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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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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A Study on Samgukyusa(三國遺事) and Choi Chi-won(崔致遠)

김희만 ( Kim¸ Heui-man )
  • : 한국사상사학회
  • : 한국사상사학 68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8월
  • : 129-163(35pages)
한국사상사학

DOI


목차

머리말
1.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 검토
2.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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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최치원 관계기사를 분석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一然)의 최치원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 관련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가 왜 최치원 관련 자료를 다른 인물의 자료보다 많이 삽입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를 검토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삼국사기』에 서술된 최치원 관계 자료와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관계 자료는 최치원에 ‘대한(about)’ 서술 위주라면, 『삼국유사』 관계기사는 최치원에 ‘의한(by)’ 논지 전개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최치원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최치원의 말을 원용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더욱 폭넓게 찬술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연의 역사서술 태도가 유연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불교 승려였지만, 유학(儒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최치원 관련 자료를 중시하여, 활용한 것이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지만, 귀국 후 왕명으로 불교 관련 비문,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작성하는 등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일연에게 있어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사에 정통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한 인식이 『삼국유사』의 찬술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 『삼국유사』 관계기사의 의미 또는 성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치원 관련 자료를 『삼국유사』에 굳이 수록하여 무엇을 밝히려고 했는 지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을 한국 고대사회 및 불교와 유교에 정통하였다는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 최치원 관련 자료이며, 일연은 그 기반 위에서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유교와 상대되는 불교 또는 신이사관(神異史觀) 등으로 평가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최치원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은 불교와 유교를 접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In this article, we analyzed the articles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三國遺事)』, and looked into the recognition of Choi Chiwon of Ilyeon(一然), a author of 『Samgukyusa』. In 『Samgukyusa』, there are more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than other figures, but no active review has been made so far. Through this study, we investigated why the proponent of 『Samgukyusa』 inserted more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than other figures, and what he was trying to convey as a result.
First, in order to examine the articles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 related data were extracted and analyzed in comparison with the data related to Choi Chi-won described in 『Samguksagi(三國史記』. Through this, it was possible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while the documents related to 『Samguksagi』 focused on ‘about’ to Choi Chi-won, the articles related to 『Samgukyusa』 were developed ‘by’ by Choi Chi-won. In other words, Ilyeon intentionally used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while writing 『Samgukyusa』.
The contents of 『Samgukyusa』 could be more widely recited by Ilyeon citing Choi Chi-won's words, and this was possible because of Ilyeon's flexible attitude in writing history. Ilyeon was a Buddhist monk, but it is thought that he had an attitude to Accept Confucianism. The fact that he put importance on Choi Chi-won-related materials and utilized them shows that attitude. Choi Chi-won was a scholar who studied Confucianism in China, but after returning to Korea, he was active as a literary writer by writing Buddhist inscriptions, especially Sasanbimyeong(四山碑銘). Therefore, for Ilyeon, Choi Chi-won could be regarded as a Confucian scholar and well-versed in Buddhist history. I think that this perception of Choi Chi-won was reflected in the hymns of 『Samgukyusa』.
Next, the meaning or nature of the articles related to 『Samgukyusa』 was examined in more detail in order to investigate the use of Choi Chi-Won's data and its recognition in Ilyeon. It was an attempt to verify what he was trying to reveal by including the data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 In fact, in 『Samgukyusa』, Ilyeon acknowledged that Choi Chi-won was well versed in Korean ancient society, Buddhism and Confucianism, and actively reflected and recorded this. He wrote that part. Existing studies have evaluated the characteristics of Ilyeon as Buddhism or historical consciousness of God(神異史觀) as opposed to Confucianism. Considering that the intention to articulate is reflected, it could be suggested that a new understanding and a broader approach are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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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410-ECN-0102-2022-100-000787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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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연3회
  • : 1226-9441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87-2022
  • :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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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권0호(2022년 04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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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송기식 『유교유신론』의 집필 계기와 '유교청년' 기획

저자 : 이현정 ( Lee¸ Hyun-j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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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유교 담론 중에서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송기식의 『유교유신론』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유리된 채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유신론』에서 제시하는 '유교 현대화론'은 저자를 비롯한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이자, 1920년대 신문 매체의 담론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였다.
송기식은 자신이 지닌 유교 지식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다수의 서간문을 주고받았다. 선배그룹으로부터의 영향은 물론이고, 특히 동료/후배그룹과는 서간문을 통해 후진 양성에 방점을 둔 교육 사업을 중시하고 있음을 논했다. 이러한 후진 양성에 대한 관심은 종국에 『유교유신론』 집필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집필 내용은 다시 동료에게 요약 전달되면서 주변 유교 지식인 내부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유교 지식인 내부의 논의와 더불어, 『유교유신론』은 집필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1920년대 신문 매체의 유교 비판 논쟁을 인식하고,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 후 현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후속 세대 양성에 관심을 갖고 청년들의 비판과 세대론에 주목하였다.


