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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6세기 출토 청동 조명도구 연구

A Study of Bronze Lamps of the 3rd to 6th Century Unearthed in China

韓茗 ( Han Ming )
  •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 백제연구 7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213-256(44pages)
백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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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 리 말
Ⅱ. 육조시대(六朝時代) 청동 조명도구(照明道具) 형태
Ⅲ. 육조시대 조명도구 형태의 특징 ―청동 조명도구와 도자기 조명도구의 비교를 바탕으로-
Ⅳ. 한·육조시대(漢·六朝時代) 조명도구 유형에 대한 재조명
Ⅴ. 맺 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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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대륙에서 출토된 3~6세기 청동 조명도구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형태의 차이에 따라 수병등(豎柄燈), 연지등(連枝燈), 횡병등(橫柄燈), 제등(提燈), 녹로등(轆轤燈), 치등(卮燈), 촉반(燭盤), 촉삽좌(燭插座)의 8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나라 이후부터 수나라 이전까지의 청동 조명도구의 변천양상을 파악해보았다. 또, 동시대의 도자기 조명도구의 형태와 비교하여 육조시대 조명도구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비록 한나라 이후 청동 조명도구 제작이 쇠퇴하였지만, 도자기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조명도구 장식에 높은 예술적 표현력과 역외(域外) 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특히 촉삽좌 같은 조명도구의 발전으로 같은 시기의 조명도구 장식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시대적인 특징도 더하였다. 초(燭)의 보급으로 조명연료가 변하게 된 것은 한나라 이후 조명도구의 형태변화의 가장 중요한 계기이며, 육조시대는 중국 고대 조명도구의 전환기로 되었다.
본고에서는 한당시대(漢唐時代) 조명도구의 연구과 분류기준을 참고하여 육조시대 조명도구의 특별한 성격에 알아보았다. 또한, 현재 조명도구의 형식학적 연구에 대해 복잡한 분류와 자료의 부족에서 문제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This paper collects the data of bronze lamps unearthed from the 3rd to 6th century in Chinese mainland. According to the difference from the perspective of form, they are divided into eight types: vertical handle lamp, branches-shaped lamp, horizontal handle lamp, pendant lamps, clamshell-shaped lamp, vessel-shaped lamp, candle tray and candle socket, based on which we trying to summarize the evolution of bronze lamps between the end of Han Dynasty to Sui Dynasty. We investigate the general appearance of lamps in the Six Dynasties taking ceramic lamps from the same period as comparison. Although the production of bronze lamps declined after the Han Dynasty, under the background of the rise of porcelain manufacturing industry, lamp decoration showed a strong artistic expression and the influence of foreign culture, especially the rise of lamps for candle, which made the lamps more decorative and full of the new fashion of the times. The wide use of candles promoted the change of lighting fuel, which was the most important reason for the change of the forms of lamps after Han Dynasty. It was the Six Dynasties that was the transition period of ancient Chinese lamps. Starting from the particularity of the lamps from the Six Dynasties, based on the aboved iscussion, this paper discusses the judgment and classification standards of lamps and lanterns in the Han-to-Tang Dynasties period, and points out the complexity of lamp typology and that there remains much to be further expl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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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226-6906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70-2021
  • :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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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권0호(2021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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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령왕릉 출토 동경의 계보와 연대

저자 : 福永伸哉 ( Fukunaga Shinya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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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 위치한 무령왕릉에서는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3점의 동경이 부장되었다. 본고에서는 특히 변형방격규구경에 주목하여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의 계보와 제작 연대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 동경은 후한의 방격규구경을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하고 여기에 인수상 1개, 짐승상 4개를 더한 특이한 도상을 지니고 있다. 본 논문은 이 동경의 제작기법과 인수상 표현에 주목을 하였다.
동경의 표현상태를 관찰한 결과 제작기법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공정으로 복원하였다. 먼저 후한경을 본떠 제작한 1차 거푸집에 납을 넣어 밀랍으로 만든 경체를 만든다. 그 다음 표면에 밀랍으로 만든 입체적인 인수상을 입혀 전체가 밀랍으로 만들어진 원형을 만든다. 그리고 이 납원형을 주형토로 감싸고 가열을 하여 2차 주형을 제작하고 청동을 흘려 넣어 완성품인 동경이 완성된다. 이러한 제작기법은 '실랍주조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서 수경이나 당경의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인수상은 긴 자루의 무기를 든 인물과 네 마리 짐승이 질주하는 모습을 표현한 사냥문이라 할 수 있다. 사냥문의 모티브나 인수의 방향 등은 당경(唐鏡)과 가장 유사하다.
이상과 관련하여 필자는 이 동경이 수경이나 당경으로 이어지는 계보상의 중국거울이며, 그 제작연대는 무령왕이 재위한 6세기 1분기라고 추정하였다. 무령왕이 남조(南朝) 양(梁)에 파견한 512년과 521년이 그 입수시기로 보았다. 이것이 인정된다면 역시 후한경을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된 다른 두 점도 양(梁) 대의 동형경일 가능성이 있다.
후한경의 복제경은 일본의 5~6세기 고분에서 약 130점이 출토된다. 일본고고학에서는 이들이 5세기 중엽에 왜 왕권이 교섭관계에 있던 남조 송나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 보고, 그 일부가 왜 왕권으로부터 백제에도 제공되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무령왕릉 동경이 양나라의 것이라면, 왜와 남조의 관계가 끊어진 6세기에 백제를 경유하여 왜 왕권에 가져다준 반환경일 가능성이 생긴다.
이처럼 무령왕릉 출토 동경은 일본에서 출토되는 복제원의 역사적 평가를 재검토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필자는 향후 무령왕릉 출토 동경의 제작기법이나 도문에 대한 연구가 한층 더 진전될것으로 기대한다.


