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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실학학회> 한국실학연구>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예학(禮學)과 『상체편람(常體便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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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예학(禮學)과 『상체편람(常體便覽)』

The Ritual Study of Sonul Noh Sang-jik and Sangchepyunram

김윤정 ( Kim Yun-jung )
  • : 한국실학학회
  • : 한국실학연구 41권0호
  • : 연속간행물
  • : 2021년 06월
  • : 43-82(40pages)
한국실학연구

DOI

10.23945/KSS.41.43.82


목차

1. 머리말
2. 노상직 예학의 성격
3. 『상체편람』의 구성과 의미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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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은 망국의 시기에 강학과 간행사업을 통해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데 주목한 지식인이었다. 허전의 제자로서 『사의』 간행에 참여하고 『상체편람』을 저술하는 등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집성과 고증의 방식을 통해 허전 심의설의 특징과 정당성을 드러내는 「심의고증」을 저술했다. 그는 허전의 예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했지만, 다른 예설에 대한 배척이 아닌 통합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유학자들의 분열을 원치 않았던 노상직의 학문 경향을 토대로, 예학은 논쟁의 대상이기보다는 지켜야 할 가치로서 인식되었을 것이다.
노상직의 예서인 『상체편람』은 變節보다 예의 기본인 常體를 강조하는 행례서로서, 복잡다단한 예설 논쟁보다는 예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상체편람』은 55개의 의절로 구성되었는데, 집안에서 날마다 행하는 관혼상제 중심의 가례 관련 의절이 51개에 해당된다. 『가례』의 내용을 행례 단위로 의절화하면서, 『사의』의 書式과 祝文을 보충하였다. 사당제도와 오복제도 등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필요할 경우 『가례』에 없는 별도의 조목을 추가하기도 했다. 『사의』의 예설을 중심으로, 「청기의」를 보충하고 「조석곡전」을 하나의 의절로 마련했다. 그러나 「기제의」의 考妣並祭와 「묘제의」의 親盡墓祭 문제에서는 자신의 예설을 드러내기도 했다.
『상체편람』은 가례뿐만 아니라 서당의 의례를 함께 수록함으로써 서당 중심의 예교에 주목했다. 「향음주의」와 「사상견의」는 서당의 행례에 맞게 변용되었고, 유교적 제향을 위한 「창주정사석채의」와 「문묘석전의」는 서당의 문생들이 지켜야할 지식으로 인식되었다. 망국의 시기에, 서당은 유학의 예교를 실천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고, 노상직은 서당의 예교를 통해 유학자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Sonul Noh Sang-jik was an intellectual who focused on inheriting the tradition of studying abroad through lectures and publication projects during the period of his ruin. As a disciple of Heo Jeon, he was well versed in ritual study, participating in the publication of Saeui and writing Sangchepyunram. Through the method of aggregation and examination, he wrote Simeuigojeung which reveals the characteristics and merits of false examination theory. He practiced Heo Jeon's ritual theory and tried to verify its legitimacy through a Bibliographical Study, but did not mention them as controversial subjects. During the chaotic period of the country, Noh Sang-jik's academic tendency, which did not want to divide Confucian scholars, was reflected, and ritual study was recognized as a value to protect rather than as a subject of controversy.
Sangchepyunram emphasizes the basics of riual rather than the transformation, and it reflected the changes in the times when it was more necessary to keep the basics of ritual than the complex debate. Sangchepyunram consisted of 55 Protocols, 51 of them were about the family rituals. The contents of Family Rituals were made on a ritual basis, supplementing the forms and written prayer of Saeui. Sangchepyunram focused on the Confucianism centered on the Seodang by incorporating not only the cases but also the rituals of the Seodang. The Seodang was recognized as the last bastion of Confucianism, and Noh Sang-jik maintained his social role as a Confucian scholar until the end.

UCI(KEPA)

I410-ECN-0102-2022-100-000631659

간행물정보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 : KCI등재
  • :
  • : 반년간
  • : 1598-0928
  • :
  • : 학술지
  • : 연속간행물
  • : 1999-2021
  • :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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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권0호(2021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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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약용과 최한기의 위민론(爲民論) 비교 고찰

저자 : 김경수 ( Kim Kyung-so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39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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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그간 민주주의와 관련지어 평가되어온 다산과 혜강의 정치철학적 특징을 유가 민본사상으로 조망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다산의 原牧과 湯論에 나타난 下而上의 정치권력 발생론과 혜강의 民願과 共治등의 개념은 민주주의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 주목받아왔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근본적으로는 유가 민본사상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들의 정치철학을 분석할 것이다.
민본사상은 크게 위민론과 애민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위민론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다산과 혜강의 同異를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들의 정치철학이 유가 위민론의 계승과 발전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힐 것이다.
다산과 혜강은 모두 위민정치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하이상의 정치권력 발생론에 두고 있으며, 이것은 목민관의 존립이유를 위민으로 규정할 수 있는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근거로서 작동한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위민 정책의 수립과 실천에 있어 민의의 수렴을 사전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민의에 대한 사전적 수렴작용 없이, 천과 성인에 의해 덕치가 민을 위한 정치형태로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유가 위민론과의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차별성은 당시 다원화되고 구체화되던 민의를 유가의 위민정치로 묶기 위해 발생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present a point of view that looks at Jeong Yak-yong and Choi Han-ki's political philosophy characteristics as the Minbon (民本) Thought of Confucianism, which have been evaluated in relation to democracy. Dasan's bottom up's theory on political power generation in Wonmok(原牧) and Hyegang's some political concepts such as Gongchi(共治) has been noted for having democratic implications. However, in this paper, we will analyze their political philosophies, paying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se characteristics are fundamentally expressed in terms of inheriting the Confucianism of Minbon-Thought.
Minbon-Thought can be broadly classified into the theory of Wemin(爲民) and the theory of Aemin(愛民). However in this paper, we will analyze the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Jeong Yak-yong and Choi Han-ki, taking only the theory of Wemin as the subject of analysis. And through this, it will be revealed that their political philosophy can be interpreted in terms of the succession and development of Confucianism.
Both Jeong Yak-yong and Choi Han-ki have the basis for justifying Wemin politics on the bottom up's political power generation, which works as a realistic and practical basis for defining the reason for the existence of officials for Wemin. In addition, this characteristic develops to reflect the opinions of the people in advance for establishing policy. It is a differentiated part from the Confucianism of Wemin which Deokchi(德治) is unilaterally defined as a form of politics for the people by Cheon(天) and saints without prior convergence to the opinions of the people. It can be evaluated that this distinction is created in order to bind the pluralistic and materialized opinions of the people into the Wemin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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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피(西陂) 유희(柳僖)의 『중용장구보설(中庸章句補說)』 연구 - 구조 분석 특징과 主氣的 학설 비판을 중심으로 -

