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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초기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적 동향

Andong Nam-in's Political Activities in the Early Period of King Yeongjo

이재현 ( Lee Jae-hyeon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257-296(40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4.257


목차

Ⅰ. 머리말
Ⅱ. 무신란과 영남 남인
Ⅲ. 김성탁의 이현일 신원 활동과 정치적 의미
Ⅳ. 안동 지역 사족의 정치적 갈등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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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英祖 초기에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을 규명한 것이다. 시기적 범위는 영조 즉위 이후부터 대략 辛酉大訓을 전후한 시기까지이며, 지역적 범위는 安東을 중심으로 하되 禮安·英陽·寧海 등 안동 주변 지역 또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역적 범위는 곧 李玄逸 門人 집단 내 핵심인물들의 거주 범위와 일치한다.
영조는 즉위 이후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신유대훈으로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이 설립되기까지 乙巳換局, 丁未換局, 戊申亂, 己酉處分, 十九下敎, 混沌開闢, 庚申處分 등 많은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영남 남인의 경우 숙종 대 甲戌換局 이후로 실각하여 재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 초기 정국에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더구나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지역 전체가 ‘逆鄕’으로 규정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통상적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 명분은 무신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영조의 배려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남 남인 인사의 등용이 있었다. 김성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안동 지역 남인들은 이현일의 문인집단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현일의 伸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나 ‘己巳年의 餘黨’으로 낙인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김성탁이 이현일을 伸救하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 유배 간 사건은 안동 지역 남인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성탁 사건의 파급으로 인해 안동 지역 내에서는 김상헌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南·老 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안동 지역 내에서 열세에 처했던 노론 측은 官의 지원 아래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으나, 남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저지하여 서원 건립이 좌절되었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남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黨論 위에서 君師로 군림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의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1740년대가 되면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은 침체되었고, 이것은 곧 영남 남인의 정치활동의 침체를 의미한다.
This study identifies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in Andong in the early days of King Yeongjo. The period ranges from the time of King Yeongjo's accession to the throne to around the time of Sinyu Daehun. The regional range was centered on Andong and around Andong such as Yean, Yeungyang and Yeunghae. The regional range is in line with the extent to which key figures reside within the Lee Hyeon-il’s followers.
King Yeongjo promoted Tangpyeong policy(蕩平策) after his ascension, and many political events took place, including the Eulsa Regime Change in 1725(乙巳換局), Jeongmi Regime Change in 1727(丁未換局), Musin Revolt(戊申亂), Kiyucheobun(己酉處分), Sibguhagyo(十九下敎), Hondongaebyeok(混沌開闢), Gyeongsincheobun(庚申處分), until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led Tangpyeong regime. However, in the case of Namin group of Yeongnam, he failed to recover after Gabsul Regime Change in 1694(甲戌換局), and thus had little rol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 in the early days of King Yeongjo. Furthermore, relevant to Musin Revolt put the entire region at risk of being defined as "Rebellion." In general, it was understood that the political cause of Namin group of Yeongnamwas completely destroyed due to Musin Revolt.
However, Namin group of Yeongnam centered on Andong was appointed because of King Yeongjo's consideration after Musin Revolt. Kim Seong-tak was a representative figure. However, Namin in Andong were intertwined with Lee Hyun-il's followers at that time. If Lee Hyun-il is not innocent, They were always likely to be branded as ‘the remnants of the year of Gisa’. In 1737, Kim Sung-tak's banishment due to Yeongjo's anger while explaining Lee Hyun-il shows the weak political foundation of Namin in Andong.
Due to the ripple of the Kim Seong-tak's banishment, there was confrontation between Namin and Noron over the construction of Hagdong Seowon in Andong. Noron, who had a weak power in Andong, pushed for the construction of the Seowon under the support of the government office, but the construction of the Seowon was thwarted by Namin's physical force. King Yeongjo gave relatively lenient treatment to Namin in this case.
King Yeongjo's attitude showed King Yeongjo's intention to reign as ‘Master King(君師)’ on the party platform. However, despite King Yeongjo's intentions and consideration,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in Andong began to stagnate in the 1740s, which meant that the political activities of Namin group of Yeongnam had stagnated.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corpsel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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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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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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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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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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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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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조선 및 낙랑군 시기의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고찰

저자 : 강종훈 ( Kang Jong-h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0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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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패수(浿水)'의 위치를 놓고 그동안 청천강으로 보는 설과 압록강으로 보는 설이 양립해 왔다. 사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니 두 설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결과,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있는 '대령강'이 패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고, 근래 알려진 대령강장성이 패수가 대령강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파악되었다. 이를 근거로 낙랑군에 속한 현들 가운데 패수 부근에 있던 현들의 위치를 새로 비정하였는데, 특히 '수성현(遂成縣)'은 대령강과 청천강 사이에 위치한 박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re have been the academical debates on the location of the Pae-su River during Kojoseon and Lolang periods, which was the border between Kojoseon and Han Empire. The two major theories are the Cheongcheon-gang River theory and the Yalu River theory. But a close investigation shows that both of them have the logical defects.
As a result of seeking new alternatives, it is judged that the Daeryeong-gang River between the Yalu River and the Cheongcheon-gang River is likely to have been the Pae-su River. And it is thought that the recently known 'the long wall of Daeryoung-gang' can be a good evidence to prove it. Based on this, the location of the prefectures of Han Empire near the Pae-su River can newly be determined. Especially Suseong-hyun prefecture's location is presumed to be Pakcheon, which is located between the Daeryeong-gang River and the Cheongcheon-gang River.
(Department of History Education, Daegu Catholic University / kangjh@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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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구려(高句麗) 석비(石碑)의 교(敎)

