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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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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Characteristics of Shinraehanye and Goguryo’s Border Defense Facilities South of Gyeonggi

심정현 ( Sim Jeong Hyeon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161-193(33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84.6


목차

Ⅰ. 머리말
Ⅱ. 신래한예 차출 배경과 한강유역 지배방식
Ⅲ. 경기 이남 고구려 관방시설의 설치 목적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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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吾慮舊民轉當羸劣”을 이유로 장수왕에게 守墓人을 略來韓穢로 교체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慮其不知法則”을 이유로 守墓人을 전면 교체하지 않았고,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舊民을 대상으로 守墓 관련 제도가 제정이 되어있는 점, 舊民이 羸劣될 수 있는 점, 略來韓穢가 法則을 모르는 점에 대해서 당시 광개토왕, 장수왕은 인지하고 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은 敎言을 하여 守墓人을 교체하고자 하였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의중을 알면서도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이는 守墓人 구성에 대한 두 왕의 입장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장수왕은 略來韓穢가 아닌 舊民과 新來韓穢로 守墓人을 구성함으로써 광개토왕의 敎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장수왕은 新來韓穢라는 복속 지역의 지방민을 守墓人으로 차출하였다. 이러한 新來韓穢 차출지를 통해 당시 고구려 남방의 지방행정단위를 알 수 있다. 新來韓穢 차출지는 대부분 城 단위이었고, 또한 영락 6년에 정복된 백제 城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는 백제 城을 기반으로 한 지배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러한 지배방식 틀에서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실 월평동 유적ㆍ남성골 산성, 경기도에 소재한 도기동 산성은 백제 방면으로 뻗어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475년 漢城 함락 이후 고구려가 대전까지 진출ㆍ점유했다는 견해, 청원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남성골 산성을 축조ㆍ사용했다는 견해, 안장왕 친정을 계기로 대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백제의 대응, 백제ㆍ신라의 협력에 장기간 버텨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漢城 함락, 문주왕 피살, 재위 3년 만에 사망하는 삼근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미호천 유역을 잠식한 고구려 군의 주둔소로 여겨 진다. 이후 동성왕 재임 기간 내에 관방시설은 퇴진됐을 것이며, 안성천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라고 추정하였다.
King Gwanggaeto ordered King Jangsoo to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with Yakraehanye due to the “吾慮舊民轉當羸劣”. King Jangsoo did not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completely on due to the “慮其不知法則”. Both kings might well know that the royal tomb management system had been well established, that the old people might be weakened and that Yakraehanye did not welll know about the rules. Nevertheless, King Gwanggaeto attempted to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by means of the order, while King Jangsoo re-used the old people, although he knew King Gwanggaeto’s intention. In short, the two kings had different positions as far as the royal tomb managers were concerned. After all, King Jangsoo organized the royal tomb managers with the old people and Shinraehanye, not Yakraehanye, not following his preceding king’s order completely.
King Jangsoo drafted the conquered local people called 'Shinraehanye' for the royal king tomb managers. Based on the regions where they were drafted, we may well know about the administrative units in the southern districts of Goguryo. Shinraehanye people were drafted based on the units of Baekje castles that had been occupied at the 6th year of Youngrak. Hence, it is deemed that Goguryo ruled the old Baekje territory south of Han River based on the castles.
Wolpyeongdong remain, Namseonggol fortress and Dogidong fortress located m Gyeonggi-do were located uniquely towards Baekje. After AD 475 when Hanseong was fell, it is argued that Goguryo would advance even to Daejeon or that it advanced to Cheongwon region to build and use Namseonggol fortress temporarily, or that King Anjang personally advanced to Daejeon. The researcherjudges that the defense facilities south of Gyeonggi district could not long be defended against Baekje or combined forces of Baekje and Shilla. All in all, as well seen in collapse of Hanseong castle, murder of King Moonju and death of King Samgeun only 3 years after his enthronement, it is estimated that Goguryo would occupy the area around Miho River. Later, during King Dongseong's reign, Goguryo’s defense facilities would be withdrawn, and thus, the basin of Anseong River would be the border between Goguryo and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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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900-00082963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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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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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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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 시기와 그 과정

