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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고성 내산리 소가야묘 팔찌에 대한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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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내산리 소가야묘 팔찌에 대한 검토

A Study on the Bracelet Excavated from Naesan-ri Tombs in Goseong

이한상 ( Lee Hansang )
  •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 한국학논총 56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91-117(27pages)
한국학논총

DOI

10.25232/ku.2021.56.91


목차

1. 머리말
2. 팔찌의 출토 맥락
3. 팔찌의 부장방식 비교
4. 팔찌의 형태 비교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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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소가야의 중심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고성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 관하여 살펴본 것이다. 소가야는 5세기 이후 고고학적 실체가 뚜렷하지만 소가야양식 토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을 소가야적인 고고자료로 볼 수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금속장신구에 소가야적 특색이 발현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내산리 소가야묘군의 경우 7기의 유구에서 11점의 팔찌가 출토되었다. 34호분 주실에서 4점, 60호분에서 2점, 여타 무덤에서는 1점씩 출토되었다. 금팔찌는 없고 은팔찌가 2점, 동팔찌가 9점이다. 대부분 망자의 좌우 팔목에 착장시켜 매장한 양상이다. 팔찌의 부장에는 다양한 방식이 혼재되어 있어 소가야만의 특색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는 문양의 유무나 형태에 따라 3류로 나눌 수 있다. 문양이 없는 것이 2점, 각목문을 갖춘 것이 7점, 돌기형 장식을 갖춘 것이 2점이다. 각목문 팔찌는 신라의 그것과 형태에서 차이가 있어 백제-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 다만 제작지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며 일부는 현지산일 가능성도 있다. 팔찌의 상한 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설정할 수 있다. 돌기가 장식된 팔찌는 신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으며 신라로부터의 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 6세기 전반의 늦은 단계나 6세기 중엽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서는 다양성이 보인다. 이는 다양한 외래토기가 함께 묻히는 발굴 양상과도 맥이 닿는다. 이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주변국과 다양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수행하며 생활하던 소가야인들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whether bracelets excavated from the Naesan-ri Tombs have characteristics of Sogaya(小加耶). Sogaya is known to have a unique culture among Gaya countries.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examine whether there is a Sogaya-style in the bracelets as in the pottery.
Naesan-ri Tombs are located on the beach of Goseong, Gyeongsangnam-do, and have been excavated several times. In the meantime, 11 bracelets have been excavated from seven tombs. In particular, four were excavated from Tomb No.34. So far, no gold bracelets have been discovered, but 2 silver bracelets and 9 bronze bracelets have been discovered. Most of them are worn on the left and right wrist of the person buried in the tomb. In Naesan-ri Tombs, there are various ways to bury bracelets in tombs, and the characteristics of Sogaya are not identified.
Bracelets excavated from the Naesan-ri Tombs can be divided into three types based on patterns. There are two without patterns, seven with line patterns, and two with protrusions. As the bracelets with a line pattern excavated from these tombs have a difference in shape from that of Silla, it can be compared to Baekje or Daegaya(大加耶) bracelets. However, it is difficult to specify the production site, and some of them seem to have been made in Sogaya.
The bracelets excavated from these tombs were made after the late 5th century. Among them, the bracelet which is decorated with protrusions seems to have been made in the 6th century.
The variety of bracelets excavated from Naesan-ri Tombs reflects the openness of Sogaya culture. Sogaya dominated the hub of maritime transportation and interacted with various countries. The bracelet excavated from Naesan-ri tombs symbolizes the politics and culture of Sogaya.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76641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225-9977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78-2022
  • :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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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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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가야 룡문(龍文)의 계보와 전개

저자 : 이한상 ( Lee Hansa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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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가야의 유물에 표현된 용문을 모아 보고 그것의 기원과 변천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이 논문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대가야의 용문이 어디서 기원하였고, 또 언제쯤 대가야 장인들이 용문을 물품 제작에 활용하였는지, 그리고 대가야의 용문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이다.
대가야의 용문은 장식대도와 성시구에 표현되었다. 장식대도의 용문은 주로 철을 주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용문 가운데 다수는 2마리의 용이 조합을 이루어 표현된다. 용 2마리가 마주보며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목을 교차하는 모습이다. 대도의 고리 안에 용두 장식이 끼워져 있는 사례도 있다. 성시구에 표현된 용문은 숫자가 많고 용의 자세가 대가야적 특색을 갖추었다.
대가야에서 용문은 5세기 중엽 경 등장한다. 합천 옥전 35호분 출토 대도에 표현된 용문이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제작기법에 주목해보면, 이 대도는 백제에서 제작되어 대가야로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5세기 후반에 조성된 합천 옥전 M3호분에서는 여러 점의 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4점에 용문이 표현되어 있다. 3점은 대가야에서 제작된 것이고 1점은 백제에서 제작된 것 같다. 대도에 표현된 용문의 전체적인 형태는 비슷하지만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에서는 차이가 있다.
6세기 전반의 대가야 대도에 표현된 용문은 5세기 후반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약간의 변화가 확인된다. 변화의 방향은 세부 표현이 간략해지는 경향이다. 또한 6세기 전반이 되면 용문은 대도 이외의 공예품에도 표현된다.
용문을 갖춘 대가야의 대도는 5세기 후반 경 이래 주변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신라로는 완제품이 전해졌고 아라가야와 왜로는 도안과 제작기술이 전해졌다.


