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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서평】『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2021,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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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2021, 푸른역사]

나종현
  • : 한국사상사학회
  • : 한국사상사학 6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211-225(15pages)
한국사상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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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100-000787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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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944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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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권0호(2022년 08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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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작의 『안락집』에 제시된 두 가지 주장에 대한 후대의 관점-『유심안락도』·순지·요세·나옹·경허를 중심으로

저자 : 이병욱 ( Lee By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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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도작의 『안락집』에서 제시된 두 가지 주장을 소개하고, 그 주장에 대한 후대의 관점을 살펴본다. 첫째, 도작의 『안락집』에서는 도솔천에 태어남과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남을 회통한다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남이 도솔천에 태어남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한 것이 『유심안락도』와 『경허집』이다. 『유심안락도』에서는 사람의 성품에 따라서 도솔천에 태어남이 쉬울 수 있고,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남이 쉬울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경허집』에서는 이처럼 견해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경전과 논서에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방편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느 견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도작의 『안락집』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견해를 제시한다. 도작은 공사상에 근거한 정토사상과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제시한다. 이것은 상근기 수행자는 유심정토에 들어가고, 중근기와 하근기 수행자는 유심정토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모습의 정토[相土]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도작은 하품(下品)의 중생, 곧 중근기와 하근기 수행자도 유심정토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염불 수행을 통해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도작의 주장은 충돌된다. 이러한 도작의 주장에 대해 순지는 공사상에 의거한 정토사상과 유심정토를 수용하고, 원묘국사 요세는 유심정토를 제시한다. 그에 비해 나옹혜근은 염불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도작의 서로 충돌하는 견해는 한쪽은 순지와 요세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나옹혜근으로 이어진다.


In this article, I introduce two arguments presented in Daochuo(道綽)'s Paradise Collection(安樂集), and look at the perspectives of later generations about two arguments. First, in Daochuo's Paradise Collection, it is said to reconcile being born in tuṣita heaven and being born in the western paradise of pure land, but in fact, being born in the western paradise of pure land is superior to being born in tuṣita heaven. Yusimanlakdo(遊心安樂道) and Gyeongheojip(鏡虛集) have specifically answered these two arguments. In Yusimanlakdo, it can be easy to be born in tuṣita heaven, and it can be easy to be born in the western paradise of pure land, according to a person's personality. And in Gyeongheojip, it is said that this difference of opinion occurs because the scriptures and treatises use expedients to guide sentient beings. So, it is said that there is no need to stick to one view. Second, in Daochuo's Paradise Collection, a conflicting view are presented. Daochuo presents the pure land idea based on śūnyatā and citta-mātra pure land. This leads to the superior faculties entering citta-mātra pure land, and middling and lesser capacity entering the form of pure land without knowing the meaning of citta-mātra pure land. However, it is said that even the lower level of sentient being, that is, middling and lesser capacity, can realize the principle of non-living through remembrance of the buddha, even if they do not know the meaning of citta-mātra pure land. At this point, Daochuo's argument is conflicted. In response to this claim of Daochuo, Sunji accepts the pure land idea based on śūnyatā and citta-mātra pure land, and Yose presents citta-mātra pure land. On the other hand, Naong claims that one can reach the world of enlightenment through remembrance of the buddha. In this way, Daochuo's conflicting views lead to Sunji and Yose on one side, and Naong on the other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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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 고대의 정토신앙과 신정도시(神政都市)

