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연세사학연구회> 학림> 18세기 나리포창 발전과 제주로의 곡물 조달

KCI등재

18세기 나리포창 발전과 제주로의 곡물 조달

The Development of Naripochang and Grain Procurement to Jeju Island in the 18th Century

김태홍 ( Kim¸ Tae Hong )
  • : 연세사학연구회
  • : 학림 4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9월
  • : 255-289(35pages)
학림

DOI


목차

1. 머리말
2. 나리포창 신설과 접제 논의
3. 나리포창 이전과 절가 발매
4. 나리포창 정착과 물산 결집
5. 맺음말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나리포사실』에는 18세기 국가의 상업 정책과 지역 진휼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나리포창에 관한 연구는 상업 정책과 진휼 정책 차원에서 모순적으로 확인되었다. 전자는 상업에 대한 국가의 집권적 역할이 발전하는 사례로서 나리포창을 분석하였고, 후자는 진휼 정책이 이완하여 특정한 가치로만 유지된 사례로서 이해하였다. 양자는 각각 국가의 상품 유통체계 발전과 사적인 상품 교환경제 확대에서 나리포창을 다르게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본 글에서는 선행 연구를 전제하되, 나리포창의 발전과 곡물 조달이 모순되지 않았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는 제주 물산을 매개로 한 국가의 상업 이익 확보와 제주에 진휼 곡물을 조달하기 위한 교환경제 활용이 공존하였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나리포창 운영에는 국가가 제주 물산 발매를 통해서 접제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과 확보한 재원을 제주 인근 군현에서 무곡하여 제주에 조달하는 작업이 분류되면서도 절충해 있었다.
The 18th century national commercial policy and regional relief were recorded In the 『Nariposasil』. Until now, research on Naripochang has been conducted contradictingly in terms of commercial policy and relief policy. The former analyzed Naripochang as an example of the development of the state’s dominant role in commerce, and the latter was understood as an example in which the relief policy was relaxed and maintained at a specific value. The two may have seen Naripochang differently in terms of the national product distribution system and private product exchange economy. This article presupposes prior research, but attempts to clarify that the development of Naripochang and the procurement of grain were not contradictory. The national commercial interests and riding on the exchange economy for grain procurement were categorized but also compromised.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916962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0440-2324
  • : 2713-982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0-2022
  • : 267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9권0호(2022년 03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아돌프 멘첼의 역사화에 나타나는 프로이센의 이미지 : 시각사(visual history) 연구의 방법론적 난제에 대한 탐구

저자 : 전진성 ( Jin-sung Ch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8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시각사(visual history)'란 단지 시각자료를 사료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각 이미지의 매체적 특성을 원리로 삼아 재현의 가능성과 한계를 반추해보는 역사이다. 본고는 프로이센의 역사화가 멘첼의 사례를 통해 회화를 위시한 시각 이미지가 과연 시대의 증언이자 해석으로서 유효한지 살펴보았다. 멘첼은 고유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역사적 순간의 덧없는 일시성을 포착하려 한 급진적 역사주의자인 동시에 알레고리 기법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전통적 모티프를 활용하는 고전주의자이기도 했다.
역사적이면서도 비역사적이고 시각적이면서도 비시각적인 아돌프 멘첼의 역사화는 '시각사'의 방법론적 난제를 부각시킨다. 시각 이미지의 '시각성'은 그 자체로 현실을 바라보고 만들며 해석한다. 이미지는 대상과 함께 행동한다. 개인적,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특유의 멜랑콜리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역사가와 목격증인, 목격의 대상인 행위자간의 긴장관계를 탐구한 멘첼의 역사화는 이미지가 역사서술과 동급의 재현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Visual history' is meant to be a history that does not merely use visual data as historical material, but also reflects on the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of representation through the lens of visual images as principal media. The history paintings of Adolph Menzel are particularly useful in proving that visual images are valid as a testimony and interpretation of the times insofar as these extraordinary artworks advocated radical historicism capturing the ephemeral temporality of a historical moment based on their own realism, but at the same time underpinned classicism utilizing traditional allegory techniques and motifs. The uniqueness of Menzel's history paintings, which is both historical and non-historical, visual and non-visual, highlights the methodological aporia of visual history. The 'visuality' of the visual image itself gazes, creates, and interprets the reality. The image acts with the object. Menzel's artistic historiography, which explores the tension between the historian, the eyewitness, and the actor who is the target of eyewitness, through his unique melancholic distance derived from a personal and historical context, demonstrates that the visual image can be a representation of the same level as the historian's historiography.

KCI등재

2위로의 연대: 이미지로 보는 16세기 독일 루터파 공동체의 이상

저자 : 한유나 ( Yu Na H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9-84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개인의 불행과 고통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및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위로해주고 극복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공동체의 이상은 기독교의 전통적 미덕 중 하나인 '이웃 사랑(amor proximi)'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루터는 성경의 전체 내용이 믿음(fides)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전자는 오직 후자를 통해서만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만큼 '이웃 사랑' 개념에 전에 없이 큰 가치를 부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6세기 루터파 문화권 내에서 시각적 이미지들이 이웃 사랑의 실천에 동기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연대와 결속을 다지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한편으로는 감상자로 하여금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탱해줄 공동체적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자 자신도 이러한 안전망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웠다. 기존 미술사 연구들은 이웃 사랑의 주제를 다룬 16세기 루터파 이미지들 상당수가 중세의 전통적 주제들과 도상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이유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논의되었던 '이웃 사랑'의 추상적 개념과 공동체적 이상이 일상생활 안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실천적 행위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들이다.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16세기 독일 루터파 공동체의 이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 이웃 봉사에 있어 도움의 공여자와 수혜자의 구분이 없는 호혜적 관계의 형성을 강조하였다. 이웃 사랑의 의인화(personification)인 여성이 갓난아이를 수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과일을 받아먹는 모습을 담은 '카리타스(caritas)'의 도상, 전도 활동을 위해 먼 길을 떠나기 전 서로를 다정하게 격려하는 사도들을 재현한 '사도들의 이별(divisio apostolorum)'과 같은 주제들이 크게 유행하였다. 둘째, 정신적 위안과 물질적 원조에 대한 균형감 있는 관심을 장려하였다. 복음 전파를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전하는 이웃 봉사의 행위로서 시각화한 작품들과 빈민구제를 위한 공동기금(Gemeiner Kasten)의 주제를 다룬 이미지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현실에서 상호 원조를 통해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웃들이 곧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구현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특히 신자들이 함께 모여 전례에 참석하는 교회 공간에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의 집단 초상이 포함된 제단화나 추모화(epitaph)들을 안치함으로써 그 상징성을 극대화시켰다.


