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상세보기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KCI등재

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The Dispatch of Qing Dynasty’s Envoys and The Political-Diplomatic Significance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리샤오칭 ( Li¸ Xiaoqing )
  • : 대구사학회
  • : 대구사학 144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213-256(44pages)
대구사학

DOI

10.17751/DHR.144.213


목차

Ⅰ. 머리말
Ⅱ. 1637년 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와 인조의 책봉
Ⅲ. 1639년 청사출래와 조청관계의 긴장
Ⅳ. 맺음말

키워드 보기


초록 보기

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In this paper, by examining the purpose and the negotiation activities in Hanyang of Qing Dynasty’s Envoys dispatched to Joseon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significance of the Qing Dynasty’s Sahaeng(使行) toward Joseon was investigated.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requested an end to the Qing's request for conscription through Sahaeng(使行) in April and September 1637. In October 1637, the Qing dispatched an envoy to Joseon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ithout Joseon‘s resquest, and the Qing dynasty’s envoys negotiated with Joseon focusing on the issue of repatriation of Naturalized jurchen(向化人), Chinese(漢人), Joseon people who captured by the Qing tried to come back Joseon(走回人). The issue of repatriation was an important negotiation issue even in later Sahaeng(使行) toward Joseon. It can be said tha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most urgent task of Joseon was the resolution of the issue of conscription. However, what the Qing dynasty considered important was the maintenance of hierarchical relationship with Joseon and the establishment of a Qing-centered international order.
Besides exemption from conscription, Joseon's other concern is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In September 1637, Joseon requested the return of the crown prince , but was rejected by the Qing Dynasty. In February 1639, an envoy was sent with a request for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crown prince, and it was also expected that the crown prince could return to Joseon through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After that, Injo's illness also made it a reason to request the crown prince to return to Joseon. However, from Qing's point of view, the installation of the queen and the crown prince was a procedure that could settle a hierarchical relationship of Joseon and Qing Dynast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Qing Dynasty mentioned the installation of Crown Prince before Joseon’s request.
In November 1639, the Qing dynasty’s envoy who came for the monument of Samjeondo(삼전도비) stayed in Hanyang until December 5 and supervised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ll work was completed on December 8th. From the Qing point of view, the monument of Samjeondo was regarded as a symbolic space for the success of the Manchus and the victory of the war to Joseon. From the point of view of Joseon, it was the result of the defeat and a symbol of obedience to the Qing Dynasty.
For the first time the Qing dynasty dispatched a envoy after the Manchu war of 1636(丙子胡亂), Joseon discussed the standard of treatment for the Qing dynasty’s envoy. At first, it was intended to use the rules of treatment for Tangcha(唐差), but it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of treatment for Ming dynasty’s envoys(明使).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this time seemed to be satisfied with the reception of Joseon. In October 1637, the reception to the Qing dynasty’s envoy dispatched for the installation of King Injo was the first step in making the reception of Qing dynasty’s envoys regular.
In September 1639, the reception for Qing dynasty’s envoy who is named Mandaerhan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previous treatment for Qing dynasty’s envoys. It was because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差官) who came to visit King Injo. Joseon viewed Mandaerhan 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who came under the emperor's orders, but the lowest level department(접대소) was installed to entertain Mandaerhan. This is different from the case of the reception for officials who were temporarily dispatched and served the Ming emperor's orders. It can be said that this was influenced by the the reception for Jin dynasty’s envoys, and the antipathy towards Qing was reflected in the reception.
The reception of Mandaerhan in September 1639 and Maputa in November 1639 is another point worth noting. King Injo did not go out for greeting the two envoys. In September, Mandaerhan was a official temporarily dispatched, so there was no need for Injo to greet according to the ceremonial regulations. However, it was a precedent that Injo did not greet envoy on the excuse of his illness from November 1639. Afterwards, Joseon recorded cases in which the king did not greet envoy and made it a custom.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 lixiaoqing0313@naver.com)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769945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225-9039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69-2022
  • : 1395


저작권 안내

한국학술정보㈜의 모든 학술 자료는 각 학회 및 기관과 저작권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자료를 상업적 이용, 무단 배포 등 불법적으로 이용할 시에는 저작권법 및 관계법령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7권0호(2022년 05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16세기 일기체 경연 기록의 등장

저자 : 이인복 ( Yi In-bo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3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경연일기는 개인이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여 경사를 강의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경연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경연일기를 기록한 개인이나 이를 정리하여 문집에 수록하거나 간행하는 집단의 의도가 담겨 있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왔다. 다만 선조대와 같이 관찬사료가 부족한 시기의 경연일기만이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李珥의 『경연일기』나 柳希春의 「경연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경연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연 기록은 경연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종, 중종대를 거치면서 사림이 등장하고 경연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경연이 자주 시행되고 경연에서의 논의내용도 풍부해지면서 경연 기록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사관의 경연 입시 정례화로 사초에 경연 내용이 풍부해지고, 관찬 사료의 경연기사의 내용이 자세해졌다. 개인의 일기에도 경연 내용이 기록되고, 경연 때에 자신의 발언을 별도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종대 조광조, 한충을 비롯한 기묘사림들은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하여 남겼으며, 선조대의 이황 역시 경연에서의 진계를 별도로 기록으로 남겼다.
선조대에는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연에서의 발언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변화되었으며, 이는 16세기 지식인들의 일기 쓰기와 연관이 있다. 개인의 일기에서 경연에서의 경험이 기록되는 것은 국왕과 면대하여 경사를 진강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특별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본인이나 후손, 제자들에 의해 경연 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로 정리된다. 주희의 『주자경연강의』나 진덕수의 『진서산경연강의』, 관찬 경연일기를 작성하였던 경험들은 조선시대 경연만을 주제로 하는 경연일기의 출현에 영향을 주었다. 그 사이에서 이황의 「경연강의」, 이이의 『경연일기』는 경연일기가 등장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다. 이후 김우옹의 「경연강의」 이후로 작성 주체와 형식이 다양한 경연일기들이 저술되기 시작한다.


