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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The Dispatch of Qing Dynasty’s Envoys and The Political-Diplomatic Significance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리샤오칭 ( Li¸ Xiaoqing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213-256(44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4.213


목차

Ⅰ. 머리말
Ⅱ. 1637년 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와 인조의 책봉
Ⅲ. 1639년 청사출래와 조청관계의 긴장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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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In this paper, by examining the purpose and the negotiation activities in Hanyang of Qing Dynasty’s Envoys dispatched to Jose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significance of the Qing Dynasty’s Sahaeng(使行) toward Joseon was investigate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requested an end to the Qing's request for conscription through Sahaeng(使行) in April and September 1637. In October 1637, the Qing dispatched an envoy to Joseon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ithout Joseon‘s resquest, and the Qing dynasty’s envoys negotiated with Joseon focusing on the issue of repatriation of Naturalized jurchen(向化人), Chinese(漢人), Joseon people who captured by the Qing tried to come back Joseon(走回人). The issue of repatriation was an important negotiation issue even in later Sahaeng(使行) toward Joseon. It can be said tha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most urgent task of Joseon was the resolution of the issue of conscription. However, what the Qing dynasty considered important was the maintenance of hierarchical relationship with Joseon and the establishment of a Q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
Besides exemption from conscription, Joseon's other concern is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In September 1637, Joseon requested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 but was rejected by the Qing Dynasty. In February 1639, an envoy was sent with a request for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crown prince, and it was also expected that the crown prince could return to Joseon through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After that, Injo's illness also made it a reason to request the crown prince to return to Joseon. However, from Qing's point of view,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the crown prince was a procedure that could settle a hierarchical relationship of Joseon and Qing Dynast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Qing Dynasty mentioned the installation of Crown Prince before Joseon’s request.
In November 1639, the Qing dynasty’s envoy who came for the monument of Samjeondo(삼전도비) stayed in Hanyang until December 5 and supervised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ll work was completed on December 8th. From the Qing point of view, the monument of Samjeondo was regarded as a symbolic space for the success of the Manchus and the victory of the war to Joseon. From the point of view of Joseon, it was the result of the defeat and a symbol of obedience to the Qing Dynasty.
For the first time the Qing dynasty dispatched a envoy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discussed the standard of treatment for the Qing dynasty’s envoy. At first, it was intended to use the rules of treatment for Tangcha(唐差), but it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of treatment for Ming dynasty’s envoys(明使).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this time seemed to be satisfied with the reception of Joseon. In October 1637, the reception to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as the first step in making the reception of Qing dynasty’s envoys regular.
In September 1639, the reception for Qing dynasty’s envoy who is named Mandaerhan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previous treatment for Qing dynasty’s envoys. It was because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差官) who came to visit King Injo. Joseon viewed Mandaerhan 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who came under the emperor's orders, but the lowest level department(접대소) was installed to entertain Mandaerhan. This is different from the case of the reception for officials who were temporarily dispatched and served the Ming emperor's orders. It can be said that this was influenced by the the reception for Jin dynasty’s envoys, and the antipathy towards Qing was reflected in the reception.
The reception of Mandaerhan in September 1639 and Maputa in November 1639 is another point worth noting. King Injo did not go out for greeting the two envoys. In September,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so there was no need for Injo to greet according to the ceremonial regulations. However, it was a precedent that Injo did not greet envoy on the excuse of his illness from November 1639. Afterwards, Joseon recorded cases in which the king did not greet envoy and made it a custom.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lixiaoqing03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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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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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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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권0호(2021년 11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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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99년 전염병[胡疫]의 대유행과 국가의 위기대응 방식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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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염병의 실상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을 검토한 것이다. 본 연구는 1798년 연말부터 1799년 초까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에 주목하였다. 당시 전국에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개인의 일기에서 당시의 사정을 확인해 본다.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은 15세가 되던 1799년 1월 7일 감기 걸렸다. 원래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같은 증상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친족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평안·함경·황해·전라·강원도 감사(監司)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승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사망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울에서만 6만 명이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국왕 정조는 이것을 국가 재난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1799년 1월 13일 진휼청에 백성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다음으로 여제(厲祭)와 위제(慰祭)를 거행하였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은 국가에서 민간의 토지를 구입해서 격리하여 매장하였고, 봄철 군사훈련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빈민에게 쌀과 곡식을 공급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약 20여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15세의 류의목은 전염병 소식을 매일 일기에 빼곡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이 전염병을 '호역(胡疫)'이라고 말하였다. '호역', 중국에서 들어온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정말 중국에서 유입되었을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의주는 특히 피해가 심각하였다. 기록자의 시각에 민간의 여론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국가는 전염병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국가를 신뢰하였다.