저자 : 조진선 ( Cho Jins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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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역은 마한 소국 중 하나인 일난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며, 백제 시기에는 월나군, 고미현, 아로곡현, 반나부리현 등이 설치되어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은 인구의 집중과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의 형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암지역은 기원전 8~4세기경의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는데, 고고학적으로는 송국리형 주거지와 1,399기에 이르는 지석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암지역으로 유입된 새로운 인구집단은 지석묘의 형식과 분포상태로 보아 탐진강유역(장흥군 유치면 일대)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된 점이다. 전쟁인류학적으로 보면, 평등한 부족사회와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는 전쟁 양상이 서로 달라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조합도 다르다.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영암지역의 무기조합은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석검)여서 부족사회의 모습을 보이지만, 초기철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는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여서 군장사회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로 보아 영암지역은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집중되기 시작한 인구를 바탕으로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되면서 군장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 소국은 이러한 군장사회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Yeongam is a favorable location at which the formation of Mahan statelets can be studied. Yeongam witnessed a period of population aggregation in the middle of bronze age from ca. 8th to 4th centuries BC, as indicated by the appearance of Songguk-ri type settlements and 1,399 dolmens. These dolmens in Yeongam and the surrounding area suggest that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e new population influx was from the Tam-jin River basin (Yuchi-myeon region).
From a war anthropological point of view, an egalitarian tribal society and a hierarchical chiefdom society where coercive power in infested in their leaders have different weaponry assemblages due to their divergent warring patterns. Yeongam in the middle bronze age appeared to be an egalitarian tribal society since the weaponry of this period consisted of ranged projectile weapons (such as arrowheads, and melee hilt weapons (such as stone daggers). On the contrary, chiefdom society aspects indicated by a different weaponry assemblage that consisted of ranged projectile weapons, melee hilt weapons, and melee pole weapons (such as bronze spear and bronze dagger-axe) are observed in the slender bronze age dagger culture during the early iron age at Yeongam.
Judging by the changes in weaponry assemblages, it is highly likely that Yeongam began to become a chiefdom society as coercive power emerged, which was given rise by the growth of the population since the middle bronze age. The Mahan statelets is understood to have historically recorded this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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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완도 법화사지의 성격에 대한 신고찰-고려 후기의 항몽(抗蒙)과 백련결사(白蓮結社), 그리고 송징(宋徵)과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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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완도의 장보고 중심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고려 후기 완도 법화사지의 역사적 현황을 고고 자료, 문헌 자료, 설화 자료의 검토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는 완도 법화사가 12세기 초에 재건되었고, 1243년에 완도를 '거점 섬'으로 지정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243년 당시 고려의 최이정권은 진도의 용장성에 도성에 버금가는 전략시설을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완도와 압해도 등의 주요 섬을 연결하는 서남해지역 '거점 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1247년에 백련결사의 2대 사주였던 천인과 그의 도반인천책 등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거점 섬' 완도의 전략시설이 조성된 법화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고려의 官人 이영이 유배형을 당하여 완도로 왔고, 이영의 작은아버지 승려 혜일도 완도에 들어왔다. 이는 '거점 섬'으로 지정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이 조성된 직후의 일로서, 당시 완도 법화사가 항몽의 공동체이자 법화신앙의 공동체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완도의 설화적 인물 송징은 완도에서 명멸해간 민중영웅들을 다면적으로 대변하는 복합적 캐릭터이다. 따라서 역사화 과정에서 송징이 때로는 장보고로 치환되기도 하고, 때로는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되기도 하는 것은 나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법화사지 발굴에서 12~13세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됨에 따라 송징을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is thesis examines the historical status of Wando Beophwasa Temple Site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rough a review of archaeological data, literature data, and narrative data in order to reflect on Wando's perception of Jang Bogo-centered history.
The letter inscribed tile excavated from Beophwasa Temple Site shows the possibility that Wando Beophwasa Temple was rebuilt in the early 12th century, and Wando was designated as a “hub island” in 1243 and strategic facilities were built in Beophwasa Temple. In 1243, the Choi Yi regime of Goryeo established a strategic facility comparable to that of the capital city in Yongjang-castle, Jindo, and built a “hub island network” in the southwest sea region that connects major islands such as Wando and Abhaedo.
According to the literature data, in 1247, Cheonin, the second boss of the Baeknyeongyeolsa, and his religious friend, Cheonchaek, entered Beophwasa Temple, where strategic facilities of Wando, a “hub island,” were built to avoid Mongolian invasion. And around that time, Lee Young, a Goryeo official, was exiled and came to Wando, and Lee Young's uncle, Monk Hyeil, also entered Wando. It was immediately after it was designated as a “hub island” and a strategic facility was established in Beophwasa Temple. At that time, it shows that Wando Beophwasa Temple functioned as a community of anti-Mogolia and a community of Beophwa faith.
Song Jing, a folktale character in Wando, is a complex character that represents the folk heroes who have been wiped out in Wando in multiple ways. Therefore, in the process of historicalization, it can be said that it is reasonable that Songjing is sometimes replaced by Jang Bogo, or sometimes replaced by Sambyulcho's commander. In that context, it can be understood that as relics from the 12th to 13th centuries have been intensively excavated from the excavation of the Beophwasa Temple Site, several attempts to replace Songjing with a commander of Sambyeolcho are tak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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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산보의 학문과 사상

저자 : 고영진 ( Koh Young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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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는 16세기 전반 대표적인 호남사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5살 때인 1517년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나 2년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이 賜死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자 통분하며 낙향하여 무등산 아래 창암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소쇄원을 경영하고 평생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
양산보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먼저 至治主義의 구현을 들 수 있다. 그는 스승인 조광조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의 학문은 『소학』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四書 중에서는 『대학』과 『중용』을, 五經 중에서는 『주역』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도연명과 주돈이를 흠모해 서재에 도연명의 「歸去來辭」와 「五柳先生傳」, 주돈이의 「太極圖」, 「通書」, 「愛蓮說」 등을 두고 가까이 하였다.
양산보는 『소학』의 실천에 힘썼으며 「孝賦」와 「愛日歌」등을 저술하고 소쇄원에 愛陽壇을 쌓는 등 효를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의 『소학』과 효 중시 사상은 家學으로 전해 내려져 갔다.
그는 스승의 죽음과 개혁의 실패를 보고 좌절하기도 하였지만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 스승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지치를 자신의 주변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사회에까지 넓혀가고 자연 속에서까지 구현하려고 하였다. 『소학』과 효의 실천, 의리의 강조, 소쇄원의 건설이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양산보의 또다른 사상적 특징으로는 天人合一論을 들 수 있다. 양산보는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학적 세계관과 우주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북송성리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주돈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천인합일론에 기반하고 있다.
양산보가 흠모했던 또 한 명의 인물은 도연명이다. 그는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는데, 道家的 隱逸之士보다는 엄격한 出處觀을 가진 儒家的 處士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은거하였지만 세상과 등진 것은 아니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의식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의 시문은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 바탕에는 천인합일론에 입각한 物我一體의 사상이 있었다.
양산보는 스승과 자신이 꿈꿨던 이상사회인 지치를 자연에 구현한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도 소쇄옹으로 하였다. 그러나 소쇄는 단순한 쇄락으로서의 내면적 정신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쇄락의 기상을 의미한 강한 실천지향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구체적 형용이 광풍제월이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도연명과 주돈이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소쇄원을 소쇄라는 문학적 기풍과 광풍제월이라는 기상의 결합이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건축물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천인합일,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사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조광조의 사상과 이기심성론 중심의 주자성리학의 중간 단계, 즉 성리학적 우주론 중심의 북송성리학과 친연성이 있었지 않나 생각되며 호남유학사에서는 송순계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소쇄원이 그들 사이의 학문 교류의 장이 되면서 송순계열의 학문과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양산보는 소쇄원을 중심으로 송순, 임억령, 김윤제,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 많은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활발한 문학 교류를 하였다. 당시 호남지역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최고 수준이었는데 양산보와 소쇄원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Yang San-Bo was one of the typical Honam sarim. He entered the Jo Gwang-Jo's school in 15 years old and studied. But his teacher and many Literatis were executed or exiled in the Purge of 1959(kimyo sahwa), he went back home and built Soswaewon(瀟灑園) in Changamchon of Changpyeong province. He lived there until he was dead.
The first characteristic of Yang San-Bo's thoughts is the realization of Ideal politics and world. He succeeded to Jo Gwang-Jo's thoughts faithfully. His Study was based on 『Sohak(小學)』 and put emphasis on 『Book of Changes(周易)』. He also respected Tao Yuanming(陶淵明) and Zhou Dunyi(周敦頥) and put books of these two men.
Yang San-Bo made effort to realize the Ideal politics and world from himself to a family, socity and nature. The practice of 『Sohak』 and filial duty(孝), a emphasis of royalty, building of Soswaewon were a evidence of this.
The another characteristic of Yang San-Bo's thought is the theory of Unification of heaven and human. He has deep knowledge of 『Book of Changes』 and was concerned about the world view and the universal theory of Neo-Confucianism.
The study and thoughts of Yang San-Bo is located between Jo Gwang-Jo's thoughts and Lichi theory(理氣論) of Neo-Confucianism, in other words Neo-Confucianism of North Song(北宋性理學).
Futhermore Yang San-Bo contributed a development of Song Sun's school and he with a activity in Soswaewo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area of literature of Honam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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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황진(黃進) 추서(追敍)와 17세기 기억의 형성