This paper collects the dragon patterns expressed in the relics of Daegaya and examines its origin and transformation. The main focus of this paper is on where Daegaya's dragon pattern originated, when Daegaya craftsmen used it to produce goods, and how Daegaya's dragon pattern changed.
Daegaya's dragon pattern is expressed in the adorned swords and metal fittings for quivers. The dragon pattern of a sword was mainly expressed by casting iron. Many of the dragon patterns are expressed in a set of two dragons. Two dragons pass by facing each other or cross the neck. In some cases, dragon-shaped decorations are inserted into the ring of a sword. The dragon pattern expressed in metal fittings for quivers is numerous and a dragon's posture is characteristic of Daegaya.
In Daegaya, the dragon pattern appears around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The dragon pattern expressed on the sword excavated from Hapcheon Okjeon No. 35 is the earliest. Paying attention to the production techniques, it is possible that this sword was made in Baekje and was handed down to Daegaya.
Several swords were excavated from Okjeon Tomb No. M3 built in the late 5th century. Among them, a dragon pattern is expressed on four swords. Three of them were made in Daegaya, and one seems to have been made in Baekje. The overall shape of the dragon pattern expressed on the swords is similar, but there is a difference in the technique of expressing the pattern.
The dragon pattern expressed on the Daegaya sword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is similar to that of the second half of the 5th century, but some changes are confirmed. It tends to be simplified in detail. In addi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dragon patterns are expressed in crafts as well as swords.
The dragon pattern of Daegaya has also spread to neighboring countries since the late 5th century. Finished products were handed down to Silla, and patterns and production technologies were handed down to Ara Gaya an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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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라 준영랑고(俊永郞考)

저자 : 여성구 ( Yeo Sung-gu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7-6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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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선의 하나로 알고 있는 영랑 외에도 여러 영랑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영랑을 밝혔을 때, 신라4선에 대한 이해도 분명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 백률사조에는 '世謂'의 준영랑과 「별전」의 영랑 등 2명의 영랑이 등장한다. 준영랑은 연구자들이 가장 주목했던 영랑이었다. 그러므로 준영랑=(별전)영랑, 준영랑=(戌年)영랑, 준영랑=(4선)영랑 등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 왔다. 이에 본고에서 (별전)영랑과 준영랑을 밝혀보면서 기존의 견해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별전)영랑은 그의 낭도 외에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언급한 「별전」의 용례를 분석해 「별전」의 내용을 유추하였다. 「별전」은 일연이 수록하고자 했다가 편집 과정에서 삭제한 자료일 수 있음을 추론하였다. 그리고 진성여왕대 화랑 효종랑과 효녀 지은 설화를 참고해, (별전)영랑전에는 불교 관련 기사가 없었고, 영랑의 선행이나 낭도들과의 우애 등에 초점을 맞춘 내용일 것으로 보았다.
준영랑은 안상의 出自에 대한 두 가지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부례랑 설화와 '世謂'의 두 기록을 取捨하지 않고, 부합할 수 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 진평왕대 혜숙이 호세랑과 구참공 등 두 명의 화랑을 모신 사례처럼 안상 역시 준영랑과 부례랑을 모셨다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천전리서석에 보이는 大玄郞이 부례랑의 父로서 호세랑과 연관되고 있음을 유추하였다. 그 결과 부례랑과 준영랑은 기존의 견해처럼 효소왕대의 화랑이 아니고, 활동 시기를 달리한 화랑이었음을 밝혔다. 안상은 문무왕대에 준영랑의 낭도였고, 이후 출가 후 승려 낭도로서 효소왕대의 부례랑을 섬겼다고 할 수 있다.


In addition to the Yeongrang of the Silla 4th Seon(四仙), records of various Yeongrang are reported. Therefore, when each of the youngrang is revealed, it is thought that the understanding of Silla 4th Seon(四仙) will become clear.
Two youngrang appear in the BaekryulSa of Samguk Yusa. One is Junyoungrang(俊永郞) of 'privately transmitted(世謂)' and the other is the Youngrang of 'Byeoljeon(別傳)'. Junyoungrang was the most noted youngrang by researchers. Therefore, it has presented various views such as Junyoungrang=(Byeoljeon) Yeongrang, Junyoungrang=(Sulneon) Yeongrang, Junyoungrang= (4th Seon) Yeongrang. In this study, I tried to supplement the existing views by looking at the (Byeoljeon) Youngrang and Junyoungrang.
We can only know his rangdo about (Byeoljeon)Youngrang. However, the use of Byeoljeon was analyzed and its contents were inferred. Ilyeon wanted to include the Byeoljeon in SamgukYusa, but I thought it was deleted during the editing process. And I refer to the story of Hyojongrang and Jieun of Jinseong Queen.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re was no Buddhist article in the (Byeoljeon) Yeongrangjeon(永郞傳). It was also thought to be focused on the good deeds of Youngrang and friendship with the rangdo.
The Junyoungrang was examined through two data of Ansang. I tried to interpret both of the records of Buryeorang(夫禮郞) tales and 'privately transmitted' without selecting the two records.
During the reign of King Jinpyeong, Hyesook(惠宿) served two hwarang, Joserang(好世郞) and Guchamgong(瞿旵公), and like that case, Ansang also interpreted that he served a Junyeongrang and Buryeorang. And it was inferred that Daehyunrang(大玄郞), which is seen in the Seoseok of Cheonjeonri(川前里), is the father of Buryeorang and is related to Joserang. As a result, Buryeorang and Junyoungrang were not the hwarang of the age of HyoSo King as in the existing view, but the hwarang with different periods of activity.
Ansang was the rangdo of Junyeongrang during the reign of King Munmu. Then, after he became a monk, he served Buryeorang as a monk rangdo of the age of HyoSo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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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초기 사부(賜賻)·사시(賜諡)·사제의례(賜祭儀禮)와 명례(明禮)의 영향

