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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시대 ―1970년대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아파트 표상과 그 의미―

The Era of Nonpossession

이철호 ( Chulho Lee )
  • : 한림과학원
  • : 개념과 소통 27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137-169(33pages)
개념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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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두 가지 소유방식, ‘점거’와 ‘투기’
2. 사적 소유권의 성채: 아파트, 타자화, 동물적인 삶
3. ‘무소유’의 시대
4. 결론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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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자신이 소유의 주체임을 입증하는, 매우 이질적인 두 가지 방식―투기와 점거, 혹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적 소유권―이 서로 경합하다 마침내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된 시기였다. 강남개발 이후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사적 소유권의 강화와 더불어 소유 관념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한편, 아파트 투기를 통해서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땅과 주택은 주거공간 이상의 의미로 대상화 되었다. 그 무렵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와 그 속물성에 관해서는 박완서의 소설들이 주목되며, 특히 아파트 단지 중심의 도시개발과 그로 인한 풍속의 변화를 다룬 문학적 범례로서 유의미하다. 1970년대부터 급속히 조성된 아파트 단지들을 가리켜 ‘사적 소유권의 성채’라 비유할 수 있다면, 여기서 타자화의 전략은 ‘아파트 단지’와 ‘무허가 판자촌’ 간의 대립구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도시’와 ‘자연’이라는 심상지리 속에서도 재연된다. 『무소유』 열독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는 이를테면 무소유의 삶을 심정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소비자본주의에 얼룩진 자신의 속물성에 면죄부를 제공할 필요성이 절실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소유’는 아파트 투기로 대표되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해 도덕적 성찰을 요청하는 용어로 등장했으나, 동시에 그러한 투기의 심리와 욕망을 정당화하는 용어로 전유되었다.
During the 1970s two disparate ways of proving property ownership competed, namely speculation versus occupation, or community bond versus private ownership, and ultimately there could be only one winner. After the development of Gangnam, the importance of private ownership was reinforced, yet at the same time a pervasive belief spread that real estate speculation could make everybody rich. As a result, land and residential property were objectified, and thus acquired a meaning beyond that of simple living spaces. Park Wanseo’s novels documented the rampant consumer capitalism, snobbery, and other changes which resulted from the apartment-centered urban development of the late 1970s. The popularity of Nonpossession (無所有, 1976) testifies to the profound social changes of that era. The undisguised greed of consumer capitalism prompted a counter-reaction, in which many felt an urgent need to demonstrate their own essential humanity by emotionally appropriating a life of nonpossession. Park Wanseo’s work prompts moral reflection, and investigates the psychology and desires which drive property spec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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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정보

  • : 사회과학분야  > 기타(사회과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2005-1492
  • : 2733-8746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2008-2021
  • :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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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권0호(2021년 06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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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각국에서 소유권의 법적 구성에 대한 일고찰 ―자유, 제도 그리고 권리―

저자 : 강광문 ( Guangwen Jiang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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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법적 개념으로서의 소유권이 동아시아 각국의 법제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해석되고 있는지를 고찰하였다. 근대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법제와 법학은 서양의 그것을 수입, 계수하여 탄생한 것이다. 동아시아가 수입한 소유권 개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논문은 소유권을 둘러싼 한중일 3국의 법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자유와 제도 및 권리 등 소유권의 3가지 측면을 석출해냈다. 우선, 소유권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민법 등 법률에 의해 그 내용과 한계가 정해진다. 다음으로, 각국 헌법은 '제도'로서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중국은 소유권을 주로 권리가 아닌 제도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로서의 소유권은 법률이 아닌 헌법의 의해 보장되고 그 변경은 헌법개정권이 아닌 일반 입법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소유권은 법률상 '권리', '제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개개인이 천부적으로 가져야 하는 '자유'이다. 이는 소유권 보장의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유권은 헌법을 통한 보장을 넘어선 超헌법적인 의미를 가진다.
논문은 소유권의 이 3가지 측면을 각각 '법률상의 권리', '헌법상의 권리' 및 '超헌법적인 권리'로 명명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right of ownership (Korean: 소유권) as a legal concept is constructed and interpreted in the East Asian countries. Since the modern era these countries have imported laws and legal theories from the West, and the concept of ownership, as imported by East Asia, has many overlapping meanings.
In analyzing the ownership laws of Korea, China, and Japan, three aspects of ownership can be extracted: rights, institution and freedom. First, ownership establishes a 'right' in law, with the meaning and limitations of ownership determined by civil and other laws. Next, the constitution of each country guarantees ownership as an 'institution', which is particularly important in socialist China, where ownership is defined primarily as an institution rather than as a right and guaranteed by the constitution. This means that change of ownership can only be accomplished by constitutional amendment, and not by general legislation, Finally, the meaning of ownership goes beyond 'right' and 'institution' to encompass the 'liberty' which is an essential prerequisite for individuals to ensure their human dignity and realize their intrinsic value. This is also the ultimate reason for guaranteeing ownership, on behalf of everyone, and in this sense ownership therefore has a meaning beyond any specific constitution.
The terminology of these three aspects of ownership is also clarified, by proposing the terms 'legal rights', 'constitutional rights' and 'ultra-constitutional 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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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의 성격 검토