저자 : 오보라 ( Oh Bo-ra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1-86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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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유희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희의 경학관과 학맥에 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중용장구보설』을 살펴보았다.
유희는 道를 밝혀 일상생활에 실천하는 것이 儒學의 本領이라고 여겼으며, 여러 분야에 통달한 '通儒'가 되는 것이 儒者의 진정한 本分이라 여겼다. 따라서 유희의 경전 해석은 주자학의 학문 방법론을 토대로 도를 실현하는 것을 큰 틀로 삼되, 세부적인 文義해석에 있어서는 다양한 설을 폭넓게 검토하고자 했다. 이처럼 유희는 주자학의 학문 방법론을 종지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유연한 경전해석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전 해석 태도를 지닌 유희의 저술에서 理氣心性論의 존재 양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저술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 유희의 경전 해석은 주로 유학의 실천성과 文義의 치밀한 고증에 방점을 두고 있으며, 전자는 補說類저술에 후자는 訓詁類저술에 각각 드러난다. 유희의 『중용장구보설』은 補說類에 속하는 저술로, 여기서 유희는 『중용장구』의 각 장절에 대한 견해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술했다.
본고는 유희의 『중용』 해석 특징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구조분석의 측면에서 보면, 유희는 程子의 三分說을 수용하여 1장과 33장이 『중용』의 핵심, 즉 道의 本然을 말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2∼32장은 도의 본연이 萬事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희는 정자의 삼분설에 의거해 『중용』의 구조를 분석하여, '中庸'을 인간이 행해야 할 핵심 규범으로서 강조했다.
내용 분석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유희가 主氣的해석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희는 큰 틀에서는 栗谷의 학설을 수용하되, 지나친 氣의 강조가 가져올 수 있는 理의 주재성 약화를 우려하여 氣에 대한 理의 우위를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을 지닌 유희는 氣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韓元震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유희는 한원진의 설이 심성 수양에 의한 도의 윤리적 실천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유희는 한원진이 氣를 강조해 새로운 설을 수립함으로써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한다고 여겼다.
경전 해석에서 유학의 실천적 측면을 중시한 유희는 인간 세상의 萬事에 적용되는 윤리 규범으로서 『중용』을 인식했다.


This article analyzed the Jungyoungjanggu-Boseol(中庸章句補說) by Seo Pa Yu Hui, to clarifying Yu Hui's ideological characteristics and academic background.
Yu Hui considered it the essence of the Confucianism to practice Tao(道) in daily life, and considered it the true duty of the scholar to become a 'Tongru(通儒)' who mastered various fields. Therefore, Yu Hui's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is based on the academic methodology of Zhuzi(朱子), but in the detailed interpretation of the sentence, various theories were widely reviewed. As such, Yu Hui is showing a flexible attitude of interpreting scriptures while using Zhuzi's academic methodology as the end.
This paper analyzed how Yu Hui interpreted the Doctrine of the Mean from two aspects, as follows. First, it is the aspect of structural analysis. Yu Hui accepted Chengzi(程子)'s view of dividing the Doctrine of the Mean into three parts. So he thought that the Chapters 1 and 33 refered to the core of the Doctrine of the Mean. And Yu Hui thought that Chapters 2-32 explained how the Tao(道) applied to everything. Futhemore, Yu Hui matched the main concepts of the Neo-Confucian and the quote from the Classic of Poetry, one by one. He saw that the Doctrine of the Mean had a thoroughly fine double crown structure.
Second, it is the aspect of content analysis. The characteristic of content analysis on the Doctrine of the Mean by Yu Hui is summarized as follows. Yu hui accepted Yulgok(栗谷) Yi I(李珥)'s theory in a large framework, but acknowledged Li(理)'s superiority over Qi(氣), fearing that excessive emphasis on Qi could lead to weakening of Li. From this point of view, Yu hui strongly criticized Han Won-jin's theory. Yu Hui thought that Han Won-jin's theory might interfere with the ethical practice of morality through mental training. In addition, Yu Hui thought that Han Won-jin wanted to dominate the intellectual hegemony by establishing a new theory by emphasizing Qi(氣).
Yu Hui, who emphasized the practical aspect of the Confucianism, recognized the Doctrine of the Mean as an ethical norm applied to everything in the huma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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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조(正祖)의 『사서대전(四書大全)』에 관한 비판적 인식에 대하여 - 『사서집석(四書輯釋)』의 재구성을 중심으로 -

저자 : 이영준 ( Lee Young-jun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7-11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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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正祖의 『四書輯釋』 재구성을 통하여 『四書大全』에 관한 그의 인식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大全』은 조선조의 公認된 註釋書인 만큼 정조의 經學에 있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정조의 경전 해석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전』에 관한 그의 인식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기에 본고는 試論으로서 우선 『사서대전』에 관한 정조의 인식을 고찰하였다. 정조는 東宮시절부터 『대전』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이후 『대전』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였다. 『사서』에 있어서는 『사서대전』의 底本인 『사서집석』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1799년(정조23)에 38권 『重訂四書輯釋』을 완성함으로써 『사서집석』의 원형을 회복하였지만 결국 印頒하지는 못하였다. 『사서대전』에 관한 정조의 비판적 인식은 『사서집석』을 재구성하여 인반하려고 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났다. 『사서집석』의 재구성은 徐命膺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서대전』의 한계와 문제를 인지함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 해결하려고 한 정조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breifly review King Jeongjo's perception on Sishu Daquan via his work of reorganizing Saseo Jipseok. Considering the fact that Sishu Daquan was the official commentary, it was natural to shed great inflence on Jeongjo's jiingxue [經學]. To understand the King's interpretation on the Confucian Classics, it is essential to follow his understanding on Daquan precedently. He had been skeptical on Daquan since he was a crown prince, and this attitude continued to compile the unpublished 38 volumes of Jungjeong Saseo Jipseok [重訂四書輯釋] in 1799, which puts more emphasis on Saseo Jipseok, the proto-type of Sishu Daquan. His new edition restored its original text, but never published. Still, the very intention of reorganizion and publication of Saseo Jipseok reflects Jeongjo's critical perception on Sishu Daquan. Even though it was initiated by the request of Seo Myeong-eung, Jeongjo had strong will to improve weakness of Daquan after recognizing the limitation and problems of the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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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실학자들의 발해지리 고증 ―안정복·유득공·한진서를 중심으로―

저자 : 김종복 ( Kim Jong-bo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3-14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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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들은 발해사에 관심을 갖고 발해의 역사지리를 규명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초고본 『발해고』는 인용 자료의 한계로 인해 발해의 주요 지역을 요동에 비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는 『요사』 지리지 및 이를 전재한 『성경통지』를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본 『발해고』는 『요사』 지리지 의 오류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발해의 주요 지역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비정하였다. 이는 『요사』 지리지 의 오류를 부분적이나마 처음으로 지적한 『대청일통지』를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본 『발해고』는 한두군데에서 『요사』 지리지 의 오류를 간과하였고, (발해의) 서경 압록부에 대해서는 국내 문헌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오류도 범하였다. 한진서의 『해동역사속』은 수정본 『발해고』를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때로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수정본 『발해고』의 부분적 오류는 읍루나 고구려 등 발해의 선행 역사에 소홀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해동역사속』은 한국사의 모든 시기의 역사지리를 다루었기 때문에 수정본 『발해고』의 부분적 오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후기 실학자에 의한 발해지리 고증은 근대역사학의 수준에 근접하게 되었다.