저자 : 김한신 ( Kim Hansh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4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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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黃進은 17세기 이후의 조선사회에서 전란 초반의 전황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임진전쟁 발발 직후 호남 방어에 전력을 다했으며, 충청병사에 승진된 이후 활동범위를 확대하여 삼남의 보전에 초점을 맞추어 임무를 수행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었고, 황진은 다른 군·민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했다. 조선 조정으로 전달된 보고에서 황진이 중과부적임에도 '力戰'하다 전사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정에서는 서둘러 황진 등 전사자에게 상을 내리고 추증했다. 황진의 공훈은 당대를 넘어 17세기 이후 사대부 사이에서 기억되고 기록으로 전승되었다. 황진의 기억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황진이 후손들 사이에서만 顯彰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 그의 기록이 수정, 보완을 거치며 당대를 설명하는 敍事 중 일부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황진의 史實은 私撰記錄과 官撰史書에서 병행 수록되어, 그의 면모와 전공을 재조명하는 가운데 당대사의 실상이 복원될 수 있었다.


Hwang Jin(黃進) can be remembered as one of the most well-known figures who died as a war hero in the second Jinju Fortress battle in June 1593. During the Joseon period in the seventeenth century, people certainly referred to him whenever they discussed the early stages of the Imjin War. Right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Hwang Jin did his utmost to defend Jeolla(全羅) and he was later promoted as the Provincial Army Commander of Chungcheong(忠淸兵使) to focus on preserving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 Joseon, namely, Chungcheong, Kyungsang(慶尙), and Jeolla. Eventually, in late June 1593, when the second Jinju Fortress battle began, Hwang Jin was killed while fighting bravely with his troops and the people of the castle against the Japanese army. According to the reports sent to the Joseon court Hwang Jin “fought valiantly” until the end(力戰) despite facing an overwhelming number of the enemies. The Joseon court immediately conferred prizes and granted posthumous honours to Hwang Jin and his colleagues. Hwang Jin's meritorious service throughout the war was remembered long after his death and was recorded by some Confucians, the upper class of Joseon since the seventeenth century. Remembering Hwang Jin was crucial not just for commemorating him among his descendants but also for constructing a part of the entire narrative to explain the Imjin Wartime by famous Confucians later on. The historical facts about Hwang Jin were documented in both private and official history, which led to the restoration of the realities surrounding the Imjin War by shedding light on his personality and devotion to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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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해임과 사탕무당제조사업권 추구

