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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고종 즉위 초 종친부 강화와 경복궁 내 제례 공간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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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 초 종친부 강화와 경복궁 내 제례 공간의 확장

Expansion of Ceremonial Space in Gyeongbokgung Palace under Gojong

이민아 ( Lee¸ Min-ah )
  • : 한국사상사학회
  • : 한국사상사학 6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165-200(36pages)
한국사상사학

DOI


목차

머리말
1. 종친부 권역 확장과 정치적 위상 강화
2. 경복궁 내 제례 공간과 종친부 연결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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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와 함께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중건 경복궁은 조선 초 경복궁의 재현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축적된 의례 전통이 발현된 결과물이었다. 의례 공간 중에서도 제례 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은 중건 경복궁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제례 공간은 흉례(凶禮)를 위한 빈전(殯殿) ㆍ혼전(魂殿) 권역과 선왕의 어진을 봉안한 길례(吉禮) 공간인 선원전(璿源殿) 권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때 빈전, 혼전 및 선원전은 모두 종친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종친부의 정치적 권한을 확대함과 동시에 종친부 건물을 확장하였다. 종친부는 광화문 앞 의정부ㆍ삼군부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했다. 종친부 내 핵심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집무실인 아재당(我在堂)과 함께 철종의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선원전에서 철종을 배제하는 대신 종친부 내에 새로운 철종 어진봉안처, 천한 전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선원전 권역이 궐 밖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와 함께 궁궐 내 빈전 및 혼전 등 흉례 공간이 궁궐 북서쪽 권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공간은 전체 궁궐면적의 1/5 가량을 차지하지만 건물 사이의 밀도는 매우 낮았다. 이는 중건 경복궁 내에서 흉례 공간이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선원전 및 빈전ㆍ혼전 공간은 종친부가 의례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소렴과 대렴 의식 등 흉례 의식이 진행될 때 종친이 백관과 함께 거애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국초부터 정해진 의례 절차였다. 진향 절차에서 종친은 항상 문무백관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기 때문에 빈전ㆍ혼전 공간은 자연스럽게 위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종친과 문무백관 다수가 의식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야 했으며, 종친이 의례를 주도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건 경복궁은 종친부 강화라는 맥락에서 종친부 공간과 연동해서 해석해야만 그 특징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The ceremonial space is an important component of the palace. In particular, the ritual space was a symbolic space expressing the ideology of ‘filial piety(孝)’. When Gyeongbokgung was reconstructed, the ceremonial space was expanded. The ceremonial spaces of Gyeongbokgung Palace, Binjeon(殯殿), Honjeon(魂殿), and Seonwonjeon(璿源殿) are all closely connected with Jongchinbu(宗親府).
When Heungseon Daewongun(興宣大院君) reconstructed Gyeongbokgung Palace, he expanded the Jongchinbu building. Jongchinbu is close to Uijeongbu(議政府), Samgunbu(三軍府) and 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All these spaces are connected. Ahjaedang is the office of Heungseon Daewongun, and Cheonhanjeon is the building where the portrait of King Cheoljong(哲宗) is enshrined. The portrait of King Cheoljong did not exist in the newly built Seonwonjeon Hall of Gyeongbokgung Palace. Instead, the Cheonhanjeon(天漢殿) was built to enshrin the portrait of King Cheoljong in Jongchinbu. In the end, the Seonwonjeon area was extended outside the palace through Cheonhanjeon. The Binjeon and Honjeon buildings are located in the northwest area of the palace. It occupies 20% of the total area of the palace. However, the density of each building was very low. As such, the ceremonial space occupied a high position in Gyeongbokgung Palace.
When performing the ritual, When performing the ritual, Jongchin stood in front of the king’s servant. A hierarchy was formed in the sacrificial space. And because there were so many people in attendance, they needed more space.
When Heungseon Daewongun strengthened the Jongchinbu, the ancestral hall of Gyeongbokgung was expanded. The sacrificial space was emphasized because it was the space of Jongc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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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944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1
  • :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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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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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불교사에서의 구산선문 개념 검토

저자 : 강호선 ( Kang Ho-s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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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구산(五敎九山)은 포광 김영수 이래 고려시대 불교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었다. 선종 구산문의 성립은 신라하대 수용된 선종이 나말여초 사회변동 속에서 각 지역에 자리를 잡는 과정이자 결과였고, 고려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김영수가 고려선종사를 구산문으로 설명한 이래, 교과서는 물론이고 여러 개설서에서 나말여초불교의 변화 및 고려 선종을 구산선문[선문구산]으로 설명해 왔다. 『고려사』나 금석문 등 당대 사료에 구산이라는 용어는 여러 차례 나오지만, 이것이 아홉개의 개별산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사례는 찾기 어렵다. 1084년(선종 1) 구산 문도들도 3년에 한번씩 승과를 볼 수 있게 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현재까지 확인되는 “구산문”에 대한 가장 오랜 것이며, 현재 알려진 아홉 개의 산문과 그 개산조는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 처음 정리되어 있다. 구산은 승과시행과 불교교단 정비로 대표되는 고려전기 승정 확립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의천의 천태종 개창으로 인한 선종계의 변화를 반영하듯 고려중기 이후 “조계종”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면서 사굴산문, 가지산문, 성주산문 등 산문의식을 드러내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또한 고려후기 자료에서의 구산은 아홉개의 개별산문이 아니라 당시 선종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도 특징이어서 구산은 나말여초 성립된 여러 산문들이 고려시대 겪었던 변화와 승정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고려적인 요소로 볼 수 있으며, 승정이라는 측면에서 승과와 관련된 “구산선(九山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산선문은 실제 아홉 개의 산문이 고려시대 내내 모두 존속했느냐의 여부보다 고려시대 선종교단의 존재양태를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Five Teachings and Nine Seon Schools(五敎九山) is a framework for understanding Buddhism during the Goryo period, as Kim Yougsu(金映遂) put it into concept in 1920's. Nine Seon Schools were established in the process by which Seon Buddhism accepted from Tang China by Shilla Seon monks was established in the Late-Shilla and Early Goryo Society. It meant a symbolic event to mark a departure of Korean Seon Buddhism. Many books and papres explained on Korean Buddhism as Nine Seon Schools meant the number actual 9. There are also Nine Moutains(九山, the same concept witn Nine Seon Schools) in the History of Goryo(高麗史, Goryosa), stele and colleciton of literary works of Goryo period. However it does not mean the actual numer. The earlist record on names of actual Nine Seon schools and the founder of each school was Sunmunjosayecham-uimun(禪門祖師禮懺儀文, the Ritual Book for the Zen and Seon Masters). The book is estimated to have been written Mid-Goryo Period. The term “Nine Mountails(九山)” was also used as a concept to represent the entire Seon(JoGye) School at the time. The term of “Nine Seon Schools”, i.e. “Nine Mountains” should be examined in conjunction with Buddhist policy(僧政) in terms related to Seungkwa(僧科, State examination for Buddhist Mo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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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시대 '경장(更張)'의 의미와 변천