저자 : 조경철 ( Jo Gyung-cheol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35-6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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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익산을 미륵정토의 도시 신도(神都)로 만들었다. 미륵사의 3개의 탑은 하생한 미륵이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 심으면 일곱 번 수확한다는 일종칠확의 미륵경의 내용을 떠올리는 미륵사의 1천 3백여개의 7엽의 녹유연목와는 풍요로운 미륵정토의 구체적인 모습을 모여주고 있다. 미륵사의 쌍석탑은 법화경 견보탑품에 근거한 것으로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이 어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문왕은 동경에 여러 개의 이불병좌상을 조성하였다. '금륜' 즉 전륜성왕을 자처한 문왕은 구국-중경-상경-동경 등 사방으로 수레를 몰며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 발해의 통합을 도모했다. 마지막 동경에서는 석가불과 동방의 부처인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있는 이불병좌상을 여럿 만들어 동경이 전륜성왕(과 미륵)이 다스리는 부처님의 도시 신경(神京)임을 드러냈다. 발해 동경에서도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이 어우러져 있는데 이는 백제(와 신라)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후고려 궁예는 철원에 처음 도읍을 정했다가 개경으로 옮긴 후 다시 철원으로 옮겼다. 다시 철원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서울 신경(新京)이라 했는데 이는 이전 철원이 미륵을 자처한 궁예가 통치하는 미륵의 도시 신경(神京)이 되었다는 의미다. 궁예는 철원에 발삽사를 세워 미륵과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를 안치하고 별자리 신앙 특히 북두칠성 신앙을 강조했다. 특히 발삽사는 바로 '발타(勃陀=Buddha, 부처, 불)'의 발(勃), 삽다(颯哆=Sapta, 7)의 삽(颯) 두 글자에서 따왔다고 생각한다. 곧 '발타삽다'의 줄임말 발삽으로, 발삽은 번역하면 불칠(佛七), 곧 칠불(七佛)이 된다.
백제의 무왕은 익산에, 발해의 문왕은 동경에, 후고려 궁예는 철원에 미륵정토의 도시 신도 또는 신경을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미륵신앙을 주로 하면서 법화신앙과 점찰신앙 치성광여래 신앙 등등이 나라 사정에 따라 결합되었다. 그러나 세 나라 세 왕이 모두 죽은 뒤 신정도시는 계속 계승되지 못하였다.


King Mu of Baekje built Mireuksa Temple in Iksan and made Iksan the city of Mireuk Pure Land as a God city. The three pagodas of Mireuksa Temple mean that the descendant Maitreya rescues sentient beings through three sermons. The 7-leaf lotus-patterned tile of Mireuksa shows the world of Mireuk Jeongto, where once a seed is sown, it can be harvested 7 times. The twin stone pagodas of Maitreya Temple are based on the Lotus Sutra, and it can be seen that the Maitreya faith and the Beophwa faith are in harmony.
King Mun of Balhae created several two Buddhas sitting side by side in Donggyung[東京]. King Mun, who claimed to be the 'Geumryun', or the Holy king driving a cart[轉輪聖王], drove a cart in all directions such as Guguk[舊國], Chongqing[中京], Sanggyeong[上京], and Donggyung, spreading Buddhism and promoting the unification of Balhae. In the last Donggyung, he made several two Buddhas sitting side by side in which Shakyamuni Buddha and Buddha Dabo sit side by side, revealing that Donggyung is the God city of the Buddha, ruled by the King of Wheels (and Maitreya). Even in Donggyung of Balhae, the Maitreya faith and the Beophwa faith are mixed, which is thought to be the influence of Baekje (and Silla).
Hu-Goryeo[後高麗] Dynasty, Gungye first established the capital in Cheorwon, then moved to Gaegyeong and then to Cheorwon again. When it was moved back to Cheorwon, it was called the new Seoul[Singyeong, 新京], which means that the former Cheorwon became the God City[[Singyeong, 神京] of Maitreya, ruled by Gungye, who claimed to be Maitreya. Gungye built a Balsapsa temple in Cheorwon to enshrine the Buddha Chiseonggwang, which symbolizes Maitreya and the North Star, and emphasized the belief in the constellation. In particular, I think that Balsapsa[勃颯] Temple is derived from the two letters 'balta' (勃陀=Buddha) and sapta(颯哆, 7). Balsapsa can be called Chilbulsa[七佛寺].
King Mu of Baekje tried to establish a city of Mireukjeongto in Iksan, King Mun of Balhae in Donggyung, and Hu-Goryeo in Cheorwon. While the Maitreya faith was mainly practiced, the Beophwa faith, the Divination religion, the Buddha Chiseonggwang faith, etc. were combined according to the circumstances of the country. However, after the death of all three kings of the three kingdoms, Citys ruled by Gods[神政都市]did not continue to succ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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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본정토사상의 범부관(凡夫觀)