저자 : 이용현 ( Lee Yong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1-9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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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 관련 자료는 1차 자료가 적은 한국 고대 행정문서 문자자료 가운데에서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그 가운데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이 고구려 자료다. 충주고구려비,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고구려 敎의 분석, 그리고 신라 중고 초기의 비석에 보이는 敎와의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검출해낼 수 있다. 고구려 敎 발령의 주체는 국왕 1인이었는데, 이는 敎의 발령 주체가 諸侯王이었던 고대 중국, 그리고 국왕을 포함한 집단이었던 중고초 신라와 비교할 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敎를 발령할 때, 관련사항에서는 先代, 先王의 敎를 중시하였다. 當代에 敎 발령 시, 先王, 祖王의 敎를 참작하여 認容繼受하거나 變容改修하였는데, 그 근거는 항상 이전의 敎였다. 敎 발령에 있어서, < 敎 - 節敎 >로 하여 敎 2건을 1組로 묶어 발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호간의 연관성을 지니는 건으로, 그 안에서 항목이 분류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敎 안에 부속세칙 혹 시행강제규정으로서 令이 수반되는 경향이 있다. < 敎하여 令 즉 -하게 하다/하노라 >라는 패턴이었다. 敎를 위반할 경우 처벌 규정은 制令의 형식으로 말미에 부가하기도 했다. 일련의 敎는 말미가 종결사 之로 마무리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같은 현상은 신라 비석 초기 敎文에서도 보인다. 고구려의 敎 양식은 新羅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라의 敎라 할 수 있는 6세기 1사분기 신라의 敎에는 先王 혹 前時의 敎를 引用하여 존중하였다. 또 <敎 - 節敎 >의 서식도 보이며, 敎 말미 처벌규정 隨伴의 현상 등이 그것이다.


The subject of the appointment of Goguryeo was one king. This can be said to be a characteristic compared to ancient China, where the subject of the church was Feudal lords, and 6 Century's Silla, which was the ruling group including the King. When issued King's order Gyo or Jiao, it valued and related Former and Ancestor of King's orders. It was issued in groups of two cases under < Gyo敎-Jeol Gyo節敎 >. There was a tendency for Gyo to be accompanied by Command Ryeong令 as an accessory detailed rule or enforcement regulation. After the order was issued, when the order was violated, compulsory regulations, including punishment regulations, were added at the end in the form of Je制. A series of Gyo tend to end with a terminator Ji之. In many aspects, it can be concluded that Goguryeo's A style influenced Silla through comparison of Goguryeo's tombstones and early Silla tombstones.
(Institute of Humanities Studies,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yhyi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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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라의 船府(署) 정비와 백촌강 전투

저자 : 이재석 ( Lee Jae-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5-12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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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진평왕 5년(583)에 처음 설치된 신라의 선부서(船府署)가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직후인 문무왕 18년(678) 선부(船府)로 승격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문무왕 3년(663)에 卿 2인의 신설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삼국사기』 職官志에는 船府의 성립 이전에는 兵部의 大監ㆍ弟監이 선박(舟楫)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고 하므로 선부서(船府署)는 곧 병부의 屬司였으며 따라서 선부로의 승격은 병부로부터의 자립화 과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선부서의 大監ㆍ弟監 설치가 兵部의 大監ㆍ弟監 설치보다 시기적으로 선행하므로, 직관지에보이는 舟楫之事 담당의 兵部 大監ㆍ弟監과 선부서의 그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선부서의 운용 실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본고에서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정합적으로 이해하는 방안으로서 583년 선부서의 大監ㆍ弟監이 처음부터 兵部의 예하 조직으로 편성되었다는 점과 589년ㆍ623년에 각각 설치되는 병부의 제감과 대감은 583년 선부서의 大監ㆍ弟監과는 별개의 조직이었다고 파악해야 함을 피력하였다. 또한 663년 선부서 卿 2인의 신설은 선부의 자립으로 가는 중간 다리였으며 이러한 선부서의 기능 강화는 특히 663년 8월에 벌어진 백촌강 水戰과 직ㆍ간접적으로 연동되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선부서 경의 신설이 통일전쟁에 임하는 신라의 선제적 태세에 비추어볼 때 백촌강의 水戰 이전에 선제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Seonbu(船府) was one of Silla's central administrative departments and was in charge of Silla's naval forces and ships. According to the records of Samguksagi(三國史記), Seonbu was first established in 583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And until it became an independent government office in 678, it seems that it was commanded by the military department, Byeongbu(兵部). In the Byeongbu and Seonbu, there are government posts with the same name, Daegam(大監) and Jegam(弟監), and I mentioned in this article that the Daegam and Jegam were separate government posts, respectively.
In addition, in this paper, I reviewed the significance of the appointment of two members of the Seonbu, especially in the 3rd year of King Munmu (663). The appointment of two new seniors in 663 occurred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from the military department(兵部) to the independence of the Seonbu, which meant strengthening the function of the Seonbu. As is well known, in 663, there was a most important battle to determine the victory or defeat of the Baekje Restoration War. In particular, the naval battle of the Baekchon River between the Silla-Tang Alliance and the Baekje-Japan(Wa) Alliance in August 663 was important. I emphasized that the appointment of the senior superintendent((卿) of the Seonbu and its strengthening of the functions were directly or indirectly related to this naval battle. In addition, in light of Silla's preemptive attitude toward the unification war, I mentioned the possibility that the construction of the Seonbu was preemptively carried out with preparation for this in advance before the Battle of the Baekchon River.
(Department of History and Culture, Hansung University / jsl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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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6년 신라 대당 외교의 내용과 목적