저자 : 이경동 ( Lee Kyung-do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5-8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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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경장(更張)'의 용례와 의미 변천을 통해 경세론의 추이를 분석하고 시기별 변화에 따른 역사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경장은 변화 및 개혁을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사용된 이래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폭넓게 사용되었다.
한국사에서 경장은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14세기 후반부터 용례가 확인되는데, 국면의 변환이나 법제의 개수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에는 『경국대전』의 편찬과 그 이후의 개수 논의와 관련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이는 경장 개념이 법제와 관련한 부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16세기에는 사림(士林)의 정치적 활동이 증대됨과 동시에 경장의 용례가 점차 증가하였다. 사림들은 동중서를 포함하여 송대 이학자(理學者)인 진덕수(眞德秀), 정호(程顥), 주희(朱熹) 등이 주장했던 견해를 토대로 경장을 구조화하였다. 경장을 활발하게 사용했던 인물은 조광조(趙光祖)였으며, 이후 이이(李珥)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이이는 시기, 방법, 지향, 주체의 측면에서 경장을 정의하고 그 내용을 구조적으로 밝혔다. 이 시기 정립된 경장 개념은 경세론과 결합되어 이후 전개되는 경장에 대한 활용에 있어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경장은 17세기 사회개혁정책의 전개와 함께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대동법(大同法)을 포함한 주요 개혁 논의의 담론 속에 경장 개념이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경장과 함께 경장에 상대되는 '준수(遵守)'가 이원적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책문(策問), 상소문, 연설(筵說) 등에서 경장과 준수가 언급되었는데, 당대 국가 운영의 방향과 관련한 인물들 사이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부터 경장은 탕평론과 결합되며 활용되었다. 영·정조는 경장을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였던 개혁정책와 결부하며 경장의 주체로서 군주를 설정하였으며, 스스로 경장의 주인을 자처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 초까지 경장의 주체를 관료로 설정했던 경장관과는 차이가 있다.
19세기에는 삼정(三政) 등 당대 사회문제와 함께 경장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경장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1862년 임술민란을 계기로 제출된 삼정책(三政策)이다. 제출된 삼정책에는 경장을 입론의 당위나 전거로서 제시하고, 삼정문제에 관한 해결방안을 각론으로 제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trend of reformism through the interpretations and change of meaning of the concept of 'Gyeongjang(更張)'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The concept of Gyeongjang had been devised by Dong Zhongshu (董仲舒) of Han Dynasty of China originally meaning that a qinse (琴瑟) string needs to be replaced if it comes loose, and the meaning was extended to be a synonym of political change and reform.
In Korea, the first example of use of Gyeongjang is found in late 14th century when Neo-Confucianism was introduced to Korea. It was used intermittently to mean a change of situation, improvement of laws, etc. In the 15th century, the term was used restrictively in the compilation of Gyeonggukdaejeon (經國大典) and discussions for its revision afterwards.
During the 16th century, the concept of Gyeongjang was used frequently among Sarim, the literati class. A historical figure who used the term Gyeongjang actively was Cho Gwang-jo (趙光祖), and after then the concept was systemized by Yi Yi (李珥) who defined the concept of Gyeongjang and elucidated its contents structurally by categorizing it based on the period, method, direction, and principle agent.
The concept of Gyeongjang was actively used while reformism was discussed vigorously during the 17th century due to social requirement. In particular, it is noteworthy that 'Junsu (遵守, compliance)' began to be understood dualistically together with Gyeongjang. The fact can be confirmed in the civil service exam, reformist ideas, discussion on policy, etc. and there were two perspectives of the people at that time in relation to the direction of management of state. The people at that time tried to find out the methodology to solve actual issues, and deepened their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Gyeongjang in such a process.
During the 18th century, the concept of Gyeongjang was used for Tangpyungron (蕩平論), the theory of impartiality. The then kings led state affairs by empathizing the role of the king who was the main principle of Gyeongjang. Gyeongjang was often mentioned not only in social and economic policies but also in a situation of political change.
During the 19th century, the frequency of use of the term Gyeongjang tended to increase with the emergence of social issues such as natural disasters, imposition of tax, etc. The term Gyeongjang was used the most in the reformist ideas of intellectuals proposed after a national uprising which broke out in 1862. The concept of Gyeongjang was used with high frequency in the proposed reformist ideas, and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actual problems recognized by each person on the basis of the concept of Gyeongjang and the solutions were suggested specif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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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선 초기 궁궐 사찰 '내원당(內願堂)'의 설치와 변동

