 나아가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먼저 중국 동진·남조시기 전실묘의 변화 양상과 묘주의 신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등급을 구분해 보았다. 황제와 황실 친족, 1~3품에 해당하는 고위관료묘는 신분과 묘 등급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보이는 반면, 3품 미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3품 이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엄격한 묘제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의 구조적 특징과 무령왕의 관작으로 보아 중국 동진·남조시기 1~3품에 해당하는 제후왕 또는 고위관료묘의 특징과 부합하는 한편, 구조면에서 양대 이전의 전실묘와 상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무령왕릉의 구조적 특징을 근거로 본고에서는 무령왕릉이 백제가 남조 송·제와 지속적 문화교류를 통해 습득하고 축적한 건축기술과 무령왕릉 전돌을 제작한 남조 양 공인들의 영향이 한데 어우러져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보았다.


The tomb of King Muryeong is the tomb of the 25th King Muryeong and Queen of Baekje, and provides valuable data for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China by adopting a brick tomb, a Chinese tomb system. In this paper,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and the brick tombs of the Eastern Jin Dynasty and the Southern Dynasties period in Nanjing, China were compared and analyzed to identify the grade of the tomb of King Muryeong, and further examine its meaning.
First, the grades were classified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ange pattern of brick tombs during the Eastern Jin Dynasty and the Southern Dynasties in China and the status of the tombstone. The emperor, imperial relatives, and high-ranking officials' graves of grades 1 to 3 showed a close correlation between their status and tomb ratings, while those below level 3 did not, so it seems that there was a relatively strict tomb system for grade 3 or higher.
It is noteworthy that the tomb of King Muryeong is consistent with the characteristics of Vassal King or high-ranking official tombs, which are grades 1 to 3 during the Eastern Jin Dynasty and the Southern Dynasties, but rather in line with the brick tombs before the liang Dynasty.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tomb of King Muryeong were raised the possibility that it was built in harmony with the architectural techniques accumulated and accumulated through cultural exchanges with the Song and Qi of Souther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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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황해 교섭·교류 항로와 경기만

저자 : 임동민 ( Lim Dong-ming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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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만은 남북방향 연안항로의 경유지, 동서방향 횡단항로의 기항지, 한강 수계의 인후부로서 교통망의 '결절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가진 동시에, 많은 연안항해 위험요소를 지닌 곳이다. 이에 따라 고대 경기만의 역사는 황해 항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황해 항로에 관한 기존 연구에서는 특정 사료를 통해 특정 항로의 개척시점 문제에 천착하였지만, 항로 활용의 주체와 목적에 따른 구분을 고려하면, 경기만과 긴밀히 연결된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시점과 활용 양상에 대해 보완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황해 항로 활용의 주체는 국가와 민간 영역으로 나뉘며, 활용의 목적은 정치·군사·외교적 측면의 교섭과 경제·문화·사상적 측면의 교류로 크게 구분된다. '교섭 항로'는 정치, 군사, 외교적 '교섭'을 위해 활용하는 항로를 의미하는데, '교류 항로'보다 공적인 성격을 지니며, 더욱 높은 안전성을 요구한다. '교류 항로'는 경제, 문화, 사상적 '교류'를 위해 활용하는 항로로서, '교섭 항로'보다 상대국과의 적대관계, 기항지 연안의 정세변화에 구애받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교섭 항로'는 '교류 항로'의 경험, 기술, 정보가 축적되어 안정성이 담보된 항로를 의미한다. '교섭 항로', '교류 항로'는 당시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항로라기보다, 연안항로, 횡단항로 등 다양한 항로를 활용했던 역사적 사실을 목적에 따라 구분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 구분을 통해 황해중부횡단항로의 개척 시점을 살펴보면, 4세기 이전 경기만, 낙랑지역 관련 문헌자료, 고고자료에서 이미 횡단항로가 교류 및 교섭 항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된다. 그리고 4세기 후반 백제는 앞선 시기의 횡단항로 경험을 흡수하여, 장거리 연안항로 대신에 횡단항로를 교섭 항로로 활용하여 동진과 교섭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면, 고대 경기만의 해양사적 전개과정은 4시기로 구분된다. 1기(~4세기 초반) 연안항로 중심 시대의 경기만은 연안항로 경유지로서, 신분고국과 '마한주'(백제왕)가 성장한 지역이었다. 횡단항로 중심 시대는 세 시기로 세분되는데, 2기(~5세기 초반)는 백제가 횡단항로를 활용한 시기로서, 경기만은 남북방향 연안항로, 동서방향 횡단항로, 내륙의 한강수계를 잇는 '결절점' 역할을 하였다. 3기(~6세기 중반)에 경기만 '결절점'의 범위는 동아시아 각국으로 확대되어, 왜와 가라국도 경기만의 백제를 거쳐 중국과 교섭하였다. 하지만 백제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교섭항로의 안정성이 떨어졌고, 왜나 가라국의 중국 교섭을 지켜보아야 하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4기(6세기 후반~)에 신라는 경기만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도 기존에 축적된 지정학적 이점과 해양학적 특성을 흡수하여 횡단항로를 통해 당과 동맹을 맺어 삼국통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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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역 인식의 교착(交錯)지대로서의 전북 동부지역 이해를 위한 소론(小論)