저자 : 김춘호 ( Kim Choon-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66-93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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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본정토사상을 이끌었던 호넨(法然), 신란(親鸞), 잇펜(一遍)의 범부관을 살펴보았다. 특히, 호넨의 전수염불(專修念佛), 신란의 타력신심(他力信心), 잇펜의 십일불이(十一不二) 사상이 그들의 범부관과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구명하여 일본정토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자하였다.
호넨은 인간내면의 범부성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강조한다. '정토문(淨土門)은 우치(愚癡)로 돌아가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다'라고 한 그의 말에서처럼, 범부로서의 자각을 중시하며, 이는 '자각형 범부관'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아미타불이 여러 선행이나 지혜, 지계 등을 본원으로 하지 않고, 칭명염불을 선택한 것은 범부의 왕생을 위한 것인 까닭이라고 하여 오로지 칭명염불의 전수(專修)를 주장한다.
신란은 범부중생이 염불이라는 수승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미타불에 의해 주어진 신심(信心)에 의한 것이지, 범부 스스로의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수동형(受動形) 범부관'인 셈이다. 따라서 그러한 신심이야 말로 극락왕생의 정인(正因)이며, 염불 역시 범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에 의해 '해지는 것'이라는 타력신심사상을 전개시킨다.
잇펜의 경우 범부중생의 현상적 모습은 번뇌구족(煩惱具足)의 존재지만 본래면목은 이미 왕생이 결정된 존재라고 보는 '본각형(本覺形) 범부관'을 제시한다.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십일불이사상은 법장비구(法藏比丘)가 십겁(十劫) 전에 성취한 깨달음과 현재 중생의 일념왕생(一念往生)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본각형 범부관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view on unenlightened people of Patriarchs Honen (法然), Shinran (親鸞), and Ippen (一遍) who led Japan's Pure Land Buddhism. In particular, this study intended to understand the trend within Japanese Pure Land Buddhism by investigating how the thought of each patriarch: Honen's Senju Nembutsu (專修念佛, to practice the path of enlightenment only by chanting Buddha's name), Shinran's Tariki Shinjin (他力信心, faith is endowed by Amitabha Buddha), and Ippen's Juuichi Fuji (十一不二, Amitabha Buddha's enlightenment achieved very long time ago is basically the same as an unenlightened person's rebirth in the Pure Land after chanting 'I faithfully bow or depend on Amitabha to guide me'), are interconnected with their view on unenlightened people.
Honen emphasized a dispassionate reflection on the unenlightened-ness inside human mind. As he said, 'The Pure Land faith is to return to ignorance and stupidity and be reincarnated in paradise,' he places importance on becoming aware of oneself as an unenlightened person, which can be called a 'self-awareness'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In addition, he insisted on practicing the path of enlightenment only by chanting Buddha's name since the reason Amitabha Buddha did not pursue various good deeds, wisdom, wisdom, precepts, etc., as the original vow, and chose chanting Buddha's name is for the unenlightened people's rebirth in the other world.
Shinran believed that unenlightened people can perform the noble act of chanting because of the faith given to them by Amitabha Buddha, not because of their own might. In other words, it is a 'passive'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From there, he unfolded the idea of Tariki Shinjin that such a faith is the very primary cause for the blissful rebirth in the Pure Land and Buddha chanting is also not unenlightened people's 'doing' but is 'done' by Amitabha Buddha.
Ippen proposed the 'primal awakening'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that the phenomenal form of unenlightened people is the ones that are unable to do good deeds but only evil deeds while engulfed with passion but their rebirth in other worlds already has been decided. The idea of Juuichi Fuji that represents him is that Amitabha Buddha's enlightenment achieved very long time ago is basically the same as an unenlightened person's rebirth in the Pure Land through ardent recitation of the name of Amitabha Buddha. It is clear that this idea is based on his 'primal awakening' view of unenlightened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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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신론』의 마하연체(摩訶衍體)와 마하연자체상용(摩訶衍自體相用)을 둘러싼 원효의 해석과 의의

