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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1960~70년대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를 중심으로-

Student Movements of Ideological Groups in the 1960s and 1970s-Yonsei University’s Korean History Studies Association-

김아람 ( Kim¸ A Ram )
  • : 연세사학연구회
  • : 학림 4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9월
  • : 7-39(33pages)
학림

DOI


목차

1. 머리말
2. 4월혁명 후 학생활동 확대와 한국문제연구회 창립
3. 한국문제연구회의 정치운동과 재편
4. 농촌봉사활동을 통한 연대 모색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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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는 1960년대에 한일협정 반대, 삼선개헌 반대 투쟁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념서클이었다. 한연회는 출발 당시부터 총학생회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운동의 중심이 되어 총학생회를 선도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타 대학과의 연대 활동에서도 주축이 되었다. 1971년 위수령으로 한연회가 강제해산되었지만 출신 멤버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후신 조직인 민족문화연구회는 1975년 시위를 이끌었다. 연세대의 사례로 보면, 1970년대에 이념서클 출신 멤버와 후신 조직이 활발하게 반유신 투쟁에 참여하여 1960년대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흐름은 대학생이 정권의 억압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헌신했던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념서클은 대학생의 일상 문화를 공유하는 장이자 농촌활동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주체였다. 한연회는 농활을 학생운동으로 인식하고 농촌의 현실을 분석하여 가능한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시 대학생들의 단기간의 경험이 농촌문제를 파악하고 연대한다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농촌이 도시 시위에 지친 학생들의 ‘피신처’였을지도 모른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은 당대 대학생의 입장에서 다각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농활은 도시-농촌 문제를 환기하고 자기 비판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Yonsei University’s Korean Studies Association was an ideological group that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struggle against the Korea-Japan Agreement and the three-way amendment in the 1960s. The KSA participated in the student council from beginning, and later became the center of the movement, leading or opposing the student council. It also played a major role in solidarity activities with other universities. In 1971, the KSA was forcibly disbanded by the Garrison decree. Its members were arrested in the Mincheonghakryeon, and the National Culture Research Association, a successor organization, led the protests in 1975. In the case of Yonsei University, members from ideological groups and posterior organizations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anti-Yushin Regime struggles of the 1970s, showing continuity with the 1960s. This trend was part of a process in which college students continued to resist and devote themselves to fighting the oppression of the regime.
In addition, the ideological group was a place to share the daily culture of college students and led the student movements through rural activities. The KSA recognized agricultural activity as an element of the student movements and sought a possible role by analyzing the reality of rural areas. There must have been a clear limitation, in that urban college students’ short-term experience identified and solidified rural problems. There is also criticism that rural areas may have been a “place of refuge” for students tired of urban protests. However, the “student movement” of the ideological groups sought to find its meaning from the perspective of college students at the time from various angles and agricultural activity was to evoke urban-rural problems and to provide an opportunity to practice self-ref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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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0440-2324
  • : 2713-9824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50-2021
  • :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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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권0호(2021년 09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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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교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1960~70년대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를 중심으로-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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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는 1960년대에 한일협정 반대, 삼선개헌 반대 투쟁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념서클이었다. 한연회는 출발 당시부터 총학생회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운동의 중심이 되어 총학생회를 선도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타 대학과의 연대 활동에서도 주축이 되었다. 1971년 위수령으로 한연회가 강제해산되었지만 출신 멤버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후신 조직인 민족문화연구회는 1975년 시위를 이끌었다. 연세대의 사례로 보면, 1970년대에 이념서클 출신 멤버와 후신 조직이 활발하게 반유신 투쟁에 참여하여 1960년대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흐름은 대학생이 정권의 억압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헌신했던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념서클은 대학생의 일상 문화를 공유하는 장이자 농촌활동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주체였다. 한연회는 농활을 학생운동으로 인식하고 농촌의 현실을 분석하여 가능한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시 대학생들의 단기간의 경험이 농촌문제를 파악하고 연대한다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농촌이 도시 시위에 지친 학생들의 '피신처'였을지도 모른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은 당대 대학생의 입장에서 다각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농활은 도시-농촌 문제를 환기하고 자기 비판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Yonsei University's Korean Studies Association was an ideological group that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struggle against the Korea-Japan Agreement and the three-way amendment in the 1960s. The KSA participated in the student council from beginning, and later became the center of the movement, leading or opposing the student council. It also played a major role in solidarity activities with other universities. In 1971, the KSA was forcibly disbanded by the Garrison decree. Its members were arrested in the Mincheonghakryeon, and the National Culture Research Association, a successor organization, led the protests in 1975. In the case of Yonsei University, members from ideological groups and posterior organizations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anti-Yushin Regime struggles of the 1970s, showing continuity with the 1960s. This trend was part of a process in which college students continued to resist and devote themselves to fighting the oppression of the regime.
In addition, the ideological group was a place to share the daily culture of college students and led the student movements through rural activities. The KSA recognized agricultural activity as an element of the student movements and sought a possible role by analyzing the reality of rural areas. There must have been a clear limitation, in that urban college students' short-term experience identified and solidified rural problems. There is also criticism that rural areas may have been a “place of refuge” for students tired of urban protests. However, the “student movement” of the ideological groups sought to find its meaning from the perspective of college students at the time from various angles and agricultural activity was to evoke urban-rural problems and to provide an opportunity to practice self-ref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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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70년대 전반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저자 : 이기훈 ( Lee¸ Ki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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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모색하며 사회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대학과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정권은 군사교육인 교련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현역 군인을 교관으로 배치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의 보루로서 학원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교련반대 투쟁을 맹렬히 전개했다. 1970년 말부터 1971년 연세대 학생운동도 다른 대학 운동과 연대하여 대규모 집회와 시위, 단식농성을 전개하며 교련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을 휴교시키고 학생운동 주도자들을 강제 입영시키며 저항을 무산시켰다.
이후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성립하자 학생운동은 각 대학을 연대하여 조직적인 반유신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1974년 민청학련이 대표적인 사례다. 연세대 학생들도 민청학련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하다 구속되었다. 연세대학은 1974년 하반기부터 교수, 학생과 대학 당국이 모두 참여하는 대학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5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교수 학생의 복직, 복교에 대한 정권의 탄압에 대해 대학 공동체가 함께 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학원 자율성의 수호 이면에서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지향이 성숙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로서 민족-민중을 발견했다. 이는 주체의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세계를 해석하는 시야의 확장이었고, 역사와 공간을 민중운동과 변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실존적 지식인의 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념적 측면에서 학생운동은 학원을 벗어나 민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Following the 1969 constitutional amendment that allowed a third term of presidency,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cracked down on any civil resistance, so it could hold on to political power indefinitely. To suppress student movement and discipline universities, the Park administration ordered compulsory military training at all universities and planned to place military officers as teachers for the training. The students staged a severe protest against such a move, in order to guard the independence and freedom of university campuses as the last bastion of democracy. From the end of 1970 to 1971, student activists at Yonsei University formed a coalition with other universities and staged massive street rallies, demonstrations and hunger strikes to protest against forced military training on campus. The government, however, crushed all resistant attempts by issuing a garrison decree (a soft martial law), closing down universities and forcefully enlisting the student movement leaders to military service.
When the Yushin Regime was established in October 1972, the student activists from different universities again formed a coalition and staged organized protests against the Yuhsin regime. The activity of the student organization National Democratic Youth-Student League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is most representative. Many Yonsei University students also participated in its activities and were arrested. In the late half of 1974, Yonsei University conducted a major administrative reform, where faculty, student and university administration all participated, and achieve successful outcomes. This encouraged the university community to join forces and stand up against political oppression in the 1975 reinstatement of faculty and students who had to leave the school for their involvements in the National Democratic Youth-Student League incident.
While guarding freedom on the university campus, student movement was also maturing in terms of its ideology and overall direction. The students went beyond striving for achieving liberal democracy;they discovered national identity and the people as an important player in realizing democracy. This implied more than just broadening the students' understanding of the key players in the movement, but also of their whole viewpoint on modern history; the students came to see history and its physical space from the perspective of civil movement and revolution. While still portrayed as existential intellectuals, the student activists and their movement started to look beyond the university campus, to the outside world, and embrace the people in their ideological conce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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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80년대 초 신군부의 학원정책과 연세 학생운동-대학당국의 조치와 경찰의 개입-