Song Ki-sik's Confucian Revitalization Theory(1921), considered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among the modern Confucian discourses in Korea, did not appear apart from the context of the time. The Confucian Revitalization Theory presented in 'Confucian Modernization Theory' was a discourse within the author and other Confucian intellectuals, and a result of being deeply conscious of the discourse of the newspaper media in the 1920s.
Song Ki-sik exchanged a number of letters using his network of Confucian intellectuals. In addition to the influence from senior groups, he discussed in a letter with colleagues and junior groups that he emphasized educational projects focusing o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This interest i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eventually served as an opportunity to write Confucian Theology. As the contents of the writing were summarized again to colleagues, it became a discourse within the surrounding Confucian intellectuals.
Along with the discussions within Confucian intellectuals, the Confucian Revitalization reflects the context of the period at the time of writing. The text recognized the controversy over Confucian criticism presented by the newspaper media in the 1920s, critically reviewed the contents, and suggested a modernization plan. In particular, it paid attention to the criticism and generational theory of young people with interest in fostering younger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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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 지식인의 서양 번역서 독해방식: 전병훈,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의 사례를 중심으로

저자 : 소진형 ( Soh¸ Jean-h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41-73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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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의 분석을 통해 서양식 교육을 받지 않은 조선 지식인의 서양서적 독해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한 글로 평가되어 왔지만, 실제 이 텍스트의 서양사상 부분을 검토해보면 그가 서양사상을 그 자체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기존 번역서 중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발췌하고 모아서 구성한 것이라는 점이 확인된다. 특히 『정신철학통편』의 2권 14장, 15장을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출판되었던 번역서 및 개론서와 비교해보면, 전병훈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고 서양사상을 수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초가 발견된다. 전병훈이 인용한 책들은 『법의(法意)』, 『철학요령(哲學要領)』, 『철학강요(哲學綱要)』, 『심리학개론(心理學槪論)』 등으로, 그 번역자들은 엄복, 채원배, 왕국유였다. 이들은 서양 철학 개념에 대한 번역어가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태극(太極), 리(理), 성(性)과 같은 동양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번역에 반영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어의 선택은 전통적인 언어로 책을 독해하는 전병훈과 같은 사람들의 자의적 독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전병훈의 서양철학서의 독해방식을 검토하고 근대 초기교육의 체계 없이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양 사상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This article aims to scrutinize how Korean intellectuals who did not acquire a Western-style education read translated Western texts through an examination of Jeon Byeonghun's Jeongsin cheolhak tongpyeon. His book has been praised for integrating Eastern and Western philosophy; however, when we compare it to the translations he read, we can see that he wrote his book by taking bits and pieces from the translations he read and weaving them together. He had mostly read Western books translated by Yan Fu, Cai Yuanpei, and Wang Guowei, in which the translators intentionally and unintentionally borrowed the core terms of Eastern philosophy to use for the translation of Western philosophical terms. The translators' practice contributed to Jeon's liberal reading of Western philosophy and his own way of interpretation; due to the terminology, he came to believe that Western philosophy was concerned with li, xing, xin, and taiji and that he was free to read the works. Jeon's instance is significant because it demonstrates how intellectuals who did not receive a contemporary education would place Western literature in Eastern intellectual contexts and read them through an Eastern l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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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소녀필지(少女必知)』의 특징과 지향