저자 : 김희연 ( Kim Hee 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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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해임되는 과정과 그 가운데 알렌이 획득하려 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검토했다. 기존 연구는 알렌의 해임 배경에 대해 그가 루스벨트 정부의 친일, 반러 정책에 반박하고 친러, 반일, 친한 정책을 개진했기 때문이라 해석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 입장에서 알렌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 가지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알렌이 해임 전후로 추진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이때 그의 관심은 한국의 독립이 아닌 자국 권익과 개인적 실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알렌이 공사에서 경질되는 배경을 자세히 검토했다. 알렌은 자신이 친러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알렌은 일본측에 협조적으로 움직였고 한국의 보호국화를 예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해임되었고 알렌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기에 처했다. 이는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모건이 제안한 사탕무당제조사업의 내용과 알렌이 마련한 계약안 내용을 분석했다. 이때 알렌 계약안은 종전에 비해 혜택이 축소되었을지언정 이권획득자를 적극 배려한 것으로, 그가 한국에서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충분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동시에 일본의 한국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획득하고자 취한 대일협조적 행보들을 살펴보고, 그가 한국을 떠나는 과정을 살폈다. 알렌은 이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친화적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개인에 전매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알렌의 시도는 결국 무산되었다. 귀국 후 서한이나 강연에서 알렌은 그러한 자신의 행적은 모조리 소거하고 자국 정부의 공사관 조기철수를 비판했다.
알렌의 해임과 그 과정에서 이뤄진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알렌은 자신의 안위와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주의 노선을 철저하게 따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세계정세와 관련한 알렌의 인식과 태도 변화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is study sheds light on the process by which U.S. Minister Horace N. Allen was dismissed and the concession for manufacturing beet sugar which Allen attempted to secure. Previous studies interpreted that Allen was dismissed because he refuted the Roosevelt administration's pro-Japanese and anti-Russian policies and advocated pro-Russia, anti-Japanese, and pro-Korean policies. This has been one of the grounds for positively evaluating Allen's moves from the Korean standpoint. Allen's attempt to secure beet sugar concession after his dismissal suggests that his interest at that time did not lie in the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Korea, but in the American interests and his own personal interests.
This study clarified the backgrounds of Allen's dismissal from the U.S. Minister to Korea. Allen continued to strive to dispel the perception that he was a pro-Russian. He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authorities and predicted Korea's doom to fall into a Japanese protectorate. Nevertheless, Allen was dismissed and he was put in crisis both politically and economically. This situation rendered Allen deeply interested in beet sugar concession.
This study also analyzed the contents of Morgan's proposal and those of Allen's draft contract. In the latter, the benefits have been reduced compared to previous concessions. Still, Allen's draft contract was favorable to the concessionaire. It fully reflected the trial and error he had experienced while promoting various projects in Korea. At the same time, it took the situation into account, where Japan's control over Korea was expected.
Lastly, this study examined Allen's Japan-friendly moves in order to acquire beet sugar concession and explained his leaving from Korea and various remarks after the scheme was frustrated. Allen actively showed friendly attitude towards Japan. Nevertheless, Allen's attempt was frustrated as the Japanese government eventually decided not to grant a concession to any individual. In letters to Koreans or lectures after returning home, Allen eliminated all such pro-Japanese remarks and actions and criticized the U.S. government for the quick withdrawal of her legation.
Allen's dismissal and attempt to secure beet sugar concession exhibit that Allen was a realist who thoroughly pursued his own safety and interests. Changes in Allen's perception and attitude towards both Korean affairs and the international affairs should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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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저자 : 이승일 ( Lee Seung I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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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하의 대만과 조선은 일본을 통해서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이 지역에는 전문 재판기관이 설치되었고, 법률 전문가가 판사와 검사에 임용되었다. 더 나아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을 분리하였고 소송절차법도 만들어졌다. 이렇듯, 대만과 조선은 모두 일본의 사법제도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는 대만의 법원조직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대만의 사법제도,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대만의 사법제도의 특징을 연구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를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Under the colonial rule, Taiwan and Joseon introduced modern judicial system through Japan; with the invasion of Japanese imperialism, professional justice agencies were established in the area, and legal experts were appointed to judges and prosecutors. Furthermore, civil and criminal lawsuits were separated and the Litigation Procedure Act was created. As such, Taiwan and Joseon were both strongly influenced by the Japanese judicial system. In particular, the judicial system of colonial Joseon was created by referring to the court organization of Taiwan, so research on it is necessary. In this study, the judicial system and lawyers of Taiwan were analyzed. Studying the characteristics of Taiwan's judicial system is thought to be useful in understanding the judicial system of colonial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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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 - 오월의 기록>에 담긴 5·18 민주화운동 영상기록물 연구

저자 : 김정아 ( Kim Jung 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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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영상기록물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87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 자료다. 영상기록물이 역사 자료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출처와 제작 배경, 내용을 밝히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오월의 기록>은 80년 5월 광주를 기록한 국내외 영상의 출처, 시간과 장소를 면밀히 파악하여 그날의 진실에 가까운 '5·18민주화운동 영상일지'를 만든다는 기획 의도로 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수집된 5·18 영상기록물의 생산처와 소장처, 제작 배경과 일시, 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따라 영상기록물의 내용을 문서 자료, 사진 자료와 교차 분석함으로써 영상기록물이 가진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The 5·18 video record is historical sources that informed the truth of the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as a trigger for the 1987 democratization movement. In order for video records to serve as historical sources, basic work that reveals the exact source, production background, and contents must be preceded.
The KBS documentary “Video Archive-10 Days in May” was produced with the intention of creating a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Video journal' that allows users to access the truth of the day by checking the exact time and place as much as possible.
In this paper, the production and collection of 5·18 video records collected during the program production process, the background, date of production and contents are summarized. And according to the flow of the documentary, the contents of the video record were cross-analyzed with document data and photo data to reveal historical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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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상왕(商王)의 출정(出征)과 '방인(方人)'의 여정