저자 : 한성훈 ( Han¸ Sung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2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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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변혁의 시대였고 대학은 민주화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신군부의 학원대책은 학생운동이 갖는 반독재 민주화의 성격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통제와 개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계엄위원회의 방향 제시와 연구위원회의 구체적인 대책 마련으로 이어진 신군부의 학원정책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이어졌다. 신군부는 지도교수제를 중심으로 학생지도대책의 수립과 집행, 학사기구의 지도강화, 운동 학생들의 분리 조치로 학원을 재편하려 했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같은 대책은 1980년대 문교당국의 학원대책과 대학당국의 학생지도체제, 그리고 학사운영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학원의 통제는 정부의 학생지도대책과 대학의 학생징계 조치에서 극에 달했다. 정부가 개입하고 대학이 실행한 직권휴학과 강제징집에 따른 군입대 조치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대학은 정부의 학사대책과 학생운동 참여자에 대한 격리 조치에 적극 협조했으며, 학내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


The 1980s were an era of transformation, with universities at the center of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Under the new military leadership, university policies reflected the nature of the anti-trust democratization of the student movement, and at the same time, control and intervention progressed extensively. The new military's academy policy, which introduced a direction for the Martial Law Committee and the preparation of specific measures by the Research Committee, led to the National Security Emergency Committee. The new military tried to reorganize the academy by establishing and implementing student guidance measures, strengthening the guidance of academic organizations, and separating students, focusing on a supervisory system. Although they varied slightly from period to period, these policies shaped the government of the 1980s and established themselves as the basic principles for the student guidance system and academic management. The control of the academy reached its peak in the student guidance measures and student disciplinary measures. The government's intervention and the leave of absence and military conscription measures violated the human rights of students. The university actively cooperated with the government's academic measures and quarantine measures for participants in the student movements, and did not make efforts to restore school aut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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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와 혁신의 모색-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세영 ( Lee¸ Se 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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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학생운동의 퇴조기인 1990년대, 연세대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층에서의 학생운동 인식과 활동을 보다 풍부하게 복원하고자 함이다.
1990년대 초부터 학생운동이 위기에 빠지고 있으며, 대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는 학생들의 학생회/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 저하로부터 비롯되었다. 1990년대 대학사회와 문화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 졸업 후 취업난 심화, 사회주의권 붕괴 등으로 크게 변화했으며, 학생들의 의식도 변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학생회의 비민주성이 지적되면서 학생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학생운동도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연세대학생들은 '네트워크 총학생회'를 건설하는 등 학생회를 보다 민주화시키기 위한 실험을 하였으며, 기존 정치투쟁 중심의 학생운동 대신 보다 다원화된 부문운동을 벌여 학생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전반의 이런 인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6년 들어 학부제가 실시되면서 학생회의 인적 결속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8월 벌어진 '연대 항쟁'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이 커져갔다. 그 결과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97년도 총학생회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연세대 내에서 학생운동 혁신 논의는 학우대중의 불신에 더해 정권의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에 의하여 더욱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한총련을 사수할 것인지, 탈퇴할 것인지가 주요 이슈가 되면서, 학생운동 혁신 논의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거대 연합체 운동의 한계, 학생운동의 학생회 중심성 등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운동 방식의 모색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하거나, 교육권 투쟁과 같이 부문운동에 보다 천착하려는 것이 그것이었다.