Martin Luther (1483-1546) urged fellow men to actively help their neighbors in distress, and in the case of their own tribulation, to seek out some company who could assist them. This idea originated from the traditional Christian concept of neighborly love, to which the reformer attached unprecedented importance: the whole scripture was to be simply encapsulated in two notions, that is, faith and neighborly love, and the former could be fully achieved only by the latter. Luther's ultimate goal was to establish a network of mutual support and protection within his community.
Sixteenth-century Lutherans in Germany actively used images visualizing the reformer's idea to indeed foster solidarity among themselves. For example, the works presenting the iconographic themes such as Caritas and the Separation of the Apostles highlighted the reciprocity of neighborly service. Meanwhile, those images respectively thematizing preaching of the salvific Word and raising of communal funds propagated that spiritual and material aids were equally important. Group portraits of local congregations also became a crucial part of Lutheran visual culture;they represented the “network of support” in a literal sense. The presence of neighborly love was easily to be buried in oblivion in everyday life. Thus, it was the mission of the pictorial works depicting the Lutheran ideal of solidarity to reassure the viewers that loving hearts ready to assist were available to them whenever needed.

KCI등재

3미국 흑인의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 : 흑인 신체에 대한 집단적 비하와 문화적 인종주의의 구축

저자 : 허현 ( Hur Hy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85-119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미국 내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왔지만 노예제 폐지 이후 짐 크로우시대를 거치며 더욱 확산되고 변형·발전되었던 미국 흑인들에 대한 다양한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고찰을 통해 그 내용과 목적, 그리고 메시지 효과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정형화된 인종주의적 흑인 캐릭터들로서는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샘보(sambo)와 매미(mammy), 경멸적인 쿤(coon), 음탕한 제즈벨(jezebel), 폭력적인 브루트(brute)와 벅(buck) 등을 들 수 있는데 백인 중심의 기성 인종질서의 정당성과 위기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주의적 이미지와 캐리커처들은 백인 노예소유주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창조하여 흑인들에게 억지로 강요했던 가공의 뒤틀린 자화상이자 자기혐오의 시선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일방적 시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억압적 문화 공간 안에 갇혀 있었고 그러한 '하얀 시선'을 통해 '검은 자아'를 부정당했다. '검은 자아들'은 늘 곱슬머리와 왕방울 같은 눈, 두터운 입술, 튀어나온 입과 유난히 하얀 이, 칠흑 같은 피부색, 비대한 몸, 바보 같거나 천박한 미소, 타락한 몸짓, 욕정에 찬 음탕한 눈길 등과 같은 부정적인 신체적 특징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부당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정형화는 특히 노예제의 폐지 이후 백인들이 인종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개한 헤게모니 장악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문화적 인종주의의 구축을 통해 후기노예제사회를 건설하고자하는 의도를 품고 있었고 인종주의적 캐리커처에서 드러나는 유머와 위트로 가장한 흑인들의 문화적 재현을 통해 노예제라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역사적 기억상실을 도모하고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work is to examine the contents, intentions, and message effects of the various racist images and African American caricatures which have been developed from the antebellum period through the Jim Crow era. These racially-stereotyped black characters, which includes submissive and faithful sambo and mammy, insolent and dishonest coon, seductive, sexually arousing jezebel, and innately savage, animalist, and criminal brute and buck, have justified the history of slavery and at the same time reflected the crisis of racial hierarchy. Also, these racial stereotypes have signified a fictional, distorted self-portrait and the gaze of self-abhorrence for African Americans which slaveholders and white supremacist imposed for their power and hegemony. African Americans were in prison of oppressive looking, becoming racialized objects of view. As a result, African Americans internalized the sense of always looking at one's self through the eyes of others, that is, through the lens of a dominant white gaze. In the process, the universal humanity of the African Americans, the 'black one's self,' were denied by the 'white gaze,' because it defined the African American identity with distorted, negative physical features of them. Privileged whites had an intention of building the post-slavery society through the degradation of the black body and the construction of cultural racism, and simultaneously sought to cause collective historical amnesia about the violent history of slavery.

