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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오학론(五學論)으로 읽는 경전학의 이면 -경학과 과거 문장학의 조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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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론(五學論)으로 읽는 경전학의 이면 -경학과 과거 문장학의 조응-

The Scripture Studies Reading in the other side of Ohakron(五學論)-Correspondence of Confucian Classics and Gwageo Heraldry -

함영대 ( Ham¸ Young-dae )
  • : 한국한문학회
  • : 한국한문학연구 83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9월
  • : 9-36(28pages)
한국한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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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다산의 五學論
3. 경전학과 과거 문장학의 조응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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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五學論을 통해 18세기 조선 학술의 풍토에 대해 매우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다산은 성리학과 훈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존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전환적 인식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성리학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 제고를 요청하여 기존의 理氣와 理發氣發 중심의 인식론적 이해에서 수기치인의 事功的 효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해의 시각을 조정하려 했다. 제한적인 훈고학의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경전 이해의 최종적인 목표는 의리의 확인과 그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기타 문장학과 과거학, 술수학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온전한 학문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산의 당대 학술에 대한 관점을 집약한 五學論을 검토해보면 다산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학문관으로 이해된다. 그는 理氣의 발함이나 本然과 氣質의 분기를 투철하게 인식하여, 심성수양을 중시하는 宋學의 논리로 성리학을 바라보기보다는 誠意와 正心의 실천적 요소를 중심으로 수기치인의 사공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洙泗學의 시야로 성리학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종래의 성리학 인식과는 판이한 것으로 그 결과 孝弟忠信과 禮樂刑政이 중시되었으며, 성리학자의 官人적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경전의 본지에 대한 이해에서 훈고학의 역할을 한정적으로 이해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산은 훈고가 경전의 의미파악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문구의 정확한 이해에 불과한 것으로 그 오묘한 본지의 추구에 있어서는 의리적인 접근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조선의 현실에서는 한대의 훈고와 송대의 의리를 절충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중점은 훈고가 아닌 의리가 중점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 외에 문장학과 과거지학에 대한 비판은 다산의 경학 우위의 학문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다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이해가 과도하게 적용된 면이 없지 않다. 아울러 술수학에 대한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기존 技藝論을 중심으로 다산의 합리적인 과학사상을 높게 평가해온 것에 비추어 좀 더 그 인식에 대한 이해의 조정을 요청하는 측면이 있다.
다산의 오학론에 등장하는 학문인식의 정당함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전통적인 이해의 측면을 살펴보았다. 사공적 효용을 강조하는 다산의 시야에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나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는 퇴계와 우암의 문제의식은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훈고학에 대한 이해는 다산의 관점이 지닌 학술사적 시효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전학과 과거 문장학의 문제를 검토한 위백규와 성해응 등의 언급은 경전공부를 두고 가급적 聖賢之學과 科擧之學, 그 둘의 간극을 좁혀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 효용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회의 저변에서 매우 진중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향촌과 서얼이라는 사회적 발신이 과거제도 외에 딱히 찾기 어려웠던 지역과 계급의 경우, 과거 문장학을 置之度外하기 어려웠고, 그 경전에 대한 학자로서의 기본 태도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둘의 관계를 조화롭게 이해하고자 노력한 정황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올바른 경전독서를 통한 과거 문장학의 도야를 은근히 권한 향촌 지식인 존재 위백규의 경전 주석과 ‘仁義의 功令文字’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거를 위한 詩會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던 명문 서얼가 창녕성씨 상곡공파의 경우는 그 실제의 한 단면이다.
명분은 삶을 통과하여 드러날 수 없고, 학문이 수양의 도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성취를 위한 중요한 매개로 작동해야 함은 18~19세기 조선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삶의 기반이 취약한 계층의 경우, 그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다산의 오학론은 재독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Dasan Jeong Yak-yong once had an extremely keen criticism on the practice of the 18C Joseon academic circle through his Ohakron (Dasan’s criticism on the theory for five studies). Through the criticism on the Neo-Confucianism and exegetical studies, Dasan demanded the shifting perception on the existing understanding of the Neo-Confucianism. For example, he had requested the enhancement of perception on the grand social role of the Neo-Confucianism in a way of attempting to shift the view of understanding from the existing egi (a Confucian doctrine to explain the universe and human in reasoning and spirit) and ebalgibal (A theory of Toegye that reasoning has to be available to have the ethical emotion to have the relevance with good and evil) perceptive understanding to the direction to emphasize the work accomplishment efficacy of the Sigichiin (self-discipline and self-control). While acknowledging the efficacy of restricted exegetical studies, he clarified that the ultimate goal of the Scripture understanding is to confirm righteousness and its practice. With respect to other heraldry, gwageo (national examination) studies and Shu Shu, he emphasized the negative effect with the criticism that it would not be understood as a complete academic field.
Ohakron is the outline of Dasan’s scholastic point of view of the time, as reviewed earlier, it is understood as the scholastic view with the strong reflection of the Dasan’s subjective point of view. He thoroughly recognized the manifestation of Egi or stirring up of intrinsic nature in a way of finding out the Neo-Confucianism with the view of Susahak (Confucian studies) that may assert the work accomplishment competency of Sigocjoom (self-discipline, self-control) for the focusing on the practical factors of good faith and righteous mind rather than the Neo-Confucianism with the theorem of Song Studies that placed importance on Simseongsuyang (discipline of mindset). It would be radically different perception from the conventional Neo-Confucianism, and as a result, Hyojechungsin (filial duty toward family and loyalty to king and state) and Yeakhyeongjeong (Ye-conservation of social order, ak-music to harmonize social mind, Hyeong-penal code to prevent evil, and jeong-all administrative agencies) had the importance and the government official appearance of Neo-Confucianism scholars were emerged.
Such a shift for the point of view is not distanced from restricted understanding of the role for exegetical studies from understanding on the main part of the Scripture. Dasan clearly acknowledged that annotations would be of help in finding out the implication of the Scripture, but the role was the clear understanding of the phrases only that there has to be righteous approach in terms of pursuit for the exquisite main section. Therefore. under the reality of Joseon,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ing the annotations of the Han Dynasty and righteousness of the Song Dynasty with the compromise to each other and the emphasize is made to have the focus on righteousness, not on the annotations.
In addition, the criticism on heraldry and studies for gwageo comes from the Confucian Classics-intensified academic point of view of Dasan that it has certain aspect of excessive application on understanding on Dasan’s own scholarship. Furthermore, any criticism almost like the neglect on Shu Shu has certain aspect of requesting for adjusting the understanding a little bit more on its perception rather the evaluation highly evaluated for the existing artistic and skill theory-oriented reasonable scientific ideology of Dasan.
For the understanding on appropriateness of academic perception as appearing on the Ohakron of Dasan, the aspect of traditional understanding has been sought. For the view of Data who emphasized time and spatial efficacy, the critical mind of Toegye and Wooam who placed importance on the origin of human and unive3rse or willingness of human seem not to be so easy to find the connecting point. Understanding on the exegetical studies may need to consider the scholastic efficacy for the Dasan’s point of view.
Mentioning of Wi Baek-gyu and Sung Hae-eung revising the issues of Scripture studies and Gwageo heraldry confirmed that the attempt to acquire the efficacy in the positive scheme by narrowing the gap between studies of sacred wisemen and the studies for gwageo as much as possible with respect to the Scripture studies has been made extremely seriously on the social foundation level. In particular, for the case of regions and classes where there would not easily found other than the gwageo system for any social manifestation in local community, clan hierarchical order and so forth, the Gwageo heraldry would be difficult to Chijidooihagi (leave the matter alone without having an issue out of it), and the basic attitude as a scholar on the Scripture would not be deserted that it has the aspect to understand to make harmonious relationship of the two. With respect to the Scripture annotations of Wi Baek-gyu, a local community intellectual who subtle recommended for Doya of the Gwageo heraldry through the correct Scripture reading and Changnyeong Sung Clan Sanggokgongpa, a seoeol (out-of-wed off-spring) clan of reputable family that continuously held the poetry society for the Gwageo with the slogan in ‘Gongryeongmunja (characters of meritorious orders) of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it has an aspect of the presence. The justification could not be appeared by pass through the life and the academics is not only a tool of such discipline but also an important medium for social accomplishment, which should not be an exception even during the 18C-19C joseon. In particular, for the case of classes with vulnerable foundation of lives, this issue would be even more des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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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800-00072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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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 KCI등재
  • :
  • : 계간
  • : 1228-128x
  • : 2733-4910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76-2022
  •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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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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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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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효전 심노숭의 역병 체험과 질병 서사