Gyeongyeon(經筵, Royal Lectures) is a system in which the king and his servants give lectures on scriptures of Confucianism and history books, and at the same time discuss the politics of the country. For individuals, Gyeongyeon(經筵) were also a special experience, so they were recorded in various forms. In the case of individual Gyeongyeon(經筵)-diaries, the intentions of the individual or group who wrote them are reflected.
As Gyeongyeon(經筵) are activated in Sungjong(成宗) and Jungjong(中宗) period, various Gyeongyeon(經筵)-related records appear. Individual experiences in Gyeongyeon(經筵) were also recorded in individual diaries. In addition, the remarks made in the lecture were collected and left as a separate record, which is Gyeongyeon(經筵)-Jingye(陳啓). These records were mainly made by Salim(士林), including Jo Gwang-jo(趙光祖).
As this trend continues to the Sunjo(宣祖) period, the Gyeongyeon(經筵)-diary begins to appear. Among the diaries, representative titles are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and 'Gyeongyeon(經筵)-diary'. These records were also made by Salim(士林), including Yi Hwang(李滉) and Yi Yi(李珥). In this regard, it is Zhu Xi(朱熹)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that can be noted. In the 16th century, intellectuals of Joseon paid attention to this book and published it. Zhu Xi(朱熹)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influenced the appearance of the Gyeongyeon(經筵)-diary.
Kim Woo-Ong(金宇顒)`s 『Gyeongyeon-Gang`oui(經筵講義)』 is a relatively early Gyeongyeon(經筵)-diary. It is an important book when looking at the process of individual Gyeongyeon(經筵)-diaries appearing. This diary was written and organized by him, and was organized by his disciples in the process of publishing it later. In the form of the diary, the date, method, place, textbook, scope, and participants were first recorded. After that, lectures on textbooks and discussions on national politics were recorded. This is the same as the general Gyeongyeon(經筵)-diary format that appears later. In the content, it is useful data for examining his ideas and policies. This book has been read a lot by intellectuals since then and has influenced many things.

KCI등재

2麟坪大君 李㴭의 『燕途紀行』 연구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70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麟坪大君(1622~1658)의 12차례 대청사행을 살펴보고, 그의 대중국 인식을 『燕途紀行』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인평대군은 인질과 사신으로 자주 청을 왕래하였으며, 왕족 출신인 그의 대중국 인식은 관료들의 인식과 차이를 보인다.
『연도기행』은 인평대군이 12차례의 사행 가운데 11번째인 1656년(효종 7)의 사행을 기록한 것이다. 『연도기행』에는 이전 10차례 사행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1656년(효종 7) 당시의 사행일기보다 회고록의 성격이 강하다.
인평대군은 여행자로서 개인의 사행 체험, 연행 노정의 고초와 심정을 기록하였고, 사신으로서 연로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조선의 산성 현황과 청의 요동 병력 배치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인평대군은 전란이 재차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산성 보존과 민심의 수습을 중요시하고, 청의 요동 병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인평대군은 청에 거주하는 역관과 조선인을 통해 청 내정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청의 정치 운영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명 정권의 보존과 부흥을 기대하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인평대군이 왕족으로서 중국의 흥망에 대한 인식이다. 인평대군은 명의 멸망이 山海關을 열어준 吳三桂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운수가 쇠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나라의 존망에 人和 즉 인심 향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명의 멸망 원인에 대한 그의 고민은 왕족인 통치자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This paper examines the twelve Sahaeng(使行) of Prince Inpyeong(麟坪大君) and analyzes his perceptions of China, focusing on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As a hostage and ambassador to the Qing dynast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often traveled to and from China, and his knowledge of China differed from that of the bureaucrats.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is the record of the 11th trip of the 12 trips made b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in 1656. The Yeondo-gihaeng(燕途紀行) contains information from the previous 10 trips. It is more of a memoir than a record of the Sahaeng(使行) in 1656.
Prince Inpyeong(麟坪大君) recorded his personal experience of Sahaeng(使行) and the sufferings and emotions along the way as a traveler, and collected various information as an ambassador. He was very concerned about the current state of mountain castles in Joseon and the deployment of Qing Dynasty troops in Liaodong. Due to the fear of another war, Prince Inpyeong(麟坪大君) attached importance to preserving the mountainous castle of Joseon and pacifying the people, and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strength of the Qing Dynasty in Liaodong.
Prince Inpyeong(麟坪大君)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internal affairs of the Qing dynasty through interpreters and Koreans living in the Qing dynasty. He pointed out the problems of the political operations of the Qing Dynasty and looked forward to the preservation and revival of the Southern Ming regime. What is of interest is Prince Inpyeong(麟坪大君)'s perception of the rise and fall of China as a royal family. Prince Inpyeong(麟坪大君) believes that the Ming dynasty fell not because of Wu Sangui(吳三桂), who opened the Opening the Shanhaiguan Gate, but because of the declining fortunes, and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people's hearts and minds to the survival of the nation. His anguish about the cause of the Ming Dynasty's demise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of being a ruler of a royal family.

KCI등재

318세기 대구 사대부의 일상을 통해 본 가족과 관계 - 최흥원(1705~1786)의 사례 -

저자 : 김정운 ( Kim Jeong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1-104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18세기에 대구에서 살았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일상생활에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이다. 논의는 두 가지 지점에 집중하였다. 첫째는 공간이다. 공간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흥원이 살았던 18세기 대구의 특징을 확인하였다. 18세기의 대구는 번화한 도회지였다. 1601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설치되었고, 행정과 사법의 중심이었다.
둘째는 가족과 관계이다. 가족의 범위는 좁게는 부부와 자녀이며, 확대하면 부부의 부모와 형제가 포함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하였나. 최흥원이 가족에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였다. 최흥원의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부부가 함께 분담하였다. 또 아내와 자녀, 부모와 형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


This study contemplates the meanings of family in the daily life of Choi Heung-won (1705~1786) who lived in Daegu in the 18th century. In the study, discussions focus on two points. The first point is space as it was an important element in a person's way of thinking and action. The study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Daegu in the 18th century when Choi lived there. The provincial office of Gyeongsang Province was set up in Daegu in 1601. The governor would have controlled the entire province, including its administration and judicial power. Thus, Daegu became the central city of the province in administration and jurisdiction. Gyeongsang Province was the most populous administrative unit at the provincial level in Joseon in the 18th century, and Daegu was at its center.
The second discussion point is family, which is a foundational group of life. The scope of family, in a narrow sense, encompasses a couple and their children, and in a broader sense, even their parents and siblings. Accordingly, one must know the description of family. The present study sheds light on the family relationships of Sadaebu in the 18th century with the case of Choi's family, whose perceptions of family and roles were reviewed based on their words and actions to each other.
Choi's family consisted of a couple and their children. They lived together, and the couple shared responsibility for their children's upbringing and education. As a father, Choi was particularly devoted to the upbringing and education of his children. He taught his son everything from daily habits to interpersonal behavior styles. It was the same with his daughter. He would postpone an urgent matter to prevent her from getting hurt emotionally and even feel sorry after spending days at the house of his married daughter.
The study also examines the couple's relationships with their parents and siblings. Their parents and siblings lived in separate places and worked together to serve their parents. Choi was the eldest son and lived with his mother after his father passed away early. Choi's wife also passed away early. Under these circumstances, he lived with his mother. His siblings lived in their respective homes after getting married. He and his siblings divided their roles to serve their parents.