저자 : 이성원 ( Lee Sung W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7-28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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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는 공방, 토방, 강방, 주방, 인방 등 중원 외곽의 강력한 방국들과 주기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하였고 필요한 경우 상왕은 군사적 출정을 하였다. 이들 지역은 상읍으로부터 500~800킬로미터 거리였기에 이러한 군사적 출정을 다녀오려면 두 달 혹은 석 달이 시간이 소요되는 장도의 원정이었다. 상왕의 출행은 정례적인 卜旬 복사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일간격으로 행해지는 점복을 기록한 복순 복사에서 상왕이 상읍 이외의 지역에 머무르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소재지를 기록함으로써 상왕의 이동 경로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복순 복사에 의하면 상대 후기 상왕이 동남 회하유역으로 잦은 원정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경유지에서 복순 복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이라도 상읍의 출입에는 방위, 택월, 택일 등의 신탁이 허락해야 출입 할 수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생포된 방인들은 상왕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여정을 보여준다. 특히 강방의 강족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검토하면, 그들은 전쟁에서 생포되어 상읍까지 수백 킬로의 험난한 장도를 감내하며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비록 살아서 상읍에 도착하여도 그들 대부분은 벌제의 식을 통해 제사의식의 희생이 되었다. 즉 그들은 고향을 떠나 와서 이승이 아닌 저 피안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 외의 방인들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훼손되는 육형을 받아야 했고, 남은 여생동안 불구가 되어 내밀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According to oracle bone scripts, Shang dynasty often waged war against strong nations around central China, called Fang[方], for examples Gong Fang [方], Tu Fang [土方], Qiang Fang [羌方], Zhou Fang[周方], Ren Fang[人方], etc. Sometimes the king of Shang dynasty went to war in person. It was a long expedition to take two or three months at least because it was five or eight hundred kilometers from those nations to Shang. The fact that the king made a journey can be found in the augural scripts which had been written after an fortune forecast for coming ten days, called Bu Xun [卜旬]. Wherever the king might be, he had to perform 'the ten days forecast'. So when he performed the forecast outside the capital city, he had to write where he was on an oracle bone. According to those scripts we can find the itinerary of the king, especially outside the capital city. It was very important for even king to decide which direction, which month, and which day depended on oracle bone forecast in going out or entering the capital city.
On the other hand, compared to that of king, the itinerary of foreigners who had been captured alive in the battle with Shang showed a dramatic contrast. Captured in the battle, they were escorted to Shang hundreds of kilometers away. It was for the first time for them to make a long journey, though it must be a terribly tortured journey to death. Even if they were alive after a tortured journey, they had to meet the more tragic fate. Most of them had to be decapitated as a sacrifice for natural gods and ancestral gods in the ritual ceremony of Shang. A human sacrifice was usual and culminating in Shang dynasty. If they were alive, the rest of them had to be punished to cut the part of their body, for examples a penis, a leg, a nose, skins, etc, and had to serve a kind of shamanistic j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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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송시기 전쟁이 화폐에 끼친 영향 -단평입락(端平入洛) 시기 회자(會子)의 발행량을 중심으로-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0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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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시기의 재정은 赤字였고 이러한 적자재정의 主要 原因은 막대한 軍費 지출에 있었다. 즉 南宋 건립이후 金과의 계속 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량의 軍隊를 유지해야만 했었고 이것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남송조정이 적자재정을 해결하고자 하였다면 우선 군비의 지출을 줄이고 세금 수입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은 남송조의 실제정황과는 符合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송조정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쉬운 방법은 紙幣를 대량으로 발행하는 것이다.
남송과 金 間의 계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가 필요하자 회자의 발행량도 점점 증가하여 開禧北伐 後 회자의 발행량은 1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비록 회자의 발행량이 증가하였다 할지라도 회자와 교환하는 金, 銀, 銅錢 등의 準備金이 충분하였다면 회자의 가치하락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234년(端平 元)에 남송은 蒙古와 연합하여 金을 멸망시키고 승리하였지만 몽고로부터 전쟁 승리에 대한 보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金을 멸망시킨 후에 남송조정은 三京收復을 목적으로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하그렇지만 이 전쟁의 실패로 남송과 몽고는 전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로 얻은 것은 없다하여도 조금이나마 재정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시간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理宗 친정초기에 진행하였던 두 번의 戰役은 재정에 큰 손실을 주었다. 端平入洛 이후에 남송조정은 이전보다 많은 군비를 지출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결국은 회자의 발행량이 4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회자가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사회경제활동에 큰 문제였고 남송의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端平入洛 後 會子의 가치가 하락하는 추세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하였다. 남송과 몽고가 연합하여 金을 멸한 이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宋과 蒙古는 平和 時期였다. 하지만 南宋이 三京을 수복하기 위하여 蒙古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端平入洛의 결과는 매우 비참하여 이후 남송의 재정 적자는 더욱 악화되었고 어쩔 수 없이 會子의 發行量을 늘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端平入洛은 宋과 蒙古의 全面 戰爭의 도화선이 되었다. 端平入洛은 晩宋時期기에 會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The Southern Song dynasty had to cope with chronic financial loss. The main cause of the financial loss was huge amount of military spending. The Southern Song government had to maintain so many troops because of the perpetual war with the Jin dynasty[金]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It was a huge drain on the national finances. The Song's government should cut down their military spending and impose new taxes[賦稅 收入] for filling in the losses. But the policies did not fit in the situation of the Song dynasty. The Song's government adopted the easiest way, it was the issuing a large amount of paper money.
Because of the perpetual war with the Jin dynasty, the Song's government needed a huge amount of military spending and the amount of issuing Huizi for the war was constantly increased. After the campaign to retake the north in 1206[開禧北伐],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exceeded one hundred million min[緡]. In spite of the increasing of the amount of issuing Huizi, if the reserve for exchange like as gold, silver, bronze and so on was enough, the value of Huizi might not have been decreasing. In the first year of Duanping[端平 元年, 1234], the Song dynasty confederated with Mongol and destroyed the Jin dynasty. However, the Song dynasty didn't obtain any reward from Mongol. The Song dynasty again made preparations for a war to retake the three major cities[三京收復]. The campaign was failed and it led to the all-out war between the Song dynasty and Mongol. The Song's government lost the opportunity to recover the national finances.
In the early stage of military expedition[親政] of Emperor Lizong[理宗], the two military campaigns imposed a heavy burden on the national finances. After the Mongol invasion, the Song government had to expend more military spending than before. Finally,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exceeded four hundred million min. The depreciation of Huizi caused lots of socio-economic problems, it caused a burden on the national finances. And the fall in the value of Huizi became more serious than before.
After the collapse of the Jin dynasty, the Song dynasty and Mongol enjoyed a small period of peace and rest. But the Song dynasty again made the war with Mongol to retake the three major cities. As the result of the Mongol Invasion, the vicious circle that the growing the fiscal deficits of the Song dynasty led to the expansion of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reiterated. The Mongol invasion became a trigger to bring the all-out war between the Song dynasty and Mongol. Therefore, the Mongol invasion was the largest factor to affect Huizi in the late of the Song dynasty[晩宋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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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여성: 엠마 윌러드의 여성관과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