저자 : 정우봉 ( Chung Woo-b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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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후기 疫病이 유행하던 상황에서 역병 체험을 다룬 글을 질병 서사의 관점을 활용하여 분석하였다. 특히 역병 체험을 다룬 많은 인물들 가운데 풍부한 자료를 남긴 孝田 沈魯崇(1762~1837)에 주목하였다. 심노숭의 글에서 역병과 관련한 질병 서사의 양상을 크게 '육체의 증언으로서의 질병 서사', '말하는 몸을 통한 공감의 질병 서사', '육체의 소멸과 애도의 질병 서사'로 구분하였다. 세 가지 양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육체가 반응하는 양상 및 그 변화의 과정을 매우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 육체적 고통만을 서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고통까지 함께 서술하였으며, '말하는 몸'을 통해 주체를 재발견하였다는 점, 이와 같은 육체 증언으로서의 질병 서사는 심노숭의 육체에 대한 인식과 연관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또한 심노숭에게 있어 성적인 욕망에 대한 긍정, 음식에 대한 감각과 취향 등은 모두 육체적 욕구와 욕망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와 연결된다. 인간을 살아있는 감각적 주체, 육체적 주체로 인식하는 연장선 위에서 심노숭은 역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육체적 반응을 매우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육체적 고통 속을 살아가는 자신의 자아에 대해 새롭게 성찰할 수 있었다.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서, 욕망과 감정을 지닌 개별적 자아로서 긍정하였던 일련의 사고와의 관련 속에서 우리는 역병 체험 서사에 나타난 육체의 증언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This thesis analyzed the writings about the experience of the epidemic in the context of the epidemic in the late Joseon Dynasty using the perspective of the disease narrative. In particular, attention was paid to Sim No-Sung (1762-1837), who left a wealth of material among the many people who dealt with the epidemic experience. In No-Sung Sim's writings, the aspects of disease narratives related to infectious diseases are largely divided into 'disease narratives as testimony of the body', 'disease narratives of empathy through the speaking body', and 'disease narratives of the annihilation of the body and mourning'. And the meaning is that he observed the reaction pattern of the body and the process of its change in a very detailed and specific way and recorded it. The fact that the subject was rediscovered through this process, and that the narrative of disease as a physical testimony needs to be interpreted in relation to Sim No-sung's awareness of the body.
Also, for Sim No-Sung, the affirmation of sexual desire, the sense and taste for food, etc. are all connected with a natural understanding of physical desire and desire. On the extension line of recognizing humans as living sensual subjects and physical subjects, Sim No-Sung described his physical reaction to an infectious disease in a very detailed and detailed manner, and was able to reflect on his own self living in such physical pain. In connection with a series of thoughts that affirmed humans as living beings and individual self with desires and emotions, we are trying to interpret the testimony of the body in the plague experience narrative.
In addition, in relation to the literary response to infectious diseases, human conflict and anguish, as well as aspects of use as a material for memories and laughter were exam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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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질, 학을 떼게 만드는 고통의 기억 -심원열의 「침질기」를 중심으로-

저자 : 박동욱 ( Pak Dong-u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7-75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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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遠悅(1792∼1866)은 학질에 대한 인상적인 기록인 「寢疾記」(권5)를 문집에 남겼다. 「침질기」는 총 118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인 沈魯巖(1766∼1811)의 發病부터 시작하여 투병과 臨終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일기 형태로 상세히 기록했다. 이 기록은 病錄을 첨부한 임종 일기로 보아야 한다. 「침질기」는 병세가 심각해진 6개월을 그 대상으로 했으니 임종 장례 일기 중에 가장 긴 시간과 분량을 기록한 자료 중 하나다. 학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의원을 찾아 나서고 그들로부터 처방을 받아 이루어졌던 다양한 투약이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환자에 대한 가족의 대응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내용은 당일에 있었던 일화, 담당 의원과 각종 처방, 아버지의 몸 상태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하루에 1-2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그날 중요한 변화가 있을 경우에는 여러 칙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당일의 기록을 적고 있지만 그 일에 대해 훗날에 느꼈던 감회를 追思, 追念, 追書 같은 형식으로 보충해 놓았다. 중간중간에 먹으로 지운 흔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초고의 상태로 보인다.
등장 인물은 심노숭, 심노암 형제와 심원열 그리고 의원 등으로 한정했다. 통상 내방객들을 다루는 다른 기록들과 달리 「침질기」에서는 다른 인물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선택과 집중을 확실히 하여 온전히 아버지 병과 관련된 일에만 중심을 두고 있다. 있었던 일들을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런 기록의 특성상 감정을 상당히 절제해서 건조하게 기술되기 마련이지만, 「침질기」는 서정적인 면모나 위트가 드러나서 문학성 또한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침질기」는 어떤 기록보다 학질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관련된 의원과 처방들이 매우 소상히 남겨져 있어 의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투약에 대한 기록은 훗날 처방의 근거나 중복 투약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로 보인다. 이러한 객관적인 기록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환자 본인과 환자 가족들의 대처와 반응이었다. 심노숭과 심노암의 우애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침질기」에서 두 사람의 형제애를 다시금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병세가 심각해질수록 안타까워하고 스스로 자책했다.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일어날 죽음이란 사건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재 속에 남겨질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드러낸다. 부자가 죽음이란 사건을 함께 앞에 두고 환자와 가족의 입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Shim Won-yeol(1792-1866) wrote "Chimjilgi" (Volume 5), an impressive record of the quality of the school. The Chimjilgi consists of a total of 118 rules. The process from the onset of his father, Shim No-sung (1766-1811), to fighting and dying was recorded in detail in the form of a diary. This record should be viewed as the death diary attached with the records of the disease. Not only are various medications that were made by visiting several clinics to treat hemorrhoids and receiving prescriptions from them recorded, but the family's response to the patient is also written in detail.
The Chimjilgi is one of the longest records of time and amount of time during the dying funeral, as it was targeted for six months when the disease became serious. This record was completed on June 17, 1811, centering on the daily notes.
The contents mainly deal with anecdotes from the day, various prescriptions with the clinic in charge, and the physical condition of the father. It is based on 1-2 rules a day, but if there is an important change that day, it is composed of several rules. I am writing down the records of the day, but I supplemented the feelings I felt in the future in the form of memorial service, memorial service, and memorial service. As traces of ink erasing are found in the middle, it seems to be in an unprepared state.
The characters were limited to Shim No-sung, Shim No-am brothers, Shim Won-yeol, and lawmakers. Unlike other records dealing with visitors, other characters rarely appear in the Dormant Period. It focuses entirely on work related to father's disease by ensuring choice and concentration. Since the things that happened were organized in the form of dialogue, the situation at the time is vividly conveyed. Due to the nature of these records, emotions are often restrained and described in a dry manner, but "Darkness" is also excellent in literature because of its lyrical aspect and wit.
Bedroom is a more detailed record of the quality of the crane than any other record. Related clinics and prescriptions are left in great detail, so it can be said to be very important medically. Records of medication appear to be necessary to prevent future prescription grounds or duplicate medication. These objective records are also meaningful, but most impressive of all was the response and response of the patient himself and the patient's family. The friendship between Shim No-sung and Shim No-am was well known, but you can check the brotherly love between the two in detail in "Chimjilgi." The son felt sorry and blamed himself as his father's condition became more serious. At some point, the father admits the death that will happen to him and shows pity for his son who will be left in his absence. It is a very impressive work to see the father and son struggling from the perspective of patients and their families in front of the death incident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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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년의 홍역-權相一의 『淸臺日記』에 기록된 감염병의 시간