저자 : 김천학 ( Kim Cheon-ha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93-12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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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신론』의 마하연체와 마하연자체상용을 둘러싼 원효의 해석을 중심에 두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왜 '체'와 '자체'인지, 마하연자체상용의 독법은 어떻게 되는지. 진여·생멸문과 삼대의 관계 설정의 문제들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이것들이 『기신론』 주석가의 『기신론』 이해의 큰 틀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원효의 해석에서 지론사나 화엄가의 영향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원효의 해석이 법장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장은 원효의 『별기』와 『소』를 둘 다 참조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구축해간다. 다만, 진여·생멸문과 삼대의 관계에서도 보이듯이 법장이 반드시 원효의 사유를 따르지는 않는다. 사유구조와 문장은 가지고 오지만 결론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원효와 법장을 비교할 때 문헌학적인 엄밀성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본고의 문제의식에 대한 원효의 『별기』와 『소』의 관계를 검토해볼 때 두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별기』가 서술형인데 비해 『소』는 그것을 명확히 개념화하려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별기』가 종교적 수행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경향성이 발견되는 반면에 『소』는 이론의 정합성을 추구한다. 향후 원효의 마하연체와 마하연자체상용에 대한 해석이 『기신론』 해석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확대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finds its meaning by focusing on Wonhyo's interpretation of the essence of Mahāyāna(摩訶衍體) and the essence itself, characteristics, and function of Mahāyāna(摩訶衍自體相用) in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大乘起信論). In particular, the issues of why essence(體) and essence itself(自體), the reading method of the essence itself, characteristics, and function of Mahāyāna(摩訶衍自體相用),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usness aspect(眞如門), the arising and ceasing aspect(生滅門), and three kinds of greatness 三大 were mainly deals with. This is because these are important issues that determine the broad framework of the understanding of the structure of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of the commentator.
Wonhyo's(元曉) interpretation of this issue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Fazang(法藏), and Fazang builds his own thought by referring to both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起信論別記) and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起信論疏) of Wonhyo. However, as seen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usness aspect, the arising and ceasing aspect, and three kinds of greatness, Fazang does not necessarily follow Wonhyo's thought. The reason is that Fazang brings Wonhyo's thought structure and sentences, but his conclusion is different from Wonhyo's. This point requires philological preciseness and objectivity in the case of a comparison of Wonhyo and Fazang.
Two characteristics can be found when exam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and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of Wonhyo in this part. The first is that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is a narrative type, whereas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tends to conceptualize its contents. Second is that the Expository Notes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is inclined to interpret from the view of a religious practitioner, while the Commentary to the Awakening of Mahāyāna Faith is aca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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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역(日域)' 인식의 형성과 추이

저자 : 秋明燁 ( Choo Myung-yeop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23-15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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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곳으로서의 '일역'은 '중국' 용례처럼 왕조를 넘어서는 공간적 자의식을 보여주는 아국(我國)의 별칭이면서 중국과 구별되는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에서는 한 이래 일찍부터 '일역'을 활용해 고조선 지역을 지칭하였고 이후 '일역'은 요(遼)·송(宋)까지 중국 중심의 천하관념 속에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8~11세기에 '일역'은 서역(西域)을 염두에 두고 자칭되었고 이는 불법(佛法)의 동류(東流)라는 문화적 배경 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결국 '일역'은 11세기 고려 팔방 천하 속의 '일방(日邦)' 자칭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자칭의 흐름은 12세기 중엽까지 이어졌지만, 12세 후반 이후 '일역'은 고려가 있는 지역을 자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의미가 점차 희석되고 일본과의 관계 진전 속에서 동쪽 해 뜨는 지역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서의 의미를 중심으로 일본지역을 지칭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3세기 후반에 가서는 몽골의 일본 원정 속에서 '일역'은 일본을 지칭하는 의미로 주로 활용되었다. 동일한 시기에 아침 해가 선명하다는 의미의 '조선'이 아국의 대명사로서 '일역'을 대신하여 활용되면서 '일역'은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이는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나타난 자의식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 시기에도 '일역'은 대개 일본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종종 중국과 대비되면서 일반명사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용된 경우가 있다. 그런 인식 속에서 '일역'은 활용 빈도도 점차 낮아진 것으로 여겨진다.