저자 : 윤승희 ( Yun Seunghee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9-104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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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서는 조선 초기 賜賻·賜諡·賜祭儀禮의 성립과 그 과정에서 발견된 明禮의 영향 및 조선의 독자적인 정비내용을 검토하였다. 그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조선에서는 명으로부터 받은 의주를 준용하여 사부·사시·사제의주를 성립하였다. 태종 8년(1408) 태조가 사망하자, 영락제는 시호·부물·제문을 보냄과 동시에 명 국내의 王·公·大臣을 대상으로 제정한 관련 의주를 조선에 전달하였다. 조선에서는 명에서 보낸 의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의례 참여자의 자리 및 의물의 위치가 모두 동일하였고, 전반적인 의례 절차도 완전히 같았다.
둘째, 조선에서는 명 의주에서 조선의 상황에 맞지 않는 구절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절차를 삽입하였다. 사부 명령이 칙서로 전해질 경우 조선 迎勅의례의 정비결과에 따라 사신이 문서를 선독하지 않거나 사시·사제의례 당일에 가장 먼저 국왕이 혼전에서 哭禮를 행하는 등의 절차를 통해 확인된다. 이는 이들 의례가 조선 땅에서 조선의 대행왕을 위해 거행하는 의례임을 분명히 하는 작업이었다.
셋째, 五禮儀의 「사부의」·「사시의」·「사제의」는 의례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편제되었다. 실제 조선 초기 사부·사시·사제의례는 先王의 國喪을 우선하여 사제의례, 사부의례, 사시의례의 순으로 거행되거나 날을 달리하여 길일을 택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사부·사시·사제의례가 같은 날 동시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오례의에 수록된 국가의례는 현존하는 질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정치적인 행위로, 관례가 아닌 정형화된 원칙이 담겨야 했다. 이에 오례의에는 嗣王의 권위를 중시하여 사부의례가 가장 우선에 배치되고, 국왕의 역할이 적은 사제의례가 마지막에 편제되었다.


There are rites in which a Ming Emperor gives sympathy gifts to the bereaved king(賜賻儀禮), the posthumous name to the late king(賜諡儀禮) and the Funeral Oration to a funeral(賜祭儀禮) in Joseon's funeral ceremonies(凶禮). The results of reviewing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se rites in the early Joseon are as follows.
First, the Ming sent related procedures(儀注) so that Joseon could perform these rites, and Joseon actively accepted them. The positions of the rite participants and the positions of the objects were all the same, and the overall rite procedures were completely the same. Second, among the procedures sent by the Ming, Joseon revised phrases that did not fit the situation of Joseon or inserted new phrases. This was a work to clarify that these rites were held for the king of Joseon in the land of Joseon. Finally, These rites contained in National Five Rites(五禮儀) did not follow customs and were thoroughly organized according to the political purpose of the rite. Accordingly, the rite of revealing the authority of the king by receiving sympathy gifts from a Ming Emperor was placed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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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세기 조선의 승려(僧侶) 오복도(五服圖) 등장과 그 특징 - 『가례(家禮)』 「본종오복지도(本宗五服之圖)」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진우 ( Kim Jin-w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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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戰亂을 겪은 17세기 조선 사회에 등장한 승려 오복도의 특징과 그 의의를 고찰하였다. 17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전후 조정과 사족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책을 제시하였다. 예의 설행을 통한 질서 유지는 그 시책들 가운데 하나였다. 예(禮) 중에서도 상례에는 한 사회의 기본 구조라 할 수 있는 종법(宗法)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 종법을 잘 보여주는 상례 절차가 상복이다.
친족들은 그들 간의 친소 관계에 따라 상복을 구분하여 입는다. 혈연의 친소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무거운 상복을 입고 복상 기간도 길다. 한편 혈연의 친소가 먼 사람일수록 가벼운 상복을 입으며 복상 기간도 짧다. 이렇게 형성된 친족 관계를 원형으로 도식화한 것이 오복도이다. 오복도에 구현된 친족 관계는 종법에 근간하는 친족 제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에 등장한 불교 상례서(『석문가례초』, 『석문상의초』)는 세속의 인연 가운데 부모에 대한 정과 그들을 위한 예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저서이다. 두 불교 상례서 가운데 승려 오복도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크게 오복도와 승오복도로 구분된다. 두 유형의 승려 오복도는 17세기 조선에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이들을 유교 상례의 규정인 『가례』의 오복도와 비교한 결과, 전자는 불완전하지만 『가례』 「본종오복지도」에 등장하는 친족용어를 구현하였다. 후자는 일부 직계친과 방계친에 대한 승려의 복상 기간을 도식화하여 승려가 직계친에 대해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로서 그들에 대한 정과 예를 다하였지만, 방계친은 혈연적으로 가까운 친족들에게만 최소한의 추모와 복상 기간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향이 가지는 의의는 첫 번째, 승려는 자신과 관련된 세속의 인연을 오복도에 넣어 이들에 대한 친족 관계를 형성 또는 유지하여 조선 사회에 적응하려 하였다. 이것은 벽암각성의 서문처럼 이와 머리털을 지닌 사람으로 부모의 낳아주고 길러준 정(情)과 그들에 대한 예를 끊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하였다. 두 번째, 승려 오복도의 등장은 戰後 17세기 조선 사족이 상례와 종법을 사회에 정착시키려는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여 불교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적응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 불교의 이러한 노력은 사족이 조선 후기에 분암을 문중의 재실로 활용하여 이를 수호하기 위해 승려들을 동원하거나 사찰 경제가 침체된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This study considers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five-garment diagram of the monk that appeared in Joseon society in the 17th century after the war. In Joseon society in the 17th century, many policies were proposed to maintain post-war coordination and social order. Among them, maintaining order through Li was one of the policies. In particular, the mourning ritual is well is inherent in lineage system and among the mourning ritual, mourning clothes is well shown lineage system.
Kinship wear mourning clothes separately according to their degree of intimacy relation. Five-garment diagram is a schematic diagram of the kinship formed in this way. The kinship relationship embodied in Five-garment diagram can be said to be the epitome of the kinship system based on lineage system.
Buddhist funeral books(Seokmungaryecho, Seokmunsanguicho), which appeared in the 17th century, are the book that appeared to express affection for parents and Li for them. Among two Buddhist funeral books, five-garment diagram of the monk is largely divided into five-garment diagram and five-garment diagram of the monk. The two types of five-garment diagram of the monk did not exist before in the 17th century Joseon.
The significance of this trend is three things. First, the monk tried to adapt to Joseon society by maintaining ties with kinship. Second, the appearance of five-garment diagram of the monk can be interpreted as Buddhism's attempt to adapt in their own way in line with the movement of gentry who settles mourning ritual and lineage system in the 17th century society. Third, this effort of Buddhism can be seen as a result of the situation that the economy of Buddhist temple was in a s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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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10년대 사형 순국한 의병 연구 -『조선총독부관보』 '사형집행'조를 중심으로-

