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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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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Characteristics of Shinraehanye and Goguryo’s Border Defense Facilities South of Gyeonggi

심정현 ( Sim Jeong Hyeon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11월
  • : 161-193(33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84.6


목차

Ⅰ. 머리말
Ⅱ. 신래한예 차출 배경과 한강유역 지배방식
Ⅲ. 경기 이남 고구려 관방시설의 설치 목적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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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광개토왕은 “吾慮舊民轉當羸劣”을 이유로 장수왕에게 守墓人을 略來韓穢로 교체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慮其不知法則”을 이유로 守墓人을 전면 교체하지 않았고,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舊民을 대상으로 守墓 관련 제도가 제정이 되어있는 점, 舊民이 羸劣될 수 있는 점, 略來韓穢가 法則을 모르는 점에 대해서 당시 광개토왕, 장수왕은 인지하고 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은 敎言을 하여 守墓人을 교체하고자 하였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의중을 알면서도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이는 守墓人 구성에 대한 두 왕의 입장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장수왕은 略來韓穢가 아닌 舊民과 新來韓穢로 守墓人을 구성함으로써 광개토왕의 敎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장수왕은 新來韓穢라는 복속 지역의 지방민을 守墓人으로 차출하였다. 이러한 新來韓穢 차출지를 통해 당시 고구려 남방의 지방행정단위를 알 수 있다. 新來韓穢 차출지는 대부분 城 단위이었고, 또한 영락 6년에 정복된 백제 城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는 백제 城을 기반으로 한 지배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러한 지배방식 틀에서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실 월평동 유적ㆍ남성골 산성, 경기도에 소재한 도기동 산성은 백제 방면으로 뻗어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475년 漢城 함락 이후 고구려가 대전까지 진출ㆍ점유했다는 견해, 청원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남성골 산성을 축조ㆍ사용했다는 견해, 안장왕 친정을 계기로 대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백제의 대응, 백제ㆍ신라의 협력에 장기간 버텨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漢城 함락, 문주왕 피살, 재위 3년 만에 사망하는 삼근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미호천 유역을 잠식한 고구려 군의 주둔소로 여겨 진다. 이후 동성왕 재임 기간 내에 관방시설은 퇴진됐을 것이며, 안성천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라고 추정하였다.
King Gwanggaeto ordered King Jangsoo to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with Yakraehanye due to the “吾慮舊民轉當羸劣”. King Jangsoo did not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completely on due to the “慮其不知法則”. Both kings might well know that the royal tomb management system had been well established, that the old people might be weakened and that Yakraehanye did not welll know about the rules. Nevertheless, King Gwanggaeto attempted to replace the royal tomb managers by means of the order, while King Jangsoo re-used the old people, although he knew King Gwanggaeto’s intention. In short, the two kings had different positions as far as the royal tomb managers were concerned. After all, King Jangsoo organized the royal tomb managers with the old people and Shinraehanye, not Yakraehanye, not following his preceding king’s order completely.
King Jangsoo drafted the conquered local people called 'Shinraehanye' for the royal king tomb managers. Based on the regions where they were drafted, we may well know about the administrative units in the southern districts of Goguryo. Shinraehanye people were drafted based on the units of Baekje castles that had been occupied at the 6th year of Youngrak. Hence, it is deemed that Goguryo ruled the old Baekje territory south of Han River based on the castles.
Wolpyeongdong remain, Namseonggol fortress and Dogidong fortress located m Gyeonggi-do were located uniquely towards Baekje. After AD 475 when Hanseong was fell, it is argued that Goguryo would advance even to Daejeon or that it advanced to Cheongwon region to build and use Namseonggol fortress temporarily, or that King Anjang personally advanced to Daejeon. The researcherjudges that the defense facilities south of Gyeonggi district could not long be defended against Baekje or combined forces of Baekje and Shilla. All in all, as well seen in collapse of Hanseong castle, murder of King Moonju and death of King Samgeun only 3 years after his enthronement, it is estimated that Goguryo would occupy the area around Miho River. Later, during King Dongseong's reign, Goguryo’s defense facilities would be withdrawn, and thus, the basin of Anseong River would be the border between Goguryo and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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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900-00082963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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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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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라하대 원랑선사 대통의 위앙종 수용과 월광사 주석