This study examines how attempts were made to cope with the 'crisis of student movement' centered on Yonsei University in the 1990s, when the student movement was at its decline.
Since the early 1990s, there has been a widespread perception that the student movement is in crisis and that alternatives are needed. This resulted from a decline in students' interest in and participation in student councils/student movements. Amid the change in university culture, it was analyzed that the student movement could only be revitalized if the undemocratic student council was changed more democratically.
Yonsei University students conducted experiments to further democratize the student council and attempted to expand the base of the student movement by conducting a more diverse sector movement instead of political struggle.
However, despite these efforts, the student council's human solidarity weakened rapidly with the implementation of the undergraduate system in 1996. Also, due to the 'YONSEI uprising' in August, students' distrust of the student movement has grown irrevocably.
Despite all the difficulties, the search for a new mode of movement continued, criticizing the limitations of the large coalition movement and the student council's centrality. It was to participate in the construction of a new progressive party, or to be more inclined to sector movements, such as the struggle for educational 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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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90년대~2000년대 초반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의 형성과 특징-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의 전개와 실천 중심으로-

저자 : 장미현 ( Jang¸ Mi Hy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3-20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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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대학여성운동과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은 사회와 대학사회 내의 변화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모해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여성운동은 여성주의자 그룹이 주도하였는데 연세대 대학여성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은 '자주적 여학생운동' 계열과 보수적 기독교 계열 대학여성운동과 경쟁하면서 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은 대학 '여성'이라는 수적으로 다수지만 권력 차원에서는 소수인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의 구성과 몸의 구성, 정체성 정치와 몸의 정치 같은 다양한 실천을 전개해나갔다. 이 같은 사유의 과정은 새로운 문화를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문화를 바꾸는 과정이었던 만큼 실천은 쉽지 않았다. 다른 여성운동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자신과 싸우면서 '운동'을 훼손시키려는 동료, 이웃, 대학사회와 끊임없이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 불편함을 표현하면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2019년 연세대 총여학생회 제도는 폐지되었다. 제도의 폐지와는 상관없이 대학여성운동은 역사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사회운동이며 성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대학문화는 이러한 운동의 결과물이다. 향후 서울의 주요 대학 중 하나였던 연세대와 서울지역 다른 대학들, 특히 지역의 대학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주체의 형성과 지역적 특징, 학내 학생운동과의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Since the 1990s, the women's movement on campus at Yonsei University has been unfolded while being influenced by the situation of university community. Since the mid-1990s, campus feminists have led the women's movement on campus at Yonsei University. They competed with the 'NL(National Liberation)' women's movement group and the conservative Christian women's movement group on campus. Feminist group on campus at Yonsei University thought and analyzed why women's students were excluded from power despite the majority and they tried identity politics and body politics through cultural festivals. They aimed to change the masculine culture on campus. Though this process was not simple, they have spread 'gender politics' and feminism both inside and outside campus in solidarity with LGBT students and students with disabilities. This article was written focusing on the feminist women's movement on campus at Yonsei University. However, it is necessary to closely examine the perspectives and practices of the 'anti-imperialism/nationalism' university women's movement on various campuses in the first half of the 1990s. In particular, in the case of the local women's movement on campu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ormation of the subject,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student movement will be necessary to analyze in more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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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00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정체성 모색과 운동의 다각화-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저자 : 정다혜 ( Jeong¸ Da Hy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5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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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0년대 학생운동의 내용과 특성을 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2000년대 학생운동은 소수 활동가 중심 운동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확대되고 '탈정치'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학생운동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성숙, 대학생의 지위 변화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와 같은 전국단위 학생회연합체 운동은 약화되었으나, 등록금투쟁을 비롯한 교육투쟁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대학생 의제가 전체 사회운동의 의제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다. 학생운동의 위기를 학생운동 정체성의 재규정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변화된 대학생의 지위를 반영하여 사회경제적으로 고통받는 대학생·청년의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운동으로 학생운동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운동 조직과 활동 방식에서의 다양화 경향도 뚜렷이 나타난다. 시민사회운동을 대학 내에서 다양한 조직 방식으로 확산하거나 이슈를 중심으로 오픈된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이 증가하였다. 대표적으로 대학 내 비정규노동문제를 제기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공간을 학외에서 학내로 전환시키는 시도가 주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2000년대 학생운동에서 공통의 정치적 목표로 다수가 통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운동방식은 크게 감소한 반면, 이슈별로 활동가 간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은 증가했고, 여성주의가 점차 활동가 정체성에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였다. 2000년대 대학 내 사회운동세력의 '학생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옅어지고 있는데, 이는 변화된 대학생의 지위와 운동의 다변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trends and characteristics of the student movement in the 2000s, focusing on the case of Yonsei University. The student movement evolved into having only a small number of activists. Neoliberalism had significant impacts on the university operating system and the lives of students. It led to the weakening of student organizations and to a trend of “depoliticization.” Nevertheless, the progressive movements led by students continued, and students searched for a new direction influenced by social change. The movement driven by student unions was centered on tuition protests and the struggle to transform a market-oriented education system. Tuition protests expanded from an issue confined to the student movement to making the agenda of other social movements, including civil movements and labor movements. Some student activists argued that the goal of the student movement should be focused on solving the “youth problem,” away from elitism. They tried to redefine the identity of the student movement by reflecting the changed status of college students and the social structural conditions. On the other hand, the flexibility of movement organizations increased, and the agenda was diversified. While the tendency for movements in which the majority struggles for a single common goal has decreased, the joint struggles among activists has increased. In addition, feminism has become important to activist identity. Overall, the identity of student activists as “student movement activists” is gradually fading. This can be regarded to stem from the change in college students' status and the diversification of mov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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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세기 나리포창 발전과 제주로의 곡물 조달