저자 : 양혜원 ( Yang Hye-w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2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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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조선 초기 궁궐 내 절의 설치 과정과 변동에 대해 고찰하였다. 조선 초기에 존재하던 궁궐 안[內]의 절[願堂, 佛堂]은 내원당(內願堂), 내불당(內佛堂)으로 불렸는데, 이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해야 한다. 먼저, 고려와의 연장선 위에서 살펴야 하며, 조선 초에는 개성과 한양으로 거듭된 천도가 이루어져 수도와 궁궐의 이동을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궁궐 안에 위치한 내원당과 한양 도성 안에 위치하되 궁 밖에 설치된 정업원은 전혀 다르므로 구분해야 한다.
조선의 내원당은 건국 직후부터 확인된다. 개경에 수도를 두었던 국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양으로 천도한 후 1396년(태조 5) 1월에 신궁 경복궁에도 설치되었다. 이 경복궁 내원당은 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여 생활하던 1412년(태종 12)에 폐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설치한 창덕궁 문소전(구 인소전) 불당은 1433년(세종 15)까지 존재한다.
내원당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내원당은 궐 안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찰이라기보다, 왕의 발원에 따라 궁 안에 다수 건립될 수 있는 불당이었다. 둘째로, 내원당은 국왕의 거주 공간인 궁궐 안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목적하에 설치되었다. 셋째로, 궁궐 내 혼전으로서의 진전에 부속된 불당도 하나의 내원당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왕실 상장례의 변화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선 초 건립되는 내원당은 모두 현왕인 태조와 태종, 세종의 의지와 발원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창덕궁 내원당은 1433년(세종 15)까지 유지되다가, 세종이 경복궁에 문소전을 새로 건립하고 원묘(原廟)로 단장하면서 철거되었다. 그러나 1448년(세종 30)년 세종은 다시 경복궁 문소전 옆에 내원당을 짓고자 하는데,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궁 안이 아닌 궁 밖에 건립하게 된다. 이로써 '내원당'은 이름과 달리 궁 밖에 건립되면서 '궁궐 내 불당'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establishments and changes of palace temples in early Joseon, Korea. The Buddhist temples in the palace that exist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called Naewondang (內願堂), or Naebuldang (內佛堂), but they should be investigated carefully with the following perspectives. First, we need to look at Naewondang as an extension of Goryeo's tradition. Next, Naewondang should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consecutive movements of the capital and palace in the early Joseon. Lastly, attention is needed because Naewondang located inside the palace and Jeongeopwon placed outside the palace were completely different temples though they were constructed within the boundary of the Hanyang City Wall.
The existence of Naewondang of Joseon was already documented right after the founding of the country. It seems that there had been a Naewondang since Gaegyeong was set as the capital, and historical documents show that a Buddhist temple was also established in Gyeongbokgung Palace after the capital relocation to Hanyang. It appears that this Gyeongbokgung Naewondang was abolished in 1412, after King Taejong moved his residential palace to Changdeokgung.
In the palace, a shrine was prepared to enshrine the portraits of the former kings and queens, and it was often accompanied by a Buddhist temple. Insojeon (仁昭殿) was the place where Queen Sinui's portrait was enshrined, and a Buddhist temple was built together. It was rebuilt and renamed as Munsojeon (文昭殿) for enshrining the portraits of the King Taejo and Queen Sinui. The temple of Munsojeon in Changdeokgung was maintained until 1433, but was abolished when King Sejong remodeled Munsojeon as a Wonmyo (原廟) in Gyeongbokgung Palace. As a result, 'Naewondang', having a meaning of 'a buddhist temple inside the palace' as a word, was ironically built 'outside the palace', closing the era of Buddhist temples inside th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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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의 절의(節義)와 선산(善山) 사림(士林)의 추숭 활동

저자 : 이광우 ( Yi Gwang-wo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1-173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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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절의(節義)'를 숭상하였다.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는 세조 연간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지만, 사림(士林)들은 하위지의 단종 복위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추숭해 나갔다. 하위지는 '인재(人材)의 부고(府庫)'라 일컬어졌던 경상도(慶尙道) 선산(善山) 출신으로 세종 연간 문과 장원 급제 후 집현전(集賢殿)·사헌부(司憲府)·예조(禮曹) 등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조선 왕조가 지향하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활동을 펼쳐 나갔던 인물이다. 단종 복위 실패 후 역률(逆律)이 적용되어 멸족(滅族)에 가까운 화를 입었지만, 사림은 그를 절의 인사로 추숭하였는데, 특히 선산 사림의 활동이 주목된다. 우선 선산 사림은 하위지에 대한 외손봉사를 지원하며 그의 '구기(舊基)'와 묘소를 수호하였다. 최현(崔晛)은 1591년 한문소설 「금생이문록(琴生異聞錄)」을 통해 도학의 실천자로서 하위지를 손꼽았다. 이상일(李尙逸)은 1668년 하위지 등 선산 출신 절의 인사의 유고 및 전기를 『삼인록(三仁錄)』으로 편찬함으로써, 그 정신을 주체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이렇게 형성된 공감대를 바탕으로 선산 사림은 하위지를 삼인묘(三仁廟)에 제향하였다. 나아가 1694년에는 단종 복위에 맞추어 삼인묘를 월암서원(月巖書院)으로 사액(賜額) 받았다.


The Joseon Dynasty esteemed the 'integrity' on the basis of Confucian justification. Dangye(丹溪) Ha Wi-ji(河緯地) attempted for the return of King Danjong to thron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but caught and executed, but the Confucian scholars recognized Ha Wi-ji's attempt for the return of King Danjong to throne as the integrity of 'Bulsaigun (No Serving of Two Masters)' and enthusiastically commemoration. Ha Wi-ji was from Seonsan(善山) of Gyeongsang-do as it was known for 'Treasure of Human Talents' and he passed the national examination with the top performanc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and served on government positions in Jiphyeon-jeon, Saheon-bu, Yeo-jo and others, he was the man who was committed to realize the Confucian political ideology for the Joseon Dynasty. After failing its movement for returning of King Danjong to throne, his family was harshly punished to near extermination under the law of treason, but the Confucian scholars enshrined his as the men of integrity with particular attention given for the activities of the Seonsan scholars. First of all, the Seonsan Confucian scholars supported the Oisonbongsa (a memorial service led by mother's clan) on Ha Wi-ji and protected his 'ancient tombs' and tomb sites. Through 「Geumsaengimun-rok(琴生異聞錄)」, a novel written in Chinese, in 1591, Choi Heon recognized Ha Wi-ji as the scholar who practiced Taoism principle. Lee Sang-il published 『Samin- rok(三仁錄)』 for the passing and bibliography for the man of integrity from Seonsan, such as, Ha Wi-ji and others, in 1668, in a way of objectively succeeding their spirits. On the foundation of sympathy formed as above, the Seonsan Confucian scholars enshrined Ha Wi-ji into Samin-myo (Tomb for Three Persons), and furthermore, in 1694, with King Danjoing returning to the throne, Samin-myo was dedicated as Wolam-seowon(月巖書院) with the royal decree to grant the framed tab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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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반계 유형원의 화폐유통론과 상업인식