저자 : 안주홍 ( An Juh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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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86년의 신라의 대당 외교 활동을 분석한 글이다. 『삼국사기』에는 686년에 신라가 예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듬해 태조와 직계 4친으로 구성된 祖廟에서 致祭한 기록과 연결하여, 신라가 『예기』를 수용하여 제후 5묘를 정립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신라는 진덕왕대에 신정 『예기』와 『예기정의』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686년의 예기는 『예기』가 아니라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대로 당례이다. 그런데 신라는 진덕왕대에 『진서』를 통해 오례의 개념을 알았고, 『정관례』도 수용하였다. 태종무열왕대는 양국의 관계가 긴밀하였으므로 『현경례』도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은 677년, 678년에 당례를 개편하였다. 686년에 신라가 요청한 당례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신문왕은 새로운 당례를 수용하지 않아도 국가의례를 정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왕에 수용된 당례에 따라 683년에 국왕의 혼례를 거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은 군신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방법의 하나로 경전을 사여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대당 관계의 개선을 위해 당례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대당 관계를 개선하고자 외교 활동을 벌였다. 681년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문무왕의 사망과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 684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요청에 따라 그해 12월에 일본의 견당학생의 귀국을 도왔다. 685년에 망덕사를 창건하여 이 소식을 686년에 파견한 하정사를 통해 알렸을 것이다. 686년의 기록은 신라의 요청이 성사된 시점이다. 당 측천은 686년에 다시 임조하였고,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신라의 요청을 이행하였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diplomatic activities of Silla and Tang Dynasty in 686. Silla accepted the newly compiled "Yegi(禮記)" and "Yegijeong(禮記正義)" from the Tang Dynasty during the reign of King Jindeok. Therefore, the view that Silla accepted "Yegi" in the Tang Dynasty in 686 and completed the Jongmyo(宗廟) system in 687 cannot be followed. Yegi, which Silla requested to the Tang Dynasty in 686, is Dangrye(唐禮). In 648, the Tang Dynasty gave "Jinseo(晉書)" to Silla. Silla learned Orye(五禮) after reading “Jinseo”. King Jindeok of Silla accepted the Tang Dynasty's Jeonggwanrye(貞觀禮). Tang Dynasty reorganized Dangrye in the 670s and Silla requested that.
In 683, King Shinmun married on the basis of Dangrye. As such, Silla had no problem in reorganizing the national ritual based on Dangrye. The Tang Dynasty presented 'Confucian scriptures' to other countries. This was a good way to turn neighboring countries into subordinate countries. Silla tried to create a good relationship by requesting "Dangrye" from the Tang Dynasty. In 681, King Sinmun dispatched envoys to the Tang Dynasty to announce the death of King Munmu and his ascension. In 684, envoys were dispatched to the Tang Dynasty. Tang Dynasty asked Silla for help so that Japanese students(日本遣唐學生) could return to their home country. Silla actively accepted the Tang Dynasty's demands. In 685, Silla founded Mangdeok Temple(望德寺) for the Tang Dynasty. In 686, a envoy was dispatched to the Tang Dynasty to announce this news. Wu Zeitian(武則天) again replaced the emperor in 686. She tried to show off her power by fulfilling Silla's request.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ajhkn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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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세기 시장(諡狀)의 출현과 의미

저자 : 김현지 ( Kim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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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신하의 생전 행적을 기려 諡號를 내려주었으며, 그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사후의 이름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전기에는 『經國大典』의 규정에 맞는 신하에게 시호를 내린 데 비하여 선조대에는 儒賢에게, 인조대에는 전쟁 절사자에게 증시가 승인되면서 조선후기로 갈수록 규정 외의 인물이 시호를 받는 사례가 늘어났다.
국가에서 시호를 내릴 때 그 절차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사망한 증시 대상자의 집안에서 行狀을 제출한다. 행장이란 어떤 인물의 사후에 짓는 것으로 인적사항과 생전의 행적을 세세하게 남기는 글이다. 예조와 봉상시에서 차례로 이 행장을 검토하고, 다시 홍문관에서 사망자의 행적을 살펴 시호 三望을 결정한다. 결정된 삼망이 의정부의 署經을 통과하면 다시 행장과 함께 보고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 일련의 증시 절차에서 시호를 논의하는 가장 기초자료가 되는 문서가 행장이다. 조선전기 행장은 사망한 관원의 친척들이 작성하였다. 그래서 행장의 내용과 실제 행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인조대에는 가문 외의 인물이 시장을 따로 짓는 관례가 생겨났다. 이는 행장의 객관성 문제를 논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규정 외의 인물이 시호를 받는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본래 규정인 정2품 이상의 인물에게 내릴 시호를 논의할 때에는 비교적 행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증직 후 시호를 받은 인물들은 관품이 증시 자격에 이르지 못하였던 만큼 다른 이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시호를 하사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롭게 시장을 짓게 되었다.
이렇듯 객관적으로 사실과 같은 내용을 찬술해야 한다는 인식은 후대로 갈수록 강해지며, 이러한 인식과 관련하여 숙종대 李選(1632~1692)이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그는 수많은 저술에서 객관적인 행장 작성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이선이 당시 증시를 주도한 인물들과 교류하였고 숙종 역시 그의 의견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인식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증시 제도는 개인적 · 가문적 명예 보장과 더불어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국가의 의도를 투영시키려면 기초 자료가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장이란 형태의 행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물의 행적을 평가하는 가장 기초자료인 행장 찬술에 점차 국가의 관여가 확대되었다.


A posthumous name(諡號, Shiho) refers to a title given to the deceased official by evaluating his conducts while aliv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 accordance with the regulations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經國大典』,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 posthumous name was strictly given only to 'the royal families and the officials with the senior grade of the second rank or higher' who had lost their jobs. Then, Confucian intellectuals(儒賢, Yuhyeon) started to be given the titles by the Sarim(士林) forces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when the increased expectation of loyalty to the state during the Imjin War(壬辰倭亂) led to more cases where people other than those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 were given the titles. King Injo embraced these changes and gave the titles to the persons whom the king himself or the dynasty deemed exemplary using the system of giving a posthumous name.
Before the state issued a posthumous name to the deceased subject, his family first submitted a record of the deceased during his lifetime(行狀, Haengjang). A Haengjang refers to a detailed record containing the personal information of the king and the gentry during the Joseon Dynasty only after their death. Yejo(禮曹) and Bongsangsi(奉常寺) review the contents of the submitted Haengjang in turn and again, the conducts of the deceased are examined at Hongmungwan(弘文館) to determine three candidate titles to be given to the deceased. After the prospective titles are agreed upon and are agreed upon and signed(署經) by Uijeongbu(議政府), the three candidate titles are reported again with the Haengjang to receive the king's approval.
A Haengjang serves as the starting point and the most basic document for discussing a posthumous name in this series of procedure in which a posthumous name is given. Howeve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 Haengjang was written by the relatives of the deceased official, which constantly raised a question about the objectivity of its contents. As the deceased was a member of the same family, his relatives did not write his conducts in an honest and transparent way, only highlighting his good deeds.
Then, there was a movement to write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during the reign of King Injo. This was because there was a need for a procedure to discuss the issue of objectivity of a Haengjang and to grant legitimacy when a person other than the aforementioned person stipulated in 『GyeongGukDaeJeon』 would receive a posthumous name. Credibility regarding knowledge of Confucianism or loyalty could vary according to evaluation criteria, whereas the grades of official ranks in the original regulations served as an objective and well-accepted criterion. In addition, if a person with low rank was given a posthumous name later, there could be a gap of several hundred years between the date of birth and death of the person, thereby raising the question of whether his Haenjang was a reliable data. It was necessary to write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for the legitimacy of granting the title to those whose official title did not meet the qualifications for being given a posthumous name in order to make it more persuasive to others.
Hence, the perception that the market should be praised objectively and based on facts grew more and more widespread with each passing generation. It is worth paying special attention to Lee Seon(李選, 1632-1692)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who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writing a Haengjang objectively in his numerous writings. It is thought that this perception was preval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given that Lee Seon interacted with the people who were mainly in charge of giving a posthumous name at the time and that King Sukjong also accepted most of his opinions.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became a common practice and was included in the regulations for a person with guaranteed sentences to write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The system of giving a posthumous name in the 17th-century Joseon Dynasty was expanded from guaranteeing honor to individuals and families to emphasizing national values. A Haengjang in a form of a document to suggest a posthumous name came into being as the fairness and objectivity of its contents was essential to clearly projecting the state's intentions.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khj9410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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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만(張晩)의 대외정세 인식과 대중국 외교현안 대응