저자 : 위가야 ( We Ka-ya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57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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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가야와 백제에서 바라본 각자와의 접경이라는 관점에서 문헌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전북 동부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는 5~6세기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에서 전북 동부지역이 가지는 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 검토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가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하는 기문은 논쟁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그 위치를 섬진강 유역에서 찾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보았다. 기문이라는 지명을 이해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한원』의 基汶河를 섬진강에 비정할 수 있으며, 이른바 '기문·대사 분쟁'의 성격이 섬진강 교통로를 둘러싼 갈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섬진강 교통로는 479년 대가야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할 때 이용한 경로이며, 그 교통로의 장악을 통해 왜와의 교역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백제는 대가야가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대할 수 있던 주된 요인을 섬진강 교통로의 장악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를 근절하기 위해 기문과 대사에 대한 공략에 나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해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성립할 수 있다. 최근 반파의 위치를 장수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문헌의 새로운 해석과 봉수 유적 등 고고자료의 발굴 결과를 근거로 제기되었지만, 『일본서기』 기록의 문학적 윤색을 사실로 전제하고 고고자료를 해석한 결과 도출된 견해라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현재까지는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양직공도』 백제국사조와 『삼국사기』의 우륵 12곡 관련 기사를 통해 같은 시기에 백제와 대가야가 기문을 비롯한 전북 동부지역을 자신의 영역 또는 영향권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북 동부지역은 대가야와 백제 모두의 의식에서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되었지만, 실제로는 두 세력 모두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양국의 영역 인식이 交錯하는 지역으로서 전북 동부지역을 이해할 때, 그 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체의 실상에 좀 더 가까운 접근이 가능할 것이며, 향후 이러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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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무령왕릉(武寧王陵) 장례과정(葬禮過程)에서 <설치식(設置式) 관(棺)>의 검토(檢討)

저자 : 강원표 ( Kang Won-pyo )

발행기관 : 백제학회 간행물 : 백제학보 3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9-8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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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 상장의례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정확한 조사보고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장례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관의 안장방법과 위치, 관 내 부장품의 위치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검토가 진행되기 어려웠다. 이에 장례 과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유물의 실제 위치 파악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973년 보고서와 이후 복원안의 문제점을 살펴 정확한 유물 출토위치와 관 안장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목관의 안장방법을 재검토하였다.
왕과 왕비의 관은 300kg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덤의 입구가 좁고, 연도와 묘실의 크기가 협소하므로 인력으로 무거운 관을 들어 왕릉 내에 안치하는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관은 시신이 안치된 관을 빈장지에서부터 운구하여 묘실에 안치하는 <운구식 관>이 아니라, 묘실 내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설치식 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운구를 위한 손잡이로 추정되었던 관고리가 실제 역할을 할 수 없으며, 두침과 족좌에 운구 시 진동에 대비한 고정 흔적이 없는 점, 좁은 실내에서 조립이 용이하도록 안쪽에 홈을 파고 모서리를 깎아 가공한 관재, 머리 부분에 타격흔적이 없는 관정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관 내부는 3개 공간으로 나뉘고 시신은 가운데, 부장품은 위, 아래 공간에 안치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령왕릉의 상장례는 중국의 유교적 상장례의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가 많았다. 하지만 무령왕릉 장례과정 중 목관의 안장방법을 검토한 결과 중국의 전통 상장례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확인된다. 묘실 내 미리 설치된 목관에 시신 안치, 관 내부 공간을 구획하여 가운데는 시신 안치공간으로, 머리 위와 아래는 부장공간으로 활용한 점 등은 백제의 전통적인 장례 방법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가 중국 상장의례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나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묘제의 변화가 상장례의 변화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향후 백제 상장례에 대한 연구는 묘제의 변화와 장례 방식의 변화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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