The 'Ilyuk(日域)' as an area of sunrise showed the spatial self-consciousness that goes beyond the dynasty, such as the example of 'China'. That name was showing the characteristics of an area as distinct from China. Since early in China, the Gojoseon area had been referred to using 'Ilyuk' since the beginning of the year. The Han(漢) dynasty had referred to 'Ilyuk' in the Chinese-centered concept of the world.
However, the Silla had called oneself Ilyuk in the 8th century. In Silla, it was thought that the Ilyuk was symmetrical to the west. The Ilyuk title was formed based on the cultural background of the eastern spread of Buddhism. Eventually, the Ilyuk title resulted in the calling oneself 'ilbang(日邦)' on the background of the Haedongcheonha(海東天下) in the 11th century.
Such self-proclaimed trends continued until the middle of the 12th century, but in the late 12th century, Goryeo began to refer to the 'Ilyuk' as Japan. In particular in the late 13th century, Goryeo refered to the 'Ilyuk' as Japan in Mongolia's expedition to Japan. At the same time, 'Joseon(朝鮮)' which means that the morning sun is bright, was used as a pronoun in Korea instead of 'Ilyuk', and it gradually disappeared from memory. That was also set in the background of changes in self-consciousness that emerged in the Mongol interferenc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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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설장수의 인적 네트워크와 『직해소학』의 편찬

저자 : 양강 ( Yang Ka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59-19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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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귀화 지식인 설장수의 유학지식, 경세론, 외국어능력을 통해서 고려와 조선 사회에 기여한 바를 살펴보고 그 활동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려후기의 귀화인은 종족별·시기별로 다양하였고 지식인 귀화가 증가하였는데 설장수는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공민왕 7년(1358)에 부친을 따라 고려로 귀화한 그는 과거에 급제하고 성리학을 매개로 지식인들과 교유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는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에서 이루어진 성리학의 연구를 통해서 동료 유학 지식인들과 함께 경세의식을 견지하고 현실개혁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설장수는 대명외교 활동에서도 활약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전에는 의례적인 성절사·천추사로 명에 파견되어 고려·명 양국의 갈등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 고려 왕조의 수호에 앞장섰다.
조선 건국후 출사하여 대명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장수는 사역원의 통역관 인재양성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태조 3년(1394)에 상서문을 올려 한어 능통자는 양성하고 유학적 기본 지식과 소양 또한 함께 갖춰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유학의 사회적 실천을 위한 기초교육으로 『소학』을 중시하였다. 이는 그의 인적 네트워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소학』을 백화문으로 풀이하여 『직해소학』을 편찬하였다. 『직해소학』은 이후 역학뿐만 아니라 승문원 이학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고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성리학의 학습서로서 보급되었다. 말하자면 귀화인 설장수는 유학지식과 한어의 능통함으로 고려와 조선왕조의 체제유지에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This study tried to examine the contributions of naturalized intellectual Seol Jang-su to Goryeo and Joseon society through his knowledge of studying abroad, theory of governance, and foreign language skills, and to examine what historical significance his activities have.
Naturalized people in the late Goryeo Dynasty varied by race and period, and naturalization of intellectuals increased, and Seol Jang-su was a representative figure. Naturalized to Goryeo following his father in the 7th year of King Gongmin (1358), he passed the imperial examination in the past, communicated with intellectuals through Neo-Confucianism, and formed a human network. Through the study of Neo-Confucianism conducted at Sungkyunkwan in the 16th year of King Gongmin (1367), he maintained a sense of the world and participated in real-life reform politics with fellow Confucian scholars. Seol Jang-su was also active in diplomacy toward Ming activities. Before the Wihwado retreat, he was dispatched to the order as a ceremonial Seongjeolsa(聖節使) or Cheonchusa(千秋使) to deal with conflicts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after the Wihwado retreat, he took the lead in protecting the Goryeo Dynasty.
After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he took part in diplomacy toward Ming activities. In the 3rd year of King Taejo's reign (1394), Seol Jang-su put forward suggestions for reforming the talent training system for interpreters of the Sayeok-won(司譯院), saying that Chinese proficient people must possess basic knowledge and literacy of Confucianism. In particular, he valued < Sohak(小學) > as a basic education for social practice of Confucianism. This would have been influenced by his human network. In addition, he annotated < Sohak > in Baekhwamun(白話文) and compiled < Jikhae-Sohak(直解小學) >. < Jikhae-Sohak(直解小學) > was later adopted as an examination subject for the Yeokhak(譯學) and Sungmun-won's Ihak(吏學), and during the reign of Sejong, it was distributed nationwide as a study book of Neo-Confucianism. In other words, naturalized Seol Jang-su contributed to the maintenance of the system of Goryeo and Joseon dynasties with his knowledge of Confucianism and proficiency in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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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 전기 유교식 불효의 출현-성종 대 이심원 불효 사건을 중심으로-