Ryu Ui-mok(1785~1833) contracted influenza on January 7, 1799 at the age of 15. The next day, the family of an elder brother of his family, the family of a younger brother of his father, and families of his father's cousins all contracted it at once when his grandfather returned after going out. A few days later, seven of eight governors including the governor of Gyeongsang Province died. The number of deaths reached 400 in Andong and 63,000 in Seoul.
King Jeongjo(正祖) of Joseon determined that it was a national disaster and crisis, taking on relief works first. He gave an order to relieve people to Jinhyulcheong(賑恤廳) on January 13, 1799 and had Yeoje(厲祭) and Wuije(慰祭) held. These were traditional approaches, but they had much influence on the opinions of the people. He also had the bodies of the deceased due to the infectious disease isolated and buried in private land that was owned by people and purchased by the government for the purpose. The regular spring military campaign was suspended altogether. These measures were taken during a period of approximately 20 days.
Under this miserable situation, interesting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It is difficult to trace the origin of an infectious disease. It must have been even more difficult in the traditional society. The stories spread among the people during a severe infectious disease must reflect the consciousness of the people. Ryu Ui-mok at age 15 called this cold "Hoyeok(胡疫)" writing down what he heard. He believed that the cold was transmitted from China. The government made fast reactions to the influenza spreading around the nation, and the people seemed to have trusted the government.
(Institute of Youngnam Culture Research / jeongu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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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10-1911년 봉천(奉天)의 페스트 유행과 민중의 대응 : 방역의식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자 : 김현선 ( Kim Hy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6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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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령,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인식과 참여는 나라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방역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이 방역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이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가 방역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시사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Dugald Christie의 『奉天三十年』과 『東三省疫事報告書』를 중심으로 1910-1911년 奉天의 페스트 유입과 방역당국의 방역정책과 민중의 대응, 방역에 대한 민중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1910년 페스트가 발생한 후 러시아와 일본은 페스트를 빌미로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내우외환에 처한 청조는 유럽의 방역을 모범으로 한 근대적 방역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당시 민중은 방역과 위생에 무지했으며, 엄격하고 과감한 근대적 방역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방역사업을 도왔던 외국인 의료선교사의 희생은 서양인과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역정책에 대한 저항을 완화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중국 민중은 상인들의 모험을 통해 근대적 방역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하는 방역정책에 반대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정부의 방역정책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병원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인들이 개설한 병원에서 중의를 비롯한 대다수의 환자가 희생되었으며, 이는 방역정책의 실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역과 위생에 대한 민중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우고 방역의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부는 신문과 포고문을 배포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높은 방역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은 방역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으며, 민중의 적극적 협조는 방역정책의 성공을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With the spread of COVID-19 around the world in December 2019, the prevention measures taken by the governments had a significant impact on slowing the spread of COVID-19 in each country. However, not only the national prevention measures, but also the awareness and behavior of citizens who accept prevention measures are very important. In this regard, this paper examines the spread of plague in the northeastern China, the implementation of prevention measure, and the people's response to plague and authorities' prevention measure during 1910-1911.
After an outbreak of plague on October 25, 1910 in Manchouli(满洲里), the plague spread along the railroad to Heilongjiang(黑龍江) and Jilin(吉林) Provinces. In December, it spread to Fengtian(奉天), the political center of the three northeast provinces, and then to Tianjin(天津), Shandong(山東), and Beijing(北京). In Fengtian(奉天), quarantine stations and hospitals were installed to control the source of the plague, and efforts were made to block the transmission route.