저자 : 이정민 ( Lee¸ Jung-mi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75-10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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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1920년대 편찬된 조인석(趙寅錫, 1879~1950)의 여성교육서 『소녀필지(少女必知)』를 통해, 식민지시기 유교 관습의 척결과 문명개화를 주장한 지식인이 집필한 여성교육서의 특징과 여성 인식을 검토하였다. 저자는 신구 문명의 갈등으로 촉발된 가족의 붕괴, 근대자본주의와 식민지배라는 현실로 야기된 여성 빈곤의 현실을 분석하고, '신구 문명의 공존' 및 '노동을 통한 가난의 극복'이라는 두 화두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한 기존의 여성교육서와는 매우 다르다. 성현의 언행 대신 본인의 경험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서술하였고,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성녀(聖女)' 대신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여성들의 사례를 수록하였다. '가문의 번성을 위한 여성 교육'을 중시한 종래의 여성교육서와 달리 여성 교육을 '여성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전통적 남녀유별 의식보다 부부간의 애정과 위생의 문제를 거론한 것도 이 책의 근대적 특징이다.
저자는 구여성과 신청년 간의 갈등으로 인한 이혼과 별거의 증가, 구여성 시모와 신여성 며느리 간의 갈등 등 신구 문명의 충돌에 주목하였다. 이에 구여성에게는 구습의 탈피와 신지식 습득을 강조하고,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혼당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반면 신여성에게는 서구 문명과 가난한 조선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고, 구생활의 노동과 살림을 배워 현실에 안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둘 다 여성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 조언이었다고 하겠다.
저자는 또 자본주의가 유입되던 식민지 현실에서 경제적 빈곤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이에 돈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불식하고 가난을 합리화하지 말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가난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를 통해 가족의 붕괴를 막고 가난을 극복하며, 무엇보다도 경제의 멸망을 막는 것이 식민지하에서 종족을 보전하는 궁극의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Examined in this article is a Female Education text called So'nyeo Pilji (少女必知, What Every Girl Should Know), authored in the 1920s by a Korean modern intellectual named Jo In-seok(趙寅錫, 1879-1950).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Jo In-seok called for the abolition of old Confucian practices, and strongly supported the idea of cultural enlightenment. This text effectively reveals Jo's perception of females, as well as certain 'tasks' which he thought women should take on in the future. In his eyes, the two biggest problems that were threatening the very survival of the Korean females were collapse of families and poverty, which were brought on by clashes between old and new ways and not to mention the advent of modern capitalism to a colonized land, so his suggestions were all based on that very observation.
This book wa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other female educative texts of the time, which had mostly dealt with traditional values. Words from 'Past sages,' the usual component of traditional texts, were replaced by stories and episodes from the author's past experience and even imagination. Instead of promoting females who could only be called as Women saints(聖女) symbolizing Confucian values, Jo's book is filled with stories of females stuck in tough economic situations. Unlike past female educative texts that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female education onlhy in terms of 'Building prosperous families,' Jo claimed that female education was imperative because it was vital to the women's survival. He also discussed the importance of 'love(affection)' between spouses and the issue of sanity, instead of stressing on traditional notions like 'different roles of spouses.'
Jo In-seok was keenly aware of the 'clashes' that were happening between old and new ways, represented by sudden increase in separation and divorces between spouses (especially between new-age males and old-style females) or conflicts between females (particularly between old-style mothers-in-law and new-age daughters-in-law). He asked the old-age females to break free from old customs and learn new things, and especially not to allow themselves to be divorced in economically handicapped situations. Then he also asked the new-age females to acknowledge the rift between Western civilization and the Joseon society's reality, and try to eventually fit in by familiarizing themselves with old labor and living styles. Both suggestions were of a nature that prioritized female survival.
Jo was also very concerned about female poverty in colonized Joseon, which was also witnessing at the time the onset of Capitalist aspirations unfolding on a larger scale. He pleaded that the Joseon people let go their prejudice and misconception of money, do not in any way justify poverty, and engage in proper labor to overcome their poor reality. It was his belief and his suggestion, that only by doing so the Joseon society could prevent collapse of the families, further spreading of poverty, and ultimately keep the economy in tact and save the Korean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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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탐라기년』에 담긴 심재 김석익의 의식과 시각에 대하여

저자 : 김새미오 ( Kim¸ Saemi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05-1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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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심재 김석익(心齋 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대한 제반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 글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탐라기년』의 서지사항을 정리하였고, 실증적 사실추구, 유교문명의 제고, 표류에 대한 재인식의 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용과 시각을 정리하였다. 이어 저작이 차지하는 학술적 위치를 정리하였다.
『탐라기년』은 필사본과 연활자본이 전해진다. 원본인 필사본은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연활자본은 1918년 영주서관에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탐라기년』은 탐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심재는 본격적인 제주 역사기록에 앞서 「외서(外書)」라는 항목을 두어 탐라시대를 따로 구분하였다. 탐라는 제주사람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지만, 문헌기록은 많다고 할 수 없다. 심재는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외서」를 써 내려갔고, 이를 통해 탐라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심재는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역사로 해석하려하지 않았다. 이에 『탐라기년』을 서술하면서, 부족하거나 보충 서술이 필요한 부분은 '부(附)' '안(按)'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기술하였다. 이런 방식을 통해 심재는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 후세의 검증을 기다렸다.
유교문화에 대한 심재의 기술은 제주도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살펴보았다. 제주는 무속 문화가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심재는 병와 이형상의 신당철폐 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유교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유교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조선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며, 이는 일제강점기 유교지식인의 문투(文鬪)로 평가할 수 있다. 바다에 관한 인식 역시 주목된다. 이는 제주 사람들의 지리적 인식이 확대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재가 기록한 표류와 표착에 관한 자료는 예전에 있던 다른 서적들 보다 그 양이 많다. 그만큼 심재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재의 『탐라기년』은 지금까지 제주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다. 기존에 있던 역사저술이 대부분 외부인이 제주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면, 『탐라기년』은 제주사람이 제주를 직접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characteristics of Tamlaginyun written by Shimje Kim Suk-Ik. It first identifies the three bibliographic items of Tamlaginyun and further examines their meanings. The items identified are: seeking for positivist truth, improvement of Confucius civilization and perceptions regarding floating. Tamlaginyun has currently both a transcript copy and a lead printed copy. The original transcript copy being located in Jeju National Museum, the lead printed copy was published in Yongjuseogwan in 1918, this further being widespreadly recognized. Tamlaginyun documents, in a chronological form, historical facts for the periods from Tamla to modern. Prior to getting into recording history of Jeju, Shimje put Tamla period under the separate heading of a foreign book. Even though Tamla is very critical to the identity of Jeju islanders, documented records are not impressive. Shimje aimed to put in order Tamla history under the heading of a foreign book drawing upon evidence-based documents. Shimje put himself significantly cautioned to interpreting as a history those unidentifiable through documents. In this reason, in writing Tamlaginyun, he prepared separate appendix headings(附, 按) in order to provide supplementary explanations. Through this, he corrected existing misguided perceptions and waited further verification by leaving the unidentifiable for future generations.
In describing confucius culture, Shimje looked into a specific situation of Jeju. It is because Jeju is a place in which shamanism culture is very strong. He believed that the abolishment of shamanism temples by Byungwha Lee Hyung-Sang would bring Jeju into a place where confucius culture could prosper. Shimje's emphasis upon confucius culture can be read as considering Joseon positively, which is also a literary battle through which confucius scholars kept their identities living the Japanese occupation years. It is worthwhile to pay attention to his perception of seawater. This is because the geographic perceptions of Jeju islanders got to broaden. The volume of materials that Shimje recorded concerning floating and drifting ashore are much greater than the previous ones. We can be hinted that Shimje made a great effort in documenting these subjects. Shimje's Tamlaginyun transforms the way Jeju is perceived so far. While Jeju and its history having been documented by non-native scholars to Jeju, Tamlaginyun holds very important implication in that it is written by Jeju island born native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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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와 의미