저자 : 김진아 ( Kim Geen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9-3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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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세기 여성 고등교육을 이끌어 갔던 엠마 윌러드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미국에서의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과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고등교육 1세대 여성들은 여성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여성 고등교육 확장을 주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 윌러드를 포함한 이 시대 여성들은 미국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활동으로 기억되는 참정권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해 왔고, 이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이들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여성사 연구 일체가 '영웅적 서사' 혹은 '비극적 서사'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통해 여성의 삶을 논의하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교육 활동이란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왔던 가정 안에서의 양육 활동을 가정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교육 활동을 통해 여성의 공적 활동을 확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에 엠마 윌러드의 교육관이나 정치관, 여성관, 그리고 이와 관련한 각종 활동의 한계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초지일관 여성의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공화국의 여성 시민을 성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In this paper, I discussed the expansions of women's higher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its meanings in women's history. For this work, I particularly investigated Emma Hart Willard's educational experiences in leading women's higher education. The first generation of women, who received higher education in the 19th century, became educational workers and led educational reforms after graduating from Female Seminaries or Academies. Despite such activities, their educational achievements were not well-noted, as they had conservative viewpoints of the suffrage movements, which have been remembered as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activities in American women's history. However, negative viewpoints toward Emma Hart Willard were grounded in the polarized frameworks of women's histories: Heroic narrative versus Tragic narrative. In this paper, I argued that educational activities were appropriate ways to prolong traditional domestic works; and these were also good strategies for women to participate in public work. Rather than pointing out the limitations of her perspectives on women, education, and politics, I highlighted the fact that Emma Hart Willard wanted to grow female citizens of the early Republic by focusing on particular areas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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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세기 초 만주(滿洲) 한인(韓人)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

저자 : 박정현 ( Park¸ Junghy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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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는 20세기 초 간도협약과 만몽조약 전후 시기 만주 한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연구했다. 1915년 滿蒙條約 체결 이후 중국과 일본은 만주에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했다. 중국과 일본은 크게 세 부분에서 서로 충돌했다. 1) 한인의 국적문제와 중국 귀화문제, 2) 한인에 대한 재판관할권 적용 범위, 3) 간도지역에 토지 商租權 적용문제였다.
중국은 자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외국인인 한인을 통제해야 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면서 한인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래서 중국정부의 한인政策은 일본과 외교 마찰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적, 정책적 수단으로 단속했다. 이러한 방식은 눈에 띄는 차별이나 압력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일상적이었다. 만주 현지에서는 지방관리들과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압박이 현실로 나타났다. 만주 한인문제는 만주사변 전까지 한인과 중국인 사이의 최대 갈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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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의 인식변화 추이 - 「인민일보(人民日報)」와 「광명일보(光明日報)」를 중심으로 -

저자 : 송한용 ( Song Han 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6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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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정부 및 중국공산당의 인식을 「인민일보」와 「광명일보」의 기사를 통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몇가지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시기적으로 신중국 성립부터 중일 국교가 정상화되는 시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익화 문제와 중일 간 센카쿠/댜오위다오의 분쟁이 본격화하기 이전 시기, 일본의 우익화가 강화되고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 실시되는 시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중국의 만주사변 인식은 역사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나 필요성 그리고 국제적 상황 특히 중ㆍ일 간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있고, 기념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우경화가 강화되고, 중국이 국력에 자신감을 회복한 이후, 중국은 애국주의교육을 강조하면서 만주사변을 애국주의의 중요한 교재로 삼았다. 또한 만주사변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을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맹세의 도구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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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베 고보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에 나타난 일본과 만주 : 경계선 위의 짐승들은 연대할 수 있는가

저자 : 심정명 ( Sim Jeongm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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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주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는 주로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고생담에 기울어 있거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채 만주에 대한 향수를 그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귀환 체험을 다룬 방대한 수기들은 귀환자 개개인의 피해와 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 논문에서는 만주국의 붕괴와 함께 홀로 남겨져 일본을 향해 가는 소년 규조를 주인공으로 한 아베고보의 소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를 분석하면서, 귀환을 다룬 문학이 이 같은 내셔널한 서사에 자그마한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본 논문 또한 이작품이 일본인인 규조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고난을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귀환문학이라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단, 이때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 목적지로 설정된 '일본'이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 가이다. 규조에게 일본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상상한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을 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규정을 계속한다. 이를 통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그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주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그때그때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바꾸어 나가는 고세키토라는 인물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이러한 자의적 특징들은 민족들 간의 지배ㆍ피지배 관계와도 겹쳐져 있다. 즉 이 작품에서 규조가 갈구하는 일본이란 만주의 황야나 규조와 고 같은 '짐승'들과 대비되는 문명이자 만주국이 붕괴하기 전의 일상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이상적인 고향으로서의 일본은 존재하지 않고, 경계선상에서 '짐승'으로 살아가는 규조와 고는 일본으로 가는 밀수선을 타고서도 결국 일본에 상륙하지 못한다. 본 논문에서는 또한 이 작품이 규조와 고의 관계나 규조와 중국인소년의 관계를 통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벗어나서 연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였다. 규조와 고는 선양에 도착하기까지 기묘한 동행을 계속하고, 그것은 단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제목에 있듯 '고향'을 향하는 복수형의 '짐승들'에 주목할 때, 이 작품에서는 규조의 실패한 관계 맺기를 통해 귀환이라는 경험을 내셔널한 서사로 회수하지 않는 귀환문학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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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수 삼고리고분군 출토 토기의 변천양상과 그 의미