저자 : 송양섭 ( Song Yang-seop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5-220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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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의 화폐론은 공전제(公田制)에 입각한 농업사회의 운영을 위한 하위영역이자 국가적 재분배 체계의 중요한 매개역으로 다루어졌다. 유형원은 동전분송(銅錢分送), 재정지출, 점포설치 등을 통한 화폐의 유포, 그리고 조세의 대전납(代錢納)을 통한 회수라는 양 방향의 경로로 제시하여 하나의 순환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시 화폐유통책과 동궤를 이루는 것으로 총통화량의 산정은 공전제의 세수(稅收)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경비(經費)=상세(常稅)'로 지칭되는 재정총량을 기준으로 삼았다. 유형원의 행전론이 철저하게 국가의 재정·부세와 관련된 물류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폐유통과 물류의 거점으로서 포자(鋪子)는 상업이 과도하게 발달하여 농업을 해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과세를 통해 적절히 관리·통제되었다. 아울러 유형원은 지방 각 군현의 공장(空場)은 모조리 없애고 그 기능은 포자(鋪子)·참점(站店)이 흡수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장시철폐 및 규제론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장과 상업은 화폐유통·물자재분배와 관련하여 농업사회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철저히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통제하고자 한 것이 핵심이었다.


Yu Hyeongwon, on his discussion on the currency, considered currency as the significant medium of the redistribution system of resources, where it is subordinate to the operation of agricultural society based on Gongjeonje (公田制; public land system). The idea that Yu suggested consisted of two-way circulation system: money would be disseminated by dispensation of the copper currency, expenditure of the governmental finance, and establishment of stores, while it would be retracted by tax payment in the form of coins. This was aligned with the coin circulation system of the time: the estimation of the total amount of currency would make up the total amount of finance, indicated as Gyeongbi (經費; the Expense), and it was equal to Sangse (常稅; the constant tax revenue) collected from Gongjeonje. Yu's discussion of coin circulation was comprehensively aiming the logistics of the state finance and taxation. Poja (鋪子; stores), the hub of coin circulation and logistics, was controlled and managed by taxation, so it could inhibit the situation where the development of commerce would harm the agriculture. In addition, Yu planned the markets in local counties and prefectures to be abolished and their functions to be absorbed into Poja and Chamjeom (hostels and lounges). This was the extension of the discourse of regulating local markets at the time, and the core idea was that the state should take control of the markets and commerce thoroughly so the agricultural society could be protected in the currency circulation and resource allo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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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수신편(理藪新編)』의 편찬과 내용 구성

저자 : 구만옥 ( Koo Mhan-oc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1-271 (5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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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석(黃胤錫)이 그의 나이 16세 무렵인 1740년대 중반에 착수한 『이수신편』의 편찬 작업은 175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 내용은 1760년대 중반에도 보완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수신편』은 '태극(太極)과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역학계몽(易學啓蒙)』 등에 수록되어 있는 상수(象數)나 율려(律呂)와 관련한 학문, 그리고 천문역산학(天文曆算學)의 세부적 방법 등을 '옛사람들의 지극히 훌륭한 이론[古人之至論]'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황윤석은 『성리대전』의 목차를 모방하여 자기 나름의 편목을 새롭게 구성하고, 『성리대전』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비롯한 다양한 참고 문헌을 활용하여 세부 내용을 채웠으며, 곳곳에 자신의 견해를 주석의 형태로 덧붙여 23권 분량의 책을 완성하였다. 황윤석이 첨가한 내용은 본문에 등장하는 용어나 고사를 부연 설명한 것, 중국인 특유의 표현 양식에 대해 설명한 것, 해당 내용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덧붙인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황윤석이 『이수신편』에서 인용한 문헌 가운데는 조선 학자들의 저술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가 조선 학자들이 작성한 여러 도설(圖說) 자료를 인용하여 『성리대전』의 내용을 부연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선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그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반면에 서학서(西學書)의 활용은 생각만큼 풍부하지 않았다. 황윤석이 한양에 올라와 다양한 서학서에 본격적으로 접한 시점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꼼꼼히 따져본다면, 앞으로 『이수신편』의 편찬 시기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수신편』의 편찬은 황윤석이 필생의 사업으로 여겼던 『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의 편찬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수신편』과 『성리대전주해』는 성리학을 집대성하겠다는 공통의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정확한 시점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1760년대 후반 이후 황윤석의 학문적 관심은 『성리대전』을 주해하는 작업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성리대전』의 각 권마다 찌지를 붙여가며 주를 달고, 간혹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거나 옛사람의 학설을 인용하는 작업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율력연원(律曆淵源)』을 비롯한 최신 서적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황윤석은 『이수신편』에 자신의 평생 정력이 투여되었다고 했던 것처럼 이 작업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했다. 이는 『성리대전』을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함으로써 『성리대전주해』를 완결하고자 했던 황윤석의 학문적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Hwang, Yun-seok(黃胤錫) had continuously worked on writing of Lisu-sinpyeon, which he commenced at the age of 16 in the mid-1740s, till the early 1750s, and seemed to partly supplement even in the mid 1760s. With the framework of 'a highly supreme theory of the older generation', Lisu-sinpyeon compiled 'the discourses of taiji(太極) and liqi(理氣)'; studies on images and numbers(象數, xiangshu) and the Pitches(律呂, lulu) from the books, such as Hongfan huangji neipian(洪範皇極內篇, The Inner Chapter of the Majestic Pole of the Grand Plan), Huangji jingshishu(皇極經世書, Book of Supreme World-Ordering Principles), and Yixue qimeng(易學啓蒙,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I-ching); and particular methods of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In the completed twenty-three volumes, Hwang renewed the organization while adopting that of Xingli daquan(性理大全, Collected Works on Human Nature and Principle), detailed contents by referring to various confucius texts and history books, and annotated with his own thoughts. His addition was comprised of three different types: ones that added explanations for words and fables, others that interpreted Chinese unique expressions, and lastly the ones revealed his own thinking on the issue.
Among the texts Hwang referred included many works by Korean scholars. The fact that he used explanatory diagrams fabricated by Korean scholars showed that he actively accepted the accomplishments of the Korean academia. On the other hand, he employed relatively small amount of books on Western Learning(西學). Considering his later move to Hanyang further exposed him to the books on Western Learning, this should be counted deciding when Hwang compiled Lisu-sinpyeon.
It is considered that Hwang's compilation of Lisu-sinpyeon was related to his life-long work on Annotations to the Xingli daquan(性理大全註解). The two books had a common goal of comprehensive survey of neo-Confucianism. One cannot specify the exact timeline, but Hwang's interest seemed to move to annotation of Xingli daquan around the late 1760s. Attaching memos for annotation and quoting on theories of sages or his own thoughts, he tried to utilize brand new books like Luli yuanyuan(律曆淵源, Origins and foundations of musical tuning, calculation, and the calendar). As Hwang once mentioned that he put his lifetime energy into Lisu-sinpyeon, he considered this work as his lifework. It demonstrated Hwang's scholastic endeavor to complete Annotations to the Xingli daquan by modifying and supplementing the Xingli daquan with newly acquired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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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18세기 구황 서적 편찬의 전개와 변화