Silhak scholars in the late Joseon period aimed at identifying the historical geography of Balhae with an interest in the history of Balhae. However, An Jeong-bok(安鼎福)'s Dongsa-gangmok(東史綱目) and Yu Deuk-gong(柳得 恭)'s first edition of Balhae-go(渤海考) made the mistake of appointing the main areas of Balhae as Liaodong due to an error in the cited material. Both books cited Liaoshi(遼史)'s account of geography and Shengjingtongzhi(盛京通志) that reprinted it. After that, the revised edition of Balhae-go criticized the errors of Liaosh in earnest and the major areas of Balhae were appointed to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northeastern part of the Manchuria. This is because the book cited Daqingyitongzhi(大清一统志), which was the first book that partially pointed out the error of Liaosh.
However, the revised edition of Balhae-go overlooked the error of Liaosh in several points, and also made a mistake of uncritically citing the Korean records about Seogyeong(西京) Amnokbu(鴨綠府). Han Jin-seo(韓鎭書)'s Haedong-yeoksasok(海東繹史續)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revised edition of Balhae-go, but sometimes took a critical stance on it. Partial errors in the revised edition of Balhae-go resulted from neglect of the preceding history of Balhae, such as Eumnu(挹婁) and Goguryeo. However, Haedong-yeoksasok was able to overcome the partial errors of the revised edition because it deals with the historical geography of all periods in Korean history. Thus, the historical examination of the geography of Balhae by Silhak scholars in the late Joseon period came close to the level of modern histor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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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유득공 『발해고』의 사료인용 양상과 역사서술 방법

저자 : 노요한 ( Noh Johan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7-18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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泠齋柳得恭(1748∼1807)의 『발해고』는 유득공이 당시 조선 역사에서 망각되어 있던 발해사를 복원하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의 여러 역사서와 기타 문헌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발해 관련 사료들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발해고』는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발해사에 대한 최초의 역사 저술이라는 점과 함께 자서에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南北國시대라는 역사 개념을 처음으로 제출하였다는 점, 국가 간 영토 경계의 문제에서 실증적 역사 서술 가지는 중요성을 환기했다는 점 등 발해사 연구와 조선후기 북방지역에 대한 역사지리 연구에 있어 선구적 성과를 제출하였다는 데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발해고』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과 자국의 역사서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발해의 사적을 어떠한 방식으로 집적하여 撰次하고 있으며 그 인용 양상은 어떠할까. 또한 유득공은 서문의 말미에서 이 책을 '발해고'라고 한 것은 아직 역사를 완성하지 못하여 감히 역사로 자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유득공이 구상한 발해 역사는 어떠한 역사서술의 체제를 가지는 것이었으며, 그 역사관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본고는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유득공 『발해고』의 諸寫本을 점검하고 『발해고』의 사료인용 양상과 역사서술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Study of the Parhae Kingdom (Parhaego, 渤海考) compiled by Yŏngjae Yu Tŭkkong (泠齋柳得恭, 1748-1807) under the goal of restoring Parhae (渤海) history that had been long forgotten in the national history, is composed of the excerpts that are taken from Parhae-related historical records including history books in Korea, China and Japan, and other literature. Parhaego has a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at it played pivotal roles in producing the following leading research findings on Parhae history and historical geography in the northern region of the late Chosŏn Dynasty along with the fact that it is the first Parhae history accomplished in the late Chosŏn Dynasty. Moreover, it introduced in his author's preface the historical concept of northern and southern halves of a single partitioned nation (南北國), where Silla (新羅) and Parhae coexist for the first time, and it reminded us of the importance of empirical historical descriptions in addressing the issue related to territorial boundaries between countries.
Then, so as to fulfill these purposes, how Parhaego collects and compiles the historical traces of Parhae scattered in history books of China and Korea, and what would the citation be like? Moreover, at the end of the auhtor's preface Yu Tŭkkong said the reason why he entitled his ambitious work 'Parhaego', not Parhae history was that he had not yet completed the history of Parhae. If so, what was the historical narrative system that Yu Tŭkkong designed for Parhae history, and what was his view of history? This paper examines various manuscripts of Parhaego, and explores further the aspects of its citation of historical sources as well as its methods of historical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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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순암 안정복의 북방 인식

저자 : 박인호 ( Park In-h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7-229 (4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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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반도에게 가장 논란이 되는 공간이고 또한 그 공간에 대한 해석에 따라 상고사를 보는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북방 지역의 공간에 대한 안정복의 인식을 살펴본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북방 영역에서의 문명의 흐름을 안정복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정리하였다. 안정복은 삼한정통론의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지만 오히려 북방 공간에서의 문명의 흐름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안정복은 고조선에서 당대에 이르는 공간의 행방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북방강토의 행방에 대한 안정복의 관심은 『동사강목』 지리고 에 잘 드러나고 있다.
『동사강목』의 강역도는 안정복의 북방 지역에 대한 인식관을 시각적으로 확인해 주고 있다. 『동사강목』에서 우리나라와 연결하는데 고심하는 태도를 보였던 부여나 발해 등 열국에 대한 안정복의 공간적 입장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강역도에서 현재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 선으로 확정한 위에 역사적 변동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영역관은 오랑캐의 침입에 대한 위기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안정복이 대명의리의식 속에서 북쪽의 오랑캐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서북 지역에 대한 방비론으로 나타났다.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변경을 지키고 침략에 대비하려는 대책으로 국경에 성책을 쌓거나 수레 사용에 대비해야 한다는 현실의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역사 기술에서도 침구의 사실만 적는 것이 아니라 풍속, 기후, 연대, 사실의 측면에서 종합적인 배경을 확인하여 대비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 연구는 안정복의 북방 지역에서 전개된 문명의 흐름과 현실에 대한 인식이 『동사강목』 내의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한 기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으로 실학자들의 역사서 편찬에 대한 학문적 기초를 해명할 수 있는 한 사례를 보여주고자 한다.