저자 : 박성배 ( Park¸ Seong-b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9-12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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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삼고리고분군은 1995년 처음 조사된 이후 장수지역을 대표하는 가야유적으로 동촌리ㆍ삼봉리고분군과 더불어 큰 틀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삼고리고분군 묘제 및 출토유물에 대한 세세한 변천 과정과 특징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현재까지 조사된 것 가운데 보고서가 간행된 유구를 중심으로 부장유물의 특징과 변천양상을 파악하였다. 고분 출토유물은 크게 재지계, 대가야계, 백제계, 신라계로 구분되어진다. 대가야계 토기를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여 유적의 상대편년과 특징 그 의미를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분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5세기 전후로 목곽묘 단계가 확인되며, 이후 석곽묘 단계로 발전되다가 6세기 중ㆍ후엽부터는 토광묘 단계로 변화한다.
목곽묘 단계는 비교적 이른 시기 발형기대와 유개식 장경호, 고배 등이 확인되어 장수지역 가야문화의 시작이 한 단계 앞서게 되었다. 수혈식 석곽묘 단계에서는 유입된 대가야토기를 재지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충실히 모방한 토기류를 생산한 것과 재지계+대가야계 양식이 결합한 토기의 생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가야지역의 중심지(고령)와 함께 주변지역에 위치한 가야세력(함양ㆍ산청ㆍ합천) 등과 교류 양상이 있었음을 파악하였다. 토광묘 단계에서 백제화된 묘제의 장축방향과 부장유물을 간소화하는 박장 양상이 파악된다.
이러한 변천과정은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다시 석실분으로 변화하는 일반적인 가야지역 고분 문화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세기 중ㆍ후엽에 석곽묘 이전 단계에 삼고리세력이 사용한 토광묘(목곽묘)다 다시 주 묘제로 등장하는 특이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수 삼고리고분군은 5세기~6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조영되었고, 무덤과 출토유물 등의 변천 과정을 통해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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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구려의 건국과 현도군

저자 : 김성한 ( Kim Sung-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5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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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 武帝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沃沮城을 치소로 하여 玄菟郡을 설치하고, (제1현도군), 沃沮와 濊貊 지역을 그 영역으로 했다. 기원전 75년 직전 遼東의 烏桓이 반란을 일으키자, 前漢은 三輔 및 郡國의 불량소년과 죄지은 관리를 징발하여 遼東에 주둔하게 하고 遼東에 玄菟城을 쌓고 현도군을 옮겨와 (제2현도군) 烏桓의 침입에 대비했다.
제2현도군은 토착세력인 句驪가 위치한 지역에 자리했기 때문에 句驪의 이름을 따서 그 지역을 句驪縣이라 하고 郡의 治所로 삼았다. 토착세력인 句驪는 前 漢으로부터 처음에는 縣級인 '侯'로 대우받았다가, 桓帝 때 烏桓이 투항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桓帝의 뒤를 이은 元帝 建昭 2년(B.C. 37)에 郡級인 '王'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서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것으로 표방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句驪는 前漢으로부터 '高'를 姓으로 사여 받아 국호를 句驪에서 高句驪로 변경했을 것이며, 前漢은 高句驪王에게 그 신분에 걸맞게 鼓吹伎人과 朝服을 사여했던 것이다. 이때 玄菟郡의 句驪縣도 高句 驪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전한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漢書』 地理志에 高句驪로 기재되었던 것이다.
그 뒤 고구려는 新나라를 건국한 王莽이 자신을 징발하여 匈奴를 정벌하려 하자, 기원후 12년 무렵 이에 반항하여 제2현도군의 경계를 벗어나 자립했다. 新나라의 뒤를 이은 後漢은 자립한 高句驪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王'의 호칭을 인정하고 제2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幘溝漊라는 작은 城을 쌓아 高句驪로 하여금 歲時에 朝服과 衣幘을 가져가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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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저자 : 심정현 ( Sim Jeong H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9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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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吾慮舊民轉當羸劣”을 이유로 장수왕에게 守墓人을 略來韓穢로 교체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慮其不知法則”을 이유로 守墓人을 전면 교체하지 않았고,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舊民을 대상으로 守墓 관련 제도가 제정이 되어있는 점, 舊民이 羸劣될 수 있는 점, 略來韓穢가 法則을 모르는 점에 대해서 당시 광개토왕, 장수왕은 인지하고 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은 敎言을 하여 守墓人을 교체하고자 하였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의중을 알면서도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이는 守墓人 구성에 대한 두 왕의 입장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장수왕은 略來韓穢가 아닌 舊民과 新來韓穢로 守墓人을 구성함으로써 광개토왕의 敎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장수왕은 新來韓穢라는 복속 지역의 지방민을 守墓人으로 차출하였다. 이러한 新來韓穢 차출지를 통해 당시 고구려 남방의 지방행정단위를 알 수 있다. 新來韓穢 차출지는 대부분 城 단위이었고, 또한 영락 6년에 정복된 백제 城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는 백제 城을 기반으로 한 지배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러한 지배방식 틀에서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실 월평동 유적ㆍ남성골 산성, 경기도에 소재한 도기동 산성은 백제 방면으로 뻗어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475년 漢城 함락 이후 고구려가 대전까지 진출ㆍ점유했다는 견해, 청원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남성골 산성을 축조ㆍ사용했다는 견해, 안장왕 친정을 계기로 대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백제의 대응, 백제ㆍ신라의 협력에 장기간 버텨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漢城 함락, 문주왕 피살, 재위 3년 만에 사망하는 삼근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미호천 유역을 잠식한 고구려 군의 주둔소로 여겨 진다. 이후 동성왕 재임 기간 내에 관방시설은 퇴진됐을 것이며, 안성천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라고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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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항의 『강감회요』 편찬과 사학사적 의의

