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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문서학회> 고문서연구> 박태보의 자기비첩소생(自己婢妾所生)의 신분 귀속에 대 한 인식 - 「단송안(斷訟案)」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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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의 자기비첩소생(自己婢妾所生)의 신분 귀속에 대 한 인식 - 「단송안(斷訟案)」을 중심으로 -

Awareness of the Status Attribution of His Slave’s Concubine(自己婢妾所生) during the Joseon Dynasty - Focusing on Park Tae-bo(朴泰輔)’s “Dansong-an(斷訟案)” -

한상권 ( Han Sang-kwon )
  • : 한국고문서학회
  • : 고문서연구 59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93-127(35pages)
고문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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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伊川縣監 시절 판결
Ⅲ. 법률 개정을 위한 노력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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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輔(1654∼1689)는 강원도 伊川縣監 시절인 1684년(숙종 10) ‘자기비첩 소생 論介를 放良한다’는 판결을 하였다. 이는 비첩소생이 보충대에 ‘入屬하면 從良’, ‘입속하지 않으면 私賤’이라는 현행법과 상치되는 판결이었다. 논개는 보충대에 입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54년(명종 9) 반포된 「甲寅受敎」는 嫡族이 비첩소생을 사역하는 것은 骨肉相殘으로 인륜상의 문제가 있다고 보아 사촌까지는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同氣라 할지라도 5촌을 넘으면 사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박태보는 「갑인수교」가 骨肉의 사역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人情에 배치되며 또한 『經國大典』의 ‘本意’와도 상충한다고 보아 논개를 종량 판결한 것이다. 박태보는 중앙 정계로 복귀한 뒤 筵中啓辭를 올려 법문 개정을 국왕에게 아뢰었다. 그 결과 1687년(숙종13) 「丁卯受敎」가 반포되어, 비첩소생이 보충대에 ‘入屬하면 從良’, ‘입속하지 않으면 公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규정은 『續大典』에도 수록된다.
In 1684,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Park Tae-bo (1654-1689) who was a prefect of Icheon(伊川) in Gangwon-do Province ruled that “Non-gae who is a slave’s concubine should be emancipated.” This was contradictory to the law at that time, which states that “if a salve could be a part of Bochungdae(補充隊) he may be emancipated, otherwise he should stay as private slave.” According to “Gapinsugyo(甲寅受敎)” which was announced in 1554 (the 9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noble class prohibited his cousin from serving as a slave because it was against human right. However, even if both are cousin, it was allowed the noble class to use his relatives as salve who are his cousin’s son or daughter. Park Tae-bo made a decision of releasing Non-gae given that “Gapinsugyo(甲寅受敎)” was not in accordance with human right as well as a spirit of “Gyeonggukjeon(經國大典)”. After his returning to the central political arena, Park Tae-bo appealed to the king to amend the law by reporting “Yeonjoonggyesa(筵中啓辭)”. As a result, “Jeongmyosugyo(丁卯受敎)” was declared in 1687(13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ich stated that “if a salve could be a part of Bochungdae he may be emancipated, otherwise he should stay as public slave.” This regulation is also included in “Sokdaejeon(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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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900-00078130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598-3218
  • : 2671-8081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1-2022
  • :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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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권0호(2022년 02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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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주(公州) 초려가(草廬家) 소장 장택기(葬擇記) 사례 연구