In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located in Gongju, three pieces of bronze mirror were buried, which is rare in Korea. In this paper, the genealogy of the bronze mirror excavated from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and the production date were examined, paying particular attention to the modified Bronze Mirror with Design of Square and Ruller Marks.
This bronze mirror is made from Bronze Mirror with Design of Square and Ruller Marks of the Late Han with pressure technique, and has a unique icon that adds 1 statue of an human head and 4 statues of beasts. This paper paid attention to the manufacturing technique of this bronze mirror and the expression of the statue of an human head.
As a result of observing the expression state of bronze mirror, the manufacturing technique was restored by the following process. First, a hard body made of beeswax is made by putting lead into the primary mold that is modeled after the mirror of Late Han. Then, a three-dimensional human head figure made of wax is applied to the expression to create a prototype made entirely of wax. And the lead prototype is wrapped with the soil of mold and heated to make a secondary mold, and bronze is poured to complete the finished product, the bronze mirror. This manufacturing technique is called 'cire perdue', and recent research has revealed that it was used for the production of Sui mirror or Tang mirror.
The human head statue is a hunting scene that depicts a man with a long sack of weapons and four animals running. The motif of the hunting gate and the direction of the human head are most similar to that of Tang mirror.
In connection with this, writer assumed that this was the Chinese mirror of a genealogy leading to Sui mirror or Tang mirror, and that the production date was the first quarter of the 6th century when King Muryeong was re-elected. The years 512 and 521 that King Muryeong dispatched to Yang of South Dynasty were considered to be the period of entry. If this is recognized, it is possible that the other two produced by the pressure technique on Late Han mirror will also be the Same Model Mirror from the Yang Dynasty.
About 130 pieces of the Late Han-Dynasty Mirror are excavated from tombs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in Japan. Japanese archaeology is widely believed to have obtained them from the Song of South Dynasty, where the japanese royal power was negotiated in the mid-5th century, and some of them were provided to Baekje from the Japanese royal power. However, if bronze mirror of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belongs to the Yang Dynasty, it is possible that it was an returning mirror that was brought to the throne through Baekje in the 6th century when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South Dynasty was severed.
As such, the excavation of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has an important key to reviewing the historical evaluation of the cloning institutes excavated in Japan. In the future, writer expects further research on the manufacturing techniques and design of bronze mirror excavated from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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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문헌으로 읽은 일본열도 내 백제계·중국계 이주민

저자 : 田中史生 ( Tanaka Fumio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3-8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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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華北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 이주한 중국계 지식인과 그 후손들이 활약했다. 또한 백제는 이들 중 일부를 왜 왕권 아래로 보내 왜국과의 동맹 강화를 꾀하였다. 중국계 이주민들은 중국에서 유래한 '家'를 바탕으로 그 姓과 문화를 후손에게 계승해 각지에서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왜국에서는 중국계 이주민의 姓과 문화가 6세기에 계승되지 않고 왜 왕권이 편성한 씨족 조직으로 흡수되어 간다. 한편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중국계 인사들의 姓과 문화가 6세기 이후에도 계승되는 데, 이러한 차이는 왜국과 백제나 고구려의 對中 외교 자세 차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국계 이주민과 그 후손들은 특히 對中 외교에서의 활약이 기대되었는데, 왜국에서는 5세기 후반을 마지막으로 중국 왕조와의 직접교류를 오래 중단하면서 그 필요성이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국으로는 6세기 이후에도 중국에서 유래한 문화가 한반도에서 유입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가 왜국에 보낸 여러 博士와 승려들이다. 이 중 박사에 대해서는 중국적인 姓을 가진 사람이 많아 5세기 이전에 백제에 포섭된 중국계 이주민의 후손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 건너온 박사·승려들은 著書로 그 지식을 왜인에게 전수하였다. 또 백제에서 이주한 수공업자도 그 기술을 왜인에게 전수했다.
7세기 후반 왜국에는 멸망한 백제로부터 많은 이주자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때 백제계 이주민들은 계층적인 확산과 다민족적 구성을 통해 멸망 이전 백제의 사회 구성을 대체로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본국 멸망을 계기로 이주한 舊백제 지배층은 왜 왕권 하에서 官人으로 포섭되자 백제시대에 축적한 지식과 능력을 이용하여 이후의 일본역사를 규정하는 왜국에서 일본 율령국가로의 탈바꿈에 크게 뒷받침하였다. 그 실상은 6세기 백제 이주민의 양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In the 5th century, Baekje and Goguryeo had Chinese intellectuals and their descendants who migrated to the Korean peninsula in the wake of the conflict in northern China. In addition, Baekje sent some of them to the Wa kingdom in order to strengthen the alliance with Wa. The Chinese immigrants inherited their family name and culture from their descendants, based on their Chinese-derived "family"(家), and gained political positions in various regions.
In Wa, however, the family names and culture of the Chinese immigrants were not inherited in the 6th century, and they were absorbed into the clan organization formed by the Wa kingdom. On the other hand, in Goguryeo and Baekje, the family name and culture of the Chinese people were inherited from the 6th century onwards. These differences may be attributed to the different attitudes of the Wa, Baekje and Koguryo towards China and abroad.Chinese immigrants and their descendants were expected to play an active role, especially in diplomacy with China. However, in the 6th century, Wa ceased direct exchange with the Chinese dynasty, and the need for them seems to have been significantly reduced.
However, in Wa, Chinese culture continued to flow from the Korean peninsula after the 6th century. This is exemplified by the hakase(博士) and monks priests that Baekje sent to Wa. Many of these hakase had Chinese surnames and were probably descendants of Chinese immigrants who had been incorporated into Baekje before the 5th century. The hakase and monks who came from Baekje passed on their knowledge to the Wa through the use of books. In addition, the craftsmen who migrated from Baekje also passed on their skills to the Wa.
In the latter half of the 7th century, a large number of immigrants from the defunct Baekje came to Wa at once. At this time, the Baekje immigrants had a hierarchical spread and multi-ethnic composition that largely reflected the social structure of Baekje just before its fall. In addition, the former Baekje ruling class that migrated after the fall of their home country were taken in as officials under the Wa monarchy, and used the knowledge and skills they had accumulated during the Baekje period to greatly support the transition from Wa to Japanese Ritsuryo state, which defined the history of Japan from then on. This was similar to the situation of the people who migrated from Baekje in the 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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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긴키(近畿)지역의 고대 백제계(韓系) 이주민의 연구