KCI등재

4한국사의 의미에 비추어 본 현행 교육과정 고대사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저자 : 박성현 ( Park Sung-hy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한국사, 특히 전근대 한국사를 네이션으로서 현재 한국, 한국인의 '형성 과정'으로 규정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국사 체계가 대체로 큰 틀에서 그러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정통론이나 특히 근대의 민족 개념에서는 일정한 선택의 원리가 작용하여,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배제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현행 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와 중학교 역사의 고대사 체계를 검토해 보았다. 선사 및 고대 부분은 대체로 4시기로 구성되는데, 선사/ 고조선과 '여러 나라'/ 삼국 및 가야/ 남북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의 멸망에서 삼국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여전히 정립되지 않고 있으며, 그 이유 중 하나는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무엇보다 처음부터 한민족 혹은 한국사의 경계를 정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경계를 설정하게 되면서 그 범위를 현재의 한국인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그 외의 계통, 이를테면 중국계의 군현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한국사의 과정에서 배제하였다. 특히 역사 교육에서 한국사 체계는 한국인 형성 과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열린 체계로서 제시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한국 문화의 형성에 대해서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 이것을 한국사 과목 안에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문명사 및 동아시아사와의 연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is paper, Korean history, especially pre-modern Korean history, is defined as the process of formation of Korea and Koreans as the present nation, and the structure of Korean history formed in the process was evaluated as largely explaining such process in a broad framework. However, it was pointed out that there is a problem of emphasizing or excluding certain parts as a result of certain selection principles working in the orthodox the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especially in the concept of minjok.
From this perspective, the ancient history structure of high school Korean history, and middle school history in the current curriculum were reviewed. The prehistoric and ancient parts are largely composed of four periods: the prehistoric period, Gojoseon and 'many countries', the three kingdoms and Gaya, and the northern and southern kingdoms. Among them, the part leading to the establishment of the three kingdoms from the fall of Gojoseon has not been established, and one of the reasons is thought to be because it excludes Chinese counties including Nakrang.
In this paper, I tried to say that there is a problem in the tendency to set boundaries in the beginning of Korean people or Korean history. By setting the boundary in this way, it was made an error of equating the scope to the current Korean, and other lines, such as Chinese counties, were unfairly excluded from the process of Korean history. In history education, the Korean history structure should be presented as an open one that shows the 'flow' of the Korean formation process, and furthermore, it should be able to show the formation of Korean culture from a broader perspective. However, not all of this can be achieved in the course of Korean history, and it can be realized in connection with the history of civilization and the history of East Asia.

KCI등재

5신라 진지왕 폐위 원인에 관한 새로운 고찰과 그 역사적 의미

저자 : 성준선 ( Seong Jun-su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71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은 6세기 新羅 眞智王의 즉위와 폐위를 주제로 삼았다. 진지왕이 조카이자 태자의 아들인 白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眞興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배경으로, 진흥왕이 적극 활용한 轉輪聖王이라는 불교적 신성관념으로 등장한 '聖骨'을 주목하였다. 진흥왕은 안정적인 왕위 계승과 6세기 후반 달라진 삼국 간의 정세 속에 자신의 유고를 대비하여 백정보다 연장자인 진지왕을 金輪으로 명명하여 정치일선에 등장시켰다.
짧은 재위로 『三國遺事』와 『三國史記』 모두 관련 기록이 소략할뿐더러 서로 다른 실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자 한다. 그 배경으로 전자에는 진지왕 개인의 부도덕함과 자질 문제, 후자에는 신라가 처한 대외적 상황의 어려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혼재되자 신라 지배계층에서 혼란과 위기감, 불만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진지왕의 리더십에 큰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의 가장 큰 명분으로는 정법을 수호하고 엄격한 자기관리와 도덕성이 요구되는 전륜성왕으로서 그 자격이 문제가 된 것 같다. 이에 국인들이 폐위를 요구하자 진지왕이 이를 수용하였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 뒤를 銅輪의 아들 백정이 眞平王으로 즉위하였다. 진평왕은 전륜성왕 신성관념이 더는 효용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이보다 한층 더 강화된 신성관념으로 '석가족'을 내세웠고, 그 범위를 동륜계로 한정하면서 중고기 성골은 한차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King Jinji(眞智王) succeeded King Jinheung(眞興王) to the throne as the new Chakravartin(轉輪聖王), but was dethroned after 4 years of reign. As this is an unprecedented event, various causes are raised.
A clue could be found in the two records, Samguk-Yusa(三國遺事) and Samguk-Sagi(三國史記). Several factors such as unrestricted behavior, personal qualities, and Baekje's pressure on Silla acted in a complex way. Under this circumstance, the ruling class of Silla began to have doubts about the sanctity of the Chakravartin, and King Jinji was finally dethroned. The newly crowned King Jinpyeong(眞平王) asserted a stronger notion of the divinity than the Chakravartin. King Jinpyeong declared his family to be the Sakyamuni(釋迦牟尼)'s family. As a result, the sacredness of Silla's seonggol(聖骨) was strengthened, while the closedness became even deeper.