When authorities implemented modern prevention measures, people expressed skepticism about western medications and modern prevention measures, due to their conflict with the Chinese conventional traditions, as well as the economic damage such measures cost. However, after the death of a medical missionary, Jackson, experiments that risked the lives of merchants, and authorities' propagation, the people's skeptical perception and behavior changed. People began to protect themselves by preparing effective prevention measures devices on their own. The people's cooperation wa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 prevention success.
Examining the transition of people's skeptical consciousness and resistance to preventions is very important in their success and the modernization of public health in the northeastern China. In addition, examining people's awareness and effort in preventing the plague would give a strong message for the prevention on COVID-19.
(HK Research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 kimhyunsun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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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리클레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인가?

저자 : 안재원 ( Ahn Jaew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7-9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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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역병이 동시에 발생한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간과했다. 역병은 아테네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마저 해체했다. 이 상황에서,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배분 정의론과 종교와 법에 호소하면서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런 페리클레스의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다름 아닌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전쟁과 역병의 딜레마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신중함의 리더십임을 강조하는 작품이 『미친 헤라클레스』였다.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역병은 긍정적 측면도 남기었다. 역병으로 인해 소위 “데카당스”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만연했을 때, 예컨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정의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Thucydides did, however, overlook the issue of what kind of leadership should be required in a situation of war and plague, particularly in a plague disaster. Pericles clearly boosted patriotism and nationalism by appealing to traditional distributive justice, religion, and law, while the plague destroyed the traditional values and ideology that held Athens together. However, many people criticized Pericles' leadership in this regard. One such critic was Euripides, who saw Pericles as nothing more than the insane Heracules. Because Heracles mainomenos is a work that emphasizes the prudence-based leadership required in times of war and plague. Given its long history, the plague had a positive impact by allowing for introspection and insight into what is just and how to live.
(Seoul National University, numeni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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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의 인구추이에 대한 연구 - 고고자료를 중심으로 -

저자 : 최규진 ( Choi Gyuji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7-13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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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형산강 유역이라는 공간 범위에서 청동기시대 취락 조사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취락 자료를 중심으로 시기별·지역별 인구를 추정해보고 당시의 인구추이와 사회구조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동기시대 형산강 유역 인구추정에 있어서 1인이 필요한 주거 면적을 5㎡의 수치로 추정했다. 그 결과 전기의 인구를 100%로 산정하여 인구추이를 지구별로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청동기시대 전기 인구 규모의 40.7%로 60% 정도 감소한 양상을 보인다.
인구추정 결과로 본 인구분포 비율은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60% 정도 감소하였으나 경주 중심권과 안강 방면 북부권의 경우에는 전기보다 후기의 인구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경주중심권으로 취락들이 통합되어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추정되며 취락의 구조가 커짐을 뜻한다. 이러한 경주 중심권으로의 인구증가는 청동기시대 후기 읍락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주중심권으로 인구가 모여드는 인구집중을 토대로 하면서 대외교류 증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기철기시대에 읍락을 중심으로 한 기초 정치체가 형성되고 더 통합되어 지역정치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This thesis aims to estimate the population sizes over time each region had during the Bronze Age on the basis of settlement data in the Hyeongsan River and aims to trace the population trends and the social structures as the settlement data that have been accumulated recently.
In estimating the population of the Hyeongsan River basin during the Bronze Age, five square meters has been used as the spatial size a person needs according to the generally used average floor size per a person. According to the population estimation results, the population size of the Late Bronze Age turns out 40.7% of the population size of the Early Bronze Age.