저자 : 김향숙 ( Kim Hyang-so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7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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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公州 草廬家에 소장된 葬擇記의 사례연구이다. 草廬家가 위치한 충남 공주시 중동골은 忠淸五賢이자 畿湖禮學의 대가인 草廬 李惟泰 선생이 45세에 寓居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이 일대는 慶州李氏의 世居地이다. 草廬家에는 초려 선생의 아버지인 25世 李曙로부터 36世 李圭憲까지 이어지는 400여년의 공주 경주이씨 가문의 역사자료를 모아 놓은 고문헌 총 168건이 전래되고 있다. 초려가 고문헌은 고서 47건과 고문서 121건으로 大別되는데, 고문서 121건 중 34건이 葬擇記에 해당된다. 이처럼 葬擇記의 높은 소장 비율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자료관의 여타 가문별 고문서 소장현황과 비교해 볼 때 초려가 고문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초려가 葬擇記의 서식적 특징과 내용적 특징을 통해 조선시대 기호예학 가문이 남긴 葬擇記의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This paper is a case study of JangTaekgi(葬擇記), which is in the collection of the Gongju Choryeo family(草廬家). Jungdonggol, Gongju-si, Chungcheongnam-do, where the family is located, is the place where Professor Choryeo(草廬) Yi Yu-tae(李惟泰), a scholar and master of the Confucian Academy, nurtured junior students at the age of 45.
A total of 168 ancient documents are handed down to the 草廬家, a collection of historical materials of the 400-year-old Gyeongju Yi family from the 25th generation 李曙, the father of Choryeo, to the 36th generation 李圭憲.
Choryeo family's list of ancient documents is 168 in total, with 47 old books and 121 ancient documents. As such, the high collection ratio of 葬擇記 is a characteristic of Choryeoga ancient documents compared to the current status of collections of ancient documents by other families in the Archives of the Central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Studies.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introduce a case of 葬擇記 that was left by the Choryeo family in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and content characteristics of the Choryeo family's 葬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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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한제국기 조서(詔書)의 발급 과정 연구 - 1908년(융희 2) 진종(眞宗)·헌종(憲宗)·철종(哲宗) 추존칭경진하(追尊稱慶陳賀) 조서(詔書)를 중심으로 -

저자 : 노인환 ( Noh Inhwa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9-61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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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詔書는 조선시대 국왕의 敎書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령을 수록한 가장 권위 있는 문서이다. 본고는 1908년(융희 2)에 순종이 진종·헌종·철종을 황제로 추존한 후 稱慶하고 陳賀하기 위해 반포한 조서와 제진단자를 통해 대한제국기 조서의 발급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황제는 조서의 발급을 결정하면 먼저 조서 제술관을 임명하였다. 대한제국기 관직 제도의 변화에 따라 조서를 제술하는 아문은 경연청, 경연원, 홍문관, 규장각으로 변화하였다. 조서 제술관은 조서의 내용을 제술한 후에 황제의 啓下를 받기 위해 제진단자로 작성하였다. 「啓字奏請規則」에 따라 궁내부대신이 제진단자를 황제에게 入啓하면 황제는 제진단자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 小啓字印과 籤紙로 수정하고 啓字印을 답인하여 계하하였다. 황제의 계하 후에 조서 서사관이 조서의 내용을 書寫하고 궁내부에서 皇帝之寶를 안보하면 최종적으로 조서가 발급되었다. 황제가 친림하거나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 권정례로 조서를 반포한 후 관보에 조서를 게재하여 전국으로 전달하였다. 1908년 眞宗·憲宗·哲宗 追尊稱慶陳賀 詔書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상황에서 발급된 황제의 조서지만, 대한제국기 조서를 발급하는 문서 행정과 제도를 확인할 수 있으며 황제지보가 안보된 유일한 문서라는 점에서 자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Joseo(詔書)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is the most authoritative document that includes the emperor's order as with the king's Gyoseo(message, 敎書) in the Joseon Dynasty. This thesis aims to examine the process of issuing Joseo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through Joseo and Jejindanja that were issued for celebrating and offering congratulations after Sunjong honored Jinjong, Heonjong, and Cheoljong as emperors in 1908(2nd year of Yunghui). Once the emperor decided to issue Joseo, he first appointed Joseo Jesulgwan. According to the revision of the government post system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the public offices for writing Joseo were changed to Gyeongyeoncheong, Gyeongyeonwon, Hongmungwan, and Gyujanggak. After writing the contents of Joseo, the Joseo Jesulgwan wrote Jejindanja to get a Gyeha(approval, 啓下) from the emperor. If the Gungnaebu Daeshin offered(Ipgye, 入啓) the Jejindanja to the emperor by following the rules of Gyejajucheong(啓字奏請規則), the emperor reviewed the contents of Jejindanja, modified it with Sogyejain(stamp, 小啓字印) and Cheomji(tag, 籤紙), and finally approved it by stamping the Gyejain(啓字印) on it. After getting the approval from the emperor, the Joseo Seosagwan transcribed the contents of Joseo, stamped the Great Seal of Korean Empire(皇帝之寶), and finally issued the Joseo. After issuing the Joseo in the ceremony with or without the emperor, it was published in the official gazette, and issued in the whole nation. Even though the emperor's Joseo was issued in the process of Japan's pillage of the national sovereignty of Korean Empire, this study was able to verify the document administration and system of issuing Joseo in the period of Korean Empire, and Joseo has the value of material as the only document that includes the Great Seal of Kore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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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선원록(璿源錄)』을 통해 본 성종 공주·옹주 후손의 혼인 양상과 그 성격