저자 : 김가람 ( Kim Ka-ram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1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3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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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유교식 효와 효행을 통해 유교적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효는 절대적 가치가 되어 조선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불효이다. 효를 강조할수록 효의 대척점에 있는 불효 또한 부각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종 대에 발생한 이심원 불효 사건은 효가 절대화되며 불효가 부각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 당시 죽은 이심원은 중종 이후 충신으로 인정받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효자의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성종 대에 고모부 임사홍의 탄핵에 깊게 관여하였다가 조부 이합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불효죄로 고발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불효죄에 대해서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격론이 발생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격론의 내용을 통해 불효에 대해 접근하였다. 이 과정에서 효와 불효의 변화를 파악하고자 효/비효(非孝)/불효의 설명틀을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살펴본 결과 이심원의 불효 사건이 발생한 15세기 후반 불효죄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불효의 범위 확대이다. 이는 효와 불효의 중간 영역에 속하면서 효도 불효도 아니던 비효가 불효로 전환한 것이다. 이심원이 조부에게 대든 행위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불효의 주관적 성격 강화이다. 효행 대상자의 주관에 따라 불효죄는 성립도 해소도 될 수 있었다. 셋째는 불효의 구속력 강화이다. 효의 가치 절대화는 효를 부정하는 불효에 대한 엄격한 처벌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유교 사회에서 통용되는 효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출현하였다는 점에서 유교식 불효라 할 수 있다.


After the founding of the country, Joseon tried to establish a Confucian social order through Confucian filial piety. In this process, filial piety became an absolute value and exerted influence on Joseon society. It is not good to show this well. The more filial piety was emphasized, the more unfilial piety was emphasized, and it became a social issue. In this context, the case of Lee Simwon's unfilial piety that occurr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shows the process of absoluteizing filial piety and highlighting unfilial piety. Lee Simwon, who died at the time of Muosahwa, was recognized as a loyalist after King Jungjong, but while he was alive, he lived under the label of a bad son. This is because he was deeply involved in the impeachment of his uncle Lim Sa-hong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and was accused of being ineffective due to the deterioration of his relationship with his grandfather Lee Hap. However, since there was a dubious part about his crime of infidelity, several heated debates occurred in the court.
This article approached unfilial piety through the contents of this heated debate. In this process, an explanation frame of filial piety/nonfilial piety/unfilal piety was used to grasp the change in filial piety and unfilial piety. As a result of examining this, there were three characteristics of the crime of insolence in the late 15th century, when the case of Lee Simwon's insolence occurred. The first is the widening of the range of unfilial piety. This is the transition of nonfilial piety, which belonged to the middle area between filial piety and unfilial piety, and was not filial piety, to unfilial piety. The act of Lee Simwon against his grandfather is a representative example. The second is the strengthening of the subjective nature of unfilial piety. Depending on the subjectivity of the person subject to filial piety, the crime of filial piety could be established and resolved. The third is strengthening the binding force of unfilial pirety. The absoluteization of the value of filial piety has led to strict punishment for unfilial piety, which denies filial piety. In addition, this can be said to be a Confucian-style filial piety in that it emerged while absoluteizing the value of filial piety used in Confuci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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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법화경』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하는가?-세친 『법화경론』의 사종성문설을 중심으로-

저자 : 하영수 ( Ha¸ Young-s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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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일승사상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세친의 『법화경론』을 중심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세친은 그의 주석서에서 『법화경』의 성문을 퇴보리심성문(退菩提心聲聞), 응화성문(應化聲聞),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 결정성문(決定聲聞)의 네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이 사종성문설은『유가사지론』에서 설해진 사종성문의 개정(改定)이다. 세친은 이 사종성문 중에서 앞의 두 부류는 여래로부터 직접 수기를 받았지만, 나머지 두 부류의 성문은 상불경(常不輕)보살로부터 수기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이 사종성문에 대응하는 경문을 찾아 그들의 성불 여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네 부류의 성문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관건이 되는 것은 유가행파에서 성불할 수 없는 성문으로 분류한 취적성문(趣寂聲聞)의 성불 여부이다. 그러나 취적 성문에 관해서는 「화성유품」에서 아라한의 죽음 이후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성불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경전에 취적성문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져 있으므로, 세친은 수행론적 관점이 반영된 취적성문이라는 용어를 종성론적 색채가 투영된 결정성문으로 변경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변경은 『법화경』의 '일체중생의 성불'이라는 명제와 유가행파의 '종성이론' 사이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법화경』의 일승(一乘)사상을 종성론적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일종성(一種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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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대통사와 『법화경』 「화성유품」 신앙