저자 : 김하라 ( Kim Ha-ra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7-125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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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바이러스성 감염병의 하나인 홍역에 초점을 두고 『淸臺日記』의 질병 서사를 구축하고자 했다. 46년간 홍역을 의식하며 살았던 저자 權相一(1679∼1759)의 생애를 다음 세 국면으로 나눠 기술했다.
1707년, 경상도 尙州에 거주하는 29세의 擧子 권상일은 홍역이 유행하는 가운데 향시에 응시하기 위해 昌寧까지 불안한 여정을 왕복했다. 홍역의 '未疫者'였던 그는 안전을 위해 감염병에 오염된 지역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이동 경로를 통해 창녕 이북의 玄風과 善山, 金泉, 상주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홍역이 유행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1719년과 1720년, 40대 중앙관료 권상일은 서울 倉洞의 우거와 상주의 고향집 사이를 오가며 홍역이 유행하는 양상을 기록했다. 권상일의 아들 權煜, 왕세자 李昀 등 어린이와 젊은이 들이 경향 각지에서 홍역을 치른 사례를 볼 수 있으며, 감염병에 오염된 구역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미역자' 권상일의 행동원칙이 관철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1752년과 1753년, 상주의 고향집에 머물던 70대 노인 권상일은 조정의 출사 요청을 거듭 거절해야 하는 명망 있는 노학자였다. 노년까지 홍역의 '미역자'였던 권상일은, 자신을 돌보고 가정과 지역 공동체를 보살피며 감염병 상황에서 관혼상제의 일상을 가능한 한 안전하게 이어나가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감염병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조심한지 46년 된 1753년 정초에 75세의 권상일은 마침내 홍역을 잘 치르고 감사한 마음으로 여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46년간의 홍역을 기록한 권상일의 『청대일기』는 오랜 감염병 시절을 통과하는 개인 및 공동체의 삶의 모습과 그 시간에서 얻게 된 질병과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의를 갖는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tract a disease narrative on the topic of measles from Cheongdaeilgi, Kwon Sang-il's diary. I read this diary with a particular focus on Kwon's 46 years of measles-conscious life, and described the life of Kwon in three phases.
In 1707, a 29-year-old student Kwon was living in Sangju. Despite the epidemic of measles, he had to make an uneasy trip back and forth to Changnyeong to take a local exam. He, who has not yet acquired immunity to measles, tried to avoid areas contaminated with infectious diseases as much as possible for safety. Through his travel route, it is possible to confirm the widespread prevalence of measles in Hyeonpung, Seonsan, Gimcheon, and Sangju.
In 1719 and 1720, Kwon Sang-il, a central official in his 40s, recorded an epidemic of measles while traveling between his temporary residence in Chang-dong, Seoul and his hometown in Sangju. It is confirmed in his diary that children and young people, including Kwon's son and the Crown Prince of Joseon, suffered measles in various parts of the province and in Seoul, and that the principle of action of Kwon, which protects himself by avoiding areas contaminated with infectious diseases, is still being implemented.
In 1752 and 1753, Kwon Sang-il, an elderly man in his 70s who lived in Sangju's hometown, was a renowned old-age scholar who had to repeatedly refuse the government's request to work in a high-ranking public office. Kwon, who had not suffered from measles until then, took care of his health and took care of his family and local community during the infectious disease situation. And he tried to carry on the ordinary daily life of holding ancestral rites and welcoming guests as safely as possible. On New Year's Day in 1753, 46 years after recognizing and being careful about the dangers of measles, 75-year-old Kwon was able to overcome the measles well and expect the rest of his life with a grateful heart.
Cheongdaeilgi, which recorded 46 years of measles, reveals the lives of individuals and communities through the days of infectious diseases, as well as insights into diseases and life gained through that time. This diary has present significance in that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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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 살 곳 찾기 현상의 동인과 다층성 -십승지와 『택리지』 그리고 그 주변-