저자 : 임평섭 ( Lim Pyeong-seob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4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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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하대에 활동한 선승인 원랑선사 대통(816~883)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대통은 신라 변방의 지방민이자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당나라에서 최신 선사상을 수용하여 명망을 얻었다. 대통이 교류하였던 낭혜 무염과 경문왕은 당대의 명사였으며, 그가 수행한 위앙종은 9세기 중반 당나라의 선종계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다. 그렇지만 대통에 관해서는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대통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핵심적인 사안을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대통의 생애는 크게 입당과 귀국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대통의 출신지와 함께 그가 출가한 이후 활동했던 지역에 대한 분석이다. 대통의 출신지인 통화부는 신라의 서북방 국경인 취성군이며, 그가 출가한 이후 활동한 단엄사는 지금의 철원 방면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로, 대통이 당나라에서 배웠던 위앙종의 사상적 특징과 관련한 내용이다. 위앙종의 수행 방법 가운데 대통은 특히 조사선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귀국 이후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은 월광사 주석과 함께 경문왕과의 관계이다. 계립령 북부 입구에 있는 월광사에 주석한 대통은 주변 지역의 교화에 힘을 쏟았다.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경문왕은 이러한 대통의 활동을 우대하였다. 대통에 관한 연구를 통해 9세기 신라 남종선의 조사선 수용 흐름과 함께 월광사가 가지는 시대적 의미 또한 살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This article mainly looks into the life and thoughts of Wollang-sonsa Dae-Tong who acted as a Zen monk in the late period of Silla. Even though Dae-Tong was born into a poor family as well as came from a frontier, He finally gained fame with a human network, even accepting the newest Zen thoughts from the Tang Dynasty. Nanghye muyom and King Kyongmun who made a relationship with Dae-Tong were famed people at the same time. Besides, Wiang-sect was the most popular Buddhist thought representing the Zen sect in the 9th century of the Tang Dynasty. However, it has been little research on him so far.
The article is supposed to consider three aspects to examine the life and thoughts of Dae-Tong. Firstly, It closely examines Dae-Tong's birthplace and some regions he was actively engaged after he became a Buddhist monk. Tonghwa-bu, for instance, was placed at the northwestern frontier of Silla which is estimated as Ch'wisong-gun now. In addition, the current direction of Daneom-sa temple in which he dwelled is assumed in Chulwon. Secondly, It focuses on an ideological feature of Wiang-sect that Dae-Tong learned in the Tang Dynasty. Among one of the unique practices of Wiang-sect, he accepted Patriarchal Seon especially and followed that kind of practice.
Lastly, It is remarkable his dwelling in Wolgwangsa Temple and his relationship with King Kyongmun. Dwelling in Wolgwangsa Temple placed at the northern mouth of Gyeripnyeong(鷄立嶺), he put his energy into educating the local people. King Kyongmun also gave preference to his endeavor to strengthen royal control of local regions. From the research, it is looking forward to developing both more research on how Patriarchal Seon of Southern School Seon flowed in the 9th century and the periodic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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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이의민 집정시기 명종의 정치적 위상

저자 : 임영희 ( Lim Younghe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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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 집권기에 국왕의 위상이 위축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글은 과연 명종의 27년간이라는 오랜 재위가 나약하고 무력한 왕으로서만 가능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명종대는 무인 집권의 성립기로 아직 무인집정자의 위치가 확고하지 않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여러 인물의 무인집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국왕은 경대승이 죽자 공백기라는 절호의 기회에 가장 먼저 경대승의 사병조직인 도방을 해체하고 그 도방을 구성하는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왕은 무인 집정자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처럼 처신하다가도 기회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걸림돌을 제거해버리는 면밀하고 적극적인 생존방식을 보여주었다. 명종의 인사정책 또한, 중방의 반대에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반발이 가라앉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살며시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다시 등용시킴으로써 왕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명종은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을 직접 불러들였다. 이의민이 집정하더라도 경거망동하거나 국왕의 전주권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할 거라는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명종의 이의민 발탁은 국왕의 효율적인 정국운영과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한문준, 문극겸, 이지명 등은 지공거를 수차례 역임하면서 인재발굴에 집중하여 친왕적 관료육성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명종은 두경승과 이의민을 서로 경쟁케 하는 구도에 둠으로써 일방적인 권력의 독점을 막고 왕권안정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명종은 경대승 사후에서 이의민 집정시기에 어느 때보다 국왕의 권위가 회복의 탄력을 받으면서 안정된 통치력을 보였다. 반면에 명종이 대항마인 두경승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문신이 무신의 위상을 넘을 수 없었던 점은 한계로 남는다.