저자 : 남기현 ( Kihyun Nam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7-8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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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토지소유권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행정기관의 주도로 토지소유권이 확인된 것,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게 되고 등기제도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의 성격은 유사한 점을 보인다. 즉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에 적합한 토지소유권으로 확인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첫째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이다. 지조개정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지조개정 이전에 형성되었던 토지구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조선토지조사사업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옛 토지관습과는 단절된 것이다. 둘째 행정구제제도, 행정재판에 관한 것이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식민지 조선에서는 행정처분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셋째 법령과 재판에서 규정된 원시취득에 관한 것이다. 일본에서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 문제는 국유(관유), 민유를 구분할 때에만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국유지, 민유지에 상관없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원시취득으로 간주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 확정은 일본과 달리 다른 관점에서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확정된 토지소유권은 사법적 재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행정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행정처분의 결과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식민지적 토지소유권'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looks at the differences between Japan and colonial Joseon in terms of land ownership. The process of determining land ownership, in Japan and in colonial Joseon, exhibited clear discrimination. First, Land Tax Reform was reflected in land ownership which was confirmed as a result of the land change revision, whereas land ownership which was confirmed as a result of the Cadastral Survey of Joseon ignored traditional customs. Second, in colonial Joseon there was no system to raise objections to administrative dispositions, unlike in Japan. Third, in Japan, the issue of original acquisition of land ownership became a problem only when dividing state-owned from privately-owned properties. In colonial Joseon, however, the results of the Cadastral Survey of Joseon were considered primary, regardless of whether the land ownership was state or private. Thus, land ownership was confirmed in colonial Joseon as a result of administrative dispositions, and the administrative agencies involved did not tolerate any judicial intervention. In effect, then, Japan created in colonial Joseon a kind of 'colonial land ownership' which had a different character from land ownership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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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20년대 초반 소유 개념과 사유재산 담론

저자 : 황병주 ( Byoungjoo Hwang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36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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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 성립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1912년 조선 민사령 공포, 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등을 거치면서 토지를 비롯한 주요 자산의 사적 소유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적 소유권과 사유재산은 오랜 관습이자 새로운 현실이기도 했다. 왕토사상에도 불구하고 이미 조선 중반부터 경작지와 대지 등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식민지 시기 제도적 변화와 맞물리면서 1920년대 초반은 소유 개념, 사유재산 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를 주도한 것은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의 좌파 이념들이었다. 이들 좌파 담론들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담론이었기에 사적 소유권에 대한 비판을 주도했다. 특히 1920년 노동공제회를 비롯한 노동 관련 단체들이 대거 출현했고 노동 개념은 소유 개념과 치열한 신성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소유 대신 노동 개념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 동력이라는 주장은 부르주아 계몽 담론과 좌파 담론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20년대 초반 유산과 무산의 대립구도가 등장했다. 이 역시 좌파담론이 주도했던 구도였고 사유재산을 둘러싼 대립을 배경으로 했다.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이 구도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지향하는 共産의 상상력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프루동이나 헨리 조지에 일본 귀족원까지 등장해 토지의 사적 소유문제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이 족출하였다. 分産과 公産,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적 전망 하의 다양한 소유제도에 대한 전망들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노농 러시아의 거대한 변화를 배경으로 共産의 헤게모니가 점점 더 강화되는 추세였다. 물산장려운동은 공산에 맞선 물산을 제시하는 도발적 전략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에 의해 '인민의 아편'으로 지목된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북 기독교 및 유산집단으로부터 출발한 물산장려운동은 3년 여 시차를 두고 경성으로 확산되어 중앙의 유산계급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사회주의 세력 일부까지 규합하여 생산력주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더 많은 물질적 재화, 더 높은 생산력에 대한 욕망의 정치가 좌우를 넘나들며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The 1920s are a foundational period in the establishment of Korean capitalism. After the promulgation of the Joseon Civil Code in 1912 and the completion of the land survey project in 1918, private ownership of land and other major assets was established both legally and in practice. Private ownership and private property existed by traditional custom, and also as a new reality. Despite the prevailing Wangto (王土) ideology, private ownership of land, including arable land, began to spread widely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When this was impacted by institutional chang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concepts of ownership and private property emerged as important issues in the early 1920s.
Criticism of private ownership arose from left-wing ideologies such as socialism, communism, and anarchism, which saw private property as the central critical discourse of capitalism. Many labor-related organizations emerged in the 1920s, including the Labor Credit Union, which were deeply hostile to the principle of private ownership. These organizations argued that it is not ownership but labor which drives economic development and social progress.
A confrontation thus arose between bourgeois enlightenment discourses and proletariat discourses in the early 20s, and the primary field of conflict concerned private property. Left-wingers sought to establish social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arguing for a variety of alternative structures to the private ownership of land, including proposals inspired by Proudhon, Henry George, and the Japanese aristocracy. Following the Russian revolution, however, communist ideology became the dominant model.
In response, Christian and bourgeois groups in the northwest started the 'product encouragement' movement, extolling the benefits of more material goods and higher productivity. This was a provocative strategy to counter Marx's characterization of religion as “the opium of the people”. Within a few years the movement had spread to Seoul, and the most influential bourgeoisie, but it also helped to unite the socialists into a more effective coal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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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무소유'의 시대 ―1970년대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아파트 표상과 그 의미―

저자 : 이철호 ( Chulho Lee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6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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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자신이 소유의 주체임을 입증하는, 매우 이질적인 두 가지 방식―투기와 점거, 혹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적 소유권―이 서로 경합하다 마침내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된 시기였다. 강남개발 이후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사적 소유권의 강화와 더불어 소유 관념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한편, 아파트 투기를 통해서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땅과 주택은 주거공간 이상의 의미로 대상화 되었다. 그 무렵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와 그 속물성에 관해서는 박완서의 소설들이 주목되며, 특히 아파트 단지 중심의 도시개발과 그로 인한 풍속의 변화를 다룬 문학적 범례로서 유의미하다. 1970년대부터 급속히 조성된 아파트 단지들을 가리켜 '사적 소유권의 성채'라 비유할 수 있다면, 여기서 타자화의 전략은 '아파트 단지'와 '무허가 판자촌' 간의 대립구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도시'와 '자연'이라는 심상지리 속에서도 재연된다. 『무소유』 열독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는 이를테면 무소유의 삶을 심정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소비자본주의에 얼룩진 자신의 속물성에 면죄부를 제공할 필요성이 절실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소유'는 아파트 투기로 대표되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해 도덕적 성찰을 요청하는 용어로 등장했으나, 동시에 그러한 투기의 심리와 욕망을 정당화하는 용어로 전유되었다.