저자 : 전병무 ( Jeon Byung-m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17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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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총독부관보』(1910~1917년)의 '사형집행' 기사를 정리하여 1910년대 항일의병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 제시한 것이다. 우선 이 시기 의병관련 사형수를 약 225명으로 파악하였다. 이들의 사형집행 장소는 대구감옥 114명(51%), 평양감옥 66명(29%), 경성감옥(서대문감옥) 45명(2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대구감옥에서 의병 사형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1908년 이후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삼남지방으로 이전하여, 이 지역의 의병이 전국적으로 가장 왕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출신 지역은 경상 53명, 전라 52명, 황해 29명, 평안 28명, 강원 19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의병 항쟁의 중심지와 이에 대한 일제의 진압 작전 지역이 출신 지역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의병관련 사형수 약 225명을 관련 자료와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공적조서> 등을 비교, 대조하여 3그룹으로 분류하였다. 즉 1)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어 공인된 의병을 A그룹(51명), 2) 비독립유공자이지만 확실한 자료가 있는 의병을 B그룹(34명), 3) 비독립유공자로 『조선총독부관보』에만 있는 의병을 C그룹(140명)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B그룹의 경우는, 의병으로 판단한 관련 자료를 제시하여, 이들이 의병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 가운데 평남 일대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박운혁과 경남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했던 의병장 안범성을 찾아낸 것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B그룹과 C그룹의 의병은 지금까지 제시된 바 없는 것으로, 추가 자료 발굴과 검증 단계를 거친다면 기존의 의병 판결문 연구가 가졌던 수량적 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이 시기의 의병사 연구에 주요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This thesis is to discover and present new data on the anti-Japanese loyal soldiers in the 1910s by organizing the execution articles of the Chosen Governor's Office Bulletin(1910~1917).
First, the number of loyal soldiers-related death sentences at that time is estimated to be about 225. The places where they were executed were 114(51%) in Daegu Prison, 66(29%) in Pyongyang Prison, and 45(20%) in Gyeongseong Prison(Seodaemun Prison). The reason why the number of loyal soldiers death-row convict was the highest in Daegu prison was that the center of loyal soldiers since 1908 was in the Samnam[三南] region, including Jeolla-do, and the jurisdictional reexamination court was located in Daegu. The areas of origin of loyal soldiers sentenced to death were 53 in Gyeongsang, 52 in Jeolla, 29 in the Hwanghae, 28 in Pyeongan, and 19 in Gangwon. It can be seen that the center of the loyal soldiers conflict and the area of the Japanese Empire's suppression operation are almost the same as the birthplace of the loyal soldiers.
The 225 loyal soldiers sentenced to deaths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groups as follows by comparing and contrasting related data with the official records of independent meritors. Group A is loyal soldiers who has been praised by the government as an independent meritorious person, Group B is loyal soldiers who is not an independent meritorious person but has reliable activity materials, and Group C is not an independent meritorious person but is related to the Chosen Governor's Office Bulletin. In particular, in the case of group B, we tried to prove that they were loyal soldiers by presenting relevant data that were judged to be loyal soldiers.
Through this study, it was a great achievement to newly discover leader Park Woon-hyuk who was active in the Pyeongnam area, and leader Ahn Bum-seong who was active in the Gyeongnam area.
Group B and Group C loyal soldiers have not been studied so far, so a little more examination could overcome the quantitative and spatial problems that were the limits of existing loyal soldiers trial studies. In the future, it is expected that this paper will be used as a main data for loyal soldiers research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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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영문 『시정연보』를 통한 조선총독부의 대외선전 전략과 국제사회의 시선

저자 : 박보영 ( Park Boyou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77-20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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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매년 방대한 행정문서의 결산이자 압축본으로서 『시정연보』(1906-1942)를 발행했다. 여기에 필요한 정보들을 추가하여 영문으로 번역한 영문 『시정연보』(1906-1939)가 대내외 선전의 중요 자료로 널리 유포되었다. 한국내 선교사들은 선교보고서 작성이나 교세확장을 위한 선교 방침의 기초자료로 활용했고, 각국 영사들 또한 중요 참고자료로 소장자료에 누락본이 없도록 챙겼다. 국제 여론의 주요 거점인 미국에는 일본 선전기관인 「일본학회」를 중심으로 영문 『시정연보』 등의 선전물이 대량 유포되었다.
영문 『시정연보』는 유력한 친일 학자들의 서평이나 인용을 통해 알려지고, 태평양을 둘러싼 국제문제 연구자들은 '비상한' 관심으로 정독했다. 영문 『시정연보』가 활용되고 있는 수많은 인용 기사들과 저술들은, 일본이 생산해내는 통계와 데이터에 찬탄하면서, 한국이 '발전'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무엇보다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문 『시정연보』의 허수와 기만성, 특히 정부 생산의 공식통계가 가지는 편향성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았다. 국제 여론의 장에는 치열한 반일-친일 지형이 있었고, 특히 외교가에서는 일본의 한국 통치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심각한 경고가 상존했다. 영문 『시정연보』가 과시하는 산업생산액의 높은 통계가 송신하는 바는 그것이 언제든 전시산업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점을 국제사회는 예의주시했다.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General in Korea published the Annual Report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 (1906-1942), a condensed collection of a large volume of administrative documents issued every year.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Annual Reports (1907-1939) which also contained additional information necessary for foreigner were widely disseminated as an important source of internal and external propaganda. Missionaries in Korea used the Annual Reports as the source of basic information for preparing mission reports or policy to expand Christianity, while foreign consulates also made sure to collect all the volumes and used them as the key reference for data. In the United States that based the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the Annual Report and other similar materials were disseminated through the Japan Society, the official Japanese overseas propaganda agency.
The English Annual Reports were made known to the world by prominent pro-Japan scholars who referenced them and wrote their reviews. International Relations researchers of the Pacific region also paid close attention to the Annual Reports. Their numerous writings that cited the Annual Reports supported the Japanese government's claim that Korea had achieved based on the statistical data presented in the Reports. On the other hand, there was also criticism against the Japanese biases and misrepresentation, espeically in statistics regarding industrial production. There were fierce pro-Japanese and anti-Japanese sentiments within the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especially regarding the implication of Japanese rule of Korea among the diplomatic circle. In additio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orried that the high industrial productivity indicated in the Annual Reports statistics could turn into military industry at a time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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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27년 매화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

