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이것이 종법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왕세자를 책봉한 뒤에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인정받는 절차를 거쳤다. 조선은 10여년 동안 명나라에 주청사를 파견하였지만 명나라는 계속해서 거부했고 결국 선조가 죽은 뒤에야 광해군을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지금껏 광해군의 세자책봉 교섭에 관해서는 대개 실록의 기사를 기초로 하였다. 본문에서는 事大文軌에 수록된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10여년 동안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섭의 과정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광해군의 세자책봉 문제는 일방의 주장이 관철되거나 또는 조선이 요청을 하면 명나라에서는 허락 또는 거절을 하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논쟁을 주고받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싼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교섭은 사신을 파견하고 시작하여 회신을 받는 것에서 종결되는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의 화두를 중심으로 담론이 누적되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Gwanghaegun, the fifteen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was the second son of Seonjo. He was established as the heir at the era of Wanli emperor of Ming Dynasty. However, because of the inconsistency with primogeniture, the Ming Dynasty did not authorize Gwanghaegun as the crown prince. For over ten years, Joseon sent envoys to the Ming Dynasty several times to acquire the Ming emperor’s approval to inaugurate Gwanghaegun as the heir of Joseon Dynasty. However, all of them returned without success. However, it was only after King Seonjo's death (1608) that the Ming Dynasty officially appointed the successor Gwanghaegun as king of Joseon Dynasty. Currently, research on the issue of Joseon Dynasty’s efforts for acquiring Ming’s investiture of Gwanghaegun is insufficient. This article will elaborate on the process of Gwanghaegun’s investiture by using the historical source, Sadaemungwe (事大文轨, The Exemplary Writings of Serving the Gr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