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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간양록(看羊錄)』의 편간 과정과 내산서원 소장 필사본에 대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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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看羊錄)』의 편간 과정과 내산서원 소장 필사본에 대한 분석

Analysis of the publication process of “Ganyangrok(看羊錄)” and the manuscripts owned by Naesan Seowon(內山書院)

안동교 ( Ahn¸ Donggyo )
  • : 호남사학회
  •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73-99(27pages)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DOI

10.37924/JSSW.83.3


목차

Ⅰ. 머리말
Ⅱ. 『간양록』의 편간 과정
Ⅲ. 내산서원 소장 필사본의 구성
Ⅳ. 내산서원 필사본의 필사 시기와 필사자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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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姜沆, 1567-1618)이 17세기 벽두에 남긴 『간양록(看羊錄)』은 조선의 도학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실학자로 알려진 인물들에게도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의 기록에서도 『간양록』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17세기 중반에 『간양록』이 간행 보급된 이후, 이 책은 어떤 특정계층에만 국한되지 않아 조선의 유학자라면 두루 읽은 일종의 역사와 문화의 교양서였다.
현재 강항을 제향 하는 내산서원(內山書院)에는 1658년 목판본 『간양록』이 간행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사본 『간양록』이 소장되어 있다. 그간 학계에서는 이 필사본의 구성과 필사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 필사본의 전승 과정과 필체 분석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였다.
필자는 이 필사본이 두어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필사본이 합사본(合寫本) 형태로 꾸며진 것이고, 필사자는 강항을 포함하여 4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또 필사본 『건거록(巾車錄)』에서 목판본 『간양록』으로 제목·목차·내용·체제 등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이 내산서원 필사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The “Ganyangrok(看羊錄)” written by Kang Hang(姜沆, 1567-1618) in the beginning 17th century, did not only affect Chosun's Taoist, but also influence the figures known as Silhak scholars in many ways. In addition, the records of the communications officer that have visited Japan also mention the contents of the “Ganyangrok”. After the publication of “Ganyangrok” in the mid-17th century, this book was a kind of historical and cultural refinement read by Chosun Confucian scholars, not limited to any particular class.
In Naesan Seowon, which is currently sacrifice to Kang Hang, the manuscript “Ganyangrok”, which appears to have been written before the woodblock edition “Ganyangrok” was published in 1658, is in the collection. In the past, learned circles have conducted research on the composition of the manuscript and Scribe, but failed to provide a clear answer. Therefore, I came up with a few meaningful achievements through the process of transmission and handwriting analysis of this manuscript in order to complement the incomplete parts.
I estimated that this manuscript was made in the form of a pair of manuscripts on a couple of occasions, and that Scribe was about four, including Kang Hang. In addition, I think that the process of changing the title, table of contents, contents, and system gradually from the manuscript “Geongerrok(巾車錄)” to the woodblock edition “Gangyangrok(看羊錄)” can be confirmed through this manuscript of Naesan Seowon.

UCI(KEPA)

I410-ECN-0102-2022-900-000784315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한국사
  • : KCI등재
  • :
  • : 계간
  • : 1975-243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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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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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 시기와 그 과정

저자 : 조진선 ( Cho Jins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5-3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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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지역은 마한 소국 중 하나인 일난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며, 백제 시기에는 월나군, 고미현, 아로곡현, 반나부리현 등이 설치되어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암지역에서 마한 소국의 형성과정은 인구의 집중과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의 형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암지역은 기원전 8~4세기경의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는데, 고고학적으로는 송국리형 주거지와 1,399기에 이르는 지석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암지역으로 유입된 새로운 인구집단은 지석묘의 형식과 분포상태로 보아 탐진강유역(장흥군 유치면 일대)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된 점이다. 전쟁인류학적으로 보면, 평등한 부족사회와 위계가 형성된 군장사회는 전쟁 양상이 서로 달라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조합도 다르다.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영암지역의 무기조합은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석검)여서 부족사회의 모습을 보이지만, 초기철기시대의 세형동검문화는 원격전용 투사무기(석촉)+근접전용 단병충격무기(세형동검)+근접전용 장병충격무기(동모·동과)여서 군장사회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로 보아 영암지역은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집중되기 시작한 인구를 바탕으로 강제력을 수반한 수장권이 형성되면서 군장사회로 진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한 소국은 이러한 군장사회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Yeongam is a favorable location at which the formation of Mahan statelets can be studied. Yeongam witnessed a period of population aggregation in the middle of bronze age from ca. 8th to 4th centuries BC, as indicated by the appearance of Songguk-ri type settlements and 1,399 dolmens. These dolmens in Yeongam and the surrounding area suggest that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e new population influx was from the Tam-jin River basin (Yuchi-myeon region).
From a war anthropological point of view, an egalitarian tribal society and a hierarchical chiefdom society where coercive power in infested in their leaders have different weaponry assemblages due to their divergent warring patterns. Yeongam in the middle bronze age appeared to be an egalitarian tribal society since the weaponry of this period consisted of ranged projectile weapons (such as arrowheads, and melee hilt weapons (such as stone daggers). On the contrary, chiefdom society aspects indicated by a different weaponry assemblage that consisted of ranged projectile weapons, melee hilt weapons, and melee pole weapons (such as bronze spear and bronze dagger-axe) are observed in the slender bronze age dagger culture during the early iron age at Yeongam.
Judging by the changes in weaponry assemblages, it is highly likely that Yeongam began to become a chiefdom society as coercive power emerged, which was given rise by the growth of the population since the middle bronze age. The Mahan statelets is understood to have historically recorded this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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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완도 법화사지의 성격에 대한 신고찰-고려 후기의 항몽(抗蒙)과 백련결사(白蓮結社), 그리고 송징(宋徵)과 관련하여-