During the 1970s two disparate ways of proving property ownership competed, namely speculation versus occupation, or community bond versus private ownership, and ultimately there could be only one winner. After the development of Gangnam, the importance of private ownership was reinforced, yet at the same time a pervasive belief spread that real estate speculation could make everybody rich. As a result, land and residential property were objectified, and thus acquired a meaning beyond that of simple living spaces. Park Wanseo's novels documented the rampant consumer capitalism, snobbery, and other changes which resulted from the apartment-centered urban development of the late 1970s. The popularity of Nonpossession (無所有, 1976) testifies to the profound social changes of that era. The undisguised greed of consumer capitalism prompted a counter-reaction, in which many felt an urgent need to demonstrate their own essential humanity by emotionally appropriating a life of nonpossession. Park Wanseo's work prompts moral reflection, and investigates the psychology and desires which drive property spec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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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열하일기』와 중화(中華) 개념

저자 : 배우성 ( Woosung Bae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1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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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열하일기』를 중화 개념의 층위에서 다시 읽어본 것이다. 우리가 중화를 국적이나 문화 등으로 정의하거나 본질화하고 그 '정의'를 잣대로 하여 박지원과 근대 혹은 박지원과 주체성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려 해 오는 동안 묻지 않은 것들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그것이 '중화'의 역사적ㆍ사회적 맥락에 대한 '해석'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박지원이 청을 열린 시선에서 보았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명과 청을 대등하게 취급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명나라를 부를 때 사용했던 '중화' 혹은 '상국'이라는 표현을 결코 청나라에 대해 구사하지 않았다. 그가 인정한 것은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자이자 '대국'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결코 존주론과 존명의식을 버리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시의(時宜)에 맞는 존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것은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자부심에 기대는 존주가 아니라, 조선의 낙후함을 인정하고 '중국'을 자기화하는 존주이다.
박지원은 청이 가진 '천명'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눈높이에서 말한다면, 청이 '천명'을 받아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도리어 '중국을 잊지 않으려는 자'를 각성시키기 때문에 중요했다. 청이 가진 '천명'은 '중국'과 분리된 '천명'이며, '천도'와 별개의 '천의'였다. 청은 결국 '중국'을 자기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을 자기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청으로부터 '한당송명의 유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청을 통해서 배울 뿐이다. 결코 청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박지원이 '천명'과 분리된 '중국', '천의'와 별개의 '천도'를 말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This paper reconsiders the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of Sinocentrism as expressed in the Jehol Diary (Yŏrhailgi). This work is a travelogue written by Pak Chiwŏn (朴趾源,1737-1805), one of Joseon's most celebrated literati, who is famous for his creative thinking and unprecedentedly free style of writing. This book has long been a favorite among Korean scholars, with some claiming that Pak Chiwŏn was trying to act as a bridge between the disappeared Ming and the prosperous Qing, and others arguing that he found no place for his advanced ideas inside the regime and dreamed of escaping. Nevertheless, although it may not be evident from a first reading, the book also reflects upon Sinocentrism, which this paper contends is a fundamental issue for the author. The Sinocentrism of the late Joseon dynasty is generally understood as a mixture of such essentials as ethnicity, nationality, and culture. This paper reexamines this stance, however, by adopting the viewpoint of conceptual history to interpret Sinocentrism in its historical context, rather than by its essential characteristics.
Although Pak Chiwŏn shows no prejudice against Qing China, it cannot be said that he treated Ming and Qing on equal terms. Moreover, he never suggested that Joseon and its literati should abandon their respect and admiration for Ming China. He did propose, however, that his country needed a new more practical approach, that it should admit its backwardness, and should learn from Chinese civilization as appropriated by Qing China. Rather surprisingly, although he regarded Qing China as having the Mandate of Heaven, he never viewed it as a true exemplar of Chinese civilization. According to his understanding, Joseon was in the best position to inherit this man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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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대신어석의(現代新語釋義)』(1922)와 당대 매체의 언어