KCI등재

6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에 나타난 수혈주거지 변화에 대한 고찰

저자 : 황대일 ( Hwang Dae-il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3-207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앞 시기인 고려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나타나는 벽석렬과 주혈의 규칙성이 확인되지 않으며, 면적이 15㎡ 전후로 벽로 중심의 시설이 설치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보인다. 이처럼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 내에서 확인되는 수혈주거지는 문헌기록과 면적, 구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때 최하층민의 주거형태에 해당한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취락의 분포는 소규모, 중소규모, 대규모 취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대규모 취락은 주요 교통로 또는 역원 주변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지리적으로 모두 태화강 북쪽에 위치하며, 취락 주변에 소규모 취락과 중소규모 취락이 함께 분포하는 양상이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대규모 취락에서 수혈주거지 시기별 변화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15세기 중반부터 수혈주거지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에는 취락마다 수혈주거지의 수량이 급증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17세기 이후부터는 급격히 감소하면서 18세기가 되면 취락 내에서 거의 수혈주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울산지역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시기별 변화의 요인은 4가지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주거형태의 변화로 17세기 이후 수혈주거지에서 지상건물지로의 변화이다. 둘째, 입지의 변화로 농업기술과 사회ㆍ경제활동의 발달로 인해 취락의 중심이 구릉에서 평지로 이동하였다. 셋째, 인구변화로, 16~17세기에 발생한 양란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원인이 작용하여 취락 내 수혈주거지의 개체 수 또한 급격히 감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역촌의 설치와 정비, 해체가 역촌의 형성과 소멸로 연결되어 취락 내 수혈주거지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The dwelling sites in the Joseon Dynasty is not confirmed the regularity of stone rows and column holes in the walls that appeared in the Goryeo Dynasty. Its area was around 15㎡, and it had a relatively simple structure with facilities installed around a fireplace on the wall. Based on documentary records, size, and structure, the dwellings within the villages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Ulsan area correspond to the housing type of the lowest class.
The main characteristic of the residential change process in large-scale settlements of the Joseon Dynasty in Ulsan area was that the number of dwellings in each village increased rapidly in the 16th century, as the number of dwellings began to gradually increase from the middle of the 15th century. From the 17th century, it was decreased sharply, and by the 18th century, not only villages but also dwellings were almost absent.
The factors of residential change process of the Joseon Dynasty in Ulsan can be summariz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it is the change of the building site in the residential area after the 17th century. Second, the center of the village was characterized by moving from the hills to the plains caused by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al technology and social, economic activities. Third, the population was decreased rapidly due to the two great wars that occurred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and as a result, the number of dwellings within the village was also decreased sharply. Lastly, it is thought that set-up and withdrawal of the station with inns led to the formation and extinction of the station area, affecting the change of residence in the village.

KCI등재

7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은행 경영과 식민지 주주자본주의 - 1920년대 경상공립은행의 설립과 경영 -

저자 : 김명수 ( Kim Myungs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50 (4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1920년 7월부터 10년 동안 대구에 존재했던 경상공립은행을 대상으로 설립주체, 설립과정, 경영변동, 조선총독부의 은행합동정책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의 측면을 강조했던 선행 연구와 달리 일본인들에 의한 공립은행의 경영 사례가 일제강점기라는 정치적 상황 하에서 오직 일본인 주주들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주주자본주의였음을 해명하고자 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20년 7월에 설립된 공립은행은 대구에 본점을 두었지만 주주의 대부분이 가가와현에 거주하는 '순수한' 일본인 은행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설립된 은행들이 그 구성비율에 차이가 있어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주주로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했음을 고려한다면 공립은행은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이례적인 은행이었다.
둘째, 공립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미야이(宮井正一)의 축재 경로는 대금업, 도기제조업, 창고금융업, 정미업, 미곡거래업이었다. 당시 대구의 주요 일본인들이 종사했던 분야였다. 미야이의 축재 경로는 당시 대구의 일본인 자산가들이 걸었던 전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립은행은 1920년 7월에 설립되어 1930년 9월 임시주주총회에서 경일은행과의 합병안을 승인할 때까지 정확히 만 10년 동안 존재했었다. 은행의 '공공적 성질'을 생각하지 않고 '철두철미 실리 본위'로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공립은행의 퍼포먼스는 '주주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넷째, 대출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어음할인이나 어음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담보물도 지극히 보수적으로 평가했으며, 평가한 금액에 대해서도 대체로 60%만을 대출해 주었다. 하지만 1929년 개정 은행령에 의해 감독이 강화되면서 대금업자식의 '미야이식' 은행 경영이 어려워졌다. 미야이가 은행업을 폐업을 고려한 것도 경일은행과의 합병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This paper have two goals. The first goal is to examine the founders, the establishment process, the management fluctuation,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f Gyungsang Public Bank(GPB). The second is to make it clear that the case of GPB is nothing but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because GPB was faithful only to the interest of shareholders. This is different from research results which existing studies have stressed on financing for colonial development. The results of this paper are as follows.
Firstly, Founded in July 1920, GPB was a purely Japanese bank in the sense that most of its shareholders were from Kagawa Prefeture Japan.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at many banks have Korean and Japanese shareholders commonly, the case of GPB was a rare one because GPB consisted of only Japanese shareholders.
Secondly, Masakazu Miyai, who led the establishment of GPB, amassed a fortune from money-lending business, pottery manufacturing, warehousing, financial business, rice-cleaning business. Also, he was famous as a rice dealer in Daegu. Miyai's path of wealth accumulation was true of the Japanese wealthy people in Daegu at that time.
Thirdly, GPB existed exactly for 1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n July 1920 until the approval of its merger with Gyungil Bank in September 1930. Instead of thinking about the public nature of the bank, Miyai focused on only making money thoroughly. GPB appreciated secured property offered by borrowers very conservatively and lent at most about 60% of appraised value. Loans were also made centering around bill discount and loans on bills, which guaranteed high commissions.
Miyai tried to quit banking and go back to Japan when monitoring on banks became strict since revision of bank act in 1929. He could not manage GPB like a money lender under the new reinforced regulations on banking. It was the reason why Miyai responded positively the offer of acquisition to Gyungil Bank by Chosun Bank, which was the central bank of colonial Korea. In conclusion, GPB's case was the typical case of so-called shareholder capitalism.