저자 : 허태구 ( Huh Tae-k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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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선조대부터 인조대까지 최고위급 군사·외교 전문가로 활약한 張晩(1566∼1629)의 대외정세 인식과 대중국 외교현안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았다. 이 논문의 중요한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장만의 대후금 인식과 평가는 後金의 세력이 확대되고 이를 둘러싼 대외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나 장만을 비롯한 인조대 조정의 君臣들은 후금의 최우선 공격 목표를 조선이나 毛營이 아닌 中原으로 판단하여, 정묘호란 직전까지도 후금의 전면적인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인조대 초반의 조선의 가장 중요한 안보 이슈 가운데 하나는 毛文龍과 요동 난민에 대한 대응이었다. 장만은 후금에 대한 모문룡의 과시적이고 도발적인 무력시위가 조선과 후금 사이의 우발적 교전을 야기하는 상황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어 태세 강화를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둘째, 장만은 深河 패전으로 초토화된 關西 지역의 전후 수습을 전담하며 광해군의 관망적이고 양단적인 외교노선에 힘을 보탠 유능한 실무형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과 관련된 다양한 외교현안을 다룰 때에는 여전히 對明義理라는 명분을 강하게 인식하며 대처하였다. 인조대 모문룡 문제를 처리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그의 입장과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對明事大가 대명의리라는 명분에 함몰되어 조선의 국익을 방기하는 성격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후금에 대한 강경한 척화론을 주장하였던 李爾瞻, 柳希奮 등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This paper examined Jang Man(張晩)'s perception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response to diplomatic issues with China, who served as the highest-ranking military and diplomatic experts from the reign of King Seonjo(宣祖) to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The important poin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 Jangman(張晩)'s perception and evaluation of the Hugeum(後金) changed little by little as the Hugeum(後金)'s power expanded and the external environment surrounding it changed. However, Jang Man(張晩) and other kings and servants of the Royal Court judged that the Hugeum(後金)'s top priority attack goal was not Joseon(朝鮮) or Mao Wenlong(毛文龍)'s military camp, so they did not see the possibility of a full-scale invasion of the Hugeum(後金) until just before the Jeongmyo Horan(丁卯胡亂). In the early days of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one of the most important security issues in Joseon(朝鮮) was the response to Mao Wenlong(毛文龍) and Liao Dong refugees(遼民). Jang Man(張晩) was concerned about the unintended war situation between Joseon(朝鮮) and Hugeum(後金) caused by Mao Wenlong(毛文龍)'s conspicuous and provocative armed demonstration against the Hugeum(後金). And he insisted on strengthening his defense posture.
Second, Jang Man(張晩) was a competent practical official who was in charge of post-war defense in the Pyeongan-do(平安道) area devastated by the defeat of the Simha battle(深河戰鬪) and helped King Gwanghaegun(光海君)'s wait-and-see diplomatic route. Nevertheless, when dealing with various diplomatic issues related to the Ming(明), he still strongly recognized and dealt with the justification of Daemyeongeuirie(對明義理). His position and attitude did not change when dealing with problems related to Daemyeongeuirie(對明義理) in the reign of King Injo(仁祖). However, his Daemyeongsadae(對明事大) was not at all in the name of Daemyeongeuirie(對明義理), giving up Joseon(朝鮮)'s national interests. His move was distinct from Yi I-cheom(李爾瞻) and Yoo Hee-bun(柳希奮), who insisted on a strong Cheokhwa-ron(斥和論) against the Hugeum(後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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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20년대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청년운동