저자 : 이병기 ( Byeonggi Lee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7-24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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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 최초의 근대 신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신어석의≫가 당대 매체의 언어에 기반하여 표제어가 선정되고 뜻풀이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하여 갑오경장 이후부터 『석의』 간행 이전까지의 말뭉치를, 1910년을 경계로 나누어 표제어의 빈도와 용례를 조사한 국립한글박물관(2015, 2016)을 활용하였다.
2장에서는 고빈도 표제어의 특징, 1910년 경계로 용례 빈도가 급감하고 급증한 표제어의 특징을 살펴보고 『석의』와 당대 매체의 연동성을 포착하는 한편 당시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매체의 언어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반면 빈도가 0이면서 ≪큰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표재어들을 통해, 서문의 언급과는 달리, 다른 책이나 사전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3장에서는 특징적인 『석의』의 뜻풀이와 당대 매체의 용례를 비교하였는데 대부분 『석의』와 당대 매체의 연동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第一義'와 같은 일부 예에서는 당대 매체에서의 쓰임과 『석의』의 뜻풀이에 괴리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석의』의 표제어 선정과 뜻풀이에 있어 비체계적인 면을 부각하여 살펴보고 『석의』의 편찬자가 다른 책이나 사전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4장에서는 『석의』의 편찬자 최연택의 행적, 일본의 신어사전이라 할 수 있는 『고문』과 『석의』의 관련성을 고찰하였다. 결론적으로 『석의』의 일부 뜻풀이는 『고문』의 뜻풀이와 동일하였으며 영향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상이한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옮긴 것은 아니며 부분적으로 참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 관계는 단순한 사전과 사전의 영향 관계를 넘어 일본 문화 및 어휘의 한국 내로의 전파를 반영하는 것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석의』와 『고문』의 면밀한 대조와 용례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이에 대한 고찰을 더 정밀하게 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extent to which Hyeondae Sineo Seogui (hereafter “Seogui”), the first neologism dictionary in Korea, published in 1922, reflects the language of the contemporary media. It also investigates how these neologisms were used, based upon the corpus held by the National Hangeul Museum, analyzing the frequency and usage of title words appearing from the time of the Gapo Gyeongjang (the mid 1890s) up to the publication of Seogui
First we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of high frequency title words, and also of title words which saw large positive or negative changes in frequency around 1910. This revealed a significant agreement between the terms in Seogui and those used in contemporary media. There were also some words not listed in the standard Korean dictionary KuenSajeon (큰사전, published by the Hangeul society from 1947) which had zero frequency in the corpus. This suggests some alternative method of collection by Seogui, other than by collecting new words from contemporary media as stated in its preface.
Next we compared the Seogui definitions of some particular cases with their actual usage. We could generally establish the linkage between Seogui and contemporary media, but the Seogui definitions sometimes differed from the actual usage, and where Seogui included a group of related words their definitions lacked consistency. Our analysis of these unsystematic aspects of selection and definition suggest that Seogui was not compiled entirely according to the methodology mentioned in the preface.
Finally we examined the activities of Choi Yeon-taek, the editor of Seogui, comparing and contrasting Seogui with Komun, (顧問, a contemporary Japanese neologism dictionary). We concluded that although some definitions in Seogui were clearly influenced by the corresponding definitions in Komun, there are also many differences, and so a more comprehensive analysis will be needed to fully characteriz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It will also be necessary to distinguish the direct influence of Komun upon Seogui from the indirect influence which reflects the transmission of Japanese culture and vocabulary in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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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50~60년대 자유민주주의 개념의 궤적 ―『사상계』를 중심으로―

저자 : 최민석 ( Minseok Choi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9-297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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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는가를 분석한 연구 성과들은 많지만, 정작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천착한 연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연구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점에 착목하여 『사상계』를 중심으로 개념사적 접근을 시도했다. 1950~60년대 『사상계』에서 자유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자유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이런 관점을 피력한 세력은 혁신계였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방임자본주의와 동일시하여 비판하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다. 둘째는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의 틀 속으로 제한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1950년대 후반 헌법학자 한태연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후 박정희의 언설에서 이어진다. 셋째는 박정희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정권교체와 이를 위한 동원의 언어로 사용한 입장이다. 『사상계』가 1963년부터 정권교체를 최우선의 과제로 정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반공주의적 민주주의로, 탈권위주의적 민주주의로 인식하는 태도는 1950~60년대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cept of liberal democracy in 1950s and 1960s by examining Sasanggye, the most popular Korean intellectual magazine of the period. Liberal democracy can be defined in several different ways. First, progressive groups regarded liberal democracy as the antithesis of their social democratic aspirations; these intellectuals and politicians equated liberal democracy with laissez-faire capitalism and the growth of inequality. Second, a prominent constitutional scholar, Han Tae-yeon interpreted liberal democracy as advocating the kind of liberal democratic basic order (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 which had been proposed to counter totalitarianism, and especially communism, in West Germany. According to this standpoint, which influenced Park Chung-hee for some years following the coup in which he took power, anti-communism is a fundamental attribute of liberal democracy. Third, the Sasanggye coterie committed to resisting the Park regime utilized the same concept to mobilize people for a political revolution. According to their discourse, liberal democracy required replacing an authoritarian ruler by an ethical administration. These distinctly different understandings of the concept of liberal democracy, although they developed during the 1950s and 1960s, are not merely historical perspectives, but continue to shape Korean politics up to the presen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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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념사 연구에서 빅데이터 연구방법의 활용 가능성 ―한국사회 1960-1990년대 노동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저자 : 구현주 ( Hyunju Ku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33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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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빅데이터 연구방법이 인문ㆍ사회과학 분야, 특히 개념사 연구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 연구방법의 신뢰도, 타당도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사회 노동 개념 변천을 분석한 기존 질적연구와 비교하였다. 디지털인문학은 빅데이터 연구방법이 가치중립적이므로 개별 연구자의 차이와 관계없이 빅데이터의 신뢰도가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빅데이터의 연구과정, 특히 표집, 지표구성, 시각화 단계에서 개별 연구자의 판단과 역량은 결과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빅데이터 연구의 타당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개념을 시간적ㆍ공간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질적 연구방법이 분석과정의 전 단계에서 상호보완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연구자의 특수성과 주관성을 드러냄으로써 빅데이터를 활용한 연구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획득할 수 있겠다.