저자 : 탁현진 ( Tak Hyeon-ji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09-24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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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도 소작쟁의는 1920년대 후반 리 단위의 작은 섬, 매화도에서 일어난 농민운동이다. 매화도 소작쟁의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매화도는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면 단위와 견줄 만큼 결렬한 소작쟁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서인섭이라는 악지주가 있다는 것과 함께 서병대를 중심으로 한 청년층의 성장을 들 수 있다. 서병대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농민들을 결속했으며, 1927년 매화도농민조합을 결성해 지주에 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천서씨 친족간의 갈등과 함께 매화도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조선인 사이의 지주-소작관계를 넘어 식민당국과의 저항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지주 서인섭은 1920년대부터 목포에서 활동하며 식민권력과 결탁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소작쟁의가 일어났을 때 가옥명도가처분과 같은 식민지법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나아가 집달리, 경찰, 검사 등 식민권력까지 동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권력이 소작쟁의 주동자들을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매화도 소작쟁의는 단순히 조선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인들과의 갈등을 넘어 식민지권력. 식민지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확장시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The Plum Blossom Island Farm Tenancy Dispute is a peasant movement that occurred on the Plum Blossom Island, a small island classified as the administrative unit of li(里), in the late 1920s. Theaspects of the Plum Blossom Island Farm Tenancy Dispute that need to be highlighted are as follows: first, the Plum Blossom Island, despite being a small island, was where vigorous farm tenancy disputes that were comparable to the unit of myeon (a township) broke out. The reason could be that there was a vicious landowner known as Seo In-sup and that there was a growth of the young generation cantered around the Seo Byeong-dae. The Seo Byeong-dae consolidated the farmers under the influence of socialism, and it established the Plum Blossom Farmers Association in 1927 to defy the landowner. During this process, the conflict among relatives of the Icheon Seo clan and a sense of community among the Plum Blossom Island residents was observed. Second, it extended to the form of a resistance against the colonial authorities beyond the landowner-tenant farmer relationship among Koreans. Starting in the 1920s, the landowner Seo In-sup was colluding with the colonial authorities during his activities in Mokpo. As a result, when the tenancy dispute occurred, he actively utilized colonial laws, such as the disposition of house name. Further, even colonial authorities such as bailiffs, police, prosecutors, and others were mobilized. During this process, the fact that the colonial authorities defined the leaders of the farm tenancy dispute as socialists can be figured out. As such, the Plum Blossom Island Farm Tenancy Dispute should be seen as an extension of the resistance against the colonial establishment and colonial authorities rather than a mere conflict between a Joseon person and Joseon tenant far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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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국제회의(國際會議)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식민지배(植民支配)

저자 : 최현우 ( Choi Hyunw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9-274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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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구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관료를 파견한 배경과 관료의 활동을 검토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36년까지 22명의 관료를 철도, 동력, 수산, 의학, 농림, 무선 통신, 교육, 체신사업 등과 같이 다양한 주제의 국제회의에 파견하였다. 파견 관료의 절반에 달하는 11명의 관료는 철도 분야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주로 조선철도의 국제연락운수 시행과 확대를 위해 회의에 파견되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철도정책을 뒷받침하는 시찰 조사 활동도 함께 전개하였다. 체신국 관료는 체신행정뿐만 아니라 무선 통신 설비와 기술에 주목하였다. 학무국 관료는 조선총독부의 '교육실제화', '청년훈련' 정책의 집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필요한 구미의 학술과 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통치기구 관료 이외에는 연료선광연구소, 수산시험장, 권업모범장과 같은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기술관료와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의 교관이 국제회의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무연탄 활용, 수산물 분석·가공, 토지 개량 등과 같은 조선총독부의 당면 과제에 대한 기술 개발과 자료 수집의 목적으로 국제회의에 파견되었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식민지배체제의 구축과 운영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다양한 국제회의에 관료를 파견하였다. 국제회의는 조선총독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시사점을 제공하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학술적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와 그의 식민지배체제를 선양하는 자리로 활용되었다.