KCI등재

81920年代 在韓 中國人 無緣故死亡者의 處理와 中日交涉

저자 : 이학로/HakroRhee 1 ( Rhee Hak-r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1-284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발생과 그 처리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1920년대에 발생한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경우 대부분 당시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조선의 중국인들은 주로 중국과 왕래하기 쉬운 북부 지역이나 仁川 등 京畿道와 서울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업과 노동 그리고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무연고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먼저 그의 국적을 판단하였다. 사망자가 중국식 복장을 하거나 소지품에서 국적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을 경우 중국인으로 판단하였다. 이들 사망자는 1920년대에 많이 발생하였는데, 1927년 華僑排斥事件 이후에는 중국인 무연고 사망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조선총독부와 중국측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게 된다.
그것은 사망자 처리 비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사망자가 발생하면 그의 국적을 확인하고 그의 주소, 이름과 직업 등을 조사하고 연고자를 찾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중국측에 그 비용을 청구하였다. 대개 인부들의 인건비와 간단한 부대비용으로 큰 금액은 아니었다. 금액의 크기보다 책임의 소재 때문에 그 비용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두고 양측간에 여러 차례 교섭이 오고가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 중국은 華商들에게 그 비용을 담담하게 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This essay is the analysis on the Chinese deceased without family in 1920s' Joseon and the study about the process of their treatment. The death of Chinese people without family in 1920s mostly occurred in the region that Chinese people liked to live. They used to reside mainly in the northern region or the central region of Korea like Gyeonggi-do Province and Seoul, where it was convenient for them to travel to China. Their jobs were various. Some were engaged in commerce, others in farming. And there were also wage-labourers.
When a death case occurred, the first thing to be done was to identify the nationality of the dead. Usually it was decided on the ground of the Chinese clothes of the dead or the possessions of the dead. The death case of the Chinese in Joseon frequently occurred in 1920s. Especially after overseas Chinese Rejection Incident in 1927, Joseon Government General and the Chinese authority in Joseon responded against each other very sensitively concerning the handling of the Chinese dead without family. The conflict between two sides was partly due to the expense for the treatment of the dead.
In general when a person was discovered dead, the Japanese officers checked the nationality, address, name and jobs, and then tried to find family or relatives. Then Joseon Government General claimed Chinese authority for the expense. The expense composed of labor cost and other small expenditure was not a large amount. The negotiation between two sides about which side would pay the expense used to go on mainly in the aspect of who would take charge of the case. In many cases this kind of accident was settled down, with overseas Chinese merchant forced to pay the expense.

KCI등재

9제정기 로마군 공성전에 관한 실증 연구

저자 : 배은숙 ( Bae Eun 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5-317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공화정 후기에서 4세기까지 총 124번의 공성전을 분석하여 포위전의 쇠퇴 가능성을 추론한 것이다. 공화정 후기 총 65번의 공성전을 분석하면 포위전만 한 전투는 21번(32.3%)이었다. 포위망 구축 후 공격한 14번(21.5%) 전투와 곧바로 공격에 들어간 25번(38.5%) 전투를 합하면 공격적인 전투는 39번(60%)이었다. 1-4세기 총 59번의 공성전 중에서 포위전만 한 것은 7번(11.9%)이었고,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든 공격적인 전투를 한 것은 45번(76.3%)이었다. 공격전을 펼친 것이 공화정 후기에는 60%, 제정기에는 76.3%를 차지한다는 것은 로마 공성전의 전술적 특징이 지속해서 공격전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포위전이 공화정 후기 32.3%에서 제정기 11.9%로 줄어들어 포위전의 쇠퇴를 주장할 수 있지만, 전장을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적인 서부와 유대,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가 적인 동부로 나누어보면 달라진다. 공화정 후기 서부 지역에서 행했던 총 33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16번(48.9%)에서 제정기 총 11번의 전투 중 5번(45.5%)으로 비율적으로 차이가 없다. 서부 지역에서는 포위전이 쇠퇴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동부 지역에서 행했던 공성전에서 공화정 후기 총 32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5번(15.6%)에서 제정기 총 48번의 공성전 중 포위전은 2번(4.2%)으로 현격히 감소했다. 이를 볼 때 동부 지역은 공화정 후기보다 제정기에 포위전이 쇠퇴하고, 공격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공성전을 할 줄 모르는 갈리아족과 게르만족, 로마군을 모방하여 공성 기술을 갖춘 유대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화정 후기와 제정기의 공성전이 동일한 공격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적에 따른 지역적 편차가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포위전 쇠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This study analyzes a total of 124 siege wars to infer the possibility of the decline of the siege warfare. When analyzing a total of 65 siege battles in the late republican period, 21 battles(32.3%) were just siege battles. When the 14 battles(21.5%) that attacked after establishing the siege network and the 25 battles(38.5%) that immediately started attacking were combined, the number of offensive battles was 39 battles(60%). Of the 59 siege battles between the 1st and 4th centuries, 7 battles(11.9%) were only siege battles, and 45 battles(76.3%) were the battles that either attacked after establishing a siege network or immediately entered into an attack. The fact that offensive battles took up 60%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76.3% of the imperial period indicates that the tactical characteristics of the siege of Rome continued to be directed toward offensive warfare.
Although the decline of the siege war can be argued as the siege war has been reduced from 32.3% in the late republican period to 11.9% in the imperial period, it is different when the battlefield is divided into the western part, where Gauls and Germanic enemies are enemies, and the east part, where Parthia and Sassanid Persia are enemies. Of the total 33 siege battles conducted in the western region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there were 16 (48.9%) siege battles and 5 (45.5%) out of 11 battles during the imperial period, so there is no difference in proportion. In the western region, the siege cannot be said to have declined. On the other hand, Of the 32 siege battles conducted in the eastern region of the late Republican Dynasty, siege battles were 5 battles(15.6%). Of the total 48 siege battles during the imperial period, siege battles took place 2 battles(4.2%). In view of this, siege warfare declined during the imperial period rather than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the eastern region tended to prefer offensive warfare. Therefore, although the siege battles of the late Republican period and the imperial period can be regarded as the same offensive battles, it is difficult to argue that the siege wars are in decline as there are regional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enemy.

KCI등재

10노스버릭 마녀사냥과 제임스 6세의 왕권신수설

저자 : 김중락 ( Kim Joongla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19-354 (36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연구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어떻게 1590-1년 노스버릭 마녀사냥을 통해 자신의 미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신성화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1590년 제임스 6세는 성년의 나이었지만 강력한 귀족들의 권력싸움과 종교적 갈등속에 어려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때에 발생한 노스버릭 마녀사건은 제임스에게 왕권강화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제임스는 마녀혐의자들에 대해 직접 심문에 참여하였고, 재판에 관여하면서 정적제거를 위한 진술을 확보하였다. 마녀혐의자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고, 국왕을 해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결혼을 방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법적인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임스 6세가 고문을 통해 얻은 자백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진술로 제임스는 정적인 보스웰 백작을 제거할 수 있었다.
1591년 재판 말기에 제임스는 Newes from Scotland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했는데 이 보고서는 왕권의 신성화를 꾀한 고도의 정치선전물이었다. 보고서는 악마가 스코틀랜드 왕은 “이 세상에서 그의 가장 큰 대적”이라고 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이 표현은 왕이 이 세상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Newes from Scotland에서 왕은 “신의 자녀” 또는 “신의 종”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은 신이 보호아래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왕은 신의 기름부은 자이고 신의 전능한 힘으로 보호아래 있음으로 악마와 마녀들의 음모를 이길 수 있었다. 제임스 6세는 1598년 Trew Law of Free Monarchies에서 자신의 왕권신수설을 피력했는데 이는 Newes from Scotland에서 시작된 왕권신성화의 논리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King James VI of Scotland strengthened his feeble monarchy and even sanctified his royal power through the North Berwick witch-hunt of 1590-1. In 1590, although King James VI had long reached the age of majority, his rule was far from stable amidst power struggles and religious conflicts among powerful nobles. James saw the North Berwick witch incident in 1590-1 as a right opportunity to strengthen his royal power. James directly took part in the interrogation and trials of the witch suspects and secured statements from those accused of witchcraft which helped him eliminate his political enemy. The witch suspects confessed that they had made a pact with the devil and tried to harm the king as well as hindered his marriage. In the absence of legal experts, the confessions that James VI obtained through torture were very likely to have been distorted. These statements allowed James to get rid of Earl of Boswell, his political opponent.
At the end of the trials in late 1591, James arranged to publish a report entitled Newes from Scotland, which was a highly political propaganda. The pamphlet claims that the devil defined the Scottish king as "the greatest enemy he hath in the world." Paradoxically, this expression could mean that the king is the closest person to God in the world as God is the opposite of the devil. In fact, in Newes from Scotland, the king was once described as a "child of God" or "servant of God". The king was also portrayed as being under divine protection. The king was the anointed by the God, and with God's almighty power, he was able to defeat the plots of the devil and witches. It may be said, the theory of the divine right of kingship was elaborated in the Trew Law of Free Monarchies in 1598, but it started from Newes from Scotland in 1591.