저자 : 양승목 ( Yang Seung-mok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6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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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살 곳 찾기'라 명명한 조선후기 유력한 문화현상을 추동한 배경 및 그 성격과 양태를 탐구해본 것이다. 살 곳 찾기 현상은 17세기 전란 직후 소위 십승지로 대표되는 當亂保身의 땅을 찾는 움직임으로부터 태동한 것으로, 조선후기를 관통하여 20세기 초반까지도 상존하였다. 먼저 이러한 지속과 만연에 대해 인민이 마주한 재난이라는 관점에서 그 실질적인 동인을 고찰해보았다. 군사행동이 동반된 역모, 이상기후에 따른 천변재이와 그로 인한 기근과 역병, 세금의 부과와 징수에 있어서 만연했던 비위 등 국가적 차원의 전란이 종국된 뒤로도 개인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위난의 상황은 끊임없이 박도하였으며, 이러한 자연적/사회적 재난 요소 및 이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을 희구하게 한 동력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어 살 곳 찾기 현상이 가진 다층적 면모에 대해 상론하였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논제에 대한 검토로 구성하였다. 하나는 십승지와 『택리지』의 긴밀하고도 상호적인 관계를 고구한 것이다. 재난을 피해 살 수 있는 곳을 찾던 움직임은 사대부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만한 고장을 물색하는 계기와 문법을 제공하였으며, 이로부터 탄생한 고 품질의 결과물은 다시 피란ㆍ보신의 공간을 찾는 관심과 시선이 진화되는 양분이 되었다는 것, 따라서 살 곳 찾기 현상은 기층의 可生處 찾기와 상층의 可居處 찾기라는 복수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특기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살 곳 찾기 현상에 대한 반류, 즉 대척점에 있었던 주장과 사유를 살펴본 것이다. 자신의 거처를 버리고 '살 곳'을 찾아 떠나는 세태에 대한 비판은 실로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 되는데, 이러한 비판의식은 결국 樂土在心, 곧 진정 살기 좋은 곳이란 자신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유가의 전통적인 福地論으로 수렴됨을 짚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재난과 십승지, 십승지와 『택리지』, 이로부터 큰 조류를 형성했던 살 곳 찾기 현상, 그리고 그 반류에 이르기까지 각각이 긴밀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를 하나의 입체적인 문화현상으로서 보아야 함을 논구하였다. 이는 재난과 십승지 그리고 『택리지』를 맥락화하여 이해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조선후기 다양한 형태의 공간탐색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동향을 조망하는 시좌와 논리를 마련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번 논의에서 수립한 살 곳 찾기 현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후기 문화사와 문학사의 연동 또 역동을 드러내는 것을 차후의 과제로 삼는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background, nature, and aspect of driving the influential cultural phenomena of the late Joseon Dynasty, named Finding a Place to Live. The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was born immediately after the war in the 17th century from the movement to find the land of Tenshelters, so-called Tenshelters, which existed through the late Joseon Dynasty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First, the reason why it could last and be prevalent for such a long time was found in terms of disasters faced by the people. Rebellions accompanied by military actions, natural disasters caused by abnormal climates, famine and plague, and misconduct in tax collection continued to be difficult to overcome as an individual even after the national war ended. These natural and social disaster factors and their experiences and memories were the actual driving force behind finding a land that could survive.
It then discussed the multi-layered aspect of the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It was largely composed of a review of two topics. One is to examine the close and interactive relationship between Tenshelters and Taengniji. The movement to find a place to avoid disasters provided an opportunity and grammar to find a place to live a happy life as a nobleman, and the high-quality results resulting from this became an evolution of interest and attention to finding a space for refuge. In short, the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consists of two layers: 'finding a place to survive' on the base and 'finding a place to live in' on the upper floor. Another is the argument that opposed this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Indeed, criticism of the situation of abandoning one's residence and leaving to find a good place to live is confirmed in various data. In the end, he pointed out that this sense of criticism is based on the traditional Confucian thinking system that it depends on one's attitude and mindset that it is a truly good place to live.
Through the above discussion, it was confirmed that disasters, Tenshelters, Tenshelters, and Taengniji, the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which formed a large current, and its counterflow are closely related. This proves that the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was a three-dimensional cultural phenomenon. This is primarily to understand disasters, Tenshelters, and Taengniji organically. At the same time, this is to prepare a view and logic to view the extraordinary interest and trends in various forms of spatial explorati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Based on the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on of finding a place to live established in this discussion, revealing the linkage and dynamics of cultural and literary histo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will be a next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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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학장구』 「정심수신」장에 대한 조선 경학자들의 변석 -'察'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저자 : 이영호 ( Lee Young-ho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5-19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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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 『중용장구』 「서문」에서 제시한 '16字 心傳'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유학의 중요이념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16자 심전에서 '정밀하게 살핌[精察]'은 핵심적 가치였다. 이 살핌으로서의 마음에는 살핌의 대상으로서의 人欲과 살핌의 주체로서의 道心이 공존한다. 주자의 이러한 논의는 『대학장구』 「정심수신」장에서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이후 조선 경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퇴계는 '살핌[察]'으로서의 마음을 거론하면서, 주재성과 작용성을 동시에 고려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살핌의 주체로서의 도심과 살피는 대상으로서의 인욕을 통섭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 이후, 조선경학사에서는 그 주재성과 작용성의 한쪽에 치우치거나 이 둘을 통섭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 경학, 더 나아가 마음을 중심에 둔 조선유학의 양상을 다채롭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The 16-character teaching in the introduction chapter of Zhu Xi's Jungyong Janggu was appeared as an important ideology of Confucianism in three countries in East Asia. In particular, 'observing closely(精察)' in the 16-character teaching was an essential value. Humility as an object of 'observing' and the mind of the Way as a subject of 'observing' coexist in the mind through 'observing.' Zhu Xi's discussion on this matter was encapsulated in the chapter of Jeongsimsusin in Daehak Janggu, which later influenced on Kyunghak of the Joeson dynasty.
Toegye simultaneously considered both the substance and the function along with discussing the mind as 'observing(察).' This actually can be understood as an opinion which joins both humility as an object of 'observing' and the mind of Tao as a subject of 'observing.' Since Toegye, there have been discussions on supporting either the substance or the function or on supporting consillience of both of these in the history of Kyunghak in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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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18세기 조선맹자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정전제 논의를 중심으로-