It is an undeniable fact that the status of the king was weakened during the military rule of Goryeo. This study began with a question how King Myeongjong's long reign of 27 years could have been kept as just such a weak and powerless king. The period of King Myeongjong's reign was the period of being established of the military rule, and the military leader's position was not yet firm. Accordingly, military powers were replaced by Lee Ui-bang, Jeong Jung-bu, Gyeong Dae-seung, and Lee Ui-min. Upon the death of Gyeong Dae-seung, the king first disbanded his private organization, Dobang and mercilessly executed the soldiers who comprised that. The king showed a thorough and active way of survival by acting as if he was complying with the demands of the military magistrate and removing obstacles when there is an opportunity as if he was waiting for that. King Myeongjong's personnel policy was also performed as his will by waiting for the opposition to subside and calm, and then secretly reappointing the talent he wanted, rather than directly confronting the opposition of the Joongbang.
Myeongjong directly called in Lee Ui-min who had murdered King Uijong. It was based on a practical judgment that he would not be reckless or interfere with the King's sovereignty even if Lee Ui-min took the office. In fact, King Myeongjong's appointment of Lee Ui-min helped his efficient political management and stability. Han Moon-jun, Moon Geuk-gyeom, and Lee Ji-myoung served as Jigonggeo several times, and they concentrated on discovering talents, contributing to cultivating pro-royal bureaucracies. In particular, King Myeongjong tried to prevent one-sided monopoly of power and contribute to the stability of the royal authority by appointing Du Kyung-seung and Lee Ui-min to a competitive position. From the death of Gyeong Dae-seung to the rule of Yi Ui-min, King Myeongjong showed stable governance as the royal authority being regained more than ever. On the other hand, it was limitation that King Myeongjong didn't use it properly Du Kyung-seung and Notable literary official couldn't get over the Political Status of Military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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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임진왜란기 조선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저자 : 김경태 ( Kim Kyong-t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2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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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관한 서술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오랜 평화에 안주해 있었던 데다가 당파 간의 갈등이 심하여,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런데 국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있었고, 정부 내에는 간신과 아첨하는 이들이 가득했다는 극단적인 표현도 존재했다. 과연 이러한 역사상(歷史像)은 실재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스스로 반성하는 문구를 남긴 경우가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명과 조선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하자, 명측 인사의 발언과 외교문서에서는 강한 비난 표현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문구들은 항상 정치적인 배경과 함께 해석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명에서 만들어진 임진왜란 관련 문헌에서는 맥락을 제거한 채, 비난의 표현만을 남겼다. 전쟁 후 조선의 문헌에는 자기반성을 위한 레토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상대되는 인물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문헌에서 국왕과 왕조를 직접 비난하는 서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
두 나라의 문헌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대중 지향의 출판이 유행하면서, 강렬한 요소만을 뽑아 흥미 위주의 임진왜란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기노시타 사네히로와 하야시 다이스케는 시대적인 맥락과 공간적인 맥락을 없애고,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뽑아낸 후 재조합하여 “게으르고 방탕한” 조선상을 만들어냈다. 그에 더하여, 개항 이후 조선에서 수집한 조선 사료의 목록을 추가하여 자신의 조합을 더 화려하게 꾸몄다. 기노시타와 하야시의 저작은 이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저작은 후대 학계에 큰 영향을 주어 오랜 기간 부정적인 조선 이미지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Some description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portray Joseon before the invasion critically. A familiar narrative is that Joseon had been complacent during the long period of peace and was not prepared for war due to internal conflict. However, some extreme statements were made that the king was dissipated in alcohol and women and that the government was full of confidants and flattery. Is this historical image tru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Joseon left documents examining its actions. Amid disputes between Joseon and the Ming dynasty during the war, there were strong criticisms of Joseon by Ming figures and in diplomatic documents. Such passages should always be interpreted within their political context. However, Ming's post-war literature on the invasion only contains these expressions of criticism without context. After the war, the literature in Joseon strove for self-reflection, and the authors described their adversaries critically, highlighting a specific person. Nevertheless, descriptions directly criticizing the king and the dynasty were not permitted in Joseon literature.
The literature of both countries was transmitted to Japan. As the public-oriented publishing became popular in Japan, only intense elements were used to create an image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focused on arousing public interest. In modern times, Sanehiro Kinoshita and Daisuke Hayashi ignored the spatial and temporal context by extracting only the negative aspects that they recombined to create the image of a “lazy and dissipated” Joseon. Additionally, they made this combination more colorful after Joseon opened its ports by collecting Joseon's historical materials to add to the cited works. The works of Kinoshita and Hayashi were the culmination of this trend. These works significantly influenced later scholars and played an essential role in the later negative image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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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제강점기 在中韓人留學生의 근대학문 수용과 유통 - 北京大의 李允宰를 중심으로 -