12
권호별 보기
같은 권호 다른 논문
| | | | 다운로드

KCI등재

1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저자 : 서호준 ( Seo¸ Ho-j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 (71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등장한 이래 다양한 학문영역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대응은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4차 산업혁명과 역사학간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빅데이터 기법을 어떻게 하면 역사학, 특히 한국 고대사 분야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바로 연구의 목적이라할 수 있다.
사실 역사학은 방대한 사료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랜 데이터과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상관성을 추구하는 빅데이터와 인과성에 대한 탐문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간에는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각은 빅데이터의 위상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으로 역사연구를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로서만 빅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역사연구는 한층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빅데이터와 한국 고대사 연구간의 접목을 위해 해방 이후 2010년대까지 약75년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연구경향을 크게 7개 시기로 구분하여 텍스트 마이닝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시도하였다. 빅데이터 기반 분석결과를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에 관한 기존의 논의결과와 비교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한국 고대사 연구경향 분석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논저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최근으로 올수록 그 정확성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것이다. 둘째, 특정 국가사의 활성화 정도를 직관적으로 논의하는 경우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보충적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은 기본적으로 키워드(노드) 분석을 위한 것이므로 문장단위 분석이나 고차원적인 개념분석에는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사실 사료에 대한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가 요망되는 고대사 연구를 계량적으로만 분석한다면 오히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게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빅데이터 기반 연구는 이와 같은 단순 계량적 접근을 넘어 사료나 연구경향 논문들을 대상으로 한 키워드 도출을 통해 가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네트워크내 키워드들의 위상과 영향력 그들 상호간의 관련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실증과정에서 적지 않은 한계를 노출하긴 하였지만, 본 연구가 제시한 분석의 프레임 자체는 양질의 후속연구를 태동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KCI등재

2고려 고승비 음기의 문도 검토 -경북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한기문 ( Han¸ Ki-mo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105 (33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고려 고승의 문도 형성과 성격을 이해하고자 고승비 음기를 살폈다. 선봉사대각국사비 음기, 운문사원응국사비 음기, 중수용문사기 음기, 인각사보각국존비 음기 등 4 사례의 문도 직명을 살펴본 결과, 다양한 직명의 문도를 확인하였고, 크게 법손[사법제자, 부법제덕], 집사제자, 세속제자[수법유경사대부] 등의 부류가 있었다.
다양한 직명의 유래를 추적한 바, 고승의 강회, 담선 활동 및 승정제도, 승록사, 결사 등과 연관하여 그 고승의 문도가 형성되었다. 문도 중에서도 법손주지가 수법제자의 학풍을 유지하면서 문도 형성에서 중심이었다. 집사제자 문도 형성은 고승의 승정 관여와 연관되었다. 승정제도가 성립된 靖宗代를 기점으로 이러한 문도의 분열 이동이 많아지면서 사원 소속이 명시되는 등 종파분쟁의 조짐도 보였다. 승단이 확장되면서 결사 운동과 관련하여 세속제자도 문도로 기재되었다.

KCI등재

3고려 의종대 왕제(王弟) 대녕후(大寧侯) 사건

저자 : 장상주 ( Jang¸ Sang-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7-136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大寧侯 사건은 의종대 정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의종의 모후인 공예태후는 차자인 대령후를 지지하여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의종은 이러한 관계로 태자 시절부터 대령후와 왕위 계승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의종은 인종의 지지와 정습명의 보좌로 왕위에 올랐다. 의종은 즉위 초부터 정안 임씨와 대령후를 견제하였다. 대령후의 견제는 즉위 초인 동왕 5년부터 재위 후반기인 동왕 21년 '流矢의 變'으로 이어졌다.
의종의 측근인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와 그 족당인 정서·최유청·임극정·이작승 등을 참소하여 유배와 좌천시켰다. 이어 정함과 김존중은 대령후의 세력 기반을 점차적으로 와해시켰다. 그리고 의종은 다른 동모제인 익양후(명종)와 평량후(신종)도 의심하였다. 그만큼 王弟는 의종대 국정에 적지 않은 파장을 끼쳤다.

KCI등재

4읍지(邑誌)와 방목(榜目), 호적(戶籍)을 통해 본 대구 출신 급제자들

저자 : 한상우 ( Han¸ Sangwoo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74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조선시대 대구에서는 몇 명의 문과급제자들이 배출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조선시대 이후 편찬된 대구의 邑誌, 市史, 榜目과 대구부호적대장 등을 활용하여 대구 출신 급제자들을 확인하였다. 읍지와 시사, 방목을 비교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대구 출신 급제자들은 총 79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료들마다 급제자들의 명단과 정보가 상이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대구에 거주한 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1681년부터 1876년까지에 걸쳐 남아 있는 대구의 호적에서 17세기 후반 이후의 급제자들과 그 가족들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읍지와 방목 속 대구 급제자들이 모두 대구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며, 반대로 실제로 대구에 거주했더라도 읍지에서 누락된 경우가 있었다. 즉, 대구 출신 급제자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실제 대구 거주 여부뿐 아니라 다면적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구 출신 급제자 확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그들이 잦은 이주였다.