저자 : 김태홍 ( Kim¸ Tae Ho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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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포사실』에는 18세기 국가의 상업 정책과 지역 진휼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나리포창에 관한 연구는 상업 정책과 진휼 정책 차원에서 모순적으로 확인되었다. 전자는 상업에 대한 국가의 집권적 역할이 발전하는 사례로서 나리포창을 분석하였고, 후자는 진휼 정책이 이완하여 특정한 가치로만 유지된 사례로서 이해하였다. 양자는 각각 국가의 상품 유통체계 발전과 사적인 상품 교환경제 확대에서 나리포창을 다르게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본 글에서는 선행 연구를 전제하되, 나리포창의 발전과 곡물 조달이 모순되지 않았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는 제주 물산을 매개로 한 국가의 상업 이익 확보와 제주에 진휼 곡물을 조달하기 위한 교환경제 활용이 공존하였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나리포창 운영에는 국가가 제주 물산 발매를 통해서 접제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과 확보한 재원을 제주 인근 군현에서 무곡하여 제주에 조달하는 작업이 분류되면서도 절충해 있었다.


The 18th century national commercial policy and regional relief were recorded In the 『Nariposasil』. Until now, research on Naripochang has been conducted contradictingly in terms of commercial policy and relief policy. The former analyzed Naripochang as an example of the development of the state's dominant role in commerce, and the latter was understood as an example in which the relief policy was relaxed and maintained at a specific value. The two may have seen Naripochang differently in terms of the national product distribution system and private product exchange economy. This article presupposes prior research, but attempts to clarify that the development of Naripochang and the procurement of grain were not contradictory. The national commercial interests and riding on the exchange economy for grain procurement were categorized but also comprom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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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맹자(孟子)』를 척도로 본 조선후기 공전(公田) 담론의 경세학적 층차

저자 : 윤석호 ( Yoon¸ Suk H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1-341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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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는 삼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가 仁政이라는 이념, 分田과 制祿이라는 원리, 井田制와 公田이라는 제도를 통해 운영되었음을 회고했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까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이상으로부터 단절된 현실에 살았던 그는, 삼대로부터 무엇을 또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공전에 대한 경학적·경세학적 과제를 후대 유자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조선후기는 전근대의 한국사에 있어 삼대적 이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온 시기였지만 '공전'을 소환한 다양한 경세 담론이 제기된 시기이기도 했다. 먼저 李縡는 '因時'라는 프리즘으로 공전의 이상성을 재해석했다. 공전의 이념은 현실에까지 왜곡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지만, 그것의 구현은 당시의 제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삼대와의 질적 차이 속에서 유학의 이상을 선택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그래서 공전의 원형을 저변으로 하되 '제록' 중심의 제도들을 통해 인정의 이념을 달성하려던 현실화된 공전 담론인 것이다.
柳馨遠은 공전 원리에 고금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부여했다. 특히 삼대의 기내봉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실의 군현제 하에서 정전제가 실행될 수 있게 하는 경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공전 원리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반계수록』에 정밀하게 설계했다. 맹자가 남겨 놓은 두 가지 과제를 '分田'과 '制祿'의 통합으로 풀어냈던, 또한 그로 인해 국가체제의 규모에서 개혁안을 논정했던 조선시대 최초의 경세 담론이었던 것이다.
丁若鏞은 공전 설치의 시공을 삼대 전역으로 확대했고, 9職의 전업과 이원적 수취체제를 상정했으며, 이상세율로서의 1/10을 기각했다. 나아가 다산은 '공전체제'를 모델로 한 점진적이고도 전면적인 개혁을 『경세유표』에서 기획했다. 이념과 원리, 그리고 제도의 총체로서의 공전이 국가 체제의 중핵이 되는, 즉 보편적 통치체제로서의 '공전체제'를 창안한 것이다.
이처럼 『맹자』가 전한 원형으로서의 공전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공전들로 재해석되었다. 그 경학적·경세학적 변주에는 많은 유자들이 동참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公田'의 실질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었다. 비록 '공전들'의 지향은 달랐을지라도, 그들이 공히 公田[井田]을 경세의 장에서 운위했음은 공전으로 표상되는 '공공성'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유학의 이상적 전장이 명확한 하나의 제도적 실체가 아님을, 그래서 현실의 다양한 요구와 지향에 상응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分田'의 실현을 타진했던 유자들이 치자의 세습적 특권에 대해 공통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음은 주목되는 지점이다.