저자 : 中久保 辰夫 ( Nakakubo Tatsuo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34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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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은 서기 3세기에서 6세기를 대상으로 한반도와의 문화적 교류와 이주민이 일본 열도의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한다. 토기 자료를 중심으로 한일 이주민이 수행한 역할을 정리하면, 이주민의 역사적 역할은 3세기에서 4세기 초엽의 교역에서 5·6세기의 인적 교류와 정착을 통한 기술과 지식의 도입으로 이행된다. 또한, 중기 말부터 후기 사이에는 백제를 통한 한반도계 이주민의 존재도 뚜렷해지고 있다.
한인 이주민들이 재래사회에 끼친 영향은 취락유적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실증할 수 있다. 본론에서는 奈良縣의 新堂유적, 布留유적, 兵庫縣 남서부의 播磨지역을 다루었다. 新堂유적에서는 수륜연대보정분석을 통해 5세기 초엽을 나타내는 河道 출토 항렬과 풍부한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되었고, 鍛冶 관련유물과 말뼈 등이 수반되었다. 수공업 식산과 한반도계 이주민의 밀접한 관계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布留유적 사례연구에서는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수공업 생산의 확충과 지역개발을 권력기반으로 유력 호족들이 대두하는 과정이 밝혀졌다. 또 播磨지역 분석으로는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거주 유적이 훗날 고대 육로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러한 이주민을 통한 문화교류와 사회 자본투자는 왜의 고대국가 형성에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In this paper, the author considers the effects that cultural interaction wit h and immigration from the Korean peninsula had on the society and culture of the Japanese archipelago from the 3rd to 6th century AD. Consideration of the historical role of immigration from the Korean peninsula based on an analysis of pottery reveals that while trade was prominent in the 3rd to early 4th centuries, the 5th and 6th centuries witnessed a significant shift to the actual movement and settling down of people, leading to the introduction of new technology and knowledge. Additionally, from the end of the Middle Kofun period to the Late Kofun period, the existence of immigrants from China, through Baekje, has come to light in recent years.
The influence of immigrants from the peninsula on local society can be a scertained through archaeological excavation of and research on settlement sites. In this paper, the author considers the Shindō site (Nara Prefecture), Furu site (Nara Prefecture), and the sites of Harima province in the southwestern Hyogo Prefecture. At the Shindō site, analysis of the tree-ring oxyge n isotope ratios of a row of wooden spikes from a river revealed that the a ccompanying Korean-style stoneware, ironworking objects, and horse bones belonged to the first third of the 5th century, suggesting an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the spread of craft production and immigrants from the Kore an peninsula. At the Furu site, the process by which a powerful elite group rose to power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based on the expansion of craft production and regional development has been greatly clarified. Additionally, the Harima case study reveals the possibility that settlement sites populated by peninsular immigrants had strong connections to ancient roadways.
The author proposes that this cultural interaction and investment in infra structure supported by immigrants had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ancient state formation of the Japanese archipel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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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대 일본의 등화구

저자 : 神野恵 ( Jino Megumi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17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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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화구(燈火具)의 존재는 야간(夜間) 인류의 지적(知的) 활동 시간을 주고, 그야말로 문명을 밝히는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일본 등화구 출현의 확실한 사례로는 고고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7세기 전반의 식기(食器) 전용 등화구와 조합식의 스에키(須恵器)에 사용 자국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문헌자료로는 651년에 아지후노미야(味經宮)의 연등공양(燃燈供養) 기사가 처음 확인되었다.
고대 일본의 등화구는 왕권의 위신재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이에대한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하였다. 등화구가 일정한 고위 계층에 보급되는 것은 불교의 전래와 황족·귀족층에 대한 반영일 것이다. 나라시대 전반인 8세기 제2/4분기에는 불교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가는 과정에서 등화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궁도(宮都)의 등화구 증가는 율령제도에 기초한 국가 형성 및 궁인(官人)의 증가가 그 배경에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등화구는 중국과 한국의 등화구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발달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등화구는 고대 동아시아의 교류사를 웅변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The existence of oil lamps was a great invention that gave mankind time for intellectual activities at night and truly illuminated civilization. The appearance of oil lamps in Japan can be confirmed by archaeological materials, which show traces of their use in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in the recycled oil lamps that were originally used as tableware and in combination-type Sue ware. In addition, the article on Buddhist ritual at Ajifu-no-miya Palace in 651 is the first documented case.
We must consider the possibility that ancient Japanese lamps were introduced as a prestige material for royal authority, but at present we have no solid evidence of this.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and the penetration of the imperial family and aristocracy probably led to the spread of oil lamps among a certain level of high society. In the second quarter of the eighth century, which is the first half of the Nara period (710-794), it has become clear that the spread of oil lamps throughout the country occurred in the process of the nationwide penetration of Buddhism.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lamps in the imperial capitals was probably due to the formation of the state based on the Ritsuryo system and the increase in the number of government officials.
In addition, it has become clear that the development of oil lamps excavated in Japan was greatly influenced by those of Ancient China and Korea. We have come to realize that lamps also eloquently illustrate the history of exchange between ancient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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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헌으로 본 일본 고대 등잔