저자 : 조경철 ( Jo Gyung-cheol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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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대통사는『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이 대통 원년(527)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웅진에 세웠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단순히 신라법흥왕을 백제 성왕으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대통을 양무제의 연호로 보았다. 필자는 예전 대통사는 무령왕의 3년 빈상이 끝나는 525년 무렵무령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고 절 이름의 대통은 『법화경』 「화성유품」의 대통불로 보았다. 「화성유품」에 의하면 전륜성왕 - 대통불[위덕세존] - 법왕/사택지적으로 이어지는데, 백제에서는 성왕 - 위덕왕 - 법왕으로 이어지고 대표적인 법화신앙자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있었다. 대통불에게는 16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은 나중에 출가하여 8방에 둘씩 16부처가 된다.
이 글에서는 양나라 무제의 '대통' 연호를 따서 527년 대통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백제에서는 백제에 전륜성왕의 성왕이 있었고 불교에 돈독한 위덕왕과 법왕이 있었고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있었다는 데서 ≪대통사≫가 『법화경』 「화성유품」의 대통불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백제는 대통불의 계보를 백제 왕실에 적용하여 왕권의 신성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한편 웅진시대 처음으로 연꽃 문양의 연잎 개수가 8개인 것과 16개인 것이 등장하고 사비시기 각 잎마다 2개씩 갈라진 8(x2=16)엽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를 8방에 둘씩 배치된 16부처를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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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효의 『법화경』 삼거가와 사거가의 논쟁에 대한 관점-『법화종요』를 중심으로-

저자 : 이병욱 ( Lee¸ By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0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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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원효의 『법화경』 삼거가(三車家)와 사거가(四車家)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였다. 『법화경』의 중요내용 가운데 하나가 삼승의 가르침이 궁극에는 일승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비유품」에서는 비유를 통해서 다시 설명하는데, 여기에 대승을 비유한 '소의 수레'와 일승을 비유한 '큰 흰 소의 수레가 등장한다. 중국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소의 수레'와 '큰 흰 소의 수레'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논쟁이 생겼다.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이 논쟁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원효는 화쟁사상적 근거로서 말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서 3가지 화쟁의 견해를 주장한다. 첫째, 통(通)과 별(別)의 관점에서 화쟁하는 것이다. 이는 삼거가와 사거가의 견해가 일승을 인정하는 것과 이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삼거가의 관점에서 화쟁하는 것이다. 이는 성문과 연각이 실제가 아닌 점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고, 이 점에서 삼거가와 사거가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통교삼승'과 '별교삼승'으로 구분해서 화쟁하는 것이다. 삼거가의 주장은 '통교삼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고, 사거가의 주장은 '별교삼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거가와 사거가의 주장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전개된 것이므로 서로 충돌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3가지 화쟁의 견해를 제시하면서도 셋째의 견해에 비중을 두고 있고, 또 셋째 견해 가운데서도 '별교삼승'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원효는 '별교삼승'의 관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원효는 삼승의 인과(因果)가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을 4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별교삼승의 개념에 '인승'과 '천승'이 포함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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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이초(最澄)의 법화사상-그가 평생 추구하고자 한 것-