This paper explores the use of big data research methods in the field of social science, especially in the study of conceptual history, focusing upon the reliability and validity of such methods. Changes in the concept of labor in Korean society were analyzed and compared with previous studies. In the digital humanities, the big data research method is supposedly value-neutral, and its reliability has therefore been argued to be independent of any differences between particular researchers. Unfortunately, however, there is considerable variation in the judgment and competence of individuals engaged in the big data research process, especially in the stages of sampling, indexing, and visualization, and this represents a major influence on the results obtained. Thus, in order to increase the reliability and validity of big data research, it is necessary to apply an additional qualitative research method to all stages of the analysis process, to place concepts objectively in their temporal and spatial contex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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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북한 역사학과 소련 역사학의 관련성 ―봉건제 개념과 국가성립 문제를 중심으로―

저자 : 조호연 ( Hoyeon Cho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7-37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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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서 북한 역사학의 성과들이 합법적으로 출판될 수 있게 된 이후, 북한 역사학을 소개하는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그렇지만 북한 역사학이 성립된 배경으로서 소련 역사학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한 형편이다. 이 글에서는 봉건제 개념과 국가성립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소련 역사학에서 논의된 내용이 북한 역사학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영되었음을 살펴보았다. 봉건제라는 개념 자체는 소련에서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인 1930년대에 그레코프에 의하여 정립된 바 있다. 국가성립의 문제도 소련에서 노르만 학설에 대한 비판으로서, 키예프 루시 이전의 동슬라브 족에게서 사회경제적으로 국가성립의 전제가 갖추어졌음이 확인된 바 있다. 북한에서도 삼국시대가 노예제 사회냐 봉건제 사회냐의 논란을 거쳐 1960년대에 봉건제라고 획정되었으며, 그 이전 시기인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도 그 발전 정도가 규명된 바 있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에 북한의 역사학과 소련의 역사학은 정치적 이유와 학문적인 이유로 갈등관계에 접어든다. 정치적인 이유란 김일성의 권력이 공고해짐에 따라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을 의미한다. 학문적인 이유란 역사발전 단계에서 북한은 자국 역사에서 노예제 시기와 봉건제 시기를 공히 인정한 반면, 소련에서는 키예프 루시 시대로부터 봉건제로 본 것을 의미한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북한 역사학의 논의구조는 소련 역사학의 문제 의식과 유사한 구도로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The concept of feudalism, as discussed in Soviet history, should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social problems of the Russian Empire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N. P. Pavlov-Silvanskii, in particular, tried to explain Russian history since the 13th century with the concept of feudalism. Then after the Russian Revolution, the issue of feudalism began to be discussed within a Marxist-Leninist framework. In the early years of the Soviet Union, however, even M. N. Pokrovskii, a very eminent historian, could not clearly define the feudal system, but from the mid-1930s onwards, the Soviet Union, through the studies of D. N. Grekov, defined the society of Kievan Rus' as a feudal system. Moreover, the so-called Norman theory, which has long been controversial, was firmly rejected by Soviet historians.
In the historiography of North Korea, the first scholar who proposed a theory of feudalism was Nam-un Baek, who was attempting to overcome colonial historical studies which underestimated the significance of Korean history. Since Nam-un Baek became active as a scholar and politician in North Korea, his feudal theory was widely recognized in the early days of the North Korean regime. However, just as the Soviet historians experienced confusion over feudalism, the same happened in North Korea. There were heated discussions about feudalism, in particular over whether the Three Kingdoms era should be characterized as a slave society or a feudal society. Regarding the establishment of the earliest state, by the early 1960s there was a consensus among North Korean historians to define Gojoseon as a slave society with a high level of development.
During the 1950s there were practical exchanges between the historians of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North Korean historians carefully examined the Marxist-Leninist historical studies of Stalin's Soviet Union; and Soviet scholars like Mikhail Pak, who led the Soviet study of Korean history at the time, paid close attention to Korean discussions of feudalism and the founding of a state in North Korea. When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fell out in the early 1960's the fundamental reason was, of course, political, but this quickly resulted in academic dissension. North Korean criticism of Mikhail Pak's thesis written by Kim Seok-hyung in 1961 ultimately resulted in a breakdown of friendly academic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us, we can see that although the historians of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were in conflict in the early 1960s, the development of North Korean historiography after liberation, which was primarily concerned with feudalism and the founding of a state, resembled that of Soviet historiography following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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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그 비판자들―

저자 : 조효원 ( Hyowon Cho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4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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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 사상은 통상 민주주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결단주의에 기초한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극도로 복잡한 사유의 회로로 구성된 건축물이다. 따라서 그의 결단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맥락과 근원에 주의 깊은 시선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의 정치신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철학과 흡사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슈미트의 시간관념이 역사적 사건의 '일회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일회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독특한 형태의 일기 철학, 즉 부리분켄학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역사적 구체성을 중요시한 슈미트에게는 적대자들이 많았으며, 그는 이들과의 사상적 대결을 통해 자신의 정치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사유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다. 즉, 그의 결단주의는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적대자는 법학자 한스 켈젠과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이다. '정치적인 것'을 법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 켈젠의 실증주의적 순수법학을 논파하기 위하여 슈미트는 '예외상태' 개념을 주창했다. 그런가 하면, 스트라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무고한 악'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인간학적 통찰에 입각하여 '정치적인 것'의 성립 불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슈미트의 홉스 해석 및 이에 기초한 정치신학의 핵심 주장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에 맞서 홉스를 자유주의에 맞서는 결단주의자로 옹립하기 위하여 슈미트는 오랜 세월 고투해야 했다. 생애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결단주의 정치신학이 처음부터 패배자의 사유였음을 인정한 슈미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사유가 19세기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의 허무주의에 젖줄을 댄 것임을 시사한다. 즉, 슈티르너의 무신론적 사유가 슈미트의 부리분켄적 역사철학의 주요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슈티르너의 극단적 개인주의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던 슈미트는 자신의 정치신학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고수했다. 요컨대,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은 초개인적 허무주의와 기독교의 기묘한 결합에 의해 탄생한 사상이다.