This study is a study on the thoughts of An Jeong-bok on the space in the northern region which is the most controversial to the Korean Peninsula. However, depending on the idea of who occupied this area, the difference in the view of ancient history of the Korean peninsula is evident.
In this paper, I summarized how An Jeong-bok thought about the history of the northern region. An Jeong-bok had the idea that he should pay attention to the whereabouts of the northern region from Gojoseon to the present age, and also he had the position that he should study the area in detail historically. Therefore, the interest in who and when the Northen boundary occupied is well revealed in the Tongsagangmok compiled by An Jeong-bok.
The map of the territory in the Tongsagangmok visually confirms the idea of the northern region that An Jeong-bok had. This map shows the territory that An Jeong-bok is thinking about in various countries such as the Buyeo dynasty and the Balhae dynasty which were vaguely explained in Jirigo of the Tongsagangmok. This map presents the changes in history in the Liaodong frontier, Pyeongando and Hamgyeongdo areas, while confirming our territory as the south of the ablok and Tuman rivers. This idea is combined with the crisis consciousness of the invasion of the Manchus.
This paper aims to show a case that can explain the academic foundation of An Jeong-bok's compilation of history books through the flow of history about the northern region and the idea of the northern border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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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정약용(丁若鏞)의 기자(箕子) 인식(認識) - 고법(古法)탐구와의 연동(連動)을 중심으로 -

저자 : 윤석호 ( Yoon Suk-h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31-269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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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기자 인식은 비균질적이면서도 전환적으로 변화했다. 또한 보편적 유교문화의 시원으로서 기자를 정위한다는 기조를 공유했으되, 기자로부터 전래된 보편문화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당시의 유자들과 상이한 견해를 가졌다. 이에 본고는 다산의 기자 인식이 古法에 대한 독법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양자를 계기적으로 논증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사료적 가치에 있어 후대의 역사서보다 經書를 우선했다는 점, 경서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유교의 보편적 전장을 궁구했다는 점, 또한 이것이 기자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준거로 활용되었다는 점 등은 다산의 기자 인식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었다.
그럼에도 다산의 기자 인식은 유배기 전후로 크게 달랐는데, 이는 고법과 기자에 대한 경전적 해명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사환기까지의 다산은 기자의 동래와 그로 인한 행적 전반에 대한 경학적 전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단군이 한반도를 다스렸고 '朝鮮'이라는 명칭도 이때부터 있어왔다고 보았던 한편으로, 기자의 동래 나아가 평양에 도읍을 세웠다는 것에는 강한 의문을 표했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기자정전'으로 운위되던 평양의 격자형 유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지의 구획는 '井'자가 아닌 '田'자였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맹자』의 정전에 대한 경문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산이 '기자정전'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신 이를 당나라의 이세적이 운영했던 둔전의 유지로 추정케 했던 경학적 근거였다.
그러던 다산에게 강진 유배기는 유학의 보편적 전장을 본격적으로 궁구할 시공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산은 『周易』의 明夷卦를 역사적으로 재해석하여, 기자 동래에 대한 경전적 근거로 삼았다. 또한 『주역』의 坤卦, 『尙書』의 洪範九疇와 六鄕制, 『周禮』의 營國원리 등을 재해석했다. 그리고 '井'자가 토지제도에서부터 도성[읍성]건설, 나아가 통치 이념에 이르는 삼대 전장에서의 보편적 원리였음을 추론했다.
이와 같은 고법 독법 하에서 다산은 기자의 흔적을 평양의 유적 가운데에서 해명했다. 그런데 그가 주목한 것은 평양성 밖의 이른바 '기자정전'이 아닌 평양성 내부의 격자형 유지였다. 동래한 기자가 고법에 의거해 평양성을 조영했으니, 내부에 남아 있는 '井'자 형태의 공간 구조가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로써 다산은 고대의 한반도를 유학의 보편적 전장이 시행된 시공으로, 그와 같은 경학적·역사적 추론에 대한 실증적 근거로서 평양성을 위치시켰다.
이처럼 다산에게는 보편적 전장의 해명이라는 학술적 목표가 일관되게 저류하고 있었다. 특히 유배기 이후로는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고법에 대한 기왕의 독법을 조정했으며, 그 논점을 통치체제의 차원으로 확대했다. 다산의 이러한 학술적 경과 속에서 고법은 기자와의 주요한 교점이 되었다. 그리고 고법 독법의 변화에 근거해 기자에 대한 인식 또한 연동했고, 이 과정에서 기자는 고대 한반도에서의 문명사적 실체로서 자리매김했다.


Dasan(茶山) Jeong Yak-yong(丁若鏞)'s recognition on Kija(箕子) was inhomogeneous and conversely changed. Therefore, this paper aims to empirically argue Dasan's perception on Kija under the connection with the process of changing his view about Old Law(古法).
The fact that the historical value of the Confucian scriptures was prioritized over the later historical books, that the universal system of Confucianism was explained based on the interpretation of Confucian scriptures, and that it was used as a criterion for judging the historicality of Kija were characteristics that were continuously confirmed in Dasan's perception on Kija.
Nevertheless, Dasan's perception on Kija was significantly different between before and after the exile period, because Dasan's explanation based on Confucian scriptures for Old Law and Kija was changed.
Dasan before exile was unable to provide evidence in the Confucian scriptures for Kija's migration to the east and the overall course of action related thereto. In addition, Pyongyang(平壤)'s grid-shaped historical site, so-called 'Kija's Jeong-jeon(井田)', was not recognized because it did not conform to the explanation of 『Mencius(孟子)』 about Jeong-jeon.
Dasan was exiled by Gangjin(康津), and during that period, he studied the universal system delivered in Confucian scriptures in earnest. In this process, Dasan historically reinterpreted Ming-Yi Hexagram(明夷卦) in 『I-Ching(周易)』, and used it as a scriptural basis for Kija's migration to the east. In addition, Dasan reinterpreted Kun Hexagram(坤卦) in 『I-Ching(周易)』, the Nine Category of the Great Rule(洪範九疇) in 『Shangshu(尙書)』, Hyangsu- System(鄕遂制) in 『Zhou-li(周禮)』 and 『Shangshu』, and argued that the form of 'Jeong(井)' was the universal principle of the Confucian ruling system.
Under this interpretation of Old Law, Dasan explained the traces of Kija among Pyongyang's ruins. However, what he paid attention to was not the so-called 'Kija's Jeong-jeon', but the maintenance of the grid inside Pyongyang Fortress. He understood that Kija built Pyongyang Fortress in accordance with the old law, and regarded the remaining shape of Jeong as its evidence. Overall, Dasan evaluated the ancient Korean Peninsula as a space where the universal Confucian system was implemented. In addition, he positioned the grid-shaped historical site inside Pyongyang Fortress as an empirical basis for his Confucian scriptural and historical 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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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제학(金濟學)의 관서(關西) 죽지사(竹枝詞)에 나타난 역사 인식