저자 : 최용석 ( Choi Yong-se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39-282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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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일지역은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연일군,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관제 조정으로 통합되어 영일군이 되었다. 3·1운동이후 영일지역의 청년들도 각 면지역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설립하였다. 포항면의 영일청년회, 청하면의 청하청년회, 송라면의 송라청년회, 흥해면의 흥해청년회 등을 설립하였고, 이러한 청년단체들은 이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전국의 청년단체들이 혁신을 통해 조직체를 변경한다. 전국적 청년단체의 혁신은 영일지역의 청년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혁신과 더불어 지역 청년단체 연합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영일지역에서는 10 여 개의 청년단체들이 모여 영일청년연맹을 설립한다.
이후 영일청년연맹은 1927년, 청년운동이 민족주의·사회주의 양 진영의 통일전선체 구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방향전환 한 청년회들은 더욱 더 조직화 되어 一郡 一靑年會라는 목적아래 각 府·郡에 있는 청년회 및 청년연맹을 자진 해체하고, 대신 각 府·郡 청년동맹을, 그리고 각 面에는 동맹지회를 결성하여 나갔다. 영일청년연맹 역시 이러한 통일전선체 구성을 통해 영일청년동맹으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또한 정학선·이재우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사상단체 '四月會'를 해체하고, 신간회 영일(포항)지회 설립하였다.
영일지역의 청년들은 영일청년동맹 활동과 신간회 영일(포항)지회와 의 연대활동을 통해 민족의 이익 옹호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29년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일어난 조선공산당사건, 조선공산당 재건위 사건은 신간회 각 지회와 청년단체에 있어서 큰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신간회 각 지회 간부들이 대거 연행이 되고, 이들이 속한 단체들은 강제 해산되거나,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일지역에서도 조선공산당사건은 지역의 청년운동이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청년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포항교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새로운 민중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특히, 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던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검거된 이후, 청년단체 뿐만아니라 노동조합, 형평사, 어업조합 등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거나 와해되면서 지역적 민족운동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일지역 청년운동은 많은 청년들을 지역의 민족운동의 선도자적 위치로 이끌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계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적·사상적 분화를 뛰어 넘어, 영일청년연맹·신간회영일(포항)지회·영일청년동맹 등 단일한 민족운동 세력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은 영일지역에서도 청년들이 1920~30년대 청년회 활동과 해방 이전까지 일제에 대해 끊임없이 항거하고 전민족적 활동을 이어왔다는데 그 의의와 영향은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Yeongil-gun, Yeonil-gun, Heunghae-gun, Cheongha-gun, and Janggi-gun were reorganized into Yeonil-gun, Heunghae-gun, Cheongha-gun, and Janggi-gun due to local control reorganization in 1895.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young people from the Yeongil area also established youth groups centered on each Myeon area. Yeongil Youth Association in Pohang-myeon, Cheongha Youth Association in Cheongha-myeon, Songra Youth Association in Songra-myeon, and Heunghae Youth Association in Heunghae-myeon were established.
At that time, socialism was also spread in the Yeongil area by Jeong Hak-seon and others. After that, each youth organization changes its organization through innovation. After the change in the Youth Association, youth organizations in the Yeongil region sought a coalition of local youth organizations. At a time when each youth organization was changing, it was also necessary to unite local youth organizations and unify the youth movement. Due to this need, the Yeongil Youth Federation is established with more than 10 youth organizations in the Yeongil area.
Since then, the Young-Japanese Youth Federation has undergone another change in 1927 when the youth movement discussed the composition of a unified front between the two camps of nationalism and socialism. The youth associations, which changed their direction to the National Unification Front Movement, were further organized and voluntarily disbanded youth associations and youth federations in each department and county, and formed alliance branches in each side. The Young-Japanese Youth Federation will also be transformed and developed into the Young-Japanese Youth Alliance through the formation of such a unified front. In addition, the ideological organization “Sawolhoe”, led by Jeong Hak-seon and Lee Jae-woo, was disbanded and the Yeongil (Pohang) branch of the Singanhoe was established.
Young people in the Yeongil region engaged in activities to defend the interests of the people through joint activities with the Yeongil Youth Alliance and the Yeongil (Pohang) branch of the Singanhoe. However, the Joseon Communist Party incident and the Joseon Communist Party Reconstruction Committee incident, which took place from the end of 1929 to the early 1930s, were a major blow to each branch and youth organization of the Singanhoe. Due to these cases, a large number of executives of each branch of the Singanhoe were arrested, and the organizations to which they belonged were forced to be dissolved or subject to many restrictions on their activities. Even in the Yeongil region, the Joseon Communist Party incident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the local youth movement to shrink.
The national and youth movements in Yeongil, Gyeongsangbuk-do, were led by young socialist people and Christians from Pohang Church. However, there was a limitation in that it could not actively attract the participation of new people except them. In particular, after the arrest of socialist youth who led the local movement by the Japanese colonial rule, activities such as labor unions, equity firms, and fishing associations as well as youth groups were greatly reduced or collapsed, revealing the limitations of the local national movement. However, despite these limitations, the Yeongil Youth Movement led many young people to a leading position in the local national movement. In addition, they constantly tried to form a single national movement force, such as the Youngil Youth Federation, the New Korean Hoeyeongil Branch, and the Youngil Youth Alliance, beyond the ideological and ideological differentiation of socialist and Christian uncompromising nationalists. In this regard, it can be said that the significance and impact of young people in the Yeongil region constantly protested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nd continued national activities before liberation in the 1920s and 30s are great.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ttl7904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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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원대(元代) 운남(雲南) 통치와 토인(土人) 활용 - 호광행성(湖廣行省)과 비교를 중심으로 -

저자 : 진현경 ( Jin Hyeongyeo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1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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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元朝의 운남지역 통치변화 과정에서 재지세력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다루고, 더 나아가 호광 지역과 비교를 통해 元代 土人 활용 방식을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元朝는 운남에서 재지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바탕에는 정복한 지역의 기존 세력을 흡수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몽골의 전략적 관습이 있었다. 몽골인들은 제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정치 환경에 조응하여 새로운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복지가 가진 고유한 요소에 더해 몽골적 요소도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은 남송전쟁에 대비하여 뭉케 시기에 운남을 선제적으로 점령하였다. 하지만 운남은 몽골의 정치중심지에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에 어려움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몽골 통치자는 해당 지역 재지세력의 협조에 크게 의지하여 통치력을 보강하였다. 운남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재지정치체 大理國의 정세와 몽골의 군사목적은 호응하였고, 몽골 통치자는 재지세력에게 운남 통치를 맡기는 방식으로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후 舍利畏의 난, 雲南王 후게치 독살사건을 거치며 元朝는 이 지역에 지방 최고통치기구인 行省을 세우게 되어 운남 재지세력 활용방식에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元朝는 운남에서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路-府-州-縣의 중층적 지역 구획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재지세력을 정규 관원으로 선발하고 관직 세습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활용 방식은 이후 明代의 土官 개념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새로 편입되어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재지세력을 재편하기 어려웠던 지역에서는 투항한 재지수령과 휘하 세력을 간접적으로 통제하였다. 이와 같은 간접 통치방식은 호광행성에서 이루어진 蠻夷官 제도와 유사하다. 元代의 두 가지 土人 활용법은 후대의 재지세력 관할 방식에 영향을 주어, 明 중기에 이르러서는 土司制度라는 하나의 제도로 통합되었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Yuan dynasty's governance of Yunnan (雲南) focusing on how the native force was utilized and also categorized the utilization method of the native people in Yuan Dynasty into two types through a comparison of the Branch Secretariat of Yunnan (Yunnan Xingsheng 雲南行省) and the Branch Secretariat of Huguang (Huguang Xingsheng 湖廣行省). Mongolian rulers actively utilized indigenous Yunnan people in this region for reign. On the basis of this phenomenon was a Mongolian strategic custom of absorbing the indigenous people of the conquest site and utilizing them in the next war. In the process of expanding the empire, Mongol sought a new way of governing in harmony with the political environment of each conquest. Inevitably, this process resulted in embodying both the customs of Mongol and of the conquest.
During the reign of Möngke Qa'an, Mongol preemptively conquered Yunnan to prepare for the military campaign against the Southern Song (南宋). However, as Yunnan was located far away from the capital, centralized control was difficult. Therefore, Mongolian rulers heavily relied on the cooperation of native force of the region to reinforce their governance. While conquering Yunnan, the political scene of the indigenous kingdom, Dali Kingdom(大理國), and Mongol's military purpose responded, and Mongolian rulers governed this area by entrusting the native force with the ruling of Yunnan. Following the sheliwei(舍利畏)'s revolt in 1264 and the poisoning of the prince of Yunnan(雲南王) in 1270, Qubilai Qa'an came to establish the highest local government organization in this area, and a significant change in the utilization method of Yunnan's native force has occurred.
Based on the census in Yunnan, the Yuan empire selected native people as regular officials in reigns where multi level local government structure was made and allowed them to inherit government posts. This utilization method had a huge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concept of 'native officials (Tuguan 土官)' in the Ming Dynasty. Meanwhile, in areas where reorganizing native people was difficult due to the lack of military stability, Mongolian rulers governed by incorporating the natives who surrendered. Such indirect way of ruling is similar to the Branch Secretariat of Hugang's system named 'Manyiguan (蠻夷官)'. These two methods of utilizing native force in the Yuan dynasty were later integrated into one system named 'Tusi system (土司制度)' in the Ming dynasty.
(Department of History,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inbory22@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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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용굉(容閎)과 청말(淸末) 근대외교(近代外交)