『Mencius』 recalled the ideal land system of Confucianism, in which Gonjeon(公田) was a core institution. However, he did not provide specific information. Moreover, living in a reality that differed from the ideal, Mencius did not clearly explain what shape this ideal should take and how to realize it. As a result, the task of elaborating on 『Mencius』's explanation of Gongjeon in the lights of Confucian Classics and statecraft was left to later Confucian scholars.
The late Joseon Dynasty was the farthest period from the ideal in the Korean history of the premodern era, but it was also the time when various statecraft discourses were produced that evoked Gongjeon.
First, Lee Jae(李縡) reinterpreted the ideal of Gongjeon through a prism called Insi(因時). He believed that the ideology of Gongjeon had universality that still applied even today, but that it could only be achieved through the system that was in place then. His was a realistic revolutionary discourse to selectively realize the ideal of Gongjeon, so as to achieve Injoeng(仁政) through a Zerok(制祿)-centered system.
Yu Hyeong won(柳馨遠) regarded the principle of Gongjeon(公田) as a universality that penetrated the past and the present. In particular, he denied the implementation of the feudal system(封建制) in Wangki(王畿), which became the logical link for seeking the feasibility of Jengjeonje(井田制) under the rational bureaucracy(郡縣制). In 『PangyeSurok(磻溪隨錄)』, he specifically designed a state system based on the principle of Gongjeon. It was the first major discourse of the Joseon Dynasty that solved the two tasks bequeathed by Mencius through the integration of Bunjoen(分田) and Zerok(制祿), and thus discussed the reform plan on the scale of the national system.
Jung Yak yong(丁若鏞) invented the System of State on Gongjeon(公田體制), in which Gongjeon(公田) was a key law. He argued that only farmers should gain land, and that land gainers should co-cultivate the Gongjeon(公田) for paying tax on land. He also insisted that people who did not receive farmland should become experts in other occupations. His vision was of a country where professionalization was achieved in all industries, including agriculture. Furthermore, in 『GyeongseYupyo(經世遺表)』 he planned a gradual and sweeping reform modeled on the System of State on Gongjeon.
Thus, the idea of Gongjeon conveyed by 『Mencius』 was reinterpreted as various gonjeons. Many Confucian scholars fed the variations, and in the process, the substance of Gongjeon was split into various strands. This shows that the ideal Confucian system is not institutionally clear, so there is room for adapting it to the various demands and goals of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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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구례 유씨가의 처가왕래와 부계화

저자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3-38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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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구례 유씨가의 일기 분석을 통하여, 부계중심의 성리학적 친족질서가 정착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한말-일제하 양변적 친족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부계우위사상으로 소외되었음직한 사위의 위상과 존재는, 내부적으로는 지속적인 처가왕래를 통하여 부계화 관련 일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딸들에 비해 사위들은 처가를 빈번히 왕래하며 단순한 인사차 방문 뿐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재혼 후에도 사위들은 전(前)처가인 유씨가와의 인연을 지속하여, 조카에게는 심리적 의지처가 되어주며 경제적으로 서로 돕고 있었다. 장인 또한 사위들의 재취소생의 외손들의 교육과 혼례 등에 도움을 주었다. 사위들이 처가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처가와 가까이 살고 있었던 점, 유씨가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라는 점, 그리고 양반 지역민들끼리의 계모임과 시회를 통한 경제-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사위-고모부와 처족들 간에 물질적 교류와 심리적 연결을 보여주는 이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성리학자들이 추구했던 부계위주의 이념과는 달리 한말-일제하 유씨가에서는 양변적 친족 관행을 볼 수 있으며, 비부계친과의 경제-문화-정서적인 자원의 교류를 동원하여 혈족의 부계화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This paper presents examples of bilateral kinship during the late Korean empire and Japanese ruling period through an analysis of Gurye(求禮) Ryu(柳)'s diary, contradicting the conventional interpretation that the patriarchal Neo-Confucianists would have reached. Contrary to ideology such as chul-ga-oei-in(出嫁外人), according to which Neo-Confucian scholars emphasized that the daughter in Yangban who got married cut off all relations with her family, the married daughter in Ryu who lived near her parents visited her family house either on short or long vacations. On the surface, the status and existence of the son-in-law, who would have been alienated by the patriarchal order, contributed to patrilineal transformation internally through continuous interaction with the in-laws. Compared to the daughters, sons-inlaw frequently visited their wife's family, not only to greet them but also to exchange economic and cultural resources. Even after remarriage following their wife's death, sons-in-law continued their relationship with their ex-wife's family, becoming a psychological and emotional support for their nephews-inlaw and helping each other economically. The father-in-law also helped with the son-in-law's children's education and weddings. Some of the reasons the son-in-law was able to form a close relationship with his wife's family include that it was not far away geographically, that they had known Ryu for a long time (over generations), and that it was through Korean traditional private funding and poetry meetings. Material exchanges and psychological connections between non-paternal relatives like sons-and fathers-in-law suggest that unlike the patriarchal ideology highlighted by the Neo-Confucianists, the results of analysis of the Gurye Ryu family's diar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reveal that a bilateral kinship custom was persistent and that each kin promoted their own patrilineal transformation through economic-cultural resource exchanges in terms of strategic mob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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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항기(1880~1906) 원산주재 일본영사의 파견과 거류지 행정

저자 : 최보영 ( Choi¸ Bo 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81-41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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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원산은 한국이 근대 이후 외국인에게 개항한 최초의 항구였다. 원산개항장 내에서 벌인 청일 양국의 각축에서 결국 일본이 승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 원산영사관의 설치와 여기에 파견된 영사들의 활동임은 자명하다. 본고에서는 원산영사의 파견과 활동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의 네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원산 개항은 일본에 의해 이뤄졌으며 이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군사적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수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을 경험한 김기수를 덕원부사로 임명하고 감리를 두어 이에 대응토록 하였다.
둘째, 일본영사의 면면을 보면 처음 원산 총영사관은 마에다를 총영사로 발탁할 정도로 원산을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을 보면 부산보다 짧은 것으로 보아 서울에 공사관이 개설되고 인천영사관이 개설된 이후 러시아의 견제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하에서 그 중요성이 적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원산영사가 제정·시행한 포달을 표로 정리하고 이들 포달이 갖는 특징을 정리하였다. 대개 확인된 49개의 포달을 보면 첫째, 매춘영업과 위생에 관한 포달, 둘째, 거류민의 행정·사법적 통제, 셋째, 어업에 관한 통제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거류지에 성업했던 매춘에 대한 문제들을 행정통제권 아래로 묶어두어 위생과 함께 무분별하게 낭비되는 비용을 절감하게 한 것이다. 또 거류민의 각종 영업활동에 대한 통제를 포달을 통해 수행했으며 개개인의 형법·민법적 불법행위를 영사재판권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해양을 끼고 있는 개항장이라는 것으로 많을 수밖에 없는 어업권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산에 파견된 영사는 영사 고유의 업무에 매진한 것과 함께 한국에 일본공사가 파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덕원부사와 교섭해 거류지 관련 조약을 체결하는 외교대표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일본인의 안정적인 거류지 정착을 위해 다양한 포달을 제정·시행하였다.