저자 : 이민기 ( Yi¸ Min-ki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35-159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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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圜丘)제사는 유교적 성격을 가진 국가의례 가운데 위상이 가장 높은 제사이다. 고려왕조는 정월 상신일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인 상제와 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에게 송아지[犢]을 잡아 바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고려시대 환구제사의 희생물을 처리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그 가운데 특이점을 도출하여 환구제사의 성격과 의미를 가늠해 보았다.
고려 환구제사에서는 희생이 신을 맞이하기 위해 적합한 상태인지 점검하고, 도살한 뒤 머리·피·몸통을 분리한다. 분리된 희생의 머리와 피는 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신단계에서 사용되었다. 몸통은 삶은 후 별도의 제기에 담아 각 신좌 앞 제사상에 올렸으며, 국왕·태위·광록경이 헌작한 다음, 요단에서 제사상에 올렸던 고기와 제물들을 태워 신을 돌려보내는 과정을 거쳐 제사를 종결하였다.
고려 환구제사의 희생 처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희생의 머리를 태워 연기를 내는 행위로서 신을 맞이 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이 행위는 고려초 성종대 환구제사 설행 초기가 아닌 고려중기 예종대부터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두 번째는 모혈, 그 중에서도 '피'의 문제이다. 고기로부터 분리된 피가 '생명력', '생동감'이라는 본연의 상징성을 토대로 희생의 신선함을 부각시키는 실용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피가 제거된 깨끗한 희생물로써 제사대상에 대한 예우를 극대화한 외양 또한 연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The Round-Altar Rite(圜丘祭祀) was the most important and in fact highest Confucian ritual a government of a pre-modern dynasty could ever hold, and so it was in Goryeo as well. Every Sangshin day in January, the Goryeo King would offer a calf(犢) to the Heavenly King(Sangje) and the Founder King Taejo Wang Geon, hoping for a generous yield that year.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those sacrifices were processed, while the nature and meaning of the rite itself is contemplated as well.
The animal to be offered as a sacrifice was first examined to make sure it was in adequate shape to be offered to deities in the ritual. Then it was killed, and the head would be severed from the body while blood was removed as well. The head and blood were later used to invite the deity, and the body was boiled to be offered in bowls. After the King and officials paid respect, the meat and other items were all burned in an act of bidding farewell to the departing spirits.
There were two unique aspects in Goryeo Round-altar rites, in terms of the treatment of the sacrifice. First, the animal's head would be burned to make smoke that would guide the spirit to the service. This practice does not seem to have originated with the initiation of the ritual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but instead later on during King Yejong's reign. Secondly, the blood of the animal seems to have harbored a fairly symbolic meaning. Other than its own image of vitality and liveliness, blood separated from the meat signified the freshness of the sacrificed animal, while a cleanly processed bloodless body would generate the appearance of honoring the deities with the utmost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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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정국(金正國)의 『성리대전서절요』 편찬과 대체군주론(大體君主論)