저자 : 이은주 ( Yi Eun-ju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71-30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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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창작된 金濟學의 「次申石北關西樂府百八韻」은 申光洙의 「關西樂府」를 차운한 작품이다. 차운시의 특성상 원시의 다양한 요소를 계승하면서도 평양보다는 평안도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이 시는 김제학이 접한 다양한 정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19세기 중엽 평안도의 여러 상황과 평안도를 바라보는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는 평안도 지역사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 시의 특이점을 짚어가면서 김제학이 어떤 관점에서 여러 지역의 사건들을 선별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 냈는지를 논의하였다. 예컨대 심하 전투, 최효일 사건 등을 보면 평안도의 유명 인물보다는 대명의리를 강조하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또 이 시는 홍경래의 난이 상당히 비중 있게 제시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전 시기부터 만연했던 영고탑 회귀설의 소환, 곧 홍경래의 난으로 변방의 위협이 고조된 맥락 속에서 과거 사건들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시에서 지역사를 바라보는 구도는 대명의리와 변방의 위협으로 양분되며 그런 맥락에서 국가의 수호, 충성, 절의 같은 것들이 강조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평안도 지역사는 외부인이 평안도를 국경을 지키는 울타리로 인식하는 방법이자 평안도 지역민에게 기대했던 모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Kim Je-hak's “Bouts-rimés of Gwanseo-akbu” is a work that following the rhymes used by Shin Kwang-soo's “Gwanseo-akbu” created in the late 18th century. Due to the nature of bouts-rimes, it inherits various elements of the original poem, but at the same time, it focuses all over Pyeongan-do rather than Pyongyang. Since this poem reflects various information encountered by Kim Je-hak, we can read various information and perceptions of Pyeongan-do in the mid-19th century.
Since the proportion of local history in Pyeongan-do is high in this poem, this paper discussed from what perspective Kim Je-hak selected local incidents and created the flow, by following the peculiarities of this poem. In particular, it is possible to derive a flow that emphasizes Loyalty to the Ming Dynasty rather than Pyeongan-do's famous figures, such as the Battle of Sarhu and the incident of Choi Hyo-il. In addition, since Hong Kyung-rae's rebellion are presented with considerable weight in this poem, it can be thought that past events were selected in the context of the the Rumor of Manchurian return to Ningguda, which was prevalent from the past. In other words, the structure of evaluating local history in this poem is divided into the Loyalty to the Ming Dynasty and the Frontier areas under military threat, and in that context, the protection, loyalty, and patriotism of the state are emphasized. The local history of Pyeongan-do shown in this poem can be thought of as a way for outsiders to perceive Pyeongan-do as a fence protecting the border. They expected loyalty to protect the country from the people of Pyeong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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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유득공의 북방인식과 탈중화의 궤적

저자 : 이철희 ( Lee Chul-he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5-33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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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은 18세기 조선 지식인 중 옛 북방영토에 대한 인식과 중국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의 변화과정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준다. 20대 백탑 동인들과 소품문과 시문학에 열중하던 유득공은 1778년 북경의 청나라 문사들에게 보내기 위해 지은 『이십일도회고시』를 계기로 역사방면으로 관심을 돌려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 북방영토와 역사의 연구에 큰 성과를 남겼다. 『이십일도회고시』는 민족적 역사의식이나 북방경략의 의지가 관철되어있다기보다 만주족 치하의 한족 지식인과 망국의 슬픔을 공감하기 위해 지은 작품이었다. 같은 해 심양에 사행을 다녀오며 요동에서 지은 시는 고구려 고토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 있지 않는 반면, 소중화 의식이나 정묘, 병자호란에 대한 울분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십일도회고시』는 단순한 회고시가 아니라 역사서의 성격도 지니게 되면서, 부여, 옥저 등 북방역사를 제외하고 조선의 역사적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만회하기 위하여 유득공은 북방역사 탐구에 매진하여 『발해고』를 저술하며 고구려 고토회복 의식을 드러내었고, 몽고, 여진 등 동북아 제민족의 역사문화로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갔다. 1790년 12년 만에 두 번째 사행을 떠나 북경과 열하를 다녀온 유득공은 그의 여행기에서 만주족 인물과 통치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교만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한족지식인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하여 양쪽에 대하여 객관적 관점에서 취하였다. 그 결과 당시 여행기의 대단원이라 할 수 있는 <鳳城>에서 고구려 정통론과 고구려, 발해, 여진, 만주로 이어지는 동북아민족의 계통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소위 동북아 정세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주장은 5년 뒤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고구려의 강성함에 대비하여 신라를 倭문화에 물든 야만의 문화로 비하하였고, 고구려와 발해가 여진족과 만주족과 친밀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의 계보로 묶었는데,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조선의 지식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득공의 동북아 정세론은 명나라의 패망원인을 북방 민족의 강성함과 남방 한족의 문약함을 대비하는 남북문화 비교론에서 찾았던 김창업과 이기지의 의론과 연계되며, 홍대용이 『의산문답』에서 제기하였던 중화문명의 숭문주의에 대한 懷疑와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탈중화'의 궤적이라 평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Yu Deuk-gong reveals the perception regarding the old territory of Goguryeo among 18th century Joseon intellectuals, as well as the broader process of breaking away from a Chinese-centered worldview. Yu Deuk-gong, who spent his twenties absorbed in literature and poetry with his baektap colleagues, turned his attention to history in 1778 with the book 《二十一都懷古詩》, which was sent to Qing dynasty scholars in Beijing. Along with his later works, Balhaego and Sagunji, Yu Deuk-gong made 《二十一都懷古詩》was written to sympathize with the sorrows of Han Chinese intellectuals under Manchurian rule, rather than embodying national historical consciousness or the will of the northern territories. In the same year, while traveling to Shenyang and writing a poem in Liaodong, Yu Deuk-gong showed no awareness of Goguryeo's native lands. 《二十一都懷古詩》was not simply a retrospective poem but also a historical book, which led to criticism for reducing Joseon's historical areas to the south of the Yalu and Tuman rivers, except for northern historical lands such as Buyeo and Okjeo.
To overcome such criticism, Yu Deuk-gong devoted himself to exploring northern territory history and wrote Balhaego, revealing a sense of restoration regarding ancient Goguryeo land. He also expanded his interest to the historical culture of the Northeast Asian Empire peoples, such as Mongolia and Yeojin. In 1790, Yu Deuk-gong, who left for the second time in 12 years to visit Beijing and Yeolha, gave a favorable evaluation of Manchuria's character and government in his travel journals. He represented both sides in an objective manner by also discussing a Han Chinese intellectual who complained and was arrogant. The culmination of his travel records can be considered <鳳城>, which presents not only the orthodoxy of Goguryeo but also a systematic theory of the Northeast Asian people linking the Goguryeo, Balhae, Yeojin, and Manchu tribes into one genealogy. However, this theory, which can be referred to as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Situation Theory, was deleted from his travel records in the process of re-editing five years later. In contrast to the strength of Goguryeo, Silla was degraded as a barbaric culture stained with Wakoku culture, furthermore, Goguryeo and Balhae were grouped into the genealogy with Manchuria and Yeojin because they were intimately related, which provoked opposition from Joseon's intellectual class at the time.
However, Yu Deuk-gong's Northeast Asian Political Situation Theory is linked to Kim Chang-up and Lee Ki-ji's comparative theory of inter-Korean culture, which posits that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is attributable to both the national strength of the northern peoples and the cultural weakness of the Han Chinese in the south. His theory is also in the same context as Hong Dae-yong's suspicion of the reverence of Chinese literature, discussed in his work Uisan Question and Answer, which demonstrates a sort of “de-Chineseization” as an escape from Chinese centr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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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자연지식에 대한 성호학파(星湖學派)내부의 담론 - 윤동규(尹東奎)와 안정복(安鼎福)의 논의를 중심으로 -