저자 : 강봉룡 ( Kang Bongy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71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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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완도의 장보고 중심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고려 후기 완도 법화사지의 역사적 현황을 고고 자료, 문헌 자료, 설화 자료의 검토를 통해 살펴본 것이다.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는 완도 법화사가 12세기 초에 재건되었고, 1243년에 완도를 '거점 섬'으로 지정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243년 당시 고려의 최이정권은 진도의 용장성에 도성에 버금가는 전략시설을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완도와 압해도 등의 주요 섬을 연결하는 서남해지역 '거점 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1247년에 백련결사의 2대 사주였던 천인과 그의 도반인천책 등이 몽골의 침략을 피해 '거점 섬' 완도의 전략시설이 조성된 법화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즈음에 고려의 官人 이영이 유배형을 당하여 완도로 왔고, 이영의 작은아버지 승려 혜일도 완도에 들어왔다. 이는 '거점 섬'으로 지정되고 법화사에 전략시설이 조성된 직후의 일로서, 당시 완도 법화사가 항몽의 공동체이자 법화신앙의 공동체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완도의 설화적 인물 송징은 완도에서 명멸해간 민중영웅들을 다면적으로 대변하는 복합적 캐릭터이다. 따라서 역사화 과정에서 송징이 때로는 장보고로 치환되기도 하고, 때로는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되기도 하는 것은 나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법화사지 발굴에서 12~13세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됨에 따라 송징을 삼별초의 장수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is thesis examines the historical status of Wando Beophwasa Temple Site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rough a review of archaeological data, literature data, and narrative data in order to reflect on Wando's perception of Jang Bogo-centered history.
The letter inscribed tile excavated from Beophwasa Temple Site shows the possibility that Wando Beophwasa Temple was rebuilt in the early 12th century, and Wando was designated as a “hub island” in 1243 and strategic facilities were built in Beophwasa Temple. In 1243, the Choi Yi regime of Goryeo established a strategic facility comparable to that of the capital city in Yongjang-castle, Jindo, and built a “hub island network” in the southwest sea region that connects major islands such as Wando and Abhaedo.
According to the literature data, in 1247, Cheonin, the second boss of the Baeknyeongyeolsa, and his religious friend, Cheonchaek, entered Beophwasa Temple, where strategic facilities of Wando, a “hub island,” were built to avoid Mongolian invasion. And around that time, Lee Young, a Goryeo official, was exiled and came to Wando, and Lee Young's uncle, Monk Hyeil, also entered Wando. It was immediately after it was designated as a “hub island” and a strategic facility was established in Beophwasa Temple. At that time, it shows that Wando Beophwasa Temple functioned as a community of anti-Mogolia and a community of Beophwa faith.
Song Jing, a folktale character in Wando, is a complex character that represents the folk heroes who have been wiped out in Wando in multiple ways. Therefore, in the process of historicalization, it can be said that it is reasonable that Songjing is sometimes replaced by Jang Bogo, or sometimes replaced by Sambyulcho's commander. In that context, it can be understood that as relics from the 12th to 13th centuries have been intensively excavated from the excavation of the Beophwasa Temple Site, several attempts to replace Songjing with a commander of Sambyeolcho are tak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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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산보의 학문과 사상

저자 : 고영진 ( Koh Young J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3-10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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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보는 16세기 전반 대표적인 호남사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5살 때인 1517년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나 2년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이 賜死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자 통분하며 낙향하여 무등산 아래 창암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소쇄원을 경영하고 평생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
양산보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먼저 至治主義의 구현을 들 수 있다. 그는 스승인 조광조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의 학문은 『소학』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四書 중에서는 『대학』과 『중용』을, 五經 중에서는 『주역』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도연명과 주돈이를 흠모해 서재에 도연명의 「歸去來辭」와 「五柳先生傳」, 주돈이의 「太極圖」, 「通書」, 「愛蓮說」 등을 두고 가까이 하였다.
양산보는 『소학』의 실천에 힘썼으며 「孝賦」와 「愛日歌」등을 저술하고 소쇄원에 愛陽壇을 쌓는 등 효를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의 『소학』과 효 중시 사상은 家學으로 전해 내려져 갔다.
그는 스승의 죽음과 개혁의 실패를 보고 좌절하기도 하였지만 그 절망을 딛고 일어나 스승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지치를 자신의 주변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사회에까지 넓혀가고 자연 속에서까지 구현하려고 하였다. 『소학』과 효의 실천, 의리의 강조, 소쇄원의 건설이 이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양산보의 또다른 사상적 특징으로는 天人合一論을 들 수 있다. 양산보는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리학적 세계관과 우주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북송성리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주돈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천인합일론에 기반하고 있다.
양산보가 흠모했던 또 한 명의 인물은 도연명이다. 그는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는데, 道家的 隱逸之士보다는 엄격한 出處觀을 가진 儒家的 處士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은거하였지만 세상과 등진 것은 아니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의식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의 시문은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 바탕에는 천인합일론에 입각한 物我一體의 사상이 있었다.
양산보는 스승과 자신이 꿈꿨던 이상사회인 지치를 자연에 구현한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도 소쇄옹으로 하였다. 그러나 소쇄는 단순한 쇄락으로서의 내면적 정신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쇄락의 기상을 의미한 강한 실천지향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구체적 형용이 광풍제월이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도연명과 주돈이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소쇄원을 소쇄라는 문학적 기풍과 광풍제월이라는 기상의 결합이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건축물로 이해하기도 하며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천인합일,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사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조광조의 사상과 이기심성론 중심의 주자성리학의 중간 단계, 즉 성리학적 우주론 중심의 북송성리학과 친연성이 있었지 않나 생각되며 호남유학사에서는 송순계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소쇄원이 그들 사이의 학문 교류의 장이 되면서 송순계열의 학문과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양산보는 소쇄원을 중심으로 송순, 임억령, 김윤제,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 많은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활발한 문학 교류를 하였다. 당시 호남지역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최고 수준이었는데 양산보와 소쇄원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Yang San-Bo was one of the typical Honam sarim. He entered the Jo Gwang-Jo's school in 15 years old and studied. But his teacher and many Literatis were executed or exiled in the Purge of 1959(kimyo sahwa), he went back home and built Soswaewon(瀟灑園) in Changamchon of Changpyeong province. He lived there until he was dead.
The first characteristic of Yang San-Bo's thoughts is the realization of Ideal politics and world. He succeeded to Jo Gwang-Jo's thoughts faithfully. His Study was based on 『Sohak(小學)』 and put emphasis on 『Book of Changes(周易)』. He also respected Tao Yuanming(陶淵明) and Zhou Dunyi(周敦頥) and put books of these two men.
Yang San-Bo made effort to realize the Ideal politics and world from himself to a family, socity and nature. The practice of 『Sohak』 and filial duty(孝), a emphasis of royalty, building of Soswaewon were a evidence of this.
The another characteristic of Yang San-Bo's thought is the theory of Unification of heaven and human. He has deep knowledge of 『Book of Changes』 and was concerned about the world view and the universal theory of Neo-Confucianism.
The study and thoughts of Yang San-Bo is located between Jo Gwang-Jo's thoughts and Lichi theory(理氣論) of Neo-Confucianism, in other words Neo-Confucianism of North Song(北宋性理學).
Futhermore Yang San-Bo contributed a development of Song Sun's school and he with a activity in Soswaewo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area of literature of Honam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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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황진(黃進) 추서(追敍)와 17세기 기억의 형성