저자 : 정동연 ( Jung Dong 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7-34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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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용굉(容閎, 1828~1912)이 청말 근대외교에 미친 영향을 탐색한 글이다. 그동안 용굉에 대해서는 청 정부가 미국에 보낸 국비 유학생, 이른바 '유미유동(留美幼童)'을 인솔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용굉의 활동은 청 정부가 서양 국제법에 토대를 둔 근대외교를 수용하는 과정과 중첩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그가 지닌 외교사적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용굉은 어린 시절 광둥 지역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곧 이어 미국인 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예일대학에서 서양 지식과 가치관을 습득하였다. 귀국한 용굉은 중국이 근대외교에 뒤처져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한때 태평천국에 가담할 생각을 품었던 것도 이들이 청을 대신하여 중국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용굉은 서양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하다는 이유로 청 정부의 실권자 증국번(曾國藩)의 막료로 발탁되었다. 용굉은 서양 기계를 도입하는 임무를 완수하여 증국번의 신뢰를 얻은 다음, 어린 학생들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사업을 승인받았다. 1872년부터 파견된 120명의 유미유동은 용굉의 인솔 하에 서양식 교육을 받았지만, 1881년 청 정부의 지시로 중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 시기 용굉은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근대외교를 직접 실행하였다. 그는 외국 사정에 밝고 외국어에 능숙할 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활용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쿨리 학대 문제를 조사하여 보고함으로써 청 정부가 페루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청이 설립한 주미공사관의 초대 참찬(參贊)이 된 후에는 공사(公使) 진란빈(陳蘭彬)을 보좌하며 미국 내의 반중 정서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유미유동이 중도 귀국한 후에는 한동안 미국에서 칩거하였지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군함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차관 도입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용굉이 양성한 유미유동은 청말 근대외교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청 정부가 해외에 설립한 공사관(公使館)과 영사관(領事館)에서 근무하였고, 이를 토대로 의화단사건 이후 설립된 외무부(外務部)의 고위 관료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한공관(駐韓公館) 경력을 토대로 외무부로 옮겨 활동한 당소의(唐紹儀)와 양여호(梁如浩)는 중화민국에서 외교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용굉은 유미유동을 통해 근대외교의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analyzed the influence of Yung Wing on modern chinese diplomacy. Meanwhile, it was emphasized that Yung Wing led the chinese students sent to America by Qing Dynasty so-called 'Chinese Educational Mission'. But it is necessary to appreciate Yung Wing's diplomatic significance by paying attention to his activities was overlapped with the process of the Qing government's introduction of modern diplomacy based on Western international law.
Yung Wing received Western-style education in Canton in his childhood and followed an American teacher to study in the United States and acquired Western knowledge and values at Yale University. After returning to homeland, Yung Wing witnessed the reality that China was lagging behind modern diplomacy but was not aware of it.
So, Yung Wing demonstrated modern diplomacy directly based on his ability. He was not only good at foreign situations and was fluent in foreign languages, but also had various human networks in the United States. Yung Wing was appointed as a staff of Zeng GuoFan who was the power-holder of the Qing government because he was bright in Western circumstances and was fluent in foreign languages. Yung Wing gained trust of Zeng GuoFan by completing the mission of introducing Western machines, and was approved the plan to dispatch 'Chinese Educational Mission'. In this period, he investigated the situation of Cooley abuse in the America, and helped Qing government to sign a trade treaty with Peru. After a while, he became the vice minister of the Embassy, he tried to respond to anti-Chinese sentiment in the United States. Although Yung Wing stayed in the United States without any special activities after the recall of the 'Chinese Educational Mission', he negotiated the introduction of loans with England to prepare a warship that could attack Japan during the Sino-Japanese War. As such, Yung Wing was typical figure as an practitioner of modern diplomacy.
The 120 Chinese students dispatched from 1872 received Western-style education under the leadership of Yung Wing, but were returned under the direction of the Qing Dynasty in 1881. 'Chinese Educational Mission' fostered by Yung Wing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modern diplomacy in the late Qing Dynasty. They worked at the legation and consulate established overseas by the Qing Dynasty, and some of them were promoted to a high-ranking official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fter the Boxer Rebellion. In particular, Tang Shaoyi and YangRuhao became president of diplomatic affairs in the Republic of China by his experience as a diplomatic official in Korea. From this point of view, it can be said that Yung Wing sowed the seeds of modern diplomacy through 'Chinese Educational Mission'.
(Cheongju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 jungdy@c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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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書評] : 오주환 지음, 『영국혁명 사관과 사회계층』(헤로도토스, 2021.08)