저자 : 함영대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1-22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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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18세기 당대 동아시아의 지평에서 조선 맹자학의 특징적인 국면을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맹자가 주장한 정치경제론의 중요한 논점을 이루는 「등문공상」 3장의 '井田制 논의'가 그 관찰 대상이다.
토지를 나누어 주는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 정전제 논의는 '어진 정치는 경계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견지했다. 그 때문에 이후 유교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데 요청되는 최소한의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식있는 경세가들에 의해 정전제는 꾸준히 호출되며 그 실현가능성이 검토되었다. 개인의 도덕수양이 아니라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방략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때문에 수기치인의 국면, 곧 경세적 실천인 治人의 맥락에서 이 논점은 그의 경전읽기가 얼마나 경세적 실천의 지향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점검에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다. 정전제 논의에서 조선의 儒者들은 당대 동아시아의 지평에서도 그 문제의식의 심각성, 논의의 치밀함, 경세적 방략과의 연결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 문제는 굳이 주자의 어떠함과 비교하는 데서 그칠 필요없이 그 자체로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논제로 전개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논의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던 경세적 기획의 진정성을 짚어볼 수 있는 최소한의 접근법으로 '주석자의 지향과 태도'를 중시하여 그 부분을 좀 더 치밀하게 검토했다.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과 학술사적 전통을 지니는 나라들이 하나의 보편적인 주제로 학술을 논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의 경전을 주제로 서로 상이한 견해가 집결된 경학은 당대의 상호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특히 개인적인 도덕수양의 논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전제의 논의와 그에 대한 비교는 단순히 경학 뿐만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를 이해하는데 널리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정전제는 조선학자들이 실현을 염두에 두고 깊은 학술적 노력와 고투를 거듭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take a look at the specific aspects of the under the Mencius Studies of Joseon for the prospect of East Asia in the 17-18th century. Detailed relevant points of observation is the 'Discussion of Jeongjoen-je (A land tax system advocated by Mencius)' of Chapter 3 of 「Deungmoongongsang」 that established important point of political economic theory that Mencius asserted.
The Jeongjoen-je discussed in more details for issues involving the land allocation sustained clear position that, 'good politics starts from the correctly establishing the boundaries'. Because of this attribute, it had been steadily called upon by the conscious statemen who intended to structure the economic foundation required for building up the idealistic Confucian state and reviewed for its possibility of realization. Since it was a level to discuss the fundamental policies to rule a country, not an issue of developing individual ethics that this point may be critically utilized for checking on how his script reading would strive for the governing practice on this discussion point under the context of the phase of ruler, namely, the governing practice for a ruler. Under the point of Jeongjoen-je, those Confucian scholars of Joseon display a remarkable outcome in East Asia at the time in conjunction with seriousness of critical mind, refinement of discussion and governing policy. This issue may be developed as a general theme of East Asia without a need to stop in comparing with certain issue of Chu Shi.
Under this discourse, it is considered to be the minimal approach method to take a look at the genuineness of the governing planning that has not realized the direction of the noting party and issue of attitude and this aspect has been reviewed far more refined ways. It is not easy to discuss the academics with a single general theme by the countries that have different cultural environment and academic tradition. However, the Chinese classics that integrate mutually different opinion on a theme of scripture could be one of the barometers to understand the reciprocity of the respective time. In particular, the discussion of the Jeongjoen-je that may bring out the social changes, not an issue of the discussion topic of individual ethical improvement and the comparison thereto would have the possibility to visually expand on understanding of East Asia at the time, not just a simply critical mind of Chinese classic.
In particular, the discussion on the Jeongjoen-je has conspicuous implication with the standout struggle of Joseon scholars who completed with the profound academic endeavors with the respective concreteness in their m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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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周易』 「繫辭傳」의 '一陰一陽'과 '繼善成性'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주석 一考

저자 : 서혜준 ( Seo Hye-jo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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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 학자들의 『주역』 이해의 양상을 살펴보려는 취지로 『周易』 「繫辭上傳」 제5장의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이하 '一陰一陽', '繼善成性')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주석을 일별하였다.
程朱는 '一陰一陽'과 '繼善成性'을 성리학적 理氣論에 입각하여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해석은 『周易大全』에 수록되어 조선 학자들에게 전해졌으며, 이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주석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본고에서는 『周易大全』의 주석과 비교하여 『韓國經學資料集成』에 수록된 조선 학자들의 주석을 살펴보았다.
程朱는 '一陰一陽之謂道'에서 陰陽과 道를 각각 氣와 理의 차원으로 나누었으며, '繼之者善'과 '成之者性'은 이러한 道가 유행하여 陰陽이 운행되어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으로 해석하였고, 이 과정을 氣와 理의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이와 비교하여 살펴본 결과, 조선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대체로 수용하되 天道와 人性이 연결되는 지점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으며, 이를 性善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 程朱의 성리학적 해석과는 전혀 다르게, 理에 대한 논의 없이 이 구절을 해석한 주석도 존재했다.


The Zhouyi 周易 or Book of Changes is one of the Chinese philosophical canon, and Xici 繫辭 is one of its canonical commentaries made in ancient period. In Song 宋 dynasty, the Cheng brothers (Cheng Hao 程顥 and Cheng Yi 程頤) and Zhu Xi 朱熹 interpreted Zhouyi with the view of Neo-Confucianism. Korean scholars in Joseon 朝鮮 dynasty understood Zhouyi based on the Neo-Confucian view, but there were also some differences between them, which reflected Korean scholars' own unique interests.
This paper examined the Korean scholars' commentary to Xici, comparing to the Cheng brothers and Zhu Xi. This paper especially focused on several phrases of Xici, which are highly abstract : "the alternation of yin and yang called dao" (yiyin yiyang zhiwei dao 一陰一陽之謂道), "carrying on with it is good" (jizhizhe shan 繼之者善) and "completing it is nature" (chengzhizhe xing 成之者性).
The Cheng brothers and Zhu Xi divided the world into physical world and metaphysical world. According to them, yin and yang 陰陽 belongs to the physical world, while dao 道 belongs to the metaphysical world. They thought that the world has created by yin and yang, and dao is the principle of yin and yang. This is how they understand the abstract phrases above.
Korean scholars mostly accepted this point of view, while they were more focused on the theory of human nature than the principle of nature. On the other hand, among Korean scholars' commentaries-although it's a minority view-there was also an opinion that interpreted these phrases in a way other than metaphysics, which is a far different perspective from Neo-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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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국 근대시기 독본류 교재로 바라본 한문고전교육의 의미 -일제시대 총독부 출간 『中等敎育 朝鮮語及漢文讀本』을 중심으로-

저자 : 홍유빈 ( Hong You-bi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8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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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통치기에 출간된 『중등교육 조선어급한문독본』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시기 독본류 교재를 통해 한문고전교육의 의미를 돌아본 논문이다. 유구한 漢學의 전통이 이어져 온 한국에 있어서, 과거 조선시대의 서당 교육과 향교 등에서 가르쳤던 훈몽서나 儒家 서적들과 그에 대한 학습은 '한문고전교육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개화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교육에서의 한문교육은 개별 교과의 하나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한문고전교육 역시 그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기는 한학과 한문교육에 대한 열기가 여전히 유지되었던 시기였으며, 韓ㆍ日 병합에 의해 일본의 통치 하에 들어간 시기에도 어문정책에 있어서는 漢字ㆍ漢文의 몫이 상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 논의하는 『중등교육 조선어급한문독본』은 그 이전에 사용되던 『보통학교 학도용 한문독본』이나 『(고본) 고등조선어급한문독본』 등의 교재에 비해 한문의 비중은 적지만, 단문의 경우 우리말 번역을 붙이고 장문에는 제목과 출전을 밝히는 등 이전의 교과서에 비해 진일보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장문으로 수록된 글 역시, 일제시기의 초창기 독본류 교과서의 경우 경서류 위주의 중국 문장 일색으로 구성된 것에 비해, 『중등교육 조선어급한문독본』에서는 중국 고전을 포함하여 『삼국사기』나 『증보 산림경제』와 같은 조선의 고전 문장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예문들 위에 頭註의 형식으로 저자 소개나 서지 및 어려운 어구에 대한 풀이를 간략하게 적어놓아 한문고전에 대한 교양을 쌓는 데에 좋은 길잡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서는 한문과 한문고전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재에 있어서도 일정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본서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본서에 수록된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자세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을 보완하고자 본서의 첫 권인 1권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한문고전 교육 교재로서의 특징과 의의를 고찰하였다.