저자 : 김한신 ( Kim Hanshi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3-14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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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黃進은 17세기 이후의 조선사회에서 전란 초반의 전황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임진전쟁 발발 직후 호남 방어에 전력을 다했으며, 충청병사에 승진된 이후 활동범위를 확대하여 삼남의 보전에 초점을 맞추어 임무를 수행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었고, 황진은 다른 군·민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했다. 조선 조정으로 전달된 보고에서 황진이 중과부적임에도 '力戰'하다 전사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정에서는 서둘러 황진 등 전사자에게 상을 내리고 추증했다. 황진의 공훈은 당대를 넘어 17세기 이후 사대부 사이에서 기억되고 기록으로 전승되었다. 황진의 기억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황진이 후손들 사이에서만 顯彰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 그의 기록이 수정, 보완을 거치며 당대를 설명하는 敍事 중 일부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황진의 史實은 私撰記錄과 官撰史書에서 병행 수록되어, 그의 면모와 전공을 재조명하는 가운데 당대사의 실상이 복원될 수 있었다.


Hwang Jin(黃進) can be remembered as one of the most well-known figures who died as a war hero in the second Jinju Fortress battle in June 1593. During the Joseon period in the seventeenth century, people certainly referred to him whenever they discussed the early stages of the Imjin War. Right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Hwang Jin did his utmost to defend Jeolla(全羅) and he was later promoted as the Provincial Army Commander of Chungcheong(忠淸兵使) to focus on preserving the three southern provinces of Joseon, namely, Chungcheong, Kyungsang(慶尙), and Jeolla. Eventually, in late June 1593, when the second Jinju Fortress battle began, Hwang Jin was killed while fighting bravely with his troops and the people of the castle against the Japanese army. According to the reports sent to the Joseon court Hwang Jin “fought valiantly” until the end(力戰) despite facing an overwhelming number of the enemies. The Joseon court immediately conferred prizes and granted posthumous honours to Hwang Jin and his colleagues. Hwang Jin's meritorious service throughout the war was remembered long after his death and was recorded by some Confucians, the upper class of Joseon since the seventeenth century. Remembering Hwang Jin was crucial not just for commemorating him among his descendants but also for constructing a part of the entire narrative to explain the Imjin Wartime by famous Confucians later on. The historical facts about Hwang Jin were documented in both private and official history, which led to the restoration of the realities surrounding the Imjin War by shedding light on his personality and devotion to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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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해임과 사탕무당제조사업권 추구

저자 : 김희연 ( Kim Hee Ye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43-179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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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해임되는 과정과 그 가운데 알렌이 획득하려 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검토했다. 기존 연구는 알렌의 해임 배경에 대해 그가 루스벨트 정부의 친일, 반러 정책에 반박하고 친러, 반일, 친한 정책을 개진했기 때문이라 해석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 입장에서 알렌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 가지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알렌이 해임 전후로 추진했던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이때 그의 관심은 한국의 독립이 아닌 자국 권익과 개인적 실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알렌이 공사에서 경질되는 배경을 자세히 검토했다. 알렌은 자신이 친러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알렌은 일본측에 협조적으로 움직였고 한국의 보호국화를 예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해임되었고 알렌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기에 처했다. 이는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모건이 제안한 사탕무당제조사업의 내용과 알렌이 마련한 계약안 내용을 분석했다. 이때 알렌 계약안은 종전에 비해 혜택이 축소되었을지언정 이권획득자를 적극 배려한 것으로, 그가 한국에서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충분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이는 동시에 일본의 한국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알렌이 사탕무당제조사업권을 획득하고자 취한 대일협조적 행보들을 살펴보고, 그가 한국을 떠나는 과정을 살폈다. 알렌은 이권을 따내기 위해 일본친화적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개인에 전매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알렌의 시도는 결국 무산되었다. 귀국 후 서한이나 강연에서 알렌은 그러한 자신의 행적은 모조리 소거하고 자국 정부의 공사관 조기철수를 비판했다.
알렌의 해임과 그 과정에서 이뤄진 사탕무당제조사업권 획득 시도를 보면, 알렌은 자신의 안위와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주의 노선을 철저하게 따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세계정세와 관련한 알렌의 인식과 태도 변화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This study sheds light on the process by which U.S. Minister Horace N. Allen was dismissed and the concession for manufacturing beet sugar which Allen attempted to secure. Previous studies interpreted that Allen was dismissed because he refuted the Roosevelt administration's pro-Japanese and anti-Russian policies and advocated pro-Russia, anti-Japanese, and pro-Korean policies. This has been one of the grounds for positively evaluating Allen's moves from the Korean standpoint. Allen's attempt to secure beet sugar concession after his dismissal suggests that his interest at that time did not lie in the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Korea, but in the American interests and his own personal interests.
This study clarified the backgrounds of Allen's dismissal from the U.S. Minister to Korea. Allen continued to strive to dispel the perception that he was a pro-Russian. He cooperated with the Japanese authorities and predicted Korea's doom to fall into a Japanese protectorate. Nevertheless, Allen was dismissed and he was put in crisis both politically and economically. This situation rendered Allen deeply interested in beet sugar concession.
This study also analyzed the contents of Morgan's proposal and those of Allen's draft contract. In the latter, the benefits have been reduced compared to previous concessions. Still, Allen's draft contract was favorable to the concessionaire. It fully reflected the trial and error he had experienced while promoting various projects in Korea. At the same time, it took the situation into account, where Japan's control over Korea was expected.
Lastly, this study examined Allen's Japan-friendly moves in order to acquire beet sugar concession and explained his leaving from Korea and various remarks after the scheme was frustrated. Allen actively showed friendly attitude towards Japan. Nevertheless, Allen's attempt was frustrated as the Japanese government eventually decided not to grant a concession to any individual. In letters to Koreans or lectures after returning home, Allen eliminated all such pro-Japanese remarks and actions and criticized the U.S. government for the quick withdrawal of her legation.
Allen's dismissal and attempt to secure beet sugar concession exhibit that Allen was a realist who thoroughly pursued his own safety and interests. Changes in Allen's perception and attitude towards both Korean affairs and the international affairs should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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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식민지 대만의 사법제도 연구