KCI등재

4'14-18 전쟁'과 프랑스의 흑인 병사 이미지: 실재, 상상(계), 그리고 재현

저자 : 이재원 ( Lee Jae-w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1-163 (4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탈식민화 이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어떻게 인식되며 재현되고 있을까?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식민지 시기 유럽 대중 다수가 접하게 된, 당시의 일상적이고도 사회정치적인 삶 속에 관여했던, 이미지들에 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허구와 상징, 그리고 현실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전(propaganda)과 전파 덕분에 다수의 대중을 매혹한 메시지가 된 이미지들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 내의 평범한 일반 프랑스인들의 흑인 병사에 대한 상상은 혹은 상상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형성되었다. 본 논문은 전쟁 기간 프랑스인들이 재현한 식민지인, 특히 아프리카 흑인 병사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연구이다. 논문을 준비하며 접하게 된 다량의 이미지는 프랑스인들의 식민지 의식의 형성에 있어 식민지 시기 동안의 이미지 자료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랑스인이 인식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식민지인, 그중 다수가 참전한 아프리카 흑인병사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다변적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분석하기 위해 먼저, '가장 거대한 프랑스(La Plus Grande France)'라는 상상계 속에서 1차 대전 중 아프리카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다음으로, 유명한 핫초코 분말 제품인 '바나니아(Banania)' 광고 속 흑인 병사의 '큰 아이(grand enfant)'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이와 더불어 희화화된 아프리카인 이미지의 양가적 측면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식민지의 군사적 기여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식민지 제국의 희생에 대한 늦은 인정에 대해서도 소개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차 대전 종전 후 점령군으로서 독일의 라인란트(Rheinland) 지역의 진주에 반대하는, 즉 '검은 치욕(Schwarze Schande)'에 대항하는 독일의 선전 활동과 이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More than 60 years after decolonization, how are Africa and Africans perceived and reproduced by Europeans today? In order to deal with this problem, it is necessary to study images that were involved in the daily and socio-political life of the time that the majority of the European public encounter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Research is needed on images that have maintained a complex and subtle relationship between fiction, symbols, and reality and have become a harsh message for the majority of the public thanks to propaganda and propagation.
The imagination or imaginary world of ordinary Frenchmen in France about African soldiers was formed during World War I.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image of colonies, especially African black soldiers, reproduced by the French during the war. The large amount of images encountered while preparing for the thesis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image data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the formation of French colonial consciousness.
The image of the French as colonists during World War I, of whom the vast majority participated in the war, is diverse and multifaceted. In order to analyze these images, I will first mention the importance and role of Africans during World War I in the imaginary world of “The Greatest France”. Next, I would like to highlight the image of a black soldier as a “grand enfant” in the advertisement for “Banania”, a famous hot chocolate powder product, and also consider the ambivalent aspect of the caricatured image of Africans. The indifference and oblivion of the French colonies' military contribution and the late recognition of the colonial empire's sacrifice as compensation for this will be introduced. And finally, I would like to examine Germany's propaganda activities against the “Black Shame” as an occupational force after the end of World War I, and France's response to this.

KCI등재

5전쟁 트라우마, 감각적 고통, 반전(反戰)의 미학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

저자 : 최용찬 ( Choi Yong-ch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195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1930년의 전쟁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나타난 '전쟁 트라우마'(Kriegstraumata)에 의한 참전 세대의 감각적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특히 참전 병사들의 전쟁 트라우마에 의한 총체적 파괴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목표를 둔다. 레마르크 소설에서 제시된 실마리를 따라, 본론 2장에서는 참호병과 전쟁 트라우마의 청각적 고통, 3장에서는 포격 공포증과 전쟁 트라우마의 시각적 고통, 4장에서는 전선 조광증과 전쟁 트라우마의 촉각적 고통을 나누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세대가 몸소 겪은 전쟁 트라우마의 감각성, 곧 청각성, 시각성, 촉각성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를 통해 이 영화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병사들이 경험한 전쟁 트라우마의 보편적, 심리적, 정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별적, 감각적, 신체적 차원까지 모조리 재현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반전영화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대목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전쟁 트라우마와 세 가지 감각적 고통이 제각각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병사들은 모두 다 전쟁 트라우마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신체의 감각적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영화는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일스톤의 영화는 전쟁 유탄이 인간의 신체 감각에 미치는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을 통해 참전 세대의 일반적, 심리적, 정신적 파멸성뿐만 아니라, 개별적, 감각적, 신체적 파괴성 차원까지 철저하게 구명해낸 최초의 반전영화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This study focuses on analyzing the filmic ways to represent the sensory suffering of the young generation participating into World War I by the war trauma, which appeared in the 1930 war film All Quiet on the Werstern Front. In particular, the main goal is to reshape the process of total destruction by war trauma of veterans. Following the clues presented in the Erich Mariaq Remarque's famous war novel, it should be differently analyzed firstly trench disease and their aural pain in Chapter II, seondly, shelling phobia and their visual pain in Chapter III, and thirdly frontline dimming and their tactile pain in Chapter IV. These analysis specifically revealed their sensory, auditory, visual, and tactile nature of the war trauma experienced by the veterans of World War I. As a result, it should be confirmed that the film was the first anti-war film to be successful in reproducing not only the universal, psychological and mental dimensions of the war trauma experienced by veterans in World War I, but also individual, sensory, and physical dimensions. More importantly, the above three war traumas and three sensory pains were and are not separated. In other words, the film reminded us that all the world war veterans in those days were exposed to any kind of war trauma and suffered the sensory pain of the body. Therefore, Milestone's film deserves high regard for being the first anti-war film to thoroughly reveal not only the general, psychological, and mental ruin of the veterans, but also the individual, sensory, and physical destructive dimensions through the various trauma symptoms of the war generation.