Most readers find Carl Schmitt's decisionism rather a perilous stance, considering it to have pernicious anti-democratic tendencies. His decisionism is, however, far more complex than it appears at first sight. To appreciate it rightly, we should take a careful look at the context to which he applied it, as well as at its origins. Schmitt's political theology, which derives from his decisionism, is actually similar, in many respects, to the philosophy of history represented by Walter Benjamin, among others. When it comes to the notion of time, however, Schmitt diverges from such thinkers by his emphasis upon the singularity [Einmaligkeit] of historical events. His fascination with the uniqueness of historical and political vicissitudes is expressed most clearly in his idiosyncratic conception of the act of keeping a diary, i.e., buribunkology [Buribunkologie]. Seeing himself as a Buribunk who was solely concerned with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Schmitt had a great many opponents who condemned his decisionistic notion of jurisprudence. In this regard, two Jewish intellectuals are worthy of notice, among many others: the jurist Hans Kelsen and the political philosopher Leo Strauss. In fact Schmitt only disseminated his own concept of a 'state of exception' after Kelsen had proposed the idea of a 'pure theory of law', which derives from a positivist idea that Schmitt detested. And Strauss very perceptively pointed out that the anthropological premise upon which Schmitt's political theology depends is unsustainable in the face of what Strauss called 'innocent evil'. Indeed, after Strauss'demolition of Schmitt's political theology, Schmitt was deeply perturbed, struggling for decades to overcome the resulting trauma. In the end, however, Schmitt admitted that he had been vanquished from the outset. In a diary entry he intimated that he contrived his political theology in response to the nihilistic philosophy of Max Stirner. Yet, Stirner's nihilistic egoism could not wholly absorb Schmitt, who considered himself a devout Catholic, whatever he meant by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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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 각국에서 소유권의 법적 구성에 대한 일고찰 ―자유, 제도 그리고 권리―

저자 : 강광문 ( Guangwen Jiang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56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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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법적 개념으로서의 소유권이 동아시아 각국의 법제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해석되고 있는지를 고찰하였다. 근대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법제와 법학은 서양의 그것을 수입, 계수하여 탄생한 것이다. 동아시아가 수입한 소유권 개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논문은 소유권을 둘러싼 한중일 3국의 법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자유와 제도 및 권리 등 소유권의 3가지 측면을 석출해냈다. 우선, 소유권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민법 등 법률에 의해 그 내용과 한계가 정해진다. 다음으로, 각국 헌법은 '제도'로서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 중국은 소유권을 주로 권리가 아닌 제도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로서의 소유권은 법률이 아닌 헌법의 의해 보장되고 그 변경은 헌법개정권이 아닌 일반 입법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소유권은 법률상 '권리', '제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개개인이 천부적으로 가져야 하는 '자유'이다. 이는 소유권 보장의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유권은 헌법을 통한 보장을 넘어선 超헌법적인 의미를 가진다.
논문은 소유권의 이 3가지 측면을 각각 '법률상의 권리', '헌법상의 권리' 및 '超헌법적인 권리'로 명명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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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의 성격 검토

저자 : 남기현 ( Kihyun Nam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57-86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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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토지소유권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행정기관의 주도로 토지소유권이 확인된 것,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게 되고 등기제도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의 성격은 유사한 점을 보인다. 즉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에 적합한 토지소유권으로 확인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첫째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이다. 지조개정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지조개정 이전에 형성되었던 토지구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조선토지조사사업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옛 토지관습과는 단절된 것이다. 둘째 행정구제제도, 행정재판에 관한 것이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식민지 조선에서는 행정처분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셋째 법령과 재판에서 규정된 원시취득에 관한 것이다. 일본에서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 문제는 국유(관유), 민유를 구분할 때에만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국유지, 민유지에 상관없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원시취득으로 간주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 확정은 일본과 달리 다른 관점에서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확정된 토지소유권은 사법적 재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행정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행정처분의 결과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식민지적 토지소유권'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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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20년대 초반 소유 개념과 사유재산 담론

저자 : 황병주 ( Byoungjoo Hwang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36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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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 성립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1912년 조선 민사령 공포, 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등을 거치면서 토지를 비롯한 주요 자산의 사적 소유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적 소유권과 사유재산은 오랜 관습이자 새로운 현실이기도 했다. 왕토사상에도 불구하고 이미 조선 중반부터 경작지와 대지 등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식민지 시기 제도적 변화와 맞물리면서 1920년대 초반은 소유 개념, 사유재산 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를 주도한 것은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의 좌파 이념들이었다. 이들 좌파 담론들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담론이었기에 사적 소유권에 대한 비판을 주도했다. 특히 1920년 노동공제회를 비롯한 노동 관련 단체들이 대거 출현했고 노동 개념은 소유 개념과 치열한 신성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소유 대신 노동 개념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 동력이라는 주장은 부르주아 계몽 담론과 좌파 담론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20년대 초반 유산과 무산의 대립구도가 등장했다. 이 역시 좌파담론이 주도했던 구도였고 사유재산을 둘러싼 대립을 배경으로 했다.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이 구도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지향하는 共産의 상상력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프루동이나 헨리 조지에 일본 귀족원까지 등장해 토지의 사적 소유문제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이 족출하였다. 分産과 公産,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적 전망 하의 다양한 소유제도에 대한 전망들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노농 러시아의 거대한 변화를 배경으로 共産의 헤게모니가 점점 더 강화되는 추세였다. 물산장려운동은 공산에 맞선 물산을 제시하는 도발적 전략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에 의해 '인민의 아편'으로 지목된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북 기독교 및 유산집단으로부터 출발한 물산장려운동은 3년 여 시차를 두고 경성으로 확산되어 중앙의 유산계급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사회주의 세력 일부까지 규합하여 생산력주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더 많은 물질적 재화, 더 높은 생산력에 대한 욕망의 정치가 좌우를 넘나들며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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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무소유'의 시대 ―1970년대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아파트 표상과 그 의미―