저자 : 구만옥 ( Koo Mhan-ock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2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33-384 (5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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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규와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종장인 이익의 高弟이다.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이 1756년부터 1759년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주요 자료로 삼아 성호학파 내부의 자연지식에 대한 담론을 검토하였다. 지금까지 성호학파의 자연지식에 대한 연구는 이익의 저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자료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星湖僿說』을 비롯한 이익의 저술에는 자연지식에 대한 풍부한 논의가 담겨 있는 반면 다른 구성원들의 논저에서는 이와 같은 자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와 같은 한계를 윤동규와 안정복의 편지를 통해 일부 극복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양자의 논의는 안정복의 질문에 윤동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한 경력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윤동규는 천문역산학을 비롯한 자연지식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안정복으로서는 매우 적절한 토론 대상였던 셈이다. 두 사람의 논의는 歲差說, 서양의 천문역산학, 日躔表, 潮汐說등의 자연지식과 천주교의 교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의 논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西學관련 서적이 등장한다. 천문학 분야의 『天問略』이나 지리학 분야의 『坤輿圖說』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안정복과 윤동규의 논의를 통해 1750년대 후반 자연지식에 대한 성호학파 내부의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논의의 수준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들의 논의는 西學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객관적 관점에서 서양인의 학문적 성과를 탐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물론 이들의 논의가 당시 자연지식 분야의 최신 문헌이라 할 수 있는 『律曆淵源』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이들이 참고한 서적은 『新法算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Yun, Dong-gyu and An, Jeong-bok are old disciples of Yi, Ik, the master of the Seongho School. This paper reviews the theories of natural philosophy discussed amongst the members of the Seongho School, through the letters of the two between 1756 and 1759. So far the studies on natural philosophy of the Seongho School was focused on the writings of Yi, Ik. That was partly because of the lack of the sources; others' writings short of substantial discussion on natural philosophy compared to the writings of Yi, Ik, including Seonghosaseol(星湖僿說, Miscellaneous Writings of Seongho). This review tried to overcome such limitation by reading the letters between Yun and An.
Overall, the discussion between the two was comprised of An's questions and Yun's answers. This stemmed from the length of study under Yi, Ik, rather than the age difference between the two. Also, Yun had quite knowledge in the field of natural philosophy, including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which made him a qualified discussion companion for An. Discussions between the two encompassed natural philosophical subjects, such as theory of precession, Western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Richan-biao(日躔表) and tidal theory, as well as theology of Catholicism. They referred to the various books of Western Learning, notably Tianwenlue(天問略, Epitome of Astronomy) and Kunyu tushuo(坤輿圖說, Illustrated explanation of the world).
The review of discussions between Yun, Dong-gyu and An, Jeong-bok enables us to understand the formation and class of discourses of natural philosophy inside the Seongho School. They tried to eliminate prejudice against Western sciences and explore the scholarly achievements of the Westerners objectively. However, their discussion remained in the level of Xinfa suanshu(新法算書), the book they refer to; and therefore failed to reach the quality of the then most updated book of Lüli yuanyuan(律曆淵源, Origins and foundations of musical tuning, calculation, and the calen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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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학담론의 재구성과 양득중의 실사구시론

저자 : 김태희 ( Kim Tae-heui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7-4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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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담론은 역사적 소산이다.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실학담론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종래 실학으로 파악했던 내용을 세 가지 명제로 재구성해 보았다.
첫째 道器不相離論. 道와 器(또는 修己와 治人)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보완 관계라는 생각이다. 그동안 '경세치용론'과 '이용후생론'의 기술개발, 제도개혁, 민생개선 주장에 주목해왔다. 이것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물질적인 부분만 강조할 수는 없다. 정신과 물질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 華夷一也論. 모든 공동체와 문명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관점이다. 그동안 탈중국중심주의 경향과 북학론 등을 실학으로 파악해왔다. 주체성의 강조가 자칫 자폐에 빠질 수 있고, 보편성 추구가 자칫 종속으로 흐를 수 있다. 양 편향을 극복하고, 세계의 보편성과 주체의 고유성을 조화롭게 결합해야 한다. 이것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프레임 자체를 극복한 '華夷一' 사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셋째 實事求是論. 진리와 실천의 준거를 實心과 實事에서 찾는 자세 또는 作風이다. 실사구시의 의미는 덕촌 양득중의 실사구시론에서 구해야 한다. 덕촌은 '실사구시'의 제창과 함께, 『반계수록』을 추천함으로써 실학의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본고는 새로운 실학담론 논의에 일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논의에는 法古創新의 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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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예학(禮學)과 『상체편람(常體便覽)』