The open port period of Wonsan was, in practice, the first Korean port to be opened to foreigners. It is widely agreed that the installation of the Japanese consulate and dispatch of consults in Wonsan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Japan to win the Sino-Japanese conflict in the open port. This article is focused on the dispatch and activities of Japanese consuls in Wonsan, and discusses the four main findings as follows:
First, the port of Wonsan was opened by Japan in order to monitor Russia for possible invasion into the South. As a result, Korea appointed Kimgisu(金綺秀), who was previously dispatched to Japan as a diplomat, provincial governor of Deokwon.
Second, at first, Japan appeared to have considered Wonsan as an important location, considering the country has sent Maeda(前田) as the first consul-general of the consulate in Wonsan. However, in terms of the average tenure in Wonsan, it was shorter than that in Busan. This suggests the importance of Wonsan decrease dafter a legation was set up in Seoul and another consulate in Incheon, as Japan possibly realized monitoring Russia was not as important as they once thought.
Third, consuls dispatched to Wonsan did not only perform tasks dedicated to consuls but they also acted as diplomatic representatives who signed a settlement-related treaty with the provincial governor of Deokwon. Also, they created and enforced various consul's announcements supporting stable settlement of Japanese people.
Lastly, the article provides a table of announcements enacted and enforced by the consuls in Wonsan and discuss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announcements. The 49 announcements were largely divided into:first, ones related to prostitution and sanitation;second, administrative and legislative control of the settlement residents;and third, fishing-related regulations. The purpose was to save costs related to sanitation, by categorizing issues related to prostitution, which was rampant at the time of settlement, under the administrative control. Also, the announcements served as regulations of various sales activities and were intended to handle illegal activities of individuals based on the consular jurisdiction. Also, they were used to control the fishery right that was closely related to the open port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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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교에서 거리로, 도시에서 농촌으로:1960~70년대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를 중심으로-

저자 : 김아람 ( Kim¸ A Ram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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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는 1960년대에 한일협정 반대, 삼선개헌 반대 투쟁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념서클이었다. 한연회는 출발 당시부터 총학생회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운동의 중심이 되어 총학생회를 선도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타 대학과의 연대 활동에서도 주축이 되었다. 1971년 위수령으로 한연회가 강제해산되었지만 출신 멤버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후신 조직인 민족문화연구회는 1975년 시위를 이끌었다. 연세대의 사례로 보면, 1970년대에 이념서클 출신 멤버와 후신 조직이 활발하게 반유신 투쟁에 참여하여 1960년대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흐름은 대학생이 정권의 억압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헌신했던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념서클은 대학생의 일상 문화를 공유하는 장이자 농촌활동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주체였다. 한연회는 농활을 학생운동으로 인식하고 농촌의 현실을 분석하여 가능한 역할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시 대학생들의 단기간의 경험이 농촌문제를 파악하고 연대한다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농촌이 도시 시위에 지친 학생들의 '피신처'였을지도 모른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념서클의 '학생운동'은 당대 대학생의 입장에서 다각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농활은 도시-농촌 문제를 환기하고 자기 비판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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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70년대 전반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저자 : 이기훈 ( Lee¸ Ki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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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모색하며 사회적 저항을 약화시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대학과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정권은 군사교육인 교련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현역 군인을 교관으로 배치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의 보루로서 학원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교련반대 투쟁을 맹렬히 전개했다. 1970년 말부터 1971년 연세대 학생운동도 다른 대학 운동과 연대하여 대규모 집회와 시위, 단식농성을 전개하며 교련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을 휴교시키고 학생운동 주도자들을 강제 입영시키며 저항을 무산시켰다.
이후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성립하자 학생운동은 각 대학을 연대하여 조직적인 반유신 운동을 시도하였는데, 1974년 민청학련이 대표적인 사례다. 연세대 학생들도 민청학련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하다 구속되었다. 연세대학은 1974년 하반기부터 교수, 학생과 대학 당국이 모두 참여하는 대학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5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교수 학생의 복직, 복교에 대한 정권의 탄압에 대해 대학 공동체가 함께 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학원 자율성의 수호 이면에서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지향이 성숙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실현 주체로서 민족-민중을 발견했다. 이는 주체의 확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세계를 해석하는 시야의 확장이었고, 역사와 공간을 민중운동과 변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실존적 지식인의 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념적 측면에서 학생운동은 학원을 벗어나 민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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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80년대 초 신군부의 학원정책과 연세 학생운동-대학당국의 조치와 경찰의 개입-