저자 : 桑田訓也 ( Kuwata Kuniya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1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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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대 일본에서 등불의 전반적인 양상과 그 속에서 등잔이 차지하는 위치 및 등잔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문헌을 통해 검토하였다.
우선, 일본 고대의 등불과 등잔에 대해 개관하고, 등잔을 이용하는 것은 고대의 등불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하며 실내에서 고정적인 등불로 사용하는 상황에 한정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등잔을 나타내는 용어로 '등잔', '유배', '등배' 등을 포함하여 보다 넓은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등잔을 이용하는 상황을 궁궐·관아와 사원로 나누어 소개했다. 궁궐·관아에서는 일상생활의 등불, 仕事의 등불, 의식·연중행사의 등불로 사례를 분류하였고, 사원에서는 숙직, 연등공양, 개인 헌등을 거론했다. 또한, 문자자료로 본 조명도구의 구조, 등잔의 규격과 기름·심지의 소재, 등잔과 기름·심지의 사용 비율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관아·사원에서 특징적인 등잔의 양상에 대해 전망하였다. 관아에서는 등잔을 사용하는 상황이 많은 반면 상황별 사용수는 대체로 적지만 사원에서는 1회에 대량으로 사용(소비)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 또한 등잔의 기본적인 성격을 굳이 종교적 도구인지 조명용 도구인지 양자택일로 생각할 경우 관아에서는 조명용 도구, 사원에서는 종교적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overall picture of lighting in ancient Japan, the place of the lamp-dish in that picture, and the specific situations in which the lamp-dish was used, based on historical documents.
First, I overviewed ancient Japanese lights and lamp dishes, and pointed out that the use of lamp dishes was limited to indoor situations where they were used as fixed lights, and that terms such as "灯盞," "油坏," and "灯坏" were used to describe lamp dishes, but their frequency was low. I pointed out that it is necessary to examine a wider range of historical materials that include words such as "油(oil)," "灯(light)," and "夜(night) ".
Next, I introduced the situations in which lampshades are used, dividing them into palaces and government offices and temples. In the case of palaces and government offices, the examples were categorized as lights for daily life, lights for work, and lights for ceremonies and annual events. In the case of temples, I focused on the use of lights for lodgings, burning lanterns, and private offerings.
I also examined the structure of lampshades from the perspective of textual materials, the standard of lampshades and the materials of oil and lamp cores, and the ratio of lampshades to oil and lamp cores.
Lastly, I made some observations on the aspect of lantern dishes that is characteristic of government offices and temples. I pointed out that while there were many occasions when lampshades were used in government offices, the number of occasions when they were used was generally small, while in temples they were sometimes used (or consumed) in large quantities at one time. In addition, I pointed out that if we dare to choose between a religious tool and a lighting tool, the basic character of a lampshade can be seen as a lighting tool in government offices and a religious tool in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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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 3~6세기 출토 청동 조명도구 연구

저자 : 韓茗 ( Han Ming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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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대륙에서 출토된 3~6세기 청동 조명도구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형태의 차이에 따라 수병등(豎柄燈), 연지등(連枝燈), 횡병등(橫柄燈), 제등(提燈), 녹로등(轆轤燈), 치등(卮燈), 촉반(燭盤), 촉삽좌(燭插座)의 8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나라 이후부터 수나라 이전까지의 청동 조명도구의 변천양상을 파악해보았다. 또, 동시대의 도자기 조명도구의 형태와 비교하여 육조시대 조명도구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비록 한나라 이후 청동 조명도구 제작이 쇠퇴하였지만, 도자기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조명도구 장식에 높은 예술적 표현력과 역외(域外) 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특히 촉삽좌 같은 조명도구의 발전으로 같은 시기의 조명도구 장식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시대적인 특징도 더하였다. 초(燭)의 보급으로 조명연료가 변하게 된 것은 한나라 이후 조명도구의 형태변화의 가장 중요한 계기이며, 육조시대는 중국 고대 조명도구의 전환기로 되었다.
본고에서는 한당시대(漢唐時代) 조명도구의 연구과 분류기준을 참고하여 육조시대 조명도구의 특별한 성격에 알아보았다. 또한, 현재 조명도구의 형식학적 연구에 대해 복잡한 분류와 자료의 부족에서 문제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This paper collects the data of bronze lamps unearthed from the 3rd to 6th century in Chinese mainland. According to the difference from the perspective of form, they are divided into eight types: vertical handle lamp, branches-shaped lamp, horizontal handle lamp, pendant lamps, clamshell-shaped lamp, vessel-shaped lamp, candle tray and candle socket, based on which we trying to summarize the evolution of bronze lamps between the end of Han Dynasty to Sui Dynasty. We investigate the general appearance of lamps in the Six Dynasties taking ceramic lamps from the same period as comparison. Although the production of bronze lamps declined after the Han Dynasty, under the background of the rise of porcelain manufacturing industry, lamp decoration showed a strong artistic expression and the influence of foreign culture, especially the rise of lamps for candle, which made the lamps more decorative and full of the new fashion of the times. The wide use of candles promoted the change of lighting fuel, which was the most important reason for the change of the forms of lamps after Han Dynasty. It was the Six Dynasties that was the transition period of ancient Chinese lamps. Starting from the particularity of the lamps from the Six Dynasties, based on the aboved iscussion, this paper discusses the judgment and classification standards of lamps and lanterns in the Han-to-Tang Dynasties period, and points out the complexity of lamp typology and that there remains much to be further expl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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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제 파수부 등잔 연구

저자 : 李相日 ( Lee Sangil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8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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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비기에는 다양한 유적에서 등잔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활발한 조명문화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등잔들은 대부분 종지형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독특한 형태의 등잔이 사비기에 공존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등잔은 동체에 파수(把手)와 덧붙여진 칸이 조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체의 경우 소형 완(盌)의 형태와 유사하여 일반적인 종지형 등잔에 비해서는 크다. 파수의 경우 따로 제작한 점토를 부착하고 이를 90°로 접어 측면에서 보았을 때, 'ᄀ'자 형태를 띤다. 마지막으로 덧붙여진 칸은 세종류로 구분된다. 먼저 작은 귀(耳)를 동체 중간부터 부착한 것과 같은 Ⅰ형식, 장방형의 칸을 동체에 연접하여 부착한 Ⅱ형식, 작은 완을 동체에 연접하여 부착한 것과 같은 Ⅲ형식이 있다.
파수부 등잔의 편년을 살펴보면, 7세기 초엽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기점이 되는 유적이 부여 관북리 유적과 청산성, 동남리사지를 주목할 수 있다. Ⅰ형식과 Ⅱ형식이 주를 이루며 Ⅲ형식은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7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파수부 등잔의 출토 유적이 증가하는데, 익산 왕궁리에서도 확인된다. Ⅲ형식도 보급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세가지 형태가 백제 말기까지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파수부 등잔의 출현 배경으로는 중국의 영향, 고구려의 영향, 자체 발생을 고려해볼 수 있는데, 중국 문화의 수용과 중국 자기의 번안(飜案)을 고려하면 중국 조명도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파수부 등잔은 동체에 연료를 담고, 덧붙여진 칸에 심지를 놓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이는 동체에서 기름이 담겼던 흔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덧붙여진 칸에는 그을음이 다량 흡착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심지의 고정을 향상하기 위해 동체와 덧붙여진 칸 사이에 작은 원공(圓孔)을 설정한 사례도 존재한다.