Although the Late Bronze Age witnessed 60% decrease in the population size of the Early Bronze Age in the Hyeongsan River basin, there had been some variations in the basin. That is, there had been the population increases in the central Gyeongju region and the northern Gyeongju region including the Ahngang basin from the Early Bronze Age to the Late Bronze Age, which is an interesting population trend. It is considered that this population increase in the two areas might be related to the integration of settlements including population nucleation by the emerging center located at Gyeongju area. In addition, it might mean that the settlement structures got bigger and more complex. This phenomenon the population increase in the central Gyeongju area might be the dawn of the emergence of the regional polity consisting of the village clusters or settlement networks called 'euprak' because the population increase could stimulate not only diverse social integrations but also long distance trades.
(Youngnam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 mcjin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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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라 진흥왕대 황룡사(皇龍寺) 창건과 그 의미

저자 : 최준식 ( Choi Jun-sic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7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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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가 창건된 배경과 목적에 관한 연구는 관련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황룡사 창건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미처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도 확인된다. 예컨대 진흥왕대 활발하게 진행된 대외활동이 황룡사 창건 과정에 끼친 영향에 관해서는 거의 검토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황룡사 창건의 배경과 목적을 대외적인 상황 속에서 살펴보았다.
문헌 기록과 고고 자료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553) 신궁(新宮) 조영을 위한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사찰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황룡사 보완발굴조사 내용을 참고하면 황룡사는 북편의 건물군(建物群)과 담장이 먼저 들어서고, 점차 불상(佛像)과 금당(金堂)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이 신궁을 사찰로 전환하게 된 명분은 '황룡(黃龍)'의 출현이었다. 이때 '황룡'은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聖王)과의 경쟁 관계에서 우위를 가져간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신라 토착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용' 서상(瑞祥)에 황제를 표상하는 중국 '용'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신궁의 황룡사로의 전환은 백제와의 전쟁과 전쟁 이후 새롭게 확보한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늦어지게 되었고, 결국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 마무리되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백제 성왕과 마찬가지로 양무제(梁武帝)의 숭불(崇佛) 정책을 참고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특히 황룡사에 양의 국가대사였던 광택사(光宅寺)와 동태사(同泰寺)의 역할과 유사한 부분이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룡사는 진흥왕이 불교를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황룡사는 진흥왕 당시부터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Research on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in the 14th reign of King Jinheung(553) has been studied despite the lack of relevant records. As a result, it was possible to see the general ideas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However, it is also seen that some parts could not have been thoroughly examined when looking at previous research. For instance, it was hardly considered the impact of international activities, was briskly conducted on the foundation of Hwangnyongsa Temple in the King Jinheung era. Therefore, this research will examine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establishing Hwangnyongsa Temple in the external context.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literature records and archaeological data, it can be seen that the construction plan for Singung - new palace, which had been finished laying the foundation, was changed its usage to a temple. The temple firstly consisted of a huge building with small buildings on the north side and a wall on the rest of the sides. Then, they gradually built Buddhist sculptures and Geumdang(Goden Hall, 金堂). King Jinheung changed the palace plan into the temple because of the emergence of 'Hwangnyong - yellow dragon.' The emergence of the Hwangnyong could be created by combining the Silla's traditionally auspicious creature 'Yong - dragon' with the Chinese auspicious creature to reveal that king Jinheung dominated the Hangang River basin and took over the power in the competitive relationship with the king Seong(聖王) in Baekje. However, Hwangnyongsa Temple's construction took some time to build as Silla was more focused on stabilizing newly secured territories.
The establishment of the Hwangnyongsa Temple by King Jinheung was related to worshiping Buddhism as a policy of Emperor Wu(武帝) of Liang(梁). Like King Seong in Baekje, King Jinheung intended to reveal the royal authority through Buddhism as Emperor Wu did political actions through Buddhism. One of the cases was that King Jinheung sacrificed his palace to build the Hwangnyongsa Temple. In that respect, the temple can be considered a significant temple since King Jinheung.