저자 : 남철호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6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1-35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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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저자 : 서호준 ( Seo¸ Ho-j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 (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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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등장한 이래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대응은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과 역사학간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빅데이터 기법을 어떻게 하면 역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 분야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바로 연구의 목적이라할 수 있다.
사실 역사학은 방대한 사료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랜 데이터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상관성을 추구하는 빅데이터와 인과성에 대한 탐문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간에는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빅데이터의 위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으로 역사연구를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빅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역사연구는 한층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간의 접목을 위해 해방 이후 2010년대까지 약75년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연구경향을 크게 7개 시기로 구분하여 텍스트 마이닝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하였다. 빅데이터 기반 분석결과를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에 관한 기존의 논의결과와 비교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분석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논저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최근으로 올수록 그 정확성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둘째, 특정 국가사의 활성화 정도를 직관적으로 논의하는 경우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보충적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은 기본적으로 키워드(노드) 분석을 위한 것이므로 문장단위 분석이나 고차원적인 개념분석에는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사실 사료에 대한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가 요망되는 고대사 연구를 계량적으로만 분석한다면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빅데이터 기반 연구는 이와 같은 단순 계량적 접근을 넘어 사료나 연구경향 논문들을 대상으로 한 키워드 도출을 통해 가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네트워크내 키워드들의 위상과 영향력 그들 상호간의 관련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실증과정에서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긴 하였지만, 본 연구가 제시한 분석의 프레임 자체는 양질의 후속연구를 태동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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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고승비 음기의 문도 검토 -경북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한기문 ( Han¸ Ki-m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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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 고승의 문도 형성과 성격을 이해하고자 고승비 음기를 살폈다. 선봉사대각국사비 음기, 운문사원응국사비 음기, 중수용문사기 음기, 인각사보각국존비 음기 등 4 사례의 문도 직명을 살펴본 결과, 다양한 직명의 문도를 확인하였고, 크게 법손[사법제자, 부법제덕], 집사제자, 세속제자[수법유경사대부] 등의 부류가 있었다.
다양한 직명의 유래를 추적한 바, 고승의 강회, 담선 활동 및 승정제도, 승록사, 결사 등과 연관하여 그 고승의 문도가 형성되었다. 문도 중에서도 법손주지가 수법제자의 학풍을 유지하면서 문도 형성에서 중심이었다. 집사제자 문도 형성은 고승의 승정 관여와 연관되었다. 승정제도가 성립된 靖宗代를 기점으로 이러한 문도의 분열 이동이 많아지면서 사원 소속이 명시되는 등 종파분쟁의 조짐도 보였다. 승단이 확장되면서 결사 운동과 관련하여 세속제자도 문도로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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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 의종대 왕제(王弟) 대녕후(大寧侯) 사건

저자 : 장상주 ( Jang¸ Sang-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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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寧侯 사건은 의종대 정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차자인 대령후를 지지하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의종은 이러한 관계로 태자 시절부터 대령후와 왕위 계승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의종은 인종의 지지와 정습명의 보좌로 왕위에 올랐다. 의종은 즉위 초부터 정안 임씨와 대령후를 견제하였다. 대령후의 견제는 즉위 초인 동왕 5년부터 재위 후반기인 동왕 21년 '流矢의 變'으로 이어졌다.
의종의 측근인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와 그 족당인 정서·최유청·임극정·이작승 등을 참소하여 유배와 좌천시켰다. 이어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의 세력 기반을 점차적으로 와해시켰다. 그리고 의종은 다른 동모제인 익양후(명종)와 평량후(신종)도 의심하였다. 그만큼 王弟는 의종대 국정에 적지 않은 파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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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읍지(邑誌)와 방목(榜目), 호적(戶籍)을 통해 본 대구 출신 급제자들

저자 : 한상우 ( Han¸ Sa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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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구에서는 몇 명의 문과급제자들이 배출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이후 편찬된 대구의 邑誌, 市史, 榜目과 대구부호적대장 등을 활용하여 대구 출신 급제자들을 확인하였다. 읍지와 시사, 방목을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대구 출신 급제자들은 총 79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료들마다 급제자들의 명단과 정보가 상이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대구에 거주한 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1681년부터 1876년까지에 걸쳐 남아 있는 대구의 호적에서 17세기 후반 이후의 급제자들과 그 가족들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읍지와 방목 속 대구 급제자들이 모두 대구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실제로 대구에 거주했더라도 읍지에서 누락된 경우가 있었다. 즉, 대구 출신 급제자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실제 대구 거주 여부뿐 아니라 다면적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구 출신 급제자 확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그들이 잦은 이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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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세기 전반 호패법 시행 과정 연구

저자 : 설현지 ( Seol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1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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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 전반의 변화를 논의하였다. 본고에서는 광해군대와 인조대 호패법의 논의와 시행, 중단 과정을 살폈다.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호패를 차도록 하는 법제였다. 이는 전쟁으로 유실된 백성들의 거주지와 국역을 다시 정해주고, 국가의 개별적 백성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법이었다. 호패법은 조선 초부터 시행하고자 한 법이었지만, 置廢를 반복하다가 숙종대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호패법은 고려말기에 도입된 제도로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호패법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인조대까지 이어졌다. 정묘호란 이후 호패법은 중단되었지만, 인조대 호패법 시행으로 정해진 각종 규칙들은 『호패사목』으로 남아서 숙종대 호패법 시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선조대 후반부터 인조대까지 호패법의 시행과 중단, 그 사이에 일어난 다양한 논의를 살핀 후, 『호패사목』을 통해서 호패법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파악하였다.
호패법은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용이한 법이었기에, 조정에서는 호패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호패법으로 인해 새롭게 군역의 의무가 생겼기 때문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유생들도 敎生考講에 탈락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기 때문에 반발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시행의 찬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지만, 부족한 군역을 채우기 위해서는 호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일부 백성과 유생들의 반발에도 호패법은 필요한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호패법의 시행을 위해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호패사목』이다. 『호패사목』의 내용은 오가작통법, 단자식, 운영 규정과 특수민의 호패에 관한 것들이다. 단자식을 봤을 때 조선 정부는 관료-관료 예비군-군역 대상자로 분류해 백성들을 파악했음을 확인하였다. 『호패사목』을 통해 조선 정부가 호패법으로 군역을 보충하고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임진왜란 후 무너진 국가 질서와 세금 제도를 회복하기 위해 시행하고자 한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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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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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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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영조 초기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적 동향