Oil lamps are excavated from various historical sites during the Baekje Sabi Period. This shows that lighting devices were used actively at that time. Most of these lamps are bowl-shaped, with unique types of lamps coexisting.
The lamp features a combination of a handle and an added container on the body. The body is similar with the shape of a small bowl which is bigger than the general small cup sized oil lamps. For the handle, separately made clay was used, which was folded to 90°, looking like a 'ㄱ' form on the side. The last container to be added is classified into three types. First, there is a Type I with a small ear attached to the body, a Type II with a rectangular container attached to the body, and a Type Ⅲ with a small bowl attached to the body.
Looking into the chronology of Handle lamp, it is appearing in early 7th century. The original remains of it is Gwanbuk-ri in Buyeo, Cheongsan Fortress, and Dongnam-ri Temple. Mainly Type I and Type II were present, and Type 3 is not seen much. Entering the mid-7th century, excavated remains increased and was also found in Iksan Wanggung-ri. It seems that Type Ⅲ has also been supplied, assuming these three types have been used until the end of Baekje. Handle Lamp may have emerged from the background of Goguryeo and China, and also by Baekje itself. However, considering the acceptance of Chinese culture and the adaption of Chinese porcelain, with big possibility it was influenced by Chinese lighting devices.
Finally, the Handle Lamp would have placed oil on the body and wick on the added container. This was shown through traces of oil on the body, and a large amount of soot on the added container. There are also examples of small holes made between the body and the added container to increase the settling of the w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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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두계 이병도의 백제사연구 -그 업적과 한계-

저자 : 崔章烈 ( Choi JangYeal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2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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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계 이병도(1896~1989)는 일반적으로 실증사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두계가 역사연구 방법론으로 평생 동안 실증적 방법을 중요시한 것은 적어도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일본인 스승과의 만남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두계는 긴 생애를 통해 역사가로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겼는데, 한국 고대사는 스스로 가장 큰 성과를 이룬 분야로 자부하였다. 두계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쓴 고대사 논문을 모아『한국고대사연구』(1976)를 출간하였고, 이 책에 일제강점기부터 개별적으로 발표한 백제사 관련 논문도 재수록하였다. 두계가 고이왕대와 근초고왕대를 중요한 획기로 설정한 백제사 체계의 큰 틀은 지금까지도 통설이 되어 유지되고 있다. 백제사 연구는 두계를 제1세대로 하여 그 기반이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두계가 제시한 백제사 관련 여러 견해들, 이를테면 삼한의 위치 비정, 하남위례성 비정, 미륵사 창건연대 재해석 등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두계의 연구가 부실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간 신자료의 발굴 및 관련 연구의 심화 등 학문적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계는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에 입각한 연구로 한국사학이 역사학으로 정립하고, 그 학문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한편으로는 식민주의 사학자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한국사 연구가 일본인들이 만든 식민사관을 추종한다는 것이다. 두계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주로 고대사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연구자의 연구가 내포하고 있던 한계, 즉 일본인들이 설정하고 이끌고 간 문제의식이나 연구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두계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두계가 쌓아왔던 연구업적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다. 역사가에 대한 사학사적 평가는 그의 학술 활동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Yi Byeong-do (courtesy name: Dugye, 1896-1989)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Korean historians of the 20th century, best known as a champion of empirical history. Yi's lifelong emphasis on empirical methodology is traced back to his years in Tokyo during which he met his Japanese mentor while studying at Waseda University.
While he made remarkable achievements throughout the long career as a historian, he was particularly proud of the one he made in the field of ancient Korean history. Yi compiled a volume of research papers he had written on ancient Korean history until his later years, and published the book A Study o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1976). The book also contained his early research papers on Baekje history, some of which were originally published as early as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is basic idea on Baekje history that the ancient Korean kingdom had two pivotal periods, one when it was under the reign of King Goi and the other under the reign of King Geunchogo, is still widely accepted. A pioneer in the historical research of Baekje, Yi laid the groundwork for this field. Notwithstanding, some of his theories related to Baekje history such as the presumed locations of Jinhan and Wiryeseong Fortress in Hanam or the new date he proposed as the founding year of Mireuksa Temple have been mostly dismissed today. This, however, should not be seen as a proof of imperfection of the Yi's researches, but rather as a natural consequence of advances in the field. New findings and further research most often lead to an improved understanding of a period.
His research based on a modern methodology is considered to have made immeasurable contributions in transforming Korean historiography into historical science and raising scholarly standards in this field. At the same time, Yi has been also criticized as a historian with a colonial view of Korean history. His critics accused him of echoing the Japanese-made colonial vision of Korean history. Such criticism has been mainly directed against his research in ancient history. Yi's research was undeniably limited by his circumstances as a Korean historian who liv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conformed, in many ways, to the Japanese perspectives and methods. However, the fact that Yi's research was not free of such limitations in no way diminishes the value of the many contributions he made over his career. A historiographic assessment of a historian ought to be based on a comprehensive and through evaluation of his or her scholarly activities and accomplish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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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사카모토타로(坂本太郞)의 백제사 연구

저자 : 朴宰用 ( Park JaeYong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27-343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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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은 잔존 사료의 편재성과 그 성격의 문제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4~7세기 사료는 압도적으로 일본측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것도 『일본서기』에 편중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천황중심적 이념에 의해 윤색되어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그로부터 사실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내느냐가 진실에 가장 잘 접근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본서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단초를 연 인물이 바로 坂本太郞이다. 坂本은 사료 중심의 실증주의적 사관에 입각해 가능한 객관적 해석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서기』사료에 신뢰를 두고 원전 및 인용방식을 검토하는 과정을 중시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연구는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坂本의 『일본서기』 백제관계 기사에 대한 연구방법 및 이해방식은 선구적이었으며, 이후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The greatest difficulty in the study of the ancient Korea-Japan history is the ubiquity and character of the remaining historical materials. Historical documents from the 4th to 7th centuries, which form the center of the ancient Korea-Japan history, were overwhelmingly compiled by the Japan. It is biased toward 「Nihonsyoki」. Therefore, it is of utmost importance to accurately grasp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the 「Nihonsyoki」. In other words, removing the part colored by the emperor-centered ideology and deriving facts from it will be the best way to approach the truth.
Sakamoto Taro is the person who opened the beginning of a full-scale study of this 「Nihonsyoki]. Sakamoto tried to pursue a possible objective interpretation based on a historical positivist view. However, since he went through the process of reviewing the original source and citation method with confidence in the historical sources of 「Nihonsyoki」, his research today clearly reveals its limitations. Even so, it cannot be denied that Sakamoto's research method and understanding method of 「Nihonsyoki」 on Baekje related articles was pioneering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subsequent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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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청파(靑坡) 노도양(盧道陽)(1909~2004)의 백제사 연구