KCI등재

517세기 전반 호패법 시행 과정 연구

저자 : 설현지 ( Seol Hyeonji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12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조선사회는 임진왜란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 전반의 변화를 논의하였다. 본고에서는 광해군대와 인조대 호패법의 논의와 시행, 중단 과정을 살폈다. 호패법은 16세 이상의 남성이면 모두 호패를 차도록 하는 법제였다. 이는 전쟁으로 유실된 백성들의 거주지와 국역을 다시 정해주고, 국가의 개별적 백성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법이었다. 호패법은 조선 초부터 시행하고자 한 법이었지만, 置廢를 반복하다가 숙종대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되었다.
호패법은 고려말기에 도입된 제도로 시행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호패법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인조대까지 이어졌다. 정묘호란 이후 호패법은 중단되었지만, 인조대 호패법 시행으로 정해진 각종 규칙들은 『호패사목』으로 남아서 숙종대 호패법 시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선조대 후반부터 인조대까지 호패법의 시행과 중단, 그 사이에 일어난 다양한 논의를 살핀 후, 『호패사목』을 통해서 호패법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파악하였다.
호패법은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용이한 법이었기에, 조정에서는 호패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호패법으로 인해 새롭게 군역의 의무가 생겼기 때문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유생들도 敎生考講에 탈락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기 때문에 반발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시행의 찬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지만, 부족한 군역을 채우기 위해서는 호패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일부 백성과 유생들의 반발에도 호패법은 필요한 제도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호패법의 시행을 위해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호패사목』이다. 『호패사목』의 내용은 오가작통법, 단자식, 운영 규정과 특수민의 호패에 관한 것들이다. 단자식을 봤을 때 조선 정부는 관료-관료 예비군-군역 대상자로 분류해 백성들을 파악했음을 확인하였다. 『호패사목』을 통해 조선 정부가 호패법으로 군역을 보충하고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임진왜란 후 무너진 국가 질서와 세금 제도를 회복하기 위해 시행하고자 한 제도였다.

KCI등재

6병자호란 직후 청사출래(淸使出來)와 정치외교적 의의

저자 : 리샤오칭 ( Li¸ Xiaoqing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3-256 (4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 병자호란 직후 조선으로 파견된 청사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청사의 파견 목적과 한양에서의 교섭 활동 및 조선에서의 청사 접대를 살펴봄으로써 병자호란 직후 청의 대조선사행의 정치적·외교적 의미를 규명해보았다.
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1637년 4월과 9월의 사행을 통해 청의 징병 요구 중지를 청하였다. 청은 1637년 10월에 조선에 인조 책봉을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奏請한 것이 아니라 청의 자의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이때 청사는 향화인·한인·주회인 쇄환 문제를 중점으로 조선과 교섭하였다. 청의 대조선 사행에서 쇄환 문제는 중요한 교섭 사안이었다. 조선의 경우, 징병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청에게는 조선과의 군신관계 유지와 이를 통해 청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의 주청 없이 이루어진 인조 책봉은 조청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실적으로 성립시켰음을 의미한다. 청의 관심 문제는 1639년 11월 삼전도비 감독으로 온 청사의 출래에도 반영된다.
조선에서 인질로 잡혀간 왕세자의 귀국 또한 징병 문제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1637년 9월의 대청사행에 조선은 왕세자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청에게 거절 당하였다. 1639년 2월에 조선에서 왕비와 왕세자의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세자의 귀국을 위한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인조의 병세 악화로 조선은 청에게 왕세자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청의 입장에서 인조 책봉의 연장선에서 왕비, 왕세자 책봉을 시행한 것은 明制를 모방해서 조청의 계서적인 군신관계를 공고할 수 있는 절차였다. 청이 조선보다 먼저 왕세자의 책봉 요청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왕세자의 귀국을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축약조가 맺어진 후, 조선에서는 청사를 접대하기 위해서 청사 접대 기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唐差에 대한 접대방식을 원용하고 청사를 접대하려고 하였다가 명사 접대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였다. 1637년 10월 인조 책봉으로 온 청사에 대한 영접은 명사의 접대규정에 따라 청사 접대를 정례화하기 시작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 1639년 9월의 滿達爾漢 일행에 대한 접대는 앞의 청사 접대와 차이가 있었다. 만대르한은 병문안하러 오는 差官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만대르한을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차관으로 보고 있었지만, 접대도감이 아닌 격이 가장 낮은 접대소를 설치하여 만대르한을 접대하였다. 이는 명 황제의 명을 받들어온 欽差官의 경우 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묘호란 이후의 金差 접대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청에 대한 반감이 접대방식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39년 9월의 만대르한과 11월의 마푸타 일행에 대한 영접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인조가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2차례 청사 일행이 왔을 때 인조는 교영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9월의 청사는 차관이기 때문에 의례 규정상에 인조는 교영할 필요가 없었지만, 11월 마푸타 일행의 경우 인조는 마땅히 교외에 나가 영접해야 하였다. 그러나 1639년 11월부터 인조가 자신의 병환을 이유로 교영에 친림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은 국왕이 교영을 시행하지 않는 경우를 숙종대의 『通文館志』에 기록하여 하나의 관례로 만들었다.

KCI등재

7영조 초기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적 동향

저자 : 이재현 ( Lee Jae-hyeon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7-296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英祖 초기에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을 규명한 것이다. 시기적 범위는 영조 즉위 이후부터 대략 辛酉大訓을 전후한 시기까지이며, 지역적 범위는 安東을 중심으로 하되 禮安·英陽·寧海 등 안동 주변 지역 또한 그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역적 범위는 곧 李玄逸 門人 집단 내 핵심인물들의 거주 범위와 일치한다.
영조는 즉위 이후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신유대훈으로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이 설립되기까지 乙巳換局, 丁未換局, 戊申亂, 己酉處分, 十九下敎, 混沌開闢, 庚申處分 등 많은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영남 남인의 경우 숙종 대 甲戌換局 이후로 실각하여 재기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영조 초기 정국에서는 중앙 정계에서의 역할이 미미하였다. 더구나 무신란에 연루되면서 지역 전체가 '逆鄕'으로 규정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통상적으로 영남 남인의 정치적 명분은 무신란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영조의 배려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남 남인 인사의 등용이 있었다. 김성탁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안동 지역 남인들은 이현일의 문인집단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현일의 伸冤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나 '己巳年의 餘黨'으로 낙인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1737년(영조 13)에 김성탁이 이현일을 伸救하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 유배 간 사건은 안동 지역 남인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성탁 사건의 파급으로 인해 안동 지역 내에서는 김상헌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南·老 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안동 지역 내에서 열세에 처했던 노론 측은 官의 지원 아래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으나, 남인들이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저지하여 서원 건립이 좌절되었다. 영조는 이 사건에서 남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영조의 태도는 黨論 위에서 君師로 군림하려는 영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의 의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1740년대가 되면 안동 지역 남인의 정치활동은 침체되었고, 이것은 곧 영남 남인의 정치활동의 침체를 의미한다.