KCI등재

6鄭世雅의 生涯와 壬亂 擧義 -영천성 전투를 중심으로-

저자 : 박순교 ( Park Soon Ky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6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정세아(1535~1612)는 영천의 재지사족이었다. 그는 임란 시기 영천성 복성 전투, 임고서원 중건 등의 중핵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본문은 영천의 재지사족 정세아의 삶을 복원하고, 임란의 혼란기 전후 영천 지역의 사건과 동향을 정세아의 삶과 곁들여 검토했다. 그간 본격 검토되지 않은 『호수실기』를 여타 잔존 기록들과 대조, 검토하였고, 잘못되거나 누락된 사실들을 비정하였다. 정세아 집안의 가풍, 정세아 집안의 노루목 이거 과정과 의미, 정세아의 소과 입격 성적, 정세아의 상경 사건, 정세아의 경북 영양 오극성과의 만남, 정세아의 세계관과 삶의 궤적, 임진란 당시 정세아의 거의 시점, 거의 목적, 거의 성격 등을 축차적으로 구명하였다. 본문은 영천의 4월 추평회맹을 부정하고, 영천성 전투를 전후한 시기, 영천에서 발현된 다기다양한 세력들의 정치적 노선과 상황들을 천착하고 부각하였다.


This thesis attempted to closely restore the life of Jeong Se-ah(鄭世雅), a Jaejisa tribe(在地士族) in Yeongcheon, and through this, the events and trends of the Yeongcheon area before and after the confusion of Imran(壬亂) reviewed alongside the life of Jeong Se-ah(鄭世雅). Accordingly, the main text carefully contrasted and reviewed the actual contents of Jeong Se-ah's actual recording(湖叟實記), which had not been reviewed in earnest, with other remaining records, and clarified the facts that were incorrect or omitted.
The family customs of Jeong Se-ah'(鄭世雅)s family, Jeong Se-ah's process into Jayang(紫陽) and its meaning, Jeong Se-ah's academic record, Jeong Se-ah's succession-related events, Jeong Se-ah's visit to Youngyang(英陽), Gyeongsangbukdo and encounter with Oh Gyeog-seong(吳克成), Jeong Se-ah's view of the world and trajectory, the uprising point of view, uprising purpose, and uprising personality of Jeong Se-ah at the time of Imran(壬亂) were sequentially investigated. This thesis denied 'the April Chupyeong Association(四月 楸坪會盟)' of Yeongcheon recently raised by some, and focused on and highlighted the political lines and situations of the various forces that emerged in Yeongcheon before and after the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永川城). I believe that these considerations will be the cornerstones of the future studies of Jeong Se-ah (鄭世雅).

KCI등재

7전통적 華夷論의 변천과 崔濟愚의 文明觀

저자 : 김민석 ( Kim Minseok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7-274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전통적 화이론의 구조와 특징, 그것의 수용과 변천 과정을 살펴본 후, 화이론과의 관계에서 동학의 天觀과 聖人觀, 전통 사상 및 서양·청·일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최제우의 문명관을 검토하였다. 최제우는 天觀에 기초하여 보편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개방적·포용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게 '문명'이란 특정 문화나 가치·이념의 구현이 아닌 보편적인 天道의 실현이었으며, 이는 곧 전통적 화이론의 '유일·보편' 문명과는 다른 '혼성·보편' 문명의 지향이었다.


Starting from defining the traditional concept, structure, and feature of Hwairon, this study shows how Hwairon had been appropriated in the Korean Peninsula and had become the main theory of civilization in Choi Cheu's era through many changes. After, it explores Choi Cheu's perspective of civilization on the basis of its relation to Hwairon and the concept of Cheon which was the starting and main point of Choi Cheu and Donghak.
By doing so, this paper was confirmed that Choe Je-u aimed for universalism based on the concept of Cheon, which is the starting point of Donghak and the core of doctrine, while at the same time showing an open and inclusive attitude toward specific theories and ideas such as Confucianism and the Western Learning. In other words, it can be summarized as aiming for 'mixed and universal' civilization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Hwai-theory's 'only and universal' civilizaiton.

KCI등재

8조선후기 사적복수 허용에 대한 일고찰 -법규 변화와 『추관지(秋官志)』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하경 ( Ha-kyoung Le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305 (3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유교 경전 어구처럼 조선시대에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국가의 사법적 체제를 경유하지 않고 개인이 무력을 통해서 사건을 직접 해결하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적인 무력사용을 국가에서도 일정하게 허용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사례에서는 복수를 감행한 행위에 대해 국가 차원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유교적인 가치가 내재화되는 차원에서 이와 같은 사적복수 허용을 분석해 왔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국가의 입장에서 개인의 무력사용을 허용하면서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서 조선후기 법규의 변천을 추적하고 관련 사례분석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러 복수와 관련된 법규가 어떻게 세분화 되었는지, 허용되는 복수 주체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형량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아울러, 사적복수 사건을 27건 수록하고 있는 『추관지(秋官志)』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복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복수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The famous phrase originated from Confucian ideology, “one should not live under the same Heaven with the enemy who has slain one's father,” reveals the tolerance of revenge in Chosǒn dynasty. In some cases, individuals did not resort to the state's judicial procedures but tried to solve the case with private use of force for the sake of revenge. Also, the state commended the use of such private force. Sometimes, the state even praised revengers for taking private revenge. Existing studies have analyzed such permission of private revenge in terms of internalizing Confucian values in the late Chosǒn dynasty. However, this study focused on social and political problems that could be caused by allowing individuals to use force. This paper traces the changes concerning the regulations of private use of force and conducts case studies. Throughout an analysis of the changing regulations, this paper explicates how private use of force, especially revenge, was categorized, who was allowed to use violent means for revenge, and how punishments changed over time. In addition, the case studies based on Ch'ugwanji, a case book delineating different types of revenge, explicates how the policymakers understood private use of force.