저자 : 양정현 ( Yang Jung-hy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3-90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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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으로부터 파생된 異姓 후손의 범주에 포함되는 공주·옹주 계열의 후손 집단은 宗姓 후손과 달리 법제적으로나 혈연적으로 왕실과의 연결 관계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특징으로 인해, 조선 왕실의 제도적 내지는 현실 관행적 측면의 인원 범주 규모나 집단의 성격을 검토할 때 부차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선원록』에 기재된 성종 공주·옹주 후손의 혼인 양상을 분석한 결과, 세대의 흐름에 따라 잠정적으로 왕실 테두리 바깥으로의 퇴출이 예정된 인원으로 간주되었던 이성 후손의 경우, 오히려 혼인을 통해 왕실의 혈맥을 연장해나가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관료층을 흡수함으로써 집단의 사회적 위상을 가시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왕의 이성 후손이 『선원록』에 등재된 후손을 배우자로 맞이하면서 왕실 혈연의 중첩이 발생하는 경향은 자신보다 국왕에 가까운 대수와 혼인함으로써 『선원록』에 지속적으로 등재되어 왕실의 후손이라는 법제적, 사회적 지위를 영유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에서 왕실의 인원 범주를 국왕으로부터 6대로 제한한 원칙으로 표상되는 혈연의 비영속성은 관념적 위상의 소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회경제적 이권과 결부된 파장을 야기했다. 따라서 후손 집단의 관점에서는 세대가 이어짐에 따라 국왕으로부터의 혈연적 농도가 옅어질수록 집단 내부의 혼인을 통해 재차 왕실의 중심부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The descendants of the Gongju(公主) and Ongju(翁主) were treated secondary to the review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Joseon royal family as the connection with the royal family was relatively loose, both legally and bloodily. Based on the above problem consciousness, the marriage pattern of the descendants of Gongju(公主) and Ongju(翁主) in the Seonwonrok(璿源錄) was analyzed. As a result, it was confirmed that the social status of the group was visible by continuing to absorb the bureaucracy while inheriting the royal family through marriage. The tendency to welcome the descendants recorded in the Seonwonrok(璿源錄) as spouses was a phenomenon reflecting the willingness to maintain the social status of the royal descendants by marrying a close relative to the king and continuously recording them in the Seonwonrok(璿源錄). The discontinuity of royal bloodlines was not only the extinction of ideological status, but also the problem associated with the socioeconomic interests of reality. Therefor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descendant group, as the blood distance from the king became farther away, attempts were made to approach the center of the royal family through marriage within the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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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선후기 토지거래의 비교사적 의미 - 인간관계와 가격윤리의 측면에서 -

저자 : 이용훈 ( Lee Yong Hoo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1-125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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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토지 매매는 유럽보다 이른 15세기에, 일정 정도의 토지 사유를 전제로 한 상황에서 허용되었다. 본 연구는 비교사적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조선후기 토지거래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인간 관계와 가격윤리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았다.
영호남 농촌지대에서 토지거래는 경기지역에 비해 지역사회 내부의 대면관계에서 거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토지매매는 급전이 필요한 농민들의 자구책으로 허용되어 농민보호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처지가 어려운 사람이 방매하려는 토지를 헐가매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가격윤리가 존재하였다. 즉 조선후기 상황은 유럽에서의 토지상품화와 다른 맥락에 있었다. 조선후기 농촌 구성원들은 생계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유롭게 토지를 매도하여 활로를 찾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위기를 넘어서면 다른 토지를 매득하여 생계를 도모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활발히 이뤄졌던 토지매매는 토지의 용이한 처분ㆍ매입을 통해 가계상황에 대응하는, 생계주기 순환의 윤활유로서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In the Joseon, land transactions were allowed earlier than in Europe under the premise of a certain degree of private land ownership. This article microscopically approached the meaning of this through keywords such as personal relationships and price ethics.
In rural areas of Yeongnam and Honam, land transactions were relatively common among people within the local community. In some cases, face-to-face transactions between relatives and acquaintances were not carried out purely depending on economic calculations. In this face-to-face relationship, it was socially and ethically required that land transaction prices be set generously. The reason was that land transactions were allowed as a self-rescue measure for peasants in need of emergency funds, and thus were in charge of some of the peasants protection functions.
This situation is the opposite of that face-to-face transactions often result in price discounts in modern society. The situation in Joseon may have arisen from the relatively low demand for land. In other words, it means that it is difficult to see land transactions in the late Joseon in relation to land commercialization that progressed in Europe. Land transactions, which were actively conducted in the late Joseon, could have a certain meaning as a lubricant for the family's life cycle, responding to household conditions through easy disposal and purchase of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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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선후기 면주전의 인센티브 체계 - 포상 및 처벌의 규정과 실제 -