This study reviewed on the meaning of Chinese classical education in the perspectives of reading books in Korean modern times focused on 『中等敎育 朝鮮語及漢文讀本』 which was published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study of Chinese books for the children or Confucian books in Seodang and Hyanggyo are the Chinese classical literature itself in Korea which has had the long-lived tradition Chinese literature. However, from the Flowering period in Chosun late dynasty to the present, Chinese Education in public education has been considered as each subject and Chinese classical education also had been included. Nevertheless, The Flowering period was somewhat full of enthusiasm about Chinese literature and Chinese education. Eve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art of Chinese education had a big portion in terms of language education. The book 『中等敎育 朝鮮語及漢文讀本』 which discussed had the less portion of Chinese literature compared to 『普通學校 學徒用 漢文讀本』 or 『(稿本) 高等朝鮮語及漢文讀本』, had more developed aspect than the previous textbooks in terms of revealing the title and the reference for the long sentences and Korean translation for short sentences. And in the case of the writings for the long sentences, 『中等敎育 朝鮮語及漢文讀本』 had included Chinese classics and Korean classics such as 『三國史記』 or 『增補 山林經濟』. By the way, reading textbooks in Japanese colonical period had been composed of Chinese sentences focused on the Confucian textbooks. Furthermore, footnotes in each sentences had about the introduction of the writer and the references or the difficult sentences. Therefore, it had a guiding role for enhancing of general education through Chinese literature. In this perspective, this book can be a good guide for the present which has had the Chinese and Chinese literature education. However, in the previous study abut this book had not included the specific analysis. Therefore, in this study reviewed the book, especially the first book, and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as Chinese classical education mate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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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45년 李穀의 上都 행로와 心迹

저자 : 이승수 ( Lee Seung-su ) , 민선홍 ( Min Seon-h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4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7-32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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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345년 이곡의 상도 행로를 고찰한 것이다. 상도 행로를 논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14세기 중엽 麗元 관계와 이곡의 생애와 원대 兩都制의 운영과 大都 - 上都 사이의 교통로 운영 실태를 정리하였다. 당시 원의 大都와 上都 사이에는 네 개의 교통로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중 이곡이 이용한 길은 居庸關 - 八達嶺 - 岔道口 - 統幕站 - 槍竿嶺 - 李老谷 - 雕窠站 - 龍門峽 - 李陵臺 등을 잇는 驛路였다. 이곡이 이 길을 오가고 상도에 머문 체험은 9제 12수의 시로 남아있다. 이 시에는 북방 길을 걷는 여행자의 경이와 향수, 사방이 광막하게 펼쳐진 초원의 장관, 세계 제국의 위용과 황실 연회의 문화 등이 담겨 있다. 이곡의 상도 여행은 한 개인의 경험이며 동시에 역사의한 자취이다. 이곡이 여행에서 시를 지어 남겼으니 그곳은 또 우리 문학의 산실이며 배경이 된다. 이 글은 한국 역사의 현장이자 문학의 영토로써 오늘날 북경에서 내몽골 錫林郭勒盟 正藍旗 사이의 경로와 지리를 재구하고, 그 위에서 있었던 체험과 감회를 살펴본 결과이다.


This study investigated Yi Gok's path to Shangdu in 1345. As the preliminary work to discuss the path to Shangdu, this study summarized th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Yuan Dynasty in mid 14th century, the life of Yi Gok, dual capital system during Yuan period and the traffic route between Dadu and Shangdu. There are four traffic routes between Dadu and Shangdu during Yuan period. Of them, Yi Gok used the postal road linking Juyongguan, Bada Ling, Chadaokou, Tongmuzhan, Qiangganling, Lilaogu, Diaokezhan, Longmenjia and Lilingtai. The experience of Yi Gok passing through this road and staying in Shangdu was expressed in 12 poems in 9 titles. The poems described the wonder and nostalgia of a tourist walking on a road in the northern region, the magnificent meadow extended in all directions, dignity of world empire and banquet culture of a royal family. Yi Gok's journey to Shangdu is the individual experience as well as the trace in the history. Since Yi Gok created poems as travelling, the road became the cradle and background of Korean literature. This study reorganized the route and geography between Beijing at present to Zhenlanqi, Xilinguolemeng, Inner Mongolia as the domain of literature as well as the site of Korean history and investigated the experience and sentiments on that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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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집 목차

저자 : 한국한문학회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 (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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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학론(五學論)으로 읽는 경전학의 이면 -경학과 과거 문장학의 조응-

저자 : 함영대 ( Ham¸ Young-dae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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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五學論을 통해 18세기 조선 학술의 풍토에 대해 매우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다산은 성리학과 훈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존의 성리학 이해에 대한 전환적 인식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성리학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 제고를 요청하여 기존의 理氣와 理發氣發 중심의 인식론적 이해에서 수기치인의 事功的 효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해의 시각을 조정하려 했다. 제한적인 훈고학의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경전 이해의 최종적인 목표는 의리의 확인과 그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기타 문장학과 과거학, 술수학에 대해서는 그 폐단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온전한 학문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산의 당대 학술에 대한 관점을 집약한 五學論을 검토해보면 다산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학문관으로 이해된다. 그는 理氣의 발함이나 本然과 氣質의 분기를 투철하게 인식하여, 심성수양을 중시하는 宋學의 논리로 성리학을 바라보기보다는 誠意와 正心의 실천적 요소를 중심으로 수기치인의 사공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洙泗學의 시야로 성리학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종래의 성리학 인식과는 판이한 것으로 그 결과 孝弟忠信과 禮樂刑政이 중시되었으며, 성리학자의 官人적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경전의 본지에 대한 이해에서 훈고학의 역할을 한정적으로 이해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산은 훈고가 경전의 의미파악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문구의 정확한 이해에 불과한 것으로 그 오묘한 본지의 추구에 있어서는 의리적인 접근이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조선의 현실에서는 한대의 훈고와 송대의 의리를 절충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중점은 훈고가 아닌 의리가 중점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 외에 문장학과 과거지학에 대한 비판은 다산의 경학 우위의 학문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다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이해가 과도하게 적용된 면이 없지 않다. 아울러 술수학에 대한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기존 技藝論을 중심으로 다산의 합리적인 과학사상을 높게 평가해온 것에 비추어 좀 더 그 인식에 대한 이해의 조정을 요청하는 측면이 있다.
다산의 오학론에 등장하는 학문인식의 정당함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전통적인 이해의 측면을 살펴보았다. 사공적 효용을 강조하는 다산의 시야에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나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는 퇴계와 우암의 문제의식은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훈고학에 대한 이해는 다산의 관점이 지닌 학술사적 시효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전학과 과거 문장학의 문제를 검토한 위백규와 성해응 등의 언급은 경전공부를 두고 가급적 聖賢之學과 科擧之學, 그 둘의 간극을 좁혀 긍정적인 방향에서 그 효용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회의 저변에서 매우 진중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특히 향촌과 서얼이라는 사회적 발신이 과거제도 외에 딱히 찾기 어려웠던 지역과 계급의 경우, 과거 문장학을 置之度外하기 어려웠고, 그 경전에 대한 학자로서의 기본 태도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둘의 관계를 조화롭게 이해하고자 노력한 정황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올바른 경전독서를 통한 과거 문장학의 도야를 은근히 권한 향촌 지식인 존재 위백규의 경전 주석과 '仁義의 功令文字'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거를 위한 詩會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던 명문 서얼가 창녕성씨 상곡공파의 경우는 그 실제의 한 단면이다.
명분은 삶을 통과하여 드러날 수 없고, 학문이 수양의 도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성취를 위한 중요한 매개로 작동해야 함은 18~19세기 조선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삶의 기반이 취약한 계층의 경우, 그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다산의 오학론은 재독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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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수광(李睟光)(1563~1628)과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도문론(道文論)과 사상적 차이