저자 : 김윤정 ( Kim Yun-jung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43-82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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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은 망국의 시기에 강학과 간행사업을 통해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데 주목한 지식인이었다. 허전의 제자로서 『사의』 간행에 참여하고 『상체편람』을 저술하는 등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집성과 고증의 방식을 통해 허전 심의설의 특징과 정당성을 드러내는 「심의고증」을 저술했다. 그는 허전의 예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했지만, 다른 예설에 대한 배척이 아닌 통합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유학자들의 분열을 원치 않았던 노상직의 학문 경향을 토대로, 예학은 논쟁의 대상이기보다는 지켜야 할 가치로서 인식되었을 것이다.
노상직의 예서인 『상체편람』은 變節보다 예의 기본인 常體를 강조하는 행례서로서, 복잡다단한 예설 논쟁보다는 예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상체편람』은 55개의 의절로 구성되었는데, 집안에서 날마다 행하는 관혼상제 중심의 가례 관련 의절이 51개에 해당된다. 『가례』의 내용을 행례 단위로 의절화하면서, 『사의』의 書式과 祝文을 보충하였다. 사당제도와 오복제도 등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필요할 경우 『가례』에 없는 별도의 조목을 추가하기도 했다. 『사의』의 예설을 중심으로, 「청기의」를 보충하고 「조석곡전」을 하나의 의절로 마련했다. 그러나 「기제의」의 考妣並祭와 「묘제의」의 親盡墓祭 문제에서는 자신의 예설을 드러내기도 했다.
『상체편람』은 가례뿐만 아니라 서당의 의례를 함께 수록함으로써 서당 중심의 예교에 주목했다. 「향음주의」와 「사상견의」는 서당의 행례에 맞게 변용되었고, 유교적 제향을 위한 「창주정사석채의」와 「문묘석전의」는 서당의 문생들이 지켜야할 지식으로 인식되었다. 망국의 시기에, 서당은 유학의 예교를 실천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고, 노상직은 서당의 예교를 통해 유학자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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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전례유집(全禮類輯)』과 예설 교류

저자 : 남재주 ( Nam Jae-ju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83-11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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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堂 柳疇睦은 경상북도 尙州에서 활동하면서 退溪學派의 西厓學統을 계승한 학자이다. 그는 300여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하였고 학술 진흥, 특히 禮學 분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편찬한 『全禮類輯』은 家禮와 邦禮를 전체적으로 아우른 禮書로, 조선시대 예학 저술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면밀한 것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는 官撰이 아니라 한 개인의 학문적 열정으로 편찬한 私撰 '예설 종합서'로 그의 사후에 제자들과 지역 유림의 협조로 최종 정리되었다. 그가 가례뿐만 아니라 방례까지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결과물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西厓 柳成龍과 洛波 柳厚祚 등으로 이어져 家學전통으로 자리매김한 '世臣之義'의 가르침을 출처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였던 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류주목의 제자로서 近畿南人 性齋 許傳의 제자 명단에 함께 수록된 인물이 20명에 이를 정도로 많다. 특히 『전례유집』에 수록된 '師服' 조목은 영남남인 東巖 柳長源의 『常變通攷』 자료를 기초로 하여 편찬하였는데, 류주목의 제자이자 허전의 제자인 克齋 盧佖淵의 아들 小訥 盧相稷이 「師服考」라는 저술에서 이들 자료를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경상북도 상주 중심의 류주목 제자와 경상남도 중심의 허전 제자 간에 학술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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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의(士儀)』의 체제와 예설의 학파적 성격

저자 : 이봉규 ( Lee Bong-kyoo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17-14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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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이 편성하였던 『사의』의 체제는 1870년에 간행된 목활자본에서 알 수 있다. 허전 사후 1909년에 간행된 목판본 『사의』는 제자와 영남 지역의 유학자들이 함께 활자본에 교정을 가하고 체제를 일부 새로 편성한 것이다. 그러나 목판본은 활자본 이후 허전과 제자들에 의해 가해진 수정을 일부만 반영하였다. 따라서 향후 『사의』의 정본을 편찬할 경우, 두주와 노필연의 「士儀考誤增註」 등을 교감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조선에서 편찬되는 가례서는 『가례』의 체제를 따르는 유형과, 독자적으로 의절을 수립하고 주석을 부가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방식은 이익의 『星湖禮式』에서 시작되었고, 정약용의 『四禮家式』으로 이어졌다. 허전의 『사의』는 고례와 『가례』를 중심으로 의절을 세우고 독자적으로 주석을 부가하면서, 변례와 상관되는 쟁점에 대해서 “辨疑”의 항목을 두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허전은 사의도(106도)로 가례도(31도)를 대체하였고, 부고전 告廟, 成殯, 계후자에 대한 상복 등 『가례』에 없거나 『가례』와 다른 규정을 의절에 새로 추가하였다. 『사의』는 성호학파의 예학 전통을 계승하면서 당대 중국과 한국에서 논의된 예설까지 수렴하여 서민의 수준에서 가례를 실행할 수 있게 편성한 독자적인 가례서이다. 허전은 예설에서 『星湖禮說類編』의 설을 주로 계승하면서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견해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正體를 후계자가 아닌 부친과 조부에게 해당한다는 것, 적자가 생존해 있으면 적손의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조모나 모친이 생존해 있을 때 승중손의 처가 시조부에 대하여 중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성호학파의 관점을 수렴하여 제시한 것이다. 반면, 입후한 뒤의 승계에서 계후자의 지위를 우선시하고, 환종을 반대한 것은 이이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또한 계후자의 상복을 의복이 아닌 正服으로 규정하면서 이익, 이상정, 권상하, 한원진, 이재 등의 견해를 원용하였다. 허전은 정약용의 『상례사전』의 견해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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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常變通攷)』가 조선후기 예학사(禮學史)에 끼친 영향

저자 : 정길연 ( Jeong Gil-ye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49-18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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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영남의 예학자 동암 류장원의 『상변통고』가 조선 후기 예학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하였다. 『상변통고』는 처음 기획부터 주자의 『가례』를 표본으로 삼고, 그리고 『의례경전통해』의 방대함을 겸하는 것이 그 편찬 목적이었다. 이 책의 방대하고 면밀한 고증면에서는 영남의 예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방대한 『상변통고』는 나름의 문제도 안고 있었다. 그것은 방대함이 주는 불편함이었다. 이로 인해 素隱 柳炳文, 定齋 柳致明, 近庵 柳致德 등은 『상변통고』의 이러한 문제들을 보완하기 위해 각각 예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상변통고』는 영남 학자들은 물론이고 기호학파의 학자들에게까지 고증서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상변통고』를 참고한 학자들 중에는 서울의 性齋 許傳과 芸窓 朴性陽, 경기도 과천의 果齋 成近默, 충청도 보령의 肅齋 趙秉悳, 전라도 전주의 艮齋 田愚, 경주의 立軒 韓運聖 등 그 범위가 전국에 걸쳐있다. 이들 학자들은 모두 방대한 자료를 수록한 『상변통고』를 통해 의심스러운 禮說을 살피고 논단했다. 뿐만아니라 『상변통고』를 숙독한 나머지 그 미비점을 지적하는 데 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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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상복(喪服) 연구