저자 : 이철호 ( Chulho Lee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37-16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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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자신이 소유의 주체임을 입증하는, 매우 이질적인 두 가지 방식―투기와 점거, 혹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적 소유권―이 서로 경합하다 마침내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된 시기였다. 강남개발 이후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사적 소유권의 강화와 더불어 소유 관념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한편, 아파트 투기를 통해서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땅과 주택은 주거공간 이상의 의미로 대상화 되었다. 그 무렵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와 그 속물성에 관해서는 박완서의 소설들이 주목되며, 특히 아파트 단지 중심의 도시개발과 그로 인한 풍속의 변화를 다룬 문학적 범례로서 유의미하다. 1970년대부터 급속히 조성된 아파트 단지들을 가리켜 '사적 소유권의 성채'라 비유할 수 있다면, 여기서 타자화의 전략은 '아파트 단지'와 '무허가 판자촌' 간의 대립구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도시'와 '자연'이라는 심상지리 속에서도 재연된다. 『무소유』 열독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는 이를테면 무소유의 삶을 심정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소비자본주의에 얼룩진 자신의 속물성에 면죄부를 제공할 필요성이 절실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소유'는 아파트 투기로 대표되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해 도덕적 성찰을 요청하는 용어로 등장했으나, 동시에 그러한 투기의 심리와 욕망을 정당화하는 용어로 전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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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열하일기』와 중화(中華) 개념

저자 : 배우성 ( Woosung Bae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71-215 (4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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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열하일기』를 중화 개념의 층위에서 다시 읽어본 것이다. 우리가 중화를 국적이나 문화 등으로 정의하거나 본질화하고 그 '정의'를 잣대로 하여 박지원과 근대 혹은 박지원과 주체성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려 해 오는 동안 묻지 않은 것들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그것이 '중화'의 역사적ㆍ사회적 맥락에 대한 '해석'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박지원이 청을 열린 시선에서 보았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명과 청을 대등하게 취급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명나라를 부를 때 사용했던 '중화' 혹은 '상국'이라는 표현을 결코 청나라에 대해 구사하지 않았다. 그가 인정한 것은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자이자 '대국'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결코 존주론과 존명의식을 버리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시의(時宜)에 맞는 존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것은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자부심에 기대는 존주가 아니라, 조선의 낙후함을 인정하고 '중국'을 자기화하는 존주이다.
박지원은 청이 가진 '천명'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눈높이에서 말한다면, 청이 '천명'을 받아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도리어 '중국을 잊지 않으려는 자'를 각성시키기 때문에 중요했다. 청이 가진 '천명'은 '중국'과 분리된 '천명'이며, '천도'와 별개의 '천의'였다. 청은 결국 '중국'을 자기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조선은 '중국'을 자기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청으로부터 '한당송명의 유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청을 통해서 배울 뿐이다. 결코 청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박지원이 '천명'과 분리된 '중국', '천의'와 별개의 '천도'를 말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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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대신어석의(現代新語釋義)』(1922)와 당대 매체의 언어

저자 : 이병기 ( Byeonggi Lee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17-247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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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 최초의 근대 신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신어석의≫가 당대 매체의 언어에 기반하여 표제어가 선정되고 뜻풀이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하여 갑오경장 이후부터 『석의』 간행 이전까지의 말뭉치를, 1910년을 경계로 나누어 표제어의 빈도와 용례를 조사한 국립한글박물관(2015, 2016)을 활용하였다.
2장에서는 고빈도 표제어의 특징, 1910년 경계로 용례 빈도가 급감하고 급증한 표제어의 특징을 살펴보고 『석의』와 당대 매체의 연동성을 포착하는 한편 당시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매체의 언어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반면 빈도가 0이면서 ≪큰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표재어들을 통해, 서문의 언급과는 달리, 다른 책이나 사전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3장에서는 특징적인 『석의』의 뜻풀이와 당대 매체의 용례를 비교하였는데 대부분 『석의』와 당대 매체의 연동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第一義'와 같은 일부 예에서는 당대 매체에서의 쓰임과 『석의』의 뜻풀이에 괴리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석의』의 표제어 선정과 뜻풀이에 있어 비체계적인 면을 부각하여 살펴보고 『석의』의 편찬자가 다른 책이나 사전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4장에서는 『석의』의 편찬자 최연택의 행적, 일본의 신어사전이라 할 수 있는 『고문』과 『석의』의 관련성을 고찰하였다. 결론적으로 『석의』의 일부 뜻풀이는 『고문』의 뜻풀이와 동일하였으며 영향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상이한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옮긴 것은 아니며 부분적으로 참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 관계는 단순한 사전과 사전의 영향 관계를 넘어 일본 문화 및 어휘의 한국 내로의 전파를 반영하는 것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석의』와 『고문』의 면밀한 대조와 용례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이에 대한 고찰을 더 정밀하게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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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50~60년대 자유민주주의 개념의 궤적 ―『사상계』를 중심으로―