저자 : 조영준 ( Cho Young-ju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7-15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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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표적 상인 단체인 市廛의 구성원에 대한 인센티브 체계의 실제를 구명하고자, 가와이문고에 소장된 綿紬廛 자료를 집중적으로 활용하여 포상과 처벌의 양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면주전에서는 포상을 위해 「賞帖」을 발급하였으며, 이를 謄書한 자료가 『各項賞案』이다. 포상금의 지급은 銀子를 통하는 형식이었으나, 실제로 지급된 것은 아니고, 장부상으로만 관리되었다. 禮錢의 납부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장부에서 차감하는 방식의 計減이 이루어졌고, 그 내역은 『各項禮捧冊』에 기록되었다. 면주전의 포상은 후대로 갈수록 전반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갑오개혁에 따른 시전의 貢納 기능 소멸과 관계되며, 그후로 이루어진 은자 지급은 포상이라기보다는 통상적 업무 수행에 따른 보상의 성격에 한정된다. 면주전의 처벌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작성된 문서는 찾기 어렵지만, 「代定帖文」을 통해 처벌의 사유 및 조치 결과를 일부 시기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처벌 시행의 상세한 내역을 장기적으로 파악하려면 면주전 大房의 지출 장부를 보면 되고, 대표적 사례가 『補用所上下冊』이다. 면주전의 처벌은 다양한 유형으로 시행되었으나, 疊罰을 배제하고 解罰을 상례화하는 등 상당히 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削黜이나 損徒와 같은 처벌의 명칭과 관계없이 벌금형을 위주로 하였다. 여타의 시전이나 貢契 및 褓商·負商 등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일부 공통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면주전의 사례는 규정을 넘어서 실태까지 소상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In order to investigate the reality of the incentive system for members of sijŏn, a representative merchant guild in late Chosŏn Korea, myŏnjujŏn documents stored in the Kawai Collection were intensively used to examine both aspects of reward and punishment. Myŏnjujŏn issued sangch'op for the reward, and the documentary material for this was kakhangsang'an. The payment of the reward was in the form of silver ingot, but it was not actually paid, and was managed only on the account books. When there was a situation where the payment of yejŏn was required, the amount was deducted from the ledger, and the details were recorded in the kakhangyebongch'aek. The rewards of myŏnjujŏn show a general tendency to decrease as time went on. This seemed to be related to the abolition of tribute system in accordance with the Kabo Reform, and the subsequent payment of silver ingot was limited to the compensation for ordinary rotation of duty rather than rewards. Although it is difficult to find direct documents on the punishment of myŏnjujŏn, the reasons for the punishment and the action results can be discovered for some period through the taejŏng-ch'emun. In order to understand the details of the punishment enforcement in the long term, we can look at the expenditure ledger written by taebang of myŏnjujŏn, and a representative example is poyongsoch'ahach'aek. The punishment of myŏnjujŏn was implemented in various types, but it seems to have been fairly generous, such as excluding double punishment and making amnesty a common practice. In addition, regardless of the name of punishment, fines were mainly imposed. Compared to other merchant communities, there were some commonalities, but also various differences. In particular, the case of myŏnjujŏn is meaningful in that it goes beyond regulations and informs the actual situation in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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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49년 청주 목관 문서

저자 : 김현영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65 (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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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선사주내로선전소식(修禪社主乃老宣傳消息)에 대한 고찰