저자 : 이승일 ( Lee Seung Il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81-221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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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하의 대만과 조선은 일본을 통해서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이 지역에는 전문 재판기관이 설치되었고, 법률 전문가가 판사와 검사에 임용되었다. 더 나아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을 분리하였고 소송절차법도 만들어졌다. 이렇듯, 대만과 조선은 모두 일본의 사법제도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는 대만의 법원조직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대만의 사법제도,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대만의 사법제도의 특징을 연구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법제도를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Under the colonial rule, Taiwan and Joseon introduced modern judicial system through Japan; with the invasion of Japanese imperialism, professional justice agencies were established in the area, and legal experts were appointed to judges and prosecutors. Furthermore, civil and criminal lawsuits were separated and the Litigation Procedure Act was created. As such, Taiwan and Joseon were both strongly influenced by the Japanese judicial system. In particular, the judicial system of colonial Joseon was created by referring to the court organization of Taiwan, so research on it is necessary. In this study, the judicial system and lawyers of Taiwan were analyzed. Studying the characteristics of Taiwan's judicial system is thought to be useful in understanding the judicial system of colonial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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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 - 오월의 기록>에 담긴 5·18 민주화운동 영상기록물 연구

저자 : 김정아 ( Kim Jung 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23-25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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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영상기록물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87년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 자료다. 영상기록물이 역사 자료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출처와 제작 배경, 내용을 밝히는 기초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KBS 다큐멘터리 <영상아카이브-오월의 기록>은 80년 5월 광주를 기록한 국내외 영상의 출처, 시간과 장소를 면밀히 파악하여 그날의 진실에 가까운 '5·18민주화운동 영상일지'를 만든다는 기획 의도로 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수집된 5·18 영상기록물의 생산처와 소장처, 제작 배경과 일시, 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따라 영상기록물의 내용을 문서 자료, 사진 자료와 교차 분석함으로써 영상기록물이 가진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The 5·18 video record is historical sources that informed the truth of the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as a trigger for the 1987 democratization movement. In order for video records to serve as historical sources, basic work that reveals the exact source, production background, and contents must be preceded.
The KBS documentary “Video Archive-10 Days in May” was produced with the intention of creating a '5·18 Democratization Movement Video journal' that allows users to access the truth of the day by checking the exact time and place as much as possible.
In this paper, the production and collection of 5·18 video records collected during the program production process, the background, date of production and contents are summarized. And according to the flow of the documentary, the contents of the video record were cross-analyzed with document data and photo data to reveal historical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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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상왕(商王)의 출정(出征)과 '방인(方人)'의 여정

저자 : 이성원 ( Lee Sung W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57-28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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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는 공방, 토방, 강방, 주방, 인방 등 중원 외곽의 강력한 방국들과 주기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하였고 필요한 경우 상왕은 군사적 출정을 하였다. 이들 지역은 상읍으로부터 500~800킬로미터 거리였기에 이러한 군사적 출정을 다녀오려면 두 달 혹은 석 달이 시간이 소요되는 장도의 원정이었다. 상왕의 출행은 정례적인 卜旬 복사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일간격으로 행해지는 점복을 기록한 복순 복사에서 상왕이 상읍 이외의 지역에 머무르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소재지를 기록함으로써 상왕의 이동 경로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복순 복사에 의하면 상대 후기 상왕이 동남 회하유역으로 잦은 원정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경유지에서 복순 복사를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이라도 상읍의 출입에는 방위, 택월, 택일 등의 신탁이 허락해야 출입 할 수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생포된 방인들은 상왕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여정을 보여준다. 특히 강방의 강족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검토하면, 그들은 전쟁에서 생포되어 상읍까지 수백 킬로의 험난한 장도를 감내하며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비록 살아서 상읍에 도착하여도 그들 대부분은 벌제의 식을 통해 제사의식의 희생이 되었다. 즉 그들은 고향을 떠나 와서 이승이 아닌 저 피안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 외의 방인들은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훼손되는 육형을 받아야 했고, 남은 여생동안 불구가 되어 내밀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According to oracle bone scripts, Shang dynasty often waged war against strong nations around central China, called Fang[方], for examples Gong Fang [方], Tu Fang [土方], Qiang Fang [羌方], Zhou Fang[周方], Ren Fang[人方], etc. Sometimes the king of Shang dynasty went to war in person. It was a long expedition to take two or three months at least because it was five or eight hundred kilometers from those nations to Shang. The fact that the king made a journey can be found in the augural scripts which had been written after an fortune forecast for coming ten days, called Bu Xun [卜旬]. Wherever the king might be, he had to perform 'the ten days forecast'. So when he performed the forecast outside the capital city, he had to write where he was on an oracle bone. According to those scripts we can find the itinerary of the king, especially outside the capital city. It was very important for even king to decide which direction, which month, and which day depended on oracle bone forecast in going out or entering the capital city.
On the other hand, compared to that of king, the itinerary of foreigners who had been captured alive in the battle with Shang showed a dramatic contrast. Captured in the battle, they were escorted to Shang hundreds of kilometers away. It was for the first time for them to make a long journey, though it must be a terribly tortured journey to death. Even if they were alive after a tortured journey, they had to meet the more tragic fate. Most of them had to be decapitated as a sacrifice for natural gods and ancestral gods in the ritual ceremony of Shang. A human sacrifice was usual and culminating in Shang dynasty. If they were alive, the rest of them had to be punished to cut the part of their body, for examples a penis, a leg, a nose, skins, etc, and had to serve a kind of shamanistic j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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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송시기 전쟁이 화폐에 끼친 영향 -단평입락(端平入洛) 시기 회자(會子)의 발행량을 중심으로-