저자 : 오세현 ( Oh¸ Se-hyu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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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과거제 시행 과정에서 등장했던 강경이라는 경학 시험과 제술이라는 문장 시험의 힘겨루기는 문장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장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공감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즈음이었다. 문장가 이수광은 문장의 역할과 가치관에 대한 공감대의 지속을 대표한 인물이고, 정경세는 그러한 공감대에 문제제기를 제기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수광은 도학이 근본이고 문장은 말단이라는 도본문말론의 원칙론에 공감했지만, 동시에 문장의 실제적인 효용성과 가치에 대해서도 긍정했다. 도학과 문장의 관계에 관한 이수광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 중기에 새롭게 등장한 모습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반면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확산과 더불어 예학이 심화되고 예서의 편찬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조선 중기에 정경세는 도학이 근본이고 문장이 말단이라는 주희의 견해를 근거로 하여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문장의 역할을 제한고자 했다.
정경세는 이수광의 격물치지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거나, 「채신잡록」의 곳곳에 대해 양명학은 물론 노장철학과 불교와의 연관성을 제기하며 비판했다. 이러한 정경세의 비판은 문장가로 명망을 얻었던 이수광의 사상적 다양성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수광과 정경세의 도문론과 사상적 차이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의 조선사회에서 이수광을 비롯한 다수의 문장가들에 의해 지속되었던 문장에 대한 집중과 그 집중의 연장선에서 만나게 되는 불교와 노장철학에 대한 관심과 인정, 그리고 이에 관한 정경세를 비롯한 일부 성리학자들에 의한 강력한 문제제기와 비판이라는 역사적 특징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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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과문(科文) 관련 자료의 유형과 특징-규장각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현순 ( Park¸ Hyun-so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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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文 학습용으로 편찬된 科文集은 학습의 내용을 제공하는 교재인 동시에 편찬자 개개인이 주체가 된 학습 활동의 기록물이다. 최근 과거에 대한 연구가 다각화되고 科文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과문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현전하는 과문집들은 그 수도 부지기수지만 그 구성 방식도 다양하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그 성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과문 관련 자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그 특성을 조망해 보려는 시도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 중 과문 관련 자료 47종을 뽑아 국가행정용으로 편찬된 科作集, 우수과문을 선집한 科文抄集, 특정한 개인의 과문 작품을 모은 科文私集 등으로 유형화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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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숙종(肅宗)·영조대(英祖代) 과거제(科擧制)와 과문(科文)의 추이(推移)와 쟁점에 관한 일고찰

저자 : 박선이 ( Park¸ Seon-yi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4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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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후기 科擧制에서 肅宗ㆍ英祖代 科擧制의 推移와 그 양상을 살펴보고 科文의 程式과 文體에 관한 논의와 쟁점이 되었던 사안들을 고찰하여 당대 科文과 관련한 논란의 핵심을 밝히고 그 推移를 규명한 글이다.
먼저 肅宗ㆍ英祖代 科擧制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사안은 숙종 대부터 과거 시험의 시행이 확대됨에 따라 응시자가 대폭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科場 관리의 부실 및 과거 시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폐해가 극심해졌다. 특히 숙종 대에는 庭試가 자주 시행되면서 表文 작성에 유리한 서울 유생들의 합격률이 높아지는 한편, 表文의 빈번한 출제로 인해 응시자들이 科文 관련 類抄와 儷文選集類의 학습에 몰두하여 표절하고 답습하는 폐단이 심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숙종 대와 영조 대에는 과거제와 관련한 폐단을 시정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였으며, 일정 부분은 科擧事目에도 반영되었다.
다음으로 肅宗ㆍ英祖代 科文의 程式과 文體에 관련한 논의와 그 쟁점이 되었던 사안들은 크게 科文의 격식과 문체에 대한 논란과 사륙문의 애호와 科表 위주의 선발로 인한 논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 후기 科文의 격식과 문체에 대한 논란은 문체정책이 이루어졌던 정조 대가 아니라 숙종 초기부터 문제가 되었던 사안으로, 영조 대를 거쳐 정조 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문제점으로 인식되었다. 肅宗ㆍ英祖代에는 科文의 程式에 맞지 않는 試券을 작성하거나 科文의 문체에 맞지 않는 용어와 語錄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科擧事目에 반영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科文의 격식과 문체를 바로잡고 응시자의 기호에 따라 기괴한 작법과 용어를 쓰는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科文의 격식과 문체 변화 역시 개성적이고 신기함을 추구했던 조선 후기 文風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그러므로 科文의 정식과 격식을 위배한 응시자를 처벌하고 이러한 응시자를 선발한 試官을 처벌하는 제도적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 別試를 대체한 庭試 시행의 확대는 제도상의 변화 뿐 아니라 합격자의 선발 방식과 科文 문체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숙종 대부터 科文에서 表文을 중시하고 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졌고, 그로 인해 과거를 준비하는 응시자 사이에서 表文의 학습이 중시되었으며, 儷文選集類에 대한 수요와 편찬이 확대되었다. 애초에 表文 위주의 선발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표절과 모방의 답습 등 表文의 애호와 중시로 인한 폐단 역시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科擧制의 변화가 단순히 제도상의 변화와 머물지 않고 科文의 문체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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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한·중 과거(科擧) 경의문(經義文) 비교 -조선시대 사서의(四書疑)·오경의(五經義)와 명·청대 팔고문(八股文)을 중심으로-

저자 : 윤선영 ( Yoon¸ Sun-you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8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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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과거에서 經義를 시험하기 위해 치러진 과목들의 답안을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들여다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의 四書疑ㆍ五經義 과목과 명ㆍ청시대의 八股文에 대해 주자설 인용 방식과 의존도 변화 양상에 대해 비교하였다. 조선의 경의문은 주로 주자학파의 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였으며, 자신의 설은 내세우지 않은 채 선유들의 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팔고문은 주자설을 위주로 하였으나 이를 문장 속에 간접적으로 녹여냈으며, 후기로 갈수록 주자설 의존도가 점차 약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건륭제 이후의 답안에서 古註를 근거로 하여 주자설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는 답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답안들이 시관들의 좋은 평가를 받고 모범 답안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19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주자설을 엄혹히 견지했던 조선시대 과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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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시대 문학관의 변화와 한국문학의 정체성(2) -기(氣) 위주 문학관을 중심으로-