저자 : 염정섭 ( Yeom Jeong-sup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3-311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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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구황 서적 편찬에서 주목되는 것은 1636년 이식과 최명길 등이 증보한 『고사촬요』이다. 이 『고사촬요』 「구황방」의 각 조목 가운데 조선 구황방 편찬 정리작업의 변화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구황을 위해서 탐색, 습득 등의 채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종자를 획득하고 이를 파종하여 기르는 재배법을 기재한 조목인데, 「구황방」의 맨 마지막 조목인 '종우법(토란 재배법)'이 그것이다. 이후 채소 대부분이 구황식물의 의미를 갖게 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1660년에 이르러 서원현감이던 신속은 『구황촬요』를 새로 간행하면서 「구황보유방(救荒補遺方)」을 붙여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를 편찬 간행하였다. 「잡물식법(雜物食法)」과 「벽곡절식방(辟穀絶食方)」이라는 항목 아래 여러 가지 구황식물을 식용하는 방법을 기재하고 있다.
18세기에 이르러 홍만선(洪萬選)이 편찬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구황과 관련된 많은 구황방(救荒方)을 수록하고 있었다. 구황방의 수집과 정리가 구황서라는 전문분야의 서적 편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산림경제』 이후 종합농서의 주요한 항목으로 '구황편'이 설정되어 편입되었다. 『산림경제』의 구황(救荒)과 치포(治圃)는 구황에 활용하는 구황식물의 상당 부분이 채소재배라는 일상적인 채소농사의 범위에 속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황식물과 채소로서의 성격을 각각 떼어 「구황」, 「치포」로 나누어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유중림(柳重臨)이 편찬한 『증보산림경제』는 『산림경제』 「구황(救荒)」 항목을 바탕으로 몇가지를 보완, 증보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서명응이 편찬한 『고사신서(攷事新書)』는 대부분의 내용이 『산림경제』 「구황」의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그런데 서명응의 『본사(本史)』는 농서의 구성체제에서 사서(史書)의 기전체(紀傳體) 형식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황정지(荒政志)」는 구황방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모아놓는 방식이 아니라 각 구황방과 연관된 초목(草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구황과 관련된 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구황방과 초목의 재배법을 연결시키는 내용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구황식물 확보방법이 채취에서 재배로 나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What is noteworthy as the compilation of books about famine relief on the 17th century is Gosachwalyo(『고사촬요(攷事撮要)』) compiled by Yi Sik(이식, 李植) and Choi Myung-gil(최명길, 崔鳴吉) in 1636. Among the items in this book, the changes in the compilation book about famine relief are shown as they are. It is not a method of searching and collecting for the sake of about famine relief, but a section describing the cultivation method of acquiring seeds and sowing them and raising them. Since then, most of the vegetables have moved on to the stage where they have the meaning of famine relief plants. By 1660, the Seowon Prefectural Officer(서원현감, 西原縣監) Sin Sok(신속, 申洬) newly published Singan-Guhwangchwalyo(신간구황촬요, 新刊救荒撮要), describing how to eat various famine relief plants.
In the 18th century, Sanlimgyeongje(산림경제, 山林經濟) compiled by Hong Man-seon(홍만선, 洪萬選), contained many nethods of famine relief related to the famine relief. It clearly showed that the collection and arrangement of the famine relief methos were not made only by compilation of books in the specialized field of famine relief. After that book the category of famine relief was established and incorporated as a major item of book of farming method. The Guhwang(구황, 救荒) and Chipo(치포, 治圃) of Sanlimgyeongje show that much of the famine relief plants used in famine relief within the range of everyday vegetable farming,
Most of the contents of the Gosasinseo(고사신서, 攷事新書) compiled by Seo Myeong-eung(서명응, 徐命膺) in the late 18th century were translated into Sanlimgyeongje compiled by Hong Man-seon. However, Seo Myeong-eung's Bonsa(본사, 本史) was introduced in the form of Gijeonche(기전체, 紀傳體). In addition, Hwangjeongji(황정지, 荒政志) was not a method of collecting all that corresponds to the famine relief method, but a method of explaining what is related to the famine relief in the part of explaining the vegetation related to each famine r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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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19세기 서양어 문헌 목록으로 살펴본 한국 인식의 형성 과정