저자 : 이재현 ( Lee Jae-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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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英祖 초기에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을 규명한 것이다. 시기적 범위는 영조 즉위 이후부터 대략 辛酉大訓을 전후한 시기까지이며, 지역적 범위는 安東을 중심으로 하되 禮安·英陽·寧海 등 안동 주변 지역 또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역적 범위는 곧 李玄逸 門人 집단 내 핵심인물들의 거주 범위와 일치한다.
영조는 즉위 이후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신유대훈으로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이 설립되기까지 乙巳換局, 丁未換局, 戊申亂, 己酉處分, 十九下敎, 混沌開闢, 庚申處分 등 많은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영남 남인의 경우 숙종 대 甲戌換局 이후로 실각하여 재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 초기 정국에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더구나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지역 전체가 '逆鄕'으로 규정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통상적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 명분은 무신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영조의 배려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남 남인 인사의 등용이 있었다. 김성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안동 지역 남인들은 이현일의 문인집단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현일의 伸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나 '己巳年의 餘黨'으로 낙인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김성탁이 이현일을 伸救하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 유배 간 사건은 안동 지역 남인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성탁 사건의 파급으로 인해 안동 지역 내에서는 김상헌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南·老 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안동 지역 내에서 열세에 처했던 노론 측은 官의 지원 아래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으나, 남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저지하여 서원 건립이 좌절되었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남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黨論 위에서 君師로 군림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의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1740년대가 되면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은 침체되었고, 이것은 곧 영남 남인의 정치활동의 침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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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기철의 통일운동 역정과 생애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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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195,60년대 진보당과 통일사회당 등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며 일생을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김기철이다. 그는 해방 직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우익계열 단체를 통해 정치 사회운동을 시작했으나, 북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46년 3월 월남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 민족자주연맹에 몸담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김기철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출마 때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 조봉암과 서상일이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혁신정당을 창당할 때 김기철은 창당 추진을 위한 핵심인물로 활약했고,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진보당 창당 후에는 통일문제연구위원장으로서 남북문제의 국제적 해결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통일방안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안은 1958년 진보당사건 당시 검찰이 진보당의 이적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되었고, 당국이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조봉암의 사형으로 진보당 관계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일시 정치 사회운동의 장을 떠났던 김기철은 4월혁명으로 혁신계의 활동공간과 기회가 확보되자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혁신세력의 이합집산 와중에 사회대중당(창당준비위원회), 통일사회당을 거치면서 역시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와중에 그가 구상했던 통일안을 좀 더 구체화한 중립화통일방안을 내세워 다양한 공론의 장에서 그의 주장을 펼쳤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가 실시한 혁명재판에서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기철은 1963년 3공화국 출범 뒤 단행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한 후에도 당 내에서 통일문제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거의 전 생애를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하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김기철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적 사회건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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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진(天津) 죄범습예소(罪犯習藝所)의 건설과 '근대' 감옥의 탄생

저자 : 조병식 ( Cho¸ Byung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7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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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光緖30년(1904)에 건설된 중국 최초의 신식 감옥인 天津罪犯習藝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죄범습예소를 전통 감옥에서 근대 감옥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존재로 이해하였지만, 천진의 경우 '근대' 감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저명한 감옥학자였던 오가와 시게지로오(小河滋次郞)의 고대/'근대' 감옥을 판별하는 3가지 기준을 차용하였다. 첫 번째 기준인 수감 대상에 있어서 천진 죄범습예소 건립 당초 기결수와 부랑자들을 함께 수감하였는데, 성격이 상이한 집단을 한 공간에 수감한다는 점에서 전통 감옥의 雜居와 맞닿아있었다. 그러나 光緖32년(1906) 遊民習藝所가 설립되어 부랑자 수용 시설이 별도로 마련되면서 죄범습예소는 기결수만을 감금하는 공간이 되었다. 두 번째 기준인 감옥의 목적과 관련해서 천진죄범습예소는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전통 감옥의 목적에서 탈피하고 수감자의 갱생과 출소 후의 생계 도모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생과 방범에 중점을 둔 감옥 건축물이 건조되었고, 직무에 따라 관리 인원의 직위를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죄범습예소 내 총 6곳의 공장을 설립하여 수감자들이 수공업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기준인 경비 조달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州縣에 할당한 수감자 비용은 죄범습예소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비용이었지만 연체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죄범습예소에서는 수감자들의 역량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추진하였다. 죄범습예소의 공장화에 대한 直隷總督 袁世凱의 경고가 있었으나 죄범습예소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천진 죄범습예소는 오가와 시게지로오의 3가지 기준 가운데 2가지를 충족하였다. 그리고 경비 조달의 문제는 천진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고, '근대' 감옥을 표방하여 설립된 模範監獄 또한 동일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천진 죄범습예소는 '근대' 감옥으로의 과도 기적 존재라기보다는 '근대' 감옥의 직접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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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고대 성곽 공방전에 관한 군사 공학적 전략론 분석

저자 : 배은숙 ( Bae¸ Eun-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1-4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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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프론티누스와 베게티우스의 글을 군사 공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프론티누스는 군지휘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이 있으므로, 베게티우스는 고위 행정가로서의 경험이 있으므로 이들의 글이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거론하는 성곽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전략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전략을 비교, 분석했다.
프론티누스의 글은 적을 공격하는 공성전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공성전 중에서도 포위전에 관한 전략을 상세히 서술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포위전은 아군에게도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아군에게 상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하고, 적을 경계해야 하는 심리적인 긴장도 상당하다. 또 그가 활동하던 1세기에 로마군은 포위전만 한 것이 없고, 공격전 위주로 전쟁했다. 따라서 프론티누스가 전투 경험을 가진 군지휘관이어서 실질적인 전략을 서술했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그의 글은 당대의 전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베게티우스의 글에는 공격적인 전략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 있다. 4세기의 전투 사례들을 볼 때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하든 공격전을 펼친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공격전을 강조한 당시의 상황이 베게티우스의 글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의 수성전 전략도 전략의 현실성과 유익성 면에서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빈도를 볼 때 그의 수성전 전략은 그렇게 활용 가치가 높은 전략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게티우스 글의 유익성은 로마군이 가장 빈번하게 하는 공격전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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