저자 : 이재령 ( Lee Jaer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6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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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 유학생 이윤재의 지적 경험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근대 학문·사상의 수용과 유통 양상을 다루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이윤재는 베이징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중국은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을 거쳐 서양의 학문·사상이 홍수를 이루었고, 대중운동이 일상화된 격변기였다. 유학 중 이윤재는 문자혁명, 몽고의 독립운동, 중화민국정치사, 학생운동, 노동운동, 문학혁명, 여론동향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중국 인식과 구국방안 모색에 기여하였다. 그는 문자혁명 위주의 신문화운동에 주목하였는데 胡適의 문학혁명을 적극 지지,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어문일치운동에 자극을 주었고, 중국학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중국 연극사에 주목하였다. 그는 중국의 애국운동을 지지하였는데 5·4운동을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민중운동으로 평가하면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옹호하고 인권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이윤재는 전공학문의 범위를 넘어 동시대 중국의 신문화와 대중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 유통시켰다.
귀국 후 이윤재는 곧장 교육·학술·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근대역사학을 공부한 만큼 史論과 史話에 관한 글을 가장 많이 썼는데 역사상 위인들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리더십을 찾고자 했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를 알리는데 힘썼다. 그는 민족문화의 유구함과 우수성을 강조하였으며 외세 침략에 저항한 영웅들을 소개하여 역사를 통한 교훈을 강조하였다. 이윤재는 한글운동에도 앞장섰는데 중국 문학혁명의 영향을 받아 체계적인 한글 사용과 표준화를 주장하였고, 한글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맹목적인 서양사상의 수용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는 식민지를 극복할 첫걸음으로 도덕적 윤리적 수양을 강조하여 自助와 互助를 앞세웠다. 그는 민족의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단군역사와 개천절을 중시했는데 '弘益人間'과 '在世理化'를 특히 부각시켰다. 이렇듯 민족주의 성향이 짙었던 이윤재는 베이징유학을 통해 과학적 학문 방법과 근대적 학술사상을 섭렵하고, 학과공부뿐만 아니라 시국 문제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교육·언론 활동을 통해 구국방안을 강구하였다. 이윤재의 교육·학술 활동은 베이징 유학을 통해 축적된 근대지식과 서양사상이 민족주의와 혼합, 변용된 것으로 실천적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deals with accepting and circulating aspects of modern sciences and thought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by force, based on the intellectual experiences of Li Yunjae, a Korean student studying in Peking University. From 1921 till 1924, Li Yunjae studied history in Peking University. Meanwhile, as China went through the New-Culture Movement and the May Fourth Movement, modern sciences and thoughts were flooded in China, and mass public movements dramatically arose daily. Li Yunjae as a foreign student in China published his articles regarding on Chinese Character Revolution, Mongolian Independence Movement, political history of the Republic of China, student movements, labor movements, literature revolution, trends of public opinion, and so on, so he helped Koreans' understanding China and their pursuing methods for saving their country. As he paid his attention to New Culture Movement emphasizing Chinese Character Revolution, and as he held up and introduced the Cultural Revolution of Hu Shi, he stimulated Korea's Verbal-written Language Unity Movement, and emphasized the history of Chinese dramas as a method of sinology. As he supported China's patriotic movements, he evaluated the May Fourth Movement as the most honorable popular movement in history, and defended the freedom of assembly and association and seriously considered human rights. As he supported China's patriotic movements, he evaluated the May Fourth Movement as the most honorable popular movement in history, and defended the freedom of assembly and association and seriously considered human rights. Like such ways, Yi Yunjae, regardless of his major field, was strongly influenced by contemporary Chinese New Culture Movement and popular movements, and circulated them in Korea through mass-media.
Right after coming back to Korea, Yi Yunjae participated into educational, academical, and journalistic activities. As he studied modern history, he wrote a lot of historic essays and historic stories, through which he excavated historic figures in order to find leadership for his colonized homeland. Also, he put his efforts in educating general public about his homeland's history. He emphasized the perpetuality and excellency of his nation's history, and the historical lesson of historical heroes resisting foreign invasions. Yi Yunjae also led the Hangeul Movement; as he was influenced by the Chinese Literary Revolution, he asserted systematic usage and standardization of Hangeul and participated in compiling a Hangeul dictionary. He was cautious about reckless acceptance of western thoughts, emphasized moral and ethical cultivations, such as self and mutual reliance for the first step to overcome the colonized reality. He highly regarded Dan-gun history and Gaecheonjeol not to forget the national origin, and especially highlighted 'hongyikyingan' and 'jaeseyihwa'. With his strong nationalist tendency, Yi Yunjae mastered scientific methodologies and modern academic thoughts through studying in Beijing, got interested not only in his class works but also in state of affairs, and devised the way to save his homeland through educational and journalistic activities. Yi Yunjae's educational and journalistic activities were the combination and transformation of the modern knowledge and western thoughts attained by studying in Beijing and of nationalism. He was a model of the intellectual acti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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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5 전쟁> 토론수업에 나타난 예비 역사교사의 역사인식 사례 연구 - 유엔군1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에 대하여-