저자 : 金榮官 ( Kim Youngkwan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5-36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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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양은 대한지리학회 회장을 지내는 등 해방 후 한국지리학계를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역사 연구에 지리학적 연구 방법론을 도입한 학자로 중요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백제역사지리 연구업적은 3편에 불과하지만, 결코 경시할 수 없다.
노도양의 백제사 연구는 모두 명지대 재직시절인 60대에 집필되었다. 그의 역사지리 연구는 일본고마자와대학에서 역사지리학을 전공한 것이 기반이 되었다. 특히 백제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는 충남부여보통학교 교원으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겪은 경험과 1952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도중인 1958년에 만든 백제연구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노도양의 백제사 연구는 지명 비정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등 각종 역사기록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비판, 『新增東國輿地勝覽』 등과 같은 지리지 기록과 고지도 및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를 활용한 지리학적 연구 방법과 국어학적 연구 방법론까지 활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현장 답사를 중시했다. 이러한 연구 방법론은 오늘날의 역사연구 방법론으로도 매우 유용하고 타당한 면이 있다.


Roh Doyang(19909~2004) was a key figure who led the geographical academic circle in Korea after the Independence from the Japan Occupation, including serving as president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and made important research achievements in introducing geographical research methodology to historical research. His work in Baekje's historical geography is only three, but it is never taken lightly.
All of his studies on Baekje's history were written in his 60s during his tenure at Myongji University in Seoul. His research was based on his major in historical geography at Komazawa University in Japan. Particularly his interest in Baekje's historical geography came from his activities and experiences as a teacher at Buyeo Ordinary School in Chungnam (Chungcheong South Province) for three years, as a history professor at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from 1952, and as a researcher at the Baekje Research Society established in 1958.
Roh Doyang's studies on Baekje's history focused on estimating place names. However, they were based on thorough reviews and criticism of various historical records, including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Sagi) and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 (Samguk Yusa). He also used geographical and linguistic research methods using geographical descriptions such as the Revised and Augmented Survey of the Geography of Korea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ancient maps, and topographical maps issued by the National Geographic Information Institute. Therefore, the research methodology on the location of Gosisan, Tanhyeon, Wangheungsa Temple Site, Juryuseong Fortress and Baekgang River has something to learn from the current perspective, and the research results are also us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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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령왕릉 출토 동경의 계보와 연대

저자 : 福永伸哉 ( Fukunaga Shinya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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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 위치한 무령왕릉에서는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3점의 동경이 부장되었다. 본고에서는 특히 변형방격규구경에 주목하여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의 계보와 제작 연대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 동경은 후한의 방격규구경을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하고 여기에 인수상 1개, 짐승상 4개를 더한 특이한 도상을 지니고 있다. 본 논문은 이 동경의 제작기법과 인수상 표현에 주목을 하였다.
동경의 표현상태를 관찰한 결과 제작기법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공정으로 복원하였다. 먼저 후한경을 본떠 제작한 1차 거푸집에 납을 넣어 밀랍으로 만든 경체를 만든다. 그 다음 표면에 밀랍으로 만든 입체적인 인수상을 입혀 전체가 밀랍으로 만들어진 원형을 만든다. 그리고 이 납원형을 주형토로 감싸고 가열을 하여 2차 주형을 제작하고 청동을 흘려 넣어 완성품인 동경이 완성된다. 이러한 제작기법은 '실랍주조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서 수경이나 당경의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인수상은 긴 자루의 무기를 든 인물과 네 마리 짐승이 질주하는 모습을 표현한 사냥문이라 할 수 있다. 사냥문의 모티브나 인수의 방향 등은 당경(唐鏡)과 가장 유사하다.
이상과 관련하여 필자는 이 동경이 수경이나 당경으로 이어지는 계보상의 중국거울이며, 그 제작연대는 무령왕이 재위한 6세기 1분기라고 추정하였다. 무령왕이 남조(南朝) 양(梁)에 파견한 512년과 521년이 그 입수시기로 보았다. 이것이 인정된다면 역시 후한경을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된 다른 두 점도 양(梁) 대의 동형경일 가능성이 있다.
후한경의 복제경은 일본의 5~6세기 고분에서 약 130점이 출토된다. 일본고고학에서는 이들이 5세기 중엽에 왜 왕권이 교섭관계에 있던 남조 송나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 보고, 그 일부가 왜 왕권으로부터 백제에도 제공되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무령왕릉 동경이 양나라의 것이라면, 왜와 남조의 관계가 끊어진 6세기에 백제를 경유하여 왜 왕권에 가져다준 반환경일 가능성이 생긴다.
이처럼 무령왕릉 출토 동경은 일본에서 출토되는 복제원의 역사적 평가를 재검토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필자는 향후 무령왕릉 출토 동경의 제작기법이나 도문에 대한 연구가 한층 더 진전될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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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문헌으로 읽은 일본열도 내 백제계·중국계 이주민