저자 : 한성훈 ( Han¸ Sung Hoo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2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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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변혁의 시대였고 대학은 민주화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다. 신군부의 학원대책은 학생운동이 갖는 반독재 민주화의 성격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통제와 개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계엄위원회의 방향 제시와 연구위원회의 구체적인 대책 마련으로 이어진 신군부의 학원정책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이어졌다. 신군부는 지도교수제를 중심으로 학생지도대책의 수립과 집행, 학사기구의 지도강화, 운동 학생들의 분리 조치로 학원을 재편하려 했다. 시기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같은 대책은 1980년대 문교당국의 학원대책과 대학당국의 학생지도체제, 그리고 학사운영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학원의 통제는 정부의 학생지도대책과 대학의 학생징계 조치에서 극에 달했다. 정부가 개입하고 대학이 실행한 직권휴학과 강제징집에 따른 군입대 조치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였다. 대학은 정부의 학사대책과 학생운동 참여자에 대한 격리 조치에 적극 협조했으며, 학내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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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9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와 혁신의 모색-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이세영 ( Lee¸ Se 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5-16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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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학생운동의 퇴조기인 1990년대, 연세대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층에서의 학생운동 인식과 활동을 보다 풍부하게 복원하고자 함이다.
1990년대 초부터 학생운동이 위기에 빠지고 있으며, 대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는 학생들의 학생회/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 저하로부터 비롯되었다. 1990년대 대학사회와 문화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 졸업 후 취업난 심화, 사회주의권 붕괴 등으로 크게 변화했으며, 학생들의 의식도 변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학생회의 비민주성이 지적되면서 학생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학생운동도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연세대학생들은 '네트워크 총학생회'를 건설하는 등 학생회를 보다 민주화시키기 위한 실험을 하였으며, 기존 정치투쟁 중심의 학생운동 대신 보다 다원화된 부문운동을 벌여 학생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90년대 전반의 이런 인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6년 들어 학부제가 실시되면서 학생회의 인적 결속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8월 벌어진 '연대 항쟁'으로 인해, 학생들의 학생운동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이 커져갔다. 그 결과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97년도 총학생회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연세대 내에서 학생운동 혁신 논의는 학우대중의 불신에 더해 정권의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에 의하여 더욱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한총련을 사수할 것인지, 탈퇴할 것인지가 주요 이슈가 되면서, 학생운동 혁신 논의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거대 연합체 운동의 한계, 학생운동의 학생회 중심성 등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운동 방식의 모색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하거나, 교육권 투쟁과 같이 부문운동에 보다 천착하려는 것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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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90년대~2000년대 초반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의 형성과 특징-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의 전개와 실천 중심으로-

저자 : 장미현 ( Jang¸ Mi Hy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3-203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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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대학여성운동과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은 사회와 대학사회 내의 변화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모해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여성운동은 여성주의자 그룹이 주도하였는데 연세대 대학여성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연세대 대학여성운동은 '자주적 여학생운동' 계열과 보수적 기독교 계열 대학여성운동과 경쟁하면서 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여성주의 대학여성운동은 대학 '여성'이라는 수적으로 다수지만 권력 차원에서는 소수인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체성의 구성과 몸의 구성, 정체성 정치와 몸의 정치 같은 다양한 실천을 전개해나갔다. 이 같은 사유의 과정은 새로운 문화를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문화를 바꾸는 과정이었던 만큼 실천은 쉽지 않았다. 다른 여성운동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자신과 싸우면서 '운동'을 훼손시키려는 동료, 이웃, 대학사회와 끊임없이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 불편함을 표현하면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2019년 연세대 총여학생회 제도는 폐지되었다. 제도의 폐지와는 상관없이 대학여성운동은 역사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사회운동이며 성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대학문화는 이러한 운동의 결과물이다. 향후 서울의 주요 대학 중 하나였던 연세대와 서울지역 다른 대학들, 특히 지역의 대학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주체의 형성과 지역적 특징, 학내 학생운동과의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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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00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정체성 모색과 운동의 다각화-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저자 : 정다혜 ( Jeong¸ Da Hy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5-25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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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0년대 학생운동의 내용과 특성을 연세대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2000년대 학생운동은 소수 활동가 중심 운동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확대되고 '탈정치'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학생운동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성숙, 대학생의 지위 변화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와 같은 전국단위 학생회연합체 운동은 약화되었으나, 등록금투쟁을 비롯한 교육투쟁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대학생 의제가 전체 사회운동의 의제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다. 학생운동의 위기를 학생운동 정체성의 재규정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변화된 대학생의 지위를 반영하여 사회경제적으로 고통받는 대학생·청년의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운동으로 학생운동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운동 조직과 활동 방식에서의 다양화 경향도 뚜렷이 나타난다. 시민사회운동을 대학 내에서 다양한 조직 방식으로 확산하거나 이슈를 중심으로 오픈된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이 증가하였다. 대표적으로 대학 내 비정규노동문제를 제기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공간을 학외에서 학내로 전환시키는 시도가 주목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2000년대 학생운동에서 공통의 정치적 목표로 다수가 통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운동방식은 크게 감소한 반면, 이슈별로 활동가 간 연대를 강화하는 방식은 증가했고, 여성주의가 점차 활동가 정체성에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였다. 2000년대 대학 내 사회운동세력의 '학생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옅어지고 있는데, 이는 변화된 대학생의 지위와 운동의 다변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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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세기 나리포창 발전과 제주로의 곡물 조달

저자 : 김태홍 ( Kim¸ Tae Ho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5-289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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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포사실』에는 18세기 국가의 상업 정책과 지역 진휼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나리포창에 관한 연구는 상업 정책과 진휼 정책 차원에서 모순적으로 확인되었다. 전자는 상업에 대한 국가의 집권적 역할이 발전하는 사례로서 나리포창을 분석하였고, 후자는 진휼 정책이 이완하여 특정한 가치로만 유지된 사례로서 이해하였다. 양자는 각각 국가의 상품 유통체계 발전과 사적인 상품 교환경제 확대에서 나리포창을 다르게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본 글에서는 선행 연구를 전제하되, 나리포창의 발전과 곡물 조달이 모순되지 않았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는 제주 물산을 매개로 한 국가의 상업 이익 확보와 제주에 진휼 곡물을 조달하기 위한 교환경제 활용이 공존하였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나리포창 운영에는 국가가 제주 물산 발매를 통해서 접제 재원을 마련하는 작업과 확보한 재원을 제주 인근 군현에서 무곡하여 제주에 조달하는 작업이 분류되면서도 절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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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맹자(孟子)』를 척도로 본 조선후기 공전(公田) 담론의 경세학적 층차