KCI등재

9식민지 소년 정문기의 교육입지전(敎育立志傳)

저자 : 장신 ( Jang Shi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7-333 (2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한 한 소년의 교육 경험을 연대기로 정리하였다. 소년 정문기는 1909년부터 강습소의 근대교육을 시작으로 1929년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당시 일본인 소년은 소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바로 진학하였다. 소수의 관립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조선인 소년은 정문기처럼 여러 사립학교를 전전하였다. 졸업과 편입, 중퇴, 졸업이 반복되었다. 1910년대 조선의 소년은 네 곳의 사립학교를 거쳐 중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식민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업 연한이 3년이나 차이났기 때문이었다. 교육 제도의 구조적 차별이었다. 그나마 정문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여느 조선인 소년과 마찬가지로 정문기도 일본의 중학교에 다시 편입하여 상급학교 진학 자격을 얻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차별 속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정문기는 민족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조선인 교원과 학생으로 구성된 사립학교만 다녀서 일본인을 접할 기회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축구와 야구 등 운동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개인적 특성도 있지만, 일본 유학 중에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제국대학 재학생이라는 일본인 학생의 엘리트 의식도 한 몫을 했다. 출신 지역보다 출신 학교의 동질감이 큰 이유도 있었다. 구조적 차별과 개인의 차별이 분리될 수 없지만 환경에 따라서 의식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a young student, living in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achieved success through the colonial education system. The protagonist of our story is Jeong Mungi, who first went through modern education from 1909 at an “educational institution (Gang Seupso 講學所) and later graduated from the Tōkyō Imperial University in 1929. A typical Japanese student would have moved through the elementary school-middle school-high schoolcollege school system during this period.
In contrast, except for a very few students registered in the state-sponsored Higher Common School (Godeung Botong Hakgyo, 高等普通學校), most Korean students would have-just like Jeong Mungi-wandered his way through various private education institutions, going through a rather unorganized process of admission(s), dropout(s), transfer(s) and graduation(s). In the 1910s, a Korean student would have been able to graduate from one of the four private schools and complete a curriculum provided by a “middle-level school (Jungdeung hakgyo 中等學校)” but the official high schools were not accessible to the Koreans. Accordingly, there were systematic discriminations imposed on Koreans compared to their peer Japanese, such as the Koreans being subject to a stricter year limit for graduation. However, Jeong Mungi was relatively fortunate, as he was able to transfer to a Japanese middle school and eventually earn qualifications to advance to a higher school.
Even though Jeong went through this systematically discriminative system, his memoirs do not indicate any direct experience of ethnic discrimination. Before his college education, he only attended private schools that consisted of Korean instructors and Korean students and thus did not have many opportunities to interact with Japanese. Similarly, but for different reasons, Jeong did not experience ethnic discrimination during his study abroad time in Japan. The lack of discriminative experience might have been partially due to his athletic expertise, as he was a talented football and baseball player. But we must also note the elite group mentality prevalent among his Japanese colleagues, those who valued his educational background as a Tōdai graduate more than his regional and ethnic background. Even though it is impossible to separate systematic and personal discrimination, Jeong Mugi's experience shows that one might not constantly be aware of these elements of ethnic discrimination.

KCI등재

101970년대 후반 기업의 직업훈련소 운영과 훈련의 효과 -금성통신 기간사원 양성과정을 중심으로-

저자 : 장미현 ( Mihyun Ja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9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35-369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기업의 직업훈련 사례 중 하나로 1970년대 후반 금성통신의 직업훈련을 살펴본다. 금성사에서 분사한 금성통신은 전국기능경기대회와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을 다수 배출하고 있었던 만큼 기능직 훈련에도 적극적이었다. 1976년부터는 사내 강사를 활용한 초급대학 수준의 훈련 과정을 개설하였다. 초급대학 수준의 기간사원 양성과정으로 개설된 이 훈련은 고졸 훈련생을 선발해 1년 간 훈련을 시킨 후 사무기술직에 입사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기간사원 양성과정을 통해 금성통신이 기대한 효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고졸사원을 입사시켜 총급여액을 절약하는 것이었고 둘째, 훈련소 기숙사 입소와 단체생활을 통해 애사심을 향상시켜 이직률을 낮추는 것이었다. 구술을 통해 확인했듯이 기간사원 양성과정 훈련생들 대다수가 훈련과정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1년 간의 훈련 과정은 입사 후 이들의 회사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훈련생들은 대졸사원 대우를 넘어 대학 진학을 회사가 지원할 것으로 기대했다. 기업과 훈련생들의 기대 효과가 달랐던 것이다. 한편 기업이 의도한 애사심과 단체생활을 통해 훈련생들은 자신들만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내·외에서 협력하였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훈련생들에겐 유리했지만 기업 차원에서는 인사관리 차원에서도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었다. 입사 후 훈련생들 대다수는 대졸사원 대우와 대졸은 다르다는 점을 체감했고 대다수가 야간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금성통신의 직업훈련은 해당 기업과 산업의 인력수급을 넘어 채용, 인사, 노동과정, 복무, 사내 인간관계 등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시에 구술자들의 생애사적 차원에서 보자면 기간사원 양성과정은 이들에게 교육과 취업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결국 대졸사원 대우였지 대졸과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시대적 한계 또한 금성통신 기간사원 양성과정과 구술자들의 생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examines the vocational training of Goldstar Telecommunication in the late 1970s as one of the cases of corporate vocational training. Goldstar Telecommunication, which was spun off from Goldstar Company was also active in training for skilled workers as it produced several winners in the National Skills Competition and Skill Olympics. Junior college-level training courses were also established in 1976 conducting in-house instructors. This training was a program, which was opened as a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course at the junior college level that trains selected high school graduates for one year, and then joins them in office technician positions,
There were two effects that Goldstar Telecommunication expected through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process: First, it was to cut down the total amount of salary by hiring high school graduates, and second, it was to lower the voluntary turnover rate by encouraging loyalty towards the company through entering a training camp dormitory and living together in a group. As confirmed through the verbal statement, most of the trainees in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course were satisfied with the training process and the one-year training course helped them a lot in terms of adjusting to the work environment after joining the company. However, not to mention getting equal treatment as the college graduates, the trainees expected that the company would support them in entering college. There were differences in expectations of the companies and the trainees. The majority of the trainees who moved to Seoul from other provincial areas were of the same age and formed a bond of their own at the training camp as they spend time in a group. They set up their own network and collaborated both inside and outside of work. Although such a network gave the trainees an edge over the others, it could become a potential risk factor for human resource management from the corporate perspective. After joining the company, most of the trainees chose to attend night college because they realized that there was a difference between being equivalent to the college graduates and actually being a college graduates.
As can be seen from this study, the vocational training of Goldstar Telecommunication was pan out in intricate relationships such as recruitment, HR, labor process, service, and interpersonal relationships within the company, beyond the supply and demand of manpower in the company and industry. Whils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interviewee's life history,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course provided them with education and employment opportunities. However, it was only an offering of the same treatment as college graduates. And beyond the education discrimination, the generational limitations were also confirmed through the study of the fundamental industry employees training process of Goldstar Telecommunication that they were not recognized as equal society members.