저자 : 김수미 ( Kim Su-m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3-19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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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6ㆍ25 전쟁 과정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에 대하여 예비 역사교사를 대상으로 토론수업을 진행하고, 이 토론수업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비 역사교사의 역사인식을 살펴본 사례 연구이다. 이 연구의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6ㆍ25 전쟁의 책임은 우선적으로 북한에 있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예비 역사교사는 유엔군의 전쟁 개입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고마운 존재로 인식하는 반면,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가 나누어졌다. 또한 전쟁 전 이승만의 북진 통일 주장에 대해서는 무력을 이용한 통일은 반대한다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토론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사 토론수업의 효용성에 대한 부분이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고 나와 다른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도 사유해 보는 토론을 거치면서 다양한 해석을 살피면서 역사인식이 실제로 변화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효용성 있는 토론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본 연구는 분단국가의 특수성이 있는 상황에서 6ㆍ25 전쟁 당시'유엔군의 북진 정당성'문제에 의문을 던진다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논제로 삼아 근거를 찾아 설득하는 토론수업 경험은 역사교사를 지망하는 예비교사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This case study is intended to investigate the historical cognition of pre-service history teachers participating in classroom debates on the UN forces' moving north of the 38th parallel during the 6ㆍ25 War, which used to be regarded unquestionable. The analysis highlights the following findings and implications.
First, the participants share the historical cognition that North Korea is primarily responsible for the 6ㆍ25 War and that the liberal democratic system is superior to the communist one. Mostly, the participants attribute the existence of the Republic of Korea to the grateful involvement of the UN forces in the war, whereas they have mixed views on the legitimacy of the UN forces' moving north. Also, the participants articulate the historical cognition against any unification via armed forces in reference to the pre-war stance of Syngman Rhee advocating a preemptive strike on North Korea.
Second, as for the benefits of classroom debates on historical events, there is a shift in the historical cognition among the pre-service history teachers, who corroborate arguments with compelling evidence while contemplating and discussing diverse evidence-based arguments and interpretations from different perspectives.
Third, beneficial classroom debates should be underpinned by participants' profound appreciation of historical contents and contexts.
Despite the challenge of raising questions about the legitimacy of the UN forces' moving north during the 6ㆍ25 War given the awkward reality of our divided nation, it seems worthwhile for pre-service history teachers to engage in classroom debates with compelling evidence-based arguments about historical events that used to be deemed unquestion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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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청대 복건지역의 역병(疫病) 발생과 관민(官民)사회의 대응

저자 : 유채원 ( Yoo Chaewe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7-2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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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중후기로 갈수록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고 복건지역의 경우 福州와 厦門 등 연안도시의 성장도 가속화되면서 역병의 발생과 유행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은 의료적 측면에 있어서도 청대에는 의료가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방치되면서 의료위생환경에 대한 조성은 각 지방정부의 행정력과 민간사회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조치는 역병의 발원지나 유행지를 선정하고 승선의 검역 등을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또한 복건지역의 민간사회에서는 자선적 성격의 보건활동이 매우 유동적이었고, 많은 민간 의사들이 역병 치료를 위한 구조 활동을 펼치거나 의서를 선전해서 역병에 도움이 될 만한 일상 상식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에 역병이 돌 때 시행했던 환경 및 위생 개선 조치들을 토대로 대응했으며, 이론적으로는 당대의 의학 지식에 의존했다.
청대 복건인의 역병에 대한 대처 방식은 종교 관념이 투영된 의례를 통해 치료하려는 방식과 경험적인 의약에 의존하는 전통방식을 고수해 가면서 당사자도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역병의 지리적 확산과 피해의 증대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지리적 다양성과 분절성으로 인해 생성된 복건의 지역적 특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고, 역병이라는 큰 재난상황에서 긴장과 협력과정을 거치면서도 전통과 근대라는 과도기에 나타난 복건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환경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The population was increasing significantly in the mid-to-late Qing Dynasty, and in the case of the reconstruction area, the growth of coastal cities such as Fuzhou and Xiamen was accelerated, and the outbreak and epidemic of infectious diseases became a serious social problem. In terms of medical treatment, medical care was completely neglected as a private area during the Qing Dynasty, and the creation of the medical hygiene environment was different depending on the administrative power of each local government and the capabilities of the private society.
The most important measure is that the origin or epidemic of the epidemic was selected and quarantine on board was institutionalized. In addition, philanthropic health activities were very fluid in the civilian community in the Fujian area, and many private doctors carried out rescue activities for the treatment of the epidemic or promoted daily common sense that could help the epidemic. It responded based on environmental and hygiene improvement measures previously implemented during the epidemic, and theoretically relied on contemporary medical knowledge.
In the Qing Dynasty, the Fujian people's response to the epidemic contributed to the geographical spread of the epidemic and the increase of damage in a way that was not recognized by the parties while adhering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treating it through rituals projected with religious ideas and relying on empirical medicine.
This result is because there was a strong tendency to emphasize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Fujian created by geographical diversity and segmentation, and it can be said that it shows Fujian's fluid and unstable socioeconomic environment in the transition period of tradition and modernity through tension and cooperation in the great disaster of epi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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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세기 초 만주(滿洲) 한인(韓人)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

저자 : 박정현 ( Park¸ Junghyu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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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는 20세기 초 간도협약과 만몽조약 전후 시기 만주 한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연구했다. 1915년 滿蒙條約 체결 이후 중국과 일본은 만주에서 더욱 첨예하게 대립했다. 중국과 일본은 크게 세 부분에서 서로 충돌했다. 1) 한인의 국적문제와 중국 귀화문제, 2) 한인에 대한 재판관할권 적용 범위, 3) 간도지역에 토지 商租權 적용문제였다.
중국은 자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외국인인 한인을 통제해야 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면서 한인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래서 중국정부의 한인政策은 일본과 외교 마찰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적, 정책적 수단으로 단속했다. 이러한 방식은 눈에 띄는 차별이나 압력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일상적이었다. 만주 현지에서는 지방관리들과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압박이 현실로 나타났다. 만주 한인문제는 만주사변 전까지 한인과 중국인 사이의 최대 갈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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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의 인식변화 추이 - 「인민일보(人民日報)」와 「광명일보(光明日報)」를 중심으로 -