(Kyo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schoihisto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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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왕권에 대한 조언 : Basilikon Doron을 중심으로

저자 : 강미경 ( Kang Mi-kyu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5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9-21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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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바쁜 와중에도 아테네로 유학 간 아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 편지를 3권으로 묶어 출판한 것이 바로 서양 근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의무론』(De Officiis, BC 44)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이후 고전 문화가 부활, 재생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브리튼(Britain) 섬에서도 고전 저작들의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특히 키케로의 『의무론』은 라틴어 원문은 물론 영어 번역본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더불어 『의무론』을 본떠 아들 혹은 딸에게 보내는 조언을 책으로 출판하는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행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 1567-1625)의 『바실리콘 도론』(Basilikon Doron, 1599)이었다.
『바실리콘 도론』은 '왕의 선물(The royal gift)'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의무론』처럼 제임스 6세가 장남인 헨리 왕자(Prince Henry, 1594-1612)를 위해 쓴 편지 형태의 조언서(conduct book)이다. 처음 이 조언서는 왕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비밀리에 7부만 인쇄되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Ι, 1533-1603)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게 될 즈음에는 이 조언서에 대한 관심이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서도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 다양하게 날조된 복사본과 요약본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실리콘 도론』은 1603년 런던에서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잉글랜드와 유럽 전역으로 유포되었으며 당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실리콘 도론』을 지금 우리가 다시 살펴보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바실리콘 도론』은 왕이 어린 아들에게 주는 조언서로 등장했던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의 교육이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왕이자 지식인이었던 제임스가 자신의 시대와 왕권(kingship)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고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과 사회계약설(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그리고 교황의 국왕폐위권(authority to depose the King)이 갈등하던 시기를 살았던 그 자신의 왕권에 대한 이상을 피력하는 하나의 수단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는 『바실리콘 도론』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종교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제임스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한 1603년 전후에 이루어진 『바실리콘 도론』의 출판과 유포에 집중하려 한다.


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a famous politician and philosopher of Rome, wrote letters of advice to his son who went to Athens to study even though he was very busy. The publication of these letters in three volumes had a great effect on modern Western thinkers, and this is De Officiis (BC 44).
As the ancient culture was revived and regenerated after Renaissance, the British Islands saw re-illumination of classical books, and especially De Officiis was widely spread in English and Scotland both in the original version and in English-translated version of 1534. There was a trend to publish letters of advice to sons or daughters by being modeled after De Officiis, and the representative work of the tendency was Basilikon Doron (1599) by James Ⅵ (1567-1625), King of Scotland. Basilikon Doron is a Greek word meaning 'the royal gift', and it is a conduct book in the form of letters written to Prince Henry (1594-1612).
At first, this conduct book was printed for private purpose, so there were only seven books in secret. However, by the time King James succeeded to the king of English after Queen Elizabeth Ι (1533-1603), the attention of this book was spread not only in Scotland but also England and European continent. Even fabricated copies and abridged editions were popular. Finally, Basilikon Doron was officially published in London for general public and translated into Latin, French and German, being distributed throughout English and Europe as a bestseller of the time.
Why do we need to read Basilikon Doron now?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book? As Basilikon Doron appeared as a conduct book from the king to his son, this book can help to understand king's education and ideal king in those days. In addition, it is an important resource to find out how King James, who was a king and intellectual, recognized his era and kingship. It also gives an opportunity to see a device to express the ideal about his kingship during the period of the conflicts among Divine Right of Kings, the theory of social contract and authority to depose the King.
This study is intended to focus on political and religious backgrounds and contents of the advent of Basilikon Doron, and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Basilikon Doron around 1603 when King James succeeded to thron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james-1603@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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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저자 : 서호준 ( Seo¸ Ho-j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 (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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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등장한 이래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대응은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과 역사학간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빅데이터 기법을 어떻게 하면 역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 분야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바로 연구의 목적이라할 수 있다.