저자 : 배민재 ( Bae Min-jae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13-344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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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동아시아 관련 서양어 문헌 목록의 분류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 관한 서양의 지리적·문화적 인식이 점차 분화하면서 한국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조명하였다. 동서 간의 접촉과 교류가 시작된 이래로, 아시아에 관한 지식은 각종 문서와 저술의 형태로 축적되었다. 문헌 목록은 그렇게 축적된 개별적 지식을 수집, 선별하여 배치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문헌 목록은 지식을 수집하여 나열한 축적의 한 형태이자, 분류의 총체이다. 수집된 도서에 대한 분류 및 배치는 문헌 목록의 편찬자와 독자가 속해 있는 학술 공동체의 인식과 규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용자에게 있어서 문헌 목록은 특정 분야에 관해 축적되어 온 지식의 안내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수집 및 분류 대상이 일치하는 문헌 목록들의 분류체계 및 분류 항목의 전거와 전승 관계를 추적하였다. 문헌 목록에서 지식이 존재하는 위치와 형태에 대한 분석은 한국 인식의 연원과 더불어, 지식을 생산해내는 주체 및 지식이 생산되는 맥락의 변화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recognition of Korea by the Western world, as their geographical and cultural perceptions of East Asia gradually differentiated, by analyzing the classification system of East Asian-related bibliographies. Since the beginning of East-West contact and exchange, knowledge of Asia has been accumulated in the form of various documents and writings. The bibliography serves to visually demonstrate the subject's perception of the target by collecting, screening and deploying such accumulated individual knowledge. In this study, the origin of Korean perception was traced through an analysis of the location and form of knowledge of Korea in bibliographies.
Bibliographies are more continuous if the object of knowledge is consistent or more relevant, even if the time and subject of compilation changes. This work notes this continuity, highlighting in particular the transfer relationship and rationale of classification systems and classification items. The intention is to reveal the transmission and differentiation process of the Western perception of the East Asian region. An analysis of the location and form of knowledge will serve as an opportunity to shed a new light on the origin of the perception of Korea, and the change of context on producing knowledge of Korea in the Wester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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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세기 말 한국 지식인의 서구 문화규범 수용 양태-윤치호의 경우-

저자 : 박주영 ( Park Ju-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45-38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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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말 서구 교육을 받은 뒤 동아시아로 돌아온 한국인 윤치호의 사례를 통해, 서구화된 그의 신체 및 정신이 동아시아의 '전근대적인' 일상 환경에 어떠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는지, 그 '전근대성'을 어떤 근거로 비판하였는지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서구화된 동양인/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였는지도 확인해 보려고 한다.
윤치호가 서구 세계를 떠나 동아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접하게 된 것은 그의 오감을 자극하는 '전근대적' 광경과 냄새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오랜 유학 생활 후 다시 접하게 된 중국과 한국의 환경 - 위생 및 예의범절을 포함한 일상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환경에 대한 그의 부정적 평가는 일면 나름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내면화한 서구의 미적 가치기준을 자동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표출하는 그의 신체·오감과는 달리, 그의 한국인(비서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이를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구한말 한국의 '전근대적인' 모습을 본 서구 선교사들의 태도와 분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experiences of Yun Tchi-Ho (1865-1945) studying abroad and the aspects of conflict with traditional society to shed light on the ambivalent identity of him, a Korean who returned home after experiencing Western modernity for the first time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main focus of this paper is how he experienced Western modernity, how he clashed with tradition and expressed his hybrid identities in the process after returning to East Asia.
What Yun encountered as soon as he left United States and arrived in East Asia was the “pre-modern" sight and smell that stimulated his five senses. He, a “modernized" subject, was unable to easily adapt to the pre-modern environment of China and Korea, including food, clothing and shelter, and etiquette that he encountered again after a long period of studying abroad. His negative assessment of the pre-modern environment in East Asia was based on his own rationalism, but on the other hand, he automatically applied Western aesthetic value standards that he internalized. Unlike his physical and five senses which express unbearable disgust in this environment, however, his identity as a Korean (non-western people) is forcing him to accept it. This is a clear difference from the attitude of Western missionaries who experienced “pre-modern" Korea at the lat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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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러일전쟁 개전 전후 언론의 국제정세 인식과 대응-한국 중립론을 중심으로-