저자 : 원영상 ( Won¸ Yong-sa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2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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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 후반에 유입된 천태종은 중세 신불교 탄생의 요람이 된다. 천태종의 역할은 사실상 근현대 다양한 불교계 신종교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일본불교의 저변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종합불교로서 신앙과 수행의 폭넓은 세계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천태종은 사이초(最澄, 766~822)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원ㆍ선ㆍ계ㆍ밀(圓禪戒密)의 4종(宗)을 계승했다. 귀국해서는 밀교를 도입하여 완전한 종합불교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국가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대승교단 구축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천태종을 일본에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사이초는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남도불교(南都佛敎)의 대표주자인 도쿠이츠(德一)와의 논쟁이다. 불성론(佛性論)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이초는 심혈을 기울여『법화경』의 정신에 의거한 일승(一乘)사상을 주장했다. 말년에 나온 많은 저술은 이러한 법화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핵심은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불도(皆成佛道) 사상이다. 일본 불교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결국 사이초가 주장한 법화사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기성불교계와 국가불교로부터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밀교와 더불어 종합불교의 양축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이초는 법화사상에 기반한 수행체계를 통해 대승불교의 정신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가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에서 “나라의 보물을 무엇인가. 그 보물은 도심(道心)이다. 도심 있는 사람을 국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도심은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비예산(比叡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대승의 계율을 확립했다. 후대에 사이초의 법화종단은 그가 대립했던 기성불교계와 마찬가지로 왕권과 밀착하고 마침내 분열되기는 했지만, 여러 조사들에 의해 시대를 따라 늘 새롭게 해석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불교의 사상적 저수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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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저자 : 김희만 ( Kim¸ Heui-ma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6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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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최치원 관계기사를 분석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一然)의 최치원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 관련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가 왜 최치원 관련 자료를 다른 인물의 자료보다 많이 삽입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를 검토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삼국사기』에 서술된 최치원 관계 자료와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관계 자료는 최치원에 '대한(about)' 서술 위주라면, 『삼국유사』 관계기사는 최치원에 '의한(by)' 논지 전개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최치원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최치원의 말을 원용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더욱 폭넓게 찬술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연의 역사서술 태도가 유연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불교 승려였지만, 유학(儒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최치원 관련 자료를 중시하여, 활용한 것이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지만, 귀국 후 왕명으로 불교 관련 비문,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작성하는 등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일연에게 있어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사에 정통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한 인식이 『삼국유사』의 찬술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 『삼국유사』 관계기사의 의미 또는 성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치원 관련 자료를 『삼국유사』에 굳이 수록하여 무엇을 밝히려고 했는 지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을 한국 고대사회 및 불교와 유교에 정통하였다는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 최치원 관련 자료이며, 일연은 그 기반 위에서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유교와 상대되는 불교 또는 신이사관(神異史觀) 등으로 평가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최치원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은 불교와 유교를 접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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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종 즉위 초 종친부 강화와 경복궁 내 제례 공간의 확장

저자 : 이민아 ( Lee¸ Min-ah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20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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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와 함께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중건 경복궁은 조선 초 경복궁의 재현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축적된 의례 전통이 발현된 결과물이었다. 의례 공간 중에서도 제례 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은 중건 경복궁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제례 공간은 흉례(凶禮)를 위한 빈전(殯殿) ㆍ혼전(魂殿) 권역과 선왕의 어진을 봉안한 길례(吉禮) 공간인 선원전(璿源殿) 권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때 빈전, 혼전 및 선원전은 모두 종친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종친부의 정치적 권한을 확대함과 동시에 종친부 건물을 확장하였다. 종친부는 광화문 앞 의정부ㆍ삼군부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했다. 종친부 내 핵심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집무실인 아재당(我在堂)과 함께 철종의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선원전에서 철종을 배제하는 대신 종친부 내에 새로운 철종 어진봉안처, 천한 전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선원전 권역이 궐 밖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와 함께 궁궐 내 빈전 및 혼전 등 흉례 공간이 궁궐 북서쪽 권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공간은 전체 궁궐면적의 1/5 가량을 차지하지만 건물 사이의 밀도는 매우 낮았다. 이는 중건 경복궁 내에서 흉례 공간이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선원전 및 빈전ㆍ혼전 공간은 종친부가 의례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소렴과 대렴 의식 등 흉례 의식이 진행될 때 종친이 백관과 함께 거애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국초부터 정해진 의례 절차였다. 진향 절차에서 종친은 항상 문무백관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기 때문에 빈전ㆍ혼전 공간은 자연스럽게 위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종친과 문무백관 다수가 의식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야 했으며, 종친이 의례를 주도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건 경복궁은 종친부 강화라는 맥락에서 종친부 공간과 연동해서 해석해야만 그 특징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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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2021, 푸른역사]

저자 : 나종현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1-225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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