사실 역사학은 방대한 사료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랜 데이터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상관성을 추구하는 빅데이터와 인과성에 대한 탐문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간에는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빅데이터의 위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으로 역사연구를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빅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역사연구는 한층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간의 접목을 위해 해방 이후 2010년대까지 약75년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연구경향을 크게 7개 시기로 구분하여 텍스트 마이닝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하였다. 빅데이터 기반 분석결과를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에 관한 기존의 논의결과와 비교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분석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논저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최근으로 올수록 그 정확성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둘째, 특정 국가사의 활성화 정도를 직관적으로 논의하는 경우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보충적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은 기본적으로 키워드(노드) 분석을 위한 것이므로 문장단위 분석이나 고차원적인 개념분석에는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사실 사료에 대한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가 요망되는 고대사 연구를 계량적으로만 분석한다면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빅데이터 기반 연구는 이와 같은 단순 계량적 접근을 넘어 사료나 연구경향 논문들을 대상으로 한 키워드 도출을 통해 가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네트워크내 키워드들의 위상과 영향력 그들 상호간의 관련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실증과정에서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긴 하였지만, 본 연구가 제시한 분석의 프레임 자체는 양질의 후속연구를 태동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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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 고승비 음기의 문도 검토 -경북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한기문 ( Han¸ Ki-m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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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 고승의 문도 형성과 성격을 이해하고자 고승비 음기를 살폈다. 선봉사대각국사비 음기, 운문사원응국사비 음기, 중수용문사기 음기, 인각사보각국존비 음기 등 4 사례의 문도 직명을 살펴본 결과, 다양한 직명의 문도를 확인하였고, 크게 법손[사법제자, 부법제덕], 집사제자, 세속제자[수법유경사대부] 등의 부류가 있었다.
다양한 직명의 유래를 추적한 바, 고승의 강회, 담선 활동 및 승정제도, 승록사, 결사 등과 연관하여 그 고승의 문도가 형성되었다. 문도 중에서도 법손주지가 수법제자의 학풍을 유지하면서 문도 형성에서 중심이었다. 집사제자 문도 형성은 고승의 승정 관여와 연관되었다. 승정제도가 성립된 靖宗代를 기점으로 이러한 문도의 분열 이동이 많아지면서 사원 소속이 명시되는 등 종파분쟁의 조짐도 보였다. 승단이 확장되면서 결사 운동과 관련하여 세속제자도 문도로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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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려 의종대 왕제(王弟) 대녕후(大寧侯) 사건

저자 : 장상주 ( Jang¸ Sang-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3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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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寧侯 사건은 의종대 정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차자인 대령후를 지지하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의종은 이러한 관계로 태자 시절부터 대령후와 왕위 계승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의종은 인종의 지지와 정습명의 보좌로 왕위에 올랐다. 의종은 즉위 초부터 정안 임씨와 대령후를 견제하였다. 대령후의 견제는 즉위 초인 동왕 5년부터 재위 후반기인 동왕 21년 '流矢의 變'으로 이어졌다.
의종의 측근인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와 그 족당인 정서·최유청·임극정·이작승 등을 참소하여 유배와 좌천시켰다. 이어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의 세력 기반을 점차적으로 와해시켰다. 그리고 의종은 다른 동모제인 익양후(명종)와 평량후(신종)도 의심하였다. 그만큼 王弟는 의종대 국정에 적지 않은 파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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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읍지(邑誌)와 방목(榜目), 호적(戶籍)을 통해 본 대구 출신 급제자들

저자 : 한상우 ( Han¸ Sa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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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구에서는 몇 명의 문과급제자들이 배출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이후 편찬된 대구의 邑誌, 市史, 榜目과 대구부호적대장 등을 활용하여 대구 출신 급제자들을 확인하였다. 읍지와 시사, 방목을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대구 출신 급제자들은 총 79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료들마다 급제자들의 명단과 정보가 상이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대구에 거주한 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1681년부터 1876년까지에 걸쳐 남아 있는 대구의 호적에서 17세기 후반 이후의 급제자들과 그 가족들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읍지와 방목 속 대구 급제자들이 모두 대구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실제로 대구에 거주했더라도 읍지에서 누락된 경우가 있었다. 즉, 대구 출신 급제자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실제 대구 거주 여부뿐 아니라 다면적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구 출신 급제자 확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그들이 잦은 이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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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세기 전반 호패법 시행 과정 연구

저자 : 설현지 ( Seol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1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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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 전반의 변화를 논의하였다. 본고에서는 광해군대와 인조대 호패법의 논의와 시행, 중단 과정을 살폈다.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호패를 차도록 하는 법제였다. 이는 전쟁으로 유실된 백성들의 거주지와 국역을 다시 정해주고, 국가의 개별적 백성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법이었다. 호패법은 조선 초부터 시행하고자 한 법이었지만, 置廢를 반복하다가 숙종대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호패법은 고려말기에 도입된 제도로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호패법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인조대까지 이어졌다. 정묘호란 이후 호패법은 중단되었지만, 인조대 호패법 시행으로 정해진 각종 규칙들은 『호패사목』으로 남아서 숙종대 호패법 시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선조대 후반부터 인조대까지 호패법의 시행과 중단, 그 사이에 일어난 다양한 논의를 살핀 후, 『호패사목』을 통해서 호패법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파악하였다.