저자 : 조남곤 ( Jo Nam-go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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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시대 고문서인 「修禪社主乃老宣傳消息」을 판독하고 그 내용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松廣寺奴婢文書로 불리어 온 이 고문서는 지금까지 문서의 종류와 성격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는데 본고에서는 이것이 宣傳消息의 일종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국어학계 일각에서는 이 문서의 판독이 남풍현(1974/2000)에서 완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잘못 판독한 초서자들을 實證的 方法으로 정밀하게 판독하였고 지금까지 미제로 남아 있던 8행의 마지막 글자에 대해서도 草書 形態와 文理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실증적인 판독을 하였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 爲로 판독한 10행의 安邀 뒤의 글자도 자형과 문리, 작성자의 필법의 특성을 고려하여 새롭게 판독하였다.
이러한 판독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 고문서에 쓰인 敎定別監, 出納과 같은 고려시대의 제도적 용어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어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이두 敎/敎是의 문법적 용법을 기술하였고, 조선시대에 기관이나 행정 단위 명사 뒤에서 주격조사로 쓰인 以가 音借字로 이미 13세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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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 병증록(病症錄)의 문서학적 고찰

저자 : 김정수 ( Kim Jeong Su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6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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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조선시대의 병증록 문서 87건을 고문서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관·사찬 문헌을 통해 병증록의 실제 이용 사례를 분석한 것이다. 병증록은 환자 측에서 신상정보·과거 병력·복용 약력·병의 증상 등을 적어 약 처방이나 치료법을 묻거나 질병 상담을 목적으로 의료인에게 작성해 보낸 문서이다.
민간에서 병증록은 환자 측에서 왕래망을 통해 간찰과 동봉하여 보내거나, 혹은 단독으로 보내졌고, 의료인은 병증록이나 별도의 종이에 약방문을 적어 환자 측에 돌려보냈다. 환자 측에서는 이를 근거로 조제와 탕전 등을 거쳐 약을 복용했다. 왕실에서는 내의원 의관의 요청에 따라 궐내의 왕실 구성원이 병증록을 작성해 내려보내면, 이를 근거로 議藥 및 처방이 이루어졌으며, 궐외의 의관이 왕실 구성원이나 대신의 병을 진단하고 약을 요청하거나, 병증을 보고할 때는 병증록을 書啓單子로 대체하여 작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병증록은 문서 형태상 낱장형과 점련형으로 나뉜다. 구성요소는 환자의 성별·생년·나이 등의 신상정보를 필두로 하여, 병력·복용 이력·약 처방을 요청하는 종결어 등이 있다. 서체상 소지류 문서와 유사한 특징을 보이며, 작성 과정에서 의료인의 약방문을 작성할 공간을 사전에 마련해 보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증록은 한문, 국·한문혼용, 한글로 작성되었는데, 특히 한글은 어린아이나 여성 등의 병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효율적으로 이용되었다.
본 연구는 병증록을 고문서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생활의약사 방면에서 병증록을 통해서 이루어진 조선시대 의약 문화의 일단을 드러냄으로써, 역사학과 의학사 방면에서 소외되었던 병증록의 사료적 가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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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주 교동 최씨가 소장 추수기(秋收記)·수세기(收稅記) 자료의 전존 현황과 특성

저자 : 최주희 ( Choi Joo Hee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63-9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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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 최씨가[최부자댁]에서 소장하고 있는 334건의 추수기·수세기 자료는 교동 최씨 가의 지주 경영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군이다. 이중 274건은 경주시와 울산 북부 지역 일대의 논에서 지대를 수취하기 위해 작성된 추수기 자료들이다.
최씨가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干支를 기준으로 작성연대를 추정하였을 때, 19세기 후반부터 일제시기 전반에 이르는 시계열 분포를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 같은 해에 작성된 여러 형태의 추수기가 남아 있고, 추수기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셋째, 일제시기까지 대부분의 논에서 打租의 방식을 적용하여 추수기를 작성하였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지대수취 방식은 대부분 執租와 賭租인데 반해, 교동 최씨가의 추수기는 作人과 種子, 稅米까지도 공동 분담하는 형식을 띤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추수기 상에 作人과 斗落, 種子·卜價를 먼저 쓰고, 추수 후 이를 공제하여 반분한 내역을 나중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추수기를 작성하였다. 실제로 경주지역 작인들 사이에서 최씨가의 지대수취 방식을 '단갈림한다'고 표현하였다.
한편 교동 최씨가에서는 밭작물인 보리와 콩 수확을 관리하고 지대를 수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별도의 수 세기를 작성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수만 60점으로 확인된다. 추수기에 대한 다양한 사례 연구가 발표된 바 있지만, 밭작물의 지대수취 내역을 이처럼 오랜 기간 수세기 형식으로 작성한 경우는 드물다.
일부의 사례를 검토한 것이기는 하지만, 최씨가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평균 지대량은 당대 다른 지역의 지대량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반면 작인에게서 거둔 보리와 콩의 평균 지대량은, 도조의 방식으로 수취하였기 때문에 절대 생산량을 짐작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적은 액수로 파악된다. 이는 최씨가에서 가경지를 제외한 나머지 밭을 작인들에게 대여해주고 최소한의 지대만 수취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처럼 최씨가의 지주 경영은 당대 다른 지역 사례와 차별되는 측면들이 있다. 본고에서는 전체적인 자료의 현황과 작성방식을 분석하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향후에는 본고에서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구체적인 지대량의 추이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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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태보의 자기비첩소생(自己婢妾所生)의 신분 귀속에 대 한 인식 - 「단송안(斷訟案)」을 중심으로 -