저자 : 정종원 ( Jung Jong-wo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9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83-425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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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언론의 국제정세인식과 대응을 검토하여, 삼국제휴론으로만 해석되어 왔던 『황성신문』이 실제로는 국제정세에 따라 중립론과 삼국제휴론을 오갔음을 드러냄으로써, 한국의 지식인들이 주체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음을 밝히는 데 있다.
1903년 5월에 러시아가 용암포 사건을 일으키자 『황성신문』과 『한성신보』 모두 러시아를 경계하고, 의주 개시(開市)를 통해 러시아의 한국 침략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도 경계했던 반면에, 『한성신보』는 용암포에 침입하는 러시아군을 한국이 막지 못한 것이 문제라며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신문은 용암포 사건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1903년 하반기에 이르러 러일전쟁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한국의 중립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황성신문』은 동양과 한국 모두를 정체성의 대상으로 삼는 이중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중정체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삼국제휴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속적인 한국 침략은 『황성신문』으로 하여금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라는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이중의 침략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황성신문』의 이중정체성은 분열되었다. 결국 『황성신문』은 동양을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은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성신문』은 중립을 통해 자강(自强)을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으며, 중립을 선언한 청과 동맹을 맺어 동양의 연대와 한국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지키려 했다. 반면, 『한성신보』는 한국의 중립을 끊임없이 견제하면서, 중립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황성신문』은 한국이 이미 일본에 점령된 상황 속에서 삼국제휴론으로 선회했다. 삼국제휴론의 논리에 의지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성신문』은 한일의정서 체결에 격렬히 반대했다. 반면 『한성신보』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개전한 것이 정당하다고 강조하면서,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의 독립이 보장되었으니 내정에만 신경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성신보』는 한국의 주체적인 국제정세인식과 대응을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황성신문』이 국제정세에 따라 삼국제휴론과 중립론을 오갔다는 사실은 『황성신문』이 인종주의와 삼국제휴론에 갇혀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황성신문』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랑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how that the Capital Gazette (Hwangsŏng Sinmun), which was considered to claim the alliance of three nations (Korea, Japan, and Ch'ing), actually alternated between neutralization and alliance following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to reveal that Korea's intellectuals had independent thought.
When Russia seized Yongamp'o in May 1903, both the Capital Gazette and Hansŏng Sinbo alerted Russia, and tried to prevent Russia's invasion of Korea by opening a market [開市] in Ŭiju. But the Capital Gazette was wary about not only Russia but also Japan. On the other hand, Hansŏng Sinbo (pressed by Japanese in the Korean language) insisted that Korea was also responsible because Korea didn't stop the Russian army. Two papers show the rift in understanding and responding to the seizure of Yongamp'o.
In the second half of 1903, as the outbreak of war was becoming clear, the issue of neutralizing Korea began to emerge. The Capital Gazette has a dual identity, with both the East and Korea as subjects. And the Capital Gazette claimed the alliance of three nations, which satisfied dual identity. But the continuing Japanese invasion made the Capital Gazette lose trust that Japan would ensure Korea's independence. With the double-invasion occurring by Russia and Japan, the Capital Gazette's dual-identity was divided. Eventually, the Capital Gazette claimed that Japan had to wage war with Russia for the sake of the East and that Korea should remain neutral for independence. Capital Gazette's intend was to make time by neutralization, and alliance with Ch'ing to keep the alliance of the East and Korea's independence. Meanwhile Hansŏng Sinbo continuously opposed Korea's neutrality, and tried to break the legitimacy of neutralization.
When the Russo-Japanese War broke out, The Capital Gazette turned to claim the alliance of three nations, under the condition that Korea was already occupied by Japan. The Capital Gazette's intent was to keep Korea's independence dependent on the logic of the three nations' alliance. As a result, the Capital Gazette was vehemently opposed to the Japan-Korea Treaty of 1904. Meanwhile, Hansŏng Sinbo justified Japan's outbreak of war and claimed that Korea should focus on domestic problems since the Japan-Korea Treaty of 1904 guaranteed Korea's independence. Hansŏng Sinbo was trying to prevent Korea's independent understanding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response.
The fact that the Capital Gazette alternated between neutralization and alliance following the international situation shows the Capital Gazette wasn't locked into racism and the alliance of three nations. Korea's intellectuals, represented in the Capital Gazette, made various selections to keep Korea's independence from the Russ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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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법화경』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하는가?-세친 『법화경론』의 사종성문설을 중심으로-

저자 : 하영수 ( Ha¸ Young-s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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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일승사상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세친의 『법화경론』을 중심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세친은 그의 주석서에서 『법화경』의 성문을 퇴보리심성문(退菩提心聲聞), 응화성문(應化聲聞),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 결정성문(決定聲聞)의 네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이 사종성문설은『유가사지론』에서 설해진 사종성문의 개정(改定)이다. 세친은 이 사종성문 중에서 앞의 두 부류는 여래로부터 직접 수기를 받았지만, 나머지 두 부류의 성문은 상불경(常不輕)보살로부터 수기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이 사종성문에 대응하는 경문을 찾아 그들의 성불 여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네 부류의 성문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관건이 되는 것은 유가행파에서 성불할 수 없는 성문으로 분류한 취적성문(趣寂聲聞)의 성불 여부이다. 그러나 취적 성문에 관해서는 「화성유품」에서 아라한의 죽음 이후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성불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경전에 취적성문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져 있으므로, 세친은 수행론적 관점이 반영된 취적성문이라는 용어를 종성론적 색채가 투영된 결정성문으로 변경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변경은 『법화경』의 '일체중생의 성불'이라는 명제와 유가행파의 '종성이론' 사이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법화경』의 일승(一乘)사상을 종성론적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일종성(一種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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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대통사와 『법화경』 「화성유품」 신앙

저자 : 조경철 ( Jo Gyung-cheol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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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대통사는『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이 대통 원년(527)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웅진에 세웠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단순히 신라법흥왕을 백제 성왕으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대통을 양무제의 연호로 보았다. 필자는 예전 대통사는 무령왕의 3년 빈상이 끝나는 525년 무렵무령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고 절 이름의 대통은 『법화경』 「화성유품」의 대통불로 보았다. 「화성유품」에 의하면 전륜성왕 - 대통불[위덕세존] - 법왕/사택지적으로 이어지는데, 백제에서는 성왕 - 위덕왕 - 법왕으로 이어지고 대표적인 법화신앙자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있었다. 대통불에게는 16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은 나중에 출가하여 8방에 둘씩 16부처가 된다.
이 글에서는 양나라 무제의 '대통' 연호를 따서 527년 대통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백제에서는 백제에 전륜성왕의 성왕이 있었고 불교에 돈독한 위덕왕과 법왕이 있었고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있었다는 데서 ≪대통사≫가 『법화경』 「화성유품」의 대통불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백제는 대통불의 계보를 백제 왕실에 적용하여 왕권의 신성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한편 웅진시대 처음으로 연꽃 문양의 연잎 개수가 8개인 것과 16개인 것이 등장하고 사비시기 각 잎마다 2개씩 갈라진 8(x2=16)엽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를 8방에 둘씩 배치된 16부처를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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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효의 『법화경』 삼거가와 사거가의 논쟁에 대한 관점-『법화종요』를 중심으로-