호패법은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용이한 법이었기에, 조정에서는 호패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호패법으로 인해 새롭게 군역의 의무가 생겼기 때문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유생들도 敎生考講에 탈락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기 때문에 반발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시행의 찬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지만, 부족한 군역을 채우기 위해서는 호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일부 백성과 유생들의 반발에도 호패법은 필요한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호패법의 시행을 위해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호패사목』이다. 『호패사목』의 내용은 오가작통법, 단자식, 운영 규정과 특수민의 호패에 관한 것들이다. 단자식을 봤을 때 조선 정부는 관료-관료 예비군-군역 대상자로 분류해 백성들을 파악했음을 확인하였다. 『호패사목』을 통해 조선 정부가 호패법으로 군역을 보충하고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임진왜란 후 무너진 국가 질서와 세금 제도를 회복하기 위해 시행하고자 한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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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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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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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영조 초기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적 동향

저자 : 이재현 ( Lee Jae-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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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英祖 초기에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을 규명한 것이다. 시기적 범위는 영조 즉위 이후부터 대략 辛酉大訓을 전후한 시기까지이며, 지역적 범위는 安東을 중심으로 하되 禮安·英陽·寧海 등 안동 주변 지역 또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역적 범위는 곧 李玄逸 門人 집단 내 핵심인물들의 거주 범위와 일치한다.
영조는 즉위 이후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신유대훈으로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이 설립되기까지 乙巳換局, 丁未換局, 戊申亂, 己酉處分, 十九下敎, 混沌開闢, 庚申處分 등 많은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영남 남인의 경우 숙종 대 甲戌換局 이후로 실각하여 재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 초기 정국에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더구나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지역 전체가 '逆鄕'으로 규정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통상적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 명분은 무신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영조의 배려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남 남인 인사의 등용이 있었다. 김성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안동 지역 남인들은 이현일의 문인집단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현일의 伸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나 '己巳年의 餘黨'으로 낙인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김성탁이 이현일을 伸救하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 유배 간 사건은 안동 지역 남인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성탁 사건의 파급으로 인해 안동 지역 내에서는 김상헌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南·老 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안동 지역 내에서 열세에 처했던 노론 측은 官의 지원 아래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으나, 남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저지하여 서원 건립이 좌절되었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남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黨論 위에서 君師로 군림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의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1740년대가 되면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은 침체되었고, 이것은 곧 영남 남인의 정치활동의 침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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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기철의 통일운동 역정과 생애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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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195,60년대 진보당과 통일사회당 등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며 일생을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김기철이다. 그는 해방 직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우익계열 단체를 통해 정치 사회운동을 시작했으나, 북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46년 3월 월남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 민족자주연맹에 몸담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김기철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출마 때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 조봉암과 서상일이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혁신정당을 창당할 때 김기철은 창당 추진을 위한 핵심인물로 활약했고,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진보당 창당 후에는 통일문제연구위원장으로서 남북문제의 국제적 해결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통일방안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안은 1958년 진보당사건 당시 검찰이 진보당의 이적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되었고, 