1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학교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1960~70년대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를 중심으로-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는 1960년대에 한일협정 반대, 삼선개헌 반대 투쟁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념서클이었다. 한연회는 출발 당시부터 총학생회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운동의 중심이 되어 총학생회를 선도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타 대학과의 연대 활동에서도 주축이 되었다. 1971년 위수령으로 한연회가 강제해산되었지만 출신 멤버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후신 조직인 민족문화연구회는 1975년 시위를 이끌었다. 연세대의 사례로 보면, 1970년대에 이념서클 출신 멤버와 후신 조직이 활발하게 반유신 투쟁에 참여하여 1960년대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흐름은 대학생이 정권의 억압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헌신했던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념서클은 대학생의 일상 문화를 공유하는 장이자 농촌활동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주체였다. 한연회는 농활을 학생운동으로 인식하고 농촌의 현실을 분석하여 가능한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시 대학생들의 단기간의 경험이 농촌문제를 파악하고 연대한다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농촌이 도시 시위에 지친 학생들의 '피신처'였을지도 모른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은 당대 대학생의 입장에서 다각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농활은 도시-농촌 문제를 환기하고 자기 비판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KCI등재

21970년대 전반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저자 : 이기훈 ( Lee¸ Ki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9 (3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3선 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모색하며 사회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대학과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정권은 군사교육인 교련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현역 군인을 교관으로 배치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의 보루로서 학원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교련반대 투쟁을 맹렬히 전개했다. 1970년 말부터 1971년 연세대 학생운동도 다른 대학 운동과 연대하여 대규모 집회와 시위, 단식농성을 전개하며 교련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을 휴교시키고 학생운동 주도자들을 강제 입영시키며 저항을 무산시켰다.
이후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성립하자 학생운동은 각 대학을 연대하여 조직적인 반유신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1974년 민청학련이 대표적인 사례다. 연세대 학생들도 민청학련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하다 구속되었다. 연세대학은 1974년 하반기부터 교수, 학생과 대학 당국이 모두 참여하는 대학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5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교수 학생의 복직, 복교에 대한 정권의 탄압에 대해 대학 공동체가 함께 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학원 자율성의 수호 이면에서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지향이 성숙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로서 민족-민중을 발견했다. 이는 주체의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세계를 해석하는 시야의 확장이었고, 역사와 공간을 민중운동과 변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실존적 지식인의 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념적 측면에서 학생운동은 학원을 벗어나 민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KCI등재

31980년대 초 신군부의 학원정책과 연세 학생운동-대학당국의 조치와 경찰의 개입-

저자 : 한성훈 ( Han¸ Sung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23 (4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80년대는 변혁의 시대였고 대학은 민주화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신군부의 학원대책은 학생운동이 갖는 반독재 민주화의 성격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통제와 개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계엄위원회의 방향 제시와 연구위원회의 구체적인 대책 마련으로 이어진 신군부의 학원정책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이어졌다. 신군부는 지도교수제를 중심으로 학생지도대책의 수립과 집행, 학사기구의 지도강화, 운동 학생들의 분리 조치로 학원을 재편하려 했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같은 대책은 1980년대 문교당국의 학원대책과 대학당국의 학생지도체제, 그리고 학사운영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학원의 통제는 정부의 학생지도대책과 대학의 학생징계 조치에서 극에 달했다. 정부가 개입하고 대학이 실행한 직권휴학과 강제징집에 따른 군입대 조치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대학은 정부의 학사대책과 학생운동 참여자에 대한 격리 조치에 적극 협조했으며, 학내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

KCI등재

419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와 혁신의 모색-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세영 ( Lee¸ Se 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학생운동의 퇴조기인 1990년대, 연세대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층에서의 학생운동 인식과 활동을 보다 풍부하게 복원하고자 함이다.
1990년대 초부터 학생운동이 위기에 빠지고 있으며, 대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는 학생들의 학생회/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 저하로부터 비롯되었다. 1990년대 대학사회와 문화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 졸업 후 취업난 심화, 사회주의권 붕괴 등으로 크게 변화했으며, 학생들의 의식도 변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학생회의 비민주성이 지적되면서 학생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학생운동도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연세대학생들은 '네트워크 총학생회'를 건설하는 등 학생회를 보다 민주화시키기 위한 실험을 하였으며, 기존 정치투쟁 중심의 학생운동 대신 보다 다원화된 부문운동을 벌여 학생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전반의 이런 인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6년 들어 학부제가 실시되면서 학생회의 인적 결속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8월 벌어진 '연대 항쟁'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이 커져갔다. 그 결과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97년도 총학생회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연세대 내에서 학생운동 혁신 논의는 학우대중의 불신에 더해 정권의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에 의하여 더욱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한총련을 사수할 것인지, 탈퇴할 것인지가 주요 이슈가 되면서, 학생운동 혁신 논의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거대 연합체 운동의 한계, 학생운동의 학생회 중심성 등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운동 방식의 모색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하거나, 교육권 투쟁과 같이 부문운동에 보다 천착하려는 것이 그것이었다.