KCI등재

8김기철의 통일운동 역정과 생애

저자 : 김현주 ( Kim¸ Hyunju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7-330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195,60년대 진보당과 통일사회당 등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며 일생을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김기철이다. 그는 해방 직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우익계열 단체를 통해 정치 사회운동을 시작했으나, 북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1946년 3월 월남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 민족자주연맹에 몸담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김기철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출마 때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1955년 조봉암과 서상일이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혁신정당을 창당할 때 김기철은 창당 추진을 위한 핵심인물로 활약했고,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진보당 창당 후에는 통일문제연구위원장으로서 남북문제의 국제적 해결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통일방안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안은 1958년 진보당사건 당시 검찰이 진보당의 이적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되었고, 당국이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조봉암의 사형으로 진보당 관계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일시 정치 사회운동의 장을 떠났던 김기철은 4월혁명으로 혁신계의 활동공간과 기회가 확보되자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혁신세력의 이합집산 와중에 사회대중당(창당준비위원회), 통일사회당을 거치면서 역시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 와중에 그가 구상했던 통일안을 좀 더 구체화한 중립화통일방안을 내세워 다양한 공론의 장에서 그의 주장을 펼쳤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사정부가 실시한 혁명재판에서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김기철은 1963년 3공화국 출범 뒤 단행된 특사로 석방되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한 후에도 당 내에서 통일문제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거의 전 생애를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하며 연구하고 활동했던 김기철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적 사회건설이었다.

KCI등재

9천진(天津) 죄범습예소(罪犯習藝所)의 건설과 '근대' 감옥의 탄생

저자 : 조병식 ( Cho¸ Byungsi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1-370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에서는 光緖30년(1904)에 건설된 중국 최초의 신식 감옥인 天津罪犯習藝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죄범습예소를 전통 감옥에서 근대 감옥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존재로 이해하였지만, 천진의 경우 '근대' 감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저명한 감옥학자였던 오가와 시게지로오(小河滋次郞)의 고대/'근대' 감옥을 판별하는 3가지 기준을 차용하였다. 첫 번째 기준인 수감 대상에 있어서 천진 죄범습예소 건립 당초 기결수와 부랑자들을 함께 수감하였는데, 성격이 상이한 집단을 한 공간에 수감한다는 점에서 전통 감옥의 雜居와 맞닿아있었다. 그러나 光緖32년(1906) 遊民習藝所가 설립되어 부랑자 수용 시설이 별도로 마련되면서 죄범습예소는 기결수만을 감금하는 공간이 되었다. 두 번째 기준인 감옥의 목적과 관련해서 천진죄범습예소는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는 전통 감옥의 목적에서 탈피하고 수감자의 갱생과 출소 후의 생계 도모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생과 방범에 중점을 둔 감옥 건축물이 건조되었고, 직무에 따라 관리 인원의 직위를 세분화하였다. 그리고 죄범습예소 내 총 6곳의 공장을 설립하여 수감자들이 수공업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기준인 경비 조달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州縣에 할당한 수감자 비용은 죄범습예소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비용이었지만 연체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 때문에 죄범습예소에서는 수감자들의 역량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추진하였다. 죄범습예소의 공장화에 대한 直隷總督 袁世凱의 경고가 있었으나 죄범습예소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천진 죄범습예소는 오가와 시게지로오의 3가지 기준 가운데 2가지를 충족하였다. 그리고 경비 조달의 문제는 천진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고, '근대' 감옥을 표방하여 설립된 模範監獄 또한 동일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천진 죄범습예소는 '근대' 감옥으로의 과도 기적 존재라기보다는 '근대' 감옥의 직접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KCI등재

10고대 성곽 공방전에 관한 군사 공학적 전략론 분석

저자 : 배은숙 ( Bae¸ Eun-suk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간행물 : 대구사학 144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1-400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프론티누스와 베게티우스의 글을 군사 공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했다. 프론티누스는 군지휘관으로서의 실제 경험이 있으므로, 베게티우스는 고위 행정가로서의 경험이 있으므로 이들의 글이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거론하는 성곽 공방전을 중심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전략과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전략을 비교, 분석했다.
프론티누스의 글은 적을 공격하는 공성전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공성전 중에서도 포위전에 관한 전략을 상세히 서술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포위전은 아군에게도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은 아군에게 상당한 육체적 노동을 강요하고, 적을 경계해야 하는 심리적인 긴장도 상당하다. 또 그가 활동하던 1세기에 로마군은 포위전만 한 것이 없고, 공격전 위주로 전쟁했다. 따라서 프론티누스가 전투 경험을 가진 군지휘관이어서 실질적인 전략을 서술했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그의 글은 당대의 전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베게티우스의 글에는 공격적인 전략에 관한 내용이 상당수 있다. 4세기의 전투 사례들을 볼 때 포위망을 구축한 후 공격하든, 곧바로 공격하든 공격전을 펼친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공격전을 강조한 당시의 상황이 베게티우스의 글에서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의 수성전 전략도 전략의 현실성과 유익성 면에서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빈도를 볼 때 그의 수성전 전략은 그렇게 활용 가치가 높은 전략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게티우스 글의 유익성은 로마군이 가장 빈번하게 하는 공격전에서 두드러진다.

12
주제별 간행물
간행물명 최신권호

KCI등재

석당논총
83권 0호

KCI등재

동양학
88권 0호

KCI등재

동양문화연구
36권 0호

KCI등재

중국학논총
76권 0호

KCI등재

이화사학연구
64권 0호

KCI후보

문물연구
41권 0호

KCI등재

중국연구
91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8권 0호

KCI등재

중국지식네트워크
19권 0호

KCI등재

사림(성대사림)
80권 0호

KCI등재

몽골학
69권 0호

KCI등재

동양예술
55권 0호

KCI등재

사총
106권 0호

KCI등재

대구사학
147권 0호

KCI등재

강원사학
38권 0호

KCI등재

동아시아문화연구
89권 0호

KCI등재

명청사연구
57권 0호

KCI등재

동양학
87권 0호

KCI등재

일본학
56권 0호

KCI등재

중국사연구
137권 0호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발행기관 최신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