저자 : 박인호 ( Park¸ In-h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5-22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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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은 명·청대에 『자치통감강목』의 체재를 본받아 여러 시대를 다루는 통사적 형태로 역사서를 만들면서 대중적 역사서의 서술 형태를 취한 책이다. 강항이 편찬한 『강감회요』는 『자치통감강목』의 미진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강지의『통감절요』와 유우익의 『서법』과 윤기신의 『발명』 등을 추가하여 종합한 우리나라에 희귀한 강감류 사서이다. 『강감회요』의 구성은 모두 17권으로 되어 있으며, 각 권의 대부분은 상, 하로 나누어져 있다.
『자치통감강목』은 『자치통감』의 정통 처리, 간지와 연기 표기, 시비와 득실, 관점자 서술, 도덕이나 덕치 서술 등에 오류가 많다고 생각한데서 편찬되었다. 『자치통감강목』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 『강감회요』는 이러한 『자치통감강목』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강감회요』가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제시하였던 서술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교조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강감회요』는 형식면에서는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강감의 형태를 가지면서도 강목에 대한 서법과 발명 주석서를 합한 형태로 편찬되었다. 사학사적으로 중국에서 강목에 대한 광범위한 회집에 들어가고 있는 시기에 발맞추어 16세기 조선에서 강항의 『강감회요』가 나온 것은 조선의 주자학적 역사학이 독자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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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글가사 「임계탄」을 통해 본 '신임계 대기근'

저자 : 김덕진 ( Kim Deok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5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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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1733년ㆍ신해ㆍ임자ㆍ계축ㆍ에 장흥에 대기근이 들었다. 이 실상을 장흥의 한 선비가 「임계탄」이란 가사로 읊었다. 원인은 가뭄, 홍수, 해일, 병충해였다. 이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사람이 죽고 마을이 텅 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환곡ㆍ군포 등의 세금 납부를 독촉하였고, 재결을 통해 드러났듯이 재해지역에 대한 재정지원도 게을리 하였다. 지방행정을 담당한 수령과 양반 및 향리들은 기아자 선발과 진휼곡 확보 등 진휼업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에 급급한데다 관리감독 기능마저 마비되어 총체적 문란이었다. 이 결과 절망적 상황과 인륜 부재 및 치안 위기까지 초래되었다. 이런 사실을 장흥에 살고 있는 한 선비가 가사, 시, 그림으로 남겼다. 목적은 무능과 부정으로 점철된 실상을 고발하여 재발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어 天時泰運의 세상을 다시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최종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창작품들의 최종 귀결처는 국정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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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후기 밀양변씨 의관 연구 - 효량공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훈평 ( Park Hun Pye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8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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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변씨 효량공파는 조선후기의 의학 관료를 구성하는 대표적 가계였다. 조사된 가계 내의 의관은 총 88명이였다. 본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도출해냈다.
첫째, 의관 가계로서 17세기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후반 이후19세기 후반까지 전성기로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효량공파 가계 내 의관은 변이근ㆍ변이형 형제가 처음이었다. 정조 순조 대에 활동한 의약동참의 변관해와 변지순은 숭록대부와 정헌대부가 되면서 의관 가계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하였다.
둘째, 사조 분석을 통해보면, 의관 가계로서의 세전 양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효량공파의 경우 사조 중에 역관이 많이 있기 때문인데, 효량공파는 조선후기 주요한 역관 가문의 하나로서 후손들이 의과에만 치중하지 않고 역과로도 출사하였다.
셋째, 대부분의 의학 관료는 삼의사에 속하였다. 최종 관력이 삼의사에 해당하는 이들은 총 86명으로 전체(88명)의 97.72%이다. 이는 가계 내 인물이 의학을 본업으로 할 경우 대부분 삼의사에서 근무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후기 의관이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다.
넷째, 내의원에서의 가계 위상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더 높아졌다. 효량공파 내의원 입사자는 19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변화된다. 주요한 입속방법이 19세기중후반 의약 동참의와 내침의에서 내의로 바뀐다. 내의원의 三廳이 모두 의술이 높은 이들이지만 삼청의 첫째는 내의라는 점에서 효량공파 출신들의 내의원 내위상이 더 높아졌다.
다섯째, 의학 관료는 19세기 전반 이후 의과 중심으로 배출되었다. 가계 내 양의사 입사자는 순조 때를 기점으로 하여 혜민서에서 전의감 중심으로 변화된다. 또한 내의는 의과 출신자여야 했으므로 전의감 중심으로의 관력자 변화와 내의중심으로의 내의원 입속과는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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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제강점기 나주협동상회의 설립과 운영

저자 : 한규무 ( Hah Kyu-m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1-30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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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협동상회는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1929년 4월 설립하고 6월 개점한 협동조합ㆍ소비조합의 성격이 섞인 상점이었으며 고권(股券)을 발행하고 회원제로 운영되었다. 이는 신간지회의 경제활동으로서 실제로 설립ㆍ운영된 흔치 않은 사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신간나주지회의 사업으로 출발했기에 일제의 탄압도 이어졌다. 상회장 김창용은 1930년, 이사장 양장주는 1931~1932년 일제에 검속되었고, 1930~1931년일제는 협동상회을 수색했다. 그럼에도 협동상회는 적어도 1937년까지는 주민들의 큰 호응과 가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38년 폐쇄되었다.
협동상회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7년 창립된 신간나주지회에서 이 상회를 설립하고 경영했는데, 각지의 신간지회 활동 중 이 같은 사례는 흔치 않다. 둘째, 나주에 진출한 일본인 상업자본과 맞서 조선인들의 호응을 받으며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셋째, 협동상회 건물은 나주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신간회 관련 사적 6개 중 하나라고 한다. 따라서 근대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도 크며, 그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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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명 최신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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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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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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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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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논집
79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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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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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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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학보
39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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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청계사학
23권 0호

문화재 과학기술
16권 1호

한국계보연구
11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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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학지
181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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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연구
41권 0호

KCI후보

청람사학
34권 0호

KCI등재 SCOUPUS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34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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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연구
116권 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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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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