저자 : 송한용 ( Song Han 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6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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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정부 및 중국공산당의 인식을 「인민일보」와 「광명일보」의 기사를 통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몇가지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시기적으로 신중국 성립부터 중일 국교가 정상화되는 시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익화 문제와 중일 간 센카쿠/댜오위다오의 분쟁이 본격화하기 이전 시기, 일본의 우익화가 강화되고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 실시되는 시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중국의 만주사변 인식은 역사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나 필요성 그리고 국제적 상황 특히 중ㆍ일 간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있고, 기념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우경화가 강화되고, 중국이 국력에 자신감을 회복한 이후, 중국은 애국주의교육을 강조하면서 만주사변을 애국주의의 중요한 교재로 삼았다. 또한 만주사변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을 중국공산당에 대한 충성맹세의 도구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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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베 고보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에 나타난 일본과 만주 : 경계선 위의 짐승들은 연대할 수 있는가

저자 : 심정명 ( Sim Jeongmyo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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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주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는 주로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고생담에 기울어 있거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채 만주에 대한 향수를 그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귀환 체험을 다룬 방대한 수기들은 귀환자 개개인의 피해와 희생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 논문에서는 만주국의 붕괴와 함께 홀로 남겨져 일본을 향해 가는 소년 규조를 주인공으로 한 아베고보의 소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를 분석하면서, 귀환을 다룬 문학이 이 같은 내셔널한 서사에 자그마한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본 논문 또한 이작품이 일본인인 규조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고난을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귀환문학이라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단, 이때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 목적지로 설정된 '일본'이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 가이다. 규조에게 일본은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상상한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을 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규정을 계속한다. 이를 통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그것을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은 자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주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그때그때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바꾸어 나가는 고세키토라는 인물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이러한 자의적 특징들은 민족들 간의 지배ㆍ피지배 관계와도 겹쳐져 있다. 즉 이 작품에서 규조가 갈구하는 일본이란 만주의 황야나 규조와 고 같은 '짐승'들과 대비되는 문명이자 만주국이 붕괴하기 전의 일상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이상적인 고향으로서의 일본은 존재하지 않고, 경계선상에서 '짐승'으로 살아가는 규조와 고는 일본으로 가는 밀수선을 타고서도 결국 일본에 상륙하지 못한다. 본 논문에서는 또한 이 작품이 규조와 고의 관계나 규조와 중국인소년의 관계를 통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벗어나서 연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였다. 규조와 고는 선양에 도착하기까지 기묘한 동행을 계속하고, 그것은 단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제목에 있듯 '고향'을 향하는 복수형의 '짐승들'에 주목할 때, 이 작품에서는 규조의 실패한 관계 맺기를 통해 귀환이라는 경험을 내셔널한 서사로 회수하지 않는 귀환문학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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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수 삼고리고분군 출토 토기의 변천양상과 그 의미

저자 : 박성배 ( Park¸ Seong-ba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9-12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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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삼고리고분군은 1995년 처음 조사된 이후 장수지역을 대표하는 가야유적으로 동촌리ㆍ삼봉리고분군과 더불어 큰 틀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삼고리고분군 묘제 및 출토유물에 대한 세세한 변천 과정과 특징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현재까지 조사된 것 가운데 보고서가 간행된 유구를 중심으로 부장유물의 특징과 변천양상을 파악하였다. 고분 출토유물은 크게 재지계, 대가야계, 백제계, 신라계로 구분되어진다. 대가야계 토기를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여 유적의 상대편년과 특징 그 의미를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분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5세기 전후로 목곽묘 단계가 확인되며, 이후 석곽묘 단계로 발전되다가 6세기 중ㆍ후엽부터는 토광묘 단계로 변화한다.
목곽묘 단계는 비교적 이른 시기 발형기대와 유개식 장경호, 고배 등이 확인되어 장수지역 가야문화의 시작이 한 단계 앞서게 되었다. 수혈식 석곽묘 단계에서는 유입된 대가야토기를 재지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충실히 모방한 토기류를 생산한 것과 재지계+대가야계 양식이 결합한 토기의 생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가야지역의 중심지(고령)와 함께 주변지역에 위치한 가야세력(함양ㆍ산청ㆍ합천) 등과 교류 양상이 있었음을 파악하였다. 토광묘 단계에서 백제화된 묘제의 장축방향과 부장유물을 간소화하는 박장 양상이 파악된다.
이러한 변천과정은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다시 석실분으로 변화하는 일반적인 가야지역 고분 문화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세기 중ㆍ후엽에 석곽묘 이전 단계에 삼고리세력이 사용한 토광묘(목곽묘)다 다시 주 묘제로 등장하는 특이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수 삼고리고분군은 5세기~6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조영되었고, 무덤과 출토유물 등의 변천 과정을 통해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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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구려의 건국과 현도군