저자 : 정일교 ( Jeong Il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83-30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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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시기의 재정은 赤字였고 이러한 적자재정의 主要 原因은 막대한 軍費 지출에 있었다. 즉 南宋 건립이후 金과의 계속 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량의 軍隊를 유지해야만 했었고 이것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남송조정이 적자재정을 해결하고자 하였다면 우선 군비의 지출을 줄이고 세금 수입을 늘리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은 남송조의 실제정황과는 符合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송조정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쉬운 방법은 紙幣를 대량으로 발행하는 것이다.
남송과 金 間의 계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가 필요하자 회자의 발행량도 점점 증가하여 開禧北伐 後 회자의 발행량은 1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비록 회자의 발행량이 증가하였다 할지라도 회자와 교환하는 金, 銀, 銅錢 등의 準備金이 충분하였다면 회자의 가치하락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234년(端平 元)에 남송은 蒙古와 연합하여 金을 멸망시키고 승리하였지만 몽고로부터 전쟁 승리에 대한 보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金을 멸망시킨 후에 남송조정은 三京收復을 목적으로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하그렇지만 이 전쟁의 실패로 남송과 몽고는 전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승리로 얻은 것은 없다하여도 조금이나마 재정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시간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理宗 친정초기에 진행하였던 두 번의 戰役은 재정에 큰 손실을 주었다. 端平入洛 이후에 남송조정은 이전보다 많은 군비를 지출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결국은 회자의 발행량이 4億貫을 초과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회자가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사회경제활동에 큰 문제였고 남송의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端平入洛 後 會子의 가치가 하락하는 추세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하였다. 남송과 몽고가 연합하여 金을 멸한 이후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宋과 蒙古는 平和 時期였다. 하지만 南宋이 三京을 수복하기 위하여 蒙古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端平入洛의 결과는 매우 비참하여 이후 남송의 재정 적자는 더욱 악화되었고 어쩔 수 없이 會子의 發行量을 늘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端平入洛은 宋과 蒙古의 全面 戰爭의 도화선이 되었다. 端平入洛은 晩宋時期기에 會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The Southern Song dynasty had to cope with chronic financial loss. The main cause of the financial loss was huge amount of military spending. The Southern Song government had to maintain so many troops because of the perpetual war with the Jin dynasty[金]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It was a huge drain on the national finances. The Song's government should cut down their military spending and impose new taxes[賦稅 收入] for filling in the losses. But the policies did not fit in the situation of the Song dynasty. The Song's government adopted the easiest way, it was the issuing a large amount of paper money.
Because of the perpetual war with the Jin dynasty, the Song's government needed a huge amount of military spending and the amount of issuing Huizi for the war was constantly increased. After the campaign to retake the north in 1206[開禧北伐],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exceeded one hundred million min[緡]. In spite of the increasing of the amount of issuing Huizi, if the reserve for exchange like as gold, silver, bronze and so on was enough, the value of Huizi might not have been decreasing. In the first year of Duanping[端平 元年, 1234], the Song dynasty confederated with Mongol and destroyed the Jin dynasty. However, the Song dynasty didn't obtain any reward from Mongol. The Song dynasty again made preparations for a war to retake the three major cities[三京收復]. The campaign was failed and it led to the all-out war between the Song dynasty and Mongol. The Song's government lost the opportunity to recover the national finances.
In the early stage of military expedition[親政] of Emperor Lizong[理宗], the two military campaigns imposed a heavy burden on the national finances. After the Mongol invasion, the Song government had to expend more military spending than before. Finally,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exceeded four hundred million min. The depreciation of Huizi caused lots of socio-economic problems, it caused a burden on the national finances. And the fall in the value of Huizi became more serious than before.
After the collapse of the Jin dynasty, the Song dynasty and Mongol enjoyed a small period of peace and rest. But the Song dynasty again made the war with Mongol to retake the three major cities. As the result of the Mongol Invasion, the vicious circle that the growing the fiscal deficits of the Song dynasty led to the expansion of the amount of issuing Huizi was reiterated. The Mongol invasion became a trigger to bring the all-out war between the Song dynasty and Mongol. Therefore, the Mongol invasion was the largest factor to affect Huizi in the late of the Song dynasty[晩宋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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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여성: 엠마 윌러드의 여성관과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

저자 : 김진아 ( Kim Geen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5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09-34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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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세기 여성 고등교육을 이끌어 갔던 엠마 윌러드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기 미국에서의 여성 고등교육의 확장과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고등교육 1세대 여성들은 여성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교육 노동자로 일하며 여성 고등교육 확장을 주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 윌러드를 포함한 이 시대 여성들은 미국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활동으로 기억되는 참정권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해 왔고, 이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이들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이는 지금까지의 여성사 연구 일체가 '영웅적 서사' 혹은 '비극적 서사'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통해 여성의 삶을 논의하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당시 교육 활동이란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왔던 가정 안에서의 양육 활동을 가정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교육 활동을 통해 여성의 공적 활동을 확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에 엠마 윌러드의 교육관이나 정치관, 여성관, 그리고 이와 관련한 각종 활동의 한계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초지일관 여성의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공화국의 여성 시민을 성장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In this paper, I discussed the expansions of women's higher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its meanings in women's history. For this work, I particularly investigated Emma Hart Willard's educational experiences in leading women's higher education. The first generation of women, who received higher education in the 19th century, became educational workers and led educational reforms after graduating from Female Seminaries or Academies. Despite such activities, their educational achievements were not well-noted, as they had conservative viewpoints of the suffrage movements, which have been remembered as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activities in American women's history. However, negative viewpoints toward Emma Hart Willard were grounded in the polarized frameworks of women's histories: Heroic narrative versus Tragic narrative. In this paper, I argued that educational activities were appropriate ways to prolong traditional domestic works; and these were also good strategies for women to participate in public work. Rather than pointing out the limitations of her perspectives on women, education, and politics, I highlighted the fact that Emma Hart Willard wanted to grow female citizens of the early Republic by focusing on particular areas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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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駕洛國記」와 '6伽耶' 성립 배경 검증