저자 : 최민규 ( Choi¸ Min-gy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61-19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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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정국이 편찬한 『성리대전서절요』를 통해서 기묘사림 내부의 군주론, 군신관계론의 한 특색을 살피고자 했다.
김정국은 기묘사화 이후에 기묘사림들의 『성리대전』 연구를 계승해 『절요』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지주제의 확산 속에서 몰락하는 농민들, 그리고 반정과 사화가 연쇄하는 정국 현실을 목도하면서 군주 주도의 정치론 모색 차원에서 『성리대전』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절요』의 체재 역시 원래 『성리대전』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대」, 「군도」, 「치도」 등 정치사상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을 긍정하는 목차와 언설을 활용해서 요약했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김정국은 『성리대전』에 담겨 있는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긍정하면서 『절요』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절요』의 내용적인 차원에서도 군주 주도의 정치론을 강조하는 특색이 드러난다. 그는 군주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는 군주가 정무의 최고 주재자로서 대체를 장악하는 가운데, 군신 간의 협력을 촉구하는 대체군주론을 바탕으로 『절요』의 군주론을 정리했다. 실제로 그는 군주수신론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실질적인 정무주재자로서 군주가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군신관계에서도 군주의 독단에 의한 정치는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신료들의 자정을 촉구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그는 군주와 재상이 같이 정치할 것을 말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보는 재상은 경세적 자질인 재와 도덕적 능력인 덕을 겸비한 실무재상이었다. 그는 실무재상론을 통해서 관료층의 실무에 대한 자질 강화, 그리고 그 내부의 자정 촉구를 통해 관료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했다.
요약하자면, 김정국의 『절요』는 중종 대의 정치·사회 문제를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발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절요』가 양반사대부 일반의 정치론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성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군주권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한 명종 대 집권세력이 주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This paper tried to examine one characteristic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uler and the subject through the 〈Seongri daejeonseo jeolyo〉 compiled by Kim Jeong-guk.
Kim Jeong-guk succeeded in the study of 'Seongri Daejeon'(『性理大全』) of the Gimyo sarim(己卯士林) and compiled 'Jeolyo'(『節要』). However, while witnessing the decline of peasants amid the spread of the land tenure system, and the political reality of a chain of 'literati purges'(士禍) and 'The Restoration of Righteousness'(反正), he paid attention to 'Seongri Daejeon' in terms of seeking a monarch-led political theory. Accordingly, the format of 'Jeolyo' was also summarized into political ideologies, which occupies a small proportion in the original 'Seongri Daejeon', and in the table of contents affirming the monarchcentered political operation and Much of the content structure was quoted. From this, it can be seen that Kim Jeong-guk compiled 'Jeolyo' while affirming the monarch-led political theory contained in 'Seongri Daejeon'.
Also, in terms of the content of 'Jeolyo', the characteristic of emphasizing the monarch-led political theory is revealed. In the part related to the monarch theory, he arranged the monarch theory of 'Jeolyo' while supposing the role of the monarch as the supreme ruler. In fact, he said that the monarch should be moral, but he emphasized that it was the means by which the monarch could function as a de facto ruler rather than constraining the monarch. At the same time, in term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arch and his subjects, he criticized the monarch's arbitrary politics, but similarly urged the rectification of the subjects' excessive media activity. Based on this position, he said that the monarch and the prime minister should govern together. His ideal prime minister was a working-level prime minister with both governmental and moral capabilities. He urged the normal operation of the bureaucracy by strengthening the qualifications of the bureaucrats in practice through the theory of practical re-employment, and by urging for self-correction within the bureaucracy.
In summary, Kim Jung-guk's 'Jeolyo' was an idea to solve the political and social problems of the reign of King Jungjong by strengthening the monarchy. However, this fact caused the attention of the ruling powers of the Myeongjong era, who sought ways to strengthen the monarchy within the framework of Neo-Confucianism, rather than being accepted as a general political theory by the yangbansadae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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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동법에 동조했던 '공(貢)'의 경세 담론들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199-243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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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납제를 대체했던 대동법은 조선 후기 다수의 유자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전국적 단위의 세제로서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대동법에의 동조'라는 지점에서 본다면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만, 그로부터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전후의 맥락을 조망한다면 이 지점을 교차했던 다양한 담론들이 논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이에 본고는 고법(古法)에 대한 이해를 출발점으로 개혁의 지향(指向) 종착점으로 설정하고, '대동법에의 동조'를 경유했던 경세 담론들을 분별적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확인된 상이한 네 경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을 고법으로 간주했으나, 현실에서는 이를 '시의(時宜)'에 맞게 경장(更張)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서인계 경세가들을 중심으로 한 유자들에게 비교적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둘째와 셋째는 고법에 있어 임토작공(任土作貢)은 제후가 천자에게 납부했던 후공(候貢)에 한정되는 한편, 백성이 군주에게 진납하는 민공(民貢)의 경우에는 대동법과 마찬가지로 수미(收米)의 방식이 시행되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고법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시 둘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토지 사유의 현실을 용인하는 바탕 위에서 대동법을 전조와는 별도의 세목으로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토지에 대한 차등적인 재분배를 달성한 토대 하에서, 대동세의 명목을 전조의 일부로 용해시키는 입장이다.
넷째는 삼대에는 9직(職)이 전업을 이루었으며, 공(貢)은 이들에게 각자가 생산한 물품을 납부케 한 직공(職貢) 즉 직업세였다는 견해이다. 정약용이 이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러한 고법으로서의 직공을 경세의 지향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현실의 조선은 사회적 분업이 전업적 산업체계로 성숙되지 못했던 까닭에 이것이 당장 시행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산은 한편으로는 직공의 시행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조선 산업의 다각화와 전업화를 추동할 방안을 제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동법이 비록 그에게 이상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직공 시행의 이전 단계에서 그것이 지니는 제도사적 의의를 긍정했다.
공(貢)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유학적 이상과 조선 후기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유자들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경세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로써 펼쳐진 스펙트럼은 경세라는 유학의 본령과 시대적 요구에 당시 유자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었음을, 또한 지향하는 목표의 근거와 모델을 고법의 재해석을 통해 '발견'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경세학을 유학적 이상과 조선적 현실, 그리고 미래적 지향 사이의 다층적 학술 담론으로서 입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Gong(貢), Daedong Law(大同法), Imposing Tribute upon Regional Products(任土作貢), Old Law(古法), Tribute System, Hwang Shin(黃愼), Lee Yoo-tae(李惟泰), Kim Yuk(金堉), Jo Ik(趙翼), Yu Hyeoung-won(柳馨遠), Jeong Yak-yong(丁若鏞), Occupational Tax(職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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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저자 : 나종현 ( Na¸ Jong-hyu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70권 0호 발행 연도 : 2022 페이지 : pp. 245-277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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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背師論)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윤증의 배사 문제는 노론에서 끊임없이 소론에 대한 공격 논리로 활용하였던 것이었다. 『가례원류』 사건을 거치며 숙종의 처분으로 윤증의 배사가 '공식화'되면서, 배사론은 단순한 공격 논리를 넘어 하나의 정치론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사문(師門)의 입장을 수호하려 하였던 호론계 권상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배사론은 호론계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스승에게 학문적으로 반발한 혐의를 가지고 있던 권상하 문하의 이간은 스승에 대한 글을 지어 윤증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낙론 계열의 이현익 또한 윤증의 배사 문제를 논하면서 윤증과 그를 옹호한 나양좌를 비판하였다.
경종대의 신임옥사와 영조대 초반의 의리 문제를 거치며 배사론은 충역론과 결합하여 노론 의리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권상하로부터 호론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한원진은 배사의 문제를 충역과 연결하고, 스승과 군주를 배신한 난적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원진과는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여 논쟁을 벌였던 이간 또한 배사론과 충역론에 근거하여 노론 의리의 관철과 소론에 대한 강한 징토를 주장하였다. 18세기 초반 호론계 배사론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배사론이 단순히 그들의 태생적 배타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국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영향력이 변화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development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Ho-ron's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problem of Yun Jeung's betrayal of his master, Song Si-yeol, was that Noron had constantly used as an attack logic against So-ron. However, after the fact that Yun's betrayal was formalized by King Suk-jong through the controversy over 『Garyewonryu(家禮源流)』, it could served as the political theory of Ho-ron. Here, Kwon Sang-ha, who tried to defend the position of his school, played a great role. This allowed the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had a greater effect than before. Yi Gan, Kwon's diciple, who was accused of protesting against his master, wrote a text about the master. In this text, Yi criticized Yun and defend his own position. Yi Hyun-ik, a member of the Nak-ron, also criticized Yun Jeung and Na Yang-jwa, and defended the position of his own school.
Through the King Gyeong-jong's reign and the early King Yeong-jo's reign,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was used as a mechanism to emphasize the legitimacy of Noron loyalty. Han Won-jin, who was considered as the heir of Horon, argued that the So-ron had betrayed the master and King Gyong-jong and King Yeong-jo should punished them drastically. This appearance was also revealed without much difference in Yi Gan, who was philosophically arguing with Han. Yi also revealed same political ideas with Kwon-Han line's, which runs from the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to the theory of 'betraying own king'. Consider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Ho-ron's theory of 'betraying own master' in the early 18th century, it can be seen that the theory was not simply due to Ho-ron's inherent exclusivity, but the status and influence of the theory changed according to the changes in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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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법화경』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하는가?-세친 『법화경론』의 사종성문설을 중심으로-