저자 : 박경남 ( Park¸ Kyeong-nam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5-22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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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문학관을 매개로 한국문학의 정체성 및 정체성 개념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하는 두번째 기획이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동아시아 전통적 문학관의 다기한 측면중 '氣를 중심으로 한 문학관'을 소개하고, 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았다.
기 위주 문학관 역시 중국의 문학 담론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조선 문인들 개개인의 고민과 시대적 요청 속에서 새롭게 호명되고, 서로 경쟁하며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선천적인 기를 중시하는 문기론과 유람과 독서를 통한 양기론이 각축했고, 이러한 각축은 서거정 단계에서 양기론을 긍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선천적인 기를 중시하는 담론은 논의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유람을 통한 양기론과 경전 독서를 통한 양기론이 공존하며 점차 강화되어 갔다. 또한, 독서를 통한 의기 함양 담론은 유가 성리학 경전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독서를 지향하는 개방적 경향과 유가 성리학 이외의 서적에 대한 독서를 이단으로 취급하며 배제하는 경향이 공존하며 각축했다. 다만, 동아시아의 기철학과 서구 근대학문의 성과를 종합하고자 했던 최한기와 같은 개방적인 기 위주 문학관은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기 위주 문학관은 근대 이후 계승되지 못하고 그 생명력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기 위주 문학관에서 강조되었던 '부단한 독서'와 '내면적 성찰', '여행을 통한 견문의 확대' 등은 현대에도 여전히 창작 수련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비록 기라는 용어의 쓰임새와 유효성은 현대사회에서 미미해졌지만 기 중심의 문학 담론으로 제출되었던 여러 의견들은 여전히 문학 창작과 비평에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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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정선당송천가련주시격(精選唐宋千家聯珠詩格)』에 활용된 송(宋)ㆍ원대(元代) 문학비평서의 문헌학적 검토

저자 : 류화정 ( Ryu¸ Hwa-je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5-255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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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選唐宋千家聯珠詩格』(이하, 『聯珠詩格』)은 于濟ㆍ蔡正孫의 絶句選集이다. 이 책이 국내로 유입된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絶句는 『연주시격』'이라는 공식이 전해질 정도로 유행했다. 1483년에는 成宗이 직접 이 책의 諺解와 註解를 명했다. 언해는 완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주해는 1485년 徐居正을 중심으로 1차 완성되었고, 1492년에 성종이 다시 安琛 등에게 補削을 요구하여 1502년에 간행되었다. 채정손의 評釋을 의식하여 '增註'라고 이름 붙인 朝鮮 註解本은 이후에 원본 『연주시격』을 대체하여 일본으로 전해지고, 중국에도 역수출되었다.
『연주시격』과 같은 詩選集이 한시 학습서로 수용된 데는 고려로부터 이어진 宋ㆍ元代 批評書에 대한 독서와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黃庭堅을 인지하고, 江西詩派를 발전적으로 수용하여 海東江西詩派까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송ㆍ원대 비평이 조선 초기까지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자료들이 비교적 드물어서, 비펑서들의 유입과 활용 양상을 충분히 규명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된 『연주시격』의 增註에 활용된 송ㆍ원대 비평서를 검토해 보는 것은, 자료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초기 문학비평과의 관련성을 재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증주에 인용되었다고 모두 당시 문단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는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화집과 시선집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해 내용을 통해 비평서의 활용 양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초기 문학비평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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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한국 의고시(擬古詩)의 사적(史的) 전개와 의고(擬古) 양상 연구-고려 후기~조선 전기를 중심으로-

저자 : 이훈 ( Lee¸ Hoon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1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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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古詩十九首」와 연관된 한국 擬古詩에 대한 통시적 연구의 일환으로,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의고시의 史的 전개와 擬古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본고의 연구는 韓中 의고시 간의 관계망을 분석하는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구축하는 것에 일차적 목적을 두었다. 이에 먼저 의고시의 개념과 유형을 제시하였고, 중국의 의고시 작품 개황을 표로 정리하였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의고시의 史的 전개와 擬古 양상에 대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는 前代의 여러 작품에서 語句와 詩意를 차용하여 모의하는 광의적 개념으로서의 의고시 창작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權近의 「擬古和陶」 4수는 陶潛의 「飮酒」를 화운하여 모의한 것으로서 和韻과 擬古의 창작방식이 융합된 양상을 지니는데, 陶潛의 「擬古九首」를 화운한 蘇軾의 「和擬古九首」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광의적 의고시의 창작이 지속되었으며, 중국의 의고시를 화운한 작품이 출현하기에 앞서 한국 의고시에 있어 최초의 협의적 의고시인 成俔의 「擬古十首」가 등장하였다. 성현의 작품은 陸機의 「擬古詩十二首」처럼 「고시십구수」의 체재를 유지하면서 句數를 가감하는 방식으로 모의한 것이다.
육기와 성현의 의고시를 비교 분석한 결과, 작품 간의 연관성을 통해 前代의 의고시가 後代의 의고시 창작에 교과서적이고 교량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양자의 의고시가 원작의 詩型과 정형성을 변주한 양상, 원작의 語句를 대체한 양상, 원작의 詩意를 전환한 양상 등에서 개별적인 면모를 지닌다는 점도 구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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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63年 계미통신사행록 『동사기행(東槎紀行)』의 작자와 일본 체험

저자 : 정우봉 ( Chung¸ Woo-bong )

발행기관 : 한국한문학회 간행물 : 한국한문학연구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3-334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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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63년 계미통신사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崔英泰(1723∼?)의 일본 사행록 『東槎紀行』의 일본 체험이 지닌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저자는 格軍으로 참가했다가 盤纏次知로 職役을 변경했던 인물이다. 『동사기행』은 格軍으로 참여했던 작자가 통신사행 동안 관찰하고 경험했던 내용을 매우 진솔하게 기록하게 두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 통신사행단 참가 인원 중에서 중하층의 職役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어떠한 관심과 의식지향을 보였는가를 파악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작자는 일본 사행 중 민간인과의 접촉이 엄격하게 통제된 가운데 여러 일본인들과 만났는데, 특히 일본 중하층 인물들과 활발하게 접촉을 하고 교류를 가졌다. 이 점이 『동사기행』의 독특한 면모이다. 통신사 일행을 호위, 응대하는 일본의 중하층 인물들과의 접촉과 교류를 일화 중심으로 흥미롭게 묘사하였으며, 때로는 일본 민가의 한 처녀와의 외설스러운 장면을 가감 없이 다루기도 하였다.
또한 『동사기행』은 매우 잡다하고 다양한 소재와 사건들을 다루었으며, 일본의 제도와 문물, 학술, 외교 문제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주로 일본에 와서 그곳 현지 사람들과 접촉하고 부딪히면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일들,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 혹은 일화들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작자는 일본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문화적 우위의 시선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동사기행』은 특별하고 신기한 이국 체험의 견문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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