This thesis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dispatch of officials to international conferences by the Chosen Government General[朝鮮總督府] and their activities during Japanese colonial era. The Chosen Government General sent 22 officials to various international conferences from 1912 to 1936. Eleven officials attended conferences in the field of railroad, most of them being senior officers of the Railroad Bureau[鐵道局]. They were mainly dispatched to the conferences to implement and expand the international liaison transport[國際連絡運輸] of the Chosen Railway, and also conducted inspection and investigation activities to support the railroad policies of the Chosen Government General. The postal bureau[遞信局] officials paid attention not only to the postal administration, but also to wireless communication facilities and technologies. Academic Affairs Bureau[學務局] officials were dispatched to investigate academic and case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necessary to rationalize the implementation of Chosen Government General's “realization of education[敎育實際化]” and “youth military training[靑年訓練]” policies.
In addition, technical officials engaged in research institutes such as the Fuel testing & mineral processing center[燃料選鑛硏究所], Fisheries experiment station[水産試驗場], Agricultural experiment station[勸業模範場], and professors of governmental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such as Keijo Medical College[京城醫學專門學校], Suwon Agricultural and Forestry college[水原高等農林學校] were dispatched to the international conferences. They were dispatched to international conferences for the purpose of technical development and data collection on the current tasks of the Chosen Government General, such as the use of anthracite coal, analysis and processing of aquatic products, and land impr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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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상덕(金尙德)의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저자 : 박걸순 ( Park Gul-su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75-30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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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상덕의 독립운동 역정에서 후반부에 해당하는 1933년 만주로부터 관내로 귀환한 이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1926년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33년 관내로 귀환한 이후 난징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노력하였다. 특정 사상이나 이념에 편향되기보다는 통합을 통한 유일당운동에 나선 것이다.
1934년에는 신한독립당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함으로써 통합의 일단을 이루었다. 그러나 곧 김원봉과 교류하며 의열단에 참여하였고, 1935년 4월 조선혁명정치군사학교 제3기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 행로에서 중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그는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 참여하며 줄곧 김원봉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 결정에 따라 의정원 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경상도 의원으로 당선됨으로써 22년 만에 임시의정원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골간을 바로 세우고, 해방 후 조국의 청사진을 마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원 등 야당 계열 의원들과 수많은 제안을 공동 발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해방 전후 시기에 발의한 안건은 해방 후 새로운 세력 구도를 형성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의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고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 시기 임시정부의 선전부 선전위원, 학무부 차장, 문화부 차장에 이어 문화부 부장에 승임됨으로써 국무위원으로서의 활동도 병행하였다.
요컨대 김상덕의 1933년 관내 귀환 이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의 활동은 김원봉과 함께 한 행로였다. 이 시기 그에게 있어서 지상 과제는 조국의 독립이었고, 그 길은 통합을 통해 혁명을 추구한 노선이었다.


This paper discusses the latter part of Kim Sang-deok's independence activities, from the return to China from Manchuria in 1933 until the liberation of Korea.
Kim Sang-deok moved to Manchuria in 1926 and carried out several roles such as serving as the leader of the Manchurian administration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and the Korean Young Communists. With his return to China in 1933, he devoted himself in Nanjing to unifying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Rather than pursuing one doctrine or ideology, he endeavored to unify the diverse forces as a whole.
To achieve this, he joined the New Korea Independence Party and served as an executive. Not long after he began to interact with Kim Won-bong, and took part in the Uiyeoldan. He also worked as the third instructor of the Korean Revolutionary Political and Military School in April 1935. It was a crucial turning point for Kim Sang-deok and his independence movement. Following this, he worked with Kim Won-bong, engaging in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and the Korean Volunteer Corps.
In October 1942 when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took part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Kim Sang-deok was elected to the Korean Provisional Assembly as the representative of Gyeongsang-do. This was his first return to the Provisional Assembly in 22 years. He played a key part in setting up the framework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establishing the blueprint for the liberated country. He also was active in proposing numerous joint bills with members from other opposition parties. The agendas he proposed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 are believed to form a new power structure and to secure a political space and expand the scope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after the liberation. At this time he served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as the Propaganda Department, the Deputy Director of Education, and the Deputy Director of the Ministry of Culture. He then took a role in the cabinet as the Minister of Culture.
From his return to China in 1933 to the country's liberation, his journey for independence was taken with Kim Won-bong. His ultimate task was the country's liberation, and it was pursued by revolution through inte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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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제하 공주여자사범학교의 설립배경과 교육과정에 나타난 특징

저자 : 전진희 ( Jinhee Jeo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7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9-351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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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38년 공주지역에 관립공주여자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이어서 전국에서 두 번째로 공주지역에 관립여자사범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글은 그 대상이 되는 '관립공주여자사범학교'의 설립배경과 교육과정을 분석한 것으로서, 필자는 이를 통해서 당시 충남도청 이전의 보상물이었던 이 학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반응과 지역민의 대응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제는 전시체제기를 대비하기 위해서 식민지조선에서 제2차 초등교육확충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학교의 설립과 증설, 교원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성교육에서는 '모성'이 큰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여자사범학교의 증설방침과 여성교원 양성론이 대두되었다. 즉 초등교육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여성교육이 필요하고, 그 여성교육을 위해서는 여자사범학교도 증설해야 한다는 입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공주여자사범학교가 설립된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제2차 초등교육확충안에 따른 교원 확충의 필요성, 그리고 모성을 이용한 식민지 교육의 강화, 지역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였지만 조선총독부는 1932년 도청이전의 보상안에 포함된 '관립사범학교'를 공주지역에 설치하는데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지역민의 입장에서는 관립사범학교의 설립으로 도시의 경기회복을 기대하였기에 그만큼 절실하였다. 이에 학교 기성회를 만들어 기부금을 만드는 학교설립운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상식적으로 당국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경우 사업 추진자가 부지매수, 건물설치, 비용에 드는 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지역주민이 부지 마련과 교사 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기부금'을 걷어서 부담해야만 했다.
이러한 주민의 노력으로 설립되었으나 이 학교가 주민들이 바랐던 것처럼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 맺기와 경제 활성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학교의 설립으로 '교육도시' 면모를 갖추기를 기대했지만 주민이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해방 이후에나 가능해졌다.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established the Government-General Gongju Women's Normal School in Gongju in 1938. It is the second time in the country to establish a government-run women's normal school in Gongju after Gyeongseong Women's Normal School. This article analyzes the background and curriculum of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e local residents' response in the process of attracting the school, which was a reward before the Chungnam Provincial Office.
In order to prepare for the period of the war system, the Japanese Empire saw that a second expansion plan for elementary education in colonial Joseon was necessary. Therefore, it focused on establishing and expanding schools and fostering teachers. In addition, there was a perception that 'motherhood' plays a big role in women's education, and the policy of expanding women's Normal schools and the theory of nurturing women's teachers emerged.
In other words, in order to expand elementary education, women's education is necessary, and for that women's education, the position that women's education schools should be expanded has gained convincing power.
Therefore, the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of Gongju Women's Normal School was a combination of the necessity of expanding teachers according to the second elementary education expansion plan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 strengthening colonial education using motherhood, and regional interests.
It was this atmosphere, bu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reacted lukewarmly to the establishment of a "governmental normal school“ in Gongju, which was included in the compensation plan for the relocation of the provincial office in 1932. However, from the perspective of the local people, it was desperate because they expected the city to recover from the economy by establishing a government education school. Accordingly, all-out efforts were made to create a school establishment campaign to create donations by creating a school establishment association. In common sense, in the case of projects carried out by the authorities, the project implementer must resolve the purchase of land, installation of buildings, and cost. However, in Japanese colonial period, local residents had to collect "donations" for the site preparation and teacher construction.
It was established through the efforts of these residents, but this school did not help establish close relationships with the local community and revitalize the economy, as the residents hoped. Residents expected the establishment of the school to become an "educational city," but it was only possible after liberation when residents were able to speak out to solve local iss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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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가야지역의 횡혈식석실 수용과 특징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을 중심으로-