저자 : 차서연 ( Cha Seo-ye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189-22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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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애통한 심정을 표상하는 복식인 喪服에 대한 性齋 許傳의 해석을 고찰한 것이다. 성재는 옛 복식의 제도 중 후세까지 전해진 것은 深衣와 상복이고, 두 옷은 上衣와 下裳의 분리 여부만이 다를 뿐 전체적인 제도는 같다고 전제한다. 상복의 제도를 규정한 『儀禮』 「喪服」과 심의의 제도를 규정한 『禮記』 「玉藻」와 「深衣」는 상호 보완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는 성재의 해석적 입장은 그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古禮를 기준으로 상복의 제도를 복원한 성재는 이를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고례를 그대로 따르기 힘들 경우 『家禮』의 규정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고례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당시 조선에서 행해지던 시속을 적극 반영하였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대체품을 사용하도록 제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애통해하는 마음의 표상이라는 상복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형편에 맞추어 검소하게 마련할 것을 강조한다.
성재가 고례와 『가례』 그리고 조선의 시속까지 반영하여 상복의 형태를 논증하되 절검까지 고려하여 시행하도록 제안한 것은 상복의 의례적인 상징성과 실제적인 기능성을 회복해 상례의 수행 가능성을 높이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상복이 가장 오래된 유교적 복식의 하나이고 애통한 심정을 표상하는 의례복이며 상례를 치르는 오랜 기간 실제로 입고 생활하는 일상복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 복식으로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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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예학(禮學)

저자 : 한재훈 ( Han Jae-hoon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29-25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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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堂 李南珪(1855∼1907)의 禮學은 조선시대 예학의 마지막 장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예학은 지속적인 연구의 축적과 함께 시기별로 특징적 진전을 이루었으며, 수당의 예학은 이와 같은 성취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이러한 진전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수당의 예학에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인물은 退溪 李滉(1501∼1570)과 沙溪 金長生(1548∼1631) 그리고 星湖 李瀷(1681∼1763)이다. 특히 수당의 예학이 퇴계와 사계에 연결되는 통로는 성호였다. 성호는 일찍이 퇴계의 예학을 『李先生禮說類編』으로 정리했고, 사계의 예학에 대해서는 疑禮問解辨疑를 통해 폭넓게 변증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당이 성호의 예학을 묵수하거나 답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讀書劄記 형식의 여러 저술을 통해 성호 예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수당의 문집이 남아서 전하기는 하지만, 日兵에 의해 1907년 아들(李忠求)과 함께 순국한 정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저술이 충분히 수습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런 추측은 그의 예학 관련 자료 역시 현재 전하는 것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이어진다. 본 논문은 남아 있는 자료들 중에서 「讀星湖疑禮問解辨疑」와 「爲妻無練說」 그리고 「讀星湖禮說」을 중심으로 수당의 예학을 검토했다. 검토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수당의 예학은 기본적으로 성호 예학의 자장 내에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호를 통해 퇴계와 사계의 예학까지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성호의 예학을 그저 묵수하거나 답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냉정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호가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사계를 옹호하고 성호를 비판하는 면까지 보여주었다. 이는 수당의 예학적 특성이 성호의 예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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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지역학 저변으로 바라 본 덕촌 양득중 - 남겨진 유적 현황과 과제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승대 ( Kim Seung-dae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259-30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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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 양득중은 조선후기 실학과 양명학에 있어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의 삶과 사상을 조망하고 그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위해서는 지역학적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접근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존하는 그의 문집인 『덕촌집』 이외에 관련 저작물의 집적화와 최근 발굴된 고문서의 번역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덕촌의 생장과 활동, 추숭 관련 유적에 대한 면밀한 지역학적 차원의 연구가 요망된다. 특히 그 대상지역으로 해남 영신리, 영암 구림, 화순 일원, 보성 박실, 공주 덕촌, 노성 유봉, 부안 일원 등이 주목된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의 덕촌 양득중에 대한 실학자 연구를 넘어서 당대 학맥과 인물 교유, 문화콘텐츠화 등에 대한 '한국실학', '호남실학' 차원의 외연 확장이라 여겨진다. 실례로 해남 영신리의 '실사구시 마을' 조성, 영암 구림의 아천 박태초 연구, 공주 덕촌과 명재 윤증의 학맥 조사, 덕촌과 부안의 반계 유형원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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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덕촌 양득중 초상의 제작과 봉안

저자 : 이경화 ( Lee Kyung-hwa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간행물 : 한국실학연구 41권 0호 발행 연도 : 2021 페이지 : pp. 301-336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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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村 梁得中(1665∼1742)은 英祖(재위 1724∼1776)에게 『磻溪隧錄』의 진강을 건의하고 實事求是의 개념을 전하여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양명학과 실학적 소양을 겸비한 尹拯(1629∼1714)의 문인이었으며 영조의 신임을 받는 소론계 학자관료이기도 하였다. 1864년 영암의 사림들은 그의 고향 영암에 영당을 건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현재까지도 덕촌 영당은 양득중의 영정을 배향하며 선조와 후손들이 조우하는 공간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본 연구는 덕촌 영당 및 영정과 관련된 현존 자료를 취합하고 영당의 건립과 영정의 봉안 과정을 살피고자 하였다. 아울러 초상의 회화적 면모를 검토하고 관련 의문점을 논의하였다.
초상 속에서 양득중은 심의에 복건을 착용하였으며 무릎을 꿇고 공수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가 착용한 심의복건은 본래 朱子(1130∼1200) 초상의 의상이었다. 심의복건은 宋時烈(1607∼1689) 초상에 선택된 이후 서인-노소론계 문인의 초상에서 빈번하게 재현된 의상으로서 유학자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圖像이기도 하였다. 양득중 초상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징은 跪坐와 拱手, 즉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잡은 경건하고 신중한 태도일 것이다. 예의를 갖춘 유학자의 자세인 궤좌는 조선 초상화에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도상으로서 무엇보다 그의 스승 윤증의 초상을 특징짓는 자세였다. 스승 윤증의 도상을 차용함으로서 양득중은 윤증의 학문적·정치적 계승자로서의 의지를 표상한 것으로 이해된다.
양득중의 영당과 영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고려해야 하는 요소는 이들이 제작 당시 원형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당과 영정은 그간에 보수와 재제작을 통해 변형이 더해진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촌 영정에서 관찰되는 비전통적인 표현 요소는 이것이 근대의 이모본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문중에는 1910년 근대 초상화의 거장 蔡龍臣(1850∼1941)을 초청하여 초상을 다시 제작하였다는 이모 이력이 구전되고 있다. 그러나 초상의 회화적 면모는 채용신의 필치와 상이하며 오히려 당시 전남 지역에서 활약한 지역 화가의 화풍과 긴밀한 관계를 보인다. 이러한 결과는 양득중의 경우에 한정하지 않고 근대기 지방에서 활동한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함을 의미할 것이다. 향후에 지속적인 고찰을 통해 양득중 영정 이모의 실재가 분명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이 초상이 지닌 의의를 더욱 분명하게 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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