저자 : 김성한 ( Kim Sung-ha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5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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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 武帝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沃沮城을 치소로 하여 玄菟郡을 설치하고, (제1현도군), 沃沮와 濊貊 지역을 그 영역으로 했다. 기원전 75년 직전 遼東의 烏桓이 반란을 일으키자, 前漢은 三輔 및 郡國의 불량소년과 죄지은 관리를 징발하여 遼東에 주둔하게 하고 遼東에 玄菟城을 쌓고 현도군을 옮겨와 (제2현도군) 烏桓의 침입에 대비했다.
제2현도군은 토착세력인 句驪가 위치한 지역에 자리했기 때문에 句驪의 이름을 따서 그 지역을 句驪縣이라 하고 郡의 治所로 삼았다. 토착세력인 句驪는 前 漢으로부터 처음에는 縣級인 '侯'로 대우받았다가, 桓帝 때 烏桓이 투항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桓帝의 뒤를 이은 元帝 建昭 2년(B.C. 37)에 郡級인 '王'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서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것으로 표방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句驪는 前漢으로부터 '高'를 姓으로 사여 받아 국호를 句驪에서 高句驪로 변경했을 것이며, 前漢은 高句驪王에게 그 신분에 걸맞게 鼓吹伎人과 朝服을 사여했던 것이다. 이때 玄菟郡의 句驪縣도 高句 驪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전한 말기의 상황을 전하는 『漢書』 地理志에 高句驪로 기재되었던 것이다.
그 뒤 고구려는 新나라를 건국한 王莽이 자신을 징발하여 匈奴를 정벌하려 하자, 기원후 12년 무렵 이에 반항하여 제2현도군의 경계를 벗어나 자립했다. 新나라의 뒤를 이은 後漢은 자립한 高句驪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王'의 호칭을 인정하고 제2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幘溝漊라는 작은 城을 쌓아 高句驪로 하여금 歲時에 朝服과 衣幘을 가져가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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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래한예의 성격과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

저자 : 심정현 ( Sim Jeong H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9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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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吾慮舊民轉當羸劣”을 이유로 장수왕에게 守墓人을 略來韓穢로 교체하라고 하였다. 장수왕은 “慮其不知法則”을 이유로 守墓人을 전면 교체하지 않았고,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舊民을 대상으로 守墓 관련 제도가 제정이 되어있는 점, 舊民이 羸劣될 수 있는 점, 略來韓穢가 法則을 모르는 점에 대해서 당시 광개토왕, 장수왕은 인지하고 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광개토왕은 敎言을 하여 守墓人을 교체하고자 하였고,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의중을 알면서도 舊民을 재활용하였다. 이는 守墓人 구성에 대한 두 왕의 입장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장수왕은 略來韓穢가 아닌 舊民과 新來韓穢로 守墓人을 구성함으로써 광개토왕의 敎言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장수왕은 新來韓穢라는 복속 지역의 지방민을 守墓人으로 차출하였다. 이러한 新來韓穢 차출지를 통해 당시 고구려 남방의 지방행정단위를 알 수 있다. 新來韓穢 차출지는 대부분 城 단위이었고, 또한 영락 6년에 정복된 백제 城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한강유역 지배는 백제 城을 기반으로 한 지배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이러한 지배방식 틀에서 경기 이남 고구려의 관방시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실 월평동 유적ㆍ남성골 산성, 경기도에 소재한 도기동 산성은 백제 방면으로 뻗어가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이에 따라 475년 漢城 함락 이후 고구려가 대전까지 진출ㆍ점유했다는 견해, 청원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시적으로 남성골 산성을 축조ㆍ사용했다는 견해, 안장왕 친정을 계기로 대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백제의 대응, 백제ㆍ신라의 협력에 장기간 버텨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경기 이남 관방시설은 漢城 함락, 문주왕 피살, 재위 3년 만에 사망하는 삼근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미호천 유역을 잠식한 고구려 군의 주둔소로 여겨 진다. 이후 동성왕 재임 기간 내에 관방시설은 퇴진됐을 것이며, 안성천 유역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라고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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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항의 『강감회요』 편찬과 사학사적 의의

저자 : 박인호 ( Park¸ In-h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5-22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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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은 명·청대에 『자치통감강목』의 체재를 본받아 여러 시대를 다루는 통사적 형태로 역사서를 만들면서 대중적 역사서의 서술 형태를 취한 책이다. 강항이 편찬한 『강감회요』는 『자치통감강목』의 미진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강지의『통감절요』와 유우익의 『서법』과 윤기신의 『발명』 등을 추가하여 종합한 우리나라에 희귀한 강감류 사서이다. 『강감회요』의 구성은 모두 17권으로 되어 있으며, 각 권의 대부분은 상, 하로 나누어져 있다.
『자치통감강목』은 『자치통감』의 정통 처리, 간지와 연기 표기, 시비와 득실, 관점자 서술, 도덕이나 덕치 서술 등에 오류가 많다고 생각한데서 편찬되었다. 『자치통감강목』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 『강감회요』는 이러한 『자치통감강목』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강감회요』가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제시하였던 서술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교조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강감회요』는 형식면에서는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강감의 형태를 가지면서도 강목에 대한 서법과 발명 주석서를 합한 형태로 편찬되었다. 사학사적으로 중국에서 강목에 대한 광범위한 회집에 들어가고 있는 시기에 발맞추어 16세기 조선에서 강항의 『강감회요』가 나온 것은 조선의 주자학적 역사학이 독자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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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글가사 「임계탄」을 통해 본 '신임계 대기근'