저자 : 한상권 ( Han Sang-kwon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93-12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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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輔(1654∼1689)는 강원도 伊川縣監 시절인 1684년(숙종 10) '자기비첩 소생 論介를 放良한다'는 판결을 하였다. 이는 비첩소생이 보충대에 '入屬하면 從良', '입속하지 않으면 私賤'이라는 현행법과 상치되는 판결이었다. 논개는 보충대에 입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54년(명종 9) 반포된 「甲寅受敎」는 嫡族이 비첩소생을 사역하는 것은 骨肉相殘으로 인륜상의 문제가 있다고 보아 사촌까지는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同氣라 할지라도 5촌을 넘으면 사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박태보는 「갑인수교」가 骨肉의 사역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人情에 배치되며 또한 『經國大典』의 '本意'와도 상충한다고 보아 논개를 종량 판결한 것이다. 박태보는 중앙 정계로 복귀한 뒤 筵中啓辭를 올려 법문 개정을 국왕에게 아뢰었다. 그 결과 1687년(숙종13) 「丁卯受敎」가 반포되어, 비첩소생이 보충대에 '入屬하면 從良', '입속하지 않으면 公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규정은 『續大典』에도 수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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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쟁에서 송관의 역할 - 최소한의 개입 -

저자 : 전경목 ( Chon Kyoung Mok )

발행기관 : 한국고문서학회 간행물 : 고문서연구 5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48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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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본고에서 1801년 정월에 부안현에서 김기정(金基正, 1773~1811)에게 발급해 준 '결입안'을 분석해서 그와 강재태(姜在泰, 1769∼?) 사이에 벌어진 우반동 가사 등에 대한 환퇴(還退) 분쟁에 대해 살펴보겠다. 부안현에 거주하던 강재태와 김기정은 각기 전라감사(全羅監司)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우반동에 있는 부안김씨 종가의 가사(家舍)와 전답 등의 환퇴를 놓고 다투고 있는 중이었는데 서로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각각 탄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른 양 당사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결국 타협하지 못하고 관아에 탄원서를 제출할 경우, 절차에 따라 소송을 진행하여 판결한 후 그 과정과 결과를 입안으로 작성해 주었는데 이것을 결송입안이라 했다. 이와 달리 양 당사자가 소송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을 규명한 후 조정을 통해 처분하고 그 결과를 간단하게 탄원서에 기록해 주었는데 이를 입지라 했다. 후자의 경우에도 간혹 조정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해 주기 원하면 입안을 발급했는데 이때 작성한 입안을 결입안이라 했다. 결송입안과 결입안의 차이점은 전자에는 양 당사자가 소송을 시작하면서 작성하는 시송다짐과 소송을 마치고 판결을 요청하는 결송다짐이 첨부되어 있는데 후자에는 소송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소송 과정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소송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범법 사실들이 드러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송관들은 이를 요즈음의 별건 사건으로 간주해서 가급적이면 이에 대해 더 이상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현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채 범법 행위를 끝까지 색출하겠다는 생각에 충만한 수령들은 간혹 이 별건 사건들을 조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저지르는 폐해가 오히려 컸다. 그래서 조선후기 목민서에서는 소송의 확대를 크게 경계하고 오로지 본질적인 것만을 조사해서 해결토록 하는 최소한 개입을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담당 송관들이 무능하거나 부패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조선후기 지방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된 것은 송관의 최소한의 개입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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