저자 : 이도학 ( Lee¸ Dohac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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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가 절대 부족한 가야사 연구에서 국내 사료인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의 내용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 가운데 6가야의 시조 誕降卵生說話는 「가락국기」에만 적힌 유일한 기록이었다. 여기서 비롯한 6가야설은 가야 단일연맹설의 근거가 되었다. 문제는 「가락국기」에 적힌 가야의 범위에는 6가야를 훨씬 넘는 諸國들이 산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 즉 加羅라는 국명을 지닌 정치체는 김해와 고령 2곳에 불과하였다.
그러면 6가야 시조설화는 언제 성립한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전승에 근거하여 신라 말~고려 초에 정리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곳 호족들이 반신라적인 명분으로 가야를 들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6가야 지역의 호족들 간에는 연대나 유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안라가야가 소재한 함안 지역의 호족은 신라에 대한 절의를 내세우면서 왕건에 대적하였다. 그리고 가야로 인식한 세력은 신라 말에도 2곳에 불과하였고, 시조 탄강설화도 6卵이 아니라 獨卵이 원형이었다. 고려 전기에 편찬된 「구삼국사」에 적힌 列國 가운데 沃沮와는 달리 가야는 수록되지도 않았다. 가야는 옥저보다도 존재감이 없었음을 뜻한다.
「가락국기」에 수록된 6가야는 고려 문종대인 11세기 후반에 왕실의 외척으로 득세하던 인주 이씨 세력과 엮어져 있었다. 수로왕을 공통의 시조로 하는 인주 이씨 세력에 의해 금관가야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6가야와 더불어 넓은 강역을 창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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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삼국 · 통일신라시기 광주 중심지 연구

저자 : 최영주 ( Young-joo Choi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71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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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광주지역의 삼국시기 중심지와 통일신라시기 무진주의 개발 시기와 양상을 살펴보았다.
광주지역에서 마한 시기에 해당된 유적은 3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엽으로 편년된다. 유적은 하천의 충적지와 구릉에 입지하여 농경을 기반으로, 토기·제철·옥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적 성격의 복합유적에 해당된다. 그중 하남동유적은 5세기대에 의례적인 성격을 보이는데 구사오단국의 중심지에 해당하며, 백제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의 대상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게 병합된 이후의 사비기에는 광주천 일대의 배후지를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각화동과 운림동고분군의 입지를 통해 고분 관련 집단의 세거지는 산사면 아래의 구릉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진주는 현재 금남로 일대로 1917년 지적원도에서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의 무진도독성은 무진주의 방리와 관청을 감싸는 나성으로 장방형의 형태로 추정된다. 범위는 동쪽과 서쪽은 동계천과 광주천으로 구분되며, 남쪽은 학동, 북쪽은 누문동의 경계로 보인다. 1방은 155m~160m 정도로 보이며, 장축(남북)은 13방~14방으로 약 2,400m 정도, 단축(동서)은 4방~5방으로 약 700m~1,000m 정도로, 전체 규모는 약 6,500m 정도로 추정된다. 무진주는 사벌주와 경주 도심 개발 양상을 통해 보면, 늦어도 7세기 후엽~8세기 초에 정비되기 시작하며 배후산성인 무진고성이 축조되기 이전인 8세기 후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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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간양록(看羊錄)』의 편간 과정과 내산서원 소장 필사본에 대한 분석

저자 : 안동교 ( Ahn¸ Donggy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9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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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姜沆, 1567-1618)이 17세기 벽두에 남긴 『간양록(看羊錄)』은 조선의 도학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실학자로 알려진 인물들에게도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의 기록에서도 『간양록』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17세기 중반에 『간양록』이 간행 보급된 이후, 이 책은 어떤 특정계층에만 국한되지 않아 조선의 유학자라면 두루 읽은 일종의 역사와 문화의 교양서였다.
현재 강항을 제향 하는 내산서원(內山書院)에는 1658년 목판본 『간양록』이 간행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사본 『간양록』이 소장되어 있다. 그간 학계에서는 이 필사본의 구성과 필사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으나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 필사본의 전승 과정과 필체 분석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였다.
필자는 이 필사본이 두어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필사본이 합사본(合寫本) 형태로 꾸며진 것이고, 필사자는 강항을 포함하여 4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또 필사본 『건거록(巾車錄)』에서 목판본 『간양록』으로 제목·목차·내용·체제 등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이 내산서원 필사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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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곡성 합강삼절(合江三絶)의 건립자와 역사적 함의