저자 : 하영수 ( Ha¸ Young-su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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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일승사상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설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세친의 『법화경론』을 중심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세친은 그의 주석서에서 『법화경』의 성문을 퇴보리심성문(退菩提心聲聞), 응화성문(應化聲聞),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 결정성문(決定聲聞)의 네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이 사종성문설은『유가사지론』에서 설해진 사종성문의 개정(改定)이다. 세친은 이 사종성문 중에서 앞의 두 부류는 여래로부터 직접 수기를 받았지만, 나머지 두 부류의 성문은 상불경(常不輕)보살로부터 수기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이 사종성문에 대응하는 경문을 찾아 그들의 성불 여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네 부류의 성문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관건이 되는 것은 유가행파에서 성불할 수 없는 성문으로 분류한 취적성문(趣寂聲聞)의 성불 여부이다. 그러나 취적 성문에 관해서는 「화성유품」에서 아라한의 죽음 이후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성불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경전에 취적성문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져 있으므로, 세친은 수행론적 관점이 반영된 취적성문이라는 용어를 종성론적 색채가 투영된 결정성문으로 변경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변경은 『법화경』의 '일체중생의 성불'이라는 명제와 유가행파의 '종성이론' 사이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법화경』의 일승(一乘)사상을 종성론적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일종성(一種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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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제 대통사와 『법화경』 「화성유품」 신앙