저자 : 윤석호 ( Yoon¸ Suk Ho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1-341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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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는 삼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가 仁政이라는 이념, 分田과 制祿이라는 원리, 井田制와 公田이라는 제도를 통해 운영되었음을 회고했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까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이상으로부터 단절된 현실에 살았던 그는, 삼대로부터 무엇을 또한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공전에 대한 경학적·경세학적 과제를 후대 유자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조선후기는 전근대의 한국사에 있어 삼대적 이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온 시기였지만 '공전'을 소환한 다양한 경세 담론이 제기된 시기이기도 했다. 먼저 李縡는 '因時'라는 프리즘으로 공전의 이상성을 재해석했다. 공전의 이념은 현실에까지 왜곡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지만, 그것의 구현은 당시의 제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삼대와의 질적 차이 속에서 유학의 이상을 선택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그래서 공전의 원형을 저변으로 하되 '제록' 중심의 제도들을 통해 인정의 이념을 달성하려던 현실화된 공전 담론인 것이다.
柳馨遠은 공전 원리에 고금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부여했다. 특히 삼대의 기내봉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실의 군현제 하에서 정전제가 실행될 수 있게 하는 경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공전 원리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반계수록』에 정밀하게 설계했다. 맹자가 남겨 놓은 두 가지 과제를 '分田'과 '制祿'의 통합으로 풀어냈던, 또한 그로 인해 국가체제의 규모에서 개혁안을 논정했던 조선시대 최초의 경세 담론이었던 것이다.
丁若鏞은 공전 설치의 시공을 삼대 전역으로 확대했고, 9職의 전업과 이원적 수취체제를 상정했으며, 이상세율로서의 1/10을 기각했다. 나아가 다산은 '공전체제'를 모델로 한 점진적이고도 전면적인 개혁을 『경세유표』에서 기획했다. 이념과 원리, 그리고 제도의 총체로서의 공전이 국가 체제의 중핵이 되는, 즉 보편적 통치체제로서의 '공전체제'를 창안한 것이다.
이처럼 『맹자』가 전한 원형으로서의 공전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공전들로 재해석되었다. 그 경학적·경세학적 변주에는 많은 유자들이 동참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公田'의 실질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었다. 비록 '공전들'의 지향은 달랐을지라도, 그들이 공히 公田[井田]을 경세의 장에서 운위했음은 공전으로 표상되는 '공공성'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유학의 이상적 전장이 명확한 하나의 제도적 실체가 아님을, 그래서 현실의 다양한 요구와 지향에 상응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分田'의 실현을 타진했던 유자들이 치자의 세습적 특권에 대해 공통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음은 주목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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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구례 유씨가의 처가왕래와 부계화

저자 : 박미해 ( Park¸ Mee Ha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3-38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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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구례 유씨가의 일기 분석을 통하여, 부계중심의 성리학적 친족질서가 정착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한말-일제하 양변적 친족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부계우위사상으로 소외되었음직한 사위의 위상과 존재는, 내부적으로는 지속적인 처가왕래를 통하여 부계화 관련 일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딸들에 비해 사위들은 처가를 빈번히 왕래하며 단순한 인사차 방문 뿐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재혼 후에도 사위들은 전(前)처가인 유씨가와의 인연을 지속하여, 조카에게는 심리적 의지처가 되어주며 경제적으로 서로 돕고 있었다. 장인 또한 사위들의 재취소생의 외손들의 교육과 혼례 등에 도움을 주었다. 사위들이 처가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처가와 가까이 살고 있었던 점, 유씨가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라는 점, 그리고 양반 지역민들끼리의 계모임과 시회를 통한 경제-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사위-고모부와 처족들 간에 물질적 교류와 심리적 연결을 보여주는 이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성리학자들이 추구했던 부계위주의 이념과는 달리 한말-일제하 유씨가에서는 양변적 친족 관행을 볼 수 있으며, 비부계친과의 경제-문화-정서적인 자원의 교류를 동원하여 혈족의 부계화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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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항기(1880~1906) 원산주재 일본영사의 파견과 거류지 행정

저자 : 최보영 ( Choi¸ Bo Young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간행물 : 학림 4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81-41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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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원산은 한국이 근대 이후 외국인에게 개항한 최초의 항구였다. 원산개항장 내에서 벌인 청일 양국의 각축에서 결국 일본이 승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 원산영사관의 설치와 여기에 파견된 영사들의 활동임은 자명하다. 본고에서는 원산영사의 파견과 활동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의 네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원산 개항은 일본에 의해 이뤄졌으며 이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군사적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수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을 경험한 김기수를 덕원부사로 임명하고 감리를 두어 이에 대응토록 하였다.
둘째, 일본영사의 면면을 보면 처음 원산 총영사관은 마에다를 총영사로 발탁할 정도로 원산을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을 보면 부산보다 짧은 것으로 보아 서울에 공사관이 개설되고 인천영사관이 개설된 이후 러시아의 견제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하에서 그 중요성이 적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원산영사가 제정·시행한 포달을 표로 정리하고 이들 포달이 갖는 특징을 정리하였다. 대개 확인된 49개의 포달을 보면 첫째, 매춘영업과 위생에 관한 포달, 둘째, 거류민의 행정·사법적 통제, 셋째, 어업에 관한 통제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거류지에 성업했던 매춘에 대한 문제들을 행정통제권 아래로 묶어두어 위생과 함께 무분별하게 낭비되는 비용을 절감하게 한 것이다. 또 거류민의 각종 영업활동에 대한 통제를 포달을 통해 수행했으며 개개인의 형법·민법적 불법행위를 영사재판권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해양을 끼고 있는 개항장이라는 것으로 많을 수밖에 없는 어업권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산에 파견된 영사는 영사 고유의 업무에 매진한 것과 함께 한국에 일본공사가 파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덕원부사와 교섭해 거류지 관련 조약을 체결하는 외교대표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일본인의 안정적인 거류지 정착을 위해 다양한 포달을 제정·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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