저자 : 田中史生 ( Tanaka Fumio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3-80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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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華北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 이주한 중국계 지식인과 그 후손들이 활약했다. 또한 백제는 이들 중 일부를 왜 왕권 아래로 보내 왜국과의 동맹 강화를 꾀하였다. 중국계 이주민들은 중국에서 유래한 '家'를 바탕으로 그 姓과 문화를 후손에게 계승해 각지에서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왜국에서는 중국계 이주민의 姓과 문화가 6세기에 계승되지 않고 왜 왕권이 편성한 씨족 조직으로 흡수되어 간다. 한편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중국계 인사들의 姓과 문화가 6세기 이후에도 계승되는 데, 이러한 차이는 왜국과 백제나 고구려의 對中 외교 자세 차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국계 이주민과 그 후손들은 특히 對中 외교에서의 활약이 기대되었는데, 왜국에서는 5세기 후반을 마지막으로 중국 왕조와의 직접교류를 오래 중단하면서 그 필요성이 현저히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국으로는 6세기 이후에도 중국에서 유래한 문화가 한반도에서 유입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가 왜국에 보낸 여러 博士와 승려들이다. 이 중 박사에 대해서는 중국적인 姓을 가진 사람이 많아 5세기 이전에 백제에 포섭된 중국계 이주민의 후손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 건너온 박사·승려들은 著書로 그 지식을 왜인에게 전수하였다. 또 백제에서 이주한 수공업자도 그 기술을 왜인에게 전수했다.
7세기 후반 왜국에는 멸망한 백제로부터 많은 이주자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때 백제계 이주민들은 계층적인 확산과 다민족적 구성을 통해 멸망 이전 백제의 사회 구성을 대체로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본국 멸망을 계기로 이주한 舊백제 지배층은 왜 왕권 하에서 官人으로 포섭되자 백제시대에 축적한 지식과 능력을 이용하여 이후의 일본역사를 규정하는 왜국에서 일본 율령국가로의 탈바꿈에 크게 뒷받침하였다. 그 실상은 6세기 백제 이주민의 양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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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긴키(近畿)지역의 고대 백제계(韓系) 이주민의 연구

저자 : 中久保 辰夫 ( Nakakubo Tatsuo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1-134 (5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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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은 서기 3세기에서 6세기를 대상으로 한반도와의 문화적 교류와 이주민이 일본 열도의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한다. 토기 자료를 중심으로 한일 이주민이 수행한 역할을 정리하면, 이주민의 역사적 역할은 3세기에서 4세기 초엽의 교역에서 5·6세기의 인적 교류와 정착을 통한 기술과 지식의 도입으로 이행된다. 또한, 중기 말부터 후기 사이에는 백제를 통한 한반도계 이주민의 존재도 뚜렷해지고 있다.
한인 이주민들이 재래사회에 끼친 영향은 취락유적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실증할 수 있다. 본론에서는 奈良縣의 新堂유적, 布留유적, 兵庫縣 남서부의 播磨지역을 다루었다. 新堂유적에서는 수륜연대보정분석을 통해 5세기 초엽을 나타내는 河道 출토 항렬과 풍부한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되었고, 鍛冶 관련유물과 말뼈 등이 수반되었다. 수공업 식산과 한반도계 이주민의 밀접한 관계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布留유적 사례연구에서는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수공업 생산의 확충과 지역개발을 권력기반으로 유력 호족들이 대두하는 과정이 밝혀졌다. 또 播磨지역 분석으로는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거주 유적이 훗날 고대 육로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러한 이주민을 통한 문화교류와 사회 자본투자는 왜의 고대국가 형성에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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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대 일본의 등화구

저자 : 神野恵 ( Jino Megumi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17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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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화구(燈火具)의 존재는 야간(夜間) 인류의 지적(知的) 활동 시간을 주고, 그야말로 문명을 밝히는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일본 등화구 출현의 확실한 사례로는 고고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7세기 전반의 식기(食器) 전용 등화구와 조합식의 스에키(須恵器)에 사용 자국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문헌자료로는 651년에 아지후노미야(味經宮)의 연등공양(燃燈供養) 기사가 처음 확인되었다.
고대 일본의 등화구는 왕권의 위신재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이에대한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하였다. 등화구가 일정한 고위 계층에 보급되는 것은 불교의 전래와 황족·귀족층에 대한 반영일 것이다. 나라시대 전반인 8세기 제2/4분기에는 불교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가는 과정에서 등화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궁도(宮都)의 등화구 증가는 율령제도에 기초한 국가 형성 및 궁인(官人)의 증가가 그 배경에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등화구는 중국과 한국의 등화구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발달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등화구는 고대 동아시아의 교류사를 웅변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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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헌으로 본 일본 고대 등잔

저자 : 桑田訓也 ( Kuwata Kuniya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3-21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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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대 일본에서 등불의 전반적인 양상과 그 속에서 등잔이 차지하는 위치 및 등잔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문헌을 통해 검토하였다.
우선, 일본 고대의 등불과 등잔에 대해 개관하고, 등잔을 이용하는 것은 고대의 등불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하며 실내에서 고정적인 등불로 사용하는 상황에 한정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등잔을 나타내는 용어로 '등잔', '유배', '등배' 등을 포함하여 보다 넓은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등잔을 이용하는 상황을 궁궐·관아와 사원로 나누어 소개했다. 궁궐·관아에서는 일상생활의 등불, 仕事의 등불, 의식·연중행사의 등불로 사례를 분류하였고, 사원에서는 숙직, 연등공양, 개인 헌등을 거론했다. 또한, 문자자료로 본 조명도구의 구조, 등잔의 규격과 기름·심지의 소재, 등잔과 기름·심지의 사용 비율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관아·사원에서 특징적인 등잔의 양상에 대해 전망하였다. 관아에서는 등잔을 사용하는 상황이 많은 반면 상황별 사용수는 대체로 적지만 사원에서는 1회에 대량으로 사용(소비)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 또한 등잔의 기본적인 성격을 굳이 종교적 도구인지 조명용 도구인지 양자택일로 생각할 경우 관아에서는 조명용 도구, 사원에서는 종교적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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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 3~6세기 출토 청동 조명도구 연구

저자 : 韓茗 ( Han Ming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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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중국대륙에서 출토된 3~6세기 청동 조명도구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였다. 형태의 차이에 따라 수병등(豎柄燈), 연지등(連枝燈), 횡병등(橫柄燈), 제등(提燈), 녹로등(轆轤燈), 치등(卮燈), 촉반(燭盤), 촉삽좌(燭插座)의 8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나라 이후부터 수나라 이전까지의 청동 조명도구의 변천양상을 파악해보았다. 또, 동시대의 도자기 조명도구의 형태와 비교하여 육조시대 조명도구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비록 한나라 이후 청동 조명도구 제작이 쇠퇴하였지만, 도자기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조명도구 장식에 높은 예술적 표현력과 역외(域外) 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특히 촉삽좌 같은 조명도구의 발전으로 같은 시기의 조명도구 장식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시대적인 특징도 더하였다. 초(燭)의 보급으로 조명연료가 변하게 된 것은 한나라 이후 조명도구의 형태변화의 가장 중요한 계기이며, 육조시대는 중국 고대 조명도구의 전환기로 되었다.
본고에서는 한당시대(漢唐時代) 조명도구의 연구과 분류기준을 참고하여 육조시대 조명도구의 특별한 성격에 알아보았다. 또한, 현재 조명도구의 형식학적 연구에 대해 복잡한 분류와 자료의 부족에서 문제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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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제 파수부 등잔 연구