저자 : 홍보식 ( Bo Shik Ho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1 (4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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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근 활발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고성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을 구조별로 분석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선행의 수혈식석곽을 매장주체시설로 한 고분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내산리고분군에 횡혈식석실이 수용된 시기는 6세기 2/4분기였음이 다른 가야권역의 횡혈식석실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내산리고분군의 독특한 고분 조성방식인 선분구 조성 후 매장주체시설 구축은 사용 석재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토목공법이었으나 횡혈식석실의 수용을 계기로 고분 구축방식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지면을 정지한 면에 석실과 봉분을 동시에 조성하고, 벽체에 사용할 벽석의 두께를 수혈식석곽의 벽체에 사용한 벽석보다 두텁게 하여 뚜껑돌과 상부의 봉분 하중을 극복하였다.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은 장방형의 현실 평면, 중앙 연도, 평천장, 주검의 목관 매납 등 남부 가야권역의 횡혈식석실과 공통하지만, 현문시설이 설치된 점은 특징적이다. 이 현문시설은 왜계 석실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내산리고분군의 횡혈식석실은 현지의 고분 축조공법+백제로부터의 횡혈식석실의 매장법+왜계 석실의 현문시설 요소 등이 복합되어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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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가야 출토 마구의 성격과 의미

저자 : 류창환 ( Ryu Chang-hwa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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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소가야의 중심지로 이해되고 있는 경남 고성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를 집성하여 편년하고 그 성격과 의미를 검토함으로써 문헌 기록상 그 실체를 잘 알 수 없는 소가야의 일면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소가야 출토 마구 중에서 좌우 비대칭의 부품으로 구성된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좌우 비대칭의 부품으로 구성된 마구는 사용 중에 파손된 것을 보수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이를 통해 마구의 실용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성 율대리와 내산리 고분 출토 재갈에서 확인되는 보수흔은 그러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소가야 출토 마구의 경우 거의 예외없이 갑주와 대도, 철모, 철촉 등과 같은 무기·무구와 함께 출토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는 소가야 출토 마구의 실용성과 무장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실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경장기병 또는 중장기병과 같았을 것이다.
한편 소가야의 고분에는 그 위계에 따라 재갈과 안장, 등자로 구성된 기본마구, 철제의 장식용 마구, 금동장 장식마구 등으로 구분되어 부장된 사실도 확인되는데, 이는 당대의 마구가 실용품을 넘어 피장자의 권위와 위세를 상징하는 위세품으로도 활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소가야 출토 마구 중에는 계통을 달리하는 외래계 마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대가야계·백제계·신라계·왜계 마구 등이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외래계 마구는 소가야가 당대의 대가야와 신라,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여러 세력과 교류 또는 교섭했음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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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성 내산리 소가야묘 팔찌에 대한 검토

저자 : 이한상 ( Lee Hansa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1-11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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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소가야의 중심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고성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 관하여 살펴본 것이다. 소가야는 5세기 이후 고고학적 실체가 뚜렷하지만 소가야양식 토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을 소가야적인 고고자료로 볼 수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금속장신구에 소가야적 특색이 발현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내산리 소가야묘군의 경우 7기의 유구에서 11점의 팔찌가 출토되었다. 34호분 주실에서 4점, 60호분에서 2점, 여타 무덤에서는 1점씩 출토되었다. 금팔찌는 없고 은팔찌가 2점, 동팔찌가 9점이다. 대부분 망자의 좌우 팔목에 착장시켜 매장한 양상이다. 팔찌의 부장에는 다양한 방식이 혼재되어 있어 소가야만의 특색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는 문양의 유무나 형태에 따라 3류로 나눌 수 있다. 문양이 없는 것이 2점, 각목문을 갖춘 것이 7점, 돌기형 장식을 갖춘 것이 2점이다. 각목문 팔찌는 신라의 그것과 형태에서 차이가 있어 백제-대가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다. 다만 제작지를 특정하기는 어려우며 일부는 현지산일 가능성도 있다. 팔찌의 상한 연대는 5세기 후반으로 설정할 수 있다. 돌기가 장식된 팔찌는 신라에서 계보를 구할 수 있으며 신라로부터의 반입품일 가능성이 있다. 6세기 전반의 늦은 단계나 6세기 중엽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내산리고분군 출토 팔찌에서는 다양성이 보인다. 이는 다양한 외래토기가 함께 묻히는 발굴 양상과도 맥이 닿는다. 이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주변국과 다양한 인적ㆍ물적 교류를 수행하며 생활하던 소가야인들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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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삼국 초기 海上 英雄과 국가의 성격 - 영웅시대의 설정 -