저자 : 이병욱 ( Lee¸ By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0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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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원효의 『법화경』 삼거가(三車家)와 사거가(四車家)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였다. 『법화경』의 중요내용 가운데 하나가 삼승의 가르침이 궁극에는 일승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비유품」에서는 비유를 통해서 다시 설명하는데, 여기에 대승을 비유한 '소의 수레'와 일승을 비유한 '큰 흰 소의 수레가 등장한다. 중국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소의 수레'와 '큰 흰 소의 수레'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논쟁이 생겼다.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이 논쟁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원효는 화쟁사상적 근거로서 말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서 3가지 화쟁의 견해를 주장한다. 첫째, 통(通)과 별(別)의 관점에서 화쟁하는 것이다. 이는 삼거가와 사거가의 견해가 일승을 인정하는 것과 이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삼거가의 관점에서 화쟁하는 것이다. 이는 성문과 연각이 실제가 아닌 점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고, 이 점에서 삼거가와 사거가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통교삼승'과 '별교삼승'으로 구분해서 화쟁하는 것이다. 삼거가의 주장은 '통교삼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고, 사거가의 주장은 '별교삼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거가와 사거가의 주장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전개된 것이므로 서로 충돌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3가지 화쟁의 견해를 제시하면서도 셋째의 견해에 비중을 두고 있고, 또 셋째 견해 가운데서도 '별교삼승'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원효는 '별교삼승'의 관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원효는 삼승의 인과(因果)가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을 4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별교삼승의 개념에 '인승'과 '천승'이 포함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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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이초(最澄)의 법화사상-그가 평생 추구하고자 한 것-

저자 : 원영상 ( Won¸ Yong-sa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2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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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 후반에 유입된 천태종은 중세 신불교 탄생의 요람이 된다. 천태종의 역할은 사실상 근현대 다양한 불교계 신종교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일본불교의 저변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종합불교로서 신앙과 수행의 폭넓은 세계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천태종은 사이초(最澄, 766~822)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원ㆍ선ㆍ계ㆍ밀(圓禪戒密)의 4종(宗)을 계승했다. 귀국해서는 밀교를 도입하여 완전한 종합불교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국가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대승교단 구축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천태종을 일본에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사이초는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남도불교(南都佛敎)의 대표주자인 도쿠이츠(德一)와의 논쟁이다. 불성론(佛性論)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이초는 심혈을 기울여『법화경』의 정신에 의거한 일승(一乘)사상을 주장했다. 말년에 나온 많은 저술은 이러한 법화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핵심은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불도(皆成佛道) 사상이다. 일본 불교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결국 사이초가 주장한 법화사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기성불교계와 국가불교로부터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밀교와 더불어 종합불교의 양축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이초는 법화사상에 기반한 수행체계를 통해 대승불교의 정신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가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에서 “나라의 보물을 무엇인가. 그 보물은 도심(道心)이다. 도심 있는 사람을 국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도심은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비예산(比叡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대승의 계율을 확립했다. 후대에 사이초의 법화종단은 그가 대립했던 기성불교계와 마찬가지로 왕권과 밀착하고 마침내 분열되기는 했지만, 여러 조사들에 의해 시대를 따라 늘 새롭게 해석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불교의 사상적 저수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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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저자 : 김희만 ( Kim¸ Heui-ma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6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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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최치원 관계기사를 분석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一然)의 최치원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 관련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가 왜 최치원 관련 자료를 다른 인물의 자료보다 많이 삽입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를 검토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삼국사기』에 서술된 최치원 관계 자료와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관계 자료는 최치원에 '대한(about)' 서술 위주라면, 『삼국유사』 관계기사는 최치원에 '의한(by)' 논지 전개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최치원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최치원의 말을 원용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더욱 폭넓게 찬술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연의 역사서술 태도가 유연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불교 승려였지만, 유학(儒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최치원 관련 자료를 중시하여, 활용한 것이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지만, 귀국 후 왕명으로 불교 관련 비문,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작성하는 등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일연에게 있어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사에 정통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한 인식이 『삼국유사』의 찬술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 『삼국유사』 관계기사의 의미 또는 성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치원 관련 자료를 『삼국유사』에 굳이 수록하여 무엇을 밝히려고 했는 지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을 한국 고대사회 및 불교와 유교에 정통하였다는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 최치원 관련 자료이며, 일연은 그 기반 위에서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유교와 상대되는 불교 또는 신이사관(神異史觀) 등으로 평가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최치원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은 불교와 유교를 접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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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종 즉위 초 종친부 강화와 경복궁 내 제례 공간의 확장

저자 : 이민아 ( Lee¸ Min-ah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20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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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와 함께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중건 경복궁은 조선 초 경복궁의 재현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축적된 의례 전통이 발현된 결과물이었다. 의례 공간 중에서도 제례 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은 중건 경복궁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제례 공간은 흉례(凶禮)를 위한 빈전(殯殿) ㆍ혼전(魂殿) 권역과 선왕의 어진을 봉안한 길례(吉禮) 공간인 선원전(璿源殿) 권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때 빈전, 혼전 및 선원전은 모두 종친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종친부의 정치적 권한을 확대함과 동시에 종친부 건물을 확장하였다. 종친부는 광화문 앞 의정부ㆍ삼군부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했다. 종친부 내 핵심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집무실인 아재당(我在堂)과 함께 철종의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선원전에서 철종을 배제하는 대신 종친부 내에 새로운 철종 어진봉안처, 천한 전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선원전 권역이 궐 밖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와 함께 궁궐 내 빈전 및 혼전 등 흉례 공간이 궁궐 북서쪽 권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공간은 전체 궁궐면적의 1/5 가량을 차지하지만 건물 사이의 밀도는 매우 낮았다. 이는 중건 경복궁 내에서 흉례 공간이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선원전 및 빈전ㆍ혼전 공간은 종친부가 의례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소렴과 대렴 의식 등 흉례 의식이 진행될 때 종친이 백관과 함께 거애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국초부터 정해진 의례 절차였다. 진향 절차에서 종친은 항상 문무백관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기 때문에 빈전ㆍ혼전 공간은 자연스럽게 위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종친과 문무백관 다수가 의식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야 했으며, 종친이 의례를 주도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건 경복궁은 종친부 강화라는 맥락에서 종친부 공간과 연동해서 해석해야만 그 특징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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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서평】『조선 불교사상사: 유교의 시대를 가로지른 불교적 사유의 지형』 [김용태, 2021,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저자 : 손성필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1-209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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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2021, 푸른역사]

저자 : 나종현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1-225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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