저자 : 李相日 ( Lee Sangil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8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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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비기에는 다양한 유적에서 등잔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활발한 조명문화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등잔들은 대부분 종지형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와 더불어 독특한 형태의 등잔이 사비기에 공존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등잔은 동체에 파수(把手)와 덧붙여진 칸이 조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체의 경우 소형 완(盌)의 형태와 유사하여 일반적인 종지형 등잔에 비해서는 크다. 파수의 경우 따로 제작한 점토를 부착하고 이를 90°로 접어 측면에서 보았을 때, 'ᄀ'자 형태를 띤다. 마지막으로 덧붙여진 칸은 세종류로 구분된다. 먼저 작은 귀(耳)를 동체 중간부터 부착한 것과 같은 Ⅰ형식, 장방형의 칸을 동체에 연접하여 부착한 Ⅱ형식, 작은 완을 동체에 연접하여 부착한 것과 같은 Ⅲ형식이 있다.
파수부 등잔의 편년을 살펴보면, 7세기 초엽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기점이 되는 유적이 부여 관북리 유적과 청산성, 동남리사지를 주목할 수 있다. Ⅰ형식과 Ⅱ형식이 주를 이루며 Ⅲ형식은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7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파수부 등잔의 출토 유적이 증가하는데, 익산 왕궁리에서도 확인된다. Ⅲ형식도 보급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세가지 형태가 백제 말기까지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파수부 등잔의 출현 배경으로는 중국의 영향, 고구려의 영향, 자체 발생을 고려해볼 수 있는데, 중국 문화의 수용과 중국 자기의 번안(飜案)을 고려하면 중국 조명도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파수부 등잔은 동체에 연료를 담고, 덧붙여진 칸에 심지를 놓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이는 동체에서 기름이 담겼던 흔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덧붙여진 칸에는 그을음이 다량 흡착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심지의 고정을 향상하기 위해 동체와 덧붙여진 칸 사이에 작은 원공(圓孔)을 설정한 사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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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두계 이병도의 백제사연구 -그 업적과 한계-

저자 : 崔章烈 ( Choi JangYeal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89-32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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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계 이병도(1896~1989)는 일반적으로 실증사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두계가 역사연구 방법론으로 평생 동안 실증적 방법을 중요시한 것은 적어도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일본인 스승과의 만남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두계는 긴 생애를 통해 역사가로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겼는데, 한국 고대사는 스스로 가장 큰 성과를 이룬 분야로 자부하였다. 두계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쓴 고대사 논문을 모아『한국고대사연구』(1976)를 출간하였고, 이 책에 일제강점기부터 개별적으로 발표한 백제사 관련 논문도 재수록하였다. 두계가 고이왕대와 근초고왕대를 중요한 획기로 설정한 백제사 체계의 큰 틀은 지금까지도 통설이 되어 유지되고 있다. 백제사 연구는 두계를 제1세대로 하여 그 기반이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두계가 제시한 백제사 관련 여러 견해들, 이를테면 삼한의 위치 비정, 하남위례성 비정, 미륵사 창건연대 재해석 등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두계의 연구가 부실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간 신자료의 발굴 및 관련 연구의 심화 등 학문적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계는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에 입각한 연구로 한국사학이 역사학으로 정립하고, 그 학문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한편으로는 식민주의 사학자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한국사 연구가 일본인들이 만든 식민사관을 추종한다는 것이다. 두계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주로 고대사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연구자의 연구가 내포하고 있던 한계, 즉 일본인들이 설정하고 이끌고 간 문제의식이나 연구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두계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두계가 쌓아왔던 연구업적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다. 역사가에 대한 사학사적 평가는 그의 학술 활동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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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사카모토타로(坂本太郞)의 백제사 연구

저자 : 朴宰用 ( Park JaeYong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27-343 (1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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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은 잔존 사료의 편재성과 그 성격의 문제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4~7세기 사료는 압도적으로 일본측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것도 『일본서기』에 편중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적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천황중심적 이념에 의해 윤색되어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그로부터 사실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내느냐가 진실에 가장 잘 접근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본서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단초를 연 인물이 바로 坂本太郞이다. 坂本은 사료 중심의 실증주의적 사관에 입각해 가능한 객관적 해석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서기』사료에 신뢰를 두고 원전 및 인용방식을 검토하는 과정을 중시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연구는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坂本의 『일본서기』 백제관계 기사에 대한 연구방법 및 이해방식은 선구적이었으며, 이후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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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청파(靑坡) 노도양(盧道陽)(1909~2004)의 백제사 연구

저자 : 金榮官 ( Kim Youngkwan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간행물 : 백제연구 7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5-36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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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양은 대한지리학회 회장을 지내는 등 해방 후 한국지리학계를 이끈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역사 연구에 지리학적 연구 방법론을 도입한 학자로 중요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백제역사지리 연구업적은 3편에 불과하지만, 결코 경시할 수 없다.
노도양의 백제사 연구는 모두 명지대 재직시절인 60대에 집필되었다. 그의 역사지리 연구는 일본고마자와대학에서 역사지리학을 전공한 것이 기반이 되었다. 특히 백제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는 충남부여보통학교 교원으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겪은 경험과 1952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도중인 1958년에 만든 백제연구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노도양의 백제사 연구는 지명 비정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등 각종 역사기록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비판, 『新增東國輿地勝覽』 등과 같은 지리지 기록과 고지도 및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를 활용한 지리학적 연구 방법과 국어학적 연구 방법론까지 활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현장 답사를 중시했다. 이러한 연구 방법론은 오늘날의 역사연구 방법론으로도 매우 유용하고 타당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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