당국이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조봉암의 사형으로 진보당 관계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일시 정치 사회운동의 장을 떠났던 김기철은 4월혁명으로 혁신계의 활동공간과 기회가 확보되자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혁신세력의 이합집산 와중에 사회대중당(창당준비위원회), 통일사회당을 거치면서 역시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와중에 그가 구상했던 통일안을 좀 더 구체화한 중립화통일방안을 내세워 다양한 공론의 장에서 그의 주장을 펼쳤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가 실시한 혁명재판에서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기철은 1963년 3공화국 출범 뒤 단행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한 후에도 당 내에서 통일문제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거의 전 생애를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하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김기철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적 사회건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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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진(天津) 죄범습예소(罪犯習藝所)의 건설과 '근대' 감옥의 탄생

저자 : 조병식 ( Cho¸ Byung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70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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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光緖30년(1904)에 건설된 중국 최초의 신식 감옥인 天津罪犯習藝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죄범습예소를 전통 감옥에서 근대 감옥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존재로 이해하였지만, 천진의 경우 '근대' 감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저명한 감옥학자였던 오가와 시게지로오(小河滋次郞)의 고대/'근대' 감옥을 판별하는 3가지 기준을 차용하였다. 첫 번째 기준인 수감 대상에 있어서 천진 죄범습예소 건립 당초 기결수와 부랑자들을 함께 수감하였는데, 성격이 상이한 집단을 한 공간에 수감한다는 점에서 전통 감옥의 雜居와 맞닿아있었다. 그러나 光緖32년(1906) 遊民習藝所가 설립되어 부랑자 수용 시설이 별도로 마련되면서 죄범습예소는 기결수만을 감금하는 공간이 되었다. 두 번째 기준인 감옥의 목적과 관련해서 천진죄범습예소는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전통 감옥의 목적에서 탈피하고 수감자의 갱생과 출소 후의 생계 도모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생과 방범에 중점을 둔 감옥 건축물이 건조되었고, 직무에 따라 관리 인원의 직위를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죄범습예소 내 총 6곳의 공장을 설립하여 수감자들이 수공업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기준인 경비 조달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州縣에 할당한 수감자 비용은 죄범습예소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비용이었지만 연체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죄범습예소에서는 수감자들의 역량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추진하였다. 죄범습예소의 공장화에 대한 直隷總督 袁世凱의 경고가 있었으나 죄범습예소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천진 죄범습예소는 오가와 시게지로오의 3가지 기준 가운데 2가지를 충족하였다. 그리고 경비 조달의 문제는 천진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고, '근대' 감옥을 표방하여 설립된 模範監獄 또한 동일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천진 죄범습예소는 '근대' 감옥으로의 과도 기적 존재라기보다는 '근대' 감옥의 직접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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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고대 성곽 공방전에 관한 군사 공학적 전략론 분석

저자 : 배은숙 ( Bae¸ Eun-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1-40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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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프론티누스와 베게티우스의 글을 군사 공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프론티누스는 군지휘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이 있으므로, 베게티우스는 고위 행정가로서의 경험이 있으므로 이들의 글이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거론하는 성곽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전략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전략을 비교, 분석했다.
프론티누스의 글은 적을 공격하는 공성전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공성전 중에서도 포위전에 관한 전략을 상세히 서술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포위전은 아군에게도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아군에게 상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하고, 적을 경계해야 하는 심리적인 긴장도 상당하다. 또 그가 활동하던 1세기에 로마군은 포위전만 한 것이 없고, 공격전 위주로 전쟁했다. 따라서 프론티누스가 전투 경험을 가진 군지휘관이어서 실질적인 전략을 서술했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그의 글은 당대의 전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베게티우스의 글에는 공격적인 전략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 있다. 4세기의 전투 사례들을 볼 때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하든 공격전을 펼친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공격전을 강조한 당시의 상황이 베게티우스의 글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의 수성전 전략도 전략의 현실성과 유익성 면에서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빈도를 볼 때 그의 수성전 전략은 그렇게 활용 가치가 높은 전략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게티우스 글의 유익성은 로마군이 가장 빈번하게 하는 공격전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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