저자 : 김덕진 ( Kim Deok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5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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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1733년ㆍ신해ㆍ임자ㆍ계축ㆍ에 장흥에 대기근이 들었다. 이 실상을 장흥의 한 선비가 「임계탄」이란 가사로 읊었다. 원인은 가뭄, 홍수, 해일, 병충해였다. 이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사람이 죽고 마을이 텅 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환곡ㆍ군포 등의 세금 납부를 독촉하였고, 재결을 통해 드러났듯이 재해지역에 대한 재정지원도 게을리 하였다. 지방행정을 담당한 수령과 양반 및 향리들은 기아자 선발과 진휼곡 확보 등 진휼업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에 급급한데다 관리감독 기능마저 마비되어 총체적 문란이었다. 이 결과 절망적 상황과 인륜 부재 및 치안 위기까지 초래되었다. 이런 사실을 장흥에 살고 있는 한 선비가 가사, 시, 그림으로 남겼다. 목적은 무능과 부정으로 점철된 실상을 고발하여 재발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책에 반영되어 天時泰運의 세상을 다시 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최종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창작품들의 최종 귀결처는 국정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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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선후기 밀양변씨 의관 연구 - 효량공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훈평 ( Park Hun Pye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8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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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변씨 효량공파는 조선후기의 의학 관료를 구성하는 대표적 가계였다. 조사된 가계 내의 의관은 총 88명이였다. 본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도출해냈다.
첫째, 의관 가계로서 17세기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후반 이후19세기 후반까지 전성기로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효량공파 가계 내 의관은 변이근ㆍ변이형 형제가 처음이었다. 정조 순조 대에 활동한 의약동참의 변관해와 변지순은 숭록대부와 정헌대부가 되면서 의관 가계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하였다.
둘째, 사조 분석을 통해보면, 의관 가계로서의 세전 양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효량공파의 경우 사조 중에 역관이 많이 있기 때문인데, 효량공파는 조선후기 주요한 역관 가문의 하나로서 후손들이 의과에만 치중하지 않고 역과로도 출사하였다.
셋째, 대부분의 의학 관료는 삼의사에 속하였다. 최종 관력이 삼의사에 해당하는 이들은 총 86명으로 전체(88명)의 97.72%이다. 이는 가계 내 인물이 의학을 본업으로 할 경우 대부분 삼의사에서 근무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후기 의관이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다.
넷째, 내의원에서의 가계 위상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더 높아졌다. 효량공파 내의원 입사자는 19세기 중반을 기준으로 변화된다. 주요한 입속방법이 19세기중후반 의약 동참의와 내침의에서 내의로 바뀐다. 내의원의 三廳이 모두 의술이 높은 이들이지만 삼청의 첫째는 내의라는 점에서 효량공파 출신들의 내의원 내위상이 더 높아졌다.
다섯째, 의학 관료는 19세기 전반 이후 의과 중심으로 배출되었다. 가계 내 양의사 입사자는 순조 때를 기점으로 하여 혜민서에서 전의감 중심으로 변화된다. 또한 내의는 의과 출신자여야 했으므로 전의감 중심으로의 관력자 변화와 내의중심으로의 내의원 입속과는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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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제강점기 나주협동상회의 설립과 운영

저자 : 한규무 ( Hah Kyu-m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1-306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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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협동상회는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1929년 4월 설립하고 6월 개점한 협동조합ㆍ소비조합의 성격이 섞인 상점이었으며 고권(股券)을 발행하고 회원제로 운영되었다. 이는 신간지회의 경제활동으로서 실제로 설립ㆍ운영된 흔치 않은 사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신간나주지회의 사업으로 출발했기에 일제의 탄압도 이어졌다. 상회장 김창용은 1930년, 이사장 양장주는 1931~1932년 일제에 검속되었고, 1930~1931년일제는 협동상회을 수색했다. 그럼에도 협동상회는 적어도 1937년까지는 주민들의 큰 호응과 가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38년 폐쇄되었다.
협동상회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7년 창립된 신간나주지회에서 이 상회를 설립하고 경영했는데, 각지의 신간지회 활동 중 이 같은 사례는 흔치 않다. 둘째, 나주에 진출한 일본인 상업자본과 맞서 조선인들의 호응을 받으며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셋째, 협동상회 건물은 나주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신간회 관련 사적 6개 중 하나라고 한다. 따라서 근대 문화유산으로의 가치도 크며, 그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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