저자 : 김재홍 ( Kim Jae-hong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9-15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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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초기 바다를 배경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수로왕과 탈해왕, 석우로, 이음과 장군 一伐, 박제상 등이 있으며, 이 중에서 고대 영웅시대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석우로, 이음과 장군 一伐을 상정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신라 석씨 이사금시기의 영웅으로 활약한 인물이며, 국가를 위해 전공을 세우고 우로와 같이 목숨까지 받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영웅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에서 영웅시대의 국가 형태는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방식은 중앙은 6부로 나누어져 있고 지방에는 소국이 자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라 국왕은 개별 6부와 지방 소국의 자치력을 인정하면서도 전시에 군사권과 외교권은 국왕의 아래에 통합시키고 있다. 신라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여가는 방식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고 6세기 중고기 이후에는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국가체를 구성한 것이 가야이다. 가야는 독립적인 자연지형인 분지나 해안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립하여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강하였다. 전시의 군사권이나 외교권도 개별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였다. 포상팔국의 예도 이와 유사하였는데, 8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각자 국왕이나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야의 발전이 신라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야는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지만, 이것이 신라 사회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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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물질자료로 본 변한의 대외교류

저자 : 이창희 ( Changhee Lee ) , 구숙현 ( Sookhyun Koo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53-18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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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변한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을 집성하여 변한의 대외 교류상을 살펴보고자 한 논문이다. 외래계 유물을 중국계와 왜계, 토기와 금속기로 나누어 집성하였는데, 낙랑군 설치 직후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 후반까지의 시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변한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은 낙랑군(BC108) 설치 이후 중국계 유물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漢式 위세품에 대한 변한인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변한인은 수입과 모방을 통해 그 갈망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목관묘에서 목곽묘 사회로 전환되면서 한식유물에 대한 가치와 수요가 변화·감소하게 되었고, 위세품도 재지화되고 독자적으로 변용된 것이 나타났다.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부 최대의 한중일 교역 거점이었던 늑도는 기원후가 되면서 교역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김해지역이 각광받기 시작하는데, 양동리·대성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특히 倭系유물의 기종과 분포의 변화는 정치체 간 교역의 성격이 짙어졌음을 의미한다. 무덤에서 드러나는 변한의 모습은 정치권력형 왕조 사회로의 지향을 보여준다.
변한에서 가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물질자료의 변화는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묘제 및 부장품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변한 소국들의 사회 구조 및 수장의 성격, 정체성의 변화와도 연결되는데, 외래계 유물에서 나타나는 한중일 교역 네트워크의 변화와도 연동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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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령 쾌빈리 郭召史墓의 기초적 검토

저자 : 이영재 ( Lee Yeong-jae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91-22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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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쾌빈리 산23-4번지 일원에 위치했던 郭召史墓는 조사과정에서 우연히 확인되었다. 郭召史墓는 회곽묘 조사사례 가운데 하나로 마무리될 뻔했으나 '회곽' 속성과 銘旌(免賤海南郭召史之柩)은 새로운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郭召史墓의 '회곽' 속성을 분석하여 규모는 양반 계층 회곽묘에 비견될 정도였고 회벽은 통벽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郭召史의 신분이 최상층은 아닐지라도 양반 계층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유추해 보았다. 다만 명정은 郭召史의 신분에 대해 또다른 내용을 알려주는데 '免賤'은 郭召史가 상전에 의해 사노비에서 해방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층의 여성을 지칭했던 '召史'는 늦어도 18세기에는 사대부의 첩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郭召史가 상전의 첩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즉 郭召史는 양반 계층의 첩이 되면서 천층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나 양반 계층으로의 진입은 어려웠고 결국 첩이 지녔던 신분적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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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곡 어변갑의 장원 대책 연구

저자 : 안소연 ( Ahn Soyeo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6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3-258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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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태종 8년 식년시 책문과 어변갑의 장원 대책을 시대 배경과 연결해 분석하였다.
태종 8년은 아직 조선 개국 공신 세력이 건재하였고, 무인정사·2차 왕자의 난의 공신 세력이 영향력을 많이 미치고 있었기에 주자성리학을 수용하여 이를 기반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해나가면서도 아직 고려 말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책문 또한 이러한 과도기적인 주제를 다루었을 것이다. 어변갑은 태종 8년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면은 없는 인물이지만, 태종의 측근들이 시험관이었던 시험에 장원급제 한만큼 그 대책 또한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태종 8년 식년시 전시 책문은 『동국장원집』 권 上에, 어변갑의 장원 대책은 『전책정수』 권 上에 전문이 전한다. 책문에서 다룬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⑴ 요순삼대와 한 문제·경제, 당 태종의 통치 방식과 주자성리학적 이상사회 및 군주상 구축 ⑵ 과전법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기내의 과전을 기외로 분급하자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 ⑶ 여진족 및 왜구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모색으로 나눌 수 있다.
어변갑은 대책에서 우선 중국 고대 태평성대의 시기로 알려진 요순삼대가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 정치를 행하는 것에 있어서 도와 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 문제·경제, 당 태종은 이보다 못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여말 『대학연의』가 도입되고 태종대에 들어서 경연·서연 교재로 읽히면서 고려 시기 『정관정요』를 중심으로 한 패도 정치를 지양하고 주자성리학적인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정치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과전법에 대해서는 기내와 기외를 비교하면 기내가 훨씬 중요하고, 공전이 사전보다 먼저라고 하면서 기내의 과전을 기외로 분급하자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기외의 군자전을 기내로 옮기고, 기외에 과전을 분급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사전을 없애는 형태로 개혁을 진행하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진과 왜구에 대한 외교적 관계에 대한 어변갑의 대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미'라는 표현이다. '기미'는 조선의 사대 질서에 따르도록 해야 하는 대상을 가리키는데, 여진과 왜구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여진의 지리적 위치상 조선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으면 위험한 존재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들이 내조할 때 지나치게 대우하지 말아야 하며 한편으로는 사적인 무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구에 대해서는 부신을 징표로 주고 교역을 하게 하는 한편 군사적 대처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변갑이 개혁 정책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과 자료는 매우 적지만, 8년 식년시에 장원급제했다는 것에서 당시 태종이 요구한 인재상이었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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