저자 : 조경철 ( Jo Gyung-cheol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7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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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대통사는『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이 대통 원년(527)양나라 무제를 위해서 웅진에 세웠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단순히 신라법흥왕을 백제 성왕으로 바꾸어 이해하고 있다. 대통을 양무제의 연호로 보았다. 필자는 예전 대통사는 무령왕의 3년 빈상이 끝나는 525년 무렵무령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고 절 이름의 대통은 『법화경』 「화성유품」의 대통불로 보았다. 「화성유품」에 의하면 전륜성왕 - 대통불[위덕세존] - 법왕/사택지적으로 이어지는데, 백제에서는 성왕 - 위덕왕 - 법왕으로 이어지고 대표적인 법화신앙자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있었다. 대통불에게는 16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은 나중에 출가하여 8방에 둘씩 16부처가 된다.
이 글에서는 양나라 무제의 '대통' 연호를 따서 527년 대통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백제에서는 백제에 전륜성왕의 성왕이 있었고 불교에 돈독한 위덕왕과 법왕이 있었고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있었다는 데서 ≪대통사≫가 『법화경』 「화성유품」의 대통불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백제는 대통불의 계보를 백제 왕실에 적용하여 왕권의 신성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한편 웅진시대 처음으로 연꽃 문양의 연잎 개수가 8개인 것과 16개인 것이 등장하고 사비시기 각 잎마다 2개씩 갈라진 8(x2=16)엽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를 8방에 둘씩 배치된 16부처를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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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효의 『법화경』 삼거가와 사거가의 논쟁에 대한 관점-『법화종요』를 중심으로-

저자 : 이병욱 ( Lee¸ Byung-wook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7-103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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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원효의 『법화경』 삼거가(三車家)와 사거가(四車家)에 대한 관점을 검토하였다. 『법화경』의 중요내용 가운데 하나가 삼승의 가르침이 궁극에는 일승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비유품」에서는 비유를 통해서 다시 설명하는데, 여기에 대승을 비유한 '소의 수레'와 일승을 비유한 '큰 흰 소의 수레가 등장한다. 중국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소의 수레'와 '큰 흰 소의 수레'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논쟁이 생겼다.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이 논쟁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다. 우선, 원효는 화쟁사상적 근거로서 말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서 3가지 화쟁의 견해를 주장한다. 첫째, 통(通)과 별(別)의 관점에서 화쟁하는 것이다. 이는 삼거가와 사거가의 견해가 일승을 인정하는 것과 이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삼거가의 관점에서 화쟁하는 것이다. 이는 성문과 연각이 실제가 아닌 점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고, 이 점에서 삼거가와 사거가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통교삼승'과 '별교삼승'으로 구분해서 화쟁하는 것이다. 삼거가의 주장은 '통교삼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고, 사거가의 주장은 '별교삼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거가와 사거가의 주장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전개된 것이므로 서로 충돌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3가지 화쟁의 견해를 제시하면서도 셋째의 견해에 비중을 두고 있고, 또 셋째 견해 가운데서도 '별교삼승'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원효는 '별교삼승'의 관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원효는 삼승의 인과(因果)가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을 4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별교삼승의 개념에 '인승'과 '천승'이 포함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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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이초(最澄)의 법화사상-그가 평생 추구하고자 한 것-