저자 : 박정하 ( Park Chung-ha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1-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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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합강은 섬진강과 옥과천의 물길이 만나는 지역으로 합강삼절은 합강지역에 자리잡은 합강정, 관이정, 무진정을 말한다.
정자의 주인이나 연대 등이 지리지에 나타난 정황과 씨족들의 계보를 수록한 족보(보첩)의 기록과 매우 상이한 면이 많이 나타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향토사적 측면이나 학문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대부분의 자료들이 이 같은 지리지 등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어 바로잡지 않으면 향후 후진이나 연구자들에게 혼선을 가져다 주게 된다.
본고에서는 각종 관찬, 사찬 지리지와 정자를 설립한 가문의 족보를 면밀히 검토하여 본 결과 많은 오류를 발견되었다.
삼강삼절 중 합강정은 1545년도를 전후한 시기에 유경안이 처음으로 설립했으며 그 위치는 옥과면 합강리 산 14-2번지 일대이며, 관이정 1530년대 윤부가 건립했으며 그 위치는 합강리 산 192-3번지인 것으로 파악되고, 무진정의 건축연대는 1751년이 아닌 1629년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특별한 점은 첫째, 합강삼절은 남원윤씨 문효공파 가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명문가와 혼인을 통해 수많은 인맥을 형성, 이들을 통해 전국적인 명사들이 찾아와 교유하면서 정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합강삼절은 조선시대 최대의 강변 유원지로 절경을 이루어, 주변을 다스리는 관장들이 찾아와 향음을 베풀고 교류하면서 「합강선유가」라는 가사문학을 양태 했다는 점이다. 셋째, 합강삼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누란의 위기 봉착되자 정자를 중심으로 분연히 일어서 의병으로 나가 충성하는 진원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담론이 생성된 곳이다는 점이다.
이처럼 합강정, 관이정, 무진정은 서로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상통하는 표식, 즉 아름다운 절경, 국가에 대한 충성심, 끈끈한 가문의 인맥이라는 이라는 배경이 '합강삼절'이라는 표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섬진강의 옛 지명인 순자강 유역 즉 합강에서 곡성읍 지역까지 합강삼절을 비롯해 약 20여개의 정자가 줄띠를 이루며 자리 잡고 번성했지만, 현재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한 편으로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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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 후기 태안이씨 의관 연구 - 사맹공파를 중심으로

저자 : 박훈평 ( Park Hun Pyeo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5-16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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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이씨 사맹공파는 조선 후기 기술직 관료를 구성하는 주요한 가계의 하나이다. 조사된 가계 내의 의관은 총 65명이었다. 선행연구에서 조사된 57명에 새로 8명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본 연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첫째, 의관 가계로서 17세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후반 전성기를 누렸고, 19세기에도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가계 내 의관은 1672년 의과에 급제한 인물이 처음이었다. 18세기 중반, 내의를 3명이나 배출하면서 의관 가계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18세기 중후반은 활동한 가계 내 인물이 의관이 19명에 달한다. 19세기는 점차 고위직에 오른 의관이 줄었지만 배출 의관의 수는 비슷하였다.
둘째, 사조 분석을 통해보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가계 내 세전 양상이 잘 나타난다. 사조 중에 의관이 없는 경우는 5례로 전체의 7.81%에 불과하다. 생년에 따른 활동 시기를 감안하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가계 내 세전 양상이 두드러진다.
셋째, 가장 많이 종사한 의학 관청은 전의감이었다. 해당 의관 중에 전의감이 최종 관력인 이는 42명으로 65.6%에 달한다. 『해혹변의』를 저술하게 된 배경도 이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다. 의관 가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가계 내 후진의 의과 대비에 더욱 노력했을 가능성이 있다.
넷째, 영조와 순조 때 의과의 급제 연령은 다른 의관 가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았다. 즉 세전 양상이 두드러진 시기에 급제 연령이 낮게 나타났다. 사맹공파 내에서 영정조기에 비하여 순조 대에 급제 연령이 높아졌다가 고종대에 다시 감소하는 추이도 세전과 급제 연령의 연소화와 관련시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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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9 직후 내각책임제 개헌논의와 '보수합동'

저자 : 김지형 ( Kim Ji Hyung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1-18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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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직후 내각책임제 개헌은 민주당 주도 하에 일사천리를 진행되었다는 통설과 달리 자유당과 이승만, 이기붕 등 여권에서 먼저 제기된 사실을 우선 주목하였다. 이른바 '정국 수습책'으로서 제시된 내각제 개헌론은 자유당의 입장에서 볼 때, 국회 해산을 방지할 강력한 명분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전통적 당론이었던 내각제를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최적화된 전략이었다. 특히 자유당 혁신파와 민주당 구파를 중심으로 '보수합동'의 원리에 따라 개헌논의의 주도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이 점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중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이 초기 보수합동의 균열을 야기한 측면이 있으나 이승만의 4.26 하야에 이어 4.28 경무대 퇴거라는 가시적 조치가 나타나면서 장면과 신파의 입장은 '현 국회 내에서의 개헌'으로 바뀌었고, 이후 내각제 개헌이 본격 추진되었다.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보수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보수합동 의식의 배경에는 3.15와 4.19의 원인을 이승만·자유당 독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중심제라는 제도의 문제 때문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였으며, 바로 이 점이 내각제 개헌론의 맹점이었다.
개헌 추진과정에서 드러난 보수합동의 모순점들도 확인된다. 부정선거사범에 해당하는 자당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담보로 몽니를 부렸으며 민주당은 속수무책으로 자유당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공소 만기를 하루 넘겨 개헌안이 통과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애초 민주당이 3.15 부정선거의 원흉인 자유당과 공조하는 순간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개헌 통과 후 7.29총선을 거쳐 제2공화국 장면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보수합동의 정치사적 귀착점에 도달했으나 불과 열달 만에 5.16쿠데타로 전복됨에 따라 내각책임제 구현의 이상도 함께 사라졌다. 이러한 정치사적 결과는 '권력 집중의 방지'를 명분으로 한 내각제 개헌이 그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견인한 보수합동이라는 가치의 당위성마저 의미 부여하기 곤란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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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로컬에서 1991년 5월투쟁을 다시 보기 :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저자 : 김봉국 ( Kim¸ Bong Guk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2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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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1년 5월투쟁을 서울지역의 경험이나 정치적 성패 차원의 논의에서 벗어나 '광주'라는 로컬의 위치와 감성적 주체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았다. 광주지역은 5·18의 경험과 감성의 자장 속에서 5월투쟁에 직면했다. 80년 '5월 청산'의 문제가 지연된 상태에서 5·18 문제는 지속적으로 지역민의 사회인식과 실천에 (무)의식적 영향을 미쳤다. 91년 5월투쟁 당시 투쟁의 리듬과 강도와 지속성이 다른 지역과 달랐던 배경에는 이처럼 지속된 5·18의 상흔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낳은 분노가 연이은 '열사'들의 죽음에 응답했기 때문이었다. 5월투쟁은 지역민들에게 반복되는 일상적 삶을 정지시키고 구조화된 삶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경험공간을 제공했다. 특히 애도와 투쟁의 리미널한 시공간은 지역민들에게 80년 5월의 '해방공동체'를 떠올리고 경험하게 했다. 또 하나의 5월로 경험되었던 5월투쟁은 광주시민에게 '5월 청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패'나 끝이 아닌 계속되어야 할 투쟁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결국 광주지역의 사례는 91년 5월투쟁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위치와 문맥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91년 5월투쟁에는 에른스트 브로흐(Ernst Bloch)가 '비동시성의 동시성(die Ungleichzeitigkeit des Gleichzeitigen)'이라고 말했던 바와 같이, 여러 시간대가 중첩되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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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청대 의약시장의 상업화와 '매약'