저자 : 최민석 ( Minseok Choi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49-297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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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는가를 분석한 연구 성과들은 많지만, 정작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천착한 연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연구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점에 착목하여 『사상계』를 중심으로 개념사적 접근을 시도했다. 1950~60년대 『사상계』에서 자유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자유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이런 관점을 피력한 세력은 혁신계였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방임자본주의와 동일시하여 비판하면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다. 둘째는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의 틀 속으로 제한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1950년대 후반 헌법학자 한태연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후 박정희의 언설에서 이어진다. 셋째는 박정희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정권교체와 이를 위한 동원의 언어로 사용한 입장이다. 『사상계』가 1963년부터 정권교체를 최우선의 과제로 정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반공주의적 민주주의로, 탈권위주의적 민주주의로 인식하는 태도는 1950~60년대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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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념사 연구에서 빅데이터 연구방법의 활용 가능성 ―한국사회 1960-1990년대 노동 개념 변천을 중심으로―

저자 : 구현주 ( Hyunju Ku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99-336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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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빅데이터 연구방법이 인문ㆍ사회과학 분야, 특히 개념사 연구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 연구방법의 신뢰도, 타당도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사회 노동 개념 변천을 분석한 기존 질적연구와 비교하였다. 디지털인문학은 빅데이터 연구방법이 가치중립적이므로 개별 연구자의 차이와 관계없이 빅데이터의 신뢰도가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빅데이터의 연구과정, 특히 표집, 지표구성, 시각화 단계에서 개별 연구자의 판단과 역량은 결과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빅데이터 연구의 타당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개념을 시간적ㆍ공간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질적 연구방법이 분석과정의 전 단계에서 상호보완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연구자의 특수성과 주관성을 드러냄으로써 빅데이터를 활용한 연구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획득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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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북한 역사학과 소련 역사학의 관련성 ―봉건제 개념과 국가성립 문제를 중심으로―

저자 : 조호연 ( Hoyeon Cho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7-37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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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서 북한 역사학의 성과들이 합법적으로 출판될 수 있게 된 이후, 북한 역사학을 소개하는 많은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그렇지만 북한 역사학이 성립된 배경으로서 소련 역사학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못한 형편이다. 이 글에서는 봉건제 개념과 국가성립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소련 역사학에서 논의된 내용이 북한 역사학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반영되었음을 살펴보았다. 봉건제라는 개념 자체는 소련에서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인 1930년대에 그레코프에 의하여 정립된 바 있다. 국가성립의 문제도 소련에서 노르만 학설에 대한 비판으로서, 키예프 루시 이전의 동슬라브 족에게서 사회경제적으로 국가성립의 전제가 갖추어졌음이 확인된 바 있다. 북한에서도 삼국시대가 노예제 사회냐 봉건제 사회냐의 논란을 거쳐 1960년대에 봉건제라고 획정되었으며, 그 이전 시기인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도 그 발전 정도가 규명된 바 있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에 북한의 역사학과 소련의 역사학은 정치적 이유와 학문적인 이유로 갈등관계에 접어든다. 정치적인 이유란 김일성의 권력이 공고해짐에 따라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것을 의미한다. 학문적인 이유란 역사발전 단계에서 북한은 자국 역사에서 노예제 시기와 봉건제 시기를 공히 인정한 반면, 소련에서는 키예프 루시 시대로부터 봉건제로 본 것을 의미한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북한 역사학의 논의구조는 소련 역사학의 문제 의식과 유사한 구도로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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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그 비판자들―

저자 : 조효원 ( Hyowon Cho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27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77-41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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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 사상은 통상 민주주의 원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결단주의에 기초한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극도로 복잡한 사유의 회로로 구성된 건축물이다. 따라서 그의 결단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맥락과 근원에 주의 깊은 시선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의 정치신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철학과 흡사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슈미트의 시간관념이 역사적 사건의 '일회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일회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독특한 형태의 일기 철학, 즉 부리분켄학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된다. 역사적 구체성을 중요시한 슈미트에게는 적대자들이 많았으며, 그는 이들과의 사상적 대결을 통해 자신의 정치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사유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다. 즉, 그의 결단주의는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적대자는 법학자 한스 켈젠과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이다. '정치적인 것'을 법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 켈젠의 실증주의적 순수법학을 논파하기 위하여 슈미트는 '예외상태' 개념을 주창했다. 그런가 하면, 스트라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무고한 악'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인간학적 통찰에 입각하여 '정치적인 것'의 성립 불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슈미트의 홉스 해석 및 이에 기초한 정치신학의 핵심 주장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에 맞서 홉스를 자유주의에 맞서는 결단주의자로 옹립하기 위하여 슈미트는 오랜 세월 고투해야 했다. 생애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결단주의 정치신학이 처음부터 패배자의 사유였음을 인정한 슈미트는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사유가 19세기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의 허무주의에 젖줄을 댄 것임을 시사한다. 즉, 슈티르너의 무신론적 사유가 슈미트의 부리분켄적 역사철학의 주요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슈티르너의 극단적 개인주의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던 슈미트는 자신의 정치신학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고수했다. 요컨대,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은 초개인적 허무주의와 기독교의 기묘한 결합에 의해 탄생한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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