KCI등재

51990년대~2000년대 초반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의 형성과 특징-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의 전개와 실천 중심으로-

저자 : 장미현 ( Jang¸ Mi Hy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3-203 (4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1990년대 이후 대학여성운동과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은 사회와 대학사회 내의 변화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모해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여성운동은 여성주의자 그룹이 주도하였는데 연세대 대학여성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은 '자주적 여학생운동' 계열과 보수적 기독교 계열 대학여성운동과 경쟁하면서 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은 대학 '여성'이라는 수적으로 다수지만 권력 차원에서는 소수인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의 구성과 몸의 구성, 정체성 정치와 몸의 정치 같은 다양한 실천을 전개해나갔다. 이 같은 사유의 과정은 새로운 문화를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문화를 바꾸는 과정이었던 만큼 실천은 쉽지 않았다. 다른 여성운동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자신과 싸우면서 '운동'을 훼손시키려는 동료, 이웃, 대학사회와 끊임없이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 불편함을 표현하면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2019년 연세대 총여학생회 제도는 폐지되었다. 제도의 폐지와는 상관없이 대학여성운동은 역사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사회운동이며 성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대학문화는 이러한 운동의 결과물이다. 향후 서울의 주요 대학 중 하나였던 연세대와 서울지역 다른 대학들, 특히 지역의 대학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주체의 형성과 지역적 특징, 학내 학생운동과의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KCI등재

62000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정체성 모색과 운동의 다각화-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저자 : 정다혜 ( Jeong¸ Da Hy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52 (4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2000년대 학생운동의 내용과 특성을 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2000년대 학생운동은 소수 활동가 중심 운동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확대되고 '탈정치'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학생운동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성숙, 대학생의 지위 변화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와 같은 전국단위 학생회연합체 운동은 약화되었으나, 등록금투쟁을 비롯한 교육투쟁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대학생 의제가 전체 사회운동의 의제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다. 학생운동의 위기를 학생운동 정체성의 재규정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변화된 대학생의 지위를 반영하여 사회경제적으로 고통받는 대학생·청년의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운동으로 학생운동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운동 조직과 활동 방식에서의 다양화 경향도 뚜렷이 나타난다. 시민사회운동을 대학 내에서 다양한 조직 방식으로 확산하거나 이슈를 중심으로 오픈된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이 증가하였다. 대표적으로 대학 내 비정규노동문제를 제기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공간을 학외에서 학내로 전환시키는 시도가 주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2000년대 학생운동에서 공통의 정치적 목표로 다수가 통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운동방식은 크게 감소한 반면, 이슈별로 활동가 간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은 증가했고, 여성주의가 점차 활동가 정체성에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였다. 2000년대 대학 내 사회운동세력의 '학생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옅어지고 있는데, 이는 변화된 대학생의 지위와 운동의 다변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KCI등재

718세기 나리포창 발전과 제주로의 곡물 조달

저자 : 김태홍 ( Kim¸ Tae Ho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89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나리포사실』에는 18세기 국가의 상업 정책과 지역 진휼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나리포창에 관한 연구는 상업 정책과 진휼 정책 차원에서 모순적으로 확인되었다. 전자는 상업에 대한 국가의 집권적 역할이 발전하는 사례로서 나리포창을 분석하였고, 후자는 진휼 정책이 이완하여 특정한 가치로만 유지된 사례로서 이해하였다. 양자는 각각 국가의 상품 유통체계 발전과 사적인 상품 교환경제 확대에서 나리포창을 다르게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본 글에서는 선행 연구를 전제하되, 나리포창의 발전과 곡물 조달이 모순되지 않았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는 제주 물산을 매개로 한 국가의 상업 이익 확보와 제주에 진휼 곡물을 조달하기 위한 교환경제 활용이 공존하였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나리포창 운영에는 국가가 제주 물산 발매를 통해서 접제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과 확보한 재원을 제주 인근 군현에서 무곡하여 제주에 조달하는 작업이 분류되면서도 절충해 있었다.