저자 : 최지희 ( Choi Jihee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1-26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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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대 이후의 중국의 대도시에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처방을 내려주면 환자가 약포로 가서 약재를 고르고 미리 제조된 매약(賣藥)을 사는 의약분업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그만큼 대중이 매약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즉 명청대의 의료 환경에서 약포와 매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9세기 이후에는 상인이 전문적으로 약포를 경영하고 매약을 판매하였다. 상인이 운영하는 약포에서는 일상생활의 갖가지 질병과 관련된 약을 제조했고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약품의 수요를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청대 후기 전염병이 유행하고 전란이 빈번하던 시기에는 이에 맞는 전염병 치료나 외과 치료와 관련된 약품의 종류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청대 사회에서 매약은 질병을 치료하는 약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상품이기도 했고 약포들은 매약이라는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사용했다. 약포는 약목을 출판하여 약포에서 생산하는 매약이 항상 검증된 좋은 약재를 쓰고 옛 약방을 준수하여 제조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약단이나 벽보같은 수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청말 근대 매체가 들어온 이후에는 신보와 같은 신문이 새로운 광고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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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860년대 중반 소형기선의 내지항행을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측과 총리아문, 상해당국의 논쟁을 중심으로 청말 양선의 내지항행에 대한 청정부의 입장과 대처를 분석해 보았다. 19세기말 서양과의 조약 체결에 따른 통상항 개항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청정부는 양선의 非통상항, 즉 內地로의 접근을 금지함으로써 대응하였다. 천진·북경조약 체결 이후 북경의 總理衙門은 재차 양선의 非通商港, 즉 內地(interior)로의 접근 및 교역을 일절 금지하였다. 즉, 양선은 오로지 통상항만 왕래하면서 교역할 수 있었다.
1865년 북경에서 프랑스공사 벨로네가 기선의 내지항행 허용을 요청하였을 때, 총리아문은 충돌사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완곡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그리고 상해통상대신 이홍장을 위시한 상해당국과의 긴밀한 협조 속에서 기선의 내지항행 금지를 견지하고자 했다. 상해당국은 이 문제가 國家稅釐, 商民生計와 직결되는 중대 사안이라 여겼고 이는 총리아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프랑스측 역시 물러서지 않고 조약 규정과 프랑스의 사례, 그리고 양선업의 화상 이익을 들어 기선의 내지항행 허용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의 뒤를 이어 상해통상대신에 부임한 증국번은 무엇보다 내지의 민선업으로 영위하는 商民의 생계를 내세워 기선의 내지항행에 반대하였고, 결국 청조중앙과 지방당국의 지속적인 반대 속에서 기선의 내지항행은 허용되지 않았다. 청말의 통상항 개항은 일견 그때까지 닫혀 있었던 중국이 서양에 개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정부가 양선을 통상항에 묶어둔 정책에서 생각해본다면, 통상항은 양선교역에 대한 제한이 관철되는 장소로서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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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방역과 자유 사이에서 : 1721년 영국 방역법의 형성과 개정

저자 : 주의돈 ( Euidon Joo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83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3-333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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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21년 제정된 영국의 방역법과 그것의 의학적 토대를 제공한 리처드 미드(Richard Mead)의 저술, 그리고 방역법의 핵심적인 조항을 둘러싼 논쟁과 그 조항의 폐지를 살펴본다. 1720-3년 마르세유를 시작으로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영국인들은 1665-6년의 런던 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을 떠올리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의회는 흑사병의 유입을 막기 위해 그리고 흑사병이 영국에 들어왔을 경우 그 확산을 막기 위해 1721년 1월에 새로운 방역법을 제정하였다. 당시 영국의 탁월한 의사 미드는 방역법의 이론적 토대와 실무적 지침을 제공하였다. 1721년 방역법의 특징은 영국 내로 흑사병이 유입되었을 경우 이전에 비해 매우 적극적인 조치 - 격리병원으로의 감염자 강제 이송, 방역선 설치를 통한 감염지역으로부터의 이동 제한 - 를 취하도록 규정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1721년 방역법 중에서 위의 적극적인 조치를 규정한 조항들이 여전히 프랑스 남부에서 흑사병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 폐지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존 연구에서 폐지의 주요한 이유로 간주되는 것은 흑사병 위협의 감소, 영국 상인들의 상업적 이해관계, 월폴(Robert Walpole) 내각과 반대파 사이의 정쟁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요소들이 방역법 일부 조항의 폐지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만 기존 연구가 간과해 온 요소에 주목한다. 그것은 방역법 반대파의 정치공세 이면에 존재했던 부유층의 특권의식이다. 반대파는 방역법의 일부 조항이 강압적이기 때문에 영국민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상 그 자유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생계에 대한 염려 없이 감염지역으로부터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부유층뿐이었다. 따라서 국내 방역 대비책을 규정한 조항의 삭제에는 부유층의 특권의식을 대변한 의회 의원들이 영향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흑사병이 영국으로 유입되지 않고 1720-3년의 위기가 지나갔지만, 만약 흑사병의 유입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면 1721년 방역법의 일부 조항 폐지는 특권 의식에서 비롯한 뻐아픈 실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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