저자 : 원영상 ( Won¸ Yong-sang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05-127 (2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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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 후반에 유입된 천태종은 중세 신불교 탄생의 요람이 된다. 천태종의 역할은 사실상 근현대 다양한 불교계 신종교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일본불교의 저변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종합불교로서 신앙과 수행의 폭넓은 세계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천태종은 사이초(最澄, 766~822)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원ㆍ선ㆍ계ㆍ밀(圓禪戒密)의 4종(宗)을 계승했다. 귀국해서는 밀교를 도입하여 완전한 종합불교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국가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대승교단 구축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천태종을 일본에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사이초는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남도불교(南都佛敎)의 대표주자인 도쿠이츠(德一)와의 논쟁이다. 불성론(佛性論)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이초는 심혈을 기울여『법화경』의 정신에 의거한 일승(一乘)사상을 주장했다. 말년에 나온 많은 저술은 이러한 법화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핵심은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불도(皆成佛道) 사상이다. 일본 불교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결국 사이초가 주장한 법화사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기성불교계와 국가불교로부터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밀교와 더불어 종합불교의 양축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이초는 법화사상에 기반한 수행체계를 통해 대승불교의 정신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가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에서 “나라의 보물을 무엇인가. 그 보물은 도심(道心)이다. 도심 있는 사람을 국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도심은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비예산(比叡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대승의 계율을 확립했다. 후대에 사이초의 법화종단은 그가 대립했던 기성불교계와 마찬가지로 왕권과 밀착하고 마침내 분열되기는 했지만, 여러 조사들에 의해 시대를 따라 늘 새롭게 해석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불교의 사상적 저수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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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저자 : 김희만 ( Kim¸ Heui-man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29-163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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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최치원 관계기사를 분석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一然)의 최치원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 관련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가 왜 최치원 관련 자료를 다른 인물의 자료보다 많이 삽입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를 검토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삼국사기』에 서술된 최치원 관계 자료와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관계 자료는 최치원에 '대한(about)' 서술 위주라면, 『삼국유사』 관계기사는 최치원에 '의한(by)' 논지 전개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최치원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최치원의 말을 원용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더욱 폭넓게 찬술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연의 역사서술 태도가 유연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불교 승려였지만, 유학(儒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최치원 관련 자료를 중시하여, 활용한 것이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지만, 귀국 후 왕명으로 불교 관련 비문,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작성하는 등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일연에게 있어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사에 정통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한 인식이 『삼국유사』의 찬술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 『삼국유사』 관계기사의 의미 또는 성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치원 관련 자료를 『삼국유사』에 굳이 수록하여 무엇을 밝히려고 했는 지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을 한국 고대사회 및 불교와 유교에 정통하였다는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 최치원 관련 자료이며, 일연은 그 기반 위에서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유교와 상대되는 불교 또는 신이사관(神異史觀) 등으로 평가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최치원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은 불교와 유교를 접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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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종 즉위 초 종친부 강화와 경복궁 내 제례 공간의 확장

저자 : 이민아 ( Lee¸ Min-ah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65-20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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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와 함께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중건 경복궁은 조선 초 경복궁의 재현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축적된 의례 전통이 발현된 결과물이었다. 의례 공간 중에서도 제례 공간이 확대되었다는 점은 중건 경복궁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제례 공간은 흉례(凶禮)를 위한 빈전(殯殿) ㆍ혼전(魂殿) 권역과 선왕의 어진을 봉안한 길례(吉禮) 공간인 선원전(璿源殿) 권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때 빈전, 혼전 및 선원전은 모두 종친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종친부의 정치적 권한을 확대함과 동시에 종친부 건물을 확장하였다. 종친부는 광화문 앞 의정부ㆍ삼군부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권역을 형성했다. 종친부 내 핵심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집무실인 아재당(我在堂)과 함께 철종의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선원전에서 철종을 배제하는 대신 종친부 내에 새로운 철종 어진봉안처, 천한 전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선원전 권역이 궐 밖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와 함께 궁궐 내 빈전 및 혼전 등 흉례 공간이 궁궐 북서쪽 권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공간은 전체 궁궐면적의 1/5 가량을 차지하지만 건물 사이의 밀도는 매우 낮았다. 이는 중건 경복궁 내에서 흉례 공간이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선원전 및 빈전ㆍ혼전 공간은 종친부가 의례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소렴과 대렴 의식 등 흉례 의식이 진행될 때 종친이 백관과 함께 거애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국초부터 정해진 의례 절차였다. 진향 절차에서 종친은 항상 문무백관 앞에서 의식을 진행하기 때문에 빈전ㆍ혼전 공간은 자연스럽게 위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종친과 문무백관 다수가 의식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야 했으며, 종친이 의례를 주도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건 경복궁은 종친부 강화라는 맥락에서 종친부 공간과 연동해서 해석해야만 그 특징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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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서평】『조선 불교사상사: 유교의 시대를 가로지른 불교적 사유의 지형』 [김용태, 2021,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저자 : 손성필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01-209 (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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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평】『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2021, 푸른역사]

저자 : 나종현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간행물 : 한국사상사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1-225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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