KCI등재

8『맹자(孟子)』를 척도로 본 조선후기 공전(公田) 담론의 경세학적 층차

저자 : 윤석호 ( Yoon¸ Suk H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1-341 (5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孟子』는 삼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가 仁政이라는 이념, 分田과 制祿이라는 원리, 井田制와 公田이라는 제도를 통해 운영되었음을 회고했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까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이상으로부터 단절된 현실에 살았던 그는, 삼대로부터 무엇을 또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공전에 대한 경학적·경세학적 과제를 후대 유자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조선후기는 전근대의 한국사에 있어 삼대적 이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온 시기였지만 '공전'을 소환한 다양한 경세 담론이 제기된 시기이기도 했다. 먼저 李縡는 '因時'라는 프리즘으로 공전의 이상성을 재해석했다. 공전의 이념은 현실에까지 왜곡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지만, 그것의 구현은 당시의 제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삼대와의 질적 차이 속에서 유학의 이상을 선택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그래서 공전의 원형을 저변으로 하되 '제록' 중심의 제도들을 통해 인정의 이념을 달성하려던 현실화된 공전 담론인 것이다.
柳馨遠은 공전 원리에 고금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부여했다. 특히 삼대의 기내봉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실의 군현제 하에서 정전제가 실행될 수 있게 하는 경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공전 원리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반계수록』에 정밀하게 설계했다. 맹자가 남겨 놓은 두 가지 과제를 '分田'과 '制祿'의 통합으로 풀어냈던, 또한 그로 인해 국가체제의 규모에서 개혁안을 논정했던 조선시대 최초의 경세 담론이었던 것이다.
丁若鏞은 공전 설치의 시공을 삼대 전역으로 확대했고, 9職의 전업과 이원적 수취체제를 상정했으며, 이상세율로서의 1/10을 기각했다. 나아가 다산은 '공전체제'를 모델로 한 점진적이고도 전면적인 개혁을 『경세유표』에서 기획했다. 이념과 원리, 그리고 제도의 총체로서의 공전이 국가 체제의 중핵이 되는, 즉 보편적 통치체제로서의 '공전체제'를 창안한 것이다.
이처럼 『맹자』가 전한 원형으로서의 공전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공전들로 재해석되었다. 그 경학적·경세학적 변주에는 많은 유자들이 동참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公田'의 실질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었다. 비록 '공전들'의 지향은 달랐을지라도, 그들이 공히 公田[井田]을 경세의 장에서 운위했음은 공전으로 표상되는 '공공성'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유학의 이상적 전장이 명확한 하나의 제도적 실체가 아님을, 그래서 현실의 다양한 요구와 지향에 상응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分田'의 실현을 타진했던 유자들이 치자의 세습적 특권에 대해 공통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음은 주목되는 지점이다.

KCI등재

9구례 유씨가의 처가왕래와 부계화

저자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3-380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구례 유씨가의 일기 분석을 통하여, 부계중심의 성리학적 친족질서가 정착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한말-일제하 양변적 친족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부계우위사상으로 소외되었음직한 사위의 위상과 존재는, 내부적으로는 지속적인 처가왕래를 통하여 부계화 관련 일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딸들에 비해 사위들은 처가를 빈번히 왕래하며 단순한 인사차 방문 뿐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재혼 후에도 사위들은 전(前)처가인 유씨가와의 인연을 지속하여, 조카에게는 심리적 의지처가 되어주며 경제적으로 서로 돕고 있었다. 장인 또한 사위들의 재취소생의 외손들의 교육과 혼례 등에 도움을 주었다. 사위들이 처가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처가와 가까이 살고 있었던 점, 유씨가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라는 점, 그리고 양반 지역민들끼리의 계모임과 시회를 통한 경제-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사위-고모부와 처족들 간에 물질적 교류와 심리적 연결을 보여주는 이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성리학자들이 추구했던 부계위주의 이념과는 달리 한말-일제하 유씨가에서는 양변적 친족 관행을 볼 수 있으며, 비부계친과의 경제-문화-정서적인 자원의 교류를 동원하여 혈족의 부계화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KCI등재

10개항기(1880~1906) 원산주재 일본영사의 파견과 거류지 행정

저자 : 최보영 ( Choi¸ Bo 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81-413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개항장 원산은 한국이 근대 이후 외국인에게 개항한 최초의 항구였다. 원산개항장 내에서 벌인 청일 양국의 각축에서 결국 일본이 승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 원산영사관의 설치와 여기에 파견된 영사들의 활동임은 자명하다. 본고에서는 원산영사의 파견과 활동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의 네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원산 개항은 일본에 의해 이뤄졌으며 이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군사적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수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을 경험한 김기수를 덕원부사로 임명하고 감리를 두어 이에 대응토록 하였다.
둘째, 일본영사의 면면을 보면 처음 원산 총영사관은 마에다를 총영사로 발탁할 정도로 원산을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을 보면 부산보다 짧은 것으로 보아 서울에 공사관이 개설되고 인천영사관이 개설된 이후 러시아의 견제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하에서 그 중요성이 적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원산영사가 제정·시행한 포달을 표로 정리하고 이들 포달이 갖는 특징을 정리하였다. 대개 확인된 49개의 포달을 보면 첫째, 매춘영업과 위생에 관한 포달, 둘째, 거류민의 행정·사법적 통제, 셋째, 어업에 관한 통제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거류지에 성업했던 매춘에 대한 문제들을 행정통제권 아래로 묶어두어 위생과 함께 무분별하게 낭비되는 비용을 절감하게 한 것이다. 또 거류민의 각종 영업활동에 대한 통제를 포달을 통해 수행했으며 개개인의 형법·민법적 불법행위를 영사재판권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해양을 끼고 있는 개항장이라는 것으로 많을 수밖에 없는 어업권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산에 파견된 영사는 영사 고유의 업무에 매진한 것과 함께 한국에 일본공사가 파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덕원부사와 교섭해 거류지 관련 조약을 체결하는 외교대표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일본인의 안정적인 거류지 정착을 위해 다양한 포달을 제정·시행하였다.

12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동양학
87권 0호

KCI등재

일본학
56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7권 0호

KCI등재

동아연구
82권 0호

KCI등재

중국연구
90권 0호

KCI등재

석당논총
82권 0호

KCI등재

중국학논총
75권 0호

KCI등재

학림
49권 0호

KCI등재

선사와 고대
67권 0호

KCI등재

몽골학
68권 0호

KCI등재

대구사학
146권 0호

KCI등재

동양예술
54권 0호

KCI등재

동아시아문화연구
88권 0호

KCI등재

고문서연구
60권 0호

KCI등재

사림(성대사림)
79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6권 0호

KCI등재

동양학
86권 0호

KCI등재

사총
105권 0호

사학지
61권 0호

복현사림
39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